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담임목사 주일설교
조용기 원로목사 주일설교
오늘의 묵상
7월 5일(토) - 염려가 아닌 믿음으로
  • ◎ 말씀 : 마 6:31~33 ◎ 찬송 : 456장(통 509장) 먹고사는 문제는 우리 삶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인간의 염려와 근심도 대부분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지 않도록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이러한 연약함을 아시고 문제의 해답을 제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구하라고 하신 “그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이며 “그의 의”는 우리 삶에 중심으로 삼아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이 다스리시는 나라가 되고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세상의 모든 염려와 걱정과 근심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생활의 모든 걱정과 염려 앞에서 눈앞의 환경보다 주님을 먼저 바라보며 그것들을 이겨내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6.2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7월 4일(금) - 행복의 비결
  • ◎ 말씀 : 마 5:3 ◎ 찬송 : 427장(통 516장)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소망하지만 그 비결을 잘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팔복에 관한 말씀을 통해 사람이 어떻게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중 첫 번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리는 행복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재물의 소유와 상관없이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영적인 가난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마음과 영혼이 가난해서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란 세상 누구에게도 도움을 구할 수 없어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삶의 매 순간 하나님만 의지하여 천국을 소유한 것과 같은 행복을 누리며 살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6.2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7월 3일(목) - 우리의 자존감은 사명 안에 있습니다
  • ◎ 말씀 : 마 3:11 ◎ 찬송 : 200장(통 235장) 침례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의 침례를 받을 것을 외치며 예수님의 공생애를 준비하는 사명을 맡은 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의 신을 들 자격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신을 든다’라는 표현은 주인의 신발을 준비하는 종의 역할을 의미합니다. 침례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의 종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한 존재라며 겸손함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겸손에서 자존감의 상실은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그 누구보다도 높은 자존감을 지녔기에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것은 세상의 부와 명예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때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진정한 자존감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직 주님이 주신 사명이 내 자존감의 근원이 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6.2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예수님의 팔복
    ⑥ 마음이 청결한 자
  • 천국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하나님 볼 수 있어 예수님의 보혈 의지해 마음 지켜 나아가야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본문으로 설교한 이영훈 목사는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마음에 더러움이 없고 깨끗한 것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정결해야 했다. 흠이 있는 것은 드릴 수 없었다”면서 “하나님께 우리가 드려지기 위해서는 흠이 없는 모습으로 나아와야 한다. 우리는 죄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기 때문에 예수의 보혈로 우리가 정결함을 입고 변화 받아야한다. 주 앞에 예배를 드릴 때에 우리가 정결한 모습으로 흠이 없는 모습으로 드려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하나님은 구만리장천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닌 무소부재하신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볼 수 없다. 모든 인간은 죄를 범하였고 율법적으로 온전하고 정결해질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는 마음 자세만큼은 순전하고 순수할 수 있다. 이는 두 마음을 품지 않고 마음을 청결히 하여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는 우상숭배의 죄, 음란의 죄, 누추함의 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회개해야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대속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을 수 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 마음을 청결히 하고 매 순간 성령님께 마음을 드리고 정결케 해주시기를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 조용기 목사는 마음 상태에 따라서 보이는 것이 다르게 보인다고 설명하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내 주먹을 믿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해를 봐도 하나님이 보이고 달을 봐도 하나님이 보이고 별들을 봐도 하나님이 보이고 꽃 한 포기를 봐도 ‘아! 하나님이 묘하게 지으셨구나’ 사람들을 봐도 ‘하나님이 얼마나 이쁘고 아름답게 사람을 만드셨느냐’라고 말한다”고 했다. 또한 조용기 목사는 “밉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밉게 보인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면 미운 가운데도 모든 아름다운 것이 눈에 보인다. 마음이 나의 환경을 바라보게 하고 결정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요소가 되는 것이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전했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 충만을 간구하고 예수님의 보혈에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스스로 마음을 잘 지켜서 하나님만 바라볼 때 천국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처럼 이땅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고 교제하면서 살아가는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다.
  • 2025.05.30 / 복순희 기자

    ⑤ 긍휼히 여기는 자 
  • 긍휼, 깊고 심오한 하나님의 가르침 진정한 용서와 사랑의 마음이 회복 가져와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나온 팔복 중 다섯 번째는 ‘긍휼’에 관한 내용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불쌍히 여김을 의미한다. 사랑과 자비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은 긍휼에 관한 가르침으로 누가복음 10장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기도 했다. 강도 만난 유대인을 제사장과 레위인은 지나쳤지만 사마리아인은 긍휼한 마음으로 그를 주막으로 데려가 돌봐주고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대가를 지불하겠다며 자비의 마음을 실제 행동으로 나타낸다.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짓고 불의해 추악해진 인생들을 긍휼히(불쌍히) 여기셨기에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주셨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제물로 삼으셨다. 아들을 제물로 바쳐서 우리 죄를 다 청산하게 하시고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용서와 의, 영광을 얻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탁월하신 긍휼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산 소망을 가지고 영광 중에 재림의 주를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무궁하신 긍휼과 자비의 결과이다. 따라서 긍휼을 받은 우리는 긍휼을 실천하며 살아가야 한다. 야고보서 2장 13절은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남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고 혹독히 심판하면 자신도 긍휼이 필요할 때 긍휼을 받지 못하고 혹독한 심판을 받게 된다. 사랑 실천과 용서의 삶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통로가 된다. 예수님은 긍휼, 자비의 실천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성경은 긍휼을 베푸는 자가 긍휼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이다. 마태복음 6장 14절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라고 기록하고 있다. 긍휼을 입은 자는 부모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같이 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부모는 자녀가 60세가 되어도 그 자녀를 언제나 긍휼의 마음으로 바라본다. 긍휼의 마음이 우리 안에 가득할 때 긍휼에 빚진 자들은 더 많아지고 또 다른 긍휼의 마음을 양산해 더 많은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된다. 대한민국은 지금 정치적 불안과 사회적 갈등 심화로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러한 때 크리스천은 절망 대신 희망의 빛이 대한민국에 살아나도록 긍휼의 마음을 안고 서로를 바라봐야 한다. 가족과 이웃, 지역 속에서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면 우리 안에 서로를 향한 불신과 미움의 마음은 더 이상 자라나지 못하게 된다.
  • 2025.05.02 / 오정선 기자

    ④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하나님의 의를 찾을 때 영적 허기 채워지고 만족 얻어 산상수훈의 팔복 중 네 번째 말씀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받는 복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배고픔과 목마름은 인간 생존에 중요한 요소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육체적 갈망을 넘어서 영적인 갈망에 대해 이야기하시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영적인 만족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란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의 도덕적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시하신 규율과 정의이다. 사람들의 생각과 법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의 도덕적 기준은 상황에 따라 지나치게 높거나 이중적이기도 해서 부조리함을 드러낸다. 이로 인해 우리는 때때로 상실감을 경험하고 그 결핍을 해결하려는 시도로 자연으로 들어가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불확실한 인생 속에서 단단한 마음을 갖고 정도를 걷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필수다. 다윗은 어린 시절부터 왕이 되기까지 하나님의 의를 갈망하고 그 인도하심을 간구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 42:1~2).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 63:1). 하나님을 갈망하며 의를 구했던 다윗도 인간적인 실수를 하고 그로 인해 깊은 자책과 회개를 경험했다. 양치기 소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이 하나님의 길과 인간적인 선택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갈등을 겪었을지 성경 말씀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먹고 마시는 일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 먼 길을 떠나기도 하고 원하는 것을 위시리스트에 적어두기도 한다. 육체적인 갈급함은 쉽게 느껴지지만 영적인 갈급함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자주 내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나의 영적 상태는 지금 배부른 상태인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정의를 실현하는 삶’을 열망하는 마음이 첫 번째요, 그 길을 잊지 않고 의를 실천하기 위해 ‘기도와 말씀으로 영적 습관’을 기르는 자가 아닐까. 이렇게 하나님의 의로 삶을 채워 나갈 때 주님이 우리의 영적 허기를 채워주시고 진정한 만족감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 2025.04.04 / 김주영 기자

    선교 열전
    (17) 존 로스
  • 최초의 한글 성경 번역으로 선교 토대 마련 최초의 한글 신약성경인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를 출판하고 이후 신약성경 전체를 번역하는데 기여한 존 로스(John Ross, 1842~1915)는 조선인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섰다.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로스는 조선의 복음화를 꿈꾸며 한글 성경 번역에 자신의 젊은 날을 헌신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그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입학했다. 신학교에 입학한 로스는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비롯해 독일어, 중국어 등 외국어를 공부했다. 사람들이 외국어를 공부하는 이유를 묻자 로스는 “예수님은 너희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는데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당연히 많은 외국어를 공부해야 한다”고 답했다. 신학생 시절 로스는 중국 선교사인 허드슨 테일러의 강연에 참석해 “중국에서 수억 명의 사람들이 복음을 모른채 죽어가고 있다”는 메시지를 듣고 복음을 알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선교사가 될 것을 결단했다. 1872년 중국에 도착한 로스는 먼저 선교 중이던 존 매킨타이어와 함께 길거리에서 한문으로 번역된 성경을 나눠주며 전도를 시작했다. 로스가 중국어로 설교를 할 수 있을 만큼 유창한 어학 실력을 갖추게 된 후에는 직접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순회 전도를 했다. 그는 중국인들에게 익숙한 유교적 표현을 이용해 기독교 교리를 이해시키려 노력했고 현실에 지쳐 불교·도교 사원으로 도피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찾아가 복음을 전했다. 당시 만주 지역에는 중국인뿐 아니라 조선인, 러시아인, 일본인 등 다양한 민족의 사람들이 거주했다. 주변 선교사들을 통해 조선을 알게 된 로스는 만주 지역에서 전도하며 머지않아 조선에도 복음의 문이 반드시 열릴 것을 확신했다. 그는 “조선인이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우리가 한글 성경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않겠습니까?”라며 주변 사람들에게 한글 성경에 대한 필요성을 알리고 번역에 힘썼다. 그는 당시 한문으로 된 성경은 이미 있었지만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글을 통해 복음이 더 많은 이들에게 전파될 것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로스는 자신이 한글을 공부하면서 정리한 내용과 예문을 바탕으로 조선을 방문할 선교사들에게 도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국어 교재인 ‘조선어 첫걸음’이라는 책도 저술했다. 비록 그는 조선의 쇄국 정책과 기독교 박해로 조선 땅을 밟지는 못했다. 그러나 조선과 가까운 중국 만주를 선교 거점으로 삼고 조선인들과 교류하며 복음을 전해 조선에 공식적인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 기독교 신앙이 자리 잡도록 기틀을 마련한 선교사다.
  • 2025.05.23 / 금지환 기자

    (16) 말콤 펜윅
  • 초기 한국기독교 토대 마련 성경·찬송 번역하며 46년간 헌신한 선교사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 1863~1935)은 국내에서 헌신하며 신약성경과 찬송을 우리말로 번역한 선교사다. 찬송이 수록된 『복음찬미』, 전도를 위한 성경 구절을 모은 『만민됴흔긔별』 발간뿐 아니라 1919년에는 『신약젼셔』 를 출판했다. 캐나다인인 그는 26살 때 초교파 모임인 나이아가라 사경회에 참석해 성경을 공부하던 중 인도 선교사로 활동한 로버트 와일더의 “사막에서 애타게 물을 찾으며 죽어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한 유리 주전자에 담긴 물이 아닌 오직 물이다”라는 간증을 듣고 선교사로 결단했다. 1889년 입국한 펜윅은 국내에서 복음을 전하며 250여 개의 교회를 세웠다. 펜윅은 장로교 조사 서경조와 동행하며 한국어를 배워 황해도 송천에서 ‘예수 사랑하심은’(Jesus Loves Me), ‘나는 참 기쁘다’(I am so glad) 찬송과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해 소년들에게는 성경을 가르치고 마을의 여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성경 공부를 이끌었다. 그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 15:20)는 사도 바울과 같은 신념을 갖고 개신교 선교부가 없는 원산으로 이동해 자립 선교의 토대 마련을 위해 농장을 운영했다. 1906년 ‘대한기독교회’를 조직한 펜윅은 다른 사람이 전하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선교 정책으로 삼고 원산을 중심으로 만주와 시베리아까지 소외된 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교단의 목사와 전도사는 순회사역자가 되어 전국에서 전도 활동을 펼쳤고 교인들도 전도 현장에 투입돼 복음 전파에 앞장섰다. 펜윅은 전도자들이 개척한 교회들을 돌아보며 그들의 신앙을 격려했고 가는 곳마다 사경회를 개최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집회가 끝나면 참석자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해 원산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이단 활동에 효과적으로 대처했다. 펜윅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만주를 거쳐 시베리아까지 복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마지막 순간까지도 선교에 힘썼다. 복음 전파를 향해 기관차처럼 달려온 그는 원산의 자택에서 72세의 나이로 하나님 곁으로 갔다. 말콤 펜윅은 이 땅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이래 46년간 선교하며 어떤 교파에도 의지하지 않고 한국인 사역자와 함께 초기 한국기독교의 토대를 마련했다.
  • 2025.01.31 / 박찬웅 기자

    (15)로티 문(Lottie Moon) 선교사
  • 일평생 중국 복음화 위해 헌신한 선교사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 일평생 수 만명의 중국인에게 찬양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파한 독신 여성 선교사가 있다. 미국 남침례교에서 파송한 로티 문이다. 1840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로티 문은 어릴 적부터 침례교 신앙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로티의 본명은 샬롯 딕스 문(Charlotte Diggs Moon)이다. 미국 버지니아 알베말 출신인 로티는 18세가 되던 해에 브라더스 목사의 집회에 참석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했다. 이후 대학에서 성경 공부와 기도 모임을 주도하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났다. 갑작스런 사고로 아버지를 일찍이 여읜 로티는 당시 남녀 차별이 심각했던 시대적 배경에도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고등교육까지 받아 미국 남부에서 가장 학식이 높은 여인이 됐다. 1873년 중국에서 학원 사역을 펼치고 있었던 선교사 부부를 돕기 위해 중국 선교사로 파송된 로티는 평일에는 학생들을 가르쳤고 주말에는 시골 마을을 순회하며 전도에 매진했다. 로티는 1885년 외국인이 한 명도 없고 외국인 보호 조약과 거리가 먼 지역인 핑투라는 곳에 정착해 본격적으로 현지인 복음화에 앞장섰다. 전도를 위해서는 먼저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며 선교지에서 관계 전도를 이어갔던 그는 현지인과 같은 옷을 입고 활동하며 마을에 복음을 전했다. 복음을 전할 때마다 현지인들의 핍박이 거셌다. 그러던 어느 날, 현지에서 로티가 가르치는 성경을 비난하고자 참석했던 중국인 리 쇼우팅이 성경을 접하며 개종하게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후 리 쇼우팅은 사도 바울처럼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 되어 북부를 다니며 전도하고 1000여 명에게 침례를 베풀며 귀하게 쓰임 받았다. 38년간 중국에서 헌신한 로티의 노력으로 16개 교회와 56개 학교가 세워져 많은 학생을 배출하게 하는 열매를 맺었다. 또한 남성 전도사 42명, 여성 전도사 14명의 현지인 제자를 세웠고 이들을 통해 2000여 명 현지인이 침례를 받았다. 1912년 로티는 미국 남침례교의 재정 상황의 악화로 더 이상 선교 지원금을 받지 못하게 됐다. 거기에 기근까지 들어 아이들이 굶주리게 되자 자신의 식사를 나눠주며 본인은 금식을 하다 결국 25㎏까지 몸무게가 줄었다. 쇠약해진 몸을 회복하기 위해 미국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지만 미국으로 가는 길에 72세의 생일을 일주일 앞둔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추리아 호에서 소천을 받았다.
  • 2024.02.23 / 금지환 기자

    주일설교 요약본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
  •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여 이르되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에스더 4장 13~16절) 신앙의 절개를 지키고 말씀과 기도로 나아갈 때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이 실패를 승리의 길로 이끄셔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며 지금도 하나님은 세계 모든 나라의 흥망성쇠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구약 에스더서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 뒤 페르시아 땅에 흩어져 살던 유다 백성이 직면한 위기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기록한 말씀입니다. 1. 하나님의 백성에게 다가온 절망적 상황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에 앗수르에 멸망했고 남유다 또한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멸망당했습니다. 이후 남유다 백성은 바벨론으로 끌려가 포로 생활하며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남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도 얼마 지나지 않아 바사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바사 곧 페르시아 제국은 아하수에로 왕 통치시대에 세력이 더욱 확장되어 애굽에서 인도까지 127개 지방을 관할하는 최대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바사의 아하수에로 왕은 즉위 3년에 자기 명을 거역한 왕후 와스디를 폐위시키고 전국에서 아름다운 처녀를 구해 그중에서 왕비를 뽑게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로 그곳에 포로로 끌려와 살고 있던 유대인 에스더가 수많은 후보자 가운데 새 왕비로 뽑히게 되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의 제칠년 시월 곧 데벳월에 에스더가 왕궁에 인도되어 들어가서 왕 앞에 나가니 왕이 모든 여자보다 에스더를 더 사랑하므로 그가 모든 처녀보다 왕 앞에 더 은총을 얻은지라 왕이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로 삼은 후에”(에 2:16~17). 에스더는 일찍 부모를 잃은 고아였으나 사촌 오빠 모르드개가 그녀를 딸처럼 키웠습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는 아하수에로의 왕궁 문 앞에서 일하는 신하였습니다(에 3:2). 아하수에로 왕은 하만을 모든 대신들보다 높이고 백성들에게 그에게 무릎을 꿇고 절하라고 명령했는데, 하나님만 섬기던 모르드개는 왕의 명령일지라도 하만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분노한 하만은 유대인을 모두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탈취할 수 있도록 왕의 허락을 받아 조서를 전국에 반포했습니다(에 3:13~14).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은 아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전멸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전 세계 곳곳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많은 크리스천이 핍박과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릎 꿇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모르드개가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믿음을 굳건히 지켰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섬기고 살아가는 믿음의 용사가 되어야 합니다. 2. 기도와 결단의 신앙 왕의 조서가 전국 각처에 전달되어 유다 민족이 전멸당할 위기에 처하자 온 유대인은 애통하고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왕의 명령과 조서가 각 지방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에 4:3). 우리가 어떤 문제를 만나고 어려움을 겪더라도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이리저리 뛰기보다 먼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전갈을 보내어 왕 앞에 나아가 유다 민족을 위해 간청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왕의 부름 없이 왕 앞에 나아가는 자는 왕이 금 규를 내밀지 않는 한 곧바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에 4:11). 그럼에도 에스더는 유다 민족을 살리기 위해 3일간 금식하고 왕에게 나아가기로 결단합니다.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여 이르되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에 4:15~16). 이처럼 믿음은 결단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부족하여 문제 앞에서 망설인다면 어떤 일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절대 긍정의 믿음을 가지고 약속의 말씀을 붙잡아 믿음으로 전진해 나아갈 때 기적이 임합니다. 우리가 마주한 절망의 상황을 희망과 축복으로 바꾸는 능력은 기도에 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의 기도가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응답으로 역사하십니다. 기도하는 백성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우리가 문제 앞에서 에스더와 같이 결사 각오의 기도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3.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에스더가 예복을 갖추어 입고 왕궁 뜰에 서자 아하수에로 왕은 그녀를 기쁘게 맞이하며 금 규를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에스더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 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 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하니”(에 5:2~3). 에스더는 자신의 요청을 곧바로 말하지 않고 지혜롭게 왕과 하만을 연회에 초청합니다. 기분 좋게 연회에 다녀온 아하수에로 왕은 그날 밤에 잠이 오지 않아서 역대 일기를 가져오게 하여 읽다가 마침 왕을 암살하려던 음모를 모르드개가 고발해 막았던 사건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하수에로 왕은 모르드개를 높이기 위해 왕복을 입히고 왕의 말을 태워 성중 거리를 돌게 하며 그가 왕이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백성들 앞에서 공표하게 합니다. 왕이 모르드개의 충성과 왕의 생명을 구한 공로를 알게 된 것은 에스더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스더와 유다 민족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모든 일을 친히 주관하신 것입니다. 에스더는 두 번째 연회 자리에서 왕에게 자신이 유대인임을 밝히고 유다 민족의 생명을 구해 달라고 간청하며 그들을 말살할 음모를 꾸민 자가 하만임을 폭로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에스더의 소원대로 유다 민족을 구원해 주었고 하만은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준비한 장대에 자신이 달려 죽게 되었습니다(에 7:10). 하만이 유대인을 멸하려고 정한 아달월 13일은 오히려 유다 민족을 치려고 하던 자들이 멸망한 날이 되었고, 그다음 날은 ‘부림절’이라 불리며 유대인들 사이에 오늘날까지 기쁨의 축제로 지켜지게 되었습니다(에 9:31). 하나님은 절망의 날을 구원의 날로 바꾸셨고 실패처럼 보인 상황을 승리의 길로 이끄셨습니다. 우리의 인생 또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담대히 나아가 승리하고 믿음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이 친히 우리와 동행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삶에 때때로 고난이 찾아오더라도,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길 원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의 자녀가 되어 모든 문제에서 승리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6.2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그의 곁에서 창조자가 되어
  •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잠언 8장 30~31절) 하나님 곁에 머물며 숙련된 창조자의 자세로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 감당해 세상에 선한 영향력 끼쳐야 사랑은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보람을 느끼게 하며 앞으로 나아갈 힘을 줍니다. 이처럼 삶의 근원이 되는 참된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큰 은혜이자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우리는 그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1.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우리의 믿음은 사랑의 하나님 곁에 머물며 그분과 깊은 교제 가운데 동행할 때 시작됩니다. “내가 그 곁에 있어서”(잠 8:30a). 우리가 하나님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믿음으로 결단하며 하나님을 붙들면 주님은 평생토록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의 앞길을 친히 인도해 주십니다.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야훼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신 31:6).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새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곁을 떠나 멀어지게 되면 다시 죄를 짓고 방황하는 옛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시선은 언제나 믿음의 주시며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향해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을 의지하고 나아갈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우리의 삶에 임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회복시켜 주신 본래의 형상대로 살아감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창조적 삶을 누리게 됩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7).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또한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신 그 은혜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곁에 머물며 그분의 뜻을 따라 세상 가운데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하나님과 함께 이루어 가야 합니다. 2. 창조자가 되어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창조자가 되어”라고 말씀합니다(잠 8:30b). ‘창조자’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아몬’인데, 이를 성경 원어의 의미로 풀어보면 어떤 일을 능숙하게 감당하는 숙련된 기술자 또는 장인을 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하나님의 장인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이 세상에서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이뤄가야 합니다. 절망이 가득한 곳에는 희망을, 슬픔이 있는 곳에는 기쁨을, 원망과 불평이 들리는 곳에는 감사와 찬송을 창조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숙련된 기술자가 되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직장인은 직장에서, 사업가는 사업장에서, 예술가, 교육자, 의료인, 정치인 등도 각자의 자리에서 맡겨진 책임과 역할을 성실히 감당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상처나 절망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인생에서 지나가는 한 과정일 뿐 우리를 멈추게 할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과거를 되짚으며 실패의 기억을 다시 꺼내어 후회하고 주저앉습니다. 과거의 실패를 아무리 되돌아본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를 성공의 자리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과거에 매여서 좌절하지 말고 믿음으로 일어나 미래를 향해 전진해야 합니다. 이전의 아픈 과거는 지나갔습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희망의 내일만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밝고 찬란한 미래를 향해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각자 삶의 자리에서 숙련된 창조자의 자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과거를 딛고 새로운 미래를 창조해 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3. 그의 기뻐하신 바 되었으며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자신을 위해 살았지만 이제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잠 8:30c).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우리가 삶 속에서 감당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자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아무리 작고 평범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재능으로 이를 감당할 때, 그 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찬양과 기도뿐만이 아니라 일터에서의 수고도, 가정에서의 섬김도 모두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칭찬을 받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침례를 받으셨을 때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날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크리스천의 삶은 자기 욕심과 탐욕을 쫓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과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죄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있지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며 존경하고 칭찬할 수 있는 삶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변을 돌아보며 소외된 이웃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고, 하나님의 선한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선한 영향력을 세상에 끼치면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이 우리를 통해 온 세상에 전해질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잘되는 것은 하나님께 받은 복을 세상에 전하라는 주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용서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허물을 덮어주시고 우리를 축복의 통로로 사용해 주십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무엇보다 사랑은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힘들고 낙심되는 상황을 만납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셔서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끝까지 사랑하고 의지하면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고 은혜와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시 91:14).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언제나 하나님의 곁에 머물며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삶 속에 맡겨진 모든 일을 믿음으로 성실히 감당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원합니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6.1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
  • “야훼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예레미야 29장 11~13절) 늘 성령님과 동행하며 하나님 주시는 평안 누리고 진심으로 주님께 기도하면 거룩한 꿈과 소망 얻게 돼 세상에는 하나님의 길과 인간의 길,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도 두 길 사이에서 흔들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1.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평안 성경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평안이라고 말씀합니다. “야훼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오늘날 세상은 불안과 근심, 염려로 가득하기에 많은 사람이 마음의 평안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로 물든 이 세상에서는 참된 평안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평안을 얻으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깊은 근심과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죄로 인해 마음의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탄식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우리에게 참된 평안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평안을 구하려고 애쓰는 대신 예수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모든 문제를 내려놓고 평안을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또한 우리가 참된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힘과 노력만으로는 예수님이 주신 평안을 온전히 지켜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 충만하여 늘 성령님과 동행하면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이 주신 평안을 지킬 수 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위대한 사도인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감리교를 창시한 요한 웨슬레도 성령 충만을 받은 후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우리의 인격과 삶 속에 성령의 열매가 풍성히 맺히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평안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성령님이 임하시면 우리 마음에 사랑과 기쁨이 가득하게 되고 예수님이 주신 평안으로 넘쳐나게 됩니다. 우리 안에 주어진 평안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인정하시며 도우신다는 믿음의 확신에서 비롯됩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야훼이시니이다”(시 4:8). 하나님이 주신 평안을 소유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불안해하거나 분노하지 않으며, 불평하지도 않습니다. 항상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을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 하나님께서 주시는 미래와 희망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안과 함께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주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남유다의 멸망을 앞둔 절망의 때에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야훼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낙심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이루실 미래와 희망을 전했습니다. 비록 눈앞의 현실은 고난과 슬픔만으로 가득한 것 같지만 지금 겪는 고난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의 미래로 이끄시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절망은 끝이 아니라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징검다리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눈앞의 문제만 바라보고 쉽게 좌절하며 절망합니다. 이는 어둡고 부정적인 세상에 익숙해져서 불안을 견디고 이겨낼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이들은 무속에 기대어 위안을 얻으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들의 불안을 더욱 깊게 만들 뿐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참된 꿈과 희망을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우리는 눈앞의 고난에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믿으며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승리와 축복을 주시고 기적의 내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에게는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 같은 새 힘을 주신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야훼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세상이 절망과 어둠을 이야기할지라도 우리는 희망과 미래를 선포해야 합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를 보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말씀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는 것’이 세상의 시간표라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시간표입니다. 고난의 저녁이 지나가면 희망의 새벽, 축복의 새벽, 기적의 새벽이 밝아옵니다. 그러므로 주님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좋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3.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주시는 미래와 희망을 품기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렘 29:12).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와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부모와 자녀가 대화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알고 이해하듯이 우리도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고난 중에도, 평안할 때도, 외롭고 지치거나 병들었을 때도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우리에게 크고 은밀한 일들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야훼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시 3:4).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를 절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 인생에 고난의 밤이 지나가고 희망의 새벽이 밝아올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 평안과 희망임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은혜의 길로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다가오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문제와 씨름하거나 사람을 찾기보다 가장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처한 형편과 처지를 보고 안타깝게 여길 수 있지만 문제에 대한 답을 줄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문제와 어려움이 다가오면 마음에 평안이 임할 때까지 계속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마음의 평안 가운데 하나님이 거룩한 꿈과 소망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성령 충만을 받아 모든 문제를 이기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꿈과 소망 안에서 담대히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불안과 염려, 근심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평안과 미래의 소망을 부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도함으로써 놀라운 응답과 기적을 체험하길 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평안 안에서 믿음으로 담대히 전진하는 우리가 되게 해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6.0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성경 인물
    (113) 사랑의 사도, 요한
  • 요한복음 등 저서 통해 복음 전파 예수님 만나 사랑의 사도로 변화돼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도 요한은 이며 기독교에 매우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이다.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제자이며 요한복음,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를 기록했고 신약성경의 유일한 예언서인 요한계시록을 썼다. 세베대의 아들인 요한은 형제 야고보와 함께 갈릴리에서 어부로 지내던 중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다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자 바로 예수님께 달려가 제자가 됐다. 예수님을 따른 이 두 형제는 예수님께 사랑받는 열 두 제자에 속했지만 감정이 격발할 때가 많았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소란을 뜻하는 의미의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실 정도였다. 요한은 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었지만 어디든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조급하고 폭력적이던 성격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해 변화됐다. 그는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 다른 제자들이 모두 도망을 했을 때에도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따라갔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제자 중에 유일하게 그곳을 지킨 제자였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무덤으로 맨 먼저 달려간 사람도 요한이었다. 예수님은 요한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에 자신의 어머니를 그에게 의탁하셨고 그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극진히 모셨다. 초대교회 설립의 핵심 인물이었던 요한은 사도 바울에게 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이라고 칭함을 받기도 했다. 노년을 에베소에서 설교와 저술활동으로 보내던 요한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 시에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죄목으로 밧모섬에 유배됐다. 그곳에서 신약의 마지막 복음서인 요한계시록을 저술했다. 사면되어 다시 에베소로 귀환한 그는 교회들을 지도하고 성경을 기록하며 에베소에서 말년을 보냈다. 요한은 요한복음에 자기 자신을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제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을 전심으로 사랑했던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사랑의 사도인 요한은 설교할 때마다 성도들에게 서로 사랑할 것을 강조했다. 그의 설교의 핵심은 늘 예수 그리스도였다. 우리 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강조하며 불신자와 믿는 자 모두를 아우르는 설교를 했다. 그가 남긴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에 가장 강조된 것이 바로 사랑이다. 전도지나 교회에서 가장 많이 보고 듣는 이 성경 구절 안에 사도 요한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확실히 담겨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 2024.11.29 / 이미나 기자

    (112) 한나
  • ‘간절한 기도의 여인’ 표상 문제 앞에 탄식하며 부르짖어 기도하면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은총 얻게 돼 한나는 ‘기도의 여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자신의 괴로움을 극복할 만한 힘과 능력이 없을 때 어떤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지 한나를 통해 우리는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에브라임 산지 여로암의 아들 엘가나에게는 한나와 브닌나 두 아내가 있었다. 소실인 브닌나에게는 자녀가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이름의 뜻인 ‘은총’과는 달리 자녀가 없었다. 매년 고통을 겪어야 했던 한나는 고통 중에 부르짖고 또 부르짖으며 하나님 앞에 통곡의 기도를 드렸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야훼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야훼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야훼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 1:10~11). 한나가 주께 드린 기도는 처절한 절규였으며 가슴에 멍이 드는 탄식의 간구였다. 그런 한나의 부르짖음에 하나님은 그 마음을 감찰하시고 한나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셨다. 성경 사무엘상 2장 1~10절은 한나가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기도에 응답해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격의 내용이 기록돼 있다.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야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야훼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은 먼저 자녀를 두어 그동안 한나를 업신여겼던 브닌나의 교만을 꺾어주시며 가정의 질서 또한 바로 세워주셨다.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삼상 2:5). “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삼상 2:9). 한나의 고백적 탄원과 언약의 서원을 보면 아들 사무엘이 하나님의 깊은 섭리와 은총에 의해 태어났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사무엘이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따라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는 것을 보면서 몇 가지 교훈도 얻게 된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헤아리신다는 것이다. 한나는 능력의 하나님을 믿었기에 포기하지 않고 응답을 얻을 때까지 기도했다. 또 성전에 나와 기도할 때 엘리 제사장이 술에 취한 것으로 오해할 정도의 절박하고 애끓는 기도를 드렸다. 기도 없이는 결코 응답을 얻을 수 없다. 둘째, 하나님은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는 역전의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이 신다. 자녀가 없던 한나는 브닌나의 업신여김을 참고 견뎌야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한나가 간구할 때 ‘은총’을 허락하셨고 고난의 주인공에서 영광의 주인공으로 그 삶을 변화시켜주셨다. 셋째, 한나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기도의 깊은 통찰력과 겸손의 지혜를 깨닫게 된다. 한나는 사무엘을 낳기까지 숱한 고통을 겪었지만 사무엘을 낳은 후 자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린다. 자녀가 내 소유물이 아님을 인정하는 겸손이다. 자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업이다(시 127:3). 이 땅에 사는 동안 청지기 사명을 가지고 자녀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자라도록 욕심을 버리고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며 한나와 같은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
  • 2024.11.01 / 오정선 기자

    (111) 안디바
  •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 주님을 섬기는 일에 타협 없던 안디바 한 사람의 순교가 지역 변화시켜 소아시아 버가모는 우상숭배가 만연한 도시로 유명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갖은 이유로 타협하고 우상숭배를 할 때 단 한 사람, 안디바는 우상숭배를 거부했다. 그는 뛰어난 석공이었지만 로마 황제의 신상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놋 가마 위에서 순교했다. 안디바는 로마 제국의 명령을 거절한 대가로 철판 위에 산 채로 구워져 순교를 당했지만 버가모교회 부흥의 씨앗이 됐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충성된 증인이라고 높여주셨다. 안디바라는 이름도 ‘모든 사람을 반대하는 자’라는 뜻이다. 안디바는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핍박하는 로마 관리들에게 당당했다. 그는 순교를 당하는 순간에도 “만왕의 왕, 만주의 주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니 예수 외에는 내가 절하지 않겠노라”고 외칠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순교를 통해 책망받던 초대교회 중 하나인 버가모교회가 변화됐다. 예수님을 영접했지만 지나온 삶을 끊지 못한 채 죄의 유혹에 빠져 살아가던 버가모교회의 성도들은 안디바의 순교를 보고 180도 달라졌다. 작은 유혹에도 넘어지고 흔들리던 이들이 우상숭배로 만연한 지역에서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외치게 된 것이다. 버가모교회가 있는 지역은 해발 300m의 높은 지역에 있었다. 또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사탄의 권좌’라고 불리는 무려 12m나 되는 거대한 제우스 신전과 로마 황제를 예배하는 신전도 있었다. 라틴 교부였던 터툴리안의 『순교자에 대해서』라는 책을 보면 안디바에 대해 알 수 있다. 당시 버가모교회의 그리스도인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한 부류는 예수님을 영접한 유대-그리스도인들이었다. 이들은 할례, 음식에 대한 규제, 율법을 지키는 것과 복음 사이에서 갈등했다. 또 다른 부류는 이방인이지만 기독교인이 된 헬라 성도들이었다. 이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 거리낌 없이 해 왔던 우상숭배, 성적인 문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건한 삶을 지켜가는 것에서 갈등했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도 당당히 하나님께 순종한 안디바의 신실한 믿음은 신앙이 흔들리던 많은 크리스천의 마음에 경종을 울렸다. 생계를 위한다는 이유로 세상과 타협하고 고난과 박해가 두려워 주님을 의지하지 못할 때가 있다면 고통 속에서도 주님 한 분만을 바라보며 의지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를 기억하자.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계 2:13).
  • 2024.10.04 / 박찬웅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PDF

    지면보기

  • 행복으로의 초대

    PDF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