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담임목사 주일설교
조용기 원로목사 주일설교
오늘의 묵상
6월 21일(토) - 고요함의 힘
  • ◎ 말씀 : 계 8:1 ◎ 찬송 : 539장(통 483장) 일곱째 인이 떨어질 때 하늘은 약 반 시간 동안 고요해졌습니다. 이전 인들이 떼어질 때와 달리 이 고요함은 오히려 천둥소리보다 더 강렬한 긴장감을 주었습니다. 여섯 개의 봉인을 떼는 과정에서 고조되던 긴장감은 이 고요함 속에서 절정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침묵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습니다. 활을 쏘기 직전,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긴 순간의 고요함은 화살을 과녁에 명중시키기 위해 가장 중요한 시간입니다. 새 시대는 바로 이런 긴장이 감도는 고요함 속에서 탄생합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와 같은 침묵의 순간이 필요합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요함 속에서 새로운 시작을 위한 힘과 능력을 얻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분주한 일상생활 속에서도 주님과 함께하는 고요한 시간을 회복하여 새로운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해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6.1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6월 20일(금) - 역전의 하나님
  • ◎ 말씀 : 에 9:21~22 ◎ 찬송 : 487장(통 535장) 유대인들은 매년 아달월 14일과 15일 이틀 동안 부림절을 지킵니다. 당시 유대인의 적대자 하만은 아달월 13일에 유대인을 몰살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스더를 통해 그 계획을 무산시키시고 이날을 기쁨의 날로 바꾸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를 ‘부림절’이라 정해 매년 기념합니다. ‘부림’은 하만이 제비뽑기로 날짜를 정한 데서 유래했으며 하나님의 뜻 가운데 그날이 승리와 기쁨의 날이 된 것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절망도 기쁨과 축제로 바꾸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절망을 소망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십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믿음으로 전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놀라운 역전의 은혜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하심을 믿고 위기를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케 해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6.1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6월 19일(목) - 기도의 향기
  • ◎ 말씀 : 계 5:7~8 ◎ 찬송 : 364장(통 482장) 사도 요한의 두 번째 환상에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린 두루마리를 취합니다. 그러자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손에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들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엎드려 경배합니다. 대접에 담긴 향은 성도들의 기도였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의 기도는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금 대접에 담겨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금 깨닫게 합니다. 기도는 공허한 외침이 아니라 하나님이 받으시는 향기로운 예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반드시 기도를 들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날마다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응답과 기적을 경험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기도가 반드시 하나님 앞에 상달됨을 기억하고 기도를 게을리하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6.1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예수님의 팔복
    ⑥ 마음이 청결한 자
  • 천국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하나님 볼 수 있어 예수님의 보혈 의지해 마음 지켜 나아가야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본문으로 설교한 이영훈 목사는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마음에 더러움이 없고 깨끗한 것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정결해야 했다. 흠이 있는 것은 드릴 수 없었다”면서 “하나님께 우리가 드려지기 위해서는 흠이 없는 모습으로 나아와야 한다. 우리는 죄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기 때문에 예수의 보혈로 우리가 정결함을 입고 변화 받아야한다. 주 앞에 예배를 드릴 때에 우리가 정결한 모습으로 흠이 없는 모습으로 드려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하나님은 구만리장천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닌 무소부재하신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볼 수 없다. 모든 인간은 죄를 범하였고 율법적으로 온전하고 정결해질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는 마음 자세만큼은 순전하고 순수할 수 있다. 이는 두 마음을 품지 않고 마음을 청결히 하여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는 우상숭배의 죄, 음란의 죄, 누추함의 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회개해야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대속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을 수 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 마음을 청결히 하고 매 순간 성령님께 마음을 드리고 정결케 해주시기를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 조용기 목사는 마음 상태에 따라서 보이는 것이 다르게 보인다고 설명하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내 주먹을 믿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해를 봐도 하나님이 보이고 달을 봐도 하나님이 보이고 별들을 봐도 하나님이 보이고 꽃 한 포기를 봐도 ‘아! 하나님이 묘하게 지으셨구나’ 사람들을 봐도 ‘하나님이 얼마나 이쁘고 아름답게 사람을 만드셨느냐’라고 말한다”고 했다. 또한 조용기 목사는 “밉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밉게 보인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면 미운 가운데도 모든 아름다운 것이 눈에 보인다. 마음이 나의 환경을 바라보게 하고 결정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요소가 되는 것이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전했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 충만을 간구하고 예수님의 보혈에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스스로 마음을 잘 지켜서 하나님만 바라볼 때 천국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처럼 이땅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고 교제하면서 살아가는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다.
  • 2025.05.30 / 복순희 기자

    ⑤ 긍휼히 여기는 자 
  • 긍휼, 깊고 심오한 하나님의 가르침 진정한 용서와 사랑의 마음이 회복 가져와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나온 팔복 중 다섯 번째는 ‘긍휼’에 관한 내용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불쌍히 여김을 의미한다. 사랑과 자비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은 긍휼에 관한 가르침으로 누가복음 10장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기도 했다. 강도 만난 유대인을 제사장과 레위인은 지나쳤지만 사마리아인은 긍휼한 마음으로 그를 주막으로 데려가 돌봐주고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대가를 지불하겠다며 자비의 마음을 실제 행동으로 나타낸다.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짓고 불의해 추악해진 인생들을 긍휼히(불쌍히) 여기셨기에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주셨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제물로 삼으셨다. 아들을 제물로 바쳐서 우리 죄를 다 청산하게 하시고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용서와 의, 영광을 얻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탁월하신 긍휼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산 소망을 가지고 영광 중에 재림의 주를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무궁하신 긍휼과 자비의 결과이다. 따라서 긍휼을 받은 우리는 긍휼을 실천하며 살아가야 한다. 야고보서 2장 13절은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남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고 혹독히 심판하면 자신도 긍휼이 필요할 때 긍휼을 받지 못하고 혹독한 심판을 받게 된다. 사랑 실천과 용서의 삶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통로가 된다. 예수님은 긍휼, 자비의 실천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성경은 긍휼을 베푸는 자가 긍휼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이다. 마태복음 6장 14절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라고 기록하고 있다. 긍휼을 입은 자는 부모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같이 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부모는 자녀가 60세가 되어도 그 자녀를 언제나 긍휼의 마음으로 바라본다. 긍휼의 마음이 우리 안에 가득할 때 긍휼에 빚진 자들은 더 많아지고 또 다른 긍휼의 마음을 양산해 더 많은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된다. 대한민국은 지금 정치적 불안과 사회적 갈등 심화로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러한 때 크리스천은 절망 대신 희망의 빛이 대한민국에 살아나도록 긍휼의 마음을 안고 서로를 바라봐야 한다. 가족과 이웃, 지역 속에서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면 우리 안에 서로를 향한 불신과 미움의 마음은 더 이상 자라나지 못하게 된다.
  • 2025.05.02 / 오정선 기자

    ④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하나님의 의를 찾을 때 영적 허기 채워지고 만족 얻어 산상수훈의 팔복 중 네 번째 말씀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받는 복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배고픔과 목마름은 인간 생존에 중요한 요소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육체적 갈망을 넘어서 영적인 갈망에 대해 이야기하시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영적인 만족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란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의 도덕적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시하신 규율과 정의이다. 사람들의 생각과 법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의 도덕적 기준은 상황에 따라 지나치게 높거나 이중적이기도 해서 부조리함을 드러낸다. 이로 인해 우리는 때때로 상실감을 경험하고 그 결핍을 해결하려는 시도로 자연으로 들어가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불확실한 인생 속에서 단단한 마음을 갖고 정도를 걷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필수다. 다윗은 어린 시절부터 왕이 되기까지 하나님의 의를 갈망하고 그 인도하심을 간구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 42:1~2).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 63:1). 하나님을 갈망하며 의를 구했던 다윗도 인간적인 실수를 하고 그로 인해 깊은 자책과 회개를 경험했다. 양치기 소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이 하나님의 길과 인간적인 선택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갈등을 겪었을지 성경 말씀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먹고 마시는 일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 먼 길을 떠나기도 하고 원하는 것을 위시리스트에 적어두기도 한다. 육체적인 갈급함은 쉽게 느껴지지만 영적인 갈급함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자주 내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나의 영적 상태는 지금 배부른 상태인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정의를 실현하는 삶’을 열망하는 마음이 첫 번째요, 그 길을 잊지 않고 의를 실천하기 위해 ‘기도와 말씀으로 영적 습관’을 기르는 자가 아닐까. 이렇게 하나님의 의로 삶을 채워 나갈 때 주님이 우리의 영적 허기를 채워주시고 진정한 만족감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 2025.04.04 / 김주영 기자

    선교 열전
    (17) 존 로스
  • 최초의 한글 성경 번역으로 선교 토대 마련 최초의 한글 신약성경인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를 출판하고 이후 신약성경 전체를 번역하는데 기여한 존 로스(John Ross, 1842~1915)는 조선인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섰다.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로스는 조선의 복음화를 꿈꾸며 한글 성경 번역에 자신의 젊은 날을 헌신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그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입학했다. 신학교에 입학한 로스는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비롯해 독일어, 중국어 등 외국어를 공부했다. 사람들이 외국어를 공부하는 이유를 묻자 로스는 “예수님은 너희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는데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당연히 많은 외국어를 공부해야 한다”고 답했다. 신학생 시절 로스는 중국 선교사인 허드슨 테일러의 강연에 참석해 “중국에서 수억 명의 사람들이 복음을 모른채 죽어가고 있다”는 메시지를 듣고 복음을 알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선교사가 될 것을 결단했다. 1872년 중국에 도착한 로스는 먼저 선교 중이던 존 매킨타이어와 함께 길거리에서 한문으로 번역된 성경을 나눠주며 전도를 시작했다. 로스가 중국어로 설교를 할 수 있을 만큼 유창한 어학 실력을 갖추게 된 후에는 직접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순회 전도를 했다. 그는 중국인들에게 익숙한 유교적 표현을 이용해 기독교 교리를 이해시키려 노력했고 현실에 지쳐 불교·도교 사원으로 도피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찾아가 복음을 전했다. 당시 만주 지역에는 중국인뿐 아니라 조선인, 러시아인, 일본인 등 다양한 민족의 사람들이 거주했다. 주변 선교사들을 통해 조선을 알게 된 로스는 만주 지역에서 전도하며 머지않아 조선에도 복음의 문이 반드시 열릴 것을 확신했다. 그는 “조선인이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우리가 한글 성경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않겠습니까?”라며 주변 사람들에게 한글 성경에 대한 필요성을 알리고 번역에 힘썼다. 그는 당시 한문으로 된 성경은 이미 있었지만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글을 통해 복음이 더 많은 이들에게 전파될 것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로스는 자신이 한글을 공부하면서 정리한 내용과 예문을 바탕으로 조선을 방문할 선교사들에게 도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국어 교재인 ‘조선어 첫걸음’이라는 책도 저술했다. 비록 그는 조선의 쇄국 정책과 기독교 박해로 조선 땅을 밟지는 못했다. 그러나 조선과 가까운 중국 만주를 선교 거점으로 삼고 조선인들과 교류하며 복음을 전해 조선에 공식적인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 기독교 신앙이 자리 잡도록 기틀을 마련한 선교사다.
  • 2025.05.23 / 금지환 기자

    (16) 말콤 펜윅
  • 초기 한국기독교 토대 마련 성경·찬송 번역하며 46년간 헌신한 선교사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 1863~1935)은 국내에서 헌신하며 신약성경과 찬송을 우리말로 번역한 선교사다. 찬송이 수록된 『복음찬미』, 전도를 위한 성경 구절을 모은 『만민됴흔긔별』 발간뿐 아니라 1919년에는 『신약젼셔』 를 출판했다. 캐나다인인 그는 26살 때 초교파 모임인 나이아가라 사경회에 참석해 성경을 공부하던 중 인도 선교사로 활동한 로버트 와일더의 “사막에서 애타게 물을 찾으며 죽어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한 유리 주전자에 담긴 물이 아닌 오직 물이다”라는 간증을 듣고 선교사로 결단했다. 1889년 입국한 펜윅은 국내에서 복음을 전하며 250여 개의 교회를 세웠다. 펜윅은 장로교 조사 서경조와 동행하며 한국어를 배워 황해도 송천에서 ‘예수 사랑하심은’(Jesus Loves Me), ‘나는 참 기쁘다’(I am so glad) 찬송과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해 소년들에게는 성경을 가르치고 마을의 여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성경 공부를 이끌었다. 그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 15:20)는 사도 바울과 같은 신념을 갖고 개신교 선교부가 없는 원산으로 이동해 자립 선교의 토대 마련을 위해 농장을 운영했다. 1906년 ‘대한기독교회’를 조직한 펜윅은 다른 사람이 전하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선교 정책으로 삼고 원산을 중심으로 만주와 시베리아까지 소외된 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교단의 목사와 전도사는 순회사역자가 되어 전국에서 전도 활동을 펼쳤고 교인들도 전도 현장에 투입돼 복음 전파에 앞장섰다. 펜윅은 전도자들이 개척한 교회들을 돌아보며 그들의 신앙을 격려했고 가는 곳마다 사경회를 개최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집회가 끝나면 참석자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해 원산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이단 활동에 효과적으로 대처했다. 펜윅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만주를 거쳐 시베리아까지 복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마지막 순간까지도 선교에 힘썼다. 복음 전파를 향해 기관차처럼 달려온 그는 원산의 자택에서 72세의 나이로 하나님 곁으로 갔다. 말콤 펜윅은 이 땅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이래 46년간 선교하며 어떤 교파에도 의지하지 않고 한국인 사역자와 함께 초기 한국기독교의 토대를 마련했다.
  • 2025.01.31 / 박찬웅 기자

    (15)로티 문(Lottie Moon) 선교사
  • 일평생 중국 복음화 위해 헌신한 선교사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 일평생 수 만명의 중국인에게 찬양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파한 독신 여성 선교사가 있다. 미국 남침례교에서 파송한 로티 문이다. 1840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로티 문은 어릴 적부터 침례교 신앙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로티의 본명은 샬롯 딕스 문(Charlotte Diggs Moon)이다. 미국 버지니아 알베말 출신인 로티는 18세가 되던 해에 브라더스 목사의 집회에 참석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했다. 이후 대학에서 성경 공부와 기도 모임을 주도하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났다. 갑작스런 사고로 아버지를 일찍이 여읜 로티는 당시 남녀 차별이 심각했던 시대적 배경에도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고등교육까지 받아 미국 남부에서 가장 학식이 높은 여인이 됐다. 1873년 중국에서 학원 사역을 펼치고 있었던 선교사 부부를 돕기 위해 중국 선교사로 파송된 로티는 평일에는 학생들을 가르쳤고 주말에는 시골 마을을 순회하며 전도에 매진했다. 로티는 1885년 외국인이 한 명도 없고 외국인 보호 조약과 거리가 먼 지역인 핑투라는 곳에 정착해 본격적으로 현지인 복음화에 앞장섰다. 전도를 위해서는 먼저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며 선교지에서 관계 전도를 이어갔던 그는 현지인과 같은 옷을 입고 활동하며 마을에 복음을 전했다. 복음을 전할 때마다 현지인들의 핍박이 거셌다. 그러던 어느 날, 현지에서 로티가 가르치는 성경을 비난하고자 참석했던 중국인 리 쇼우팅이 성경을 접하며 개종하게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후 리 쇼우팅은 사도 바울처럼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 되어 북부를 다니며 전도하고 1000여 명에게 침례를 베풀며 귀하게 쓰임 받았다. 38년간 중국에서 헌신한 로티의 노력으로 16개 교회와 56개 학교가 세워져 많은 학생을 배출하게 하는 열매를 맺었다. 또한 남성 전도사 42명, 여성 전도사 14명의 현지인 제자를 세웠고 이들을 통해 2000여 명 현지인이 침례를 받았다. 1912년 로티는 미국 남침례교의 재정 상황의 악화로 더 이상 선교 지원금을 받지 못하게 됐다. 거기에 기근까지 들어 아이들이 굶주리게 되자 자신의 식사를 나눠주며 본인은 금식을 하다 결국 25㎏까지 몸무게가 줄었다. 쇠약해진 몸을 회복하기 위해 미국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지만 미국으로 가는 길에 72세의 생일을 일주일 앞둔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추리아 호에서 소천을 받았다.
  • 2024.02.23 / 금지환 기자

    주일설교 요약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
  • “야훼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예레미야 29장 11~13절) 늘 성령님과 동행하며 하나님 주시는 평안 누리고 진심으로 주님께 기도하면 거룩한 꿈과 소망 얻게 돼 세상에는 하나님의 길과 인간의 길,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도 두 길 사이에서 흔들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1.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평안 성경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평안이라고 말씀합니다. “야훼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오늘날 세상은 불안과 근심, 염려로 가득하기에 많은 사람이 마음의 평안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로 물든 이 세상에서는 참된 평안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평안을 얻으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깊은 근심과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죄로 인해 마음의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탄식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우리에게 참된 평안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평안을 구하려고 애쓰는 대신 예수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모든 문제를 내려놓고 평안을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또한 우리가 참된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힘과 노력만으로는 예수님이 주신 평안을 온전히 지켜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 충만하여 늘 성령님과 동행하면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이 주신 평안을 지킬 수 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위대한 사도인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감리교를 창시한 요한 웨슬레도 성령 충만을 받은 후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우리의 인격과 삶 속에 성령의 열매가 풍성히 맺히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평안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성령님이 임하시면 우리 마음에 사랑과 기쁨이 가득하게 되고 예수님이 주신 평안으로 넘쳐나게 됩니다. 우리 안에 주어진 평안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인정하시며 도우신다는 믿음의 확신에서 비롯됩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야훼이시니이다”(시 4:8). 하나님이 주신 평안을 소유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불안해하거나 분노하지 않으며, 불평하지도 않습니다. 항상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을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 하나님께서 주시는 미래와 희망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안과 함께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주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남유다의 멸망을 앞둔 절망의 때에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야훼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낙심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이루실 미래와 희망을 전했습니다. 비록 눈앞의 현실은 고난과 슬픔만으로 가득한 것 같지만 지금 겪는 고난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의 미래로 이끄시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절망은 끝이 아니라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징검다리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눈앞의 문제만 바라보고 쉽게 좌절하며 절망합니다. 이는 어둡고 부정적인 세상에 익숙해져서 불안을 견디고 이겨낼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이들은 무속에 기대어 위안을 얻으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들의 불안을 더욱 깊게 만들 뿐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참된 꿈과 희망을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우리는 눈앞의 고난에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믿으며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승리와 축복을 주시고 기적의 내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에게는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 같은 새 힘을 주신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야훼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세상이 절망과 어둠을 이야기할지라도 우리는 희망과 미래를 선포해야 합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를 보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말씀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는 것’이 세상의 시간표라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시간표입니다. 고난의 저녁이 지나가면 희망의 새벽, 축복의 새벽, 기적의 새벽이 밝아옵니다. 그러므로 주님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좋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3.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주시는 미래와 희망을 품기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렘 29:12).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와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부모와 자녀가 대화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알고 이해하듯이 우리도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고난 중에도, 평안할 때도, 외롭고 지치거나 병들었을 때도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우리에게 크고 은밀한 일들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야훼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시 3:4).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를 절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 인생에 고난의 밤이 지나가고 희망의 새벽이 밝아올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 평안과 희망임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은혜의 길로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다가오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문제와 씨름하거나 사람을 찾기보다 가장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처한 형편과 처지를 보고 안타깝게 여길 수 있지만 문제에 대한 답을 줄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문제와 어려움이 다가오면 마음에 평안이 임할 때까지 계속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마음의 평안 가운데 하나님이 거룩한 꿈과 소망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성령 충만을 받아 모든 문제를 이기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꿈과 소망 안에서 담대히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불안과 염려, 근심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평안과 미래의 소망을 부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도함으로써 놀라운 응답과 기적을 체험하길 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평안 안에서 믿음으로 담대히 전진하는 우리가 되게 해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6.0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지도자
  •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 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그들이 해가 있을 동안에도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도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그는 벤 풀 위에 내리는 비 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이 내리리니 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시편 72편 1~7절 세계 역사는 창조적인 소수에 의해 발전해 왔습니다. 크리스천들은 십자가 신앙 위에서 절대 긍정과 절대 감사로 무장하고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전하는 창조적 소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크리스천이 사람들을 바른길로 이끄는 영적 지도자가 되어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기를 원하십니다. 1. 공의로운 지도자 하나님은 공의로운 지도자를 찾고 계십니다. 공의로운 지도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판단하고 하나님의 지혜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시 72:1). 하나님은 악을 멸하시고 죄인을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그분이 인정하시는 의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올바른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이 땅 가운데 펼쳐 나갈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왕의 자리에 오르고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린 후,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라고 물으셨습니다(왕상 3:5). 이에 솔로몬은 듣는 마음 곧 분별력을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솔로몬이 구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이었기에, 하나님은 그에게 분별력뿐만 아니라 부귀와 영광까지도 함께 허락하셨습니다(왕상 3:12-13). 지도자는 자기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기준 삼아 모든 일을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지혜를 소유해야 하고, 겸손히 자신을 돌아볼 줄 알며 공의롭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 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시 72:2~3). 우리는 선한 일을 이루는 데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기를 소망하며, 공의와 사랑으로 세상을 섬기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2. 약한 자의 편에 서는 지도자 세상은 힘 있고 권력 있는 자 앞에 줄을 서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회적 약자의 편이 되셔서 그들과 함께하시며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마 9:10~11).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사랑으로 돌보며,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을 도울 때, 이를 보시고 기뻐하시며 우리 삶에 더욱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시 72:3~4). 또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들이 해가 있을 동안에도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도 대대로 그리하리로다”(시 72:5). 요셉은 노예로 팔려가고 감옥에 갇히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늘 그와 함께하시며 그를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야훼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야훼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야훼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창 39:21, 23). 사도 바울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자 힘썼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우리 역시 바울처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 길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에 행하신 3대 사역은 말씀을 가르치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며 병든 자를 고치시는 일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 4:23). 이처럼 예수님은 약한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사람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고 이를 채워줌으로써 그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신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서 메마른 땅에 내리는 단비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주위에 평안과 위로와 용기를 전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는 벤 풀 위에 내리는 비 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이 내리리니”(시 72:6). 서로를 격려하고 용서하며 화합하여, 사랑의 공동체를 함께 세워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3. 평화를 가져오는 지도자 오늘날 세상은 전쟁과 기근, 각종 재난으로 인해 두려움과 불안이 가득합니다. 우리나라 또한 분열과 갈등 속에 국민들의 마음이 편치 않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혼란한 시대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참된 평화입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만이 분열과 상처로 얼룩진 이 시대를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정의와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야훼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6~7).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길을 따르는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헌신하는 이들입니다. 이 땅 가운데 평화를 이룰 사명을 품은 크리스천과 지도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시 72:3, 7) 극심한 분열과 갈등으로 깊은 상처를 입은 이 세상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치유하고,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불안과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한 이 세상 속에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따라 우리도 세상에 평안과 위로를 전하는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대로 세상을 섬기는 영적인 지도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6.0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일어나서 함께 가자
  •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 아가 2장 10~12, 15절 고난의 시간 겪을 때 하나님 뜻 잘 분별해 뜨거운 사랑 회복하고 선한 영향력 나타내야 우리의 신앙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날마다 믿음의 주시며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앞으로 전진해 나아가야 합니다. 구약 아가서는 이 믿음의 여정을 남녀 간의 사랑으로 비유하며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 말씀합니다. 1.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인 교회와 성도 아가서의 남자 주인공은 솔로몬 왕입니다. 그는 많은 여인 중에서 술람미 여인을 특별히 사랑하고 귀하게 여겼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 2:10). 이 말씀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와 우리를 사랑하시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해도 하나님은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부르십니다. 술람미 여인은 포도원에서 일하느라 햇볕에 그을려 얼굴이 검게 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솔로몬 왕은 그녀를 택하여 매우 사랑했습니다.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아 1:6).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 왕의 사랑을 받고 있었기에 겉모습이 햇볕에 그을려 검게 되었어도 자신의 내면은 왕의 휘장처럼 아름답다고 담대히 고백합니다.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아 1:5). 만왕의 왕 되신 하나님은 수많은 사람 가운데 우리를 택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생각하는 대신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는 자부심을 품고 긍정적인 자화상을 세워가야 합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야훼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때로는 삶이 절망스럽고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사 43:4).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에 응답하여 절망과 슬픔의 자리에서 일어나고,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2. 우리에게 다가오는 희망의 봄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듯 고난의 겨울이 지나가면 축복의 봄이 우리에게 반드시 찾아옵니다. 어떤 절망 가운데 있더라도 우리는 곧 봄이 찾아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며 전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절망은 희망으로 슬픔은 기쁨으로 문제는 응답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아 2:11~12).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 왕을 볼 수 없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병까지 얻었다고 고백합니다.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아 2:5).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겨울과 같은 문제와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럴 때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지 않으시는 듯한 외로움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며 변함없는 사랑으로 언제나 우리 곁에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고난의 겨울을 겪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두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영적으로 더욱 강하게 훈련하시고 변화시키기 위함입니다. 둘째는 우리 삶 속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심으로 우리에게서 죄의 모습을 제거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고난의 겨울이 찾아왔다고 해서 절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다시 일어나기로 결단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기쁨의 꽃과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아 2:13). 절대 긍정과 절대 감사의 믿음으로 전진하며 희망의 봄을 맞이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3. 여우 같은 불신앙의 요소를 제거하라 포도원을 망치는 주범은 곰이나 사자와 같은 큰 맹수가 아니라 몰래 나타나 포도나무 뿌리를 갉아 먹고 도망가는 작은 여우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아 2:15). 우리의 신앙에도 은혜와 기쁨을 앗아가는 작은 여우들이 찾아옵니다. 영혼에 해를 가져오는 작은 여우, 곧 불신앙의 요소들을 우리는 쫓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큰 죄를 범할 때는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음을 쉽게 알아차리지만 사소해 보이는 죄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죄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사라지고 받은 은혜가 지속되지 못하며 예배의 열정마저 식어버렸다면 이는 이미 ‘작은 여우’가 우리의 마음에 들어왔다는 신호입니다. 사소하지만 반복되는 거짓말, 말씀에 대한 불순종, 영적 나태함, 시기와 질투, 원망과 불평, 부정적인 생각, 쉽게 화내는 태도, 남을 헐뜯고 비판하는 것, 다투고 분열하는 것 등 이 모든 것이 작은 여우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다른 사람에게는 엄격하면서도 자신에게는 관대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래서 타인의 작은 잘못은 쉽게 눈에 들어오지만 자기 잘못은 쉽게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경고하셨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 앞에서 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 중에 그리고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숨겨진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점검하고 작은 죄까지 철저히 회개하며 모든 불신앙의 요소를 깨끗이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신앙과 사랑의 관계를 해치는 어떤 모습도 우리 안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날마다 믿음 안에서 자신을 연단해야 합니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1~22).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 삶의 중심이며 전부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마음과 영혼에 품고 있다면 우리는 어떤 문제도 능히 이겨내고 우리의 신앙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회복하여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흘려보내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연약한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시며 늘 우리와 동행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인생에 어떤 문제와 어려움이 찾아와도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담대히 일어나 믿음으로 전진하길 원합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우리 안에 불신앙의 요소를 깨끗이 씻어주시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5.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성경 인물
    (113) 사랑의 사도, 요한
  • 요한복음 등 저서 통해 복음 전파 예수님 만나 사랑의 사도로 변화돼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도 요한은 이며 기독교에 매우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이다.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제자이며 요한복음,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를 기록했고 신약성경의 유일한 예언서인 요한계시록을 썼다. 세베대의 아들인 요한은 형제 야고보와 함께 갈릴리에서 어부로 지내던 중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다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자 바로 예수님께 달려가 제자가 됐다. 예수님을 따른 이 두 형제는 예수님께 사랑받는 열 두 제자에 속했지만 감정이 격발할 때가 많았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소란을 뜻하는 의미의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실 정도였다. 요한은 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었지만 어디든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조급하고 폭력적이던 성격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해 변화됐다. 그는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 다른 제자들이 모두 도망을 했을 때에도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따라갔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제자 중에 유일하게 그곳을 지킨 제자였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무덤으로 맨 먼저 달려간 사람도 요한이었다. 예수님은 요한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에 자신의 어머니를 그에게 의탁하셨고 그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극진히 모셨다. 초대교회 설립의 핵심 인물이었던 요한은 사도 바울에게 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이라고 칭함을 받기도 했다. 노년을 에베소에서 설교와 저술활동으로 보내던 요한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 시에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죄목으로 밧모섬에 유배됐다. 그곳에서 신약의 마지막 복음서인 요한계시록을 저술했다. 사면되어 다시 에베소로 귀환한 그는 교회들을 지도하고 성경을 기록하며 에베소에서 말년을 보냈다. 요한은 요한복음에 자기 자신을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제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을 전심으로 사랑했던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사랑의 사도인 요한은 설교할 때마다 성도들에게 서로 사랑할 것을 강조했다. 그의 설교의 핵심은 늘 예수 그리스도였다. 우리 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강조하며 불신자와 믿는 자 모두를 아우르는 설교를 했다. 그가 남긴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에 가장 강조된 것이 바로 사랑이다. 전도지나 교회에서 가장 많이 보고 듣는 이 성경 구절 안에 사도 요한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확실히 담겨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 2024.11.29 / 이미나 기자

    (112) 한나
  • ‘간절한 기도의 여인’ 표상 문제 앞에 탄식하며 부르짖어 기도하면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은총 얻게 돼 한나는 ‘기도의 여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자신의 괴로움을 극복할 만한 힘과 능력이 없을 때 어떤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지 한나를 통해 우리는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에브라임 산지 여로암의 아들 엘가나에게는 한나와 브닌나 두 아내가 있었다. 소실인 브닌나에게는 자녀가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이름의 뜻인 ‘은총’과는 달리 자녀가 없었다. 매년 고통을 겪어야 했던 한나는 고통 중에 부르짖고 또 부르짖으며 하나님 앞에 통곡의 기도를 드렸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야훼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야훼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야훼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 1:10~11). 한나가 주께 드린 기도는 처절한 절규였으며 가슴에 멍이 드는 탄식의 간구였다. 그런 한나의 부르짖음에 하나님은 그 마음을 감찰하시고 한나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셨다. 성경 사무엘상 2장 1~10절은 한나가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기도에 응답해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격의 내용이 기록돼 있다.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야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야훼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은 먼저 자녀를 두어 그동안 한나를 업신여겼던 브닌나의 교만을 꺾어주시며 가정의 질서 또한 바로 세워주셨다.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삼상 2:5). “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삼상 2:9). 한나의 고백적 탄원과 언약의 서원을 보면 아들 사무엘이 하나님의 깊은 섭리와 은총에 의해 태어났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사무엘이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따라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는 것을 보면서 몇 가지 교훈도 얻게 된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헤아리신다는 것이다. 한나는 능력의 하나님을 믿었기에 포기하지 않고 응답을 얻을 때까지 기도했다. 또 성전에 나와 기도할 때 엘리 제사장이 술에 취한 것으로 오해할 정도의 절박하고 애끓는 기도를 드렸다. 기도 없이는 결코 응답을 얻을 수 없다. 둘째, 하나님은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는 역전의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이 신다. 자녀가 없던 한나는 브닌나의 업신여김을 참고 견뎌야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한나가 간구할 때 ‘은총’을 허락하셨고 고난의 주인공에서 영광의 주인공으로 그 삶을 변화시켜주셨다. 셋째, 한나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기도의 깊은 통찰력과 겸손의 지혜를 깨닫게 된다. 한나는 사무엘을 낳기까지 숱한 고통을 겪었지만 사무엘을 낳은 후 자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린다. 자녀가 내 소유물이 아님을 인정하는 겸손이다. 자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업이다(시 127:3). 이 땅에 사는 동안 청지기 사명을 가지고 자녀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자라도록 욕심을 버리고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며 한나와 같은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
  • 2024.11.01 / 오정선 기자

    (111) 안디바
  •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 주님을 섬기는 일에 타협 없던 안디바 한 사람의 순교가 지역 변화시켜 소아시아 버가모는 우상숭배가 만연한 도시로 유명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갖은 이유로 타협하고 우상숭배를 할 때 단 한 사람, 안디바는 우상숭배를 거부했다. 그는 뛰어난 석공이었지만 로마 황제의 신상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놋 가마 위에서 순교했다. 안디바는 로마 제국의 명령을 거절한 대가로 철판 위에 산 채로 구워져 순교를 당했지만 버가모교회 부흥의 씨앗이 됐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충성된 증인이라고 높여주셨다. 안디바라는 이름도 ‘모든 사람을 반대하는 자’라는 뜻이다. 안디바는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핍박하는 로마 관리들에게 당당했다. 그는 순교를 당하는 순간에도 “만왕의 왕, 만주의 주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니 예수 외에는 내가 절하지 않겠노라”고 외칠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순교를 통해 책망받던 초대교회 중 하나인 버가모교회가 변화됐다. 예수님을 영접했지만 지나온 삶을 끊지 못한 채 죄의 유혹에 빠져 살아가던 버가모교회의 성도들은 안디바의 순교를 보고 180도 달라졌다. 작은 유혹에도 넘어지고 흔들리던 이들이 우상숭배로 만연한 지역에서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외치게 된 것이다. 버가모교회가 있는 지역은 해발 300m의 높은 지역에 있었다. 또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사탄의 권좌’라고 불리는 무려 12m나 되는 거대한 제우스 신전과 로마 황제를 예배하는 신전도 있었다. 라틴 교부였던 터툴리안의 『순교자에 대해서』라는 책을 보면 안디바에 대해 알 수 있다. 당시 버가모교회의 그리스도인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한 부류는 예수님을 영접한 유대-그리스도인들이었다. 이들은 할례, 음식에 대한 규제, 율법을 지키는 것과 복음 사이에서 갈등했다. 또 다른 부류는 이방인이지만 기독교인이 된 헬라 성도들이었다. 이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 거리낌 없이 해 왔던 우상숭배, 성적인 문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건한 삶을 지켜가는 것에서 갈등했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도 당당히 하나님께 순종한 안디바의 신실한 믿음은 신앙이 흔들리던 많은 크리스천의 마음에 경종을 울렸다. 생계를 위한다는 이유로 세상과 타협하고 고난과 박해가 두려워 주님을 의지하지 못할 때가 있다면 고통 속에서도 주님 한 분만을 바라보며 의지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를 기억하자.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계 2:13).
  • 2024.10.04 / 박찬웅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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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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