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오순절 조직신학
VII. 죄론(Hamartiology) - 1
  • 죄의 근본적 정의는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
    인간은 죄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선언하고 있는데, ‘모든’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테스는 인류 전체를 포괄적으로 일컫는 단어이다. 우리 나라 말은 ‘죄’, 영어는 ‘sin’이라는 단어로 죄에 대해 포괄적인 의미로 지칭하고 있으나 성경은 ‘죄’에 해당하는 단어를여러 가지로 쓰고 있다. 구약성경은 8가지 다른 단어와 신약은 12가지의 다른 단어가 ‘죄’라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이 여러 단어 중에 헬라어 ‘하마르티아’가 죄론 (Hamartiology)의 어원이 되었다. ‘하마르티아’의 뜻은 ‘과녁에서 벗어나다’는 의미이다. ‘하마르티아’가 의미하듯 죄에 대한 근본적인 정의는 살인과 도둑질과 같은 범법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을 말한다. 최초 인류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서 볼 수 있듯이 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불순종이다. 불순종은 단지 하나님의 공의와 율법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며 인간의 한계성을 넘어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려는 행위로 나타났다(창 3장). 또한 하나님의 보좌를 침범하는 행위와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것을 의미 한다(사 14:13). 바울은 죄를 하나님의 ‘원수’(롬 5:10, 골 1:21)라고 했으며 그것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미워하는 자’(롬 1:30)라고 했다. 1. 죄의 기원 (The Origin of Sin) 죄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죄가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했거나 진정한 행복을 선사한 적은 한 순간도 없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 사역 가운데서 천사의 창조와 죄의 창조는 찾아 볼 수 없다. 모든 것이 다 보시기에 좋았고 악한 것은 없었다. 그럼 죄는 어디에서부터 온 것일까? 죄론에서 다루는 명제들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로 간주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죄 또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할 수는 없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동산 가운데 두셨다고 해서 인간의 타락을 유도했다고 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결단코 악을 행하지 않으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치 않으신다(욥 34:10).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그의 안에는 불의가 전혀 없다(신 32:4; 시 92:16).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기능은 강요가 아닌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위함이다. 인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는 것은 순종의 표현이며 과녁에서 벗어나지 않은 삶을 이어가기 위한 결단이다. 2) 죄는 천사의 세계에서 시작되었다 인간의 타락을 말씀하고 있는 창세기 3장을 보면 인간이 죄를 짓기 이전에 이미 ‘뱀’으로 형상화 된 사탄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창 3:1). 이것은 죄가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사야 14장 12~14절에 계명성으로 대변되는 천사의 타락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이 계명성을 영어 성경 KJV은 루시퍼(Lucifer)라고 번역을 했다. 사탄이 인간의 타락 이전에 이미 존재했으며 이들로부터 죄가 인간에게 들어 왔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죄에 대해 인간의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3) 죄는 인간의 고의적인 행위로 말미암은 것(롬 5:12, 18, 19) 죄는 외부로부터 온 유혹과 그 유혹에 대한 인간의 적극적인 반응에서 시작되었다. 성경은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14)라고 말씀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을 만큼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선한 자유를 잘못 사용함으로서 죄가 인간에게 들어 왔다. 인간은 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면 안 된다. 4) 죄의 이해 (1) 교부 시대의 죄의 이해 동방 교부들은 죄를 포괄적이고 피상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이에 반해 서방 교부들은 죄의 문제를 윤리적인 것으로 심화했다. 그래서 교황을 비롯한 가톨릭의 성인들은 아무 죄(윤리적인 죄)를 짓지 않았다고 주장하게 되었다(아타나시우스). 서방 신학의 아버지인 터툴리안에 의해 처음으로 원죄론이 대두되었으며,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은 타락 전에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지만, 타락 후에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2) 중세시대 토마스 아퀴나스는 죄의 종류를 ‘용서할 수 있는 죄’, ‘죽을 죄’,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이웃에게 범하는 죄’, ‘원죄 또는 유전 죄’, ‘행위 죄’, ‘원래적인 의의 결핍’, ‘질료’, ‘탐욕’ 등으로 나누어서 설명하려고 했다. 루터는 죄를 철저히 인격적으로 이해했다. 루터는 죄를 감각적, 육체적 영역뿐 아니라 인간의 영혼 안까지 도달한다고 생각했다. 멜란히톤은 죄를 ‘원래적인 의의 결핍’과 ‘탐욕’으로 이해했다. 칸트는 죄를 ‘인간의 본성 안에 있는 철저한 악’이라고 선언했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3.10.06

    Ⅵ. 인간론(The Doctrine of Humanity) - 3
  • 인간은 하나님의 실존이 투영돼 창조된 존재
    4. 하나님의 형상 (The Image of God, Imago Dei) 많은 기독교인들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았다는 말에 익숙해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첼렘)과 ‘모양’(떼무트)대로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1:26). 히브리어로 형상은 ‘첼렘’이다. 그 뜻은 ‘그늘지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그림자’(시 39:7)라는 뜻이며 ‘모양’은 ‘떼무트’인데 ‘닮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며 이 두 단어가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두 단어가 주는 의미처럼 인간은 하나님을 반영하는 존재이며 하나님의 실존이 그림자처럼 투영되어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천지창조를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다른 피조물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으며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임이 분명하다. 여기서 두 가지의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에 관한 의문이다. 둘째는 타락한 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1)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인가? (1) 형상(Image)과 모양(Appearance)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 둘은 동일시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두 단어가 동일한 의미라며 창세기 1장 26절에서 굳이 이 단어를 구별해서 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관해 가톨릭과 개신교는 서로 다른 이해를 하고 있다. 가톨릭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형상(image)과 하나님의 모양(appearance)을 일반화하지 않고 구별해서 이해해왔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속성(attributes)과 성품(character)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모양은 외형적인 모습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만약 하나님의 형상이나 모양을 하나님의 외형적인 모습으로 이해하면, 인간의 외형적인 모습과 같이 하나님도 눈이 두 개, 팔이 두 개, 손가락과 발가락이 있는 인간의 모습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모양과 틀에 갇혀 있을 수 없는 영이시라고 말씀하고 있다(요 4:24).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외모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은 분명히 아니다. 반론의 여지가 없이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을 가진 피조물로 창조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2) 광의적 하나님의 형상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이 서로 다르다는 것에 동의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의 범위와 의미에 대해서는 이견을 나타내고 있다. 개신교 내에서도 루터파와 개혁주의 뿐만 아니라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존재한다. 루터파는 제한된 의미로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형상을 영적인 요소로 제한시키고 있다. 그 결과 타락 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잃어 버렸다고 생각한다. 칼빈도 인간의 타락을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잃어버린 전적인 타락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후기 개혁주의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광의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광의적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어 주신 하나님의 형상이 영적인 영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사회적 성품, 지성, 인격, 윤리와 가치, 도덕적 성품까지 확대된 것을 말한다.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와 에밀 브루너(Emil Brunner, 1889~1966)와 같은 신정통주의자들은 인간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성 혹은 인간이 인간 사이에 맺고 있는 인격적 관계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2)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는가? 하나님의 형상을 거룩하고 영적인 것으로 제한한다면,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은 남아 있지 않다. 인간의 타락은 영적인 죽음을 의미하며,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과 그의 임재로부터 추방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광의적으로 해석한다면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타락 이후에도 인간 속에 남아 있게 된다(롬 1:19). 에덴동산에서와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이 세상에 살면서 제한된 범위 내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고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는 것(창 4:1~4)은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 이후에도 인간에게 남아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요소가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는 바울이 말한 ‘하나님을 알만한 인간의 지성’을 인간에게 남겨진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해했다.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고 그에게 순종하는 지혜가 인간에게 남아 있기에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그리스도를 통한 은총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회복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하나님을 반영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타락 이전 하나님의 권한을 위임받아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한이 인간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타락 이후 하나님의 형상을 상당부분 잃어 버렸고,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이것을 회복할 수 없다.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유일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3.06.30

    VI. 인간론(The Doctrine of Humanity) - 2
  • 영적인 상태와 직결되는 인간의 다섯가지 상태
    3. 인간의 상태 II 조직신학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는 인간에 대한 이해이다. 조직신학의 인간 이해는 사회, 문화, 정치, 경제적 환경보다는 인간의 영적인 상태와 직결된다. 특별히 인간의 상태에 대한 이해는 창조와 타락,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최후의 심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인간의 상태는 다섯 가지로 이해 될 수 있다. 1) 타락 이전의 무죄 상태(Status Integritatis) 무죄의 상태에 있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었으며 언제든 하나님의 임재에 참여 할 수 있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죽음의 공포, 질병, 고통, 슬픔, 불의 등 인간을 괴롭히는 모든 요소에서 벗어나 있었다. 타락 이전의 무죄 상태에 있는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간의 삶 속에 죄가 유입됐으며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2) 타락으로 인한 부패의 상태(status corruptionis) 완전한 선을 추구할 수 있었던 인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부패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에덴동산에서 누렸던 권리는 모두 박탈되었고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다. 인간의 거룩성은 사라졌고 하나님의 거룩 앞에 설 수 없게 되었다. 에덴동산의 풍요, 평화, 자유, 기쁨은 사라지고, 땀을 흘려야 먹고 해산의 수고와 고통을 짊어져야 했다.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창 3:16~18). 만물에 대한 통치권을 잃었으며 하나님의 임재 밖으로 버려졌다. 목숨은 붙어 있었으나 이미 사망 선고가 내려진 상태였고 영혼은 부패했으며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되었다. 죄의 욕망에 따라 살며 결국에는 죄 가운데 죽어갈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마음의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고(창 6:5)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육신은 흙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유한한 존재가 되었다. 3) 그리스도로 인한 선사된 은총의 상태(status gratiae) 칼빈(John Calvin)이 말한 ‘전적인 타락’에 놓인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선물, 즉 은총(카리스)만이 필요하다. 성경은 그 어느 곳에도 다른 길이 없다고 말한다(요 14:6).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사람도 어떤 이름도 주신 적이 없다고 단언한다(행 4:12).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세주로 영접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우리의 영혼은 거듭나고 중생한다(롬 10:9). 이 거듭남과 중생의 결과로 인간은 새로운 피조물, 그리스도의 신부, 성령의 전, 하나님의 자녀라는 은총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진리를 소유함으로써 자유를 누리게 된다(요 8:32).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졌으며 사망의 종이나 지배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법 아래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무죄 상태에 있던 아담과 달리 죄의 속성이 여전히 잔존해 있어서 끊임없이 죄의 유혹과 육체의 소욕과 싸워야 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2~24)라고 절규하는 바울의 모습은 이런 인간의 상태를 잘 묘사해 주고 있다. 4) 구원을 받는 자들의 죽음 후 영광의 상태(status gloriae) 육체의 죽음은 존재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은 죽음을 통해 늙고 병든 육체를 벗고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고전 15:20), 우리 또한 부활의 기쁨과 함께 신령한 옷을 입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영광스런 상태가 된다. 이것이 구원 받는 자들의 죽음 후 영광의 상태이다. 아담과 하와가 잃어 버렸던 무죄의 상태를 회복하며 더 이상 죄와 사망, 질병과 고통에 지배되지 않는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절대적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함에 거리낌이 참여할 수 있다, 모든 희미하고 불분명했던 것들이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과 같이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며(고전 13:12), 상함과 행함이 없는 완벽한 평화를 맛보게 될 것이다. 5) 저주를 받은 자들의 죽음 후 저주 상태(status damnationis) 죽음 후 인간의 상태는 믿는 자들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 믿는 자들에게 주어질 영광의 상태와 정반대되는 인간의 상태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이 죽음 후 놓이게 될 저주의 상태이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는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 기록된 글귀처럼 더 이상 어떤 소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선함을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사랑은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심판의 고통만이 영원히 지속되며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나(마 25:30), 돌이킬 수 있는 방법과 기회는 사라진 상태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는 기대할 수 없고 사탄과 죽음의 권세로 다스려지는 처참한 인간의 상태이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3.03.03

    VI. 인간론 (The Doctrine of Humanity) - 1
  • 고대로부터 이어진 철학자들의 가장 주된 관심사와 질문은 ‘인간은 무엇인가’이다. 이 질문은 인간이 끊임없이 해 왔던 질문이다. 동·서양의 철학자들은 주로 인간의 본성이나 존엄성과 가치 등 인간 자체에 대한 이해를 하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인간에 대한 이해의 영역은 생물학적인 인간의 이해나 형이상학적 인간에 머물러 있지 않다. 일반적인 인간론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인간론은 인류학적인 인간이나 철학적인 인간 이해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기독교의 인간론은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속에 인간의 삶의 목적과 의미뿐만 아니라 인간의 물리적 사회적 특성 또한 이해되고 논증되어야 한다. 이런 차이는 인간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접근에서부터 시작된다. 인류학적 인간론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기준점은 ‘지금의 인간’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인간을 이해하는 시작은 ‘현세적인 인간’이 아니다. 죄로 인해 일그러진 인간이 아닌 창조 시점의 인간 즉 본래의 인간(original human being)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인간론은 인류의 타락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어야 할 참된 인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1. 인간의 철학적 이해 플라톤(Platon)은 인간을 몸과 영혼으로 구별하는 이원론적 존재로 이해했다. 플라톤의 이런 인간의 이해는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극단적으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고 육체는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나 악한 것으로 여기는 영지주의자들의 사상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 중세를 지나며 인간에 대한 이분법적인 이해는 점차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인간을 영과 육으로 분리해서 이해하는 이분법적 인간 이해보다는 인간의 실존과 이성에 더욱 관심을 두었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고 생각을 했고, 니체, 하이데거, 장 폴 사르트르와 같은 현대 철학자들은 인간의 본질을 단순한 영혼과 육체의 분리와 조합이 아닌 자유와 책임과 같은 존재론적, 사회적-역사적 인간을 인간의 이해 대상으로 보았다. 2. 성경적 인간 이해 성경에서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나눠진 이원론적 존재일까? 아니면 영, 혼, 육으로 구성된 삼원론적 존재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영혼’에 대한 이해에 따라 달라진다. 1) 구약의 인간 이해 창세기 2장 7절을 보면 “야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히브리어 원어로는 하나님께서 땅의 ‘먼지’(히. 아파르)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히. 네페쉬)를 불어 넣어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뜻이다. 간혹 하나님께서 성령(히. 루아흐)을 부어 사람이 되게 하셨다고 말하는 설교자들이 있는데, 창세기 2장 7절은 성령이 아닌 ‘생기’(히. 네페쉬)를 불어 넣어 사람을 만드셨다고 되어 있다. 창세기 2장 7절만 본다면 인간은 ‘육체’와 ‘생기’를 지닌 이원론적 존재이다. 그러나 욥기와 시편의 말씀을 종합하면 인간은 ‘먼지’(창 2:7; 3:19; 시 104:29)이지만 ‘생기’(창 2:7)와 ‘하나님의 숨결’(루아흐, 욥 27:3)을 지니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다. 2) 신약의 인간 이해 구약성경은 ‘영’과 ‘혼’에 대한 구별이 분명하지 않아 ‘영혼’으로 쓰일 때가 많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혼’(헬. 프시케)와 ‘영’(헬. 프뉴마)에 대한 구별이 구약보다는 더욱 선명하다. 신약에서 ‘혼’(헬. 프시케)은 불멸적인 요소가 아니다. ‘프시케’는 종종 ‘인간 자신’(롬 2:9; 13:1)이나 ‘목숨, 생명’(마 10:39; 롬 6:4; 11:3)으로 쓰이고 있다. 신약성경의 삼분법적 인간 이해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프뉴마)과 혼(프시케)과 몸(소마)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육체와 영에 비교되는 ‘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성경은 ‘육체의 부활’과 ‘영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만약 ‘혼’을 ‘몸’과 구별되는 또 다른 영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면 ‘육체와 영의 부활’외에 다른 부활을 이야기해야 한다. 이런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육체의 부활’과 ‘영혼의 부활’을 주장하게 된다면 이것은 이미 ‘영’과 ‘혼’을 하나로 묶어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구분 짓는 이원론적인 인간 이해이다. 삼분법적인 인간관은 기독교 역사 초기의 희랍과 알렉산드리아 교부들(클레멘트, 오리겐, 그레고리)에게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예수님의 인성을 손상시키는 도구로 사용되면서 거부되기 시작했다. 이후 점차 어거스틴과 종교개혁자들을 포함한 서구 신학에서는 인간을 두 부분(육체와 영혼)으로 이해하는 기류가 형성되었다. 현대 신학자들에게 이분법적 혹은 삼분법적 인간 이해는 큰 논쟁의 대상이 못 된다. 칼 바르트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몸과 영혼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을 분리해 ‘육체’만으로 인간을 이해할 수 없으며 (이것은 인간을 동물과 같이 생물학적, 해부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불과하다.),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으로만 인간을 이해하는 것 또한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육체적 제한성과 상황과 환경 속에서 인간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환경과 조건이 달라지면 얼마든지 다른 본성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상태의 인간은 인간의 속성을 가질 수 없으며 반드시 육체와 영혼이 결합된 상태에서만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 3. 인간의 상태 조직신학적 인간이해는 인간의 상태를 다섯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타락 이전의 무죄의 상태, 둘째 타락으로 인한 부패의 상태, 셋째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한 은총의 상태, 넷째 구원을 받은 자들의 죽음 후의 영광의 상태, 다섯째 저주를 받은 자들의 죽음 후의 저주 상태이다. 1) 타락 이전의 무죄의 상태 타락 이전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은 무죄 상태였다(창 1:26~28). 무죄 상태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가운데도 살아 갈 수 있었다.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어 있었으며 고통과 슬픔도 없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선을 추구하며 그것을 행할 자유(전 7:29)와 권한(창 1:26)을 부여 받았다. 타락 이전의 무죄 상태인 인간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회복하게 될 본래의 인간의 모습이다. <다음 호에 계속>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3.02.03

    V. 신론 (The Doctrine of God) - 3
  •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강조되면 하나님 모습 왜곡될 수 있어
    4.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믿음의 대상이며 실체인 하나님을 철학적으로 혹은 신학적으로 증명하려는 것은 헤어 나오지 못할 블랙홀을 헤매는 것과 같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인간 속에 두신 하나님의 선재적 행위로 인해(롬 1:19)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려는 시도와 노력을 무모한 신기루를 쫓는 행위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목적론적 증명(Teleological argument)이다. 모든 사물은 의미와 이유를 갖고 있다. 그 어떤 것도 고유한 의미 없이 생성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요소들은 무질서하게 계획과 목적이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교한 질서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하늘의 수많은 별들 중 만약 어느 하나라도 궤도를 이탈하거나 다른 영역을 침범한다면 예기치 못한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것이 일정한 목적과 기능을 수행하도록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세심한 관찰 결과에 근거해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하는 것이 목적론적 증명이다. 목적론적 논증은 고대 철학자들도 사용했던 방법론으로써 대표적인 철학자들은 플라톤(Plato)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를 중심으로 한 스토아(Stoa) 학파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이 신학적인 언어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철학적인 용어인 ‘형상’(形相, form)과 ‘질료’(質料, matter)라는 단어를 썼다. 어떤 질료도 갖고 있지 않은 채 형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을 순수 형상(entelecheia)이라고 규정을 했는데, 이것을 신(God)이라고 생각했다. 철학적인 복잡함을 제거하고 목적론적 증명을 신학적으로 단순하게 접근하면 이렇다. 세상 모든 만물은 의미와 목적을 갖고 있는데, 그 목적을 부여하고 목적대로 사물을 움직이게 하는 근원적인 순수 형상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분이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신 존재 증명에 대한 논쟁과 당위성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현대 신학에서 신 존재 증명은 신학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분야는 아니다. 신 존재 증명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신학자들도 많이 있다(이에 대해서는 지난 호를 참조). 현대 신학자들의 관심은 하나님을 인간의 이성이나 철학, 혹은 학문적 방법론으로 증명하려는 노력보다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있다. 1)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의미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각 사람의 개인 속에 거하시는, 혹은 인간의 삶과 공동체 안에 내재하시는 분이신가?”아니면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초월적이신 분이신가?”에 대한 문제이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대한 문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시작하는 주기도문 서두에도 잘 나타난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은 인간이 가까이 할 수 없는, 분명히 하나님의 초월성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라는 것은 인간의 삶 속에서 인간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맺고 계신 내재적 하나님을 함축적으로 일컫는 단어이다. 2) 하나님의 초월성 하나님의 초월성은 그의 피조물인 인간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초월성은 천지를 창조하시는 모습에서 극명하게 나타고 있다. 천지 창조 속에 인간은 한 피조물일 뿐 천지 창조의 역사에서 철저히 배제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피조물로부터 초월해 계시며 그의 창조물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넘을 수 없는 초월성을 갖고 계시다. 성경에 기록된 기적적인 사건들은 자연적인 현상과 요소, 삶과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은 하나님의 초월성의 산물이다.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내재성마저 하나님의 초월성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칼 바르트(K. Barth)와 브라운(W.A. Brown)이 있다. (1) 칼 바르트(K. Barth)는 인간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보여 주신 것만큼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하나님의 ‘자기계시’조차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바르트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본성, 소유, 행위의 순수한 한계와 순수한 시초이며 인간과 모든 인간적인 것과 완전히 다른 존재로서 무한한 질적인 차이 속에 대립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2) 브라운(W.A. Brown)은 만약 하나님이 세계의 근거와 세계의 깊이로서 이 세상에 매어 있다면 하나님은 세상과 구별되는 자신의 자유와 독자성을 상실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은 언제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의 내재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하나님의 주권은 쉽게 희미해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휴머니즘적인 사랑은 쉽게 동질화 될 수 있다. 즉, 다시 말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것이 하나님 사랑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세우기 위한 심판과 징벌도 하나님 사랑의 일부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구원에서 제외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릴 수는 없다. 그의 초월적 선택과 주권 때문이다. 3) 하나님의 내재성 하나님의 내재성은 역사적으로는 타락과 회개를 반복하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시고 그들의 희생 제사를 받으시고 전쟁에 개입하시며 개인의 삶을 주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내재성을 의미한다.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 본 회퍼(Dietrich Bonhoeffer),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 로빈슨(John A. T. Robinson) 등은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고 있다. (1) 본 회퍼는 하나님은 주변 세계나 배후 세계가 아니라 우리 세계의 중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해서 우리는 ‘세상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D. Bonhoeffer, Widerstand und Ergebung 9 (Aufl, 1959), 184f; 필만, 『교의학』, 189). (2) 틸리히는 관념주의에 영향을 받아 하나님은 내재화된 초월자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지만 하나님의 초월성보다는 인간의 삶 속에 내재화된 모습으로 이해하고 있다. (3) 로빈슨은 하나님은 세계 위에, 또는 세계 밖에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깊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내재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인간의 자율성은 사라지는 위험에 처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이 없으며 세상의 악과 부조리 또한 하나님의 의지로 치부될 수 있다. 하나님의 내재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위험에 빠질 우려도 있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 균형을 잡지 못하면 신앙은 변질되기 쉽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강조되면 하나님의 모습은 심하게 일그러진 모습으로 왜곡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대한 깊은 신학적 고찰과 신앙적 균형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2.11.04

    V. 신론 (The Doctrine of God) - 2
  • 신 존재 증명은 이성적 측면에서 하나님을 증명하고자 한 노력 조직신학은 신학의 여러 주제들을 조직적으로 세분화하고 체계화시켜 다루는 학문이다. 예를 들면 성령론은 성령에 대해서만 구원론은 구원에 대해서만 기독론은 그리스도에 대한 것만을 다루게 된다. 같은 맥락으로 신론은 하나님에 대해서만 다루는 것인데 신론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신 존재 증명’이다. ‘신 존재 증명’은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말일 수 있다. 어원적인 뜻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 존재 증명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음의 차원이 아니라 이성적인 측면에서 증명하고자 하는 다소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신 존재 증명의 대표적인 방법으로는 목적론적, 우주론적, 존재론적, 도덕적 신 존재 증명 등이 있다. 하지만 이런 신 존재 증명에 대한 이론과 신학적 접근에 대해 부정적인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1) 우주론적 논증(cosmological argument) 신 존재 증명 이론들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 우주론적 증명이다. 우주론적 증명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322)에 의해 처음 시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적 논증은 복잡한 이론이나 수사학적 기교가 아닌 간결한 논증으로 시작한다. 그는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발전하고 확장되고 있는 우주의 근원을 소급해 올라가면 우주의 시작이 된 제1원인(prima causa)을 발견하게 될 텐데 이 제1원인이 되는 존재가 신이라고 생각했다. 우주의 근본 원인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신 존재 증명에 관한 논쟁은 이후 활발히 진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중세를 지나면 인간의 이성에 대한 자각과 인식이 발달하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믿음의 차원이 아닌 이성의 차원에서 증명하고자 하는 논쟁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중세시대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신 존재 증명을 받아들여 신 존재 증명을 더욱 세분화하고 확장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인 모든 우주의 근원이 되는 ‘제1원인’이라는 말 대신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모든 움직임(movement)에는 그것을 일으킨 힘과 움직임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시작된 움직임은 또 다른 운동을 만들어가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간다. 이렇게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모든 움직임의 원인을 찾아 올라가면 결국 최초의 움직임을 가능케 한 근원적인 힘의 요소가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 힘은 어떤 외부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즉 다른 것에는 영향을 줄 수 있으나 그 어떤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것을 ‘부동(不動)의 동자(動者)’라고 했으며 이것이 하나님이라고 논증했다. 2) 존재론적 논증(ontological argument) 존재론적 증명은 철학적 사고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인데 중세 시대 더욱 활발해졌다. 중세의 철학자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는 존재론적 논증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다. 안셀무스는 스콜라 철학을 발전시킨 사람이다. 스콜라학파는 성경과 신학을 해석하는데 철학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며 이성으로 기독교 신앙을 증명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 안셀무스는 하나님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존재론적으로 증명하려 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인간은 불완전하다’는 말에 모두가 동의한다.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완전’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한’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기에 한계가 있는 ‘유한’의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참과 거짓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런 능력도 없는 무능하고 무기력한 인간을 발견하는 순간 전능하신 하나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중세의 위대한 철학자이며 신학자인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는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증명을 이어받았다. 데카르트는 안셀무스와 달리 존재론적 증명을 조금 더 구체화했다. 그는 하나님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논증함에 있어 인간의 이성과 사고 능력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신과 인간의 연관성’ 속에서 존재론적 증명을 논증해 나갔다. 데카르트에게 ‘생각하는 자아’는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이다. 그래서 데카르트가 증명하려고 했던 신 존재 증명은 기독교의 진정한 하나님이 아니라 ‘철학자의 신’이라는 비평을 듣기도 한다. 3) 도덕적 증명(moral argument)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서로 다른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설명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존재가 증명됐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칸트는 신 존재 증명에 대해 기본적으로 회의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지만 그가 주장한 신 존재 증명은 ‘도덕적 증명’이다. 비록 인간의 한계와 죄를 짓고자 하는 본성으로 인해 좌절될지라도 인간은 선과 도덕적인 삶을 추구한다. 여기에는 인종, 성별, 나라, 언어, 문화적인 차이가 없다. 종교가 다를지라도 모든 인간은 도덕적인 삶을 추구한다. 이것은 모든 인류가 추구하고 있는 최고의 도덕적 개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도덕적 개념을 인간에게 창조한 분이 존재하며 그분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 중 신 존재 증명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학자가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증명되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인간은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자기 계시’에 의해서만 제한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오토 베버(Otto Weber, 1902~1966)는 신 존재 증명을 ‘하나님을 세계화 또는 이성화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왜냐하면 신 존재 증명은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규정하는 오류에 빠질 위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오순절적 입장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이성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그의 존재를 인정하고 증명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증명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인식의 세계와 인간의 이해와 한계의 밖에 스스로 계신 분으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2.07.01

    V. 신론 (The Doctrine of God)-1
  • 인간의 역사와 삶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존재 조직신학의 신론은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 속성과 사역에 관한 신학적 접근과 이해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다.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고 이에 반에 유신론자들은 하나님의 실존을 증명하려고 한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신존재 증명'이라고 한다. 키에르케고르(So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는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을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한 모욕"으로 치부하기도 했다(앤터니 티슬턴, 『조직신학』, 61).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하나님이 누구신지 규정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것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존재는 인간의 역사와 삶 속에서 드러나며 인간과의 소통을 통해 어떤 분인지 그의 속성을 알 수 있다. 1. 하나님에 대한 이해 신약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구약의 하나님 이해는 차이점이 있다. 이 말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르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시다. 다만 구약시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이해한 것과 예수님의 구원 사역과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신약시대 기독교인의 하나님 이해가 다르다는 것이다. 1) 구약의 하나님 이해 구약시대의 하나님을 대표하는 말은 '거룩'이다. '거룩'은 하나님과 인간을 구별함과 동시에 전적인 차별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다윗이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거룩의 집약체인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길 때 흔들리는 법궤를 잡았다가 죽은 웃사의 이야기(삼하 6:1~7)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에 근접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임재 속으로 자의적으로 들어갈 수 없다. 민수기는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민 23:19)라는 말로 하나님과 인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주인(아도나이)이며 인간은 그의 피조물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구약의 하나님 이해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과 구원 사역을 통해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2) 신약의 하나님 이해 구약의 하나님 이해가 '거룩'이라면 신약의 하나님 이해는 '사랑'이다. 셀 수 없이 많은 구약의 구절에서 하나님의 거룩이 강조되고 있는 것처럼 수많은 신약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요한일서는 하나님이 곧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다(요일 4:8, 16). 또한 구약의 거룩하고 죄를 심판하시는 무서운 전능자 하나님은 신약에서 '아빠, 아버지'로 기록되고 있다(롬 8:15). 이런 '하나님 이해'의 전환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이루어졌다.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과 같이 되셨고, 인간을 심판이 아닌 사랑으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빌 2:6~8). 거룩하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하나님이 되었고,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이 되었으며, 주인이 자신의 아들 안에서 자신을 배반하고 타락한 인간의 '아빠, 아버지'가 되셨다. 신약과 구약의 성서적 '하나님 이해' 외에도 교부와 중세시대는 물론 현대 신학자들에게 하나님 이해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3) 교부와 중세시대의 '하나님 이해' 교부들은 이성과 논리를 통한 철학적 신학적 '하나님 이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초기 기독교 변증가인 저스틴(Justin, 100~165)은 하나님을 인간의 언어로 '말할 수 없는 분'이라고 규정했으며, 클레멘트(Clement, 150~215)는 하나님은 '증명될 수 없고, 파악될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중세 신학자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 철학적 언어를 사용해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했다. 『신학대전』을 쓴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하나님을 '최초의 원인'(causa prima), '순수한 현실'(actus purus)이라고 이해했다.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하나님은 진노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이고, 은총 속에서 '계시된 하나님'이라고 이해했다. 이 말은 무서움과 파괴적인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는 진정한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없으며, 은총 가운데 하나님의 참모습이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 충만한, 불타는 화로'이며 선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루터 못지않게 종교개혁에 앞장섰던 멜란히톤(Melanchthon, 1497~1560)은 하나님을 율법과 복음의 이중적 인식론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그는 '율법은 하나님의 생소하고 익숙하지 않는 활동이고, 복음은 고유한 본래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진노를 하나님의 또 다른 속성이나 본질로 보지 않고 사랑인 하나님에게 따라오는 불가피한 그림자로 이해했다. 2.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론(Erroneous Theories about God) 하나님을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잘못된 접근 방법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들이 무신론(atheism), 불가지론(agnosticism), 유물론(materialism), 범신론(pantheism), 이원론(dualism), 다신론(polytheism), 이신론(deism) 등이다. 1) 무신론(atheism) 무신론은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이다. 무신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철학적 무신론이다. 니체(F.W. Nietzsche)가 말한 '신은 죽었다'와 같이 하나님의 존재를 철학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둘째는 실존론적 무신론이다. 하나님이 실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증명할 수도 없고 인간의 삶에 개입할 수도 없다는 주장이다. 2) 불가지론(agnosticism) 불가지론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지만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식과 지혜의 한계를 인정한 기독교적 사고 같으나 반기독교적인 사상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인간 속에 두셨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롬1:19). 3) 유물론(materialism)과 이원론(dualism) 유물론은 영(spirit)과 영적인 존재(spiritual being) 자체를 부인한다. 모든 영적인 현상은 뇌의 작용일 뿐이고, 유물론자들에게 죄는 불완전한 것일 뿐이다. 이원론은 영과 물질의 영역을 구분하고, 모든 물질은 악하고 오직 영만이 선하다고 믿는다. 4) 다신론(polytheism), 범신론(pantheism), 이신론(deism) 다신론과 범신론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다신론은 '많음'을 의미하는 'poly'와 '신(神)'을 의미하는 'theos'가 합쳐진 헬라어 합성어로서 많은 신의 존재를 믿으며 하나님도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범신론은 힌두교와 같이 하나님과 우주만물을 동일시하는 사상으로 우주가 곧 하나님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이신론은 하나님과 피조 세상을 분리하는 것이다. 전능자가 우주와 인간을 창조했지만 피조물을 유기했으며 더 이상 인간 세상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이런 종교적 철학적 사상으로는 하나님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으며, 그의 본질과 속성에 가까이 갈 수도 없다. (다음 호에 계속)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2.04.03

    IV. 구원론 (Soteriology)-2
  • 예정론과 예지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 담긴 구원론 칼뱅주의자에게 인간의 능력이나 의지는 구원의 전제 조건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을 구원할 어떤 힘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원은 인간의 선함(goodness)을 전제로 하지 않으며 인간의 행위 또한 구원의 필수 요소가 아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능력만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 지난 호에서 살펴 본 칼뱅의 5대 신조 중 첫 번째 '전인 타락'(total depravity)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상태에 빠져있다면, 그래서 누구도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면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이 필요하다.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칼뱅주의자들은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육체적인 죽음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부패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이해한다. 전적인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구원을 위한 그 어떤 윤리적, 도덕적 가치와 요소도 갖고 있지 않다고 진단한다. 그러므로 구원받을 자를 선택하는 하나님의 선택은 무조건적인 선택일 수밖에 없다. 칼뱅주의자들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의 자녀를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시며 구원을 위한 믿음과 회개의 기회를 허락하신다. 그러나 예지론을 주장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조건적 선택(Conditional Election)을 주장한다. 이 조건은 인간 본성에 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말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는 조건 아래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보고 있다. (3)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 칼뱅주의자들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만인구원론(보편구원론)을 인정하지 않는다. 만인구원론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종교통합주의(Ecumenism) 적인 해석이다. 기독교에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이단적 사상으로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정확한 용어 선택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기독교 안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원하신다는 의미로 만인구원론이 사용되기도 한다. 기독교적 만인구원론은 종교통합주의적 보편구원론으로 이해될 위험성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열려있다는 의미 외에 다른 의미로 확대 해석하면 안 된다.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으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칼뱅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온 세상의 죄를 속하기에 충분하지만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는 오직 선택한 자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구원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수가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예정된 사람들만을 위한 '제한적 속죄'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구원받을 사람들을 미리 택정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이 예정된 사람들의 구원을 보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칼뱅의 이런 예정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원이 예정된 사람들에게만 국한된다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십자가의 사건은 온 인류를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한 제한적 속죄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기에 구원은 결코 제한된 속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기에 누구든지 자유의지에 따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이 첨예한 두 개의 대립과 논쟁은 500여 년이 다 된 지금도 협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4)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칼뱅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불가항력적 은혜란 마치 1세기 기독교 최악의 박해자 중 하나였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체험하고 복음의 증거자로 새롭게 태어난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할 수 있는 인간은 없음을 말한다. 예를 들자면 지금은 복음을 거부하고 구원을 받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모든 선택된 자들은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다. 하나님은 택한 자를 구원하시는데 그 어떤 저항이나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으시며 어떤 제약이나 간섭을 받지도 않으신다. 선택된 자는 이 은혜를 거부할 수도 없으며 거절할 수도 없다. 이것이 칼뱅주의자들이 말하는 '불가항력적 은혜'이다. 하지만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생각은 다르다. 그들은 인간은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칼뱅주의자들의 불가항력적 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할 수 있는 가항력적 은혜(Resistible Grace)를 주장한다. (5)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칼뱅주의의 마지막 5대 신조는 성도의 견인이다. 성도의 견인은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선택한 성도들을 성령을 통해 거룩하게 하시며 구원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끝까지 지키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번 거듭난 사람은 사탄의 자녀가 될 수 없으며 믿음에서 떠날 수도 없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성도의 견인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실제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성도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칼뱅주의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성도의 견인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자유롭고 변치 않는 사랑에서 나오는 불변성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칼뱅주의자들이 구원을 위한 인간의 인내와 믿음의 결단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구원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박해와 고난을 인내하며 믿음으로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고 끝까지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인간의 의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인식하고 있다. 이런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구원론의 정리한다면 칼뱅주의의 입장에서 구원은 인간이 배제된 하나님의 전적인 사역이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의 구원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이다. 칼뱅주의의 예정론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 뜻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에 반해 예지론은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유의지'가 구원에 직접적인 원인인 것처럼 오해할 소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예정론이나 예지론이 구원론의 결론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예정론과 예지론을 비교하며 보완하고 절충한다면 기독교의 구원론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이전편 ☞ [평신도를 위한 오순절 조직신학] IV. 구원론 (Soteriology)- 1
  • 2022.03.06

  • 순복음가족신문

    PDF

    지면보기

  • 행복으로의 초대

    PDF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