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영화-<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
  • 성공이 아니야, 섬김이야 # 1 예전 광주광역시 양림동 선교사 묘역을 들렀을 때 묘역이 앞마당처럼 포근했다. 유진 벨, 윌슨, 오웬 등 호남을 중심으로 선교사역을 펼친 미국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의 이름을 담은 묘비들이 촘촘히 늘어서 있었고 그 묘비들을 돌다 그녀의 이름을 찾았다. ‘Elisabeth Johanna Shepping, 서서평.’ 그녀의 묘비 앞에는 이미 여러 개의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그 무렵 그녀의 이름을 건 영화 한 편이 극장에 걸려 있었다. 쉐핑은 서른 두 살이던 1912년 조선에 왔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슬픈 땅으로 온 그녀는 이 아픈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해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이 선교사가 된 유일한 이유였다. 간호사였던 그녀는 조선에서 간호사를 양성하는 기관을 만들었고 여성 지도자를 키우는 이일성경학교를 설립했다. 한센 병 환자들을 비롯한 행려병자들과 길거리에 넘쳐나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이웃으로 살았다. 풍토병을 앓으면서도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보살피고 거두느라 결국 54세에 영양실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마지막 남은 시신까지 기증하고 사람들에게 “천국에서 만납시다” 인사한 뒤 빈손으로 떠났다. 1934년이었다. 그녀의 장례는 광주지역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졌는데 누구보다 그녀의 죽음을 슬퍼한 사람들은 가난한 양림천의 거지들과 한센병 환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르침을 받아 조선의 첫 신여성이고자 했던 성경학교의 제자들이었다. 그녀와 만남으로써 비로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그리고 귀한 존재임을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을 하늘처럼 받듦으로써 스스로 하나님의 제자가 된 셈이었다. # 2 영화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는 다시 그녀의 시간에 마음을 둘 수 있어 좋았다.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는 “Not Success But Service(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그녀를 떠올리면 무엇보다 먼저 떠오를 만큼 유명한 구절인데도 우리는 서서평 선교사를 떠올리면 성공이 아닌 섬김에다 방점을 찍었고 ‘성공’이란 단어를 까맣게 망각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성공’이라는 달콤한 유혹이 가끔은 혼자 남은 그녀의 방을 찾아와 쿡쿡 충동질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여 자고 일어날 때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의 글귀를 읽으며 자신을 다독였을 것이다. 그러니 한센병 환우를 돌보고 가난하고 외로운 어린아이를 위해 자신의 것을 떼어 주고 슬프고 고달픈 세월을 살아가는 조선 여인네들의 편이 되어준 그녀의 위대한 ‘섬김’은 어쩌면 그런 수많은 유혹들과의 싸움을 통해 얻어낸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성녀’로 불린 그녀이지만 성공이라는 욕망을 가진 사람, 나와 다르지 않음에도 나와 다르게 살고자 한 사람, 그래서 처음부터 성녀로 태어나지 않았으나 ‘호남의 성녀’가 된 사람…. 영화는 미혼모의 가정에서 태어나 가족의 사랑을 누리지 못한 채 외롭게 자란 어린 쉐핑의 시간을 깊이 들여다본다. 아버지의 존재조차 알지 못한 채 가여운 아이로 태어나 모질고 가혹한 ‘나쁜 엄마’를 경험한 그녀였다. 어쩌면 슬픈 나라 조선의 백성들을 가난과 탄압으로 내몰던 사납고 암울한 기운이 그녀의 ‘나쁜 엄마’와도 닮았던 것일까? 유독 조선에서 그녀의 시간은 엄마처럼 세밀하고 따뜻했다. 그녀의 눈은 조선의 바람과 바다와 나무와 풀 한 포기까지 세밀하게 관찰하였고 조선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녀의 사랑은 거기서부터 싹이 텄다. 그녀의 모든 부정적인 환경은 긍정과 감사로 열매 맺었다. 서서평은 결국 사랑과 섬김으로써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감사한 셈이었다. # 3 사랑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긍정이라고 믿는다.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이 아들을 죽인 빨갱이를 용서함으로써 자신에게 닥친 부정적 상황을 극복했듯이 말이다. 실제로 모든 사랑의 공통점은 부정적 감정을 이겨낸 긍정의 힘에서 비롯되었다. 자신을 향해 침 뱉고 조롱하던 사람들을 바라보며 분노와 증오의 감정조차 사랑과 자비의 언어로 녹여낸 분이 예수님이었다. 우리는 가끔 착각한다. 예수님이었으니까, 손양원 목사님이었으니까, 그녀는 성녀였으니까…. 나는 사람이니까 분노하고 증오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스스로 변론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말해버리는 그 순간 우리는 예수님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선택이 무엇이었는가 묻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고자 스스로 쳐서 복종시키는 노력을 용기 있게 감행해야 한다. ‘쉐핑’을 내려놓고 ‘서서평’으로 살아간 그녀처럼 날마다 자신을 다독여야 한다. ‘성공이 아니야, 섬김이야’라고.
  • 2020.02.0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통해 쓰여진 책
  • 세계 각 민족 330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돼 수많은 영혼 구원 개그우먼 조혜련씨가 남편의 전도로 교회에 다니게 되었을 때 이야기입니다. 처음 교회를 다니게 되었을 때 조혜련씨는 성경을 읽는 것이 재미있고 즐거워 늘 손에 들고 다니면서 찜질방이든 커피숍이든 어디를 가든 작은 소리로 읽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면 먼저 성경 이야기부터 꺼냈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성경을 읽지도 않지? 진짜 이해가 안돼!”라며 속으로 혀를 찼다고 합니다. 기독교를 흔히 책의 종교라고 합니다. 성경책에 하나님의 뜻이 모두 계시돼 있다고 믿고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정신으로 이 책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설교합니다.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는 대개 혼자 명상을 하거나 몸을 수련해 도를 깨닫기를 추구한다거나 교주의 말을 맹종하거나 율법이나 강령을 지키는 것이 바른 신앙이라고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참 역설적이게도 기독교만큼 경전을 다양하게 번역하는 종교가 없습니다. 이슬람교는 코란의 공식 번역을 금지하고 있고 유교도 사서삼경을 원문 그대로 외우고 또 외웁니다. 유독 기독교만은 히브리어 헬라어 아람어로 씌여진 성경을 다시 라틴어로 영어로 한국어와 세계 각국의 말로 번역했고 지금도 새로운 말로 옮기고 있습니다. 한국어 번역본도 얼마나 많은지 가장 권위 있는 번역본을 펴내는 성서공회에서 낸 성경만 해도 개역판 개역개정판 표준새번역판 새번역판 등 시대에 따라 말이 바뀌듯 성경도 현대어에 맞게 여러 형태로 번역했습니다. 변함없는 진리의 하나님 말씀을 현대의 언어로 번역해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노력입니다. 성경책을 읽지만 책 너머에서 책을 통해 역사하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책의 종교라면서도 문자에만 집착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유롭게 해석하도록 마냥 풀어놓지도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도 그 답은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씌여진 책’이라는 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성경을 쓸 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문자로 다 담기 어려운 깊은 의미까지 녹아들도록 영감을 주셨고 읽는 사람들도 성경 속에 담긴 하나님의 영감을 함께 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을 질타하신 이유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이들은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살리려 하기 보다 문자적인 율법을 지키는데 집착하다가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요즘 교회 안팎에서 기독교인들을 미혹시키는 이단들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해석한다면서 자기네가 만든 교리를 마음대로 가져다 붙입니다. 언뜻 들으면 명쾌하게 성경을 풀어주는 것처럼 느끼지만 사실은 엉터리입니다. 참된 신앙은 성경을 열심히 읽되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목회자나 좋은 신앙서적, 신학서적을 참고하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성경을 공부합니다. 그래도 자신이 성경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지 조심스럽게 묻고 조심스럽게 적용하면서 겸손하게 실천합니다. 그 속에서 사랑의 열매가 맺히는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지 지켜보면서 성경 속에 담긴 참 뜻을 구합니다. 조심스러우니까 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성경도 잘 모르는 것 아니야?”라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신앙이 성숙해졌다는 증표일 수 있습니다. 신앙이 깊은 사람일수록 더욱더 자신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맞는지 조심하게 됩니다. 성경을 읽고 또 읽고 연구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동안 이 지면을 통해 여의도순복음교회 성도님들을 뵈어서 참 감사했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으며 또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실천하다보면 또 다른 곳에서 뵙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끝>
  • 2019.12.15 / 김용두 기자

    얼마 남지 않은 올 한해… 예수님의 사랑으로 배려하고 이해하자
  • 사람의 마음을 열어주는 것은 논쟁이 아니라 아름다운 꽃 한송이 주일 아침, 카카오톡 친구들 단체대화방에 한 녀석이 사진을 띄웠습니다. 탐스럽게 익은 홍시, 하얀 코스모스 그리고 이름 모르는 분홍색 꽃들 사진입니다. '올해 마지막 꽃들'이라고 한마디 덧붙입니다. 예배 드리러 가는 길에 사진을 확인하고는 저도 답장을 써줍니다. "길가에 핀 가을 꽃 보고 친구들 생각해 사진 찍어 보내준 니 마음도 꽃처럼 예쁘다." 지난 두 달간 참 큰 다툼이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카카오톡이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에서 서로 반목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단체 대화방에선 아예 정치와 관련된 얘기는 금지어가 되기도 했습니다. 저도 뭔가 말을 하려다 관두기도 했습니다. 왠지 서로 서운해지고 조심스러워진 것 같아 조금 씁쓸했습니다. 가을바람이 선선해질 무렵 친구가 보내준 꽃 사진이 유난히 더 고마웠던 이유입니다. 꽃과 열매를 찍은 사진이 상처 난 마음에 연고를 발라주는 듯 했습니다. 고백하자면 저는 꽃 산 나무 이런 사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등산길에 휴대폰을 꺼내 바위와 나무와 꽃을 찍어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모습이 참 고리타분하다 생각했습니다. 예전 싸이월드 시절부터 그랬습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비싸고 화려한 음식 먹는 사진, 카페에서 음료와 빵 찍은 사진을 올리는 사람을 보면 허세를 부리는 것 같았습니다. 대신 저는 블로그나 페이스북으로 사회 현안을 날카롭게 파헤치는 주장, 남들이 생각 못했던 촌철살인의 시각을 소개하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요'를 많이 눌러주면 제 자신이 남들보다 조금 더 앞서가고 뛰어난 것 같은 착각에 빠졌습니다. 소셜미디어는 자유로운 공론의 장이 되어 가장 좋은 의견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모아주리라 기대했습니다.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습니다. 논쟁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깊이 생각해보기 전에 쉽게 찬성이냐 반대냐 입장부터 정했습니다. 일단 자기 입장을 정하고 나면 다른 편의 주장을 경청하기보다 성급하게 반박하고 비웃기 일쑤였습니다. 특히 정치적인 주제로 논쟁을 하면 모두 교회를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인데도 서로 손가락질하고 비난을 퍼붓곤 했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만 서로 '좋아요''멋져요'를 누르다보니,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기는 갈수록 어려워졌습니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되었지만 오히려 더 고립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어차피 논쟁을 해봐야 끼리끼리 모여서 '좋아요'를 누르는 걸로 끝날 거라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맘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재미난 영상이나 노래, 자연을 찍은 사진를 공유하는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현실을 외면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을 열어주는 것은 치열한 논쟁이 아니라 아름다운 꽃 한송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는 얘기입니다. 얼마 전 한 곡의 노래를 알게 되었습니다. 노래 제목이 '진달래'였습니다. "추운 겨울에 일을 밖에서 하다보니 손발이 시리고 참으로 곤하다. 인생이 이런 거지. 산다는 것이 쉬운 일 아니야. 저기 저기 보세요. 콘크리트 틈에 진달래가 피었네. 아름다운 진달래 나를 보려 찾아왔구나. 진달래야 너는 원망도 않고 모두를 반기는구나. 너를 만나 기쁘다. 안녕, 감사해." 혹시 카카오톡, 페이스북, 유튜브 같은 소셜미디어에서 말다툼을 벌이다 멀어진 친구가 있습니까? 벌써 11월인데, 오늘은 예쁜 낙엽 사진이나 한강 풍경 사진을 보내면서 이렇게 덧붙여 보면 어떨까요. "친구야, 예쁜 걸 보니 니 생각이 난다. 속상했지? 미안해.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서해줘. 우리 꽃처럼 다시 웃자."
  • 2019.11.10 / 김용두 기자

    영화 ‘남한산성’(2017년) - ‘옳고 그름’보다 ‘사랑과 믿음’으로
  • # 척화(斥和) 또는 주화(主和) 임진년에 왜구의 침략을 받아 7년 전쟁을 치른 조선은 피폐할대로 피폐했다. 조정은 왜구를 무찌른 공을 대명(大明)의 은덕으로 돌리며 수군을 이끈 충무공의 공적과 각지에서 일어선 의병들의 희생에 대해서는 오히려 깎아내리고자 했다. 광해가 즉위하며 조정이 숨통을 트는 듯했으나 노론 기득권 세력은 다시 인조를 내세워 그들의 지배를 이어갔다. 노론에 빌붙어 왕위에 오른 인조는 명 황제의 신하로 처신하느라 새로이 동아시아의 강자로 부상한 여진족의 나라 청(淸)과 맞서 전쟁을 치러야 할 운명이었다. 이처럼 정묘년과 병자년에 있었던 호란(胡亂)은 조정이 자초한 참화였다. 당시 조정을 사로잡은 척화론, 곧 오랑캐인 여진족의 나라에 맞서 싸우다가 모두가 죽더라도 명 황제의 은덕만큼은 기려야 한다는 주장은 그 참화의 토대인 셈이었다. 군신의 관계를 요구하며 침략한 청의 군대에 쫓겨 궁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조정은 이제 두 가지 선택이 남아 있었다. 척화(斥和), 곧 청과 싸워야 한다는 주장과 주화(主和), 곧 오랑캐라 하더라도 화친하자는 주장이었다. 척화는 사대부로서 의로운 죽음을 선택하는 길이며 주화는 비루하더라도 목숨을 보전하는 길이었다. 의로운 죽음은 떳떳하되 미래를 기약할 수 없고 비루한 삶은 고통스럽더라도 앞이 열려 있었다. 그러니 어느 선택을 하든 절대 옳거나 절대 그르지 않았다. 누구에게는 옳은 길이 누구에게는 절대 가선 안 될 길이었다. # 명길과 상헌 김훈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남한산성』은 이 절박한 선택의 기로에 선 '남한산성 조정'의 47일을 그려낸다. 화친으로써 후일을 도모하자는 주화파 최명길과 오랑캐에 맞서 싸워 대의를 지키자는 척화파 김상헌의 가파른 논쟁이 팽팽한 긴장을 자아내고, 다른 한편에선 조정의 대립이 어떠하든 그저 얼음이 녹고 민들레가 피기만을 기다리는 민중들의 지난한 시간들이 흐르고 있다. 인조는 끝내 주화의 길을 선택하고 청 태종에게 보낼 항복문서 집필을 명길에게 맡긴다. 두고두고 후세에 손가락질당할 일인 줄 알면서 명길은 그 길을 왕에게 강요하고 앞장서서 제 목숨을 던질 각오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명길이 쓴 항복문서를 상헌이 찢어버리자 명길이 다시 찢긴 문서들을 주워 모으며 "조정에는 이 문서를 찢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나처럼 주워 모으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명길과 상헌은 서로 다른 길을 주장했으나 실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데는 같은 마음인 셈이었다. 하여 두 사람의 주장은 다르면서도 같았다. 둘은 서로 자신이 가고자 한 길을 갈 뿐이었고 그 길을 가면서 책임을 면하고자 하지 않았다. 상헌은 자결하고자 했고 명길은 후대의 비판을 각오하였다. # 선하거나 악하거나 그러니 척화는 선이고 주화는 악이라는 식으로 역사를 보아 왔다면 이 또한 틀렸다. 역사를 보는 잣대는 차라리 상식이거나 몰상식이어야 할지 모른다. 영화 『남한산성』은 어쩌면 역사를 이원론으로 보려는 우리의 손쉬운 시각을 꾸짖고 있다. 최명길의 주화론 또한 하나의 상식일 뿐이었다고 평가하는 게 옳지 싶다. 역사를 보는 잣대만 아니라 사람을 보는 잣대 또한 선하거나 악하거나 두 개의 기준에 얽매여 제거하거나 칭송하는 데 익숙한 우리들이다. 사람의 판단에 따라 옳고 그름이 과연 하나님의 판단과도 일치할까? 세월이 흐른 뒤에 그때 옳은 것이 도리어 그른 것으로 판별이 되거나 그때 그른 것이 후에 옳은 것으로 드러나는 일을 많이 보면서 나는 섣부른 판단에서 벗어나고자 애썼다. 심지어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 하고 단언한 일조차 뒤늦게 '천만의 말씀'으로 드러나는 일도 목격했으니 사람의 일이란 도무지 판단이 쉽지 않다. 그 섣부른 판단으로 히틀러는 600만 명의 유대인 을 학살하고 스탈린은 수천만의 목숨을 앗아갔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성으로 살아갈 뿐이다. 인생이 가야 할 길을 사람이 알지 못하기에 오히려 인생은 하나님의 뜻을 물어가며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뿐이다. 먼 인생을 돌아보며 도무지 사람이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즈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개입에 대해 소름 돋는 감사를 드리게 된다. 그러니 역사를 대하거나 사람을 대하거나 섣부르게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보다 그 길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자 정성을 다할 일이다. 이를 진정성이라 일컫는다면, 세월이 지나고 모든 것이 낡아 부서지더라도 끝내 남는 것은 그 마음뿐이지 않을까. 사랑만이 영원하다는 성경의 말씀이야말로 진리가 아닐까. 영화 『남한산성』이 내게 말하고자 한 바도 그것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명철 기자
  • 2019.11.03 / 박명철 기자

    유튜브와 아이들
  • 휴대폰으로 유튜브 그만 보고 책 좀 읽으라고 아이에게 잔소리를 했습니다. 애 키우는 집마다 비슷한 사정일겁니다. 그거 아세요? 책이 처음 나왔을 때도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책 그만보고 일 좀 하라”고 잔소리를 했다고 합니다. 책에 담긴 옛이야기나 꾸며낸 사연이 너무 재미있어서 젊은이들이 푹 빠지는 바람에 사회문제가 됐다고 합니다.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하면 늘 젊은이들은 환호하고 어른들은 걱정했나봅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더 어린 아이들에게 ‘게임 조금만 하고 유튜브로 공부 하라’고 잔소리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요즘 유튜브 영상을 만드는 일을 합니다. 일 때문에라도 유튜브를 많이 봐야 합니다. “아이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이겠네요”라고 누군가 얘기한다면 “하하… 그럴까요?”라고 답합니다. 유튜브에는 1분마다 600분 분량의 영상이 올라온다고 합니다. 다 보기는 불가능하니 잘 골라야 합니다. 궁금한 주제를 담은 영상이나 재미있어 보이는 영상 한 두개를 보면 유튜브에서 척척 제가 좋아할만한 영상을 추천해줍니다. 어른도 계속 빠져서 보게 만드니 아이들이 유튜브만 들여다보는 게 이해는 됩니다. 유튜브에는 다른 영상에 비해 기독교 영상이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목사님들의 설교나 집회에서 부른 찬양, 간증이 많은데 아무래도 젊은이나 아이들이 보기엔 재미가 좀 떨어집니다. 유튜브에서는 이단도 조심해야 합니다. 기독교 분야의 인기영상으로 분류된 유튜브 채널을 찾아보면 교회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곳에서 만든 영상이 많습니다. 자기들끼리 ‘좋아요’도 많이 누르고 조회수도 올려주니 교회나 기독교단체들이 만든 영상보다 더 쉽게 검색이 됩니다. 가짜 뉴스 영상도 많습니다. 진짜 뉴스보다 더 자극적이고 단순해서 진실이라고 믿기 쉽습니다. 사정이 이러니 유튜브 보지마라고 잔소리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책도 좀 읽고 밖에 나가 바람도 쐬면 좋겠는데 말이죠. (아마 요즘 아이들은 밖에 나가면 친구들끼리 모여 또 유튜브 볼 겁니다. 흑흑.) 유튜브를 못 보게 하는 건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어차피 아이들이 유튜브로 정보도 얻고 공부도 하고 설교도 듣는다면, 좋은 영상을 찾아 고를 수 있게 또 미리 유튜브 보는 시간을 정해 놓고 절제할 수 있게 가르치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제 생각에 가장 좋은 유튜브 교육은 직접 영상을 만들어보는 겁니다. 직접 영상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에게 ‘좋아요’를 받는 창작자, 요즘 말로 크리에이터(Creator)가 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이들은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친구들끼리 모여서 영상을 만들면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가게 되겠지요? 무슨 내용을 어떻게 촬영해서 편집할까 고민하다보면 짧은 유튜브 영상 한편을 만드는 데에도 얼마나 많은 공부와 노력이 필요한지도 저절로 깨닫게 될 겁니다. 또 어떤 영상이 진심을 담아 만든 좋은 영상인지, 어떤 영상이 쉽게 인기만 끌려고 자극적으로 만든 엉터리 영상인지 분별할 수 있는 눈도 생깁니다. 영상을 만드는데 시간이 제법 많이 듭니다. 아마 한 두편 만들다보면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할테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계속 영상을 만들겠다고 하면 요즘 인기 있는 직업인 유튜버가 될 자질이 있을지 누가 압니까? 이왕이면 교회를 주제로 한 영상을 만들어보게 하면 어떨까요? 우리 교회를 소개하는 영상, 교회를 다니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재미있는지 얘기하는 영상,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인형이나 그림으로 들려주는 영상을 만들어 유튜브에 올리면 좋은 전도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요즘엔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미리 유튜브에서 목사님 설교나 교회 소개 영상을 찾아보는 경우도 많거든요. 그리고 자녀와 함께 유튜브를 보시게 되면 제가 만들고 있는 ‘미션라이프’ 채널의 영상도 한번 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꾸벅! 김지방(국민일보 기자)
  • 2019.10.13 / 김용두 기자

    영화 <채비> - 떠나야 할 사람들의 ‘채비’에 대하여
  • 영화 ‘채비’(2017년, 조영준 감독, 고두심 김성균 주연)는 발달장애를 가진 아들을 두고 먼저 떠나야 하는 어머니가 살아있는 동안 아들을 위해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것들, 그 소소한 이별의 방식을 다룬 작품이다. # 채비 1 세상에서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엄마뿐인 아들을 두고 먼저 떠나야 하는 어미의 심정이란 오직 홀로 남아 살아갈 자식에 대한 걱정뿐이다. 끼니도 해결해야 하고 빨래도 하고 돈벌이도 해야 할 텐데 아들은 그 무엇 하나 온전히 해낼 수조차 없는 발달장애인이다. 누나가 있지만 제 앞가림하기도 벅찬 형편이라 맡기지도 못한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속고만 살 것 같아 엄마는 아들에게 세상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한다. 그런데도 아들은 세상이 모두 자기편인 양 헤벌쭉 마냥 웃기만 한다. 병세가 더 악화되자 엄마는 우격다짐에 나선다. 아들이 언감생심 마음을 뺏긴 아가씨를 찾아가서 “제발 우리 아들에게 모질게 말해서 다시는 아가씨를 생각하지도 못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고, 목사님을 찾아가서 “하나님 같은 건 없으니 믿을 건 오로지 네 자신뿐이라고 말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엄마의 기대와 어긋났다. 아가씨는 모질지 않고 목사님은 아들 편이다. 구청 공무원들도 심지어 힘이 되어주지 않을 것 같은 누나조차 엄마와는 ‘다른’ 세상을 사는 듯하다. 하지만 엄마가 살아온 세상은 독하지 않으면 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없는 세상이었고, 엄마가 아들에게 물려줘야 할 세상 또한 그렇다고 믿었다. 어느새 엄마의 세상은 마치 지옥 같았다. ‘아들아, 짓밟히지 않으려면 짓밟아야 해. 그러니 일단은 가지고 보는 거야. 돈도 가지고 학벌도 가지고 힘도 가지게 되면 그때는 비로소 세상이 너를 함부로 깔보지 않을 거야. 그러니 정신 바짝 차리고 엄마 말을 들어. 영어는 필수야. 돈이 되는 직업을 찾아야 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돈을 모아야 해. 이기려고 사는 거야. 이기는 게 착한 것이니까. 내 말을 들으렴. 다른 이야기에 귀기울이면 안돼. 누구보다 강해야 돼, 아니 독해야 해.’ 어느새 영화 ‘채비’는 장애인 아들을 위한 채비에서, 아들을 남겨두고 떠나야 할 엄마의 채비로 그 무게중심이 옮아간다. 아들을 위해 분주하던 엄마는 오히려 험준한 세상을 살아오며 만난 모든 부정적이고 차가운 시선들을 거둬들인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이 살아갈 세상에 대한 긍정으로 이별을 맞기까지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채비의 시간을 산 셈이었다. # 채비 2 영화 ‘채비’의 엄마 마음을 가진 또 한 사람의 늙고 병든 아비를 우리는 알고 있다.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목자 없는 양처럼 남아서 믿음을 지켜가야 할 자식 같은 사람들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채비란 편지로써 마음을 전하는 길뿐이었다. 남은 이들은 그 편지를 읽고 용기를 내어 저 무지막지한 로마의 탄압을 견뎌야 했다. 그러니 편지는 절절하게 그 길을 열어주어야 하고 그들은 강해져야 하며 끝내 스스로를 지켜내야 했다. 하여 그가 해야 할 모든 채비란 자신이 살아온 세상의 민낯을 알려주는 일인 동시에 그 세상에 맞서는 길을 일러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물려주어야 할 세상과 그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터득해야 할 기술은 여느 아비들의 그것과 너무 달랐다. ‘정복’이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아무도 그런 기술로써 로마의 압제에 맞설 수 있으리라 예상하지 않았으므로 믿고 따르기도 쉽지 않을 것이었으나 그의 당부는 날 선 칼처럼 또렷했다. ‘사랑이다, 사랑으로써 맞서고 이겨야 한다. 아니 사랑만이 이긴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변화를 전제로 하지 않으므로 가장 안전한 전략이다. 네가 사랑하면 된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세상은 네가 할 수 있는 그 사랑의 힘으로써 맞설 때 너는 비로소 강해진다. 놀랍게도 사랑만이 영원히 남아서 승리한다.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것, 네가 지금까지 보아 온 모든 잘나고 힘센 것들조차 남김없이 사라진다. 그러나 사랑만은 끝내 이기고 남는다. 그러니 사랑이다, 오직 사랑이다.’ 회자정리(會者定離). 인생은 만나면 헤어지기 마련이어서 누구나 자신이 살아온 세상과 물건과 꿈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을 준비하며 살아간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숨 쉬고 살아가는 모든 시간은 어쩌면 이별을 위한 채비의 시간인지 모른다. 단지 저마다 그 채비의 내용이나 빛깔은 달라서 그것으로써 한 인생이 그려낸 삶의 무늬를 짐작할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자신에게 질문할 차례다. 나는 어떤 채비를 하며 살아가느냐고.
  • 2019.10.0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명태 알탕 그리고 명란파스타…
  • 하나님이 주신 생물 지혜롭게 다스려야 먹는 일은 우리가 웬만해선 하루도 빼놓지 않는 일입니다. 먹는 데에도 기독교적인 식사와 그렇지 않은 식사가 있을까요? 꼭 기독교적이라고 말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식사법은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 명태는 가장 값싼 생선의 대명사였습니다. 궤짝에 여러 마리를 집어넣어 상자 째로 팔 정도였으니까요. 이름도 다양합니다. 잡은 그대로면 생태, 얼리면 동태, 말리면 명태, 새끼는 노가리라고 불립니다. 구워 먹고 튀겨 먹고 국 끓여 먹는 건 기본입니다. 알은 명란젓, 내장은 창란젓, 아가미는 아가미젓을 만들어 먹지요. 알만 모아서 매운탕처럼 끓여내는 알탕은 가장 값싸게 생선 맛을 볼 수 있는 요리였지요. 이 명태가 귀한 몸이 되었습니다. 이미 80년대부터 동해바다에서 잡히는 양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2008년부터 사실상 명태 어획량은 0이 되었다고 합니다. 동해 바다에서 찾아보기도 힘들어서 산 채로 잡은 명태는 정부가 한 마리에 50만원을 주고 사들인다고 합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새끼까지 잡아서 구워먹고 알마저 젓을 담그고 탕을 끓여 먹으니 제대로 번식할 기회마저 없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한국인의 명태 소비량은 연간 30 만톤이 넘는다고 하니 그만큼 또 러시아나 일본 혹은 미국이나 캐나다의 바다에서 잡은 걸 수입해 와야 합니다. 지구의 70%가 바다이고 물고기들은 한 번에 수 만개의 알을 낳으니 수산자원은 말 그대로 무궁무진할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도 이미 명태의 사촌인 대구가 멸종 위기에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알을 품은 암컷을 산 채로 장을 담그는 걸 최고로 치는 꽃게나 알 자체가 최고급 요리로 꼽히는 철갑상어와 연어도 밥상에서 사라지게 될지 모릅니다. 창세기 1장 2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고는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과연 바다의 물고기를 포함한 모든 생물들을 잘 다스리고 있는 걸까요? 선진국에선 취미로 물고기를 잡는 데에도 엄격한 제한이 있습니다. 캐나다의 경우 개인이 취미 삼아 낚시를 하려고 해도 반드시 면허를 받아야 합니다. 면허는 1년에 몇 만원에 해당하는 돈만 내면 쉽게 받을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물고기는 잡으면 안 되는지 배우게 됩니다. 크기가 손바닥보다 작은 물고기는 잡아도 놔줘야 하고 크기가 크더라도 암컷은 무조건 놔줘야 합니다. 또 하루에 한 사람이 잡을 수 있는 물고기도 딱 2마리로 제한됩니다. 물고기가 알을 낳고 수정하는 산란기에는 아예 낚시를 금지하기도 하고 지역에 따라 물고기가 많이 모이는 곳은 1년 내내 낚시를 못하게 합니다. 한마디로 취미로만 낚시를 해야 하고 물고기들이 알을 낳고 번식하는 걸 방해해선 안 된다는 거죠. 만약 이런 규제를 어기고 규정보다 조금이라도 더 큰 물고기를 잡았다가는 몇 십 만원에 해당하는 벌금을 내야 합니다. 낚시꾼이 모이는 곳마다 감독관이 있어서 아주 강력하게 처벌합니다. 낚시면허제도는 캐나다만 아니라 미국 독일 프랑스 같은 여러 선진국에서 시행되고 있습니다. 물론 바다에서 물고기가 사라지는게 낚시꾼만의 책임은 아닙니다. 갈수록 뜨거워지는 지구온난화 탓도 있고 훨씬 더 많은 물고기를 잡는 상업 어선들이 얼마나 법규정을 잘 지키는지도 따져봐야 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기독교인이라면 낚시꾼이나 어부들만 탓할 게 아니라 나부터 물고기까지도 잘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떻게 실천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알탕이나 명란파스타 주문을 줄이는 것부터 시작하면 어떨까요? 우리 아이들이 명태를 그림책에서 멸종 동물로 배우기 전에 말입니다. 김지방(국민일보 기자)
  • 2019.08.11 / 김용두 기자

    똑똑똑 천국의 문을 두드려요
  • ▶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 On Heaven’s Door, 1997년 작품, 토마스 얀 감독/ 얀 요제프 리퍼스, 틸 슈바이거 주연) #1 “천국은 없어. 산타클로스가 없는 것처럼 천국도 없어. 천국이 없으면 우리 아빠는 어디에 있는 거야….” 예쁜 꼬마 환자 예은이가 엉엉 운다. 아빠는 천국에 갔다고 했는데 짓궂은 어떤 오빠가 예은이에게 천국은 어디에도 없다고 했다. 그러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아빠는 어디에 계시는 걸까? 예은은 아빠를 다시 볼 수 없을까 두려운 게다. 그때 예은에게 친구 같은 소아과 레지던트 박 선생님이 다가온다. “예은아, 아빠 얼굴 기억나니?” “예.” “아빠하고 놀던 것, 선물 사준 것도?” “예.” “그럼 됐어. 너한테는 아빠가 하늘나라로 가는 문이 있으니까.” “문요?” “응.” 박 선생님은 자신의 가슴을 가리킨다. 거기 문이 있다는 듯이. “그런데 맨날 울고 슬퍼하고 천국이 없다고 믿으면 이 문은 사라져버려. 하지만 아빠랑 즐거웠던 때를 생각하고 항상 웃으면 큰 문이 생겨. 아빠는 이 문으로 천국에 갔다가 예은이에게 놀러 오시기도 해. 천국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문이 없어서 그런 거야.” 그제야 예은의 얼굴에 두려움이 사라진다. “그 말 들으니까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 하며 마치 아빠가 곁에 있는 양 “아빠 맨날맨날 놀러 와야 해” 하고 말한다. 예은이도 작은 손으로 가슴을 ‘콩콩’ 두드린다. 그 모습이 마치 천국 문을 노크하는 듯하다. #2 소아외과 병원을 무대로 한 드라마 ‘굿닥터’(KBS2 월화드라마, 2013년)에 나오는 이 장면은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를 떠올리게 한다. 밥 딜런의 명곡 ‘노킹 온 헤븐스 도어’가 그대로 타이틀이 된 영화. 영화에서 천국이 있다는 걸 믿는 사람들만이 가진 그 문을 ‘노크’ 하던 두 남자를 기억한다. 두 남자는 같은 병실에서 만났다. 죽음을 코앞에 둔 그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이 전혀 달라서 한 번도 같은 자리에서 만나지 않았을 것 같은데, ‘죽음’이란 같은 종착지로 향해 가는 지금, 같은 병실에서 만났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모든 다름을 뒤로한 채 동반자가 되어 마지막 시간을 함께한다. 두 남자가 가야 할 길은 알 듯 모를 듯한 대사 한 마디에서 결정된다. “하늘나라에 대해 들어봤나? 그곳에선 바다의 아름다움과 바다에서 바라본 석양에 대해 얘기할 뿐이야. 물속으로 빠져들기 전에 핏빛으로 변하는 커다란 공, 사람들은 자신이 느낀 그 강렬함과 세상을 뒤덮는 바다의 냉기에 대해 논하지. 그러니까 영혼 속의 불길만이 영원한 거야. 노을이 질 때 불덩어리가 바다로 녹아드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불은 촛불 같은 마음속의 불꽃뿐이야.” 그리고 둘은 병실을 떠나 바다에 가기로 한다. 바다에 가서 석양을 바라보자고 결심한다.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미션이 되어버렸다. 천국에서 이야기할 그 주제를 찾아 나선 두 사람. 죽음 앞에 서지 않고선 발견할 수도 없고, 발견했다 하더라도 거기 인생을 던질 까닭도 없었을 텐데 둘은 지금 그 미션을 찾고 또 그 미션을 수행하기에 딱 좋은 조건을 가진 셈이었다. 영화는 시종 흐린 하늘처럼 차분하면서도 빠른 속도감이 느껴진다. 튀지도 가라앉지도 않는 두 사람의 마지막 여행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다다른 그들의 바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그 땅끝에서 두 사람은 이글거리는 바다의 태양을 만난다. 땅과 바다의 경계에 천국으로 향하는 문이 있는 것일까. 노래가 흐른다. 천국의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다. ‘똑똑똑 천국의 문을 두드려요∼. 똑똑똑 천국의 문을 두드려요’. 밥 딜런의 그 노래와 함께 다시 예은이가 자신의 가슴을 콩콩 치며 하던 말이 떠오른다. “아빠 맨날맨날 놀러와야 해.” #3 태양이 가장 뜨거운 계절, 다시 바다에 서면 파도처럼 두려움이 밀려온다. 방학숙제를 마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문득 시무룩해진다. 그리고 이글거리는 저 붉은 태양의 뜨거움이 녹아드는 바다를 바라보면 내 안에서도 ‘콩콩 똑똑똑’ 그 노크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 안의 두려움을 거두어들인다. ‘똑똑똑’ 천국의 문을 두드린다.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며 용기 있게 순종하리라 결심한다. 그 길 끝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열릴 것이다. 다시 이글거리며 타올라야 하리라, 우리의 자리에서. 박명철 기자
  • 2019.08.04 / 박명철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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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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