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심재영 목사(여의도직할성전 담당) - 먹을 만하고 약이 되는 결실
  • 가을이 깊어가며 결실하는 계절이 왔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무언가 결과물을 내야 한다는 조급함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맘때가 되면 각자 몇 가지 간절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있는 수험생들도 있고 올해가 가기 전에 이루어야 할 것들에 분주한 이들도 있으며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한 해 동안 맺은 열매를 보기 위해 또한 영혼구원의 결실을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결실하다’는 것은 단지 보이는 결과물을 내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열매를 맺어내는 것입니다.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말씀의 강가에서 자라난다고 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때를 따라 열매 맺는 신실함으로 자신의 계절을 살아냅니다. 오랜 시간 땀과 인내로 씨를 뿌리고 가꾼 수고가 지금 결실의 문턱에 서 있다면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결과보다는 신실하게 걸어온 과정 속에서의 믿음을 보시고 이를 귀히 여겨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1편 3절에서 “철을 따라”의 뜻은 서두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그분의 손길에 맡기는 순종의 태도를 말합니다. 유진 피터슨의 책 『한 길 가는 순례자』에서 “신앙의 성장은 단기간의 성취가 아니라 오랜 순종의 여정이다. 인내 속에서 자라난 믿음만이 진짜 결실을 맺는다”고 했습니다. 이 결실의 계절에 행여나 급해지지 않도록 우리는 마음을 잘 다듬어가야 합니다. 급한 마음에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생수가 아닌 다른 양분으로 그럴싸한 결과물을 만들려 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결과물과 결실은 비슷해 보이나 그 본질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에스겔이 환상 중 본 나무의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은 “약이 된다” 했습니다. 하나님께 뿌리내린 사람이 맺는 열매는 내 자신만을 위한 결실이 결코 아닙니다. 그 열매는 다른 이를 살리고 그 잎은 상처 입은 이들의 마음을 치유합니다. 학문의 열매, 섬김의 열매, 전도의 열매 등 주님 안에서 맺힌 것이라면 반드시 누군가의 생명을 일으키는 약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씨앗을 주셨으며 햇살을 주셨고 기다림의 시간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에게 열매의 계절을 주셨습니다. 추수감사절을 앞둔 이 가을에 이렇게 기도합시다. “먹을 만하고 약이 되는 결실로 감사가 가득한 계절이 되게 하옵소서!”
  • 2025.11.07

    배정호 목사(여의도순복음은평성전 담임) - 성령 안에서 드리는 감사
  • 1620년 겨울, 메이플라워호에서 내린 청교도들의 눈앞에는 신앙의 자유가 아니라 죽음뿐이었습니다. 추위와 굶주림은 그들의 환상을 무너뜨렸고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얼어붙은 대지에 누워갔습니다. 그러나 봄의 햇살이 내려 그 땅을 녹일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인디언들의 손길 속에 옥수수와 보리가 자라났고 가을의 수확은 그들의 예상을 훨씬 초월했습니다. 추수의 날 그들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이 자신들을 붙들었음을 깨달은 감격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들이 세운 감사의 제단 위에는 풍요로운 곡식이 아닌, 죽음의 계곡을 통과한 영혼들의 믿음이 제물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추수감사절의 진정한 기원입니다. 그들의 감사는 결코 풍요에서 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결핍의 한복판에서 절망의 어둠 속에서 오직 믿음만이 이끄는 길을 걸으며 드린 감사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순절 신앙의 깊은 의미를 만나게 됩니다. 오순절 운동은 성령의 현재적 임재를 체험하고 그 능력을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그렇기에 감사는 단순한 감정의 파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이 우리 영혼 깊숙이 일으키는 믿음의 응답이며 현실의 폭풍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을 놓지 않는 영혼의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의 외침이 울려 퍼집니다. “성령 안에서 항상 감사하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심을 믿을 때 비로소 어둠 속에서 드리는 감사의 찬양입니다. 청교도들처럼 고난의 자리에서 감사의 제단을 세우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증거입니다. 사도행전의 오순절 마가다락방에서 성령이 임하던 그 순간은 마치 영적 추수감사절과 같았습니다. 초대교회는 복음의 열매를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언어의 장벽이 무너지고 문화의 벽이 허물어지며 수많은 영혼들이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날의 감사는 곡식의 풍성함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영혼들이 영원한 생명으로 추수되는 기적에 대한 감사였고 물질의 풍요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끝없는 확장에 대한 감격이었습니다. 신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영에 속한 것을 더 풍성하게 거두며 감사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추수감사도 이러한 영적 유산 위에 서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영혼 밭에 맺으신 믿음의 열매, 사랑의 향기, 인내의 결실들을 감사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약속들까지도 씨앗을 뿌린 농부가 가을 수확을 기다리듯 믿음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감사는 현실의 가시밭과 어둠을 뚫고 피어나는 꽃과 같습니다. 그것은 절망 속에서 소망을 노래하게 하고, 죽음의 계곡 속에서도 생명의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청교도들이 추운 겨울을 견디며 눈물 속에 씨를 뿌렸듯이 우리도 그 믿음의 전통을 이어가야 합니다. 우리도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영혼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2025.10.31

    김용권 목사(여의도순복음신월교회 담임) - AI시대를 분별하라
  • 오늘날 인공지능(AI)의 급속한 발전은 교회와 목회 현장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행사, 교육 콘텐츠 제작, 행정 자동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AI는 유용한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신학적 우려와 윤리적 경계가 존재한다. 지난 1월 한국기독교학회는 AI(인공지능)시대에 발생할 수 있는 윤리적 문제와 부작용에 대해 교회가 청지기적 목소리를 낼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우리는 AI(인공지능)시대를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술의 유익을 누리지만 그 본질과 영향력을 성경적 관점에서 분별해야 한다. 이제는 단순히 온라인 포털에서 검색하는 것을 넘어서 ChatGPT 서비스에게 일문일답으로 답을 얻고, 실생활에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AI 앞으로 어디까지 얼마나 발전할까? 많은 기술업계 전문가들은 AI가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범용 인공지능) 컴퓨터로 사람과 같은 또는 그 이상의 지능을 구현하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경고하고 있다. AI가 인간의 지능을 모방하고 특정 영역에서 능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던지게 한다. 창세기 1장 27절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라고 선언하며, 인간은 단순한 정보 처리 기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AI는 인간의 이해를 구현할 수는 있지만 도덕적 판단, 영적 교감, 사랑의 실천은 결코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AI를 맹목적으로 신뢰하고 의존할수록 하나님의 성품 대신 AI의 가치, 계산, 통제, 생산성을 닮아갈 위험이 있다. 이는 곧 기술을 우상화하는 현대판 심각한 바알 숭배가 될 수 있다. AI가 제공하는 출처가 불분명한 정보는 교회의 진리 수호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 창세기 1장 28절은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청지기적 사명을 부여한다. AI는 선하거나 악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 결정된다. 교회는 AI를 두려워하거나 배제하기보다 하나님 나라 확장의 도구로 지혜롭게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체의 영적 건강을 해치지 않도록 윤리적 기준과 신학적 검증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기술의 유익을 누리되 그것이 인간의 본질을 침해하거나 복음의 본질을 왜곡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교회는 AI를 통해 더 넓은 선교의 문을 열 수 있지만 그 문이 진리의 길이 되도록 목회자의 분별과 성령의 인도하심이 반드시 필요하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1~22).
  • 2025.10.24

    이승훈 목사(여의도순복음청주교회 담임) - 너는 복이 될지라
  •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사역하다 여의도순복음청주교회으로 내려온 지 1년이 되었습니다. 지나면서 한 번 들렀을 법도 한데 청주는 처음입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떤지 조금이나마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시고 “너는 복이 될지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입니다. 이 말씀으로 복을 받아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복이 될지라”는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이 되게 하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즉 내가 하나님의 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주의할 점은 축복과 기복을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축복을 기복으로, 기복을 축복으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축복신앙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받는 복된 신앙입니다. 반면에 기복신앙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복만 달라고 하는 잘못된 신앙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는 복을 주십니다. 즉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축복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반면에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으면서 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복을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기복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과연 진정한 복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말에 ‘복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려대 한국어 사전에는 “행운이나 행복을 가져다주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주로 어린아이에게 많이 쓴다”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귀한 자녀가 태어나거나 지혜로운 며느리가 들어와서 가정에 화평과 재물이 있으면 복덩이가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요셉이라는 복덩이로 인해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복이 임했습니다. 무시무시한 감옥의 간수장도 요셉이 복덩이인 것을 알고 제반 사무를 맡겼습니다. 결국 요셉은 총리가 되어 이스라엘 민족뿐 아니라 애굽과 굶주리는 많은 나라에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덩이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복은 주위를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내 맘대로, 내 이익대로, 내 기분대로 한다면 주위를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복인 사람은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희생해야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사는 것입니다. 진정한 복은 나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모든 곳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섬기므로 진정한 복이 되시기 바랍니다.
  • 2025.10.17

    심형섭 목사(여의도순복음청라교회 담임) -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보며
  • 기도는 단순한 말의 나열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누는 깊은 대화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때로 기도의 본질을 잊고, 얼마나 오래 했는지 몇 번 했는지에만 마음을 두기도 합니다. 어느 성도의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그는 기도할 때마다 호두 하나를 유리병에 담으며 자신이 얼마나 기도하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병은 가득 찼고 그는 스스로 기도의 사람이라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꿈속에서 주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이 병들은 무엇이냐?” 성도는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호두 하나가 한 번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망치로 알을 깨뜨려 보아라.” 호두를 깨뜨리자 속은 모두 비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네 기도는 이 호두처럼 비어 있구나. 말은 많았으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기도는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나와의 진정한 대화임을 잊지 말라” 마태복음 6장 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기도는 믿음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기도로만 끝나지 않고 삶 속에서 행동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열매를 맺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서의 말씀처럼 기도와 믿음은 반드시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여의도순복음청라교회는 2024년 7월 아이들을 포함한 25명의 성도들이 함께 모여 첫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영훈 목사님의 격려와 여의도순복음교회 장로전도단과 전도실의 헌신, 고등부 교사들과 마포1대교구의 RK를 통한 섬김, 봉사, 많은 중보기도가 모여 여의도순복음청라교회를 든든히 세우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우리에게 주신 ‘또 하나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머무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야 합니다. 받은 사랑을 이웃과 나누며 또 다른 열매를 맺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더 큰 기쁨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여의도순복음청라교회는 첫 예배보다 두 배 이상 성장하며 성도들의 기도와 기대 가운데 함께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가정과 일터 그리고 학업의 자리에서도 귀한 열매가 맺히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가 기도와 믿음으로 주님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고, 그 열매를 함께 나누는 성도가 되길 소망합니다.
  • 2025.10.10

    김종현 목사(여의도순복음이천중앙교회 담임) - 영적 회춘 
  • 오늘날은 ‘100세 시대’라고 부릅니다. 의학과 과학이 발달하면서 이제 인간이 100세까지도 살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60대, 70대는 이미 노인의 대명사처럼 여겨졌지만 요즘은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며 사회와 교회 속에서 자기의 가치를 증명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 모습은 단순한 노화의 과정이 아니라 마치 다시 젊음을 되찾은 것 같은 ‘회춘’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요즘 어르신들은 젊은이 못지않게 시대의 변화를 즐기고 계십니다. 스마트폰으로 쇼핑도 하고, 유튜브로 세상 소식을 접하며 크리에이터로 직접 영상을 올리는 등 세대 간의 벽을 허물고 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가는 어르신들을 보면서 우리는 ‘나이’가 인생을 제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성경 속에도 ‘회춘’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있습니다. 바로 모세와 갈렙입니다. 모세는 120세까지 살았는데 신명기 34장 7절에 보면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끝까지 충성하며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갈렙은 여호수아 14장 10~11절에서 85세의 나이에 여전히 담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는 “오늘 내가 야훼께서 말씀하신 날로부터 45년을 지냈나이다 … 오늘 내가 85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라고 고백합니다. 그의 고백은 단순한 건강의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붙잡는 믿음에서 나오는 담대함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영적 회춘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육체는 약해질 수밖에 없지만 믿음의 사람은 날마다 속사람이 새로워집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주 안에 있는 사람은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영적인 젊음을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이가 우리의 한계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비전이 있는 한 우리는 나이에 상관 없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믿음으로 기도하며 말씀을 붙잡고 사는 사람은 육체의 나이를 뛰어넘어 영적으로 회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나이에 상관없이 모세와 갈렙처럼, 그리고 바울처럼 영적으로 늘 새로워지는 은혜를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주 안에서 날마다 회춘하는 삶, 그것이 바로 참된 행복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입니다.
  • 2025.10.03

    박창호 목사(여의도순복음춘천교회 담임) - 우후죽순의 은혜
  • “왕대 밭에 왕대 난다.” 조용기 목사님의 이 말씀은 큰 스승 밑에서 큰 제자가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큰 믿음의 밭에서 반드시 큰 믿음의 사람이 자라난다는 뜻입니다. 대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보면 이 말씀이 더욱 깊이 다가옵니다. 우후죽순(雨後竹筍)이란 대나무가 비가 온 뒤 하루에 수십 센티미터씩 자라는 놀라운 성장을 말합니다. 대나무는 단기간에 가장 큰 성장을 이루는 식물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수년 동안 땅속 깊이에서 뿌리를 넓히며 보이지 않는 인고의 시간을 견뎌야 합니다. 이는 세상 모든 만물의 이치입니다. 교회의 부흥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전에 반드시 눈물과 기도, 헌신의 뿌리가 깊이 내려야 합니다. 교회가 지금까지 겪어온 고난과 시련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크고 놀라운 역사를 준비하게 하시는 훈련의 과정이었습니다. 마치 대나무가 땅속에서 인내하듯 우리도 그 시간 동안 기도로 버티고 믿음으로 기다리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어 성령의 단비가 교회 위에 쏟아질 때 비가 내린 후 죽순이 일제히 솟아오르듯 ‘우후죽순의 은혜’가 ‘왕대’의 꿈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야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욜 2:23). 오늘 이 땅에 ‘우후죽순의 은혜’를 꿈꾸어 봅니다. 교회가 순복음 왕대밭으로 자라나는 부흥의 역사가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지듯 부흥을 위한 왕대의 인고의 시간을 지나, 비를 준비하시는 하나님께서 마침내 부흥의 소낙비를 부어주시고 우후죽순의 은혜를 베풀어 주심을 믿습니다. 다시 새로운 희망을 향하여 꿈을 꾸며 ‘절대긍정 절대감사’와 ‘성령 충만의 은혜’로 순복음의 왕대씨를 뿌리며 나아갈 때 우후죽순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이 가을 기도의 계절, 가을 하늘을 우러러 우후죽순의 은혜와 왕대의 꿈을 간구합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1, 47).
  • 2025.09.26

    김창수 목사(여의도순복음광주교회 담임) - 광야(미드바르)에서 부는 바람!
  • 성경의 인물 중 우리는 모세를 잘 알고 있다. 청춘의 객기일까? 노예 생활로 몸과 마음이 멍든 동족 이스라엘을 돕는다는 명분은 오히려 살인자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하루 아침에 지명 수배범이 되어 그가 도망간 곳은 생면부지의 미디안 광야였다. 40년이라는 광야의 시간들은 모세의 젊음과 장군으로서의 카리스마까지 앗아가는 혹독한 마법이었다. 무엇보다 이방인에 대한 냉대와 따가운 시선들, 영혼 깊은 곳에서 흙탕물을 일으키며 솟구쳐 오르는 하나님을 향한 오해는 그의 전 존재를 뒤흔드는 위기의 바람이었다. 아마도 모세는 ‘여긴 어디?,’ ‘난 누구?’를 수천수만 번 곱씹으며 고뇌의 밤을 뒤척일 때 그의 두 어깨를 두드리는 벗은 눈물과 한숨뿐이었다. 모세에게 불어오는 광야의 바람은 절대 절망의 바람이었고 소망의 싹을 꺾으려고 하는 충동질의 바람이었다. 그러나 인생의 막다른 길목에서도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모든 사람보다 온유한 자’(민 12:3)로 모세를 새롭게 빚어내셨다. 광야의 척박한 환경은 우리에게 고달픔과 위기를 안겨주지만 광야에 숨겨진 보화가 있음을 알아야만 한다. ‘광야’는 히브리어로 ‘미드바르’이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장소’라는 뜻이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불어오는 연단의 바람을 통하여 깨어짐과 겸손을 체득하였고 소명과 사명을 깨달아 ‘하나님의 지팡이’(출 4:20)를 움켜잡을 수 있었다. 지금 나의 삶의 자리가 광야라고 느끼고 있는가? 삶의 지난한 무게가 두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가? 희망의 불씨가 사라져 소망마저 나를 외면하는 절망의 수렁에 빠져 있는가? 우리는 각자가 처한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만 한다. 모세를 향했던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 인생들의 광야에서도 위로의 바람, 축복의 바람으로 다가 오심을 확신해야 한다. 각자의 심비에 새기자! 광야 저편에 가나안의 축복이 우리에게 손짓하고 있다. 그렇기에 광야는 인생의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작이다. 잊지 말자! 광야에서 부는 바람은 ‘절대 희망의 바람, 성령의 바람, 사명의 바람’ 이란 걸!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신 8:16).
  • 2025.09.19

    마웅갑 목사(여의도순복음신안산교회 담임) - 하나님 나라의 확장자로 살아가기
  • 최근 교회에 등록한 성도가 출석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회사의 과도한 업무로 항상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승진 경쟁, 인간관계, 경제적 부담이 그를 짓눌렀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일하는 동료의 모습에서 뭔가 다른 점을 발견했다. 같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평안함과 여유로움이 있었다. 도대체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 지 궁금했던 차에 교회 출석을 권유 받고 전도의 열매가 맺어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도의 자연스러운 출발점이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삶을 살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다름의 근원’에 대해 궁금해 한다. 폴 트립은 『지금 누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 실재라고 강조했다. 이는 전도에 있어 핵심적인 통찰을 제공한다. 우리는 미래의 천국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나누는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한 간호사는 환자들을 대할 때 다른 동료들과 달리 두려움 대신 평안함을 보였다. “죽음도 두렵지 않아요. 저에게는 영원한 소망이 있거든요.” 그녀의 고백을 들은 동료들이 하나둘씩 교회를 찾기 시작했다. 또 다른 자연스러운 전도의 열매였다. 그것은 말이 아닌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증명한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전도를 ‘부담스러운 의무’로 생각한다. 하지만 리처드 포스터가 『영적 훈련』에서 말했듯 진정한 영적 실재를 경험한 사람은 그것을 나누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평안을 맛본 사람에게 전도는 자연스러운 흘러넘침이다. 제리 브릿지스가 『거룩한 삶의 추구』에서 말했듯 우리의 일상적인 거룩함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전도 도구다. 직장에서의 정직함, 가정에서의 희생적 사랑, 이웃을 향한 친절함이 모두 하나님 나라를 증명하는 증거가 된다. 전도를 의무가 아닌 특권으로 생각하자.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소식을 가진 사람들이다.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베드로와 요한처럼 우리에게 은과 금은 없지만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외로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두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평안을 전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가치를 아는 그리스도인으로의 특권을 누리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면 우리 삶 자체가 전도가 된다.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증명할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근원이신 하나님을 찾게 된다. 전도하기 복된 계절이 왔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자로서 이 땅에 복음의 향기를 퍼뜨리며 살아가자.
  • 2025.09.12

    이용우 목사(여의도순복음횡성교회 담임) - 뜻 밖의 손님, 나그네 대접의 즐거움
  • 강원도 횡성에서 목회한지 어느덧 2년이 훌쩍 넘어 3년을 바라보고 있다. 지리적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1시간 20분이면 오는 거리이기 때문이다. 횡성이라는 위치상 심리적 거리가 멀어서 많은 분들이 시골 목회를 하는 줄 아신다. 그래서 이번 여름에는 선교하러 청년들이 많이 다녀갔다. 오지 선교를 꿈꾸고 온 청년들에게 미안했지만 여름사역에 함께 힘을 쏟아주어 너무 반갑고 고마웠다. 여의도순복음횡성교회는 읍내에 위치하고 있고, 주변에 아파트와 초, 중, 고등학교에 둘러 쌓여 도시 목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성도들 가운데 소를 키우시는 분이 한 분도 없을 정도다. 횡성은 인구가 2024년 7월 기준, 4만 6000명 정도이며 횡성하면 유명한 한우 사육두수는 6만 1000두정도 된다. 춘천에서 사역하는 친구 목사님이 계시는데, 그 목사님은 손님이 오시면 늘 ‘춘천 닭갈비’를 대접한다. 하지만 횡성은 한우가 유명해서 손님이 오시면 늘 난감하다. 횡성 한우는 일반 한우보다 값이 더 비싸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뜻 밖에 손님이 오면 대접에 고민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우리 교회는 1층에 요양원을 운영 중이다. 대부분의 치매 어르신을 천국 갈 때 까지 모시고 있다. 요양원은 우리 인생이 나그네임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현장이다. 교회에도 수많은 나그네가 다녀간다. 아는 지인 뿐 아니라 뜻 밖에 찾아오는 손님들도 많다. 2년 전 여름, 태풍 카눈이 북상했을 때 파주 예수전도단에 속한 팀이 2박 3일간 거처를 찾고, 사역을 하겠다고 해 극진히 대접했다. 그 팀을 통해서 우리 교회에 잃어버린 한 청년의 영혼이 소생되는 기쁨이 있었다. 그 팀은 매년 여름 마다 찾아와 위로를 더해주고 간다. 최근 교회 인근 어르신들에게 ‘말복 삼계탕’을 대접한 것도 그분들의 후원이 큰 몫을 했다. 올해 여름 우리교회에 본교회 가스펠청년들과 순복음강남교회 청년들, 여의도순복음구로교회 청년들이 와서 RK사역을 하고 돌아갔다. 그들도 우리 교회도 모두 대접하기에 서로 힘썼다. 그래서 모두에게 큰 기쁨이 있었다. 나그네 대접의 힘씀은 당연하다. 성경은 나그네를 대접하라고 당부하고 있으며 뜻 밖의 손님 대접에는 하나님의 큰 보상이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서 세 나그네(주의 천사)를 극진히 대접한 이야기는 후에 아내 사라에게 아들 이삭이 태어날 것을 예고 받고, 이어서 소돔을 위해 아브라함이 중재하는 장면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횡성에 뜻 밖에 오실 분들은 극진히 환영한다. 오셔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가시길 바란다. 대접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 2025.09.05

    임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군산교회 담임) - 도전, 살아난다
  • 출석 교인이 아직 100명이 안 된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라는 사자성어를 되뇌며 어느 날 면접장으로 향했다. ‘우리 목사님! 우리 통장님!’이라고 3년 후 쓸 책 제목까지 정해놓고 말이다. 동네 주민들을 밑바닥부터 쌍끌이 조업으로 건져 올리려면 합법적인 신분이 필요하다. 집집마다 전도할 때 “안녕하세요. 통장입니다!”만한 명찰이 또 없겠다 싶었다. 면접 당일, 탱탱한 꼬치어묵 같았던 그 확신은 부풀렸던 복어 배 꺼지듯 축 처져버렸다. “목사님! 통장 지원은 왜 하신 거예요? 저희 일하기 부담스러워요.” 면접관들의 볼멘소리였다. 강원도에서만 잡히는 도루묵을 왜 군산 어시장에서 찾느냐는 소리처럼 들렸다. 다시스로 도망가던 배 밑창 요나의 깨어남처럼 당황스러웠다. 여리고성을 돌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끝날 외마디 함성을 외쳤을 때 여리고성이 무너졌던 기적은 내게 일어나지 않았다. 목적은 분명했으나 적확한 전술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군산에는 예수님 제자 마태가 앉아있을 법한 ‘호남관세박물관’이 있다. 세워진 지 120년이 되어가는 일본식 근대 건축물이다. 군산은 이렇게 지역의 역사성이 깊다. 한 발 더 뻗으면 광활한 고군산 군도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는데 ‘환경으로서의 지역’이 주는 자산이다. 로컬전문가들은 지방 소도시가 살아나려면 ‘지역과 환경과 사람’이 필요하다고 진단한다. 이 모든 것을 움직이는 것은 역시 ‘사람’이다. 교회가 그 ‘살아남’의 중심에 있을 수밖에 없는 근거다. 살리려면 끌어내야 한다. 한국인의 사회적 고립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우울증 환자는 100만명을 넘어섰고 외로움 지수도 영국보다 더 높다. 교회가 멘탈 케어 커뮤니티로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목회데이터연구소의 주장도 과하지 않다. 얼핏 서울 등 대도시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실제는 지방 소도시에서 그 고립도는 더욱 심각하다. 교회는 사회적으로 붐을 일으킬 수 있는 어젠다를 생성해 내야하고 사람들을 끌어낼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야 한다. 동시에 불신자들이 자연스럽게 성도들과 섞일 수 있는 커뮤니티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남녀노소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인프라가 축적된다면 교회의 도전도 더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혁신과 성장을 향한 도전은 계속되어야 한다. 주한 외국인들을 선교적 자원으로 품기 위해 내가 ‘한국어교원자격’에 도전하고 있듯이… 도전 100명, 살려내야 한다.
  • 2025.08.29

    임지택 목사(천안순복음소망교회 담임) - 여름 끝자락에서 피어나는 믿음
  • ‘처서’가 지나면 계절의 공기가 달라집니다.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는 점차 누그러지고 들판에는 어느새 가을의 기운이 깃들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바쁘고 뜨거웠던 여름이 저물어 갈 때 우리 마음도 함께 지쳐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이 순간 우리는 믿음 안에서 다시 중심을 잡아야 할 때임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 삶의 모든 계절에 각기 다른 의미가 있음을 분명히 알려 줍니다. 전도서 3장 1절은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여름의 뜨거운 열정도 소중하지만 동시에 쉼과 회복이 필요한 시간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또 하나의 때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여도 그 시간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은밀하게 다듬고 계십니다. 이 특별한 시기를 영적인 전환점으로 삼아 보시길 바랍니다. 단순히 더운 계절이 지나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의 삶과 믿음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새롭게 정돈되는 은혜의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설령 여전히 분주하고 마음이 복잡하더라도 잠시 멈춰 하나님 앞에 서 보십시오. 하나님은 쉼 없이 달려가는 우리를 기다리시며 상한 심령을 따뜻하게 감싸 주시는 분이십니다. 가을이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왔습니다. 풍성한 열매의 계절입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결코 우연히 맺히지 않습니다. 여름 동안의 땀과 인내, 그리고 눈물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실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지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입으며 예기치 못한 문제들 앞에 마음이 무너질 때도 있지만, 그 모든 순간에도 하나님은 분명한 뜻을 두시고 회복의 길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순복음의 믿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감사와 절대 긍정으로 반응하는 믿음입니다. 현실이 불안정할수록 우리는 더욱 굳건히 믿음을 선택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우리의 믿음을 다시 바로 세울 때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낙심을 멈추고 감사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염려와 두려움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삶을 다듬으시며 다가올 계절을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여름의 끝자락에 서 있는 지금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이 계절이 끝나는 자리는 새로운 믿음의 계절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당신의 계절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은혜의 새 계절로 들어가는 문 앞임을 믿으십시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사 40:29).
  • 2025.08.22

    김태선 목사(여의도순복음목포교회 담임) - 고정관념을 버리면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다!
  • 2011년 여의도순복음교회 제1호 독립지교회가 되면서 본격적인 순복음의 신앙을 세워 나가고 있는 여의도순복음목포교회는 올해로 창립 21주년을 맞이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코로나 팬데믹과 교회 내 어려운 문제들이 생기면서 교회는 점점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절대 긍정과 절대 감사를 외치며 믿음으로 전진해 나아갔지만 오래된 신앙의 습관은 쉽게 변화되지 못했다. 다양한 예배와 행사를 통해 교회 분위기 전환에 힘쓰고 있던 중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조직개편과 더불어 구역예배와 지역예배 등에 변화를 주었다. 우리 교회 성도의 대부분은 주중에 생업에 종사하는 분들과 이제 연로하여 거동이 힘든 분들이다. 그래서 주중 구역예배와 지역예배 참석이 쉽지 않았고 이로 인해 구역조직이 탄탄하게 세워지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주중의 구역예배와 지역예배의 틀을 과감히 깨버리고 주일에 구역예배와 지역예배 그리고 교구 연합 성령대망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기존 주일 1시 예배는 예전 예배의 틀을 벗어나 구역장은 구역원들과 구역예배를 드리고 매주 2개 구역은 담임목사와 지역예배를 드리면서 전 성도가 교회 내 정해진 장소에서 구역예배와 지역예배를 드리도록 했다. 이를 통해 주중에 드리기 힘들었던 구역예배와 지역예배는 주일에 전 성도가 교회 곳곳에서 함께 드리는 예배가 되었다. 주중에 참석률이 저조했던 상황과는 다르게 주일에 드리는 구역예배와 지역예배는 전 성도가 마음을 같이 할 수 있었고 구역이 활성화되어 이전과 다른 교회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주중 사역은 심방에 중점을 두고 지역별로 사업장과 가정 심방을 하여 상담 및 기도로 성도 각 개개인의 신앙이 회복되는 것에 초점을 맞춰 진행하고 있다. 또한 1개 교구로 운영되던 것을 최근 1교구(긍정교구), 2교구(감사교구)로 교구 분할하여 각 교구 내에서 모이고 협력하는 분위기를 만들었고 1교구와 2교구는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며 전도에 열심을 다하고 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생각의 틀을 깨고 나니 교회 분위기에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오게 되었고 예배가 활성화되니 성도들의 닫혔던 마음들도 하나둘씩 열리기 시작했다. 여의도순복음목포교회는 다음 세대를 위한 공간을 마련 중이며 순복음 다운 교회를 꿈꾸며 오늘도 절대 긍정의 믿음으로 달려가고 있다. 새로운 변화의 시작은 고정관념을 버릴 때 시작된다.
  • 2025.08.15

    변성우 목사(여의도순복음강동교회 담임) - 좋은 일이 오려나 보다!
  • “좋은 일이 오고 있습니다.” 제가 사역하는 여의도순복음강동교회의 인사입니다. 우리 교회는 2023년 11월 1일부터 강동구 천호동에서 새롭게 시작하였습니다.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매일 매일 성실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의 인도함 속에 지내다 보니 벌써 21개월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환경과 상황은 좋을 때보다 힘들 때가 더 많았고 현재도 어려움 속에 있는 분들도 있지만 성도들은 좋으신 하나님을 믿고 소망하며 늘 그것을 입술로 고백하며 기도하고 서로 축복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현재의 고난과 어려움에 소화되지 않고 매일 매일 승리의 삶을 살며 누리고 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소망하고 믿음으로 살며 서로 사랑하며 기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섬기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좋은 일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갖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알고 믿으면서도 우리가 맞이하는 현실은 이 믿음대로 사는 것을 어렵게 합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믿음의 담대함보다는 걱정과 근심을 더하게 하기도 합니다. 바벨론의 침공과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며 유다의 회개를 촉구했던 예레미야는 유다가 멸망할지라도 하나님의 계획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며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렘 29:11).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며 응답하시고, 심지어 크고 비밀한 것을 알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렘 29:12~13, 렘 33:3). 강동교회 성도들은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아픈 사람이 없고 가난한 사람이 없는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란 기도를 드립니다. 이렇게 기도하며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좋은 일들을 기대하고 소망하니 믿음의 지경이 좀 더 넓고 깊어진 것 같습니다. 큰 부흥은 아니더라도 날마다 성도가 늘어나며 구원받는 사람의 수가 더해지고 이런 일들이 우리가 좋으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소원하는 것을 바라보며,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좋은 일이 오려나 보다!’란 기대와 소망을 갖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좋은 일들을 만나게 되고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기적이 일어나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엄청나게 좋은 일이 오고 있습니다.
  • 2025.08.01

    김현동 목사(마포2대교구장) - 지금 문안(問安)하세요!
  • 얼마 전 대교구로 발령을 받아 사역을 시작하면서 어떤 준비가 필요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때였다. 때마침 목회의 대선배이신 한 목사님으로부터 격려와 조언의 말씀을 듣게 되었는데, ‘인사 잘하세요!’라고 조언해 주시는 것이었다. 평상시 본인께서 인사를 잘하시는 모범을 보여주신 분이었기에 ‘인사’를 강조하신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했지만 많은 강조 사항 중에서도 ‘인사’를 제일 먼저 말씀해 주신 것은 뜻밖이었다. 수십 년 목회 사역을 해오신 대선배님께서 사역의 핵심 노하우를 조언해 주셨을 터인데 ‘인사’가 이토록 중요한지는 이제껏 알지 못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사’에 대한 표현은 ‘문안’(問安)이다. 헬라어로는 ‘아스파사스데’라고 하며, ‘인사하다’, ‘문안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러면 성경에 ‘문안’이라는 표현을 가장 많이 쓴 사람은 누구이고, 어떤 성경에서 가장 많이 강조하고 있을까? 목적 지향적으로 보이는 바울이 ‘문안’(問安)이라는 관계적인 표현을 가장 많이 사용하였고, 그가 지은 ‘로마서’에서는 16장이 ‘인사’ 바로 ‘문안’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신약학자는 ‘문안’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 ‘아스파사스데’가 신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총 59회 등장하는데, 이 중 41회가 바울 서신서에서 사용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바울을 ‘인사를 중시하는 매우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고까지 평가하고 있다. 마지막 장인 16장을 온전히 ‘문안’에 대한 내용으로 채우고 있는 로마서의 경우에는 ‘문안’에 대한 언급을 무려 17회나 반복하고 있다. 30여 명이 넘는 다양한 배경과 신분을 가진 사람들에게, 심지어 로마에 가 본 일이 없는 바울은 얼굴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문안’하도록 명령하거나 ‘문안’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목회 대선배님의 귀한 조언은 대교구 사역에 큰 도움과 활력을 주고 있다. 그저 밝은 얼굴로 ‘인사’ 한번 드렸을 뿐인데, 특별한 용건은 없지만 건강하신지 어려운 일은 없으신지 ‘문안’ 전화 한번 드렸을 뿐인데 성도님들로부터 돌아오는 반응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바울과 같이 아무리 능력 있고 탁월한 사도라고 할지라도 ‘문안’과 교제 그리고 위로하는 것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전도와 선교는 혼자서 감당하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인사’가 어떠한 신학적인 교리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믿음의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넣고 풍성한 교제가 일어나게 하는 ‘문안’, 말씀대로 실천할수록 더욱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된다. 오늘 성령님께서 마음 속에 생각나는 이에게 주저 말고 연락해 보면 어떠할까? 지금 문안(問安)하세요!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롬 16:16).
  • 2025.07.25

    윤호근 목사(은평대교구장) - 선택
  •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인생은 B와 D사이의 C다”라고 말한다. 인생은 태어남(Birth)과 죽음(Death) 사이에 있는 선택(Choice)의 연속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한 연구에 따르면 평범한 사람이 하루 동안 내리는 의사 결정은 약 3만5000회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는 눈을 뜨는 순간부터 크고 작은 선택 앞에 놓인다. 오늘 어떤 옷을 입을지 어떤 길로 갈지 무엇을 먹을지…. 삶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그때 왜 그렇게 선택했을까?”라는 후회 속에 머물게 된다. 인간은 기억의 존재이다. 그런데 이 기억의 창고는 유독 실패, 후회, 상처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더 깊이 저장한다. 이러한 기억들은 때때로 우리의 발걸음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선택을 막는 보이지 않는 굴레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때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우리의 모든 선택 위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이 있다는 사실이다. 사르트르는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라고 말했지만 하나님의 자녀에게 “인생은 B와 D 사이의 C, 곧 Christ(그리스도)”이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지만 그 모든 선택 가운데 중심되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요 14:6),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하든 그 길에 주님은 함께 하시며 때로는 우리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길 위에서도 주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이루어 가신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야훼시니라”(잠 16:9). 잠언 기자는 우리가 어떠한 선택과 계획을 할지라도 결국 우리를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선포한다. 때때로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하고 설령 실수하고 넘어질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 실패마저도 직조하셔서 놀라운 은혜의 작품으로 빚어 가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모든 선택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절대 긍정하고, 선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절대 감사하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 2025.07.18

    김진태 목사(영등포대교구장) - AI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의 지혜
  • AI(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 지능)가 현실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인간의 영역을 점유하고 대체하는 모습은 놀라움을 넘어 때로는 위협감마저 느끼게 합니다. 공영방송 신입사원 채용 광고에 가상 인물이 등장하고, 범죄 재연 영상이 AI로 대체되는 사례는 기술 발전의 속도와 파급력을 실감하게 합니다. 이러한 AI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합니다. AI 기술을 무조건 거부하거나 두려워하기보다 기술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분별력 있게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AI는 인간의 편의를 증진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강력한 도구이지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한 존재는 아닙니다. 일본은 인간을 대체할 로봇을 서비스, 복지 등 여러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점점 사람을 닮아가고 사람을 대체하는 AI 기술력이 만들어져도 그것이 인간의 모든 영역, 특히 영적인 영역까지 대체할 수 없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AI는 방대한 성경 지식을 학습하여 설교문을 작성하거나 신학적 논쟁에 대한 답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AI가 제공하는 지식은 데이터 기반의 논리적 추론일 뿐 인간만이 경험할 수 있는 영적인 깨달음이나 감동과 계시를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AI를 신앙의 보조 도구로 활용하되 궁극적인 진리의 원천은 오직 성경과 하나님의 계시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AI는 지능적이고 효율적인 작업을 수행할 수 있지만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사랑, 연민, 공감, 창의성, 도덕적 판단력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영적인 차원은 결코 모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첫째, 깊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이루는 개인적 영성과 둘째, 깊은 관계를 맺는 능력, 아름다움을 느끼고 창조하는 능력 그리고 고통받는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회적 영성을 발전시켜야 할 것입니다. AI는 인간의 관계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가상현실, 소셜 미디어 등 디지털 환경 속에서 인간 관계는 더욱 복잡해지고 때로는 피상적으로 변모할 수 있습니다. AI는 정보를 제공하고 효율성을 높일 수 있지만 인간적인 공감, 위로, 돌봄 등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통한 관계 형성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따뜻하고 친밀한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강화해야 합니다. 소외된 이웃을 돌보고 고독을 느끼는 이들에게 위로를 제공하며, 디지털 피로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영적인 안식처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직 믿음 안에서 진정한 인간 관계의 가치를 회복하고 신앙공동체의 본질적인 역할을 더욱 강조해야 합니다.
  • 2025.07.11

    김정대 목사(용산대교구장) - 신앙의 구간단속 - 십자가 앞에 멈추는 시간
  • 내가 살고 있는 파주에서 서울로 오가는 길목마다 구간단속 카메라가 있다. 한 지점을 빠져나가던 속도만으로는 과속 여부를 알 수 없어서 시작과 끝, 그 사이를 어떻게 달려왔는지 시간을 계산해서 판단한다. 단속 구간 안에서는 운전자가 속도를 의식해야 하고 스스로 규정속도를 조절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닮아 있다. 예배의 자리에서 은혜를 받고 결단하지만 다시 삶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종종 속도를 잃는다. 세상의 흐름에 쫓기고 분주함에 밀려 주님의 뜻보다 앞서 달리기도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신앙의 구간단속’을 허락하신다. 그것은 때로 문제이며 때로 고난이고 갑작스런 멈춤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징계가 아니라 주님의 초대이며,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속도를 줄이며 멈추고 방향을 다시 설정하라는 부르심이다. 그 구간에서 우리는 회개의 길에 들어선다. 회개는 단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속도를 자각하는 일이며 내 신앙이 너무 앞서갔는지, 혹은 주님의 마음을 잊은 채 달려왔는지를 직면하는 자리다. 이 멈춤은 두려운 시간이 아니라 내면의 정비이고 영적 점검이다. 또한 그 시간은 말씀을 다시 붙드는 순간이다. 말씀은 우리의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고 목적지를 잊지 않게 하는 나침반이다. 하나님의 뜻을 잊지 않기 위해 삶의 속도를 조율하기 위해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낮추고 다듬는다. 말씀 없는 속도는 결국 탈선으로 이어진다. 무엇보다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성령은 삶의 속도와 방향을 감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다. 조용히 말씀하시고 필요할 땐 멈추게 하신다. 주님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우리 마음에 속도표를 새기신 분이다. 신앙의 구간단속은 결국 십자가 앞에 멈추는 것이다. 십자가는 단순한 고난의 상징이 아니라, 바른 신앙의 기준이다. 세상이 달려가라 말할 때도, 십자가는 멈추라 말씀하신다. 멈춤 속에서 우리는 다시 중심을 잡고, 주님의 속도에 걸음을 맞춘다. 오늘 당신의 삶에 구간단속의 시간이 있다면 그것은 축복이다. 속도를 줄이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요즘 여름 금식성회가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서 열리고 있다. 잠시 달려가는 길을 멈추고 성회에 참여하여 십자가를 바라보자. 우리의 삶은 바르게 가는 것이 빠르게 가는 것보다 중요하다. 신앙은 도착보다 ‘동행’의 길이며 그 길 위에서 주님의 손을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 2025.07.04

    최진용 목사(강서1대교구장) - 젊고 건강하게 사는 비법
  • 어느덧 한 해의 절반을 지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 삶을 잠시 돌아보면 나이 듦이라는 단어에 얽힌 감정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나이 든다’는 것을 곧 ‘늙는다’고 여겨 한숨을 쉬고 그래서인지 실제로 더 빠르게 노화를 경험하곤 한다. 그런데 이 노화는 단순히 신체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일본의 정신과 의사 와타 히데키는 『사람은 감정부터 늙어간다』라는 책에서 흥미로운 통찰을 전한다. 그는 “노화는 지력이나 체력보다 감정에서 먼저 시작된다”고 말한다. 지능이나 지성은 비교적 늦게까지 유지되지만 감정은 세월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감정이 먼저 늙으면 육체도 빨리 따라 늙고 반대로 감정이 젊으면 몸도 자연스레 활력을 되찾게 된다. 그러니 ‘감정의 젊음’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젊고 건강하게 사는 비결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감정의 노화를 막을 수 있을까? 성경 빌립보서 4장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기뻐하라, 관용하라, 염려하지 말라, 감사하라.” 이 말씀은 단지 마음을 다스리라는 조언이 아니다. 이 네 가지는 감정의 영역이자 믿음의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영적 무기이다. 기쁨, 관용, 감사는 건강한 감정이지만 원망과 염려는 감정을 병들게 한다. 우리 마음이 원망과 불평, 걱정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면 그것은 이미 감정이 늙어버렸다는 증거이다. 감정도 습관이다. 자꾸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히면 어느덧 우울한 것이 일상이 된다. 감정은 기질의 영향을 받지만 훈련을 통해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다. 날마다 절대 긍정, 절대 감사를 선포하고 삶에 실천을 해 나가면 성령께서 우리의 감정을 도우시고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신다. “기뻐하고 감사하자! 사랑하고 용서하자! 염려하지 말고 여유 있는 미소로 살자!” 감정의 늙음을 거절할 때 영적 젊음을 지키고 육체도 함께 회복된다. 그것이 곧 젊고 건강하게 사는 비법이며 모든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길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4~7).
  • 2025.06.27

    김영석 목사(선교국 담당) - 선교의 불을 다시 지필 때입니다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마 28:19). 2025년 한국 교회는 복음 선교 140주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1885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조선 땅에 첫 발을 내딛은 그날의 순종과 헌신은 140년이 지난 오늘날 세계 170개국에 2만1000여 명의 장기 선교사를 파송하는 결실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수치는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이정표에 불과합니다. 신록이 짙어지는 6월을 맞아 제51회 순복음세계선교대회가 열립니다. 이번 대회는 전 세계 67개국에 파송된 673명의 선교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는 주님의 사명을 새롭게 되새기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특히 여의도순복음교회 창립 70주년을 3년 앞두고 열리는 이 대회는 한국교회 선교의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선교의 지형은 급속히 변하고 있습니다. 북반구 중심에서 남반구 중심으로, 교회 중심에서 도시와 일상 중심으로, 그리고 현장 선교에서 디아스포라 사역과 디지털 미션으로 그 흐름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안에도 300만명이 넘는 해외이주민과 다문화 가정, 외국인 유학생들이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먼 나라의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가 복음으로 품고 섬겨야 할 ‘이웃’입니다. 이제는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시대를 넘어 현지 교회와의 깊은 협력, 다음세대 선교 인재 양성, 국내 이주민과의 연합 사역이 요청되는 시대입니다. 단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넘어서,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는 선교 공동체’로의 전환이 절실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태복음 28장 19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는 140년 전 낯선 이 땅에 복음을 들고 온 선교사들의 심장이었고 오늘날 우리가 다시 붙들어야 할 사명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성령의 이름으로 선교의 불씨를 다시 타오르게 할 때입니다. 모든 성도의 기도와 헌신이 한국 교회에 다시금 뜨거운 선교의 불길을 타오르게 할 것입니다. 이 선교의 맨 앞에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선교사들이 절대 긍정의 믿음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 2025.06.20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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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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