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힐링
나랑 같이 살자
  • 최근 미국에서 오신 한 목회자로부터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지 아세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하나님이 나에게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성실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일까? 영혼 구원일까? 여러 ‘모범 답안’이 떠올랐다. 그 목회자는 하나님의 소원은 단 한 가지, 바로 “나랑 같이 살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분과 매사에 동행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에게 주어진 최고의 삶이라고 언급했다. 하나님과 함께라면 우리는 어디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기쁘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왕이시다.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은 왕과 사는 특권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는 시련의 골짜기를 지날 수도 환희의 정상에서 머물 수도 있다. 그러나 왕과 함께 사는 자라면 어디든 상관이 없다. 시련의 골짜기에서도 환희의 정상에서도 왕이신 나의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그만이다. 그분이 계신 곳이야말로 내가 있어야 할 곳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인생의 무수한 장애물 가운데에서 허우적거릴 때가 있다. 거기서 절망감을 맛보며 인생을 포기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 수 있다. 때론 내가 거하고 있는 지금의 위치가 너무나 초라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상관없다. 그분과 함께라면 인생의 장애물도 멋진 도약대가 될 수 있다. 초라한 내 위치야말로 왕의 일(왕업·王業)을 하라고 그분이 특별하게 심어두신 곳일 테니 말이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왕이신 그분과 함께 거하며 그분과 함께 가고 있느냐이다. 그분과 함께라면 일상이 기쁨의 순례길이 될 수 있다. “나랑 같이 살자”는 그분의 음성에 응답하는 순간 우리 삶의 진정한 혁명이 시작될 것이다.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2.11.18

    위라클(WERACLE)
  • 최근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으로 구독자 수 46만여 명의 유튜브 채널 ‘위라클’을 운영하고 있는 박위라는 청년을 만났다. 위라클은 우리라는 영어 위(We)와 기적을 뜻하는 미라클(Miracle)의 합성어로 ‘우리 모두에게 기적을’이라는 뜻이다. 건강한 청년이었던 그는 8년 전 불의의 낙상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었다. 당시의 그에겐 삶을 포기해버리는 것이 쉬운 결정이었다. 그런 그를 일으켜 세워준 것은 병원 기도실에서 만난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가족, 수많은 교회 지체들이었다. 그들의 기도와 응원으로 그는 일어섰다. 비장애인이었다면 평범한 직장인이었을 박위는 지금 수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전하는 ‘기적 같은’ 삶을 살고 있다. 그를 만나면서 ‘박위라는 기적’을 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말했다.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하면 보통 초현실적인 현상을 떠올립니다. 아니요. 기적은 지금 제가 휠체어를 타고 살아가는 삶, 여러분의 삶 그 자체입니다.” “전신마비가 되었다고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마음마저 마비되지는 않습니다. 삶과 죽음 사이 그 어딘가에서 나는 오늘도 기쁨을 선택하고, 삶을 선택합니다.” 예수원을 창립한 고 대천덕 신부는 생전에 매일 ‘기적 일기’를 쓴다면서 우리 모두 ‘삶이 기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모두에게 기적을!”이라고 외치는 박위는 최근 ‘위라클’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위라클’은 박위의 기적 일기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주님 안에서의 삶 자체가 기적의 선물이다. 그것을 ‘박위라는 기적’을 통해 새삼 깨닫는다. 이 땅의 수많은 ‘박위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2.10.14

    십자가의 환상 
  • “이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십자가를 좇아야 한다.” 영국 출신의 성공회 주교로 35년간 인도 선교사를 지낸 레슬리 뉴비긴의 말이다. 그는 선교사로서만이 아니라 수많은 신학자와 선교학자, 기독교 사상가에게 영향을 미친 이 시대의 영적 스승이다. 삶의 상당 부분을 세계교회협의회에서 활동했기에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그를 자유주의적 색채가 강한 인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유주의자는 물론 복음주의자, 은사주의자들과도 깊은 교류를 한 폭넓은 인물이었다. 흔히 자유주의자와 영적 체험은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뉴비긴은 강력한 체험의 신앙을 지녔다. 특히 케임브리지대학에 다니던 시절에 보았던 십자가의 환상은 그를 평생 한길 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했다. 당시 한밤중에 깨어 있는 상태로 누워 있던 그에게 십자가의 환상이 보였다.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에 걸쳐 있는 십자가와 온 세계를 끌어안고 있는 팔이 보이는 환상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일로서 그 십자가는 가장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인간에게 내려와 생명과 승리를 약속하는 상징과 같았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그날 밤의 환상이 계기가 되어 나는 이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십자가를 좇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부터 나는 길을 잃을 때 어떻게 내 위치를 찾아야 할지를 알게 되었지요. 나의 지식이나 용기가 다 떨어졌을 때 과연 어디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 세상을 이해하고 그 바탕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좇아야 한다. 십자가를 따르면 우린 결코 인생의 길을 잃지 않는다.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2.09.16

    펠릭스 솔리튜드
  • 라틴어 펠릭스(Felix)는 행복, 행운을 뜻한다. 유럽에서는 펠릭스란 이름의 남성들이 많다. ‘한여름 밤의 꿈’을 작곡한 멘델스존의 이름도 펠릭스다. 펠릭스를 넣어 다양한 조어(造語)를 할 수 있다. 펠릭스 뒤에 고독을 뜻하는 영어 단어 솔리튜드(Solitude)를 넣으면 ‘펠릭스 솔리튜드’(행복한 고독)가 된다. ‘행복한 고독’은 요즘에 아주 필요한 개념이다. 사회가 발전하면 할수록 외로운, 고독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혼밥’, ‘혼술’이 흔해졌고 사람들은 수많은 이들과 함께 살아도 군중 속의 고독을 느낀다. ‘고독사’라는 단어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누구나 닥치는 퇴직 이후에 대부분 고독감과 상실감을 경험하게 된다. 고독이 사무치는 외로움이 되지 않고 행복한 고독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끝까지 복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행복한 고독을 누리는 자가 되기 위한 여러 필요조건이 있을 것이다. 일찍부터 육체적 근육, 영적 근육, 재정적 근육을 잘 키운다면 노년이 되어 고독하더라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개연성이 높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동행할 때에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펠릭스 솔리튜드’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선하신, 좋으신 주님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평강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주님과 함께라면 고독의 시간은 침묵의 은혜가 넘치는 참된 행복의 순간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을 살며 필사적으로 생명의 주님을 만나야 한다.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2.08.19

    자존자인가, 의존자인가?
  • 자기 스스로의 깃발을 들고 일어서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을 영웅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영웅은 될 수도, 발견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우리의 대적(大敵)에 비해 너무나 연약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쉽게 시험에 무너진다. 외부의 시험 뿐 아니라 더욱 강력한 내부의 시험에 여지없이 무너진다. 우리의 대적은 치밀하게 우리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파고드는데 탁월하다. 그래서 우리는 전능자의 그늘 속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다. 거기가 안전하다. 그분은 우리보다도 우리의 대적보다도 훨씬 더 크고 강력한 분이시다. 이를 누구보다도 잘 간파한 독일의 신학자 헬무트 틸리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께 신실할 수 없고 그분이 우리 손을 잡아주셔야 한다. 우리가 그분을 위해 싸울 수 없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싸우셔야 한다.” 지금은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신뢰해야 할 때다. 우리의 일은 자기 힘을 다해 깃발을 드는 것이 아니라 전능자를 신뢰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존자(自存者)가 아니라 철저히 의존자(依存者)다. 전능하신 그분을 의존하는 것이다. 우리가 의존하는 그분이 우리를 대신해 일하시도록 해야 한다. 유약한 내가 아니라 ‘힘센 장수’이신 그분이 내 대신 싸워야 인생의 전쟁이란 큰 판에서 결국 이길 수 있다. 그분이 무대 위로 오를 때 게임은 끝난다. 우리의 대적은 절대로 이 의존의 원리를 이해할 수 없다. 철저한 자존자인 그에게 ‘신뢰’란 단어는 없기 때문이다.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2.07.15

    우리들의 블루스
  • 최근 인기리에 종영된 ‘우리들의 블루스’는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옴니버스 형식의 TV 드라마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한 편에 녹아 있다. 옴니버스는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몇 개의 독립된 짧은 이야기를 늘어놓아 만든 한 편의 작품을 의미한다. 삶의 우여곡절이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엮어내는 각각의 이야기들이 작가가 의도하는 하나의 주제로 수렴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블루스’에는 공동체적인 연대감과 화해라는 주제가 들어 있다. 그래서 타이틀이 ‘너와 나의’ 블루스가 아니라 ‘우리들의’ 블루스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 작가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주제는 행복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분명한 사명 하나. 우리는 이 땅에 괴롭기 위해 불행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오직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 모두 행복하세요.” 마지막 회가 끝나면서 화면에 새겨진 글귀다. 성경은 여러 저자가 긴 세월에 걸쳐 쓴 66권에 이르는 방대한 책이지만 주제와 결론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옴니버스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한 가지는 바로 이 땅에 오실, 오신, 그리고 다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님이야말로 우여곡절 많은 우리네 인생의 해석자요 해결자이시다. 드라마의 엔딩대로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 그렇다면 어떻게 행복을 얻을 수 있는가? 해답은 한 가지. 오직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필코 그분을 만나야 한다.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2.06.19

    자유
  • 10일 열린 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사를 통해 ‘자유’를 35번이나 외쳤다. 그는 “자유는 보편적 가치”라고 규정하며 “인류 역사를 돌이켜보면 자유로운 정치적 권리, 자유로운 시장이 숨 쉬고 있던 곳은 언제나 번영과 풍요가 꽃 피었다”고 말했다. “번영과 풍요, 경제적 성장은 바로 자유의 확대”라고도 강조했다. 자유는 믿음의 측면에서도 가장 중시되는 가치 가운데 하나다. 자유가 너무나 중요하기에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자유는 성경 전체에 흐르는 주제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선포하셨다. 교회사는 신앙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지난한 역사이기도 하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에 도착한 청교도들이 목숨을 걸고 추구했던 것이 신앙의 자유였다. 마틴 루터와 장 칼뱅, 얀 후스 등이 종교개혁을 위해 자신을 던진 것도 진리를 향한 진정한 자유를 갈구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개신교도인 위그노들이 긴 세월 동안 탄압을 받으면서 가톨릭 중심의 봉건 체제에 저항했던 것 역시 신앙의 자유 때문이었다. 그들은 비진리에 저항하며 자원해서 광야로 나가 참된 예배를 드렸다. 자유인으로서 개혁자와 진리의 수호자로 살기 위해 기꺼이 생명을 던졌다. 진정한 자유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누릴 수 있다. 그분의 십자가 대속으로 우리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이 자유가 대한민국에 넘치게 되기를 바란다.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2.05.15

    죽어도 살겠고
  • 오래전 이 땅을 떠난 교회 후배의 어머님이 최근 요양병원에 들어가시는 것을 지켜보았다. 오랜 세월 홀로 사시다 결국 인생의 말년을 요양병원에서 지내야 하는 그 어르신의 모습이 너무나 처연해 보여 가슴 아팠다.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는 스스로 활동하는 분들도 있지만 ‘살아 있으나 죽은 자’ 같은 상태의 분들도 많다. 그들에게도 화려한 젊은 날이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침대에 누워 떠날 날 만을 기다리고 있다. 누구나 피하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의 말년이다. 그들을 보면서 요한복음 11장 25절 말씀을 떠올린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참으로 위대한 주님의 말씀이다. 특별히 ‘죽어도 살겠고’란 말이 강력하게 다가온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며 지금 내가 보고 듣고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이상의 삶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살아 있으나 죽은 자’ 같은 요양병원의 모든 환자들이 다시 벌떡 일어나 활기 있게 활동하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부활의 주님을 믿을 때 부활은 현존하는 실재가 된다. 주님이 생명 자체이기에 우리는 주님 안에서 ‘죽어도 살게 되는’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결국 언젠가 요양병원 신세를 지게 될 우리의 인생은 너무나 허망하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에 우리는 어떤 상태에서도 하늘의 소망을 지닐 수 있다. 평생 주님을 신실하게 믿은 후배 어머님이 이 부활의 아침에 살아 계신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2.04.17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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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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