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 순복음
(168) 순복음의 7대 신앙-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81>
  • 참된 사랑은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것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에 이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라는 문구의 의미는 ‘사랑은 자기의 유익에만 몰두하지 않는대’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그 어떤 상황에도 자기를 먼저 내세우지 않는 예의의 바탕이 되는 마음과 생각의 근본적인 태도를 묘사하는데,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다’라는 번역이 의미상으로 좀 더 가깝다. 하지만, 현시대의 상황과 문화를 고려해 볼 때,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와 스스로 세상 모든 것의 중심이 되려고 하는 ‘자기중심주의’라는 두 개념을 모두 포함해야만 될 것으로 보인다. 진정한 사랑은 욕망이 중심이 되는 전형적 ‘에로스’의 사랑과는 달리 자기희생을 근본으로 하는 ‘아가페적’ 사랑이다. 참된 사랑은 결코 스스로 자신의 만족을 위해 다른 사람을 ‘소유하려’ 들지 않는다. 연인, 부부, 부모, 자식 혹은 그 어떤 친근한 관계라 할지라도, ‘나는 너를 원해’라는 말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일종의 위험 신호일 수도 있다. 그러한 소유욕은 자기 유익의 충족 혹은 자기만족이라는 어긋한 바람에 위험할 정도로 바짝 붙어 항해하는 종류의 사랑이기 쉽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를 존중하고 지키기 위해 애를 쓰지만, 그러한 노력의 대가로 상대방을 통제하거나 억압하려 들지 않는다. 또한 참된 사랑은 결혼과 가족 안에 존재하는 여러 종류와 수준의 관계뿐 아니라, 교회 내에서나 삶의 다른 영역에 존재하는 관계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그것은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반영하는 것이다(롬 15:3).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발생한 문제들은 상당 부분 성도들이 이런 삶을 살지 못함에서 기인한다고 여겼다.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에 대한 나름의 방식을 고집하는 것(고전 10:24, 33), 주의 만찬에 서둘러 달려들거나 혹은 세심하지 못한 방식으로 주의 만찬을 ‘주관하는 것’(고전 11:21~22), 이미 말하고 있는 사람의 말을 막아서고 갑자기 자기가 받은 계시를 들이대거나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을 기회가 없을 정도로 자기 말만 길게 늘어놓는 것(고전 14:29~33) 등이다. 자신의 유익에 집착하는 이러한 모든 태도의 표현은 ‘다른 사람’을 그 자체로 자신과 동등한 권리를 지닌 사람으로 보지 않고 무시하는 것이다. 성령 충만하며 참된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는 그리스도가 행하셨던 것처럼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닌 다른 이들의 ‘유익’에 더 큰 관심을 가진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 15:2~3).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6.01.16

    (167)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80>
  • 사랑하는 관계에 금이 가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무례히 행하는 것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 교만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창조주 하나님도 피조물인 인간을 함부로 대하지 않으신다. 만일 하나님이 믿지 않는 이들에게 지옥에서 형벌을 받는 모습을 보여주시며 “이래도 나를 믿지 않을 거냐?”라고 말씀하시며 협박과 위협으로 신앙을 강요하셨다면, 정말 효과적으로 전도와 선교가 이뤄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곧 ‘사랑’이시기 때문이다(요일 4:8,16). 사랑은 절대로 무례히 행치 않음을 가장 잘 보여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들에게도 무례히 행치 않고 예의를 갖추신다. 예수님도 우리 마음의 문을 계속해서 두드리신다. 그분은 절대로 강력한 힘이나 능력으로 밀어붙이지 않으신다. 그분은 사랑으로 무례히 행치 않으시고, 우리가 반응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 주신다. 이처럼 우리도 사랑한다면 예의를 지켜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무례함이 가득하다. 무례함은 누구에게나 상처를 남긴다. 사랑하는 관계가 금이 가는 이유는 바로 ‘무례함’ 때문이다. 요즘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데이트 폭력’이 그러한 예이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아무렇게나 막 거칠게 대하고 폭력을 가하며 협박까지 해놓고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범죄이다. 어떤 이유로도 폭력과 억압은 참된 사랑일 수 없다. 진정한 사랑은 친절하게 배려하는 사랑이다. 참된 사랑은 절대로 무례히 행치 않는다. 많은 부부가 이혼하는 중요한 이유도 이러한 무례함과 깊은 관련이 있다. 사랑이 무례함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같이 살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신앙적 지혜가 필요하다. 무례함이 권리이고, 그것을 권력으로 여기는 세태를 따라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의 예절은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행동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의 변화된 행실을 따라 진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이다. 참된 예수님의 제자 된 성도는 절대로 다른 형제자매들에게 무례히 대하며 상처를 주지 않는다. 성도의 예절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과 참된 신앙적 영성의 중요한 요소이다. 이것은 단순히 예절의 문제가 아닌 영적인 문제이다. 이것은 교회를 온전하고 든든히 세우는 중요한 토대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지키는 중요한 도구이다. 만일 성도들이 일상의 삶에서 예절을 지키지 않고 무례하게 굴며 거칠게 행동한다면, 과연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전도하여 교회로 이끌 수 있겠는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제자로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절대로 무례히 행치 않는 성경적 예절을 심각하게 고민하며 존중과 배려를 실천해야 한다.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5.12.19

    (166) 순복음의 7대 신앙-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79>
  • 과격하고 무례한 부모의 훈육은 자녀에게 상처와 분노 남겨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 교만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부모들이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자녀가 자신들의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녀들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하나님의 기업이요 선물이다. “보라 자식들은 야훼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 127:3). 유대인의 교훈 중에는 “신(神)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드셨다”라는 말이 있다. 즉, 어머니는 신(神)의 대리자라는 의미이다. 그만큼 부모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자녀들을 기르는 중요한 사명을 위임받은 청지기이다. 청지기는 주인이 아니다. 하나님의 소유물을 자기 생각대로 함부로 대하거나 처리해서는 안 된다. 이후에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지 않으려면 맡겨주신 자녀들을 사랑으로 보듬으며 자녀에게 절대로 무례히 행치 말아야 한다. 시인이요 철학자였던 칼릴 지브란은 『예언자』라는 책에서 자녀에 대한 부모의 소유의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계한다. “당신의 자녀는 당신의 것이 아니다. 자녀는 당신을 통하여 나왔을 뿐 당신이 만든 것은 아니다. 비록 자녀는 당신과 함께 있지만, 당신의 소유물은 아니다. 당신은 자녀에게 당신의 사랑을 줄 수는 있지만 당신의 생각들을 줄 수는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녀는 스스로 생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녀의 몸을 머물게 할 수는 있지만, 자녀의 영혼을 머물게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녀의 영혼은 미래의 집에 살고 있으며, 당신은 꿈속에서조차 그곳에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자녀처럼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지만 자녀를 당신처럼 만들려고 하지는 마라. 위대한 생명은 뒤로 물러가지 않으며, 결코 어제에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녀를 훈육할 때 부모는 조심해야 한다.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무례히 행함은 옳지 않으며, 감정적으로 분노를 쏟아내도 안 된다. 어떤 부모는 성경이 매를 허락했다는 이유로 가혹하게 매를 들고는 자신은 성경대로 행했다며 합리화한다(잠 13:24). 물론 자녀를 양육할 때 때로는 엄한 훈육이 필요할 때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때에도 상황과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고 훈육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절대로 과격하고 무례하게 자녀를 몰아붙여 그 마음에 분노를 쌓이게 해서는 안 된다. 자녀를 위한 부모의 희생은 사실 자신들이 받은 은혜를 되돌려 주는 것이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부모들도 자신의 부모로부터 아낌없는 희생과 사랑을 받아 이만큼 성장했고, 받은 그 사랑을 다시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권리의식이 아니라 ‘내리사랑’이며 이는 하나님이 만드신 가장 숭고한 사랑의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5.11.14

    (165)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78>
  • 자녀는 부모와 동등한 인격체 례함 아닌 존중으로 대해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 교만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2025년 4월 여성가족부는 ‘2024년 위기청소년 지원기관 이용자 생활실태조사’의 결과를 발표했다. 위기청소년 실태조사는 3년마다 실시하는 국가승인 통계자료로, 청소년 상담복지센터·청소년쉼터 등을 이용한 만 9세에서 18세 이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조사이다. 이 결과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가출해본 적이 있다’는 응답자는 27.7%, ‘최근 1년간 가출해봤다’는 응답자는 20.0%였다. 위기청소년은 가출의 이유에 대해 ‘가족과의 갈등(69.5%)’, ‘자유로운 생활(34.3%)’, ‘가정폭력(26.3%)’ 등을 꼽았다. 특히 가족과의 갈등과 가정폭력의 주 상대자는 다름 아닌 부모였다. 일반적으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 ‘무례하다’라고 하는 말은 주로 자녀들에게 붙인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함부로 대하는 것을 무례하다고 하며 이는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자녀의 무례함 못지않게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부모의 무례함이다. 사실 부모는 사랑이라는 이유로 자녀들에게 무례하게 행할 때가 너무 많다. 자녀는 애완동물이 아니며 자신의 의지와 생각, 그리고 감정을 소유한 부모와 동등한 인격체다. 인격체에게 필요한 것은 무례함과 강압이 아니라 존중과 대화이다. 안타깝게도 부모는 때때로 이런 자녀들의 인격을 무시하기가 쉽다. 자녀를 자기 소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게 자녀에게 ‘내가 낳았고, 내가 모든 정성과 희생을 쏟았고, 또 내가 너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강요한다. 문제는 이런 부모들의 사랑을 자녀들은 부당하다고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청소년의 70%가 ‘부모를 미워한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설문조사에 따르면 ‘자녀들을 사랑합니까’라는 질문에 99%의 부모들은 ‘그렇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대답한 부모의 자녀들에게 ‘당신의 부모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질문했더니 단지 33%만이 ‘그렇다’고 대답했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부모와 자식들 사이의 이러한 66%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부모의 사랑이 자녀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그 결정적 원인은 바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녀에게 행해진 부모의 무례함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 4절에서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며 부모들에게 교훈한다.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인격이 무시당한다고 느낄 때이다. 진정한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으며 이것은 자녀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자녀를 사랑한다면 절대로 무례히 행해서는 안 된다. 무례한 사랑은 사랑을 가장한 학대이기 때문이다.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5.10.17

    (164) 순복음의 7대 신앙-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77>
  • 익숙하고 편한 부부 관계일수록 더욱 예의를 지키고 배려해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 교만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통계청이 발표한 ‘2024년 혼인·이혼 통계’에 따르면 결혼한 지 30년 이상인 부부의 이혼이 최근 10년 새 47%가량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이혼 건수는 9만1151건으로 전년에 비해 1.4% 감소했지만 결혼 기간이 30년 이상인 부부의 이혼은 1만5128건으로 334건(2.3%) 늘었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무려 46.6%(4809건)나 증가한 것이다. 물론 30년 이상 부부의 이혼은 고령인구가 늘어난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하지만 이혼 부부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오랜 갈등이 자녀의 성장 및 독립과 더불어 폭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발표한 이혼 상담 이유로 여성은 남편의 폭력 등 부당대우, 장기별거, 성격차이, 경제갈등, 남편의 외도 등이 많았고 남성은 장기별거, 성격 차이 등이 주요 이유였다. 남편이 은퇴로 돈을 벌지 못하자 아내가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 취급했다는 상담 내용도 있었다. 부부간의 사랑은 자칫 잘못하면 무례한 사랑이 되기 쉽다. 때로 부부간의 약속은 잘 안 지켜도 된다고 생각해서 다른 중요한 약속이 생기면 부부간의 약속은 항상 뒷전으로 밀린다. 또한 사랑하고 친숙해졌다는 이유로 무례한 말도 서슴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면서 ‘부부니까’ 이해해 주리라 믿으며 안심한다. 다른 이들에게는 신사나 숙녀처럼 예의 바르고 잘 배려하면서 가장 소중하고 아껴야 할 배우자에게는 무심하고 배려에 인색한 경우도 많다. 한 번 스쳐 지나갈 낯선 타인에게는 깍듯이 예의를 지키면서도 평생을 함께해야 할 내 아내, 내 남편에게는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은 진정 어리석고 미련한 행태가 아닐 수 없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 연구팀에 따르면 스스로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물러서는 부부일수록 순조로운 결혼 생활을 더 오랫동안 지속한 것으로 조사됐다. 다시 말해 성공적인 결혼 생활에는 “고마워” 못지않게 “미안해”라는 말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남편이 “미안해”라는 말을 자주 할수록 부부의 행복도와 결혼 만족도가 높아졌다. 연구팀은 부부 사이에 “미안해”라는 말은 단순한 ‘사과’가 아니라 지혜로운 ‘투자’라고 강조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상처 입은 사람에게 보내는 러브레터이며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가장 용감한 사람, 먼저 용서하는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라고도 했다. 상대방을 무시하고 무례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안하다”고 사과하기가 힘든 것이다. 예의 없는 사랑이 서로의 관계를 힘들게 한다. 그것은 무례한 행위 그 자체보다도 상대방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대한 상처가 더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나부터 먼저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내보는 것은 어떨까? 성령 충만한 믿음의 부부들이 모두 행복하기를 소망해 본다.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5.09.19

    (163)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76>
  • 참된 사랑은 그 누구에게라도 무례히 행하거나 소홀히 대하지 않아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 교만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하루는 시몬이라 불리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청했고 예수님은 그 초대에 응해 그 집에 들어가 앉으셨다. 때마침 그 동네에 살던 한 여인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왔다. 성경에는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기록돼 있다. 추측하기는 아마도 몸을 파는 창기였을 것이다. 그 여인은 먼저 자신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셨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냈다. 뒤이어 그 발에 입을 맞추더니 값비싼 향유를 그 발에 부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집주인 바리새인 시몬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그런 죄지은 여자가 자기의 집에 들어온 것조차도 탐탁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만일 이 사람이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라고 생각하였다(눅 7:36~39). 그 순간 이미 시몬의 생각을 간파하신 예수님은 시몬이 그 여인에게 무례히 행하기 전에 먼저 이렇게 물으셨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그러자 시몬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많이 탕감을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대답을 들으시고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네 판단이 옳도다.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인은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인은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다(눅 7:40~50). 바리새인 시몬은 율법의 눈으로 그 여인을 판단하고 무시했다. 그에게는 율법의 기준과 잣대는 있었으나 사랑과 긍휼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예수님은 사랑으로 그 여인을 감싸 주셨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불쌍한 여인을 시몬의 무례함에서 건져주신 것이다. 더불어 예수님은 바리새인 시몬 앞에서 다음과 같이 그 여인을 칭찬해 주셨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예수님은 참된 사랑으로 자신을 섬겼던 그 여인을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해 주셨다. 이처럼 사랑은 아무리 하찮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 비록 그가 흉악한 죄인이라도 말이다. 진정한 사랑은 누구에게도 무례히 행치 않는다. “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라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만으로 행함이니라”(잠 21:24).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5.08.22

    (162) 순복음의 7대 신앙-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75>
  • 예수님처럼 공손하며 언행에 무례함이 없어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 교만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참된 사랑은 절대로 무례히 행치 않는다. 이 말씀을 몸소 행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라고 기록한다. 이렇듯 예수님은 언제나 “내가 너한테 들어가도 되겠니?”하고 노크를 하시며 정중하고 친절하게 모든 이들을 대하는 분이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에게도 절대 무례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으셨다. 병든 사람에게, 고난받고 외로운 이들에게, 주리고 목마른 이들에게, 귀신 들린 이들에게 먼저 찾아와 주셨다. 무조건 자신을 따르고 믿으라고 명령하고 윽박지르지 않으셨다. 위로하시며 고쳐주시고 친구가 되어주시고 배불리 먹이시고 친히 귀신을 쫓아내셨다. 결국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저절로 그분을 따를 수밖에 없도록 만드셨고 절로 고개를 숙이도록 이끄셨다. 세상 사람들은 서로에게 함부로 대하고 사랑이 없어 무례히 행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앞세워 무례하고 지배적이며 폭력적이고 공격적으로 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 특히 함부로 반말을 내뱉고 말로 상처를 주고 무례히 행하는 것은 성령 충만하고 사랑이 넘쳐야 할 성도들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예수님처럼 누구에게든 공손하고 상대방을 높여 존중하며 무례함 없이 친절하게 정중한 태도로 대해야만 한다. 경북 예천군 대죽리 마을에는 언총(言塚)이라고 불리는 500년의 역사를 가진 고분(古墳)이 있다. 그 뜻은 입에서 나오는 ‘말의 무덤’이라는 뜻이다. 오래전 그 마을에 살던 여러 문중이 크게 싸웠는데 그 발단은 사소한 말 한마디였다고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들은 ‘말의 무덤’을 만들었다. 이웃을 향한 험담과 비방이나 원망과 불평이 담긴 거친 말이나 욕설을 사발에 뱉어 담은 후에 그 나쁜 말들에 대한 장례를 치르고 그것을 땅에 묻어 무덤을 만든 것이다. 상징적인 행동이었지만 놀랍게도 그 이후 더 이상 거칠고 부정적인 말들을 하지 않으려 노력한 결과 그 마을은 평화를 되찾았다. 이처럼 혀를 길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항상 긍정적이고 무례하지 않고 예의 바른 언어생활을 위해 노력하며 입술의 파수꾼을 붙여달라고 기도해야 한다(시 141:3). 거칠고 무례해 후회될 말이나 누군가를 낙심케 하는 부정적인 말은 입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한다. 거룩한 성도의 언어는 생명과 진리의 언어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며 범사에 은혜와 감사의 말로 온전해 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약 3:2).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5.07.18

    (161)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74>
  • 무례함의 기준은 나 자신이 아닌 상대방, 항상 조심하며 살펴 행동해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 교만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무례히 행하지 않으려는 행동은 존중과 배려로 가득 찬 선한 마음을 의미한다.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은 예의 바르다는 의미이고 그것은 경솔하거나 가볍지 않고 깊이 있는 행동을 의미한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가볍게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밖에 없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무례히 행치 않는 ‘예의 바름’을 사랑의 한 모습으로 이해하고 가르치고 있다. 다시 말해 사랑하면 상대를 대할 때 예의 바르고 따뜻하며 정중하게 행동하게 된다. 그런 예의 바른 행실을 통해 사랑의 마음이 전해지고 표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례히 행하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그것은 상대가 싫어하고 불편하게 여기는 행동이나 기분을 상하게 하는 행동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무례함의 기준이 나 자신이 아닌 상대방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경우든 상대가 무례히 여겨졌다고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예의 바름의 기준은 곧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진실한 배려의 마음으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무례히 행치 않으려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참된 사랑의 모습이다. 사도 바울은 왜 무례히 행치 않음을 사랑으로 보았을까? 당시 고린도 교회의 모습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초대 교회 시대의 성만찬 식사는 지금의 성만찬 의식과는 달리 규모가 큰 공동체의 식사였다. 문제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성도가 교회에서 그 식사에 참여하고 싶어도 그들에게까지 차례가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빈번했다. 소위 교회의 지도자급 성도들, 즉 지금으로 치면 제직들이 앞에서 먼저 배부를 정도로 음식을 다 먹고 성만찬 포도주도 취할 정도로 마셔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한 모습을 보며 바울은 그들의 무례함을 곧 사랑이 없는 모습으로 이해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1장 34절을 통해 바울은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고 책망하며 그런 행동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사랑이 없어 무례히 행하는 그 모습으로 그 모임이 심판받지 않기를 바란다고 엄중히 경고한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비판과 경고는 현재의 교회에도 유효하다. 교회가 무례히 행하면 비판받는 모임이 될 수 있다. 교회와 성도들은 진정 무례히 행치 않고 치열하고 치밀하게 빈틈없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행하고 실천해야 한다. 성령 충만한 교회와 성도는 마치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성령의 공동체처럼 무례히 행치 않는 사랑의 모습으로 세상의 칭송을 받아야 한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6~47).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5.06.20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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