교회사에 비친 인물
훌트라이히 쯔빙글리
  • 교회사에 비친 인물 18 - 훌트라이히 쯔빙글리(1484-1531) 최초의 개혁파 신학자 훌트라이히 쯔빙글리(Huldreich Zwingli)는 스위스의 종교개혁자로서 바젤, 베른, 비엔나에서 교육을 받았고 1516년까지 글라루스에서 본당 신부로 일했다. 또한 그는 헬라어와 히브리어 그리고 교부학을 연구하였고 .가톨릭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노바라 전투와 마리그나노 전투에서 스위스 용병 부대의 사제로 활동했을 당시 용병 제도에 반대한 개혁정신을 가진 청년이었다. 1515년에 에라스무스를 만나 깊은 감동을 받은 그는 아인지델른으로 옮겨간 후 그는 교회의 악습을 반성하고 복음적 신앙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쯔빙글리의 저작은 신학적 논쟁의 산물이었다. 조직신학 저서인 「참종교와 거짓종교에 대한 논평」은 신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쯔빙글리는 가톨릭과 루터교와 재침례교를 거절한 최초의 개혁파 신학자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성만찬 중에 영적으로 임재해 계시며 세속 통치자들은 교회 문제에 있어서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 2002.08.0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교회사에 비친 인물6 - 로렌스 형제
  • 하나님 임재 위해 노력한 인물 프랑스 로렌지방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니꼴라스 헤르만으로 ‘로렌스 형제’라고 친근하게 불렸다. 정규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경건생활의 고전적 회의록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라는 책을 남긴 그는 1666년 파리에 있는 ‘맨발의 카르멜회’ 교단의 수도사가 되었다. 로렌스는 자신의 생애가 매순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살아가는 하나의 실험이 되기를 소원했다. 그는 하나님과의 습관적인 교제 상태를 창조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영적생활에 도달했다.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임재연습’은 그의 사후에 편집된 것으로 이 책은 그가 있던 수도원 원장 조셉 드 보포르가 자기의 방에서 발견한 로렌스의 편지들과 쪽지들을 모아 편집하고 거기에 로렌스와 나눈 대화들을 첨가해서 만든 것이다.
  • 2002.05.0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성경으로 배우는 선교영어
    [시편 109:4] 걱정하지 마세요
  • “In return for my friendship they accuse me, but I am a man of prayer” (Psalm 109:4).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시편 109:4) ▶ 대화 Meena: What are you worrying about? 무슨 걱정 있으세요? Sunny: Someone falsely accused me, so I feel distressed and angry. 누가 저를 모함하는 것 같아요.그래서 속상하고 화가 나요. Meena: Don’t worry. If you pray, God will solve it. Let’s pray. 걱정하지 마세요. 기도하면 하나님이 해결하십니다. 기도하세요. ▶ 기도 한마디 Lord, I pray that you will meet me in every environment. Amen. 주님! 어떠한 환경에서도 주님을 만나길 기도합니다. 아멘.
  • 2006.03.03 / 이소흔 기자

    [시편 108:5] 베니힌 목사님 한국대성회
  • “Be exalted, O God, above the heavens, and let your glory be over all the earth”(Psalm 108:5)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땅에서 높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시편 108:5) ▶ 대화 Meena : Would you like to go together to the Crusade in the Olympic Gymnasium? 올림픽공원에서 열리는 집회에 같이 가실래요? Yoori : What is it ? 무슨 집회요? Meena : It is the Benny Hinn Korean Crusade. It will begin March 2. 3월 2일부터 시작하는 베니힌 목사님이 진행하는 한국대성회에요. Yoori : I expect to works of Holy Sprit. 성령님의 역사가 기대되는군요. ▶ 기도 한마디 Lord, I pray that many Christians will attend the Benny Hinn Korean Crusade. Amen. 주님! 베니힌 한국대성회에 많은 기독인이 참여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 2006.02.24 / 이소흔 기자

    [시편 107:1] 언제부터 교회 출석?
  • “Give thanks to the LORD, for he is good; his love endures forever”(Psalm 107: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07:1) ▶ 대화 Sunny: When did you begin to attend a church? 써니: 언제부터 교회에 나오셨나요? Deacon Kim: I began to attend a church 20 years ago. 김 집사: 20년전부터 교회에 출석했어요. Sunny : Are you an elder in our church? 써니: 당신은 우리교회 장로님이십니까? Deacon Kim : No, I am a ordained deacon. 김 집사: 아니요, 저는 집사입니다. ▶ 기도 한마디 Lord, let Your great love be seen in me. Amen. 주님, 주의 크신 사랑이 나타나게 하소서. 아멘.
  • 2006.02.17 / 이소흔 기자

    성지순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성지 ⑤ - 예루살렘
  • 예루살렘 성벽과 문 현재의 구시가 성벽은 16세기에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대제가 축조하였다. 둘레 약 4㎞의 성벽에는 8개의 문이 있다. 서쪽의 자파문(Jaffa Gate), 북쪽의 다마스쿠스문(Damascus Gate), 헤롯문 (Herod’s Gate), 동쪽의 라이온문(Lion’s Gate, 스테파노 문)과 황금문(Golden Gate, 아름다운 문), 남쪽의 분문(Dung Gate)과 시온문(Zion Gate) 등이다. 이중 황금문은 잠겨 있다. 가장 번화한 자파문은 옛날에는 화물이 통과하던 항구였다. 시온문은 1889년 노트르담 교회와 그리스도교 지구를 연결하기 위해 세워진 문이다.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향해 세워졌다고 해서 붙여진 다마스쿠스문은 아랍인들로 항상 붐빈다. 헤롯문은 빌라도와 함께 그리스도교를 탄압한 헤롯의 저택 근처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게 되었다. 분문은 쓰레기를 운반한 데서 연유했고, 사자 4마리가 문에 새겨져 있는 라이온 문(사진) 앞에서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일으켰다고 한다. 글·이소흔 / 사진·오정선 기자
  • 2007.04.2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우리나라 최초의 신사참배거부운동
  • 주일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주도 강경성결교회에 기념 조형물 세워 ‘자기들은 헛 신에게 절하는 것이 무리한 미신이며 또한 하나님 압헤 죄 됨을 깨닷고 신앙의 주를 굿게 직히여 절하지 아니하엿더니’ 기독교잡지 ‘활천’(1924.10)에 기록되어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사참배거부운동에 관한 기사에 일부이다. 1910년 우리나라는 을사조약을 맺음으로서 국권을 잃은 이름만 남은 나라가 되어버렸었다. 더욱이 일본은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우리나라 곳곳에 그들의 신사를 세우고 한국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이는 충청남도 논산에 위치한 강경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강경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터라 1924년 이전에 이미 신사가 세워져 있었다. 특히 일제는 강경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옥녀봉에 신사를 건립했다. 옥녀봉은 유적지인 동시에 3·1운동 만세시위 현장이었기에 강경 사람들은 더욱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었다. 일제는 신사참배에 강경의 모든 학생들을 동원했다. 그런데 강경공립보통학교의 교사 김복희와 학생 57명이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이다. 이들의 거부이유는 위의 기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당시 신사참배를 강행한 조선총독부는 결국 교사와 학생들을 모두 학교에서 파면, 출교시키는 것으로 매듭을 지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1925년 조선신궁 건립 등 신사참배를 전면적으로 확대하려했던 일본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10여년 후퇴시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유일하게 어린이들에 의해 이뤄진 신사참배 거부운동이자 신앙적, 민족적 저항이 결합된 운동으로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진 것으로도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 운동의 근원지라고 할 수 있는 강경성결교회에서도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것으로 일각에서는 천주교에서 주도한 운동으로 주장되었었다. 하지만 강경성결교회 담임 신영춘 목사가 활천과 동아일보의 옛 기사를 통해 강경성결교회 주일학교 교사와 학생들임을 밝혀내고 지난 9월에는 ‘최초신사참배거부 선도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 강경성결교회의 앞마당에 설치된 기념비는 높이 5m로 김복희 교사와 학생들이 일제의 신사참배에 거부하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으며 오직 민족의 구원은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신영춘 목사는 “구전으로만 전해져 오던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할 수 있어서 기쁘다”며 “앞으로 우리나라의 최초신사참배거부운동이 일어난 이곳이 우리나라의 민족교육의 장은 물론 영성의 훈련의 장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 2006.11.26 / 정승환 기자

    철원 장흥교회
  • 현존하는 철원지역 최초의 교회 서기훈 목사 순교자비 있어 일제의 굴레에서 해방된 직후 남한과 북한과의 정치적 경계선인 38선. 38선이 그어지면서 북측지역이 된 철원에는 사랑의 실천과 체험신앙을 중시하는 감리교가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철원에는 일제시대 항일운동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꿋꿋하게 마을과 신앙을 지킨 순교자들의 숨결이 남아있다. 이 철원 지역에서 현존하는 최초의 교회인 장흥교회. 서기훈 목사의 순교비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1882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한 서기훈 목사는 한학을 배우던 중 기독교에 입교했다. 지금의 감리교신학대학에 입학한 후 23세되던 1914년 6월, 남감리회에서 전도사로 임명받았다. 서 목사는 철원 원산 등지에서 사역했다. 1.4후퇴 때 공산군이 철원을 점령할 당시 서 목사는 장흥교회 청년회가 주축이 된 대한애국청년회라는 반공 우익 단체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1950년 12월 31일 공산당 정치보위부에 잡혀간 서 목사는 총살당함으로 70세에 순교했다. 당시 증언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서 목사에게는 삶의 길이 충분히 보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1.4후퇴 때 교인들이 남하할 것을 권하자 서 목사는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목자가 양떼와 생사를 같이 할 것이거늘 나 혼자 살란 말인가”가 마지막 남긴 말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틀후 공산군에게 연행됐다. 서 목사는 한국전쟁이 난 후에도 피난길에 나섰다가 양떼를 두고 갈 수 없다며 되돌아와 매일 새벽종을 울렸다고 한다. 또한 서 목사는 공산군과 마을 청년들 사이에서 화해를 도모했다. 양측간의 살상과 분쟁 속에서 서 목사는 거짓 증언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둘 사이를 화해시키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목숨을 건 일이었다. 서기훈 목사의 묘비에는 ‘死於當死 非當死 生而求生 不是生’라고 적혀있다. ‘당연히 죽을 때 죽는 것, 이는 죽음이 아니오, 살아 있으면서 살기를 바라는 것, 이는 살아 있음이 아니니라’는 뜻이다. 이 글귀에서 서기훈 목사의 신앙관과 순교의 의지가 느껴진다. 거룩한 희생을 선택한 서기훈 목사는 분명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은 한 알의 밀알이었다. <사진제공=김영태 집사>
  • 2006.10.29 / 이소흔 기자

    바로쓰는교회용어
    어느 때고 어느 일이고 기도밖에 없습니다.
  • 강자는 거짓을 말해도 정당화 될 수 있고 약자는 참말을 하여도 거짓으로 몰릴 수도 있는 것이 인류 역사상에 나타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우리들은 여러 과정에서 배웠고 들었고 보고 온 사실입니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인 우리들은 진리의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만들고 공의롭게 행해야 할 절대 기본 밑에 있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며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세상은 위와 같은 일들로 시끌벅적하고 심지어 싸움까지 벌어지기도 하지만 우리들은 기도할 수 있는 자격과 여건 위에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강자와 약자가 공존하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세상에도 같이하고 있지만 결과는 말씀대로 진리대로 공의롭게 생각하고 기도하는 곳에 응답의 승리가 있을진대 높고 낮고 간에 우리들은 가장 많이 기도할 때입니다. 더욱 기도하십시다. 원로장로회 제공
  • 2009.02.2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지어다’라는 말
  • ‘지어다’라는 말은 “마땅히 그렇게 하여라”의 뜻을 나타내는 명령형 종결 어미로 장엄한 어감을 띤다. 예를 들면 “너는 군인이 되었으니 지금부터 국방의 의무를 다 할지어다” 명령형 반말임에 틀림없습니다. 예배가 끝날 때 축도 속에 ‘지어다’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는데 이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이나 성령님에게 반말을 하는 것으로 들려 은혜가 안 될 때도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성전을 떠나가는 성도들 위에 영원히 함께 있을지어다” 이것은 누구엔가 명령이요 반말로 하는 것임으로 듣기에 겸손치 않게 느껴지니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이렇게 하면 더욱 은혜스럽습니다. 쉽게 말하면 상대방에게 “복 받으십시오” 하는 것과 “복받을지어다” 하는 것과 어떤 것이 듣기에 좋고 예의적입니까? ‘지어다’는 불손하게 들리고 교만하게 들리므로 교회에서 특히 예배와 관계되는 데는 사용을 삼가는게 좋습니다. 공동체 안에서는 특히 대중성에서 반말로 들리는 말은 아무리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습관성이라 할지라도 반말을 듣고 좋아할 사람은 없으니까요. 원로장로회 제공
  • 2009.02.2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꼭 지켜야 할 교회주변의 교통질서
  • 주일예배가 끝나면 모두 집에 가는 발걸음이 바쁩니다. 그러나 은혜 받고 나온 몸이 바쁘다고 교통질서를 위반하고 봉사자의 안내는 아랑곳없이 차도에 뛰어들어 무단 횡단하거나, 차가 지나가고 있는 횡단보도에 뛰어드는 아슬아슬한 장면을 자주 보게 됩니다. 차를 빨리 타려고 서둘러 뛰겠지만 교통법규와 질서는 꼭 지켜야 합니다. 위험하고 모양새가 나쁘고 세상사람들의 규탄거리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행위이며 더하면 죽기도 합니다. 질서는 아름답고 질서는 안전하고 잘 지키는 질서는 은혜롭기도 합니다. 원로장로회 제공
  • 2009.02.1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신앙상담
    폭력적인 아이
  • Q: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을 둔 엄마입니다. 아들이 아침에 일어나면 옆에서 시중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피곤해서 숙제를 못하겠다고 저에게 물건을 집어던지고 때리고, 발로 차고 물어뜯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이제는 습관처럼 폭력을 행사합니다. 며칠 전에는 학교에서 폭력을 행사해서 문제가 일어났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자녀 부모 함께 상담 받아야 A: 외국에서는 청소년 폭력 비행 장애가 대부분 집 밖에서 일어나는데 비해 우리나라는 집안에서, 특히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엄마를 상대로 일어나는 것이 특이합니다. 그리고 현재 이처럼 ‘폭력을 동반한 반항과 품행 장애’를 주 중상으로 하는 소아 청소년기 행동 및 정서장애는 6년 전 보다 2배로 늘어났고 한 전문의는 단순히 버릇없는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반항장애(Oppositional Defiant Disorder)로 적절한 치료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엄마는 피해자이면서도 한편으론 가해자이기도 합니다. 엄마에 대한 폭력 반항 사례에서 문제의 뿌리는 ‘아빠가 생계를 책임지고 엄마가 과도하게 아이의 삶, 학업, 친구, 하다못해 양말 색깔 하나까지 간섭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가정은 부부 관계도 닫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사회적 대응책도 거의 무방비 상태입니다. 엄마들은 ‘창피하고 집안 체면이나 학업을 계속해야 한다’는 이유로 바깥에 알리지 않고 심지어 남편에게도 말하지 않는 경우가 많죠. 몇 가지 조언을 드리면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가 때리면 꼭 끌어안고 발로 차고 버둥거리거나 물어뜯으면 자리를 피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쯤이면 엄마는 체력에 뒤지므로 실제로 아이들은 엄마가 힘이 없는 것을 알고 폭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이때는 엄중히 경고하고 바로 상담을 받도록 해야합니다. 힘으로 맞서지 말고 권위를 지킬 수 있는 길을 찾고 아이가 난동을 부리면 잠깐 밖에 나가는 것도 좋습니다. 또한 폭력을 사용하는 아이에게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마시고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으로 원칙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엄마를 때리는 아이들은 평소에 자신을 때리는 엄마를 모델로 ‘모델학습’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개 이런 가정은 부모도 함께 상담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상담소
  • 2007.01.26 / 박재형 기자

    집중력이 없는 아이
  • Q: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을 둔 학부모입니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아들이 수업 중에 멍하니 딴 생각을 하다가 수업 내용을 놓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성적도 떨어졌고 생각해보면 아이가 생활 속에서 무엇에 집중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부모로서 앞으로 아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할까요? 지시보다 함께 대화하며 문제 풀어야 A: 집중력은 타고나는 능력이 아니라 청소년기 이후까지 발달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좋은 습관을 만들고 집중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좋습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도와 줄 수 있는 몇 가지 방법들이 있는데요 첫째 ‘딴생각 수첩’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딴생각이 날 때마다 간단하게 메모할 수 있도록 작고 가벼운 수첩에 ‘딴생각 수첩’이라는 이름을 짓고 아이에게 선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혹은 일주일에 한두 번 아이와 함께 딴생각 수첩에 적힌 내용을 보며 대화를 하면 집중력은 물론 사고력과 창의력이 높아지는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둘째, 부모는 질문만 하고 아이에게 생각하고 대답하도록 하면서 책임감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수학숙제부터 끝내”라고 지시하지 말고 “오늘 어떤 숙제를 해야 하니?”라고 질문해서 아이로 하여금 스스로 숙제를 끝내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셋째, 아이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왜 그렇게 멍하니 있니?”라고 지적하지 말고 “지금 어떻게 하고 있니? 집중해서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니?”라고 말해서 아이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해서 얼른 알아차리고 다시 집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게 하는 것입니다. 넷째, 아이들은 시각보다 청각에 더 민감하므로 아이가 공부하는 동안에는 텔레비전을 끄거나 할 수 있는 한 소리를 내지 않도록 하십시오. 다섯째, 부모가 먼저 아이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이가 이야기할 때 몸을 아이 쪽으로 향하고 눈을 마주하며 관심을 보이고 이야기를 들을 때 아이의 입장에서 듣고 중간에 말을 가로막거나 부모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을 자제하는 것입니다. 그럼 학년이 올라가면서 아이가 주님과 자신의 삶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상담소
  • 2007.01.19 / 박재형 기자

    오냐오냐 키운 아이 학습지도
  • Q: 맞벌이 부부입니다. 현재 시어머님이 아이를 돌봐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시어머님이 아이를 사랑과 관용으로 대해 주시다 보니 숙제도 하지 않고 학습지도 하지 않아서 걱정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주말에는 부모가 공부습관 잡아줘야 A: 공부 습관은 매일 조금씩 들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지만 주말에만 아이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현실적으로 그 버릇을 들이는 것은 힘든 상황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차라리 아이에게 부모와 함께 하는 학습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도록 주말은 아이의 학습 능력을 향상시키는 기간으로 잡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 입학 전이라면 박물관이나 미술관, 연극, 뮤지컬 등 아이의 눈높이에 맞는 프로그램을 함께 접하는 것입니다. 사진도 찍어서 집에 돌아오면 엄마 아빠와 함께 체험한 것을 노트로 만들어 보셨으면 합니다. 이렇게 하면 단순한 구경을 넘어서 기록으로 남을 수 있는 현장 체험이 되고 아이가 자라서도 학습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학습지의 경우는 일일 공부보다 주간 학습지를 선택하되 학습 시간이 한 번에 10∼20분 정도가 좋고 아이와 함께 풀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아이와 함께 지내고 있다면 시어머님과 교육에 대한 의견을 맞추시고 가족 모두가 공부할 시간을 정하시기 바랍니다. 통상적으로 할머니와의 약속은 어겨도 된다고 생각하던 아이도 엄마, 특히 아빠와 한 약속은 대부분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약속 시간이 되면 할머니는 텔레비전을 끄고 집안 분위기를 조용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아이가 약속을 어기려 할 때 할머니의 역할은 “지금은 공부할 시간이야. 가족 모두가 약속했으니까 지켜야 해”라고 아이에게 정확하게 말해주시고 부모는 직접 체크하셨으면 합니다. 또한 출근 전에 아이의 전날 과제들을 챙겨주시고 학습량을 정해 가족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 표를 만들어 놓는 것도 방법입니다. 세상 지식도 귀하지만 이 보다 더 귀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부디 어린 자녀가 말씀의 소중함을 잊지 않도록 교육시켜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상담소
  • 2007.01.12 / 박재형 기자

    우리는보내는선교사
    유럽의 재부흥(Revival)을 꿈꾸다
  • 11개국 선교사 도와 물질과 기도 후원 회원들 기적 체험 후 사명감 확고해져 내년 3월 이영훈 목사 초청 성회 예정 유럽은 일찌감치 기독교를 받아들인 지역이다. 하지만 오늘날 유럽은 이슬람이 강세하며 기독교는 침체되고 있다. 이러한 유럽을 되살리려 성령의 불을 붙이고 있는 이들이 순복음의 제자들이고, 뒤에서 기도와 물질로 후원하고 있는 이들이 바로 유럽선교회원들이다. (사)순복음실업인선교연합회 유럽선교회 회장 정충시 장로는 “유럽 선교는 두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경제적으로 나은 환경을 갖고 있지만 복음의 영성이 죽어 있는 서유럽에 순복음의 영성, 성령 운동을 전개해 성도들이 거듭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또 하나는 과거 공산주의에 억눌렸다 자유를 되찾았으나 경제적으로나 영적으로 취약한 동유럽을 복음화하는 것, 이것이 유럽 지역 선교사님과 우리 선교회원들이 해야 할 몫이다”라고 선교회에 주어진 사명을 설명했다. 정충시 회장은 이를 위해 유럽에서는 매년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맞아 금식기도성회를 갖는다고 했다. “유럽 총회 소속 선교사님들과 유럽의 성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함께 금식기도하며 유럽 지역이 복음화 돼 부활의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때 선교회에서 후원을 하며 함께 동참하는데, 이는 바로 유럽선교회가 지금까지 이어 온 전통적인 사역입니다” 유럽선교회가 유럽복음화를 위해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1995년 9월 재창립되면서부터다. 1976년에 설립된 순복음실업인선교연합회의 각 선교회가 93년 원주민 선교 지원체제로 대대적인 변신을 꾀하는 과정에서 동남아선교회로 바뀌었다가 2년 뒤 제자리로 돌아온 유럽선교회는 전보다 선교활동에 매진했다. 재창립되면서 조용기 목사가 써준,지금도 벽에 걸려있는 ‘천하의 유럽선교회’라는 휘호가 선교회원들에게는 큰 힘이자 자랑이 됐다. 15년 째 봉사 중인 김봉재 안수집사는 “유럽 선교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에 더 많이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그런 말씀을 주신 것 같다. 그 덕에 우리선교회는 단합이 잘 된다”고 말했다. 재적 100명의 성도가 활동 중인 유럽선교회는 주일 오전 11시 예배를 드리고는 점심 식사 후 전원이 모여 찬양연습을 한다.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전회원이 찬양팀 역할을 한다”고 말한 정충시 회장은 “일년 내내 연습을 한 결과 실업인의 날 찬양대회에서 대상을 세 번이나 타기도 했다”며 단합으로 일군 쾌거를 소개하기도 했다. “회원들에 대한 자랑은 또 있어요. 선교사님들을 위해 365일 중보기도를 한다는 사실이죠. 회원들이 한 조를 이뤄 평균 2∼3명의 선교사를 위해 기도 응답을 받을 때까지 집중적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정충시 회장의 설명에 이어 중보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한 김봉재 안수집사는 “유럽 선교가 다른 지역보다 힘들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유럽이 우리보다 복음을 빨리 받아들인 나라들이라 동양에서 온 작은 선교사들의 사역에 거부감을 갖는 경우가 많아요. 루마니아 채정기 선교사님의 경우는 백인들에게 따귀를 맞기도 하고 심지어는 ‘누렁이, 너희나라로 돌아가라’는 멸시를 받기도 하셨죠.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사역 14년만에 7개의 제자교회를 만드셨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죠. 감사한 일이기도 하구요. 그래서 저희가 기도를 쉴 수 없습니다” 선교사를 위한 후원과 중보기도 외에도 유럽선교회원들은 5년 전까지 조용기 목사가 유럽 지역에서 성회를 인도하면 함께 동행해 선교지 부흥을 위해 기도했다. 10년 동안 선교회에서 활동 중인 서명원 안수집사는 “우리는 매주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듣기 때문에 잘 모르지만 유럽에서는 직접 조용기 목사님의 말씀 듣기를 얼마나 사모하는 지 모른다. 나는 2002년 영국과 2004년 독일 성회를 따라갔는데, 신기한 건 목사님 성회에 따라 날씨가 좌우됐는데 비가 목사님을 피해 다닐 정도였다”라고 이야기했다. 복음의 빚을 갚는 마음으로 선교회 봉사를 시작했다는 서명원 안수집사는 “사랑의 공동체로 하나돼 유럽 복음화를 위해 헌신한다는 사실이 감사할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충시 회장은 올 한해 유럽선교회를 이끌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했다. “선교회원들이 늘어났어요. 집기를 줄이고 자리를 많이 늘렸는데, 또 다시 공간이 비좁네요. 또 다른 변화는 생각의 전환이 가져온 놀라운 기적 체험입니다. 삼 주 전 있었던 축복철야예배를 준비하며 우리에게 이메일 한 통이 왔습니다. 채정기 선교사님의 사택이 공사 중에 자금 문제로 중단 된 상태라는 내용이었어요. 무너질 위기에 처한데다 올 겨울 전기, 가스 공급도 안돼 어려움에 처했다며 그저 기도만 해달라는 것입니다. 도와달라는 말도 못하는 선교사님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정기총회가 다가와 예산이 없는 상태여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앉아서 고민만 할게 아니라 철야예배 때 선교 현황을 보고하고 후원금을 모아보자 했죠” 정 회장의 말에 회원들은 전에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정 회장은 4차원의 믿음을 가지고 해보자고 선교회원들을 독려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 겁니다. 하루, 일 주일, 이 주일이 지나 후원금이 들어오는데 선교사님에게 필요했던 1만 유로(한화 1800만원)를 채우고도 남아 얼마 전 마케도니아로 파송된 강경보 선교사님 교회에 강대상 등 일부를 지원하기도 했죠.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실 일을 하면 능히 채우고도 12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체험한다는 사실을 회원들이 깨달으면서 요즘 주변 성도들을 데리고 와 선교회원들이 점차 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열정이 이어져 내년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예수님의 향기를 전하는 선교회가 되길 바란다”는 정충시 회장은 “현재 유럽 11개국에 50명의 선교사님이 사역하고 계시는데 앞으로 20개국에 70명의 선교사가 사역하길 기대하며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내년 3월 말 독일에서 이영훈 담임목사를 강사로 세워 고난주간 및 부활절 금식성회를 가지고 이어 런던순복음교회 헌당예배를 드릴 계획이다. 순복음의 영성으로 유럽이 성령으로 뒤덮혀 다시 부흥의 불길을 경험할 수 있도록 유럽선교회가 힘써 주의 사역을 후원하겠다”고 밝혔다.
  • 2009.11.06 / 오정선 기자

    오세아니아 전역에 성령운동 일으키는 선교회
  • 11월 솔로몬군도 의료선교 통해 100명 백내장 수술 계획 호주, 뉴질랜드 등 29개 교회에 기도와 물질후원 앞장 (사)순복음실업인선교연합회 오세아니아선교회(회장 백운석 장로)는 오세아니아를 복음화하고 선교사들을 지원하기 위해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고 있는 선교회다. 우리교회 세계선교센터 8층에 위치한 오세아니아선교회는 2000년 12월 출범이후 호주와 뉴질랜드 뿐 아니라 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피지와 솔로몬군도 등지에 이르기까지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및 성령운동을 통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 해마다 한차례씩 선교지에 나가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체크하고 선교사들을 지원한다. 오세아니아에 대한 선교회원들의 열정은 남다르다. 호주, 뉴질랜드, 피지, 솔로몬군도 29개 지교회를 위해 밤낮없이 기도하는 것은 물론 선교지에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뉴질랜드, 올해 초에는 호주 선교지 전 지역을 탐방해 선교지원금과 주보 인쇄기를 지원했다. 매월 호주와 뉴질랜드 전지역에 주보인쇄용 프린터의 소모품인 잉크와 프린트헤드를 무상지원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매주 순복음가족신문과 주일설교 DVD, 행복으로의 초대, 플러스인생, 국민일보 등을 발송해 교회와 국내 선교에 대한 소식을 전한다. 또한 선교용품과 구역공과, 설교집, 교육자료 등을 수시로 보내 선교사들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고 있다. 지난해에는 실업인의날 순복음엑스포에 참가하고, 선교 동영상전에서 금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다. 올해에는 다른 오세아니아 지역에 비해 낙후된 솔로몬 군도의 복음화에 두 팔을 걷어붙였다. 오세아니아선교회는 11월 21일부터 29일까지 굿피플 실명예방단과 함께 솔로몬군도 의료선교를 다녀올 예정이다. 특히 솔로몬군도 현지인 중 백내장 환자 100명을 수술할 계획이다. 선교회는 뿐만 아니라 어린이선교팀과 율동팀을 구성해 원주민들 복음전파를 위해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해마다 솔로몬군도에 옷을 보내고 있는 오세아니아선교회는 이번에도 원주민들에게 나눠줄 옷을 잔뜩 챙겨놨다. “원주민 무료 백내장 수술을 위해 수정체 100구좌 모금을 하고 있어요. 한 명을 수술하는데 필요한 수정체가 18만7000원이 들어요. 8일까지 27구좌가 들어왔는데 선교회 회원 뿐 아니라 구로대교구 권사님들도 6명이나 후원해주셨어요. 솔로몬군도 인구 대부분이 크리스천이지만 뜨거운 성령 체험이 없어요. 원주민들은 성령을 간절히 구하고 있죠. 이번 의료봉사는 원주민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다시한번 체험하게 하는 시간이 될 것 같아요” 백운석 장로의 기대처럼 이번 솔로몬군도 의료봉사는 그동안 심겨진 순복음의 영성에 큰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선교회원들은 선교지에서 더 큰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매주 화요일 솔로몬군도 단기의료선교를 위한 준비기도회를 진행하고 있다. 11월에는 전 회원들이 금식기도회에 나설 예정이다. 우리교회의 오세아니아지역에 대한 선교는 1980년대부터 시작돼 1986년 2월 오세아니아연합회가 결성되고, 1993년 제3세계 선교강화를 계기로 한층 심화됐다. 특히 1995년 ‘비전 95호주 대성회’ 등에서는 연인원 3만여 명이 성회장소에 집결하는가 하면, 매일 수백 명씩 결신함으로써 현지인들조차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조용기 목사는 호주 시드니 성회, 남호주 150주년 기념 특별성회, 호주 브리스베인 성회, 호주 아들라이드 성회 등 1980년대부터 다양한 성회를 통해 오세아니아에 성령의 바람을 불어일으켰다. 2004년 4월에는 조용기 목사 초청 솔로몬 군도 대성회가 개최돼 솔로몬군도 원주민들을 성령으로 변화시키는 큰 역사가 일어났다. 백운석 장로는 오세아니아선교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큰 비전이 있다. “오세아니아선교회를 통해 선교지의 영성이 뜨거워지고 선교사들이 더욱 순복음화되길 바래요. 호주, 뉴질랜드 선교지를 방문해보면 교회사정이 열악한 곳이 많아요. 피지와 솔로몬군도는 우리나라 70년대 수준이라 많은 지원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워킹비자로 유학을 가는 청년들이나 이민을 준비하는 분들이 선교회에 오시면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현지 교회의 지원도 받을 수 있으니 많은 분들이 선교회에 오시기 바래요” 교회를 세우는것 보다 지원하는데 주력하겠다는 백운석 장로. 그는 오세아니아총회와 많은 교회들이 더욱 부흥할 수 있도록 많은 성도들에게 보내는 선교사가 되어줄 것을 부탁했다.
  • 2009.10.09 / 이미나 기자

    우리는 보내는선교사 - ⑦ 중국북방선교회
  • “중국북방 지역과 몽골에 성령 바람이 불고 있어요” 공산권선교회로 1984년부터 후원사역 시작 ‘조용기 목사 초청 몽골 성회’ 기폭제 역할해 열정 안고 ‘보내는 선교사’ 위해 달음질 다짐 중국에는 23개의 성(省)이 있다. 4개의 직할시와 5개의 자치구, 2개의 특별행정구를 포함하면 중국에서 성급 행정 단위는 모두 34개에 이른다. 이중 최근 이슈화되고 있는 신장 위구르자치주와 내몽고자치주를 포함 중국 산동성 위쪽 부분인 7개 성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를 후원하는 곳이 바로 중국북방선교회다. (사)순복음실업인선교연합회 중국북방선교회(회장 김광부 장로)는 이들 지역과 더불어 중앙아시아 북부 고원지대인 몽골을 대상으로 보내는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중국북방선교회가 이들 지역 복음화를 위해 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다. 가장 주된 사역은 인턴선교사와 현지인 사역자를 포함해 26명의 선교사를 후원하는 일이다. 또한 이들을 도와 교회를 세우고 있다. 조용기 목사와 이영훈 목사의 설교, 저서를 중국어로 번역해 보급하는 일도 한다. 그러나 가장 큰 일은 현지인 사역자들이 많아지도록 제자 양성을 후원하는 일이다. “일조에 세워진 신학교가 최근 중국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았어요. 지난해 1기 졸업생을 배출했고, 올해 8명이 졸업할 예정이에요. 앞으로 이 곳을 졸업하는 신학생들을 통해 내륙 복음화에 힘이 실릴 것 같습니다” 김광부 장로는 신학생 후원에 중국북방선교회가 나서고 있다며 “한 명의 신학생이 한달에 5∼7만원 정도면 합숙하며 공부할 수 있다고 해요. 후원이 이어진다면 더 많은 학생들을 공부시킬 수 있는데 그게 좀 안타까와요”라고 토로했다. 중국북방선교회는 신학생 지원 외에도 주기적으로 중국 선교지를 방문하고 선교사와 성도들을 격려한다. 중국북방선교회에서 14년 째 봉사중인 김광부 장로는 선교지를 탐방할 때마다 잊지 못할 많은 사건들을 접한다고 설명했다. “중국이 선교제한국가이다 보니 공안의 눈을 피해 설립된 오지 교회를 갈 때가 있어요. 길을 잃은 적도 있고, 감시를 피해 휴대전화를 껐다켰다를 반복하기도 하죠.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해요” 김 장로는 지난해 12월 장대건 선교사의 제자가 A지역에 세운 처소교회를 방문했을 때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어찌나 추운 지 양말 위에 양말을 신고, 내복을 두개나 입고, 그 위에 파카에 모자 장갑까지 끼고 이불을 둘둘 말고 자는대도 추웠어요. 그래도 손님이 찾아왔다고 처소교회 사역자가 방에 불을 지폈주었는데, 얼마나 땠는지 자다가 타는 냄새가 나서 일어났더니 바닥은 이미 새까맣게 타있었고, 이불은 불 붙기 바로 직전이었더라구요. 얼마나 놀랐는지…” 또 세수하려고 얼굴에 물을 묻히면 추운 날씨 탓에 얼굴이 금새 얼어붙어 씻을 수가 없어다고 한다. 그나마 물도 귀해 더운 세숫물을 김 장로가 씻고나면 그 물에 장대건 선교사가, 뒤를 이어 처소교회 사역자가 씻었다고 김 장로는 이야기했다. 한번은 또 조대희 선교사가 교회 건물을 매입하고 싶다고 요청해 현황을 알아보기 위해 몽골에 갔을 때의 일이다. “몽골에 간 지 1년이 조금 넘은 선교사가 교회 건물을 사달라고 하는데 선뜻 내키지 않는 겁니다. 도대체 어떤 상황인지 알아보려고 몽골에 갔는데 27살 난 선교사 내외를 보는 순간 성령께서 제가 이렇게 물으시더군요. ‘너 같으면 젊은 나이에 어린 자녀들까지 고생시켜가며 여기 와서 사역하겠니? 네 아들이, 네 딸이 선교간다면 선뜻 보내겠니?’. ‘나라면 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대답은 당연히 ‘못한다’였죠. 순간 찬송가 355장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라는 가사가 떠올랐어요.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 곳에 그들이 온 까닭이 ‘오직 예수’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죠. ‘선교사가 위대하다’는 것과 제가 ‘보내는 선교사로 후원 사역을 맡고있다’는 게 감사했어요.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선교회원들과 상의해 교회 건물 매입 후원을 결정하게 됐죠” 김 장로는 선교지를 돌다보면 안타까운 이야기도 접하지만 기적같은 이야기도 들을 때가 있다고 말했다. “한 중국인이 제자교회가 어렵다는 말에 한화로 가진 돈의 절반인 30만원을 드린 일이 있었나봐요. 10년 뒤인 최근 그가 시골에 갖고 있던 광산의 가격이 올라가면서 정부에서 그 광산을 600억원에 매입하겠다는 요청을 해 마지막 절차를 남기고 있대요. 그는 현재 중국복음화를 위해 선교사님을 헌신적으로 돕고 있답니다. 하나님은 절대 심은 것을 그대로 두시는 법이 없으세요” 1984년 12월 공산권선교회로 출발해 13억의 중국인과 280만의 몽골인 복음화를 위해 보내는 선교사로 헌신하고 있는 중국북방선교회. 2004년 8월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에 열린 조용기 목사 초청성회는 중국북방선교회원들에게 선교 사명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일대 사건이었다. “말씀을 듣겠다고 사람들이 구름떼 같이 몰려오던 것이 기억나요. 몇 만장의 성회 전단지를 한국에서 만들어갔는데 금새 동이 나 현지에서 다시 만들던 일도 기억나구요. 말씀에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조용기 목사님이 타신 차를 한 번이라도 만져보겠다고 몰려와 선교회원들이 경호한 일도 있었어요. 정말 잊지 못할 대성회였죠” 당시 성회에 동행했던 부회장 유승로 안수집사의 설명이었다. 김광부 회장은 선교지 부흥은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와 이들 뒤에서 후원하는 ‘보내는 선교사’의 헌신이 어우러질 때 완성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더 많은 복음의 결실을 위해 쉼없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중국북방선교회원이 아니더라도 중국과 몽골은 복음의 황금어장이기에 성도들의 기도가 절실히 요구됩니다. 또한 물질적 후원도 뒷받침돼야 합니다. 따라서 더 많은 이들이 보내는 선교사로 동참하길 바랄 뿐입니다” (문의 02-782-5278)
  • 2009.07.10 / 오정선 기자

    땅끝까지 복음을
    <종합편>‘신사도행전’을 위해 꺼지지 않는 순복음 횃불
  • 62개국 10개 총회 711명 선교사 사역 종교 비자 발행 거부 등 사역에 제한 많아 전세계 6개 신학교 세워 현지인 제자 양성 주력 본지는 2월 순복음아세안총회를 시작으로 11월까지 10회에 걸쳐 순복음선교회의 10개 총회 소속 선교사들과 그들의 사역 그리고 그들을 중보하는 (사)순복음실업인선교연합회 해외 선교회들의 이야기를 연재했다.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4차원의 영성 등 희망 메시지를 통해 주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순복음의 선교사들. 그들의 헌신적인 사역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믿음의 행보였다. 40여년 가까운 세월, 이들이 고난과 맞서고 죽음을 무릎 쓰고 신사도행전을 써내려간 결과 우리교회는 세계 62개국에 711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또한 그들을 통해 804개 교회를 세워 순복음의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다. 197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처음 선교사를 파송한 우리교회는 1975년 4월 정식으로 세계선교회를 발족했다.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말씀 따라 북미를 시작으로 선교에 박차를 가했다. 이민 1세대를 대상으로 시작된 순복음의 선교활동은 이민 사회에서 새로운 커뮤니티를 형성하며 영향력 있는 리더들을 세웠다. 또한 북미 지역을 넘어 남미와 제3대륙으로 나아가 복음전파에 힘쓰고 있다. 북미에 이어 유럽에서도 이미 목회는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이민목회 중심이었던 선교정책이 제3세계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1992년부터였다. 조용기 목사가 세계하나님의성회 총회장으로 피선되면서 우리교회는 이미 제3세계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을 통해 선교사 양성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을 구체화하는 등 다각적인 선교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제3세계가 분포돼 있는 북위 10도에서 40도 사이인 이른바 10/40창을 중심으로 선교사들이 파송됐고, 이에 맞춰 선교 정책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북위 10도는 전세계 13억 무슬림 중 절반이, 20억 기독교인 중 60퍼센트가 살고 있어 기독교와 이슬람세력의 충돌이 빈번한 ‘프론트 라인’(Front line)으로 민감한 곳이다. 선교가 쉽지 않은 이곳에서 선교사들은 신학교를 세우고 제자들을 키워 현지인 복음화에 주력하고 있다. 중동보다 더 많은 무슬림이 있는 인도네시아에서 20년 넘게 사역한 한치완 선교사의 경우는 1998년부터 교육 선교 사업을 통해 목회자를 양성하고 아세안 지역에 사역자를 파송하는 파이프라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10/40창에서 주목받고 있는 나라는 단연 C국이다. C국은 21세기 새로운 선교국가로 급부상되면서 교민 목회를 통한 현지인 목회를 전개할 수 있는 최적의 요충지로 부각되고 있다. C국은 국제화로 인해 여러 분야가 개방됐지만 유독 기독교 만큼은 국가의 통제를 받고 있다. 따라서 비공식적으로 성경학교 형식의 ‘사경회’가 조직돼 이를 통해 현지인 제자들이 배출, 지하교회를 통해 복음이 봇물 터지듯 전파되고 있다. 인도의 경우 선교사들이 NGO같은 비영리활동을 전개하며 현지에 동화하는 ‘침투전략’을 구사, 효과적인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다. 선교 지역 중 최근 중보기도가 필요한 곳으로 떠오른 지역은 구소련 영역이었던 독립국가연합(CIS) 소속 나라들이다. 우크라이나는 비교적 선교활동이 자유롭지만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은 박해가 심하다.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같이 이슬람 성지가 많은 우즈베키스탄은 선교사들에게 종교비자를 내주지 않고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자파로지아영산신학대학과 카자흐스탄 침켄트영산신학대학을 통해 순복음의 제자들이 양성, 이 지역에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있다. 신학교의 사역이 점차 중요시 되면서 우리교회 선교국은 2012년에도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볼리비아 인도네시아 대만 중국 케냐 등에 설립된 6개 신학교를 통해 신실한 주의 종을 배출할 계획이다. 또한 FMTC 선교훈련원 목회자·평신도 과정을 거쳐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로서 기존 사역자를 돕거나 중보기도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할 것이다. 선교국은 또한 FMTC 선교연구소를 통해 선교지 종족 연구, 선교지 국가별 정보 수집으로 세계 선교 흐름과 동향을 분석하고 그에 맞는 전략을 세워갈 방침이다. 선교사는 강인한 생존력으로 세계의 오지와 그늘로 뛰어든다. 척박하고 외로운, 때론 전쟁터와 순교현장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런 선교사들에 대한 국제선교회(WEC) 전 총재 에번 데이비스의 설명은 선교가 과연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들은 생명을 위협하는 풍토병 속해서 일했으며, 굶주림으로 고통당했으며, 돌과 매를 맞았으며, 침 뱉음을 당했으며, 죽음의 경지에 이르기도 했다. 코트디부아르, 콩고, 콜롬비아, 태국, 베네수엘라, 가나, 중국 등 수많은 국가들 속에 세워진 교회들은 이런 열정을 가진 사람들의 헌신의 결과다…그들은 40도가 넘는 불볕 더위 속에서 살며, 영하 30도가 넘는 혹한 속에서 일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납치 위험,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일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세상 사람들이 외면한 마약 중독자, 알코올 중독자, 에이즈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숱한 역경 속에서도 순종이라는 이름 아래 이들이 선교사로서 헌신하는 까닭은 복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세계선교를 위한 헌신은 비단 이들만의 몫이 아니다. 우리교회 10개 총회에 속하거나 FMTC 훈련을 받은 평신도 선교사 그리고 (사)순복음실업인선교연합회 해외선교회원에게만 주어진 사역도 아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주님의 복음이 전세계를 거쳐 다시 예루살렘에 울려퍼질 때까지 우리는 아직도 주님을 알지 못하는 종족을 향해 ‘영원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지상명령이기 때문이다.
  • 2011.12.11 / 오정선 기자

    이슬람의 나라에 순복음의 깃발을 꽂는다
  • 구소련지역 복음화 위해 제자양성, 교회개척 주력 선교박해 지역 많아 성도들의 기도가 꼭 필요한 곳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몰도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구소련지역 15개 나라에 순복음의 영성을 전하는 순복음소련(CIS)총회.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총회장 김용만 선교사를 비롯해 9명의 순복음 선교사가 파송돼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전하고 있다. 총회 산하에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서러시아지방회가 있어 지역별 특성에 맞춘 선교를 펼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선교가 자유로운 편이지만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대부분의 지역은 선교 박해가 심해 많은 기도가 필요하다. 소련총회의 주력 사역은 원주민 선교와 제자양성이다. 총회장 김용만 목사는 “이번에 침켄트에 이영훈 목사님이 다녀가시면서 현지인 목회자 양성, 현지인 교회 개척 등에 대한 비전을 주셨다. 많은 신학생을 발굴하고 교육, 훈련 파송에 더욱 힘을 쏟을 계획이다”라며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으로 제자 목회자들을 양성해 구소련지역에 1000개의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우리교회 선교사가 파송된 곳은 러시아,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이다. 키르기스스탄에는 현지인 제자교회가 있다. 우즈베키스탄은 국제오픈도어 선교회가 발표한 세계 기독교 박해국 중 10위안에 들 정도로 선교하기 어려운 나라다. 부하라, 사마르칸트와 같은 유명 이슬람 성지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종교비자가 나오지 않고 항상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아야 할 정도다. 하지만 이 곳 수도 타쉬켄트에는 순복음교회가 우뚝서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깃발을 날리고 있다. 우리교회의 구소련지역(CIS)선교가 시작된지 20년이 지났다. 구소련지역에 펼쳐진 조용기 목사의 선교사역은 이곳에 순복음의 뿌리를 심어놓았다. 1992년 크렘린궁에서 열린 조용기 목사 초청 모스크바 대성회는 4만여 명의 참석자 가운데 1만5000명이 결신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사람들은 아직도 그 성회의 감동을 기억하고 있다. 제자 목회자들은 조용기 목사의 말씀에 순종해 현지에 신학교를 세우고 제자들을 훈련시키는데 주력했다. 훈련된 순복음제자들은 교회를 개척해, 현재 구소련지역(CIS)에는 80여 개의 교회가 세워졌다. 지금도 선교사들과 현지인 사역자들을 통해 중앙아시아 및 러시아 지역에서 교회개척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자파로지아영산신학대학, 카자흐스탄 침켄트영산신학대학이 현지 목회자를 양성하고 우크라이나와 침켄트 외에 구소련지역 곳곳에 파송하고 있다. 구소련 해체와 함께 이 지역 복음화에 대해 비전을 품은 조용기 목사에 의해 설립된 이곳은 순복음의 영성을 전하는 양성소가 됐다. 두 영산신학대학이 연합해 순복음 현지인 제자 선교대회를 가지며 순복음 영성으로 무장하고 화합하고 있다. 2년전 우크라이나에서 제 1회 영산제자수련대회가 열렸다. 지난 9월 이영훈 담임목사가 카자흐스탄 침켄트를 방문하고 제2회 영산제자수련대회를 가졌다. 이 때 소련총회 현지인지방회장들에게 임명장을 주는 시간을 가졌고,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3년동안 전도사 사역을 감당했던 현지인사역자들에게 목사임직을 주었다. 그밖에도 영산제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뚜바 등 선교지를 소개하고 찬양하는 시간이었다. 순복음의 정체성을 갖는 의미있는 시간이 됐다. 구소련지역은 우리교회 선교사들의 열정으로 조금씩 변화되고 있다. 지난해 우크라이나대성회, 올해 침켄트 순복음교회 20주년 기념성회에 이어 내년 9월에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성회가 예정돼있다. 강력한 이슬람의 영향아래 복음증거가 힘든 선교지역인 구소련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이 땅을 묶고 있는 이슬람의 영이 물러가고 사단의 악한 영향들이 끊어지는 역사가 나타나도록, 선교사들과 현지인 사역자들이 순복음의 영성으로 무장해 하나님 나라를 강력하게 증거할 수 있도록 많은 중보기도가 필요하다.
  • 2011.11.13 / 이미나 기자

    ⑨ 동북아일본총회
  • 영적 전쟁 승리자 ‘순복음의 선교사’ 일본 일천만구령운동에 총력 10년 안에 100개 교회 세울 것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200년 앞선 16세기부터 기독교가 유래됐지만 복음 전파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무려 800만 신이 존재하는 나라 일본은 영적인 전쟁과 방해가 심하다. 아울러 일본 특유의 ‘혼네(속마음-본심)와 다테마에(겉모습-명분)’의 문화에서 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언제나 상냥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들은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항상 남들과 다른 것을 경계하고 조심한다. 막부시대부터 크리스천을 극심하게 핍박했던 과거는 이러한 일본 특유의 문화 정서와 맞물려 기독교가 뿌리내리기에 척박한 환경이 됐다. 그러나 동북아일본총회(총회장 정대원 목사)의 선교사들은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순복음의 영성으로 일본을 주님 품으로 인도하는 승리자의 모습으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교회의 일본 선교는 1971년부터 시작된 최자실 목사의 일본선교와 조용기 목사의 ‘일본 인구의 10%를 구령하자’는 ‘일천만구령운동’ 구호 아래 동경을 중심으로 태동됐다. 1989년에 신성남 목사를 초대총회장으로 설립된 ‘순복음아시아총회’는 지난 8월 ‘순복음동북아일본총회’로 개명됐고 현재 정대원 목사가 총회장을 맡고 있다. 동북아일본총회는 8개 지방회, 78개 교회에서 108명의 선교사가 활약한다. 동경지방회를 비롯해 동북, 관동, 보오소, 칸사이, 큐슈, 중부, 오사카지방회까지 총회 소속 선교사들은 일본 전역에 흩어져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복음전파에 힘을 쏟아 왔다. 특히 지난 35년간 조용기 목사는 일천만구령을 실현하고자 매년 동경, 오사카 등 일본 각 지역에서 성회를 인도하며 일본인들의 구원을 위해 앞장서왔고 선교사들은 오중복음 삼중축복 순복음의 영성을 전하고 있다. 순복음동경교회의 담임을 역임했던 이영훈 목사도 일천만구령운동을 외친 조용기 목사의 뜻을 받들어 매년 일본선교에 역량을 쏟는다. 정대원 목사는 “모든 교회는 기도할 때마다 일천만 구령을 위해서 기도하고 부르짖고 있다. 일본 교회가 일천만구령을 하는데 때로는 선봉이 돼 드리기도 하고, 어려울 때는 뒤에서 후원 부대가 돼드리겠다”고 말했다. 동북아일본총회는 매년 한차례 총회를 개최해 연간 사역보고로 선교정보를 공유한다. 선교사들의 영성 충전과 훈련을 위해 순복음과 영산의 신학 등을 주제로 세미나를 진행하는 등 노력을 기울인다. 지난해에는 벚나무 140그루를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 기증하고 기념식을 갖고 일본복음화의 꿈을 염원했다. 선교사들은 교포, 유학생, 일본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전도하며 이들을 제자화 하고 사명자로 세워나가고 있다. 도쿄에 위치한 일본 풀가스펠신학교는 1999년도에 일본 일천만 구령과 아시아복음화를 목적으로 설립됐다. 설립당시 베데스다신학대학대학원이란 이름이었지만 2001년 풀가스펠신학대학대학원으로 개명된 뒤 2003년 동경과 오사카 2학교 체제로 편성됐다. 최근 일본은 3월에 있었던 지진으로 많은 아픔과 상처를 입었다. 동북아일본총회 선교사들은 지진과 쓰나미, 이로 인한 원전사고로 상처받은 일본을 감싸주고 치료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정대원 목사는 “피해 발생지역인 동북지역에는 여섯 개의 순복음교회가 있는데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지만 성도들이 많이 귀국하는 등 간접적인 피해를 많이 입었다. 관동지방에 있는 교회들도 많은 교민과 유학생들이 한국으로 돌아갔다. 동경지방회는 2개월에 한번 기도회로 모여서 3.11동일본대지진으로 고통받는 동일본의 신유를 위해 기도한다”고 말했다. 순복음동경교회는 4월 한 달 지진 피해복구를 위해서 기도했다. 지난 7,8월에는 21일동안 밤 12시부터 새벽 5시까지 쉬지 않고 기도하는 다니엘철야기도를 실시해 성도들의 마음을 추슬렀다. 정대원 목사는 “과거 선교의 방향이 교민 중심에 있었다면 앞으로 일본인 원주민 선교로의 방향 전환을 생각하고 있다. 또 10년 내에 일본 전역에 100개의 교회를 더 세우고, 교단을 초월해 교세가 약한 교회에 대해 물질적인 후원도 계획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교회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도록 세미나 등의 프로그램도 개최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 2011.10.09 / 복순희 기자

    세계속의 순복음
    순복음 영향받은 대만목회자들, 중국 복음화 꿈꾸다
  • <사진설명: 2006년 10월 26,27일 대만대학교 체육관에서 열린 성회 장면. 양일간 2만명이 참석하고, 3000명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겠다고 나서 대만교회에 영적파장을 일으켰다.> <사진설명: 대만교회 성장에 큰 영향을 끼친 아세아성도방한대성회> 우리교회 7명 선교사 파송, 현지인 제자 양성주력 사회적 약자인 소수 민족 ‘순복음 희망’으로 끌어안아 대만 현지 목회자와 협력해 중화권 복음화 힘쓸 계획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있어 반드시 거쳐야 할 지역이 바로 중국이다. 우리나라는 중국 복음화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해외파송 전체 선교사 중 16%에 해당하는 3775명의 선교사를 중국을 비롯해 대만 홍콩 등 중화권에 파송했다. 우리교회 역시 중화권에 선교사들을 파송해 적극적인 복음 사역에 나서고 있다. 순복음중국총회로부터 2007년 분리된 대만총회(총회장 장한업 목사)는 대만복음화는 물론 나아가 중국 복음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대만은 타이페이순복음교회를 이끄는 장한업 목사를 비롯해 타이중순복음교회 서상진 목사, 링커우순복음교회 장완호 목사, 반치아오순복음교회 박철희 목사, 타이통순복음교회 김경숙 목사, 멩푸순복음교회 임미선 목사, 타오위안순복음교회 이용균 목사등 7명의 선교사가 정식으로 파송돼 있다. 이들 외에도 순복음의 선교사들에 의해 길러진 현지인 사역자를 통해 순복음의 ‘희망 복음’을 대만 땅에 전파, 오순절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대만은 특히 전통종교가 강한 나라로, 지역마다 민간신앙의 신을 모신, 나무 조각한 우상을 색칠해 나무 상자에 모셔놓은 ‘신위’를 볼 수 있다. 국민의 60%가 유교 불교 도교가 혼합된 민간신앙을 믿는 대만이, 2000년 이후 종교적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대만교회들이 한국교회의 경배와 찬양, 교회성장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성령운동’을 받아들인 후 급속도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현재 대만의 복음화율은 5%를 넘어섰고, 대도시의 경우는 10%대로 알려져 있다. 30년 전만해도 300명이 출석하는 교회가 단 한 곳도 없었지만 이제는 성도 수 1만명이 넘는 교회, 5000명, 2000∼3000명이 출석하는 대형교회가 계속 늘고 있다. 교단간 연합이 어려웠던 대만교회들이 연합하면서 전세계 중화인들을 모아 대만복음화 나아가 중국 복음화에 대한 비전을 품기까지 했다. 그 대표적인 대회가 바로 매년 여름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서 진행되는 아세아성도방한대성회다. 대만교회사는 대만교회 성장에 있어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아세아성도방한대성회’라고 기록하며 조용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선교사역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1980,90년대 조용기 목사는 대만 타이페이와 가오슝 등에서 성회를 활발히 이끌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병고침을 체험했고, 교회 성장과 성령 사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2006년 10월에는 대만대학교 종합체육관에서 성회를 개최하고 또 다시 대만에 성령 바람을 일으켰다. 조용기 목사의 영향으로 대만에서 ‘순복음’과 ‘순복음 선교사’의 영향력은 당연히 커질 수밖에 없었다. 대만은 중국에서 유입돼 주류를 이룬 한족과 소수 민족간의 갈등이 깊다. 따라서 대만에서 중요한 사역 하나가 소수 원주민 대상의 사역이다. 김경숙 목사는 교회 성도 90%가 소수민족으로, 사회적 약자인 이들을 복음화하는 것은 물론 사랑 나눔 실천에 앞장서고 있다. 또한 교육적 혜택이 적은 아이들을 위해 방과 후 교실을 운영하며 아이들을 크리스천 리더로 양육하고 있어 지역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소수민족간의 화해와 화합을 통해 대만 전역 복음화를 꿈꾸는 대만교회는 이제 중화권 복음화에 눈을 돌리고 있다. 중화권 선교를 위한 통로가 대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올해 25회를 맞이한 아세아성도방한대성회 역시 궁극적인 기도제목은 중국 복음화다. 대만은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깝지만 정치 경제적으로 오랜 시간 갈등을 겪어왔다. 그러나 전세계 흩어진 중화인을 한 자리에 모아 중국 복음화를 통한 ‘백 투 예루살렘’을 현실화해가고 있다. 이를 위해 대만에서는 교단간 연합과 체계화된 선교 전략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개진되고 있다. 장한업 목사는 “중국의 기독교가 급속도로 성장하는 것을 볼 때 머지 않아 ‘중국 10만 선교사 파송’시대가 열릴 것”이라며 아세아성도방한대성회를 통해 중국 복음화를 위한 기도의 목소리를 더욱 높이겠다고 말했다. 장 목사는 또 대만총회 선교사를 중심으로 2020년까지 대만 및 중국에 신학교를 더 세워 현지인 사역자 양성에 주력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중국은 비공식 크리스천까지 합치면 1억명에 육박한다. 경제적 개방과 함께 기독교 역시 지난날과 같은 박해는 없지만 숨어 있는 가정교회가 건강한 ‘에클레시아’가 되도록 힘써야 할 필요성은 있다. 이를 위해 중국에는 반드시 훈련된 신실한 기독 리더들이 세워져야 한다. 이념과 사상이 아닌 오직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질 수 있도록 대만의 역할의 크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이 모든 것이 이뤄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함께 노력할 때 주의 복음은 전파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순복음의 선교사’들은 오늘도 쉼없이 성령의 역사하심을 기대하며 기도와 복음 전파에 전념하고 있다.
  • 2013.12.08 / 오정선 기자

    중남미 6억 5천여 명 복음화 위해 ‘순복음 열정’안고 달린다
  • <▲사진설명:1997년 브라질대성회. 150만명이 운집했던 이 성회는 성령이 역사한 최고의 성회로 기억되고 있다.> 1997년 조용기 목사 브라질 성회 …150만명 운집 16명 선교사 파송 8개국에 121개 교회 세워 우리나라와는 정반대인 대척지에 해당하는 대륙이 남아메리카다. 기후, 시간대가 정반대인 남미는 가장 큰 브라질을 비롯해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칠레, 우루과이, 파라과이 등 12개국에 속해 있다. 전통적으로 가톨릭이 강세를 보이는 남미 지역에서 개신교 가운데 부흥을 경험하는 교파는 단연 오순절 교회이다. 세계적으로 하나님의성회는 5000만명이며, 그 중 10분의 1은 브라질 성도일 정도로 남미에서 오순절 사역은 부흥기를 맞고 있다. 이러한 요인에는 조용기 목사의 영향이 컸다. 남미는 성령 사역이 불일 듯 일어나면서 놀라운 교회 부흥을 경험하고 있다. 조용기 목사가 남미 지역 복음화에 첫 발을 내딘 것은 1979년 1월. 조용기 목사는 당시 2주간의 일정으로 과테말라를 비롯해 멕시코, 코스타리카, 엘살바도르를 방문해 중남미 지역 교역자들을 대상으로 세미나를 인도했다. 1980년대에는 브라질, 도미니카공화국, 페루와 베네수엘라 등을 돌며 부흥성회를 인도, 남미 지역의 부흥을 예고했다. 1990년대에는 파나마의 수도 파나마시티와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특별 대성회가 열렸다. 90년대에는 1997년 9월 150만명이 운집한 브라질 대성회가 단연 최고의 성회로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다. 상파울로 이비라 쀼에라 체육관과 깜보지 말지 경비행장에서 열린 성회는 초유의 인원이 참석해 조용기 목사가 깜보지 말지 경비행장 행사장에 마련된 강대상으로 이동하는 것이 어려워 헬기가 동원되기도 했다. 이 성회에는 또 페르난두 엔히키 카르도주 대통령도 참석해 화제가 됐다. 조용기 목사의 활발한 선교 행적은 남미지역에서 사역하는 순복음의 선교사들 사역에 큰 힘을 실어줬다. 대다수 남미에 세워진 순복음교회는 1977년부터 남미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거점지인 브라질의 상파울로,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파라과이의 아순시온, 볼리비아의 산타크루스, 파라과이의 시우다 델 에스데 등에 세워져 교민 사역을 시작했다. 이후 원주민 사역으로 눈을 돌려 현지인을 중심으로 한 사역을 전개, 순복음의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통해 중남미 지역 현지인들에게 ‘삶의 궁극적인 의미’와 ‘십자가 능력을 통한 긍정적 신앙’을 심어주고 있다. 현재 남미에는 (순)중남미총회(총회장 김용철 목사) 소속으로 16명의 선교사가 파송돼 사역을 전개하고 있다. 중남미총회는 모두 4개의 지방회로 다시 나뉘는데, 동지방회는 남미에서 가장 큰 나라인 브라질이 포함돼 있다. 브라질에서는 김용환(깜포 그란데 순복음교회) 김용철(빅토리아순복음교회) 김재우(브라질순복음교회) 윤성호(상파울로순복음교회) 진상훈(포르토 알레그레순복음교회) 선교사가 사역 중이다. 이 가운데 김용환 김용철 선교사는 형제로, 브라질 아마존에서 생활하는 원주민 등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중지방회 소속으로는 손강국(파라과이. 순복음파라과이교회) 정지영(파라과이. 엔카순복음교회) 장명준(파라과이. 순복음 델 에스데 교회) 선교사가 포함돼 활동하고 있다. 북지방회에는 이호영(멕시코. 멕시코순복음교회) 박혜윤(멕시코. 아마르순복음교회) 선교사, 이승우(에콰도르. 에콰도르순복음교회) 서장원(도미니카공화국. 도미니카순복음교회) 선교사가 포함돼 있어 순복음의 성령사역을 전개하고 있다. 남지방회에는 전명진(볼리비아. 볼리비아순복음교회) 최주호(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순복음교회) 김주영(칠레. 칠레순복음교회) 유경준(아르헨티나. 순복음샘터교회)가 소속돼 있어 교회를 세우고 선교의 지경을 넓혀가고 있다. 현재 이들 16명의 선교사들에 의해 중남미 8개국에는 121개 순복음교회가 세워졌다. 16명 선교사 중 6명은 교민을 중심으로 한 사역이고, 10명은 원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으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멕시코순복음교회는 1998년 조용기 목사가 해외 지성전으로 개척해 교민목회와 중남미 선교의 비전을 가지고 사역을 시작했다. 멕시코순복음교회는 ‘교회는 가정이며, 가정은 큰 교회’라는 모토를 가지고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삼고 성령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교회가 되기 위해 복음사역에 전념하고 있다. 중남미 대다수의 나라는 가톨릭 국가로 파라과이 역시 기독교율은 5∼7%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수도 아순시온을 중심으로 사역하는 손강국 선교사는 지금까지 11개의 지교회를 세우고, 2개의 기도처, 5년제 신학원을 통해 소명받은 하나님의 일꾼들을 키워가고 있다. 브라질에서 사역하는 김용철 김용환 선교사 형제는 한인보다는 현지 인디언을 복음화하는 사역에 주력하고 있다. (순)중남미총회장 김용철 선교사는 1984년 브라질 아마존 남쪽 인디언 선교를 시작으로 29년 동안 사역했다. 그는 빅토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80여 개 지교회를 세웠다. 육로가 없어 배나 비행기를 이용해야 들어갈 수 있는 오지이지만 김용철 선교사와 그가 길러낸 제자들은 순복음의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험한 길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1985년 선교사로 정식 임명을 받고 선교사가 된 김용환 선교사는 아마존 남쪽 정글에 살고 있는 떼레나 부족에서 첫 사역을 시작했다. 1967년 브라질로 이민와 언어가 능숙했던 김용환 선교사는 도시와 아마존 정글을 오고가며 부족원들의 집을 일일이 방문하며 복음을 전했다. 그 결과 한 무속인의 딸이 고침받은 일이 소문나면서 인디언들이 차례로 주님을 영접하게 됐다. 20년 넘게 인디언들과 함께 해온 김용환 선교사는 지금까지 10여 곳의 인디언 교회를 개척했고, 제자들을 길러 인디언들에게 ‘십자가를 통한 희망’을 전하는데 전력하고 있다. 올해 창립 36주년을 맞은 남미 최대 나라인 브라질에 세워진 상파울로순복음교회. 1977년 창립된 이 교회는 현재 주일출석 성도가 500여 명에 이른다. 상파울로순복음교회는 현재까지 9개 지교회를 세우고 10명의 원주민 사역자를 지원하며 순복음의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한인은 물론 원주민들에게 전파하고 있다. 올해는 성도들의 헌신 속에 5년 4개월간의 공사를 마치고 4월 이영훈 목사를 초청해 새성전 입당예배를 드려 주위를 놀라게 했다. 올해 32주년을 맞은 볼리비아순복음교회는 교회사역을 물론 ‘순복음영산신학교’를 통해 중남미 지역 복음화를 위한 수많은 사역자를 배출했다. 현재는 정부가 인정하는 공식 대학으로 다양한 크리스천 리더를 양육하는데 힘쓰며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해 이바지하고 있다. 이처럼 조용기 목사를 통해 시작된 순복음의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메시지는 이제 제자들을 통해 남미 전역에서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고 있다. 여기에 이영훈 목사가 중남미 지역을 방문해 순복음의 선교사들을 격려, 6억 5000여 명 중남미 인구 가운데 순복음의 성령 역사가 일어나도록 기도와 지원에 힘쓰고 있다.
  • 2013.10.13 / 오정선 기자

    중앙아시아 내륙 몽골에 심겨진 순복음 신앙
  • 1991년 문호 개방과 동시에 기독교 전파 2004년 조용기 목사 성회 몽골선교 도화선 현재 김용권 조대희 선교사 중심으로 사역 진행 아시아 중앙 내륙에 위치한 몽골은 천년의 기독교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1991년 기독교가 몽골에 다시 들어오기 전까지 기독교인의 비율은 0퍼센트였다. 이유는 공산주의 때문이었다. 구소련의 영향으로 사회주의를 지향해온 몽골은 소련이 붕괴되는 1991년까지 공산당 1당 독재 체제를 유지해왔다. 자연히 기독교가 탄압될 수밖에 없었다. 1989년 남미의 크리스천 여행객들에 의해 근대 몽골이 세계에 알려졌고, 구소련 붕괴와 함께 1991년 불어닥친 몽골의 민주화 운동을 기점으로 기독 선교사들이 몽골 땅에 들어가게 되면서 복음화는 다시 시작됐다. 몽골의 기독교율은 2000년 0.5퍼센트 미만까지 성장됐다가 2004년 조용기 목사가 몽골에서 성회를 개최한 이후 급속도로 늘어났다. 2004년 8월 4,5일 양일간 열린 ‘조용기 목사 초청 몽골추수 2004 성회’가 몽골선교의 도화선이 된 셈이다. 성회는 이틀간 6만 여명이 참석했으며 이중 3만 여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수백만명이 병 고침을 받았다는 간증이 이어지면서 몽골의 언론들은 이를 앞다퉈 보도하기도 했다. 그 결과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에 순복음교회가 세워졌다. 현재 몽골은 울란바타르순복음교회를 맡고 있는 김용권 선교사와 날라이흐순복음교회를 맡고 있는 조대희 선교사 두 명이 사역하고 있다. 2009년 파송돼 현재 5년째 사역에 접어든 김용권 선교사는 현재 울란바타르시 외곽지역 빈민촌 털거트에 위치한 울란바타르순복음교회(500명 출석)를 중심으로 또 다른 빈민촌 지역에 위치한 장진순복음교회 그리고 울란바타르에서 차량으로 비포장도로를 4시간 넘게 달려야 도착하는 산사르교회 등 네 곳 교회를 섬기고 있다. 김용권 선교사는 몽골 선교에 있어 10개 교회 개척이 목표다. 이를 위해 지난해에는 공사가 중단되었던 건물을 인수하고 성도들의 중보 속에 공사를 마무리 지어 9월 20일 입당예배를 준비 중이다. 이 교회가 바로 울찌뜨순복음교회이다. 그는 말씀 사역 외에도 순복음의 제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현지인 부목사 1명 전도사 4명 그리고 신학생 2명, 지구역장 25명 등을 세워 ‘순복음의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사역에 매진하고 있다. 몽골은 아직까지 가난한 나라다. 지금도 쓰레기장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을 위해 김용권 선교사가 진행하는 사역은 구제다. 가난한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굿피플과 함께 NGO 사역을 진행 중인 김용권 선교사는 집없는 사람들에게 게르(몽골전통 가옥)를 만들어 주고, 우물을 시추해 현지 지역주민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현재 3개의 아동센터(털거트, 장진, 울찌뜨)를 세워 형편상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수업(한국어, 몽골어, 컴퓨터, 수학등)을 가르치고 있다. 현재 몽골에서 8년째 사역 중인 조대희 선교사는 울란바타르에서 동쪽으로 32km 떨어진 날라이흐 지구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 조대희 선교사가 섬기는 날라이흐순복음교회는 예배운동을 통해 성도들의 신앙을 세워가고 있다. 그는 예배를 통해 성도들의 개인 신앙 성장은 물론 봉사자들을 철저히 훈련시켜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양육하고 있다. 그 결과 인근 선교사들이 예배 문화를 배워가기 위해 조대희 선교사를 찾고 있다. 조대희 선교사도 김용권 선교사와 마찬가지로 복음 사역 외 구제 사역에 힘을 싣고 있다. 과거에 비해 경제가 성장했지만 몽골은 여전히 수도를 벗어나면 환경이 열악하다. 이 때문에 날라이흐순복음교회는 몽골 국제기아 대책과 협력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아동 200명과 결연해 아이들이 자신의 미래를 설계해 나갈 수 있도록 다양한 강연 및 체험, 방과 후 학습 등을 진행 중이다. 또 지역 아동들을 위해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다. 몽골 전통 게르에 세워진 도서관은 이 지역 최고의 도서관으로 지역 아이들이 교회에 대한 거리감을 좁히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다. 몽골에서 기독교의 역할은 상당하다. 하지만 불교 국가인 몽골은 공식적으로는 종교 비자를 인정하나 실제 교회 허가 및 종교 비자를 받기란 쉽지 않다. 최근들어서는 잦은 종교법 수정으로 인해 비자 및 교회허가가 늦춰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선교사들은 불법 체류자가 되지 않기 위해 매년 한국에 왔다가야 하는 실정이다. 교회허가마저 쉽지 않아 보이지 않는 종교탄압이 일어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몽골에는 개신교 교회가 500여 개, 목회자는 150여 명 정도다. 목사안수를 받지 않는 교회 지도자가 300여 명에 육박하는 등 어려운 중에도 꾸준히 복음을 위한 일꾼들이 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여전히 가난한 나라이기에 아무런 소망이나 목표가 없는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할 수 있다 하면된다 해 보자”라는 순복음의 절대긍정과 절대희망의 메시지인 것이다. 순복음의 영성과 기도, 성령운동이 확산될 때 이 나라는 희망을 안게 되며 기독교가 더 큰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몽골을 통해 중앙아시아 지역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 2013.09.08 / 오정선 기자

    한국 기독교 130년
    12-한국 기독교의 미래
  • 한국교회 ‘성령과 동행’ 할 때 희망 있다 지난 130년 부흥 원동력, 주가 보낸 ‘성령’ 주 위해 하나될 때 사회적 사명 다할 수 있어 130년 역사를 맞은 한국 기독교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참으로 많다. 5만 5000여 교회, 1200만 성도로 성장하기까지 양적부흥을 위해 정신없이 달려왔으니 이제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헌신토록 내적 부흥에 더욱 내실을 기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은혜를 받았으니 받은 은혜를 교회 안에만 담아두지 말고 세상과 나눠야 한다는 실천적 행동이 강조되기도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가 필요하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많은 일들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안에서 ‘분열과 다툼’의 이미지가 강해 거센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최근 한기총과 한교연 대표회장이 서로 손을 맞잡아 연합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했다. 이러한 연합은 곧 교회 협력과 일치를 가져온다. 국내외 교회가 초교파적으로 협력하게 되면 통일 문제와 사회적 약자들에 관한한 정치 참여, 사회 활동을 기대할 수 있다. 물론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실천해온 사회참여는 많았다. 하지만 기독교 문화운동, 기독교 윤리 실천, 사회봉사 운동, 환경 운동, 평화통일운동에 있어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성경에 기록되었듯 주의 가르침을 따라 한국교회가 하나 될 때, 정직 절제 사랑운동 순결서약 등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전개되고, 국내 구호사업 및 해외구제 사업 등 사회 봉사활동이 보다 확대될 수 있다. 또 통일과 북한 선교에 있어 한국교회가 이제껏 해온 노력에 하나님이 더 큰 열매를 맺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이같은 활동을 위해서는 하나 됨을 위한 한국교회의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교회가 새로운 부흥을 기대하며 하나 되기 원한다면 오직 성령의 역사를 간구해야 한다. 성령만이 교회를 변화시키고 성도를 일꾼으로 세울 수 있다. 지난 130년 동안 한국교회를 일으키고 부흥을 가져온 것은 바로 성령의 힘이었다. 주를 알지 못한 조선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외국인 선교사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도, 선교사들이 순교와 박해를 이겨내고 조선에 교회와 학교를 세우도록 역사하신 이도,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를 시작으로 대부흥운동을 일으킨 이도 바로 성령이었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됐듯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면서 비로소 교회가 탄생한 것처럼 한국교회는 성령의 힘으로 오늘날 5만5000여 교회가 탄생될 수 있었다. 또한 순복음을 이단으로 규정했던 많은 교회들이 성령을 인정하고 성령 운동에 동참할 때 폭발적 부흥을 경험하게 됐다. 성령을 인정할 때 교회가 부흥한 것은 세계교회도 마찬가지다. 전세계에서 가장 부흥한 교회들을 보면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고 성령 운동에 동참했을 때 놀라운 변화를 경험했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지난 130년의 역사를 기반으로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원한다면 성령을 인정해야 한다. 성령으로 하나 될 때만이 한국교회에 연합과 일치가 이뤄진다. 또한 다양한 사회적 활동에 나설 수 있다. 그리고 북한 복음화를 위해 한 마음으로 전진할 수 있다. 성령의 역사는 또 강력한 기도 운동을 불러일으킨다. 과거 우리나라는 민족과 국가를 위한 기도회가 많았다. 나라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한국교회는 손을 치켜올리기보다는 먼저 한자리에 모여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기도할 때 성도들의 신앙은 뜨거워졌고, ‘내’가 아닌 ‘주’를 위한 부르심 따라 헌신된 일꾼으로 일어섰다. 그들은 민족 지도자로 일어섰고, 사회 리더가 됐으며, 세계 각지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됐다. 주의 은혜를 자신들 안에 담아두기보다는 밖으로 흘려보낼 때 거룩한 생수의 강으로 모든 이들의 목마름을 해갈해줬다. 결론을 맺자. 이제 한국교회의 미래는 오직 ‘성령’에 달려 있다. 성경으로 돌아가 오로지 말씀에 충실하고 성령의 임재를 간구할 때 한국교회는 이전과 다른 변화와 각성 그리고 새로운 부흥을 기대할 수 있다. 자신을 겸허히 내려놓고, 오직 주 만을 높이며 성령과 동행한다면 우리의 이웃과 사회는 강요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주를 인정하고 더욱 주를 따르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앞으로 희망이 있다.<끝>
  • 2014.12.14 / 오정선 기자

    11-여의도순복음교회와 1200만 기독인
  •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며 복음 전파·사회 운동에 앞장 선 한국교회 폭발적 부흥의 선봉이었던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성령운동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서대문에 자리하고 있던 순복음중앙교회 시절 이미 성도수가 8000명이 이르렀다. 나날이 늘어나는 성도수로 인해 주일예배는 3부 예배로 드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가 부족해 많은 성도들이 성전에 못 들어 와 교회 마당에 앉아 스피커로 들려나오는 설교를 들으며 예배를 드렸다. 결국 조용기 목사는 성전 건축과 이전을 결심하고 성도들의 조언을 받아 여의도에 1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성전 건축의 비전을 품게 됐다. 1969년 4월 착공 예배 후 4년만인 1973년 8월 15일 여의도에 교회가 완공되면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만, 5만, 10만명 성도라는 폭발적 부흥을 거듭하기에 이른다. 이와 동시에 1973년 전세계를 돌며 열리는 세계오순절대회(Pentecostal World Conference) 제10차 대회의 준비위원장으로 조용기 목사가 임명돼 대회 일부 행사가 우리교회에서 진행되면서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미국 프랑스 등 세계 30여 개국 2000여 명이 참석한 서울대회에는 서울시장의 환영사가 있을 정도로 사회의 관심이 컸다. 조용기 목사는 이 대회에서 말씀을 전한 짐머만 목사의 통역을 맡았으며, 성회를 통해 말씀을 전하며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을 근거로 “성도들이 성령을 체험하고 병을 고침 받아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1975년 대전에서 열린 복음화전도대회, 연이어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서울전도대회, 9월에 열린 부산전도대회, 대구전도대회에 많게는 3만명까지 참석하면서 국내 복음화는 불이 붙기 시작했다. 1977년 8월 15일부터 18일까지 서울 여의도광장에서는 민족복음화대성회가 열렸는데, 이 대회는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성령운동을 70년이 지난 시점에서 재현하고자 한 운동의 일환이었다. 성회에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성도뿐 아니라 전국에서 몰려든 초교파 성도들의 참석으로 한국교회에 성령의 역사와 영적부흥을 일으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1980년대는 1970년대의 성장 추세를 그대로 이어받아 한국교회가 계속 성장하는 시기였다. 주도적인 역할은 여의도순복음교회였다. 많은 교회들이 이단으로 규정했던 순복음교회를 찾아와 부흥을 배워가기 시작했고, 함께 성령운동을 전개하기 이른다. 한국교회 부흥의 중심에는 이렇듯 언제나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조용기 목사가 선봉에 있었다. ‘성령의 횃불을 드높게’ 든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성령운동의 선구자로 한국교회에 성령 운동을 전개하는 일을 주도해나갔다. 그 결과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성도수가 세계 최대라는 80만명이 이르렀고, 한국교회는 1200만 성도와 5만 교회라는 놀라운 부흥을 맞이했다. 이는 한국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지 130여 년 만에 일어난 변화였고, 2천년 교회사에 유례없는 놀라운 부흥과 성장이었다. 한국의 5만 교회는 이후 범사회적 운동을 일으키며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사랑 실천 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나눔 운동은 교회별로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일어나거나 기독교 윤리 실천, 사회 봉사, 환경운동, 평화 통일 운동 등이 교회 연합으로 전개됐다. 이 뿐 아니라 국가적 재난 앞에 한국교회는 누구보다 먼저 나서 어려운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위로의 손길을 내밀었다. 복음 전파와 사랑나눔 실천은 국내에만 머물지 않고 제3세계에도 전해져 한국교회를 중심으로 한 NGO단체가 태동하기도 했다. 복음전도와 사회적 운동, 통일 및 북한 복음화를 위한 노력 앞에서도 언제나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아낌없는 지원에 나서는 등 하나님이 원하시는 시대적 부름에 순종하며 오늘날 여기까지 왔다.
  • 2014.11.09 / 오정선 기자

    10-폭발적인 부흥의 시작
  • 선교의 ‘땅 끝에서’ 선교의 ‘출발지로’ 엑스플로 74, 민족복음화 대성회 등을 통해 국내선교 넘어 세계선교 비전 품고 교회성장 방송선교, 군복음화가 부흥의 촉매제로 작용 세계교회에 있어 대한민국은 복음을 전해야 할 ‘땅 끝’의 일부였다. 그러나 70년대에 열린 대부흥성회들이 시발점이 되어 한국교회는 더 이상 선교지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선교의 사명을 갖고 복음을 가지고 선교지로 향하는 선교의 출발지가 됐다. 60년대에 심은 복음화운동이 70년대에는 대부흥운동으로, 80년대에는 선교운동으로 변화되면서 한국교회가 세계교회 가운데 변방이 아닌 세계교회를 리드하는 위치로 바뀌게 됐다. 1965년에 “3천만을 그리스도에게”라는 표어를 내걸고 전국을 복음화하는 열렬한 복음화운동을 전개됐다. 이 복음화 운동은 개신교 18개 교단과 로마 가톨릭과 정교회까지 포함하여 총 20개 교단이 함께 참여한 대규모 전도운동이었다. 이 복음화운동은 1년 동안 전국에서 계속되었고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이 복음화 운동은 위원장 홍현설 목사, 총무 김활란 박사를 중심으로 한 준비모임이 발족, 그해 11월에 서울운동장에서 전국복음화 대성회를 갖고 ‘교회는 일치를, 사회는 봉사를, 민족에게는 소망을’이란 선언문을 채택했다. 그 후 1973년, 1974년, 1977년 계속해서 여의도 광장에서 대성회 개최에 큰 역할을 해며 한국교회의 폭발적인 부흥의 단초를 마련했다. 1973년 서울 당시 여의도 5·16광장에서 모인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는 100만의 성도들이 한 자리에 집결한 민족 최초의 대집회였다. 미국의 세계적 부흥사 빌리 그레이엄 목사를 강사로 한 이 집회는 한국교회의 저력을 세계에 보인 초대형 집회로서 한국의 모든 교회들에게 큰 자극이 됐다. 당시 집회는 일반 매스컴에서도 중계하면서 대한민국 전역으로 복음이 전해졌다. 집회 중 여의도광장에 무지개가 드리워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증거라고 입을 모으기도 했다. 1974년 8월 13일에는 ‘EXPLO’74’대회가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개최됐다. 엑스플로는 원래 미국 CCC에 의해 주도된 대전도집회로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설립자 김준곤 목사가 72년에 열린 미국 텍사스 대회에 참석해 한국대회를 개최하겠다고 선포함에 따라 열렸다. ‘예수혁명-성령의 제3폭발’을 주제로,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소서’를 표어로 진행됐으며 한경직·김준곤 목사, 미국의 빌 브라이트, 일본의 하도리 아키라, 싱가포르의 찬 두레이, 홍콩의 필립 텡 등이 강사로 초청됐다. 연 655만 명이 참가한 대규모 집회로 하루에 20만 명이 길거리 전도에 참여하여 27만 2000여 명의 결신자를 얻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대회 후 지방별로 후속 전도대회가 여러 곳에서 열렸으며 기도회와 전도훈련이 지속됐다. 이때부터 사영리가 전도의 도구로 자리 잡았다. 대회를 기점으로 예수혁명, 성령충만,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자’는 구호가 교회마다 전해지며 교회부흥의 불꽃이 퍼져나갔다. ‘민족복음화 대성회’는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 70주년을 기념해 1977년 여의도광장에서 열렸다. 이 집회는 외국선교단체 등 외부의 도움이 아니라 부흥사로 이름을 알린 조용기 신현균 목사를 비롯한 국내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준비됐다. 주제는 ‘민족복음화를 위하여, 한국인에 의해서, 오직 성령으로’였다. 이 집회에서 처음으로 평양대부흥운동을 한국교회 부흥 및 성령 운동의 역사적 사건으로 기념했다. 1980년 ‘세계복음화대성회’, 1984년 ‘한국 기독교 100주년 선교대회’ 등 80년대에도 대규모 기독집회의 열기가 이어지며 한국교회의 부흥의 불씨가 이제는 한국을 넘어 선교지, 즉 세계를 바라보게 됐다. 한편 전도운동의 불씨에 바람이 되어 준 것이 바로 방송매체의 등장이었다. 현 CBS의 모체인 기독교 방송국(HLKY)이 1954년 감의도 목사(본명 오토 디캠프)에 의해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4교단의 연합 사업으로 창립 개국했다. 민간방송의 효시이기도 한 기독교 방송은 전국 방방곡곡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어 국제복음방송국(현 극동방송)이 1956년 시험방송을 시작으로 1957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기독교인의 교양, 문화, 전도에 주력하는 한편 한국어방송은 물론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로 방송해 공산국가를 향한 방송선교도 함께 진행했다. 또하나의 불씨는 의외로 군부대에서였다. 군목제도가 1950년 창설되어 각 군에서 군종병들과 군목들의 노력으로 많은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1970년의 전군신자화운동을 통해 본격적으로 전군으로 복음이 전해지게 됐다. 당시 1군사령관이었던 한 신 장군이 이스라엘군이 중동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로 유대교신앙을 꼽으며 모든 장병들에게 신앙을 가질 것을 당부했다. 이에 군종감실에는 모금운동을 통해 논산 훈련소에 1500명을 수용가능한 교회를 건립하고, 이어 500명이 동시에 침례를 받는 군부대만의 특수한 ‘합동침례식’이 생겨나게 됐다. 한 번에 몇 천명이 동시에 침례를 받는 진풍경으로 인해 군부대는 전도의 황금어장이라 불리기도 했다. 군복음화운동은 지금까지도 매우 중요한 전도사업이며 한국교회 성장의 촉매제역할을 했다.
  • 2014.10.12 / 정승환 기자

    선교열전
    (36)소피아 프릭(1886∼1912)
  • 양화진에 안장된 최초의 구세군 선교사 한국서 복음전하다 4개월 만에 급성 뇌염으로 사망 소피아 프릭(Frick, Jenny Sofia)은 스웨덴에서 한국에 파송된 최초의 구세군 선교사다. 프릭과 함께 한국에 입국한 제1진 선교사는 코흘러, 울선 등으로 이들은 1911년 12월 24일 한국에 첫 발을 내딛었다. 이중 프릭은 한국에 파송된 구세군 선교사 중 최초로 1912년에 양화진에 묻혔다. 1911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한국 땅을 밟은 프릭 선교사는 서울 평동에 머물면서 한국어를 익혔다. 간단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자 그녀는 거리로 나가 쪽복음과 ‘구세신문’을 나눠주며 문서전도에 힘썼다. 프릭 선교사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기도와 성경 공부를 마치고 나면 어김없이 7시에는 뒷산에 올라가 한국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간구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생활을 하면서 기도와 복음 전파에 힘쓴 프릭 선교사는 “오직 한국인을 위해 복음을 전하다 목숨을 바치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녀의 이런 다짐이 있기까지는 본국인 스웨덴에서 받은 선교 훈련의 영향력이 컸다. 프릭 선교사가 파송될 때 스웨덴의 연대장 뷔버는 프릭의 한국 파송을 격려하며 “프릭이 한국으로 갈 수 있음이 무한히 기쁘다”고 말했다. 뷔버는 “본래 프릭은 성령이 충만한 젊은 여성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어디를 가든지 주님을 위하여 좋은 사업을 크게 이룩할 수 있는 선교사”라고 평하기도 했다.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복음전파를 위해 일평생을 헌신하겠다고 다짐했던 프릭 선교사는 한국에 오자마자 인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열정적인 복음을 전했던 프릭 선교사는 사역 중 1912년 4월 18일 급성 뇌염으로 앓아눕게 됐다. 의사의 극진한 진료와 호가드 사령관 부인 등 여러 사관들의 정성어린 간호에도 불구하고 프릭 선교사는 1912년 4월 29일 오전 4시 하나님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 프릭 선교사와 함께 생활하던 본영 총무서기관 크리스핀은 프릭 선교사의 삶과 죽음에 대해 “나는 프릭 사관과 한 대문 안에서 살았으므로 자연스럽게 그를 살펴 볼 수 있었다. 그는 한국인을 구원해 주님의 빛을 발하도록 하려는 생각만 간절했다. 한국말은 잘 하지 못하지만 구세신문과 마가복음을 자기 돈으로 사서 여러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눠주는 등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전했다. 또 프릭 선교사가 4개월 남짓 한국에서 선교사역한 것을 회상하며 “그가 한국에서 활동하며 모든 선교사들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그의 아름다운 삶과 열성은 본보기가 됐다”고 말했다. 프릭 선교사의 유해는 현재 양화진에 안치돼 있으며 양화진에 안장된 최초의 구세군 선교사로 기록되고 있다. 주의 소명을 받고 구세군 선교사가 됐던 소피아 프릭 선교사는 1886년 8월 16일 스웨덴 텔례북에서 출생했고, 스톡홀름 구세군 성경대학교에 입학해 1911년 11월 20일 참위 직분을 받은후 곧바로 한국 구세군 선교사로 선임됐다.
  • 2014.12.07 / 오정선 기자

    (35)말콤 펜윅(1863∼1936)
  • 한국침례교의 토대를 세운 선교사 찬송가·성경 번역 통한 복음전도 만주 블라디보스톡까지 한인 위해 교회 세워 말콤 펜윅 선교사는 1863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펜윅이 5살 때 열 한 자녀를 남기고 사망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펜윅은 주일 봉사를 하는 등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 그러나 그가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난 건 어머니의 사고 이후였다. 이 일로 펜윅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만나길 원했고, 기도에 매진했다. 그리고 26세 되던 1889년 한국 선교에 대한 소명을 처음 받았다. 한국을 조그마한 섬나라로 이해했던 그는 당시 철물 도매업을 하면서 저녁마다 나이아가라 사경회 성경공부에 참여했다. 정규 신학 교육을 받지 않아 마음에 부담이 컸던 그는 처음에는 선교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인도에서 사역하던 한 형제가 성경공부 모임에서 한 간증을 듣고 마음을 돌이켰다. “사막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은 화려한 유리 주전자에 담긴 물이 아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물이다” 복음의 본질이 말씀에 있음을 깨달은 펜윅은 즉시 주변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넉 달간의 항해 끝에 마침내 한국에 도착했다. 한국에 도착한 펜윅 선교사는 처음 열 달은 한국어를 배우는데 집중했다. 한국 사람들과 부딪히는 삶 속에서 한국어를 익힌 그는 몇몇 한국 친구들과 함께 황해도로 향했다. 그때가 1890년이었다. 초대교회인 소래교회에서 펜윅 선교사는 소년반을 만들어 사역했고, 찬송가 ‘예수 사랑하심은’ ‘나는 참 기쁘다’ 등을 한국어로 번역해 불렀다. 펜윅 선교사는 남달리 글쓰는 재주가 있어 당시의 한국 풍습과 사정을 기록하는 한편 초기 한국선교의 어려움을 생생하게 기술하기도 했다. 그는 사역 틈틈이 근처의 버려진 땅을 개간해 밭을 일구기도 했다. 선생이나 선비는 노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던 당시 사회에서 이러한 모습은 주민들에게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국에서 선교사역이 쉽지 않았던 펜윅 선교사는 1893년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하며 재충전의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그 후 교회가 없는 원산으로 사역지를 옮겨 복음 사역에 전념했다. 1900년 남감리교 선교사인 하인즈와 결혼한 뒤에는 원산에서 과수원과 농사를 하면서 남녀 성경공부반을 조직해 전도활동을 했다. 1903년에는 충청도 지방의 전도 사업을 이양받아 신명균 성도를 첫 한국인 동역자로 세웠다. 신학교를 세워 한국인 조사(문서순회전도자)들을 대상으로 성경교육과 영적훈련을 시킨 펜윅 선교사는 캐나다 교회의 지원을 통해 1920년까지 36개의 가정교회를 설립했다. 조사들을 각처에 파송하고 순회전도를 통해 교회가 생겨나자 펜윅 선교사는 교단 조직의 필요성에 절감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1906년 충남 강경침례교회에서 최초의 침례교단 총회에 해당하는 대화회를 창립하고 ‘대한 기독교회’(The Church of Christ in Corea)를 조직했다. 1914년에는 제9회 총회를 원산에서 개최하고 9년간 역임해 오던 감목직을 이종덕 목사에게 위임하기도 했다. 펜윅 선교사가 설립된 교회들은 처음에는 ‘대한기독교회’로, 후에는 ‘동아기독교’로 불리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침례교회의 전신에 해당된다. 펜윅 선교사를 중심으로 세워진 교회 수는 1920년 162개처로 늘었으며 펜윅 선교사가 사망한 1936년에는 교회수가 250여 개처로 확장됐다. 펜윅은 생전 정기적으로 이들 교회들을 순회하며 사역했고, 장로교 감리교가 한반도 선교지를 분할할 때 만주 일대는 물론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까지 그의 조사들을 보내어 한국인들을 찾아 교회를 세우기까지 했다. 펜윅 선교사는 또 1919년 10월에는 신약전서(원산 번역)를 출판했으며 1899년부터는 복음찬미도 발행해 그 후 증보판을 계속 발행했다. 젊은 시절 복음을 들고 한국에 들어와 46년간 한국 땅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던 말콤 펜윅 선교사는 72세를 일기로 원산 자택에서 하나님의 품에 고이 잠들었다.
  • 2014.11.02 / 오정선 기자

    (34)조지 매큔(1878∼1941)
  • 한국인에게 참된 신앙 심어준 선교사 독립운동 돕고, 일제 신사참배 반대 두번 추방 당하면서도 한국 사랑 남달라 조지 매큔(George Shannon McCune)은 일제강점기 한국에 거주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한 미국선교사이다. 그는 일제시대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섰던 진실한 선교사였다. 미북장로교에서 파송된 한국 선교사인 조지 매큔의 한국이름은 윤산온(尹山溫). 미국 미주리주에서 출생해 파크대학을 졸업하고 선교사로 1905년에 한국에 입국해 부인과 평양에서 4년간 한국어를 공부하며 교회 일을 도왔다. 1909년에는 평안북도 선천의 신성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부임 즉시 미국의 독지가 오닐(Hugh Oneil) 부인으로부터 1만5000달러를 기부 받아 학교의 급속한 발전에 기여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시위참가 학생들을 숨겨주는 등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그의 신학적 입장은 보수적이었지만 그가 1912년에 있었던 데라우치 암살미수사건 혹은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일본인들에게 알려진 것처럼 그는 한국인들의 민족주의적 열정에 일정한 공감을 가졌다. 조지 매큔 선교사는 1921년 한국에서 추방됐다가 1929년 5월 제4대 학장으로 평양숭실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기독교 교육에 집중했지만 30년대 중반 점점 더 강화되어가는 일제의 전체주의 체제에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1935년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요구 거부로 그의 시련은 시작됐다. 평안남도 지사 야스다케 타다오(安武直夫)는 11월 14일 공·사립학교 교장회의를 소집하고, 참석자 전원에게 신사에 참배할 것을 요구했다. 1935년 12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실행부가 조지 매큔 선교사의 집에 모여 밤늦도록 회의를 한 후 이런 행사는 이전에 없던 일이며 자신들은 교장인 동시에 선교사이므로 기독교 교리에 반하는 신사에 참배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조지 매큔 선교사는 시내 27개의 교회와 협의한 결과 “신사에서 일본 신을 참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며 “나의 기독교 양심으로 신도에 참배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신사참배 요구를 거부했다. 1936년 1월 총독부 평남지사 야스다께는 60일간의 기한을 주고 신사참배 여부를 회답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숭실학교의 조지 매큔 교장과 숭의여중학교의 스노크 교장을 파면하고 미국으로 강제 추방했다. 그는 결국 1936년 교장직에서 파면됐고 두 번째로 추방됐다. 한국에서 쫓겨났지만 그는 미국에서 한국 유학생들을 지원했고 한국에 대한 연구자료로 두 아들과 함께 저작물을 발간했다. 조지 매큔 선교사의 저서로는 한글로 된 ‘그리스도의 전기’ 등이 있다.
  • 2014.10.05 / 이미나 기자

    잊혀진 북한교회
    (15)마지막회
  • 해방 전 북한에 세워진 교회 2000여 곳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며 복음화 앞장 서 통일 한국과 북한교회 재건 위한 준비 필요 지금까지 1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이 지면을 통해 ‘잊혀진 북한교회’에 대해 알아봤다.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리웠던 평양을 중심을 북한 곳곳에 세워졌던 교회는 민족 복음화는 물론 일제강점기에 한민족 정신 계승을 위해 앞장서 나갔다. 우리가 그동안 알아본 교회는 1907년 대부흥의 중심에 서 있던 장대현교회를 비롯해 10여 개에 불과하지만 북한에는 해방 전까지 대략 2000개가 넘는 교회가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 기관에서 1994년에 발간한 ‘북한지역 종교자료집’에 따르면 해방 이전 북한 지역에 설립된 교회는 중국대륙 동북지역을 포함해서 2193개 교회가 존재한 것으로 수록돼 있다. 또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1996년 발행한 ‘북한교회사’에는 모두 2978개의 교회가 존재했던 것으로 수록돼 있다. 이 가운데 500여 개는 중국 대륙 동북지역 등에 세워진 교회들로 이 교회들을 빼면 북한 지역에는 대략 2439개 교회가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교회 중 대다수를 차지한 것은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장로교와 감리교였다. 장로교는 대략 1370여 개 교회가, 감리교는 300여 개 교회가 있었다. 이 외에도 성결교회가 존재했으며 구세군, 성공회 교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 교회들은 일제강점기와 공산 치하, 한국전쟁 시기를 거치며 대부분 사라졌다. 따라서 남한 교회는 이들 북한교회에 대한 자료 수집에 나서 해방 전 어떤 교회들이 북한에 있었는지 다각적인 조사에 나섰다. 극동방송은 광복 50주년을 기념해 북한 교회를 알리는 기획을 진행했다. 한기총도 북한교회 자료 조사에 나서 통일 이후 교회 재건을 위한 기초 작업을 진행한 바 있다. 북한에 세워졌던 교회들은 각 지역의 구원의 등대였을 뿐 아니라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한 계몽의 선두에 서 있었다. 교육을 일으켰고, 의료 사업을 전개했으며, 민족애를 일깨웠다. 또한 민족적 인물을 키웠으며 한국 복음화를 위한 위대한 지도자를 양성했다. 지역 중심에 섰던 교회는 독립 운동 중심에 있었고, 기독교를 반대하는 공산주의와 맞서기도 했다. 무엇보다 남한 교회 부흥의 불씨가 됐다. 공산주의를 피해 남하한 북한 기독교인들이 남한에 모여 이룬 교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영락교회 대다수 교인들이 북한에 고향을 둔 이들이었고, 남산현교회는 월남한 성도들이 모여 교회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며 신앙의 유산을 이어나갔다. 이들은 남한 교회 부흥은 물론 통일 한국 시대를 기대하며 북한 교회 재건을 위한 기도를 이어가고 있다. 북한교회 재건을 위한 기도는 비록 교회는 사라졌지만 목숨 걸고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을 이어가는 북한 교인들을 위함이다. 또 통일 한국 후 북한 세습 체제에 묶여 있던 북한 주민들을 기독교의 신앙과 사랑으로 회복시켜, 다시 한국이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세계선교 사명을 완수하는데 크게 쓰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한국 교회는 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통일 한국을 위해, 북한 교회 재건을 위해 우리교회가 1% 통일 기금을 매월 꾸준히 적립하듯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나가야 할 것이다.
  • 2016.12.18 / 오정선 기자

    (14)회령교회
  • 항일 민족운동에 앞장섰던 교회 최경재 목사 회령서 독립 운동 주도 한국초기 영화인 나운규·윤봉춘도 가담 1945년 해방 이전 북한의 크리스천은 인구 940만명 중 370만명으로 40% 가까이 차지했다. 북한에 있던 기독교인들은 일제 강점기 시절 누구보다 항일운동에 열심이었다. 한국영화의 개척자로 영화 ‘아리랑’을 제작한 나운규는 함경북도 회령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참가한 인물이다. 15세 때인 1916년 중국 간도에 있는 미션스쿨 명동중학교 재학시절 독립 정신을 키운 나운규는 1919년 4월 초 회령교회 최경재 장로의 지도를 받으며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 때 독립운동에 함께 나섰다가 투옥된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나운규와 함께 한국 영화의 개척을 이룬 윤봉춘이다. 나운규와 함께 명동중학교를 다니며 민족 독립 정신을 배운 윤봉춘은 당시 명동중학교 안에서 발간하는 독립신문을 옷에 숨기고 가져와 회령교회 최경재 장로에게 전하면 최경재 장로는 신문을 주변에 뿌렸다. 독립운동을 주도한 최경재 장로가 시무했던 교회가 바로 회령교회이다. 장로교인 회령교회가 설립된 것은 1908년이다. 회령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마주보는 곳으로 당시 함경도는 캐나다 장로교의 선교구역이었다. 한국에 공식적으로 처음 들어온 캐나다 선교사 중 한 명이었던 로버트 그리어슨은 1901년 5월부터 회령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그리어슨 선교사는 원산, 성진, 함흥에서 선교 활동을 차례로 진행했는데 함경도 기독교 중심지였던 성진의 전도인 안순용을 회령에 보내 전도 활동을 전개하고 교회를 설립한 것이 바로 회령교회였다. 개인 집에서 시작된 회령교회는 1910년 성진 선교부에서 기와집 두 채를 구입해 한 채는 예배당으로, 다른 한 채는 목사관으로 사용하면서 선교사와 교역자, 전도인, 교사들이 부임했고 교회는 크게 부흥했다. 회령교회는 복음 전도 외에도 교육 분야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 그래서 교회를 중심으로 진명학교, 신흥학교, 보흥여학교를 설립했다. 보흥여학교의 경우는 그 일대의 유일한 여성고등교육기관이었다. 회령교회는 앞에서도 설명했듯 회령 일대 만세운동을 주도한 교회로 유명하다. 그 중심에는 최경재 장로가 있었다. 고향이 성진인 최경재는 회령으로 이사해서 회령교회를 크게 부흥시키기 위해 힘썼다.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최경재 장로는 만세 운동 주도자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회령은 국경 도시로 일본 군대가 주둔해 있었기에 만세 진압에서 많은 사람들을 거칠게 다뤘다. 최경재 장로는 형무소 출감 후 1924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뒤 회령교회 담임목사로 재직하게 된다. 민족 운동에 앞장섰던 회령교회는 회령 지역 뿐 아니라 중국대륙 동북지역, 당시 북간도 지역 선교의 발판으로 복음운동과 민족운동에 헌신했다. 회령교회는 최경재 목사 외에도 함경도 선교의 거목인 김영제 목사, 회령교회 초기 어학교사로 수고한 강두화 목사가 활동했다. 우리에게는 김일성의 부인이었던 김정숙의 고향으로 알려진 회령. 하지만 이제 회령은 복음화의 흔적이 사라지면서 마약이 불법으로 거래되는 마약 범죄도시로 전락하고 있다고 북한관련 한 소식통은 전하고 있다. 또 중국과의 접경지로 북한을 탈출하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다고 한다.
  • 2016.11.20 / 오정선 기자

    ⑬신의주동부성결교회
  • 이성봉 목사 부임 후 놀라운 부흥 일어나 일제와 공산정권에 맞선 담임 목사들 신앙정신 이어받은 인물이 정진경 목사 북한의 신의주는 압록강 하류의 평안북도에 위치하고 있다. 평야지대로 이뤄진 신의주는 중국 단둥시와 인접한 곳으로 구글 지도상 단둥과 신의주 평야 초입간의 다리가 완공돼 있다. 이들 간의 거리는 대략 20㎞, 도보로 25분 거리다. 중국 대륙과 가까운 잇점 탓에 북한이 한 때 중국과의 교류로 특별행정자치구를 만들려고 했던 신의주는 경의선 철도의 종점이자 우리나라 국도 제1호선의 종착점이기도 하다. 국도1호선의 출발점은 전라남도 목포이다. 신의주에는 해방 전 모두 8개의 교회가 세워졌다. 감리교, 장로교, 구세군, 성결교가 자리잡고 있었다. 신의주동부성결교회는 1934년 7월에 세워졌다. 성결교는 신의주동부성결교회가 세워지기 전 1927년 신의주성결교회를 먼저 설립했다. 이 교회가 부흥해 분립한 것이 바로 신의주동부성결교회이다. 신의주동부성결교회가 분립하면서 신의주성결교회는 신의주서부성결교회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신의주동부성결교회는 더 늦게 세워졌지만 서부교회보다 크게 성장했다. 그 이유가 1936년 4월에 담임으로 부임한 이성봉 목사 영향이다. 이성봉 목사는 우리나라 대부흥사로, 성결교회 재건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평안남도 출생인 이성봉 목사는 6세에 기독교에 입문해 모친에게서 신앙교육을 받았다. 21세 때 원인불명의 병으로 고통당하던 이성봉 목사는 이때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절대 믿음을 갖게 된다. 목회자가 되고 신의주동부성결교회에 부임한 이성봉 목사는 부임 즉시 한 주간 교회에서 부흥회를 개최했다. 이로 인해 130여 명의 교인이 생겨났고 성도들의 부흥으로 이듬해 교회는 벽돌 예배당을 신축해 화제가 됐다. 이성봉 목사는 신의주에서 목회할 때 태어난 딸의 이름을 신의주의 ‘의’자를 넣어 ‘의숙’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그의 딸 이의숙은 한국도자기 김동수 회장의 부인으로, 이의숙 여사는 수안보 파크호텔에 아버지의 신앙정신을 기억하기 위해 성봉메모리얼채플을 세우기도 했다. 이성봉 목사 후임으로 부임한 교역자는 김유연 목사이다. 황해도 출신인 김유연 목사는 일제 강점기 말 옥고를 치르는가 하면 동아일보 경서지국장,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 부총회장, 경성신학교(현 서울신학대) 교수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신의주동부성결교회를 비롯해 안성교회·무교정교회(현 중앙교회)·신공덕교회(현 신덕교회) 담임을 지내기도 했다. 성도들은 김유연 목사의 신앙 정신을 본받아 거룩한 삶을 이어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해방 후 서울에서 목회와 교수생활을 하던 김유연 목사는 북으로 피랍돼 이후 행방을 알 길이 없다. 이 외에도 초기 담임이었던 김성달 전도사, 신의주서부성결교회 2대 담임이었다가 신의주동부성결교회를 담임했던 한성과 목사, 박용현 목사도 공산 정권과 맞서 복음을 전한 믿음의 용사들로 알려져 있다. 성결교회는 한 때 일제의 미움으로 강제 해산된 적이 있다. 이때 신의주동부성결교회 역시 폐쇄됐지만 해방 후 재건돼 1947년에는 교인 수가 200명이었다. 신의주동부성결교회 담임은 아니었지만 이 교회 목회자들을 통해 한국교회 지도자가 된 인물도 있다. 신촌성결교회 담임이었던 정진경 목사(2009년 9월 3일 소천)다. 정진경 목사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과 한기총 대표회장,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장, 한국세계선교협의회 대표회장, 월드비전 이사장, 대한성서공회 이사장, 호서대 이사장 등을 지낸 개신교계 대표적인 인물이다. 양반 집안의 11대 종손이자 외아들이었던 정진경 목사는 아들이 ‘예수쟁이’가 되는 것을 싫어한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예수를 믿었다. 정 목사는 10대 때 신의주동부성결교회에서 성령을 체험했으며, 18세 때 은행에 취직했다가 폐결핵과 늑막염에 걸려 산속에서 요양하던 중 신유를 체험하기도 했다. 오늘날 신의주동부성결교회의 자취는 사라져 그 위치마저 확인할 길이 없지만 많은 이들에게 영적 가르침을 깨우쳐준 주님의 교회로 기억되고 있다.
  • 2016.10.16 / 오정선 기자

    가스펠 로드
    미국 켄터키 노아의 방주
  • 노아의 방주는 얼마나 컸을까? 성경에 등장하는 노아는 세상이 부패하고 포악함이 가득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이면서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다(창 6장).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땅과 함께 멸하시려고 작정하셨을 때,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어 홍수를 피할 수 있게 하셨다. 그 때 만든 방주는 얼마나 컸던지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들의 암수 둘씩 그리고 노아와 그 가족을 태우고 먹을 양식까지 모두 실을 수 있었다. 누구나 노아의 방주가 얼마나 클지 상상하기 마련인데, 그 상상을 도와줄 실제 크기의 노아의 방주가 미국 켄터키주 윌리엄스타운에 건설됐다. 미국의 한 기독교단체에서 제작한 이 노아의 방주는 길이 155.4m, 폭 25.9m, 높이 15.54m에 달하며 이 방주를 짓는데 1800만 달러(약 209억 원)라는 금액이 사용되었으며 놀라운 것은 이 대부분이 후원금으로 마련됐다는 것이다. 축구장 한 개 반 길이에 축구장 절반에 이르는 폭을 가진 노아의 방주 안에는 노아의 가족과 동물들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특히 방주는 성경에 기록한 것처럼 목재로 제작되어 ‘세계 최대의 목재 골조 건축물’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한 ‘창조의 응답’(Answers in Genesis) 대표 켄 햄 회장은 “이 사업은 우리 역사상 최대의 위대한 기독교 사업이 될 것”이라고 평가하며 800 에이커(약 3.23 ㎢)에 달하는 테마파크로 운영되며 노아의 방주 외에도 바벨탑 내부 500석이 완비된 5D 상영관, 동물원, 예수님이 살았던 동네의 당시 모습 등을 재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현재 크리스천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해 실제 노아 방주의 크기에 놀라고 성경 속 모습을 꼼꼼하게 재현하려고 노력한 모습에 감탄하고 있다. 글 정승환 기자 / 사진 순복음북미총회 제공
  • 2016.11.20 / 정승환 기자

    ⑨ 제중원
  •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제중원 고종황제 작명 “백성들을 구제한다” 의미 지금은 국민 누구나 병원에서 현대 의술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이런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은 사실 오래된 일이 아니다. 1885년 4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제중원 개원이 그 첫 시작이었다. 제중원이 설립될 당시만해도 우리나라는 신분사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중원에서는 신분과 지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모든 백성을 상대로 서양식 의료 진료가 진행됐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1884년 7월 고종황제는 일본에서 들어온 매클레이 선교사에게 ‘학교와 병원’ 사업에 국한해 선교를 허락했다. 이에 따라 미국 선교부가 먼저 착수한 사업은 의료사업이었다. 1884년 10월 미국 공사관 소속 의사로 우리나라에 온 앨런은 갑신정변 때 칼에 맞은 민영익을 치료해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서양 의술에 대한 큰 신임을 얻었다. 이를 계기로 알렌은 왕실부 시의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고종으로부터 병원설립 허락을 받아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광혜원이었다. 그 후 13일 만인 4월 23일 고종은 이 병원에 ‘제중원’이란 이름을 하사했는데, 이는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제중원은 신분에 상관없이 서양식 진료를 한 것뿐만 아니라 선교의 전초기지로써 언더우드와 스크랜턴, 헤론 그리고 여의사로 처음 입국한 엘러스 선교사들이 제중원을 거쳐 우리나라 곳곳에 복음을 전했다. 당시 첫 서양식 병원 개원으로 환자들의 방문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많게는 하루에 260여 명의 환자를 돌보았고 첫 해에만 1만 460명의 환자를 진료했다는 알렌의 기록이 남아 있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환자가 늘어나자 알렌은 선교부에 의료선교사를 추가로 요청하기도 했다. 제중원은 현재 헌법재판소가 있는 종로에 그 터가 남아있으며 1985년에 연세대에서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광혜원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건물을 복원했다. 광혜원 내 사료관에는 당시 언더우드가 사용했던 타자기를 비롯해 다양한 자료 등을 만날 수 있다.
  • 2016.10.16 / 정승환 기자

    카이저빌헬름교회&마리엔교회
  • 독일 베를린에는 수많은 랜드마크들이 있지만 그 중에도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이 바로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다(사진 왼쪽). 브라이트샤이트 광장 중앙의 쿠담거리에 위치한 이 교회 외관을 보면 깜짝 놀라게 되는데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의공습으로 인해 첨탑의 일부와 중앙현관을 제외하고는 파괴되어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이기 때문이다. 독일은 이미 회복불능 상태인 교회를 억지로 복원하기보다 파손된 첨탑을 그대로 유지하고 1층에 기념관을 지어 후대들에게 전쟁의 무서움과 아픔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원래 이 교회는 카이저 빌헬름 2세가 그의 할아버지인 카이저 빌헬름 1세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교회로, 빌헬름 1세의 생일인 1891년 3월 22일에 주춧돌을 놓았다고 한다. 113미터 높이의 첨탑과 2000여 명이 들어가는 크기의 규모다. 또한 중앙현관은 1906년 2월 22일에 축성됐다. 지금 이 교회 옆에는 4개의 빌딩으로 구성된 신관을 만날 수 있다. 에곤 아이어만이 설계한 이 신관은 구관의 유적을 둘러싸고 있으며 구관을 중심으로 서쪽에 로비가 있으며 예배당이 있는 빌딩은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빌딩은 육각형을 하고 있으며 예배당이 있는 빌딩은 팔각형이다. 신관은 콘크리트와 철, 유리로 만들었는데, 벽들은 2만1292개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벌집모양으로 박은 콘크리트로 건설했다. 글래스의 파란색을 바탕으로 루비 레드, 에머랄드 그린, 노란색이 섞여있다. 밤에 보면 특유의 빛과 더불어 독특한 겉모습 때문에 베를린 시민들은 가끔 ‘립스틱과 파우더 박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교회는 지름 35미터, 높이 20.5미터로 1000명 이상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으며 내부에는 황동 예수상과 5000여 개의 파이프로 만든 오르간이 있는데 매우 인상적이다. 조금 떨어진 리브크네히트 거리로 가면 베를린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 하나인 마리엔교회를 만날 수 있다. 지어진 당시인 1292년에는 로마 가톨릭 성당이었으나 종교 개혁 이후 개신교회가 됐다. 이 교회 외부는 특유의 빨간 벽돌로 되어 있으며 인근에 있는 붉은 시청사(Rotes Rathaus)는 이 교회에서 모티브를 얻어 설계됐다고 한다. 마리엔교회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심각하게 파괴됐으나 1950년대에 동독 정부가 이 교회를 재건했다. 교회 앞에는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동상이 있으며 중세 예술의 대표작인 ‘죽음의 무도’(Totentanz) 프레스코 벽화가 이 교회 안에 전시되어 있다. 글·정승환 / 사진·김용두 기자, 김한수 선교사
  • 2016.09.18 / 정승환 기자

    알면 은혜되는 외국어
    빌 4:6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6)
  • 2018.12.02 / 이미나 기자

    벧전 5:7
  •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벧전 5:7)
  • 2018.11.18 / 이미나 기자

    빌 1:6
  •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 2018.11.11 / 이미나 기자

    한국의 성지순례
    (29) 철원제일감리교회
  • 강원도 최초 ‘철원읍 3.1운동’ 이끈 교회 일제의 압박과 핍박에도 날로 부흥 민족의 아픔과 상처가 새겨진 유적지 철원 노동당사에서 남쪽으로 500m를 내려가면 철원제일감리교회(구 철원제일교회) 유적지가 있다. 철원제일감리교회는 미국에서 온 웰본(E.A.Welbon 한국명 오월번) 선교사에 의해 1905년 설립됐다. 설립 초기 철원읍교회로 불렸던 이 교회는 강원도 철원군 최초의 교회이다. 철원제일감리교회는 1919년 3월 10일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항일 만세 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철원제일감리교회 담임 박연서 목사는 교회의 학생·교사·전도사와 함께 ‘철원읍 3.1 운동’을 이끌었다. 철원읍 3.1운동을 시작으로 춘천과 횡성 홍천 등으로 강원도 전역에 만세운동이 전파됐다. 박연서 목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항일단체인 ‘철원애국단’을 조직해 국내 독립운동 상황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고하고 임시정부에서 전달된 문서를 국내에 반포했다. 일제의 압박과 핍박이 거셌지만 교회는 날로 부흥했다. 철원제일감리교회는 계속해서 늘어나는 성도들로 인해 더 큰 성전이 필요하게 됐고 1937년 교회를 새로 건축했다. 당시 이화여대를 건축한 유명 건축 선교사인 윌리엄 보리스가 교회건축을 맡았다. 철원제일감리교회는 현무암과 화강암을 쌓아 만든 준 3층 규모의 석조 건물로 1층에는 소예배실(교육관)과 10개의 분반 공부방이 있었고 2층에는 대예배실이 있었다. 일제의 계속된 탄압에도 부흥 성장하던 철원제일감리교회에 위기가 찾아왔다. 1939년 조선총독부는 철원제일감리교회에 새로 부임한 강종근 목사(1904.9.26~1942.6.3)를 반일 및 신사참배 거부를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체포했다.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은 강종근 목사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모진 고문을 받다 37세의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강종근 목사의 일대기에는 그가 신사참배를 거부한 목회자 중 첫 순교자라고 적혀있다. 광복 후 철원제일감리교회가 위치해 있던 지역이 북한 땅으로 귀속됐다. 교회를 섬기던 기독 청년들은 필사적으로 반공투쟁을 펼치며 교회를 지켰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교회가 폐쇄됐다. 인민군은 교회를 병영으로 삼고 지하 기도실을 철원지역 양민들을 학살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교회는 전쟁 중 폭격으로 파괴돼 현재는 전면 출입구 및 기둥과 벽면의 일부만 남아있다. 철원제일감리교회 유적지는 민족의 아픔과 상처가 새겨진 장소로 그 가치가 인정돼 한국근대문화유산 23호로 지정됐다. 기독교대한감리교회는 교단차원에서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한국 교회의 고난의 역사를 간직하고자 철원제일감리교회를 복원하기로 결정하고 철원제일감리교회 유적지 옆에 ‘철원제일교회 복원기념예배당’을 지었다.
  • 2020.10.25 / 금지환 기자

    (28) 성봉 메모리얼 채플
  • 한국의 무디 이성봉 목사 기념 교회 하늘과 땅 잇는 야곱의 사닥다리 의미 담아 한국 아름다운 교회 중 한 곳으로 손꼽혀 충청북도 충주 수안보파크호텔 경내에 위치한 성봉 메모리얼 채플은 한국의 아름다운 교회 중 한 곳으로 손꼽힌다. 중세 고딕양식을 적용한 성전과 숲속 자연이 어우러져 경관이 일품이다. 성봉 메모리얼 채플은 2004년 故이성봉 목사(1900∼1965)의 셋째 딸 이의숙 권사가 이성봉 목사의 선교 열정과 뜻을 기리기 위해 마련한 교회이다. 이성봉 목사는 한국의 무디(Moody)로 불릴만큼 복음 전파에 열정적이었으며 수많은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부흥사이다. 평안남도 출신인 이성봉 목사는 1925년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28년부터 1937년까지 경기도 수원 전라남도 목포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목회를 하다 1938년 총회에서 부흥사로 임명받아 순회전도를 시작했다. 일제 말인 1941년에는 만주 영변에서 부흥사로 사역을 하던 이성봉 목사는 1945년부터 고국으로 귀국해 성결교회 재건을 위한 집회를 이어갔다. 1950년에는 6.25전쟁 중에도 서울과 목포를 오가며 집회를 열었고 목포에서 인민군 내무서원에 붙잡혀 온갖 고문을 당했지만 순교를 각오하며 옥중에서도 신앙을 지켰다. 이 목사는 1954년 전쟁으로 무너진 교회의 재건과 작은 교회 부흥을 위해 2년 동안 ‘임마누엘 특공대’를 조직해 순회 집회를 인도했다. 서울 부산 인천 대구 대전 등 주요 대도시를 방문해 천막을 치고 대중 집회를 열었고 농촌과 산골 도서 지방에서도 순회 집회를 인도했다. 이 목사는 1961~1963년 1일 1교회 순회 집회를 시작해 총 408개 교회를 순회하며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하리라’란 유명한 말을 남기며 수많은 사람을 그리스도의 품으로 인도했다. 이 목사는 1965년 7월 성결교 합동총회에서의 설교를 마지막으로 8월 2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성봉 메모리얼 채플은 하늘과 땅을 잇는 야곱의 사닥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의미가 있다. 100여 명 남짓 수용하는 작은 교회지만 호텔 직원 및 투숙객을 비롯해 인근 여행객들의 주일 예배 처소로 사용되고 있다. 주일 예배는 오전 9시와 오후 3시 두 차례 진행되며 담임목사 없이 원로목사 및 외부 목사를 초청해 예배를 드리고 있다. 평일에는 소규모 영성훈련과 세미나 기도회의 장소로 사용되고 누구든지 와서 기도하고 쉬어갈 수 있도록 연중 24시간 개방하고 있다. 교회 내에는 이 목사의 유품도 일부 전시돼 당시 고인의 선교에 대한 열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 2020.09.27 / 금지환 기자

    (27) 두암교회
  • 23인 성도들의 순교 신앙 기린 곳 전북 정읍시 소성면 애당리에 위치한 두암교회는 매년 2만여 명이 넘는 한국교회 성도들이 찾는 순교의 성지로서 전북 지역 대표적 기독교 유적지 중 하나로 손꼽힌다. 두암교회는 1945년 우리 민족이 광복을 맞이한 해에 김용은 전도사와 그의 모친 윤임례 집사가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됐다. 두암교회 성도들은 윤 집사의 가정집에 모여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며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 성장에 힘썼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한 달이 채 안 되어 정읍지역에 공산당이 주둔하면서 두암교회는 위기를 맞는다. 두암 마을 성도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공산당에게 위협을 당했다. 특히 공산당은 반공 내용을 담은 부흥집회를 개최한 김용은 전도사를 잡아들이는데 혈안이 돼 윤 집사와 성도들을 수시로 탄압했으며 고문도 마다하지 않았다. 공산당은 불시로 가택 수색을 벌이며 예배 중지와 교회 폐쇄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오히려 성도들은 예배와 기도에 힘쓰며 믿음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1950년 10월 19일 공산당은 윤 집사와 두암교회 성도들을 몰살할 계획을 세워 칼과 몽둥이로 성도들을 죽이고 방안에 짚을 넣어 교회와 성도들의 집 4채를 모두 불태워버린다. 이 과정에서 윤 집사를 포함한 성도 23인이 순교하게 된다. 당시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한 서명선 목사와 김용례 사모(윤 집사의 막내딸)는 윤 집사가 무릎을 굽힌 자세였고 머리 뒤쪽에 칼자국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마지막 순간까지 교회에서 기도하다 순교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증언했다. 두암교회 성도들은 어린아이부터 장년까지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다. 당시 희생된 두암교회 성도가 23명이었는데 전교인이 순교자가 됐다. 두암교회는 건물이 불타 없어지고 성도가 없어 존폐의 위기에 처했지만 1964년 두암 마을 출신 김태곤 전도사가 고향집에서 주일학교를 시작하면서 다시 세워졌다. 두암교회는 1966년 가매장했던 23인의 순교자들의 시신을 교회 동산으로 이장해 ‘순교자의 묘’로 합장했으며 1994년에는 성결교단의 지원으로 ‘순교자기념교회당’과 ‘순교자 기념탑’이 세워졌다. 순교자 기념탑은 사각 십자가 모양으로 사중복음을 상징하며 기념탑 상단에는 순교신앙을 널리 전하기 위해 성령의 불을 표현한 횃불이 조각되어 있다. 기념탑 하단에는 봉헌문과 순교자 23인의 명단 및 약력이 새겨져 있다. 두암교회는 지금도 매년 10월 중순이 되면 순교자 합동추모예배를 드린다. 금지환 기자
  • 2020.02.16 / 금지환 기자

    선교열전 "선교뉴스종합"
    순복음인천중앙교회 (진유신 목사)
  • < a> 어린 영혼 전도하며 생명의 길 인도 장년출석과 어린이출석 수 같은 기현상 연출 독거노인 돌보기 등 지역 사회 빛과 같은 역할 인천광역시 선학동에 자리잡은 순복음인천중앙교회는 여타 교회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성인 성도 재적 1백명에 주일학교 재적 역시 1백명을 기록하고 있는 것. 개척 1년 8개월여 만에 1백명의 아이들을 교회로 인도해낸 순복음인천중앙교회의 저력은 과연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진유신 담임목사의 남다른 어린이 사랑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불교 집안에서 태어난 진 목사는 어린 시절 친구의 전도로 따라나섰던 교회에서 주일학교 선생님의 지극한 사랑을 경험했다. 장성한 후 교회학교 교사로 10년간 봉사하면서 교사의 중요성을 절감했고 어린 영혼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아이들을 전도하는 것은 마치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죠. 그 아이들이 일평생을 주님 안에 자라날 것을 생각하면 흐뭇해집니다” 순복음인천중앙교회는 차세대를 이끌어갈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준다는 의미에서 주일학교를 ‘비전스쿨’이라 명했다. 그리고 토요일마다 인근에 위치한 초등학교 앞에서 전도활동을 펼친다. 동화구연, 풍선아트, 시청각 자료, 레크리에이션, 축구전도, 편지쓰기 등 다양한 방법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가는데 그 중에서도 편지쓰기는 아이들에게 인기만점. 예쁜 편지봉투에 담겨 집으로 직접 배달되는 사랑의 편지는 아이들뿐 아니라 부모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아이들의 영향을 받아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부모들도 꽤 된다고. 주일학교 이외에도 ‘독거노인돕기 콘서트’, ‘병원 전도’를 통해 지역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가 하면, ‘영혼추수를 위한 50일 구약성경 통독’ 등 성도들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도 주력하고 있다. 한국교회에 부흥사례를 제공하겠다는 사명을 가지고 튼실한 아동셀 만들기에 여념이 없는 교역자와 구역셀장들. 이들이 있는 한 순복음인천중앙교회의 미래는 밝다.
  • 2002.11.0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순복음엘림교회 (홍성하 목사)
  • < a> 평신도 제자양육 통해 지역복음화 선도 분명한 목표와 표어 통해 성장 추구 1년 6개월간의 사역으로 교회 기틀다진 계기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가졌던 지난 10년간의 사역과 훈련은 순복음엘림교회가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교회 그리고 건강한 교회로 성장해 나가는 데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에서의 사역을 마감하고 지난해 3월 대구광역시 상인동에 순복음엘림교회를 개척한 홍성하 목사를 지난 6일 만났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도착해 교회에 들어서자 때마침 제자양육훈련이 한창이었다. 훈련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둘러본 교회는 아담하고 아늑하다. 성전 한쪽 벽면에는 순복음엘림교회의 표어인 ‘축복신앙을 계승하자’는 문구가 걸려있었고, 교회의 네 가지 목표(평신도 능력 극대화, 총동원 전도운동 지속전개, 오순절성령운동 및 기도운동 지속, G-12 셀 번식운동)도 함께 걸어놓아 교회사역의 방향성을 읽을 수 있었다. 교회사역이 시작된 후 1년6개월이 지난 지금 홍성하 목사는 이제까지의 사역을 ‘교회사역의 기반을 공고히 한 시간’으로 평가했다. 평신도교육 및 제자훈련을 통해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는 우리교회의 전통이 순복음엘림교회에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었고, 이는 순복음엘림교회 사역에 청신호를 밝히고 있다. 홍성하 목사가 평신도 교육과 제자훈련에 유독 관심을 갖는 데에는 그가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가졌던 사역과 무관치 않았다. 평신도교육연구소에서 6년여 기간동안 사역하며 깊이 깨달은 것이 성도들이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어떻게 전도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지 않으면 전도가 어렵고 개인의 믿음도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홍성하 목사는 “순복음엘림교회의 모든 성도를 그리스도의 강한 군사로 키우기 위해 힘을 쏟고 있다”고 했다. 이와 함께 순복음엘림교회는 성장하는 여느 교회가 그렇듯 기도에 열심이다. 창립예배를 드린 지난해 3월 12일부터 이제껏 단 하루도 동 교회는 새벽기도를 빠뜨리지 않으며 기도의 단을 쌓고 있다. 현재 순복음엘림교회는 대교구장 1명, 교구장 3명, 셀리더 10명, 인턴구역장 20명 양성을 목표로 사역을 전개, 지역 선교의 요람으로 발돋움한다는 꿈을 키워가고 있다.
  • 2002.11.0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차재헌 선교사(모리타니 누아디부순복음교회)
  • 회교권을 향한 순복음의 외침 월드컵 대회를 통해 한국의 위상 알리는 계기돼 직·간접적인 선교방해 불구 순복음 전파 주력 모리타니 선교현장에 지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 여름 프랑스의 도움으로 2002 월드컵축구경기가 이곳에 방송되면서 4강에 진출한 대한민국에 대한 위상이 높아지고 한국인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심겨진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외침이 머나먼 아프리카 모리타니에까지 울려퍼지는 모습을 보면서 감격에 잠겼었다. 선교사로서 이런 일들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에 대한 긍정적 분위기를 바탕으로 모리타니 복음화에 박차를 가할 기회가 왔음을 느끼며 오늘도 복음전파에 최선을 다해본다. 모리타니는 정식국가명이 모리타니 회교 공화국(Republique Islamique de Mauritanie)으로 이름에서 풍기듯 이슬람 국가다. 아프리카 북서단 대서양 연안에 접해있으며 북쪽은 서사하라, 모로코, 북동부는 알제리, 동쪽과 남쪽은 말리, 남서부는 세네갈에 접해 있다. 2백42만명의 국민이 한반도의 약 2.7배에 해당하는 땅에 살고 있다. 국토의 대부분이 사하라 사막에 속해있는 저지대 땅으로 건조하고 덥다. 모리타니의 헌법을 보면 “모리타니 국민의 종교는 이슬람교이다”라고 명시되어 있고 무어인, 흑인 등 인종을 불문하고 대부분이 이슬람교도들이다. 정부에서 눈에 띄게 기독교를 탄압하고 있지는 않지만 은근하게 방해하는 모습이 보인다. 예를 들면 교회간판을 떼라고 하든지 ‘Mission Stop’이라는 글귀를 인터넷 상에 올리면서 간접적인 선교방해를 하고 있다. 이슬람교도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제3국인을 통해야 하는 실정이다. 제3국인들은 이슬람교도라고 해도 기독교 복음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3국인을 대상으로 매주 축호전도와 심방을 실시하고 있다. 하지만 돈을 벌려고 모리타니를 찾아온 제3국인들은 이 지역을 유럽으로 들어가기 위한 수단으로만 삼고있는 형편이어서 어려움이 많다. 소명받은 일꾼을 보내 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리고 있으며 무엇보다 우리 성도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기를 소망하고 있다. 모리타니는 9.11 테러 이후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영향으로 인한 학생들의 시위가 지난 봄 종종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비교적 안정된 편이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대서양 연안에서 물고기가 잘 잡히지 않음에 따라 수산업이 침체에 들어가 어려운 형편에 처해있다. 얼마전 새로운 수도배관 설치가 완료되어 수돗물을 계속 쓸 수 있게 되어 국민들이 좋아하고 있다. 우리 누아디브순복음교회는 한인과 현지인을 대상으로 한 예배를 드리고 있다. 한인들은 새벽·주일·수요예배와 금요셀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현지인들은 새벽·금요저녁·주일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한인학교를 운영해 태권도를 포함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현지인 고아원을 매달 찾아 사랑을 전하고 있다. ‘전 성도 성령충만·말씀충만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꾼이 되자’는 표어를 세우고 한인 성도와 모리타니인 성도가 연합하여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일구어 가고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성도들의 기도와 후원으로 세워진 모리타니 누아디브순복음교회가 든든한 반석 위에 서서 죽어가는 모리타니 영혼들을 살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바라며 성도 여러분의 계속적인 기도를 부탁드린다.
  • 2002.11.0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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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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