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적 성경읽기
(19)영적 무장을 위한 3대 신앙
  •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로 했다면 영적 전쟁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영적 무장이다. 영적 무장이 없이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전쟁에 임하는 병사가 무장 없이 맨몸으로 나서는 법이 없듯이 영적 전쟁에서도 영적 무장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번 시간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무장, 곧 3가지 신앙적 무장에 대해서 알아보자. 1. 창조 신앙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자 우리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장본인이시다. 이 세상 모든 만물 가운데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아무리 과학이 하나님을 배제하고 진화론과 같은 이론으로 이 세상을 설명하려고 해도 그런 과학은 극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다음과 같은 우화가 있다. 어느 날 과학자 한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와 말했다. “우리 과학이 발전해 흙으로 사람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과학이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다 할 수 있다는 의미죠.” 하나님이 답하셨다. “정말 그러한가? 그렇다면 네 말대로 흙으로 사람을 만들어 보아라. 대신 네 흙으로 해라.” 이 우화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생명의 근원, 우주의 근원은 밝혀낼 수 없다는 것이다. 생명의 근원, 우주의 근원은 어디 있는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셨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2:1~2).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렇다면 창조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 달리 말해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 영광을 올려 드리며 살아야 한다. 2. 십자가 신앙 예수님의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은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함을 얻으며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축복을 얻은 것이다. 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말했다.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마르틴 루터는 이 말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어야 함을 천명한 것이다. 달리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빼놓고서는 기독교 신앙을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갈라디아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3~14). 예수님이 율법이 정한 대로 나무에 달려 죽는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우리를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브라함의 복과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셨다. 그렇다면 십자가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담대한 복음 증거자가 되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세상 앞에 절대로 주눅 들지 않는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만큼 나를 사랑하셨고 모든 저주의 굴레에서 해방하셨다. 또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우리가 삶의 형편과 조건, 세상의 시선에 위축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3. 부활 신앙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은 부활 신앙에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정사실이다. 그 증거가 무엇일까? 첫째,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 둘째, 부활의 목격자들이 있다. 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4~8). 특히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당하실 때 비겁한 도망자들이 되었던 제자들이 어떻게 다시 그 예수님을 전하다 순교자까지 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부활이 거짓일 수 없는 이유다. 물론 이런 증거에도 부활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셋째, 부활이 거짓이라면 그 거짓이 2000년 넘게 지속될 수 있었을까? 수없이 많은 사람이 그 거짓에 자기 목숨을 걸 수 있었겠으며 자기 인생을 헌신해 가며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을까? 부활은 사실이고 진리이다. 그렇다면 부활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결단코 세상에 얽매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안개처럼 쉽게 사라지는 인생길을 걷고 있으며 잠시 왔다가 떠날 나그네 인생을 살고 있다. 이 세상은 우리 삶의 종착지가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단기 선교 온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다. 바울 사도는 말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이 세상에 얽매여 잠시 잠깐뿐인 헛된 것을 찾다가 인생의 허망함에 무릎을 치며 후회하지 말고 부활 후 누릴 영원한 생명을 바라며 살아가자. 오정섭 목사
  • 2022.07.15

    절대긍정의 믿음
  •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선교라고 정의되는 시대가 찾아왔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복음 증거만큼이나 그리스도인의 삶이 주목받는 시대라는 뜻이다. 요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전하는 복음의 진정성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에서 찾는다. 따라서 성경을 삶의 원리 원칙으로 삼는 성경적인 삶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성경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절대긍정의 믿음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결론은 성도의 최후 승리를 말하고 있으며 다시 오실 예수님이 성도의 최후 승리를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 할 절대긍정의 믿음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그 땅을 정탐 다녀온 여호수아와 갈렙의 반응에서 절대긍정의 믿음이 지녀야 할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1.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을 갖고 싶어 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각 지파에서 대표 한 사람씩을 선발해 모두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에 보낸다. 그들은 40일간 그 땅을 돌아본 후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며 그 땅의 과일들은 극상품이라고 할 수 있고 그들이 누리는 것은 풍요롭다는 데에 일치된 의견을 내놓는다(민 13:25~27). 그러나 그 땅을 정복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의견은 긍정적인 의견 2명, 부정적인 의견 10명으로 갈린다. 긍정적인 의견을 내놓은 두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이다. 갈렙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한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민 13:30).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을 취하고자 하는 데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땅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비관적인 전망과 비판적인 어조에 쉽게 동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사람은 미래를 알 수 없고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매일 마주하는 삶의 과제 앞에 불안, 염려,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대면하는 문제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시고 자녀 된 우리의 삶을 위해 좋은 것을 예비해 놓고 계신 분이시다. 로마서 8장 32절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한다. 2.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는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의견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야훼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야훼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야훼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민 14:7~9). 그러나 나머지 10명의 정탐꾼들은 육신의 눈으로 확인되는 그 땅 주민들의 어떠함에 주목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2~33).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았기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땅에 대해 악평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라며 자신들에 대해서도 악평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이 무너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삶에 부정적이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분명히 차지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하나님은 그 땅을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고, 모세에게 정탐꾼을 보내라고 말씀하실 때도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했기에 그 땅을 차지하는 데에 긍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성경 말씀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책이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온갖 좋은 약속을 붙잡는 적극적인 신앙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은 절대긍정의 믿음을 소유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에 대한 기대로 가득하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실 것에 대한 거룩한 원함,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으로 충만한 절대긍정의 믿음으로 살아가자.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약속하신 가나안을 차지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정섭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신학연구소)
  • 2022.06.12

    구속사적인 삶 - 감사(2)
  • 대한민국 법 중에 최고 상위법은 헌법이다. 헌법 10조에 보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흔히 말하는 행복추구권이다. 그런데 행복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국가도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해 줄 따름이다. 다시 말해 행복은 어떤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정해진 조건이 있으면 국가가 일정 수준의 국민은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1. 행복의 근원, 감사 그렇다면 행복은 어디 있을까? 감사하는 마음에 있다. 감사하면 행복해진다. 감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사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감사가 저절로 되거나 쉽게 되지 않는다. 만약 감사가 저절로 되고 쉽게 되는 것이면 감사가 하나님의 뜻이니 범사에 감사하라고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감사는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감사가 쉬운가? 불평이 쉬운가?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한 달 동안 5층 집까지 매일 걸어가야 한다고 가정하자. 억지로라도 계단을 오를 일이 생겨 운동할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할까? 아니면 곧바로 불평할까? 감사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원망 불평이 자연스러운 우리 본성이라는 중력, 그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감사가 등산처럼 힘든 이유다. 그러나 등산도 하면 할수록 쉬워진다. 감사가 그렇다. 산 정상을 향해 오르다 보면 달라지는 것이 있다. 시야다.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감사하면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못 보던 것을 보게 된다. 감사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불평하는 일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그 일들 외에는 제대로 못 본다. 불평하는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마음이 계속 불편하다. 물론 해결이 돼도 불평할 거리는 또 있다. ‘왜 이제야 해결이 되는 거지?’ 감사하는 사람은 시야가 다르다. 보이는 것이 다르다. 눈에 거슬리는 것보다 세상 아름다운 것이 훨씬 더 많다. 보이는 게 다르니 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왜 그렇게 사소한 일에 집착했지?’ 하는 생각이 드니까 감사하는 사람의 말에는 여유가 있다. 타인에 대한 포용의 한도가 그만큼 크다. 원망 불평으로 마음의 용량이 늘 마이너스가 되어 가면 타인에 대한 용납의 한도가 계속 줄어든다. 감사를 결단하고 훈련하자. 감사한 다음에 기쁨이 따라오고 불평한 다음에 짜증이 따라온다. 감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이끌어 가지만 불평은 사탄이 원하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이끌어 간다. 감사의 종점은 천국이고 원망 불평의 종점은 지옥이다. 2. 그리스도인의 감사, 넘치는 감사 우리의 감사가 어떠한 감사가 되어야 하는지 바울 사도의 권면을 들어 보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우리 삶은 예수님 안에 있다. 예수님께 우리 인생의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이다. 여기저기 왔다 갔다, 이리저리 오락가락하지 않고 예수님 안에 콕 박혀서 사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예수님 안에서 성장하는 여정이다. 말씀대로 살면서 굳센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는 것이다. 정리하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셨으니 예수님 안에 뿌리내리고 말씀 따라 사는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감사가 넘치게 하라고 권면한다. 누가 믿음이 강한 사람일까? 감사하는 사람이다. 내 믿음의 강도는 감사가 말해 준다. 내 믿음이 명품인지 불량품인지는 감사가 보여 준다. 감사는 명품 믿음의 보증서다. 감사가 없다면 불량품 믿음이다. 감사는 넘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넘치는 감사다. 자기 분량 이상의 감사를 하는 것이다. 내 기준 이상의 감사, 내 판단 이상의 감사, 내 감정 이상의 감사, 내 선택 이상의 감사다. 그러려면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가 가능한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예수님을 주로 영접했기 때문이다. 주는 ‘주인’을 말한다.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시니까 감사하라는 것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했으니”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영접했으니”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직분, 예수는 이름이다. ‘그리스도 예수’와 ‘예수 그리스도’는 강조하는 바가 다르다. 그리스도가 먼저 나오면 예수님이 그리스도, 곧 구원자로서 하신 일에 강조점이 있다. 구원자 예수님이 하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떠난 내 죄 때문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다. 나의 주님이 되셔서 천국 가는 그날까지 내 삶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고, 도우시며 책임져 주신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다. 성경이 다시 쓰이기 전까지는 변하지 않는다. 내 삶의 형편과 조건은 오락가락해도 나를 향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주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 되셔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도록 역사해 주실 것임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 삶의 형편, 조건, 기분, 감정과 상관없이 감사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 일평생 감사할 수 있다. 감사하자.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어렵고 힘들고 괴로울 때 인생이 마음대로 안 될 때 감사하자. 감사하면 사탄이 틈타지 못한다. 영적 시야가 넓어지고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 관계가 회복되고 인생이 달라지고 행복해진다. 아니 이미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Thanksgiving’뿐만 아니라, ‘Thanks-living’하자! 오정섭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신학연구소)
  • 2022.05.08

    구속사적인 삶 - 감사(1)
  •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 아니라 불만이다”라는 격언이 있다. 감사가 넘치는 사람은 행복하고 불만이 가득한 사람은 불행하다. 그리스도인도 예외가 아니다. 감사가 넘치는 그리스도인은 삶에 생기가 넘치고 주위를 밝게 만든다. 반면 불만이 가득한 그리스도인은 삶에 활력이 없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주위를 물들인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감사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감사는 그리스도인이 마주한 영적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강력한 무기이자 신앙고백이기 때문이다. 1. 에덴동산과 감사 창세기 3장을 보면 사탄이 하와에게 뱀으로 접근해 묻는다. “하나님이 진짜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어?” 여자가 “그건 아니고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이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먹으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셨지”라고 답한다. 사탄은 말한다. “에이 무슨 소리야, 먹어 봐라 절대 안 죽는다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게 되니까 하나님이 못 먹게 한 거야” 사탄이 한 말에 담긴 의미는 뭘까? ‘하나님이 너희에게 다 주신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하와가 이 말을 듣고 나서 선악과를 보니 웬걸,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였다. 유혹받기 전까지는 만지지도 말아야 할 금단의 열매였는데 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고 넘어뜨릴 때 괴물같이, 귀신같이 나타나서 협박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마음속에 거짓말 몇 마디만 넣어 줄 뿐이다. 사탄이 하와에게 한 말을 한 번 더 들여다보자. “선악과를 따 먹으면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게 될 거야. 그러면 하나님 없이도 세상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그런 능력을 갖추게 되는 거지. 하나님은 너희가 그런 능력을 얻는 게 싫어서 못 먹게 한 거야.” 사탄은 이 유혹의 말을 통해 하와가 하나님께 불만을 품도록 자극했고 하와는 거기에 꼴딱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무섭지 않은가? 하나님을 배신한 이유가 불만에서 비롯됐다니 말이다. 불만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하나님도 배반하게 만든다. 심지어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 남편도 ‘먹게 했다.’ 하와는 아담을 돕는 배필로 창조되었는데 죄를 지어 하나님을 배반하도록 도왔다. 불만의 파급력이 이렇게 큰 것이다. 개인도 망치고, 부부도 망치고, 가족도 망치고, 공동체도 망치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망친다. 그 불만이 객관적 사실인가? 뱀의 거짓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탄은 사람이 마음에 불만을 품으면 얼마나 쉽게 넘어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더 놀라운 점은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모든 것을 다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만이 들어오니까 하나님께 아무것도 못 받은 사람처럼 하나님을 배신했다. 만약 아담과 하와의 마음이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한 감사로 가득했다면 사탄의 거짓말에 넘어갈 수 있었을까? 인류의 비극은 감사하지 않는 마음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2. 약속의 땅과 감사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한 후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모세가 정탐꾼 열둘을 보냈다. 40일간 가나안에 출장을 다녀온 열두 정탐꾼이 결과를 보고했는데 10대 2로 의견이 갈렸다. 10명의 정탐꾼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일이니 가나안 땅은 이미 정복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부정적인 보고에만 귀를 기울였고 결국 정신줄을 놓고 말았다. 카카오톡, 인스타그램, 페이스북도 없던 시절에 부정적인 보고가 그렇게 쉽게 여론을 장악한 것이 기적이다. 성인 남자만 60만명이나 되었는데 그 많은 사람의 마음이 삽시간에 부정적인 보고에 사로잡히다니! 공기 중으로 퍼지는 전염병에라도 걸린 듯 말이다. 그들은 고된 광야길 여정에 쌓인 게 많았던지 울화통이 터진 김에 온갖 부정적인 말을 쏟아 냈다. 그들의 말을 들으신 하나님은 이렇게 응답하셨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야훼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 14:28).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말을 경청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감사의 말을 하는 습관이다. 인도 속담에 “인생의 첫 30년은 사람이 습관을 만들고 마지막 30년은 습관이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다. 감사의 습관을 만들면 나중에는 감사의 사람이 된다. 감사는 누가 잘할까? 감사해 본 사람이다. 불평은 누가 잘할까? 불평해 본 사람이다. 감사하는 사람한테는 모든 게 다 감사의 제목으로 보이고 불평하는 사람한테는 모든 게 불평거리로밖에 안 보인다. 나를 둘러싼 상황이나 내 처지가 결코 절대적인 게 아니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사람은 감사하고 어떤 사람은 불평한다. 하나님 같으면 어떤 사람에게 복을 주실까? 위대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 목사님의 잘 알려진 말이다. “촛불을 보고 감사하면 별빛을 주시고, 별빛을 보고 감사하면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면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면 천국을 주신다.” 마음, 삶, 가족에 천국이 임하기를 원하면 감사부터 시작하자. 만약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감사할 줄 알았다면 이스라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역사를 바꾸는 힘이 감사에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오정섭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신학연구소)
  • 2022.04.10

    구속사적인 삶 - 용서(3)
  • 용서는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용서는 억울함, 원한, 복수심으로부터 자유를 가져다준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전 대통령 넬슨 만델라는 말했다. “원한을 품고 사는 것은 독약을 먹으면서 원수가 죽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과거의 상처는 바꿀 수 없지만 용서는 오늘의 나를 달라지게 한다. 더는 과거의 희생자가 되지 말자. 미국 루터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인 라이맨 T. 런딘은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권리가 없는데 용서는 미래를 새로운 가능성과 기회로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보석과 같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제 용서를 실천해 보자. 1. 상대방이 나에게 한 잘못을 직면하자 누군가에게 상처받았을 때 “다 지난 일이야”, “어쩔 수 없지, 뭐” 이런 말로 넘어가려고 할 때가 많다. 그러나 말처럼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라고 되어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거나 실수가 아니라 ‘죄’라고 콕 집어 말씀하셨다. 우리는 안타깝게도 서로가 서로에게 죄를 짓는다.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용서에 관한 비유에도 빚의 액수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무엇을 말해주는가? 용서가 가능해지려면 그 사람이 나에게 빚진 것이 얼마인지를 구체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가 무엇을 잘못했고 그로 인해 나는 어떤 아픔을 겪고 상처를 입었는지를 직면해야 한다. 2. 잘못에 대해 갚을 것이 없다고 선언하자 죄를 짓는다는 것은 빚을 지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면 종류에 따라서 그것은 인격, 신체, 재산에 손해를 끼친 것이다. 물론 전부 다일 수도 있다. 만약 사과나 배상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빚이 된다. 일종의 채무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 채무 관계를 청산해 주는 것이 용서다. 사실 용서하지 않는 사람의 심리에는 채권자 지위를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용서의 핵심은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다. 물론 상대방은 나에게 상처 준 사실을 모를 수도 있다. 안다고 해도 사과는커녕 뉘우치는 기색조차 없을 수 있다. 상대방은 관심 없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 즉 상대방이 사과할 의사도 없고 아니 사과는 고사하고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를 때에도 용서가 가능할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여전히 죄인일 때 우리를 용서하시는 사랑을 베푸셨다.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써 말이다. 우리가 빌든 안 빌든, 잘못했다고 고백하든 안 하든 그 이전에 이미 우리를 용서하신 것이다. 만약 내게 잘못한 그 사람이 와서 빌고 내가 원하는 대로 했다고 치자. 그러고 나서 용서한다면 그게 진정한 용서일 수 있을까? 내 삶의 주도권을 나에게 상처 준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3. 내 마음의 감옥에서 그를 출소시키자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정죄하고 처벌해서 내 마음속 분노의 감옥에 가둬 두면 정작 그 감옥에 갇히게 되는 사람은 나다. 갚을 게 없다고 선언하고 풀어 줘야 마음의 법정에서 재판이 끝나고 내가 그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만약 그를 내 마음속 감옥에 가둔 채 분노가 올라올 때마다 마음의 법정에 불러들여 정죄를 계속한다면? 정작 괴로운 사람은 누구일까? 송사에 휘말려 재판을 받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가해자든 피해자든 재판 과정은 힘든 것이다. 더욱이 피해자로 사는 게 그렇게 행복한 일은 아니지 않는가? 감옥에서 풀어 준다는 의미는 더는 그를 죄인 취급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 사람을 그 사람 자체로서 용납하는 것이다. “나한테 잘못했으니 당신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라는 판결문을 폐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은 말 그대로 은혜 곧 값없이 주신 선물이다. 값어치가 없어서 값없이 주신 게 아니라 값을 매길 수 없어서 값없이 주신 것이다. 값을 매길 수 없는 그 큰 은혜를 우리가 받았다면 우리 삶은 그 값어치를 드러내는 삶이 되어야 마땅하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값어치가 있는 것인지는 우리가 무엇을 포기하고 사느냐가 보여 준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으로 세상에 드러나려면,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한 만큼 세상에 속한 것들을 우리가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성령님의 도움은 우리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게 하고도 남을 효능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성령님의 도움이 우리 삶에 실제로 효과가 나타나려면 구원받기 전과는 다른 선택을 우리가 해야 한다. 용서하며 살아가자. 오정섭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신학연구소)
  • 2022.03.13

    구속사적인 삶 - 용서(2)
  • 예수님은 우리가 용서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인간은 용서하는 존재이며 인간에게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가르치셨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용서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교훈은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용서에 관한 비유에서 비롯된다. 1.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 18) 한 나라의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이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많게는 2조 5000억원 정도 된다. 액수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갚을 수 없는 빚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임금이 그 빚을 조건 없이 탕감해 준다. 말 그대로 기적이다. 빚진 종은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을 것이다. 종은 엄청난 빚을 탕감받고 나가는 길에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곧 500만원을 빚진 친구를 만났다. 멱살을 잡고 패대기를 치면서 당장 갚으라고 윽박질렀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친구를 고소하여 감옥에 처넣었다. 이 소식을 500 데나리온 빚진 사람의 또 다른 친구들이 알게 됐다. 임금에게 달려가 친구의 딱한 사정을 아뢰었다. 임금이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를 불러서 “네가 한 짓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하며 그를 감옥에 가두고, 일만 달란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출소는 없다고 엄명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비유의 결론은 이렇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그런데 이 말씀을 하나의 율법처럼 이해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그 용서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알고도 남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2조 5000억원을 탕감받았는데, 500만원 때문에 고소라니. 비율은 유지하고 단위를 낮춰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A와 B는 한 회사의 입사 동기이자 친구다. 어느 날 A가 업무 실수를 저질러 회사에 2500만원의 손해를 끼쳤다. 사장님께 불려간 A는 해고당하겠지 싶었지만, 놀랍게도 아무런 징계도 받지 않고 사장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A는 뛸 듯이 기뻤고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A는 사무실로 돌아가던 길에 친구 B를 만났다. 그런데 갑자기 A가 B의 멱살을 잡더니, 며칠 전 자판기 커피를 뽑아 먹으려는데 부족하다며 빌려 간 50원을 갚으라고 소리 질렀다. B가 당장 동전이 없다고 하자 A는 친구 B를 회사 윤리위원회에 제소해 버렸다. 이런 일이 가능할까? 만약 A가 그랬다면 2500만원이라는 일종의 빚을 탕감받은 것이 A의 마음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이다. 이것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또 만약 그랬다면 A는 자신이 회사에 손해를 끼친 것을 용서받은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자신이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 것인 마냥 말이다. 아니면 A가 사장님에게 용서받은 건 A의 상상이었고 사실 A는 해고당한 것이었거나! 우리는 창조의 하나님, 우리 생명의 주인 되신 분께 죄를 지은 것이다. 그 죗값은 우리가 뭘 해도 다 치를 수 없을 만큼 크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그 죗값을 탕감받았다면 그 감사와 감격은 나에게 잘못한 사람의 죗값을 탕감해 주고도 남을 만큼 크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용서하면 용서받는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이 하나님께 용서받기 위한 전제조건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용서받음과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시적인 사건이라는 의미다. 2. 주기도문에서의 용서 다음으로 마태복음 6장에 기록된 주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보자. 주기도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하나님을 향한 세가지 간구와 우리를 위한 세가지 간구다. 그 가운데 우리를 위한 세가지 간구는 이렇다. 첫째, “일용한 양식을 주시옵고”, 매일의 삶을 의탁하는 간구다. 둘째,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용서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간구다. 셋째,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말 그대로 사탄의 유혹에 빠져들어 가도록 허용하지 마시고 악으로부터 구원해 달라는 간구다. 그런데 우리를 위한 세가지 간구의 중심에 ‘용서 실천’이 있다. 그만큼 주님은 우리가 용서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3. 용서를 위한 첫걸음 심리학자로서 행동건강학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딕 티비츠가 쓴 『용서의 기술』이란 책을 보면 용서를 실천하도록 돕는 팁이 나온다. “첫째, 다른 사람들이 나와는 다른 규칙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라. 둘째, 내가 받은 상처에 관한 이야기, 즉 ‘억울한 사연’에 집착하지 말라. 셋째,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살아온 처지에 공감함으로써 그를 보는 시각을 바꿔 보라.”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말했다. “우리 중에 가장 악한 사람에게도 좋은 점이 있고, 우리 중에 가장 선한 사람에게도 악한 점이 있다.” 다음 편에서는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용서를 실천할 수 있는지 나눠 보도록 하겠다. 오정섭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신학연구소)
  • 2022.02.13

    구속사적인 삶 - 용서(1)
  • 정죄보다 용서를 택하신 예수님 1. 그리스도인의 용서란? 그리스도인에게 용서란 어떤 의미일까? 그리스도인에게 용서란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떼려야 뗄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왜일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 보자.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배드리고 찬양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하고 응답되기를 기대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용서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존재가 되었을까? 온 세상이 창조되고 최초 인류로서 아담과 하와가 이 땅에 유일하게 거주하던 때에 비극적이게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 죄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창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제멋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 모든 말과 행동이다. 죄는 하나님 없음을 주장하는 것과 하나님 없음을 기준으로 하는 삶이다. 한 마디로 인간 삶의 하나님 부재가 죄다. 죄가 치명적인 것은 하나님을 상대로 한 잘못이라는 점이다. 또한 죄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한 대가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으로 밖에 지불이 안된다는 점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죄의 대가는 사망이다. 단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재 가운데 영원히 사는 지옥의 처벌이다. 그래서 구원받지 못한 이에게 죽음은 형벌이다. 반면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영원히 사는 천국의 축복이다. 이렇듯 하나님의 부재를 선택한 이에게는 죽음이라는 처벌이 주어지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처벌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공의를 위한 처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속사의 핵심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에 대한 대가를 우리에게 지우기를 원하시지 않았다. 우리 생명을 멸하여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을 원하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용서하셨을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셨다. 우리 죄에 대한 대가인 생명의 박탈이라는 처벌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대신 받게 하신 것이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그 죽음을 통해 우리를 용서하셨고, 하나님이 아들 예수를 통해 하신 그 일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용서의 선물을 받게 하셨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의 핵심은 용서다. 그런데 이런 용서가 갑자기 나온 이야기일까? 아니다. 구약성경의 핵심도 사실 하나님의 용서다. 구약시대 하나님과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민족 사이의 관계를 위해 말씀하신 제사들 역시 용서가 핵심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용서받는 일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용서는 하나님의 권한이고 신앙의 목적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으로 생각했다. 3. 예수님의 용서 유대인의 이런 사고방식에 균열을 일으킨 분이 예수님이시다. 마가복음 2장을 보면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있는 어느 집에서 말씀을 가르치셨다. 인산인해를 이뤘다. 말씀이 시작되고 난 후 뒤늦게 도착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도 보기 어려웠다. 이때 우리가 잘 아는 중풍병자 치유 사건이 일어난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이들이 먼저 온 사람들에 막혀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게 되자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내린 사건 말이다. 이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렇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막 2:5). 이 말을 들은 서기관들, 요즘 말로 하면 신학대 교수님들의 생각은 이랬다.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 2:6~7). 그들은 중풍병자에 대한 예수님의 용서 선언을 신성 모독으로 보았다. 용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시기에 앞서 용서를 선언하셨다. 예수님은 그런 말이 신성 모독으로 몰릴 것을 모르실 리 없었다. 그만큼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는 용서가 굉장히 중요했던 것이다. 요한복음 8장을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예수님 앞에 끌려 나온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때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 내용이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 8:10~11). 누구나 손가락질할 만한 일에도 예수님은 정죄보다는 용서를 선택하신다. 진정한 새 출발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은 정죄에 따른 형벌을 치름이 아니라 용서의 은혜에 대한 감격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도 용서하기를 원하셨다. 예수님은 인간은 용서하는 존재이며, 인간에게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가르치셨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오정섭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신학연구소)
  • 2022.01.09

    내 삶의 행복은 무엇인가?
  • 예수님 재림 확신하고 세상 물질에 얽매이지 않는 것 나이는 어리지만 똘똘한 한 아이가 있었다. 어느 날 아이는 궁금해졌다.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해 저렇게 열심히 사는데, 도대체 행복의 조건은 뭘까?’ 아이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묻기 시작했다. 먼저 길에서 구걸하는 사람에게 행복의 조건은 무엇이냐 물었다. 그가 답했다. “당연히 돈이지. 돈이 많아서 큰 집 사고, 깨끗한 옷 사 입고, 먹고 싶은 것 마음껏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어!” 아이는 돈 많은 부자를 찾아갔다. 큰 집에 살고 고급 차를 타며, 좋은 옷을 입고 있는 나이가 지긋하신 신사였다. ‘구걸하는 사람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을 갖췄으니 이 사람은 행복할 거야.’ 아이는 생각하며 물었다. 노신사는 답했다. “젊고 건강한 몸으로 사는 게 진정한 행복이야. 내 팔다리로 마음껏 뛰고 달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최고의 행복이지.” 아이는 노신사가 말한 행복의 조건을 갖춘, 젊고 건강한 청년을 찾아가 같은 질문을 했다. 청년은 답했다. “따뜻하고 화목한 가정이 제일 중요하지.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언제나 함께할 아내와 귀엽고 재롱부리는 아이들이 있으면 행복할 거야.” 아이는 아름다운 아내, 사랑스러운 다섯 아이를 가진 남자를 찾아가 물었다. 남자는 답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가족도 잠시 잊고 나만의 평화로운 시간을 가진다면 정말 행복할 거야.” 이렇게 여러 사람을 만난 뒤 아이는 행복의 조건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행복의 조건은 바로 나에게 없는 것이구나.’ 나의 행복의 조건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현재 자신이 가진 것을 누리기보다 갖지 못한 것을 얻는 데에 인생을 소비한다. 아픈 사람은 건강, 가난한 사람은 돈, 미혼인 사람은 배우자, 전세 사는 사람은 자기 집을 가지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행복의 조건으로 여긴다면 그 사람은 평생 행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한 가지를 얻고 나면 부족한 또 다른 한 가지가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1. 시편 1편의 행복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행복은 무엇일까? 종교개혁가 칼뱅이 시편을 두고 ‘영혼의 해부학’이라고 했을 만큼 시편에는 인간의 희로애락이 다 담겨 있다. 시편 1편을 보자. “복 있는 사람은”이라고 시작하는 시편 1편은 시편 150편의 창문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시편 1편을 펼쳐 보면 시편 전체를 들여다볼 수 있다. 시편 1편의 주제가 무엇인가? 참된 행복이다. “복 있는 사람”을 의역하면 “행복한 사람은”이라고 할 수 있다. 시편 1편이 말하는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말씀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이다. 2. 하나님 나라 새 백성의 행복 마태복음 5~7장을 산상수훈 또는 산상설교라고 부른다. 산상설교는 하나님 나라 새 백성으로 부름받은 이들이 가져야 할 정체성에 대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말씀이다. 그런데 그 산상설교의 포문을 여는 것이 바로 우리가 ‘팔복’이라고 부르는 ‘여덟 가지 행복 선언’이다.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새 백성으로 부름 받은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행복관’을 새롭게 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 새 백성으로서의 행복이 무엇인지,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부터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이 행복이고, 누가 행복한 사람인가? 마음의 가난함, 곧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을 가진 상태 자체가 행복이고 하나님을 향한 갈급한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3. 초대교회 성도들의 행복 성경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을 꼽으라면 누구를 꼽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초대교회 성도들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행 2:44~47, 새번역). 행복해 보이지 않는가?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했을까? 예수님의 재림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확신하고 세상 물질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 아니라 불만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배반한 이유가 무엇인가? 사탄의 말을 들어보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사탄은 인간이 하나님께 불만을 품도록 자극했다. ‘아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덜 주신 게 있었다고!’라고 말이다. 불만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하나님도 배반하게 만든다. 우리는 하나님이 성취하실 구속 역사에 동참하기 위해 이 땅에 단기선교 온 것임을 잊지 말자. 하나님이 주신 것에 만족할 줄 알고 절대긍정 절대감사로 살아가는 행복한 성도가 되자. 오정섭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신학연구소)
  • 2021.12.12

  • 순복음가족신문

    PDF

    지면보기

  • 행복으로의 초대

    PDF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