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담임목사 주일설교
조용기 원로목사 주일설교
오늘의 묵상
11월 15일(토) -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면
  • ◎ 말씀 : 겔 11:19~20 ◎ 찬송 : 195장(통 175장) 이스라엘 백성은 죄로 인해 징계를 받아 포로로 끌려갔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회복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단지 외적인 귀환만이 아니라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새 영을 주셔서 하나님의 율례를 따르게 하시고, 그분의 백성으로 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단순한 순종이 아니라, 변화된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실 때 우리는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기쁨으로 말씀을 따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삶이 흔들릴수록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시는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날마다 성령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말씀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11.0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1월 14일(금) - 다른 교훈을 주의하라
  • ◎ 말씀 : 딤전 1:3~4 ◎ 찬송 : 490장(통 542장) 초대교회에는 올바른 교훈을 전하는 사람들과 함께 복음이 아닌 거짓된 가르침으로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교회에서 잘못된 교리를 퍼뜨리는 사람들을 제재하라고 당부합니다. 당시 일부는 신화나 족보에 집착하며 복음의 본질을 흐렸습니다. 믿음을 세우지 못하는 가르침은 결국 성도들의 삶을 무너뜨립니다. 오늘날에도 진리처럼 보이지만 성경과 다른 메시지를 전하며 믿음을 흔드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기준 삼아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들을 분별해야 합니다. 왜곡된 복음이 교회에 퍼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참된 교훈은 사람을 하나님께 이끌고 삶을 변화시킵니다. 날마다 말씀을 붙들고 진리 가운데 거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다른 교훈에 미혹되지 않고 복음의 본질에 굳게 서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11.0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1월 13일(목) - 믿음의 공동체
  • ◎ 말씀 : 살후 3:1~2 ◎ 찬송 : 382장(통 432장)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복음을 전하며 고군분투하던 그는 수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추위와 더위, 배고픔, 강도의 위협을 당했습니다. 죄 없이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위대한 사도조차 성도들의 중보기도 없이는 복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기에 성도들에게 기도를 요청한 것입니다. 믿음의 길은 혼자 걷는 길이 아닙니다. 시험과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를 붙잡아 주는 건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입니다. 공동체는 서로의 짐을 나누며 믿음을 지켜가는 영적 울타리입니다. 기도는 가장 위대한 섬김이며 가장 실제적인 동역입니다. 신앙의 여정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기도하는 손이 많을수록 교회는 더욱 견고해집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믿음 위에 굳게 서는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11.0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순복음의 12대 핵심진리
    3. 강건함의 축복
  • 믿음의 기도와 거룩한 삶, 헌신 속에서 완성되는 강건의 복 단순한 치유 넘어 하나님 중심된 삶 이뤄야 순복음 신앙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을 ‘전인구원’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얻게 된 영적·육체적·환경적 영역을 모두 아우르는 복을 ‘삼중축복’이라 한다. 이러한 전인적인 축복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요한삼서 1장 2절이다. 이 삼중축복의 세 번째에 해당하는 복이 ‘강건함의 축복’이다. 강건함(Good Health)은 단순한 육체의 건강을 넘어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강건함을 근간으로 한 온전한 삶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강건함의 복을 마땅히 구하며 살아야 한다. 강건함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 믿음의 기도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선포하는 창조적 믿음의 고백이다. 몸이 연약하거나 질병 중에 있을지라도 “나는 건강하다”, “나는 평안하다”고 믿음으로 선포할 때 그 긍정적인 믿음의 언어가 현실을 변화시킨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약 5:15)는 말씀처럼 현상에 집중하지 않고 치유보다 치유하시는 하나님께 시선을 둬야 한다.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사 22:22)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기도이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몸은 성령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그러므로 죄와 음행, 탐욕, 중독 등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며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말씀에 순종하고 정결함을 지킬 때 마귀가 틈타지 못하고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온전히 다스리실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몸으로 주를 섬기고 이웃을 위해 ‘봉사와 헌신하는 자’에게 강건의 복을 주신다. 조용기 목사는 17세에 폐병으로 죽음의 문턱에 섰다가 예수님을 만나 치유 받았다. 이후 조용기 목사는 “건강해야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다. 강건함은 사명을 위한 복”이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육체의 건강은 단순한 생존의 조건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섬기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사명의 자원이다. 그러므로 건강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한 도구이다. 건강해야 복음을 전할 수 있고 건강해야 교회를 섬기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을 받은 우리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말씀을 통해 단순한 병이 낫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강건함의 축복을 받기 위해 우리가 드려야 할 믿음의 기도와 거룩한 삶, 봉사와 헌신은 모두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표현이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믿음에서 시작된다. 복보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시선을 둘 때 우리의 영혼은 견고해지고 삶은 새로워진다. 주님이 주시는 강건함으로 세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 그것이 바로 삼중축복 신앙의 완성이자 순복음 신앙의 본질이다.
  • 2025.10.31 / 금지환 기자

    2. 범사가 잘되는 축복
  • 하나님 안에서의 나눔은 ‘플러스’ 우리는 저주를 속량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범사가 잘되는 축복을 받고 형통한 삶을 살게 됐다. 하나님은 본래 뜻대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다고 하셨지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 인간의 삶은 저주의 가시와 엉겅퀴로 뒤덮이게 됐다(창 3:17~18). 그 결과 인간은 땀 흘려야 먹고 사는 존재로 전락해 버렸으며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와 고통의 저주 가운데 살게 됐다. 인간은 이런 저주와 고통의 운명을 바꾸려고 애썼지만 어떤 방법으로도 운명을 바꾸지 못했다. 이러한 인간의 저주받은 운명을 회복시킨 분이 예수님이시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복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저주를 짊어지고 피 흘리심으로 우리는 저주에서 벗어나 축복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됐다(갈 3:13~14).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모든 저주에서 벗어나 범사에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모든 일이 저절로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아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은 오히려 하나님께 힘과 지혜를 구하면서 주어진 일을 감당해 나가며 요한삼서 2절에 기록된 ‘범사에 잘되는’ 형통의 복을 실제로 경험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발적인 가난이나 청빈한 삶만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기독교의 축복 신앙을 단순한 기복 신앙으로 오해한 데서 나온 생각이다. 물론 물질적인 축복만을 추구하는 태도는 문제지만 그렇다고 성경이 말하는 복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복이 되어 다른 이들에게 그 복을 흘려보내길 원하신다. 영혼뿐 아니라 범사에 임하는 복은 크리스천이 마땅히 구해야 할 하나님의 선물이다(출 20:6). 크리스천은 물질에 지배당하는 자가 아니라 물질을 다스리며 사는 자이다. 그래서 헌금은 하나님께 받은 복에 대한 감사의 고백이며 모든 소유가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는 믿음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헌금은 거짓이나 속임이 없이 온전해야 한다(말 3:8~10).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려는 데 있다. 하나님께 받은 복은 이웃과 함께 나누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때 진정한 복이 된다. 하나님의 계산법은 세상의 방식과 다르다. 하나님 안에서의 나눔은 마이너스가 아니라 플러스다. 하나님은 나누는 자에게 후히 주시고,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은혜와 축복을 더해주신다(눅 6:38). 그렇기에 우리는 받은 복을 움켜쥐고 있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나누는 자에게 더욱 풍성한 복으로 채워주시는 분이다. 우리를 복의 통로로 사용하시기 위해서라도 축복해 주실 것이다.
  • 2025.10.03 / 김주영 기자

    1. 영혼이 잘되는 축복
  • 예수님 십자가 은혜로 누려야 할 온전한 구원 전인 구원의 출발점, 모든 축복의 근본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맺을 때 모든 복 뒤따라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이 말씀은 사도 요한이 가이오에게 보낸 개인적인 편지의 일부이자 인사말이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안에서 누려야 할 온전한 구원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순복음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을 ‘전인 구원’으로 본다. 이는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와 환경까지 아우르는 총체적인 축복으로 조용기 목사는 이를 삼중축복이라 했다. 이 삼중축복의 개념은 요한삼서 1장 2절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이 잘되는 축복’이다. 이는 다른 모든 축복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 그러나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면서 영적으로 죽은 존재가 됐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의 대가를 치르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셨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고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됐다. 죄로 인해 깨졌던 창조주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영혼이 잘되는 길이다. 이러한 영적 축복의 우선성은 삼중축복 신앙이 기복신앙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지점이다. 우리의 믿음은 물질적 축복이나 치유의 기적에 있지 않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한다’는 말이 반드시 시간적인 순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육체적 질병이 치유되거나 문제 해결을 통해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은 영혼 구원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사업, 가정, 학업, 건강에도 복이 임하게 된다. 모든 일의 열쇠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 우리는 영적 축복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의 영적 상태를 점검해야 한다. 영적 축복을 계속 유지하는 비결은 다음과 같다. 첫째, 회개이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다. 우리는 끊임없이 마음과 행동으로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둘째, 말씀이다. 육신의 건강을 위해 음식이 필요하듯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한다. 셋째, 성령 충만이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는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그 뜻대로 살아갈 수 있다. 영혼이 잘되는 축복을 누릴 때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지는 복이 뒤따르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모든 것의 시작이자 핵심이기 때문이다. 나의 영적 상태, 특히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지지 않았는지를 점검하며 다른 어떤 축복보다 영적인 축복을 누리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 2025.09.05 / 복순희 기자

    선교 열전
    (18) 김창식 목사
  • 머슴 출신 한국인 최초 목회자 박해 속 복음 지키며 ‘한국의 바울’로 불려 한국 초기 교회사의 빛나는 별 중 한 사람인 김창식 목사는 머슴 출신으로 한국 최초의 목사가 됐다. 한평생 순회 전도인으로 살아간 그는 당시 선교사들의 회고록에 고난 속에서도 복음을 굳게 붙들었던 ‘한국의 바울’로 기록되어 있다. 1857년 황해도 수안군 성동면 생금리에서 태어난 그는 머슴살이를 하던 시절, 선교사들에 대한 괴소문을 접했다. 당시 “아이들의 간을 떼어 약을 만든다”, “눈을 빼어 만든 것이 카메라다”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미국 북감리교 올링거 선교사의 집에 잡부로 취직해 선교사의 사생활을 감시했다. 하지만 불미스러운 행동은 전혀 찾을 수 없었고 오히려 올링거 부부의 인격과 겸손한 삶에 감동을 받아 마음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1888년 4월 아펜젤러에게 침례를 받은 뒤 선교사들의 든든한 조력자가 됐다. 김창식 목사가 ‘한국의 바울’로 불린 가장 큰 계기는 1894년 평양에서 일어난 기독교인 박해 사건이었다. 이때 김창식도 잡혀가 죽을 지경의 고문을 받았으나, “나는 기독교가 옳다는 사실을 안 이상 기독교 신자로 살 것이며 나가서도 복음을 전하겠다”며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 그는 감옥에서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라는 말씀과 함께 “주님을 배반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석방 직후 곧이어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평양은 격전지가 됐고 교회와 병원은 피난민들의 은신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당시 김창식은 홀 선교사와 함께 남아 피난하지 못한 사람들과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홀 선교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김창식 목사는 평양 선교 전반을 홀로 맡아 감당했다. 이후 그는 노블 선교사와 함께 평양 이북 지역의 교회를 이끌었다. 거리와 산골을 누비며 복음을 전해 ‘길바닥의 목사’, ‘민중 전도인’으로 불렸던 그는 1901년 5월 서울 정동교회에서 한국 최초의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회 사역 동안 김창식 목사는 48개 교회를 개척하고 전국 170여 교회를 돌보며 교파와 지역의 경계를 넘어 순행 사역자로 전국을 누비며 목회에 헌신했다. 교인들에게 스스로 신앙을 세우고 전도하는 ‘자립·자전’ 정신을 강조했던 김창식 목사는 1929년 1월 29일 향년 72세로 소천 받았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가장 작은 자’라 칭하며 겸손과 헌신의 삶을 살았다.
  • 2025.08.29 / 금지환 기자

    (17) 존 로스
  • 최초의 한글 성경 번역으로 선교 토대 마련 최초의 한글 신약성경인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를 출판하고 이후 신약성경 전체를 번역하는데 기여한 존 로스(John Ross, 1842~1915)는 조선인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섰다.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로스는 조선의 복음화를 꿈꾸며 한글 성경 번역에 자신의 젊은 날을 헌신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그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입학했다. 신학교에 입학한 로스는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비롯해 독일어, 중국어 등 외국어를 공부했다. 사람들이 외국어를 공부하는 이유를 묻자 로스는 “예수님은 너희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는데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당연히 많은 외국어를 공부해야 한다”고 답했다. 신학생 시절 로스는 중국 선교사인 허드슨 테일러의 강연에 참석해 “중국에서 수억 명의 사람들이 복음을 모른채 죽어가고 있다”는 메시지를 듣고 복음을 알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선교사가 될 것을 결단했다. 1872년 중국에 도착한 로스는 먼저 선교 중이던 존 매킨타이어와 함께 길거리에서 한문으로 번역된 성경을 나눠주며 전도를 시작했다. 로스가 중국어로 설교를 할 수 있을 만큼 유창한 어학 실력을 갖추게 된 후에는 직접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순회 전도를 했다. 그는 중국인들에게 익숙한 유교적 표현을 이용해 기독교 교리를 이해시키려 노력했고 현실에 지쳐 불교·도교 사원으로 도피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찾아가 복음을 전했다. 당시 만주 지역에는 중국인뿐 아니라 조선인, 러시아인, 일본인 등 다양한 민족의 사람들이 거주했다. 주변 선교사들을 통해 조선을 알게 된 로스는 만주 지역에서 전도하며 머지않아 조선에도 복음의 문이 반드시 열릴 것을 확신했다. 그는 “조선인이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우리가 한글 성경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않겠습니까?”라며 주변 사람들에게 한글 성경에 대한 필요성을 알리고 번역에 힘썼다. 그는 당시 한문으로 된 성경은 이미 있었지만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글을 통해 복음이 더 많은 이들에게 전파될 것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로스는 자신이 한글을 공부하면서 정리한 내용과 예문을 바탕으로 조선을 방문할 선교사들에게 도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국어 교재인 ‘조선어 첫걸음’이라는 책도 저술했다. 비록 그는 조선의 쇄국 정책과 기독교 박해로 조선 땅을 밟지는 못했다. 그러나 조선과 가까운 중국 만주를 선교 거점으로 삼고 조선인들과 교류하며 복음을 전해 조선에 공식적인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 기독교 신앙이 자리 잡도록 기틀을 마련한 선교사다.
  • 2025.05.23 / 금지환 기자

    (16) 말콤 펜윅
  • 초기 한국기독교 토대 마련 성경·찬송 번역하며 46년간 헌신한 선교사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 1863~1935)은 국내에서 헌신하며 신약성경과 찬송을 우리말로 번역한 선교사다. 찬송이 수록된 『복음찬미』, 전도를 위한 성경 구절을 모은 『만민됴흔긔별』 발간뿐 아니라 1919년에는 『신약젼셔』 를 출판했다. 캐나다인인 그는 26살 때 초교파 모임인 나이아가라 사경회에 참석해 성경을 공부하던 중 인도 선교사로 활동한 로버트 와일더의 “사막에서 애타게 물을 찾으며 죽어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한 유리 주전자에 담긴 물이 아닌 오직 물이다”라는 간증을 듣고 선교사로 결단했다. 1889년 입국한 펜윅은 국내에서 복음을 전하며 250여 개의 교회를 세웠다. 펜윅은 장로교 조사 서경조와 동행하며 한국어를 배워 황해도 송천에서 ‘예수 사랑하심은’(Jesus Loves Me), ‘나는 참 기쁘다’(I am so glad) 찬송과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해 소년들에게는 성경을 가르치고 마을의 여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성경 공부를 이끌었다. 그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 15:20)는 사도 바울과 같은 신념을 갖고 개신교 선교부가 없는 원산으로 이동해 자립 선교의 토대 마련을 위해 농장을 운영했다. 1906년 ‘대한기독교회’를 조직한 펜윅은 다른 사람이 전하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선교 정책으로 삼고 원산을 중심으로 만주와 시베리아까지 소외된 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교단의 목사와 전도사는 순회사역자가 되어 전국에서 전도 활동을 펼쳤고 교인들도 전도 현장에 투입돼 복음 전파에 앞장섰다. 펜윅은 전도자들이 개척한 교회들을 돌아보며 그들의 신앙을 격려했고 가는 곳마다 사경회를 개최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집회가 끝나면 참석자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해 원산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이단 활동에 효과적으로 대처했다. 펜윅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만주를 거쳐 시베리아까지 복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마지막 순간까지도 선교에 힘썼다. 복음 전파를 향해 기관차처럼 달려온 그는 원산의 자택에서 72세의 나이로 하나님 곁으로 갔다. 말콤 펜윅은 이 땅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이래 46년간 선교하며 어떤 교파에도 의지하지 않고 한국인 사역자와 함께 초기 한국기독교의 토대를 마련했다.
  • 2025.01.31 / 박찬웅 기자

    주일설교 요약본
    찬양과 감사의 기적
  •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야훼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야훼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야훼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야훼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역대하 20장 17, 21절) 절대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만 바라볼 때 마음에 참된 평안 넘치고 승리하는 삶 살게 돼 우리가 지음을 받은 목적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과 감사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삶이 평탄할 때뿐 아니라 문제와 어려움 속에서도 찬양과 감사를 올려드릴 때,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고 우리 삶에 복을 더해주십니다. 1. 고난이 다가올 때 여호사밧 왕 때 남유다는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모압과 암몬 자손들과 마온 사람들이 연합하여 공격해 온 것입니다. “그 후에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들이 마온 사람들과 함께 와서 여호사밧을 치고자 한지라 어떤 사람이 와서 여호사밧에게 전하여 이르되 큰 무리가 바다 저쪽 아람에서 왕을 치러 오는데 이제 하사손다말 곧 엔게디에 있나이다 하니”(대하 20:1~2). 우리 삶에도 갑작스럽고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 마음에 먼저 찾아오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욥도 그런 상황을 겪었습니다. 동방의 의인이라 불렸던 그도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재산과 자녀를 모두 잃고 악성 피부병까지 걸려 기왓장으로 몸을 긁을 만큼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했고 친구들은 그를 비난했습니다. 욥은 이렇게 탄식합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욥 3:25). 욥의 말처럼 우리가 두려워하던 일이 실제로 닥쳐올 때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여호사밧 왕은 고난 앞에서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야훼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대하 20:3). 여호사밧 왕 역시 침공의 소식을 듣고 두려웠지만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고난의 때에 무엇보다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두려움, 근심, 걱정, 염려가 마음에 자리 잡지 못하도록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삶이 힘들고 고난이 심할수록 마음을 굳게 지키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시기를 바랍니다. 2. 고난 중에 도움 되시는 하나님 연합군의 공격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유다 백성은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유다 사람이 야훼께 도우심을 구하려 하여 유다 모든 성읍에서 모여와서 야훼께 간구하더라”(대하 20:4). 그들은 이 위기를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고 자신들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대하 20:12). 이처럼 고난의 때에 할 수 있는 일은 주님께 나아가 간구하는 것입니다. 고난과 절망의 때에 우리의 유일한 도움이 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주님만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하면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염려할 시간에 기도하고 감사하면 주님이 모든 어려움에서 우리를 건져주실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온 유다 백성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자 하나님은 야하시엘을 통해 응답하셨습니다. “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야훼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대하 20:15).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야훼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야훼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대하 20:17). 고난을 만났을 때 두려움에 빠지거나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주님은 친히 우리의 대적과 싸워주시고 그들을 물리치시며 위대한 승리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3. 찬양과 감사의 기적 찬양과 감사는 놀라운 기적을 가져옵니다. 야하시엘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유다 백성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찬양과 감사를 올려드렸습니다. “여호사밧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도 야훼 앞에 엎드려 야훼께 경배하고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야훼를 찬송하니라”(대하 20:18~19). 여호사밧 왕은 전쟁터로 나갈 때 무기를 든 군사들보다 찬양대를 앞세워 행진하게 했습니다. 세계 역사상 전쟁에 나갈 때 찬양대가 예복을 입고 무기 없이 찬양하며 나아간 사례는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군대가 창과 칼, 방패로 무장해 적군과 싸우러 나가지만 유다 백성은 이미 하나님의 승리를 확신했기에 감사와 찬양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야훼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야훼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대하 20:21). 유다 백성의 감사와 찬양을 들으신 하나님이 놀라운 승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적군을 흩으시고 그들로 하여금 서로 싸우게 하셔서 세 나라의 연합군을 완전히 멸망시키셨습니다.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야훼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죽였더라”(대하 20:22~23). 고난의 때에 드리는 감사와 찬양은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감사와 찬양에는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중에도 찬양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절대 긍정의 믿음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며 찬양하고 감사드릴 때 주님이 참된 평안을 우리 마음에 넘치도록 채워주시고 모든 어려움을 이기며 승리하는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어떤 고난과 어려움이 다가와도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려 모든 문제를 해결 받고 주님의 평안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문제가 우리를 찾아올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감사와 찬양으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어떠한 상황에도 마음을 지키고 주님이 주신 평안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기며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11.0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교회를 사랑하라
  •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야훼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시편 122편 6~9절 교회 중심의 신앙으로 예배에 최선 다하고 기쁨과 감사로 주님 섬길 때 은혜로 사는 복된 인생 돼 10월 마지막 주일은 종교 개혁 주일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을 강조하며 종교 개혁을 이끌었습니다. 종교 개혁의 정신은 이후 여러 부흥 운동을 거쳐 오순절 성령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 주일은 우리 교단의 총회 주일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신앙의 유산을 되새기며 시편 122편의 다윗처럼 성전을 향한 기쁨과 평화를 위한 기도를 드리고자 합니다. 1.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라 시편 122편에서 다윗은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시 122:6).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전을 향하여 하나님의 평안이 충만하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처음 지어졌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그 성전에 가득 임했습니다.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야훼의 성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야훼의 영광이 야훼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왕상 8:10~11). 이처럼 우리 교회가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복된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주님의 영광이 임할 때 우리에게 은혜가 넘쳐나게 되고 주님의 기쁨이 우리 삶 가운데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감사와 찬양으로 주님의 전에 나아가라고 말씀합니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 100:4). 우리가 감사와 찬양으로 주님께 나아가 예배드릴 때 하나님은 하늘의 문을 여시어 우리에게 은혜와 복을 내려주십니다. 교회를 통해 우리 삶 가운데 기쁨과 평안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을 상징하며 동시에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인 교회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이자 교회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교회는 그의 몸입니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22~23). 성도들은 교회의 지체로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교회 안에 분열과 다툼과 갈등이 일어나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사랑으로 섬기고 화합할 때 교회는 주님의 평안으로 충만하여 부흥하게 될 것입니다. 2. 예루살렘을 사랑하라 성경은 예루살렘을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시 122:6). 하나님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형통의 복을 넘치게 부어주십니다. 교회는 예배의 장소이자 축복의 통로이며 예배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우리의 최선의 모습입니다. 성전에 나와 엎드려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솔로몬 왕은 성전 건축을 마친 후 봉헌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께 이렇게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내 하나님 야훼여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이 종이 오늘 주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왕상 8:28~29). 우리가 주님의 전에 나와 기도할 때 주님은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7).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우리 삶의 문제와 고통은 대부분 기도하지 않아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내 힘으로 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더 커지고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면 마음의 염려, 근심, 걱정이 떠나가고 모든 어려움이 해결됩니다. 우리는 기도의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의 기도를 듣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고 또 부르짖으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주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성전을 통해 놀라운 은혜와 복을 넘치도록 우리에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3. 복의 근원 하나님의 집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며 복의 근원입니다. 신앙생활의 기본은 예배에 있습니다. 예배 잘 드리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예배가 멀어지면 하나님도 멀어지게 됩니다. 반대로 예배드리기를 힘쓰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집에서 우리에게 넘치는 복을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집은 축복의 터전입니다. “야훼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시 122:9). 하나님의 복이 성전으로부터 강물같이 흘러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집에 거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시 84:4). 우리가 성전에서 예배드릴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기적이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야훼를 송축하라 천지를 지으신 야훼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시 134:2~3). 하나님은 성소에서 주의 자녀에게 평안을 부어주십니다.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시 122:8). 우리가 이 세상 모든 걸 다 가졌다 해도 마음에 평안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 가운데 염려, 근심, 걱정, 불안, 미움, 분노가 떠나게 하시고 평안이 넘쳐나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오는 것이 복입니다. 예배드리는 것이 복입니다. 주님 앞에 나올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놀라운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며 강건함을 얻는 삼중축복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을 하나님 제일주의, 교회 중심의 신앙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충성스럽게 섬기는 귀한 일꾼이 되어 하나님 나라의 큰 상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예배에 최선을 다하고 기쁨과 감사로 주님을 섬기며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자녀 삼아 주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이 땅에서 짧은 나그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예수님을 잘 믿고 교회를 열심히 섬기며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의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장차 주님 앞에 설 때 큰 상을 받는 충성된 일꾼이 되도록 우리의 삶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10.2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
  •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브리서 11장 5~6절) 죄 가운데 방황하던 인생 예수 보혈로 회개하고 성경 충만한 믿음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 살아야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죄와 허물 많은 인간은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어떤 노력이나 행위로도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할 때 우리는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요 3:16).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제일주의의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에녹 히브리서 11장은 에녹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 11:5). 에녹이 살던 시대는 사람들이 타락하여 죄가 범람한 시대였습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하나님을 섬기는 의인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에녹은 그 죄악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성경은 그가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다고 기록합니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창 5:22~23). 사람들의 믿음이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것과 달리 에녹의 믿음은 300년 동안 변함없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이 한결같은 믿음에 감동하시어 그를 이 땅에서 죽음을 보지 않게 하시고 천국으로 데려가셨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 또한 신약 성경 유다서는 에녹이 죄 가운데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음을 보여줍니다(유 1:14~15). 우리는 이처럼 한평생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의인의 삶을 살았던 에녹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내 뜻과 고집대로 사는 삶이 아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하늘의 문을 여시고 넘치는 복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도록 지음받았습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7).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믿음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 11:6).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께 모든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며 그분께 나아가기를 힘쓰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우리의 구세주 되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의 통로이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고 고백하면서도 여러 일로 인해 스스로 시험에 들어 주님과 멀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예배에 소홀해질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집니다. 우리는 주님의 음성 대신 사람의 음성을 듣다가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당한 채 머물러 있지 말고 다시 일어나 예배를 회복하고 주님과의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배는 축복의 통로이므로 예배에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무슨 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든지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회개하고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고집, 교만, 불순종을 회개하고 주님 앞에 나올 때 하나님은 하늘 문을 여시고 놀라운 은혜로 우리를 채워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으로 나아갈 때 주님의 치료와 용서의 은혜가 우리 삶에 임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주님 앞에 나아와 보혈의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은 후에도 계속해서 성장하는 신앙을 유지해야 합니다. 신앙이 요동치며 오르락내리락하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시험에 들 수는 있어도 빨리 회복하고 신앙이 성장해야 합니다.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우리 삶에 넘치게 임할 것입니다. 3. 지금도 살아계셔서 상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믿음은 곧 지금도 살아계셔서 상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죄에 빠지거나 타락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신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코람데오)의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때 거짓말하고 욕하고 남들을 미워하는 등 타락한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잘못된 모습에서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은혜를 간구할 때 주님이 우리에게 복을 내려주십니다. 회개하고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우리 순복음교회 신앙의 핵심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그 뜻대로 살아가도록 이끌어 줍니다. 성령 충만은 일시적이어서는 안 되며 계속 지속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불이 꺼지니까 모든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성령 충만함을 회복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식을 가지고 믿음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며 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용서하시며 치료하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는 것 없고 손에는 잡히는 것이 없더라도 절대 긍정의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 믿음을 붙잡고 나아갈 때 하나님이 놀라운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영원한 상급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상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 앞에 설 때 모두가 칭찬받고 상급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1).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만 바라보고 절대 긍정, 절대 감사의 믿음으로 전진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절대 긍정의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지금도 살아계셔서 상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거룩한 꿈을 향해 믿음으로 전진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10.1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성경 인물
    (113) 사랑의 사도, 요한
  • 요한복음 등 저서 통해 복음 전파 예수님 만나 사랑의 사도로 변화돼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도 요한은 이며 기독교에 매우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이다.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제자이며 요한복음,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를 기록했고 신약성경의 유일한 예언서인 요한계시록을 썼다. 세베대의 아들인 요한은 형제 야고보와 함께 갈릴리에서 어부로 지내던 중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다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자 바로 예수님께 달려가 제자가 됐다. 예수님을 따른 이 두 형제는 예수님께 사랑받는 열 두 제자에 속했지만 감정이 격발할 때가 많았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소란을 뜻하는 의미의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실 정도였다. 요한은 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었지만 어디든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조급하고 폭력적이던 성격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해 변화됐다. 그는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 다른 제자들이 모두 도망을 했을 때에도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따라갔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제자 중에 유일하게 그곳을 지킨 제자였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무덤으로 맨 먼저 달려간 사람도 요한이었다. 예수님은 요한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에 자신의 어머니를 그에게 의탁하셨고 그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극진히 모셨다. 초대교회 설립의 핵심 인물이었던 요한은 사도 바울에게 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이라고 칭함을 받기도 했다. 노년을 에베소에서 설교와 저술활동으로 보내던 요한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 시에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죄목으로 밧모섬에 유배됐다. 그곳에서 신약의 마지막 복음서인 요한계시록을 저술했다. 사면되어 다시 에베소로 귀환한 그는 교회들을 지도하고 성경을 기록하며 에베소에서 말년을 보냈다. 요한은 요한복음에 자기 자신을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제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을 전심으로 사랑했던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사랑의 사도인 요한은 설교할 때마다 성도들에게 서로 사랑할 것을 강조했다. 그의 설교의 핵심은 늘 예수 그리스도였다. 우리 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강조하며 불신자와 믿는 자 모두를 아우르는 설교를 했다. 그가 남긴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에 가장 강조된 것이 바로 사랑이다. 전도지나 교회에서 가장 많이 보고 듣는 이 성경 구절 안에 사도 요한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확실히 담겨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 2024.11.29 / 이미나 기자

    (112) 한나
  • ‘간절한 기도의 여인’ 표상 문제 앞에 탄식하며 부르짖어 기도하면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은총 얻게 돼 한나는 ‘기도의 여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자신의 괴로움을 극복할 만한 힘과 능력이 없을 때 어떤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지 한나를 통해 우리는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에브라임 산지 여로암의 아들 엘가나에게는 한나와 브닌나 두 아내가 있었다. 소실인 브닌나에게는 자녀가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이름의 뜻인 ‘은총’과는 달리 자녀가 없었다. 매년 고통을 겪어야 했던 한나는 고통 중에 부르짖고 또 부르짖으며 하나님 앞에 통곡의 기도를 드렸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야훼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야훼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야훼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 1:10~11). 한나가 주께 드린 기도는 처절한 절규였으며 가슴에 멍이 드는 탄식의 간구였다. 그런 한나의 부르짖음에 하나님은 그 마음을 감찰하시고 한나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셨다. 성경 사무엘상 2장 1~10절은 한나가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기도에 응답해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격의 내용이 기록돼 있다.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야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야훼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은 먼저 자녀를 두어 그동안 한나를 업신여겼던 브닌나의 교만을 꺾어주시며 가정의 질서 또한 바로 세워주셨다.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삼상 2:5). “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삼상 2:9). 한나의 고백적 탄원과 언약의 서원을 보면 아들 사무엘이 하나님의 깊은 섭리와 은총에 의해 태어났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사무엘이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따라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는 것을 보면서 몇 가지 교훈도 얻게 된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헤아리신다는 것이다. 한나는 능력의 하나님을 믿었기에 포기하지 않고 응답을 얻을 때까지 기도했다. 또 성전에 나와 기도할 때 엘리 제사장이 술에 취한 것으로 오해할 정도의 절박하고 애끓는 기도를 드렸다. 기도 없이는 결코 응답을 얻을 수 없다. 둘째, 하나님은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는 역전의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이 신다. 자녀가 없던 한나는 브닌나의 업신여김을 참고 견뎌야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한나가 간구할 때 ‘은총’을 허락하셨고 고난의 주인공에서 영광의 주인공으로 그 삶을 변화시켜주셨다. 셋째, 한나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기도의 깊은 통찰력과 겸손의 지혜를 깨닫게 된다. 한나는 사무엘을 낳기까지 숱한 고통을 겪었지만 사무엘을 낳은 후 자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린다. 자녀가 내 소유물이 아님을 인정하는 겸손이다. 자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업이다(시 127:3). 이 땅에 사는 동안 청지기 사명을 가지고 자녀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자라도록 욕심을 버리고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며 한나와 같은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
  • 2024.11.01 / 오정선 기자

    (111) 안디바
  •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 주님을 섬기는 일에 타협 없던 안디바 한 사람의 순교가 지역 변화시켜 소아시아 버가모는 우상숭배가 만연한 도시로 유명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갖은 이유로 타협하고 우상숭배를 할 때 단 한 사람, 안디바는 우상숭배를 거부했다. 그는 뛰어난 석공이었지만 로마 황제의 신상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놋 가마 위에서 순교했다. 안디바는 로마 제국의 명령을 거절한 대가로 철판 위에 산 채로 구워져 순교를 당했지만 버가모교회 부흥의 씨앗이 됐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충성된 증인이라고 높여주셨다. 안디바라는 이름도 ‘모든 사람을 반대하는 자’라는 뜻이다. 안디바는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핍박하는 로마 관리들에게 당당했다. 그는 순교를 당하는 순간에도 “만왕의 왕, 만주의 주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니 예수 외에는 내가 절하지 않겠노라”고 외칠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순교를 통해 책망받던 초대교회 중 하나인 버가모교회가 변화됐다. 예수님을 영접했지만 지나온 삶을 끊지 못한 채 죄의 유혹에 빠져 살아가던 버가모교회의 성도들은 안디바의 순교를 보고 180도 달라졌다. 작은 유혹에도 넘어지고 흔들리던 이들이 우상숭배로 만연한 지역에서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외치게 된 것이다. 버가모교회가 있는 지역은 해발 300m의 높은 지역에 있었다. 또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사탄의 권좌’라고 불리는 무려 12m나 되는 거대한 제우스 신전과 로마 황제를 예배하는 신전도 있었다. 라틴 교부였던 터툴리안의 『순교자에 대해서』라는 책을 보면 안디바에 대해 알 수 있다. 당시 버가모교회의 그리스도인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한 부류는 예수님을 영접한 유대-그리스도인들이었다. 이들은 할례, 음식에 대한 규제, 율법을 지키는 것과 복음 사이에서 갈등했다. 또 다른 부류는 이방인이지만 기독교인이 된 헬라 성도들이었다. 이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 거리낌 없이 해 왔던 우상숭배, 성적인 문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건한 삶을 지켜가는 것에서 갈등했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도 당당히 하나님께 순종한 안디바의 신실한 믿음은 신앙이 흔들리던 많은 크리스천의 마음에 경종을 울렸다. 생계를 위한다는 이유로 세상과 타협하고 고난과 박해가 두려워 주님을 의지하지 못할 때가 있다면 고통 속에서도 주님 한 분만을 바라보며 의지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를 기억하자.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계 2:13).
  • 2024.10.04 / 박찬웅 기자

    예수님의 팔복
    ⑧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
  • 의를 위한 고난은 복된 길 산상수훈은 신앙생활의 핵심 천국 소망 갖고 믿음 지켜야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되어 있는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제자들과 무리를 향해 가르치신 말씀이다. 기독교 윤리와 신앙생활의 핵심을 담고 있는 예수님의 설교 중 가장 위대한 가르침이라고도 불린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가운데 마지막 팔복은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가장 도전적인 말씀이자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에 대한 기준을 제시한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는 말씀은 고난이라는 현실 너머에 있는 하늘의 상과 위로를 선포한다.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의’란 윤리적 정의를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뜻한다. 인간의 행위로 얻는 의로움이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그 의다. 그러므로 의로운 삶이란 곧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을 자랑하며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어둠을 드러내는 의와 진리는 세상의 가치와 충돌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라고 격려한다. 마태복음 5장 11~12절은 이렇게 덧붙인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이러한 복은 단지 위로의 말이 아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이라는 증거다. 예수님 때문에 조롱받고 오해받는 그 길은 하나님이 그 위에 함께하신다는 확증이 된다. 베드로전서 4장 14절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말씀한다. 세상에 빛과 소금되신 의로우신 예수님께서는 가장 많은 핍박을 받으셨다. 빛은 어둠을 불편하게 하고, 소금은 부패를 막아 거부감을 일으킨다. 예수를 따르는 삶은 세상과 갈등하게 마련이고 박해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자연스럽게 따르는 열매인 것이다. 팔복의 시작과 끝은 모두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는 동일한 복으로 연결된다. 이는 팔복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과 궁극적 소망을 드러내는 말씀임을 보여준다. 믿음의 길에는 고난이 따르지만 가장 복된 길이다. 예수님을 따라 의로운 삶을 살다가 핍박을 받는 자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그는 이미 천국의 시민이며 하늘의 상이 예비 됐기 때문이다. 의로운 삶은 하늘의 상급으로 이어지며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때 고난이 오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담대히 나아가자. 그 길 끝에는 주님의 상급과 위로가 반드시 기다리고 있다.
  • 2025.07.31 / 이미나 기자

    ⑦ 화평하게 하는 자
  • 피스메이커,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사람 평화의 왕 예수님 세상에 전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음을 받는 복 누려야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세상이 추구하는 물질적인 복이 아닌,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과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 진정한 복이라 소개하는 팔복에서 일곱 번째로 소개된 ‘화평하게 하는 자’는 헬라어 ‘에이레네포이오스’로 ‘에이레네’(평화)와 ‘포이에오’(만들다)의 합성어이다. ‘팔복’에서 화평은 성경의 평화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단순히 평화를 사랑하는 수준을 넘어 적극적으로 갈등을 중재하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을 뜻한다. 일명 ‘피스메이커’(Peace Maker)이다. 성경이 말하는 피스메이커는 혼자 평화롭게 살면서 평화의 열매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과 공동체를 화해시키는 어려운 일에 자신을 바쳐 헌신하는 사람이다. 대표적인 피스메이커로는 예수님이 있다. 그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처한 인류의 ‘피스메이커’로 오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자녀가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됐다(롬 5:1). 독단과 분열이 가득했던 이 세상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화평의 길이 열린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군림하고 누리는 삶을 살지 않으셨다. 우리에게 평안을 주기 위해 헌신적인 사랑을 베푸셨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갈등과 분열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하나 되게 하는 ‘피스메이커’가 되어야 한다. 경쟁하거나 다투는 대신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삶을 본받아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될 때 이 세상에 평화가 임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음 받는 진정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성경이 말하는 화평에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기쁜 소식, 즉 복음을 전하는 것도 포함된다는 점이다(사 52:7). 그래서 화평케 하는 자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로 말미암아 궁극적인 평화가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전파하는 것이 곧 평화를 이루는 핵심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중세 평화의 사도인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처럼 우리도 세상의 화해자가 되어야 한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 신앙을, 거짓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가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 2025.07.04 / 금지환 기자

    ⑥ 마음이 청결한 자
  • 천국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하나님 볼 수 있어 예수님의 보혈 의지해 마음 지켜 나아가야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본문으로 설교한 이영훈 목사는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마음에 더러움이 없고 깨끗한 것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정결해야 했다. 흠이 있는 것은 드릴 수 없었다”면서 “하나님께 우리가 드려지기 위해서는 흠이 없는 모습으로 나아와야 한다. 우리는 죄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기 때문에 예수의 보혈로 우리가 정결함을 입고 변화 받아야한다. 주 앞에 예배를 드릴 때에 우리가 정결한 모습으로 흠이 없는 모습으로 드려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하나님은 구만리장천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닌 무소부재하신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볼 수 없다. 모든 인간은 죄를 범하였고 율법적으로 온전하고 정결해질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는 마음 자세만큼은 순전하고 순수할 수 있다. 이는 두 마음을 품지 않고 마음을 청결히 하여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는 우상숭배의 죄, 음란의 죄, 누추함의 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회개해야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대속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을 수 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 마음을 청결히 하고 매 순간 성령님께 마음을 드리고 정결케 해주시기를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 조용기 목사는 마음 상태에 따라서 보이는 것이 다르게 보인다고 설명하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내 주먹을 믿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해를 봐도 하나님이 보이고 달을 봐도 하나님이 보이고 별들을 봐도 하나님이 보이고 꽃 한 포기를 봐도 ‘아! 하나님이 묘하게 지으셨구나’ 사람들을 봐도 ‘하나님이 얼마나 이쁘고 아름답게 사람을 만드셨느냐’라고 말한다”고 했다. 또한 조용기 목사는 “밉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밉게 보인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면 미운 가운데도 모든 아름다운 것이 눈에 보인다. 마음이 나의 환경을 바라보게 하고 결정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요소가 되는 것이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전했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 충만을 간구하고 예수님의 보혈에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스스로 마음을 잘 지켜서 하나님만 바라볼 때 천국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처럼 이땅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고 교제하면서 살아가는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다.
  • 2025.05.30 / 복순희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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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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