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목사의 행복편지
연필에게 배우는 인생의 지혜
  • 연필은 초등학생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글은 쓰는데 필요한 도구입니다. 항상 우리 주위에 있기에 그 중요함과 편리성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은 연필 한 자루를 통해 인생의 교훈과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평범해 보이는 연필이지만 그 안에는 우리 삶에 꼭 필요한 네 가지 소중한 가치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연필은 깎이는 과정을 거쳐야 제대로 쓰일 수 있습니다. 연필은 처음엔 길고 반듯한 모습으로 만들어집니다. 보기에는 멀쩡하고 온전해 보이지만 깎이지 않으면 아무 글도 쓸 수 없습니다. 그 과정은 깎이는 만큼 짧아지고 때론 거칠게 다듬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부터 연필은 제 역할을 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된 시간과 아픔을 통과할 때 점점 단단해지고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둘째, 잘못 쓴 글은 연필 끝의 지우개로 고칠 수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글을 쓰다 보면 누구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 쓴 부분을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다는 사실은 큰 위로가 됩니다. 실수했다고 주저앉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얼마든지 새롭게 써 내려갈 수 있습니다. 셋째, 연필은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누군가 대신 써 줄 수 없으며 오롯이 자신이 써 내려가야 합니다. 누구나 걸어온 길이 다르고 그 안에 담긴 기쁨과 아픔도 다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써 내려가는 일은 그 자체로 의미 있고 귀한 일입니다. 남의 삶이 더 나아 보일 수 있지만 인생의 진정한 의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찾아 정직하게 걸어가는 데 있습니다. 넷째, 연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심’입니다. 겉은 멀쩡해 보여도 안에 심이 없거나 부러져 있으면 아무 역할도 할 수 없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외적인 조건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중심입니다. 중심이 바로 선 사람은 외부 환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삶은 연필을 닮아있습니다. 때로는 깎이는 아픔도 있고, 실수를 지우는 시간도 있으며 한 줄도 쓰지 못하고 멈춰 서 있는 날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완성해 가시는 과정입니다. 우리의 삶이 부족하고 연약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한 줄 한 줄 정성스럽게 우리의 삶을 써 내려가고 계십니다. 지나온 날들은 의미 없이 흘러간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빚으신 기록의 한 부분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손에 인생을 맡기십시오. 지치고 넘어지더라도 믿음으로 써 내려가는 하루하루가 가장 복된 인생입니다.
  • 2025.05.30

    작은 규칙으로 세워가는 하나님 나라
  • 디즈니랜드는 애니메이션의 거장 월트 디즈니가 꿈꾸고 만들어낸 세계 최초의 테마파크입니다. 이곳에 들어서면 마치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들이 현실로 뛰어나와 우리를 맞이하는 듯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특별한 체험의 비결은 디즈니랜드만의 세심한 노력과 철저한 규칙에 있습니다. 디즈니랜드의 첫 번째 규칙은 어떤 경우에도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하지 않는 것입니다. 방문객이 무엇을 물어보든 직원들은 창의적인 답변으로 꿈과 환상의 세계를 지켜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실제로 한 아이가 길을 청소하는 직원에게 무엇을 하는지 물었을 때 “나는 지금 꿈의 조각을 모으고 있어”라고 답한 것은 매우 유명한 일화입니다. 두 번째 규칙은 길이나 방향을 가리킬 때 한 손가락이 아닌 검지와 중지를 붙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 손동작은 월트 디즈니가 생전에 즐겨 사용하던 습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디즈니 포인트’라 불리며 방문객에 대한 존중과 창립자에 대한 경의를 동시에 표현하는 특별한 제스처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세 번째 규칙은 항상 깔끔하고 단정한 외모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디즈니랜드는 아이들의 꿈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인 만큼 직원들은 문신이나 과한 장식은 물론이고 손톱 길이와 머리 색깔까지 세심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네 번째 규칙은 자신의 직업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는 것입니다. 디즈니랜드에서 만난 미키 마우스가 일상에서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직원들은 꿈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더욱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규칙은 불쾌감 또는 불안함을 주는 말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놀이기구를 탄 아이가 구토를 하면 직원들은 이것을 ‘코드 브이’(CODE V)로 부르며 서로 소통합니다. 이렇게 철저한 노력과 규칙에 의해 디즈니랜드는 방문객들의 꿈과 환상을 실현하는 테마파크로서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디즈니랜드와 같은 규칙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섬기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디즈니랜드의 직원들이 작은 행동 하나에도 깊은 의미를 담아 방문객들에게 큰 기쁨을 주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담은 말과 행동으로 가족과 이웃, 동료에게 위로와 소망을 전해야 합니다. 디즈니랜드가 철저한 규칙을 통해 꿈과 환상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처럼 우리도 사랑, 용서, 섬김을 실천하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아름답게 세워가기를 소망합니다.
  • 2025.05.02

    진정한 성공의 비결
  • 시중에서 유통되는 대부분의 지퍼 상단을 보면 ‘YKK’라는 영문 이니셜이 새겨져 있습니다. 암호처럼 보이는 이 글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글자의 유래와 의미를 살펴보면 진정한 성공의 비결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지퍼는 1891년 미국의 발명가 휘드컴 저드슨이 구두끈을 대신할 목적으로 발명했습니다. 그러나 초기 제품은 지금과 달리 여러 가지 불편함이 많았습니다. 이후 1913년 스웨덴의 기드언 선드백이 기존 지퍼의 단점을 보완하여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대중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YKK’가 새겨진 지퍼는 이 두 사람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회사에서 생산한 것입니다. ‘YKK’는 1934년 일본의 요시다 타다오가 설립한 지퍼제조회사로 ‘요시다 공업 주식회사(Yoshida Kogyo Kabushikikaisha)’의 첫 글자를 따온 이름입니다. 미국에서 발명한 지퍼가 오히려 일본 제조회사의 이름으로 더욱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한 매체에서는 ‘YKK’의 성공 비결을 창업자 요시다 타다오의 아들이자 CEO인 요시다 타다히로의 독특한 경영철학 덕분이라고 분석합니다. 요시다 타다히로는 기존의 경영방식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CEO를 신격화하고 내부 관계자들만 이익을 공유하며 경영자가 전문가의 의견을 무시하며 간섭하는 전통적인 방식에 반감을 가졌습니다. 요시다 타다히로는 회사에 입사한 후 노조위원장을 맡을 만큼 직원들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경영자 중심의 회사 경영방식을 버리고 “회사는 경영자의 것이 아니라 사원들의 것”이라며 ‘믿고 맡긴다’는 직장 문화를 만들어 갔습니다. 또한 직원들에게 “실패해서 곤란한 사람은 여러분이 아니라 사장인 나”라며 “일의 성공, 실패에 연연하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주길 바랍니다”라고 격려했습니다. 그 결과 ‘YKK’는 연간 75억 개의 지퍼를 생산하며 세계 지퍼 시장의 절반을 차지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또 전 세계 70여 개국에 100여 개의 자회사를 두고 있으며 지퍼뿐만 아니라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도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YKK’의 성공 사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의 모습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한 사람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루려 하기보다 서로를 신뢰하고 협력할 때 더 크고 놀라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나 혼자의 능력과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공동체 안에서 함께 걸어갈 때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고 더욱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각자의 자리에서 사랑과 배려로 하나 되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귀한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2025.04.04

    사랑과 희생
  • 진정한 사랑은 희생과 섬김을 동반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은 가장 거룩한 희생의 본보기이며 참된 사랑의 의미를 가르쳐 줍니다. 이 같은 사랑을 실천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아이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고 자신이 돌보던 아이들과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했던 야누시 코르차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유대계 폴란드인이자 의사, 아동 교육가 그리고 고아원 원장이었던 코르차크는 유망한 의사로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코르차크는 자신의 안락함보다 소외된 어린 생명들을 돌보는 일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아이들을 단순한 보호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소중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며 그의 고아원도 전쟁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독일군은 가슴에 별 모양의 배지를 달고 있는 유대인 아이들을 모으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유대인 아이들은 그 명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공포에 떨었고 그런 아이들을 독일군이 무자비하게 끌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한 여자아이가 두려움에 떨며 코르차크를 꼭 끌어안았습니다. 독일군은 코르차크를 향해 물러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코르차크는 여자아이를 따뜻하게 품에 안아 주었고 아이들과 함께 가스실로 향하는 트럭에 올라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어디를 가든 선생님이 함께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우리 함께 기도하자.” 아이들은 코르차크의 말을 따라 두 손을 모았고 코르차크는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이제 마음이 편안해졌니?”라는 물음에 아이들은 한결같이 “네, 편안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마침내 가스실에 도착했을 때 독일군은 폴란드인이었던 코르차크를 끌어내려고 했지만 코르차크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입니다. 어떻게 이 아이들만 죽음으로 보낼 수 있단 말입니까?” 코르차크는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하며 곁을 지켰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코르차크의 사랑과 희생을 기념하여 예루살렘의 홀로코스트 기념관 앞마당에 아이들을 끌어안고 있는 코르차크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혹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와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나요? 유대인 아이들이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코르차크를 통해 위로와 평안을 얻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참된 소망과 평안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간직하며 희생과 섬김을 통해 그 사랑을 이웃들에게 나누고 전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2025.02.28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법
  • 아프리카 오지에 병원을 세워 평생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치료한 ‘아프리카의 성자’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는 ‘행복은 나눌 때 배가 되는 유일한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슈바이처 박사처럼 평생을 소외된 이웃을 위해 봉사한 의료인이 있습니다. ‘봉천동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윤주홍 원장이 그 주인공입니다. 윤주홍 원장은 본래 국어국문과를 전공했지만 결핵으로 7년간 고생한 후 지금부터는 내가 아니라 남을 위해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며 동기들보다 8년이나 늦게 의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의대 편입 시험 중 정답 대신 “노폐물로 가득한 정맥 같은 삶을 버리고 의사가 되어 동맥 같은 삶을 살고 싶다”라는 진심 어린 글을 적어 입학 관계자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습니다. 의대를 마친 윤주홍 원장은 경찰병원 수련의로 들어가자 바로 봉사의 삶에 뛰어들었습니다. 서해안의 낙안도, 외도, 간월도, 내파수도, 장고도, 고대도 등 진료시설이 없어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섬이라면 어디든 찾아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윤주홍 원장이 신림보건소를 가다가 타이어에 펑크가 나 차에서 내렸는데 길옆에 판자 아래로 사람의 발을 발견했습니다. 시체인 줄 알고 가 보니 자는 사람의 발이었습니다. 그길로 윤 원장은 봉천동 판자촌 사이에 ‘윤주홍 의원’을 개원해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돈보다 생명이 먼저라는 신조대로 진료비에 연연하지 않고 가난한 환자들에게 무상 또는 절반의 진료비만 받으며 치료에 전념했습니다. 봉천동 판자촌에서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루는 두 명의 강도로부터 위협을 당했는데 그중 한 강도가 윤주홍 원장이 자기 아들을 치료했던 의사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른 강도를 설득해 위기에서 벗어난 적이 있습니다. 또 한번은 주문하지 않은 자장면을 배달받은 적도 있습니다. 수년 전 인근 보육원의 맹장염을 앓는 아이를 무상으로 수술해 줬는데 아이가 중식점에 취직한 후 은혜를 갚고자 자장면을 들고 온 것이었습니다. 일평생 봉사와 나눔을 실천해 온 윤주홍 원장은 사회를 위해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서울시민대상, 국민훈장 동백장, 청룡봉사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 같은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한 물음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사실 그렇게 나누고 봉사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죠. 없는 사람에게는 삼분지 일도 힘든 법이에요. 그래도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아무리 힘들어도 1할 중 2푼은 어려운 사람을 도우라는 거예요. 힘들 때 나누는 건 신체의 일부를 떼어내는 고통일 수 있어요.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야 해요. 그래야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법이거든요.” 윤주홍 원장이 보여준 삶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선행을 통해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실천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2025.01.31

    우리의 결산
  • 2025.01.03

    기적의 시작
  • 많은 사람에게 새해는 소망하는 바를 꿈꾸고 계획하는 희망의 해이지만 한편으로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간절히 기적을 바라는 해이기도 합니다. 특히나 얼어붙은 경제로 말미암아 모두가 어려운 이때, 절망의 자리에서 희망의 기적을 써내려간 제프 핸더슨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제프 핸더슨은 라스베이거스의 최고급 호텔인 벨라지오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최초로 총주방장이 된 유능한 요리사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렸을 때부터 탄탄대로를 걸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프 핸더슨은 마약을 두고 온갖 범죄가 난무하는 가난한 동네에서 태어났습니다. 동네에서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으며 많은 어머니들은 마약에 중독되어 있었습니다. 이 같은 주변 환경 속에서 제프 핸더슨도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생활했습니다. 그 여파로 어린 시절부터 도둑질을 일삼았습니다. 더군다나 그 역시 청소년기에 마약의 세계로 발을 들이게 되었고, 결국 마약 밀거래 죄로 체포되어 징역 19년 7개월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교도소에 간 그는 주방에 배정되어 하루에 세 번 1500명 분량의 식기를 닦아야 했습니다. 뜨거운 솥에 살갗을 데었으며 끝없는 설거지로 손은 퉁퉁 붓고 갈라졌습니다. 그런데 제프 핸더슨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 기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요리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습니다. 설거지부터 온갖 잡일을 거치며 성실하게 기술을 익혔고, 이를 통해 10년 만에 보호관찰로 석방되었습니다. 석방된 이후에는 레스토랑에서 접시닦이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요리사 경력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절망의 자리가 바로 그의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이후 제프 핸더슨은 메리어트 호텔, 리츠칼튼 호텔, 벨에어 호텔, 레르미타주 호텔의 주방을 거쳐 라스베이거스의 시저스팰리스 호텔 주방장으로 발탁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미국 테이스팅 협회 선정 2001년 최고의 요리사 상 수상의 영광을 안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벨라지오 호텔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총주방장이 되는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제프 핸더슨은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며 『나는 희망이다(Impossible is Nothing)』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나의 성공은 모두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입니다.” 오늘 어떤 절망의 자리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나요? 예수님을 만나면 그 절망의 자리가 기적의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 희망의 새해를 써내려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2025.01.03

    사랑하면 할 수 있지요
  • 매해 겨울이 되면 대한결핵협회에서 결핵 퇴치 기금을 모으기 위해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합니다. 지금은 범국민적으로 시행된 결핵 퇴치 사업이 성과를 거둬 결핵 환자가 많이 줄었지만, 결핵은 오랫동안 인류의 생명을 앗아간 감염 질환으로 우리나라 역시 결핵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온 의료선교사들도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큰 힘을 쏟았습니다. 그중 1949년부터 1974년까지 25년간 한국의 결핵 환자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준 미국의 허버트 카딩턴 선교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카딩턴 선교사는 우리나라 땅을 밟기 전 미국 뉴욕주 코넬대학교 의학부를 졸업하고,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시에 있는 유니언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1949년 미국 남장로교를 통해 한국에 파송되어 목포프렌치병원에 부임해 활동하다가 1951년 광주제중병원의 제5대 원장으로 취임했습니다. 1966년까지 광주제중병원장을 역임했고 1967년부터 1974년까지 결핵과 과장으로 재직하며 결핵 퇴치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이렇게 의료선교를 위해 일생을 바친 카딩턴 선교사는 선교병원만큼은 가난한 환자들의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형편이 어려워 진료비를 낼 수 없는 환자도 기꺼이 진료하고 처방을 내주었습니다. 또한 결핵은 전염력이 강해 치료하는 사람도 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카딩턴 선교사는 전혀 거리낌 없이 환자를 대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다가가 몸을 안아 일으키고 수혈이 필요하면 자신의 팔을 걷어붙였으며 응급 시에는 직접 인공호흡을 해 기도에 막힌 핏덩이를 빼내곤 했습니다. 어느 날 동료 선교사가 어떻게 이런 힘든 선교를 할 수 있는지 묻자 카딩턴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사랑하면 할 수 있지요.” 이후 카딩턴 선교사는 1974년에 한국보다 의료 환경이 더 열악한 방글라데시로 떠나 1999년까지 25년간 콜레라, 결핵, 한센병 환자를 돌봤습니다. 이처럼 의료선교를 하며 50년을 보낼 동안 두 자녀를 잃었고, 아내는 병들었으며 본인 역시 암에 걸렸지만 끝까지 가난한 환자의 곁을 지킨 카딩턴 선교사는 ‘결핵 환자의 아버지’, ‘작은 예수’, ‘바보 성자’ 등의 여러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카딩턴 선교사는 죽음을 앞두고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라고 묘비에 써달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그의 유언처럼 우리는 모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을 다시금 기억하며 올겨울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웃을 돌아보고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나누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2024.11.29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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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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