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요약본
교회를 사랑하라
  •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야훼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시편 122편 6~9절 교회 중심의 신앙으로 예배에 최선 다하고 기쁨과 감사로 주님 섬길 때 은혜로 사는 복된 인생 돼 10월 마지막 주일은 종교 개혁 주일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을 강조하며 종교 개혁을 이끌었습니다. 종교 개혁의 정신은 이후 여러 부흥 운동을 거쳐 오순절 성령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 주일은 우리 교단의 총회 주일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신앙의 유산을 되새기며 시편 122편의 다윗처럼 성전을 향한 기쁨과 평화를 위한 기도를 드리고자 합니다. 1.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라 시편 122편에서 다윗은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시 122:6).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전을 향하여 하나님의 평안이 충만하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처음 지어졌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그 성전에 가득 임했습니다.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야훼의 성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야훼의 영광이 야훼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왕상 8:10~11). 이처럼 우리 교회가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복된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주님의 영광이 임할 때 우리에게 은혜가 넘쳐나게 되고 주님의 기쁨이 우리 삶 가운데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감사와 찬양으로 주님의 전에 나아가라고 말씀합니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 100:4). 우리가 감사와 찬양으로 주님께 나아가 예배드릴 때 하나님은 하늘의 문을 여시어 우리에게 은혜와 복을 내려주십니다. 교회를 통해 우리 삶 가운데 기쁨과 평안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을 상징하며 동시에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인 교회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이자 교회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교회는 그의 몸입니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22~23). 성도들은 교회의 지체로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교회 안에 분열과 다툼과 갈등이 일어나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사랑으로 섬기고 화합할 때 교회는 주님의 평안으로 충만하여 부흥하게 될 것입니다. 2. 예루살렘을 사랑하라 성경은 예루살렘을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시 122:6). 하나님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형통의 복을 넘치게 부어주십니다. 교회는 예배의 장소이자 축복의 통로이며 예배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우리의 최선의 모습입니다. 성전에 나와 엎드려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솔로몬 왕은 성전 건축을 마친 후 봉헌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께 이렇게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내 하나님 야훼여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이 종이 오늘 주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왕상 8:28~29). 우리가 주님의 전에 나와 기도할 때 주님은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7).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우리 삶의 문제와 고통은 대부분 기도하지 않아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내 힘으로 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더 커지고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면 마음의 염려, 근심, 걱정이 떠나가고 모든 어려움이 해결됩니다. 우리는 기도의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의 기도를 듣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고 또 부르짖으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주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성전을 통해 놀라운 은혜와 복을 넘치도록 우리에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3. 복의 근원 하나님의 집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며 복의 근원입니다. 신앙생활의 기본은 예배에 있습니다. 예배 잘 드리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예배가 멀어지면 하나님도 멀어지게 됩니다. 반대로 예배드리기를 힘쓰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집에서 우리에게 넘치는 복을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집은 축복의 터전입니다. “야훼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시 122:9). 하나님의 복이 성전으로부터 강물같이 흘러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집에 거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시 84:4). 우리가 성전에서 예배드릴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기적이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야훼를 송축하라 천지를 지으신 야훼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시 134:2~3). 하나님은 성소에서 주의 자녀에게 평안을 부어주십니다.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시 122:8). 우리가 이 세상 모든 걸 다 가졌다 해도 마음에 평안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 가운데 염려, 근심, 걱정, 불안, 미움, 분노가 떠나게 하시고 평안이 넘쳐나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오는 것이 복입니다. 예배드리는 것이 복입니다. 주님 앞에 나올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놀라운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며 강건함을 얻는 삼중축복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을 하나님 제일주의, 교회 중심의 신앙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충성스럽게 섬기는 귀한 일꾼이 되어 하나님 나라의 큰 상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예배에 최선을 다하고 기쁨과 감사로 주님을 섬기며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자녀 삼아 주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이 땅에서 짧은 나그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예수님을 잘 믿고 교회를 열심히 섬기며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의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장차 주님 앞에 설 때 큰 상을 받는 충성된 일꾼이 되도록 우리의 삶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10.26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
  •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브리서 11장 5~6절) 죄 가운데 방황하던 인생 예수 보혈로 회개하고 성경 충만한 믿음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 살아야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죄와 허물 많은 인간은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어떤 노력이나 행위로도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할 때 우리는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요 3:16).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제일주의의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에녹 히브리서 11장은 에녹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 11:5). 에녹이 살던 시대는 사람들이 타락하여 죄가 범람한 시대였습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하나님을 섬기는 의인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에녹은 그 죄악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성경은 그가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다고 기록합니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창 5:22~23). 사람들의 믿음이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것과 달리 에녹의 믿음은 300년 동안 변함없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이 한결같은 믿음에 감동하시어 그를 이 땅에서 죽음을 보지 않게 하시고 천국으로 데려가셨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 또한 신약 성경 유다서는 에녹이 죄 가운데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음을 보여줍니다(유 1:14~15). 우리는 이처럼 한평생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의인의 삶을 살았던 에녹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내 뜻과 고집대로 사는 삶이 아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하늘의 문을 여시고 넘치는 복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도록 지음받았습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7).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믿음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 11:6).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께 모든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며 그분께 나아가기를 힘쓰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우리의 구세주 되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의 통로이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고 고백하면서도 여러 일로 인해 스스로 시험에 들어 주님과 멀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예배에 소홀해질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집니다. 우리는 주님의 음성 대신 사람의 음성을 듣다가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당한 채 머물러 있지 말고 다시 일어나 예배를 회복하고 주님과의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배는 축복의 통로이므로 예배에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무슨 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든지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회개하고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고집, 교만, 불순종을 회개하고 주님 앞에 나올 때 하나님은 하늘 문을 여시고 놀라운 은혜로 우리를 채워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으로 나아갈 때 주님의 치료와 용서의 은혜가 우리 삶에 임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주님 앞에 나아와 보혈의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은 후에도 계속해서 성장하는 신앙을 유지해야 합니다. 신앙이 요동치며 오르락내리락하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시험에 들 수는 있어도 빨리 회복하고 신앙이 성장해야 합니다.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우리 삶에 넘치게 임할 것입니다. 3. 지금도 살아계셔서 상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믿음은 곧 지금도 살아계셔서 상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죄에 빠지거나 타락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신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코람데오)의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때 거짓말하고 욕하고 남들을 미워하는 등 타락한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잘못된 모습에서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은혜를 간구할 때 주님이 우리에게 복을 내려주십니다. 회개하고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우리 순복음교회 신앙의 핵심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그 뜻대로 살아가도록 이끌어 줍니다. 성령 충만은 일시적이어서는 안 되며 계속 지속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불이 꺼지니까 모든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성령 충만함을 회복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식을 가지고 믿음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며 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용서하시며 치료하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는 것 없고 손에는 잡히는 것이 없더라도 절대 긍정의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 믿음을 붙잡고 나아갈 때 하나님이 놀라운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영원한 상급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상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 앞에 설 때 모두가 칭찬받고 상급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1).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만 바라보고 절대 긍정, 절대 감사의 믿음으로 전진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절대 긍정의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지금도 살아계셔서 상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거룩한 꿈을 향해 믿음으로 전진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10.19

    믿음이란 무엇인가?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브리서 11장1~4절) 절망 대신 희망을 바라보고 약속의 말씀 의지하며 절대 긍정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 이뤄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늘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예기치 않은 문제와 어려움이 우리 삶에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역경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무장하여 모든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합니다. 성경은 이 긍정의 힘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 믿음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절대 긍정의 믿음으로 살아갈 때 모든 어려움을 이기며 승리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믿음 장이라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여기서 ‘실상’은 헬라어로 ‘휘포스타시스’인데 이는 실제로 이루어진 것, 집문서와 같이 확실한 것, 본체, 확신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가 꿈꾸고 바라는 것들이 이미 이루어진 것같이 믿고 나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100세의 노인이 아들을 얻는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잡았습니다(롬 4:18~21). 아브라함의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결국 그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환경이나 현실이 아니라 약속의 말씀을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절망의 오늘 대신 희망의 내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꿈을 품고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은 그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하기 때문에 현재 나의 모습이 긍정적인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내 마음 자세가 ‘이젠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하는 자세로 바뀌게 되어서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꿈꾸는 소년 요셉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꿈 때문에 미움을 받고 노예로 팔려 가고 감옥에 갇혔지만 끝까지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가 꾼 꿈대로 그를 높이셨습니다. 다윗 왕 또한 성전 건축의 꿈이 자신의 생애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꿈을 포기하지 않고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모든 것을 믿음으로 준비했습니다(대상 22:2~4). 그리고 그 꿈은 그의 아들 솔로몬의 시대에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오늘 우리도 현실의 문제와 어려움에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거룩한 꿈을 믿음으로 붙잡고 전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믿음을 통하여 우리 삶 가운데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건히 서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위대한 역사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하나님은 말씀으로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 1:3).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건히 서야 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나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가나안 정복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8).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행할 때 우리의 길이 평탄하게 되고 삶이 형통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이 찾아오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우리의 삶을 인도할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고 모든 은혜와 축복의 통로입니다. 날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 삶에 예수님의 능력과 은혜가 강물처럼 흘러넘치게 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어떤 문제와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말씀을 붙잡고 전진해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나아갈 때 우리 삶을 묶고 있는 모든 염려와 근심, 걱정이 떠나가고 주님의 은혜가 우리 삶에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3. 믿음으로 드린 피의 제사 히브리서 11장은 아벨이 믿음으로 드린 피의 제사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 11:4).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하나님은 죄 없는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게 하시고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창 3:21). 그들은 자신들의 죄로 인해 죄 없는 짐승이 대신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는 피의 제사를 통한 속죄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그 후 그들의 첫째 아들 가인은 농산물로, 둘째 아들 아벨은 양의 피로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린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구약시대의 제사는 피의 제사였습니다. 누군가 죄를 지으면 반드시 그 죗값을 치르기 위해 짐승이 대신 희생되어야 했습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죽음의 재앙을 면하게 한 것도 어린 양의 피였습니다(출 12:3). 어린 양의 피를 문인방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받았지만 피를 바르지 않은 애굽 사람들은 재앙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이 어린 양의 피는 장차 인류의 죄를 위해 흘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상징합니다. 죄 없고 흠 없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셨습니다. 침례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죄와 유혹 앞에 쉽게 넘어질 때가 많지만 예수의 피는 죄의 모든 결박을 끊고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 12:11). 주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고 절대 긍정의 믿음으로 전진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말씀 위에 굳건히 서서 절대 긍정의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며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꿈을 향해 믿음으로 전진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10.12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라
  •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브리서 10장19~22절)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하는 예수 보혈의 능력으로 마음을 성결케 하고 하나님 영광 위해 살아야 그리스도인은 하루를 살아도 의미 있고 보람되며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 안에서 거룩한 꿈을 품고 그 꿈을 향해 믿음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우리 옛 사람의 모습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꿈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 멀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길, 주님이 열어주신 새로운 살길을 보여줍니다. 1. 예수님의 피의 능력 히브리서 10장은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이 계신 성소로 나아갈 때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힘입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이처럼 예수님의 보혈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믿음으로 전진할 때 우리의 발걸음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옛 사람, 곧 죄성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히 12:1). 과거의 상처, 실패의 경험, 죄와 허물, 인간의 욕망, 자존심과 교만 등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붙잡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이 모든 결박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입니다. 주님의 보혈에 죄 사함과 정결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오직 예수님의 보혈만이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그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변화되어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우리는 더 이상 옛 사람의 모습에 붙잡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담대히 주님 앞에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날마다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여 주님의 은혜와 축복, 사랑과 용서 가운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 큰 제사장되신 예수님 예수님은 우리의 큰 제사장으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히 10:21). 구약의 제사장은 백성의 죄가 사함받도록 하기 위해 짐승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히 2:17).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하기 위해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4000년의 구약 역사는 피로 드리는 제사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를 흘려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예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히 4:14).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주님의 보혈이 우리의 죄와 허물을 깨끗이 씻어 주시며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나아가 주님의 은혜와 축복의 자녀로 변화시켜 주셔서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거하게 하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통로가 되십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종교나 훌륭한 사람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요 14:6).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이 지금도 우리를 은혜의 보좌 앞으로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우리는 날마다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보혈의 은혜를 힘입어 때를 따라 돕는 은혜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3.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라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말씀의 생수로 씻음을 받아 새롭게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더욱 깊이 누리기 위해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바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첫 번째 순서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자녀도, 사업도, 범사도 잘 되지만 우리가 우선순위를 바꾸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어 문제 속에 갇히게 됩니다. 첫째도 주님의 은혜, 둘째도 주님의 은혜, 마지막도 주님의 은혜입니다. 사람을 의지하면 상처를 받고 배신을 당하지만 하나님께 나아가면 용서와 사랑, 치유와 회복의 은혜가 임합니다. 하나님은 실패가 변하여 성공이 되게 하시고 상처가 변하여 치료와 용서가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은혜의 보좌 앞에, 긍휼의 보좌 앞에, 사랑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히 4:16). 우리는 거짓 없는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감동시키는 그런 믿음의 사람이 될 때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며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은혜가 임합니다. 세상은 지금 너무나 힘들고 어렵다고 말하지만 주님을 바라볼 때 희망이 있습니다. 오히려 힘들고 어려울 때가 바로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야훼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 73:2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먼 훗날 주님을 만날 그날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부족하고 연약하며 허물투성이인 우리들을 택하사 주의 보혈로 정결케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주님만 바라보며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길 원합니다.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10.05

    절대 절망이 변하여 절대 희망으로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장 23~26절) 고난 중에 믿음으로 나아갈 때 절망은 희망으로 바뀌게 돼 걱정과 근심 하나님께 맡기고 주와 동행하며 승리의 삶 살아야 사람이 한평생 살아가면서 가장 슬픈 일은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는 것입니다. 가족을 잃은 아픔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때로는 그 슬픔이 사람을 절망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도 우리는 남아 있는 가족을 생각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을 붙잡아야 합니다. 인생에는 누구에게나 절망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나아갈 때 절망은 소망과 승리로 바뀌게 됩니다. 1. 절대 절망에 처한 가정 요한복음 11장에는 절대 절망에 빠진 한 가정이 나옵니다. 바로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삼 남매의 가정입니다. 그 집안의 가장이었던 나사로가 죽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요 11:17). 예수님은 베다니에 살던 이 가정을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동쪽 약 3.2㎞ 지점에 있는 마을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오실 때마다 이 집에 머물며 제자들과 함께 쉼을 얻으셨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언제나 예수님을 정성껏 섬겼습니다. 언니 마르다는 손이 커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찾아와도 늘 풍성하게 대접하느라 분주했습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눅 10:40). 반면 동생 마리아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말씀을 듣기를 사모하는 영적인 여인이었습니다. 나중에는 값비싼 향유를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기도 했습니다.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요 11:2).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이 부모처럼 의지하던 오라버니 나사로가 중병에 걸렸습니다. 자매들은 급히 사람을 보내 예수님께 알렸습니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요 11:3).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오지 않으시고 며칠 더 머물러 계신 뒤에야 베다니로 오셨습니다. 그때는 이미 나사로가 세상을 떠난 지 나흘이나 지난 후였습니다.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요 11:17). 사랑하는 오라버니의 죽음을 목격한 마르다와 마리아는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우리 역시 인생을 살다 보면 예고 없이 절망의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절망이 끝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절망의 자리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준비하시고 믿는 자에게 다시 일어설 길을 열어주십니다. 2. 절대 절망이 주는 교훈 나사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요 11:4). 이처럼 고난이 다가와도 그 뒤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창세기에 나오는 꿈꾸는 요셉의 인생이 그 증거입니다. 요셉은 어린 시절 하나님이 보여주신 꿈을 품었지만, 그의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렸고 억울하게 감옥살이까지 했습니다. 무려 13년 동안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시간을 보낸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꿈을 붙들고 하나님만 바라보았고 하나님은 그와 함께하시며 그를 형통케 하셨습니다. 하루아침에 애굽 왕 바로의 꿈을 해석하게 된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가 말한 대로 7년 풍년과 7년 흉년이 찾아왔고, 애굽은 흉년에 대비하여 많은 사람들을 살려낼 수 있었습니다. 그때 22년 전 자신을 팔아버린 형들이 양식을 구하러 와서 요셉 앞에 절하였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보여주신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형들이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에게 절하며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을 원망하거나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절망 같았던 고난은 사실 하나님의 축복을 이루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역사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때로 억울한 일을 당하고 모함을 받고 고통 가운데 버려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을 세우셔서 결국 주님의 영광을 온 천하에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오직 주님만 믿고 의지하면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3. 절대 희망을 선포하신 예수님 절대 절망에 빠진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절대 희망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요 11:23). 마르다는 이 말씀을 먼 미래의 부활로 이해했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곧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선포하시며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제서야 마르다가 고백합니다.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 예수님의 말씀은 절대 희망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외치셨을 때(요 11:43) 죽었던 나사로가 온몸에 베를 칭칭 감은 채로 걸어 나왔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기적과 생명, 능력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절망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음성은 염려와 근심, 걱정을 가져오지만 주님의 음성은 우리에게 기쁨과 희망, 생명과 축복, 은혜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베로 감긴 채 걸어 나왔을 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요 11:44).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난 것처럼 예수님을 믿음으로 죽어 있던 우리가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생각과 과거의 상처가 여전히 우리를 묶어 절망하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우울증, 상처, 문제와 고통이 우리를 감싸지만 주님은 우리를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하십니다. 과거의 상처와 문제, 질병에서 자유함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성령 충만 받으면 모든 결박이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믿음은 맡기는 것입니다. 염려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기면 주님이 우리를 붙잡아 주십니다(시 55:22). 모든 결박에서 풀려나 자유케 되며 절대 절망이 절대 희망으로 바뀌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돌보시며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과 동행하며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고난과 이별, 절망과 시련 속에서도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약한 믿음으로 원망하고 불평했던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난 것처럼 우리의 모든 결박이 풀려 자유케 되고 절대 절망이 절대 희망으로 변하는 은혜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9.28

    영적인 맹인
  •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요한복음 9장 13~17절) 빛 되신 주님 바라볼 때 영적인 맹인에서 눈 뜨고 빛 되신 예수님 만나 복음 전하는 삶 살게 돼 세상에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인 눈이 가려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적인 맹인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눈이 열려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적인 눈이 열려 하나님의 자녀로 복되게 살아가야 합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사람은 절망 가운데 있었지만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1. 절망 중에 태어난 인생 예수님이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을 뜨지 못하고 어둠 속에 살고 있던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요 9:1). 그는 죄와 절망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죄 가운데 태어나 죄 가운데 살다가 죄 가운데 죽어가는 영적인 맹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은 뜨고 있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고 살아가면 모든 것을 육신의 눈으로만 보고 판단하기에 결국 죄에 갇힌 영적 맹인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영적인 눈이 가려진 사람은 모든 것을 인간의 눈으로만 판단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 9:2). 문제를 가진 사람을 사랑으로 보살피고 도와주기보다 도리어 그의 문제를 지적했던 것입니다. 남의 허물을 발견하고 판단하는 것은 영적인 맹인의 공통적인 모습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말씀을 철저히 지킨다고 자부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며 십계명을 지켰지만 실제로는 영적 맹인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고도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는 이유로 비난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요 9:16). 이처럼 영적 맹인은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데만 급급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할 때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됩니다. 한 번뿐인 인생, 우리 모두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만나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갈 때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한평생 우리 삶 가운데 임하게 됩니다. 2. 생명의 빛 되신 예수님 예수님은 세상에 계시는 동안 생명의 빛이 되셔서 우리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 9:5). 이 빛 되신 예수님을 영접할 때 구원의 은혜가 임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9, 12). 생명의 빛 되신 예수님이 맹인을 보셨습니다. 주님이 보실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잘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께 잘 보이는 것입니다. 주님의 시선이 우리에게 머무를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자리다툼과 갈등을 일으킵니다. 우리는 빛 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임합니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맹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요 9:6~7). 성경에서 침으로 흙을 이겨 눈에 바르신 사건은 이곳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어 생기를 불어넣으신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창 2:7). 흔히 있는 흙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생명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은 무가치한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바꾸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 우리의 모습도 무가치했습니다. 죄 가운데 살고 방탕과 문제 속에 얽매여 있었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무가치한 존재가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흙이 예수님의 손에 들려 맹인의 눈에 발라지고 실로암 못에서 씻겼을 때 눈이 떠지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무리 무가치해 보여도 주님의 은혜가 임하면 존귀한 존재로 변화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3. 눈 뜬 맹인의 고백 앞을 보지 못하고 절망 중에 살던 맹인은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담대히 증언합니다.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요 9:11). 이 소식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맹인의 눈을 뜨게 했다는 이유로 논쟁하며 고침받은 사람을 다시 불러 심문합니다.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요 9:24~25). 영적으로 눈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붙였지만 그는 자신이 경험한 은혜를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혹시 바리새인처럼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살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고집과 교만, 불순종에 사로잡혀 다투고 분노하고 상처 주는 모습에서 떠나야 합니다. 잘못된 과거의 모습에서 떠날 때 우리 영의 눈이 열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육신의 눈과 영적인 눈을 함께 뜬 맹인은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 9:31~33). 당시 권력을 쥔 바리새인들이 그를 위협했지만 그는 당당히 자신이 받은 은혜를 증언했습니다. 세상 권력 앞에 입장을 바꾸는 이들과 달리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 편에 서서 진리를 선포하고 바른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눈을 뜬 맹인처럼 내가 만난 예수님을 담대히 고백해야 합니다. 만나는 모든 이에게 예수님이 구세주이시며 모든 문제의 해답이 되심을 전해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예수님을 전할 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한평생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영적인 맹인에서 눈을 뜬 자로 살아가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육신의 눈은 뜨고 살아가지만 때로는 바리새인처럼 영적인 맹인으로 살았음을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고집, 편견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했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이제 우리 영의 눈을 열어주셔서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빛 되신 예수님을 전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9.21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복음 4장 13~14절 문제의 해결자 예수님이 은혜의 생수 부어주실 때 영혼의 갈급함 채워지고 복음 전하는 사람으로 거듭나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와 자녀, 배우자와 형제자매, 이웃 등 여러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갑니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을 홀로 살아가도록 창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창 2:18). 좋은 만남은 삶을 풍성하게 하지만 잘못된 만남은 상처와 불행을 가져옵니다. 2000년 전 한 사마리아 여인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행복을 얻고자 다섯 번이나 결혼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물을 길으러 나온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만나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된 만족과 기쁨이 되심을 잘 보여줍니다. 1. 한낮에 물을 길으러 나온 여인 예수님은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가셨습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요 4:4~5). 사마리아 수가라는 지역에 이르렀을 때는 점심 무렵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동네로 들어갔고 예수님은 긴 여정에 피곤하셔서 동네 입구의 우물가에 앉아 잠시 쉬고 계셨습니다. 그때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러 나왔습니다. 성경은 그 시간이 유대인의 시간으로 “여섯 시쯤” 곧 정오였다고 기록합니다(요 4:6). 유대인은 해 뜨는 새벽 6시를 하루의 시작으로 계산했기 때문에 여섯 시는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한낮 12시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무더운 낮에는 물을 길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홀로 물을 길으러 나왔습니다. 다섯 번의 결혼이 실패로 끝나면서 그녀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과 조롱을 받는 ‘문제 많은 여인’으로 낙인찍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아무도 오지 않는 한낮에 우물에 물을 길으러 나온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만남과 관계 속에서 수많은 실패를 경험합니다. 믿었던 사람이 배신하기도 하고 사랑했던 부부가 갈등 끝에 헤어지기도 하며 가까웠던 친구가 오해로 인해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누구나 사람으로 인해 마음에 크고 작은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이 상처와 갈등 속에 사는 인간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연약한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인생이 바뀝니다. 오늘도 나의 연약함보다 크신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그 은혜 안에서 새 힘을 얻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 예수님을 만난 여인 결혼을 다섯 번이나 실패했던 사마리아 여인은 한낮에 물을 길으러 왔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요 4:7). 사람과의 만남은 상처와 절망, 미움과 고통을 안겨주지만 예수님과의 만남은 모든 것들을 새롭게 합니다. 예수님은 미움과 증오를 사랑과 용서로, 상처와 절망을 희망과 용기로 바꿔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하는 사람의 마음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변치 않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불신과 상처가 깊었던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을 처음 대하는 유대인 남자가 물을 달라고 하자 당황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요 4:9). 당시 유대인들은 혈통을 중시했고 이방인과 피가 섞인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하며 대화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갈릴리로 갈 때도 사마리아를 피해 먼 길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꺼이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며 바로 그 여인을 만나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마음 깊은 공허함과 갈급함을 아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 4:10). 예수님은 그녀에게 생수를 주셔서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사람이 주는 사랑은 늘 부족하고 갈급함을 남기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사랑은 영혼의 생수가 되어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합니다. 그 사랑은 상처를 치유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올바른 길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불완전한 사람에게 기대기보다 우리에게 참된 만족과 기쁨을 주시는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3. 문제의 해결자 예수님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상처를 치료해 주실 뿐 아니라 그녀가 영적으로 변화되어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여인이 붙들고 있던 문제의 핵심을 직접 지적하셨습니다.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요 4:16). 다섯 번이나 결혼에 실패하고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던 그녀는 시치미를 떼며 대답했습니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요 4:17~18). 예수님은 그 여인의 과거와 현재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었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고백했습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요 4:19).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께 보냄 받은 메시야임을 인정한 고백이었습니다. 그 순간 다섯 번의 실패가 남긴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여인은 육신의 갈급함을 채워줄 물을 마시는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가 증언했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요 4:28~29). 상처 많던 여인은 이제 복음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증언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게 되었습니다.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요 4:39). 오늘 우리도 모든 문제의 해결자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오면 마음의 상처와 과거의 실패, 현재의 모든 문제까지도 치유되고 해결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사람으로부터 만족을 얻으려 하지 말고 예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은혜의 생수를 부어주십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자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 영혼의 갈급함이 채워지고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공허하고 상처 입은 우리의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옵니다. 우리의 갈급한 영혼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옵소서. 날마다 주님만 의지하여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의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9.14

    상처를 치유하라
  •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요한복음 5장 5~9절) 과거의 상처와 아픔을 십자가 밑에 내려놓고 예수 사랑 감격해 용서하면 진정한 치유·회복 얻게 돼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크고 작은 질병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질병은 육신의 병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적인 병입니다. 또한 오늘날 많은 이들이 겪고 있는 또 다른 질병은 바로 마음의 병입니다. 마음의 병은 대개 과거의 상처와 아픔에서 비롯되어 시간이 흘러도 쉽게 지워지지 않고 삶 전체를 짓누르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상처와 아픔으로부터 반드시 치유 받아야 합니다. 세상의 방법으로는 참된 치유를 얻을 수 없지만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1. 과거의 상처에서 자유함 받으라 예수님은 베데스다 물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 5:6). 그런데 그 병자는 다른 사람들처럼 곧바로 “예, 낫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기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상처를 예수님께 꺼내어 말했습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요 5:7). 이 고백에는 3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단 한 사람도 자신을 도와주거나 돌보아주지 않았다는 외로움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질문 앞에서 마음속 깊은 상처와 쓸쓸했던 세월을 되새기며 그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마음 한구석에는 잊히지 않는 아픈 기억이 자리 잡고 있고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붙들고 평생을 살아갑니다. 정작 상처를 준 사람은 이미 잊었을지 모르지만 상처받은 사람은 미움과 섭섭함, 증오와 아픔을 움켜쥔 채 현재를 살지 못하고 과거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 마음의 병은 결국 스트레스로 이어지고 스트레스는 육신의 여러 질병을 낳습니다. 공황장애, 불면증, 우울증, 만성두통, 위장병, 고혈압, 협심증과 같은 심장병, 뇌졸중, 위염, 소화불량, 탈모, 각종 암에 이르기까지 마음의 상처는 몸을 병들게 하고 마침내 죽음의 문턱으로까지 몰아갑니다. 우리는 반드시 과거의 상처와 트라우마로부터 자유함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는 그것을 온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위로가 잠시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오직 우리 구세주 예수님만이 절망과 상처 가운데서 우리를 건져주시고 완전히 치료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상처를 주님께 맡기고 예수님 안에서 참된 자유와 치유를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 치료자 예수님 예수님은 우리의 치료자입니다. 과거의 상처에 붙잡혀 절망 가운데 살고 있는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님은 다가오셔서 물으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 5:6). 주님은 그 병자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우리가 어떤 마음의 병이나 육신의 병을 가지고 있든지 주님은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아시고 친히 다가오셔서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은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일어나라”라고 명령하시며 희망을 선포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요 5:8). 주님은 자신의 능력의 말씀 한마디로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 한마디면 과거의 상처도, 그로 인한 마음의 병도, 육신의 모든 질병도 깨끗이 치료받고 온전하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과부의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남편을 일찍 잃고 아들 하나만 의지해 살아가던 과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마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절망 속에서 관을 따라가며 눈물로 통곡했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나와 슬픔을 나누었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마음속 깊은 아픔을 치유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눅 7:13~14). 주님의 말씀 한마디에 죽은 청년이 살아나 일어났습니다. 사람의 눈으로는 끝없는 절망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가 절대 절망을 절대 희망으로 바꾸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일어나라”라고 말씀합니다. 절망의 자리, 과거 상처의 자리, 실패와 배신의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말씀합니다. 좌절과 고통의 자리, 술과 중독의 자리, 눈물의 자리에서 과감히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와 괴로움 가운데 있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할 때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또한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요 5:8). 그 자리는 38년 동안 병자가 누워 있던 곳, 때로는 온갖 세상 것으로 더럽혀진 절망의 자리였습니다. 주님은 그 절망의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상처를 이겨내려면 그 자리를 가슴속에 묻어놓고 있지 말고 과감히 들고 일어나 버려야 합니다. 집 안에 쌓인 쓰레기를 치워버리듯이 우리의 마음속에 쌓여 있는 미움과 분노, 증오와 갈등, 서운함과 절망의 쓰레기를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 결단하고 과거의 실패와 상처, 절망의 자리를 내던져야 합니다. 그리고 뒤돌아보지 말고 주님이 주신 꿈과 비전을 붙잡고 믿음으로 전진 또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상처로부터 치유 받아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상처, 부부 사이의 상처, 인간관계에서 생긴 깊은 아픔까지도 십자가 밑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불교, 뉴에이지, 동양 철학과 같은 세상의 방법으로도 치유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해 그 사랑을 따라 용서하고 품을 때 진정한 치유와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무거운 짐을 계속 지고 살지 말고 십자가 밑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럴 때 오늘 하루를 의미 있고 보람 있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치료자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떤 연약함과 상처, 고통 가운데 있더라도 주님의 십자가 밑에 나아가 우리의 모든 죄와 상처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이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고쳐주십니다. 날마다 십자가의 그늘 아래 머물며 삶의 모든 짐을 주님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참된 치유와 회복이 우리 모두의 삶에 충만히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상처투성이의 인생을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을 만나 치유받았던 것처럼 우리 마음의 병과 육신의 병이 모두 다 치료받고 건강한 몸으로 회복되길 원합니다. 우리 모두의 상처를 치료해 주시고 주님의 기쁨과 평안함으로 충만히 채워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9.07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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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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