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 순복음
(134)순복음의 7대 신앙-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47>
  • 육체적이고 허탄한 자랑 던져 버리고 오직 십자가만 자랑해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4절). 성경에서 ‘자랑’은 영적으로 가치 있는 일로 지칭되는 예가 드물다. 시편 10편 3절은 “악인은 그의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며 탐욕을 부리는 자는 야훼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라고 기록하며, 고린도후서 11장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라고 말했다. ‘자랑’은 이처럼 현저히 육체적이고 허탄한 행위로 이해된다. 자랑의 대상들은 대부분 가치 없는 것이거나 그 가치가 한시적인 것들이다. 비록 지금 자랑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잠시 잠깐 후에는 쓸모없는 것이 돼 버리거나 창피스럽고 민망한 일이 돼 버리고 마는 경우가 많다. 평등 시리즈라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우선 사람의 나이 40대가 되면 지식의 평등이 찾아온다고 한다. 공부 잘하고 못하고 하는 것은 어릴 때 학창 시절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40이 넘어가면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똑같다. 또한 50대가 되면 외모의 평등이 찾아온다고 한다. 예쁜 사람 못생긴 사람의 차이는 어리고 젊은 시절 이야기이다. 50이 넘어가면 똑같이 배도 나오고 엉덩이도 쳐져 외모도 다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아진다는 것이다. 이어서 60대가 되면 성의 평등이 찾아와 남자나 여자나 평준화가 된다. 남자는 순해지고 여자들은 상대적으로 강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남자나 여자나 비슷하게 된다는 것이다. 70대가 되면 건강의 평등이 찾아온다. 건강한 사람이나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나 고만고만하다는 것이다. 그만큼 같이 늙어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80대가 되면 재물의 평등이 찾아온다고 한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데 돈이 많으면 무엇하겠는가? 즉 가진 사람이나 못 가진 사람이나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90대가 되면 생사의 평등이 찾아온다. 다시 말해 이 나이쯤 되면 삶과 죽음이 별 차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 살고 내일 죽으나 내일 살고 모레 죽으나 따질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금은 서글픈 이야기지만 그만큼 우리네 인생에는 자랑할 것이 별로 없다는 의미를 이해하는 예로는 적절한 이야기로 보인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5절을 통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고백하듯 말하였다. 이처럼 성령 충만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거룩한 성도들에게는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3.03.17

    (133)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46>
  • 받은 은사 자랑하고 과시하면 교회공동체 덕이 없고 무질서해져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누구든 자랑하고 나면 스스로 우월감을 느끼게 된다. 상대적으로 그것을 들은 상대방은 열등감을 느끼게 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시기심과 질투심의 원천이 된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자랑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 시기심을 불러일으키니 자랑하는 것은 이처럼 진정 여러 면에서 좋지 않은 행동이다. 아마도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자랑하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고린도전서 14장 26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권면했다. 이 말씀을 잘 풀이해 보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민낯이 드러난다. 그들은 함께 모였다. 함께 모였지만 사실 그들은 하나 되지 못해 제각각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는 열광적으로 찬송을 부르고 그에 뒤질세라 다른 누군가는 성경 말씀을 큰소리로 가르치려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또 스스로 계시를 받았다고 큰소리를 치는 사람도 있었으며 어떤 누군가는 자기는 방언을 한다고 떠들었다. 거기에 또 다른 이는 방언을 통역한다고 큰소리로 말했을 것이다. 얼마나 무질서하고 소란했을까? 도무지 덕(德)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아마도 서로서로 “너만 은사 받았냐? 나도 은사 받았다!”고 뽐내면서 자신이 받은 은사를 자랑하고 과시하려고 하다 보니 교회공동체가 덕이 없이 무질서했을 것이다. 성령 충만으로 실천하는 사랑은 결코 그 무엇도 뽐내며 자랑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모습을 한 번 살펴보자. 주님은 사실 자랑할 모든 것을 갖추신 분이셨다. 그럼에도 단 한 번도 자랑치 않으셨다. 예수님은 많은 기적을 행하셨으나 결코 자기 스스로 영광을 받지 않으셨다.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영광을 돌리셨다. 심지어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하실 때도 스스로 높여 말씀치 않으셨다. 언제나 하나님이 주신 말씀만 전한다고 말씀하셨다(요 12:49).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해야 할까? 우리도 스스로 자랑하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할 수 있기를 소망하며 스스로를 자랑할 그 시간에 다른 사람을 칭찬하려 노력하기를 바란다.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하지 말며 외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하지 말지니라”(잠 27:2).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3.02.17

    (132)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45>
  • 스스로 높아져 자랑치 말고 우릴 구속하신 예수님만 자랑해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아마도 고린도 교인들은 자랑하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자신에게 침례를 베푼 사도들을 자랑했고 신령한 은사들을 자랑했다. 이를 지적하며 사도 바울은 고전 1장에서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며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했다(고전 1:29~31). 아무리 세상 것을 자랑해도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속담처럼 세상에는 나보다 더 큰 자랑거리를 가진 사람이 분명히 있다. 스스로 가진 것이나 이룬 것 자랑치 말고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속하신 예수님만을 자랑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내신다(고전 1:26). 다시 말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육체라도 자랑치 못하도록 연약한 우리를 택하신 것이다. 고린도전서 4장 7절은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라고 기록한다. 이것은 ‘나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졌다’고 자랑치 말라는 의미다. 사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에 어떤 자랑도 헛되다. 인생들이 주로 자랑하는 것은 돈·명예·자식·권력·힘 같은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그 가치가 오래 보존되지 않는다. 육체적이며 세속적인 가치는 그 한계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가치를 자랑할 수 없는 사람은 육체적인 가치라도 자랑하며 살 수밖에 없다. 자랑은 영적이기 보다는 육적인 것으로 성경은 기록한다(갈 6:13). 이처럼 자랑은 헛된 것이 대부분이다. 진정 가치 있는 것은 자랑치 않고 자랑할 필요도 없으며 오히려 자랑하면 어색하고 그 가치를 추락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령 충만한 성도들은 스스로 약하고 부족한 것을 채우신 예수님만 자랑해야 한다. 우리들의 입에는 하나님 자랑하는 이야기, 예수님 자랑하는 이야기, 성령님 자랑하는 이야기, 우리 교회, 우리 담임목사님 자랑하는 이야기, 성도 자랑하는 이야기 그리고 온전히 예수님을 믿어 복을 받은 이야기만 가득해야 한다. 이를 통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야 복을 받고 병이 나으며 예수님을 믿어야 천국에 가는 거구나 이제 나도 예수님을 믿어야 겠다” 고백하며 교회를 찾아오게 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번성하고 더불어 예수님이 영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 충만한 성도의 본분이다(갈 6:14).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3.01.13

    (131)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44>
  • 힘써 자신의 강함을 자랑치 않고 스스로 약함과 낮아짐만 자랑해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을 사용한 것을 보니 ‘자랑하는 일’은 성령 충만한 성도들에게 권장할 만한 일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일반적으로 자랑하는 것의 그 밑바탕에는 허영과 교만이 자리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자랑을 하게 되면 누군가와 자신을 견주어 비교하고 저울질하므로 저절로 시기심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설사 자랑하는 사람은 그런 의도와 동기가 없다고 해도 어떤 자랑이든 상대방에게는 절망감 혹은 시기와 질투를 유발한다. 예를 들면, 우리 아들이 공부를 잘한다고 자랑하면 다음 날 옆집 아이의 얼굴이 구겨져 있기 쉽고, 우리 남편이 잘해준다고 자랑하면 그날 저녁 옆집 부부의 다툼 소리를 듣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자랑하는 것은 상대적이고 경쟁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자랑하는 사람은 그것을 듣는 이들 모두에게 ‘공공의 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예수님은 어떠셨는가?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6~28)고 가르치시며 스스로 높아지는 자랑이 아닌 스스로 낮아지는 섬김을 몸소 실천하셨다. 성령 충만한 성도들은 스스로 높이는 ‘자기’ 중심이 아닌 먼저 서로를 섬기는 ‘주님’ 중심의 교회를 만들기 위해 헌신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전 1:31; 고후 10:17)고 말씀했다. 주안에서 자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첫째, 스스로의 이름을 내세우기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해야 하고(대상 16:10; 시 20:7; 44:8; 105:3), 둘째, 세상의 것 세상의 일에 대해 자랑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 자랑해야 한다(롬 15:1; 살전 2:19; 고후 1:14). 셋째, 그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해야 하며(갈 6:14) 넷째, 힘써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지 않고 스스로 약한 것과 낮아진 것만을 자랑해야 한다(고후 11:30; 고후 12:5,9; 약 1:9~10). 이처럼 우리는 스스로 약하고 부족함을 고백하고 그 부족함을 채우시는 예수님을 자랑해야 한다. 우리들의 입에는 하나님만 자랑하는 소리 예수님만 자랑하는 소리 성령님만 자랑하는 소리 십자가만 자랑하는 소리 교회를 자랑하는 소리 성도들 간에 서로를 높이고 자랑하는 소리 예수님을 믿고 복을 받아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 되며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게 됐다는 ‘거룩한 자랑’만이 넘쳐나길 소망한다(요삼 1:2). 김에녹 목사
  • 2022.12.16

    (130)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43>
  • 자기 자랑으로 충만한 삶이 아닌 성령 충만의 삶 살아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무엇보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신실한 성도들은 자랑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현대 사회는 각종 광고로 넘쳐나고 있다. 조금만 눈을 돌려도 여기저기 광고가 눈에 띄고 듣고 싶지 않아도 각종 광고의 소리에 묻혀 살아간다. 각종 방송매체를 통한 온라인 광고는 물론이요 거리 곳곳마다 건물마다 현란한 광고로 요란하다. 현시대는 범람하는 광고들에 휩쓸려 사는 ‘광고 홍수의 시대’라 정의할 수 있다. 이런 넘쳐나는 광고는 비단 기업들의 광고 전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각종 인터넷 플랫폼과 사회관계접속망(SNS)을 통해 자신의 외모나 재능 그리고 사생활까지도 당당하게 노출해 광고하는 개인들도 많아졌다. 현시대는 자기를 드러내는 ‘자기 광고의 시대’임에 분명하다. 물론 이런 것이 모두 부정적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상업적이고 자극적으로 변질해 가는 것은 우려할 만한 상황임에 틀림없다. 심리학에서 어떤 개인의 심리상태를 측정하는 방법 중에 일정한 시간 동안 그 대상자의 연설 대화 혹은 일정한 길이의 문장에서 ‘나’라는 단어를 얼마나 자주 사용하는지 그 횟수를 측정하는 조사법이 있다. 이에 따르면 ‘나’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사람일수록 그 심리상태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성향이 두드러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한 언어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600만명 이상의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A. Hitler, 1889~1945)는 ‘나’라는 단어를 53단어에 한 번씩 사용했고, 그의 동조자였던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B. A. A. Mussolini, 1883~1945)는 ‘나’라는 단어를 83단어에 한 번씩 사용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나’로 충만했던 두 독재자가 일으킨 전쟁이 온 세계를 절망의 소용돌이로 몰고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눅 12:16~21)를 살펴봐도 부자의 언어인 짧은 3개의 절(눅 12:17~19)에 ‘내가, 내’라는 자기중심적 단어가 6번이나 등장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자기중심적 삶의 결과는 과연 무엇일까? 독특하지만 의미심장한 분석을 본적이 있다. 영어에서 ‘죄’를 의미하는 단어 ‘sin’의 중심에는 ‘나’를 의미하는 단어 ‘i’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죄는 자기중심적인 ‘자기 충만’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중심이 아닌 ‘내가’ 중심이 되는 것이 ‘죄’의 시작이라는 의미이다. 제일 무서운 우상은 바로 ‘나’라는 우상이다. 성도는 세상 풍조를 따라 ‘자기 충만’으로 살지 말고 말씀을 따라 ‘성령 충만’의 삶을 살아야 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김에녹 목사
  • 2022.11.18

    (129)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42>
  • 인간의 모든 자랑은 허무하고 허망한 희망 없는 그림자 같아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무엇보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신실한 성도들은 자랑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성도가 자랑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신의 힘 혹은 강함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나름대로 훌륭한 삶을 살던 사람이 무너지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자기 자랑’ 때문인 경우가 많다(렘 9:23~24). 그 대표적인 인물이 유다의 왕 히스기야다. 그는 바벨론의 사자에게 자랑하기 위해 자기의 보물고를 열어 자랑 하다가(왕하 20:13) 결국 모든 보물이 바벨론으로 옮겨지는 수치를 당하게 되었고, 자손 중에 몇몇은 바벨론의 환관이 됐다(사 39:1~7).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죽음에서 구원을 얻고 생명을 15년이나 연장받은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신의 힘을 과시한 결과였다. 둘째, 어떤 권력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했다(롬 13:1). 그런 이유로 세상의 모든 권력자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겸손히 그 분을 경외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 권력가는 결국 변질돼 교만하게 우쭐대다가 자기도 망하고 백성들도 망하게 한다. 남이 나를 높여 주면 권위가 되지만 스스로 자신을 높이면 권위주의가 된다. 권위는 신뢰를 얻지만 권위주의는 불신을 낳는다(잠 27:2; 시 52:1). 권력자들은 자신에게 아첨하는 입술과 스스로의 권력을 자랑하는 것 두 가지 모두를 조심해야 한다(고전 3:21). 스스로를 살아있는 신(神)으로 여겨 교만했던 헤롯 왕은 그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그를 쳐서 충이 먹어 죽게 됐다(행 12:21~23). “야훼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시 12:3). 셋째,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잠언 27장 1절은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기록한다. 야고보서 4장 13~14절은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기록하며 안개 같은 인생의 허무함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도 한 부자의 비유를 통해 유한한 인간이 장래 일을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가르치셨다(눅 12:16~21). 이렇듯 인간의 모든 자랑은 허무하고 허망한 희망 없는 그림자와 같다(대상 29:15; 고전 3:19~21). 김에녹 목사
  • 2022.10.14

    (128)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41>
  • 허탄하고 악한 자랑은 스스로 올무와 함정에 빠지게 만들어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특히 ‘자랑’은 그 특성상 풍선처럼 부풀려 과시하며 말하게 되는 습성이 있어 자주 문제가 발생한다. 자신의 실력을 자랑하거나 과시하려고 허위로 자신의 이력이나 경력을 부풀려 기록했다가 망신을 당하는 유명 인사들의 이야기는 일일이 나열하기조차 흔한 일이 돼버렸다. 그들의 결말은 너무나 부끄럽고 비참하다. 이처럼 성경은 ‘이생의 자랑’은 세상적이요 정욕적이고 악마적이라고 말씀하며(요일 2:15~16), 이러한 자랑은 허탄한 자랑이며 악한 것이라고 기록한다(약 4:16). 사슴 한 마리가 숲속의 샘에서 물을 먹는데 물에 비친 자기 자신을 보니 뿔이 얼마나 장엄하고 훌륭한지 스스로 감탄하고 있었다. 이와 달리 얇은 다리를 보니 너무 볼품이 없어 불만이었다. 다른 동물들 앞에서도 뽐을 내며 자신의 뿔을 자랑하고 있을 때, 갑자기 사자 한 마리가 덤벼들었고 사슴은 필사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사자도 빠르지만 평지에서 뛰는 것은 사슴에게 당할 수가 없었다. 끝까지 사자가 쫓아오자 사슴은 울창한 숲으로 숨어들었다. 아뿔사, 그것은 실수였다. 울창한 나뭇가지에 사슴이 그렇게 자랑하던 뿔이 걸리고 말았다. 사슴은 스스로 뽐내던 장엄한 뿔 때문에 결국 사자에게 잡아먹혔다. 누구든지 자랑을 하다 보면 그것의 올무에 걸리고 스스로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이목구비도 수려하며 특히 그 머릿결은 여느 여자들보다 아름답고 탐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렇게 잘 난 것을 감사히 여기고 아버지 다윗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했으면 좋았으련만 그는 반란의 우두머리가 돼 아버지 다윗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반역을 꾀했다. 어느 날 아버지를 쫓아가다 그 탐스러운 머리채가 상수리나무에 걸리게 됐다. 결국 타고 가던 노새만 빠져나가고 나무에 매달려 버둥거리고 있는데, 때마침 다윗의 장수 요압의 군사들이 발견했고 그를 쳐 죽이고 말았다(삼하 18:1~18). 허탄한 자랑이 그를 죽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하고 사랑이 넘치는 성도들은 자랑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야훼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야훼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야훼의 말씀이니라”(렘 9:23~24).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2.09.16

    (127)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40>
  • 십자가 사랑 체험해 성령 충만한 성도는 결코 자기를 자랑치 않아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자랑하다’를 의미하는 헬라어 원어 ‘페르페류오마이’는 보다 쉬운 의미로 ‘풍선처럼 부풀려 말하다’라는 뜻과 ‘무익한 잡담을 하다’라는 뜻을 지닌다. 타락한 인간 본성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고무풍선처럼 부풀려 과시하기를 좋아한다. 자기를 자랑하며 잘난척함을 의미하는 우리말 ‘뻐기다’는 ‘우쭐대며 자랑하다’라는 뜻을 잘 드러낸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자랑은 자신의 열등한 부분을 감추려 하는 무의식적 행동’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 진정한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해 성령 충만한 성도들은 결코 자기를 자랑하지 않는다(갈 6:14). 세계정복을 꿈꿨던 나폴레옹의 몰락을 가져왔던 워털루 전투(1815년)의 영웅 웰링턴(A. Wellesley, 1769~1852) 장군이 승전기념 파티를 열었다. 함께 공을 세운 육해공군의 장군들이 모두 모였다. 우쭐해진 웰링턴은 참석자들에게 보석이 촘촘히 박힌 자신의 지갑을 자랑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방금까지 있던 지갑이 사라졌다. 깜짝 놀란 웰링턴은 “이 방에 내 보석 지갑을 훔친 범인이 있다. 어서 문을 닫아라!”라고 소리쳤다. 순간 참석자들은 소지품 검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때 한 노(老) 장군이 소지품 검사를 반대하며 황급히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결국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던 그가 범인으로 소문이 났다. 1년 후에 다시 파티가 열렸다. 1년 만에 파티 외투를 입던 웰링턴은 깜짝 놀랐다. 도둑맞은 줄 알았던 보석 지갑이 외투 주머니에 있었던 것이다. 웰링턴은 황급히 그 노장군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왜 소지품은 검사를 거부했는가?” 노장군은 “사실 그날 밤 아내와 아이들이 집에서 굶고 있었고, 제 주머니에는 가족에게 줄 빵 몇 조각이 들어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답했다. 그 말에 웰링턴은 눈물을 흘리며 하며 다시 용서를 구했다. 자신이 호화스런 잔치를 여는 동안 부하의 가족은 굶주림으로 고통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웰링턴은 그 어떤 것도 자랑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도 여러 가지 고난을 겪고 있는 이들을 생각하며 자랑치 않음으로 참된 사랑을 실천하길 소망한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약 1:9~11).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2.08.19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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