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설교자 열전
가경자 베다(1)
  • 영국 교회사 집필, 민족 정체성 형성 기여 로마에서 물품 가져와 지역교회 성장 도모 평생 성경 연구하며 수련 수사들 훈련시켜 평생 수도원 밖을 나가지 않았음에도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던 수도사가 있다. 중세 초기 영국에서 활동하던 ‘가경자 베다’(Beda Venerablilis, 672~735)이다. 베다 수도사는 현재 영국 잉글랜드의 선덜랜드 지방에 있는 웨어마우스(Wearmouth)의 성 베드로 수도원과 재로우에 있는 성 바오로 수도원에서 수도했다. 베다 선교사가 중세 시대에 이름을 알릴 수 있었던 것은 성경 연구 분야뿐만 아니라 영국의 교회 역사 집필에도 뛰어난 자질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731년경에 쓴 『영국인의 교회사』는 영국 기독교회는 물론 영국 역사를 다룬 것으로 영국에서의 기독교 성장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라틴어로 쓰여진 이 책은 앵글로색슨 역사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본 중 하나이며 영국의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모두 5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학문적인 측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수집된 문서 자료는 물론 구술 증언에 대한 진위 여부를 매우 비판적으로 검토했기 때문이다. 고대 잉글랜드의 앵글로색슨족이 세운 7왕국 중 하나였던 노섬브리아에서 태어난 베다 수도사는 7세 때에 웨어마우스의 성 베드로 수도원에 맡겨졌고 그곳에서 양육되고 자랐다. 이후 재로우에 있는 성 바오로 수도원으로 옮겨졌고 735년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서 수도했다. 19세에 부제 서품을 받았고 30세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수도 생활과 성경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그는 “수도 규칙의 규율을 지키고 교회에서 매일 찬송하는 일 속에서도 배우고 가르치고 글을 쓰는 것이 언제나 나의 기쁨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수도원에서의 삶에 만족했었던 인물이다. 평생 로마를 다섯 차례 방문했던 베다 수도사는 여행 때마다 수도원에 필요한 것들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 목록에는 그림이나 성직에 필요한 물품들뿐만 아니라 유리를 다루는 직공들과 로마 베드로 성당의 수석 성가대원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로마에서 가져온 물품 중에서 가장 의미 있었던 것은 다양한 종류의 기독교 서적들이었다. 이런 서적들을 통해 당시 로마교회의 신학과 문화가 영국 교회에도 전파될 수 있었다. 베다 수도사는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라틴 수사학에 대해 능통했으며 라틴 교부들의 설교를 연구한 마지막 설교자이기도 했다. 그의 이름 앞에 ‘가경자’(the Venerabilis)라는 말이 붙은 것은 주목할만한다. 라틴어 ‘Venerabilis’는 영어의 ‘venerable’이라는 말의 어원으로, ‘존경스러운’, ‘공경할 만한’이라는 의미이다. 중세교회에서 이 칭호는 성인 추대 과정 중 첫 번째 단계에 오른 사람에게 붙인다. 우리말로는 ‘가경자’(可敬者)로 번역되며, 단순히 나이가 많다라는 의미를 넘어 그 사람이 지닌 도덕적 가치나 품격에 대한 경의의 마음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베다 수도사에게 붙여짐으로써 이 칭호가 널리 알려지게 됐다. ‘가경자’라는 칭호가 붙여졌다는 것은 베다 수도사가 영국 교회에서 수석 부주교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칭호를 통해 베다 수도사가 당대는 물론 이후에도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베다 수도사는 평생을 성경 연구에 바쳤다. 그가 연구하는 일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그의 글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나는 비록 규칙적인 훈련을 준수해 왔고, 또 교회 합창단에서 매일 찬양해 왔지만, 나의 주된 즐거움은 언제나 공부하고 가르치며 글을 쓰는 것이다”(O. C. 에드워드, 『교부들의 설교』, p.183). 또한 그는 자신의 연구와 사역을 통해서 성직자들을 세우기를 원했다. 그는 그와 같은 사실을 이렇게 적고 있다. “성직을 받은 그때로부터 59살에 이르기까지 나는 덕망 있는 교부들의 성경에 관한 작품들로부터 짧은 발췌문들을 수집하기 위해서, 그것들의 의미와 해석에 해설을 달기 위해서, 또 나 자신의 유익과 내 형제들의 유익을 위해 일해 왔다”(『교부들의 설교』, p.183~184). 성 바울로 수도원에서 그는 수련 수사들을 훈련시켰다. 교육과정에는 기초 과목인 읽기, 쓰기, 셈하기 교육을 비롯해서 라틴어까지 포함됐다. 그는 수련 수사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쳤고 그들의 모국어로 시를 배우도록 했으며, 교회력의 축제들의 날짜를 계산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특히 라틴어를 배울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앵글로 색슨어로 번역을 시도하기도 했다. 조지훈 목사(한세대학교 설교학 교수)
  • 2026.06.12

    그레고리 대제(2)
  • 알레고리적, 도덕적 성경 해석 권장해 목회 규칙』 통해 목회자들에게 설교 중요성 알려 이방인 개종과 성도 교육의 가장 좋은 수단 설교자로서 그레고리 대제는 매우 성실했다. 그는 설교를 행하고 설교를 통해 회중을 가르치는 일을 가장 중요한 임무로 생각했다. 그의 설교문은 모두 62개가 남아있다. 그중 22개가 에스겔서에 대한 것이고, 나머지는 복음서를 설교한 것이다. 이 설교문들은 주로 그가 작성한 것이며 어떤 것들은 속기사가 기록한 후에 그레고리 자신이 수정했다고 한다. 그레고리의 설교는 주로 짧은 것들이었지만 때로는 상당히 긴 것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설교는 성경 본문에 대한 알레고리적인 해석에 근거하며 본문을 의역한 후에 도덕적인 적용으로 이루어져있었다. 다간은 그레고리의 설교가 종종 거칠고 세련되지 못했으며 사상이 깊지 못했던 것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단순하고 솔직한 내용들로 구성되어있어서 일반 회중이 이해하기 쉬웠다. 특히 그레고리 대제의 설교의 특징 중 눈에 띄는 것은 일상 생활에서 발견하는 내용들이 성경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한 예화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그는 성경의 진리를 회중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성경 밖에서 다양한 이야기들을 가져왔다. 그는 이미 6세기에 설교에 있어서 이야기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그레고리는 단순히 알레고리적인 성경 해석만을 행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성경을 세 가지 관점에서 해석했다. 첫째는 역사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었고, 둘째는 알레고리적으로 보는 것이었으며, 셋째는 도덕적인 가르침으로 보는 것이었다. 때로 그는 3중의 방법 모두를 사용해서 성경 본문을 볼 필요가 있음을 역설했다(『교부들의 설교』, 180). 또한 그레고리의 설교는 신앙생활에서 묵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즉, 그는 “활동적인 생활과 명상적인 생활을 영적 성장에 있어서 두 가지 서로 다른 단계”로 보지 않고 서로 보완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O. C. 에드워드, 『교부들의 설교』, 174). 이런 그의 모습은 수도원을 중요하게 여기는 그의 생각과 훈련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그는 기독교 예배에서 설교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고 생각했다. 그레고리 대제는 목회에 관심이 많았고 그런 관심들이 『목회 규칙』(Pastoral Rule)이라는 논문에 담겨있다. 『목회 규칙』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Nazianzen)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현직에 있는 목회자들과 앞으로 회중을 이끌 목회 후보생들을 위한 내용들로 이루어져있다. 특히 회중들의 특징에 따라 다른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는 대목은 눈여겨볼만 한다. 모두 네 권으로 쓰여진 『목회 규칙』은 제1권에서 목회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사항들과 그들이 목회 현장에서 직면하게 되는 어려움을 언급하고 있다. 제2권에서는 교구 설교자들에게 필요한 자세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교구 설교자는 침묵과 언어에 있어서 신중할 것,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맞서 단호히 대처할 것, 자신의 즐거움을 지나치게 추구하지 말 것, 성경을 자주 묵상할 것과 같은 내용들이 담겨있다. 제3권은 다른 책들보다 거의 두 배 정도의 분량인데, 다양한 사람들에게 적절하게 설교하는 방안을 제안하고 있다. 이렇듯 목회자들을 위한 그레고리의 『목회 규칙』의 주제는 설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그가 설교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후에 이 『목회 규칙』은 알프레드 황제(Alfred the Great)에 의해 앵글로색슨어(Anglo-Saxon)로 번역되었고, 프랑크 왕국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가 제정한 제정한 법령들을 통해 권장되었다(Dargan, A History of Preaching 01, 128). 앞서 언급한 대로 그레고리 대제는 설교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특히 설교를 통해 성경의 복음이 선포될 때, 사람들이 구원받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간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설교가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그것에 의하여 이교도들이 개종”할 수 있기 때문이며, “신실한 신도들이 기독교적인 삶 안에서 교육받고, 이단들이 융화되며, 교회가 개혁되기 때문이다”(『교부들의 설교』, 181). 다간에 따르면 그레고리의 성품과 그의 설교를 포함한 저작들은 그를 고대 교회와 중세 교회를 있는 파라오가 되게 했다(History of Preaching 01, 129). 즉, 그는 고대와 중세를 이어줌으로서 초대교회의 설교적인 유산을 고스란히 담아 중세교회에 넘겨준 사람이었던 것이다. 조지훈 목사(한세대학교 설교학 교수)
  • 2026.06.04

    그레고리 대제(1)
  • 사회와 교회를 함께 섬겼던 그레고리 대제 유력 집안에서 태어나 수사학 등 최고 교육 받아 교황임에도 수도원 머물며 수도사로 생활해 그레고리 대제(540-604년) 역시 설교의 침체기 또는 암흑기로 말해지는 7-8세기에 활동하던 설교자이다. 로마의 명망 높은 아니키우스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정치적 위상과 영적 유산을 동시에 물려받았다. 로마의 원로원 의원과 두 명의 교황(펠라기우스 2세, 펠릭스 3세)가 이 집안 출신이었다는 것이 그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아버지 고르디아누스는 로마의 행정관을 지낸 재력가였고 그의 어머니 실비아와 그의 두 고모는 훗날 성인으로 추대될 만큼 경건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사실 그레고리가 태어나던 6세기 중반에 로마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해있었다. 당시 동로마제국이 황제였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서로마의 재정복을 목표로 서방 영토 회복에 주력했따.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을 정복하고, 이탈리아의 동고트 왕국을 정복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전쟁은 막대한 재정 부담을 남겼고 제국의 약화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이 전쟁의 과정에서 도시 로마는 점령과 탈환을 반복했고, 그 과정에서 도시 기반 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 수도와 하수도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특히 589년 티베르강의 대홍수로 도시가 잠겼고, 뒤이어 들이닥친 흑사병으로 교황 펠라기우스 2세를 포함해 수많은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레고리 대제가 태어났고 교황으로서 활동했다. 지금까지 이 연재를 통해 살펴보았던 것과 같이 초대교회와 중세교회 시대의 지도자들은 모두 당시 최고 교육인 수사학과 법학 등을 공부한 사람들이었다. 그레고리 대제 역시 수사학, 법학, 변증학을 섭렵했다. 30대 초반 그는 아버지를 따라 로마 시의 최고 행정관인 ‘집정관’의 직위에 올랐다. 이 시기의 활동에 대한 내용은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그는 정부를 위한 상당한 활동을 했었던 것 같다. 집정관으로서의 재직을 마쳤을 때, 그는 수사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사실 그는 “기도의 삶에 자신을 헌신하려는 그 자신의 열망과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돌아보도록 그가 받은 많은 부름들 사이에서의 갈등”을 경험하고 있었다고 후에 진술한다(O. C. 에드워드, 『교부들의 설교』, 171). 그러나 그의 갈등은 어떤 면에서 기우처럼 생각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교황이 되었을 때, 성직자의 활동은 물론 로마 시민들을 위한 구제사업 역시 활발히 벌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물려받은 상당한 재산을 모두 팔아 시칠리아 섬에 6개의 수도원을 세웠다. 그리고 로마의 중심지에 있던 자신의 집에 수도원을 세웠다. 그가 자신의 집을 수도원으로 만든 것은 하나님과 보다 깊은 관계 맺음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열망은 5년 정도 이어졌을 뿐이다. 교황의 부사제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579년 그레고리는 교황 펠라기우스 2세의 사절이 되어 콘스탄틴노플에 있는 최고 관구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7년을 머물렀다. 590년 흑사병으로 교황 펠라기우스 2세가 선종했을 때, 그레고리는 황제의 승인을 받아 교황의 직을 물려받았다. 당시 서로마제국은 476년 이미 멸망한 상태였고 동로마(비잔티움)제국은 서로마 시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전혀 주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흑사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돌보고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드족의 공격 가운데 교회를 지켜내야 하는 것이 황제 그레고리가 해야 할 일들이었다. 한마디로 교황 그레고리가 이끄는 교회가 ‘정부’의 기능을 수행해야 했던 것이다. 물론 당시 서로마에는 ‘시민 정부’가 존재했었다. 원로원도 있었지만 실질적인 권한이 없었고 행정 시스템은 완전히 붕괴된 상태였다. 젊은 시절 집정관으로서의 그레고리의 경험이 이런 상황을 헤쳐나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중세역사에서 그레고리를 기점으로 교황이 세속적 군주로서의 권위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세속적인 업무로 인해 그레고리가 영적인 삶을 포기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목자가 아니라 세속 통치자가 된 것 같다.”라고 탄식했던 그는 수도사로 남아 계속 공동체 생활을 했다. 특히 그는 교회의 주된 사업이 구제가 아니라 ‘영혼구원’임을 의심치 않았다. “그런 우선순위에 대한 그의 의식은 세상이 금방 끝날 것이라는 그의 확신으로 인하여 더욱 강렬해졌다”(O. C. 에드워드, 『교부들의 설교』, 173). 조지훈 목사(한세대학교 설교학 교수)
  • 2026.06.04

    아를의 체사리오(2)
  • 모든 성직자가 설교해야 한다고 생각해 자신의 설교문을 다른 성직자들이 사용하도록 허용해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교해 아를(Arles)의 체사리오(Caesarius, 470-542년경)의 설교는 약 250편이 남아있다. 그의 설교가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17세기에 활약했던 마우리스트들(the Maurists) 덕분이었다. 마우리스트로 알려진 사람들은 프랑스 마우리스트 수도회에 속해있던 수도사들이었다. 그들은 17-18세기에 걸쳐 학문적 연구와 역사 편찬에 주력했다. 역사학, 문헌학, 고문서학 등에 탁월했던 그들은 교회사와 관련된 자료들을 분석해서 방대한 양의 역사서를 편찬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마우리스트들의 연구 전까지 체사리오의 설교들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것으로 취급되고 있었다는 부분이다. O. C. 에드워드는 체사리오의 설교가 그런 취급을 받았던 이유는 체사리오 자신의 모호한 행동 때문이었다고 분석한다. “그는 그 자신이 설교를 해야 한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주교들과 사제들도 설교를 해야 하며, 심지어 부사제들도 교부들의 설교들을 읽을 수 있다고 믿었다”(O. C. 에드워드, 『교부들의 설교』, 165). 그래서 자신의 설교를 다른 성직자들이 읽고 사용할 수 있도록 편집했다. 그런 이유로 그의 설교가 그의 것이라는 사실이 가려지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에는 주교 외에는 설교권을 가질 수 없었다. 529년 바이송 공의회에서 “주교의 허락과 감독 아래에서 사제도 공적으로 설교할 수 있다.”라는 원칙이 확립되기 전까지 사제들은 설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당시 교회 성직의 단계를 잠시 살펴보자. 교회 성직은 모두 세 가지였다. 첫째, 주교(bishop / 라틴어 episcopus / 헬라어 episkopos)이다. 주교는 감독으로도 불리며 한 지역 교회를 책임지는 최고 목회자였다. 예수님의 열 두 사도들의 계승자로 이해되었고, 성경에 대한 가르침과 교회 치리의 최종적인 책임자들이었다. 또한 주교들은 교구 안에서 공식적으로 교리를 해석하는 성직자들이었고 모든 성사를 집전하는 목회자들이었다. 사제 임명, 본당 배치, 교회 재산 관리, 교회 제도 및 규율 관리 등 주교들은 교구의 행정 책임자이기도 했다. 교구 내에서 설교는 주교들에 의해 행해졌다. 사제(priest, presbyter)는 주교의 권한 아래 설교와 교육을 담당했던 목회자들이다. 주교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성사를 집전할 수 있었지만 새롭게 목회자를 세우는 ‘성품성사’만은 할 수 없었다. 한편 부제(deacon)은 교회 성직 질서에서 첫 단계에 위치한 성직으로서, 섬김과 봉사의 직분으로 이해되었다. 부제들은 예배와 성사에서 성경 봉독이나 성찬 보조와 같은 일을 했고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기도 했다. 세례, 혼인성사 장례 예식 등은 집전할 수 있었지만 다른 성사는 인도할 수 없었다. 체사리오의 설교에는 그가 직접 행한 것도 있지만 자신의 성당 안에 마련된 미래 성직자를 위한 훈련센터에서 미래의 설교자들을 위해 분배용으로 허락된 설교들도 있었다. 체사리오는 자신의 설교를 다른 성직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설교는 설교자들에 따라 서론이나 결론이 추가되기도 하고, 어휘가 단순화되기도 했으며, 불필요한 단어들은 제거되고 편집되곤 했다. 실제로 7-9세기 많은 주교가 그의 설교를 사용했다고 한다. 체사리오의 설교는 5개 그룹으로 분류된다. 첫째, 다양한 주제들에 관한 권고들로 이것은 온전한 설교 형식을 취하는 것은 아니었다. 둘째, 정식 설교 형식을 갖춘 강해설교들, 셋째, 교회력에 따른 절기 설교들, 넷째, 성인들과 축일들을 위한 설교들, 마지막으로 수도원 공동체에서 행한 연설들이다. 그의 설교에서는 풍유적 성경해석이 자주 발견된다. 풍유적 해석이란 보통 알레고리(allegory)라고 하는 것으로 성경 본문 속에서 영적, 상징적 의미를 발견하려는 성경해석법이다. ‘풍유’는 빗대어 말하다라는 의미로 성경 본문을 단순히 역사적 사실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교회, 구원, 영적 삶을 가리키는 표지(sign)으로 해석했다. 무엇보다도 체사리오의 설교는 보통 사람들이 사용하는 라틴어로 설교되었다. 그는 “단순한 사람들을 향하여 하는 설교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배운 사람들을 향하여 하는 설교는 단순한 사람들에 의해 전혀 이해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체사리오는 회중이 이해하지 못한 설교는 실패한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조지훈 목사(한세대학교 설교학 교수)
  • 2026.06.04

    아를의 체사리오(1)
  • 혼란한 시대 기독교를 지켜낸 대중 설교자 당시 주교들과 달리 올곧고 정직한 삶 살아 펠리기우스 주장에 맞서 하나님의 은총 강조 이번 호에서는 아를(Arles)의 체사리오(Caesarius, 470-542년경)에 대해 살펴보겠다. 체사리오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6세기 오랑주공의회(the Council of Orange)를 주도하며 펠라기우스 논쟁을 잠재우고 서방교회의 은총 교리를 정립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프랑스 리용에서 북쪽으로 120킬로 정도 떨어진 항구 도시 샬롱이었다. 그의 가족과 유년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그가 샬롱 지역의 유복한 가문 출신이며 18세에 갈리아의 설교자이며 신학자였던 실베리스 주교(Bishop Sylvester)에게 성직 서품을 요청했다는 것은 알려져있다. 성직에 대한 그의 요청은 받아들여졌지만, 다음 세기, 즉 6세기 전까지 가울 지역에서는 성직자들의 공동 생활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성직을 수행하는 시간 이외에는 집에서 머물러야 했을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사랑으로 충만했던 체사리오는 2년 뒤 레랭수도원으로 떠났다. 골 지역 전 교구의 요람 역할을 하고 있던 이 수도원에서 그는 깊은 기독교 영성, 금욕생활, 노동에 대한 헌신, 희생과 섬김과 봉사의 정신 등을 배웠다. 이런 배움은 이후 주교, 설교자, 목사, 개혁가로서의 그의 경력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라틴 교부들의 문학에 대한 이해는 그의 성경 이해와 설교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직무를 수행하는 체사리오의 역량을 지켜보던 수도원장은 그를 레랭수도원의 재정관리 책임자(cellerarius)로 임명했다. 그렇게 수도원을 위해 7~8년 일했던 그는 건강을 잃게 되었고 휴식을 위해 아를로 갔다. 로마시대 중요한 항구도시였던 아를은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였고 한때 골의 수도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지내면서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 있을 때, 아를의 주교이고 그의 친척이었던 애오니우스 주교가 그를 아를 교구의 주교 중 하나로 천거했다. 처음에는 부사제로, 나중에는 사제로서 8년 동안 섬긴 체사리오는 지역 수도원의 대수도원장 사망 이후 그 직을 계승했다. 499년 그의 나이 약 30세가 되던 때였다. 특히 체사리오의 신학과 사역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것은 그의 스승이었던 수사학자이자 기독교 수도자였던 포메리우스였다. 체사리오는 스승 포메리우스를 통해 수사학을 비롯한 라틴의 훌륭한 이차적 교육을 받았으며 동시에 주교로서 근면하고 검소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자신의 동료들과 공동체 생활을 했던 포메리우스는 「명상에 잠기는 생활」이라는 논문을 통해 아우구스티누스이 말했던 기독교적인 이상 생활에 대해 진술했다. 이런 포메리우스의 성향은 고스란히 체사리오에게 영향을 미쳤고, 체사리오는 주교직으로 있던 40년 동안 수많은 회의들을 통해 아우구스티누스와 포메리우스의 원리들을 입법화했다. 그는 포로상태에 있던 사람들의 출신 성분을 묻지 않고 자신의 돈을 주어 풀려나게 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했고, 지역 주교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길 원하는 여인들을 위해 수도원을 건립해주기도 했다. 독일의 신학자요 교회사학자인 오토 바르덴헤버(Otto Bardenhewer)는 체사리오의 사역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체사리오는 서로마가 붕괴하던 시기에, 야만족 정복자들의 새로운 정치 질서 위에 기독교 문명을 접목함으로써 완전한 파멸로부터 기독교 문명을 구해냈다 … 격동의 시대 한복판에서 그는 영혼의 목자, 교회 규율의 개혁자, 그리고 실천적 기독교를 전하는 대중 설교자로서 헌신적으로 사역했다.”(Saint Caesarius of Arles: Sermons Vol. 1 (1-80), viii에서 재인용). 체사리오의 생애를 말할 때 ‘펠라기우스 논쟁’을 빼놓을 수 없다. 신학자이자 수도사였던 펠라기우스(354~420년경)은 원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선을 선택할 수 있으며, 구원은 인간의 노력과 결단에 달려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죄로 인해 인간은 결코 스스로 선을 시작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은총이 없다면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529년 오랑에서 열린 공의회를 주도했던 체사리오는 원죄로 인해 인간 스스로 믿음을 시작할 수 없으며 믿음의 시작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도 필요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와는 결이 다른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이런 그의 주장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은총론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조지훈 목사(한세대학교 설교학 교수)
  • 2026.06.04

    레오 1세
  • 교황권을 공고히 한 레오 1세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강조해 설교를 교리 교육과 신앙 고백 수단으로 사용 로마교회의 종교적 권위가 강화된 시기는 402년부터 417년 교황 인노첸시오 1세 재위 때였다. 이후 인노첸시오 1세를 이어 그리스 출신의 자시머스가 교황으로 선출됐지만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선종한 뒤에 레오 1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등극한다. 기독교의 중세 역사에서 레오 1세가 중요한 것은 교황의 권위를 공고히 했기 때문이다. 특히 레오 1세는 예수님이 베드로와 베드로의 후계자들을 교회가 서있을 초석으로 삼으셨기에 로마교회의 주교, 곧 교황이 로마에서 순교한 베드로를 이을 자이며 교회를 지탱하는 궁극의 기초가 된다고 주장했다(알리스터 맥그라스, 『기독교의 역사』, p.161). 이렇듯 교황권을 강화하는데 탁월한 행정가였던 레오 1세는 설교를 통해 동서분열 가운데 있던 교회를 하나로 묶는데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던 설교자이기도 했다. 그의 설교는 서방교회 설교 전통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레오 1세의 출생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호노리우스 황제 말기 게르만족이 로마를 계속해서 괴롭히던 시기인 400년 어간에 토스카나 지방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서로마 제국의 정치가 혼란하던 시기에 청소년기를 보냈던 그는 당시 사회 지도층 자제들에게만 허락되었던 수사학을 공부했다. 이렇게 수사학 교육을 받았던 레오 1세의 진가는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이 분리되었다고 주장하던 네스토리우스와 같은 이단들과의 논쟁에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과 인성에 대한 양성론(Two Natures of Christ)을 통해 드러났고 훈족 왕 아틸라가 로마에 침입했을 때 협상을 통해 약탈을 막아낸 일을 통해 빛을 발했다. 설교에 있어서도 탁월함을 드러낸 레오 1세는 단순한 도덕적 권면이 아니라 교리 교육과 신앙 고백의 수단으로 설교를 사용했다. 특히 성육신, 그리스도의 양성론, 교회 일치 등의 주제를 반복해서 강조했다. 로마 주교가 베드로의 교황권을 전수받았다는 정당성을 설교를 통해 전개했다. 또한 그는 교회력에 따라 설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레오 1세의 설교는 약 96편 정도가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 그 설교들 대부분은 교황으로서 그가 재임하던 처음 5년 동안 했던 것들이다. 레오 1세의 설교가 가지는 특징은 첫째, 굉장히 짧다는 것이다. 평균적으로 4페이지를 넘기지 않았으며 표현은 간결하고 적절했다. 어떤 설교는 심지어 3분을 넘지 않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설교학자 O. C. 에드워드는 레오 1세의 설교를 공부하기 원하는 사람은 그의 454년 성탄절 설교를 공부하라고 조언한다(O. C. 에드워드, 『교부들의 설교』, p. 159-161). 앞서 살펴본 대로 예수님의 양성론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던 칼케톤 회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레오는 이 설교를 통해 예수님의 성육신의 신비를 다루고 있다. 그는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하나님이시며 참된 인간이 되신다고 선언하며 그와 같은 예수님의 양성의 신비를 그 어떤 인간의 말로도 표현하거나 찬미할 수 없다는 말로 설교를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신비는 최대한 올바른 언어로 선포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양성에 대해 너무도 아주 많은 사람이 잘못 이해함으로써 이단의 논설을 믿거나 퍼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레오 1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초자연적인 신비가 인간의 일상 속에 인간의 역사 속에 개입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 사건이야말로 인간 구원의 사건이며 인간에게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 편에서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구유의 낮아짐’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겸손과 자비가 무엇인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통로인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을 새로운 삶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이다. 그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라는 말씀을 인용하며 “이와 같은 사실을 어느 누구도 의심할 수 없다”라고 단언한다. 또한 그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은 이제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하는 삶을 세상에서 살아내야 한다. 곧 성화와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설교에서 레오 1세는 ‘우리’ 또는 ‘신자 여러분’과 같은 호칭을 통해 청중과의 친밀감을 높이고 윤리적 삶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청중의 적극적인 반응과 내적 변화를 촉구한다. 조지훈 목사(한세대학교 설교학 교수)
  • 2025.11.07

    중세 시대의 설교(Ⅰ)
  •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서로마·동로마 분열 서로마 멸망한 476년, 중세 시대의 시작 기독교의 설교에서 성경으로부터 어떤 메시지를 도출해낼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설교자와 그 설교를 듣던 청중들의 삶의 자리 역시 중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앞으로 살펴보게 될 중세 시대 개별 설교자들에 대해 논하기 전에 그들이 활동했던 중세 시대의 특징을 살펴보려고 한다. 영국의 신학자이자 역사가이며 저술가인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강제 퇴위당하고 서로마제국이 막을 내린 476년을 중세의 시작으로 간주한다(알리스터 맥그라스, 『기독교의 역사』,p. 158).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325년 로마제국의 서부와 동부의 통제권을 장악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제국의 동쪽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해서 선택된 장소가 바로 지중해와 흑해에 걸쳐 있는 보스포루스 해협 가운데 있는 비잔티움이며 이후에 황제의 이름을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누스의 도시’)이라고 불리게 됐다. 이 도시는 330년 5월 11일 봉헌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 도시를 ‘새 로마’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새 도시 건설은 동·서로마의 탄생과 동·서교회 분열의 서막이 되고 말았다. 그 씨앗은 379년부터 395년까지 로마를 다스렸던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뿌려졌다.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로 만드는데 중요한 조치들을 단행한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넓은 영토를 혼자 통치할 수 없다고 판단해 395년 제국을 동서로 분할하여 자신의 두 아들 아르카디우스(동로마)와 호노리우스(서로마)에게 맡겼다. 이후 동서제국은 각자 발전하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서로마제국은 476년 멸망하게 된다. 4세기 후반 훈족의 등장으로 인해 게르만족은 생존을 위해 남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이동해온 게르만족은 자연스럽게 로마에 흡수됐다. 로마에 편입된 게르만족은 부족한 노예 대신 농사를 짓고 용병이 되어 로마를 위해 전쟁터에 나갔다. 그 가운데 공을 세워 출세하는 인물들이 등장했고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서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폐위시키고 이탈리아의 왕이 된 오도아케르이다. 서로마를 멸망시킨 오도아케르는 독자적인 왕국을 건설하기보다는 동로마 황제 제논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계신 폐하께서 진정한 황제”라는 서신을 보냄으로써 동로마의 그늘에 있기를 원했다. 서로마제국의 멸망은 첫째,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제국 분할이라는 정치적인 이유와 둘째, 도시 귀족의 사치와 허영으로 인한 사회적인 이유 때문이며 셋째, 오랫동안 외부의 침략자들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군사력이 약화되는 군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한편, 서로마제국이 몰락했다고 해서 교회 조직이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동로마에 있는 로마교회는 여전히 교황이 있는 명실상부한 로마 기독교의 중심지였다. 4세기 중엽부터 대교구인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디옥의 주교들이 다른 곳의 주교들보다 더 우위에 있는 것으로 인정을 받게 됐다. 특히 서쪽 지역의 교회들에서는 로마 주교가 교회 내외의 문제를 중재하는 이로 인정받게 됐다. 로마 주교가 그런 권위를 인정받았던 것은 로마가 로마제국의 수도라는 정치적인 요인과 더불어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했고 로마에 묻혔다는 영적인 요인도 있었다. 원래 ‘교황’이라는 말은 존경받는 기독교 주교를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로마 주교를 위한 칭호로 바뀌었다. 384년부터 399년까지 로마 주교였던 시리치오는 오직 자신과 자신의 후계자에게만 이 칭호를 사용하도록 규정했다. 이런 이유로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교황들은 여전히 로마에 남아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중앙 행정 체계가 무너지고 정치권력의 공백 상태가 발생했을 때 이를 메운 것이 교황과 교회였다. 6세기 말이 되었을 때, 오직 교회만이 서로마 지역에서 유일한 국제 조직으로 남게 됐다. 또한 590년부터 14년 동안 교황을 지낸 그레고리오 1세 때에 선교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기독교의 세력권이 한층 확장됐다. 선교활동을 통해 교황의 영향력이 이탈리아 바깥 지역에도 미치게 됐으며 8세기에는 잉글랜드, 독일, 프랑스 등 서유럽 여러 지역이 교황의 권위 아래 복속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도 이전 시대와 같이 많은 설교자가 등장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했다. 조지훈 목사(한세대 설교학 교수)
  • 2025.10.10

    찬가 설교의 대가 로마노스
  • 성경이나 교리 등을 시 형식으로 노래해 이영훈 목사의 설교에서도 그 흔적 발견 설교학자 다간은 방대한 분량의 책 『설교의 역사』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죽은 5세기 초부터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는 11세기까지의 시기를 설교 역사의 두 번째 기간으로 분류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이 시기는 거대한 제국 로마가 부패로 치닫고 있었고 그에 따라 미래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고 종말 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제국 로마의 멸망을 알리는 종소리가 저 멀리에서 들려오고 있었고 이제 온 유럽에 중세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사람 중의 하나가 동방교회 전통에 속해있던 로마노스(Romanos the Melodist)이다. 로마노스는 설교자라기보다는 콘타키온(Kontakion) 형식의 찬가 작곡자였다. 폴 스캇 윌슨은 설교 역사를 인물별로 정리하는 자신의 책 『그리스도 설교의 역사』에서 로마노스를 “동방교회 내의 시적인 설교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설교자요 모든 시대에 걸쳐서 위대한 종교적인 시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다(폴 스캇 윌슨, 『그리스도 설교의 역사』, 대한기독교서회, p 62). 로마노스를 설교자로 분류할 수 있는 이유는 콘타키온이 무엇인지를 살펴봄으로써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콘타키온은 비잔틴교회의 교회 전례음악으로 6세기경 콘스탄티노플에서 한창 발전했다. 성경 이야기나 교리를 운문(시) 형식으로 서술하는 장문의 찬가인 콘타키온은 성도들에게 성경 이야기, 교리, 성인들의 생애 등을 감성적이고 시적인 언어로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콘타키온의 구조는 서곡에 해당하는 프로이미온(prooimion)과 여러 개의 연으로 구성된 오이코이(oikoi)로 되어있다. 프로이미온은 1절로 된 짧은 도입부분으로 전체 주제를 요약해주고 계속되는 후렴구를 제시한다. 18개에서 24개의 연으로 구성된 오이코이는 각 연이 동일한 운율과 리듬 구조를 가지고 있고 프로이미온에서 소개된 후렴구를 사용함으로써 통일성을 유지한다. 현재에도 동방교회 전통의 교회에서는 콘타키온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전의 긴 형식 대신 서곡만을 부르는 경우가 많다. 다른 설교학자들과는 달리 폴 스캇 윌슨은 강단에서 행해진 설교뿐만 아니라 순교자의 죽음이나 찬가 역시 하나의 설교로 간주한다. 그런 이유에서 윌슨은 로마노스를 한 설교자로 분류하고 있다. 윌슨에 따르면 기독교 역사 속에서 운율과 박자에 따른 설교의 전통이 있어왔다. 165년 소아시아의 줄 사르디스의 멜리토(Bishop Melito of Sardis)가 발견한 ‘수난에 관한 설교’가 그 대표적인 예이며 아우구스티누스의 라틴어 설교 역시 운율, 박자, 평행법, 대조법, 모음을 통한 협음 만들기 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운율과 박자에 근거한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전승에 따르면 성가대원이었던 로마노스는 노래를 잘 부르지 못했다고 한다. 어느 성탄절 전야에 찬가를 불러야 했던 그는 성모 마리아에게 전심으로 기도하며 도움을 구했다. 그날 밤 꿈속에서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이 두루마리를 먹어라”라고 말했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두루마리를 입에 넣어 삼켰고 다음 날부터 놀라운 음성과 즉흥적인 찬송시를 만드는 능력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로마노스는 1000개 이상의 콘타키온을 썼지만 오직 59개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로마노스가 작곡한 콘타키온은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개인적인 삶에 대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특징은 당시 예술가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겸손한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그들의 작업이 교회에 속한 것이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작곡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윌슨은 추정한다. 둘째, 로마노스의 시적인 설교들은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보통 24개의 연으로 구성된 설교들은 행마다 하나의 해설이 곁들여졌고 어떤 경우는 각 행에 들어있는 음절의 숫자에까지도 해설이 덧붙여졌다. 셋째, 설교를 행하는 설교자는 음율과 박자에 맞추어 노래하면서 이야기를 진행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여러 등장인물을 다른 목소리로 표현해야 했다. 이렇게 여러 등장인물을 통해 성경과 교리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가르침도 전달됐다. 이렇게 진행되는 설교의 마무리 과정에서 “회중은 합창단이 그 설교의 중심 주제로 사용하는 동일한 후렴구를 최소한 25회나 반복해서 부르는 것을 들었고, 또한 그 회중도 합창단에 합세해서 따라 부르곤 했다”(『그리스도 설교의 역사』, p 65). 오늘날 로마노스가 행했던 찬가 설교는 찾기 어렵다. 그러나 그가 강조했던 감성적이고 이야기 중심의 설교 전통은 지금도 많은 설교자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이야기 중심의 설교, 감성을 자극하는 설교는 현대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게 하는 좋은 매개체가 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로마노스의 콘타키온의 마지막 부분에 회중들이 성가대와 함께 부르는 찬양을 자신의 설교에 적용하는 현대 설교자들도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는 설교 마지막 부분에 예화를 하고 이어 설교 주제에 맞는 찬송으로 설교를 마무리한다. 설교 후반부를 찬송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성도들이 지금까지 들은 설교의 내용을 되돌아보게 하고 그 내용을 따라 한 주간을 살아가도록 결단하게 한다. 로마노스의 찬가 설교의 흔적을 이영훈 목사의 설교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다. 조지훈 목사(한세대학교 설교학 교수)
  • 2025.05.09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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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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