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최진용 목사(강서1대교구장) - 젊고 건강하게 사는 비법
  • 어느덧 한 해의 절반을 지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 삶을 잠시 돌아보면 나이 듦이라는 단어에 얽힌 감정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나이 든다’는 것을 곧 ‘늙는다’고 여겨 한숨을 쉬고 그래서인지 실제로 더 빠르게 노화를 경험하곤 한다. 그런데 이 노화는 단순히 신체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일본의 정신과 의사 와타 히데키는 『사람은 감정부터 늙어간다』라는 책에서 흥미로운 통찰을 전한다. 그는 “노화는 지력이나 체력보다 감정에서 먼저 시작된다”고 말한다. 지능이나 지성은 비교적 늦게까지 유지되지만 감정은 세월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감정이 먼저 늙으면 육체도 빨리 따라 늙고 반대로 감정이 젊으면 몸도 자연스레 활력을 되찾게 된다. 그러니 ‘감정의 젊음’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젊고 건강하게 사는 비결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감정의 노화를 막을 수 있을까? 성경 빌립보서 4장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기뻐하라, 관용하라, 염려하지 말라, 감사하라.” 이 말씀은 단지 마음을 다스리라는 조언이 아니다. 이 네 가지는 감정의 영역이자 믿음의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영적 무기이다. 기쁨, 관용, 감사는 건강한 감정이지만 원망과 염려는 감정을 병들게 한다. 우리 마음이 원망과 불평, 걱정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면 그것은 이미 감정이 늙어버렸다는 증거이다. 감정도 습관이다. 자꾸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히면 어느덧 우울한 것이 일상이 된다. 감정은 기질의 영향을 받지만 훈련을 통해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다. 날마다 절대 긍정, 절대 감사를 선포하고 삶에 실천을 해 나가면 성령께서 우리의 감정을 도우시고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신다. “기뻐하고 감사하자! 사랑하고 용서하자! 염려하지 말고 여유 있는 미소로 살자!” 감정의 늙음을 거절할 때 영적 젊음을 지키고 육체도 함께 회복된다. 그것이 곧 젊고 건강하게 사는 비법이며 모든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길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4~7).
  • 2025.06.27 / 김용두 기자

    김영석 목사(선교국 담당) - 선교의 불을 다시 지필 때입니다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마 28:19). 2025년 한국 교회는 복음 선교 140주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1885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조선 땅에 첫 발을 내딛은 그날의 순종과 헌신은 140년이 지난 오늘날 세계 170개국에 2만1000여 명의 장기 선교사를 파송하는 결실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수치는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이정표에 불과합니다. 신록이 짙어지는 6월을 맞아 제51회 순복음세계선교대회가 열립니다. 이번 대회는 전 세계 67개국에 파송된 673명의 선교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는 주님의 사명을 새롭게 되새기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특히 여의도순복음교회 창립 70주년을 3년 앞두고 열리는 이 대회는 한국교회 선교의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선교의 지형은 급속히 변하고 있습니다. 북반구 중심에서 남반구 중심으로, 교회 중심에서 도시와 일상 중심으로, 그리고 현장 선교에서 디아스포라 사역과 디지털 미션으로 그 흐름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안에도 300만명이 넘는 해외이주민과 다문화 가정, 외국인 유학생들이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먼 나라의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가 복음으로 품고 섬겨야 할 ‘이웃’입니다. 이제는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시대를 넘어 현지 교회와의 깊은 협력, 다음세대 선교 인재 양성, 국내 이주민과의 연합 사역이 요청되는 시대입니다. 단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넘어서,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는 선교 공동체’로의 전환이 절실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태복음 28장 19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는 140년 전 낯선 이 땅에 복음을 들고 온 선교사들의 심장이었고 오늘날 우리가 다시 붙들어야 할 사명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성령의 이름으로 선교의 불씨를 다시 타오르게 할 때입니다. 모든 성도의 기도와 헌신이 한국 교회에 다시금 뜨거운 선교의 불길을 타오르게 할 것입니다. 이 선교의 맨 앞에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선교사들이 절대 긍정의 믿음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 2025.06.2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고영용 부목사(개척) - 교회개척은 부르심에 대한 순종이자 믿음의 여정
  • 우리 교회는 올해로 창립 67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기본 사명인 교회 개척과 선교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의 사역을 계승한 이영훈 담임목사님도 교회개척 사명을 이어받아 현재까지 전국에 569개의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교회개척과 선교는 단순한 조직의 확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확장하는 가장 역동적인 사역입니다. 세계 방방곡곡으로 파송된 선교사들과 전국으로 나아가 교회를 개척하는 개척 목회자들은 낯선 땅과 익숙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눈물로 기도하며 복음을 전파했고, 그 순종의 씨앗은 오늘날 수많은 생명과 공동체의 열매로 자라났습니다. 개척목회는 쉬운 길이 아닙니다. 때로는 외롭고 이해받지 못하며, 때로는 재정적·정신적 한계 앞에서 좌절도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십자가를 지는 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여정입니다. 하나님은 개척교회 목회자들을 이 시대의 엘리야로 부르셨습니다.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도 확실한 하나님을 붙들며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불타는 심장을 다시 품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께도 부탁드립니다. 개척교회는 뿌리 내리는 과정에서 많은 기도와 헌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일에 여러분의 손과 무릎이 함께할 때, 주님은 여러분의 삶 또한 견고한 반석 위에 세우실 것입니다. 작은 예배당에서 드리는 찬양이 천상의 향기로 올라가고 몇 사람과 함께 드리는 기도가 도시의 영적 기류를 바꾸는 거룩한 파장이 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새 일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새 일은 바로 ‘개척’을 통해 시작됩니다. 이 사명에 함께 동참하는 모든 이들에게 성령의 위로와 담대함이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하셨기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개척사역을 기억하며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오늘도 씨를 뿌리는 모든 사역자들과 동역자들, 기도해 주시는 모든 성도님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 43:19).
  • 2025.06.1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평신도를 위한 사도행전 이야기
    (104) 사도행전의 기도에 관한 가르침④
  • 지금까지 사도행전이 ‘성령과 기도의 연관성’, ‘기도와 영적 지도자의 연관성’, ‘기도의 생활화’, ‘기도와 기적의 연관성’ 그리고 ‘안수 기도’ 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6. 기도의 방법, 자세 1) 합심기도 (1)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1:12~14) (2) 초대 교회의 생활 :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2:42) (3) 베드로가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갔을 때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음(12:12) 2) 무릎을 꿇고 기도 (1) 무리가 스데반을 돌로 치자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부르짖은 후 순교함(7:59~60) (2) 베드로가 다비다(도르가)를 다시 살릴 때: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9:40) (3)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불러서 고별설교를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고 눈물로 작별함(20:36~38) (4) 바울이 두로에서 제자들과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서로 작별”함(21:5~6) 3) 금식 기도 (1)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와 교사들이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께서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라고 하시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냄(13:2~3) (2) 바울이 제1차 선교 여행 말미에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함(14:23) 4) 안수 기도 (지난 호의 ‘5. 안수 기도’ 참조) 7. 기타 기도에 대한 교훈 1) 회개기도 베드로가 하나님의 은사를 돈을 주고 사려는 마술사 시몬에게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고 책망함(8:22) 2) 중보기도 (1) 베드로와 요한 일행이 공회에서 석방되자 성도들이 ① 그들의 안전과 ② 담대한 하나님의 말씀 전파와 ③ 병 고침과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기를 위해 기도함(4:24~30) (2) 베드로의 책망을 받은 마술사 시몬이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라고 중보기도를 부탁함(8:24) (3) 헤롯(아그립바 1세)이 백성들의 환심을 사고자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인데 이어 베드로를 잡아 투옥시키자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함(12:5) (4) 바울이 제1차 선교 여행 말미에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함(14:23) 3)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됨 고넬료의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환상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가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10:4) 베드로를 청하라고 말함(10:31 참조) 김호성 목사(여의도순복음동부교회 담임)
  • 2025.06.1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03) 사도행전의 기도에 관한 가르침 ③
  • 지금까지 사도행전의 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살펴보면서 ‘성령과 기도의 연관성’, ‘기도와 영적 지도자의 연관성’, ‘기도의 생활화’ 등을 중점적으로 고찰하였다. 4. 기도와 기적의 연관성 (지난 호에 이어서 계속) 1) 신유 (1) 베드로가 욥바에서 죽은 다비다(또는 도르가)를 살릴 때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서 시신을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라고 말하자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음(9:40) (2) 멜리데섬의 유지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앓아눕자 바울이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함(28:8) 2) 기도할 때 환상을 봄 (1)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하기 직전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할 때 천국과 인자의 환상을 봄(7:55~56) (2) 고넬료가 어느 날 제 구시(오늘날 오후 세 시)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라는 지시를 환상을 통해 받음(10:3~6, 30~32) (3) 고넬료가 환상을 본 다음날 베드로가 제 육시(오늘날 정오)에 지붕에 올라가 기도할 때 온갖 부정한 음식이 가득하게 든 그릇이 하늘에서 내려오면서 베드로에게 잡아먹으라는 명령이 세 번 반복되는 환상을 봄(10:9~16, 11:5~10) (4) 바울이 제3차 선교여행을 마친 후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천부장 루시아 앞에서 증언하면서 자신이 다메섹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환상을 통해 주께서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고 명령하셨다고 말함(22:17~21) 5. 안수 기도 1) 영적 지도자나 일꾼을 선택할 때 안수 기도 (1) 초대교회 성도가 급증하여 구제가 원활하게 시행되지 않자 사도들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여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함(6:3, 6) (2) 안디옥교회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금식하면서 기도할 때 들려진 성령의 명령을 따라 다시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사울과 바나바)에게 안수하여” 제1차 선교여행을 보냄(13:1~3) 2) 안수 기도를 통해 성령을 받음 (1) 전도자 빌립의 사역을 통해 사마리아가 복음화 되자 예루살렘교회가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하여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음(8:14~17) (2) 마술사 시몬조차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으로 그 “권능을” 사려고 함(8:18~19) (3)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다메섹의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함으로써 성령으로 충만하게 함(9:17) (4) 바울이 요한의 침례만 알고 있었던 에베소의 열두 명 정도의 제자들에게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안수하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함(19:1~7) 3) 안수 기도를 통한 병 고침, 신유 (1) 다메섹에서 아나니아가 잠시 시력을 잃은 사울에게 안수함으로써 그가 다시 보게 됨(9:12, 17~19) (2) 멜리데섬의 유지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앓아눕자 바울이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함(28:8) 김호성 목사(여의도순복음동부교회 담임)
  • 2025.05.0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02) 사도행전의 기도에 관한 가르침②
  • 지금까지 다양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성령께서 임하시는 장면이 사도행전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확인해 보았다. 사도행전은 또한 기도를 통해 영적 리더를 세워 가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2. 기도와 영적 지도자의 연관성(지난 호에 이어서 계속) 1) 영적 지도자나 사역자를 선택할 때의 기도 (4) 바나바와 바울은 제1차 선교여행을 통해 세운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했다(14:23). 이 구절은 이방 지역에서 장로들이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최초로 증언해 준다. 2) 기도는 사도의 직무 중 주요 요소 초대교회가 급성장하여 믿는 자들이 많아짐에 따라 구제하는 일이 원활히 되지 않자 일곱 ‘집사’(원어:봉사자)를 따로 세우고, 12사도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만 힘쓰기로 했다(6:4). 3) 영적 지도자들의 고난 중의 기도 (1)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마지막까지 기도를 드렸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7:59).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7:60). 그런데 이 기도는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를 떠올리게 한다(눅 23:34, 46 참조).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은 예수님처럼 살다가 예수님처럼 숨을 거둔 참 제자로 소개된다. (2)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심하게 매 맞은 후 감옥에 갇혔지만 한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다(16:25). (3)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불러서 고별설교를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고 눈물로 작별했다(20:36~38). (4)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두로에 들렀다가 다시 떠날 때 제자들이 처자와 함께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작별했다(21:5~6). 3. 기도의 생활화 1) 기도는 초대교회의 생활의 주요 요소 (1)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성도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2:42). (2) 헤롯왕(아그립바 1세)에게 잡혀 감옥에 갇혀서 죽을 위험에 처했던 베드로를 주의 사자가 구출해주자 베드로는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갔는데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12:12). 2) 규칙적으로 기도 생활을 하는 모습 (1) 베드로와 요한이 “제 구 시(오후 3시) 기도 시간에” 기도하러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美門) 앞에서 나면서부터 못 걷는 자를 고침(3:1). (2) 백부장 고넬료는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다(10:2). 그가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할 때 환상을 보고 베드로를 초청해서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말씀을 들었다(10:3, 30). (3) 베드로가 “제 육 시(정오) 기도 시간”에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서 기도할 때 환상을 보고 이방인인 고넬료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10:9). (4) 바울이 빌립보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유대인의 회당이 없어서 안식일에 혹시 “기도할 곳”(원문: 프로슈케, ‘기도처’)이 있나 해서 강가로 나갔다가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를 만나 침례를 베풀고 주님을 영접하게 했다(16:12~15). 김호성 목사(여의도순복음동부교회 담임)
  • 2025.04.1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쉽게 풀어 쓴 교회사 산책
    (79) 종교개혁⑲
  • 『크리스천의 자유』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 가운데 마지막은 그가 1520년 가을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낸 『크리스천의 자유』이다. 이 글은 단순히 교회의 잘못된 교리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복음이 한 사람의 마음과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공개서한 형식으로 작성되었고 라틴어와 독일어로 동시에 발표되었다. 루터는 인간을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보며 이를 바탕으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행위, 자유와 순종의 관계를 설명한다. 루터는 먼저 영혼의 자유 곧 인간의 내적인 자유에 대해 말한다. 그는 외적인 조건이나 종교적 행위만으로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사람은 비로소 의롭고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롬 10:10)라는 말씀에 근거한 이해이다. 루터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성도가 마치 신랑과 신부처럼 하나가 된다고 보았다. 그리스도께 속한 생명과 구원은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의 죄와 죽음은 그리스도께 전가되어 십자가에서 소멸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과 믿음이 주는 참된 자유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이다. “믿음만 있으면 되는데, 굳이 선행은 왜 필요한가?” 루터는 이 질문에 대해 명확하게 답한다. 진정한 믿음은 반드시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내적으로는 어떤 사람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완전한 자유인이지만 동시에 그 자유를 가지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받은 사랑은 자연스럽게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흘러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결코 게으를 수 없으며,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선한 일을 실천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이러한 선행은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한 조건이 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를 얻은 사람이 감사와 사랑으로 드리는 삶의 열매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올려드리고 사랑으로 이웃을 향해 자신을 낮추는 삶. 이것이 복음이 말하는 자유를 얻은 크리스천의 삶이다.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딤전 1:9)라는 바울의 말처럼 루터는 이러한 자유를 통해 크리스천이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제시하며 당시 교회와 성도들에게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촉구했다. 다음은 『크리스천의 자유』 중 한 단락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크리스천의 진정한 자유와 섬김의 의미를 곱씹어 보자.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 대하여 완전히 자유로운 주인이며 누구에게도 종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 대하여 완전히 섬기는 종이며 누구에게나 종이다. 이 두 명제는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서로 잘 조화된다. 이 두 명제는 모두 바울 자신이 말한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19절에서 “나는 자유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을 만인의 종으로 만들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로마서 13장 8절에서는 “너희는 서로 간에 사랑하는 것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빚을 지지 말라”라고 말한다. 사랑이란 그 본질상 기꺼이 섬기고자 하는 것이요 사랑하는 그 대상에 대하여 기꺼이 그의 뜻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그러하시다. 그는 만물의 주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여인에게서 나셨으며 율법에 굴복하셨다(갈 4:4). 그는 자유자이며 동시에 종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계시며, 동시에 종의 형상으로 계신다(빌 2:6f).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담당)
  • 2025.06.2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78) 종교개혁⑱
  •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 대하여』 1520년 10월에 출간된 루터의 또 다른 종교개혁 저서인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 대하여』는 교회와 성례전을 중심으로 한 로마가톨릭의 신학을 성서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로마가톨릭교회는 성례전 그 자체에 주님의 은혜가 담겨 있다고 보았으며 이를 집례하는 자나 받는 자의 믿음 여부와 무관하게 성례를 통해 은혜가 주어진다고 가르쳤다(사효성, ex opere operato). 이에 반해 루터는 믿음을 성례전의 핵심 원리로 강조했다. 그는 성례전이 사람을 자동적으로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음으로 받는 이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그로 인해 의롭게 된다고 보았다. 루터는 성례전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다음의 세 가지 요소를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첫째, 성례의 외적 표지이다. 이는 물, 떡, 포도주 등과 같이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하나님이 정하신 구체적 표지이다. 둘째, 그 표지에 담긴 영적 의미이다. 성례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어진 영적 의미를 지닐 때 비로소 능력 있는 성례가 된다. 셋째, 성례를 받는 이의 믿음이다. 이를 통해 성례는 단순한 외적 행위가 아닌 실제로 은혜를 경험하는 통로가 된다. 루터에게 있어 성례는 그 자체로 마법적인 효력을 지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을 믿는 믿음 안에서 역사하는 은혜의 수단이었다. 따라서 루터는 형식적 참여가 아닌 참된 믿음으로 성례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더 나아가 루터는 성례전보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보았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그곳에 교회가 있다”(ubi est verbum ibi est ecclesia)라고 선언하면서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음을 역설했다. 성만찬과 관련하여 루터는 로마가톨릭이 성찬에 관해 세 가지 방식(잔을 빼앗는 속박, 화체설이라는 속박, 희생의 미사라는 속박)으로 교회를 속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 속박은 당시 가톨릭교회 사제들이 성찬식에서 포도주가 든 잔을 성도들에게 주지 않고, 빵만 베푸는 행위에 관한 것이었다. 이런 생각은 두 번째 속박, 즉 화체설(transubstantiatio)이라는 로마가톨릭의 성찬 교리로 인해 비롯된 것이었다. 1215년 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이노센트 3세는 ‘미사에서 사제가 선포하는 축성의 말씀과 동시에 빵과 포도주의 본질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고 선포했는데 바로 여기에서 ‘화체설’이라는 명칭이 유래했다. 이 교리에 따르면 포도주는 실제 그리스도의 피가 되므로 그것을 쏟는 일은 절대 용납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희생의 미사 역시 화체설과 관련된 것이었다. 사제의 축성을 통해 빵과 포도주의 본질이 그리스도의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로 바뀐다면 이는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반복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더 나아가 이 모든 공로는 축성을 맡은 사제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루터의 비판이었다. 로마가톨릭의 침례에 대한 루터의 비판은 명확하다. 당시 교리에 따르면 침례를 통해 원죄는 물론 개인이 스스로 짓는 자범죄의 뿌리까지도 제거된다고 여겼고 이에 따라 사람이 죄를 범할 때마다 새롭게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루터는 죄는 결코 침례를 통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와 참회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죄 사함의 은혜로 해결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침례는 한 번 받는 것이지만 성도는 믿음을 통해 항상 침례를 받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루터는 이 논문에서 로마가톨릭이 시행하던 일곱 가지 성례 중 성찬과 침례, 그리고 참회를 제외한 나머지-결혼, 서품, 견진, 종유 성사는 모두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담당)
  • 2025.05.2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77) 종교개혁⑰
  • 독일 크리스천 귀족들에게 : 그리스도교 신분의 개선에 관하여 쾰른과 뢰벤 대학의 신학자들이 마르틴 루터의 사상을 비판하는 평가를 제출하자 로마 교황청은 이를 근거로 1520년 6월 15일 파문 교서인 「주여 분기하소서」(Exsurge Domine)를 공포했다. 이 교서는 루터의 저술에서 발췌한 41개의 문장을 정죄하고 60일 이내에 이를 취소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경고했다. 루터는 7월 중순이 돼서야 이 파문 결정 사실을 접하게 되었고 이는 그가 집필 중이던 『독일 크리스천 귀족들에게 보내는 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단 판결을 앞두고 있던 루터의 심리적 긴장과 불안한 처지가 이 저술의 중요한 배경이 됐다. 루터는 이 초창기 개혁 선언서에서 특정한 제후들을 지목하기보다 일반적인 귀족층 전체에 호소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 글에 나타난 교황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은 울리히 폰 후텐(Ulrich von Hutten)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후텐은 1517년에 이탈리아 인문주의자 로렌초 발라의 저작을 출판했는데 이 책은 교황권의 세속적 권위를 정당화해 온 ‘콘스탄티누스의 증여 문서’가 위조된 것임을 논증하고 있었다. 루터는 1520년 초에 이 책을 읽고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확신하게 됐다. 루터는 글 속에서 자신을 수도사이자 신학박사로 소개하며 궁정 광대처럼 교회의 폐단을 지적하려 한다. 당시 궁정 광대는 왕이나 높은 귀족에 의해 고용되어 공연하던 이들이었는데 공연 속에서 권력자들에게 날카로운 첨언도 할 수 있었다. 『독일 크리스천 귀족들에게』는 최종 교정 없이 출간되었으며 초판은 1520년 8월 5일 비텐베르크에서 발행되어 단 3일 만에 4000부가 모두 소진됐다. 이후 독일어로 15판, 이탈리아어로 2판이 발간되었으며 전체 인쇄 부수는 약 6만 8000부로 추정된다. 이 글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개혁을 불가능하게 만든 ‘로마주의자들(주교, 신부, 수도사, 학자들)’의 세 가지 장벽에 대한 비판, 앞으로 공의회에서 다루어야 할 의제, 27개의 구체적 개혁 조항들이다. 세 가지 장벽이란 첫째는 영적 계급은 세속적 계급 위에 있다는 교리, 둘째는 교황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으며 그의 해석은 오류가 없다는 교리, 셋째는 교황만이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는 교리이다. 루터는 로마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이 세 겹의 장벽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글에서 루터는 속히 공의회가 열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공의회에서 교황청의 행정기구를 대폭 축소하고 독일에서 로마로 빠져나가는 자금의 흐름을 차단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마지막으로 27개의 개혁 조항들은 ‘교황과 교회 권위의 제한’(1-12), ‘성직자와 수도자에 대한 개혁’(13-18), ‘미사와 종교 행위 개혁’(19-23), ‘교회 교육 및 신학 개혁’(24-25), 그리고 ‘사회와 경제적 개혁’(26-27)으로 나뉜다. 특별히 20번 조항은 미신적 신앙 타파가 종교와 사회를 위한 개혁의 열쇠임을 강조하고 있다. “빌스낙의 ‘기적의 피 교회(die Wunderblutkirche)’, 슈테른베르크의 ‘성혈 예배당(die Kapelle des Heiligen Blutes)’, 트리어의 ‘거룩한 치마(der heilige Rock)’, 그림멘탈(Grimmenthal)과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의 성모 마리아 성지들(Marienheiligtumer)은 모두 악마의 속임수(Teufelsspuk)이다. 그곳에 모여드는 사람들의 열광적인 신앙을 보라. 이러한 은총의 장소로 순례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중요한 것은 자신의 본 교회 안에 다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침례, 성례, 설교 그리고 당신의 이웃이 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담당)
  • 2025.04.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뿌리깊은 순복음
    (161)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74>
  • 무례함의 기준은 나 자신이 아닌 상대방, 항상 조심하며 살펴 행동해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 교만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무례히 행하지 않으려는 행동은 존중과 배려로 가득 찬 선한 마음을 의미한다.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은 예의 바르다는 의미이고 그것은 경솔하거나 가볍지 않고 깊이 있는 행동을 의미한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가볍게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밖에 없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무례히 행치 않는 ‘예의 바름’을 사랑의 한 모습으로 이해하고 가르치고 있다. 다시 말해 사랑하면 상대를 대할 때 예의 바르고 따뜻하며 정중하게 행동하게 된다. 그런 예의 바른 행실을 통해 사랑의 마음이 전해지고 표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례히 행하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그것은 상대가 싫어하고 불편하게 여기는 행동이나 기분을 상하게 하는 행동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무례함의 기준이 나 자신이 아닌 상대방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경우든 상대가 무례히 여겨졌다고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예의 바름의 기준은 곧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진실한 배려의 마음으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무례히 행치 않으려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참된 사랑의 모습이다. 사도 바울은 왜 무례히 행치 않음을 사랑으로 보았을까? 당시 고린도 교회의 모습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초대 교회 시대의 성만찬 식사는 지금의 성만찬 의식과는 달리 규모가 큰 공동체의 식사였다. 문제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성도가 교회에서 그 식사에 참여하고 싶어도 그들에게까지 차례가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빈번했다. 소위 교회의 지도자급 성도들, 즉 지금으로 치면 제직들이 앞에서 먼저 배부를 정도로 음식을 다 먹고 성만찬 포도주도 취할 정도로 마셔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한 모습을 보며 바울은 그들의 무례함을 곧 사랑이 없는 모습으로 이해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1장 34절을 통해 바울은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고 책망하며 그런 행동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사랑이 없어 무례히 행하는 그 모습으로 그 모임이 심판받지 않기를 바란다고 엄중히 경고한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비판과 경고는 현재의 교회에도 유효하다. 교회가 무례히 행하면 비판받는 모임이 될 수 있다. 교회와 성도들은 진정 무례히 행치 않고 치열하고 치밀하게 빈틈없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행하고 실천해야 한다. 성령 충만한 교회와 성도는 마치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성령의 공동체처럼 무례히 행치 않는 사랑의 모습으로 세상의 칭송을 받아야 한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6~47).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5.06.2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60) 순복음의 7대 신앙-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73>
  • 절대로 작은 말로라도 상처 주거나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이 참된 사랑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 교만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무엇보다 서로 주고받는 말 즉 언어로 무례히 행치 않아야 한다. 언어에 예의가 있어야 한다. 자기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후배라고 직급이 낮다고 함부로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요 그 사람의 인격에 손상을 주는 일이다. 지위와 명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말을 부드럽고 예의 있게 하면 훨씬 더 존경을 받게 된다. 입술에서 나오는 말에서 그 사람의 가치와 품격이 가장 잘 나타나는 법이다. 때로 대화 시에 상대방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말을 가로채거나 막아버리는 경우가 있다. 조용히 해야 할 곳에서 남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음을 일으키는 사람도 있다.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먼저 남을 배려하고 생각하는 것이고, 참된 사랑은 작은 말에서부터 드러난다.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말을 함부로 하고 싶어질 때 그 상대방의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를 대하든지 주를 대하듯 해야 한다(골 3:23). 예수님께서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고 하셨으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마 10:42)이라고 말씀하셨다. 성령 충만한 성도는 예의 바른 언어생활에서부터 무례히 행치 않아야 한다. 진정한 사랑은 절대로 무례히 행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로 지나가는 말로 아무 생각 없이 말을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사람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때가 있다. 옛말에 “말한 입은 사흘이요, 듣는 귀는 천년이다”라는 말이 있다. 말한 입은 사흘도 못가서 말한 것을 잊어버리지만 그것을 들은 귀는 그 들은 것을 천 년 동안 기억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따뜻한 말, 위로의 말 그리고 좋고 고운 말 한마디는 누군가의 가슴에 씨앗처럼 떨어져 위로와 용기로 싹트게 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늘나라의 왕자요 공주들이다. 성경은 성도들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택한 천국의 백성이며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리고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대사라고 말한다. 바울은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 1:27)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이기에 오히려 더 예의 바른 언어로 삶의 규모와 특성을 아름다운 입술의 말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아름답고 향기 있는 삶은 주님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려는 주님께 대한 애정 그리고 이웃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그리스도인의 덕을 세우려는 간절한 사랑에서만 비롯될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은 절대로 작은 말로라도 상처 주거나 무례히 행치 않아야 한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5.05.16 / 김용두 기자

    (159)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72>
  • 무례히 행함은 절대로 사랑이라 말할 수 없어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 교만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진정한 사랑은 절대로 무례히 행치 않는다. ‘무례히 행치 않는다’는 원어적으로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고전 7:36)라고도 번역되며 이것은 예의에 어긋난 거친 행동을 의미한다. 이를 토대로 원문을 다시 번역하면 ‘사랑은 다른 이에게 책망을 받을 만한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혹은 ‘사랑에 어울리지 않게 무례히 행치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사실 ‘무례한’ 행위는 자기를 높이기 위해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려는 마음 즉, 교만에서 나오는 행위이다. 그런 이유로 마음이 교만해 무례한 사람의 행동은 불의하고 불손하며 질서에서 이탈해 버릇없이 행하는 방자한 모습이다. 정말 나쁜 경우는 바로 자신보다 약한 자들에게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자기보다 강한 자들에게는 꼼짝하지도 못하면서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약하다고 생각되면 무례하게 행하는 사람은 진정 참된 사랑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안타깝게도 어떤 사람들은 입으로는 끊임없이 사랑을 외치면서 행동은 상대방을 무례히 대하며 고통을 주고 힘들게 하기도 한다. 그것은 스스로 자신만의 착각에 빠져 사랑이라는 허울 좋은 말로 자기를 합리화하며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괴롭히는 것이다. 어떤 이유로도 무례히 행하는 것은 사랑이라 말할 수 없다. 무례히 행함은 사실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겨준 본분과 위치 그리고 자리에 맞게 사랑을 나타내야 한다. 부모는 부모답게 자녀는 자녀답게 스승은 스승답게 제자는 제자답게 남편은 남편답게 아내는 아내답게 사랑하며, 목회자는 목회자로서 평신도를 사랑하며 평신도는 평신도로서 목회자를 사랑해야 한다. 무례히 행치 않는 사랑은 사랑 안에서의 질서를 의미한다. 사랑은 절대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정한 아가페 사랑은 놀라운 질서를 통해 드러난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으며”라는 말씀은 그래서 예의 바르고 정돈된 질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어가라는 중요한 요구이다. 이러한 모습은 모세를 통해 잘 드러난다. 출애굽기 33장 11절은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야훼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라고 기록한다. 하나님은 친구처럼 모세를 대하셨지만 모세는 단 한 번도 하나님께 대해 무례히 행치 않았다. 이처럼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는 이 세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매우 독특한 사랑의 관계이다. 그 사랑은 거룩한 두려움과 함께 공존하는 사랑이다. 죄인이며 피조물이라는 자기 위치를 지켜가며 하나님과 연합된 존재로서의 사랑을 누리는 이들이 바로 우리 성도들이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거룩한 삶을 살고,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를 항상 지켜 머물며, 올바른 방식으로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성도의 본분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5.04.1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기독교 설교자 열전
    찬가 설교의 대가 로마노스
  • 성경이나 교리 등을 시 형식으로 노래해 이영훈 목사의 설교에서도 그 흔적 발견 설교학자 다간은 방대한 분량의 책 『설교의 역사』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죽은 5세기 초부터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는 11세기까지의 시기를 설교 역사의 두 번째 기간으로 분류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이 시기는 거대한 제국 로마가 부패로 치닫고 있었고 그에 따라 미래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고 종말 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제국 로마의 멸망을 알리는 종소리가 저 멀리에서 들려오고 있었고 이제 온 유럽에 중세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사람 중의 하나가 동방교회 전통에 속해있던 로마노스(Romanos the Melodist)이다. 로마노스는 설교자라기보다는 콘타키온(Kontakion) 형식의 찬가 작곡자였다. 폴 스캇 윌슨은 설교 역사를 인물별로 정리하는 자신의 책 『그리스도 설교의 역사』에서 로마노스를 “동방교회 내의 시적인 설교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설교자요 모든 시대에 걸쳐서 위대한 종교적인 시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다(폴 스캇 윌슨, 『그리스도 설교의 역사』, 대한기독교서회, p 62). 로마노스를 설교자로 분류할 수 있는 이유는 콘타키온이 무엇인지를 살펴봄으로써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콘타키온은 비잔틴교회의 교회 전례음악으로 6세기경 콘스탄티노플에서 한창 발전했다. 성경 이야기나 교리를 운문(시) 형식으로 서술하는 장문의 찬가인 콘타키온은 성도들에게 성경 이야기, 교리, 성인들의 생애 등을 감성적이고 시적인 언어로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콘타키온의 구조는 서곡에 해당하는 프로이미온(prooimion)과 여러 개의 연으로 구성된 오이코이(oikoi)로 되어있다. 프로이미온은 1절로 된 짧은 도입부분으로 전체 주제를 요약해주고 계속되는 후렴구를 제시한다. 18개에서 24개의 연으로 구성된 오이코이는 각 연이 동일한 운율과 리듬 구조를 가지고 있고 프로이미온에서 소개된 후렴구를 사용함으로써 통일성을 유지한다. 현재에도 동방교회 전통의 교회에서는 콘타키온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전의 긴 형식 대신 서곡만을 부르는 경우가 많다. 다른 설교학자들과는 달리 폴 스캇 윌슨은 강단에서 행해진 설교뿐만 아니라 순교자의 죽음이나 찬가 역시 하나의 설교로 간주한다. 그런 이유에서 윌슨은 로마노스를 한 설교자로 분류하고 있다. 윌슨에 따르면 기독교 역사 속에서 운율과 박자에 따른 설교의 전통이 있어왔다. 165년 소아시아의 줄 사르디스의 멜리토(Bishop Melito of Sardis)가 발견한 ‘수난에 관한 설교’가 그 대표적인 예이며 아우구스티누스의 라틴어 설교 역시 운율, 박자, 평행법, 대조법, 모음을 통한 협음 만들기 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운율과 박자에 근거한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전승에 따르면 성가대원이었던 로마노스는 노래를 잘 부르지 못했다고 한다. 어느 성탄절 전야에 찬가를 불러야 했던 그는 성모 마리아에게 전심으로 기도하며 도움을 구했다. 그날 밤 꿈속에서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이 두루마리를 먹어라”라고 말했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두루마리를 입에 넣어 삼켰고 다음 날부터 놀라운 음성과 즉흥적인 찬송시를 만드는 능력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로마노스는 1000개 이상의 콘타키온을 썼지만 오직 59개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로마노스가 작곡한 콘타키온은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개인적인 삶에 대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특징은 당시 예술가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겸손한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그들의 작업이 교회에 속한 것이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작곡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윌슨은 추정한다. 둘째, 로마노스의 시적인 설교들은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보통 24개의 연으로 구성된 설교들은 행마다 하나의 해설이 곁들여졌고 어떤 경우는 각 행에 들어있는 음절의 숫자에까지도 해설이 덧붙여졌다. 셋째, 설교를 행하는 설교자는 음율과 박자에 맞추어 노래하면서 이야기를 진행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여러 등장인물을 다른 목소리로 표현해야 했다. 이렇게 여러 등장인물을 통해 성경과 교리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가르침도 전달됐다. 이렇게 진행되는 설교의 마무리 과정에서 “회중은 합창단이 그 설교의 중심 주제로 사용하는 동일한 후렴구를 최소한 25회나 반복해서 부르는 것을 들었고, 또한 그 회중도 합창단에 합세해서 따라 부르곤 했다”(『그리스도 설교의 역사』, p 65). 오늘날 로마노스가 행했던 찬가 설교는 찾기 어렵다. 그러나 그가 강조했던 감성적이고 이야기 중심의 설교 전통은 지금도 많은 설교자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이야기 중심의 설교, 감성을 자극하는 설교는 현대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게 하는 좋은 매개체가 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로마노스의 콘타키온의 마지막 부분에 회중들이 성가대와 함께 부르는 찬양을 자신의 설교에 적용하는 현대 설교자들도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는 설교 마지막 부분에 예화를 하고 이어 설교 주제에 맞는 찬송으로 설교를 마무리한다. 설교 후반부를 찬송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성도들이 지금까지 들은 설교의 내용을 되돌아보게 하고 그 내용을 따라 한 주간을 살아가도록 결단하게 한다. 로마노스의 찬가 설교의 흔적을 이영훈 목사의 설교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다. 조지훈 목사(한세대학교 설교학 교수)
  • 2025.05.09 / 이미나 기자

    교회의 역사는 설교의 역사라 할 수 있어
  • 김운용 교수 『한국교회 설교 역사』, 조용기 목사 다뤄 교회는 설교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베드로의 설교로부터 초대교회가 시작됐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에드워드 다간은 “기독교의 역사는 설교의 역사”라고까지 말했다. 이번 호에서는 그와 같은 기독교회의 설교 역사를 기록한 책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에드워드 다간(Edward Dargan)이 쓴 『설교의 역사』(A History of Preaching)일 것이다. 모두 2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1905년에 출판됐으며 무려 1200여 쪽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으로 교부들로부터 종교개혁 시기까지(1권, 70~1572년), 종교개혁 말기로부터 19세기까지(2권, 1572~1900년)의 설교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은 솔로몬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모두 3권으로 출간됐다. 스웨덴의 신학자이자 교회사 교수였던 잉베 브릴리오트(Yngve T. Brilioth)가 1945년에 쓴 『간략한 설교의 역사』(A Brief History of Preaching)라는 책도 있다. 1965년 영어로 번역된 이 책은 유대의 회당에서 시작된 설교로부터 초대교회의 설교, 헬라의 설교, 아우구스티누스의 설교, 중세 설교, 루터로부터 카르프조프(Carpzov)의 설교, 에큐메니칼적인 관점에서의 설교 연구(가톨릭교회 설교, 스위스 개혁주의 설교, 프랑스 개혁주의 설교, 청교도 전통의 설교, 미국의 설교, 성공회 설교)를 다루고 있다. 최근에 나온 설교 역사에 대한 책은 O. C. 에드워드 Jr.(O. C. Edwards Jr.)가 쓴 『설교의 역사』가 있다. 2004년에 출판된 이 책은 신약의 설교와 유대의 회당 설교로부터 시작해서 기독교 설교의 기원에 대해 살핀 후에 초대교부들의 설교, 중세 교회의 설교, 13~14세기의 설교, 르네상스로부터 계몽주의까지의 설교, 근대의 설교, 현대의 설교 등을 다루고 있다. 에드워드의 책은 기독교 설교의 시작을 2세기 이후, 곧 신약성경이 집대성된 이후로 잡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에 의하면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설교는 오늘날의 설교와 차이가 있는데 그 이유는 오늘날의 설교는 성경 해석을 근거로 행해지지만 신약성경의 설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설교를 이렇게 정의한다. “설교란 권위를 부여받은 설교자가 성경 구절에 근거한 교리에 대해 예배에 모인 기독교 청중들에게 말하는 것으로 설교자는 청중들이 자신의 설교 내용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근거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비유적인 이야기나 다양한 수사학적인 장치들을 사용한다.” 한편 그의 주장을 반박하며 다른 입장을 제시하는 학자들도 있다.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임마누엘 칼리지의 교수였던 폴 스캇 윌슨이 그런 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설교란 성경 해석 이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신약성경이 집대성되기 훨씬 이전부터 복음을 증거하는 기독교 설교는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폴 스캇 윌슨에게 예수님을 비롯해 복음을 전했던 사도들과 제자들은 이미 설교를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사도들이 보냈던 서신들 역시 하나의 설교라고 생각한다. 그 서신들은 수신자들의 교회와 교회가 당면하고 있던 문제를 복음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대안을 제시한 사도들의 설교라는 것이다. 에드워드의 책은 『교부들의 설교』(은혜출판사, 2017)라는 제목으로 번역됐다. 폴 스캇 윌슨 역시 설교 역사에 관한 책을 썼다. 이 책은 한신대에서 설교학을 가르친 김윤규 교수에 의해 『그리스도교 설교의 역사』(A Concise History of Preaching, 대한기독교서회, 2015)라는 제목으로 번역됐다. 이 책의 특징은 책 제목 그대로 기독교 설교 역사를 간략하게 인물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는 점이다. 또한, 신약성경을 하나의 설교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설교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를 살펴보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우리나라의 설교학자가 쓴 설교 역사에 관한 책 중에는 정장복 교수가 쓴 『인물로 본 설교의 역사』(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라는 책이 있다. 1986년 출판된 상권은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해서 미국의 찰스 그랜디슨 피니까지 인물별로 살펴보고, 1990년에 출판된 하권에서는 비이처를 비롯해 20세기 미국의 설교자들을 거쳐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까지 살펴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장신대 김운용 교수가 쓴 『한국교회 설교 역사』가 있다. 904쪽이나 되는 이 책에서 김 교수는 초창기 선교사들의 설교로부터 시작해서 일제 강점기의 설교, 해방 이후부터 1970년대의 설교, 1970년대 이후 교회 성장기의 설교 등을 인물로 살펴보고 있다. 이 책의 특징은 각 시대를 대표했던 설교자들의 삶과 설교를 잘 분석해놓았다는 점이다. 우리 교회 설립자이신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를 분석해 놓은 부분이 눈에 띈다. 조지훈 목사(한세대 설교학 교수)
  • 2025.04.18 / 이미나 기자

    아우구스티누스(Ⅳ)
  • 다양한 문장 반복으로 리듬감과 속도감 높여 질문과 대답 통해 청중과 대화 이끌어 현대 설교자들에게 설교학적 가르침 전달 지난 호에 이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설교를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설교가 그가 목회자로 안수 받았던 391년 성탄절에 행한 설교이다. 모두 세 개의 단락 ‘겸손한 자들은 하나님의 겸손을 굳게 붙들지어다’, ‘기뻐하라, 모든 그리스도인이여, 그리스도의 탄생일이라’, ‘그리스도의 두 탄생’으로 구성된 이 설교 중에 지난 호에서는 첫 번째 단락을 살펴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성탄절 설교의 두 번째 단락에서도 그의 수사학적 재능이 발현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가장 먼저는 짧은 문장들을 여럿 열거함으로써 설교의 속도감을 주는 부분이다. 두 번째 단락의 서두를 언급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남자들도 기뻐하고 여자들도 기뻐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각 성별이 영광을 받았습니다”라고 선포한다. 이런 짧은 문장이 연속해서 나옴으로써 청중들은 설교의 속도감을 느끼게 된다. 한편 짧은 문장들에 이어 등장하는 문장을 좀 더 길게 만듦으로서 앞에서 언급한 짧은 문장들이 하나로 정리되는 느낌이 들게 한다. 음악의 강약의 효과처럼 짧은 문장과 긴 문장을 의도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설교를 듣는 청중들이 문장을 통한 속도감과 리듬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반대되는 표현을 통해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스도가 남자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여자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남자[아담] 안에서 저주받은 모든 사람이 두 번째 남자[그리스도]에게로 오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죽음에 팔아넘긴 것은 여자[하와]였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준 것도 여자[마리아]였습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the likeness of the flesh of sin, 롬 8:3)이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죄의 육신(the flesh of sin)이 깨끗케 되고 정결케 되었습니다.” 이어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뻐하라’(rejoice)라는 선언구를 통해 거룩한 형제들, 거룩한 자매들을 언급한다. 여기서 거룩한 형제들은 결혼하지 않기로 서약한 사람들이다. 인간은 남녀의 결혼과 육체적 결합을 통해 태어나지만 예수님은 영적인 결혼, 곧 성령님을 통해 마리아에게서 잉태되고 태어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육신의 결혼을 포기한 사람들을 부르고 계신다. 거룩한 자매들이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동정을 잃지 않고 그리스도와 결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단락은 의로운 자들, 약하고 병든 자들, 종들, 자유로운 사람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기뻐하라는 권면을 함으로써 마감된다. 성탄절 설교의 마지막 단락은 “그리스도의 두 탄생”을 다룬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단락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이 갖는 영적인 의미와 육적인 의미를 언급한다. 그의 탄생은 한마디로 ‘역설’이다. 육체적으로 어머니에게 태어남으로서, 예수님은 그 날[성탄의 날]을 모든 세대에게 [선물로] 주셨으며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심으로서, 모든 세대를 창조하셨다. 그와 같은 탄생은 육신의 어머니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육신의 아버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육신의 어머니에게서 나셨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셨던 분인 것이다. 이어 아우구스티누스는 일련의 질문과 ‘혹은’(or)이라는 접속사를 통해 신성을 가지신 분으로서 예수님의 출생에 대해 말한다. “누가 그의 출생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사 53:8) 시간 밖에서 태어나신 분을, 혹은(or) 씨 없이 태어나신 분을? 시작이 없는 그 탄생을, 혹은(or) 전례 없는 이 탄생을?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없는 그 탄생을, 혹은(or)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던 이 탄생을? 끝이 없는 그 탄생을, 혹은(or) 시작이 곧 끝인 이 탄생을.” 세 번째 단락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님이 온전한 아이로 태어나신 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의 주인이신 그가 한 여인의 돌봄을 받으셨고, 우리의 존재 근원이신 그가 그녀의 품에 안기셨으며, 우리의 양식이신 그가 그녀의 젖을 빨고 계셨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의 그런 연약함과 경이로운 겸손 속에 ‘온전한 신성’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장은 그 아기 예수가 어머니 마리아보다 더 큰 분임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능하신 분이 자신에게 의존하는 어머니를 다스리고 계셨으며, 어머니의 젖을 먹으시면서도 진리로 그녀를 양육하고 계셨다.” 이상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성탄절 설교를 살펴보았다. 이 설교를 통해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뛰어난 설교자 이전에 작가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비록 그의 설교를 직접 들을 수는 없지만 그가 남긴 글을 보면서 우리는 그가 다양한 수사학적 표현을 사용했으며 이런 표현을 통해 청중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매우 효과적으로 전달했음을 알 수 있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우구스티누스는 현대 설교자들에게 설교학적으로 다양한 가르침과 테크닉을 전수해주고 있는 것이다. 조지훈 목사(한세대 설교학 교수)
  • 2025.03.14 / 이미나 기자

    기독교 렌즈로 보는 문화
    살아있는 예배로의 첫걸음 … 회중 찬송
  • 예배 중 성도들의 찬송이 대성전을 가득 메우는 순간은 언제나 감격스럽다. 찬송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선포하는 거룩한 예배 행위이다. 우리는 찬송을 통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사랑을 고백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회중 찬송’은 우리의 신앙고백이 더욱 풍성하고 아름답게 드러나는 방식이다. 각기 다른 삶의 자리에서 모인 우리가 한마음으로 찬송할 때 우리는 성령 안에서 연합하며 하나님 앞에 하나 된 공동체임을 드러내게 된다. 회중 찬송의 기원은 성경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미리암의 인도를 따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며 구원의 은혜에 응답했다(출 15장).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긴 후 레위 사람들을 세워 회중과 더불어 찬송하게 함으로써 예배 가운데 찬양을 공식화했다(대상 16장). 또한 이스라엘 백성은 매년 세 차례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며 시편을 함께 노래했다(시 120~134편). 초대교회 역시 함께 하나님을 찬미했고(행 2:47), 바울은 성도들에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권면하며 회중 찬송의 전통을 이어갔다(골 3:16).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부르는 찬양 속에 은혜의 감격과 공동체의 연합이 살아있음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그러나 교회 역사 속에서 회중 찬송의 자리는 위축되기도 했다.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교회는 제도화되며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지만 동시에 찬송 가사에 이단적 사상이 스며드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따라 4세기 라오디게아 공의회는 공인된 성가만을 허용하고 회중 찬송을 제한하는 조치를 내렸다. 이 결정은 이단 사상의 확산을 막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회중의 예배 참여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찬송은 성직자와 성가대의 전유물이 되었고, 일반 성도는 예배에서 소극적인 위치에 머물게 됐다. 이 흐름을 뒤흔든 것은 16세기 종교개혁이었다. 종교개혁의 핵심 취지 중 하나는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예배의 주체가 되는 회중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루터는 이 과정에서 음악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성도 중심의 음악을 적극적으로 추구했다. 그는 음악을 “신앙을 지키고 영혼을 맑게 하는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라 표현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음악을 통해 마음에 새겨질 때 믿음이 자라고 굳건해진다고 강조했다. 루터는 특히 성도들이 함께 찬송하며 열정적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가운데 이러한 유익이 더욱 커진다고 믿었다. 그래서 찬송의 주체를 다시 회중에게 돌려주고자 했고 그의 열정은 결국 독일 개신교의 대표적인 회중 찬송인 ‘코랄’(Chorale)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당시 예배에서는 라틴어로 된 그레고리안 성가가 사용되어 주로 성직자와 전문음악인만이 부를 수 있었다. 루터는 이러한 장벽을 허물기 위해 찬송의 가사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복잡한 다성 음악을 단순한 단선율로 개편하여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1524년 자신이 창작한 37곡의 코랄을 엮어 『기독교 가곡집』(Etliche Christliche Lieder)을 출간하면서 회중 찬송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그중 오늘날에도 널리 불리는 곡이 바로 새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Ein feste Burg ist unser Gott)이다. 종교개혁을 통해 회복된 회중 찬송은 단순히 음악에 참여하는 차원을 넘어 성도들이 예배의 주체로서 하나님 앞에 능동적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었다. 찬송을 통해 성도들은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마음에 새기며 더 깊은 신앙으로 자라났다. 나아가 회중 찬송은 성도 간의 연합을 북돋아 공동체 중심의 예배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지금까지 회중 찬송은 시대마다 문화와 언어를 달리하며 발전해왔고, 그 중심에는 늘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부르는 믿음의 노래’라는 본질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오늘날 자유롭게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은혜를 누리고 있다. 수많은 찬양곡이 넘쳐나는 가운데 회중 찬송은 여전히 교회 예배의 핵심 축을 이룬다. 그러나 때로는 찬송이 예배 전 의례적인 순서처럼 여겨지거나 의무적이고 습관적으로 불리는 현실도 부인할 수 없다. 이럴수록 우리는 회중 찬송의 의미와 가치를 마음에 새겨야 한다. 찬송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는 경건한 응답이며 살아있는 신앙고백이다. 함께 부르는 노래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되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로 묶인다. 찬송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믿음의 다리이자 세대를 넘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는 영적 유산이다. 이 귀한 유산을 소중히 지켜가며 찬송을 통해 예배가 살아나고 성령 안에서 하나 되는 연합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우리의 찬송이 대성전을 넘어 하늘에 닿아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이 되고 교회가 새롭게 되는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국제신학연구원>
  • 2025.05.1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고통의 십자가상
  • 라인란트(Rheinland)는 라인강 유역에 있는 독일 서부지역이다. 이 지역은 중세 근대 유럽의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 중 하나로 풍부한 문화와 역사적 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또한 유럽의 다양한 예술적 흐름을 받아들여 독창적인 스타일과 기법을 형성함으로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미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중세 후기 라인란트에서 만들어진 그리스도 수난상은 독특한 표현 방식으로 미술사에서 주목을 받았다. 전통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경건하고 신성하게 묘사되었으나 14세기와 15세기의 라인란트에서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고통을 강조한 십자가상이 유행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십자가형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제작되었지만, 라인란트에서는 열십자(十) 형태가 아닌 Y자 형태의 십자가상이 등장했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십자가상은 그리스도의 고통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하여 ‘고통의 십자가상’으로 불리게 되었다. 라인란트에서 ‘고통의 십자가상’이 만들어진 배경에는 당시의 종교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과 깊은 관련이 있다. 14세기 초 독일을 중심으로 기독교 신비주의 운동이 확산되었다. 이 흐름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으로 하인리히 수소(Heinrich Suso, 1295~1366)를 들 수 있다. 하인리히 수소가 태어난 13세기 말 독일은 극심한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교황과 황제 간의 대립이 심화되며 정치적으로 불안정했고 지진과 홍수 같은 자연재해와 흑사병의 유행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동시에 시민계급과 수공업자의 등장으로 사회 구조도 급속히 변화하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기독교 신비주의 운동이 큰 호응을 얻게 되었다. 이 운동은 도미니크 수도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수소는 13세의 나이에 이 수도회에 들어가 신학 공부에 매진하며 자신의 사상을 형성해 나갔다. 그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고 그 고통에 동참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중요하게 여겼다. 또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고귀한 표현으로 이해했고 금욕적인 생활과 육체적 고통을 통해 영적 깨달음을 추구했다. 14세기에 그의 사상이 독일 전역으로 확산하면서 성도들 역시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을 모방하고 참회의 삶을 실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는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권위 있고 위엄 있는 왕으로서의 그리스도보다는 고통 받는 인간의 모습으로서의 그리스도를 필요로 했던 시대적인 요구가 반영된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고통을 느끼며 그리스도와의 유대감을 강화하고 동시에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께 호소하려고 했다. 이것이 ‘고통의 십자가상’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이다. 라인란트의 ‘고통의 십자가상’ 중 대표적인 작품은 쾰른에 있는 성모 마리아 교회의 십자가상이다. 1304년경 제작된 이 작품은 독일에서 제작된 가장 초기의 Y자형 십자가 중 하나이다. 이 조각상에는 그리스도의 고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150㎝의 몸체에서 상체는 비율에 맞지 않게 과장되어 있다. 늑골은 앙상하게 드러나 있으며 채찍에 맞고 창에 찔린 상처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축 처진 머리로부터 가시관에 찔려 새어 나온 피가 얼굴 전체를 타고 흘러내린다. 힘겹게 미간을 찡그린 채 양 눈을 감고 겨우 숨을 쉬는 듯한 모습은 고통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가늠케 한다. 그리스도의 두 팔은 Y자형으로 높이 들어 올려진 채 못 박혀 있다. 이 자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상태를 더욱 고통스럽고 불안정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겉가죽이 벗겨진 손바닥을 관통하는 길고 두꺼운 대못은 보는 이로 하여금 처절한 고통을 실감하게 한다. 하체는 천 한 조각으로 간신히 가려져 있고 앙상한 두 다리는 하나의 못으로 고정되어 있다. 못이 박힌 발등 사이로는 갈라진 근육과 드러난 뼈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이 십자가상은 예배를 드리러 온 이들에게 강렬한 충격을 준다. 작품 앞에 선 사람들은 침묵 속에 깊은 묵상에 잠기거나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한참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온몸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하나님은 죄악 속에서 신음하며 괴로워하는 자녀들을 향한 사랑을 절대 멈추지 않으신다. 그리스도를 통해 십자가 위에서 확증하신 사랑은 우리의 자격이나 공로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우리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주신 것이다. 고난주간이 시작된다. 고통의 십자가상을 바라보며 하나뿐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되새겨보기를 바란다. 또한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묵상해보길 권한다. 우리의 죄인 됨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모든 죄와 허물을 대신 지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 깊이 잠길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뜨겁게 우리를 덮을 것이다. <국제신학연구원>
  • 2025.04.1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마태수난곡
  •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묵상하며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절기이다. 이 절기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부터 시작하여 부활절 전날까지 이어지는 40일간의 영적 여정이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하며 연단을 받았고,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며 사탄의 유혹을 이겨 내셨다. 이러한 성경적 배경에서 초대교회는 40일의 의미를 되새기며 금식과 기도, 회개 등의 영적 훈련을 실천했다. 오늘날에도 교회는 사순절이 되면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며 회개와 기도를 통해 경건한 시간을 보내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사순절 기간에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울림을 선사하는 음악이 있다. 바로 요한 세바스찬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의 ‘마태수난곡’(Matthaus-Passion)이다.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바흐는 독일 작센주 아이제나흐에서 교회 오르가니스트였던 요한 암부로지우스의 여덟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루터교 신앙에서 자란 그는 교회의 성가대원으로 시작하여 평생에 교회와 궁정에서 활동하며 1000곡 이상을 작곡했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던 바흐는 기독교 정통주의가 무너지는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음악이야말로 기독교적 경건을 가장 순수하게 표현할 수 있는 도구라고 믿었다. 이후 그는 독일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에서 음악 감독으로 활동하면서 성경을 바탕으로 신앙을 표현하는 음악을 만들어 기독교적 교훈을 전달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 이러한 신념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 1727년에 완성된 ‘마태수난곡’이다. 마태수난곡은 총 78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이 작품은 마태복음을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음악적으로 표현한 곡으로써 1부는 예수님이 체포되기 전까지의 이야기, 2부는 체포 이후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 곡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바흐가 예수님의 고난을 음악적으로 섬세하게 묘사했다는 것이다. 이 곡은 예수님의 두려움과 고통, 슬픔과 죽음을 나타내는 구절이 등장할 때마다 불협화음과 반음계적 진행을 사용하여 불안감과 애절함을 극대화한다. 예수님이 채찍질 당하는 장면에서는 날카로운 부점 리듬을 활용하여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의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하며, 천둥과 번개가 치는 장면에서는 빠른 연주를 통해 긴장감을 조성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시거나 등장인물의 독백이 있는 대목에서는 현악기가 은은하게 깔리면서 마치 후광이 비치는 듯한 효과를 연출한다. 예를 들어 마태수난곡 78곡 중 제47곡 아리아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뒤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는 장면이 애절한 바이올린 선율과 함께 알토의 아리아(오케스트라의 반주가 있는 서정적 독창곡)로 시작된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Erbarme dich Mein Gott) 나 이렇게 눈물 흘리고 있나이다 (um meiner Zahren willen) 나를 보시옵소서 (Schaue hier) 당신 앞에서 애통하게 울고 있는 (Herz und Auge weint vor dir) 나의 마음과 눈동자를 보시옵소서 (Bitterlich) 계속해서 반복되는 이 아리아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더 이상 예수님 앞에 설 수 없다고 느끼며, 하나님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베드로의 마음이 청중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베드로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결국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고 닭이 울자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베드로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아마도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눅 22:61)라는 말씀이 가장 먼저 떠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마음 깊이 다가온 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기도하셨다는 말씀이었을지도 모른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눅 22:31~32). 베드로는 자신이 실패하여 넘어지는 순간에도 예수님이 자신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다는 사실이 생각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을 끝까지 붙들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온전히 경험하게 되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깨어지고 상한 심령으로 애통해하며 눈물로 참된 회개를 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마태수난곡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묵상하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해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의 죄를 덮어주시고 실패하여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주시는 예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를 풍성히 경험하는 사순절이 되기를 소망한다. <국제신학연구원>
  • 2025.03.2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선교 뉴스
    신요셉 선교사, A국 파송
  • 재단법인 순복음선교회 이사장 이영훈 목사는 22일 주일 3부 예배 시간에 A국으로 파송되는 신요셉 선교사에게 파송장을 수여하고 안수했다. 이영훈 목사는 신요셉 선교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인 복음 전파에 힘써줄 것을 당부하며 축복했다.
  • 2025.06.27 / 오정선 기자

    ‘순복음세계선교대회’ 열린다
  • 전 세계에 흩어져 복음을 전파하는 순복음의 선교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성도들과 펼치는 선교축제인 제51회 순복음세계선교대회(이하 선교대회)가 25~27일 우리 교회와 강원도 홍천 소노벨비발디에서 개최된다. ‘오직 말씀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성령으로’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선교대회는 25일 대성전에서 본 대회가 진행된다. 그레이스선교사찬양팀의 찬양으로 시작되는 예배는 총회별 선교사 입장, 이영훈 담임목사의 설교, 김용만 선교사(순복음CIS총회장)의 선교 보고, 우수 선교사 및 공헌·근속상, 감사패 수여 등이 있다. 선교대회 후에는 소노벨비발디에서 수련회가 열린다. 이영훈 목사를 비롯해 양승호 부목사(목회)와 이장균(순복음강남교회)·류영모(한소망교회 원로)·엄태욱(여의도순복음광명교회)·정홍은(순복음성동교회)·신장환(AI연구소 대표) 목사, 이유경(숭실사이버대) 교수, 정유나(탈북 방송인) 자매 등이 강사로 초청된다. 같은 장소에서는 선교사 자녀캠프도 진행된다. 선교대회는 27일 우리 교회 대성전에서 ‘다음 세대와 선교사가 함께하는 금요성령대망회’로 마무리 된다. 현재 우리 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는 67개국 673명에 이른다.
  • 2025.06.20 / 오정선 기자

    선교위원회·제자교회 등 2억 6천만원 후원 
  • 제51회 순복음세계선교대회를 앞두고 17일 우리 교회 선교위원회와 순복음강남교회를 비롯한 제자교회가 연합으로 총 2억 6000만원 선교후원금을 이영훈 담임목사에게 전달했다. 여의도 페어몬트 앰배서더 서울 스펙트럼에서 진행된 전달식에서 이영훈 목사는 “선교는 교회의 존재 목적이며 선교하는 교회가 부흥하고 선교하는 나라가 부강한다”고 말했다. 성경적 가치관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당부한 이영훈 목사는 “복음 전하는 일에는 타협이 없다. 우리의 모든 재능을 다해 복음 전하는 일에 앞장서자”며 올해 선교대회에 관심을 가지고 한마음으로 동참해줄 것을 당부했다.
  • 2025.06.20 / 오정선 기자

    선교지 소식
    김경 선교사(캄보디아)
  • 소망 없던 곳이 순복음 4차원의 영성으로 변화 “예수님 안에서 할 수 있다” 날마다 외치는 아이들 교회 개척, 교육 통해 지역 사회에 꿈과 비전 선포 샬롬! 캄보디아에서 사역하고 있는 김경 선교사입니다. 저희는 캄보디아 수도인 프놈펜에서 남동쪽으로 자동차로 2시간 거리인 쁘레이벵(Prey veng)에 살며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쁘레이벵은 캄보디아의 25개주 중에서 가난하기로 1, 2위를 다투는 곳입니다. 지금 캄보디아는 수도 프놈펜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성장하고 있지만 이곳 쁘레이벵은 우리나라의 1980년대의 모습과 흡사한 전형적인 시골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선임 선교사를 통해 2008년, 2012년, 2013년 이곳에 각각의 교회를 세우게 하셨고, 2016년도에 저를 2대 담임 사역자로 부르시고 이 세 교회가 더 든든히 서 가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저희를 통해 가정 형편이 어렵고 학교가 없는 깊은 마을에 사는 청소년들에게 숙식과 학비를 지원하고 함께 학사공동체를 이루며 신앙 훈련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를 양성해 가도록 하셨습니다. 2020년에는 요셉비전센터도 설립하게 하셨습니다. 요셉비전센터는 유치원과 컴퓨터교실 그리고 유·초·중등생을 중심으로 한 ‘방과 후 교실’을 운영하며 복음의 훌륭한 접촉점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사역, 요셉비전센터, 학사사역 등을 통해 3개 교회의 부흥과 완전한 자립 그리고 이양을 위해 진력하고 있습니다. (유치원 사역 모습) (컴퓨터교실 및 학사 사역 통해 배움을 이어가는 아이들) 처음 이곳에 와서 선교를 시작할 때 소망이 없고 꿈이 없는 학생들의 모습 그리고 생활고에 시달리며 예배를 떠나서 돈벌이에 더 집착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믿음이 자라가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학사 아이를 “돈을 벌어야 한다”며 데려가는 아버지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자녀가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도록 가르치기보다 공장에 취업하거나 일찍 결혼해 가정 경제에 도움이 되길 바라는 것이 당시 이곳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가슴이 참 먹먹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꿈과 비전을 갖도록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순복음의 바라봄의 법칙 그리고 ‘말과 생각’에 대한 설교를 들려주며 큰 꿈을 꾸고 늘 긍정적인 말만 선포하도록 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등·하교 때, 외출할 때 그리고 수시로 크게 선포하는 말이 있습니다. “크뇸 앗 트붜반 크농 쁘레아 예수!”(I can do it in the Jesus! 예수님 안에서 나는 할 수 있다)라는 믿음의 선포입니다. 그 결과 지금까지 우리 학사 아이들은 고등학교 졸업시험에 한 명도 떨어지지 않았고 프놈펜국립대학교 컴퓨터학과, 교육학과 등에 진학해 꿈을 향해 열심히 도전하고 있습니다. 교회 마당을 지나 요셉비전센터 안에 들어서면 유치원과 컴퓨터센터가 있습니다. 매일 아침 유치원 아이들의 예배와 웃음소리가 가득하고 오후에는 방과 후 교실과 컴퓨터 수업을 받는 아이들의 소리로 가득합니다. 매일 아침 모든 유치원생은 ‘생각, 믿음, 꿈, 말’이라고 크게 쓰여 있는 현수막 앞에 다 함께 모여 큰 소리로 표어를 외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아이들은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기 전 다시 한번 “생각을 바꾸자” “예수님 안에서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자” “큰 꿈을 꾸자” “늘 긍정적인 말을 선포하자”라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이 외침이 영적인 선포가 되고 그 생각과 말들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나아갑니다. (매일 '생각 꿈 믿음 말'을 선포하는 아이들) 우리 유치원이 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나면서는 옆 동네에서도 많은 아이가 오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어려움이 있었지만 주님은 우리가 환경을 딛고 일어서게 하셨고 지금은 교회가 부흥돼 하나님의 은혜로 매주일 3개 교회와 4개 마을에서 어린이 예배가 열리고 있습니다. 또 주중 6개 마을에서는 어른 예배가 드려지고 있습니다. 부족한 종을 들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의 눈물이 납니다. 교회들이 순복음의 영성으로 충만해지고 든든해지도록 기도해주십시오. 교회의 자립과 지속적인 교회 개척, 이를 위해 제자들이 더욱 양성되도록 중보를 요청드립니다. 요셉비전센터와 학사사역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제자들이 교사로 섬기고 있는 ‘참지식유치원’의 자립을 위해서도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또 열악한 지역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꿈과 비전을 줄 수 있도록 제2, 제3, 제4의 유치원이 세워지길 소망합니다. 끝으로 가족의 건강과 사역자들의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 2025.05.30 / 오정선 기자

    박창용 목사(미국)
  • 미국 중남부 위치한 엘파소순복음교회, 순복음 깃발 날리다 군인 가정 등 현지인 복음화 위해 복음의 씨앗 뿌려 구원의 역사 위해 성령의 바람 불길 간절히 기대 미국 중남부 텍사스 주에 위치한 엘파소순복음교회는 1986년 4월 3일 엘파소 지역에 소속된 미국 순복음교회를 빌려 김덕우 목사님과 일곱 명의 성도가 함께 개척한 교회입니다. 특별히 엘파소순복음교회는 1994년 10월 24일 조용기 목사님을 초청해 일일 부흥성회를 개최했습니다. 먼 곳까지 찾아와 주신 조용기 목사님의 헌신과 기도로 엘파소순복음교회는 척박한 사막 같은 엘파소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엘파소순복음교회 4대 담임목사로 부름 받은 저는 2016년 5월 4일 수요예배 시간에 이영훈 담임목사님의 안수기도를 받고 이곳으로 파송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했던 엘파소순복음교회에 예배와 말씀을 통해 크게 응답하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신앙과 예배, 말씀 중심으로 사역하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2018년 여름, 순복음강북교회 선교팀과 엘파소 지역교회 성도들이 함께 엘파소 지역교회 연합부흥회를 드렸습니다. 놀라운 것은 2018년 엘파소 교회협의회 연합부흥회 가운데 주신 성령의 은혜가 2019년과 2020년에 멕시코 아메리카 부흥회로 이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엘파소 지역에 있는 멕시코 아메리카 성도들이 한 자리에 모인 부흥회가 우리 교회에서 진행됐는데 성령의 충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배와 말씀, 기도는 엘파소순복음교회의 중심이 되었고 성장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2020년부터 2023년까지 팬데믹의 어려운 환경에서도 엘파소순복음교회는 예배 중심의 사역으로 나아갔습니다. 텍사스 주 명령으로 4주 동안 강제적으로 교회의 문을 닫아야만 했고 그 이후에는 개교회의 자율에 맡겼는데 대부분의 미국 교회 분위기가 온라인으로만 예배를 드리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대로 온라인 예배를 드리다가는 교회의 문을 닫을 것만 같아 안전한 현장을 만들어 예배를 드려야겠다고 결심하던 차에 한 권사님이 ‘현장 예배의 문을 열면 참여하겠다’라고 용기 있게 건의하셨습니다. 성전이 큰 덕에 지정 좌석을 만들며 예배만 드리자 성도들의 믿음도 성장했습니다. 엘파소순복음교회가 있는 엘파소 지역은 ‘포트 블리스’(Fort Bliss)라는 미 육군에서 가장 큰 군사 훈련 단지가 있습니다. 미국 국적을 가진 한인 군인들이 작게는 몇 개월, 길게는 3년 동안 이 곳에 머무는데 교회는 발령받아 온 한인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교회의 중심을 이루는 성도 상당수도 미군 은퇴 가족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군인 가정 복음화를 위해 새로 입교하는 가정을 위한 베이비 샤워, 헌아식, 친교와 성경 공부로 군인 가족간의 단합과 성장을 돕고 있습니다. 다른 곳으로 발령 받아 떠나는 군인들에게는 파송식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군인 가정들이 엘파소순복음교회와 연합해 신앙 안에서 성장하며 선교하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도록 순복음 성도들에게 중보기도를 요청드립니다. 다음 세대 부흥을 위해 힘쓰고 있는 우리 교회는 2024년 7월 26일부터 지역의 크리스천 학교와 계약을 맺고 연합해 차세대 기독인을 양성하는 학원 선교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기도로 세상에서 빛나는 아이들을 양육하는 학교가 될 수 있도록 이 또한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엘파소순복음교회를 통해 엘파소 지역의 잃어버린 영혼들과 이 지역에 유입되는 한인 국제 가정에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복음을 전해져 구원받는 백성들이 많아지도록 기도해주시기를 간절히 요청드립니다. 엘파소순복음교회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영적인 건강함을 유지하며 미자립 교회를 지속적으로 돕는 등 주님께서 명하신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2025.05.02 / 오정선 기자

    홍정연 선교사(대만)
  • 대만 복음화, 다음 세대 영적 부흥 위한 기도 요청 1872년 캐나다 선교사가 북부지역에 복음 전파 고령화 시대 대비 선교 전략…‘원더풀 사역’ 저는 대만 북부 단수이에서 단수이순복음교회(淡水純福音敎會)를 섬기고 있는 홍정연 선교사입니다. 단수이는 대만 선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도시로 153년 전(1872년), 캐나다 국적의 맥케이(George Leslie Mackay) 선교사가 단수이를 중심으로 북부 지역에 복음을 전하며 병원과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대만 사람들의 삶과 신앙에 깊이 남아 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님을 따라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분명한 사명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막연하게나마 중국어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대학에서 중문을 전공했습니다. 대학 시절 CAM 대학선교회 수련회에서 뜨겁게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며 그때 선교사로서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이후 세 차례 대만 단기 선교를 통해 비로소 하나님께서 저를 중화권 선교에 사용하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대만으로 어학연수를 오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지금의 대만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습니다. 2004년 남편과 저는 함께 첫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리고 2017년 지금의 단수이순복음교회를 개척해 섬기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고령화 사회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데 대만도 예외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실버 세대는 복음에 대한 마음이 굳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중년층을 집중적으로 전도 대상으로 삼아, 그들이 인생을 돌아보고 앞날을 준비하는 시기에 자연스럽게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전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전 아래 ‘원더풀(Wonderful)’ 모임을 만들어 시니어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을 모르는 시니어들이 자연스럽게 교회 안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 교회는 원더풀 사역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 한편 성도들에게는 성경 공부와 일대일 제자훈련을 통해 영적 성장을 돕고 있고 주어진 환경에서 최대한 다음 세대를 잘 양육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직 한 가지 바람은 우상숭배가 전통이 되고 문화가 된 대만 땅에서 많은 사람이 복음을 접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단수이 지역의 더 많은 사람이 교회로 오기를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또 단수이순복음교회의 영적 부흥과 성장을 위해, 원더풀 사역이 더 확장될 수 있도록, 필요한 재정이 채워지게 성도님들이 중보기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2025.04.04 / 오정선 기자

    선교사를 위한 중보 기도
    허광명 선교사(인도네시아)
  • - 기독교 학교 건축이 내년까지 순탄하게 진행되도록 - 주변의 반대로 인해 학사 일정에 문제가 없도록 - 학교에서 예배드리는 것에 문제가 없도록 - 7월 14일 입학식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 2025.06.27 / 오정선 기자

    중동 지역 평화를 위한 기도
  • 이스라엘과 이란의 갈등이 해결돼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지 않도록, 중동 지역의 안정과 회복을 위해, 전쟁의 소식이 들리지 않도록 중보기도를 요청합니다.
  • 2025.06.20 / 오정선 기자

    오재웅 선교사(호주) 
  • -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예배의 능력이 살아나는 퍼스순복음교회 되도록 - 교회의 폭발적 부흥, 잃었던 모든 양들이 돌아오도록 -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인도와 돌보심이 있기를
  • 2025.06.13 / 오정선 기자

    순복음영성스케치
    기도의 종류(Ⅳ) - 중보 기도
  • 세계적인 설교자 찰스 스펄전 목사는 “위대한 일을 행하실 때마다 하나님은 먼저 기도의 사람을 세우신다”고 말했다. 그가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본인 스스로가 기도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며, 특히 그를 위해 중보하며 기도하던 무명의 기도 동역자들의 영적 지원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 역시 그의 사역에 있어 중보 기도의 능력을 인정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만 사랑하는 기도의 사람 백 명을 원했다고 한다. 타인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기도하고 연약함과 어려움을 지탱해주고자 하는 중보 기도는 영적 지도자를 위한 중보 기도로 이어질 때 더욱 강한 능력으로 나타난다. 1. 중보의 의미와 예수 그리스도 중보(intercession)의 문자적 의미는 ‘사이에 나아가다’, ‘상치하는 양자를 화해하기 위해 행동하다’의 의미가 있으며 법정에서 의뢰인을 돕는 변호사나 법률적 행위를 대신해주는 대리인의 개념을 갖고 있다. 요한복음 1장 18절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증거하고 있는데, 앞선 중보의 개념에 따르면 예수님이 하나님과 인간을 중보하는 최고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은 지금도 성령님을 통하여 계속되고 있으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 기도할 때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도와주신다. 2. 예수님의 중보 기도와 훈련 모델 능력 있는 중보 기도자가 되고자 소원하는 사람은 단연코 최고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한 명의 중보 기도자가 세워지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중보 기도자로서의 소원과 결심이 있어야 하며 더 나아가 훈련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의 최우선 순위는 기도였는데 어떠한 때에 기도하셨는지를 알아보면 중보 기도자로 서는 훈련에 도움이 될 수 있다. (1)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침례를 받으실 때 기도하셨다(눅 3:21~22). (2) 사람들에게 인정받던 전성기 때에 많이 기도하셨다. (3) 진리에 대한 계시가 필요할 때 기도하셨다. (4) 제자들을 선택하고 훈련하실 때 기도하셨다. (5) 사랑과 용서가 필요할 때 기도하셨다. 3. 중보 기도의 올바른 태도 중보 기도자로서 훈련을 받고자 하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훈련 방법은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매일 일정한 시간을 내어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 증진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아래의 5가지 올바른 태도를 유지하기만 해도 효과적인 중보 기도자로 설 수 있다. (1) 자발적으로 중보 기도하라 억지로 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가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이다. (2) 구체적으로 중보 기도하라 중언 부언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마 6:7). 구체적인 기도는 응답을 통하여 능력을 체험하는 통로가 된다. (3) 올바르게 중보하며 구하라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고 정당한 것을 구해야 한다. 응답이 올 때까지 찾고 두드리는 실행의 과정을 능동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4) 전심으로 중보하며 구하라 두 마음을 품는 것을 하나님은 싫어하신다(약 1:8). 이런저런 생각이 많으면 기도에 집중하기 어렵다. 마음이 분산되는 것을 막는 실제적인 방법은 크게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이다. (5) 쉬지 말고 중보 기도하라 기도는 호흡이요 습관이 되어야 한다. 한꺼번에 일시적으로 많은 기도를 드리는 것보다는 매일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자주 드리는 기도가 효과적이다. 4. 영적 지도자를 위한 중보 기도 중보 기도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 지도자를 위한 기도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지도자를 판단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을 갖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시 66:18). 그리고 아래와 같이 영적 지도자의 영성과 생활과 사역의 3가지 영역에서 중보하며 기도하면 사역에 큰 능력이 나타난다. (1) 영성을 위하여(마음의 짐을 덜어주는 기도) 지도자의 위치에서 듣게 되는 비난과 겪게 되는 억울한 일들을 견디고 이길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2) 생활을 위하여(개인적인 삶을 위한 기도)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추구하며, 행복한 가정의 모범이 되고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도록 기도해야 한다. (3) 사역을 위하여(사명 감당을 위한 기도) 교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는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끝까지 사명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귀한 뜻을 이루어 가야 한다. 성도들은 영적 지도자의 권위에 순종하고 그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하나되게 하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끝> 김현동 선임목사(교무국 기도처지원팀)
  • 2023.12.2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기도의 종류(Ⅲ) - 방언 기도
  • 올해는 우리 교회가 속한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교단이 창립한 지 70년이 되는 해로서 한국의 복음화를 위한 오순절 운동을 되돌아보게 한다. 오순절 운동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의 생명력을 회복시키려는 운동으로서 성령 침례의 결과가 방언, 신유, 능력으로 나타남을 강조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도 성령 충만과 방언 기도를 강조해 왔고, 이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신유 사역과 사회 참여를 통하여 세계 최대의 교회로 성장했다. 오늘은 우리 교회와 교단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 부흥의 큰 원동력이 된 방언 기도에 대해 알아보고, 방언 기도를 통해 성령 충만의 영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다짐의 시간이 되기를 기도한다. 1. 방언 기도의 의미와 성경 상의 언급 방언 기도는 영적인 언어로 말하는 기도로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통을 가능하게 하며 개인 신앙 발전에 큰 유익을 주는 기도이다. 방언은 성령 침례의 외적 증거이며 성경 많은 곳에서 성령 침례의 표적으로 나타난 방언 기도의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의 임재(행 2:1~4), 둘째는 베드로가 고넬료와 집안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을 때의 성령의 임재(행 10:44~46), 덧붙여 바울이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안수할 때의 성령의 임재(행 19:5~6)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2. 현대 오순절 운동과 방언 기도 성경 상에 등장하였던 방언 기도는 20세기 초 현대 오순절 운동에서 재발견된다. 1901년에 감리교 목사 찰스 팔함(Charles F. Parham)은 그가 가르치는 신학교 학생들과 함께 성경을 철저히 연구하던 중, ‘방언이 성령 침례의 최초의 증거’임을 깨닫게 된다. 이들은 이렇게 발견한 말씀의 내용을 철저히 믿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 침례와 방언을 체험하게 되었고 이것이 현대 오순절 운동의 시작이다. 이어 방언 기도를 강조하는 오순절 운동은 1906년 윌리엄 시무어(William J. Seymour)의 아주사 부흥으로 이어졌다. 방언과 방언 통역, 예언, 축사, 신유 등이 강력하게 나타났던 아주사 거리 집회는 무려 3년이나 지속되며 기도의 불길을 이어갔다. 3. 방언 기도의 유익 성령 침례의 최초의 증거로서 방언 기도는 다음과 같은 유익을 가져다준다. (1) 방언 기도는 성령 충만의 확신을 준다. 성경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방언)로 말하기를 시작하였다고 증거하고 있다(행 2:4). 한편 믿는 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한다고 분명히 적고 있다(막 16:17). 성령 침례를 받으면 방언이라는 표적을 통하여 분명하게 성령 충만의 증거를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방언 기도를 한다는 것은 기도하는 자에게나 듣는 자에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성령 충만의 확신을 가져다준다. (2) 방언 기도는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통을 나누는 비밀한 언어이다. 방언 기도에 대해 비교적 많은 언급을 하고 있는 고린도전서에서는 방언을 하나님과 비밀한 영적 교통을 나누는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 14:2)고 하면서 또한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고전 14:14)라고 증거하고 있다. 이러한 방언 기도는 하나님과 비밀의 기도이기 때문에 사탄도 알아듣지 못한다. (3) 방언 기도는 자기 신앙의 덕을 세운다. 성경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운다(고전 14:4)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덕’을 세운다는 것의 원어적 의미는 ‘집을 지어 올라간다’는 의미가 있다. 우리는 방언 기도를 통하여 마치 집을 짓듯이 우리의 신앙을 더욱 견고히 할 수 있다. (4) 방언 기도는 마음을 부정적인 상태에서 해방시켜준다. 방언으로 기도하면 우리의 잠재 의식 속에 있는 모든 불안, 초조, 절망, 미움, 원한, 상처 입은 것을 깨끗이 청산해 준다. 마음의 공간이 방언 기도를 통하여 깨끗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부정적인 상태에서 해방되어 절대긍정의 마음으로 변화 된다. (5) 방언 기도는 연약함을 돕는 탄식의 기도이다. 성경은 성령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하고 있다(롬 8:26~27). 방언 기도를 통하여 탄식하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6) 방언은 깊고 오랜 기도를 가능하게 한다 고린도전서 14장 15절에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 증거하고 있다.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기 위해서는 기도의 시간이 길어야 한다. 방언 기도는 기도의 언어로서 기도를 오래 할 수 있게 하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코로나19 엔데믹 선언 이후인 지금은 성도 개개인이 기도를 통해 성령 충만한 영성을 회복하고 교회 내외적으로 전례 없는 부흥을 꿈꾸어야 할 때이다. 이러한 때에 우리 교회 성령 충만과 부흥의 토대가 된 오랜 시간의 깊은 방언 기도를 회복하는 것은 교회와 성도 모두가 부흥으로 향하는 최선의 지름길을 제공해 줄 것이다. 김현동 선임목사(목회자제직훈련소)
  • 2023.11.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기도의 종류(Ⅱ): 대적 기도
  • 그리스도인들에게 악한 영들과의 영적 전쟁은 선택 사항이 아닌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과정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영적 전쟁에 대해 무의미하게 여기거나 막연히 신비적인 것이라고 오해하곤 한다. 그러나 영적 전쟁은 성경 여러 곳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으며 오늘날도 실제적으로 많은 이들에 의해 체험되고 있다. 이러한 영적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대적 기도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신 권세(창 3:15)에 힘입어 선포하는 대적 기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 대적 기도의 의미와 특징 대적 기도는 문자 그대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권세에 힘입어 악한 영들에게 명령하고 선포하는 기도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도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의 형식이지만 대적 기도는 악한 영들에 대한 것으로 간구가 아닌 명령과 선포의 형태를 지닌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는 권세를 주셨다(눅 10:19). 이 말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악한 영들을 대적함으로써 승리하였던 것과 같이 오늘날 우리들도 예수님이 주신 권세와 능력을 믿고 명령하며 선포함으로써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2. 성경에 나타난 대적 기도 성경은 영적 전쟁을 실제적으로 묘사하면서 대적 기도의 상대인 악한 영들과 이들을 어떻게 상대하여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1) 대적 기도의 대상 성경은 우리가 물리쳐야 할 대상에 대해 직접적으로 ‘대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하거나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고 말한다. 이러한 성경의 언급을 통해 우리의 대적이 바로 ‘마귀’임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2) 대적 기도의 사례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는 방법(막 9:25)과 명하여 내어 쫓는 방법(눅 8:29)을 통하여 대적 기도를 행하셨다. 바울은 이러한 예수님의 권세에 힘입어 빌립보의 귀신 들린 여종을 향하여 명하였고, 귀신은 즉시 나오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행 16:18)는 명령과 선포는 오늘날 대적 기도의 대표적인 형태로 활용되고 있다. 3. 대적 기도의 방법 대적 기도는 보이지 않는 적과의 영적 대결이므로 마치 전쟁터에서 배수의 진을 친 것과 같은 비장한 각오로 준비하고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기도해야 한다. (1) 보혈을 의지하는 기도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예수님의 보혈에 대한 예표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음에서 보호하실 것에 대한 약속이었다(출 12:13).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친히 흘려주신 보혈의 권세를 갖고 있으므로, 보혈에 의지하는 기도는 마귀에게 대적하는 가장 큰 기초가 된다.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는 우리들은 매일 같이 마귀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데 특별히 개인의 감정과 사회적 관계 그리고 환경 가운데 보혈을 뿌리며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2) 예수 이름의 권세를 의지하는 기도 예수님이 이 땅에 성육신하시어 오신 이유는 우리의 상실한 권세를 회복해 주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셨으나 부활하셔서 승리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히 8:1). 이러한 예수님의 권세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됨과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요 1:12). 성경은 예수님의 권세에 의지할 때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하였고(마 16:18), 매고 푸는 권세가 있어서 마귀들을 묶고 포로된 자들을 구원하는 권세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마 16:19). (3)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갖는 기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이긴 싸움을 싸우는 중이다. 그러나 아직 대적의 수중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겼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패배 의식에 빠지고 좌절과 낙심 가운데 살아가게 된다. 우리는 대장 되신 예수님이 죽음을 정복하셨고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주셨으며, 흉악과 결박에서 놓임 받게 해주심을 굳게 믿고 마귀를 대적하며 기도해야 한다. 4. 대적 기도의 실제와 유익 대적 기도를 통하여 의심, 두려움, 교만, 불안, 낙심과 염려 등 마음의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사라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대적 기도는 육체의 치유와 믿음의 회복도 가져다준다. 우리는 각종 암, 우울증, 중풍, 고혈압, 당뇨병, 만성 피로 등 육체의 질병에 대해 꾸짖고 명령하고 선포하여 승리할 수 있고, 영적 성장과 신앙생활에 방해를 주는 악한 영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대적하며 기도할 수 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노니, 사람의 육체와 정신과 영혼을 괴롭히는 악한 원수 마귀야! 지금 즉시 하나님의 자녀에게서 떠나갈지어다!” 이러한 선포를 통하여도 우리는 마귀와 효과적으로 대결하고 영적 전쟁의 승리에 다가설 수 있다. 김현동 선임목사(목회자제직훈련소)
  • 2023.10.2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구속사적 성경읽기
    (19)영적 무장을 위한 3대 신앙
  •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로 했다면 영적 전쟁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영적 무장이다. 영적 무장이 없이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전쟁에 임하는 병사가 무장 없이 맨몸으로 나서는 법이 없듯이 영적 전쟁에서도 영적 무장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번 시간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무장, 곧 3가지 신앙적 무장에 대해서 알아보자. 1. 창조 신앙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자 우리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장본인이시다. 이 세상 모든 만물 가운데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아무리 과학이 하나님을 배제하고 진화론과 같은 이론으로 이 세상을 설명하려고 해도 그런 과학은 극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다음과 같은 우화가 있다. 어느 날 과학자 한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와 말했다. “우리 과학이 발전해 흙으로 사람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과학이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다 할 수 있다는 의미죠.” 하나님이 답하셨다. “정말 그러한가? 그렇다면 네 말대로 흙으로 사람을 만들어 보아라. 대신 네 흙으로 해라.” 이 우화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생명의 근원, 우주의 근원은 밝혀낼 수 없다는 것이다. 생명의 근원, 우주의 근원은 어디 있는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셨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2:1~2).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렇다면 창조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 달리 말해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 영광을 올려 드리며 살아야 한다. 2. 십자가 신앙 예수님의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은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함을 얻으며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축복을 얻은 것이다. 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말했다.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마르틴 루터는 이 말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어야 함을 천명한 것이다. 달리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빼놓고서는 기독교 신앙을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갈라디아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3~14). 예수님이 율법이 정한 대로 나무에 달려 죽는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우리를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브라함의 복과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셨다. 그렇다면 십자가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담대한 복음 증거자가 되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세상 앞에 절대로 주눅 들지 않는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만큼 나를 사랑하셨고 모든 저주의 굴레에서 해방하셨다. 또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우리가 삶의 형편과 조건, 세상의 시선에 위축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3. 부활 신앙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은 부활 신앙에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정사실이다. 그 증거가 무엇일까? 첫째,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 둘째, 부활의 목격자들이 있다. 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4~8). 특히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당하실 때 비겁한 도망자들이 되었던 제자들이 어떻게 다시 그 예수님을 전하다 순교자까지 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부활이 거짓일 수 없는 이유다. 물론 이런 증거에도 부활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셋째, 부활이 거짓이라면 그 거짓이 2000년 넘게 지속될 수 있었을까? 수없이 많은 사람이 그 거짓에 자기 목숨을 걸 수 있었겠으며 자기 인생을 헌신해 가며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을까? 부활은 사실이고 진리이다. 그렇다면 부활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결단코 세상에 얽매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안개처럼 쉽게 사라지는 인생길을 걷고 있으며 잠시 왔다가 떠날 나그네 인생을 살고 있다. 이 세상은 우리 삶의 종착지가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단기 선교 온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다. 바울 사도는 말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이 세상에 얽매여 잠시 잠깐뿐인 헛된 것을 찾다가 인생의 허망함에 무릎을 치며 후회하지 말고 부활 후 누릴 영원한 생명을 바라며 살아가자. 오정섭 목사
  • 2022.07.1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절대긍정의 믿음
  •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선교라고 정의되는 시대가 찾아왔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복음 증거만큼이나 그리스도인의 삶이 주목받는 시대라는 뜻이다. 요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전하는 복음의 진정성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에서 찾는다. 따라서 성경을 삶의 원리 원칙으로 삼는 성경적인 삶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성경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절대긍정의 믿음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결론은 성도의 최후 승리를 말하고 있으며 다시 오실 예수님이 성도의 최후 승리를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 할 절대긍정의 믿음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그 땅을 정탐 다녀온 여호수아와 갈렙의 반응에서 절대긍정의 믿음이 지녀야 할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1.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을 갖고 싶어 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각 지파에서 대표 한 사람씩을 선발해 모두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에 보낸다. 그들은 40일간 그 땅을 돌아본 후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며 그 땅의 과일들은 극상품이라고 할 수 있고 그들이 누리는 것은 풍요롭다는 데에 일치된 의견을 내놓는다(민 13:25~27). 그러나 그 땅을 정복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의견은 긍정적인 의견 2명, 부정적인 의견 10명으로 갈린다. 긍정적인 의견을 내놓은 두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이다. 갈렙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한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민 13:30).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을 취하고자 하는 데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땅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비관적인 전망과 비판적인 어조에 쉽게 동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사람은 미래를 알 수 없고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매일 마주하는 삶의 과제 앞에 불안, 염려,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대면하는 문제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시고 자녀 된 우리의 삶을 위해 좋은 것을 예비해 놓고 계신 분이시다. 로마서 8장 32절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한다. 2.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는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의견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야훼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야훼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야훼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민 14:7~9). 그러나 나머지 10명의 정탐꾼들은 육신의 눈으로 확인되는 그 땅 주민들의 어떠함에 주목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2~33).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았기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땅에 대해 악평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라며 자신들에 대해서도 악평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이 무너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삶에 부정적이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분명히 차지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하나님은 그 땅을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고, 모세에게 정탐꾼을 보내라고 말씀하실 때도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했기에 그 땅을 차지하는 데에 긍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성경 말씀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책이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온갖 좋은 약속을 붙잡는 적극적인 신앙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은 절대긍정의 믿음을 소유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에 대한 기대로 가득하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실 것에 대한 거룩한 원함,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으로 충만한 절대긍정의 믿음으로 살아가자.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약속하신 가나안을 차지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정섭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신학연구소)
  • 2022.06.1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구속사적인 삶 - 감사(2)
  • 대한민국 법 중에 최고 상위법은 헌법이다. 헌법 10조에 보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흔히 말하는 행복추구권이다. 그런데 행복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국가도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해 줄 따름이다. 다시 말해 행복은 어떤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정해진 조건이 있으면 국가가 일정 수준의 국민은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1. 행복의 근원, 감사 그렇다면 행복은 어디 있을까? 감사하는 마음에 있다. 감사하면 행복해진다. 감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사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감사가 저절로 되거나 쉽게 되지 않는다. 만약 감사가 저절로 되고 쉽게 되는 것이면 감사가 하나님의 뜻이니 범사에 감사하라고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감사는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감사가 쉬운가? 불평이 쉬운가?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한 달 동안 5층 집까지 매일 걸어가야 한다고 가정하자. 억지로라도 계단을 오를 일이 생겨 운동할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할까? 아니면 곧바로 불평할까? 감사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원망 불평이 자연스러운 우리 본성이라는 중력, 그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감사가 등산처럼 힘든 이유다. 그러나 등산도 하면 할수록 쉬워진다. 감사가 그렇다. 산 정상을 향해 오르다 보면 달라지는 것이 있다. 시야다.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감사하면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못 보던 것을 보게 된다. 감사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불평하는 일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그 일들 외에는 제대로 못 본다. 불평하는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마음이 계속 불편하다. 물론 해결이 돼도 불평할 거리는 또 있다. ‘왜 이제야 해결이 되는 거지?’ 감사하는 사람은 시야가 다르다. 보이는 것이 다르다. 눈에 거슬리는 것보다 세상 아름다운 것이 훨씬 더 많다. 보이는 게 다르니 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왜 그렇게 사소한 일에 집착했지?’ 하는 생각이 드니까 감사하는 사람의 말에는 여유가 있다. 타인에 대한 포용의 한도가 그만큼 크다. 원망 불평으로 마음의 용량이 늘 마이너스가 되어 가면 타인에 대한 용납의 한도가 계속 줄어든다. 감사를 결단하고 훈련하자. 감사한 다음에 기쁨이 따라오고 불평한 다음에 짜증이 따라온다. 감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이끌어 가지만 불평은 사탄이 원하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이끌어 간다. 감사의 종점은 천국이고 원망 불평의 종점은 지옥이다. 2. 그리스도인의 감사, 넘치는 감사 우리의 감사가 어떠한 감사가 되어야 하는지 바울 사도의 권면을 들어 보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우리 삶은 예수님 안에 있다. 예수님께 우리 인생의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이다. 여기저기 왔다 갔다, 이리저리 오락가락하지 않고 예수님 안에 콕 박혀서 사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예수님 안에서 성장하는 여정이다. 말씀대로 살면서 굳센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는 것이다. 정리하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셨으니 예수님 안에 뿌리내리고 말씀 따라 사는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감사가 넘치게 하라고 권면한다. 누가 믿음이 강한 사람일까? 감사하는 사람이다. 내 믿음의 강도는 감사가 말해 준다. 내 믿음이 명품인지 불량품인지는 감사가 보여 준다. 감사는 명품 믿음의 보증서다. 감사가 없다면 불량품 믿음이다. 감사는 넘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넘치는 감사다. 자기 분량 이상의 감사를 하는 것이다. 내 기준 이상의 감사, 내 판단 이상의 감사, 내 감정 이상의 감사, 내 선택 이상의 감사다. 그러려면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가 가능한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예수님을 주로 영접했기 때문이다. 주는 ‘주인’을 말한다.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시니까 감사하라는 것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했으니”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영접했으니”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직분, 예수는 이름이다. ‘그리스도 예수’와 ‘예수 그리스도’는 강조하는 바가 다르다. 그리스도가 먼저 나오면 예수님이 그리스도, 곧 구원자로서 하신 일에 강조점이 있다. 구원자 예수님이 하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떠난 내 죄 때문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다. 나의 주님이 되셔서 천국 가는 그날까지 내 삶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고, 도우시며 책임져 주신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다. 성경이 다시 쓰이기 전까지는 변하지 않는다. 내 삶의 형편과 조건은 오락가락해도 나를 향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주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 되셔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도록 역사해 주실 것임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 삶의 형편, 조건, 기분, 감정과 상관없이 감사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 일평생 감사할 수 있다. 감사하자.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어렵고 힘들고 괴로울 때 인생이 마음대로 안 될 때 감사하자. 감사하면 사탄이 틈타지 못한다. 영적 시야가 넓어지고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 관계가 회복되고 인생이 달라지고 행복해진다. 아니 이미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Thanksgiving’뿐만 아니라, ‘Thanks-living’하자! 오정섭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신학연구소)
  • 2022.05.0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다시보는 영산 신학과 목회
    영산의 세계선교
  • 선교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복음 전도와 선교에 대한 꿈과 비전으로 충만하게 된다(행 1:8). 성령님은 영산에게 대조동 천막교회 시절부터 세계선교의 꿈을 부어주셨다. 그때부터 영산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은빛 날개를 타고 전 세계를 다니며 선교하는 꿈’을 품었다. 그 꿈처럼 영산은 당시 해외 여권을 얻기도 쉽지 않았을 때 이미 여러 나라를 다니며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다. “전 세계는 주님의 교구입니다.” 웨슬리의 유명한 말을 떠올리게 하는 영산의 고백은 절대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는 세계 최대 교회를 세우고 오대양 육대주를 다니며 선교 사역을 감당했다. 그가 머물렀던 수많은 선교 현장은 성령님이 역사하는 기적의 장소였다. 영산이 세계선교를 위한 뜨거운 열정을 갖게 된 배경은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7년 5월 세계오순절총회를 마친 영산은 100일 동안 18개국, 39개 도시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던 그는 결국 스위스에서 쓰러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침대 밑에 놓인 엽서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주님의 종으로 부름 받았으니 이 시대에 한 획을 긋는 종이 되리라”라는 글귀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적고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다. 다시는 못 일어날 만큼 쇠약해졌던 영산의 몸은 이튿날이 되자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얻고 기적처럼 회복되었다. 그때의 체험은 영산의 사역 가운데 세계선교를 항상 강조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영산은 유럽 선교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세계 교회성장을 위해 봉사하는 국제기관을 조직하라”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1976년 11월 4일 국제교회성장연구원(이하 CGI: Church Growth International)을 설립했다. 영산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부흥성장에 관한 노하우를 전 세계 교회와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에만 집중하지 않고 전 세계 교회가 함께 부흥하는 일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CGI는 설립 이래 2022년 현재까지 한국을 비롯한 100여 개국 이상에서 총 600회 이상 CGI 콘퍼런스를 개최했고, 여기에 전 세계에서 연인원 120만명이 참석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세계선교와 교회 성장에 이바지한 CGI는 2022년 10월 이영훈 목사를 제2대 총재로 만장일치 추대하면서 ‘다음 세대의 부흥’을 외치며 제2기 사역에 돌입하게 되었다. 영산은 세계선교의 사역을 더욱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2000년 3월 28일 DCEM(David Cho Evangelistic Mission)을 설립했다. 이 기구를 통해 전 세계 선교지와 선교단체 간에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선교 자원의 교류에 힘썼다. DCEM은 교파를 초월해 영적으로 갈급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 그리고 복음의 사명을 심어주는 기관으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 영산은 그 목회 사역 동안에 약 600회 이상의 해외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이런 왕성한 사역은 성령님이 주시는 비전과 열정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럼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영산의 선교 사역의 의미는 무엇일까? 20세기 기독교의 가장 큰 특징은 기독교의 무게 중심이 서구권에서 비서구권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1980년대에 들어와서 비서구권의 기독교 인구가 서구권의 기독교 인구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기독교 신학이나 선교가 서구권 교회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서구권 교회는 갈수록 쇠퇴를 거듭했고, 반대로 비서구권의 교회는 급속히 성장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역사적 맥락 속에서 영산의 세계선교 사역은 기독교 선교의 주체를 서구권 교회에서 비서구권 교회로 전환하는 데 아주 지대한 역할을 했다. 영산은 선교가 ‘순복음’의 최우선 과제임을 보여주었다. 선교하는 교회가 진정한 ‘순복음교회’(Full Gospel Church)이고 선교하는 성도가 진짜 ‘순복음성도’(Full Gospel Christian)이다. 교회가 선교를 멈추는 순간 침체와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영산 안에 넘쳤던 복음의 확신과 순복음의 영성은 많은 사람의 가슴에 희망을 불러일으켰고 나도 하나님 사명에 쓰임 받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의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David Yonggi Cho’라는 이름은 안다”라는 말이 수많은 증인에 의해 회자된 것만 보아도 그가 가진 세계선교의 열정과 영향력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만약 누군가 “순복음 신앙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에 나아가 선교하는 삶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선교에 평생을 바친 영산의 삶이었고, 그의 선교 정신을 이어받은 모든 순복음 성도들의 꿈이 되어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선배의 본을 따라 인내로써 믿음의 경주를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히 12:1). 오늘날 교회가 영산으로부터 반드시 전해 받아야 하는 믿음의 영적 바통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선교의 바통’이다. 이제 영산의 뒤를 이어 우리도 성령 충만함 가운데 ‘선교 바통’을 이어받아 주님 오시는 날까지 세계선교의 꿈을 이뤄가야 할 것이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2.11.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영산의 신유 사역 
  • 영산에게 신유 사역은 그의 핵심적인 목회 철학 중 하나였다. 영산은 신유의 기적이 과거 예수님 시대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사역임을 확고히 믿었다.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을 받았으면 믿음으로 값없이 병 고침 받는 것도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영산이 믿었던 신유의 은사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은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영산에게 신유 사역은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자 ‘아직’, 그러나 반드시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었다. 영산은 치유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임재를 보았고 하나님 나라에서의 믿는 자의 부활을 보았다. 그래서 영산은 목회 현장이나 부흥회 사역에서도 병 고침을 강조했는데, 그가 인도하는 집회에서 질병의 치료를 경험한 사람들의 간증거리는 수없이 많다. 영산이 이같이 신유를 강조하게 된 것은 어떤 특정한 치유 신학을 공부한 결과가 아니었다. 그를 ‘신유의 종’으로 만든 것은 그가 처한 삶의 현장 속에서 실제 경험했던 치유의 하나님 때문이었다. 폐결핵 3기로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을 때 주님을 만나서 완치되었던 경험이 그것이다. 또 대조동 천막교회 시절 중풍에 걸린 여인이 낫고 걷지 못했던 소년이 일어나 뛰며 듣지 못했던 사람이 듣게 되는 기적이 나타났다. 이런 경험을 통해 영산은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병든 자를 치료하신다는 사실을 체득할 수 있었다. 자신의 삶과 목회 현실에서 신유의 역사를 분명하게 체험했기에 영산은 가는 곳마다, 서는 곳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영산의 신유 사역은 교회 부흥에도 크게 기여했다. 실제로 영산의 개척교회가 빈민촌 지역사회에 깊이 뿌리 내리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치유의 기적이었다. 그래서 영산은 신유를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인 표적으로 보고 목회 사역에 열심히 적용하고 실행했다.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으로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낫게 되는 신유 사역”(막 16:18)이 복음 전파에 동반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이후에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에 대해서 회고할 때도 신유 사역의 중요성을 언급한 적이 있다. 복음에 저항적이던 사람들이 육체의 질병을 치료받고 은혜를 받아 복음의 말씀을 세상에 나아가 강력하게 전하기 때문에 교회가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교회 공동체를 신유 공동체로 보았다. 영산의 신유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믿음이다. 영산은 그 어느 목회자보다도 병 고침에 대한 메시지를 많이 선포했고 신유의 기적도 많이 행했지만 정작 자신이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성령이 필요에 따라 자신을 통해 은사를 나타내실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영산 자신이 분명히 받았다고 주장하는 은사가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믿음의 은사’였다. “내가 받은 은사를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담대한 믿음입니다. 담대함을 가지고 믿음으로 선포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성경은 표적이 여러분의 믿음보다 앞선다고 하지 않습니다. 표적이 여러분의 믿음 뒤에 따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믿음의 역사는 천막교회 시절에 나타났다. 걷지 못하던 소년이 영산을 찾아왔을 때 처음에는 그가 낫는다는 것을 믿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영산이 한 시간이 넘도록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자 뭉게구름 같은 믿음이 그의 마음으로부터 차오르기 시작했다. 영산은 그때의 기분이 마치 지구를 자기 손으로 밀면 지구가 밀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간증한 바 있다. 하나님이 주신 이러한 믿음으로 기도하고 선포할 때 영산은 그 소년을 포함한 수많은 이들의 병을 고칠 수 있었다. 영산은 오늘날 병 낫기를 간구하는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의 기도를 잘 드리지 못하거나 주님의 말씀에 담긴 뜻을 잘 알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다고 말했다. 영산에 따르면 신유의 역사는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때까지 성령님이 살아 역사하셔서 은사를 베푸시고 병든 자들을 일으키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영산은 신유가 지금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임을 분명히 믿었다. 따라서 성도는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써 신유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기에 자신의 아픈 부분에 손을 얹고 믿음으로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영산을 통한 성령의 신유 사역은 여의도순복음교회뿐 아니라 국내외 수많은 교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신유의 복음을 포함한 예수 그리스도의 전인적인 순복음을 이해하는데 큰 유익을 주었다. 앞으로도 영산의 신유 사역의 원리를 계속 연구하고 실행함으로 새로운 신유행전의 역사가 계속 나타나길 희망한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2.10.2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문서·방송 선교의 선구자…1988년 기독교 일간지 국민일보 창간
  • 영산은 미디어의 활용이 미미하던 시절, 문서 선교와 방송 선교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사역에 적용한 선구자였다. 영산은 자신이 가진 뜨거운 선교적 영성을 담아내어 빠르게 전파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 놀라운 교회 성장을 이루었다. 순복음의 신앙이 한국과 세계에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의 그 어떤 교회보다 멀티미디어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문서 전도』의 저자 조지 버워는 “기독교 문서는 인쇄된 선교사”라고 말한 바 있다. 문서 선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보게 하는 말이다. 영산은 누구보다도 문서 선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사역에 적용하였다. 1964년 당시 순복음교회 성도들에게 교회와 관련된 각종 소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순복음지』를 발간했다. 이것이 점점 발전하여 1978년에 이르러서는 영산의 설교와 칼럼, 성도들의 신앙 간증과 구역 성경 공부 및 교회 소식을 담은 『순복음뉴우스』가 되었다. 이후 『순복음가족신문』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날까지 문서 선교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다. 영산은 또한 순복음교회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한국교회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월간 잡지 『신앙계』를 창간함으로 문서 선교의 폭을 확장했다. 『신앙계』는 기독교의 대중지,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위한 교양지, 불신자들을 위한 전도지, 교회를 하나로 묶는 기독교 잡지로서 자리매김했다. 해방 이후 대중적인 기독교 잡지로는 『신앙계』를 능가하는 잡지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신앙계』가 말씀에 기초한 성령운동의 건전한 보급과 한국교회 평신도들의 신앙 성장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인 박명수 박사는 “『신앙계』야말로 오순절 신앙을 한국교회에 널리 전파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영산의 문서 선교의 열정은 『순복음가족신문』과 『신앙계』의 성공으로 끝나지 않았다. 1987년 한 이단 종교 단체가 일간 신문을 발간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영산은 만약 그 단체에서 신문을 발간하게 된다면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것이 자명하다고 판단했다. 이를 두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기독교 일간지 창간에 대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1988년 세계 최초의 기독교계 일간지 『국민일보』가 창간되었다. 정부와 사회에 기독교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언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영산은 신문사를 설립하는 과정 가운데 막대한 재정적 부담과 근거 없는 비난의 목소리로 큰 고통을 받았지만, 믿음의 확신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다. 복음 실은 일간지 『국민일보』는 매일 하나님의 복음을 한국 땅에 전파하는 발 없는 전도사로서 한국 기독교의 성장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기독교 정신으로 발간된 최초의 기독교 일간지로서 한국 교계의 대사회적인 발언의 장으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나아가 기독교 문화의 채널로써 한국 사회에 기독교 세계관을 전파하는 사명도 이뤄가고 있다. 영산의 『국민일보』 창간은 대한민국 1200만 기독교인을 대변하는 신문으로서 한국 기독교 역사 가운데 매스컴 선교의 새 장을 열었다는 데 큰 의의를 가진다. 영산은 문서 선교뿐 아니라 방송 선교를 통해서도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당시 영산은 복음 전도의 방법을 새로운 형태로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도 방송 선교의 파급력과 중요성을 일찍 깨달았던 영산은 1966년 라디오 설교와 1979년 컬러TV 방송을 송출했다. 영산의 라디오 설교 방송은 1979년, 1980년 연속, 전국 청취자 애청 프로그램 조사 결과 청취율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청취자가 많았다. 이처럼 한국교회 방송 선교의 선구자는 단연 영산이었다. 당시 흑백 TV에 익숙했던 공중파 제작자들이 방송 장비와 시스템을 구경하기 위해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견학을 올 정도였다. 방송 선교는 교단의 장벽을 뛰어넘는 데 중요한 매체가 되었을 뿐 아니라 기독교의 울타리를 넘어 일반인들에게 오순절 신앙을 전하는 통로가 되었다. 영산의 방송 선교를 통해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이 설교 말씀을 듣고 구원받는 역사가 나타났다. 또 위성과 인터넷을 활용한 예배와 설교 실황은 각 지성전 및 지교회 설립과 더불어 교세 확장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영산의 방송 선교는 국내를 넘어 전 세계에 이르기까지 사상과 국경을 초월하여 복음이 전파되었다. 1982년에는 미국 TV 프로그램 제작 회사인 KCWC사의 특별 기획으로 주일 예배 실황이 미국, 캐나다, 중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멕시코, 이스라엘, 홍콩, 필리핀, 남아공 등 25개국에 동시 위성 중계되기도 했다. 이처럼 영산의 성령 충만의 복음은 21세기 정보화 시대와 함께 전 세계에 발 빠르게 퍼져나갔다. 영산은 커뮤니케이션의 대가였다. 설교뿐 아니라 설교를 전달하는 매체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아무리 훌륭한 설교라도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면 세계적인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을 것이다. 영산의 설교와 성령 충만의 영성은 멀티미디어 사역 시스템을 통하여 세계 곳곳에까지 전파될 수 있었고 이러한 사역이 세계 교회에 끼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복음의 메시지는 불변해도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은 시대에 맞게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영산의 멀티미디어 사역이 우리에게 남겨준 값진 유훈이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2.09.23 / 김용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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