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 순복음
(165)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78>
  • 자녀는 부모와 동등한 인격체 례함 아닌 존중으로 대해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 교만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2025년 4월 여성가족부는 ‘2024년 위기청소년 지원기관 이용자 생활실태조사’의 결과를 발표했다. 위기청소년 실태조사는 3년마다 실시하는 국가승인 통계자료로, 청소년 상담복지센터·청소년쉼터 등을 이용한 만 9세에서 18세 이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조사이다. 이 결과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가출해본 적이 있다’는 응답자는 27.7%, ‘최근 1년간 가출해봤다’는 응답자는 20.0%였다. 위기청소년은 가출의 이유에 대해 ‘가족과의 갈등(69.5%)’, ‘자유로운 생활(34.3%)’, ‘가정폭력(26.3%)’ 등을 꼽았다. 특히 가족과의 갈등과 가정폭력의 주 상대자는 다름 아닌 부모였다. 일반적으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 ‘무례하다’라고 하는 말은 주로 자녀들에게 붙인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함부로 대하는 것을 무례하다고 하며 이는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자녀의 무례함 못지않게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부모의 무례함이다. 사실 부모는 사랑이라는 이유로 자녀들에게 무례하게 행할 때가 너무 많다. 자녀는 애완동물이 아니며 자신의 의지와 생각, 그리고 감정을 소유한 부모와 동등한 인격체다. 인격체에게 필요한 것은 무례함과 강압이 아니라 존중과 대화이다. 안타깝게도 부모는 때때로 이런 자녀들의 인격을 무시하기가 쉽다. 자녀를 자기 소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게 자녀에게 ‘내가 낳았고, 내가 모든 정성과 희생을 쏟았고, 또 내가 너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강요한다. 문제는 이런 부모들의 사랑을 자녀들은 부당하다고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청소년의 70%가 ‘부모를 미워한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설문조사에 따르면 ‘자녀들을 사랑합니까’라는 질문에 99%의 부모들은 ‘그렇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대답한 부모의 자녀들에게 ‘당신의 부모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질문했더니 단지 33%만이 ‘그렇다’고 대답했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부모와 자식들 사이의 이러한 66%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부모의 사랑이 자녀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그 결정적 원인은 바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녀에게 행해진 부모의 무례함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 4절에서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며 부모들에게 교훈한다.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인격이 무시당한다고 느낄 때이다. 진정한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으며 이것은 자녀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자녀를 사랑한다면 절대로 무례히 행해서는 안 된다. 무례한 사랑은 사랑을 가장한 학대이기 때문이다.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5.10.17

    (164) 순복음의 7대 신앙-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77>
  • 익숙하고 편한 부부 관계일수록 더욱 예의를 지키고 배려해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 교만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통계청이 발표한 ‘2024년 혼인·이혼 통계’에 따르면 결혼한 지 30년 이상인 부부의 이혼이 최근 10년 새 47%가량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이혼 건수는 9만1151건으로 전년에 비해 1.4% 감소했지만 결혼 기간이 30년 이상인 부부의 이혼은 1만5128건으로 334건(2.3%) 늘었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무려 46.6%(4809건)나 증가한 것이다. 물론 30년 이상 부부의 이혼은 고령인구가 늘어난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하지만 이혼 부부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오랜 갈등이 자녀의 성장 및 독립과 더불어 폭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발표한 이혼 상담 이유로 여성은 남편의 폭력 등 부당대우, 장기별거, 성격차이, 경제갈등, 남편의 외도 등이 많았고 남성은 장기별거, 성격 차이 등이 주요 이유였다. 남편이 은퇴로 돈을 벌지 못하자 아내가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 취급했다는 상담 내용도 있었다. 부부간의 사랑은 자칫 잘못하면 무례한 사랑이 되기 쉽다. 때로 부부간의 약속은 잘 안 지켜도 된다고 생각해서 다른 중요한 약속이 생기면 부부간의 약속은 항상 뒷전으로 밀린다. 또한 사랑하고 친숙해졌다는 이유로 무례한 말도 서슴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면서 ‘부부니까’ 이해해 주리라 믿으며 안심한다. 다른 이들에게는 신사나 숙녀처럼 예의 바르고 잘 배려하면서 가장 소중하고 아껴야 할 배우자에게는 무심하고 배려에 인색한 경우도 많다. 한 번 스쳐 지나갈 낯선 타인에게는 깍듯이 예의를 지키면서도 평생을 함께해야 할 내 아내, 내 남편에게는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은 진정 어리석고 미련한 행태가 아닐 수 없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 연구팀에 따르면 스스로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물러서는 부부일수록 순조로운 결혼 생활을 더 오랫동안 지속한 것으로 조사됐다. 다시 말해 성공적인 결혼 생활에는 “고마워” 못지않게 “미안해”라는 말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남편이 “미안해”라는 말을 자주 할수록 부부의 행복도와 결혼 만족도가 높아졌다. 연구팀은 부부 사이에 “미안해”라는 말은 단순한 ‘사과’가 아니라 지혜로운 ‘투자’라고 강조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상처 입은 사람에게 보내는 러브레터이며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가장 용감한 사람, 먼저 용서하는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라고도 했다. 상대방을 무시하고 무례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안하다”고 사과하기가 힘든 것이다. 예의 없는 사랑이 서로의 관계를 힘들게 한다. 그것은 무례한 행위 그 자체보다도 상대방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대한 상처가 더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나부터 먼저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내보는 것은 어떨까? 성령 충만한 믿음의 부부들이 모두 행복하기를 소망해 본다.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5.09.19

    (163)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76>
  • 참된 사랑은 그 누구에게라도 무례히 행하거나 소홀히 대하지 않아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 교만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하루는 시몬이라 불리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청했고 예수님은 그 초대에 응해 그 집에 들어가 앉으셨다. 때마침 그 동네에 살던 한 여인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왔다. 성경에는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기록돼 있다. 추측하기는 아마도 몸을 파는 창기였을 것이다. 그 여인은 먼저 자신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셨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냈다. 뒤이어 그 발에 입을 맞추더니 값비싼 향유를 그 발에 부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집주인 바리새인 시몬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그런 죄지은 여자가 자기의 집에 들어온 것조차도 탐탁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만일 이 사람이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라고 생각하였다(눅 7:36~39). 그 순간 이미 시몬의 생각을 간파하신 예수님은 시몬이 그 여인에게 무례히 행하기 전에 먼저 이렇게 물으셨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그러자 시몬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많이 탕감을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대답을 들으시고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네 판단이 옳도다.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인은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인은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다(눅 7:40~50). 바리새인 시몬은 율법의 눈으로 그 여인을 판단하고 무시했다. 그에게는 율법의 기준과 잣대는 있었으나 사랑과 긍휼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예수님은 사랑으로 그 여인을 감싸 주셨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불쌍한 여인을 시몬의 무례함에서 건져주신 것이다. 더불어 예수님은 바리새인 시몬 앞에서 다음과 같이 그 여인을 칭찬해 주셨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예수님은 참된 사랑으로 자신을 섬겼던 그 여인을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해 주셨다. 이처럼 사랑은 아무리 하찮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 비록 그가 흉악한 죄인이라도 말이다. 진정한 사랑은 누구에게도 무례히 행치 않는다. “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라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만으로 행함이니라”(잠 21:24).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5.08.22

    (162) 순복음의 7대 신앙-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75>
  • 예수님처럼 공손하며 언행에 무례함이 없어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 교만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참된 사랑은 절대로 무례히 행치 않는다. 이 말씀을 몸소 행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라고 기록한다. 이렇듯 예수님은 언제나 “내가 너한테 들어가도 되겠니?”하고 노크를 하시며 정중하고 친절하게 모든 이들을 대하는 분이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에게도 절대 무례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으셨다. 병든 사람에게, 고난받고 외로운 이들에게, 주리고 목마른 이들에게, 귀신 들린 이들에게 먼저 찾아와 주셨다. 무조건 자신을 따르고 믿으라고 명령하고 윽박지르지 않으셨다. 위로하시며 고쳐주시고 친구가 되어주시고 배불리 먹이시고 친히 귀신을 쫓아내셨다. 결국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저절로 그분을 따를 수밖에 없도록 만드셨고 절로 고개를 숙이도록 이끄셨다. 세상 사람들은 서로에게 함부로 대하고 사랑이 없어 무례히 행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앞세워 무례하고 지배적이며 폭력적이고 공격적으로 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 특히 함부로 반말을 내뱉고 말로 상처를 주고 무례히 행하는 것은 성령 충만하고 사랑이 넘쳐야 할 성도들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예수님처럼 누구에게든 공손하고 상대방을 높여 존중하며 무례함 없이 친절하게 정중한 태도로 대해야만 한다. 경북 예천군 대죽리 마을에는 언총(言塚)이라고 불리는 500년의 역사를 가진 고분(古墳)이 있다. 그 뜻은 입에서 나오는 ‘말의 무덤’이라는 뜻이다. 오래전 그 마을에 살던 여러 문중이 크게 싸웠는데 그 발단은 사소한 말 한마디였다고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들은 ‘말의 무덤’을 만들었다. 이웃을 향한 험담과 비방이나 원망과 불평이 담긴 거친 말이나 욕설을 사발에 뱉어 담은 후에 그 나쁜 말들에 대한 장례를 치르고 그것을 땅에 묻어 무덤을 만든 것이다. 상징적인 행동이었지만 놀랍게도 그 이후 더 이상 거칠고 부정적인 말들을 하지 않으려 노력한 결과 그 마을은 평화를 되찾았다. 이처럼 혀를 길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항상 긍정적이고 무례하지 않고 예의 바른 언어생활을 위해 노력하며 입술의 파수꾼을 붙여달라고 기도해야 한다(시 141:3). 거칠고 무례해 후회될 말이나 누군가를 낙심케 하는 부정적인 말은 입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한다. 거룩한 성도의 언어는 생명과 진리의 언어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며 범사에 은혜와 감사의 말로 온전해 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약 3:2).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5.07.18

    (161)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74>
  • 무례함의 기준은 나 자신이 아닌 상대방, 항상 조심하며 살펴 행동해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 교만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무례히 행하지 않으려는 행동은 존중과 배려로 가득 찬 선한 마음을 의미한다.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은 예의 바르다는 의미이고 그것은 경솔하거나 가볍지 않고 깊이 있는 행동을 의미한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가볍게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밖에 없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무례히 행치 않는 ‘예의 바름’을 사랑의 한 모습으로 이해하고 가르치고 있다. 다시 말해 사랑하면 상대를 대할 때 예의 바르고 따뜻하며 정중하게 행동하게 된다. 그런 예의 바른 행실을 통해 사랑의 마음이 전해지고 표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례히 행하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그것은 상대가 싫어하고 불편하게 여기는 행동이나 기분을 상하게 하는 행동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무례함의 기준이 나 자신이 아닌 상대방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경우든 상대가 무례히 여겨졌다고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예의 바름의 기준은 곧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진실한 배려의 마음으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무례히 행치 않으려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참된 사랑의 모습이다. 사도 바울은 왜 무례히 행치 않음을 사랑으로 보았을까? 당시 고린도 교회의 모습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초대 교회 시대의 성만찬 식사는 지금의 성만찬 의식과는 달리 규모가 큰 공동체의 식사였다. 문제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성도가 교회에서 그 식사에 참여하고 싶어도 그들에게까지 차례가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빈번했다. 소위 교회의 지도자급 성도들, 즉 지금으로 치면 제직들이 앞에서 먼저 배부를 정도로 음식을 다 먹고 성만찬 포도주도 취할 정도로 마셔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한 모습을 보며 바울은 그들의 무례함을 곧 사랑이 없는 모습으로 이해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1장 34절을 통해 바울은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고 책망하며 그런 행동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사랑이 없어 무례히 행하는 그 모습으로 그 모임이 심판받지 않기를 바란다고 엄중히 경고한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비판과 경고는 현재의 교회에도 유효하다. 교회가 무례히 행하면 비판받는 모임이 될 수 있다. 교회와 성도들은 진정 무례히 행치 않고 치열하고 치밀하게 빈틈없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행하고 실천해야 한다. 성령 충만한 교회와 성도는 마치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성령의 공동체처럼 무례히 행치 않는 사랑의 모습으로 세상의 칭송을 받아야 한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6~47).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5.06.20

    (160) 순복음의 7대 신앙-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73>
  • 절대로 작은 말로라도 상처 주거나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이 참된 사랑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 교만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무엇보다 서로 주고받는 말 즉 언어로 무례히 행치 않아야 한다. 언어에 예의가 있어야 한다. 자기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후배라고 직급이 낮다고 함부로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요 그 사람의 인격에 손상을 주는 일이다. 지위와 명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말을 부드럽고 예의 있게 하면 훨씬 더 존경을 받게 된다. 입술에서 나오는 말에서 그 사람의 가치와 품격이 가장 잘 나타나는 법이다. 때로 대화 시에 상대방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말을 가로채거나 막아버리는 경우가 있다. 조용히 해야 할 곳에서 남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음을 일으키는 사람도 있다.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먼저 남을 배려하고 생각하는 것이고, 참된 사랑은 작은 말에서부터 드러난다.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말을 함부로 하고 싶어질 때 그 상대방의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를 대하든지 주를 대하듯 해야 한다(골 3:23). 예수님께서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고 하셨으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마 10:42)이라고 말씀하셨다. 성령 충만한 성도는 예의 바른 언어생활에서부터 무례히 행치 않아야 한다. 진정한 사랑은 절대로 무례히 행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로 지나가는 말로 아무 생각 없이 말을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사람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때가 있다. 옛말에 “말한 입은 사흘이요, 듣는 귀는 천년이다”라는 말이 있다. 말한 입은 사흘도 못가서 말한 것을 잊어버리지만 그것을 들은 귀는 그 들은 것을 천 년 동안 기억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따뜻한 말, 위로의 말 그리고 좋고 고운 말 한마디는 누군가의 가슴에 씨앗처럼 떨어져 위로와 용기로 싹트게 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늘나라의 왕자요 공주들이다. 성경은 성도들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택한 천국의 백성이며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리고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대사라고 말한다. 바울은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 1:27)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이기에 오히려 더 예의 바른 언어로 삶의 규모와 특성을 아름다운 입술의 말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아름답고 향기 있는 삶은 주님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려는 주님께 대한 애정 그리고 이웃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그리스도인의 덕을 세우려는 간절한 사랑에서만 비롯될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은 절대로 작은 말로라도 상처 주거나 무례히 행치 않아야 한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5.05.16

    (159)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72>
  • 무례히 행함은 절대로 사랑이라 말할 수 없어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 교만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진정한 사랑은 절대로 무례히 행치 않는다. ‘무례히 행치 않는다’는 원어적으로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고전 7:36)라고도 번역되며 이것은 예의에 어긋난 거친 행동을 의미한다. 이를 토대로 원문을 다시 번역하면 ‘사랑은 다른 이에게 책망을 받을 만한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혹은 ‘사랑에 어울리지 않게 무례히 행치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사실 ‘무례한’ 행위는 자기를 높이기 위해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려는 마음 즉, 교만에서 나오는 행위이다. 그런 이유로 마음이 교만해 무례한 사람의 행동은 불의하고 불손하며 질서에서 이탈해 버릇없이 행하는 방자한 모습이다. 정말 나쁜 경우는 바로 자신보다 약한 자들에게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자기보다 강한 자들에게는 꼼짝하지도 못하면서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약하다고 생각되면 무례하게 행하는 사람은 진정 참된 사랑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안타깝게도 어떤 사람들은 입으로는 끊임없이 사랑을 외치면서 행동은 상대방을 무례히 대하며 고통을 주고 힘들게 하기도 한다. 그것은 스스로 자신만의 착각에 빠져 사랑이라는 허울 좋은 말로 자기를 합리화하며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괴롭히는 것이다. 어떤 이유로도 무례히 행하는 것은 사랑이라 말할 수 없다. 무례히 행함은 사실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겨준 본분과 위치 그리고 자리에 맞게 사랑을 나타내야 한다. 부모는 부모답게 자녀는 자녀답게 스승은 스승답게 제자는 제자답게 남편은 남편답게 아내는 아내답게 사랑하며, 목회자는 목회자로서 평신도를 사랑하며 평신도는 평신도로서 목회자를 사랑해야 한다. 무례히 행치 않는 사랑은 사랑 안에서의 질서를 의미한다. 사랑은 절대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정한 아가페 사랑은 놀라운 질서를 통해 드러난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으며”라는 말씀은 그래서 예의 바르고 정돈된 질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어가라는 중요한 요구이다. 이러한 모습은 모세를 통해 잘 드러난다. 출애굽기 33장 11절은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야훼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라고 기록한다. 하나님은 친구처럼 모세를 대하셨지만 모세는 단 한 번도 하나님께 대해 무례히 행치 않았다. 이처럼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는 이 세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매우 독특한 사랑의 관계이다. 그 사랑은 거룩한 두려움과 함께 공존하는 사랑이다. 죄인이며 피조물이라는 자기 위치를 지켜가며 하나님과 연합된 존재로서의 사랑을 누리는 이들이 바로 우리 성도들이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거룩한 삶을 살고,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를 항상 지켜 머물며, 올바른 방식으로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성도의 본분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5.04.18

    (158)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71>
  • 세상 사람들보다 한층 더 예의 바른 삶으로 그리스도의 사랑 드러내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 교만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우리말 ‘예절’을 표현하는 영어 표현 중에 ‘코터시’(courtesy)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본래 “궁중 혹은 왕에게 초대받은 자의 예의범절”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실 혹은 궁중의 예절은 매우 어렵고 엄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강화도령으로 유명했던 철종도 왕세자 시절 궁중 예절을 지키기가 너무 어려워서 “나 왕세자 안하고 강화도로 돌아가겠다”고 몇 번씩이나 고충을 토로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처럼 궁중의 예절과 법도를 배우고 익히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다고 한다. ‘예절’을 표현하는 또 다른 영어 단어 중에 ‘에티켓’(Etiquette)이 있다. 예의범절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두고 흔히 ‘에티켓이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어원적으로 보면 이 단어는 ‘정하다’라는 뜻의 고대 프랑스어 ‘에쓰띠께’(estiquer)에서 나온 말이다. 이 동사에서 파생된 ‘에쓰띠껫뜨’(Estiquete)는 ‘정해진 것’을 가리켰고, 이것이 영어로 차용되면서 지금의 ‘에티켓’이 된 것이다. 처음 그 단어는 물건에 사용됐다. 어떤 물건이 정해지면 그것에 일종의 꼬리표를 붙여 나머지 것들과 구별했는데 이때 사용한 종이 혹은 천 조각 그리고 작은 나무 팻말 따위를 ‘에쓰띠껫뜨’라고 불렀다. 이 단어가 출현한 14세기에는 주로 법률 용어로 쓰였다. 이 말이 프랑스어로 ‘궁중의 예식’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14~15세기의 부르고뉴(Bourgogne) 궁정 시대부터이다. 당시 프랑스의 국왕 못지않은 권세를 누리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부르고뉴 공(公) 필립 르 봉(Philippe le Bon)은 자신의 궁정에서 전례 없는 엄격한 언행과 예의를 강조하고 규율했다. 그 궁정의 사람들은 하루 동안 해야 할 일들을 일일이 적어 두고 스스로 언어와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고 전해진다. 또 다른 예로는 그 시절 프랑스 파리 교외의 베르사이유 궁전에 아름다운 화원이 있었다. 그곳에 잘 가꾸어 놓은 잔디와 꽃을 보호하기 위해 ‘출입 금지’ 푯말이 세워졌는데, 거기에 ‘에쓰띠껫뜨’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남의 일에 간섭하거나 남의 소유물에 손대는 것,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를 내거나 눈을 찌푸리게 하는 애정행각 등은 에티켓에 어긋난 행위가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에티켓에 어긋난 행위를 하는 사람은 신용 없고 믿을 수 없어 사귈 수 없는 사람 취급을 받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크리스천들은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대사이다(벧전 2:9). 크리스천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한층 더 예의 바른 삶의 규모와 특성을 몸소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이웃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그리스도인의 덕을 세우려는 간절한 사랑에서 비롯된다. 성령으로 충만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치는 성도는 절대로 무례히 행치 않는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 1:27).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5.03.21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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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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