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풀어 쓴 교회사 산책
(70) 종교개혁⑩
  • 종교개혁을 위한 루터의 각성 (1) 1512년 루터가 비텐베르크대학에서 성서학 교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요한 슈타우피츠의 결정적인 역할 덕분이었다. 슈타우피츠는 수도원 업무로 인해 더 이상 성서학 교수직을 맡을 수 없게 되자 루터에게 그 자리를 대신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이 시점부터 루터는 성서 주해에 집중하게 되었고, 이는 그에게 종교개혁을 위한 신학적 토대를 제공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슈타우피츠는 루터가 시련을 겪을 때마다 그를 위로하고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조언해 준 스승이자 친구였다. 루터는 자신이 구원의 확신을 얻으려 몸부림칠 때 슈타우피츠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며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시작한다는 그의 말은 번개처럼 나를 강타했고, 장사의 화살처럼 내 영혼에 박혔다.” 또 한 번은 루터가 자신이 구원을 위해 예정된 자인지 아닌지에 대한 깊은 고뇌에 빠졌을 때 슈타우피츠는 이렇게 조언했다. “예정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의 상처에서 시작해 보게. 하나님에 의해 예정되고 죄인을 위해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슴에 새겨야 하네. 그러면 예정으로 인한 고뇌는 사라질 것이네.” 1512년 10월 루터는 비텐베르크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수도원의 강의실에서 첫 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창세기를 가르친 후 1513년 8월부터 1515년 7월까지 시편을 강의했다. 이때 루터는 시편을 더욱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예를 들어 그는 시편 31편 1절에서 말하는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라는 구절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해 괴로워했다. 즉,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그를 구원하며 자유케 하는지 의문이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루터는 시편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위한 역사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시편 구절들이 갖는 이중적 의미를 구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즉, 하나는 다윗에게 연관되는 문자적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에게 연관되는 예언적 의미였다. 이 둘 가운데 루터는 예언적인 의미를 시편이 가진 본래적 의미로 여겼다. 다만 문자적인 의미와 예언적인 의미를 도덕적인 의미 안에서 이해할 때 그 본문 안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루터의 이러한 신학적 발전은 1515년 11월부터 1516년 9월까지 행한 로마서 강의에서 한층 발전했다. 그는 믿음이야말로 우리 안에 처음부터 내재한 원죄를 극복하고 우리 밖에 계신 그리스도(extra nos in christo), 그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붙들게 하는 것이었다.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소망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의로움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찬양은 그리스도에게 돌려야 하며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의 믿음을 통해 교회 안에 임재하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를 인간적인 의로움과 구별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인간의 의로움은 인간의 행위를 통해 일어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그것으로부터 인간의 행위를 일으킨다.”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의는 인간이 쌓은 공적을 마지막 날에 심판하시는 그런 의로움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는 의로움이며 오직 믿음 안에서만 인간에게 주어지는 의로움이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제1부원장)
  • 2024.09.27

    (69) 종교개혁⑨
  • 마르틴 루터의 로마 여행
    루터가 비텐베르크로 전출 가기 1년 전인 1510년 가을 그는 에얼랑엔, 뉘른베르크, 울름 그리고 알프스를 넘어 스위스의 쿠르를 지나 로마까지 이르는 길고도 험난한 여행을 해야 했다. 긴 여정과 한겨울의 날씨에 체력을 소진한 루터는 급기야 열병을 앓게 되었는데 훗날 그는 ‘그때 석류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여행의 목적은 로마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장들 그리고 가능하면 교황을 만나 청원서를 전하는 일이었다. 독일 에어푸르트 여러 지역에 있는 수도원들이 수도회 규정들을 둘러싸고 자율적으로 규정을 바꾸려 하면서 논쟁이 발생하자 수도회는 루터를 보내어 로마에 있는 교구 지도부에게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청원하려 했던 것이다. 루터는 그때까지만 해도 로마가톨릭에 순종하는 충성심 가득한 종이었다. 그는 로마에 도착하자 독일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이탈리아의 수도원들을 보고 감격해하면서 바닥에 엎드려 이렇게 외쳤다. “반갑다, 성스러운 로마여! 성스러운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 거룩한 도시여!” 루터는 로마에서 약 4주간 머물렀지만 그가 가져온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알게 된 로마의 실상은 루터에게 여러 가지 실망을 안겨 주었다. 그는 셀 수 없는 미사를 되풀이 하며 그것들을 날림으로 대충 해치우는 사제들을 보고 ‘역겹다’고 생각했다. 또한 성찬대에서 거만하게 구는 경박한 신부들에 관해 한탄하며, ‘독일 사제들은 이탈리아 성직자들에 관해 크게 착각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루터는 교황이 성찬대에서 ‘황금 같은 입술’을 열어 미사 참석자들의 영혼을 치유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이리저리 움직이는 일’ 외에 교황은 루터에게 아무런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라테란 성당 앞에 있는 ‘성스러운 계단’(scala sancta)은 당시 ‘빌라도의 계단’이라고 불리웠다. 당시 사람들은 맨 무릎으로 누구든지 그 28개의 계단을 오르면 죄 사함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1545년 11월 15일 설교에서 마르틴 루터는 로마 여행 중 방문한 그 계단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바 있다. “로마에 있을 때, 나는 내 할아버지를 연옥에서 구원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빌라도의 계단을 올라가며 각 단계마다 주기도문을 외웠습니다. 그렇게 하면 할아버지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정상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것이 정말인지 누가 알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심이 깊었던 루터는 순례를 중단하지 않았다. 물론, 그때까지는 개혁과 같은 거창한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후 여행에서 돌아온 루터는 수도회 내에서 지위가 높아졌고, 비텐베르크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설교자로 일하게 되었다. 1512년 비텐베르크대학에서 정식 신학 교수가 되면서 성경 강의에 집중할 수 있었는데, 종합해보면 로마 여행은 루터가 29세 되던 1513년 그의 내적인 갈등이 심해지면서 진정한 회심에 이르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제1부원장)
  • 2024.08.23

    (68) 종교개혁⑧
  • 마르틴 루터의 수도원 생활
    루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기 맘대로 수도사가 되기로 결정한 아들에게 매우 실망했다. 문학 석사가 된 자랑스런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수도원의 두꺼운 벽 안에 갇혀 인생을 허비하겠다니 얼마나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겠는가? 루터의 부모는 훗날 나머지 두 아들을 흑사병으로 잃고 나서야 루터를 향한 노기를 누그러뜨렸다. 루터는 웃음도 허락되지 않는 엄격한 규율 속에서 고요한 삶을 살게 되었다. 당시 인문학을 중시하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은 경제적으로도 제법 넉넉했지만 수도사들의 방에는 난로는커녕, 짚을 엮어 만든 침대와 담요가 전부였다. 수도사들은 끊임없이 죄에 관한 교리를 들어야 했으며, 더 나아가 매일 자신의 죄를 기억하고 고해해야 했다. 그들은 “숨 쉴 때마다 죄를 지을 수는 없지 않은가!”라며 불평하면서도 하루에 몇 시간씩 고해성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루터 역시 자신이 6시간 동안 죄를 고백한 적이 있다고 친구들에게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죄는 씻으면 씻을수록 점점 더 드러나게 된다”며 고해와 속죄 의식을 비난했다. 수도원에서 루터의 특이한 행동들은 일종의 정신질환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기록에 따르면 루터는 자신이 집례하는 첫 미사 때 바닥에 쓰러져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루터는 이 일에 관해 “미사 기도문을 낭송하면서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벌벌 떨었다”고 회고했다. 성찬대에 서서 자신이 누구에게 기도하는지 하나님에게 감히 말하고 있는 자신은 누구인지 혼란에 빠지면서 제단에서 도망치고 싶었다고 했다. 어쨌든 루터는 이 일을 계기로 ‘제2의 바울’이라는 좋은 평판까지 얻었다. 이후 루터는 차부제, 부제를 거쳐 1507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로마 가톨릭의 성직 계급은 크게 주교, 사제, 부제로 나뉘는데 부제 밑 가장 낮은 성직이 차부제이다. 이때부터 루터는 성경을 연구하는 데 모든 정성을 쏟았다. 그는 붉은색 가죽으로 덮어씌운 라틴어 성경을 들고 다니며 집착하듯 성경을 읽었는데 나중에는 성경 전문을 거의 외울 수 있을 정도였다. 1508년 가을에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으로부터 강의 의뢰를 받고 윤리 철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왕복 수일이 걸리는 거리였지만 그는 강도들이 출몰하는 위험한 산길을 지나 농가를 지나다니며 성실하게 강의를 다녔다. 수도회 내에서 지위가 높아지면서 루터는 1511년에 비텐베르크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로 전출을 가게 되었다. 이같은 신분 상승으로 루터는 그때까지 경험하지 못한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29세가 되던 그해 루터는 난생처음으로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원 별채의 독방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루터는 훗날 “초라한 쪽방에서 나와 교황의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박사학위를 받은 1512년에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정식 교수직도 얻게 되었다. 당시 비텐베르크의 영주는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였다. 그는 비텐베르크를 명망 있는 도시로 키우고자 했고 이를 위해 1502년 ‘하얀 언덕’(=비텐베르크) 위에 대학을 세웠다. 프리드리히 3세는 근처에 있던 라이프치히 대학을 뛰어넘겠다는 각오로 많은 투자를 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와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요청해 어렵사리 뛰어난 3명의 학자를 새로 영입했는데 그중에 한 명이 바로 마르틴 루터였다. 루터는 새로운 환경에서 성경을 더욱 깊이 연구했고, 특히 시편과 바울 서신서를 연구하면서 그의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제1부원장)
  • 2024.07.26

    (67) 종교개혁⑦
  • 마르틴 루터의 학업과 수도사로서의 시작
    1488년 루터는 아이스레벤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했다. 거기서 읽기, 쓰기, 노래, 라틴어를 배웠다. 8년의 기초과정을 마치고 1497년 봄에 루터는 막데부르크에 있는 성당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곳에선 공동생활형제단(FVC)과 함께 생활했는데 규칙적인 하루 일과와 경건생활 그리고 개혁적인 신앙과 일반학문을 강조하는 곳이었다. 루터는 이듬해인 1498년에 이곳을 떠나야 했다. 그의 부모가 재정적인 이유로 아이제나흐에 있는 성 게오르그 신부학교로 전학을 시켰기 때문이었다. 1501년 루터는 에어푸르트 대학에 진학했다. 루터의 부모는 아들의 출세를 원했기 때문에 법학자가 되길 바랐고 루터는 그 뜻에 순종했다. 당시 에어푸르트는 독일 대학 도시 중 가장 세련된 도시 중 하나였다. 거리엔 상가가 즐비하고 사람들로 붐볐으며 여러 가지 축제로 항상 시끌벅적했지만, 이곳에서 루터는 수도원이나 다름없는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다. 루터는 대학에서 배운 과목 중 토론술, 논리학, 변증법 등에 굉장한 재능을 나타냈다. 이 시절 루터와 함께 수학했던 친구들은 루터에게 ‘철학자’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루터는 타고난 언변술로 사람들을 사로잡았으며 어떤 주제의 토론에라도 환영받는 인사가 되었다. 이때 루터는 류트라는 만돌린과 비슷한 형태의 악기를 잘 연주했는데 “음악은 영혼을 기쁘게 한다”고 할 정도로 음악을 사랑하는 청년이었다. 루터는 성실한 학생이었고 아버지의 넉넉한 지원으로 짧은 시간에 인문학 석사 시험을 통과했다. 모든 것이 잘 되어가던 것처럼 보이던 이때 루터는 끔찍한 경험을 마주해야 했다. 그는 늘 작은 단검을 가지고 다녔는데 들판을 걷던 중 넘어지면서 단검이 다리를 찔렀다. 그런데 하필 단검 끝이 부러지면서 칼날 조각이 허벅다리에 깊이 박혔고 많은 피를 흘리게 되었다. 같이 걷던 친구가 의사를 불러오기 위해 인근 마을로 달려간 사이 루터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히며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마리아여, 나를 도와주소서!” 다행히 의사의 도움으로 곤경을 면했지만 그날 밤에 상처가 악화되면서 사경을 헤맬 수밖에 없었다. 사고가 터진 그날은 마침 부활절이었고 루터가 죽었다 살아났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죽음의 문턱에 섰던 경험 때문일까 루터는 갑자기 법학을 포기하고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입교하여 사제가 되기 위한 길로 들어섰다. 루터의 단검 이야기는 수도회 입교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거론되는 이야기 중 하나이다. 또 다른 한 가지 이야기는 잘 알려진 스토테른하임 부근에서 번개를 만난 이야기이다. 1505년 6월 루터는 스토테른하임에서 커다란 폭우를 만났다. 번개가 내리쳤고 그로 말미암아 루터는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다. 그는 간절히 기도하며 “내가 수도사가 되겠습니다”라는 서원을 했다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루터는 1505년 수도원을 찾아갔다. 자신은 자유로운 신분으로 미혼이며 아무런 질병도 없다고 고백한 후 정수리 머리털을 밀었다. 주변머리만 남기고 가운데 부분은 모두 삭발하는 것이 당시 수도사의 관행이었다. 루터는 이렇게 수도사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4.06.28

    (66) 종교개혁⑥
  • 마르틴 루터의 출생과 가정 환경
    루터는 스스로 “나는 1484년 만스펠트에서 태어났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 그의 절친 필립 멜란히톤과의 대화 내용을 따르면 루터의 확신은 다소 의심스럽다. “루터가 말했다. 나는 이제 60세가 되었네. 그러자 멜란히톤이 대답했다. 자네는 고작 58세가 아닌가? 자네의 모친이 직접 이야기해 준 것이라네. 그러자 루터가 대답했다. 자네들이 나를 너무 어리게 생각하는군. 나는 틀림없이 60세라네. 하지만 멜란히톤은 루터의 주장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처럼 루터가 태어난 해는 명확하지 하지만 날짜는 정확히 알려져 있다. 11월 10일 자정이 다 되어가던 시각, 독일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났다. 다음 날이 성자 마르틴의 날이었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 유아침례를 받았다. 지금은 멜란히톤의 주장을 받아들여 대체로 1483년 11월 10일을 루터가 태어난 날로 여기고 있다. 루터의 아버지 한스 루더는 광부였는데 쉬지 않고 일해서 작은 광산 몇 개를 소유할 정도로 출세한 사람이었다. 루터의 어린 시절 회상을 따르면 어머니 마가레테는 알뜰한 주부였다. 그녀는 자주 숲에 나가 우울한 노래를 흥얼거리며 오븐에 쓸 땔감을 줍곤 했다. 루터가 기억하는 그 노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아무도 너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단다. 그건 우리 잘못 때문이야.”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을 엄하고 벌주기 좋아하는 분으로 여겼다. 또한 미신적인 믿음도 강했는데 귀신과 악한 영들이 광산의 갱과 땅속 무덤에서 올라와 악한 일을 일으킨다고 믿었다. 루터의 형제 한 명이 죽었을 때 루터의 어머니는 옆집 여인이 요술을 써서 자신의 아이를 죽였다고 믿었으며, 루터 역시 옆집 마녀가 동생을 독살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루터는 당시 미신이 주는 두려움보다 자신의 친부모에게 느끼는 두려움이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루터의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폭력적으로 변했다. 한번은 아버지에게 너무 가혹한 벌을 받고 아버지가 너무 원망스러워 가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 어머니에게 피가 나도록 두들겨 맞았는데 호두 한 알을 훔쳤다는 이유였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가? 루터의 어린 시절은 과연 그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훗날 루터의 부인 카타리나는 집을 개방하고 루터의 친구들과 제자들이 언제든 숙식할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인지 루터의 식탁은 항상 흥미로운 토론이 벌어졌다. 여러 가지 신앙적인 질문이나 현실적인 질문들이 오갔는데 이에 대한 루터의 대답을 기록한 것이 『식탁담화』이다. 이 책은 로마가톨릭이 거의 다 태워 버렸지만 기적적으로 한 권이 보존되어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그 식탁담화가 전하는 루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세상은 술에 취한 농부 같아서 말안장 위에 간신히 앉혀놓아도 다시 반대편으로 떨어진다네. 아무도 세상을 도울 수가 없어.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따르기 마련인데 세상은 사탄을 따르기 때문이네.” 루터와 그의 지인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어린 루터는 성장하면서 어느 순간 이른바 두 번째 태어나는 경험을 했다. ‘분노의 루터’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강인한 의지, 저항하는 힘, 반항적인 자아가 만들어진 것이다. 루터는 자신이 영혼에 매인, 오랜 시간 동안 풀지 못한 매듭들과 함께 살아왔다고 고백한 바 있다. 하지만 어둡고 우울하게 보이는 그의 어린 시절의 모든 것은 그를 종교개혁의 리더로 성장시키는 요람이 되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4.05.24

    (65) 종교개혁⑤
  • 16세기 초 교회와 경건<4>
    에라스무스는 침례받은 그리스도인에게도 세 가지 악이 활동하고 있기에 여전히 은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세 가지 악이란 영적인 무지함, 육적인 정욕, 그리고 육체의 연약함이었다. 에라스무스는 이성이야말로 이러한 육과 영의 대립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빛 가운데로 이끄는 은총의 길잡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에라스무스는 신약성서와 함께 종교적 경건을 위해 교부들의 글을 연구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히에로니무스, 푸아티에르의 힐라리우스, 크리소스토무스, 이레네우스, 오리게네스, 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들이 편집되어 쏟아져 나왔다. 에라스무스는 교부들의 작품들을 읽고 연구하는 이성적 노력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실천해야 할 삶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인문주의적 개혁신학은 16세기 초 지식인들 가운데 상당히 넓게 확산되어 있었다. 이와 함께 당시 종교적 경건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던 것이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수도회를 중심으로 한 금욕주의적 경건이었다. 당시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수도원 회원이자 수련원장이었던 팔츠의 요하네스, 그리고 독일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수도원 총 책임자였던 슈타우피츠의 요하네스 등이 16세기 전환기에 하나님의 은총 아래 금욕주의적 경건을 강조하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여기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과 영성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에게 있어서 인간은 스스로의 경건으로 의롭게 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경건은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라는 은총이 있을 때 큰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루터가 왜 그토록 혹독한 경건의 삶을 고수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갈망했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16세기 초 종교적 경건의 마지막 형태가 신비주의였다. 중세후기의 신비주의는 세 가지 노선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요하네스 타울러와 하인리히 수소에게 이어진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독일 신비주의이다. 둘째는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의 사색적인 신비주의이다. 셋째는 보나벤투라, 클레르보의 베른하르트, 요한 게르손 등의 소위 가톨릭적 신비주의이다. 이 세 가지 신비주의는 각기 16세기 전환기에 뜨거웠던 종교적 경건의 형성에 독특한 근거를 제공했다. 먼저, 클레르보의 베른하르트가 강조한 것은 ‘관조’(contemplatio)였다. 명상과 사색을 통해 신을 관찰하며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밖에서의 자아 인식을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관조를 위해선 무엇보다 초월적 경험이 중요한데 이는 진리를 명상함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감성적인 이성이 매우 중요했다. 이러한 신비주의적 경건운동은 독일 라인강을 따라 물결치기 시작했다. 특히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들에게서 활발했기 때문에 도미니칸 신비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을 일컫는 호칭은 ‘하나님의 친구들’(amici dei)였다. 이들은 중세 가톨릭의 미사를 통한 신앙에 반대하여 하나님과의 친밀한 내적인 체험을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자기 부인의 길을 통해 인간의 욕구와 의지를 극단적으로 제한해야 한다고 믿었고 성령의 사역을 통해 인간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강조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인간 영혼의 일치와 연합이 목표였다. 마지막으로 디오니시우스의 아레오파기타의 신비주의는 6세기 이후로 유통되고 있던 신비서적에서 비롯되었다. 교회전승에 따르면 디오니시우스는 아덴의 첫 번째 감독이었다. 그의 신학은 부정신학(via negativa)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제한적이고 불완전한 정의를 부정함으로써 하나님의 본질을 인식하려던 신학이었다. 이를 통해 모든 인간의 객관적인 사고를 벗어나 계시의 말씀 건너편에 숨어계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던 중세 스콜라신학과는 서로 대치될 수밖에 없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4.04.26

    (64) 종교개혁④
  • 16세기 초 교회와 경건<3>
    지난 회에서 살펴보았듯이 15~16세기 무렵 성서를 중심으로 한 인문주의와 함께 내면의 종교적 경건에 힘쓰고자 하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성서연구와 경건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를 ‘작은 예수로서의 삶’으로 보았고 이를 이루기 위해 직접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되거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삶을 살고자 했다. 그들은 경건한 삶을 통해 스스로를 개혁하고 더 나아가 당시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이러한 16세기의 경건운동은 먼저 요하네스 폰 베젤 수도사에게서 뚜렷이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당시 글을 통해 가톨릭교회를 비판하는 한편, 설교를 통해서도 직접 일반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그는 신앙이 아니라 이성으로 성서를 이해하려 했던 변질된 스콜라신학과 함께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고 억압하는 가톨릭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특히, 그는 면죄부 판매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는데 이는 루터보다도 앞선 종교개혁적 요구였다. 비록 그는 종교재판에 넘겨져 죽었지만 그가 노력했던 경건운동과 신앙의 개혁은 요하네스 폰 고흐, 베젤 강스포르트, 에라스무스 폰 로테르담 그리고 마르틴 루터에게까지 이어졌다. 마르틴 루터는 훗날 자신의 칭의론과 유사한 사상을 전개했던 베젤 강스포르트를 가리켜 “나는 모든 것을 베젤 강스포르트에게서 넘겨받았다”라며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에라스무스는 원어로 성서 본문을 연구하고 주해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왜냐하면 라틴어 번역본이었던 불가타를 중심으로 한 전통을 뛰어넘어 그리스도 본래의 말씀을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아래는 1516년 출판한 신약성서의 서문을 요약한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인문주의적인 개혁신학의 목적을 밝히고 있는데, 신학을 전공하거나 배우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신약성서의 말씀 가운데 그리스도는 사시고, 숨 쉬고, 오늘 우리를 위해 말씀하신다. (성서를 통해) 그리스도는 이 땅에 계셨을 때보다 더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직접 그분을 보고 들은 것보다, 당신은 복음서에서 훨씬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있다. 당신은 단지 눈과 귀만 열면 된다. 내게는 참된 신학자란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빙빙 돌려 말하는 삼단논법이 아니라 (성서를 통해 얻은) 내적인 감동, 직접적인 체험 그리고 실천하는 삶으로 이 세상의 부를 경멸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사람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보화에다 그의 신앙을 올려놓아서는 안 되며, 오히려 전심으로 하늘을 신뢰해야 하며, 불의에 대응해서는 안 되며, 저주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사람이다. 내가 생각하는 바와 동일한 것을 설교하고, 깊은 감동을 주며, 권면하고 초대하며 격려하는 사람은 그가 노동자이건 직물업자이건 간에 정말로 참된 신학자이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모두 성서의 위대한 저자들을 연구하지 않는가? 무엇 때문에 우리는 성서를 항상 우리 곁에 두지 못하는가? 항상 성서를 손에 쥐고 그 안에 있는 것을 연구하고 찾으라. 무엇 때문에 우리는 (가톨릭교회가 가르치는) 주석과 그것이 지닌 모순된 의견에 거의 모든 우리의 생을 허비하는가? 물론 그 주석들 안에는 신학자들의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의심의 여지 없이 성서 그 자체는 장래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들의 학교가 될 것이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4.03.29

    (63) 종교개혁③
  • 16세기 초 교회와 경건<2>
    중세 후기 교회가 내세웠던 신학적 교리들은 많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했다. 당시 보편(universals)이 실재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교리들은 로마 교회와 그 주교인 교황을 여러 개별 교회와 신자들 위에 군림할 수 있게 했다(2022년 12월 23일 자 기사 참조). 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대리자로 가르쳤으며 자신들의 명령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따르도록 강요할 수 있었다. 이러한 중세 교회의 가르침은 16세기 사람들을 불안하게 했고 성경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까지 요구했으며, 결국 평범한 예배나 성례전만으로는 구원을 확신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했다. 이러한 중세 후기 스콜라 신학과 그 체계를 무너뜨린 것은 유명론이었다. 이에 따르면 보편이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름일 뿐이므로 결국 그들이 말하는 궁극적인 제1보편자로서 하나님의 실존은 증명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만으로 증명될 수 없는 분이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계심을 증명하는 것은 이성의 일이 아니라 신앙의 일이다. 신앙에 관한 일들은 이성을 통해서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만 증명될 수 있다.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 하나님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의 유일한 원천은 성경이다. 성경은 성령의 직접적인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며 믿음의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가르침과 진리에 대한 유일한 근거 역시 성경뿐이다. 성경이 유일한 권위를 가진다면 교회의 교리는 교황이나 로마 가톨릭교회에 좌우될 수 없다. 교황은 절대무오성을 주장할 수 없으며 로마 교회는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되려고 해선 안 된다. 교황이 절대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면 국가 위에 군림할 수 없고 세속의 정치적인 일들에 간섭해서도 안 된다. 이러한 신학적 인식의 대전환은 경건한 신앙에 갈급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심을 품게 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정욕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는 삶을 최고의 덕으로 삼았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기 위해 그들은 성경을 묵상하고 주석과 성경 본문을 매일 낭독했다. 과거 엄격한 규율을 지키는 수도원주의와 달리 16세기 경건운동은 성경을 읽고 이를 통해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하나님의 구원과 은총을 확신하는 데 있었다. 당시 대표적인 경건 서적은 토마스 아 켐피스(1379/1380~1491)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였다. 그는 네 권으로 나누어 경건한 삶에 관해 설명했는데 1장 1절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방황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요 8:12). 이것은 우리가 진실로 빛을 발하고 마음의 모든 눈먼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원할 때 얼마만큼이나 우리가 그분의 삶과 성품을 본받아야 하는가를 권고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깊이 숙고하는 일에 우리의 온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성자들의 모든 가르침보다 뛰어나며 영이 있는 사람은 바로 여기서 감춰진 만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이 복음서를 자주 읽기는 하지만 배고픔과 갈증이 없이 생명의 떡을 찾는 것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의 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완전하게 배우고 향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의 온 삶이 작은 예수의 삶(=제2의 예수로서의 삶)이 되도록 전심을 다해 힘써야만 한다.
  • 2024.02.23

  • 순복음가족신문

    PDF

    지면보기

  • 행복으로의 초대

    PDF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