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최진용 목사(강서1대교구장) - 잠시 멈출 줄 아는 사람이 사람을 얻습니다
  • 강물은 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바다에 이르고 깊은 숲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도 생명을 품습니다. 사람의 말도 그렇습니다. 때로는 많은 말보다 잠시 멈추는 침묵이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말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말이 많아질수록 관계가 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가까운 사람일수록 상처를 주고받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가장 깊은 아픔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돌이켜 보면 관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거창한 사건이 아닙니다. 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내뱉은 한마디,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한 성급함, 이해하기보다 먼저 반응하려는 마음이 서로의 마음에 작은 균열을 만들곤 합니다. 제퍼슨 피셔의 『잠시 멈춤』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대화의 목적은 상대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문제를 풀어가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논쟁에서 이길 수는 있어도 사람을 잃을 수 있습니다. 내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있어도 상대의 마음까지 얻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대화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라 연결입니다. 야고보서 1장 19절에 말씀합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하나님께서는 먼저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즉시 반응하기보다 잠시 멈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짧은 침묵 속에서 분노는 가라앉고 상처는 이해로 바뀌며 닫혔던 마음은 다시 열리기 시작합니다. 목회의 길을 걸으며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말했는가보다 어떤 마음으로 말했는가를 더 오래 기억합니다. 논리보다 사랑을 기억하고, 정답보다 진심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진리는 사랑이라는 옷을 입을 때 비로소 사람의 마음에 스며듭니다. 예수님은 넘어지고 실패한 사람들을 정죄하기보다 다시 일으켜 세우셨고, 상처 입은 영혼들을 긍휼로 품어 주셨습니다. 주님의 권위는 큰 목소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랑과 진실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목소리가 아닙니다. 더 날카로운 논쟁도 아닙니다. 잠시 멈추어 상대의 말을 들어 줄 수 있는 마음,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성숙함, 그리고 사람을 이기기보다 사람을 얻으려는 사랑입니다. 말은 칼이 될 수도 있고 씨앗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급한 한마디는 평생의 상처를 남기지만 사랑으로 건네는 한마디는 메마른 마음에 새로운 희망을 심어 줍니다. 그러므로 기억해야 합니다. 대화의 목적은 승리가 아닙니다. 사람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얻는 길은 언제나, 잠시 멈추어 사랑을 선택하는 그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 2026.06.26

    윤호근 목사(은평대교구장) - 화목, 행복의 다른 이름
  • 1938년에 시작된 미국 하버드 의대의 ‘성인 발달 연구’는 인간의 행복과 건강의 비결을 밝히기 위한 세계 최장기 연구 가운데 하나이다. 연구진은 하버드 대학생들과 보스턴 빈민가 청소년들, 총 724명의 삶을 수십 년 동안 추적하며 관찰했다. 그 결과 행복하고 건강한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재산이나 명예, 학벌이 아니라 ‘좋은 관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50세 무렵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 만족한 사람들이 80세에 가장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성경은 예수님을 ‘화목제물’이라고 증언한다(롬 3:25). 여기서 ‘화목제물’로 번역된 헬라어 ‘힐라스테리온’은 구약의 속죄소, 곧 법궤 위의 ‘시은좌’(법궤의 뚜껑)를 의미하기도 한다.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소 위에 어린양의 피를 뿌려 이스라엘의 죄를 사함 받았던 것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친히 피 흘려주심으로 우리의 죄를 속량하셨다. 그 보혈의 공로로 원수 되었던 우리와 하나님 사이가 ‘화목’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본질은 단순한 종교적인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를 씻고 의롭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얻는 것,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행복한 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영혼과 육체, 그리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는 ‘샬롬(Shalom)’의 복을 받게 된다. 오늘 우리의 시대는 풍요 속에서도 외로움이 깊어지고 있다. 가족 안에서도 대화가 단절되고 교회 안에서도 상처와 오해가 생긴다. 사회는 갈등과 분열로 점점 메말라가고 있다. 이런 시대 속에서 하나님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맡기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은 이제 화해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 상처보다는 사랑을 선택하고 미움보다 용서를 선택하며 정죄보다 회복을 선택해야 한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하나님과 화목할 때, 그리고 사람과 화목할 때 참된 행복이 시작된다.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고후 5:18).
  • 2026.06.19

    이상영 목사(마포1대교구장) - 마라톤처럼 달리는 우리의 믿음
  • 요즘 거리 곳곳에서 달리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마라톤이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마라톤은 특별한 장비 없이도 누구나 시작할 수 있고, 혼자서 또 여럿이 함께해도 즐길 수 있는 운동입니다. 무엇보다 마라톤은 다른 사람과의 경쟁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완주를 향해 묵묵히 한 걸음씩 내딛는 그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건강을 얻고 성취감을 맛보며 삶의 활력을 되찾습니다. 그런데 마라톤을 즐기다 보면 우리의 신앙생활과 놀랍도록 닮아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바울은 신앙의 여정을 달리기에 비유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달리라고 권면합니다. 마라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페이스’입니다. 처음부터 전력 질주하다가는 결승선에 닿기도 전에 쓰러지고 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뜨거운 열정만으로 달려가다 지쳐 넘어지는 것보다 꾸준하고 일정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더욱 귀합니다. 예배, 기도, 말씀 묵상의 리듬을 지키며 매일의 삶 속에서 믿음을 쌓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의 페이스입니다. 또한 마라톤은 혼자 달리지만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마라톤 경기에 참여하게 되면 곳곳에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고 함께 뛰는 동료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각자의 신앙 여정을 걸어가지만 우리는 한 몸 된 지체로서 서로를 격려하고 붙들어 줍니다. 지치고 힘들 때 옆에서 함께 달려주는 성도의 존재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멈추지 않는 마라톤입니다. 때로는 오르막이 있고 때로는 발이 무거운 날도 있겠지만 결승선 너머에서 기다리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오늘도 한 걸음씩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신앙의 마라톤에서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페이스를 잃지 마십시오. 그리고 함께 달리는 지체들을 응원하십시오. 우리 모두 신앙의 마라톤을 완주하는 그날까지 은혜 안에서 끝까지 달려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2026.06.12

    김현동 목사(마포2대교구장) - 호국 보훈의 달, 감사를 알아야 합니다
  • 군생활 시절 전남 장성에 있는 육군 상무대 포병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 상무대 안에는 각종 병과학교들이 있는데 포병학교를 비롯하여 보병학교, 기계화학교, 화생방학교, 공병학교가 있어서 군사 교육을 담당한다. 각 학교는 특성에 맞게 구호를 외치는데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구호에 담은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이를테면 보병은 ‘나를 따르라’이고 공병은 ‘시작과 끝은 우리가!’, 화생방학교는 ‘알아야 산다’는 구호를 갖고 있다. 보병은 리더가 솔선수범, 진두지휘해야 한다는 의미이고, 공병은 전장의 길을 트고 이후 뒷마무리를 지어야 하며, 화생방은 생존 지식을 갖추어야만 살 수 있다는 강조점을 구호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내가 교육을 받게 된 포병학교의 구호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알아야 한다!’ 다른 병과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포병은 특히나 많은 것을 배우고 알아야 한다. 포 한 발이 발사되기까지 4개 분야(관측/전포/사격지휘/측지 및 통신)가 통합적으로 긴밀하게 움직여야 한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적을 타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에 포(包) 사격이 이루어지려면 포탄이 떨어지는 곳에 대한 관측, 포탄을 발사하는 곳의 전포대 운영, 포탄을 사격하기 위해 제원을 계산하는 사격지휘소, 측지 및 통신 운영에 대한 정확한 지식 및 계산 없이는 발사 자체가 불가능하다. 실제로 포탄을 쏘기만 했던 사람은 나중에 포탄이 낙하하는 지점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본인이 쏜 ‘포탄이 이렇게 떨어지는구나’하고 놀라게 된다. 6월은 호국 보훈의 달이다. 현충일을 비롯하여 나라 사랑에 대해 각자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피흘렸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하는 시간이다. 6·25 한국 전쟁만 보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피흘렸다. 국군은 13만여 명이 전사했고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참전 16개국 군인들은 4만여 명이 전사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는 결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며 이를 위해 죽은 밀알(요 12:24)의 사명을 다한 사람들 때문에 보존되었음을 알고 감사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들을 희생을 통하여 이 나라를 지켜주셨음을 반드시 알고 감사해야 한다. 호국 보훈의 달,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을 알고 각자의 자리에서 마땅히 감사할 것에 감사했는가? 이 시간 이후 이러한 구호를 마음에 새기며 뜻 깊은 6월이 되기를 소망한다.
  • 2026.06.05

    차진호 목사(교회개척국 담당) - 개척교회를 위해 중보기도하자 
  •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지금까지 576개의 교회를 개척하고 수많은 곳을 지원하며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이어오고 있다. 최근 열린 제23회 ‘교회 개척의 날’ 행사는 지치고 낙심하기 쉬운 개척교회 목회자들이 뜨거운 기도와 성령 충만한 예배를 통해 위로와 재충전을 얻는 은혜의 자리가 됐다. 사실 개척교회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재정적인 어려움, 성도 정착의 한계,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등 수많은 파도가 목회 현장을 엄습한다. 그러나 그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개척교회 목회자들이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 ‘십자가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대형교회의 든든함도 필요하지만 지역 사회 구석구석에서 상처 입은 영혼들을 가장 가까이서 돌보는 모세혈관과 같은 존재가 바로 개척교회다. 이들이 무너지면 한국 교회의 영적 생태계가 무너지고, 이웃들의 영혼을 치유할 치료소마저 사라지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 이 땅의 개척교회들을 위해 눈물로 무릎을 꿇어야 한다. 기도는 가장 강력한 후원이자 영적 동역이다. 우리의 중보기도를 통해 외롭게 영적 전투를 벌이고 있는 개척교회 목회자들에게 하늘의 위로와 새 힘이 공급될 것이다. 오늘 하루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복음의 현장을 지키고 있는 개척교회들을 기억하며 이렇게 함께 기도하기를 원한다. 첫째, 모든 개척교회 목회자들에게 엘리야에게 주셨던 성령의 권능과 갑절의 영감을 더하여 주옵소서. 지친 몸과 마음을 십자가의 능력으로 치유하여 주시고, 끝까지 사명의 길을 걸어갈 영육의 강건함을 주옵소서. 둘째, 개척교회가 지역 사회 속에서 ‘마음의 병을 고치는 영적 병원’이 되게 하옵소서. 낙심한 자, 상처받은 자들이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만나 영혼의 자유함을 얻게 하옵소서. 셋째, 필요한 재정과 동역자를 붙여주셔서 물질과 사람으로 인해 복음 전파의 길이 막히지 않게 하시고,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통해 가정과 교회가 회복되는 부흥의 주인공들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이 핏값으로 사신 개척교회들이 십자가의 능력으로 든든히 서 갈 때, 우리 사회의 어둠은 물러가고 생명의 역사가 들불처럼 일어날 것이다. 이 거룩한 부흥의 여정에 중보기도의 등불을 밝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2026.05.29

    정용훈 목사(선교국 담당) - 선교사의 밤은 길다
  • 선교지에서 맞이하는 밤은 유난히 더 길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낮에는 사역으로 분주하게 시간을 보냅니다. 사람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고 현지의 필요를 채우며 하루를 쉼 없이 달려갑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모든 소리가 잦아들고 낮 동안 애써 묻어두었던 마음 깊은 곳의 생각들이 조용히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낯선 언어와 문화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 쉽게 이해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받은 상처, 홀로 감당해야 하는 사역의 무게들…. 그 시간은 결국 하나님 앞에 홀로 서게 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그런 밤마다 하나님께 수없이 같은 기도를 올려 드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주님, 지금도 저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제 마음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시 139:2~3). 칠흑 같이 짙고 어두운 밤 기도할 때마다 이 구절을 통해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선교지 위에 있다고 하신 말씀이 귀에 생생합니다. 하나님은 선교사의 앉음과 일어섬뿐 아니라 긴 밤 뒤척이는 시간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낯선 땅에서 느끼는 외로움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사역의 무게도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숨겨진 것이 없습니다. 한 선교사님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사역 초기 언어도 서툴고 관계도 쉽지 않아 마음이 많이 지쳐 있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성전에 홀로 앉아 십자가만 바라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평소 연락이 뜸하던 한 성도에게서 짧은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오늘 기도하다가 선교사님이 생각났습니다. 주님이 지금도 선교사님과 함께 계십니다. 선교사님, 힘내세요.” 짧은 한 문장이었지만 그 메시지가 그날 밤을 버틸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도 알지 못했던 그 시간, 그러나 하나님은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위로를 보내주셨습니다. 그 긴 밤 선교사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친히 흘려보내시는 위로의 통로입니다. 성도님들이 선교사님의 이름을 불러 기도할 때, 그 기도는 낯선 땅의 긴 밤을 밝히는 작은 빛이 됩니다. 하나님은 선교사의 낮뿐 아니라 그들의 밤도 아십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 교회 성도님들의 기도를 통해 선교사들을 위로하십니다. 다가오는 제52회 순복음세계선교대회를 앞두고 오늘 문득 마음에 떠오르는 선교사님이 있으십니까? 그 이름 을 불러 한 번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짧은 한 줄의 메시지를 보내보십시오. 그 기도와 그 한마디가 누군가의 긴 밤을 지켜주는 하나님의 작은 빛이 될 것입니다.
  • 2026.05.22

    엄태욱 부목사(목회 담당) - 교회창립 68주년을 맞이하며
  • 우리 교회가 창립 68주년을 맞이했습니다. 대조동 천막에서 시작해 세계적인 교회로 성장하기까지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선포하신 희망의 복음과 눈물로 제단을 지킨 성도님들 덕분에 교회가 든든히 섰습니다. 68년 세월에 담긴 모든 분들의 거룩한 수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역사를 기억하며 순복음의 영적 유산을 굳건히 계승해야 합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향한 신뢰,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순복음(Full Gospel) 신앙, 오순절 성령 충만의 역사는 우리가 지켜야 할 귀한 정체성입니다. 이러한 신앙을 과거에만 남겨두지 않고, 오늘 삶의 현장에서도 경험하고 나타낼 것입니다. 또한 우리 교회는 이영훈 담임목사님의 리더십 아래 순복음의 신앙을 더욱 단단하고 깊이 있게 다져가고 있습니다. 특히 목사님이 강조하시는 어떠한 고난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 긍정과 절대 감사의 믿음이 중요합니다. 이 믿음은 단순한 낙관이 아닙니다. 십자가 은혜와 성령의 능력을 신뢰하기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먼저 고백하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이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의 신앙은 삶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세계 곳곳의 전쟁과 분쟁, 유가 상승 같은 경제 위기, 극심하게 분열된 사회 현실이 성도님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어둠이 짙을수록 교회는 더욱 선명한 빛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교회는 절대 긍정과 절대 감사의 믿음으로 세상 앞에 서서 흔들리는 이웃에게 주님의 사랑과 소망을 전할 것입니다. 이제 다가올 70주년을 향해 거룩한 꿈과 소망을 품고 전진합시다. 부흥은 환경이 완벽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무르익을 때 찾아옵니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놀라운 응답과 양적 성장을 사모하면서도 우리의 갈망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영적 성숙으로 깊어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위기 앞에서도 감사와 순종으로 반응하며 예수님을 닮아갈 때 우리 교회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그릇으로 빚어져 다가올 70주년에 예비 된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오롯이 담아내게 될 것입니다. 저를 비롯한 모든 부교역자들 역시 담임목사님의 목회 비전을 최선을 다해 뒷받침하며 성도님들을 사랑으로 섬기겠습니다. 모든 성도님의 가정과 일터 위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평강이 늘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68년 전 아무것도 없는 천막 위에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 2026.05.15

    이성준 목사(교회학교 담당) - 하나님 나라 놀이터
  • 얼마 전 교회학교 건물 복도에서 한 아이를 만났습니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혼자 복도 끝에 서서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왜 여기 서 있어?”라고 물었더니 아이는 잠시 망설이다 조용히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오늘 제 이름을 불러줬어요. 그런데 그게 너무 기분이 좋아서요~” 그게 전부였습니다. 이름 하나가 그 아이에게는 그토록 특별한 하루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제자들은 아이들을 예수께 데려오는 부모들을 꾸짖었습니다. 예수님의 바쁜 사역 일정을 어린아이가 빼앗을 수 없다는 당시의 사회적 통념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아이는 아직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 10:14). 그리고 아이들을 안아 올리셨습니다. 헬라어 원어로 ‘엔아그칼리사메노스’, 즉 두 팔로 꼭 껴안으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제스처가 아니었습니다. 사회의 변두리에 있던 아이들을 하나님 나라의 중심으로 불러오신 혁명적 선언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교회를 향한 오늘의 명령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이 아이들을 품에 안으셨다면 교회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도 바로 그것입니다. 아이들이 성전의 문을 열고 들어올 때 가장 환한 얼굴로 맞이하는 곳, 이름을 불러주고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곳, 그 아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반복해서 들려주는 곳, 그 곳이 바로 교회이고 성전입니다. 시편 기자는 노래합니다. “보라 자식들은 야훼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 127:3). ‘기업’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탁하신 거룩한 유산입니다. 그 유산을 받아 돌보고 다음 세대에 신앙을 전수하는 것은 교회학교만의 사명이 아닙니다. 온 교회 공동체가 함께 짊어져야 할 거룩한 책임입니다. 우리 교회는 올해도 ‘하나님 나라 놀이터’라는 주제로 5일 교회학교의 날을 정성껏 준비했습니다. 어린이들을 위한 이벤트의 날이 아닙니다. 교회가 다음 세대를 얼마나 진지하게 품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날입니다. 복도에서 홀로 서 있던 그 아이처럼, 오늘도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기를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교회는 놀이터를 만들어 줘야 합니다. 그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주십시오. 예수님처럼 안아 올려 주십시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교회를 가장 아름답게 채우는 찬양임을 기억하며, 우리 모두가 그 찬양의 공간을 ‘하나님 나라 놀이터’로 만들어내고 지켜내길 소망합니다.
  • 2026.05.01

    김나리 목사(전도새가족부 선임) - 엠비스찬
  • 엠비스찬은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와 Christian의 합성어로 MBTI의 결과를 맹목적으로 신뢰하며 종교처럼 믿는 사람들을 부르는 신조어입니다. 최근에는 어딜가나 “MBTI가 어떻게 되세요?”라는 질문이 인사처럼 쓰이고 회사가 인력을 채용할 때 참고할 정도로 입지가 상당합니다. 과거 혈액형이나 별자리로 사람을 분류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MBTI가 하나의 문화 코드로 자리를 잡고 ‘독실한 엠비스찬’이라는 말이 만들어질 정도로 자신의 유형에 깊이 몰입하여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대변한다고 생각하는 모습도 종종 보입니다. MBTI는 칼 융의 심리유형론을 바탕으로 사람의 성격유형을 16가지로 분류하는 성격분석 도구로서 각자의 고유한 성향을 이해하고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는 데는 유용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몇 가지 성찰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독특한 존재’로서 단 16가지의 유형으로 단순화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MBTI가 자신을 규정하는 절대적 잣대가 된다면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정체성은 희미해지며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향해 계획하신 독특한 소명과 사명을 간과하게 됩니다. 둘째, 교회 공동체는 서로 다른 은사와 성품이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지체가 됩니다. MBTI로 서로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것은 좋으나 차별하는 도구가 되어선 안됩니다. 오히려 각자의 독특함을 존중하며, 서로를 섬기는 도구로 사용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셋째, 우리 모두는 어떠한 인간 이해 방식에 앞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피조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MBTI 유형에 갇히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고 성장해 나가는 여정 중임을 되새기며 그 여정을 서로 격려하는 공동체가 되어 가길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MBTI는 무엇일까? 라는 재미있는 상상을 해 본다면 예수님의 MBTI는 ‘L.O.V.E’가 아니실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소망하는 우리의 MBTI역시 ‘L.O.V.E’아닐까요? 앞으로 우리의 MBTI는 ‘LOVE’입니다.
  • 2026.04.24

    신의규 목사(강서2대교구장) - “나 혼자 못 산다”
  • “나 혼자 산다”는 독신 남녀와 1인 가정이 늘어나는 세태를 반영해 혼자 사는 유명인들의 일상을 담은 예능 프로그램입니다. 13년 전 시작된 이 프로그램이 장수하며 인기를 끄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TV 속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곁의 보편적인 풍경이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퇴근길에 사 오시던 ‘투게더(Together)’ 아이스크림을 기억하십니까? 그 이름처럼 온 가족이 둘러앉아 커다란 통에 숟가락을 맞대며 나누어 먹던 그 시절 가장 값비싼 간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스크림이 10년 전 1인용 프리미엄 제품인 ‘시그니처 싱글컵’을 출시했습니다. 참 아이러니합니다. 이름의 뜻은 “함께”인데, 정작 제품은 “혼자” 먹도록 나온 것입니다. 이 모습은 오늘날 우리 시대를 그대로 투영합니다. 구호는 여전히 ‘함께’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함께함의 불편함을 견디지 못해 자발적 고립을 선택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실제로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 1인 가구 비율은 2026년 현재 36%를 넘어섰습니다. 세 가구 중 한 가구 이상이 홀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혼자 밥을 먹고(혼밥), 혼자 영화를 보는 문화는 이제 ‘당당한 취향’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고독사와 우울증 지수는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나 혼자 못 산다”에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서 홀로 서야 하는 존재입니다. 구원은 일대일의 관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실 때부터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창 2: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독립된 개별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한 몸의 지체’로 부르셨습니다. 신앙은 홀로 골방에서 도를 닦는 수행이 아니라 때로는 나와 다른 지체들과의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며 사랑의 넓이를 넓혀가는 과정입니다. “함께”라는 단어가 싱글컵에 담기는 시대 속에서 교회는 여전히 커다란 아이스크림 통을 나누어 들고 서로의 숟가락이 부딪히는 소리를 기쁨으로 여겨야 합니다. 세상이 ‘혼자서도 충분하다’고 속삭일 때 우리는 겸손히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는 못 삽니다. 그리고 형제 자매인 당신 없이는 나 혼자 못 삽니다.” 성령의 띠로 하나 되게 하신 공동체 안에서 혼자가 아닌 ‘함께함’의 행복과 은혜, 그리고 능력을 회복하는 4월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2026.04.17

    변원중 목사(서대문대교구장) - 봄의 속도와 부활의 은혜
  • 몇 해 전 일간지에 실린 한 기사가 떠오릅니다. 봄이 북상해 오는 ‘속도’를 측정한다는 흥미로운 내용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각 지역의 민간 관측자들이 개나리, 진달래, 벚꽃과 같은 봄꽃의 개화 시기를 기록해 제보하고, 기상청은 그 자료를 종합하여 봄이 얼마나 빠르게 찾아오는지를 수치로 분석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계절의 흐름조차도 이렇게 기록되고 예측될 수 있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교회의 봄은 사순절과 함께 시작됩니다. 부활절은 춘분 이후 첫 만월 다음 주일로 정해지기에, 사순절의 시작은 곧 봄이 가까이 왔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특히 ‘재의 수요일’로 시작되는 사순절의 40일은 주일을 제외하고 거슬러 올라가며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빠르게 지나가는 봄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부활절을 보냈습니다. 이처럼 여의도의 봄은 특별한 풍경을 만들어냅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주변에서는 매년 여의도 벚꽃축제가 열려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모여듭니다. 화사하게 만개한 벚꽃 아래에서 사람들은 봄의 정취를 만끽하고 거리에는 웃음과 활기가 넘칩니다. 동시에 교회 안에서는 영광과 승리의 부활절을 보내는 성도들의 발걸음으로 분주합니다. 이렇듯 여의도의 봄에는 두 가지 모습이 공존합니다. 한편에서는 짧게 피었다가 지는 꽃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하는 믿음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봄은 얼어붙은 대지를 녹이고 새로운 생명을 움트게 하는 소생의 계절입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의 봄은 단순한 계절의 변화를 넘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새 생명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잠시 피었다 사라지는 꽃의 아름다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부활의 계절인 봄을 맞이하며 우리 역시 새 생명 가운데 살아가는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야 합니다. 이번 봄, 눈에 보이는 꽃의 아름다움을 넘어 부활의 기쁨을 깊이 누리며 그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참된 부활의 계절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2026.04.10

    강신호 목사(일산순복음영산교회 담임) - 부활의 온도
  • 하나님께서 살아계실 확률은 얼마나 될까?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니 50% 정도”라고 답한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다. 동전에는 앞면과 뒷면이라는 고정된 상수(常數)가 있고, 어느 면이 나올지는 50%의 확률로 결정된다. 하나님의 존재는 동전 던지기와 다르다.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것이지, 있는 것도 맞고 없는 것도 맞다는 전제는 결코 성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존재할 확률은 100% 아니면 0%, 오직 둘 중 하나다. 일기예보에서 “오늘 기온은 영하 1℃이지만, 강풍으로 체감온도는 영하 5℃”라고 할 때, 체감온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체력이 약한 사람은 영하 10℃로 느낄 수 있고 건강한 사람은 영상 5℃로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날의 실제 기온은 정확하게 영하 1℃일뿐이다. 온도계는 사람의 감각과 무관하게 객관적 수치를 가리킨다. 신앙도 그러하다. 좋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90% 계신 것 같다”고 말하고, 어려운 일이 겹치면 “50%도 안 되는 것 같다”고 말하는 성도들이 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존재를 재는 온도계가 있다면, 그 바늘은 형편이 좋든 나쁘든 흔들림 없이 100%를 가리킬 뿐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의 감정과 처지에 따라 오르내리는 체감온도가 아니다. 하나님이 100% 존재하신다면 그분 앞에서는 간음과 동성애와 낙태뿐 아니라, 음욕을 품는 것과 형제를 미워하는 것, 세상의 불의 앞에 침묵하는 것까지 모두 죄가 된다. 반대로 하나님이 0%라면, 무슨 짓을 해도 죄가 없다. 바로 이 경계선이 이 세대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구분한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100%요 독생자를 보내어 우리 죄를 십자가에서 사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사실이 100%라면 우리의 삶도 달라야 한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어두워도 부활의 온도계가 가리키는 천국의 온기를 이 땅에서 몸소 드러내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부활을 믿는 사람의 마땅한 삶이 아니겠는가?
  • 2026.04.03

    안현주 목사(동작대교구장) - 가장 화려한 입성, 가장 고독한 순종
  • 2026년의 봄, 우리는 인공지능이 일상이 되고 초개인화된 알고리즘이 우리의 취향과 선택을 설계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손안의 스마트폰은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을 보여주며 대중의 ‘좋아요’와 실시간 트렌드는 곧 그 시대의 정의이자 가치가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맞이하는 종려주일은 우리에게 예루살렘 입성의 화려한 ‘트렌드’ 이면에 숨겨진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금 묻게 합니다. 2000년 전 예루살렘의 거리도 오늘날의 사회관계망(SNS)만큼이나 뜨거웠습니다.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실 때, 군중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했습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막 11:9). 그들의 환호는 당시 유대 사회의 가장 뜨거운 ‘실시간 검색어’였으며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줄 강력한 메시야를 향한 집단적 열망의 투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열광적인 트렌드는 불과 며칠을 가지 못했습니다. 군중이 원했던 ‘정치적 해방자’가 아니라 고난받는 ‘인류의 구주’로서 십자가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행보는 대중의 기대라는 알고리즘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니즈(Needs)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메시야를 향해 군중은 순식간에 등을 돌렸고, “호산나”라는 찬양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분노의 함성으로 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군중을 낯선 눈으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때 실망하고, 내 기대를 벗어날 때 등을 돌리는 것, 그것은 2000년 전 예루살렘 군중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그렇기에 종려주일은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나의 실제적인 이야기입니다. 종려주일은 단순히 예수님의 입성을 축하하는 날이 아닙니다. 군중의 변덕스러운 환호 속에 감춰진 고독한 순종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박수 소리에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소리 너머에서 들려오는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종려주일을 맞아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세상의 소음을 잠시 끄고, 나귀를 타신 주님의 겸손한 뒷모습을 바라봅시다. 화려한 종려나무 가지 아래 가려진 거친 십자가의 길, 그 길 끝에 진정한 생명이 있음을 기억하며 고난 주간의 문을 열어야 할 때입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호산나’를 외치며 나에게 유익을 줄 메시야를 소비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온전히 주님의 길을 따르고 있는가.
  • 2026.03.27

    권성민 목사(반석대교구장) - 왕과 사는 남자
  • 얼마 전 가족과 함께 영화 한 편을 보았다. 계유정난으로 왕위를 빼앗긴 열두 살의 어린 왕 단종 이홍위가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고, 그 유배지를 지키는 촌장 엄흥도와 함께 짧고도 애절한 마지막 나날을 보내는 <왕과 사는 남자>라는 영화이다. 엄흥도는 처음부터 왕과 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가난한 자신의 마을에 유배지를 유치하면 먹고살 수 있을 것이라는 인간적인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유배되어 온 사람은 왕위에서 쫓겨난 어린 소년이었다. 그는 이홍위를 감시해야 할 죄인으로 대해야 했지만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채 유배되어 온 아이가 점점 마음에 걸렸다. 그렇게 엄흥도는 어느 순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왕을 위해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영화를 본 후 성도의 삶을 생각해 보았다. 성도의 삶은 어떠한가? 처음 신앙의 문에 들어설 때 우리는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삶의 고된 문제의 해결이 필요해서, 상한 마음에 위로가 필요해서 또는 알지 못하는 두려움을 해소하고 싶어서, 혹은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서….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는 알게 된다. 만왕의 왕이신 야훼 하나님이 이미 내 삶에, 유배지와 같이 돼버린 가난한 심령에 오셔서 함께하신다는 사실 말이다. 시편 기자는 고백한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 139:8). 왕이신 하나님은 형통하고 평안한 삶에 있을 때만 함께하시는 분이 아니다. 유배지처럼 막막하고 외진 삶의 자리에도 함께 계신다. 영화에서 마을 사람들은 유배되어 온 단종 이홍위와 함께 지내면서 왕과 사는 삶을 경험한다. 함께 먹고, 배우고, 어울려 소소한 웃음을 나누며 가난과 상관없는 기쁨을 경험한다. 엄흥도는 본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왕과 함께 지내는 나날 속에서 그는 달라졌다. 손해를 감수하며 위험을 무릅쓰고 마침내 역적의 누명을 각오하면서까지 왕의 곁을 지켰다. 만왕의 왕 야훼 하나님과 함께 사는 성도의 삶도 다르지 않다. 그분의 임재 안에 머무는 사람은 변한다. 세상의 두려움보다 왕의 말씀이 더 크게 들리고, 자신의 손익을 따지던 계산 대신 왕의 마음을 먼저 구하게 된다. 입술의 언어가 바뀌고 관계를 대하는 마음이 바뀌고, 고난을 해석하는 시선이 바뀐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왕과 동행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변화다. 우리 삶의 자리가 어디에 있든지 만왕의 왕이신 야훼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 그리고 그분이 함께하시는 삶은 반드시 변화된다. 왕과 사는 성도,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이요 우리의 영광이다.
  • 2026.03.20

    박현주 목사(상담소 겸 사회복지상담센터 선임) - “셰프의 능력”
  • 요즘 AI는 이미 우리의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길을 찾을 때나 글을 쓸 때도, 음악을 듣거나 상담을 받을 때도 AI가 함께합니다. 예전에는 상상 속의 이야기 같았던 일들이 이제는 현실이 되었고 어떤 면에서 AI는 우리 코앞까지 다가와 있으며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제가 자녀에게 좋은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고 하니 AI랑 결혼할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AI는 다가오는 세대들에 자연스럽고 익숙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AI가 필요한 정보를 순식간에 찾아주고, 가족처럼 친구같이 대화 상대가 되어주니 사람들이 AI와 함께하는 시간이 더 많아질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상담학 교수가 학생을 상담해주었는데 그 학생이 저녁에 AI에게 다시 물어보았더니 거의 교수와 같은 조언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꽤 정확한 방향을 제시해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과 두려움이 없을 수 없습니다. 애니메이션 AI영화 “메간”을 보면 집에서 아이와 놀아주던 AI인형이 결국 아이를 해치는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통제되지 않는 기술이 얼마나 인류를 위협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가하면 도널드 트럼프가 연설한 것처럼 보이는 AI 영상은 목소리, 표정, 현장 분위기도 실제와 거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AI의 딥페이크 기술은 진짜와 가짜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우리가 속아 넘어가기 쉽습니다. 보수적인 분들은 AI가 사탄이라고 근처도 가지 않으려 하는데, 저는 AI 배척자는 아니지만 AI를 요리에 필요한 재료를 장봐다 주는 존재와도 같다고 비유해봅니다. AI가 음식을 만들라고 콩나물, 양파, 당근, 고기, 향신료 등을 구해다주었다면, 그 음식을 맛깔나게 만드는 사람은 바로 셰프입니다. 그 재료로 어떤 음식을 만들지 무엇을 넣고 무엇을 뺄지, 달게 할지 짜게 할지 기막하게 요리해 식탁에 내놓는 사람은 결국 셰프인 우리 자신입니다. 앞으로는 더욱 AI가 활용 될 것인데 AI는 분명 우리에게 유용하고 도움이 되지만 전적으로 맹신하면 안됩니다. AI는 오류도 발생하고 윤리적인 문제도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으므로 계속 점검하고 비판적으로 살피고 최종 사용은 우리들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특히 믿는 사람들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100퍼센트 신뢰의 대상이며 성경만이 가장 오류가 없는 완벽한 지침이라는 사실을 뇌리에서 지우면 안 될 것입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AI라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 하겠나요? “야훼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 2026.03.06

    남형덕 목사(온가족행복지원연구소 선임) - 믿음의 다음 세대를 세우는 교회
  • 대한민국은 지금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저출산 위기를 겪고 있다. 출산율 0점대라는 숫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가정의 붕괴와 공동체의 약화 그리고 다음 세대의 소멸을 예고하는 시대적 경고음이다. 학교는 비어가고 지역은 늙어가며 미래를 책임질 청년 세대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교회는 과연 침묵해도 되는가. 아니면 시대의 질문 앞에 믿음으로 응답해야 하는가.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성도 출산율 2.0명이라는 목표를 제시하는 일은 단순히 국가 정책을 따라가는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을 바라보는 성경적 세계관에 기초한 신앙 고백이며 다음 세대를 향한 교회의 책임을 분명히 하는 믿음의 결단이다. 교회는 세상의 흐름을 뒤쫓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시대를 비추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생명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선포한다.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는 말씀은 하나님의 생명 질서에 동참하라는 부르심이며 “보라 자식들은 야훼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 127:3)라는 시편기자의 고백은 자녀가 부담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임을 밝힌다. 따라서 출산과 양육은 개인의 선택 이전에 하나님께서 공동체 전체에 위임하신 거룩한 사명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젊은 세대가 출산을 망설이는 이유는 단순한 이기심이 아니라 경제적 부담, 양육에 대한 두려움, 경력 단절과 돌봄 공백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교회가 이러한 현실을 외면한 채 “믿음으로 낳으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또 다른 짐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 교회에 필요한 것은 선언보다 동행이며 명령보다 책임의 분담이다. 초대교회는 생존조차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서로의 필요를 채우며 공동체를 이루었다. 가진 것을 나누고, 약한 자를 품으며 함께 살아내는 믿음을 실천했다. 오늘의 교회 역시 출산과 양육을 개별 가정의 고립된 부담으로 남겨둘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함께 책임지는 사명으로 회복해야 한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성령의 능력과 사랑의 실천으로 한국 교회를 이끌어온 교회다. 이제 그 사명은 다음 세대를 향해야 한다. 출산을 축복하는 문화, 아이 울음소리가 환영받는 예배 그리고 실제적인 돌봄과 지원을 제공하는 교회 시스템은 출산율 2.0명이라는 목표를 현실로 만드는 토대가 될 것이다. 출산율 회복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소망의 회복이며, 믿음의 유산을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영적 전쟁이다. 출산율 2.0명을 향한 여정은 쉽지 않지만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가장 본질적인 투자이며 가장 복음적인 선택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믿음으로 이 길을 걸어갈 때 그 영향력은 교회를 넘어 사회를 밝히는 빛과 소금으로 확장될 것이다.
  • 2026.02.27

    이준희 목사(구로대교구장) - 삶의 자리에서 함께하시는 하나님
  • 설 연휴가 지나고 다시 일상이 시작되었습니다. 며칠 동안 북적이던 집안은 조용해지고 명절 음식도 하나씩 정리됩니다. 기쁨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우리는 다시 현실을 마주합니다. 연휴 동안 동계올림픽 경기를 보신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스노보드 하프파이프에서 최가온 선수가 한국 설상 최초로 금메달을 목에 거는 장면은 큰 감동이었습니다. 멋진 기술을 선보이는 모습과 점수가 발표되던 순간의 환호는 화면을 통해서도 생생하게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순간을 화면으로 지켜보았지만 선수는 오랜 시간 현장에서 그것을 살아냈습니다. 몇 분의 경기를 위해 수년의 훈련과 넘어짐의 시간을 견뎌냈을 것입니다. 그 시간을 통과했기에 비로소 금메달의 기쁨이 주어졌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에도 화면에 보이지 않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순간보다 조용히 견디는 시간이 훨씬 길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배 시간에는 은혜를 경험하지만 예배가 끝나면 우리는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와 현실은 그대로입니다. 그럴 때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신앙은 어디에 있어야 할까?” 하나님은 특별한 순간에만 함께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평범한 하루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도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범사에’라는 말은 좋은 날뿐 아니라 평범한 날에도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감사는 상황이 달라진 뒤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를 기억할 때 시작됩니다. 예배의 감동이 교회에만 머물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말씀 한 구절을 묵상하고 감사의 제목을 적어 보며 가정에서 짧게라도 함께 기도하는 시간은 작아 보이지만 우리의 하루를 바꾸는 힘이 됩니다. 『감사QT 365』를 통한 말씀 묵상은 생각을 새롭게 하고 하루의 방향을 세워 줍니다. 교회에서 드린 예배가 가정으로 이어질 때 우리의 신앙은 주일을 넘어 삶 전체로 확장됩니다. 올림픽 경기가 끝나도 선수의 도전이 이어지듯 우리의 신앙도 일상 속에서 이어져야 합니다. 현실이 달라지기 전에 마음부터 하나님께로 돌려 보십시오. 문제보다 은혜를 먼저 떠올리고 걱정보다 감사 한 줄을 적어 보십시오. 그렇게 하루를 살아가다 보면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아도 우리의 마음은 더욱 단단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함께하십니다. 이 믿음을 붙들고 다시 힘차게 전진하기를 소망합니다.
  • 2026.02.20

    오승현 목사(양천대교구장) - 신의 악단
  • 영화 ‘신의 악단’이 개봉 한 달여 만에 누적 관객 100만명을 넘어섰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개봉 당시만 해도 낮은 인지도와 제한된 상영관 수 그리고 여러 대작 영화들 사이에서 이처럼 큰 흥행을 이루리라 예상한 이는 많지 않았습니다. 우리 교회 역시 지난해 12월 31일 개봉일에 맞춰 이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고 배우들이 부르는 찬양을 함께 따라 부르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마음 깊이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영화 속에 담긴 북한의 현실은 참으로 가슴 아프고 비참했습니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성경을 읽어야 했고, 찬양은 소리 내어 부를 수조차 없었습니다. 숨겨두었던 성경책이 발각되어 목숨을 잃고,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고문당하는 장면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은 충격과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장면들을 보며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생명을 걸고 예배하는 이들의 모습과 비교할 때 우리는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감사보다는 불평과 불만이 앞서지 않았는지, 자유가 있음에도 편함만을 선택하며 신앙생활을 해오지는 않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신의 악단’은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영화이자 동시에 우리의 예배와 신앙의 자세를 되돌아보게 하는 귀한 작품이라 느껴졌습니다. 시편 100편 4절 말씀은 이렇게 전합니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우리는 날마다 감사로 무장해야 할 존재임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자유를 주심에 감사하고, 마음껏 예배드릴 수 있음에 감사하며 365일 절대 긍정과 절대 감사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여드려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북한의 공산 정권이 무너지고 평화로운 복음 통일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지하 교회에서 숨죽여 예배하는 북한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도록 중보의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이 고백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의 때에 복음의 일꾼으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손 모아 기도하며 준비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2026.02.13

    홍성복 목사(장년대교구장) - 영적 가족력
  • 병원에서 진료를 받다 보면 ‘가족력’을 조사할 때가 있습니다. 가족력이란 부모, 조부모, 형제자매, 남편, 아내, 자녀 등 혈연들이 지닌 질환의 유무, 원인 등을 말합니다. 가족 구성원이 특정 질환이 있는 경우 그 질병의 발병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환자 본인과 의료진은 가족력을 주의하며 살핍니다. 일반적으로 삼대에 걸친 직계 가족 중 2명이 같은 질병에 걸렸으면 가족력이 있다고 판단합니다. 혈연 간 유전적 유사성에 의한 요인도 있으나 그보다 생활 습관, 식습관, 주거 환경 등 질병을 유발하는 환경을 공유하기 때문에 발병률이 높아지기도 합니다. 질병뿐만 아니라 믿음과 신앙에도 가족력이 있습니다. 이른바 ‘영적 가족력’입니다. 나의 신앙 형성이 조부모나 부모에게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이 있는 대학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신앙에 있어 가장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은 누구인가?”란 질문에 1, 2위 순위 합계 57.4%가 아버지, 어머니라고 답했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신앙 형성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위기라고 이야기합니다. 교회가 고령화되어 젊은 세대가 없고, 아이를 가진 젊은 세대가 교회에 없다 보니 교회학교 아이들은 더더욱 줄어드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것을 이겨나갈 방안 중의 하나가 영적 가족력의 회복입니다. 예전에는 자녀의 신앙 교육을 교회학교에 전담했지만, 이제는 교회와 가정에서 같이 신앙 교육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육체의 가족력이 나쁜 것만 유전되지 않고 좋은 것도 함께 물려받듯이 영적 가족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올바른 믿음대로 살아가는 본을 아이에게 보일 때 그것이 아이들의 마음에 각인되어 세상에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가정 공동체에서 영적 가족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 공동체의 변화도 중요합니다. 교회는 영적 대가족을 만들어 영적 가족력을 강화해야 합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처럼 한 영혼을 믿음의 자녀로 키우기 위해서는 영적 대가족이 필요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듯이 우리 성도님들은 자녀 세대들에게 무한한 사랑과 지지를 보내주어야 합니다. 지금 교회는 골든타임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더 이상 다음 세대를 놓치면 회복할 수 없습니다. 3450세대, 그리고 그 자녀들이 영적 가족력을 강화하도록 온 교회가 함께 노력합시다.
  • 2026.02.06

    서광석 목사(영등포대교구장) - FOMO(포모)의 시대, 변치 않는 가치
  • 현대사회는 예측 불가능한 변동성의 시대이다. 사회 모든 부분에서 예측이 어려운 급격한 변화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경제적으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많은 지표들 뿐 아니라, 사회 문화적으로도 하룻밤 사이에 뜨고 지는 트렌드 따라잡기에 분주하다. 그래서 누군가는 투자에서, 누군가는 관계에서, 누군가는 정보와 트렌드에서 혹시 낙오할까 불안해한다. 이러한 감정을 FOMO(포모·Fear of Missing Out)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예가 ‘벼락거지’이다. 부동산이든 가상화폐든 트렌드를 따라가는 사람들에 비해 뒤처진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가난하게 되어 버린 상황을 묘사한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벼락거지’가 되지 않기 위해 FOMO에 빠져 무리하게 부동산, 가상화폐, 주식에 투자한다. 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무척이나 애써야만 하는 피곤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내가 잘 따라가고 있나?’, ‘혹시 놓치고 있는 것은 없나?’, ‘제대로 한 선택일까?’ 이렇게 매일 불안과 근심과 후회와 두려움 속에 ‘행복’이라는 감정조차도 SNS에 장식품처럼 진열하며 산다면 진짜 행복과 평안은 환상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한 선언을 하고 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바울은 그에게 유익한 모든 것을 버린 채 환난과 곤고, 박해와 위험을 마주하면서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분리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이 고백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선명하다. 변치 않는 더 중요한 가치가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다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얼마나 성취했는지’, ‘얼마나 앞서가는지’ 물어보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누구에게 속해있는지’, ‘어떤 사랑을 받고 있는지’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얼마나 이루었는가’에 있지 않고 ‘우리가 누구인가’에 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의 속도 경쟁과 상관없이 우리에게 허락된다. 우리가 안심하고 발 딛고 서서 살벌한 현실을 견디게 해주는 반석이 그 사랑 안에 있다.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 우리를 끝까지 붙들어 주시는 사랑이 FOMO에 휘둘리지 않고 살 수 있게 해주는 우리의 경쟁력이다.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 안에 잠잠히 세상을 분별하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기를 소망한다.
  • 2026.01.30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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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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