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요약본
불신앙을 극복하라
  •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중략)…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20장 24~29절 은혜의 자리 이탈해 신앙의 침체에 빠질 때 참 기쁨과 회복 주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며 만나는 가장 큰 걸림돌은 외부의 어떤 적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자리하고 있는 불신앙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신앙의 공동체를 지키며 우리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께 나아감으로 불신앙을 걷어내고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1. 신앙 공동체에서 이탈하지 말라 신앙 공동체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그리스도인들의 결속을 굳건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기에 예배, 말씀, 기도의 자리를 함께 지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불신앙은 이런 신앙 공동체를 이탈하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예수님과 동행했던 충성스러운 제자이자 일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종교 지도자들의 핍박을 무릅쓰고 예루살렘 근처의 베다니로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가신다고 하셨을 때도 도마는 죽음도 불사하며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했던 제자였습니다.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요 11:16).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찾아오셨을 때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제자 중 유일하게 도마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요 20:24). 부활하신 예수님이 두려움에 떨며 숨어있던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평강을 전하셨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은 부활의 기쁨과 감격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는 그 은혜에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제자들이 도마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했지만 그는 자기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요 20:25). 신앙 공동체에서 떨어져 있었기에 부활의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도 못했고 전해주는 증언을 믿지도 못하는 불신앙의 상태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제가 어릴 적 할아버지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절대로 주일 예배를 빠지지 마라. 주일에는 예배드리는 일에만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은혜의 자리를 지키니 하나님이 제게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되며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빼앗기지 않는 은혜, 그것은 신앙의 공동체를 이탈하지 않을 때 지켜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2. 회복의 기회를 주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우리가 은혜의 자리를 잠시 이탈해 신앙의 침체에 빠져도 회복의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8일이 지난 뒤 다시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는 도마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습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요 20:26). 도마는 아직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그의 마음을 아셨던 예수님은 그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예수님은 창에 찔리고 못에 박혔던 상흔을 도마로 직접 확인하게 해주시면서 침체된 그의 영혼에 믿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신 것입니다. 혹시 예수님과 멀어진 분이 계십니까? 기쁨과 감사가 사라지고 원망과 불평이 쉽게 나오는 분이 있으십니까? 섬김의 자리를 떠나 비판하는 잘못된 자리에 계신 분이 있으십니까? 어떤 이유로든 예수님과 멀어진 분이 계시면 우리의 회복을 위해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4~5)는 말씀처럼 주님과의 첫사랑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멀어지려 할 때조차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진정한 기쁨과 회복, 참사랑과 헌신의 길로 우리를 이끄시는 예수님께 날마다 가까이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3. 도마의 고백과 헌신 대못이 박혔던 양손과 창에 찔렸던 옆구리의 상흔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을 만난 도마는 신앙이 회복되어 경외감과 감격 속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자기 눈으로 보고 나서야 믿음의 고백을 드릴 수 있었던 도마를 향해 예수님은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복된 믿음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예수님은 도마를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을 가슴에 품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다른 제자들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르자 하늘에서 성령이 임했고 성령 충만해진 그는 파르디아(고대 이란족 국가), 인도, 에티오피아 등 여러 나라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특별히 인도 남부 지역에 7개의 교회를 세우고 A.D. 72년경에 순교했습니다. 도마는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순교했는데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렀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지금도 인도 첸나이에는 도마의 순교를 기념하는 성도마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도마처럼 사람은 누구나 신앙의 자리에서 이탈할 수 있습니다. 은혜의 자리를 떠나 불신앙의 상태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그런 상태로 살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가 회복한 후에는 맡겨주신 귀한 사명을 감당하며 헌신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절망이나 문제의 자리에 빠졌다고 할지라도 그 자리에 머물지 말고 주님께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우리를 건져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심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278장에 “여러 해 동안 주 떠나 세상 연락을 즐기고/ 저 흉악한 죄에 빠져서 주 은혜를 잊었네/ 오 사랑의 예수님 내 맘을 곧 엽니다/ 곧 들어와 나와 함께 하며 내 생명이 되소서”라는 가사를 묵상하고 또 묵상하며 주님께로 나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를통해 믿음의 자리, 신앙의 공동체를 굳게 지키며 평생토록 우리 주님께 헌신하는 복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잠시 신앙의 공동체를 떠나 불신앙의 상태에 빠진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찾아오셔서 회복시켜 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가까이하며 주님이 주신 귀한 사명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4.04.21

    십자가의 축복
  •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린도전서 1장 18절, 2장 1~2절)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성령의 시대에 사는 우리 섬김과 복음 전파 힘써야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어떤 종교 지도자도 죽음 이후에 부활한 사람이 없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메디나에는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의 무덤이 있고, 인도의 산치에는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의 무덤이 있습니다. 또 중국 취푸시에는 유교에서 가장 존경하는 스승 공자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님의 무덤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은 3일 만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고, 우리에게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 1. 구원의 축복 십자가는 본래 죄와 저주, 사망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십자가는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올 수 있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이제 누구든지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만 하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구원은 선한 일을 많이 하거나 커다란 업적을 남긴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을 때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는 이런 구원의 역사가 충만히 나타났습니다. 오순절에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깨닫고 마음에 심한 찔림을 받게 되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 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며 예수님을 영접하고 침례를 받은 사람이 남자 어른만 3000명이나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41).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은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변화되어야 합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자신의 정욕과 욕망대로 살아왔다면 구원받은 후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기억하며 항상 하나님 앞에 ‘절대 긍정, 절대 감사’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 부요의 축복 이 땅에 오셔서 낮아짐과 섬김의 본이 되어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부요함으로 우리를 채워주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가난과 저주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타락하여 다가온 형벌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래 지금까지도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이 영적, 육체적 굶주림 속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유엔세계식량계획(WFP)의 2023년 통계 자료에 의하면 기아로 고통 받는 인구가 7억 3500만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가난과 저주를 담당하셨기에 우리는 아브라함의 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3~14).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을 받았습니다.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며 강건하게 되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만 행복하게 살라고 부요의 복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소외된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특별히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사랑으로 섬기라고 말씀합니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 10:18~19). 우리 주변에는 사랑의 섬김을 필요로 하는 고아와 과부, 나그네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 다문화 가정, 탈북자 가정, 한부모 가정, 부모가 없이 보육시설에서 자라는 아이들, 특히 출생신고도 없이 버려져 주민등록번호도 없이 자라는 아이들 등 돌봐야 할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복을 아낌없이 나눌 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질 뿐만 아니라 우리도 하나님께 더 큰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3. 성령의 약속 소외되고 헐벗은 이웃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은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우리가 귀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성령의 능력으로 공생애의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3). 예수님이 십자가 대속의 은혜와 더불어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축복은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 중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8~39). 또 승천하시기 직전에도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4~5). 이에 실제로 오순절 날이 되자 성령이 강림하셨고 제자들은 권능을 받아 복음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행 2:17~18). 사도 베드로의 선포처럼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우리는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께 성령의 충만함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성령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성령 충만이 꼭 필요함을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어 능력 있게 사명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죄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은혜도 부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소외되고 가난하고 헐벗은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고 능력 있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4.04.14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사
  •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누가복음 7장 11~16절) 온 인류의 기적 예수님 부활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삶 살 때 절망이 희망으로 변화되고 하나님 은혜와 축복 임해 예수님의 부활은 온 인류에게 절대 절망의 삶이 절대 희망의 삶으로 변화가 일어난 기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죄와 사망, 질병,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죄의 결박을 풀어주셨고,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언제나 십자가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아직도 절망에 처해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1. 깊은 절망에 처한 여인 누가복음에는 깊은 절망에 처한 한 여인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눅 7:11~12). 예수님이 나인 성으로 가실 때 죽은 사람의 관을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과부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고 슬피 울며 장례 행렬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살아가던 과부의 유일한 희망과 삶의 의미는 그 외아들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귀한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과부에게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절망이 임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나 때때로 절망의 시간을 맞이합니다. 절망 중에 가장 큰 절망은 죽음입니다.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죽음 앞에 모든 사람이 무기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망이라는 절망은 죄의 결과로 다가온 형벌입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자 육신의 죽음과 저주와 가난이 형벌로 다가온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구세주 되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할 수 있으십니다. 2. 불쌍히 보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아들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눅 7:13). 불쌍히 보신다는 원어의 의미는 ‘자신의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으로 느낀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본인의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으로 과부의 슬픔을 이해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고통을 느끼시면서 죄 가운데 고통당하고 있는 우리를 불쌍히 보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불쌍히 보실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던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병을 고치신다는 소문을 듣고 ‘언젠가 예수님을 만나면 내 눈을 뜨게 해달라고 해야겠다’라는 꿈과 소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이 오신다! 예수님이 오신다!”라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막 10:47). 바디매오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간절히 예수님께 외쳤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막 10:51~52). 또한 예수님은 한센병 환자를 불쌍히 보시고 다가가셔서 고치셨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한센병에 걸리면 “저 사람은 하나님께 형벌을 받아서 저런 병에 걸렸다”라며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멀리한 그를 불쌍히 보셨습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막 1:40~41). 하루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몰려왔습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은 간절히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루 종일 말씀을 전하셨을 때 해가 지고 저녁이 되어 무리가 배고픔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중 음식을 가진 사람을 알아보게 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셔서 모두가 배불리 먹게 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막 6:38~44).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문제와 어려움을 만났을 때 예수님께 간절히 외치십시오. “주여, 나를 불쌍히 보소서! 나를 절망에서 건져 주옵소서! 나를 고난에서 건져 주옵소서!”라고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 문제가 해결되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3. 절망이 변하여 희망으로 예수님이 관에 가까이 가셔서 손을 대시고 “일어나라!”라고 명령하시자 그 순간 과부의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눅 7:14~15). 조금 전까지 통곡하며 관을 따라가고 있던 과부는 눈앞에서 아들이 살아나자 너무나 기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붙잡고 몇 번이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며 끊임없이 감사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면 어떤 절망도, 슬픔도, 고통도 주님이 다 해결해 주십니다.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죄와 절망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절대 희망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눅 7:16). 어떤 고난이 다가와도 큰 문제가 우리를 둘러싸도 감사로 승리해야 합니다.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삶을 살 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날마다 주님만 바라보고 맡겨진 사명을 힘써 감당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날마다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 삶을 살다가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하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4.04.07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린도전서 15장 55~58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죄와 사망 권세 무너져 우리는 복받은 하나님 자녀 희망 품고 믿음으로 전진해야 예수님은 성경의 기록대로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 역사 최대 기적이자 축복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죄와 사망의 권세가 무너지고 영생으로 향하는 축복의 길이 우리에게 열렸습니다. 1. 절대 절망이 절대 희망으로 바뀜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이 절대 절망에서 절대 희망으로 옮겨졌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 죄를 짓고 타락하여 이 세상에 사망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사람은 영, 혼, 육으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동물과 달리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사람의 코에 하나님의 영인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영이 살아있는 존재가 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음으로 영이 죽게 되었고,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영의 죽음은 이어서 육신의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그 누구도 육신의 죽음 앞에서는 무기력하게 세상을 떠나야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 가운데 살다가, 죄 가운데 죽어가는 절대 절망의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로 이 세상을 지배하던 죄와 사망의 권세가 무너졌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부활의 은혜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0~22). 이 세상 사람들에게 죽음은 모든 삶이 끝이 나는 절망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죽음 앞에서 통곡하며 애도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죽는 순간 그 영이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 통곡하고 있는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더 이상 죄와 사망의 노예로 절망 가운데 살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대 희망을 품고 믿음으로 전진, 또 전진해 나가는 복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2. 율법의 형벌에서 복 받은 인생으로 바뀜 예수님을 믿은 후 우리는 모든 율법의 형벌에서 놓여남을 받고 복 받은 인생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죄를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인간이 율법을 어겨 죄와 사망의 권세가 우리 인류 역사 가운데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 절망적인 존재가 된 것입니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6). 우리 인간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죄를 지은 결과로 율법의 심판이 임해서 우리가 저주 가운데 거하게 된 것입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율법의 저주에서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이제 더 이상 죄와 사망, 가난과 저주, 질병과 고통이 우리를 묶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인생이 된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4).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나의 저주받은 옛사람이 죽고 예수님과 함께 새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이제 우리는 성령 충만을 받아 날마다 죄와 싸워 승리하는 주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이 절망 가운데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우리가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해줘야 합니다.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만방에 전해야 합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승리자의 삶으로 바뀜 예수님의 은혜로 새사람이 된 우리는 승리자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실 때 죄와 사망의 권세가 심판받았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그 순간 예수님의 승리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이제 우리의 인생은 저주받은 인생에서 복 받은 인생으로, 실패자와 낙오자의 삶에서 승리자의 삶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어떤 환난과 핍박이 찾아와도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의지해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5~37). 그러므로 날마다 주님 안에서 승리자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 5:4~5). 위대한 승리자이신 예수님 안에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절망과 문제도 이겨내고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활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5장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의 일에 힘쓰기를 바랍니다. 잠깐 있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신실하게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주님의 부름을 받는 복된 인생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믿고 복 받은 인생을 살게 하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날마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님의 일에 힘쓰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4.03.31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 53장 4~5절)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셔 우리 위해 고난 당하신 예수님 십자가 보혈로 우리를 속량하신 예수님 사랑과 은혜 전해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약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신해 받으실 고통을 상세하게 기록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3~4).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인간의 죄로 인해 발생한 모든 고통과 고난을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의 말처럼 사람들은 예수님이 겪은 고난을 하나님의 징벌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우리의 죄악을 대신해 예수님이 그 값을 자신의 피로 속량하신 것입니다. 1.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다 성경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사 53:5)라고 말씀합니다. 이사야에 기록된 말씀처럼 예수님은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시로 말미암아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막 15:17). 또한 예수님의 양손과 양발에는 커다란 못이 박혔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마 27:35).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군인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니 피와 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4).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로 인해 이 같은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생각으로 지은 죄를 대신해 가시관에 머리를 찔려 피를 흘리셨고, 우리가 손과 발의 행위로 지은 죄를 대신해 두 손과 발에 못이 박혀 피를 흘리셨으며 우리의 마음으로 지은 죄를 대신해 심장에서 가까운 옆구리에 창을 찔리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짓고 불의한 모습으로 살아왔습니다. 허물이 많은 인생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기에 예수님이 머리와 손과 발, 옆구리를 찔리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허물의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우리의 허물을 사하시려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2.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성경은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사 53:5)고 말씀합니다. ‘상함’이라는 표현은 피부가 상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상함’의 히브리 원어는 ‘메둑카’인데, ‘메둑카’의 원형인 ‘따카’는 뼈가 완전히 으스러지는 치명적인 상해를 말합니다. 그래서 공동번역 성경은 같은 구절을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이처럼 처절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셔야 했나요?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저지른 죄악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 예수님은 몸이 완전히 으스러질 정도의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 제멋대로 살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죄의 짐을 예수님께 모두 지우시고 예수님이 흘리신 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죄에 빠진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기 몸을 버리고 피를 흘리신 그 사랑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3. 그가 징계 받음으로 평화를 누리고 또한 성경은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사 53:5)라고 말씀합니다. 본래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길을 가로막았으나, 예수님이 우리 대신 징계를 받아 그 죄의 담을 허무셨습니다. 죄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관계가 되었지만, 예수님의 대속적 고난으로 하나님과 화목하여 평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엡 2:16~17).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임당하실 때 대제사장밖에 들어가지 못하는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 27:51). 죄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 죽으심으로 휘장이 찢어져 열렸고 이후로 누구든지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징계 받으시므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화목한 관계로 회복된 것입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해 “주님, 제가 왔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고 엎드려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은혜와 치료가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4.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나음을 받았도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마 27:26).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때린 채찍은 그 끝에 날카로운 쇳조각이나 뼛조각이 있어 그 채찍으로 맞을 때마다 예수님의 온 등이 갈라지고 살점이 파여 예수님은 피를 흘리셨습니다. 또 군인들은 예수님에게 침을 뱉고, 주먹과 손으로 때렸으며, 갈대로 머리를 쳤습니다.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마 27:30).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오르면서 당하신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몇 차례나 쓰러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결과로 다가온 질병에서 온 인류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이 같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병에서 놓여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에게나 고난은 다가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모진 핍박과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는 어떤 고난일지라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주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우리는 고난 가운데 처한 이웃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 너무나 많습니다. 다문화 가정, 장애인, 자유시민(탈북민), 노숙인, 미혼모 가정 등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품고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해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한 번뿐인 인생길에서 예수님을 만나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아름다운 사랑의 흔적을 남길 수 있도록 인도하옵소서. 어떤 고난이 찾아올지라도 고난을 이겨내고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을 끼치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4.03.24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마태복음 21장 12~14절) 교회는 하나님이 이 땅에 세우신 구원의 방주이자 축복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일, 말씀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일, 사랑으로 사람들을 섬기고 돌보는 일을 감당하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은 기도에 있습니다. 교회가 기도하는 집으로 존재할 때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습니다(사 56:7). 1. 인간의 왕국을 만든 교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바로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목격하신 장면은 거룩한 예배가 드려지는 성전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찬양과 감사, 기도와 말씀으로 은혜가 충만한 성전의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마치 물건을 사고파느라 정신이 없는 시장터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마 21:12).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성전 뜰에는 장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먼 곳에서 오는 순례자들에게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판매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이들 중에는 돈을 환전해 주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의 모든 남자는 1년에 반 세겔씩 성전세를 납부해야 했습니다. 성전세는 지중해 북쪽의 두로에서 만들어진 은 동전으로 내야 했기에, 성전세를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동전으로 환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성전 뜰에서 장사하는 사람들과 환전하는 사람들은 성전에 예배드리러 온 사람을 돕는다는 이유로 폭리를 취했습니다. 제물로 쓰일 동물을 시중보다 훨씬 비싼 값으로 팔았고, 지나치게 높은 수수료를 적용해 환전을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에 남은 것은 제사장들, 그리고 제사장들과 결탁해 돈을 내고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의 탐욕뿐이었습니다. 성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탐욕의 집이자 강도의 소굴로 전락한 인간의 왕국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탐욕에 눈먼 이들을 내쫓으시며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마 21:13).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주님의 성전을 인간의 왕국으로 바꿔 놓으면 안 됩니다. 교회는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할 수 있지만, 그 속에 인간의 탐욕이 자리 잡아 성도를 대상으로 유익을 취하는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인간의 왕국으로 바꿔 놓는 큰 죄악입니다. 교회는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세상에 나누는 섬김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2. 기도하는 집 무엇보다도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는 거룩한 기도의 공동체로 변해야 합니다. 교회가 기도하지 않으면 교회에서 발생하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고, 사소한 일로 분란과 다툼만 일으키게 됩니다. 모든 문제가 기도하지 않는 데서 생겨납니다.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기도할 때 내 생각과 뜻대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내 목적과 유익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위한 기도를 올려드릴 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6~39)”.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간절히 기도하시는 순간에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깨우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0-41). 제자들을 깨우신 후에 다시 한번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마 26:42). 그날 밤 예수님은 모세혈관이 터져 땀방울 속에 피가 섞여 나올 만큼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 예수님이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신 이유는 온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한국교회에 이 같은 간절한 기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기도, 간절한 기도, 부르짖는 기도, 회개의 기도, 금식기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시 한번 강력한 기도운동을 펼칠 때 문제가 해결되고, 병에서 놓여남을 받으며, 부정적인 생각에서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3. 치료하는 집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꾼을 내쫓으신 후에 예수님께 나아오는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마 21:14). 성경은 특별히 앞을 보지 못하는 자들과 다리를 저는 자를 언급합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에서 치료받아야 할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먼저, 영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해 모든 일을 육신의 눈으로, 또 세상의 방법으로 보고 판단합니다. 또한 영적으로 다리를 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신앙적으로 결핍된 부분이 있어 기쁨과 감사를 잃어버리고 절망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주변에 이 같은 사람들이 없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영적으로 앞을 보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은 없는지, 영적으로 다리를 저는 자처럼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없는지 살펴보고 그들을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고통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부르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치료자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언제나 동일하신 예수님이 우리와 날마다 함께하시고, 우리의 모든 문제, 염려, 근심, 걱정을 아시며, 우리의 삶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은혜와 축복의 길로 인도함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값없이 선물로 받았음에도 주님을 위해 살지 못하고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살았던 우리의 죄와 허물을 회개합니다. 우리의 옥합을 깨뜨려 많은 사람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4.03.17

    향유를 부은 여인
  •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중략)…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마가복음 14장 3~9절) 가장 귀한 향유 주님께 붓고 마음 다해 순종한 여인처럼 ‘나’라는 옥합 깨뜨리고 예수님 향기 온 세상 전해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일주일, 즉 고난 주간에 일어났던 일 가운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를 부은 일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 행한 놀라운 일은 성경에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온 세상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1. 한센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신 예수님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마치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사람들이 꺼리고 피하는 한센병 환자의 집에 가셔서 식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막 14:3). 예수님은 이 땅에서 공생애 사역을 하는 동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힘이 없고 약한 사람, 병든 사람,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들에게 다가가 위로해 주시며 그들이 처한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특히 많은 사람이 질병으로 고통받고 괴로움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예수님께 찾아오는 병자들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마 4:24). 평소처럼 예수님은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으려는 한센병 환자의 집에 가셔서 식사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사람들에게 차별받고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품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크리스천이라면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을 본받아야 합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소외되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의 이웃이며, 또 우리가 사랑하고 섬겨야 할 대상임을 늘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2. 옥합을 깨뜨린 여인 예수님이 한참 한센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이 값비싼 향유가 가득 담긴 옥합을 가져와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님께 부었습니다.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막 14:3). 여인이 향유를 붓는 순간 아름다운 향기가 집안에 가득하게 퍼져나갔습니다. 요한복음에도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12:3).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던 마리아는 ‘사랑하는 예수님이 우리 곁을 떠나시는데 내가 주님에게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라고 고민하던 중 자신이 가진 것 중에 가장 귀한 것 전부를 예수님께 부은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처녀들은 결혼을 위해 돈이 생길 때마다 향유를 조금씩 사서 옥합에 모았습니다. 옥합은 주둥이가 좁고 긴 항아리인데 옥합이 가득 차면 초로 완전히 밀봉해 두었습니다. 그래서 향유를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옥합이 깨어져야 했습니다. 이처럼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의 향기를 온 천하에 나타내기 위해서는 ‘나’라는 옥합을 깨뜨려야 합니다. 내가 깨어지고 죽어야만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께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겸손에 대한 최고의 표현이었습니다. 이같이 자신을 깨뜨리고 온 마음을 바쳐 예수님을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3. 제자들의 비난 예수님의 제자들은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붓자 이를 보고 화를 내며 책망했습니다.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마 26:8~9). 특히 당시 회계를 담당했던 가룟 유다는 향유의 가치를 계산하며 여인을 비난했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요 12:5). 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1년 소득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몇 천만 원짜리 가치가 있는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 허비했느냐?”라고 여인을 꾸짖은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바친 것인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모습을 보고 오히려 비난하고 책망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다가 보면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비난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선한 일을 할 때 환난과 핍박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주님의 일을 하다가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뒤로 물러서지 말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0:38). 우리가 물러서지 않고 주님의 일을 위해 힘쓰면 우리에게 예비 된 큰 상급이 있습니다. 모든 고난을 참고 견디면 믿음이 성장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만 바라보고 어떠한 문제와 어려움이 다가와도 담대한 마음으로 이겨내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제자들의 책망에도 여인은 담대하게 그리고 묵묵히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무슨 말을 할지라도 자신이 주님 앞에 충성되고 진실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그 믿음과 섬김을 보시고 큰 은혜를 내려주실 것입니다. 4. 예수님의 칭찬 여인의 섬김을 받으신 예수님은 그 여인이 예수님을 위해 좋은 일을 행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마 26:10~12). 여인은 예수님이 곧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을 알았기에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는 마음으로 향유를 부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마 26:13). 예수님을 감동하시게 한 여인의 섬김은 2000년이 지난 현재에도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옥합은 무엇인가요? 우리의 교만, 고집, 자존심, 이기주의, 욕심 등 옥합을 모두 깨뜨리기를 바랍니다. 여인이 부은 향유를 통해 아름다운 향기가 온 집안을 가득 채운 것처럼 ‘나’라는 옥합을 깨뜨려 온 세상에 예수님의 향기를 널리 전파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값없이 선물로 받았음에도 주님을 위해 살지 못하고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살았던 우리의 죄와 허물을 회개합니다. 우리의 옥합을 깨뜨려 많은 사람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4.03.10

    유월절 어린 양
  •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이 달 열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불사르라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야훼의 유월절이니라”(출애굽기 12장 5~11절) 우리 죄 사하시는 예수님 대속 은혜 기억하며 성령의 사람, 천국의 사람되어 믿음의 행진 이어가야 오늘날 온 세상은 죄로 인한 절망, 미움, 시기, 질투, 살인, 전쟁 등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러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 말씀 속 유월절 이야기는 이러한 예수님의 죄 사함의 은혜를 깨닫도록 이끄는 사건입니다. 1. 흠 없는 어린 양 이스라엘은 430년이나 애굽의 압제 속에 종살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기 위해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재앙을 내리시기 전에는 죽음의 사자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흠 없는 어린 양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출 12:5). 특별히 수컷을 택한 이유는 당시 사회에서 아버지가 가족을 대표하듯이 수컷이 대표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밤에 이스라엘을 위해 희생된 이 양들은 우리를 대신해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침례 요한은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시기 위해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흠 없는 어린 양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해서 죽은 것처럼 죄 없고 흠 없으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친히 어린 양이 되신 예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우리는 죄의 문제를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어 죄 가운데 살다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죄에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이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넘치는 감사의 고백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2. 어린 양의 피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 좌우의 기둥과 인방에 발랐습니다.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출 12:7). 마지막 재앙이 내리던 밤 애굽에서 처음 난 것이라면 바로의 아들로부터 동물에 이르기까지 다 죽임을 당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피로 인해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밤중에 야훼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출 12:29~30). 구약의 제사는 피의 제사였습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제사를 통해 죄 없는 짐승이 대신 피를 흘려 죽어야만 했습니다. 유월절 사건도 마찬가지로 애굽에서 처음 난 것이 다 죽을 때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들의 가축은 모두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어린 양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이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처럼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구약의 제사는 일시적이고 반복적인 제사였습니다. 짐승을 잡아 제사를 지내고 죄를 용서받아도 다시 죄를 지으면 짐승을 또 잡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단번에 영원한 효력이 있는 제사였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2). 예수님의 보혈에는 우리를 구원하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 천국 소망으로 살아가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날마다 이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고 찬양하며 전파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3. 어린 양의 고기 애굽을 떠날 준비를 하는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잡은 어린 양의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 및 쓴 나물과 함께 먹었습니다.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출 12:8~9). 어린 양의 고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를 먹고 힘을 내어 광야로 나간 것처럼 우리도 늘 생명의 떡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치료하고 회복시키며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고기를 불에 구워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은 성령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우리에게 말씀의 양식과 함께 필요한 것은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의 은혜가 있어야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고,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룩 없는 떡을 먹었습니다. 여기에서 누룩은 죄를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룩이 없는 떡을 먹은 것처럼 우리는 늘 죄에 물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 5:7). 누룩이 있으면 빵이 쉽게 부풀듯이 작은 죄도 간과하면 쉽게 퍼져갑니다. 악한 원수 마귀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들인 우리를 넘어뜨리려 애씁니다. 작은 죄는 지어도 괜찮다고 유혹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단호히 모든 죄를 물리쳐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쓴 나물을 먹었습니다. 이것은 430년 동안 애굽에서 당했던 쓰디쓴 고난을 잊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쓴 나물을 먹으며 고난의 시절을 기억했듯이 우리도 주님의 고난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수많은 고난이 우리 삶에 다가오지만, 그것은 우리를 연단시켜서 더 훌륭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우리는 고난이 다가올 때마다 장차 다가올 축복을 기대하며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한평생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합니다. “할렐루야 내 영혼아 야훼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야훼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시 146:1~2).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성령의 사람, 천국의 사람으로서 믿음의 행진을 해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신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죄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말씀과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날마다 죄를 이기며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고 장차 우리에게 주실 축복을 기대하며 모든 고난을 이겨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4.03.03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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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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