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차진호 목사(교회개척국 담당) - 제주도 돌고래의 협력 호흡
  • 여의도순복음서귀포교회가 있는 제주도에서 12년 동안 목회하며 서귀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올레길을 종종 산책하곤 했다. 가끔 갯바위 근처에서 수십 마리의 돌고래 무리를 마주할 때면 수족관에서 보던 몇 마리의 돌고래 쇼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장엄하고 신비로운 생명력을 느끼곤 했다. 그 경이로운 광경을 목격한 이후 제주 남방큰돌고래에 대해 찾아보며 발견한 두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곧 나의 신앙과 목회 철학이 되었다. 첫째, 돌고래는 바다에 살지만 반드시 ‘하늘의 공기’로 호흡해야 한다. 물고기와 달리 허파로 숨을 쉬는 포유류인 돌고래는 3분에서 10분마다 주기적으로 수면 위로 올라와야 한다. 등에 있는 분수공으로 신선한 공기를 마시지 않으면 바다 한가운데서 질식하여 죽고 만다.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세상은 깊고 거친 바다와 같다. 세상이라는 바다에 잠겨 지내는 동안 우리 영혼은 끊임없이 질식의 위협을 받는다. 잠시라도 기도의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으면 신앙의 맥박은 급격히 약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에 함몰되지 않고 영적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시로 수면 위를 향하는 ‘영적 분수공 호흡’이 필요하다. 둘째, 돌고래는 병든 동료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어깨를 내어준다. 무리 생활을 하는 돌고래들은 병들거나 다쳐 스스로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하는 동료가 생기면 그 아픈 동료를 아래에서 위로 받쳐 올려 숨을 쉴 수 있게 돕는다. 최근 여러 환경적 제약으로 현장 예배의 뜨거움이 식거나, 홀로 신앙을 지키며 ‘영적 호흡곤란’을 겪는 이들이 많다. 기도의 맥박이 약해지고 세상의 무게에 가라앉은 성도들이다. 우리는 이들을 그저 관망하기보다 돌고래처럼 사랑의 어깨로 받쳐 올려주어야 한다. 중풍병자를 예수 앞에 인도하기 위해 지붕을 뜯어냈던 친구들처럼(막 2:1~12), 다른 교우들과 힘을 합쳐 지친 영혼들을 돌봐야 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나의 영적 생명이 살아야 가족과 교우의 신앙도 도울 수 있다. 2026년 1월의 마지막 주, 열두 광주리 새벽기도회의 열기가 식지 않도록 예배와 기도, 봉사의 삶을 더욱 열심히 실천하자. 아침부터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수시로 기도하며 영혼의 폐부에 하늘의 생기를 채우자. 그리하여 나를 살리고 이웃을 살리는 ‘영혼의 구조대’,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2026.01.23

    백근배 목사(강서성전 담당) - 신앙안에서 근심으로부터 벗어나기
  • 몇 년 전, ‘과잉근심사회’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이는 사건과 사고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불안이 SNS와 같은 연결망을 통해 확산되면서 실제보다 과도하게 반응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우리는 팬데믹 시대를 지나오면서, ‘과잉근심사회’를 경험했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변이 바이러스 소식과 경제적 불안은 사람들로 하여금 실제보다 더 큰 위협에 노출된 것처럼 느끼게 했다. 물론 적당한 근심은 미래를 대비하게 하는 지혜의 동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과잉된 근심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과도한 분노를 표출하게 하여 작은 사건에도 과잉 반응하도록 만든다. 성경은 이 세상에 근심이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다”(벧전 1:6). 그러나 문제는 근심 그 자체가 아니라 근심에 사로잡히는 태도이다. 과잉된 근심은 우리의 심령과 뼈를 상하게 하고(잠 17:22), 개인을 넘어 공동체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근심을 이기려는 신앙적 노력은 개인과 공동체 모두에게 필수적이다. 성경의 인물들 역시 근심 앞에서 무너지는 대신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 야베스는 “나로 환난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대상 4:10)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이 짧은 기도가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이유는 근심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인간의 보편적 갈망과 하나님의 응답이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과잉된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항상 고민해봐야 한다. 첫째로는 가려서 들을수 있어야 한다. 불안을 조장하는 소식에 마음을 빼앗기기보다, 복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박국 선지자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부흥을 소망했다. 수로보니게 여인과 소경 바디매오 역시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절망이 아닌 회복을 선택했다. 다음으로는 복음의 시선으로 현실을 해석해야 한다. 리츠 쉰은 『과잉근심』에서 사람들이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상황이 바뀌기만을 기다리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성경은 상황보다 관점의 변화를 요구한다. 성도는 어떤 현실 속에서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 마지막으로 우리에겐 기도만이 해답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뿐 아니라 상황까지도 바꾸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기도를 시작하는 순간, 하나님은 이미 일하고 계신다. 과잉된 근심의 시대를 사는 오늘 그리스도인은 근심에 끌려 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믿음으로 근심을 다스리는 존재다. 불안을 키우는 소리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복음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평안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 2026.01.16

    김판호 목사(영산신학연구원 총장) - 새로운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갑시다
  • 역사 속에서 전쟁과 전염병 같은 거대한 위기는 언제나 당대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뒤흔드는 변곡점이 되어왔습니다. 로마와 잉카, 아라비아와 중화 제국 등 수많은 문명의 흥망성쇠는 그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우리 삶을 뒤흔든 코로나19 역시 현대 문명의 지형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게다가 4차 산업혁명과 정보화 사회의 도래로 스마트폰과 인터넷은 지구촌을 촘촘한 네트워크로 연결했습니다. 마치 인체의 신경조직처럼 서로 얽혀 있는 환경 속에서 우리는 이제 미디어의 그물망을 떠나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연결이 깊어질수록 ‘더불어 사는 관계적 사고’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효율과 개발을 앞세운 무분별한 생태계 파괴, 생명 윤리에 대한 혼란은 이제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 중대한 갈림길에서 우리는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까요? 아프리카 반투족의 언어에는 ‘우분투’(Ubuntu)라는 아름다운 말이 있습니다. “네가 있기에 내가 있고,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뜻입니다. 한 인류학자가 아이들에게 달리기 시합을 제안하며 “1등에게만 과일을 전부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경쟁하지 않았습니다. 서로의 손을 잡고 함께 달렸습니다. 놀란 학자가 이유를 묻자 아이들은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답했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모두 슬픈데 어떻게 나 혼자만 기쁠 수 있겠어요?” 이 짧은 한마디는 그 어떤 철학자의 이론보다 깊은 울림으로 마음에 남습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의 연합 가운데 서로를 향해 자신을 내어 주시는 공동체적 존재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또한, 자기 안에 갇힐 때가 아니라 타인에게 마음을 열고 사랑의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바로 이 ‘우분투 정신’의 회복입니다. 경쟁의 논리를 넘어 연대의 길로, 고립의 습관을 넘어 돌봄의 공동체로 다시 나아가야 합니다. 새해가 밝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라 하신 주님의 말씀은 단지 감정의 위로가 아니라 공동체적 책임에 대한 부르심입니다. 손을 잡고 함께 달려간 아이들처럼 우리도 이웃의 손을 잡고 나란히 걸어갑시다. 혼자만의 성공이 아니라 함께 살아나는 회복을 위해 더 나은 내일을 향해 함께 나아갑시다.
  • 2026.01.09

    엄태욱 부목사(목회 담당) -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
  • 2026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가 시작되면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결심을 하며 계획을 세우고 올해에는 좋은 일만 있기를 기대합니다. 아마 우리 성도님들 중에서도 저축이나 재테크, 운동, 건강관리 같은 목표를 세우고 이미 실천하고 계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성도님께서는 올 한 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가요? 우리에게 많은 비전과 목표가 있지만 우리 순복음의 성도들은 새해를 맞이하면서 무엇보다도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아갈 것을 결단해야 합니다. 성경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셔서 늘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건강과 치료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고 우리의 모든 저주를 청산하시고 아브라함의 복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우리는 영원한 천국을 향한 확실한 소망을 갖게 되었고 지금 이곳에서 작은 천국을 누리고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이 놀라운 능력을 믿음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절대 긍정과 절대 감사의 영성으로 무장하게 되고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마음 밭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가꿀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꿈을 나의 꿈으로 품고 믿음으로 도전할 때 주님이 도와주시는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말도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은혜를 선포하며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으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순복음의 성도들은 십자가 복음의 은혜와 능력을 누리고 나누며 주님 안에서 새로운 꿈을 꾸고 믿음으로 도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새해에는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 먼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타내신 능력을 선포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은혜를 날마다 입술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를 마무리 할 때에는 오늘을 보내면서 하나님께 감사했던 제목들을 구체적으로 적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영훈 목사님이 쓰신 『감사QT 365』나 스마트폰 앱을 활용하면 더욱 좋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십자가 복음의 능력으로 다시 한번 무장하시고 주님이 주시는 꿈과 비전을 향해 다시 한번 믿음으로 전진하시길 바랍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고 말해도 부정적인 생각이나 말은 모두 떨쳐버리고 절대 긍정과 절대 감사로 나아가십시오. 살아 계신 주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 2026.01.02

    조정규 목사(찬양특별교구대교구장) - 2025년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며
  • 어느덧 2025년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며 지나온 한 해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2025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우리에게는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웃음꽃 피던 즐거운 시간들이 있었고 때로는 평범하고도 잔잔한 일상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간을 되짚어 보면 거기에는 분명히 우리를 흔들리지 않게 붙드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먹먹하고 답답했던 순간들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그 은혜를 깨닫게 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세상의 변화와 환경의 불확실성을 바라보면 막막함과 답답함이 밀려오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할 때마다 우리 안에 새로운 소망과 굳건한 믿음이 샘솟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 가운데 담대함으로 설 수 있는 용기가 임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상황과 환경이 변할지라도 변함없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가장 선한 길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너무나 빠르게 변하여 적응하기조차 힘든 시대에 하나님은 변함없는 신실함으로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고 계시며 이미 영원한 생명과 승리도 약속하셨습니다. 말씀을 대할 때마다 우리는 두려움을 이기고 용기와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혼란스러운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얻고 연약함을 넘어 강건함으로 승리하게 됩니다.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시 71:14). 시편 기자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항상 소망을 품겠다’고 고백하며, 그 소망의 근원되시는 주님을 ‘더욱 찬송하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합니다. 이 고백은 단순히 소망을 바라는 것을 넘어 소망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에서 시작된 감사와 찬양입니다. 이 고백이 바로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어 지난 한 해 뿐 아니라 우리 일생 여기까지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가오는 2026년 새해를 바라봅니다. 새로운 시간을 마주하며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한 해 우리를 신실하게 이끄셨던 하나님께서 새해에도 변함없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리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동일하신 분이시며 우리의 가장 좋은 목자이자 인도자이십니다. 새해에도 신실하게 우리를 이끄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과 함께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2025.12.26

    박용식 목사(금천대교구장) - 회복탄력성
  • 회복탄력성이란 책을 보면 하와이 군도 북서쪽 끝에 인구 3만명에 불과한 카우아이라는 섬에서 있었던 연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섬주민들은 대대로 지독한 가난과 질병에 시달렸고, 주민 대다수가 범죄자나 알코올 중독자 혹은 정신 질환자였습니다. 이 섬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불행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과학자와 심리학자들은 이 섬에서 낳고 자란 아이들은 어떤 인생을 살게 되는지를 연구하기로 합니다. 1955년에 태어난 833명의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추적 조사를 하기로 하는데 에너워미라는 학자는 833명의 아이들 중 201명을 고위험군으로 분류하였습니다. 201명의 공통점은 몹시 가난하며, 부모가 이혼이나 별거 중에 있고 부모 중 한명이 알코올 중독이나 정신질환자인 세가지 큰 어려움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위험군에 속해있던 아이들은 당연히 더 심한 일탈과 나쁜짓을 하는 아이로 자랄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중에 72명은 밝고 건강한 청년으로 문제없이 성장했습니다. 그중에 한 학생은 최악의 환경속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밝고 매력적이었고, 미국 대학입학 시험(SAT)에서 상위 10% 안에 들었고, 성격도 긍정적이고 도덕적이었습니다. 에너워미는 72명의 아이들이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도 평범한 삶을 살고 심지어는 보통의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 보다 더 밝고 뛰어나게 성장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집중하여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삶의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힘의 원동력이었는데 에너워미는 이것을 ‘회복탄력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아이들은 어떻게 이런 회복탄력성을 가질 수 있을까 연구했더니 “그 아이의 입장을 무조건적으로 이해해 주고 받아 주는 어른이 적어도 그 아이의 인생 중에 한 명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엄마였던, 아빠였던, 할아버지 할머니였던 간에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푼, 아이가 언제든 기댈 언덕이 되어주었던 사람이 적어도 한 사람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리스도인으로 온전히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많은 죄와 유혹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변함없이 특별한 존재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로서 높은 회복탄력성을 갖고 날마다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기도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 2025.12.19

    신효영 목사(장애인대교구장) - 서로 연결되어 함께 지어져 갑시다
  • 2025년 한해도 어느덧 12월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탄생한 성탄절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불우이웃, 독거노인, 장애인 등 마치 12월에만 소외된 이웃이 있는 듯 평소보다 더 관심을 갖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관심과 돌봄이 필요한 소외된 이웃은 해마다 이맘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늘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나 이웃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교회를 “건물마다 서로 연결되어 성전이 되어 간다”고 말합니다. 벽돌 하나는 약하지만 서로 연결될 때 견고한 성전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 안에서 연결될 때 교회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집으로 세워집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진다”고 했습니다(벧전 2:4~5). 우리는 죽어 있는 돌이 아니라 성령의 생명으로 충만한 산 돌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정체성을 단계적으로 선언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더 이상 외인이나 나그네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이며(19절), 말씀의 터 위에 세워진 자이며(20절),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자이며(21절), 결국에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는 자들입니다(22절).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이웃과 연결될 때 구역이 건강한 구역이 되고 함께 모여 예배함으로 모든 예배가 성령으로 충만한 역동적인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웃과 연결되어 예수 사랑을 실천함으로 하나님 나라가 든든히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항상 다음의 세 가지를 점검하는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첫째, 말씀의 기초 위에 서 있는가? 둘째, 예수 그리스도와 밀착되어 성령으로 충만한가? 셋째, 이웃들과 연결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가?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을 세우시고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십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과 모든 이웃들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든든히 세워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 위에 서서 주님과 성령으로 연결되며 성도 간에 사랑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 축복의 통로로써 맡겨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2025.12.12

    이승준 목사(관악대교구장) - 영적 감수성 (Spiritual Sensitivity) 
  •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롬 10:17).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합니다. 영어에서 ‘듣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는 히어링(hearing)과 리스닝(listening)입니다. 히어링은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귀에 들리는 모든 소리를 뜻합니다. 누워 있을 때 들리는 시계 초침 소리, 파도 소리처럼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들리는 모든 소리들입니다. 반면 리스닝은 의도적으로 집중해서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설교를 들을 때, 누군가의 말을 경청할 때 바로 이 리스닝을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할 때 ‘들음’은 히어링일까요? 리스닝일까요? 영어 성경에서는 ‘hearing’으로 번역되어 있고 헬라어 원어는 ‘아코에’입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은 특정 장소, 특정 시간에서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장소, 모든 상황, 모든 관계 속에서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교회와 기도원, 골방에서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나는 우연한 만남 속에서도, 삶의 사건 속에서도, 바람 소리 속에서도, 심지어 예상치 못한 질병과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켄 가이어의 『영혼의 창(Windows of the Soul)』은 이러한 삶의 태도를 ‘영적 감수성’(Spiritual Sensitivity)이라 부릅니다. 그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벽을 허물고 모든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감지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성경 속뿐 아니라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현실 속에서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영적인 창을 닫아둔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적 감수성은 근육과 같습니다. 훈련할수록 더 예민해지고 더 강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 사건을 통해 저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모든 순간, 모든 장소, 모든 관계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약속의 땅이 어디인지 알고 떠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은 매 순간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서만 말씀하신다고 생각했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삶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들어오는 통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숨어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의 손길이 스며든 은혜로운 영적 여정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 2025.12.05

     강종복 목사(여의도순복음벧엘교회 담임) - 속사람이 강건해질 수 있다
  • 영국에 ‘줄리안 모리스(Julian Ellis Morris)’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어렸을 때에 길에서 부모를 잃어버리고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청년이 되어서 부모를 다시 만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엄청난 부자였다. 줄리안은 아버지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런데 그는 부자가 되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며 살았다. 그런데 한 달에 한번은 멋진 옷을 입고 리무진을 타고 런던의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다. 그러나 그 다음 날이면 그는 여전히 걸인의 모습으로 거리에 나타난다. 줄리안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줄리안이라는 사람만의 문제일까? 오늘 우리 역시 이런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지 않는가? 하버드 의대의 존 레이티(John J. Ratey)교수와 에릭 헤이거만(Eric Hagerman) 교수가 『운동화 신은 뇌(Spark your brain)』라는 책을 펴냈다. 운동을 하면 몸이 건강해지는 것 뿐 아니라 두뇌가 건강해진다. 몸을 활발하게 움직이면 두뇌가 자극을 받아 기억력이 좋아지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더 많이 떠오를 뿐만 아니라 우울증도 치료하고 치매도 예방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운동으로 육체가 건강해지는 것은 부수적인 효과이고 정말 중요한 효과는 두뇌가 건강해진다는 것이다. 사람은 육체와 두뇌가 건강하다고 해서 건강한 사람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 안에 또 하나의 사람이 들어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엡 3:16). 여기서 ‘속사람’이라는 헬라어 단어 ‘에소 안드로폰’은 영어로는 ‘inner man’, 즉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것은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즉 하나님의 성령으로만 강건해질 수 있다.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질 수 있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난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만 가지고 있으면 결코 영적 침체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알되 감정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지식으로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그리스도의 사랑을 감정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지식으로 깨닫고 확신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순간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신분을 갖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에 기억하고, 언제나 감사와 찬송으로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길 소망한다.
  • 2025.11.28

    윤광현 목사(동작성전 담당) - 추수 감사의 진정한 의미
  • 황금빛으로 물들었던 들녘은 가을걷이도 끝나고 농부가 흘린 땀방울은 한 해의 열매로 결실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추수감사절은 그 풍성한 결실을 보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아름다운 절기입니다. 우리는 이 감사의 본질은 단순히 “많이 거둔 것”에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추수감사절이 ‘누구에게 드리는 감사인가’와 그리고 ‘무엇을 드리는 감사인가’를 다시 묵상할 때 추수 감사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추수 감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이었습니다. “네 하나님 야훼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이레 동안 네 하나님 야훼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신 16:15). 추수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손길이 아니면 어떤 곡식도 자라날 수 없다는 고백이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에 백성은 첫 열매를 거둘 때마다 그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곡식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 되신다”는 믿음의 고백이 바로 그 제사의 중심이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해 동안 우리가 거둔 결실-건강, 가정, 일터, 관계, 그리고 믿음의 열매-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진정한 추수 감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것은 풍성할 때뿐만 아니라 부족할 때도 드리는 감사입니다.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고백했습니다. 그 고백 속에는 ‘환경의 풍성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충만함’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감사는 소유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마음의 열매입니다. 추수감사절에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단지 헌금이나 곡식의 일부를 드리는 행위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을 다시 하나님께 드리는 결단입니다. 이번 추수감사절은 ‘감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풍성한 결실이 아닌 결실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께로 돌리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새롭게 경작하시고 다음 계절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주십니다. 오늘 우리의 감사의 예배가 단지 입술의 고백으로 그치지 않고, 삶으로 드려지는 예배이기를 소망합니다. 감사의 제단 위에 우리의 마음을 올려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 향기를 기쁘게 받으시며 새로운 은혜의 추수를 허락해 주십니다. “야훼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07:1).
  • 2025.11.14

    심재영 목사(여의도직할성전 담당) - 먹을 만하고 약이 되는 결실
  • 가을이 깊어가며 결실하는 계절이 왔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무언가 결과물을 내야 한다는 조급함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맘때가 되면 각자 몇 가지 간절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있는 수험생들도 있고 올해가 가기 전에 이루어야 할 것들에 분주한 이들도 있으며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한 해 동안 맺은 열매를 보기 위해 또한 영혼구원의 결실을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결실하다’는 것은 단지 보이는 결과물을 내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열매를 맺어내는 것입니다.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말씀의 강가에서 자라난다고 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때를 따라 열매 맺는 신실함으로 자신의 계절을 살아냅니다. 오랜 시간 땀과 인내로 씨를 뿌리고 가꾼 수고가 지금 결실의 문턱에 서 있다면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결과보다는 신실하게 걸어온 과정 속에서의 믿음을 보시고 이를 귀히 여겨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1편 3절에서 “철을 따라”의 뜻은 서두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그분의 손길에 맡기는 순종의 태도를 말합니다. 유진 피터슨의 책 『한 길 가는 순례자』에서 “신앙의 성장은 단기간의 성취가 아니라 오랜 순종의 여정이다. 인내 속에서 자라난 믿음만이 진짜 결실을 맺는다”고 했습니다. 이 결실의 계절에 행여나 급해지지 않도록 우리는 마음을 잘 다듬어가야 합니다. 급한 마음에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생수가 아닌 다른 양분으로 그럴싸한 결과물을 만들려 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결과물과 결실은 비슷해 보이나 그 본질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에스겔이 환상 중 본 나무의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은 “약이 된다” 했습니다. 하나님께 뿌리내린 사람이 맺는 열매는 내 자신만을 위한 결실이 결코 아닙니다. 그 열매는 다른 이를 살리고 그 잎은 상처 입은 이들의 마음을 치유합니다. 학문의 열매, 섬김의 열매, 전도의 열매 등 주님 안에서 맺힌 것이라면 반드시 누군가의 생명을 일으키는 약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씨앗을 주셨으며 햇살을 주셨고 기다림의 시간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에게 열매의 계절을 주셨습니다. 추수감사절을 앞둔 이 가을에 이렇게 기도합시다. “먹을 만하고 약이 되는 결실로 감사가 가득한 계절이 되게 하옵소서!”
  • 2025.11.07

    배정호 목사(여의도순복음은평성전 담임) - 성령 안에서 드리는 감사
  • 1620년 겨울, 메이플라워호에서 내린 청교도들의 눈앞에는 신앙의 자유가 아니라 죽음뿐이었습니다. 추위와 굶주림은 그들의 환상을 무너뜨렸고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얼어붙은 대지에 누워갔습니다. 그러나 봄의 햇살이 내려 그 땅을 녹일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인디언들의 손길 속에 옥수수와 보리가 자라났고 가을의 수확은 그들의 예상을 훨씬 초월했습니다. 추수의 날 그들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이 자신들을 붙들었음을 깨달은 감격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들이 세운 감사의 제단 위에는 풍요로운 곡식이 아닌, 죽음의 계곡을 통과한 영혼들의 믿음이 제물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추수감사절의 진정한 기원입니다. 그들의 감사는 결코 풍요에서 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결핍의 한복판에서 절망의 어둠 속에서 오직 믿음만이 이끄는 길을 걸으며 드린 감사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순절 신앙의 깊은 의미를 만나게 됩니다. 오순절 운동은 성령의 현재적 임재를 체험하고 그 능력을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그렇기에 감사는 단순한 감정의 파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이 우리 영혼 깊숙이 일으키는 믿음의 응답이며 현실의 폭풍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을 놓지 않는 영혼의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의 외침이 울려 퍼집니다. “성령 안에서 항상 감사하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심을 믿을 때 비로소 어둠 속에서 드리는 감사의 찬양입니다. 청교도들처럼 고난의 자리에서 감사의 제단을 세우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증거입니다. 사도행전의 오순절 마가다락방에서 성령이 임하던 그 순간은 마치 영적 추수감사절과 같았습니다. 초대교회는 복음의 열매를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언어의 장벽이 무너지고 문화의 벽이 허물어지며 수많은 영혼들이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날의 감사는 곡식의 풍성함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영혼들이 영원한 생명으로 추수되는 기적에 대한 감사였고 물질의 풍요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끝없는 확장에 대한 감격이었습니다. 신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영에 속한 것을 더 풍성하게 거두며 감사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추수감사도 이러한 영적 유산 위에 서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영혼 밭에 맺으신 믿음의 열매, 사랑의 향기, 인내의 결실들을 감사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약속들까지도 씨앗을 뿌린 농부가 가을 수확을 기다리듯 믿음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감사는 현실의 가시밭과 어둠을 뚫고 피어나는 꽃과 같습니다. 그것은 절망 속에서 소망을 노래하게 하고, 죽음의 계곡 속에서도 생명의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청교도들이 추운 겨울을 견디며 눈물 속에 씨를 뿌렸듯이 우리도 그 믿음의 전통을 이어가야 합니다. 우리도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영혼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2025.10.31

    김용권 목사(여의도순복음신월교회 담임) - AI시대를 분별하라
  • 오늘날 인공지능(AI)의 급속한 발전은 교회와 목회 현장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행사, 교육 콘텐츠 제작, 행정 자동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AI는 유용한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신학적 우려와 윤리적 경계가 존재한다. 지난 1월 한국기독교학회는 AI(인공지능)시대에 발생할 수 있는 윤리적 문제와 부작용에 대해 교회가 청지기적 목소리를 낼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우리는 AI(인공지능)시대를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술의 유익을 누리지만 그 본질과 영향력을 성경적 관점에서 분별해야 한다. 이제는 단순히 온라인 포털에서 검색하는 것을 넘어서 ChatGPT 서비스에게 일문일답으로 답을 얻고, 실생활에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AI 앞으로 어디까지 얼마나 발전할까? 많은 기술업계 전문가들은 AI가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범용 인공지능) 컴퓨터로 사람과 같은 또는 그 이상의 지능을 구현하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경고하고 있다. AI가 인간의 지능을 모방하고 특정 영역에서 능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던지게 한다. 창세기 1장 27절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라고 선언하며, 인간은 단순한 정보 처리 기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AI는 인간의 이해를 구현할 수는 있지만 도덕적 판단, 영적 교감, 사랑의 실천은 결코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AI를 맹목적으로 신뢰하고 의존할수록 하나님의 성품 대신 AI의 가치, 계산, 통제, 생산성을 닮아갈 위험이 있다. 이는 곧 기술을 우상화하는 현대판 심각한 바알 숭배가 될 수 있다. AI가 제공하는 출처가 불분명한 정보는 교회의 진리 수호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 창세기 1장 28절은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청지기적 사명을 부여한다. AI는 선하거나 악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 결정된다. 교회는 AI를 두려워하거나 배제하기보다 하나님 나라 확장의 도구로 지혜롭게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체의 영적 건강을 해치지 않도록 윤리적 기준과 신학적 검증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기술의 유익을 누리되 그것이 인간의 본질을 침해하거나 복음의 본질을 왜곡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교회는 AI를 통해 더 넓은 선교의 문을 열 수 있지만 그 문이 진리의 길이 되도록 목회자의 분별과 성령의 인도하심이 반드시 필요하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1~22).
  • 2025.10.24

    이승훈 목사(여의도순복음청주교회 담임) - 너는 복이 될지라
  •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사역하다 여의도순복음청주교회으로 내려온 지 1년이 되었습니다. 지나면서 한 번 들렀을 법도 한데 청주는 처음입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떤지 조금이나마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시고 “너는 복이 될지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입니다. 이 말씀으로 복을 받아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복이 될지라”는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이 되게 하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즉 내가 하나님의 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주의할 점은 축복과 기복을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축복을 기복으로, 기복을 축복으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축복신앙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받는 복된 신앙입니다. 반면에 기복신앙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복만 달라고 하는 잘못된 신앙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는 복을 주십니다. 즉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축복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반면에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으면서 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복을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기복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과연 진정한 복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말에 ‘복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려대 한국어 사전에는 “행운이나 행복을 가져다주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주로 어린아이에게 많이 쓴다”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귀한 자녀가 태어나거나 지혜로운 며느리가 들어와서 가정에 화평과 재물이 있으면 복덩이가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요셉이라는 복덩이로 인해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복이 임했습니다. 무시무시한 감옥의 간수장도 요셉이 복덩이인 것을 알고 제반 사무를 맡겼습니다. 결국 요셉은 총리가 되어 이스라엘 민족뿐 아니라 애굽과 굶주리는 많은 나라에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덩이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복은 주위를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내 맘대로, 내 이익대로, 내 기분대로 한다면 주위를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복인 사람은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희생해야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사는 것입니다. 진정한 복은 나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모든 곳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섬기므로 진정한 복이 되시기 바랍니다.
  • 2025.10.17

    심형섭 목사(여의도순복음청라교회 담임) -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보며
  • 기도는 단순한 말의 나열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누는 깊은 대화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때로 기도의 본질을 잊고, 얼마나 오래 했는지 몇 번 했는지에만 마음을 두기도 합니다. 어느 성도의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그는 기도할 때마다 호두 하나를 유리병에 담으며 자신이 얼마나 기도하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병은 가득 찼고 그는 스스로 기도의 사람이라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꿈속에서 주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이 병들은 무엇이냐?” 성도는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호두 하나가 한 번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망치로 알을 깨뜨려 보아라.” 호두를 깨뜨리자 속은 모두 비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네 기도는 이 호두처럼 비어 있구나. 말은 많았으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기도는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나와의 진정한 대화임을 잊지 말라” 마태복음 6장 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기도는 믿음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기도로만 끝나지 않고 삶 속에서 행동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열매를 맺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서의 말씀처럼 기도와 믿음은 반드시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여의도순복음청라교회는 2024년 7월 아이들을 포함한 25명의 성도들이 함께 모여 첫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영훈 목사님의 격려와 여의도순복음교회 장로전도단과 전도실의 헌신, 고등부 교사들과 마포1대교구의 RK를 통한 섬김, 봉사, 많은 중보기도가 모여 여의도순복음청라교회를 든든히 세우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우리에게 주신 ‘또 하나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머무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야 합니다. 받은 사랑을 이웃과 나누며 또 다른 열매를 맺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더 큰 기쁨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여의도순복음청라교회는 첫 예배보다 두 배 이상 성장하며 성도들의 기도와 기대 가운데 함께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가정과 일터 그리고 학업의 자리에서도 귀한 열매가 맺히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가 기도와 믿음으로 주님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고, 그 열매를 함께 나누는 성도가 되길 소망합니다.
  • 2025.10.10

    김종현 목사(여의도순복음이천중앙교회 담임) - 영적 회춘 
  • 오늘날은 ‘100세 시대’라고 부릅니다. 의학과 과학이 발달하면서 이제 인간이 100세까지도 살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60대, 70대는 이미 노인의 대명사처럼 여겨졌지만 요즘은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며 사회와 교회 속에서 자기의 가치를 증명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 모습은 단순한 노화의 과정이 아니라 마치 다시 젊음을 되찾은 것 같은 ‘회춘’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요즘 어르신들은 젊은이 못지않게 시대의 변화를 즐기고 계십니다. 스마트폰으로 쇼핑도 하고, 유튜브로 세상 소식을 접하며 크리에이터로 직접 영상을 올리는 등 세대 간의 벽을 허물고 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가는 어르신들을 보면서 우리는 ‘나이’가 인생을 제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성경 속에도 ‘회춘’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있습니다. 바로 모세와 갈렙입니다. 모세는 120세까지 살았는데 신명기 34장 7절에 보면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끝까지 충성하며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갈렙은 여호수아 14장 10~11절에서 85세의 나이에 여전히 담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는 “오늘 내가 야훼께서 말씀하신 날로부터 45년을 지냈나이다 … 오늘 내가 85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라고 고백합니다. 그의 고백은 단순한 건강의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붙잡는 믿음에서 나오는 담대함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영적 회춘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육체는 약해질 수밖에 없지만 믿음의 사람은 날마다 속사람이 새로워집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주 안에 있는 사람은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영적인 젊음을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이가 우리의 한계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비전이 있는 한 우리는 나이에 상관 없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믿음으로 기도하며 말씀을 붙잡고 사는 사람은 육체의 나이를 뛰어넘어 영적으로 회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나이에 상관없이 모세와 갈렙처럼, 그리고 바울처럼 영적으로 늘 새로워지는 은혜를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주 안에서 날마다 회춘하는 삶, 그것이 바로 참된 행복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입니다.
  • 2025.10.03

    박창호 목사(여의도순복음춘천교회 담임) - 우후죽순의 은혜
  • “왕대 밭에 왕대 난다.” 조용기 목사님의 이 말씀은 큰 스승 밑에서 큰 제자가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큰 믿음의 밭에서 반드시 큰 믿음의 사람이 자라난다는 뜻입니다. 대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보면 이 말씀이 더욱 깊이 다가옵니다. 우후죽순(雨後竹筍)이란 대나무가 비가 온 뒤 하루에 수십 센티미터씩 자라는 놀라운 성장을 말합니다. 대나무는 단기간에 가장 큰 성장을 이루는 식물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수년 동안 땅속 깊이에서 뿌리를 넓히며 보이지 않는 인고의 시간을 견뎌야 합니다. 이는 세상 모든 만물의 이치입니다. 교회의 부흥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전에 반드시 눈물과 기도, 헌신의 뿌리가 깊이 내려야 합니다. 교회가 지금까지 겪어온 고난과 시련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크고 놀라운 역사를 준비하게 하시는 훈련의 과정이었습니다. 마치 대나무가 땅속에서 인내하듯 우리도 그 시간 동안 기도로 버티고 믿음으로 기다리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어 성령의 단비가 교회 위에 쏟아질 때 비가 내린 후 죽순이 일제히 솟아오르듯 ‘우후죽순의 은혜’가 ‘왕대’의 꿈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야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욜 2:23). 오늘 이 땅에 ‘우후죽순의 은혜’를 꿈꾸어 봅니다. 교회가 순복음 왕대밭으로 자라나는 부흥의 역사가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지듯 부흥을 위한 왕대의 인고의 시간을 지나, 비를 준비하시는 하나님께서 마침내 부흥의 소낙비를 부어주시고 우후죽순의 은혜를 베풀어 주심을 믿습니다. 다시 새로운 희망을 향하여 꿈을 꾸며 ‘절대긍정 절대감사’와 ‘성령 충만의 은혜’로 순복음의 왕대씨를 뿌리며 나아갈 때 우후죽순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이 가을 기도의 계절, 가을 하늘을 우러러 우후죽순의 은혜와 왕대의 꿈을 간구합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1, 47).
  • 2025.09.26

    김창수 목사(여의도순복음광주교회 담임) - 광야(미드바르)에서 부는 바람!
  • 성경의 인물 중 우리는 모세를 잘 알고 있다. 청춘의 객기일까? 노예 생활로 몸과 마음이 멍든 동족 이스라엘을 돕는다는 명분은 오히려 살인자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하루 아침에 지명 수배범이 되어 그가 도망간 곳은 생면부지의 미디안 광야였다. 40년이라는 광야의 시간들은 모세의 젊음과 장군으로서의 카리스마까지 앗아가는 혹독한 마법이었다. 무엇보다 이방인에 대한 냉대와 따가운 시선들, 영혼 깊은 곳에서 흙탕물을 일으키며 솟구쳐 오르는 하나님을 향한 오해는 그의 전 존재를 뒤흔드는 위기의 바람이었다. 아마도 모세는 ‘여긴 어디?,’ ‘난 누구?’를 수천수만 번 곱씹으며 고뇌의 밤을 뒤척일 때 그의 두 어깨를 두드리는 벗은 눈물과 한숨뿐이었다. 모세에게 불어오는 광야의 바람은 절대 절망의 바람이었고 소망의 싹을 꺾으려고 하는 충동질의 바람이었다. 그러나 인생의 막다른 길목에서도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모든 사람보다 온유한 자’(민 12:3)로 모세를 새롭게 빚어내셨다. 광야의 척박한 환경은 우리에게 고달픔과 위기를 안겨주지만 광야에 숨겨진 보화가 있음을 알아야만 한다. ‘광야’는 히브리어로 ‘미드바르’이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장소’라는 뜻이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불어오는 연단의 바람을 통하여 깨어짐과 겸손을 체득하였고 소명과 사명을 깨달아 ‘하나님의 지팡이’(출 4:20)를 움켜잡을 수 있었다. 지금 나의 삶의 자리가 광야라고 느끼고 있는가? 삶의 지난한 무게가 두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가? 희망의 불씨가 사라져 소망마저 나를 외면하는 절망의 수렁에 빠져 있는가? 우리는 각자가 처한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만 한다. 모세를 향했던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 인생들의 광야에서도 위로의 바람, 축복의 바람으로 다가 오심을 확신해야 한다. 각자의 심비에 새기자! 광야 저편에 가나안의 축복이 우리에게 손짓하고 있다. 그렇기에 광야는 인생의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작이다. 잊지 말자! 광야에서 부는 바람은 ‘절대 희망의 바람, 성령의 바람, 사명의 바람’ 이란 걸!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신 8:16).
  • 2025.09.19

    마웅갑 목사(여의도순복음신안산교회 담임) - 하나님 나라의 확장자로 살아가기
  • 최근 교회에 등록한 성도가 출석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회사의 과도한 업무로 항상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승진 경쟁, 인간관계, 경제적 부담이 그를 짓눌렀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일하는 동료의 모습에서 뭔가 다른 점을 발견했다. 같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평안함과 여유로움이 있었다. 도대체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 지 궁금했던 차에 교회 출석을 권유 받고 전도의 열매가 맺어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도의 자연스러운 출발점이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삶을 살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다름의 근원’에 대해 궁금해 한다. 폴 트립은 『지금 누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 실재라고 강조했다. 이는 전도에 있어 핵심적인 통찰을 제공한다. 우리는 미래의 천국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나누는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한 간호사는 환자들을 대할 때 다른 동료들과 달리 두려움 대신 평안함을 보였다. “죽음도 두렵지 않아요. 저에게는 영원한 소망이 있거든요.” 그녀의 고백을 들은 동료들이 하나둘씩 교회를 찾기 시작했다. 또 다른 자연스러운 전도의 열매였다. 그것은 말이 아닌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증명한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전도를 ‘부담스러운 의무’로 생각한다. 하지만 리처드 포스터가 『영적 훈련』에서 말했듯 진정한 영적 실재를 경험한 사람은 그것을 나누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평안을 맛본 사람에게 전도는 자연스러운 흘러넘침이다. 제리 브릿지스가 『거룩한 삶의 추구』에서 말했듯 우리의 일상적인 거룩함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전도 도구다. 직장에서의 정직함, 가정에서의 희생적 사랑, 이웃을 향한 친절함이 모두 하나님 나라를 증명하는 증거가 된다. 전도를 의무가 아닌 특권으로 생각하자.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소식을 가진 사람들이다.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베드로와 요한처럼 우리에게 은과 금은 없지만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외로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두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평안을 전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가치를 아는 그리스도인으로의 특권을 누리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면 우리 삶 자체가 전도가 된다.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증명할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근원이신 하나님을 찾게 된다. 전도하기 복된 계절이 왔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자로서 이 땅에 복음의 향기를 퍼뜨리며 살아가자.
  • 2025.09.12

    이용우 목사(여의도순복음횡성교회 담임) - 뜻 밖의 손님, 나그네 대접의 즐거움
  • 강원도 횡성에서 목회한지 어느덧 2년이 훌쩍 넘어 3년을 바라보고 있다. 지리적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1시간 20분이면 오는 거리이기 때문이다. 횡성이라는 위치상 심리적 거리가 멀어서 많은 분들이 시골 목회를 하는 줄 아신다. 그래서 이번 여름에는 선교하러 청년들이 많이 다녀갔다. 오지 선교를 꿈꾸고 온 청년들에게 미안했지만 여름사역에 함께 힘을 쏟아주어 너무 반갑고 고마웠다. 여의도순복음횡성교회는 읍내에 위치하고 있고, 주변에 아파트와 초, 중, 고등학교에 둘러 쌓여 도시 목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성도들 가운데 소를 키우시는 분이 한 분도 없을 정도다. 횡성은 인구가 2024년 7월 기준, 4만 6000명 정도이며 횡성하면 유명한 한우 사육두수는 6만 1000두정도 된다. 춘천에서 사역하는 친구 목사님이 계시는데, 그 목사님은 손님이 오시면 늘 ‘춘천 닭갈비’를 대접한다. 하지만 횡성은 한우가 유명해서 손님이 오시면 늘 난감하다. 횡성 한우는 일반 한우보다 값이 더 비싸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뜻 밖에 손님이 오면 대접에 고민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우리 교회는 1층에 요양원을 운영 중이다. 대부분의 치매 어르신을 천국 갈 때 까지 모시고 있다. 요양원은 우리 인생이 나그네임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현장이다. 교회에도 수많은 나그네가 다녀간다. 아는 지인 뿐 아니라 뜻 밖에 찾아오는 손님들도 많다. 2년 전 여름, 태풍 카눈이 북상했을 때 파주 예수전도단에 속한 팀이 2박 3일간 거처를 찾고, 사역을 하겠다고 해 극진히 대접했다. 그 팀을 통해서 우리 교회에 잃어버린 한 청년의 영혼이 소생되는 기쁨이 있었다. 그 팀은 매년 여름 마다 찾아와 위로를 더해주고 간다. 최근 교회 인근 어르신들에게 ‘말복 삼계탕’을 대접한 것도 그분들의 후원이 큰 몫을 했다. 올해 여름 우리교회에 본교회 가스펠청년들과 순복음강남교회 청년들, 여의도순복음구로교회 청년들이 와서 RK사역을 하고 돌아갔다. 그들도 우리 교회도 모두 대접하기에 서로 힘썼다. 그래서 모두에게 큰 기쁨이 있었다. 나그네 대접의 힘씀은 당연하다. 성경은 나그네를 대접하라고 당부하고 있으며 뜻 밖의 손님 대접에는 하나님의 큰 보상이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서 세 나그네(주의 천사)를 극진히 대접한 이야기는 후에 아내 사라에게 아들 이삭이 태어날 것을 예고 받고, 이어서 소돔을 위해 아브라함이 중재하는 장면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횡성에 뜻 밖에 오실 분들은 극진히 환영한다. 오셔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가시길 바란다. 대접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 2025.09.05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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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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