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박현주 목사(용산대교구장) - 2024년 12월 
  • 2024년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한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이 되었습니다. 제가 12라는 숫자를 한번 생각해보았는데 여러 가지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1년은 12달로 되어 있고, 12간지 띠가 있고, 12음계이며 연필 한 다스가 12자루이고, 한국의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는 총 12년, 심지어 인간의 뇌신경은 12쌍이랍니다. 그리고 신앙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1년을 12달, 하루를 낮 12시간과 밤 12시간으로 구분하셨습니다. 성경의 12숫자는 구약의 12지파, 12사도, 12광주리, 12진주문, 생명나무 12과실 등 12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신적 능력과 권위에 사용된 상징적 숫자입니다. 오늘은 12월의 첫날로 우리의 마음이 분주할 수 있는데 저는 오늘을 다른 의미로 묵상해 봅니다. 12월은 마치는 시간과 동시에 새로 시작되는 기대의 달입니다. 먼저 올 1년 동안 삶의 현장에서 씨앗을 뿌린 것들이 얼마나 영글었는지, 목표로 한 것들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를 막판 카운트하는 것이 사뭇 기대가 되며 나름대로 수고한 것들에 대해 스스로 박수를 쳐야 할 것입니다. 또한 혹 결실이 부족하였으면 쿨하게 털어버리고 이제 새로운 해가 곧 오므로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기대하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의 달입니다. 1이라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지만 12는 금방 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시점입니다. 12월 마지막 달이니 세상 사람들은 연말을 실컷 즐기려고 들뜬 분위기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틈을 타서 물가는 더 오르고 연말 상술이 극성을 부리기도 합니다. 추수감사절을 필두로 수능 이후 이제 성탄절까지 연말을 맞아 백화점, 마트, 쇼핑 업체의 상술들이 이어질 것입니다. 수능생 이벤트에 블랙프라이데이, 사이버 먼데이까지 많은 프로모션과 할인 상품들이 사람들을 계속 유혹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요! 12월엔 세상에 가장 좋은 소식이 전해진 달이 아닙니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하나님으로서 죄인들을 품으시기 위해 낮은 인간의 모습으로 예수님이 찾아오신 인류에게는 가장 영광스러운 달이요 성도들에게는 가장 감격적인 달입니다. 2024년 12월을 맞아 마음이 쫓기거나 가는 세월에 무상함을 느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음껏 누리시고 축하하며 사랑을 전하는 최고의 연말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 2024.11.29

    조정규 목사(찬양특별교구대교구장) - 절대 감사의 실천 ‘찬양’
  • 지난 추수감사주일은 그 어느 때보다 감사에 대해 더 많이 묵상하게 되는 날이었습니다.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마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등 감사의 찬양들과 함께 감사의 의미 그리고 삶의 실제적인 감사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참 신기한 것은 감사는 하면 할수록 더 많아지고 새롭게 발견되며,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불평과 원망은 하면 할수록 삶을 가난하고 초라하고 절망하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은 감사를 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좋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끝까지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좋은 일이 생겨서 또는 행운이 따라와야만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같은 죄인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셔서 하나님 자녀 삼아주신 것, 귀한 사명 주신 것, 나를 영원한 생명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그 신실하심이 이미 영원히 감사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루하루 시간 시간이 감사할 이유입니다. 감사는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감사를 마음과 생각에만 담아두는 것이 아니라 삶 가운데 표현해야 합니다. 아무리 감사의 마음이 있다고 해도 표현하지 않으면 누구도 그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까지 다 아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고백을 듣기 원하십니다. 감사는 여러 가지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입술의 고백으로, 하나님을 섬김으로, 몸과 마음과 물질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적극적인 감사의 실천과 표현은 ‘찬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며 찬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목소리로 즐겁게 노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으로 악기를 연주하며 하나님을 높일 수 있습니다. 몸의 움직임으로 춤을 추며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모습의 찬양이라도 우리는 자유롭게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주신 은혜와 사랑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의 찬양은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고, 고난 중에도 기뻐하게 하며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게 합니다. 가장 적극적인 감사의 실천과 표현인 찬양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고, 그 풍성한 사랑 가운데 거하며 승리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 100:4).
  • 2024.11.22

    신효영 목사(장애인대교구장) -  기쁨의 열매를 거두려면  
  • 신약성경 골로새서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골로새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에바브라’라는 신실한 사역자에 의해 세워졌고, 양육을 받은 교회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차디찬 감옥에서 골로새에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바로 감사입니다. 바울은 기도할 때마다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마땅한 것이지만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든 사도로서 감옥생활은 참으로 힘들고 견디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에게는 육체의 가시, 만성적인 질병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옥중에서 쓴 모든 편지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에서는 “항상 기뻐하라”고 강조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합니다. 빌립보 감옥에서도 바울과 실라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밤중에 찬송과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 옥문이 열리고 간수가 회개하고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아무리 열악한 상황과 환경일지라도 바울의 마음속에 있는 기쁨과 감사를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찬송과 감사로 기도할 때 하늘의 문이 열리고, 감옥의 문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감사 기도는 하늘의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입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어떤 감사가 있습니까?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내게 필요한 소원을 가지고 아뢸 때가 많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내게있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남이 가지고 있는 더 큰 것을 보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우리는 항상 잃어버린 것, 손해 본 것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감사는 지금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감사는 내 손에 남아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2024년 한 해를 달려오면서 지금 손에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어떤 분은 처음보다 더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많이 잃었다고 생각할수록 우리의 가슴은 허전해지고 슬픔에 빠집니다. 그러나 비록 잃었지만 앞으로 채우실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 입술에 감사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를 감사로 채우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풍성한 기쁨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 2024.11.15

    황혁 목사(금천대교구장) - 교토삼굴(狡兎三窟)과 믿음의 두 날개
  • 토끼의 지능은 IQ50 정도다. 웬만한 훈련이면 인간 언어에 반응하며 배변을 가리고 장애물 통과도 가능하다. 토끼는 초식 동물이며 먹이 사슬의 최하단에 위치하기 때문에 사방이 천적이다. 토끼의 생존전략은 다산(多産)과 독특한 방어기제(防禦機制)다. 토끼들은 방어를 위해 평균 1.5m길이의 굴을 파는데 유사시를 대비해 비상구도 만들고 다른 굴들과 이어지는 통로도 만든다. 이러한 토끼의 기재(奇才)를 잘 표현하는 말이 ‘교토삼굴(狡兎三窟)’이다. 이 말은 ‘영리한 토끼는 세 개의 굴을 판다’는 뜻이다. 중국 제나라 맹상군의 식객이 제안한 세 개의 계책으로 재상 자리도 되찾고, 나라도 지킬 수 있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된 고사성어다. 위험에 대비하여 여러 가지 방안을 마련해 놓는 지혜를 의미하며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뿐만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를 의미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예측 불가능한 변화로 가득 차 있다. 기후 변화에 따른 자연재해, 전쟁의 위험, 경제 위기, 사회적 변혁, 기술 발전 등 수많은 요소들로 인해 야기된다. 마치 깊은 숲속을 헤매는 길을 잃은 나그네처럼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 교토삼굴의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교토삼굴의 지혜만으로는 부족한 부분이 있다. 가치관조차 급격하게 변하는 환경 속에서 흔들림 없이 붙잡아줄 수 있는 절대불변의 믿음이 그 영역이다. 시편 119편 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는 말씀처럼 믿음은 캄캄한 밤하늘을 밝히는 별처럼 희망과 용기를 준다. 또한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고 말씀하고 있다. 믿음은 단순한 감정이나 소망을 넘어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하고 연약함을 치료하고 근심을 해결할 것이라는 확신과 신뢰다. 교토삼굴의 지혜는 우리에게 미래를 준비하고 위기에 대처하는 슬기로운 방법을 가르쳐 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다양한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줄 것이다. 마치 독수리가 두 날개를 펴고 푸른 하늘을 높이 나는 것처럼, 교토삼굴의 지혜와 믿음이라는 두 날개를 달고 힘차게 펄럭이며 날아야 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변치 않는 믿음을 가지고, 미래를 위해 치밀하게 노력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 2024.11.08

    최영권 목사(구로대교구장) - 불안을 극복하는 절대 긍정
  • 2021년 보건복지부의 정신건강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인구의 9.3%가 평생 동안 ‘불안장애’를 경험했다고 한다. ‘불안장애’란 비정상적이고 병적인 불안과 공포로 인해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정신장애를 의미하는데 대략 10명 중 1명이 정상적인 범위를 벗어나 불안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수치가 말해주는 바는 심각하다. 불안으로 인해 일상적인 생활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의 수가 이 정도라면 불안을 느끼고 있지만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의 수는 더욱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토록 불안하게 살아가고 있을까? 불안은 우리의 삶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경제적 불안정, 사회적 경쟁, 개인적인 관계의 스트레스 등 현대 사회가 제공하는 여러 압박 요소들이 우리를 지속적으로 긴장 상태에 놓이게 한다. 이러한 불안은 종종 우리 내부의 불확실성, 즉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도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불안을 해결하고자 지난 20년간 전 세계의 다양한 실험실에서 불안에 대한 뇌과학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불안이 뇌에서 어떻게 처리되는지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뇌과학적으로 볼 때 우리의 뇌는 불안을 감지하는 두 개의 주요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 다양한 상황을 예측하고 판단하는 피질과 자율신경계를 작동시키는 편도체이다. 피질에서 부정적인 생각과 이미지를 만들어낸 후 그것을 곱씹으면 편도체는 활성화되어 결국 불안에 도달하는 것이다. 뇌과학자들이 내놓은 해결책은 사건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과 사건 자체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통해 우리는 불안에 맞서 피질 기반 통제권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즉, 불안한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전환하는 것이 중요하다. 뇌에 긍정적인 경험을 집중시키고 이를 즐기는 방법을 배운다면, 전반적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형제자매 여러분,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과, 무엇이든지 옳은 것과, 무엇이든 순결한 것과, 무엇이든 사랑스러운 것과, 무엇이든지 명예로운 것과, 또 덕이 되고 칭찬할 만한 것이면, 이 모든 것을 생각하십시오”(빌 4:8, 새번역)라고 강조했다. 이는 성도들이 긍정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결론적으로 절대 긍정은 불안을 극복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이다. 우리는 긍정적인 사고를 통해 더 나은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고 일상에서 느끼는 불안을 줄일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 2024.11.01

    차진호 목사(양서성전 담당) - 체온과 면역력
  •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쌀쌀해진 환절기가 찾아왔다. 안타깝게도 추운 환절기가 되면 나이 많으신 고령자가 많이 돌아가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이유가 낮은 체온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의사들은 평상시 체온이 낮은 고령자나 환자들은 환절기와 추운 겨울에 체온이 떨어지지 않도록 적당한 운동과 반신욕으로 몸을 따뜻하게 유지해야 한다고 한다. 체온과 면역력에 대한 기사를 읽어 보니 건강한 성인의 정상체온은 36.5℃에서 36.9℃ 사이이며 어린아이들은 조금 높고 고령자는 0.5℃ 낮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몸이 정상체온보다 높거나 낮으면 건강하지 않다는 위험 신호라고 한다. 특히 체온이 낮은 경우 각종 바이러스에 노출될 위험이 크다고 한다. 신기한 것은 우리 몸은 체온이 1℃ 올라가면 면역력은 5배, 기초대사율은 10% 높아지며 바이러스에 강한 몸이 되고 혈액순환이 잘되는 건강한 몸이 된다고 한다. 사람에게 체온과 면역력이 중요한 것처럼 성경에서도 영적 온도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3장 15절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신앙 온도 관리에 실패해서 차지도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하다고 책망 받았다. 하나님께서 신앙 온도조절에 실패했다고 책망했던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요 한국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안타깝게도 우리 한국교회는 코로나 팬데믹 기간을 지나오면서 성도들의 영적 온도가 많이 떨어졌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집에서 혼자 동영상으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많으며 교회 각 기관과 부서에서 헌신했던 봉사 생활을 중단한 성도들이 많다. 이제 한국교회는 식어 버린 신앙 온도를 다시 끌어올려야 한다. 체온과 면역력을 올리기 위해서 보약을 먹고 영양제를 복용하듯이 영적 체온과 영적 면역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영적 보약을 복용해야 한다. 예배 보약, 말씀 보약, 찬양 보약, 기도 보약을 복용하면 된다. 지금보다 더 많은 예배에 참석해야 하고 더 많은 설교 말씀을 들어야 하며 더 많은 성경 말씀을 읽고 더 많은 찬양을 부르고 더 많은 기도를 드려야 한다. 무엇보다 봉사 시간과 전도 시간을 늘려가며 영적 군사로 사명 감당해야 한다. 그럴 때 성도 개인의 영적 면역력이 올라가서 마귀가 주는 불신앙 바이러스와 게으름 바이러스의 공격에도 신앙생활이 병들지 않고 날마다 승리할 수 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마가다락방에서 성령의 불을 받고 영적 체온이 뜨거워진 120명이 초대교회를 부흥시키고 열방을 선교했다. 우리들도 매일 매일 성령 충만 받고 영적 체온을 끌어올려 교회와 교구와 지구역을 뜨겁게 부흥시키길 소망한다.
  • 2024.10.25

    김민철 목사(장년국 담당) - 헌신이 필요할 때 
  • 마가복음 12장에 가난한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의 이야기가 나온다. 성전 입구에서 헌금함에 헌금하는 사람들을 지켜보시던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을 보시고는 부자들이 넣은 것 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칭찬하셨다. 칭찬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부자들은 그 풍족한 것 중에 일부를 넣었지만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 즉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두 렙돈을 오늘날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1500원 정도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금액이다. 하루 생활비가 1500원이었다니 그녀가 얼마나 가난한 삶을 살았을지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생활비 전부를 헌금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생활비는 비단 의식주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 전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생활비 전체를 드렸다는 것은 자신의 전부, 즉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어떻게 이런 헌신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다시 말해 하나님은 내 삶의 주인이시기에 내 삶의 모든 것을 책임지실 것이라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 신뢰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내 삶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의 전부를 드리고 있는가? 과부에게 두 렙돈은 생활이 전부였다. 그러므로 한 렙돈만 드려도 큰 희생이 아닐 수 없는데 두 렙돈을 전부 드렸다. 이것은 정말 큰 희생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마음, 희생을 감수하고 드리는 마음으로 헌금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으며 오늘날까지 그녀의 헌신은 널리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 봉사자는 많은데 참된 헌신자는 많지 않은 것 같다. 봉사자와 헌신자의 차이가 무엇일까? 비슷한 단어 같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다. 봉사자는 내가 시간이 나면 봉사하고 시간이 없으면 봉사를 하지 않는 사람이다. 즉 자기 희생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하지만 헌신자는 시간이 없어도 여력이 안 되어도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며 섬기는 자들이다. 여러분은 봉사자인가? 헌신자인가? 10월 23일부터 26일까지 제30차 CGI세계교회성장대회가 우리 교회에서 열린다. 우리 교회의 큰 잔치가 아닐 수 없다. 많은 기도와 더불어 헌신자들이 필요하다. 남의 일처럼 방관하지 말고 헌신자의 마음을 가지고 솔선수범하여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천국 잔치를 은혜롭게 잘 마칠 수 있기를 바란다.
  • 2024.10.17

    김정환 목사(용산성전 담당) - 한 사건 그리고 두 선택
  •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 중 단연 압권은 거라사 광인을 구원해 주신 사건이다. 군대라는 이름으로 뭉친 6000마리 귀신들이 2000마리 돼지 떼에 경쟁이라도 하듯 들어간다. 귀신의 힘이 얼마나 강했던지 돼지도 견디지 못해 죽기로 결심한다. 바다를 향해 달리다 비탈길에서는 가속도가 붙어 돼지들은 바다로 쏟아져 들어간다. 광인은 예수님을 택했다.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저 끔찍한 귀신들을 물리쳐주셨고 광인은 구원받아 정신이 온전해졌다. 그 은혜가 감사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게 해달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거절하셨다. 그가 할 일은 자신의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거라사 광인에게 자신의 가족과 돼지를 제물 삼아 거짓 신을 숭배하는 거라사인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거라사 같은 10개의 도시 데가볼리에 복음을 들고 가라고 명하셨다. 하지만 거라사 사람들은 예수님을 버렸다. 돼지 치는 자는 날벼락을 맞았다. 최하층민인 그는 본인 과실이 아님을 증명해야 했다. 돼지 주인들이 손해배상이라도 청구하면 어쩌겠는가. 그래서 모든 일의 배후에 예수가 있다고 증언한다. 돼지 주인들도 날벼락을 맞았다. 하루아침에 망했다. 돼지 팔아 아들딸 결혼시켜야 하고, 전세금도 올려줘야 하고, 무리하게 대출받아 암퇘지를 샀는데 새끼 한 마리 못 건지고 끝나버렸다. 도시 전체가 날벼락을 맞았다. 도시의 모든 경제가 마비되고 돼지 사체와 창궐할 전염병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돼지 치는 자도, 돼지 주인들도, 도시 전체도 한마음이 돼서 예수를 쫓아냈다. 그들에게는 구원받는 것보다 2000마리 돼지 떼의 가치가 더 귀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예수님이 없는 생명, 물질, 명예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오직 예수님의 구원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거라사의 ‘광인’ 아니 ‘예수님께 구원받은 자’만큼 확실한 선포자가 있을까. 예수님의 눈에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광인을 구원하는 것이 수천마리 돼지보다 귀했다. 오늘도 난 예수님을 선택한다.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막 5:20).
  • 2024.10.11

    김성호 목사(교회개척국 담당) - 성공의 진정한 의미와 역할
  • 현대 사회에서 성공은 종종 물질적 성취로 평가된다. 사람들은 더 많은 돈과 높은 지위를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과연 그것이 진정한 성공일까? 진정한 성공은 물질적 성취를 넘어선 더 깊고 의미 있는 삶에서 나온다. 영적 가치, 내적 평안 그리고 다른 이들을 향한 나눔과 봉사에서 비롯된다. 성경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 6:31)고 가르치며 물질적 성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려준다. 절대 긍정과 절대 감사는 성공을 바라보는 관점을 완전히 바꿔 놓는다. 감사하는 태도를 가지면 성공을 외적 성취로만 평가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삶의 모든 순간을 성장과 배움의 기회로 바라보게 된다. 실패와 어려움도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과정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긍정적인 마음가짐과 감사의 태도는 역경을 견디고 더욱 강해질 수 있도록 한다. 이런 태도는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 성공을 이룬 사람들도 내적으로 공허함을 느낀다. 그들은 세속적인 성공이 주는 일시적인 행복이 영원한 기쁨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진정한 성공은 물질적 성취를 넘어 영적 성숙에서 나온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 나누고 봉사하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기쁨을 줄 수 있다. 성경은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 22:39)라는 가르침을 통해 나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런 사랑과 나눔의 실천은 영적으로 성장하는 데 필수적이다. 우리는 성공을 단순히 개인적 성취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의 성공은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성공을 다른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도구로 삼아야 한다. 진정한 성공은 나눔과 봉사로 이어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이는 기부나 자선 활동은 물론, 매 순간 친절과 배려를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영적인 가치를 중심으로 한 성공을 추구해야 한다. 물질적 성취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영적 가치와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진정한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라는 말씀처럼 더 큰 목적을 위해 성공을 사용하고 절대 긍정과 절대 감사의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물질적 성취를 넘어서 영적으로 풍성한 성공을 추구하고 이를 통해 타인과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어야 한다.
  • 2024.10.04

    박창호 목사(동대문성전 담당) - 자화상(自畵像)
  • 렘브란트 하르먼손 반 레인(1606~1669)은 바로크 시대의 거장, 빛의 마술사,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를 연 화가로 불린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천재적 재능을 가졌던 그는 20대에 당대 최고의 화가 반열에 올랐고 명문가의 미녀 사스키아와 혼인하며 부와 명성을 모두 얻지만 사치와 방탕한 삶 가운데 자신의 작품이 스캔들에 휘말리며 화가로서의 명성이 몰락하고 파산하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린 세 아들과 아내마저 차례대로 세상을 떠나버리고, 결국 그는 외롭고 비참하게 살다가 1669년 63세의 나이에 가난하고 쓸쓸하게 삶을 마쳤다. 렘브란트는 평생 100여 점의 자화상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는 22세 무렵 그린 최초의 자화상과 파산하여 모든 것을 잃고 난 56세 때 그린 두 작품이 있다. 젊은 시절의 자화상은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 때의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외면하며 살아왔던 노년의 얼굴이다. 젊은 시절 그가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 때의 자화상에는 희망과 아름다운 꿈을 꾸는 듯한 평온함을 엿볼 수 있지만 하나님을 떠나 자기 생각대로 살아왔던 노년의 자화상에는 희망 없는 공허한 눈빛과 암울하고 어두운 표정으로 가득하다. 사사기 기자는 사사기 시대의 특징을 한 마디로 이스라엘이 왕이 없었기에 각기 소견대로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삿 21:25). 오늘 이 시대는 마치 사사기 시대와 같다. 온 우주의 왕 되신 하나님을 떠나 자기 방식대로, 자기 소견대로 행하고 있음을 본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교회에 세우신 영적 질서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이러한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축복을 약속하셨다(신 28:1~2). 하나님을 떠났던 렘브란트는 다시 신앙으로 돌아온다. 그의 유작은 ‘돌아온 탕자’다. 탕자는 바로 렘브란트 자신이었던 것이다. 회개하고 돌아온 탕자를 안아주시는 아버지의 얼굴에서 빛이 쏟아져 나온다. 우리의 자화상은 어떤 모습인가? 끝나지 않을 것 같이 기승을 부리던 무더위도 어느덧 조석으로 가을의 향취를 전해온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다. 이 가을 우리 신앙도 무르익고 우리 믿음도 철이 드는 계절이 되길 소망해 본다. “사무엘이 이르되 야훼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 2024.09.27

    임석명 목사(광명성전 담당) - 소유권의 주인과 행사권의 주인
  •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가 있습니다. 영혼이 정신과 육체를 지배하듯이 세상은 영적인 세계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에는 두 주인이 있는데 소유권을 가진 주인과 행사권을 가진 주인입니다. 천지 만유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소유권을 가진 원(原)주인이시라면, 사탄은 일시적으로 행사권을 차지한 임시 주인입니다.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40일 금식하시고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때 사탄은 자기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의 영광을 주리라 유혹하면서,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눅 4:6). 이는 아담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탄의 유혹을 따라 선악과를 먹으므로 말미암아 사탄에게 넘어간 권세이며 공중 권세(엡 2:2) 즉 행사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길 것인가? 사탄을 주인으로 섬길 것인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면 좋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건전하게 되고, 선하게 되며, 온유하게 되고, 지혜롭게 됩니다. 반면 행사권의 유혹에 빠져 사탄을 주인으로 섬기면 악해지며 강퍅해지고, 미련하게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고집, 욕심, 교만 때문에 인격이 망가지고 주변 사람들과 부딪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라 자기가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또 미신을 따라 점쟁이를 찾으며 부적을 붙이고, 귀신에게 제사하며 비싼 돈을 들여 굿을 하고, 조상의 묫자리에 연연하는 것은 사탄의 행사권에 미혹되어서 그렇습니다. 오늘날은 특별히 주인을 잘 선택해야 하는 절실한 시대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사탄에게 미혹되어 있지는 않는지 자신도 모르게 에고이즘에 빠져 있지는 않는지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성도라면 천지 만유를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겨,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삼중축복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시 16:4).
  • 2024.09.13

    장재욱 목사(마포1대교구장) - 성찬 받은 이후 성도의 삶은
  • 여의도순복음교회는 매월 첫 주 성찬식을 거행하고 있다. 어떤 교회는 일년에 성찬식을 한번 할까 말까 하는 교회도 있다. 나는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성찬을 떼면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대하여 감사하는 의미를 되새겨 신앙의 큰 양분을 삼곤 한다. 성찬식 때마다 눈물과 감격으로 성찬을 경건히 대하는 성도들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은 이 땅의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큰 축복이라는 생각을 매번 갖는다. 그런데 성찬식을 마치고 세상에 나간 성도들은 어떤가. 여전히 세상의 영적 도전과 미혹에 노출 된다. 먹고 마신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채 가시기도 전에 세상은 가혹하리만치 거세게 죄와 미혹을 가져오니 말이다. 이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먹고 마신 살과 피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점이다. 예루살렘에서 바리새인들에게 큰 깨우침을 주셨던 그리스도가 성찬을 통해 우리 안에 들어오신 것이다. 성경 고린도전서에서는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반문한다(고전 3:16). 성찬을 통해 성전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성령이 내주하시게 되면 우리 삶에 두 가지 자연스러운 현상이 나타난다. 첫째는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고, 둘째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된다. 세상은 하나님보다 물질과 쾌락을 더 사랑하라고 미혹하지만 성령이 내주하시는 성전 된 사람은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된다. 또 이웃에 대하여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된다. 세상은 이웃보다 너 자신을 더 사랑하라고 하지만 성찬을 통해 성령이 내주하시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증상이 점점 더 강하게 나타나면, 세상으로부터 자연스럽게 ‘구별’ 되어 지는데 이를 ‘거룩’이라 한다. 세상에 여전히 속하지만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이야말로 성찬 후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야 할 우리의 모습이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 2024.09.06

    유성은 목사(남대문성전 담당) - 성령의 임재, 아주사거리 312번지
  • 강력한 성령 운동은 하나님께서 직접 기름 부은 종을 통해 나타납니다. 이와 함께 하나님께서는 그와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그들이 기도하는 장소에 나타나십니다. 초대교회가 시작된 마가 요한의 다락방, 요한 웨슬레가 성령의 불을 받은 페터레인 그리고 한국교회의 길선주 목사와 이기풍 목사를 탄생시킨 평양의 장대현교회가 그런 장소입니다. 세계하나님의성회는 1906년 아주사에서 일어난 강력한 성령 운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교단입니다. 아주사의 부흥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령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아주사 부흥운동이 일어난 당시 LA에는 윌리엄 시무어라는 흑인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방언이 성령의 나타나심의 첫 증거라고 설교했습니다. 시무어 목사의 설교는 기존 교단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었기에, 그는 LA 보니브레 거리의 가정집에서 말씀을 전하게 됐습니다. 그의 뜨거운 설교에 감명한 인파들이 몰려오고 결국 가정집 발코니가 무너지면서 경찰이 출동하게 되고 더는 말씀을 전할 수 없게 됐습니다. 말씀을 전할 장소가 없어진 시무어 목사는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게 됩니다. 이에 오래전 감리교회 건물로 쓰였고 이미 버려져 창고로 쓰고 있던 장소를 발견합니다. 그곳은 로스엔젤레스 아주사거리 312번지입니다. 시무어 목사가 보기에 그 장소는 예배드리기에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문제는 돈이었습니다. 장소를 달라고 매일 같이 기도하는데 어느 날 성령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무조건 전차를 타라. 그리고 파사데나로 가라!” 현재 파사데나는 풀러신학교가 있는 백인이 주로 사는 소도시입니다. 인종 차별이 심하던 당시 파사데나는 흑인이 법적으로 들어갈 수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무조건 주님 음성에 순종한 시무어 목사는 어느 아파트 앞에 서게 됩니다. 저녁 10시30분 경 그는 알지 못하는 집의 문을 두드립니다. 그곳은 방언 기도 때문에 교회에서 쫓겨나 기도 모임을 하고 있는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카니라는 이름의 자매가 문을 열어 주며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물었습니다. 시무어 목사가 “여러분 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지요?”라고 말하자, 모든 자매가 동시에 “네!”라 답합니다. “제가 바로 부흥을 위해 말씀을 전할 하나님이 보낸 사람입니다.” 시무어 목사는 그곳에서 말씀을 전하게 되었고 그들의 정성스러운 헌금을 통해 아주사 거리 312번지를 구하게 됩니다. 그 후 아주사 312번지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강력한 성령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현재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 성도님들에게도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모여 기도할 때, 성령님께서는 반드시 부흥을 주시고 아주사에서 일어난 기적 같은 일을 반드시 행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 2024.08.30

    이성우 목사(여의도순복음동탄교회 담임) - 함께 아파하면 한 몸이다
  • 사사기 8장 1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미디안과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대승하고 잔치를 벌여야 할 때 에브라임 지파는 므낫세 지파에서 뽑힌 기드온 사사에게 항의를 했다.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찜이뇨 하고 크게 다투었다”고 했는데, 크게 다투었다는 것은 강렬한 싸움을 걸어온 것을 말한다.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의 의미는 “우리가 누구인데 우리보다 약한 지파출신이 까불어”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기드온은 이에 대항하지 않고 에브라임 지파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하나님이 전쟁을 승리하게 하신 것이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아야 마땅하다. 에브라임 지파의 불평을 해결하는 사이에 적군의 우두머리 세바와 살문나는 멀리 도망을 갔다. 기드온은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잡으러 요단을 건너고 피곤한 행군을 해야 했다. 숙곳과 브누엘은 기드온의 군대를 돕는 것을 거절했다(삿 8:6). 이들은 갓 지파의 후손들이다. ‘갓’은 군대란 뜻으로 12지파 중 가장 큰 군대처럼 왕성한 지파이다. 그들은 전쟁의 전문가이다. 300명이 적군 1만5000명을 감당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어리석게도 하나님이 기드온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들은 결국 심판받았고 숙곳과 브누엘은 지파 이름조차 성경에 기록하지 않았다. 이런 자들은 이스라엘 지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대인 탈무드에 보면 그런 얘기가 나온다. 머리가 둘 달린 아이가 어느 가정에 태어났다. 랍비에게 찾아가서 이 아이를 호적신고를 해야 하는데 두 아이 이름으로 호적신고를 해야 하는지, 한 아이 이름으로 호적신고를 해야 하는지, 두 아이인지 한 아이인지 물었다. 유대인 랍비가 이렇게 대답을 했다. “산에 가서 딱딱한 박달나무 막대기를 하나 만들어 와서 한 놈의 머리를 딱 때려 봐라. 그래서 둘 다 아야~ 울면 한 놈이고, 한 놈만 울고 한 놈이 웃으면 두 놈이다.” 형제가 아플 때에 나도 함께 아파하면 한 몸이라는 것이다. 너는 울어야 하는데 나는 웃어야 된다면 그것은 형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 몸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 3:26).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형제가 아파할 때 같이 아파하고, 문제를 나의 문제로 생각하며 신앙생활하고 있는지 고민해 보자. 정말 우리는 그러지 못했을 때가 너무나 많았음을 고백한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예수 안에서 만난 성도들이 한 몸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교회안에서는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며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아울러 밖으로는 구제와 선교에 힘쓰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해야 한다.
  • 2024.08.23

    이동규 목사(여의도순복음은계교회 담임) - 그리스도의 자존심
  •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이란 무엇일까요? 구원받은 자녀로서 어떤 부정적인 환경에도 당당하고 기쁘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교회에 잘 다니는 교우 중에서도 평소 건강하고 사업도 잘 되고 직장도 잘 다니고 안정된 것 같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위기가 찾아오면 그렇게 견고했던 자아가 흔들리고 삶의 전체가 무너지는 것을 가끔 보게 됩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사실 누구든지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자아가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특히 잘 믿고 신실하게 신앙생활 했는데도 어려운 현실에 부딪치면 더욱 더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매달립니다. 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예배를 잘 드려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럼에도 응답은 더디고 영적 갈증은 더할 때가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어디가 잘못된 것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확고한 자기 자존심을 갖지 못하니까 흔들리는 것입니다. 성경이 답을 말해줍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에 대해서 자주 자기의 마음을 피력한 사람은 단연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전도했던 갈라디아교회의 성도들이 거짓 선지자들과 이단들의 선동에 동요되어, 바울의 사도성을 부인하며 교회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을 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영적인 어려움과 고통의 위기에 놓였습니다. 그는 이런 위기를 만날 때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새로운 존재만이 존귀한 자이며 예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또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 받은 것은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부터 온 것도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갈 1:1).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사람 앞에서 기죽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 기준에 부합되지 못한다고 해서 자존심이 상할 이유도 없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소중한 존재”라는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자존심이 되고, 우리 몸에 새겨진 예수님의 흔적이 우리의 자존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2024.08.16

    김영석 목사(여의도순복음남구로교회 담임) - 학부모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 일주일에 교회에서 신앙교육으로 보내는 시간은 겨우 2시간 남짓에 불과하다. 일주일이 168시간인데 겨우 2시간만 교회에서 신앙교육을 받고 세상에 나가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처럼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 바로 우리 아이들이 당면한 상황이다. 안타까운 것은 자녀들이 세상에서 보내는 다른 166시간이 철저하게 성경적 가치와 기준을 무너뜨리는 교육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성경적 교육을 교회에만 맡기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그리고 교회학교에서 부모, 교사, 사역자가 함께 노력해야 우리 자녀들을 성경적 세계관으로 잘 키울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교육의 출발은 아이들 교육이 아니라 성인 교육이다. 그리고 교사 교육보다 더 앞서야 할 것이 바로 ‘부모 교육’이다. 그런데 부모가 자녀를 낳아 교회에 오면 자모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예배드리게 되는데, 현실적으로 집중이 불가능하여 있던 믿음마저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서울의 한 교회는 자모실 담당 목사를 두고, 아이들 대상이 아닌 부모 대상으로 설교하며 부모가 믿음을 잃지 않게 하고, 오히려 교회 일꾼으로 성장을 시킨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최근 남구로성전은 여의도순복음남구로교회로 승격해 독립지교회가 되었다. 남구로교회도 다른 일반교회와 마찬가지로 3040 세대들이 부족하고 학부모들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학부모들이 없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숨어 있었다. 그래서 다음세대에게 투자하면서 동시에 학부모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남구로교회는 학부모와 함께하는 유초등부 수련회, 유초등부와 학부모가 함께하는 BBQ 파티, 성경적으로 아이를 키우는 방법 세미나 등을 기획하며 피동적인 학부모들을 이끌어내 교회에 적극적인 일꾼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올바른 기독교 교육관을 가지고 아이들을 믿음의 자녀로 양육하는 것이 우리 부모세대의 사명이다. 이를 위해 먼저 부모들을 말씀과 믿음으로 무장해야 한다. 나아가 성경적 가치관으로 아이들을 양육할 때, 우리 아이들이 골리앗 같은 세상을 이기고 올바른 그리스도의 자녀로 자라나게 될 것이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 2024.08.09

    김태선 목사(여의도순복음목포교회 담임) - 믿음의 선진들을 기억하며
  • 목포는 인천, 부산, 원산항이 개항된 이후 1897년 10월 1일 4번째로 개항된 항구도시이다. 다른 항구도시들과 달리 고종이 직접 칙령서를 내려 만든 도시이다. 고창이나 정읍, 광주처럼 저항과 항전의 도시이다. 지금도 목포 근대역사관에 가면 저항의 모습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또한 기독교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도시이다. 19세기 말 목포가 개항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선교사들이 목포에서 본격적인 전도활동을 하게 되었다. 목포시 호남로에 위치한 양동교회(등록문화재 제114호)는 목포지역 최초의 교회로 호남 선교의 전초기지이자 ‘목포의 3.1운동’으로 불리는 4.8 만세운동의 주축을 형성한 교회이다. 교회당 건물이 지어지기 전인 1897년부터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유진 벨과 윌리엄 레이놀즈가 천막을 치고 20여 명의 성도와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뿌리 깊은 신앙이 있었던 목포는 현재 주변 도시에 비해 개발이 늦어지고 구도심에는 젊은 세대들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일자리를 찾아 광주나 부산, 대전, 서울 등으로 이동하는 자녀 세대들이 많아졌고 이로 인해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을 다음세대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목포는 고난과 핍박 가운데 초대교회 신앙을 지켜왔던 뿌리 깊은 신앙이 있던 곳이다. 더 나아가 순교의 현장에서도 믿음을 지켜내며 복음을 전파하던 곳이다. 초대교회 신앙으로 믿음을 지켜내며 목포의 복음화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믿음의 선조들의 발걸음을 따라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사명을 회복하며 믿음으로 전진할 때이다. 이제 목포를 섬기고 있는 교회들이 앞장서서 지역사회를 품고 약자를 돌보며 예수님의 사랑을 전할 때 믿음의 도시라는 명맥이 유지되고 목포를 넘어 호남지역까지 모두 아우르게 될 것이다. 여의도순복음목포교회는 올해 창립 20주년을 맞이해 신앙의 걸음을 이어가며 복음 전파에 앞장설 것이다. 또한 순복음의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4차원의 영성과 절대 긍정, 절대 감사로 교회 부흥과 다음세대 성장을 위해 사명을 감당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지역사회를 품고 섬기는 교회로 기도하며 나아갈 것이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 2024.08.02

    이대현 목사(순복음창원교회 담임) - 날마다 환승
  •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으로 가는 중이었다. 호기롭게 수행원을 거느리고 마치 마패를 쥐고 가는 암행어사처럼 당당하게 예수 믿는 사람들을 포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할 심산이었다. 중동의 한 낮 뜨거운 햇빛보다 더 밝은 광채를 보고 눈이 멀고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눈이 멀었다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던 신관과 신앙, 믿음의 개념이 무용지물의 암흑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말에서 떨어졌다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옳으며 지금 가는 길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기에 정당하고 타협 할 수 없는 진리라고 생각한 교만의 자리에서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야말로 환승을 경험한 것이다. 환승은 한자로 ‘바꿀 환(換) 올라탈 승(乘)’이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무지한 열심에서 절대 진리의 길로 바꾸어 탔다는 말이다. 지하철을 이용할 때 환승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가고자 하는 최종 목적지 때문에 갈아타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환승을 의미한다. 내가 믿고 추구하던 것들이 예수님과 복음 앞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고 내 열심과 내 의(義), 내 기준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갈아타는 것이다. 때로 앞이 안 보이는 절망과 말에서 떨어지는 충격과 아픔, 공포를 경험하기도 한다. 인간은 질병과 고난, 한계와 죽음 앞에서 환승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경은 아픔과 고난이 유익이라고 한다. 환승할 때 곧바로 교통편이 연결되면 왠지 기분이 좋다. 반면 지구반대편에서 한국으로 오는 선교사님들의 경우 환승 공항에서 12시간 넘게 기다릴 경우 공항 근처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되는 번거로움도 있다.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서 환승역이나 공항에서 계속해서 살지는 않는다. 천국을 향한 과정일 뿐이기 때문이다. 목적지가 분명하기에 잠깐의 수고는 너끈히 감수한다. 바울은 환승경험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사도행전에만 세 번이 나온다. 9장, 22장, 26장에서 유대인과 대제사장들 아그립바 왕 앞에서 당당하게 갈아타라고 요청한다. 이 땅에서 육의 한계와 죄성을 가진 우리들에게 구원의 환승 후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환승은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진리를 거스르는 육과 혼의 본성을 깨뜨리라고 순종, 복종, 피 흘리기까지 싸워 환승하라고 요청한다. 말씀과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맡기며 천국을 향해 우선순위, 시간, 만남, 순간의 환승을 날마다 결단하고 선택해야 될 이유다.
  • 2024.07.26

     안태경 목사(여의도순복음청주교회 담임) - 아무튼, 믿음
  • ‘아무튼’의 이름으로 나온 책들이 제법 많다. 아무튼 메모, 아무튼 게임, 아무튼 떡볶이, 아무튼 산, 아무튼 드럼, 아무튼 여름, 아무튼 망원동, 아무튼 피트니스, 아무튼 영양제 등등. ‘아무튼 시리즈’는 관찰과 집중에 따른 저자의 성장 일기이다. 어느 하나만 파고드는 사랑과 깊이가 감동이다. 평범한 일상에서 놀라운 세심함과 공감력이 돋보인다. ‘아무튼’은 믿음. 늘 보는 성경이고 늘 드리는 기도지만 늘 데면데면. 뭔가 더 있다 싶지만 애통함이 없으니 깊이가 없고, 믿음이 없으니 할 말도 쓸 말도 별로 없다. 귀한 보화 같은 것이 옆에, 가까이 있지만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 도움 받을 능력이 지금 여기 있어도 알지 못하고 알아도 믿지 못한다. 아무튼,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게 산다. 그래서 엄한 곳만 보다가 내게 가까이 있는 도움을 놓쳐버린다. 최악은 그런 어리석음이 꾸준히 반복된다는 점이다. 어리석은 자는 이루지 못한다. 어리석음을 피하려면 아무튼, 믿음. 일상에서 탁월함이 나타나지 않아도 꾸준한 집중과 관찰을 통해 어느 순간 변화를 만들어내는 통찰이 일어난다. 길이 솟아나고 땅과 하늘이 말하고 생각이 금빛처럼 떠오른다. 놋문을 쳐서 부수고 쇠빗장을 꺾고 그 안에 있는 보화와 재물(사 45:2, 3)을 얻게 된다. 지혜의 영이 충만하면 순종(신 34:9)한다. 믿음이 있으니 싸워도 이기고 뭘 해도 잘되고 존귀해진다. 존귀한 자는 계획도 존귀하고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사 32:8) 하신다. 아무튼, 믿음. 삶에 대한 사랑을 끌어내고 소소한 만남에서 인생의 깊이를 깨닫는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신앙의 힘을 깨닫고 신앙의 능력에 이르는 길은 무엇일까? ‘아무튼 시리즈’가 관찰, 사랑, 믿음, 그리고 집중에 있다면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열심(사 37:32)에서 그 답을 찾는다. 우리의 사랑과 행복 그리고 다시 일어서는 힘과 능력은 ‘하나님의 열심’에 달렸다. 아무튼, 믿음이다.
  • 2024.07.19

    임지택 목사(천안순복음소망교회 담임) - 간절함을 가지고 살자
  •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야구 예능 TV프로그램 ‘최강야구’가 있다. 야신이라 불리는 80세가 넘은 김성근 감독이 이끄는 팀에 유독 이 노장 감독에게 이쁨을 받으려고 프로야구에서 유명했던 은퇴한 선수들이 많은 노력을 하는 걸 보며 웃을 때가 있다. 이 팀에는 아마추어 선수들도 함께 뛰고 있는데, 이 팀에서 뛰었던 아마추어 선수들이 프로야구에 지명을 받아 최근 프로야구 선수로 맹활약을 하고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그 선수들이 운동하는 것을 말할 때 ‘간절야구’라는 말을 한다. 대표적인 예가 한화 이글스에서 지금 주전으로 맹활약을 펼치고 있는 황영묵 선수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선수는 고등학교 졸업 당시 프로야구 어느 팀에도 지명을 받지 못했다. 야구를 할 수 없으니 아르바이트 배달원과 독립 야구단을 거쳐 야구 예능 프로그램인 ‘최강야구’에서 뒤늦게 실력을 인정받아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프로야구팀에 입단까지 할 수 있었다. 프로무대에서 뛰고 싶어 했던 간절함 때문이었는지 매일매일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해 기대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으니 소속 팀에서도 인정을 받고 팬들이 응원가를 만들어줄 만큼 사랑 받고 있다. 현재는 팀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활약을 하고 있다. 그런데 최강야구에서 황영묵 선수를 지도했던 김성근 감독이 말한 게 화제가 되었다. “안된다고 포기하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된다. 하지만 된다 된다 된다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사람이 방법을 찾고 성공할 수 있다.” 믿음을 가진 우리들이 깨닫는 것은 무엇일까? 세상을 대충 살아선 빛을 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연약하고 부족한 게 많은 우리들이지만 세상에서 도움 받을 생각하지 말고, 사람 의지하지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하여 반드시 응답받겠다는 절대 긍정의 믿음으로 우리는 간절히 기도하며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시며 누가 보아도 절망적인 상황을 희망으로 변하게 하신다. 간절함을 가지고 시합에서 매 순간 최선을 다해 꿈을 이루고 있는 야구선수처럼 절대 긍정의 믿음으로 사는 신앙인은 다만 응답의 시기가 좀 이르거나 늦어지는 차이가 있을 뿐 반드시 빛을 보는 날이 있음을 기억하자. 간절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순복음의 성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이다.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들의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사 3:10).
  • 2024.07.12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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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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