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담임목사 주일설교
조용기 원로목사 주일설교
오늘의 묵상
9월 20일(토) - 복의 통로
  • ◎ 말씀 : 행 28:8~10 ◎ 찬송 : 384장(통 434장) 로마로 향하던 바울의 배가 거센 풍랑에 파선되었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276명 전원이 무사히 멜리데 섬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섬의 지도자 보블리오의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며 안수했고 그의 병이 치유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치유 소식이 섬 전체에 퍼지자 많은 병자가 찾아와 치유를 받았습니다. 감사한 마음을 품은 섬 주민들은 바울 일행이 로마로 가는 데 필요한 모든 물자를 넉넉히 제공해 주었습니다. 죄수 신분으로 그 섬에 표류한 바울이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축복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전하는 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믿음으로 섬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으로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주변에 전하는 복의 통로가 되게 해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9.1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9월 19일(금) - 예수님은 누구신가
  • ◎ 말씀 : 행 26:7 ◎ 찬송 : 546장(통 399장)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예수님이 바로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메시야임을 증언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원했던 것이 죄에서 구원하시는 메시야가 아닌,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해 줄 정치적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비슷한 실수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필요와 욕망에 맞춰 예수님을 재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님을 단순히 물질적 축복을 주는 분으로 또는 우리의 문제만 해결해 주는 분으로 제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신 하나님의 아들, 참 메시야이십니다. 내 기준에 예수님을 맞추려 하지 말고, 그분을 바로 알고 따르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잘못된 신앙의 틀을 깨뜨려 주시고 예수님만이 나의 유일한 구원자 되심을 날마다 고백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9.1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9월 18일(목) - 무엇을 퍼뜨리겠습니까?
  • ◎ 말씀 : 행 24:5~6 ◎ 찬송 : 520장(통 257장)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벨릭스 총독 앞에 섰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변호사 더둘로를 앞세워 그를 고발했습니다. 더둘로는 ‘전염병 같은 자’라며 소리치며 바울이 유대 사회를 흔든다고 몰아붙였습니다. 그들은 왜 바울을 전염병에 비유했을까요? 바울이 가는 곳마다 복음이 급속히 퍼져나갔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는 것을 본 종교 지도자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적은 누룩이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하듯, 한 사람을 통한 복음의 능력은 온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바울 한 사람의 헌신이 로마 제국 전역에 복음의 물결을 일으켰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복음의 ‘거룩한 전염’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나의 삶은 어떤 영향력을 퍼뜨리고 있습니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향기로운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바울과 같이 성령 충만함으로 제가 가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하는 복음의 통로가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9.1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순복음의 12대 핵심진리
    1. 영혼이 잘되는 축복
  • 예수님 십자가 은혜로 누려야 할 온전한 구원 전인 구원의 출발점, 모든 축복의 근본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맺을 때 모든 복 뒤따라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이 말씀은 사도 요한이 가이오에게 보낸 개인적인 편지의 일부이자 인사말이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안에서 누려야 할 온전한 구원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순복음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을 ‘전인 구원’으로 본다. 이는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와 환경까지 아우르는 총체적인 축복으로 조용기 목사는 이를 삼중축복이라 했다. 이 삼중축복의 개념은 요한삼서 1장 2절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이 잘되는 축복’이다. 이는 다른 모든 축복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 그러나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면서 영적으로 죽은 존재가 됐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의 대가를 치르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셨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고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됐다. 죄로 인해 깨졌던 창조주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영혼이 잘되는 길이다. 이러한 영적 축복의 우선성은 삼중축복 신앙이 기복신앙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지점이다. 우리의 믿음은 물질적 축복이나 치유의 기적에 있지 않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한다’는 말이 반드시 시간적인 순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육체적 질병이 치유되거나 문제 해결을 통해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은 영혼 구원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사업, 가정, 학업, 건강에도 복이 임하게 된다. 모든 일의 열쇠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 우리는 영적 축복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의 영적 상태를 점검해야 한다. 영적 축복을 계속 유지하는 비결은 다음과 같다. 첫째, 회개이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다. 우리는 끊임없이 마음과 행동으로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둘째, 말씀이다. 육신의 건강을 위해 음식이 필요하듯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한다. 셋째, 성령 충만이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는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그 뜻대로 살아갈 수 있다. 영혼이 잘되는 축복을 누릴 때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지는 복이 뒤따르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모든 것의 시작이자 핵심이기 때문이다. 나의 영적 상태, 특히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지지 않았는지를 점검하며 다른 어떤 축복보다 영적인 축복을 누리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 2025.09.05 / 복순희 기자

    선교 열전
    (18) 김창식 목사
  • 머슴 출신 한국인 최초 목회자 박해 속 복음 지키며 ‘한국의 바울’로 불려 한국 초기 교회사의 빛나는 별 중 한 사람인 김창식 목사는 머슴 출신으로 한국 최초의 목사가 됐다. 한평생 순회 전도인으로 살아간 그는 당시 선교사들의 회고록에 고난 속에서도 복음을 굳게 붙들었던 ‘한국의 바울’로 기록되어 있다. 1857년 황해도 수안군 성동면 생금리에서 태어난 그는 머슴살이를 하던 시절, 선교사들에 대한 괴소문을 접했다. 당시 “아이들의 간을 떼어 약을 만든다”, “눈을 빼어 만든 것이 카메라다”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미국 북감리교 올링거 선교사의 집에 잡부로 취직해 선교사의 사생활을 감시했다. 하지만 불미스러운 행동은 전혀 찾을 수 없었고 오히려 올링거 부부의 인격과 겸손한 삶에 감동을 받아 마음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1888년 4월 아펜젤러에게 침례를 받은 뒤 선교사들의 든든한 조력자가 됐다. 김창식 목사가 ‘한국의 바울’로 불린 가장 큰 계기는 1894년 평양에서 일어난 기독교인 박해 사건이었다. 이때 김창식도 잡혀가 죽을 지경의 고문을 받았으나, “나는 기독교가 옳다는 사실을 안 이상 기독교 신자로 살 것이며 나가서도 복음을 전하겠다”며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 그는 감옥에서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라는 말씀과 함께 “주님을 배반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석방 직후 곧이어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평양은 격전지가 됐고 교회와 병원은 피난민들의 은신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당시 김창식은 홀 선교사와 함께 남아 피난하지 못한 사람들과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홀 선교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김창식 목사는 평양 선교 전반을 홀로 맡아 감당했다. 이후 그는 노블 선교사와 함께 평양 이북 지역의 교회를 이끌었다. 거리와 산골을 누비며 복음을 전해 ‘길바닥의 목사’, ‘민중 전도인’으로 불렸던 그는 1901년 5월 서울 정동교회에서 한국 최초의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회 사역 동안 김창식 목사는 48개 교회를 개척하고 전국 170여 교회를 돌보며 교파와 지역의 경계를 넘어 순행 사역자로 전국을 누비며 목회에 헌신했다. 교인들에게 스스로 신앙을 세우고 전도하는 ‘자립·자전’ 정신을 강조했던 김창식 목사는 1929년 1월 29일 향년 72세로 소천 받았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가장 작은 자’라 칭하며 겸손과 헌신의 삶을 살았다.
  • 2025.08.29 / 금지환 기자

    (17) 존 로스
  • 최초의 한글 성경 번역으로 선교 토대 마련 최초의 한글 신약성경인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를 출판하고 이후 신약성경 전체를 번역하는데 기여한 존 로스(John Ross, 1842~1915)는 조선인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섰다.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로스는 조선의 복음화를 꿈꾸며 한글 성경 번역에 자신의 젊은 날을 헌신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그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입학했다. 신학교에 입학한 로스는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비롯해 독일어, 중국어 등 외국어를 공부했다. 사람들이 외국어를 공부하는 이유를 묻자 로스는 “예수님은 너희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는데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당연히 많은 외국어를 공부해야 한다”고 답했다. 신학생 시절 로스는 중국 선교사인 허드슨 테일러의 강연에 참석해 “중국에서 수억 명의 사람들이 복음을 모른채 죽어가고 있다”는 메시지를 듣고 복음을 알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선교사가 될 것을 결단했다. 1872년 중국에 도착한 로스는 먼저 선교 중이던 존 매킨타이어와 함께 길거리에서 한문으로 번역된 성경을 나눠주며 전도를 시작했다. 로스가 중국어로 설교를 할 수 있을 만큼 유창한 어학 실력을 갖추게 된 후에는 직접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순회 전도를 했다. 그는 중국인들에게 익숙한 유교적 표현을 이용해 기독교 교리를 이해시키려 노력했고 현실에 지쳐 불교·도교 사원으로 도피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찾아가 복음을 전했다. 당시 만주 지역에는 중국인뿐 아니라 조선인, 러시아인, 일본인 등 다양한 민족의 사람들이 거주했다. 주변 선교사들을 통해 조선을 알게 된 로스는 만주 지역에서 전도하며 머지않아 조선에도 복음의 문이 반드시 열릴 것을 확신했다. 그는 “조선인이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우리가 한글 성경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않겠습니까?”라며 주변 사람들에게 한글 성경에 대한 필요성을 알리고 번역에 힘썼다. 그는 당시 한문으로 된 성경은 이미 있었지만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글을 통해 복음이 더 많은 이들에게 전파될 것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로스는 자신이 한글을 공부하면서 정리한 내용과 예문을 바탕으로 조선을 방문할 선교사들에게 도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국어 교재인 ‘조선어 첫걸음’이라는 책도 저술했다. 비록 그는 조선의 쇄국 정책과 기독교 박해로 조선 땅을 밟지는 못했다. 그러나 조선과 가까운 중국 만주를 선교 거점으로 삼고 조선인들과 교류하며 복음을 전해 조선에 공식적인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 기독교 신앙이 자리 잡도록 기틀을 마련한 선교사다.
  • 2025.05.23 / 금지환 기자

    (16) 말콤 펜윅
  • 초기 한국기독교 토대 마련 성경·찬송 번역하며 46년간 헌신한 선교사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 1863~1935)은 국내에서 헌신하며 신약성경과 찬송을 우리말로 번역한 선교사다. 찬송이 수록된 『복음찬미』, 전도를 위한 성경 구절을 모은 『만민됴흔긔별』 발간뿐 아니라 1919년에는 『신약젼셔』 를 출판했다. 캐나다인인 그는 26살 때 초교파 모임인 나이아가라 사경회에 참석해 성경을 공부하던 중 인도 선교사로 활동한 로버트 와일더의 “사막에서 애타게 물을 찾으며 죽어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한 유리 주전자에 담긴 물이 아닌 오직 물이다”라는 간증을 듣고 선교사로 결단했다. 1889년 입국한 펜윅은 국내에서 복음을 전하며 250여 개의 교회를 세웠다. 펜윅은 장로교 조사 서경조와 동행하며 한국어를 배워 황해도 송천에서 ‘예수 사랑하심은’(Jesus Loves Me), ‘나는 참 기쁘다’(I am so glad) 찬송과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해 소년들에게는 성경을 가르치고 마을의 여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성경 공부를 이끌었다. 그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 15:20)는 사도 바울과 같은 신념을 갖고 개신교 선교부가 없는 원산으로 이동해 자립 선교의 토대 마련을 위해 농장을 운영했다. 1906년 ‘대한기독교회’를 조직한 펜윅은 다른 사람이 전하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선교 정책으로 삼고 원산을 중심으로 만주와 시베리아까지 소외된 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교단의 목사와 전도사는 순회사역자가 되어 전국에서 전도 활동을 펼쳤고 교인들도 전도 현장에 투입돼 복음 전파에 앞장섰다. 펜윅은 전도자들이 개척한 교회들을 돌아보며 그들의 신앙을 격려했고 가는 곳마다 사경회를 개최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집회가 끝나면 참석자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해 원산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이단 활동에 효과적으로 대처했다. 펜윅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만주를 거쳐 시베리아까지 복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마지막 순간까지도 선교에 힘썼다. 복음 전파를 향해 기관차처럼 달려온 그는 원산의 자택에서 72세의 나이로 하나님 곁으로 갔다. 말콤 펜윅은 이 땅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이래 46년간 선교하며 어떤 교파에도 의지하지 않고 한국인 사역자와 함께 초기 한국기독교의 토대를 마련했다.
  • 2025.01.31 / 박찬웅 기자

    주일설교 요약본
    상처를 치유하라
  •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요한복음 5장 5~9절) 과거의 상처와 아픔을 십자가 밑에 내려놓고 예수 사랑 감격해 용서하면 진정한 치유·회복 얻게 돼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크고 작은 질병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질병은 육신의 병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적인 병입니다. 또한 오늘날 많은 이들이 겪고 있는 또 다른 질병은 바로 마음의 병입니다. 마음의 병은 대개 과거의 상처와 아픔에서 비롯되어 시간이 흘러도 쉽게 지워지지 않고 삶 전체를 짓누르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상처와 아픔으로부터 반드시 치유 받아야 합니다. 세상의 방법으로는 참된 치유를 얻을 수 없지만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1. 과거의 상처에서 자유함 받으라 예수님은 베데스다 물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 5:6). 그런데 그 병자는 다른 사람들처럼 곧바로 “예, 낫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기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상처를 예수님께 꺼내어 말했습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요 5:7). 이 고백에는 3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단 한 사람도 자신을 도와주거나 돌보아주지 않았다는 외로움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질문 앞에서 마음속 깊은 상처와 쓸쓸했던 세월을 되새기며 그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마음 한구석에는 잊히지 않는 아픈 기억이 자리 잡고 있고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붙들고 평생을 살아갑니다. 정작 상처를 준 사람은 이미 잊었을지 모르지만 상처받은 사람은 미움과 섭섭함, 증오와 아픔을 움켜쥔 채 현재를 살지 못하고 과거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 마음의 병은 결국 스트레스로 이어지고 스트레스는 육신의 여러 질병을 낳습니다. 공황장애, 불면증, 우울증, 만성두통, 위장병, 고혈압, 협심증과 같은 심장병, 뇌졸중, 위염, 소화불량, 탈모, 각종 암에 이르기까지 마음의 상처는 몸을 병들게 하고 마침내 죽음의 문턱으로까지 몰아갑니다. 우리는 반드시 과거의 상처와 트라우마로부터 자유함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는 그것을 온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위로가 잠시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오직 우리 구세주 예수님만이 절망과 상처 가운데서 우리를 건져주시고 완전히 치료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상처를 주님께 맡기고 예수님 안에서 참된 자유와 치유를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 치료자 예수님 예수님은 우리의 치료자입니다. 과거의 상처에 붙잡혀 절망 가운데 살고 있는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님은 다가오셔서 물으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 5:6). 주님은 그 병자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우리가 어떤 마음의 병이나 육신의 병을 가지고 있든지 주님은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아시고 친히 다가오셔서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은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일어나라”라고 명령하시며 희망을 선포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요 5:8). 주님은 자신의 능력의 말씀 한마디로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 한마디면 과거의 상처도, 그로 인한 마음의 병도, 육신의 모든 질병도 깨끗이 치료받고 온전하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과부의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남편을 일찍 잃고 아들 하나만 의지해 살아가던 과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마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절망 속에서 관을 따라가며 눈물로 통곡했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나와 슬픔을 나누었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마음속 깊은 아픔을 치유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눅 7:13~14). 주님의 말씀 한마디에 죽은 청년이 살아나 일어났습니다. 사람의 눈으로는 끝없는 절망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가 절대 절망을 절대 희망으로 바꾸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일어나라”라고 말씀합니다. 절망의 자리, 과거 상처의 자리, 실패와 배신의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말씀합니다. 좌절과 고통의 자리, 술과 중독의 자리, 눈물의 자리에서 과감히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와 괴로움 가운데 있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할 때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또한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요 5:8). 그 자리는 38년 동안 병자가 누워 있던 곳, 때로는 온갖 세상 것으로 더럽혀진 절망의 자리였습니다. 주님은 그 절망의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상처를 이겨내려면 그 자리를 가슴속에 묻어놓고 있지 말고 과감히 들고 일어나 버려야 합니다. 집 안에 쌓인 쓰레기를 치워버리듯이 우리의 마음속에 쌓여 있는 미움과 분노, 증오와 갈등, 서운함과 절망의 쓰레기를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 결단하고 과거의 실패와 상처, 절망의 자리를 내던져야 합니다. 그리고 뒤돌아보지 말고 주님이 주신 꿈과 비전을 붙잡고 믿음으로 전진 또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상처로부터 치유 받아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상처, 부부 사이의 상처, 인간관계에서 생긴 깊은 아픔까지도 십자가 밑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불교, 뉴에이지, 동양 철학과 같은 세상의 방법으로도 치유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해 그 사랑을 따라 용서하고 품을 때 진정한 치유와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무거운 짐을 계속 지고 살지 말고 십자가 밑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럴 때 오늘 하루를 의미 있고 보람 있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치료자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떤 연약함과 상처, 고통 가운데 있더라도 주님의 십자가 밑에 나아가 우리의 모든 죄와 상처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이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고쳐주십니다. 날마다 십자가의 그늘 아래 머물며 삶의 모든 짐을 주님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참된 치유와 회복이 우리 모두의 삶에 충만히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상처투성이의 인생을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을 만나 치유받았던 것처럼 우리 마음의 병과 육신의 병이 모두 다 치료받고 건강한 몸으로 회복되길 원합니다. 우리 모두의 상처를 치료해 주시고 주님의 기쁨과 평안함으로 충만히 채워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9.0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
  •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요한일서 5장 4~6절) 죄와 유혹이 가득한 세상 담대한 믿음으로 승리하고 구원의 은혜로 거듭나 일평생 주님과 동행해야 우리 인생은 단 한 번뿐이기에 의미 있고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마지막 때가 가까워져 온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하고 사도 바울도 말세에는 사람들이 죄와 쾌락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런 어두운 세상 속에서 승리하려면 우리는 절대 긍정의 믿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우리는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1. 세상을 이기는 믿음 성경은 믿음의 사람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이긴다고 말씀합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보통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문제와 어려움 속에서도 담대히 나아갈 수 있으며 주님이 함께하시기에 넉넉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동행하며 죄악이 만연한 세상 속에서 죄와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 3:9). 우리가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할 때 사랑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주님은 모든 문제와 어려움을 이기게 하시고 날마다 우리의 삶을 승리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가 믿고 의지할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구원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문제와 어려움을 만나도 주님만 바라보고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우리가 주님만 믿고 의지하며 바라보고 나아갈 때 주님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셔서 인생 전체를 은혜 가운데 이끌어주십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승리를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2.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세상에 믿고 의지할 것이 많다고 하지만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죄와 사망에서 나를 구원하신 구세주임을 믿을 때 우리에게 위대한 승리가 주어집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 5:5).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태어나 죄 가운데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 율법을 정하시고 사람이 죄를 지으면 죄 없는 짐승이 피 흘려 죽음으로써 일시적으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장차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죄 사함과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멸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승리자입니다. 죄 사함을 위해서는 반드시 피 흘림이 필요했기에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히 2:14~15).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한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며 나아가야 합니다(요 16:33). 예수님을 믿을 때 그분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됩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만물을 다스리시는 통치자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기에 하나님이 그를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빌 2:8~10). 이 예수님이 한평생 우리와 함께하시며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며 결국 주님 앞에 서게 될 날이 옵니다. 그날에는 모든 고난과 눈물이 사라지고 주님이 친히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계 21:4). 그러므로 날마다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절대 감사와 절대 긍정의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3. 물과 피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과 피로 임하셨습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5:6). 물과 피는 예수님의 사역 전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물에 들어가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마 3:16). 또한 사역의 마지막은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심으로 완성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 19:30).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하시며 구원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저주, 가난과 질병을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구원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때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자 물과 피가 흘러나왔는데 이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완성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4). 성령께서 예수님이 침례 받을 때 그 위에 임하셨고 십자가에 달려 “다 이루었다” 하심으로 구원의 완성을 선포할 때 이에 대해 증언하셨습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일 5:6). 우리가 성령 충만할 때 주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그 구원의 은혜를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나 같은 죄인이 구원받았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일생은 감사의 일생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의 은혜로 삽니다. 은혜가 아니었다면 여전히 죄와 고통 속에 방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일방적으로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해 주셨기에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날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만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여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살아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며 살아가길 원합니다. 날마다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전진하며 성령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8.3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말씀으로 승리하는 삶
  •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디모데후서 3장 14~17절)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말씀과 기도로 성령 충만해 날마다 승리하는 삶 살아야 부모에게 가장 큰 근심 중 하나는 아이가 잘 자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도 영적으로 자라지 못한 채 머물러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모든 문제는 결국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데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말씀 안에서 성장하며 죄와 싸워 승리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1.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 우리가 날마다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이기에 하루에도 수많은 생각이 마음을 무겁게 하고 때로는 우울하게 만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말씀과 기도, 성경 필사, 신앙에 도움이 되는 책을 읽고 찬양을 들으며 우리의 생각을 단순화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생각을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을 다스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고 그 뜻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크리스천은 말씀과 기도로 늘 성령 충만해 영적인 귀가 열려야 합니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음성, 부정적이고 믿음이 없는 사람이 말하는 음성을 듣지 말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음성은 언제나 사랑의 음성이고 우리를 치료하시는 음성이며 용서의 음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돌보시는 양과 같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요 10:14). 우리의 목자 되시는 주님은 우리의 형편과 마음을 다 아시고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 10:4~5).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듯이 우리도 주님의 음성만 듣고 따라가야 합니다. 세상의 음성을 따라가면 결국 멸망에 이르지만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는 생명의 길을 걷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인생길을 안내하는 내비게이션의 화살표와 같습니다. 날마다 말씀 앞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걸어갈 때 주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놀라운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2. 영적 거인이 되자 우리는 언제까지나 어린아이 같은 신앙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자기주장만 앞세우고 작은 일에도 쉽게 상처 받아 시험 들고 교회를 나왔다가 안 나왔다가 하는 것은 초보적인 신앙의 모습입니다. 성도는 이런 어린아이 같은 신앙을 벗어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서는 율법과 유대교 전통에 얽매여 제자리걸음을 하던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이상 초보적 신앙에 머물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침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히 6:1~2). 여기서 ‘죽은 행실’이란 예수님을 믿기 전의 방탕과 우상숭배, 부도덕과 이기심, 경건하지 못한 옛사람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옛 습관 속에 빠져 회개만 반복하는 생활은 떠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알코올 중독, 도박 중독, 게임 중독, 음란물과 마약 중독 등은 사람의 인생을 무너뜨립니다. 이런 죽은 행실은 인간의 힘으로는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는 죄와 중독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에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신지를 의심하거나 불평하며 교회를 멀리하는 태도는 초보적인 신앙의 모습입니다. 스스로 기도하지 않고 문제만 생기면 안수만 받으려 하는 신앙, 부활과 심판의 확신이 없어 흔들리는 신앙은 영적 어린아이의 상태입니다. 이제는 이런 상태를 벗어나야 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말씀으로 훈련될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고 영적인 거인으로 성장하여 승리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날마다 말씀으로 무장하여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시길 소망합니다. 3. 영적 성장과 말씀 훈련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육신의 건강을 위해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듯 영적인 건강을 위해서는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앙생활의 절대적 기준이며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할 지침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말씀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말씀으로 훈련되어야 합니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0~21).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할 때 성령님이 우리 삶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때로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갈 때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를 책망하시고 올바른 길로 이끄십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7).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이지만 말씀과 동행할 때 점점 예수님을 닮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가 됩니다. 말씀 앞에 설 때 교만한 마음은 온유와 겸손으로 변화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나아가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자리 잡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우리는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춘 주님의 귀한 그릇으로 쓰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세상은 지금도 주님의 사랑과 도움을 기다립니다. 날마다 말씀으로 훈련된 영적 거인이 되어서 주님과 동행하며 선한 일을 힘써 행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고난 속에서도 주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전진하길 원합니다. 날마다 말씀으로 승리하는 영적 거인으로 세워지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8.2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성경 인물
    (113) 사랑의 사도, 요한
  • 요한복음 등 저서 통해 복음 전파 예수님 만나 사랑의 사도로 변화돼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도 요한은 이며 기독교에 매우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이다.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제자이며 요한복음,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를 기록했고 신약성경의 유일한 예언서인 요한계시록을 썼다. 세베대의 아들인 요한은 형제 야고보와 함께 갈릴리에서 어부로 지내던 중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다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자 바로 예수님께 달려가 제자가 됐다. 예수님을 따른 이 두 형제는 예수님께 사랑받는 열 두 제자에 속했지만 감정이 격발할 때가 많았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소란을 뜻하는 의미의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실 정도였다. 요한은 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었지만 어디든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조급하고 폭력적이던 성격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해 변화됐다. 그는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 다른 제자들이 모두 도망을 했을 때에도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따라갔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제자 중에 유일하게 그곳을 지킨 제자였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무덤으로 맨 먼저 달려간 사람도 요한이었다. 예수님은 요한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에 자신의 어머니를 그에게 의탁하셨고 그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극진히 모셨다. 초대교회 설립의 핵심 인물이었던 요한은 사도 바울에게 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이라고 칭함을 받기도 했다. 노년을 에베소에서 설교와 저술활동으로 보내던 요한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 시에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죄목으로 밧모섬에 유배됐다. 그곳에서 신약의 마지막 복음서인 요한계시록을 저술했다. 사면되어 다시 에베소로 귀환한 그는 교회들을 지도하고 성경을 기록하며 에베소에서 말년을 보냈다. 요한은 요한복음에 자기 자신을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제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을 전심으로 사랑했던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사랑의 사도인 요한은 설교할 때마다 성도들에게 서로 사랑할 것을 강조했다. 그의 설교의 핵심은 늘 예수 그리스도였다. 우리 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강조하며 불신자와 믿는 자 모두를 아우르는 설교를 했다. 그가 남긴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에 가장 강조된 것이 바로 사랑이다. 전도지나 교회에서 가장 많이 보고 듣는 이 성경 구절 안에 사도 요한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확실히 담겨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 2024.11.29 / 이미나 기자

    (112) 한나
  • ‘간절한 기도의 여인’ 표상 문제 앞에 탄식하며 부르짖어 기도하면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은총 얻게 돼 한나는 ‘기도의 여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자신의 괴로움을 극복할 만한 힘과 능력이 없을 때 어떤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지 한나를 통해 우리는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에브라임 산지 여로암의 아들 엘가나에게는 한나와 브닌나 두 아내가 있었다. 소실인 브닌나에게는 자녀가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이름의 뜻인 ‘은총’과는 달리 자녀가 없었다. 매년 고통을 겪어야 했던 한나는 고통 중에 부르짖고 또 부르짖으며 하나님 앞에 통곡의 기도를 드렸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야훼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야훼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야훼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 1:10~11). 한나가 주께 드린 기도는 처절한 절규였으며 가슴에 멍이 드는 탄식의 간구였다. 그런 한나의 부르짖음에 하나님은 그 마음을 감찰하시고 한나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셨다. 성경 사무엘상 2장 1~10절은 한나가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기도에 응답해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격의 내용이 기록돼 있다.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야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야훼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은 먼저 자녀를 두어 그동안 한나를 업신여겼던 브닌나의 교만을 꺾어주시며 가정의 질서 또한 바로 세워주셨다.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삼상 2:5). “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삼상 2:9). 한나의 고백적 탄원과 언약의 서원을 보면 아들 사무엘이 하나님의 깊은 섭리와 은총에 의해 태어났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사무엘이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따라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는 것을 보면서 몇 가지 교훈도 얻게 된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헤아리신다는 것이다. 한나는 능력의 하나님을 믿었기에 포기하지 않고 응답을 얻을 때까지 기도했다. 또 성전에 나와 기도할 때 엘리 제사장이 술에 취한 것으로 오해할 정도의 절박하고 애끓는 기도를 드렸다. 기도 없이는 결코 응답을 얻을 수 없다. 둘째, 하나님은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는 역전의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이 신다. 자녀가 없던 한나는 브닌나의 업신여김을 참고 견뎌야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한나가 간구할 때 ‘은총’을 허락하셨고 고난의 주인공에서 영광의 주인공으로 그 삶을 변화시켜주셨다. 셋째, 한나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기도의 깊은 통찰력과 겸손의 지혜를 깨닫게 된다. 한나는 사무엘을 낳기까지 숱한 고통을 겪었지만 사무엘을 낳은 후 자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린다. 자녀가 내 소유물이 아님을 인정하는 겸손이다. 자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업이다(시 127:3). 이 땅에 사는 동안 청지기 사명을 가지고 자녀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자라도록 욕심을 버리고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며 한나와 같은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
  • 2024.11.01 / 오정선 기자

    (111) 안디바
  •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 주님을 섬기는 일에 타협 없던 안디바 한 사람의 순교가 지역 변화시켜 소아시아 버가모는 우상숭배가 만연한 도시로 유명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갖은 이유로 타협하고 우상숭배를 할 때 단 한 사람, 안디바는 우상숭배를 거부했다. 그는 뛰어난 석공이었지만 로마 황제의 신상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놋 가마 위에서 순교했다. 안디바는 로마 제국의 명령을 거절한 대가로 철판 위에 산 채로 구워져 순교를 당했지만 버가모교회 부흥의 씨앗이 됐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충성된 증인이라고 높여주셨다. 안디바라는 이름도 ‘모든 사람을 반대하는 자’라는 뜻이다. 안디바는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핍박하는 로마 관리들에게 당당했다. 그는 순교를 당하는 순간에도 “만왕의 왕, 만주의 주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니 예수 외에는 내가 절하지 않겠노라”고 외칠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순교를 통해 책망받던 초대교회 중 하나인 버가모교회가 변화됐다. 예수님을 영접했지만 지나온 삶을 끊지 못한 채 죄의 유혹에 빠져 살아가던 버가모교회의 성도들은 안디바의 순교를 보고 180도 달라졌다. 작은 유혹에도 넘어지고 흔들리던 이들이 우상숭배로 만연한 지역에서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외치게 된 것이다. 버가모교회가 있는 지역은 해발 300m의 높은 지역에 있었다. 또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사탄의 권좌’라고 불리는 무려 12m나 되는 거대한 제우스 신전과 로마 황제를 예배하는 신전도 있었다. 라틴 교부였던 터툴리안의 『순교자에 대해서』라는 책을 보면 안디바에 대해 알 수 있다. 당시 버가모교회의 그리스도인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한 부류는 예수님을 영접한 유대-그리스도인들이었다. 이들은 할례, 음식에 대한 규제, 율법을 지키는 것과 복음 사이에서 갈등했다. 또 다른 부류는 이방인이지만 기독교인이 된 헬라 성도들이었다. 이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 거리낌 없이 해 왔던 우상숭배, 성적인 문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건한 삶을 지켜가는 것에서 갈등했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도 당당히 하나님께 순종한 안디바의 신실한 믿음은 신앙이 흔들리던 많은 크리스천의 마음에 경종을 울렸다. 생계를 위한다는 이유로 세상과 타협하고 고난과 박해가 두려워 주님을 의지하지 못할 때가 있다면 고통 속에서도 주님 한 분만을 바라보며 의지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를 기억하자.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계 2:13).
  • 2024.10.04 / 박찬웅 기자

    예수님의 팔복
    ⑧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
  • 의를 위한 고난은 복된 길 산상수훈은 신앙생활의 핵심 천국 소망 갖고 믿음 지켜야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되어 있는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제자들과 무리를 향해 가르치신 말씀이다. 기독교 윤리와 신앙생활의 핵심을 담고 있는 예수님의 설교 중 가장 위대한 가르침이라고도 불린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가운데 마지막 팔복은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가장 도전적인 말씀이자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에 대한 기준을 제시한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는 말씀은 고난이라는 현실 너머에 있는 하늘의 상과 위로를 선포한다.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의’란 윤리적 정의를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뜻한다. 인간의 행위로 얻는 의로움이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그 의다. 그러므로 의로운 삶이란 곧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을 자랑하며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어둠을 드러내는 의와 진리는 세상의 가치와 충돌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라고 격려한다. 마태복음 5장 11~12절은 이렇게 덧붙인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이러한 복은 단지 위로의 말이 아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이라는 증거다. 예수님 때문에 조롱받고 오해받는 그 길은 하나님이 그 위에 함께하신다는 확증이 된다. 베드로전서 4장 14절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말씀한다. 세상에 빛과 소금되신 의로우신 예수님께서는 가장 많은 핍박을 받으셨다. 빛은 어둠을 불편하게 하고, 소금은 부패를 막아 거부감을 일으킨다. 예수를 따르는 삶은 세상과 갈등하게 마련이고 박해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자연스럽게 따르는 열매인 것이다. 팔복의 시작과 끝은 모두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는 동일한 복으로 연결된다. 이는 팔복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과 궁극적 소망을 드러내는 말씀임을 보여준다. 믿음의 길에는 고난이 따르지만 가장 복된 길이다. 예수님을 따라 의로운 삶을 살다가 핍박을 받는 자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그는 이미 천국의 시민이며 하늘의 상이 예비 됐기 때문이다. 의로운 삶은 하늘의 상급으로 이어지며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때 고난이 오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담대히 나아가자. 그 길 끝에는 주님의 상급과 위로가 반드시 기다리고 있다.
  • 2025.07.31 / 이미나 기자

    ⑦ 화평하게 하는 자
  • 피스메이커,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사람 평화의 왕 예수님 세상에 전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음을 받는 복 누려야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세상이 추구하는 물질적인 복이 아닌,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과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 진정한 복이라 소개하는 팔복에서 일곱 번째로 소개된 ‘화평하게 하는 자’는 헬라어 ‘에이레네포이오스’로 ‘에이레네’(평화)와 ‘포이에오’(만들다)의 합성어이다. ‘팔복’에서 화평은 성경의 평화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단순히 평화를 사랑하는 수준을 넘어 적극적으로 갈등을 중재하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을 뜻한다. 일명 ‘피스메이커’(Peace Maker)이다. 성경이 말하는 피스메이커는 혼자 평화롭게 살면서 평화의 열매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과 공동체를 화해시키는 어려운 일에 자신을 바쳐 헌신하는 사람이다. 대표적인 피스메이커로는 예수님이 있다. 그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처한 인류의 ‘피스메이커’로 오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자녀가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됐다(롬 5:1). 독단과 분열이 가득했던 이 세상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화평의 길이 열린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군림하고 누리는 삶을 살지 않으셨다. 우리에게 평안을 주기 위해 헌신적인 사랑을 베푸셨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갈등과 분열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하나 되게 하는 ‘피스메이커’가 되어야 한다. 경쟁하거나 다투는 대신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삶을 본받아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될 때 이 세상에 평화가 임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음 받는 진정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성경이 말하는 화평에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기쁜 소식, 즉 복음을 전하는 것도 포함된다는 점이다(사 52:7). 그래서 화평케 하는 자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로 말미암아 궁극적인 평화가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전파하는 것이 곧 평화를 이루는 핵심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중세 평화의 사도인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처럼 우리도 세상의 화해자가 되어야 한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 신앙을, 거짓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가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 2025.07.04 / 금지환 기자

    ⑥ 마음이 청결한 자
  • 천국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하나님 볼 수 있어 예수님의 보혈 의지해 마음 지켜 나아가야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본문으로 설교한 이영훈 목사는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마음에 더러움이 없고 깨끗한 것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정결해야 했다. 흠이 있는 것은 드릴 수 없었다”면서 “하나님께 우리가 드려지기 위해서는 흠이 없는 모습으로 나아와야 한다. 우리는 죄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기 때문에 예수의 보혈로 우리가 정결함을 입고 변화 받아야한다. 주 앞에 예배를 드릴 때에 우리가 정결한 모습으로 흠이 없는 모습으로 드려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하나님은 구만리장천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닌 무소부재하신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볼 수 없다. 모든 인간은 죄를 범하였고 율법적으로 온전하고 정결해질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는 마음 자세만큼은 순전하고 순수할 수 있다. 이는 두 마음을 품지 않고 마음을 청결히 하여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는 우상숭배의 죄, 음란의 죄, 누추함의 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회개해야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대속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을 수 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 마음을 청결히 하고 매 순간 성령님께 마음을 드리고 정결케 해주시기를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 조용기 목사는 마음 상태에 따라서 보이는 것이 다르게 보인다고 설명하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내 주먹을 믿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해를 봐도 하나님이 보이고 달을 봐도 하나님이 보이고 별들을 봐도 하나님이 보이고 꽃 한 포기를 봐도 ‘아! 하나님이 묘하게 지으셨구나’ 사람들을 봐도 ‘하나님이 얼마나 이쁘고 아름답게 사람을 만드셨느냐’라고 말한다”고 했다. 또한 조용기 목사는 “밉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밉게 보인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면 미운 가운데도 모든 아름다운 것이 눈에 보인다. 마음이 나의 환경을 바라보게 하고 결정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요소가 되는 것이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전했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 충만을 간구하고 예수님의 보혈에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스스로 마음을 잘 지켜서 하나님만 바라볼 때 천국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처럼 이땅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고 교제하면서 살아가는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다.
  • 2025.05.30 / 복순희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PDF

    지면보기

  • 행복으로의 초대

    PDF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