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사도행전 이야기
(95) 사도행전의 열린 결말
  • 드디어 사도 바울은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입성했다. 그러나 자유인으로서가 아니라 죄수로서 그나마 로마 시민이었기에 가이사에게 호소함으로써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을 미결수로서 로마에 들어갔다. 그런데 로마 당국은 그에게 호의를 베풀어 그를 지키는 군인 한 명과 따로 있도록 허락했다. 그러므로 상당한 자유가 그에게 부여되었다. 바울은 로마에 도착해서 사흘이 지난 후 로마에 거주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중에서 지도층들을 초청해서 그들에게 자신의 사정을 설명해 나갔다. 자신은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 사람들에게 “죄수로 내준 바” 되어서 로마 사람들이 자신을 심문했는데 죽일 죄목이 없어서 석방하고자 했지만 유대인들이 반대해서 어쩔 수 없이 가이사에게 상소했다고 말했다(롬 28:17~19). 바울은 자신이 가이사에게 상소한 것은 절대로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강변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소망”이란 죽은 자의 부활을 말한다. 사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삽지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만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복음을 유대인들이 받아들이기 쉽게 설명한 것이다. 그러자 그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유대로부터 바울에 대한 어떤 편지를 받은 적도 없고, 누가 와서 그에 대해서 나쁜 소식을 전한 적도 없어서 특별히 어떤 관심은 없지만 그의 사상이 어떠한가를 듣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들도 그가 속한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바울이 속한 ‘파’란 예수님을 주로 섬기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날을 정해서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바울이 유숙하는 집에 모여들었다. 바울은 그 유대인들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권했다. 그런데 바울의 말을 들은 유대인들의 반응은 정반대로 엇갈렸다. 어떤 사람들은 믿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그러자 바울은 그들에게 준엄하게 선언했다.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행 28:25~28). 사도 바울은 이런 식으로 2년간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쳤다(행 28:30~31). 이것이 우리 성경에 있는 사도행전의 결말이다. 따라서 그것은 ‘열린 결말’이다. 즉 끝맺음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의 역사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김호성 목사(목회담당 부목사 겸 영산신학연구원 학장)
  • 2024.09.06

    (94)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다
  • 천신만고 끝에 사도 바울은 꿈에도 그리던 당시 세계 최강대국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도착했다(행 28:14~16). 그러나 최정예 선교팀의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의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곧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을 초라한 죄수의 신분으로 압송되어 갔다. 그는 복음을 전하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고난을 당했는데 바울서신 곳곳에 이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b~27). 이 구절이야말로 바울의 3차에 걸친 선교여행 과정에서의 박해와 투옥, 예루살렘에서의 체포, 구금, 가이사랴 감옥으로 이송, 로마로 압송되며 겪은 유라굴로 폭풍과 파선을 생생하게 압축해서 묘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렇게 인도하신 과정이 그가 전한 복음의 성격과 너무나도 빼닮았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하고 있고, 계속해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선포하고 있다(고후 4:7~9). 또한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라는 말씀과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9~10)라는 말씀으로 기독교 복음이 가진 역설과 그리스도인의 양면성을 잘 설명하고 있다. 바울이 전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크고 광대하신 분이시지만 믿는 우리들은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연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복음을 전할 때마다 그는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던” 것이다(고전 2:3, 빌 2:12). 여기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는 믿음의 선포가 나오게 된다. 능력의 주님이 함께하시는데 견디지 못할 고난이 없고, 넘지 못할 장벽이 없으며, 극복하지 못할 환난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어떤 모습으로 제국의 수도에 입성했느냐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흑암의 세력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음 전파를 방해하고 그 입을 틀어막으려 했지만 주님께서 하신 말씀, 즉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라는 약속이 성취되는 순간, 천국의 개선행진곡이 울리는 영광과 승리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김호성 목사(목회담당 부목사 겸 영산신학연구원 학장)
  • 2024.08.09

    (93) 드디어 로마에 도착한 사도 바울
  • 3차에 걸친 선교여행 후 예루살렘에 갔다가 유대인들에게 사로잡혀 죽을 위기에 처한 바울은 로마 천부장의 손길을 통해 구출 받아 로마군 진영에 갇혔다가 다시 가이사랴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그곳의 로마 총독인 벨릭스와 베스도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그를 계속 감옥에 가두어 놓자 바울은 황제에게 상소해 로마로 압송 되었다. 배를 여러 번 갈아타고 로마로 갈 때 처음에는 순항하는 듯 했으나 그레데 섬 인근 해역에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보름 이상을 죽음의 공포와 굶주림 속에서 표류하다가 육지가 보여 상륙하던 중에 배가 파괴되어 배 안에 있던 276명 모두 헤엄을 치거나 부유물을 붙잡고 육지에 올라 기적적으로 구조되었다. 그 섬은 멜리데(몰타)였는데 아직 폭풍우 중이고 초겨울 날씨라 주민들이 불을 피우고 먹을 것을 주며 그들을 정성껏 영접하였다. 멜리데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인 보블리오가 바울 일행을 친절하게 영접해 사흘 동안 머물게 했는데 마침 그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고통당하고 있었다. 바울이 그에게 안수하며 기도하자 깨끗이 고침 받게 되었다. 그러자 그 섬의 많은 사람들이 바울에게 와서 병 고침을 받았다. 그들도 바울 일행을 극진히 섬기고 로마를 향해 떠날 때에는 식량을 비롯해서 필요한 물품을 배에 많이 실어주었다. 석 달 동안 멜리데 섬에 머물러 겨울을 보낸 후 ‘디오스구로’(제우스의 아들들이라는 뜻)라는 이름을 가진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나 수라구사(시칠리아 섬의 시라큐스)에 들어가서 사흘을 머물고, 이탈리아 반도 남쪽에 위치한 레기온으로 가서 하루를 지냈는데 남풍이 불어와서 이틀 만에 나폴리 만에 있는 보디올에 도착했다. 그곳에 믿는 형제들이 있어서 그들의 초청으로 일주일을 함께 지낸 후 육로를 통해서 드디어 로마에 도착했다. 로마의 형제들이 바울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로마의 관문인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세 여관’이란 뜻)까지 맞으러 나왔다. 바울은 그들을 보자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담대함을 얻게 되었다. 사실 바울은 다른 어떤 곳보다 로마 방문을 원했다.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 1:11~15; 15:22~24 참조). 이처럼 바울은 전 세계의 중심지였던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기를 원했지만 계속되는 박해와 환난, 광풍과 각종 위험으로 인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행 23:11)라는 주님의 음성을 굳게 믿고 앞만 보고 나간 결과 꿈에도 그리던 로마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1). 김호성 목사(목회담당 부목사 겸 영산신학연구원 학장)
  • 2024.07.12

    (92) 유라굴로를 극복한 비결
  • 3차에 걸친 선교여행 직후 예루살렘에서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잡혀 살해되기 일보 직전에 천부장 루시아의 개입으로 로마 군인들의 영내에 구금 되었던 바울은 그를 죽이려는 흉계가 드러나 삼엄한 경호 속에 가이사랴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총독이 벨릭스에서 베스도로 바뀔 때까지도 정당한 재판 절차 없이 계속 감옥에 잡아 두는 것을 참다못해 바울은 로마 시민으로서 가이사에게 호소함으로써 로마로 이송돼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로마까지의 호송을 위해 바울은 배를 여러 번 갈아타고 그레데 섬의 ‘미항’이라는 항구에 도착했는데, 당시 겨울이 되면 항해가 불가능해져 바울이 그의 호송 책임을 맡은 백부장에게 이를 경고했지만 아무 문제없다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어 배를 출항시켰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고 만다. 엄청난 바람 때문에 배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밀려서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모래톱에라도 걸리면 배가 침몰하는 큰 위험에 빠질 수 있기에 닻을 내리고 배의 무거운 짐과 기구들을 바다에 버리며 바람에 맞서 버텨 나갔다. 여러 날 동안 폭풍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구원의 여망마저 사라져 가고 말았다. 바로 그 때 바울이 배 안에 있는 276명의 사람들을 향하여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한다. 하나님께서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행 27:22)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이제는 안심하라고 불안에 떠는 사람들을 다독였다. 십사일째 되는 밤에야 비로소 배가 육지에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알고서 암초에 걸리지 않도록 배 뒤편에서 닻 네 개를 내리고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날이 새어가자 바울이 그동안 식량을 아끼느라 거의 먹지 못한 사람들에게 마음껏 음식을 먹으라고 권하며 한 명도 생명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다 배불리 먹은 후 남은 식량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했다. 날이 새자 어떤 항만에 가까운 것을 보고서 선원들이 조심스럽게 접안을 시도하며 조금씩 육지를 향해 나아갔지만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에서 좌초하고 말았다. 군인들은 죄수들이 도망할 것을 우려하여 죽이자고 건의했지만 백부장이 바울을 구하기 위해 그것을 막고, 수영할 줄 아는 사람들은 바다에 뛰어들어 상륙하도록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널조각이나 배의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여 마침내 모두 육지에 올라 구조되었다. 바울 일행이 구조된 곳은 멜리데(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섬 남쪽의 몰타) 섬이었다. 폭풍 끝이라 비가 오고 날이 찼지만 섬 주민들은 불을 피워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모아서 불에 넣었는데, 뜨거운 열기 때문에 그 속에서 독사가 나와서 바울의 손을 물었다. 섬 주민들이 그 광경을 보고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행 28:4)라고 수군대었다. 그러나 바울이 그것을 불에 떨어 버리자 아무런 해를 받지 않았다. 섬 주민들은 바울의 손이 붓거나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생각했는데 시간이 흘러도 아무렇지도 않자 그를 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유라굴로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바울을 구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다”(행 27:24)라는 확신을 주셨고, 로마 백부장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죄수들을 죽이자는 군인들의 건의를 막아주셨다(행 27:42~43).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b). 김호성 목사(목회담당 부목사 겸 영산성서연구원 학장)
  • 2024.06.07

    (91) 광풍 유라굴로
  •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사로잡혔다가 안전 문제로 총독 관저가 있는 가이사랴로 이송되어 2년이 넘은 세월이 지났지만 벨릭스, 베스도 총독이 그의 결백을 알면서도 유대인들을 만족시키고자 계속 구금 상태로 내버려두자 로마 시민의 권리인 ‘가이사에게 호소’하는 카드를 쓰게 된다. 이후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배를 여러 번 갈아타고 로마로 압송되는 길에 오르게 되었다. 겨울이 다가와 항해가 어려워지자 바울이 안 된다고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레데 섬의 항구인 뵈닉스까지만 가서 과동하자는 의견이 많아 출항했다가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되었다. 폭풍이 워낙 강해 배가 밀려 바람을 맞서서 나아갈 수 없어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룻배(구명정)를 잡아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동여맸다. 스르디스라는 모래톱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닻을 내리고 바람에 맡긴 채 계속 밀려갔다. 이튿날에는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사흘째 날에는 배의 기구들을 바다에 던져버렸다. 이러한 큰 풍랑이 여러 날 계속되자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지게 되었다. 언제 구조될지 모르는 상황에 식량을 아끼느라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때 바울이 가운데 서서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고 희망을 선포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려주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바울의 신앙이 잘 나타나 있다. 14일째 되는 날 밤 아드리아 해에서 표류하다가 자정쯤에 사공들이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바다 깊이를 재보니 스무 길이었는데 조금 가서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 되었다. 암초에 걸리지 않도록 고물(배 뒷부분)에서 닻 넷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이물(뱃머리)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놓았다. 바울이 이를 알고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말해서 거룻줄을 끊어서 떼어버렸다. 날이 새자 바울은 사람들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면서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라고 말하면서,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주자 사람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먹었다. 배 안의 사람들은 모두 276명이었다. 배부르게 먹은 후 남은 양식을 모두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했다. 날이 새자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보여 배를 거기에 댈 수 있는지 의논한 후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고, 키를 풀어 속도를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에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갔다. 그런데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에서 배가 모래톱에 걸려서 뱃머리는 모래톱에 처박혀 움직일 수 없게 되고 배 뒷부분은 큰 물결에 부딪쳐서 깨지고 말았다. 그러자 호송 군인들은 죄수들이 헤엄쳐서 도망할 것을 막으려고 죽이자고 했으나 백부장이 바울을 살리기 위해 그것을 막고 헤엄칠 수 있는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서 육지로 올라가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수영을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널조각이나 배 물건을 의지해서 육지로 가도록 해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상륙하여 구조 되었다. 이렇게 해서 바울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라굴로의 광풍 속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며 나가는 바울 때문에 다른 사람들까지 구원해주신 것이다. 김호성 목사(목회 담당 부목사 겸 영산성서연구원 학장)
  • 2024.05.10

    (90) 로마로 압송되는 바울
  • 드디어 바울은 로마를 향해 떠난다. 사실 바울은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기를 간절히 원했다(롬 1:15). 당시 로마는 세계의 중심이었기에 모든 길은 로마를 향해 있었다. 그런데도 바울의 로마행은 번번이 가로막혔다(롬 1:13, 15:22). 이제야 비로소 로마에 가게 되었는데 자유인의 신분이 아니라 가이사 앞에서 재판을 받기 위한 죄수로서 압송 되었다. 바울의 로마까지의 호송 과정(행 27~28장)은 다시 1인칭 복수 시점인 ‘우리’로 서술된다(“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행 27:1). 성경학자들은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이 ‘우리’ 안에 있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이 여행기는 목격자의 진술이며 역사적 신빙성이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당시에는 기술적인 문제로 긴 항로를 한 번에 직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연안에 바짝 붙어서 단거리를 항해하는 여러 배편을 요즘 말로 ‘환승’해 가면서 목적지에 이르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 탄 배는 소아시아 해변의 여러 지역에 기항하는 ‘아드라뭇데노’라는 이름의 배였다. 아구스도 부대의 백부장 율리오가 바울 및 여러 죄수를 로마까지 호송할 책임을 맡았는데 그 배에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바울을 수행하기 위해 함께 탔다. 이튿날 시돈 항구에 도착했는데 백부장이 바울에게 호의를 베풀어 그곳의 지인들에게 가서 대접받는 것을 허락했다. 그곳을 떠나 맞바람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해 항해하며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시(市)에서 내렸다. 그곳에서 이달리야로 가는 ‘알렉산드리아’라는 배를 만나 백부장이 갈아타도록 했는데 배가 더디 가는 관계로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렀다. 하지만 역풍이 너무 거세어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 삼아 항해하며 간신히 라새아 시에서 가까운 미항(美港)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미항에서 순풍을 기다리다가 시간이 많이 지체됨에 따라 ‘금식하는 절기’(대속죄일, 보통 10월 초)도 이미 지났기 때문에 항해가 위태한 상황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9월 14일부터 11월 11일까지는 항해가 위태한 기간이었고, 11월 11일 후에는 탁 트인 바다에서 하는 모든 항해가 겨울이 끝날 때까지는 중지되었다(C. H. 탈버트 등). 그래서 바울은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치리라”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고, 어차피 미항이 겨울을 지내기에는 불편하기 때문에 그레데의 항구인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는 의견이 많아 그렇게 하기로 했다. 남풍이 순하게 불기에 그들의 뜻대로 되는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했는데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 향후 2주일 이상을 표류하다가 파선하기에 이른다. 절체절명의 위기였지만 바울은 하나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예루살렘 성전 옆 안토니아 요새에 구금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행 23:11)고 말씀하신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어떤 환난에서도 주님의 말씀은 그것을 극복할 힘과 용기와 소망을 공급해 준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김호성 목사(목회 담당 부목사 겸 영산성서연구원 학장)
  • 2024.04.12

    (89) 바울의 아그립바 2세왕 앞에서의 증언
  • 총독 벨릭스와 그의 후임자 베스도는 바울의 결백을 알면서도 자신들이 관할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그를 계속 구금해 놓자 바울은 로마 시민의 권리 중 하나인 황제(가이사)에게 상소하는 카드를 사용함으로써 로마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게 됐다. 그가 로마로 떠나기 전에 베스도 총독과 가까이 지냈던 헤롯(아그립바 2세)왕이 베스도를 찾아와서 교제를 나누다가 바울의 재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자신도 그를 한번 심문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베스도가 총독 접견실에 고관들을 부르고 바울을 심문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바울은 발언권을 얻자 먼저 아그립바에게 유대인의 피가 흐르는 것에 착안해서 유대교에 대해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해서 자신이 바리새인으로서 죽은 자의 부활을 굳게 믿어왔음을 밝힌다. 그리고 유대교에 대한 열심으로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해서 그를 믿는 자들을 박해하다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해보다 더 밝은 빛”(행 26:13)을 보고 땅에 엎드러졌는데, 예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그에게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다고 증언했다. 그래서 그 즉시로 이 명령에 순종해서 다메섹과 예루살렘 사람,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라고 전하자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그를 잡아서 죽이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지금까지 살아서 증언한 것이 “선지자들과 모세”(즉 구약성경)가 장차 반드시 되리라고 예언한 것, 즉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실” 것 뿐이었다고 강변했다. 바울이 여기까지 말하자 베스도 총독이 제지하면서 큰 소리로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라고 했다. 그러자 바울은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라고 대꾸했다. 그리고는 아그립바에게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 선지자를 …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라고 말을 이어갔다. 이에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고 말하자, 바울은 담대하게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그립바 왕과 왕비 버니게 그리고 베스도 총독과 참석자들이 다 일어나서 물러가 이구동성으로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라고 했다(행 26:31). 그래서 아그립바는 최종적으로 베스도에게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행 26:32)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되면 베스도가 아그립바에게 먼저 이야기 한 것(행 25:17~21)까지 포함해서 바울의 무죄를 로마제국의 고위 관리들이 세 차례에 걸쳐서 증언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의 무죄를 세 번 증언한 것(눅 23:4, 15, 22)을 떠올리게 한다. 누가가 저술한 2부작 ‘누가복음-사도행전’은 기독교 복음의 위대한 인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은 모두 로마제국에 의해 처형되었지만 사실은 로마의 최고위층의 세 번에 걸친 무죄 선언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로마제국에 항거한 정치범이 아니었음을 강변하고 있다. 바울의 심문 기록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세상 권세를 통해서도 그의 백성의 정당성을 밝혀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호성 목사(목회 담당 부목사 겸 영산성서연구원 학장)
  • 2024.03.08

    (88) 세 번째 반복되는 바울의 회심 이야기
  • 예루살렘 성전 곁 로마의 안토니아 요새의 천부장 루시아는 유대인의 암살 흉계로부터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 로마 총독의 거주지인 가이사랴로 이송했다. 그러나 끊임없이 바울을 고소하는 유대인들의 성화에 총독 벨릭스와 그의 후임자 베스도는 바울의 결백을 알면서도 그들의 환심을 사느라 바울을 계속 억류하자 그는 마침내 로마 황제에게 호소하기를 청한다. 베스도는 바울의 호소를 받아들여 로마로 압송하기로 했다. 그러는 중에 아그립바 2세왕과 버니게가 그를 찾아오자 베스도가 그들에게 바울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흥미를 느낀 아그립바는 자신도 한번 바울을 심문하겠다고 하자 베스도는 자신의 관저 접견 장소에서 여러 고위층을 초대하고서 심문을 시작했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말하라고 하자 그는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라는 말을 했다. 아그립바에게는 유대인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바울의 말을 잘 이해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바울은 자신의 젊은 시절 예루살렘에서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심문을 받는 것도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것, 즉 죽은 자의 부활을 전파한다는 이유(바리새인들의 신앙! 참조. 행 23:6~8) 때문이라고 밝힌다. 급기야 그는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라고 항변하기까지 한다(행 26:8). 그리고는 예수 믿는 자들을 극렬히 박해했던 지난날을 술회한다.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과 위임을 받아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고, 그들을 죽일 때에 찬성투표를 했으며, 회당마다 가서 박해하여 강제로 예수를 모독하는 말을 하게하고, 그것도 모자라 외국 도시에까지 가서 박해했는데 그러다가 다메섹까지 가게 되었다고 했다. 이제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이야기가 뒤따른다. 다메섹을 향해 가는 중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비추자 땅에 엎드러졌는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즉 ‘나를 박해하는 것은 너만 고생하는 일이다’)”라는 음성이 들려서, “주님, 누구시니이까?”라고 여쭸더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는 말씀이 들렸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장차 바울이 감당해야 할 사명에 대한 말씀이 들려왔다.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행 26:16~18). 사도행전에는 중요한 기사가 세 번 반복되는 특징이 있는데 바울의 회심 이야기(행 9, 22, 26장)가 대표적이다. 각 기사마다 다소간의 차이점과 특이점이 있는데, 첫째는 사도행전 저자 자신의 설명이고 둘째는 바울의 유대인 폭도들에 대한 연설이었으며 셋째는 아그립바 왕에게 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 성서학자들의 설명이다. 이처럼 바울의 회심은 초대교회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그의 변화로 인해 복음이 이스라엘 땅을 넘어 아시아로, 유럽으로, 아프리카로 멀리 멀리 퍼져나가게 되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김호성 목사(목회 담당 부목사 겸 영산성서연구원 원장)
  • 2024.02.08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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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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