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목사의 행복편지
또 하나의 언어 ‘침묵’
  • 우리는 말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정제되지 않은 수많은 말들이 의도와 상관없이 무분별하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결핍이 아닌 과도함이 우리로 하여금 참과 거짓을 분별하기 힘들게 만들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말을 아끼는 것이 필요합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고 하지만 ‘지혜는 들음으로 생기고 후회는 말함에서 생긴다’라는 영국 속담에서 알 수 있듯 백 마디 잘해서 얻는 이득보다 한 마디 실수로 인한 손해가 더 큰 법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말과 관련된 속담이 많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처럼 가볍게 한 말이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니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는 한 번 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을뿐더러 순식간에 멀리까지 퍼져 나가기 때문에 말을 신중히 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처럼 아무리 비밀스럽게 한 말이어도 반드시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가게 되어있으니 듣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도 말을 조심하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말은 보태고 떡은 뗀다’는 속담은 말을 여러 사람에게 옮길수록 부정적인 것이 더해지고 떡은 여러 사람을 거칠수록 줄어든다는 의미입니다. 그 예로 남편과 싸웠다는 말이 몇 사람을 거치면 이혼을 고민하고 있다는 소문으로 와전되는 상황을 들 수 있습니다. 남들이 잊어줬으면 하는 말일수록 더 또렷이 기억되고 감추고 싶은 말일수록 급속도로 전파되기 마련입니다. 공든 탑을 하루아침에 무너트리는 것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할까 말까 망설여지는 말은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면 좋겠지만 말이 많으면 많을수록 오해만 생길 뿐입니다. 우리가 말의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침묵의 힘을 적절히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유창한 말보다 굳게 다문 입이 더 영향력 있는 메시지를 전달할 때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기 전 심문을 받으시던 예수님은 불합리한 증언들이 난무하는 상황에서도, 갖은 모욕과 조롱에도 묵묵히 침묵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심으로 죄로 인해 절대 절망에 처한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희망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또한, 침묵은 입을 다무는 행위를 넘어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입니다. 내가 할 말을 줄이고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관심을 가져보십시오. 말의 실수가 줄어들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더 이해하고 소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민족의 명절 추석이 다가오는 9월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흩어져 지내던 가족들이 오랜만에 만나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 소중한 날, 사소한 말실수로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이 없도록 부정적인 말, 험담하는 말을 들을 때는 침묵의 언어를 사용해봅시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지내던 가족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귀 기울이며 화목을 이루고 사랑으로 하나 되는 시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 2023.09.01

    내 평생에 가는 길
  • 찬송가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은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보내는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위로와 힘을 가져다줍니다. 그런데 이 찬송의 작사가인 호레이쇼 스패포드(Horatio Spafford) 역시 큰 아픔을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스패포드는 미국 시카고의 법무법인 대표이자 법리학 교수였습니다. 또한 무디 부흥사를 도와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신실한 집사였습니다. 그런데 1871년 10월 8일 불길이 시카고 전체를 삼키는 대화재가 일어났습니다. 이때 스패포드가 섬기던 교회와 그의 전 재산이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대화재가 일어나기 얼마 전에는 4살 된 아들이 성홍열에 걸려 세상을 떠나는 아픔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스패포드는 낙심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스패포드 부인은 몸과 마음이 약해져 의사가 안정을 위해 휴식을 취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마침 영국에서 무디 부흥성회가 열리게 되어 스패포드 부부는 성회도 참석하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 4명의 딸과 함께 유럽 여행을 다녀오기로 계획했습니다. 스패포드는 시카고 대화재의 후속 처리를 해야 해 가족들을 먼저 떠나보냈습니다. 그런데 스패포드의 가족을 실은 여객선이 대서양을 순항하던 중 영국 범선과 충돌하면서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의식을 잃은 부인은 구조됐지만 4명의 딸은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내를 데려오기 위해 영국으로 향하던 스패포드에게 선장이 “지금 우리는 아이들이 타고 있던 배가 침몰한 지점을 통과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스패포드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선실로 들어와 밤새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의 일을 가장 귀하게 여겼고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환하게 동이 틀 무렵에 하나님의 말씀과 평안이 스패포드의 몸을 감싸 안았습니다. 이렇게 쓴 찬송이 바로 찬송가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입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 늘 잔잔한 강 같든지 /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 내 영혼 평안해 /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이후 스패포드 부부는 매년 3만명 이상의 아이를 돌보는 스패포드 아동센터를 설립했고, 다시 얻은 두 자녀와 함께 이스라엘 예루살렘으로 이주해 평생 고아와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고난이 다가옵니다. 하지만 고난의 때에 굳건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면 넘치는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으로 고난을 넉넉하게 이겨내고, 또 고난 가운데 있는 이웃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2023.08.04

    치료의 페이스메이커
  • 미국에서 페이스메이커스(PACEMAKERS) 운동을 펴고 있는 채영광 교수(미국 시카고 노스웨스턴 의대)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페이스메이커스 운동은 고된 치료의 과정을 마라톤처럼 달리고 있는 환자와 보호자 옆에서 의료진이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다독이며 끝까지 완주하도록 돕는 페이스메이커가 되자는 취지로 시작됐습니다. 지금은 환자에게 긍휼의 마음을 흘려보내며 치료의 페이스메이커로서 귀한 일을 감당하고 있지만 사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까지 채영광 교수는 남과 비교하는 습관이 있어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우쭐해하고 자신보다 잘난 사람을 보고는 우울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채영광 교수의 이러한 마음의 배후엔 엘리트들이 갖고 있는 자기 사랑과 자기 연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한 후 하나님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죄로 여기며 모두 하나님께 내려놓았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그 비워진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자 채영광 교수의 진료실은 곧 선교지가 됐습니다.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매우 귀하게 여기며 환자들에게 “당신을 응원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인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암 환자들에게 “암은 당신 탓이 아닙니다”라고 격려하며, 투병으로 힘들어하는 환자에게는 손을 잡고 “당신을 위해 기도해도 될까요?”라고 물은 후 진심을 다해 기도해 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믿지 않는 환자들도 채영광 교수의 진료를 통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전심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는 채영광 교수는 페이스메이커스 운동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과대학 시절엔 의사의 자질에 관해 항상 객관적인 위치에서 냉정하게 일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환자에게 잘못된 희망을 심어주어서도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감정적 번아웃을 피하려면 환자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그런데 ‘함께 우시는 예수님’을 만난 뒤로 제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환자와 함께 우는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성경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말합니다(롬 12:15). ‘저 의사가 진짜로 환자인 내가 잘되기를 바라는구나’라는 믿음을 심어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끝까지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습니다.” 가정, 학교, 직장, 사업장 등 각자 삶의 자리에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치료의 페이스메이커가 된 채영광 교수처럼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서가 아닌 타인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갈 때 모두가 큰 기쁨을 누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게 될 것입니다.
  • 2023.06.30

    다시 일어나 희망을 꿈꿉시다
  • 자신에게 일어난 불의의 사고를 극복하고 꿈을 찾아 나선 이지선 교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지선 교수는 2000년 당시 대학교 4학년 때 만취한 음주 운전자가 낸 7중 교통사고로 타고 있던 차에 불이 나 전신 55%에 3도의 중화상을 입었습니다. 이지선 교수는 화상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여기가 끝이다.’, ‘차라리 다 끝나버리면 좋겠다.’, ‘하나님, 나 어떻게 하실 거예요?’라고 원망 섞인 질문의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이지선 교수를 찾아오셔서 이렇게 약속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여기가 끝이 아니다. 너를 세상 가운데 반드시 세울 것이고, 너를 병들고 약하고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게 할 것이다.” 이지선 교수는 자신조차도 사랑할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변함없이 사랑하는 딸이라고 부르시는 것에 크게 감동했습니다. 그 이후로 40번이 넘는 고통스러운 수술을 받았지만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라는 가사의 찬양을 들으며 고통을 견뎌냈습니다. 그리고 사고의 자리에 마음을 두지 않고 슬퍼하기를 멈췄습니다. “사고를 만났고 사고와 잘 헤어질 수 있다”라며 절대 긍정의 마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두 번째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화여자대학교 유아교육과 과정을 마치고 유학을 떠나 11년 반 만에 보스턴대학교에서 재활상담학 석사, 콜롬비아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 석사, UCLA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2017년부터는 한동대학교 상담심리 사회복지학부 교수로 근무했으며, 올해 3월에는 사고 이후 23년 만에 모교인 이화여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부임했습니다. 지난 2월 최종 합격 소식을 듣고 너무나 기뻐서 울었다며 이지선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사고를 만났다. 사고와 부딪혀 만났지만 툭툭 털고 헤어져 그다음의 시간을 살았다. 나는 사고와 잘 헤어진 사람이다. 기나긴 면접 채용 과정을 지나며 다리도 억세지 못하고 목소리도 작은 자라는 것을 또 한 번 깨달았다. 스물셋에 사고를 만나고 떠나게 된 이화여자대학교에 23년 만에 교수로 돌아왔다. 모교에서 가르치는 기쁨을 누리게 해주셔서 감사하다.”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문제와 사고가 찾아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계속 머물러 불평할 것인지, 아니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새로운 희망을 향해 달려갈 것인지에 따라 그 인생은 하늘과 땅처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 놓일지라도 절대 긍정으로 일어나 희망을 향해 힘차게 달려 나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2023.06.02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 오래 전부터 영어 참고서나 단어집을 통해 학생들에게 널리 알려진 격언이 있습니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 워낙 유명한 격언인 만큼 나폴레옹이나 처칠 같은 세계적인 위인이 말했으리라 많은 사람이 추측하지만, 사실 이 격언을 말한 사람은 일본 삿포로 농학교(현 홋카이도 대학)의 초대 교감으로 취임한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William Smith Clark, 1826~1886) 박사입니다. 클라크 박사는 19세기 세계적인 농학자로 명성을 날리며 미국 매사추세츠 농업대학 학장을 지냈고 일본 정부의 초청을 받아 1876년 삿포로 농학교의 초대 교감으로 취임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홋카이도 개척을 위해 클라크 박사에게 하루라도 빨리 농업 기술을 전수받고자 했지만 클라크 박사는 농업 기술을 가르치는 것에 앞서 신앙 교육을 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늘 수업 전에 성경을 가르쳤고 그의 헌신이 열매를 맺어 삿포로 농학교의 1기 학생들 모두가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이후 클라크 박사는 약 9개월간의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학생들에게 고별사를 남겼는데, 그 고별사가 바로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입니다. 고별사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돈이나 이기적인 성취, 사람들이 명성이라 부르는 덧없는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얻기 위해서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 Be ambitious not for money or for selfish aggrandizement, not for that evanescent thing which men call fame. Be ambitious for the attainment of all that a man ought to be.) 수많은 이들에게 야망을 안겼던 이 격언에는 본래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꿈과 희망을 품으라는 뜻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 최초의 학위 수여 기관이었던 삿포로 농학교는 이 같은 클라크 박사의 교육 신념 아래 우치무라 간조 같은 영향력 있는 지도자를 배출했습니다. 국내외적으로 발생한 여러 가지 어려움 때문에 꿈을 향해 달려 나가던 많은 이들이 걸음을 멈춰 섰습니다. 하지만 잠시 걸음을 멈췄다고 할지라도 결코 마음속에 품은 꿈과 희망을 놓지 마십시오. 고난을 기회로 삼아 더 큰 꿈을 꾸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거룩한 꿈과 희망을 향해 포기하지 않고 달려 나가면, 하나님이 우리의 꿈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 2023.05.05

    인생의 필수 코스
  • 소외되고 약한 자들에게 사랑을 베푼 선한 이웃의 이야기를 따뜻하게 그려낸 소설 『불편한 편의점』은 2021년에 출간하여 지금까지 100만 부 이상 판매된 밀리언셀러입니다. 이 책에는 저자 김호연 작가의 기독교 신앙과 삶의 광야의 여정이 잘 담겨 있습니다. 김호연 작가는 대학을 졸업한 후 영화사에 취직해 영화 ‘이중간첩’의 막내 시나리오 작가로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자 영화사에서 퇴사한 후,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 3편을 써서 20여 곳에 보냈지만 모두 제작을 거절당했습니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전업으로 영화 시나리오를 썼지만 당시 한국 영화계의 침체로 흥행에 실패하는 일이 흔했고 심지어 시나리오를 써도 원고료를 못 받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때 아무리 시나리오를 재미있게 써도 결국 이것을 제작해 줄 수 있는 영화사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김호연 작가는 혼자 작품을 마무리할 수 있는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망원동 브라더스』라는 소설을 써 2013년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받으며 소설가로 데뷔했습니다. 김호연 작가는 소설가로 데뷔하기까지의 시간이 자신에게 광야의 시간이었다며 당시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많이 되새겼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다 이기셨고 세상 법칙으로는 질지언정 언젠가 인정받을 날이 올 거라 믿었습니다. 어머니도 아들을 위해 기도해주셨고, 저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소설가로 탄탄대로를 걸으리라 생각했지만, 이어서 쓴 3편의 소설이 모두 흥행에 실패하며 몸과 마음이 상해 소설가의 꿈을 접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불편한 편의점』을 쓰면서 따뜻한 이야기를 다시 써 보자는 마음을 먹었고, 사람들의 선의에 대한 이야기와 하나님의 섭리를 작품 속에 담아내겠다는 마음으로 쓰다 보니 정작 자신이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김호연 작가는 고통스러웠던 자신의 광야의 시간에 대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꽉꽉 눌러서 키우십니다. 한 번에 크게 안 주시고 단련시키는 것 같습니다. 광야의 시간은 인생의 전공필수입니다.” 누구에게나 고난의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오듯,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꿈을 향해 나아가면 반드시 좋은 날이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모두가 어려운 이 시기에 따뜻한 위로로 서로를 격려하며 희망의 날을 기대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2023.03.31

    가장 위대한 무기는 평화입니다
  •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최초 흑인 대통령인 넬슨 만델라의 이야기입니다. 만델라 대통령은 1918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음베조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날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영국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였습니다. 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독립국이 된 이후에도 흑인들이 받는 차별은 계속되었습니다. 이에 만델라 대통령은 인종차별에 맞서는 저항 운동에 가담했습니다. 1963년 저항 운동에 가담한 죄로 법정에 서게 되었고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45세의 나이에 수감되었던 그는 무려 27년이나 지난 후 72세가 되어서야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만델라 대통령은 출옥 후 1991년 아파르트헤이트(흑인차별정책)를 철폐시키고, 1993년에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게 함으로서 그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리고 1994년 4월 27일, 마침내 남아프리카공화국 역사상 처음으로 인종차별이 없는 평등 선거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통해 만델라 대통령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대통령이 되고 난 이후의 만델라 대통령이 보여준 모습입니다. 많은 사람은 만델라 대통령이 백인들을 향해 보복 정치를 할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이들의 생각과 달리 만델라 대통령은 취임 후 ‘진실과 화해 위원회’라는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잊지는 않지만 용서한다’라는 원칙을 세워 과거사 문제를 처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만델라 대통령의 노력을 통해 350여 년간 지속된 백인 정권은 보복이 아닌 용서와 화해로 막을 내렸고 평화의 새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2013년 12월 5일 만델라 대통령은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이름은 여전히 평화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특히 1964년 리보니아 재판에서 그가 했던 최후 진술은 오늘날에도 회자되어 큰 감동을 줍니다. “나는 평생 아프리카 사람들의 투쟁에 헌신했습니다. 백인 지배에 맞서 싸웠고, 흑인 지배에 맞서 싸웠습니다. 모든 사람이 조화롭게 동등한 기회를 누리며 사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라는 이상을 품었습니다. 나는 그러한 이상을 위해 살고 그러한 이상을 실현하고 싶습니다. 필요하다면 그것을 위해 죽을 준비도 되어있습니다.” 이 같은 이상을 이루기 위해 만델라 대통령이 사용했던 무기는 단 하나 평화였습니다. 만델라 대통령은 늘 이렇게 외쳤습니다. “가장 위대한 무기는 평화입니다!” 우리 사회 역시 오랜 기간 지역, 세대, 성별, 정치적 이념 등의 차이로 첨예하게 대립하곤 했습니다. 이제는 의견이나 생각이 다르다고 서로 미워하거나 다투지 말고 평화를 통해 용서와 화합의 길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2023.03.03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
  • 사회적 기업인 브라더스 키퍼(brother’s keeper)를 설립하여 만 18세가 되어 보육원 시설에서 퇴소한 보호종결아동을 돕고 있는 김성민 대표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브라더스 키퍼는 보육원 출신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자립하지 못하는 이들을 돕기 위해 설립한 회사로, 벽면 녹화(수직 정원) 작업을 통해 작년에만 20억원의 매출을 올린 스타트업 기업입니다. 김성민 대표는 브라더스 키퍼를 통해 보호종결아동들의 보금자리 마련과 취업에 도움을 주며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김성민 대표가 이 같은 귀한 일을 하게 된 데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습니다. 본인 역시 보육원에서 자라며 상처받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성민 대표는 부모님이 없다는 이유로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차별을 당했습니다. 보육원에서는 먹을 것이 늘 부족했고 형들의 폭력은 일상이었습니다. 이렇게 굶주리고 매를 맞을 때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을 버린 부모님의 탓이라고 여기며, 만일 부모님을 만나게 되면 복수하기 위해 항상 가방에 주방용 칼을 넣고 다녔습니다. 김성민 대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보육원을 퇴소해 가방 하나만 들고 상경했습니다. 6개월 동안 노숙자 생활을 하다가 하루는 복음을 전하는 한 권사님을 따라 교회에 갔는데, 교회 입구에서 흘러나오는 찬양을 듣자마자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눈물을 쏟으며 지난날의 삶을 회개하고 다시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아예 교회 근처에 방을 얻어서 교회의 모든 예배에 참석하고 매일 QT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자신과 같은 보호종결아동의 자립을 돕기 위해 브라더스 키퍼를 설립한 것입니다. 김성민 대표는 자신의 변화에 대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전에는 고아, 보육원이라는 단어가 너무 싫었습니다. 그런 단어들은 나에게 상처와 아픔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깨닫게 하셨습니다. 내가 내 발로 보육원에 걸어 들어온 게 아니라 내 어머니, 아버지의 실수로 생겨나서 보육원에 온 것이 아니라, 보육원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보내신 곳이라는 것을요. 큰 상처였던 고아라는 말이 이제 상처가 아니게 된 것입니다. 그 순간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 저를 고아로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제가 고아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제가 저의 존재를 부인하면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하신 시간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힘없고 연약한 사람을 차별하지만 하나님은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와는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십니다. 더 이상 과거의 아픔과 상처로 말미암아 낙담하지 말고,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아름답게 쓰임 받는 일꾼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 2023.02.03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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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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