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 순복음
(147)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60>
  • 모든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과 십자가 앞에 겸손히 스스로 낮아져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교만은 ‘마음의 중심’에 깃들며, 자기중심적인 자만심으로 비정상적으로 툭 튀어나온 부풀어진 마음의 상태이다. 구약성경 오바댜 1장 3절은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라고 기록한다. 그것은 교만한 마음으로 인해 ‘거짓된 안전의식’에 빠져 있던 자를 책망하는 말씀이다. 15세기의 유명한 설교자 중에 사보나롤라(G. Savonarola, 1452∼1498)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수도사로 부임한 성당에서 어느 날 아침 산책을 하다 보니 성당 앞 성모 마리아상 앞에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중년 부인 한 사람이 경건한 모습으로 성모상에 참배하면서 아주 진지하게 기도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이튿날에도 또 다음 날에도 똑같은 시간에 그 부인을 그 자리에서 만났다. 그렇게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바람이 불든 하루도 빼놓지 않고 봄, 여름, 가을, 겨울 한결같이 같은 시각에 와서 마리아상 앞에 참배하는 신실한 부인의 모습에 사보나롤라는 아주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사보나롤라는 동료 사제와 산책을 하는 도중에 또 그 부인을 보게 됐다. 그가 그 부인을 가리키면서 “여보게 내가 저 부인을 가만히 살펴보니 봄, 여름, 가을, 겨울 변함이 없어.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폭풍우가 몰아치나 꼭 같은 시간에 빠짐없이 기도하고 있단 말이야. 참 신앙심이 대단해 보이지 않나?” 그랬더니 옆에 있던 동료 사제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아직 마리아상과 저 부인에게 얽힌 사연을 잘 모르는구먼. 오래전에 이 성당에 저 마리아상을 처음 조각하도록 위임받은 조각가가 그 대상이 되는 모델을 찾았을 때, 선정된 사람이 바로 저 부인이라네. 어리고 아름다웠던 젊은 시절의 저 부인이 바로 그 모델이었던 거지. 그래서 저 부인은 저 마리아상이 완성돼 저곳에 놓인 그 이튿날부터 출근해서 지금까지 빠진 일이 없다네.” 사실 그 부인은 신앙심으로 그 자리에 매일 왔던 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그녀는 매일 그 자리에서 젊은 시절 자기 얼굴을 보고 자기를 즐기고 자기를 숭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죄의 뿌리이다. 사탄은 에덴동산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와 첫 번째 유혹을 이렇게 던졌다.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이처럼 교만은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는 것이다. 더불어 자신의 주장을 절대화시킬 때 바로 그것이 교만이다. 연약한 인간은 죄를 범할 수 있으며 언제나 불완전한 존재이다. 성령 충만한 성도는 이런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과 십자가 앞에서’ 겸손히 자기를 상대화시켜 스스로 낮아져야 한다. “야훼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 15:33).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4.04.19

    (146)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59>
  •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가장 앞장서서 멸망에 이르게 하는 죄악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결국 파멸에 이르게 하는 가장 큰 죄를 7가지로 분류해 놓고 있다. 그것은 ① 교만 ② 시기 ③ 탐식 ④ 색욕 ⑤ 분노 ⑥ 탐욕 ⑦ 게으름이다. 소위 ‘7가지 대죄(大罪, Capital Sins)’라는 이 목록은 교황 그레고리 1세(Gregorius I, 540~604)가 분류했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 성경에는 ‘대죄’라는 말은 없다. 비슷하게 ‘사망에 이르는 죄’(요일 5:16),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사함을 얻지 못하고(마 12:31), ‘다시 새롭게 할 수 없는 죄’(히 6:4~6),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죄’(고전 6:9~10)가 있다. 7가지 대죄와 비슷한 성경 말씀은 잠언 6장 16절부터 19절에 “야훼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라고 기록돼 있다. 또한 예수님은 사람을 더럽히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죄악에 대해 말씀하셨다.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막 7:21~22). 그 일곱 가지 ‘대죄’ 중에 첫 번째로 꼽히는 것이 바로 ‘교만’이다. 오래되고 유명한 신앙 도서 『참회록』의 저자 성 어거스틴(S. A. Augustinus, 354~430)이 말하기를 “교만은 인간이 빠지기에 가장 쉬운 것인 동시에 인간이 극복하기에 가장 어려운 것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교만’의 죄가 빠지기 쉬운 죄이고, 또 극복하기 어려운 것도 문제지만, 교만의 죄는 그 결과가 매우 치명적인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수많은 사람이 교만의 죄로 인해 실패하고 좌절하며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았다. 가장 아름다운 지위를 가졌던 천사 루시퍼도 교만으로 인해 사탄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다(사 14:13~14). 잠언 16장 18절은 엄중히 경고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말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가장 앞장서서 멸망에 이르게 하는 죄악이다. 그렇다면 교만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고 그 충만한 성령과 함께 사랑으로 행해야 한다. 더불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교만하지 말라’고 친히 말씀해 주실 것이다.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야훼께서 말씀하셨음이라”(렘 13:15).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4.03.15

    (145)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58>
  • 스스로 잘못했으면서도 더 큰소리치는 것이 교만한 자의 특징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바울이 두 번에 걸쳐 서신을 보냈던,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근심하며 경고할 만큼 교만했다(고전 4:6). 바울과 아볼로는 신실하고 겸손한 주님의 종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을 높이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을 높임도 원치 않았다. 하지만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파를 만들고 아볼로파를 만들었다. 거기에 게바파와 더 나가 그리스도파까지 만들어 편을 나눠 당을 짓고 서로 대적했다. 사도 바울은 그 이유를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라고 말했다(고전 4:18~19). 고린도 교인들이 서로 대적하며 편을 나눠 다투게 된 이유는 분명했다. 그들은 스스로 교만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이런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는 사도 바울이 다시 고린도를 방문하는 것조차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마음이 높아져 ‘이미 배울 것들을 모두 배웠다’는 교만으로 가득해 우월감과 자아도취에 빠져 있었다. 사실 그들 가운데 음행을 저지른 자들도 있었으며, 심지어 자신의 계모를 성적으로 범한 자도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그 당시 이방인의 법이었던 로마법에서조차 엄격하게 금지하는 악행이었다. 하지만 더 나쁜 것은 그런 추악한 음행을 저지르고도 회개치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원인도 역시 ‘교만’ 때문이다. 이처럼 스스로 잘못했으면서도 더 큰소리치는 것이 교만한 자의 특징이다(고전 5:1~2). 그 당시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서는 시장에서 파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 때문에 분쟁이 생겼다. 어떤 사람들은 꺼림칙하니까 아예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사지 않았다. 심지어는 친척의 잔칫집에 가서도 고기를 먹지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고기는 어디까지나 고기에 불과하며 이방신은 존재하지도 않는다”라고 말하면서 거리낌 없이 고기를 먹는 이들도 있었다. 이 두 가지 모습 모두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였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라고 말씀한다. 사랑 없는 지식은 교만해져서 형제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뿐이다. 상처를 주고 교만함을 뽐내는 ‘지식’을 내세우기 보다는 온전한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것에 관심가져야 한다(고전 8:13). 고린도 교인들은 스스로 마음이 높아져 교만했기 때문에 서로를 대적했고 음행을 저질러도 회개할 줄 몰랐으며 더 나아가 신앙공동체인 형제자매의 마음까지 아프게 했다. 성령 충만한 주님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교만을 벗어 버리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 스스로 낮아지는 사람이며, 또한 겸손히 믿음의 형제자매를 섬기고 교회에 충성하며 봉사와 나눔에 힘쓰는 성령의 사람이다.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4.02.16

    (144)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57>
  • 교만이 앞서가는 곳에는 항상 그 결론이 패망임을 기억해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신약성경에서 ‘교만하다’를 의미하는 헬라어 동사 ‘퓌시오오’는 대장간 등에서 바람을 일으키는 기구인 ‘풀무’를 의미하는 단어 ‘퓌사’에서 유래했다. 그 기본 뜻은 ‘부풀리다’ ‘부풀게 하다’ ‘부풀어 오르게 하다’이고 비유적으로는 ‘마음이 부풀어 득의 양양하게 하다’, ‘자만케 하다’라는 뜻이 있다. 수동태로는 ‘마음이 부풀어 오르다’, ‘거만하게 처신하다’, ‘교만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7회 나온다. 그렇다면 ‘자랑’과 ‘교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 차이는 분명하다. 자랑은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표면적이고 외적인 행위이고, 교만은 심리적이고 내적인 마음가짐이다. 잠언 16장 18절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한다. 그렇다. 교만이 선봉을 서서 앞서 나가게 내버려두면, 반드시 뒤따라오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패망이다. 거만한 마음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넘어짐이 뒤따라오기 마련이다. 즉, 결국 교만 때문에 망하는 것이며 교만은 그렇게 나쁜 것이다. 어느 날 아름다운 숲속에 아침이 찾아왔다. 각종 짐승이 연못가에 물을 마시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 가운데 사슴 한 마리가 있었다. 사슴은 물을 마시다가 물에 비친 자기의 모습에 스스로 감격했다. 머리에 달린 뿔이 너무나도 황홀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감격에 취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짐승들 머리 위에는 뿔이 없었다. 순간 사슴의 마음에 교만이 들어왔다. 사슴은 자기 머리의 뿔을 좌우로 흔들면서 뽐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으르렁’ 소리를 내며 배고픈 사자가 연못가에 나타났다. 모든 짐승이 놀라서 달아나기 시작했고 사슴도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금 도망가다가 사슴은 그 아름다운 뿔이 나뭇가지에 걸려 더 이상 달아날 수가 없었다. 결국 사슴은 자기가 교만하게 뽐내던 뿔 때문에 사자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교만의 결과가 이렇다. 교만이 앞서가는 곳에는 언제나 패망이 따라오기 마련임을 기억해야 한다. 자랑은 그냥 스스로 사람들 앞에서 ‘내가 잘 났다’하는 것이다. 하지만 교만은 그 상대가 하나님이다. 즉, 교만은 인간이 스스로 높아져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며 훨씬 더 심각한 위험 요소이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 하나님께서 받으실 감사를 자기가 다 챙기는 잘못을 범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을 질투했던 천사장이 스스로 교만해져 마귀가 됐다고 기록한다(사 14:12~20). 이처럼 교만은 성도들을 타락시키는 사탄의 주요 도구로써 정욕에 빠지게 하고(단 5:20~23), 악한 마음(시 10:2), 자기 자랑, 자기 연민, 자기 기만에 빠지게 해 결국 멸망에 이르게 한다(잠 18:12).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스스로 겸손의 본을 보이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한다(빌 2:6~11).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야훼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잠 16:5).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4.01.19

    (143)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56>
  • 성령 충만한 성도의 평생 자랑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다. 그것은 바로 단 1시간 후의 미래조차 즉,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잠 27:1). 미래는 하나님의 영역이며 하나님에 의해 좌우된다. 또한 잠언은 “많은 사람이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잠 20:6)고 말씀한다. 사람이 스스로 인자함을 자랑해도 진정으로 인자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시 52:1). 사도 야고보는 이런 인생들의 자랑을 허탄하고 악한 것이라고 했다(약 4:16).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는 하나님만을 즐거워하며 정직한 마음으로 그의 행하신 모든 일들을 다 자랑하는 자들이다(시 64:10). 성도의 자랑은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시 20:7)과 그의 행하신 일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구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은혜는 ‘마음의 즐거움’이다(시 105:3, 대상 16:10). 이와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는 야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다(사 45:25).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야훼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야훼의 말씀이니라”(렘 9:24). 덧붙여 성도의 평생 자랑은 오직 ‘주의 십자가’ 뿐이다. 사도 바울이 살던 시대인 로마의 법 집행 과정에 있어 십자가는 대역 죄인을 매달아 사형시키는 끔찍한 형틀이요 혐오와 저주의 대상이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십자가를 생각하거나 말하기조차 싫어했다. 사도 바울도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라고 기록하며 이런 사실을 뒷받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고백했다(갈 6:13~14). 어떻게 그 욕되고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그는 십자가를 통해 형용할 수 없는 큰 은혜를 체험했고, 이를 통해 ‘약할 때 곧 강함’(고후 12:10;13:9)이라는 십자가의 도를 깨닫고 행하게 됐다. 이처럼 신앙생활은 다른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진리를 아는 것이다. 십자가를 알면 모든 것을 아는 것이고, 십자가를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고전 1:26~31).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해야 한다.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약점도 못남도 자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 자랑하는 것이다. 로마서 5장 2절은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즐거워한다’는 말은 바로 ‘자랑으로 여기다’라는 뜻을 지닌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과 행하심으로의 은혜를 입었음을 자랑하며, 십자가의 은혜만을 종일토록 자랑하고 또 자랑하자.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시 44:8).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3.12.22

    (142)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 <55>
  • 하루하루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참된 성도의 모습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자신의 사도적 권위에 시비를 거는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했다.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고후 10:12)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들이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라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분란은 바로 ‘자기 자랑’에 충만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는 지혜 없는’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범위의 한계’(고후 10:13)에서 벗어나 마치 궤도를 이탈해 탈선한 폭주 기관차처럼 신앙의 공동체를 위협하는 존재들이다. 이러한 자랑은 마치 누룩처럼 온 사방으로 퍼져나간다(고전 5:6). 잠언 27장 2절 말씀도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하지 말며 외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하지 말지니라”고 경고했다. 이렇듯 스스로 높이며 자랑하는 것은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어느 날, 뉴욕에 있는 카네기 연주 홀에서 성대한 피아노 발표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어떤 젊은 피아니스트가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했다. 연주가 끝나자 모든 관중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그런데 오직 한사람, 맨 앞에 앉은 어떤 나이 지긋한 노인만은 여전히 자리에 앉은 채 그 젊은 피아니스트를 계속해서 응시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의 박수 소리가 멈추자, 사람들은 그 젊은 피아니스트를 둘러싸고 악수를 청하며 잘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칭찬이 쏟아지는 상황에서도 그 젊은 피아니스트는 얼굴빛이 매우 어두웠다. 이어서 그는 “저의 연주는 오늘 그리 잘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오늘도 많은 실수를 했습니다. 그래서 저 맨 앞에 앉으신 노인이 저의 스승님이신데 박수를 치지도 않으셨고 일어나지도 않으셨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단을 내려와 황급히 연주 홀을 빠져나갔다. 그렇다. 아무리 많은 관중이 열광적 박수를 보내고 칭찬했어도 자신의 스승이 칭찬하지 않았으므로 그 피아니스트는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가장 의미있는 칭찬은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스승의 칭찬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삶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 5:10)고 말씀했던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하루하루의 삶을 통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오로지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은 참된 성도의 모습을 얻도록 경주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후 1:12)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3.11.17

    (141)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 <54>
  • 오직 주님으로부터 칭찬받는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자랑’ 혹은 ‘자화자찬’(自畵自讚)은 권장되는 미덕(美德)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삼가야 할 악덕(惡德)으로 여겨왔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Platon, B.C.427~347 )은 말할수록 손해 보는 것 그래서 항상 비밀로 해야 하는 6가지 중에 ‘스스로 자랑하는 것’을 포함시켰다. “항상 비밀로 해야 하는 6가지가 있다. 첫째, 다른 사람의 단점을 말하지 마라. 누군가의 단점을 쉽게 말하면 자신의 이미지만 나빠진다. 둘째, 스스로 자랑치 마라. 남이 칭찬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 떠벌리면 자신이 한 일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셋째, 자신의 사생활을 필요 이상으로 발설치 마라. 혹시 관계가 틀어지면 그것으로 인해 곤란해진다. 넷째, 자신의 약점을 말하지 마라. 사람들은 타인의 약점을 통해 위안을 얻으며 자신도 모르는 새 은근히 즐긴다. 다섯째, 스스로 부(富)를 자랑치 마라. 인간은 상대방이 자신보다 더 많이 가졌다는 이유만으로도 상처받는 존재다. 앞에서는 다들 박수를 쳐 주는 듯해도 속마음은 그렇지 못하다. 여섯째, 자신의 목표에 대해 말하지 마라. 어차피 그 목표를 만들고 이뤄내야 할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최대의 승리는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중세 페르시아의 시성(詩聖)으로 불렸던 사디(M. Al-Sa'di, 1213~1291)는 “자화자찬하는 사람은 자신 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법이다. 자신만을 보는 사람의 신세보다는 오히려 보지 못함이 더욱 낫다”고 했다. 또한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L. Tolstoy, 1828~1910)는 “이름을 널리 알리려면 자화자찬하지 말며 칭찬하는 소리도 들으려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했고, 『팡세』의 저자인 철학자 파스칼(B. Pascal, 1623~1662)도 이와 유사하게 “칭찬받기를 원하면 자화자찬을 하지 말라”라고 강조하며 스스로를 칭찬하는 ‘자랑’에 대해 경고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0장 17~18절에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라고 권면했다. 그렇다. 진정한 칭찬은 바로 주님으로부터 받는 칭찬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를 칭찬할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국 아무 의미 없는 영광이다. 하물며 자기 스스로 ‘자화자찬’하는 ‘자랑’이야 말로 성령 충만한 성도의 미덕은 아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자랑하시고 칭찬하는 자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요 성령의 사람이며, 기쁘게 그리고 귀하게 쓰임 받는 성도이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 5:8~11).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3.10.20

    (140)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53>
  • 성령의 사람은 십자가 신앙으로 자신의 연약함 자랑하는 예수님의 사람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어떤 사람이든 남보다 좋은 것을 갖고 있으면 자랑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별로 뛰어난 것 같지 않아 보여도 스스로 보기에 자랑스럽고 뽐내고 싶은 것들이 있다. 그래서 외모 자랑, 재산 자랑, 건강 자랑, 권력 자랑, 인맥 자랑 등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의 자랑은 입술의 말로 이뤄진다. 자랑은 혀를 사용한 언어로 행해지는 허탄한 행위이다(약 4:16). 성령으로 충만해 하나님의 뜻을 따른 성도라면 우리의 자랑은 자아도취적인 세상의 자랑과는 달라야 한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성호를 자랑해야 한다. 시편 20편 7절은 “야훼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라고 했으며, 역대상 16장 10절은 “그의 성호를 자랑하라 야훼를 구하는 자마다 마음이 즐거울지로다”라고 기록한다. 둘째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자랑해야 한다. 우리 삶의 모든 일은 겉으로는 모두 우리 자신의 공로 같다. 하지만 신앙의 눈으로 잘 살펴보면 모두 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다. 이것을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된다. “너희는 야훼께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행하신 일을 만민 중에 알릴지어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고 그의 모든 기사를 전할지어다”(대상 16:8~9). 셋째로 주의 십자가를 자랑해야 한다. 현시대에는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사도 바울의 시대에는 십자가는 죄수를 벌주기 위한 끔찍한 형틀이요, 혐오와 저주의 대상이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십자가를 생각하거나 말하기도 싫어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까지 했다(고전 1:18~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신앙생활은 다른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자랑하고 그 진리를 아는 것이다. 십자가의 진리를 알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고, 이걸 모르면 모든 것을 다 알아도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십자가만을 자랑하기를 소망한다.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약점까지도 고백하고 자랑하는 것이다. 성령의 사람은 세상에서 잘난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하고 못난 것을 자랑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 자랑하는 것이다.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3~14).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3.09.15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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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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