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담임목사 주일설교
조용기 원로목사 주일설교
오늘의 묵상
10월 18일(토) -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 ◎ 말씀 : 사 60:1~3 ◎ 찬송 : 502장(통 259장)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셨을 때나 바벨론 포로 생활 후 돌아오게 하셨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같은 부르심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열방에 드러내는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어두워진 세상을 밝히기 위해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빛을 발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먼저 우리에게 임했기에 빛을 비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영광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빛으로 오셔서 어둠 속에 있던 우리를 구원하셨고 이제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며 세상을 비추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이 귀중한 사명을 온 힘을 다해 수행할 때 열방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구원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게 해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10.1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0월 17일(금) - 자격 증명
  • ◎ 말씀 : 고후 6:3~10 ◎ 찬송 : 449장(통 377장) 사도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는 이들은 그가 교만하고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담대히 자신을 변호하며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결코 실족할 만한 장애물을 두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감당했으며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신실하게 복음을 전해 왔다고 자신 있게 증언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맡은 사역자가 사람들에게 선한 본이 되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복음을 듣는 이들이 변화되려면 그 복음을 전하는 자가 부도덕하거나 부적절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당당히 자신을 변호한 바울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어떤 일에서든지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10.1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0월 16일(목) - 천국을 소망하는 삶
  • ◎ 말씀 : 고후 5:1~2 ◎ 찬송 : 435장(통 492장) 사도 바울은 우리 몸을 언젠가 무너질 장막에 비유하며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이 마련하신 영원한 집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한 소망을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신 영원한 나라에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천국에서 우리의 거처를 준비해 놓고 우리와의 만남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천국을 소망하는 삶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해줍니다.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게 합니다.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세상의 헛된 것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으며 그의 사랑과 은혜를 나눌 때 우리는 천국 소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그 날을 소망하며 천국 본향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믿음을 잃지 않고 영원한 천국에 이르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10.1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순복음의 12대 핵심진리
    2. 범사가 잘되는 축복
  • 하나님 안에서의 나눔은 ‘플러스’ 우리는 저주를 속량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범사가 잘되는 축복을 받고 형통한 삶을 살게 됐다. 하나님은 본래 뜻대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다고 하셨지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 인간의 삶은 저주의 가시와 엉겅퀴로 뒤덮이게 됐다(창 3:17~18). 그 결과 인간은 땀 흘려야 먹고 사는 존재로 전락해 버렸으며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와 고통의 저주 가운데 살게 됐다. 인간은 이런 저주와 고통의 운명을 바꾸려고 애썼지만 어떤 방법으로도 운명을 바꾸지 못했다. 이러한 인간의 저주받은 운명을 회복시킨 분이 예수님이시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복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저주를 짊어지고 피 흘리심으로 우리는 저주에서 벗어나 축복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됐다(갈 3:13~14).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모든 저주에서 벗어나 범사에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모든 일이 저절로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아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은 오히려 하나님께 힘과 지혜를 구하면서 주어진 일을 감당해 나가며 요한삼서 2절에 기록된 ‘범사에 잘되는’ 형통의 복을 실제로 경험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발적인 가난이나 청빈한 삶만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기독교의 축복 신앙을 단순한 기복 신앙으로 오해한 데서 나온 생각이다. 물론 물질적인 축복만을 추구하는 태도는 문제지만 그렇다고 성경이 말하는 복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복이 되어 다른 이들에게 그 복을 흘려보내길 원하신다. 영혼뿐 아니라 범사에 임하는 복은 크리스천이 마땅히 구해야 할 하나님의 선물이다(출 20:6). 크리스천은 물질에 지배당하는 자가 아니라 물질을 다스리며 사는 자이다. 그래서 헌금은 하나님께 받은 복에 대한 감사의 고백이며 모든 소유가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는 믿음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헌금은 거짓이나 속임이 없이 온전해야 한다(말 3:8~10).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려는 데 있다. 하나님께 받은 복은 이웃과 함께 나누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때 진정한 복이 된다. 하나님의 계산법은 세상의 방식과 다르다. 하나님 안에서의 나눔은 마이너스가 아니라 플러스다. 하나님은 나누는 자에게 후히 주시고,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은혜와 축복을 더해주신다(눅 6:38). 그렇기에 우리는 받은 복을 움켜쥐고 있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나누는 자에게 더욱 풍성한 복으로 채워주시는 분이다. 우리를 복의 통로로 사용하시기 위해서라도 축복해 주실 것이다.
  • 2025.10.03 / 김주영 기자

    1. 영혼이 잘되는 축복
  • 예수님 십자가 은혜로 누려야 할 온전한 구원 전인 구원의 출발점, 모든 축복의 근본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맺을 때 모든 복 뒤따라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이 말씀은 사도 요한이 가이오에게 보낸 개인적인 편지의 일부이자 인사말이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안에서 누려야 할 온전한 구원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순복음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을 ‘전인 구원’으로 본다. 이는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와 환경까지 아우르는 총체적인 축복으로 조용기 목사는 이를 삼중축복이라 했다. 이 삼중축복의 개념은 요한삼서 1장 2절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이 잘되는 축복’이다. 이는 다른 모든 축복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 그러나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면서 영적으로 죽은 존재가 됐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의 대가를 치르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셨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고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됐다. 죄로 인해 깨졌던 창조주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영혼이 잘되는 길이다. 이러한 영적 축복의 우선성은 삼중축복 신앙이 기복신앙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지점이다. 우리의 믿음은 물질적 축복이나 치유의 기적에 있지 않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한다’는 말이 반드시 시간적인 순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육체적 질병이 치유되거나 문제 해결을 통해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은 영혼 구원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사업, 가정, 학업, 건강에도 복이 임하게 된다. 모든 일의 열쇠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 우리는 영적 축복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의 영적 상태를 점검해야 한다. 영적 축복을 계속 유지하는 비결은 다음과 같다. 첫째, 회개이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다. 우리는 끊임없이 마음과 행동으로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둘째, 말씀이다. 육신의 건강을 위해 음식이 필요하듯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한다. 셋째, 성령 충만이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는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그 뜻대로 살아갈 수 있다. 영혼이 잘되는 축복을 누릴 때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지는 복이 뒤따르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모든 것의 시작이자 핵심이기 때문이다. 나의 영적 상태, 특히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지지 않았는지를 점검하며 다른 어떤 축복보다 영적인 축복을 누리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 2025.09.05 / 복순희 기자

    선교 열전
    (18) 김창식 목사
  • 머슴 출신 한국인 최초 목회자 박해 속 복음 지키며 ‘한국의 바울’로 불려 한국 초기 교회사의 빛나는 별 중 한 사람인 김창식 목사는 머슴 출신으로 한국 최초의 목사가 됐다. 한평생 순회 전도인으로 살아간 그는 당시 선교사들의 회고록에 고난 속에서도 복음을 굳게 붙들었던 ‘한국의 바울’로 기록되어 있다. 1857년 황해도 수안군 성동면 생금리에서 태어난 그는 머슴살이를 하던 시절, 선교사들에 대한 괴소문을 접했다. 당시 “아이들의 간을 떼어 약을 만든다”, “눈을 빼어 만든 것이 카메라다”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미국 북감리교 올링거 선교사의 집에 잡부로 취직해 선교사의 사생활을 감시했다. 하지만 불미스러운 행동은 전혀 찾을 수 없었고 오히려 올링거 부부의 인격과 겸손한 삶에 감동을 받아 마음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1888년 4월 아펜젤러에게 침례를 받은 뒤 선교사들의 든든한 조력자가 됐다. 김창식 목사가 ‘한국의 바울’로 불린 가장 큰 계기는 1894년 평양에서 일어난 기독교인 박해 사건이었다. 이때 김창식도 잡혀가 죽을 지경의 고문을 받았으나, “나는 기독교가 옳다는 사실을 안 이상 기독교 신자로 살 것이며 나가서도 복음을 전하겠다”며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 그는 감옥에서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라는 말씀과 함께 “주님을 배반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석방 직후 곧이어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평양은 격전지가 됐고 교회와 병원은 피난민들의 은신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당시 김창식은 홀 선교사와 함께 남아 피난하지 못한 사람들과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홀 선교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김창식 목사는 평양 선교 전반을 홀로 맡아 감당했다. 이후 그는 노블 선교사와 함께 평양 이북 지역의 교회를 이끌었다. 거리와 산골을 누비며 복음을 전해 ‘길바닥의 목사’, ‘민중 전도인’으로 불렸던 그는 1901년 5월 서울 정동교회에서 한국 최초의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회 사역 동안 김창식 목사는 48개 교회를 개척하고 전국 170여 교회를 돌보며 교파와 지역의 경계를 넘어 순행 사역자로 전국을 누비며 목회에 헌신했다. 교인들에게 스스로 신앙을 세우고 전도하는 ‘자립·자전’ 정신을 강조했던 김창식 목사는 1929년 1월 29일 향년 72세로 소천 받았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가장 작은 자’라 칭하며 겸손과 헌신의 삶을 살았다.
  • 2025.08.29 / 금지환 기자

    (17) 존 로스
  • 최초의 한글 성경 번역으로 선교 토대 마련 최초의 한글 신약성경인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를 출판하고 이후 신약성경 전체를 번역하는데 기여한 존 로스(John Ross, 1842~1915)는 조선인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섰다.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로스는 조선의 복음화를 꿈꾸며 한글 성경 번역에 자신의 젊은 날을 헌신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그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입학했다. 신학교에 입학한 로스는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비롯해 독일어, 중국어 등 외국어를 공부했다. 사람들이 외국어를 공부하는 이유를 묻자 로스는 “예수님은 너희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는데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당연히 많은 외국어를 공부해야 한다”고 답했다. 신학생 시절 로스는 중국 선교사인 허드슨 테일러의 강연에 참석해 “중국에서 수억 명의 사람들이 복음을 모른채 죽어가고 있다”는 메시지를 듣고 복음을 알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선교사가 될 것을 결단했다. 1872년 중국에 도착한 로스는 먼저 선교 중이던 존 매킨타이어와 함께 길거리에서 한문으로 번역된 성경을 나눠주며 전도를 시작했다. 로스가 중국어로 설교를 할 수 있을 만큼 유창한 어학 실력을 갖추게 된 후에는 직접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순회 전도를 했다. 그는 중국인들에게 익숙한 유교적 표현을 이용해 기독교 교리를 이해시키려 노력했고 현실에 지쳐 불교·도교 사원으로 도피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찾아가 복음을 전했다. 당시 만주 지역에는 중국인뿐 아니라 조선인, 러시아인, 일본인 등 다양한 민족의 사람들이 거주했다. 주변 선교사들을 통해 조선을 알게 된 로스는 만주 지역에서 전도하며 머지않아 조선에도 복음의 문이 반드시 열릴 것을 확신했다. 그는 “조선인이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우리가 한글 성경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않겠습니까?”라며 주변 사람들에게 한글 성경에 대한 필요성을 알리고 번역에 힘썼다. 그는 당시 한문으로 된 성경은 이미 있었지만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글을 통해 복음이 더 많은 이들에게 전파될 것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로스는 자신이 한글을 공부하면서 정리한 내용과 예문을 바탕으로 조선을 방문할 선교사들에게 도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국어 교재인 ‘조선어 첫걸음’이라는 책도 저술했다. 비록 그는 조선의 쇄국 정책과 기독교 박해로 조선 땅을 밟지는 못했다. 그러나 조선과 가까운 중국 만주를 선교 거점으로 삼고 조선인들과 교류하며 복음을 전해 조선에 공식적인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 기독교 신앙이 자리 잡도록 기틀을 마련한 선교사다.
  • 2025.05.23 / 금지환 기자

    (16) 말콤 펜윅
  • 초기 한국기독교 토대 마련 성경·찬송 번역하며 46년간 헌신한 선교사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 1863~1935)은 국내에서 헌신하며 신약성경과 찬송을 우리말로 번역한 선교사다. 찬송이 수록된 『복음찬미』, 전도를 위한 성경 구절을 모은 『만민됴흔긔별』 발간뿐 아니라 1919년에는 『신약젼셔』 를 출판했다. 캐나다인인 그는 26살 때 초교파 모임인 나이아가라 사경회에 참석해 성경을 공부하던 중 인도 선교사로 활동한 로버트 와일더의 “사막에서 애타게 물을 찾으며 죽어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한 유리 주전자에 담긴 물이 아닌 오직 물이다”라는 간증을 듣고 선교사로 결단했다. 1889년 입국한 펜윅은 국내에서 복음을 전하며 250여 개의 교회를 세웠다. 펜윅은 장로교 조사 서경조와 동행하며 한국어를 배워 황해도 송천에서 ‘예수 사랑하심은’(Jesus Loves Me), ‘나는 참 기쁘다’(I am so glad) 찬송과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해 소년들에게는 성경을 가르치고 마을의 여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성경 공부를 이끌었다. 그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 15:20)는 사도 바울과 같은 신념을 갖고 개신교 선교부가 없는 원산으로 이동해 자립 선교의 토대 마련을 위해 농장을 운영했다. 1906년 ‘대한기독교회’를 조직한 펜윅은 다른 사람이 전하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선교 정책으로 삼고 원산을 중심으로 만주와 시베리아까지 소외된 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교단의 목사와 전도사는 순회사역자가 되어 전국에서 전도 활동을 펼쳤고 교인들도 전도 현장에 투입돼 복음 전파에 앞장섰다. 펜윅은 전도자들이 개척한 교회들을 돌아보며 그들의 신앙을 격려했고 가는 곳마다 사경회를 개최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집회가 끝나면 참석자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해 원산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이단 활동에 효과적으로 대처했다. 펜윅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만주를 거쳐 시베리아까지 복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마지막 순간까지도 선교에 힘썼다. 복음 전파를 향해 기관차처럼 달려온 그는 원산의 자택에서 72세의 나이로 하나님 곁으로 갔다. 말콤 펜윅은 이 땅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이래 46년간 선교하며 어떤 교파에도 의지하지 않고 한국인 사역자와 함께 초기 한국기독교의 토대를 마련했다.
  • 2025.01.31 / 박찬웅 기자

    주일설교 요약본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라
  •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브리서 10장19~22절)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하는 예수 보혈의 능력으로 마음을 성결케 하고 하나님 영광 위해 살아야 그리스도인은 하루를 살아도 의미 있고 보람되며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 안에서 거룩한 꿈을 품고 그 꿈을 향해 믿음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우리 옛 사람의 모습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꿈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 멀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길, 주님이 열어주신 새로운 살길을 보여줍니다. 1. 예수님의 피의 능력 히브리서 10장은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이 계신 성소로 나아갈 때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힘입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이처럼 예수님의 보혈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믿음으로 전진할 때 우리의 발걸음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옛 사람, 곧 죄성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히 12:1). 과거의 상처, 실패의 경험, 죄와 허물, 인간의 욕망, 자존심과 교만 등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붙잡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이 모든 결박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입니다. 주님의 보혈에 죄 사함과 정결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오직 예수님의 보혈만이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그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변화되어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우리는 더 이상 옛 사람의 모습에 붙잡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담대히 주님 앞에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날마다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여 주님의 은혜와 축복, 사랑과 용서 가운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 큰 제사장되신 예수님 예수님은 우리의 큰 제사장으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히 10:21). 구약의 제사장은 백성의 죄가 사함받도록 하기 위해 짐승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히 2:17).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하기 위해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4000년의 구약 역사는 피로 드리는 제사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를 흘려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예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히 4:14).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주님의 보혈이 우리의 죄와 허물을 깨끗이 씻어 주시며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나아가 주님의 은혜와 축복의 자녀로 변화시켜 주셔서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거하게 하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통로가 되십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종교나 훌륭한 사람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요 14:6).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이 지금도 우리를 은혜의 보좌 앞으로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우리는 날마다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보혈의 은혜를 힘입어 때를 따라 돕는 은혜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3.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라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말씀의 생수로 씻음을 받아 새롭게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더욱 깊이 누리기 위해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바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첫 번째 순서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자녀도, 사업도, 범사도 잘 되지만 우리가 우선순위를 바꾸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어 문제 속에 갇히게 됩니다. 첫째도 주님의 은혜, 둘째도 주님의 은혜, 마지막도 주님의 은혜입니다. 사람을 의지하면 상처를 받고 배신을 당하지만 하나님께 나아가면 용서와 사랑, 치유와 회복의 은혜가 임합니다. 하나님은 실패가 변하여 성공이 되게 하시고 상처가 변하여 치료와 용서가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은혜의 보좌 앞에, 긍휼의 보좌 앞에, 사랑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히 4:16). 우리는 거짓 없는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감동시키는 그런 믿음의 사람이 될 때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며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은혜가 임합니다. 세상은 지금 너무나 힘들고 어렵다고 말하지만 주님을 바라볼 때 희망이 있습니다. 오히려 힘들고 어려울 때가 바로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야훼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 73:2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먼 훗날 주님을 만날 그날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부족하고 연약하며 허물투성이인 우리들을 택하사 주의 보혈로 정결케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주님만 바라보며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길 원합니다.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10.0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절대 절망이 변하여 절대 희망으로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장 23~26절) 고난 중에 믿음으로 나아갈 때 절망은 희망으로 바뀌게 돼 걱정과 근심 하나님께 맡기고 주와 동행하며 승리의 삶 살아야 사람이 한평생 살아가면서 가장 슬픈 일은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는 것입니다. 가족을 잃은 아픔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때로는 그 슬픔이 사람을 절망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도 우리는 남아 있는 가족을 생각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을 붙잡아야 합니다. 인생에는 누구에게나 절망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나아갈 때 절망은 소망과 승리로 바뀌게 됩니다. 1. 절대 절망에 처한 가정 요한복음 11장에는 절대 절망에 빠진 한 가정이 나옵니다. 바로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삼 남매의 가정입니다. 그 집안의 가장이었던 나사로가 죽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요 11:17). 예수님은 베다니에 살던 이 가정을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동쪽 약 3.2㎞ 지점에 있는 마을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오실 때마다 이 집에 머물며 제자들과 함께 쉼을 얻으셨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언제나 예수님을 정성껏 섬겼습니다. 언니 마르다는 손이 커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찾아와도 늘 풍성하게 대접하느라 분주했습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눅 10:40). 반면 동생 마리아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말씀을 듣기를 사모하는 영적인 여인이었습니다. 나중에는 값비싼 향유를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기도 했습니다.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요 11:2).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이 부모처럼 의지하던 오라버니 나사로가 중병에 걸렸습니다. 자매들은 급히 사람을 보내 예수님께 알렸습니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요 11:3).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오지 않으시고 며칠 더 머물러 계신 뒤에야 베다니로 오셨습니다. 그때는 이미 나사로가 세상을 떠난 지 나흘이나 지난 후였습니다.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요 11:17). 사랑하는 오라버니의 죽음을 목격한 마르다와 마리아는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우리 역시 인생을 살다 보면 예고 없이 절망의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절망이 끝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절망의 자리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준비하시고 믿는 자에게 다시 일어설 길을 열어주십니다. 2. 절대 절망이 주는 교훈 나사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요 11:4). 이처럼 고난이 다가와도 그 뒤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창세기에 나오는 꿈꾸는 요셉의 인생이 그 증거입니다. 요셉은 어린 시절 하나님이 보여주신 꿈을 품었지만, 그의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렸고 억울하게 감옥살이까지 했습니다. 무려 13년 동안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시간을 보낸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꿈을 붙들고 하나님만 바라보았고 하나님은 그와 함께하시며 그를 형통케 하셨습니다. 하루아침에 애굽 왕 바로의 꿈을 해석하게 된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가 말한 대로 7년 풍년과 7년 흉년이 찾아왔고, 애굽은 흉년에 대비하여 많은 사람들을 살려낼 수 있었습니다. 그때 22년 전 자신을 팔아버린 형들이 양식을 구하러 와서 요셉 앞에 절하였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보여주신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형들이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에게 절하며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을 원망하거나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절망 같았던 고난은 사실 하나님의 축복을 이루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역사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때로 억울한 일을 당하고 모함을 받고 고통 가운데 버려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을 세우셔서 결국 주님의 영광을 온 천하에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오직 주님만 믿고 의지하면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3. 절대 희망을 선포하신 예수님 절대 절망에 빠진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절대 희망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요 11:23). 마르다는 이 말씀을 먼 미래의 부활로 이해했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곧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선포하시며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제서야 마르다가 고백합니다.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 예수님의 말씀은 절대 희망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외치셨을 때(요 11:43) 죽었던 나사로가 온몸에 베를 칭칭 감은 채로 걸어 나왔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기적과 생명, 능력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절망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음성은 염려와 근심, 걱정을 가져오지만 주님의 음성은 우리에게 기쁨과 희망, 생명과 축복, 은혜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베로 감긴 채 걸어 나왔을 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요 11:44).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난 것처럼 예수님을 믿음으로 죽어 있던 우리가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생각과 과거의 상처가 여전히 우리를 묶어 절망하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우울증, 상처, 문제와 고통이 우리를 감싸지만 주님은 우리를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하십니다. 과거의 상처와 문제, 질병에서 자유함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성령 충만 받으면 모든 결박이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믿음은 맡기는 것입니다. 염려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기면 주님이 우리를 붙잡아 주십니다(시 55:22). 모든 결박에서 풀려나 자유케 되며 절대 절망이 절대 희망으로 바뀌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돌보시며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과 동행하며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고난과 이별, 절망과 시련 속에서도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약한 믿음으로 원망하고 불평했던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난 것처럼 우리의 모든 결박이 풀려 자유케 되고 절대 절망이 절대 희망으로 변하는 은혜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9.2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영적인 맹인
  •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요한복음 9장 13~17절) 빛 되신 주님 바라볼 때 영적인 맹인에서 눈 뜨고 빛 되신 예수님 만나 복음 전하는 삶 살게 돼 세상에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인 눈이 가려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적인 맹인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눈이 열려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적인 눈이 열려 하나님의 자녀로 복되게 살아가야 합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사람은 절망 가운데 있었지만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1. 절망 중에 태어난 인생 예수님이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을 뜨지 못하고 어둠 속에 살고 있던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요 9:1). 그는 죄와 절망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죄 가운데 태어나 죄 가운데 살다가 죄 가운데 죽어가는 영적인 맹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은 뜨고 있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고 살아가면 모든 것을 육신의 눈으로만 보고 판단하기에 결국 죄에 갇힌 영적 맹인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영적인 눈이 가려진 사람은 모든 것을 인간의 눈으로만 판단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 9:2). 문제를 가진 사람을 사랑으로 보살피고 도와주기보다 도리어 그의 문제를 지적했던 것입니다. 남의 허물을 발견하고 판단하는 것은 영적인 맹인의 공통적인 모습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말씀을 철저히 지킨다고 자부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며 십계명을 지켰지만 실제로는 영적 맹인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고도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는 이유로 비난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요 9:16). 이처럼 영적 맹인은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데만 급급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할 때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됩니다. 한 번뿐인 인생, 우리 모두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만나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갈 때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한평생 우리 삶 가운데 임하게 됩니다. 2. 생명의 빛 되신 예수님 예수님은 세상에 계시는 동안 생명의 빛이 되셔서 우리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 9:5). 이 빛 되신 예수님을 영접할 때 구원의 은혜가 임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9, 12). 생명의 빛 되신 예수님이 맹인을 보셨습니다. 주님이 보실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잘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께 잘 보이는 것입니다. 주님의 시선이 우리에게 머무를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자리다툼과 갈등을 일으킵니다. 우리는 빛 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임합니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맹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요 9:6~7). 성경에서 침으로 흙을 이겨 눈에 바르신 사건은 이곳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어 생기를 불어넣으신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창 2:7). 흔히 있는 흙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생명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은 무가치한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바꾸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 우리의 모습도 무가치했습니다. 죄 가운데 살고 방탕과 문제 속에 얽매여 있었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무가치한 존재가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흙이 예수님의 손에 들려 맹인의 눈에 발라지고 실로암 못에서 씻겼을 때 눈이 떠지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무리 무가치해 보여도 주님의 은혜가 임하면 존귀한 존재로 변화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3. 눈 뜬 맹인의 고백 앞을 보지 못하고 절망 중에 살던 맹인은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담대히 증언합니다.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요 9:11). 이 소식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맹인의 눈을 뜨게 했다는 이유로 논쟁하며 고침받은 사람을 다시 불러 심문합니다.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요 9:24~25). 영적으로 눈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붙였지만 그는 자신이 경험한 은혜를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혹시 바리새인처럼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살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고집과 교만, 불순종에 사로잡혀 다투고 분노하고 상처 주는 모습에서 떠나야 합니다. 잘못된 과거의 모습에서 떠날 때 우리 영의 눈이 열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육신의 눈과 영적인 눈을 함께 뜬 맹인은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 9:31~33). 당시 권력을 쥔 바리새인들이 그를 위협했지만 그는 당당히 자신이 받은 은혜를 증언했습니다. 세상 권력 앞에 입장을 바꾸는 이들과 달리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 편에 서서 진리를 선포하고 바른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눈을 뜬 맹인처럼 내가 만난 예수님을 담대히 고백해야 합니다. 만나는 모든 이에게 예수님이 구세주이시며 모든 문제의 해답이 되심을 전해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예수님을 전할 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한평생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영적인 맹인에서 눈을 뜬 자로 살아가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육신의 눈은 뜨고 살아가지만 때로는 바리새인처럼 영적인 맹인으로 살았음을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고집, 편견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했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이제 우리 영의 눈을 열어주셔서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빛 되신 예수님을 전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9.2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성경 인물
    (113) 사랑의 사도, 요한
  • 요한복음 등 저서 통해 복음 전파 예수님 만나 사랑의 사도로 변화돼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도 요한은 이며 기독교에 매우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이다.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제자이며 요한복음,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를 기록했고 신약성경의 유일한 예언서인 요한계시록을 썼다. 세베대의 아들인 요한은 형제 야고보와 함께 갈릴리에서 어부로 지내던 중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다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자 바로 예수님께 달려가 제자가 됐다. 예수님을 따른 이 두 형제는 예수님께 사랑받는 열 두 제자에 속했지만 감정이 격발할 때가 많았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소란을 뜻하는 의미의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실 정도였다. 요한은 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었지만 어디든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조급하고 폭력적이던 성격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해 변화됐다. 그는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 다른 제자들이 모두 도망을 했을 때에도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따라갔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제자 중에 유일하게 그곳을 지킨 제자였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무덤으로 맨 먼저 달려간 사람도 요한이었다. 예수님은 요한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에 자신의 어머니를 그에게 의탁하셨고 그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극진히 모셨다. 초대교회 설립의 핵심 인물이었던 요한은 사도 바울에게 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이라고 칭함을 받기도 했다. 노년을 에베소에서 설교와 저술활동으로 보내던 요한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 시에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죄목으로 밧모섬에 유배됐다. 그곳에서 신약의 마지막 복음서인 요한계시록을 저술했다. 사면되어 다시 에베소로 귀환한 그는 교회들을 지도하고 성경을 기록하며 에베소에서 말년을 보냈다. 요한은 요한복음에 자기 자신을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제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을 전심으로 사랑했던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사랑의 사도인 요한은 설교할 때마다 성도들에게 서로 사랑할 것을 강조했다. 그의 설교의 핵심은 늘 예수 그리스도였다. 우리 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강조하며 불신자와 믿는 자 모두를 아우르는 설교를 했다. 그가 남긴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에 가장 강조된 것이 바로 사랑이다. 전도지나 교회에서 가장 많이 보고 듣는 이 성경 구절 안에 사도 요한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확실히 담겨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 2024.11.29 / 이미나 기자

    (112) 한나
  • ‘간절한 기도의 여인’ 표상 문제 앞에 탄식하며 부르짖어 기도하면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은총 얻게 돼 한나는 ‘기도의 여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자신의 괴로움을 극복할 만한 힘과 능력이 없을 때 어떤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지 한나를 통해 우리는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에브라임 산지 여로암의 아들 엘가나에게는 한나와 브닌나 두 아내가 있었다. 소실인 브닌나에게는 자녀가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이름의 뜻인 ‘은총’과는 달리 자녀가 없었다. 매년 고통을 겪어야 했던 한나는 고통 중에 부르짖고 또 부르짖으며 하나님 앞에 통곡의 기도를 드렸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야훼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야훼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야훼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 1:10~11). 한나가 주께 드린 기도는 처절한 절규였으며 가슴에 멍이 드는 탄식의 간구였다. 그런 한나의 부르짖음에 하나님은 그 마음을 감찰하시고 한나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셨다. 성경 사무엘상 2장 1~10절은 한나가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기도에 응답해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격의 내용이 기록돼 있다.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야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야훼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은 먼저 자녀를 두어 그동안 한나를 업신여겼던 브닌나의 교만을 꺾어주시며 가정의 질서 또한 바로 세워주셨다.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삼상 2:5). “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삼상 2:9). 한나의 고백적 탄원과 언약의 서원을 보면 아들 사무엘이 하나님의 깊은 섭리와 은총에 의해 태어났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사무엘이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따라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는 것을 보면서 몇 가지 교훈도 얻게 된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헤아리신다는 것이다. 한나는 능력의 하나님을 믿었기에 포기하지 않고 응답을 얻을 때까지 기도했다. 또 성전에 나와 기도할 때 엘리 제사장이 술에 취한 것으로 오해할 정도의 절박하고 애끓는 기도를 드렸다. 기도 없이는 결코 응답을 얻을 수 없다. 둘째, 하나님은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는 역전의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이 신다. 자녀가 없던 한나는 브닌나의 업신여김을 참고 견뎌야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한나가 간구할 때 ‘은총’을 허락하셨고 고난의 주인공에서 영광의 주인공으로 그 삶을 변화시켜주셨다. 셋째, 한나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기도의 깊은 통찰력과 겸손의 지혜를 깨닫게 된다. 한나는 사무엘을 낳기까지 숱한 고통을 겪었지만 사무엘을 낳은 후 자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린다. 자녀가 내 소유물이 아님을 인정하는 겸손이다. 자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업이다(시 127:3). 이 땅에 사는 동안 청지기 사명을 가지고 자녀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자라도록 욕심을 버리고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며 한나와 같은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
  • 2024.11.01 / 오정선 기자

    (111) 안디바
  •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 주님을 섬기는 일에 타협 없던 안디바 한 사람의 순교가 지역 변화시켜 소아시아 버가모는 우상숭배가 만연한 도시로 유명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갖은 이유로 타협하고 우상숭배를 할 때 단 한 사람, 안디바는 우상숭배를 거부했다. 그는 뛰어난 석공이었지만 로마 황제의 신상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놋 가마 위에서 순교했다. 안디바는 로마 제국의 명령을 거절한 대가로 철판 위에 산 채로 구워져 순교를 당했지만 버가모교회 부흥의 씨앗이 됐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충성된 증인이라고 높여주셨다. 안디바라는 이름도 ‘모든 사람을 반대하는 자’라는 뜻이다. 안디바는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핍박하는 로마 관리들에게 당당했다. 그는 순교를 당하는 순간에도 “만왕의 왕, 만주의 주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니 예수 외에는 내가 절하지 않겠노라”고 외칠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순교를 통해 책망받던 초대교회 중 하나인 버가모교회가 변화됐다. 예수님을 영접했지만 지나온 삶을 끊지 못한 채 죄의 유혹에 빠져 살아가던 버가모교회의 성도들은 안디바의 순교를 보고 180도 달라졌다. 작은 유혹에도 넘어지고 흔들리던 이들이 우상숭배로 만연한 지역에서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외치게 된 것이다. 버가모교회가 있는 지역은 해발 300m의 높은 지역에 있었다. 또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사탄의 권좌’라고 불리는 무려 12m나 되는 거대한 제우스 신전과 로마 황제를 예배하는 신전도 있었다. 라틴 교부였던 터툴리안의 『순교자에 대해서』라는 책을 보면 안디바에 대해 알 수 있다. 당시 버가모교회의 그리스도인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한 부류는 예수님을 영접한 유대-그리스도인들이었다. 이들은 할례, 음식에 대한 규제, 율법을 지키는 것과 복음 사이에서 갈등했다. 또 다른 부류는 이방인이지만 기독교인이 된 헬라 성도들이었다. 이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 거리낌 없이 해 왔던 우상숭배, 성적인 문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건한 삶을 지켜가는 것에서 갈등했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도 당당히 하나님께 순종한 안디바의 신실한 믿음은 신앙이 흔들리던 많은 크리스천의 마음에 경종을 울렸다. 생계를 위한다는 이유로 세상과 타협하고 고난과 박해가 두려워 주님을 의지하지 못할 때가 있다면 고통 속에서도 주님 한 분만을 바라보며 의지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를 기억하자.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계 2:13).
  • 2024.10.04 / 박찬웅 기자

    예수님의 팔복
    ⑧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
  • 의를 위한 고난은 복된 길 산상수훈은 신앙생활의 핵심 천국 소망 갖고 믿음 지켜야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되어 있는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제자들과 무리를 향해 가르치신 말씀이다. 기독교 윤리와 신앙생활의 핵심을 담고 있는 예수님의 설교 중 가장 위대한 가르침이라고도 불린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가운데 마지막 팔복은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가장 도전적인 말씀이자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에 대한 기준을 제시한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는 말씀은 고난이라는 현실 너머에 있는 하늘의 상과 위로를 선포한다.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의’란 윤리적 정의를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뜻한다. 인간의 행위로 얻는 의로움이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그 의다. 그러므로 의로운 삶이란 곧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을 자랑하며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어둠을 드러내는 의와 진리는 세상의 가치와 충돌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라고 격려한다. 마태복음 5장 11~12절은 이렇게 덧붙인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이러한 복은 단지 위로의 말이 아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이라는 증거다. 예수님 때문에 조롱받고 오해받는 그 길은 하나님이 그 위에 함께하신다는 확증이 된다. 베드로전서 4장 14절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말씀한다. 세상에 빛과 소금되신 의로우신 예수님께서는 가장 많은 핍박을 받으셨다. 빛은 어둠을 불편하게 하고, 소금은 부패를 막아 거부감을 일으킨다. 예수를 따르는 삶은 세상과 갈등하게 마련이고 박해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자연스럽게 따르는 열매인 것이다. 팔복의 시작과 끝은 모두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는 동일한 복으로 연결된다. 이는 팔복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과 궁극적 소망을 드러내는 말씀임을 보여준다. 믿음의 길에는 고난이 따르지만 가장 복된 길이다. 예수님을 따라 의로운 삶을 살다가 핍박을 받는 자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그는 이미 천국의 시민이며 하늘의 상이 예비 됐기 때문이다. 의로운 삶은 하늘의 상급으로 이어지며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때 고난이 오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담대히 나아가자. 그 길 끝에는 주님의 상급과 위로가 반드시 기다리고 있다.
  • 2025.07.31 / 이미나 기자

    ⑦ 화평하게 하는 자
  • 피스메이커,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사람 평화의 왕 예수님 세상에 전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음을 받는 복 누려야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세상이 추구하는 물질적인 복이 아닌,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과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 진정한 복이라 소개하는 팔복에서 일곱 번째로 소개된 ‘화평하게 하는 자’는 헬라어 ‘에이레네포이오스’로 ‘에이레네’(평화)와 ‘포이에오’(만들다)의 합성어이다. ‘팔복’에서 화평은 성경의 평화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단순히 평화를 사랑하는 수준을 넘어 적극적으로 갈등을 중재하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을 뜻한다. 일명 ‘피스메이커’(Peace Maker)이다. 성경이 말하는 피스메이커는 혼자 평화롭게 살면서 평화의 열매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과 공동체를 화해시키는 어려운 일에 자신을 바쳐 헌신하는 사람이다. 대표적인 피스메이커로는 예수님이 있다. 그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처한 인류의 ‘피스메이커’로 오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자녀가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됐다(롬 5:1). 독단과 분열이 가득했던 이 세상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화평의 길이 열린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군림하고 누리는 삶을 살지 않으셨다. 우리에게 평안을 주기 위해 헌신적인 사랑을 베푸셨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갈등과 분열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하나 되게 하는 ‘피스메이커’가 되어야 한다. 경쟁하거나 다투는 대신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삶을 본받아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될 때 이 세상에 평화가 임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음 받는 진정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성경이 말하는 화평에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기쁜 소식, 즉 복음을 전하는 것도 포함된다는 점이다(사 52:7). 그래서 화평케 하는 자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로 말미암아 궁극적인 평화가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전파하는 것이 곧 평화를 이루는 핵심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중세 평화의 사도인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처럼 우리도 세상의 화해자가 되어야 한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 신앙을, 거짓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가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 2025.07.04 / 금지환 기자

    ⑥ 마음이 청결한 자
  • 천국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하나님 볼 수 있어 예수님의 보혈 의지해 마음 지켜 나아가야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본문으로 설교한 이영훈 목사는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마음에 더러움이 없고 깨끗한 것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정결해야 했다. 흠이 있는 것은 드릴 수 없었다”면서 “하나님께 우리가 드려지기 위해서는 흠이 없는 모습으로 나아와야 한다. 우리는 죄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기 때문에 예수의 보혈로 우리가 정결함을 입고 변화 받아야한다. 주 앞에 예배를 드릴 때에 우리가 정결한 모습으로 흠이 없는 모습으로 드려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하나님은 구만리장천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닌 무소부재하신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볼 수 없다. 모든 인간은 죄를 범하였고 율법적으로 온전하고 정결해질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는 마음 자세만큼은 순전하고 순수할 수 있다. 이는 두 마음을 품지 않고 마음을 청결히 하여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는 우상숭배의 죄, 음란의 죄, 누추함의 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회개해야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대속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을 수 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 마음을 청결히 하고 매 순간 성령님께 마음을 드리고 정결케 해주시기를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 조용기 목사는 마음 상태에 따라서 보이는 것이 다르게 보인다고 설명하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내 주먹을 믿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해를 봐도 하나님이 보이고 달을 봐도 하나님이 보이고 별들을 봐도 하나님이 보이고 꽃 한 포기를 봐도 ‘아! 하나님이 묘하게 지으셨구나’ 사람들을 봐도 ‘하나님이 얼마나 이쁘고 아름답게 사람을 만드셨느냐’라고 말한다”고 했다. 또한 조용기 목사는 “밉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밉게 보인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면 미운 가운데도 모든 아름다운 것이 눈에 보인다. 마음이 나의 환경을 바라보게 하고 결정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요소가 되는 것이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전했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 충만을 간구하고 예수님의 보혈에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스스로 마음을 잘 지켜서 하나님만 바라볼 때 천국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처럼 이땅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고 교제하면서 살아가는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다.
  • 2025.05.30 / 복순희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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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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