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평균의 종말 - 조지훈 목사 (순복음선교연합회 담당)
  • 토드 로즈가 쓴 『평균의 종말』이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1940년 말 미국 공군은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다. 비행기 성능이 좋아졌지만 많은 사고가 여러 기종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원인을 찾던 조사 담당자들은 비행기 조종석 설계로 눈을 돌렸다. 조종석을 최초로 만들었던 것은 1926년이었다. 당시 엔지니어들은 조종사 수백 명의 신체 치수를 잰 뒤 평균을 냈고 이를 기준으로 조종석을 만들었다. 평균에 맞추어 조종석 내부와 헬멧의 크기 등을 정했던 것이다. 평균에 바탕한 기준은 30년이 넘도록 변하지 않았다. 이에 조사 담당자들은 조종사들의 체격이 이전보다 커졌을 것이라고 추측했고 조종사 평균 치수를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새로운 평균에 따라 비행기를 설계하면 많은 문제가 개선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연구원 중 길버트 대니얼스 중위는 이런 해결책에 의문을 가졌다. 대학 시절 남학생 250명의 손 모양을 비교·분석했던 그는 어떤 학생도 평균치의 손 모양을 가지지 않았다는 결론을 얻은 적이 있었다. 그의 문제 제기에 따라 조사한 결과 조종사들의 신체 치수의 평균에 맞는 조종사들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개인 맞춤형 조종석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새로운 원칙이 마련됐다. 조절 가능한 조종석, 조절 가능한 헬멧 조임 끈, 조절 가능한 비행복 등이 제작됐고 이후 미 공군은 최강의 공군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세상은 여전히 평균을 추종한다. 그 평균 속에서 우리 각자의 얼굴은 사라져버리고 우리 각자가 가진 고유한 삶의 이야기도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평균을 지향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에게 우리는 각자의 얼굴을 가진 소중한 존재들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새로운 소명을 거부했던 모세에게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 3:15)이라고 소개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다른 방식으로 만나주셨고, 그들 각자의 삶을 다른 방법으로 인도하셨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지금, 이곳에서 우리 각자의 삶을 다른 모습, 다른 방식, 다른 색깔로 인도하신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우리만의 고유한 얼굴을 갖는다. 우리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갖는다. 우리만의 고유한 색깔을 갖는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 안에서 언제나 평균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오늘도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영원히 변치 않는 방법이시다.
  • 2023.11.24

    ‘만종’에 그려진 감사의 기도 -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장 프랑수아 밀레는 프랑스 화가로서 ‘씨 뿌리는 사람’, ‘이삭 줍는 여인들’, ‘만종’ 등 농부들의 일상을 그린 작품들로 유명하다. 특히 ‘만종’은 프랑스의 자랑이라고 여겨지며, 빈센트 반 고흐, 클로드 모네와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우리나라의 박수근 화백이 열두 살 때 만종의 원색 도판을 처음 보고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 달라고 늘 기도했다는 이야기가 알려져 있다. ‘만종’(저녁 종)의 원제목은 ‘삼종기도(L'Angelus)’이다. 중세 시대 하루에 세 번(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시) 교회 종이 울릴 때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를 말한다. 이 그림은 늦가을 무렵 울긋불긋 물들어 가는 노을을 배경으로 그려져 있으며, 감자 수확 중인 남녀 한 쌍(아마도 부부)이 마주 서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채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담고 있다. 해 질 무렵 어둑해진 분위기와 노란색 석양이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따듯함과 평안함을 느끼게 한다. 무엇보다 저 멀리 지평선 위로 작고 흐릿하게 보이는 교회 종탑에서 은은한 종소리가 들판 전체로 울려 퍼지고 있는 듯하다. 밀레는 어릴 적부터 농사짓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온몸으로 느끼며 자랐다. 그리고 힘들게 일하면서도 진심으로 땅을 아끼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화폭에 담았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가난한 프랑스 농민의 일상을 통해, 힘들고 고달픈 상황 가운데에서도 감사하며 주어진 삶을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밀레는 ‘만종’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를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종은 내가 옛날의 일을 떠올리면서 그린 그림이라네. 옛날에 우리가 밭에서 일할 때 저녁 종 울리는 소리가 들렸지. 어쩌면 그렇게 우리 할머니는 한 번도 잊지 않고 꼬박꼬박 우리 일손을 멈추게 하고는 삼종기도를 올리게 하셨는지 모르겠어. 그러면 우리는 모자를 손에 꼭 쥐고서 아주 경건하게 고인이 된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곤 했지!” 만약 밀레가 자기 경험을 그림에 투영해서 그린 것이라면 만종 속 부부의 기도는 단순히 자신들이 수확한 감자에 관한 감사 기도가 아니었다. 그들은 갓 캐낸 감자 앞에서도 고통과 죽음 가운데 있는 다른 이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크고 작은 수확을 감사하는 데 그치지 말고, 이 순간도 전쟁과 기근과 지진과 가난 가운데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자. 그들을 위해 아침저녁으로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우리의 모습은 온 세상 사람들에게 큰 감동과 울림을 주는 한 폭의 명화가 될 것이다.
  • 2023.11.17

    소유보다 귀한 것 - 김진수 목사(서대문성전 담당)
  • 가을에는 좋은 날씨 덕분에 종종 막내 아이를 뒤에 태우고 자전거를 탄다. “아빠는 언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어요?” 아이가 물었다. 어렸을 때 많이 아팠던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야 자전거를 처음 탔고, 이어 첫 자전거를 갖게 된 이야기도 해주었다. 당시 아버지께서는 출퇴근 하실 때 자전거를 이용하셨는데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싶은 마음에 내 자전거가 갖고 싶다고 말씀 드렸다. 며칠 후 아버지께서는 새 자전거를 선물해주셨는데 아버지의 출퇴근용 자전거를 팔고 나를 위해 자전거를 사오셨다는 사실을 알고 울컥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아이가 “그 때는 따릉이가 없어서 빌려 탈 수 없었나 봐요. 난 지금 아빠랑 같이 탈 수 있는데요”라고 하는데 문득 얼마 전 읽었던 기사가 떠올랐다. 2024년 메가트렌드 중 하나가 소유에서 임대로 개념이 이전된다는 것이었다. 기존세대처럼 무리하게 집 한 채를 소유하기보다 소비자 라이프 스타일에 맞추는 렌탈 수요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성경에도 소유하지 않는 삶을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 계시다.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우리 삶이 “소유한 것에 의해 보장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12장 말씀처럼 내 영혼을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많이 쌓아놓은 소유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작게는 자전거부터 크게는 집까지 우리는 매일 소유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쌓아가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 열심들이 내 것을 소유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영혼의 구원을 위한 사명과 나눔에 이어지지 않는다면 헛수고나 다름없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무소유에 가까운 삶을 사시고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내가 필요한 것을 이미 아셔서 채워주실 것이니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소유에 대한 마음이 내려놓아지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인생의 최종목적지’를 떠올리면 된다. 시편기자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라고 했다. 인생의 최종목적지가 주어진 생애뿐이라면 소유에 몰두해도 상관없겠지만, 우리 인생의 최종목적지는 생애를 넘어서는 곳에 있으니 본질에 집중하여 달려가는 편이 훨씬 가치 있는 일이 된다. 짧은 인생, 유행에 민감하고 소유에 몰두하기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그 나라에 주의 백성들이 돌아오도록 이끄는 인생으로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공급해주시고 덤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줄 믿는다.
  • 2023.11.10

    영적 감수성 - 이인천 목사(기도원 교구 대교구장)
  • 성경 로마서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합니다. 영어로 ‘듣다’라는 단어는 ‘히어링’(hearing)과 ‘리스닝’(listening)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히어링’은 내 귀에 들리는 모든 소리를 말합니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들리는 소리의 총체를 의미합니다. 이 소리는 집중하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를 의미합니다. 반면 ‘리스닝’은 집중해서 듣는 소리,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 소리를 의미합니다. ‘리스닝’이란 어느 특정 공간, 특정 시간에 의지를 가지고 집중해서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설교를 들을 때, 교실에서 수업을 들을 때 ‘리스닝’을 합니다. 여러분께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할 때, 그 들음은 ‘리스닝’일까? ‘히어링’일까요? 영어 성경에서는 ‘히어링’으로 되어 있고, 원어에는 ‘아코아’로 되어 있습니다. ‘아코아’는 집중해서 듣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냥 소문, 풍문, 집중하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할 때, 하나님은 특정 장소, 특정 시간, 특정 공간에서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장소, 모든 상황, 모든 관계, 모든 환경에서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켄 가이어가 쓴 『영혼의 창』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켄 가이어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영적인 감수성’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허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사람, 들에 핀 꽃, 인간관계, 삶의 모든 순간, 모든 영역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적 감수성은 몸의 근육을 키우는 것처럼 영적 감수성을 키우면 키울수록 하나님에 대해서 예민해집니다. 그럴 때 우리는 모든 순간, 모든 상황, 모든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약속의 땅을 알고 간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히브리서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약속의 땅으로 나아갔다”고 말합니다(히 11:8). 아브라함은 매 순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향해 칼을 내리치는 순간까지도 모든 상황, 모든 환경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아브라함은 아들을 향해 칼을 내리치는 그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해 이삭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상황, 모든 순간, 모든 공간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11월 깊어져 가는 가을, 자연을 바라보며 화창한 하늘과 단풍들 그리고 울창한 숲에서 숨어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는 것은 어떨까요?
  • 2023.11.03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왜 만드셨을까? - 이성광 목사(동작성전 담당)
  • 하나님은 아담을 위해 에덴동산을 만드셨습니다. 동산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드셨을까요?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들지 않았으면 아담이 죄를 범하지 않았을 텐데”라고 생각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드신 이유는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선악과는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가 되시고 사람은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아담은 자신이 먹지 못하는 선악과를 보면서 온 세상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깨닫습니다. 또한 선악과를 볼 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것은 선악과만을 금지시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 외에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금지하는 선악과만 볼 것이 아니라 선악과 외에 모든 것을 주신 것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통치하게 맡겨주셨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선악과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순종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의 사랑의 관계를 맺기 원하셨습니다. 사랑의 관계는 인격적이며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강압적이거나 억지로 하면 그것은 사랑의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로봇이나 기계와는 인격적 관계나 사랑의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조종할 수 있는 버튼이 있어서 ‘찬송 버튼’을 누르면 찬송을 하고 ‘기도 버튼’을 누르면 기도하고 ‘순종 버튼’을 눌렀을 때 순종한다면 이것은 기계와 같습니다.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통해 하나님을 순종하거나 불순종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자유의지가 있어야 진정한 사랑의 관계가 맺어집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에서 비롯된 선택에서 나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면 하나님에게는 아담의 사랑과 순종이 아무런 기쁨을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했을 때 하나님은 그 사랑이 기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주신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할 가능성이 있는 것을 알지만 하나님이 아담과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원하셨고 그만큼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선악과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상징하는 동시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 2023.10.27

    땅따먹기 - 김범석 목사 (광명성전 담당)
  • 소싯적 마땅한 놀 거리가 없던 시절, 자주 했던 놀이로 ‘땅따먹기’가 있었습니다. 고르고 넓은 땅에 커다랗게 네모진 사각형을 그리고, 한 모퉁이에 한 뼘만 한 크기로 둥그렇게 그려 각자의 집으로 정합니다. 그리고 납작하고 반듯한 작은 돌멩이를 골라 손가락으로 세 차례 튕겨 집으로 돌아오면, 그만큼은 내 땅이 되는 놀이였습니다. “내 땅을 차지한다”라는 기대감은 매력적으로 다가와 땅 차지 욕심으로 아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즐겼던 놀이였습니다. 이 놀이를 제 두 아이에게 가르쳐 주고 놀게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두 아이는 학교 운동장에서 아주 즐겁게 놀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티격태격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내 땅이, 네 땅보다 더 크다, 아니야 내 땅이 더 커.” 두 아이는 자신이 가진 땅이 서로 크다고 목청을 높였습니다. 그 광경을 잠시 지켜보던 제가 말했습니다. “애들아, 그만 집에 가자.” 그러자 언제 그랬었냐는 듯 아이들은 손을 털고 일어나 제 뒤를 따랐습니다. 납작한 돌멩이도, 널따랗게 그려진 땅도 다 뒤로 하고 말입니다. 요즘 문득 그때 일이 떠오릅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너나 할 것 없이 “내 땅이 크다” “내 말이 옳다”는 목청 높인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옵니다.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 들리고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며 옥신각신하는 세태를 바라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제는 어릴 적 ‘땅따먹기’를 하는 마음으로 세상과 현실에 가지고 있던 욕심을 내려놓아야 할 때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이 땅에 모든 걸 남겨놓고 하늘 천국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이 땅이 아니라 하늘 창고를 채워야 할 때라는 확신이 드는 건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신발 끈을 다시 고쳐 묶고 하늘 곡간을 채우는 복음의 ‘땅따먹기’를 더욱 줄기차게 해야겠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 6:19~20).
  • 2023.10.20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하나님이시라 - 장재욱 목사(경인성전 담당)
  • 요셉의 일생은 파란만장했다. 어찌나 마음고생이 심했던지 요셉은 형들보다 단명(短命)할 정도였다. 요셉의 일생을 담은 창세기를 읽다보면 우리네 인생의 애환이 고스란히 떠올라 나도 몰래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요셉의 이야기를 단순히 읽는 것만으로도 그러하니 본인의 삶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웠으랴. 형들을 만났을 때 나 같으면 “당장 저들을 옥에 가두고 한 놈씩 매우 쳐라” 하고도 남았을 텐데 요셉은 그렇지 않았다. 가히 예수님의 예표라 할 만한 인성이다. 요셉이 형들에게 보여준 모습을 통해 요셉의 신앙을 본다. 그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 그릇에도 꼭 담아야 할 보물이다. 첫째, 요셉은 형들의 두려움을 오히려 위로하고 안심시켰다. 요셉은 자신의 실체를 알게 된 형들을 먼저 안심시켰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라고 하면서 인생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재확인한다. 형들의 시기와 죄악으로 요셉이 무수한 고난을 당했음에도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을 밝히기 전에 이미 마음속으로 형들을 용서하였던 것이다. 형들은 형들의 수준에서 요셉을 바라보고 죽음의 두려움을 느꼈다면 요셉은 이미 예수님과 같은 인성을 가진 사람이 된 것이다. 둘째, 요셉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7~8). 하나님의 계획된 섭리가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는 이야기다. 형들은 악을 행하였으나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셨다는 것을 말한다. 요셉의 하나님은 우주 최고의 지혜자이셨고 주관자이셨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우리 인생이 요셉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비슷한 고난을 만날 때가 있다. 이영훈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마음으로 생각을 바꿔야 한다. 마음을 고쳐먹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다. 내 마음속의 미운 형들을 바라보지 말고 요셉의 하나님을 바라보자.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낼 사람을 찾고 계신다.
  • 2023.10.13

    갓생 살기 - 박창호 목사(금옥성전 담당)
  • ‘갓생살기’란 말이 있다. ‘갓생’은 Z세대가 최고로 좋은 것을 표현할 때 쓰는 ‘갓(god:신)’과 ‘인생’을 합친 신조어로 하루하루를 계획적으로 열심히 살며 타의 모범이 되는 성실한 삶을 뜻한다. ‘갓생살기’는 특정한 목표를 정하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최선의 일상을 만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새벽 4시에 일어나기’, ‘하루 30분 걷기’, ‘물 5잔 이상 마시기’ 등 소소하지만 목표 지향적인 자신만의 루틴을 세워 실천해 나갈 때 ‘갓생’을 살 수 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한 우울감과 무력감 등 자기 관리 욕구가 높아지면서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라이프스타일로 갓생살기 프로젝트가 유행하고 있다. 항저우아시안게임 여자 배드민턴 단체전 결승에서 대한민국은 무려 29년 만에 만리장성을 넘어 금메달을 땄다. 대표팀 에이스 안세영 선수가 첫 게임에서 승리하며 승기를 잡은 결과다. 5년 전 배드민턴 천재 소녀 안세영은 혜성같이 등장했다. 하지만 처음 나간 2018년 아시안게임에서 세계 1위 중국의 천위페이를 만나 힘 한번 못 쓰고 완패했다. 실망이 컸지만 안세영은 좌절하지 않았다. 그저 하루도 거르지 않고 훈련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후 5년 뒤 열린 아시안게임 여자 단체전 결승에서 중국의 천위페이와의 설욕전에 성공하고 금메달을 따낸 안세영은 이렇게 말했다. “내 훈련량을, 내 스스로를 믿었다.” 목표를 정하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한 갓생살기의 결과였다. ‘갓생살기’처럼 목표를 정하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계획적으로 열심히 살며 타의 모범이 되는 성실한 삶의 모습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이다. 추석이 지나며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이 가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되자. 천국 금메달을 향한 목표를 세워보자. ‘하루 1시간 새벽기도하기’, ‘하루 성경 20장 읽기’, ‘하반기 1명 반드시 전도하기’.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위한 목표를 세우고 하루하루 열심히 기도하며 꿈을 갖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이 새 힘을 주신다.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신다. 다시 순복음의 헌신과 열정을 회복하고, 뜨겁게 예배하며, 부흥을 향한 기도의 손을 들고 간절히 부르짖는 순복음의 ‘갓생러(갓생을 사는 자)’들이 각자의 처소에서 불 일듯 일어나기를 꿈꾸어 본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 43:19).
  • 2023.10.06

    더딜지라도 기다리자 - 임지택 목사(천안순복음소망교회 담임)
  • 추석이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추석은 순우리말로 ‘한가위’로도 불리며 설과 함께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특히 ‘한가위’는 그 유래가 신라시대로 올라갈 만큼 우리 민족의 독특한 명절로써 풍성한 오곡백과를 거둬들여 한 해 동안 받은 복에 감사하며 가족 친지와 이웃들과 나누는 날이기에 ‘중추가절’ 혹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하는 것이다. 그러나 명절만 되면 종교적 갈등을 겪는 가정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가족 모두 구원받은 믿음의 가정은 당연지사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생각하고 어려움 가운데서도 지켜주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추석을 맞이하겠지만,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이 있는 가정은 유교적 관습인 차례를 지내는 것으로 인하여 종종 갈등을 빚는 것을 볼 때가 많이 있다. 우리 가정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지 얼마 안 되어 추석을 맞이했을 때가 기억난다. 예수 믿기 전엔 유교적 관습에 젖어 있던 아버지는 추석 차례상을 고집하셨고, 고생하는 어머니에게 격려가 아닌 타박을 하기 다반사였다. 가족, 친척들이 추석을 맞아 오랜만에 모일 때 면 늘 어른들은 어릴 때 자랄 때 추억 등을 이야기하다 끝은 늘 누구에게 서운했던 것, 섭섭했던 것,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다 큰 소리가 오가곤 했다. 명절 스트레스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명절 문화에 익숙해져 있던 우리 가정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아버지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성령을 받고난 후 큰 결심 끝에 가족들에게 앞으로는 명절 때 가정예배를 드린다는 말씀을 하시고, 차례상이 아닌 가족들이 먹고 싶은 음식을 준비해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린다고 한 것이다. 추석 가정예배를 드리는 감격스러운 날 아버지는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셨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명절을 맞아 종교적 갈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분들은 힘을 내시길 바란다. 성경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난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참기 어려운 고난을 이겨낸 사람들임을 기억하길 바란다. 고난이 문제가 아니라 고난을 이기지 못 하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며 고난을 이기고 나면, 고난이 없었던 것보다 더 큰 축복과 은혜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비록 더딜지라도 소망 가운데 가족구원을 놓고 기도하며 기다리면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역사가 가정에 임할 줄 믿는다. 역경 속에서도 이 또한 반드시 지나가리라는 것을 늘 믿음으로 바라보며, 절대긍정과 절대감사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이 있는 추석이 되기를 소망한다. “야훼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07:1).
  • 2023.09.22

    처음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 - 이동규 목사(여의도순복음은계교회 담임)
  • 우리는 처음 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심리학에서는 첫인상이 주는 효과를 ‘초두효과’라고 한다. 대체로 대인관계에서 첫인상이 전체의 이미지에 영향을 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내가 교회 처음 출석했을 때 교회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교우들의 직업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고 있으며, 얼마나 배웠고 재산은 얼마를 가졌는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예수 안에서 서로 존중해주고 세워주며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모습이었다. 교회 안에서 선후배들과 믿음의 관계를 갖고 같이 봉사하며 한 주간 서로 안부를 묻고 생활하는 것들이 너무 아름답게 보였다. 교회의 롤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초대교회가 세워진 후 제자들은 스데반 집사의 순교 사건을 계기로 뿔뿔이 흩어져 헬라 지역의 안디옥에도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안디옥 교인들은 이전과는 다른 분명한 정체성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사람들로부터 듣게 되었다. 처음 그리스도인은 어떤 성도들이었을까? 그들은 무엇보다 복음을 전하는데 열정이 있었다. 전에는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하던 소극적인 태도에서 이방 헬라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게 된 것이다. 이 열정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구원해주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것보다 더 큰 은혜가 또 있겠는가?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를 전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열정 있는 성도가 처음 그리스도인의 모습일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도 이런 신앙의 열정을 회복해야 한다. 처음 그리스도인에게는 진한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나지 않았을까? 예루살렘 교회는 제자들 중 존경받는 바나바를 택해 안디옥으로 보낸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처음 그리스도인은 바나바처럼 예수님의 인격이 나타났다. 이를 통해 당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모두에게 선한 영향을 준 것이다. 그리고 바나바는 유대인들의 배척을 당했던 바울을 찾아내 형제, 동역자로 삼고 바울을 섬기는 모습을 보인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라면 어디든지 가고 무엇이든지 하며 자존심도 버리고 자기가 한없이 낮아져도 개의치 않았다. 이런 섬김과 연합의 모습이 처음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대변해준다. 우리도 ‘처음 그리스도인’처럼 그리스도의 향기와 섬김의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6).
  • 2023.09.15

    시간은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 - 이일섭 목사(새성북성전 담당)
  • 탈무드에 ‘시간은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라는 정의가 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 열매가 없자 내일에 대한 기대와 소망 없이 오늘을 버텨내며 살아가는 성도가 의외로 많다. 반복된 실패를 경험하고, 기다림에 지쳐 자기는 원래 타고난 실력과 운이 없어 불가능하다고 단정하며 내일은 불분명하니 오늘이라도 살아내자 생각한다. 기독교 신앙의 근본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 죽음에서 부활하신 부활의 예수님을 믿는 신앙,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며 도우시는 성령을 믿는 신앙이 그 골자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시간관이다. 세상 사람들은 인과율의 법칙에 따라 현재는 과거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흙수저 운명은 벗어나기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복된 실패를 경험해 보았는데 더 이상 미래가 있겠는가 하고 자기 인생을 예단해 버린다. 그러나 신앙인에게 있어 현재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미래를 향한 과정이다. 10년, 20년 실패가 문제겠는가? 나의 현재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새롭게 무에서 창조하실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이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을 얻었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한 현실에서 시작하셨다는 이야기이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의 노예에서 10가지 재앙과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경험한 후 약속의 땅으로 인도되었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는 인과응보라는 시간법칙도 무시된다. 집 떠난 탕자를 이미 용서하시고 기다리는 아버지와 같이 하나님을 떠나 죄의식, 패배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내일을 포기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죄 사함을 선언하신다. 칭의론의 중심 메시지는 “너는 너 자신을 포기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는다. 제발 믿어다오. 그리고 내가 함께 할 미래를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로부터 쌓인 현재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스스로 죄의식, 패배의식에 취하여 누군가가 그것을 이해해 주길 바라는 심리까지 작동한다. 예수님과 함께 과거는 다 무덤에 묻어버리고 부활의 주님이 나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실 것을 기다려보자. 성령님께서는 바람과 같이 온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 어디로부터 올지 모르지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거대한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믿음으로 참고 간구하자. 우리에게 임한 성령의 은혜가 우리의 삶과 생활 가운데 넘치도록 임할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 2023.09.08

    아직도 이 시대에 부흥이 일어나는가? - 김영석 목사(남구로성전 담당) 
  • ‘부흥’이란 영적 생명에 힘을 주고 생기가 돋아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죄 때문에 무력해져 있는 생명이 활기를 되찾고 소생하는 일을 ‘부흥’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이 포로로 잡혀 있을 때에 환상을 통해 뼈가 가득한 골짜기로 데리고 가서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냐고 물으셨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할 때 마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입혀져 가죽으로 덮혀 사람의 형태가 회복되었지만 아직 살아나지는 못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와 죽음을 당한 자에게 살아나게 하자 극히 큰 군대가 되었다. 마른 뼈들의 상태는 이스라엘의 죽어있는 영적 상태이며 또한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영적 상태를 말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움직이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나라들과 만물을 움직여 새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최근 미국의 에즈베리대학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기존의 전통적인 부흥운동과는 달리 부흥운동을 주도하는 인물이 없었다. 평범한 학생들이 찬송하고 기도하며 부흥운동을 이끌어 간다. 에즈베리의 부흥운동은 인터넷을 통하여 실시간으로 중계되었고 이것은 부흥운동의 역사상 가장 빨리 전 세계에 알려진 부흥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에즈베리대학 캠퍼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경험은 많은 사람들에게 21세기에도 부흥은 일어난다는 것을 확인해 주고 있다. 신디 제이콥스 등 많은 목회자들이 새로운 부흥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날 것이라며 한국교회도 놀라운 부흥의 파도를 타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교회의 부흥은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1903년 원산부흥, 1904년 웨일즈부흥운동, 1906년 아주사거리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등 이 모든 전 세계의 부흥이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다. 팬데믹 이후 침체된 한국 교회에도 에즈베리대학에서 일어난 부흥의 역사와 함께 놀라운 부흥의 불길이 다시 한번 타오르길 기대한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창립 70주년을 바라보면서 올해 5만명 전도 목표를 세우고 있는 가운데 이미 상반기에 약 1만4140명 전도가 달성이 되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기록인데 성령의 생기가 불어오면 가능하다. 이 시대에 아직 부흥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질문의 대답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부흥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는 분이기에 부흥의 비전을 간절히 사모하고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길 기대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는다.
  • 2023.09.01

    위기 탈출 - 이대현 목사(순복음창원교회 담임)
  • 최근 묻지마 칼부림 사건이 여러 차례 발생하면서 길을 가던 사람들도 순간 뒤를 돌아보거나 불안해하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호신용 무기 구입과 보험에 관한 문의도 쇄도한다고 한다. 요즘 교회에서 성경통독 에스겔을 읽고 있다. 에스겔서를 포함해 선지서 거의 대부분에서 빠지지 않는 말씀들을 보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하나님만 섬기라. 죄와 악을 버리고 회개하라”는 말씀이다. 구약성경을 읽다보면 왜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징그럽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까? 마음속으로 질문해 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주신 말씀을 보면 듣기만 할뿐 순종하지 않고 맞는 말씀으로 동의하면서도 위기의 순간에 자기들의 욕심을 따라 행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시려고 마음이 아프시지만 칼과 전쟁, 기근, 전염병의 위기를 보내신다고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잔혹한 심판이지만 하나님의 섭리적 관점으로 볼 때 구원하고 살리기 위한 것이다. 불안하고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형편은 별반 다르지 않다. 성경말씀도 알고, 어떻게 신앙생활 해야 되는 것도 알지만 많은 신앙인들은 내 중심적인 삶을 살다가 위기가 닥쳤을 때는 맡기지 못하고 더욱 내 방법에 매달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머리로는 알지만 결정적일 때 믿음의 방법으로 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된다. 문제와 위기 앞에 서봐야 그 사람의 진가가 나온다. 위기 앞에 여러 반응들이 있다. 피하기, 외면하기, 책임전가, 잠자기, 최선의 내 방법, 사람에게 하소연과 도움요청, 금식, 작정기도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붓지만 결정적일 때 내 방법과 내 뜻, 내 기준을 내려놓지 않으면 위기는 계속된다. 개혁(改革)은 한자로 고칠(개) 가죽(혁)으로 가죽을 벗겨내는 것처럼 힘든 것이 나를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완고하고 고집 센 마음의 가죽을 베라고 명령하신다. 믿음의 사람은 내 삶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우연이 없고 하나님의 섭리와 허락하심만 있다는 전제하에 진정한 위기탈출은 나를 진짜로 포기하고 내려놓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야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4).
  • 2023.08.25

    기후 위기와 신앙의 지경(地境) - 오장용 목사(마석교회 담임)
  • 이번 여름에도 전 세계가 기후변화로 몸살을 앓고 있을 때 한국도 폭염으로 예외는 아니었다. 지리적으로 알맞은 기후대(氣候帶)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물종(種)들의 다양성에 인간의 지나친 화석연료 사용으로 조기에 멸종되는 생물종들이 발생하는 심각한 수준이 다가오고 있다. 2000년에 들어와서 기후학자들은 2050년까지 이산화탄소배출량이 제로(탄소중립)에 이르지 못하면 지구온난화(global warming)로 인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 파멸의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런 심각한 경고 속에서 우리는 신앙의 자세를 어떻게 가져야 하는가. 기후변화로 인해 고통을 겪었던 상황들이 성경 곳곳에도 등장한다. 팔레스타인지역의 기후대에는 가뭄이 빈번하게 일어나긴 하지만 적절한 강우량이 있어서 목축과 농업을 통한 생계를 과거부터 이어왔다. 구약성경에 요엘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에도 가뭄과 메뚜기떼가 발생하자 선지자는 이러한 상황이 곧바로 하나님의 심판임을 알았다. 요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회개해야 할 징표로 삼았던 것이다. “슬프다 그 날이여 야훼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욜 1:15). 요엘 선지자는 지금의 기후변화와 같은 가뭄이나 재앙 수준의 환경을 바라보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보았다. 우리는 현재 기후변화가 위기의 상황으로 가는 절망적인 지점에 와 있다. 무심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신앙의 지경을 기후변화의 현상으로까지 넓혀야 한다. 대부분이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날씨의 변화에도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섭리로 인식하고 구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과학기술이 발전했다고 우리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현상을 신앙과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 결코 어리석은 일은 아니다. 우리는 당연히 그렇게 봐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환경으로도 임할 수 있음을 선지자들과 같은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치유와 축복의 환경을 허락하실 것이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야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욜 2:23).
  • 2023.08.18

    생명의 빛 - 이성우 목사(여의도순복음동탄교회 담임)
  • 미국의 대표적 복음주의 작가인 맥스 루케이도(Max Lucado)의 저서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주님』에 나오는 내용이다. 어느 중년 남자의 집에 갑자기 전깃불이 나갔다. 그는 촛불을 켜려고 양초를 모아둔 창고에서 양초 한 자루를 찾았다. 그런데 양초가 말을 한다. “주인님, 나는 아직 불을 밝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큰 빛을 밝힐 수 있는지 책을 읽고 있는 중인데 책을 다 읽지 못했습니다. 다음에 저를 사용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옆에 있던 다른 양초를 잡자 그 양초도 말을 한다. “주인님, 내가 불을 밝힌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묵상하는 중입니다. 아직 묵상에서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묵상에서 깨어날 때까지 내 몸에 불을 밝히는 것을 연기하면 안 되겠습니까?” 문득 옆에 나란히 서있는 네 개의 양초를 발견했다. 그들 중에 하나의 양초를 가지고 나가려 하니 네 개의 양초가 함께 소리를 지른다. “우리는 아직 불을 밝힐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합니다. 다른 초들이 훨훨 탈 때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노래 연습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결국 어떤 양초로도 불을 밝힐 수가 없었다. 그 남자는 불을 밝힐 양초가 한 자루도 없다고 투덜거리며 나왔다. 아내가 왜 양초를 가지고 오지 않았느냐 물었다. 그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아내가 화를 내면서 “무슨 그런 양초들이 다 있어요. 도대체 그 양초를 어디서 사왔어요?”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양초들은 건너편 마을의 문을 닫은 교회에서 사온 것이다. 그제야 부부는 그 양초들이 왜 그러는지 알았다. 이 시대에 불을 밝히기를 거부하는 교회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이 핑계 저 핑계로 불을 밝히기를 거부하는 인생은 결국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가복음 4장에 등불 비유가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등불을 은밀한 곳이나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어서 비취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등불을 켜기 위해선 기름도 필요하겠고, 크고 작은 수고가 있어야 어둠을 밝힐 수가 있다. 예수님은 어둠속에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그 십자가는 생명의 빛이다. 그것이 영혼 속에 비춰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빛의 사자가 되는 것이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 2023.08.11

    통·곡·기·도 - 안태경 목사(여의도순복음청주교회 담임)
  • 너무나도 애통하고 서러워서 울고 또 울었다. 밤새도록 울어도 울어도 그 눈물이 그치지 않는다. 죽음을 앞둔 히스기야 왕이 야훼 앞에 나아가 통곡하고 울었다. 히스기야 왕이 병들어 죽게 되자 선지자 이사야는 네가 죽고 살지 못할 것이라는 야훼의 말씀을 전했다. 이에 히스기야 왕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야훼께 기도했다. “야훼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왕하 20:3). 지난 14년을 어떻게 지냈는데, 그 사랑에 감격하고 그 친밀함에 뜨겁고, 하루하루 그 놀라운 역사와 능력에 얼마나 감격하고 그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하며 살았는데 이렇게 인생을 정리하라니요. 주님, 나 정말 죽어요? 어떻게 죽어요? 어떻게….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무기력함이 검은 구름처럼 그를 덮었다. 절대 절망의 또 다른 위기 곧 죽음의 구름이 몰려왔다. 이대로 죽는가? 이미 경험했던 승리의 경험은 아무 것도 아니란 말인가. 주님과의 친밀함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선지자는 이미 떠났고 더 이상 어디 찾을 곳이 없었다. 그가 눈을 들어 쳐다본 곳은 그저 벽뿐이었다. 주님, 여기가 끝인가요? 이 벽이 끝인가요? 그의 가슴에서 애통함이 솟구쳐 올라온다.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히스기야의 통곡이 얼마나 처절하고, 절박하고, 얼마나 간절했는지 성읍으로 나가던 선지자도 다시 돌아왔다. 히스기야를 고칠 방도를 찾았다. 그리고 무화과 반죽을 어찌어찌하여 상처에 붙였더니 놀라운 속도로 회복되는 것 아닌가(왕하 20:7). 이사야 선지자가 말했다. “야훼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야훼의 성전에 올라가겠고”(왕하 20:5). 살려면 다 사는 길이 있다던가. 히스기야는 다시 성전에 들어갈 수 있다는 선지자의 말을 곱씹으며 병상을 떨치고 일어났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하여 성전으로 나아갔다. 기도하면 산다. 성전에서 통곡하면 살 수 있다. 통곡기도는 정해진 운명도 바꾸는 힘이 있다. 그는 통곡으로 만들어진 생명 연장권을 사용해서 15년 생명연장을 받는다. 깊은 애통은 통곡을 위한 눈물을 만들어낸다. 통곡할 눈물이 있으면 산다. 오늘 그대의 눈물은 충분한가.
  • 2023.08.04

    부흥하게 하옵소서 - 이철웅 목사(여의도순복음목포교회 담임)
  • 몇 년 전 목포에 처음 도착 했을 때의 일이다. 목포 KTX 역사를 빠져나오니 크게 두 가지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하나는 시내 곳곳에 ‘경축 국제 슬로시티 인증 쾌거’라고 적힌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슬로시티(Slowcity)란 유유자적한 도시, 풍요로운 마을이란 뜻의 이탈리아어 ‘치따슬로’(cittaslow)의 영어식 표현으로 자연 생태계와 지역의 전통문화, 고유음식들이 잘 보존 유지되어 있어야 그 자격이 주어진다. 슬로시티는 말 그대로 화려하거나 빠르지 않지만 느림의 철학을 바탕으로 조화와 상생을 통해 발전해 나가자는 취지였다. 또 하나는 교회가 너무나 많았다는 것이다. 도시가 그렇게 크지 않고 인구도 많지 않은 지역인데, 어떻게 교회가 이렇게 많은지 궁금증을 자아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근대역사 문화유산이 깃든 항구도시 목포는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숨어있었다. 1906년 10월 프레스톤 선교사가 담당하는 목포 지역에서 선교사 하디와 쌍벽을 이루는 거딘(J. L. Gerdine)을 강사로 부흥회가 열렸다. 당시 프레스톤(J. F. Preston)은 부흥회의 모습을 전하며 “이제까지 자신이 참여했던 집회 가운데 가장 강력한 부흥회가 최근 목포에서 열렸다”고 흥분했다. 그러면서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외과용 수술 칼처럼 사람의 심령을 깊이 쪼개어 은밀한 죄악들과 영혼의 숨겨진 암세포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는 그것들을 도려내는 것과 같았다”고 고백했다. 목포 전역에서 놀라운 통회와 죄 용서가 이어졌고 성도들은 강력한 성령 체험을 통해 새 생명의 기쁨을 나누었다. 이 소식을 들은 평양의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강한 도전을 받았고, 그 불길은 다시 평양 대부흥으로 이어졌다. 목포 대부흥은 서울과 이북 지역 중심의 부흥 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최근 이영훈 목사님의 말씀처럼 다시 한번 대부흥의 파도가 한국과 전 세계에 다가오고 있다. 이를 통해 잠자는 한국 교회가 깨어나고,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오순절 성령강림의 대부흥이 이 땅에 발흥하기를 소망한다. “야훼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 3:2).
  • 2023.07.21

    우리가 절망하지 않는 이유 - 임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군산교회 담임)
  • 처음 절망은 2015년 해리 덴트의 『인구절벽이 온다』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민어의 백미라는 부레를 맛보았을 때와 같은 충격이었다. 2016년 후지타 타키노리의 책 『하류 노인이 온다』를 읽었을 때는 연포탕을 처음 먹게 된 사람이 반들반들한 낙지 머리가 터져 국물이 시커멓게 변했을 때의 절망을 느꼈다. 그 후 9년의 시간이 지났고 사태는 점점 절망적으로 흘러가는 듯하다. 지방소멸이라는 무서운 단어까지 등장했고 서울에만 5만 가구가 고독사 위험에 처해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2019년에 우치다 다쓰루가 『인구감소 사회는 위험하다는 착각』이라는 처방전이 이미 나왔었다. 절망을 정확히 인식했을 때 희망이 보이는 법이다. 요즘 군산은 날씨 변화가 빠르다. 전국이 장마 가운데 있다는 일기예보에도 군산은 쨍쨍 볕이 좋다. 볕이 좋으니 사람들의 우울감도 호전된다. 기후변화로 흑산도에서 잡히던 값비싼 홍어가 군산 앞바다로 몰려들어 어민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되고 있다. 인구변화는 더 흥미롭다. 지방 도시들이 소멸되어 가고 있다고 해도 군산은 우리 교회가 포함된 조촌동 전입인구가 늘고 있다. 참 하나님의 은혜다. 교회가 중심이 되어 지역이 살고 죽었던 상권도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니 말이다. 예로부터 교회가 많아서 군산에는 큰 사고나 재해가 없었다는 공감대도 한몫하고 있다. 교회 옆집 사시는 어르신 댁에 찐 감자를 몇 개 갖다 드리며 교회 나오시라고 했더니 감사하다며 교회 주차장 관리를 도맡아 해주신다. 주차장 화단에 어디선가 날아온 호박씨가 자리를 잡더니 넝쿨이 무성해졌다. 호박이 언제 열리나 궁금함에 견딜 수 없어서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했는데 어제 오늘 열매가 보인다. 기대는 희망을 낳는다. 희망으로 가는 길에 낙망이라는 징검다리도 있음을 명심하자. 언젠가 교회 앞 화단에 키우던 장미꽃을 도둑맞았다. 애지중지 두 달을 키웠는데 하루아침에 누군가 뿌리째 뽑아간 것을 발견하곤 매우 낙망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은 요나에게 주셨던 말씀이었다. 군산에는 20만명 이상의 불신자들이 있다. 하나님은 영혼구원을 통해 희망을 찾길 원하신다. 절망해선 안 되는 이유다. 교회가 희망이다. “야훼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욘 4:10~11).
  • 2023.07.14

    롬팔이팔 - 권성민 목사(금천대교구장)
  • 심리학 용어 중에 ‘확증편향’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원래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신념을 확인하려는 경향성을 일컫는다. 즉,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고 믿고 싶어 하는 것을 믿으려는 경향성을 가진다는 말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하는 부분은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믿음에도 이러한 경향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고 암송하는 구절인 로마서 8장 28절을 떠올리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는 구절이 강렬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마음을 담고 힘을 주어 믿음의 선포를 하듯이 선언한다. 하지만 로마서 8장 28절은 우리가 그동안 뒷부분에 중점을 두고 고백했던 것만큼이나 앞부분에 주목해야 한다. 앞부분인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는 구절에서 ‘뜻’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프로데시스이다. 이 단어는 ‘뜻’, ‘목적’이라는 의미 말고도 남이 볼 수 있도록 드러내는 ‘진열’이라는 의미도 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르신 뜻은 ‘숨은 뜻’, ‘숨겨진 목적’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고 알아차릴 수 있는 ‘뜻’, ‘목적’으로 부르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드러내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이것은 바로 앞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사람은 사람마다 얼굴이 다 다르듯이 부르심과 목적을 위해 개인마다 감당해야 하는 일이 다르고, 그것으로 인해 살아가는 모습도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동일한 목적과 뜻을 위해 부름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 자신의 소명을 확인하고 사명자로 살아갈 때 모두가 가져야 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의 살아가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숨겨지지 않고 드러나야 한다. 로마서 8장 28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을 사랑함이 드러나는 자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진다’라는 구절을 주문처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함이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길 소망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 2023.07.07

    시선 - 김형식 목사(은평대교구장)
  • 막내아들이 7살 때의 일이다. 집 주변에 작은 생태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서 1주일에 몇 번씩 산책을 했었다. 하루는 같이 가겠다고 따라나선 막내와 함께 걷고 있었다. 집에서 출발해 생태공원 근처에 이르렀을 때, 아이가 갑자기 말했다. “여기 큰 꿀벌이 있어요.” “어디, 어디?” 아내와 난 주변을 열심히 둘러보았지만 벌을 찾을 수 없었다. 아이는 또래보다 키가 10센티미터는 작아서 110센티미터가 채 되지 않았다. 아이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천천히 둘러보니 아이가 큰 꿀벌이라고 했던 벌은 딱 아이의 눈높이에 붙어 있었다. 그런데 나와 아내는 우리의 눈높이에서 찾고 있었으니 발견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벌은 꿀벌이 아니라 말벌이었고 산책길에 조성된 난간 손잡이에 붙어 있었다. 우리로서는 허리를 굽혀야만 발견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러나 아이에겐 정확히 딱 자신의 눈높이였다. 그때 새삼 깨달은 사실이 있다. 눈높이의 차이에 따라 볼 수 있는 것이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 셋은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길을 걷고 있었지만 각자에게 보이는 것만을 보았다. 누군가 무엇이 보이는지 물었다면 우리 셋 모두 다른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당연히 내가 본 것과 아내가 본 것 그리고 아이가 본 것은 전혀 일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누구의 주장이나 의견이 틀렸다고 할 수 없었다. 각자에게 보이는 것이 달랐을 뿐이다. 이런 일이 교회 밖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신앙공동체인 교회 안에도 여러 시선이 존재한다. 각 세대의 사람들은 각자의 눈높이와 그동안 자신이 쌓아온 경험 그리고 신앙의 연륜을 바탕으로 상황을 보고 판단한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것을 보고 들어도 다른 시선을 가질 수 있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너무 쉽게 오류에 빠진다. 나와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나의 생각에 다른 사람도 동조해주기만을 강력히 바란다. 우리는 내가 나의 시선과 의견을 존중하는 만큼, 다른 사람의 시선과 의견도 존중해야 한다. 우리가 속한 신앙의 공동체가 서로의 다른 시선을 인정하고, 서로 품어주고 이해하며, 용서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한다. 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마음과 주님의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다.
  • 2023.06.30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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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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