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풀어 쓴 교회사 산책
(81) 종교개혁㉑
  •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 ② 비텐베르크 시는 루터를 위해 금세공 장인이 만든 마차를 제공하고 추위와 비바람을 막기 위한 지붕을 달아주었다. 비텐베르크 대학은 여행 경비로 20굴덴을 지원했으며 동료 수도사와 교수 그리고 친구들이 루터와 길을 나섰다. 루터 일행이 라이프치히와 바이마르를 지나 에어푸르트에 도착했을 때 도시 입구에는 에어푸르트 대학 총장이 기사 40명과 함께 루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엄한 행렬이 루터를 호위하며 성 안으로 안내했다. 이튿날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대성당에 몰려든 군중 앞에 서서 설교했다. 인파의 무게로 발코니가 무너지려고 하자 사람들이 창문을 깨고 대피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루터는 거의 모든 도시에서 큰 환영을 받았으나 심적 갈등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여행 내내 스트레스로 인한 심한 복통과 변비에 시달렸으며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한편 보름스는 이미 연초부터 제국의회를 위해 1만명이 넘는 인파로 들끓고 있었다. 80명의 제후와 130명의 귀족 그리고 여러 나라의 왕이나 군주가 파견한 사절단이 모여들었고, 여기에 평의원, 성직자, 기사, 음악가, 하인, 광대들까지 몰려들었다. 인구가 7000명 남짓이던 도시는 갑작스러운 인구 폭증으로 큰 혼란에 빠졌다. 몇 달 전부터 이미 숙소가 동이 났고 의회와 총회를 열 장소와 사무국 및 법정을 마련하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루터의 소환 소식은 더욱 큰 기대를 모았다. 마침내 4월 16일 오전 10시 루터의 도착을 알리는 대성당 나팔수의 신호가 울리자 사람들은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2000명가량의 인파가 몰려들어 거리는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황제의 전령 슈투름이 선두에 섰고 루터의 마차가 뒤따랐다. 루터는 요한 기사단 건물을 숙소로 배정받았으나 두 명의 작센 관료와 함께 한 방을 사용해야 했다. 그럼에도 교회 개혁의 주창자를 직접 만나고 싶어 한 헤센 지방의 귀족들, 학자들, 그리고 평의원들이 잇달아 그를 찾아왔다. 4월 17일 수요일 루터는 황제와 제국의회 앞에서 심문받기 위해 오후 4시까지 의회에 출두해야 했다. 황제의 전령과 총사령관이 루터를 데리러 왔다. 그는 자신이 속한 수도회의 수도복을 입고 정수리를 말끔하게 깎은 차림으로 회의장에 들어섰다. 작고 초라한 방 안에는 젊은 황제 칼 5세가 앉아 있었다. 제국 통치자와 교회의 반항아가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루터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황제는 교황의 특사 알레안더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저자가 나를 이단으로 만드는 일은 없을 걸세!” 루터는 논쟁을 기대했지만 트리어 대주교의 신하 요한 폰 데어 엑켄이 진행한 심문은 예상과 크게 달랐다. 엑켄은 루터에게 탁자에 쌓아놓은 스무 권 가량의 책들을 가리키며 그것이 루터의 저술이 맞는지 또한 그 내용을 철회할 것인지 물었다. 질문은 라틴어와 독일어로 두 차례 반복됐다. 루터는 먼저 독일어로 이어 라틴어로 자신이 그 책들을 썼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철회 여부에 관한 즉답은 하지 않았다. 대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의 눈빛은 불안했고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확고하고 담대한 대답을 기대하던 많은 이들의 탄식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의회는 황제와 상의한 끝에 루터에게 하루의 시간을 주되 반드시 서면이 아닌 구두로 답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그렇게 루터는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학장)
  • 2025.08.29

    (80) 종교개혁⑳
  •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 ① “인쇄술은 이를 통해 하나님이 복음의 일을 전파시키기 위한 최고의 그리고 최근의 선물이다. 그것은 세상의 멸망에 앞선 마지막 불꽃이다.” 탁상담화에 남아 있는 루터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종교개혁 사상의 전파에 있어서 당시 인쇄술의 발달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다. 인쇄술은 사실 동양에서 개발되었지만 이를 본격적으로 활용한 곳은 유럽이었다. 1454년경 구텐베르크가 독일 마인츠에 첫 인쇄소를 세운 이후 유럽 전역으로 인쇄 기술이 확산됐다. 1480년에는 유럽 전역에 121개의 인쇄소가 운영됐고, 1500년에는 252개로 늘어났으며 그중 62개는 독일에 있었다. 1500년까지 252개 인쇄소에서 2만7000여 종의 작품이 약 2000만 부가 인쇄됐고, 그 가운데 약 3분의 1은 독일에서 생산됐다. 독일은 인쇄술의 중심지였으며 이러한 배경에서 루터의 논문들도 몇 달 만에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갈 수 있었다. 루터의 사상이 빠르게 확산되자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이를 저지하고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5세에게 기롤라모 알레안더를 포함한 추기경 사절단을 파견했다. 교황은 루터의 개혁 사상을 어떻게든 막으려 했고 먼 친척이자 정치적 동맹이었던 칼 5세에게 적극적인 개입을 요청했다. 당시 칼 5세는 1521년 1월 23일부터 보름스에서 제국의회를 소집해 독일 내 주요 사안을 다루고 있었는데 루터 문제에 대해서는 국외 추방으로 정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작센의 프리드리히 선제후를 비롯한 여러 제후들은 이에 강하게 반대했다(2023년 12월 29일자 기사 참조). 교황의 사절들과 이를 지지하던 제후들은 루터 문제를 조용히 마무리하길 원했다. 이미 루터에 대한 파문 교서가 공포됐기 때문에(1521년 4월 25일자 기사 참조), 교황의 판단을 재검토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을 꺼렸던 것이다. 반면 루터를 지지하는 제후들은 민중의 지지를 의식했다. 루터를 성급히 처벌할 경우 민심의 반발을 살 수 있다고 우려했다. 논쟁이 격화된 나머지 루터를 반대하던 브란덴부르크의 요아킴 선제후와 지지하던 프리드리히 선제후 사이에 멱살잡이까지 벌어졌고 평소 조용했던 팔츠의 루드비히 선제후도 소리를 치며 루터를 옹호하고 나섰다. 결국 황제는 루터를 제국의회에 직접 소환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토론은 생략한 채 루터에게 이단적인 주장을 철회할 것인지 여부만 묻는 방식으로 심문을 진행하고자 했다. 의회는 루터가 일부 주장을 철회한다면 다른 사안에 대한 답변도 들을 수 있겠지만 끝내 입장을 고수한다면 칙령을 발표해 루터의 법적 권리를 박탈하는 데 합의하기로 했다. 황제는 의회의 제안을 수용하여 루터에게 안전통행증과 함께 초청장을 보냈다. 제국의회의 회원들에게서 나오 는 세금을 크게 의존하고 있던 황제는 그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황제는 루터를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제국 전역에 루터의 책을 몰수하고 새로운 인쇄물을 찍어내는 것에 대한 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보름스에서 청문회를 열어 루터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전에 교황이 루터에게 내린 일방적인 판결을 지지한 셈이었다. 황제의 초청장은 3월 6일 발송됐고 같은 달 15일이 돼서야 루터에게 전달됐다. 루터는 이제 정말 보름스로 출두해야 했다. 정작 보름스에서는 루터가 진짜 오면 어떡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지만 루터는 제국의 대중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칠 소중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지체 없이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학장)
  • 2025.07.25

    (79) 종교개혁⑲
  • 『크리스천의 자유』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 가운데 마지막은 그가 1520년 가을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낸 『크리스천의 자유』이다. 이 글은 단순히 교회의 잘못된 교리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복음이 한 사람의 마음과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공개서한 형식으로 작성되었고 라틴어와 독일어로 동시에 발표되었다. 루터는 인간을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보며 이를 바탕으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행위, 자유와 순종의 관계를 설명한다. 루터는 먼저 영혼의 자유 곧 인간의 내적인 자유에 대해 말한다. 그는 외적인 조건이나 종교적 행위만으로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사람은 비로소 의롭고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롬 10:10)라는 말씀에 근거한 이해이다. 루터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성도가 마치 신랑과 신부처럼 하나가 된다고 보았다. 그리스도께 속한 생명과 구원은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의 죄와 죽음은 그리스도께 전가되어 십자가에서 소멸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과 믿음이 주는 참된 자유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이다. “믿음만 있으면 되는데, 굳이 선행은 왜 필요한가?” 루터는 이 질문에 대해 명확하게 답한다. 진정한 믿음은 반드시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내적으로는 어떤 사람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완전한 자유인이지만 동시에 그 자유를 가지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받은 사랑은 자연스럽게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흘러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결코 게으를 수 없으며,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선한 일을 실천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이러한 선행은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한 조건이 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를 얻은 사람이 감사와 사랑으로 드리는 삶의 열매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올려드리고 사랑으로 이웃을 향해 자신을 낮추는 삶. 이것이 복음이 말하는 자유를 얻은 크리스천의 삶이다.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딤전 1:9)라는 바울의 말처럼 루터는 이러한 자유를 통해 크리스천이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제시하며 당시 교회와 성도들에게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촉구했다. 다음은 『크리스천의 자유』 중 한 단락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크리스천의 진정한 자유와 섬김의 의미를 곱씹어 보자.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 대하여 완전히 자유로운 주인이며 누구에게도 종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 대하여 완전히 섬기는 종이며 누구에게나 종이다. 이 두 명제는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서로 잘 조화된다. 이 두 명제는 모두 바울 자신이 말한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19절에서 “나는 자유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을 만인의 종으로 만들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로마서 13장 8절에서는 “너희는 서로 간에 사랑하는 것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빚을 지지 말라”라고 말한다. 사랑이란 그 본질상 기꺼이 섬기고자 하는 것이요 사랑하는 그 대상에 대하여 기꺼이 그의 뜻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그러하시다. 그는 만물의 주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여인에게서 나셨으며 율법에 굴복하셨다(갈 4:4). 그는 자유자이며 동시에 종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계시며, 동시에 종의 형상으로 계신다(빌 2:6f).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담당)
  • 2025.06.27

    (78) 종교개혁⑱
  •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 대하여』 1520년 10월에 출간된 루터의 또 다른 종교개혁 저서인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 대하여』는 교회와 성례전을 중심으로 한 로마가톨릭의 신학을 성서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로마가톨릭교회는 성례전 그 자체에 주님의 은혜가 담겨 있다고 보았으며 이를 집례하는 자나 받는 자의 믿음 여부와 무관하게 성례를 통해 은혜가 주어진다고 가르쳤다(사효성, ex opere operato). 이에 반해 루터는 믿음을 성례전의 핵심 원리로 강조했다. 그는 성례전이 사람을 자동적으로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음으로 받는 이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그로 인해 의롭게 된다고 보았다. 루터는 성례전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다음의 세 가지 요소를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첫째, 성례의 외적 표지이다. 이는 물, 떡, 포도주 등과 같이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하나님이 정하신 구체적 표지이다. 둘째, 그 표지에 담긴 영적 의미이다. 성례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어진 영적 의미를 지닐 때 비로소 능력 있는 성례가 된다. 셋째, 성례를 받는 이의 믿음이다. 이를 통해 성례는 단순한 외적 행위가 아닌 실제로 은혜를 경험하는 통로가 된다. 루터에게 있어 성례는 그 자체로 마법적인 효력을 지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을 믿는 믿음 안에서 역사하는 은혜의 수단이었다. 따라서 루터는 형식적 참여가 아닌 참된 믿음으로 성례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더 나아가 루터는 성례전보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보았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그곳에 교회가 있다”(ubi est verbum ibi est ecclesia)라고 선언하면서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음을 역설했다. 성만찬과 관련하여 루터는 로마가톨릭이 성찬에 관해 세 가지 방식(잔을 빼앗는 속박, 화체설이라는 속박, 희생의 미사라는 속박)으로 교회를 속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 속박은 당시 가톨릭교회 사제들이 성찬식에서 포도주가 든 잔을 성도들에게 주지 않고, 빵만 베푸는 행위에 관한 것이었다. 이런 생각은 두 번째 속박, 즉 화체설(transubstantiatio)이라는 로마가톨릭의 성찬 교리로 인해 비롯된 것이었다. 1215년 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이노센트 3세는 ‘미사에서 사제가 선포하는 축성의 말씀과 동시에 빵과 포도주의 본질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고 선포했는데 바로 여기에서 ‘화체설’이라는 명칭이 유래했다. 이 교리에 따르면 포도주는 실제 그리스도의 피가 되므로 그것을 쏟는 일은 절대 용납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희생의 미사 역시 화체설과 관련된 것이었다. 사제의 축성을 통해 빵과 포도주의 본질이 그리스도의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로 바뀐다면 이는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반복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더 나아가 이 모든 공로는 축성을 맡은 사제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루터의 비판이었다. 로마가톨릭의 침례에 대한 루터의 비판은 명확하다. 당시 교리에 따르면 침례를 통해 원죄는 물론 개인이 스스로 짓는 자범죄의 뿌리까지도 제거된다고 여겼고 이에 따라 사람이 죄를 범할 때마다 새롭게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루터는 죄는 결코 침례를 통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와 참회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죄 사함의 은혜로 해결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침례는 한 번 받는 것이지만 성도는 믿음을 통해 항상 침례를 받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루터는 이 논문에서 로마가톨릭이 시행하던 일곱 가지 성례 중 성찬과 침례, 그리고 참회를 제외한 나머지-결혼, 서품, 견진, 종유 성사는 모두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담당)
  • 2025.05.23

    (77) 종교개혁⑰
  • 독일 크리스천 귀족들에게 : 그리스도교 신분의 개선에 관하여 쾰른과 뢰벤 대학의 신학자들이 마르틴 루터의 사상을 비판하는 평가를 제출하자 로마 교황청은 이를 근거로 1520년 6월 15일 파문 교서인 「주여 분기하소서」(Exsurge Domine)를 공포했다. 이 교서는 루터의 저술에서 발췌한 41개의 문장을 정죄하고 60일 이내에 이를 취소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경고했다. 루터는 7월 중순이 돼서야 이 파문 결정 사실을 접하게 되었고 이는 그가 집필 중이던 『독일 크리스천 귀족들에게 보내는 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단 판결을 앞두고 있던 루터의 심리적 긴장과 불안한 처지가 이 저술의 중요한 배경이 됐다. 루터는 이 초창기 개혁 선언서에서 특정한 제후들을 지목하기보다 일반적인 귀족층 전체에 호소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 글에 나타난 교황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은 울리히 폰 후텐(Ulrich von Hutten)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후텐은 1517년에 이탈리아 인문주의자 로렌초 발라의 저작을 출판했는데 이 책은 교황권의 세속적 권위를 정당화해 온 ‘콘스탄티누스의 증여 문서’가 위조된 것임을 논증하고 있었다. 루터는 1520년 초에 이 책을 읽고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확신하게 됐다. 루터는 글 속에서 자신을 수도사이자 신학박사로 소개하며 궁정 광대처럼 교회의 폐단을 지적하려 한다. 당시 궁정 광대는 왕이나 높은 귀족에 의해 고용되어 공연하던 이들이었는데 공연 속에서 권력자들에게 날카로운 첨언도 할 수 있었다. 『독일 크리스천 귀족들에게』는 최종 교정 없이 출간되었으며 초판은 1520년 8월 5일 비텐베르크에서 발행되어 단 3일 만에 4000부가 모두 소진됐다. 이후 독일어로 15판, 이탈리아어로 2판이 발간되었으며 전체 인쇄 부수는 약 6만 8000부로 추정된다. 이 글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개혁을 불가능하게 만든 ‘로마주의자들(주교, 신부, 수도사, 학자들)’의 세 가지 장벽에 대한 비판, 앞으로 공의회에서 다루어야 할 의제, 27개의 구체적 개혁 조항들이다. 세 가지 장벽이란 첫째는 영적 계급은 세속적 계급 위에 있다는 교리, 둘째는 교황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으며 그의 해석은 오류가 없다는 교리, 셋째는 교황만이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는 교리이다. 루터는 로마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이 세 겹의 장벽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글에서 루터는 속히 공의회가 열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공의회에서 교황청의 행정기구를 대폭 축소하고 독일에서 로마로 빠져나가는 자금의 흐름을 차단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마지막으로 27개의 개혁 조항들은 ‘교황과 교회 권위의 제한’(1-12), ‘성직자와 수도자에 대한 개혁’(13-18), ‘미사와 종교 행위 개혁’(19-23), ‘교회 교육 및 신학 개혁’(24-25), 그리고 ‘사회와 경제적 개혁’(26-27)으로 나뉜다. 특별히 20번 조항은 미신적 신앙 타파가 종교와 사회를 위한 개혁의 열쇠임을 강조하고 있다. “빌스낙의 ‘기적의 피 교회(die Wunderblutkirche)’, 슈테른베르크의 ‘성혈 예배당(die Kapelle des Heiligen Blutes)’, 트리어의 ‘거룩한 치마(der heilige Rock)’, 그림멘탈(Grimmenthal)과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의 성모 마리아 성지들(Marienheiligtumer)은 모두 악마의 속임수(Teufelsspuk)이다. 그곳에 모여드는 사람들의 열광적인 신앙을 보라. 이러한 은총의 장소로 순례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중요한 것은 자신의 본 교회 안에 다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침례, 성례, 설교 그리고 당신의 이웃이 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담당)
  • 2025.04.25

    (76) 종교개혁⑯
  • 성례전에 관한 설교들 루터는 에크(2월 23일자 참조) 그리고 카예탄(1월 26일자 참조)과의 논쟁을 거치면서 성례전 교리를 확립할 필요를 느꼈다. “성례전이 사람을 의롭게 하는가, 아니면 성례전에 참여하는 사람의 믿음이 그를 의롭게 하는가”라는 쟁점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1519년 루터는 회개, 침례, 성만찬 외에 다른 성례전은 인정할 수 없다고 밝히며 세 편의 설교를 했다. 먼저, 회개의 성례전에 대한 루터의 설교를 살펴보자. “죄의 용서는 교황, 감독, 사제 또는 이 땅 위에서 주어지는 사람의 직위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자신의 믿음에 달려 있다. 그는 우리를 향한 그의 위로와 축복을 인간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자신과 말씀 위에 세우셨다.” 루터는 성례전으로서 회개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에 따라 죄의 용서를 구하는 회개자의 믿음에 있음을 강조했다. 다음은 침례에 대한 루터의 설교 중 일부이다. “침례의 의미는 영적인 죄의 죽음이며,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의 부활이다. 죄 가운데 잉태되고 태어난 옛사람은 사라지고, 새로운 인간이 은혜 안에서 부활한다 … 침례를 통해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여러분과 동행하시며 하나가 되신다는 위로의 언약을 세우신다 … 그러므로 우리가 침례의 성례전을 통해 가져야 할 믿음은 이것이다. 침례는 인생의 마지막 날에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며, 그때야 비로소 인간은 새롭게 되어 죄없이 영원히 살 것이다. 또한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하여 죽을 때까지 죄와 싸우며 살아가야 한다.” 흥미롭게도 루터는 침례 후에도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보았기에, 죽는 날까지 죄와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성찬에 대한 설교에서 루터는, 빵을 떼고 포도주를 마시는 성례는 모든 그리스도의 몸 된 성도들의 연합과 교제를 의미하며,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개개인의 믿음을 통해 진정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그리스도와 모든 성도는 하나의 영적인 몸이다. 그것은 마치 한 도시의 주민들이 하나의 공동체요 한 몸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지체이자, 영적이며 영원한 신의 도성인 교회의 일부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받아들여진 사람은 성도의 공동체에 받아들여진 것이고,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과 연합하여 그의 지체가 된다.” 특히 루터는 성도의 교제로서 성찬의 특별한 은사는 ‘죄의 용서’라고 강조한다. 성찬에 참여하는 자는 믿음 안에서 죄 사함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엄한 심판이 우리에게 미치지 않도록 그리스도와 그의 성도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내어 준 바 되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은 기쁨으로 성찬에 참여하여, 성도의 교제 한가운데에 자신의 불행을 내려놓고, 영적인 몸인 모든 지체로부터 도움을 찾으라.” 결국 루터에게 있어서 성찬에 참여하는 가장 중요한 태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의지하는 믿음이었다. 마지막으로, 루터는 성찬에서 ‘빵’이 갖는 의미를 설명하며, 성도의 교제로서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사랑의 중요성에 관해서도 강조한다. “빵은 땅의 여러 곡물을 혼합하여 만든다. 이때 각각의 곡물은 그 형체와 몸을 상실하고 빵이라는 하나의 몸을 가지듯 … 만약 우리가 성찬을 바르게 사용한다면, 이러한 변화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그리스도는 그의 사랑으로 우리와 동일하게 되셨고, 우리와 함께 죄와 죽음과 모든 악에 대항하여 싸우셨다 … 우리도 그 사랑으로 변화되어 다른 성도의 연약함과 필요를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 …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변화되며 사랑으로 교제하게 된다. 사랑이 없이는 이러한 변화는 있을 수 없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담당)
  • 2025.03.28

    (75) 종교개혁⑮
  • 라이프치히 논쟁 1519년 6월 28일 칼 5세는 독일 황제로 선출되었다. 당시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이었고 독일 지역 7명의 제후는 황제를 선출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인 칼 5세는 스페인의 황제이기도 했는데 만약 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까지 차지하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교황청의 입지가 크게 약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교황청은 이를 반대하며 그 문제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루터에 대한 소송도 늦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터는 새로운 신학적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를 가리켜 1519년 6월 27일부터 7월 17일까지 벌어진 라이프치히 논쟁이라고 한다. 요한네스 에크는 독일 출신의 신학자로 로마가톨릭의 강력한 옹호자였다. 7월 2일까지 에크는 종교개혁 초기 루터의 신학적인 동지였던 칼슈타트와 예정과 자유의지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에크의 언변은 매우 뛰어나 칼슈타트는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종교개혁을 지지하던 잉골슈타트 대학의 다른 교수들조차도 에크에게 압도당했다. 그러나 7월 4일부터 루터가 직접 에크와 토론을 벌이기 시작하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루터와 에크는 교황의 수위권과 공의회의 권위에 대해서 먼저 논쟁을 벌였고 이후 면죄부, 참회, 연옥 등의 문제로 토론이 이어졌다. 교황의 수위권에 관한 논쟁은 이미 1518년 12월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에크는 수위권을 옹호하는 12개 논제를 제시했으며 이에 루터 역시 12개 반대 논제를 내세우며 맞섰다. 그러자 에크는 13번째 논제를 가지고 루터의 주장을 재반박했다. 에크는 “로마 교회가 실베스터(교황 실베스터 1세, 314~335) 이전에는 다른 교회보다 높지 않았다는 주장을 우리는 부인한다. 오히려 그 반대로 성 베드로의 신앙과 직위를 가진 그를 우리는 항상 베드로의 후계자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인정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루터 역시 13번째 반대 논제를 추가하며 “로마 교회가 다른 모든 교회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은 400년 이후에야 등장한 로마 교황의 빈약한 교령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1100년의 신앙의 역사와 성서 본문과 모든 공의회 가운데 가장 거룩한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는 이것을 반대한다”고 반박했다. 루터는 라이프치히에서 이러한 논제를 토론할 기회가 없을 경우를 대비해 『교황의 권력에 대한 13개 논제 해설』을 인쇄하여 미리 배포했다. 루터는 교황의 수위권이 ‘신의 뜻에 근거한 법’이라는 로마가톨릭의 주장을 부인하며 교황은 인간이 만든 하나의 제도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교황에게 순종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으며 한 번도 로마의 통치를 받지 않았던 동방 교회들에게는 그런 주장이나 요구가 제기된 적이 없음을 상기시켰다. 루터의 주장은 교회가 성서에 근거하지 않은 어떤 것을 구원에 절대적인 조건으로 강요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라이프치히 논쟁의 진정한 핵심은 ‘면죄부’나 ‘참회’의 문제가 아니라 성서에 근거한 ‘참된 교회에 관한 이해’였다. 1519년 8월 루터는 라이프치히 논쟁에서 전개한 자신의 논제를 바탕으로 세 개의 글을 작성했다: 『교황의 권한에 대한 13개조 논제 해설』, 『라이프치히 논제 해설』 그리고 『요한네스 에크의 사악한 판결 반박』이다. 한편, 에크는 종교개혁을 반대하는 쾰른 대학과 뢰벤 대학의 신학자들을 선동해서 루터의 주장을 비판하도록 했다. 그들은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루터의 8개 문구를 정죄하고 면죄부와 참회에 대한 그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루터의 글들을 소각하라고 명령했다. 외적으로는 에크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상 라이프치히 논쟁은 루터의 신학적 승리로 기억되고 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담당목사)
  • 2025.02.21

    (74) 종교개혁⑭
  • 아우구스부르크 심문 1518년 5월 초 루터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비텐베르크로 돌아왔다.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수도회 회원들은 대부분 루터를 지지했지만 작센의 도미니크파 수도회 회원들은 이단 혐의를 씌워 루터를 로마 교황청에 고발했다. 도미니크 교단 총회도 이러한 고소를 지지한 결과 교황 레오 10세는 교황청 신학자인 실베스터 프리에리아스에게 루터의 주장을 심사할 것을 명했다. 이를 근거로 1518년 6월 교황청 최고 판사인 체누치는 루터를 로마로 소환하라는 출두명령서를 발부했다. 이 명령서는 카예탄 추기경을 통해 1518년 8월 7일 루터에게 전달되었는데 그는 당시 교황청 대사 자격으로 터키와의 전쟁에 필요한 독일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내기 위해 아우구스부르크에 머물고 있었다. 루터의 지역 영주이던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이 문제에 즉각 개입했다. 로마 교황청에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했으며 이로써 루터의 심문은 추기경 카예탄의 주관하에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진행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교황 레오 10세는 1518년 8월 23일 교서를 통해 카예탄에게 루터를 심문할 수 있는 전권을 위임했으며 그 결과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아우구스부르크 푸거가(Fugger家)에서 루터 심문이 이루어졌다. 심문의 중요 내용은 루터의 95개조의 면죄부 반박문 중 58번째 논제에 관한 것이었다. 루터는 교황이 면죄부를 나누어주는 근거로써 주장하는 ‘교회의 보화’는 그리스도와 성자들의 공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교황 없이도 그리스도의 공로는 속사람에게는 은혜를, 겉 사람에게는 십자가와 죽음 그리고 지옥을 주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카예탄은 교회의 재정과 자원에 대한 교황의 권리를 강조하는 클레멘스 6세의 칙령(‘홀로 낳아진 자’)을 통해 그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반박했다. 그는 교황이 모든 공의회와 성서보다 우위에 있으며 루터는 자신의 모든 주장을 취소해야 한다고 비난했다. 루터는 생각할 시간을 요청했으며 자리를 떠났다. 10월 13일 루터의 두 번째 심문이 열렸다. 루터는 자신이 어떤 점에서 성서, 교부, 교황의 가르침에 어긋나게 가르쳤는지 잘 모르겠다고 밝혔다. 루터는 적법한 교회의 판단에 복종할 것이며 어느 곳에서나 상관없이 공개 토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10월 14일 세 번째 루터 심문이 열렸다. 카예탄은 루터의 입장을 반박하는 글을 낭독했고 루터에게 입장을 취소할 것을 다시 한번 요구했다. 카예탄은 루터에게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함으로써 시련을 겪는 교회에 보화의 공로를 획득했다’고 기록된 문헌을 읽어 주었다. 이에 루터는 보화를 얻는 것과 보화 자체는 다르며 그리스도 그 자신이 바로 그 보화요, 교회의 근거라고 반박했다. 루터는 “잘 가르쳐야 할 거룩한 아버지에 대해 잘 가르치지 못한 교황과 그의 판사에 관하여”라는 호소문을 작성해 유포했고 10월 22일 아우구스부르크를 떠났다. 로마에서는 루터를 압송하려는 노력에 이어 이제 면죄부 교리를 합법적으로 선포하고자 했다. 1518년 11월 9일 레오 10세는 교황은 죄를 사해 줄 수 있는 그의 권세에 근거하여 면죄부로 사면할 수 있다고 선포했다. 이 면죄부는 살아 있는 자들에게는 사면이라는 방식으로, 죽은 자들에게는 중보기도라는 방식으로 베풀어진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그사이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진행된 자신의 심문을 다룬 『아우구스부르크 행적』(Acta Augustana)을 집필하여 12월에 출판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담당목사)
  • 2025.01.24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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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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