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코로나 이후 청년세대를 위한 기도 - 김남준 목사(청장년국장)
  • 코로나 이후 청년세대들의 신앙생활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것을 가속화시킨 것이 온라인 예배다. 이전까지 우리는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는 형태를 대면 예배에 나올 수 없는 극한 상황 때나 드리는 예배로 생각하거나 집안일을 하면서 말씀을 주야로 들을 수 있는 등 신앙생활을 위한 보조 수단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없는 현실 앞에 다른 선택지가 없던 청년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온라인 예배를 선택하게 되었고, ‘예배’라는 인식이 청년들에게 강하게 심어지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모임 금지가 해제된 지금에도 청년들은 대면 예배를 드릴지 또는 온라인 예배를 드릴지를 선택한다. 그리고 코로나를 지나며 온라인 예배를 ‘예배’로 인식한 세대들에게 더는 온라인 예배에 대한 신앙의 불편함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그들은 대면 예배도 ‘예배’, 온라인 예배도 ‘예배’로 인식한다. 그들에게는 단지 방식만 다른 ‘예배’일 뿐이다. 세상은 이처럼 코로나 이후 변화된 트렌드를 쫓아 우리가 변화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방향성은 마가 다락방의 성령의 강력한 역사이다. 초대교회 당시 그들은 모였고, 모여서 함께 기도했고, 모여서 함께 기도할 때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나타났다. 성령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일하고 계신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는 다시 함께 모여야 하고 성령의 역사를 갈망하며 체험해야 한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외손자이자 미국에서 주목 받는 튤리안 차비진 목사는 이런 말을 했다. “무엇인가 알 수 없는 목마름과 갈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크리스천들은 세상과 전혀 다른 메시지를 고수해야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청년세대를 향해서도 복음을 향한 세상과 전혀 다른 메시지를 고수하며 나갈 때, 지금 이 시대 청년들의 알 수 없는 목마름을 채워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성령의 뜨거운 불을 가진 청년들이 더 깊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힘입어 도리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구별된 청년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3).
  • 2022.11.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스콴도를 기억하자 -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1603년 3월 24일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라고 평가받는 여왕 엘리자베스1세가 사망했다. 자손이 없었기에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에게 왕위가 계승되었다. 그는 잉글랜드에서 제임스 1세로 즉위한 후 노골적으로 가톨릭 제도를 옹호하며 평소 염증을 느끼던 청교도들을 탄압했다. 청교도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다른 곳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1620년 9월 16일 후세의 역사가들에 의해 ‘순례자 조상들’(Pilgrim Fathers)이라고 불리게 된 청교도 102명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북아메리카로 떠났다. 이들은 같은 해 11월 21일 케이프코드 끝의 낚시 바늘 모양의 프로빈스 타운 항구에 닻을 내렸다. 도착한 이듬해엔 첫 추수를 마치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었는데 여기에서 추수감사절이 유래되었다. 사실 ‘순례자 조상들’보다 10년 앞선 1608년 영국 무역상들이 그곳에 먼저 도착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왐파나옥이라는 인디언들을 스페인에 노예로 팔아넘겼는데 그중 스콴도라는 인디언 청년이 끼어 있었다. 그는 스페인의 한 사제에게 팔렸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기도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고 세 가지 제목을 가지고 늘 기도했다. 첫째는 고향에 돌아가게 해달라는 것이고, 둘째는 자기를 팔아넘긴 백인들을 원망하지 않고 그들과 협력하여 고향을 스페인처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셋째는 자기 평생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스콴도는 그 사제의 도움으로 우여곡절 끝에 10년 만에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와 보니 가족들은 전염병으로 모두 죽고 마을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기도한대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남은 자들을 이끌고 땅을 개간하며 마을을 재건했다. 바로 이때 메이플라워호가 도착한 것이다. 스콴도는 유창한 영어로 청교도들을 환영하고 정착을 도왔다. 영국에서 메이플라워를 타고 온 청교도 지도자인 윌리엄 브래포드 목사는 그의 일기장에 그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스콴도는 하나님이 우리의 유익을 위해 준비하신 특별한 도구였다. 그는 우리에게 옥수수를 어떻게 심는지, 낚시를 어떻게 하는지, 땅을 어디에 어떻게 개간하는지 가르쳤다. 그는 죽을 때까지 한순간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우리의 친구가 되어 우리를 인도했다.” 첫해가 지나고 청교도들과 스콴도 그리고 인디언들이 칠면조를 잡아 함께 식탁에 앉아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수년 후 그가 열병으로 죽게 되었을 때 그는 브래포드 목사에게 천국에 편히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하면서 부디 이 땅을 살기 좋은 땅으로 만들어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땅을 축복해주옵소서…” 추수의 계절, 우리 각자의 스콴도는 누구일까? 그 사람으로 인해 감사가 넘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누구보다 우리에게 진정한 스콴도 되어 주신 주님을 기억하며 넘치는 감사로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자.
  • 2022.11.18 / 김용두 기자

    세상을 구하는 오직 한 길 - 이상일 목사(용산대교구장)
  • 커피 하나로 전 세계 많은 가맹점을 운영하는 하워드 슐츠 스타벅스 사장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하워드 슐츠는 뉴욕 브루클린의 빈민가에서 태어났지만 출신배경이 문제가 아니라 노력 여하에 따라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성공했습니다. 많은 기업이 성장하면서 이것저것 손을 대지만 스타벅스는 오직 커피 하나로 3만 4317개가 넘는 가맹점을 갖는 업계 최고의 회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성장 뒤에는 종업원들을 존경과 품위로 대해야 한다는 그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가 쓴 책 『스타벅스 커피 한잔에 담긴 성공 신화』라는 책에 보면 ‘성공은 나눠 가질 때 가장 달콤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승선에 혼자 도달하면 공허하지만 한 팀을 이룬다면 기쁨이 크다는 멋있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도 스타벅스의 성공원리처럼 생애를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의 조그만 동네 출신으로 많은 사람이 비웃었지만, 그분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름처럼 구원자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사셨습니다. 훌륭한 의사가 될 수도 있었고, 또 유대의 정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니면 사람들이 많이 따르는 종교 지도자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오직 한 길, 세상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 가난한 자, 어려움에 처한 자들과 함께 하셨고 결국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성경 요한복음 2장에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인 가나의 혼인잔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며 하인들의 역할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부탁에 그들은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의 지시에 역시 묵묵히 순종하며 항아리에 물을 채웠습니다. 이어 항아리에 있는 물을 떠서 연회장에 가져다주라는 명령에도 순종했습니다. 아무도 이 맛있는 포도주가 어디서 났는지 몰랐지만 하인들만은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하인들의 순종이 있었기에 빛을 발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내 스스로의 생각이 앞설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갈릴리 가나의 하인들처럼 조용히 자기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고 묵묵히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순복음의 성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 2022.11.1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다시보는 영산 신학과 목회
    영산의 세계선교
  • 선교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복음 전도와 선교에 대한 꿈과 비전으로 충만하게 된다(행 1:8). 성령님은 영산에게 대조동 천막교회 시절부터 세계선교의 꿈을 부어주셨다. 그때부터 영산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은빛 날개를 타고 전 세계를 다니며 선교하는 꿈’을 품었다. 그 꿈처럼 영산은 당시 해외 여권을 얻기도 쉽지 않았을 때 이미 여러 나라를 다니며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다. “전 세계는 주님의 교구입니다.” 웨슬리의 유명한 말을 떠올리게 하는 영산의 고백은 절대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는 세계 최대 교회를 세우고 오대양 육대주를 다니며 선교 사역을 감당했다. 그가 머물렀던 수많은 선교 현장은 성령님이 역사하는 기적의 장소였다. 영산이 세계선교를 위한 뜨거운 열정을 갖게 된 배경은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7년 5월 세계오순절총회를 마친 영산은 100일 동안 18개국, 39개 도시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던 그는 결국 스위스에서 쓰러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침대 밑에 놓인 엽서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주님의 종으로 부름 받았으니 이 시대에 한 획을 긋는 종이 되리라”라는 글귀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적고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다. 다시는 못 일어날 만큼 쇠약해졌던 영산의 몸은 이튿날이 되자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얻고 기적처럼 회복되었다. 그때의 체험은 영산의 사역 가운데 세계선교를 항상 강조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영산은 유럽 선교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세계 교회성장을 위해 봉사하는 국제기관을 조직하라”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1976년 11월 4일 국제교회성장연구원(이하 CGI: Church Growth International)을 설립했다. 영산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부흥성장에 관한 노하우를 전 세계 교회와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에만 집중하지 않고 전 세계 교회가 함께 부흥하는 일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CGI는 설립 이래 2022년 현재까지 한국을 비롯한 100여 개국 이상에서 총 600회 이상 CGI 콘퍼런스를 개최했고, 여기에 전 세계에서 연인원 120만명이 참석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세계선교와 교회 성장에 이바지한 CGI는 2022년 10월 이영훈 목사를 제2대 총재로 만장일치 추대하면서 ‘다음 세대의 부흥’을 외치며 제2기 사역에 돌입하게 되었다. 영산은 세계선교의 사역을 더욱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2000년 3월 28일 DCEM(David Cho Evangelistic Mission)을 설립했다. 이 기구를 통해 전 세계 선교지와 선교단체 간에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선교 자원의 교류에 힘썼다. DCEM은 교파를 초월해 영적으로 갈급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 그리고 복음의 사명을 심어주는 기관으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 영산은 그 목회 사역 동안에 약 600회 이상의 해외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이런 왕성한 사역은 성령님이 주시는 비전과 열정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럼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영산의 선교 사역의 의미는 무엇일까? 20세기 기독교의 가장 큰 특징은 기독교의 무게 중심이 서구권에서 비서구권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1980년대에 들어와서 비서구권의 기독교 인구가 서구권의 기독교 인구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기독교 신학이나 선교가 서구권 교회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서구권 교회는 갈수록 쇠퇴를 거듭했고, 반대로 비서구권의 교회는 급속히 성장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역사적 맥락 속에서 영산의 세계선교 사역은 기독교 선교의 주체를 서구권 교회에서 비서구권 교회로 전환하는 데 아주 지대한 역할을 했다. 영산은 선교가 ‘순복음’의 최우선 과제임을 보여주었다. 선교하는 교회가 진정한 ‘순복음교회’(Full Gospel Church)이고 선교하는 성도가 진짜 ‘순복음성도’(Full Gospel Christian)이다. 교회가 선교를 멈추는 순간 침체와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영산 안에 넘쳤던 복음의 확신과 순복음의 영성은 많은 사람의 가슴에 희망을 불러일으켰고 나도 하나님 사명에 쓰임 받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의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David Yonggi Cho’라는 이름은 안다”라는 말이 수많은 증인에 의해 회자된 것만 보아도 그가 가진 세계선교의 열정과 영향력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만약 누군가 “순복음 신앙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에 나아가 선교하는 삶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선교에 평생을 바친 영산의 삶이었고, 그의 선교 정신을 이어받은 모든 순복음 성도들의 꿈이 되어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선배의 본을 따라 인내로써 믿음의 경주를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히 12:1). 오늘날 교회가 영산으로부터 반드시 전해 받아야 하는 믿음의 영적 바통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선교의 바통’이다. 이제 영산의 뒤를 이어 우리도 성령 충만함 가운데 ‘선교 바통’을 이어받아 주님 오시는 날까지 세계선교의 꿈을 이뤄가야 할 것이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2.11.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영산의 신유 사역 
  • 영산에게 신유 사역은 그의 핵심적인 목회 철학 중 하나였다. 영산은 신유의 기적이 과거 예수님 시대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사역임을 확고히 믿었다.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을 받았으면 믿음으로 값없이 병 고침 받는 것도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영산이 믿었던 신유의 은사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은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영산에게 신유 사역은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자 ‘아직’, 그러나 반드시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었다. 영산은 치유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임재를 보았고 하나님 나라에서의 믿는 자의 부활을 보았다. 그래서 영산은 목회 현장이나 부흥회 사역에서도 병 고침을 강조했는데, 그가 인도하는 집회에서 질병의 치료를 경험한 사람들의 간증거리는 수없이 많다. 영산이 이같이 신유를 강조하게 된 것은 어떤 특정한 치유 신학을 공부한 결과가 아니었다. 그를 ‘신유의 종’으로 만든 것은 그가 처한 삶의 현장 속에서 실제 경험했던 치유의 하나님 때문이었다. 폐결핵 3기로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을 때 주님을 만나서 완치되었던 경험이 그것이다. 또 대조동 천막교회 시절 중풍에 걸린 여인이 낫고 걷지 못했던 소년이 일어나 뛰며 듣지 못했던 사람이 듣게 되는 기적이 나타났다. 이런 경험을 통해 영산은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병든 자를 치료하신다는 사실을 체득할 수 있었다. 자신의 삶과 목회 현실에서 신유의 역사를 분명하게 체험했기에 영산은 가는 곳마다, 서는 곳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영산의 신유 사역은 교회 부흥에도 크게 기여했다. 실제로 영산의 개척교회가 빈민촌 지역사회에 깊이 뿌리 내리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치유의 기적이었다. 그래서 영산은 신유를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인 표적으로 보고 목회 사역에 열심히 적용하고 실행했다.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으로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낫게 되는 신유 사역”(막 16:18)이 복음 전파에 동반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이후에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에 대해서 회고할 때도 신유 사역의 중요성을 언급한 적이 있다. 복음에 저항적이던 사람들이 육체의 질병을 치료받고 은혜를 받아 복음의 말씀을 세상에 나아가 강력하게 전하기 때문에 교회가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교회 공동체를 신유 공동체로 보았다. 영산의 신유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믿음이다. 영산은 그 어느 목회자보다도 병 고침에 대한 메시지를 많이 선포했고 신유의 기적도 많이 행했지만 정작 자신이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성령이 필요에 따라 자신을 통해 은사를 나타내실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영산 자신이 분명히 받았다고 주장하는 은사가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믿음의 은사’였다. “내가 받은 은사를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담대한 믿음입니다. 담대함을 가지고 믿음으로 선포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성경은 표적이 여러분의 믿음보다 앞선다고 하지 않습니다. 표적이 여러분의 믿음 뒤에 따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믿음의 역사는 천막교회 시절에 나타났다. 걷지 못하던 소년이 영산을 찾아왔을 때 처음에는 그가 낫는다는 것을 믿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영산이 한 시간이 넘도록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자 뭉게구름 같은 믿음이 그의 마음으로부터 차오르기 시작했다. 영산은 그때의 기분이 마치 지구를 자기 손으로 밀면 지구가 밀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간증한 바 있다. 하나님이 주신 이러한 믿음으로 기도하고 선포할 때 영산은 그 소년을 포함한 수많은 이들의 병을 고칠 수 있었다. 영산은 오늘날 병 낫기를 간구하는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의 기도를 잘 드리지 못하거나 주님의 말씀에 담긴 뜻을 잘 알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다고 말했다. 영산에 따르면 신유의 역사는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때까지 성령님이 살아 역사하셔서 은사를 베푸시고 병든 자들을 일으키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영산은 신유가 지금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임을 분명히 믿었다. 따라서 성도는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써 신유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기에 자신의 아픈 부분에 손을 얹고 믿음으로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영산을 통한 성령의 신유 사역은 여의도순복음교회뿐 아니라 국내외 수많은 교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신유의 복음을 포함한 예수 그리스도의 전인적인 순복음을 이해하는데 큰 유익을 주었다. 앞으로도 영산의 신유 사역의 원리를 계속 연구하고 실행함으로 새로운 신유행전의 역사가 계속 나타나길 희망한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2.10.2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문서·방송 선교의 선구자…1988년 기독교 일간지 국민일보 창간
  • 영산은 미디어의 활용이 미미하던 시절, 문서 선교와 방송 선교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사역에 적용한 선구자였다. 영산은 자신이 가진 뜨거운 선교적 영성을 담아내어 빠르게 전파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 놀라운 교회 성장을 이루었다. 순복음의 신앙이 한국과 세계에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의 그 어떤 교회보다 멀티미디어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문서 전도』의 저자 조지 버워는 “기독교 문서는 인쇄된 선교사”라고 말한 바 있다. 문서 선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보게 하는 말이다. 영산은 누구보다도 문서 선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사역에 적용하였다. 1964년 당시 순복음교회 성도들에게 교회와 관련된 각종 소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순복음지』를 발간했다. 이것이 점점 발전하여 1978년에 이르러서는 영산의 설교와 칼럼, 성도들의 신앙 간증과 구역 성경 공부 및 교회 소식을 담은 『순복음뉴우스』가 되었다. 이후 『순복음가족신문』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날까지 문서 선교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다. 영산은 또한 순복음교회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한국교회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월간 잡지 『신앙계』를 창간함으로 문서 선교의 폭을 확장했다. 『신앙계』는 기독교의 대중지,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위한 교양지, 불신자들을 위한 전도지, 교회를 하나로 묶는 기독교 잡지로서 자리매김했다. 해방 이후 대중적인 기독교 잡지로는 『신앙계』를 능가하는 잡지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신앙계』가 말씀에 기초한 성령운동의 건전한 보급과 한국교회 평신도들의 신앙 성장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인 박명수 박사는 “『신앙계』야말로 오순절 신앙을 한국교회에 널리 전파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영산의 문서 선교의 열정은 『순복음가족신문』과 『신앙계』의 성공으로 끝나지 않았다. 1987년 한 이단 종교 단체가 일간 신문을 발간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영산은 만약 그 단체에서 신문을 발간하게 된다면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것이 자명하다고 판단했다. 이를 두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기독교 일간지 창간에 대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1988년 세계 최초의 기독교계 일간지 『국민일보』가 창간되었다. 정부와 사회에 기독교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언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영산은 신문사를 설립하는 과정 가운데 막대한 재정적 부담과 근거 없는 비난의 목소리로 큰 고통을 받았지만, 믿음의 확신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다. 복음 실은 일간지 『국민일보』는 매일 하나님의 복음을 한국 땅에 전파하는 발 없는 전도사로서 한국 기독교의 성장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기독교 정신으로 발간된 최초의 기독교 일간지로서 한국 교계의 대사회적인 발언의 장으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나아가 기독교 문화의 채널로써 한국 사회에 기독교 세계관을 전파하는 사명도 이뤄가고 있다. 영산의 『국민일보』 창간은 대한민국 1200만 기독교인을 대변하는 신문으로서 한국 기독교 역사 가운데 매스컴 선교의 새 장을 열었다는 데 큰 의의를 가진다. 영산은 문서 선교뿐 아니라 방송 선교를 통해서도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당시 영산은 복음 전도의 방법을 새로운 형태로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도 방송 선교의 파급력과 중요성을 일찍 깨달았던 영산은 1966년 라디오 설교와 1979년 컬러TV 방송을 송출했다. 영산의 라디오 설교 방송은 1979년, 1980년 연속, 전국 청취자 애청 프로그램 조사 결과 청취율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청취자가 많았다. 이처럼 한국교회 방송 선교의 선구자는 단연 영산이었다. 당시 흑백 TV에 익숙했던 공중파 제작자들이 방송 장비와 시스템을 구경하기 위해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견학을 올 정도였다. 방송 선교는 교단의 장벽을 뛰어넘는 데 중요한 매체가 되었을 뿐 아니라 기독교의 울타리를 넘어 일반인들에게 오순절 신앙을 전하는 통로가 되었다. 영산의 방송 선교를 통해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이 설교 말씀을 듣고 구원받는 역사가 나타났다. 또 위성과 인터넷을 활용한 예배와 설교 실황은 각 지성전 및 지교회 설립과 더불어 교세 확장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영산의 방송 선교는 국내를 넘어 전 세계에 이르기까지 사상과 국경을 초월하여 복음이 전파되었다. 1982년에는 미국 TV 프로그램 제작 회사인 KCWC사의 특별 기획으로 주일 예배 실황이 미국, 캐나다, 중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멕시코, 이스라엘, 홍콩, 필리핀, 남아공 등 25개국에 동시 위성 중계되기도 했다. 이처럼 영산의 성령 충만의 복음은 21세기 정보화 시대와 함께 전 세계에 발 빠르게 퍼져나갔다. 영산은 커뮤니케이션의 대가였다. 설교뿐 아니라 설교를 전달하는 매체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아무리 훌륭한 설교라도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면 세계적인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을 것이다. 영산의 설교와 성령 충만의 영성은 멀티미디어 사역 시스템을 통하여 세계 곳곳에까지 전파될 수 있었고 이러한 사역이 세계 교회에 끼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복음의 메시지는 불변해도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은 시대에 맞게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영산의 멀티미디어 사역이 우리에게 남겨준 값진 유훈이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2.09.23 / 김용두 기자

    평신도를 위한 사도행전 이야기
    (73)제3차 선교여행 - 에베소 대부흥
  • 바울의 제3차 선교여행의 주요 사역지는 소아시아의 주도(州都) 에베소였다. 바울은 먼저 성령 충만 사역을 펼쳤다. 그곳에서 바울은 열두 명쯤 되는 믿는 자들과 만났는데 그들은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했고” 요한의 침례만을 받았을 뿐이었다. 어떤 성서학자들은 이들이 그들과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던 아볼로(행 18:25~26)에 의해 믿음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본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이 강림하셔서 그들이 방언도 하고 침례도 하게 되었다. 학자들은 이를 가리켜 ‘에베소의 오순절’, 또는 ‘이방인의 오순절’이라고 부른다. 다음으로 바울은 말씀 사역에 매진했다. 처음에는 회당에서 석 달간, 그리고 두란노 서원에서 2년 동안 날로 증가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매일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했다. 그러자 아시아 지역의 많은 유대인들과 ‘헬라인’(이방인)들이 주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행 19:10). 바울이 이처럼 성령과 말씀 사역을 전개해 나가자 놀라운 능력이 수반되었다. 그에게 신유의 능력과 귀신 내쫓는 능력이 얼마나 강하게 나타났는지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천막 작업용)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기만 해도 병 고침을 받고 악귀가 쫓겨 나갈 정도였다. 이것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어서 병 고침을 받은 혈루증 걸린 여인 이야기(막 5:25~34)뿐만 아니라 베드로의 그림자가 지나갈 때 병든 자가 치료 받고,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이 떠났던 사건(행 5:15~16)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능력의 근원은 이런 물건이나 도구 자체에 있지 않고 주님께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이때 한 가지 웃지 못 할 일이 일어났다. 유대인 유랑 마술사들 중 자칭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바울의 은사 사역을 흉내 내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악귀야, 물러가라!”라고 외쳤다. 그러자 악귀 들린 사람이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김에 따라 그들이 상처를 입은 채 벗은 몸으로 줄행랑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이 에베소 전역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두려워하면서 주께로 나아왔다. 그런데 이 유대인 마술사들은 빌립의 사마리아 선교 시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고 돈을 주면서 안수함으로써 성령을 받게 하는 능력을 사고자 했다가 베드로에게 저주에 가까운 책망을 들은 마술사 시몬을 떠올리게 한다(행 8:17~24). 마술사 시몬이 베드로의 사역을 방해했던 것처럼 마술사인 스게와의 아들들이 바울의 사역을 방해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 충만, 말씀 충만, 능력 충만의 대부흥이 일어나자 에베소 사람들 가운데서 대규모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주께로 돌아와 자복하며 회개하고 주를 영접했다. 그중에는 마술사들이 자신들이 사용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책들(주로 비밀 주문을 기록한 두루마리)을 가지고 와서 사람들 앞에서 불로 태웠는데 그 책값이 은 오만 드라크마나 될 정도였다. 이것은 에베소가 고대 세계에서 마술의 중심지였다는 기록과 연관이 있다. 이 시점에서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행 19:20)고 사도 바울의 에베소 선교를 요약하고 있다. 김호성 부목사(목회신학)
  • 2022.11.1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72) 제3차 선교여행 -­ 에베소 선교
  • 오랫동안 안디옥에 머물다가 제2차 선교여행을 떠났던 것과는 달리 바울은 안디옥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3차 선교여행을 떠났다. 그는 먼저 오늘날 터키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과 같은 기존의 선교지를 돌아보면서 성도들을 든든하게 했다. 그즈음 아볼로가 에베소에 도착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인으로서 ‘언변이 좋고 성경(구약)에 능통’했고 ‘주의 도’를 잘 배워서 회당에서 열심히 예수님에 관한 것을 자세히 가르쳤다. 그런데 그는 요한의 침례만 알고 있어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에게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가르쳤다. 그 후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려고 하자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추천서를 써서 잘 영접하라고 했다. 그는 아가야 지방에 가서 믿는 자들에게 큰 유익을 주었는데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사람들 앞에서 힘 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겼다. 그 무렵 바울은 당시 로마 제국의 소아시아 주(州)의 수도인 에베소에 도착했다. 바로 이 에베소가 바울의 제3차 선교여행의 최대 선교지가 된다. 바울은 그곳에서 열두 명 정도의 ‘제자들’(믿는 자들)을 만났다. 그는 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아니라고 하면서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요한의 침례를 받았다고 했다. 바울이 그들에게 바로 그 요한이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고 했는데 그가 예수님이라고 했다. 그들이 그 말을 듣고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다. 이것은 신약에 기록된 유일한 재침례의 사례였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이 임하셔서 그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게 되었다. 학자들은 이를 가리켜 ‘에베소의 오순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바울은 회당에서 석 달 동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했다. 그러자 바울은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했다. 이 두란노 서원은 두란노라는 선생의 교습소로서 하루 중 가장 더운 시간 동안(오전 11시~오후 4시) 비워 뒀는데 바울이 그 시간을 이용한 것이다. 먼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후에 바울이 직접 말씀으로 훈련시킨 결과 에베소 교회는 아시아 지역에서 든든한 선교 기지가 될 수 있었다. 문자 그대로 성령 충만과 말씀 충만이 균형을 이루게 되자 건강하고 탄탄하게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다. 2년 동안 바울이 이런 사역을 펼치자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는”(행 19:10) 열매가 나타났다. 여기에서 제2차 선교여행 때 바울이 아시아에서 선교하려 했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마게도냐로 가게 된 것을 일컬어 ‘바울이 유럽을 향해 올라탄 배에 눈부신 서구 물질문명도 함께 갔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도행전의 내용에 전혀 맞지 않는 해석임을 재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제2차 선교여행 때는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유럽 땅인 마게도냐로 건너갔지만 제3차 선교여행 때는 소아시아 지역의 에베소로 돌아와 무려 2년 3개월 이상이나 머무르며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복음과 함께 물질문명이 유럽으로 갔다가 다시 아시아로 복귀했다는 말인가? 유럽과 마찬가지로 아시아도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의 대상이었다. 김호성 부목사(목회신학)
  • 2022.10.0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71)제2차 선교여행-고린도교회의 부흥
  • 바울의 2차 선교여행에서 꽃을 피운 곳은 고린도였다. 고린도에 오기까지 그가 헬라의 주요 도시 네 곳에서 복음을 전했지만 끊임없는 박해와 환난 속에서 겨우 탈출하는 위기일발의 연속이었다. 그에 따라 선교의 열매도 그다지 풍성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인적, 물적 교역이 가장 활발했고 경제적으로는 풍요했지만 각종 이방신들을 섬기는 우상숭배와 음란 방탕으로 영적 도덕적으로는 소돔과 고모라를 방불하게 하는 고린도에 도착했으니 바울이 의기소침해지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 장미꽃을 피우도록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바울의 든든한 동역자가 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먼저 로마에서 고린도로 보내셔서 천막 만드는 일에 종사하도록 하셨다. 따라서 생업이 같은 바울은 자연스레 그들과 함께 살며 일도 같이 하게 되었다. 바울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고 거기에 모인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권면했다(행 18:4). 그때 마침 베뢰아에 있던 실라와 디모데가 고린도로 내려와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믿음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고 있고 데살로니가를 급히 떠난 바울을 여전히 사모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살전 3:6~8). 기쁜 소식을 들은 바울은 더욱 담대히 “예수가 메시야(그리스도)”임을 선포했다. 그러자 회당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대적하고 비방하기 시작했다. 이에 바울은 옷을 털면서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행 18:6)라고 선언하고 회당 옆에 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이방인 중에서 유대교 신앙을 가진)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갔다. 바로 이 집이 고린도교회가 되었다. 새로운 모임 장소에서 회당장 그리스보 일가를 비롯해서 수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침례를 받았다. 그즈음 밤에 주님께서 바울에게 환상으로 나타나셔서 바울에게 담대함과 확신을 주셨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 18:9b~10). 이 말씀 그대로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 바울 일행이 2차 선교여행 중 가장 긴 기간인 1년 6개월 동안이나 고린도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수 있었다. 갈리오가 아가야의 총독이 되었을 때 유대인들이 바울을 잡아서 법정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총독에게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라고 고발했다. 바울이 이에 대해 해명하려고 하자, 총독은 그를 제지하면서 “문제가…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라고 하면서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냈다. 그러자 그들은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렸지만 갈리오는 모르는 척 했다. 며칠 후 바울은 고린도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를 타고 2차 선교여행의 출발지인 안디옥을 향해 떠났다. 인간의 눈과 하나님의 눈은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을 바울의 고린도 선교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9). 복음의 불모지 같았던 고린도가 부흥의 도가니가 되어서 바울이 2년 가까이 그곳에 머물며 복음을 전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인간의 모든 불가능은 가능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김호성 부목사(목회신학)
  • 2022.09.0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구약산책 신약산책
    요한계시록-세상의 끝을 보다
  •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20~21)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시간의 흐름을 따라 흐른다. 그 시간은 언젠가는 끝에 다다를 것이다. 시간의 끝에 이르렀을 때 세상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시간의 끝, 즉 종말의 때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될까? 요한계시록에 그 해답이 담겨있다. 요한계시록의 저자, 배경, 구조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사도 요한이다(1:1~2). 사도 요한은 주후 90년경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 정치범수용소인 밧모섬에 유배를 가게 되는데 이때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다. 도미티아누스는 황제숭배를 로마 전역에 강요했던 군주로 자신을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차 없이 형벌을 가했다. 오직 예수님만을 구주로 고백했던 그리스도인들은 당시 대대적인 박해에 시달렸고 많은 이들이 순교를 당하거나 유배를 갔다.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인이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켜야 했던 공포의 시대에 기록되었던 것이다. 요한계시록 1~3장에는 요한이 주님께 계시를 받아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기록되어있다. 일곱 교회를 향한 메시지의 공통점은 예수님께만 충성을 바치라는 것이다. 4~11장은 세상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인 일곱 인과 일곱 나팔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12~19장은 예수님의 승리와 사탄의 패배가 기록되어 있다. 20~22장은 천년왕국의 시작과 사탄의 완전한 패망,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의 도래가 기록되어 있다. 요한계시록의 장르 요한계시록은 편지이다(1:4).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주님께 말씀을 받아 기록한 내용을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게 보낸 편지이다. 편지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수신자들이 있고, 발신자인 사도 요한의 구체적인 메시지가 담겨있다. 요한계시록은 예언이다(1:3, 22:7). 예언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전하는 말이다. 신약성경에서 요한계시록만큼 앞으로 벌어질 일을 길고 자세하게 다룬 책은 없다. 요한계시록은 묵시이다(1:1). 묵시도 예언처럼 앞으로 벌어질 일을 말하지만, 예언과 구별되는 점은 예언이 ‘현재의 세상’이 변화될 것을 전한다면, 묵시는 ‘현재의 세상’이 지나가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올 것임을 전한다는 것이다. 묵시의 중심에는 예수님의 재림이 있다.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지금의 세상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 즉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다는 것이 기독교 묵시의 핵심 주제이다. 요한계시록을 볼 때 유념할 점 요한계시록을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부합하게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상징으로 가득 채워진 이 어려운 책을 해석함에 있어서 무엇을 유념해야 하는지 살펴보는 일은 가능하다. 첫째, 요한계시록을 역사의 사건이 차례대로 기록된 책으로만 여기지 않는다. 요한계시록이 역사에 벌어질 일들을 순차적으로 기록한 책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러한 주장이 틀렸다고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독교적 역사관에서는 ‘역사 속에 펼쳐질 구체적인 사건들을 알아가는 것’보다 ‘예수님이 초림하심으로 역사 속에 하나님 나라가 시작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요한계시록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역사 속에 일어날 일을 알려 하기보다 예수님이 구원을 완성하심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시작됐다는 확신을 품고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해야 할 것이다. 둘째, 요한계시록은 초대교회 성도들을 향한 편지임을 기억한다. 혹자들은 요한계시록을 현대에 있을 일을 암호화하여 기록한 책처럼 여긴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는 요한계시록은 초대교회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한 편지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만약 요한계시록이 ‘현대’에 있을 사건을 암호화한 책이라면 목숨을 걸고 신앙생활 했던 ‘2000년 전’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이 책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책이 처음 쓰였을 때의 목적을 살피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의 교훈 시대정신에 고개 숙이지 말라 요한계시록이 쓰일 당시 로마제국은 다신교 문화가 시대정신을 지배했으며 이 같은 풍조에 편승하지 않으면 큰 손해가 따랐다. 사회적으로 소외됐으며 경제적으로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심지어 ‘다신’(多神) 중 하나인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유일하신 예수님만을 섬겨야 하는 그리스도인이 이 같은 시대정신을 따를 수는 없었다. 요한계시록은 다신교라는 반기독교적 시대정신에 휩쓸릴 위험에 놓인 성도들에게 유일하신 예수님만을 따르라고 말씀한다(14:4).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충성을 바친 성도에게는 ‘생명의 관’이 수여될 것이다(2:10).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한 반기독교적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 시대정신을 거부할 수 있는 용기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두려워 말고 소망하라 그리스도인들에게 요한계시록은 두려움을 유발하는 책이 아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우리 구주 예수님이 승리하실 것임을 말씀하는 책이며, 우리가 받을 구원과 우리가 입성할 하나님 나라를 예언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위로의 책이고, 사랑의 책이며, 소망의 책이다. 요한계시록 중간 중간에 기록된 천상에서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찬양은 우리에게 하늘의 감격을 선사하고 결미에 기록된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는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품도록 해준다. 요한계시록을 읽는 우리, 그리스도 안에 속한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은 무엇일까?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세상의 끝 날에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것이다. <끝>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1.12.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교회를 지켰던 믿음의 선조들
  •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요이 1:4) 성경에는 예레미야와 같은 긴 책도 있는 반면 매우 짧은 책도 존재한다. 이번에 다룰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가 그렇다. 짧은 책의 장점은 하나의 핵심 메시지가 일관되고 분명하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를 개관하고 이 책들이 전하는 교훈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요한이서 요한이서 개관 요한이서의 저자는 사도 요한이다. 편지의 수신자는 사도 요한의 영향력 아래 있던 작은 교회 공동체였을 것이라 생각된다(1:1). 요한이서는 동일한 저자의 책인 요한일서와 강조하는 메시지가 유사하다. 바로 거짓 교사를 경계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요한일서와 요한이서에서 울려 퍼지는 요한의 목소리를 통해 이단으로부터 예수님의 가르침을 수호하고 교회를 지키고자 했던 노(老)사도의 열심을 발견할 수 있다. 요한이서의 교훈 ① 서로 사랑하라(1:5): 요한일서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책답게 요한이서는 사랑의 메시지가 강조된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도 요한은 특별히 성도 간의 평등한 관계를 강조했다. 이는 한편으로 교회 내의 조직이나 위계적 직제에 대해 요한이 유독 거부 반응을 보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교회의 조직과 직제는 필요하다. 왜냐하면 교회를 질서 있게 운영하고 교회를 이단으로부터 효율적으로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직과 직제 때문에 기독교의 핵심 가치인 사랑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조직과 직제는 언제나 사랑이라는 그릇에 담겨 운영돼야 한다. ② 거짓 교사를 경계하라(1:7): 저자 요한은 교회를 향해 거짓 교사를 경계하라고 목 놓아 외친다. 이 거짓 교사들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자들이다. 성육신을 부정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부정하는 자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부정하는 자는 '사랑'이신 하나님을 모르는 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지 않으셨으면 즉 육체로 오지 않으셨으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십자가 대속은 성육신을 전제한다. 따라서 성육신 없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다. 요한삼서 요한삼서 개관 요한삼서의 저자 또한 사도 요한이다. 요한삼서의 특별한 점은 저자가 특정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바로 '가이오'라는 성도이다(1:1). 나아가 요한은 요한삼서에서 특정 개인을 책망한다. 그 사람은 '디오드레베' 당시 교회 지도자이다(1:9). 이처럼 특정인들의 이야기가 담긴 요한삼서의 특징을 통해 우리는 교리적 메시지뿐 아니라 성도 개개인의 삶과 이야기도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사랑하는 자, 가이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1:2). 우리가 무척이나 사랑하는 이 성경 구절은 사도 요한이 가이오에게 전한 말이다. 가이오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이 같은 축복의 말을 들을 수 있었을까? 요한삼서에 따르면 가이오는 참된 것을 분별할 줄 알았다. 그는 올바른 가르침을 전하러 온 순회 설교자들을 알아보고 그들을 사랑으로 환대했으며 교회를 위해 헌신했다(1:5~6). 우리도 가이오처럼 참된 것을 분별하고 교회를 사랑한다면,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되는 '삼중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유다서 유다서 개관 유다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동생 유다이다(1:1). 저자가 유대인이기 때문인지 유다서는 유대적 색채를 강하게 띤다. 유다서는 유대인의 조상들에 관한 이야기가 내용 중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 유다서는 이단, 특히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이 핵심 메시지이다. 그런데 유다서의 독특한 점은 보통의 서신들이 이단들의 거짓된 주장을 교리적으로 반박하는 일에 집중하는 데 반해 유다서는 이단들을 향해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 힘을 쏟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단에 대해 가장 신랄하게 규탄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육체는 귀중하다 유다서에서 책망 받는 이단 영지주의는 육체를 부정한 것으로 여겼다. 육체를 어찌나 혐오했던지 이들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육체를 지니셨다는 사실을 부인하기까지 했다. 성육신에 대한 부인은 명백한 이단적 주장이다.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육체는 정말 무가치한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성육신이 그 증거이다. 부활한 예수님이 '육체'를 지니셨다는 것 또한 증거가 된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이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하셨다고 말씀한다(고전 15:20, 44). 하나님은 '육체'를 지닌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셨다(창 1:31). 우리 또한 마지막 날에 예수님처럼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육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값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만이 아니라 전인격을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육체는 무가치하니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은 틀렸다. 그리스도인은 영, 혼, 육 모두를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거룩하고 온전하게 지켜야 한다. 유다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분이라고 말씀한다(1:24). 우리를 흠 없이 거룩하게 세우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 마지막까지 우리의 육체를 거룩하게 지켜나가자.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1.11.2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요한일서-하나님은 사랑이시라
  •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신학자 윌리엄 틴데일은 요한일서에서 받은 감동을 이렇게 기록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고 또 사랑할 수 있게 됐다." 요한일서는 사랑의 서신이다. 요한일서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며,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나타났다고 말씀한다.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구원받은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요한일서의 저자, 특징 요한일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다. 요한일서 1장 1절에서 저자 자신이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졌다는 표현은 저자가 예수님과 함께 지낸 요한임을 증명한다. 요한은 자신의 또 다른 편지인 '요한복음'에서 스스로를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요 13:23)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요한일서에서도 사랑을 핵심 가치로 내세운다. 그래서 요한에게 붙여진 별명이 '사랑의 사도'이다. 요한일서의 특징은 '사랑'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가령 '하나님의 의'를 강조했던 로마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고 또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다고 말씀한다(롬 3:26). 반면 하나님의 사랑을 기치로 내세우는 요한일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다고 말씀한다(4:9). 이는 요한의 또 다른 편지인 요한복음에서도 강조되는 부분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요한일서의 배경 요한일서는 주후 90년경에 쓰였다. 당시 교회는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영지주의 이단 때문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은 거룩하지만 육신은 부정하다는 이분법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영혼의 구원을 받았으면 육신은 아무렇게나 내버려 둬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은 육신으로 죄짓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요한일서는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에 반대해 진리의 빛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라고 역설한다. 영지주의자들은 한술 더 떠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지 않으셨고 오직 영으로만 오셨다고 주장했다. 예수님이 부정한 육신을 입으실 리 없으셨다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이 영으로만 오셨다는 이단 사설을 '가현설'이라 한다. 요한일서는 이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반대한다. 요한일서의 저자는 첫 번째 구절에서부터 자신은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졌다고, 즉 예수님은 성육신하셨다고 말한다(1:1). 요한일서의 구조 요한일서는 비교적 짧은 서신이지만 그 안에서 핵심 주제가 반복되어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1장은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에 관해 말씀한다. 빛이신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거짓이 없이 진리 안에서 행해야 한다. 혹 죄를 범했다면 필히 죄를 자백해야 한다. 스스로를 속여 죄가 없다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죄를 시인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실 것이다. 2장에서도 빛 안에 거하는 삶에 관한 말씀이 나온다. 특별히 2장에서는 형제 사랑을 강조한다. 그리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 찬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이단을 물리치라 말씀한다. 3장은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에 관해 말씀한다. 재림의 소망을 지닌 사람은 예수님처럼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3:3).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3:9). 요한일서는 죄를 짓지 않는 삶을 구체화하는데,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다. 4장은 이단을 분별하라 말씀한다. 만약 누군가가 예수님이 육체를 지니고 오셨다는, 즉 성육신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한다면 그는 이단적 사상을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사랑을 보이셨고, 이 사랑을 경험한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 5장은 예수님이 "물과 피"를 지니고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한다(5:6). 이는 예수님이 육신을 지니셨음을 증언하는 것이며, 나아가 자신의 육신을 제물로 드리신 십자가 사건을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리며 죽으시고 구원을 이루셨다는 사실, 그리고 이를 깨닫게 하는 "성령"의 역사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성육신을 믿도록 한다. 요한일서의 교훈 성육신 없이는 하나님의 사랑도 없다 사랑은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래서 가장 귀한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화목제물로 내어주셨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이 육신을 지니고 오셔서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이다(4:9~10). 그러므로 성육신을 부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을 부인한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성육신하셔서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또 하나님을 만난다. 사랑의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독생자를 희생하신 사랑의 하나님께 속하게 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요한일서는 말씀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4:7). 사랑의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은 가장 값진 예수님을 내어주시며 우리를 사랑하셨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이웃을 사랑하자! 그리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온전히 거하실 것이다(4:12).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1.10.2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구속사적 성경읽기
    (19)영적 무장을 위한 3대 신앙
  •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로 했다면 영적 전쟁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영적 무장이다. 영적 무장이 없이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전쟁에 임하는 병사가 무장 없이 맨몸으로 나서는 법이 없듯이 영적 전쟁에서도 영적 무장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번 시간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무장, 곧 3가지 신앙적 무장에 대해서 알아보자. 1. 창조 신앙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자 우리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장본인이시다. 이 세상 모든 만물 가운데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아무리 과학이 하나님을 배제하고 진화론과 같은 이론으로 이 세상을 설명하려고 해도 그런 과학은 극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다음과 같은 우화가 있다. 어느 날 과학자 한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와 말했다. “우리 과학이 발전해 흙으로 사람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과학이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다 할 수 있다는 의미죠.” 하나님이 답하셨다. “정말 그러한가? 그렇다면 네 말대로 흙으로 사람을 만들어 보아라. 대신 네 흙으로 해라.” 이 우화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생명의 근원, 우주의 근원은 밝혀낼 수 없다는 것이다. 생명의 근원, 우주의 근원은 어디 있는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셨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2:1~2).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렇다면 창조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 달리 말해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 영광을 올려 드리며 살아야 한다. 2. 십자가 신앙 예수님의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은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함을 얻으며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축복을 얻은 것이다. 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말했다.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마르틴 루터는 이 말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어야 함을 천명한 것이다. 달리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빼놓고서는 기독교 신앙을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갈라디아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3~14). 예수님이 율법이 정한 대로 나무에 달려 죽는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우리를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브라함의 복과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셨다. 그렇다면 십자가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담대한 복음 증거자가 되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세상 앞에 절대로 주눅 들지 않는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만큼 나를 사랑하셨고 모든 저주의 굴레에서 해방하셨다. 또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우리가 삶의 형편과 조건, 세상의 시선에 위축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3. 부활 신앙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은 부활 신앙에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정사실이다. 그 증거가 무엇일까? 첫째,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 둘째, 부활의 목격자들이 있다. 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4~8). 특히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당하실 때 비겁한 도망자들이 되었던 제자들이 어떻게 다시 그 예수님을 전하다 순교자까지 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부활이 거짓일 수 없는 이유다. 물론 이런 증거에도 부활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셋째, 부활이 거짓이라면 그 거짓이 2000년 넘게 지속될 수 있었을까? 수없이 많은 사람이 그 거짓에 자기 목숨을 걸 수 있었겠으며 자기 인생을 헌신해 가며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을까? 부활은 사실이고 진리이다. 그렇다면 부활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결단코 세상에 얽매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안개처럼 쉽게 사라지는 인생길을 걷고 있으며 잠시 왔다가 떠날 나그네 인생을 살고 있다. 이 세상은 우리 삶의 종착지가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단기 선교 온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다. 바울 사도는 말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이 세상에 얽매여 잠시 잠깐뿐인 헛된 것을 찾다가 인생의 허망함에 무릎을 치며 후회하지 말고 부활 후 누릴 영원한 생명을 바라며 살아가자. 오정섭 목사
  • 2022.07.1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절대긍정의 믿음
  •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선교라고 정의되는 시대가 찾아왔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복음 증거만큼이나 그리스도인의 삶이 주목받는 시대라는 뜻이다. 요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전하는 복음의 진정성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에서 찾는다. 따라서 성경을 삶의 원리 원칙으로 삼는 성경적인 삶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성경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절대긍정의 믿음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결론은 성도의 최후 승리를 말하고 있으며 다시 오실 예수님이 성도의 최후 승리를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 할 절대긍정의 믿음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그 땅을 정탐 다녀온 여호수아와 갈렙의 반응에서 절대긍정의 믿음이 지녀야 할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1.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을 갖고 싶어 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각 지파에서 대표 한 사람씩을 선발해 모두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에 보낸다. 그들은 40일간 그 땅을 돌아본 후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며 그 땅의 과일들은 극상품이라고 할 수 있고 그들이 누리는 것은 풍요롭다는 데에 일치된 의견을 내놓는다(민 13:25~27). 그러나 그 땅을 정복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의견은 긍정적인 의견 2명, 부정적인 의견 10명으로 갈린다. 긍정적인 의견을 내놓은 두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이다. 갈렙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한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민 13:30).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을 취하고자 하는 데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땅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비관적인 전망과 비판적인 어조에 쉽게 동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사람은 미래를 알 수 없고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매일 마주하는 삶의 과제 앞에 불안, 염려,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대면하는 문제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시고 자녀 된 우리의 삶을 위해 좋은 것을 예비해 놓고 계신 분이시다. 로마서 8장 32절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한다. 2.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는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의견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야훼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야훼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야훼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민 14:7~9). 그러나 나머지 10명의 정탐꾼들은 육신의 눈으로 확인되는 그 땅 주민들의 어떠함에 주목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2~33).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았기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땅에 대해 악평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라며 자신들에 대해서도 악평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이 무너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삶에 부정적이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분명히 차지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하나님은 그 땅을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고, 모세에게 정탐꾼을 보내라고 말씀하실 때도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했기에 그 땅을 차지하는 데에 긍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성경 말씀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책이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온갖 좋은 약속을 붙잡는 적극적인 신앙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은 절대긍정의 믿음을 소유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에 대한 기대로 가득하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실 것에 대한 거룩한 원함,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으로 충만한 절대긍정의 믿음으로 살아가자.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약속하신 가나안을 차지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정섭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신학연구소)
  • 2022.06.1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구속사적인 삶 - 감사(2)
  • 대한민국 법 중에 최고 상위법은 헌법이다. 헌법 10조에 보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흔히 말하는 행복추구권이다. 그런데 행복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국가도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해 줄 따름이다. 다시 말해 행복은 어떤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정해진 조건이 있으면 국가가 일정 수준의 국민은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1. 행복의 근원, 감사 그렇다면 행복은 어디 있을까? 감사하는 마음에 있다. 감사하면 행복해진다. 감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사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감사가 저절로 되거나 쉽게 되지 않는다. 만약 감사가 저절로 되고 쉽게 되는 것이면 감사가 하나님의 뜻이니 범사에 감사하라고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감사는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감사가 쉬운가? 불평이 쉬운가?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한 달 동안 5층 집까지 매일 걸어가야 한다고 가정하자. 억지로라도 계단을 오를 일이 생겨 운동할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할까? 아니면 곧바로 불평할까? 감사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원망 불평이 자연스러운 우리 본성이라는 중력, 그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감사가 등산처럼 힘든 이유다. 그러나 등산도 하면 할수록 쉬워진다. 감사가 그렇다. 산 정상을 향해 오르다 보면 달라지는 것이 있다. 시야다.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감사하면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못 보던 것을 보게 된다. 감사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불평하는 일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그 일들 외에는 제대로 못 본다. 불평하는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마음이 계속 불편하다. 물론 해결이 돼도 불평할 거리는 또 있다. ‘왜 이제야 해결이 되는 거지?’ 감사하는 사람은 시야가 다르다. 보이는 것이 다르다. 눈에 거슬리는 것보다 세상 아름다운 것이 훨씬 더 많다. 보이는 게 다르니 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왜 그렇게 사소한 일에 집착했지?’ 하는 생각이 드니까 감사하는 사람의 말에는 여유가 있다. 타인에 대한 포용의 한도가 그만큼 크다. 원망 불평으로 마음의 용량이 늘 마이너스가 되어 가면 타인에 대한 용납의 한도가 계속 줄어든다. 감사를 결단하고 훈련하자. 감사한 다음에 기쁨이 따라오고 불평한 다음에 짜증이 따라온다. 감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이끌어 가지만 불평은 사탄이 원하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이끌어 간다. 감사의 종점은 천국이고 원망 불평의 종점은 지옥이다. 2. 그리스도인의 감사, 넘치는 감사 우리의 감사가 어떠한 감사가 되어야 하는지 바울 사도의 권면을 들어 보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우리 삶은 예수님 안에 있다. 예수님께 우리 인생의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이다. 여기저기 왔다 갔다, 이리저리 오락가락하지 않고 예수님 안에 콕 박혀서 사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예수님 안에서 성장하는 여정이다. 말씀대로 살면서 굳센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는 것이다. 정리하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셨으니 예수님 안에 뿌리내리고 말씀 따라 사는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감사가 넘치게 하라고 권면한다. 누가 믿음이 강한 사람일까? 감사하는 사람이다. 내 믿음의 강도는 감사가 말해 준다. 내 믿음이 명품인지 불량품인지는 감사가 보여 준다. 감사는 명품 믿음의 보증서다. 감사가 없다면 불량품 믿음이다. 감사는 넘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넘치는 감사다. 자기 분량 이상의 감사를 하는 것이다. 내 기준 이상의 감사, 내 판단 이상의 감사, 내 감정 이상의 감사, 내 선택 이상의 감사다. 그러려면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가 가능한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예수님을 주로 영접했기 때문이다. 주는 ‘주인’을 말한다.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시니까 감사하라는 것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했으니”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영접했으니”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직분, 예수는 이름이다. ‘그리스도 예수’와 ‘예수 그리스도’는 강조하는 바가 다르다. 그리스도가 먼저 나오면 예수님이 그리스도, 곧 구원자로서 하신 일에 강조점이 있다. 구원자 예수님이 하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떠난 내 죄 때문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다. 나의 주님이 되셔서 천국 가는 그날까지 내 삶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고, 도우시며 책임져 주신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다. 성경이 다시 쓰이기 전까지는 변하지 않는다. 내 삶의 형편과 조건은 오락가락해도 나를 향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주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 되셔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도록 역사해 주실 것임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 삶의 형편, 조건, 기분, 감정과 상관없이 감사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 일평생 감사할 수 있다. 감사하자.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어렵고 힘들고 괴로울 때 인생이 마음대로 안 될 때 감사하자. 감사하면 사탄이 틈타지 못한다. 영적 시야가 넓어지고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 관계가 회복되고 인생이 달라지고 행복해진다. 아니 이미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Thanksgiving’뿐만 아니라, ‘Thanks-living’하자! 오정섭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신학연구소)
  • 2022.05.0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뿌리깊은 순복음
    (130)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43>
  • 자기 자랑으로 충만한 삶이 아닌 성령 충만의 삶 살아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무엇보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신실한 성도들은 자랑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현대 사회는 각종 광고로 넘쳐나고 있다. 조금만 눈을 돌려도 여기저기 광고가 눈에 띄고 듣고 싶지 않아도 각종 광고의 소리에 묻혀 살아간다. 각종 방송매체를 통한 온라인 광고는 물론이요 거리 곳곳마다 건물마다 현란한 광고로 요란하다. 현시대는 범람하는 광고들에 휩쓸려 사는 ‘광고 홍수의 시대’라 정의할 수 있다. 이런 넘쳐나는 광고는 비단 기업들의 광고 전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각종 인터넷 플랫폼과 사회관계접속망(SNS)을 통해 자신의 외모나 재능 그리고 사생활까지도 당당하게 노출해 광고하는 개인들도 많아졌다. 현시대는 자기를 드러내는 ‘자기 광고의 시대’임에 분명하다. 물론 이런 것이 모두 부정적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상업적이고 자극적으로 변질해 가는 것은 우려할 만한 상황임에 틀림없다. 심리학에서 어떤 개인의 심리상태를 측정하는 방법 중에 일정한 시간 동안 그 대상자의 연설 대화 혹은 일정한 길이의 문장에서 ‘나’라는 단어를 얼마나 자주 사용하는지 그 횟수를 측정하는 조사법이 있다. 이에 따르면 ‘나’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사람일수록 그 심리상태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성향이 두드러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한 언어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600만명 이상의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A. Hitler, 1889~1945)는 ‘나’라는 단어를 53단어에 한 번씩 사용했고, 그의 동조자였던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B. A. A. Mussolini, 1883~1945)는 ‘나’라는 단어를 83단어에 한 번씩 사용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나’로 충만했던 두 독재자가 일으킨 전쟁이 온 세계를 절망의 소용돌이로 몰고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눅 12:16~21)를 살펴봐도 부자의 언어인 짧은 3개의 절(눅 12:17~19)에 ‘내가, 내’라는 자기중심적 단어가 6번이나 등장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자기중심적 삶의 결과는 과연 무엇일까? 독특하지만 의미심장한 분석을 본적이 있다. 영어에서 ‘죄’를 의미하는 단어 ‘sin’의 중심에는 ‘나’를 의미하는 단어 ‘i’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죄는 자기중심적인 ‘자기 충만’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중심이 아닌 ‘내가’ 중심이 되는 것이 ‘죄’의 시작이라는 의미이다. 제일 무서운 우상은 바로 ‘나’라는 우상이다. 성도는 세상 풍조를 따라 ‘자기 충만’으로 살지 말고 말씀을 따라 ‘성령 충만’의 삶을 살아야 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 2022.11.1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29)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42>
  • 인간의 모든 자랑은 허무하고 허망한 희망 없는 그림자 같아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무엇보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신실한 성도들은 자랑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성도가 자랑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신의 힘 혹은 강함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나름대로 훌륭한 삶을 살던 사람이 무너지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자기 자랑’ 때문인 경우가 많다(렘 9:23~24). 그 대표적인 인물이 유다의 왕 히스기야다. 그는 바벨론의 사자에게 자랑하기 위해 자기의 보물고를 열어 자랑 하다가(왕하 20:13) 결국 모든 보물이 바벨론으로 옮겨지는 수치를 당하게 되었고, 자손 중에 몇몇은 바벨론의 환관이 됐다(사 39:1~7).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죽음에서 구원을 얻고 생명을 15년이나 연장받은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신의 힘을 과시한 결과였다. 둘째, 어떤 권력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했다(롬 13:1). 그런 이유로 세상의 모든 권력자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겸손히 그 분을 경외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 권력가는 결국 변질돼 교만하게 우쭐대다가 자기도 망하고 백성들도 망하게 한다. 남이 나를 높여 주면 권위가 되지만 스스로 자신을 높이면 권위주의가 된다. 권위는 신뢰를 얻지만 권위주의는 불신을 낳는다(잠 27:2; 시 52:1). 권력자들은 자신에게 아첨하는 입술과 스스로의 권력을 자랑하는 것 두 가지 모두를 조심해야 한다(고전 3:21). 스스로를 살아있는 신(神)으로 여겨 교만했던 헤롯 왕은 그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그를 쳐서 충이 먹어 죽게 됐다(행 12:21~23). “야훼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시 12:3). 셋째,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잠언 27장 1절은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기록한다. 야고보서 4장 13~14절은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기록하며 안개 같은 인생의 허무함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도 한 부자의 비유를 통해 유한한 인간이 장래 일을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가르치셨다(눅 12:16~21). 이렇듯 인간의 모든 자랑은 허무하고 허망한 희망 없는 그림자와 같다(대상 29:15; 고전 3:19~21).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2.10.1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28)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41>
  • 허탄하고 악한 자랑은 스스로 올무와 함정에 빠지게 만들어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특히 ‘자랑’은 그 특성상 풍선처럼 부풀려 과시하며 말하게 되는 습성이 있어 자주 문제가 발생한다. 자신의 실력을 자랑하거나 과시하려고 허위로 자신의 이력이나 경력을 부풀려 기록했다가 망신을 당하는 유명 인사들의 이야기는 일일이 나열하기조차 흔한 일이 돼버렸다. 그들의 결말은 너무나 부끄럽고 비참하다. 이처럼 성경은 ‘이생의 자랑’은 세상적이요 정욕적이고 악마적이라고 말씀하며(요일 2:15~16), 이러한 자랑은 허탄한 자랑이며 악한 것이라고 기록한다(약 4:16). 사슴 한 마리가 숲속의 샘에서 물을 먹는데 물에 비친 자기 자신을 보니 뿔이 얼마나 장엄하고 훌륭한지 스스로 감탄하고 있었다. 이와 달리 얇은 다리를 보니 너무 볼품이 없어 불만이었다. 다른 동물들 앞에서도 뽐을 내며 자신의 뿔을 자랑하고 있을 때, 갑자기 사자 한 마리가 덤벼들었고 사슴은 필사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사자도 빠르지만 평지에서 뛰는 것은 사슴에게 당할 수가 없었다. 끝까지 사자가 쫓아오자 사슴은 울창한 숲으로 숨어들었다. 아뿔사, 그것은 실수였다. 울창한 나뭇가지에 사슴이 그렇게 자랑하던 뿔이 걸리고 말았다. 사슴은 스스로 뽐내던 장엄한 뿔 때문에 결국 사자에게 잡아먹혔다. 누구든지 자랑을 하다 보면 그것의 올무에 걸리고 스스로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이목구비도 수려하며 특히 그 머릿결은 여느 여자들보다 아름답고 탐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렇게 잘 난 것을 감사히 여기고 아버지 다윗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했으면 좋았으련만 그는 반란의 우두머리가 돼 아버지 다윗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반역을 꾀했다. 어느 날 아버지를 쫓아가다 그 탐스러운 머리채가 상수리나무에 걸리게 됐다. 결국 타고 가던 노새만 빠져나가고 나무에 매달려 버둥거리고 있는데, 때마침 다윗의 장수 요압의 군사들이 발견했고 그를 쳐 죽이고 말았다(삼하 18:1~18). 허탄한 자랑이 그를 죽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하고 사랑이 넘치는 성도들은 자랑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야훼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야훼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야훼의 말씀이니라”(렘 9:23~24).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2.09.1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쉽게 풀어 쓴 교회사 산책
    (48)십자군 전쟁 이후 중세의 변화④
  • 탁발수도회
    십자군 전쟁 이후 등장한 급진적 청빈운동을 이끌었던 알비인들은 로마 가톨릭 측에서 볼 때 한낱 급진적 이단자들에 불과했다. 이노센트 3세와 호노리우스 3세 당시 그들을 선교하려던 모든 노력은 폭력적인 양상으로 변해가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도미니크회와 프란시스코회와 같은 탁발수도회가 창설되었다. 걸식수도회라고도 불리는 탁발수도회는 수도사들이 탁발(걸식)로 생활하는 데서 유래된 명칭이었다. 대표적으로 도미니크 수도회와 프란시스 수도회가 이에 속한다. 이들은 수도원 안에서 은둔하면서 영적인 삶에 몰두했던 기존 수도회와는 달리, 더 이상 은둔하지 않고 도시 안에서 직접 시민에게 설교하여 큰 영향을 끼쳤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창설자는 도미니크였다. 그는 1211년 라보르 시에서 이단자들이 군중들의 돌에 맞아 죽거나 화형되거나 십자가에 매달리는 현장을 목격했다. 이러한 알비인들과 관련된 유혈 사태를 겪으면서 그는 새로운 형태의 수도 운동을 결심했다. 기존의 수도회처럼 고정된 장소나 적막한 곳에 동떨어진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도심 한가운데로 들어가 청빈의 본을 보이며 살아가는 공동체를 꿈꿨다. 그들은 성서와 학문을 연구하는 것을 주요 일과로 삼았는데 학문연구를 위해서라면 찬송과 기도도 멀리할 수 있다는 규칙도 정했다. 이들의 중요 목표가 하나님의 말씀을 시민들에게 설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당시 수도원 결성이 금지된 상황(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교황으로부터 수도회의 결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도미니크 수도사들은 모자가 달린 검은색 외투를 착용하고 다녔으며, 회원들에게는 신학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일반지식도 갖추도록 요구했다. 주로 남자 수도사는 설교에 집중하고, 여자 수도사는 교육과 봉사에 집중하도록 했다. 유명한 도미니크회 사제들로는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엑크 하르트, 타울러, 사보나롤라 등과 같은 중세 스콜라신학의 대가들이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중세 말기 도미니크회는 교황의 사냥개라고 일컬어지면서 종교개혁의 가장 강력한 적이 되었다. 면죄부 설교자 텟첼, 추기경 카제탄, 잉골슈타트의 신학교수 에크 등 당시 개혁자 마르틴 루터를 공격하던 인물들은 도미니크회에 속해 있었다. 프란시스 수도회는 아시시의 프란시스에 의해 설립되었다. 방탕한 젊은 시절을 보낸 그는 전쟁 참가 중 중병을 치르면서 변화되었다. 그는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파송 설교에 감명을 받고 청빈했던 예수님과 사도들의 뒤를 따르기로 결단했다. 그 후 로마 순례 중 무너져가는 작은 교회의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프란시스여, 가서 네가 보듯 폐허가 되어 가는 나의 집을 수리하거라.” 그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 창고에 있던 옷을 팔아서 허름한 교회를 복구했는데 이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재건하는 그의 삶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외에는 다른 아버지는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절대적인 청빈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살았다. 이후 프란시스 수도사들은 사랑으로 뭉쳐 철저한 청빈의 삶을 실천했고 둘씩 다니며 전도했다. 사람들에게 회개의 설교를 외쳤고 문둥병자와 버림받은 자들을 도우며 함께 생활했다. 이러한 걸식수도회와 함께 12세기에는 카르멜리터의 은둔파 수도회, 13세기에는 어거스틴의 규율을 철저히 지켰던 어거스틴 은둔자 수도회가 설립되었다. 특별히 후자는 마르틴 루터가 머물던 수도회로 잘 알려져 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2.11.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47)십자군 전쟁 이후 중세의 변화③
  • 교황권의 쇠퇴와 아비뇽 유수
    ‘카노사의 굴욕 사건’(21년 12월 25일자 참조)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중세 전반기 교황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비록 하인리히 4세와 같이 왕권 강화를 위해 교황의 절대 권위에 대항하는 인물이 등장하기도 했으나 결국 수 세기 동안 형성되어 온 교권의 거대 권력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그러나 약 200년 동안 계속되는 십자군 원정의 실패는 이를 주도한 교황권의 위세를 크게 약화시켰고 자연스럽게 왕권의 강화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 변화에 대표적인 인물이 당시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였다. 그는 시대적인 상황 가운데 붕괴하기 시작한 교황의 지배력을 벗어나 강력한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고자 했다. 당시 프랑스는 조부(루이 9세) 때부터 지속되어 왔던 십자군 원정(7차, 8차)의 실패로 인해 왕실 재정이 바닥이 난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잉글랜드와의 전쟁(1294~1303)과 플랑드르 공국과의 전쟁(1302~1304)이 연이어 발발하자 필리프 4세는 전쟁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프랑스 교회와 성직자에게까지 세금을 부과하는 강수를 두었다. 당시 교황이었던 보니파시오 8세는 칙서를 통해 이러한 프랑스 왕의 조치에 따르지 못하도록 금지시켰고 이에 맞서 필리프 4세는 교황령과의 모든 교역을 차단하는 등 강력한 제제를 가했다. 그런 가운데 필리프 4세가 프랑스 성직자를 반역죄로 체포하여 투옥시키는 일이 발생하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필리프 4세는 성직자, 귀족, 시민의 대표로 이루어진 삼부회를 조직하여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를 기반으로 군인들을 동원하여 교황 보니파시오 8세 체포를 감행했다(1303년 아나니 습격 사건). 당시 교황은 교황권의 절대 우위를 주장하는 우남상탐이라는 칙서를 발표하고 국왕을 파문하려고 했다. 체포된 교황을 압송하는 과정에서 보니파시오 8세가 사망하고 말았다. 아나니 사건을 통해 교황권을 꺾은 필리프 4세는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보니파시오 8세의 후임으로 선출된 교황 베네딕토 11세가 8개월 만에 사망한 후 1년 동안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지 못했다. 추기경들이 필리프 4세와 화해를 모색하는 친프랑스파와 복수를 요구하는 반프랑스파로 나뉘었기 때문이다. 1305년이 되어서야 친프랑스파의 의견이 관철되어 프랑스 출신 베르트랑이 교황 클레멘스 5세로 피선되었다. 이후 교황청은 프랑스 왕의 강력한 간섭을 받았으며, 로마로 들어가지 못한 채 프랑스에 체류하게 되었는데, 1309년에는 필리프 4세의 요구에 따라 교황청이 아예 프랑스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후 1377년까지 70년간 교황청은 아비뇽에 머무르며 7명의 교황을 배출했다. 이 기간을 가리켜 ‘아비뇽 유수’(1309~1377)라고 일컫는다. 아비뇽의 교황들은 프랑스 왕의 영향 속에서 프랑스에 의존하게 되었고 교황권은 더욱 쇠퇴했다. 교황청은 그레고리오 11세에 이르러서야 로마로 귀환할 수 있었지만 이듬해 그가 사망하고 이탈리아인 교황 우르반 6세가 선출되자 프랑스 추기경들이 반발하여 프랑스인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선출하고 아비뇽으로 되돌아갔다. 유럽은 두 편으로 나뉘어 로마와 아비뇽의 교황을 각각 인정하였고 이러한 분열은 로마 가톨릭의 위상을 더욱 하락시켰다. 서로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교회의 분열이 심화되자 중재 명목으로 피사에서 공의회(1409)가 열렸다. 이 회의의 의장이었던 필라르헤스는 스스로 알렉산더 5세로 즉위하여 새로운 교황으로 자처했다. 이로 인해 세 명의 교황이 공존하는 상황이 되었고 교회의 분열(1378~1417)은 심화되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2.10.2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46)십자군 전쟁 이후 중세의 변화②
  • 급진적 청빈운동 - 발두스파와 카타리파
    계속되는 십자군 원정의 실패로 인해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동방의 성지에서 굶주리고 헐벗은 가운데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고향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물질적인 것에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었던 사람들 사이에 그리스도의 청빈한 삶을 본받으려는 열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삶을 더욱 자세히 알기 위해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참전을 종용했지만 이제 자신들의 비참한 현실은 외면하고 있는 교회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세속화된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더 이상 사람들의 영적·지적 목마름을 해소해주지 못했고, 결국 이러한 상황은 12세기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종교적 개혁 운동을 출현시켰다. 12세기의 청빈운동은 성직자 수도자에게서 영적 목마름을 채우지 못한 신자들이 직접 복음서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생활로 돌아가려는 개혁 운동이었다. 그 출발선에 발두스파와 카타리파가 있었다. 이들이 강조하는 것은 청빈, 설교, 참회, 자선이었다. 특별히 ‘리옹의 가난한 자들’이라고 불리웠던 발두스파는 1173년경 부유한 상인이었던 발두스가 모든 재산을 나눠주고 자국어로 된 성경 읽기를 강조하며 청빈과 속죄에 대해 설교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리옹의 주교는 그들이 라틴어 성경을 사용하지 않을뿐더러 평신도로서 설교하는 것을 못마땅해했고 결국 1184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 의해 파문당했다. 이에 반발하여 발두스파는 보편적 사제직만을 인정하면서 스스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완전한 청빈생활을 하는 자만이 그리스도를 전할 권리가 있다고 규정하며 점차 교회로부터 이탈했다.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이단 심문자들은 수상쩍은 사람에게 “사도신경을 외워 보라”고 하고 외우지 못하면 발두스파 사람으로 간주해서 이단으로 처벌했다. 이는 발두스파가 사도신경을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로마교회가 만들어낸 것으로 여겨 강하게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삶을 추구했던 발두스파와 달리 카타리파는 마니교의 이원론을 따르는 자들이었다. 프랑스 알비를 중심으로 활동했기에 알비파라고도 불린다. 이들에 따르면 전쟁과 죽음, 가난과 질병으로 가득 찬 세상은 구약의 악한 신(=렉스 문디)에 의해 창조되었다. 그러나 신약의 선한 신은 사람들을 세상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천사 중의 하나였던 그리스도를 오점이 없는 ‘순수한 영혼을 가진 자’(카타리)로 파견해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구원에 이르기 위해 철저한 금욕생활을 강요했으며 결혼조차 거부했다. 또한 세속적 권력과 부를 탐하며 가난한 백성을 돌보지 않는 교회와 성직자들을 사탄의 회당이요 위선자로 폄하하며 성사를 거부했다. 카타리파 성직자들의 철저한 금욕생활과 청빈생활은 당시 고단한 삶을 살아가며 부유한 교회에 대해 큰 반감을 가지고 있던 많은 이들로부터 폭발적인 호응을 받으며 급속히 퍼져나갔다. 이러한 급진적 청빈운동들은 로마 가톨릭의 거센 반발을 일으켰고 결국 이단으로 탄압받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특히 1208년 카타리파를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결성된 십자군을 가리켜 알비십자군이라고 일컫는데, 20년간 약 100만 명을 학살하면서 종교재판이라 불리는 이단심문제도를 출현시키기도 했다. 그들이 카타리파와 평범한 가톨릭 신자를 구분하는 법은 다음과 같았다. “일단 모두 죽여라. 주님께서는 누가 당신의 백성인지 아신다. 주님께 판단을 맡겨라!”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2.09.2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선교 뉴스
    전영훈 선교사, 필리핀 파송 
  • 재단법인 순복음선교회 이사장 이영훈 목사는 6일 성전비서실에서 필리핀으로 파송되는 전영훈 선교사에게 파송장을 수여하고 가족을 위해 기도했다. 전 선교사는 필리핀에서 교민 대상인 일로일로제일좋은교회와 현지인 대상 리잘순복음교회를 동시에 맡아 사역하게 된다.
  • 2022.11.11 / 오정선 기자

    순복음일본총회, 영산수련원서 2022년 총회 진행
  • 순복음 열정으로 ‘일본 일천만 구령’ 전진** **이영훈 목사 성령대망회와 세미나 인도
    재단법인 순복음선교회 순복음일본총회 2022년도 총회가 17~19일 경기 파주 영산수련원에서 진행됐다. 순복음선교회 이사장 이영훈 목사는 17일 오후 성령대망회와 18일 오전 세미나를 인도하고 ‘일본 일천만 구령’ 위해 헌신하는 선교사들을 격려하고 응원했다. 이영훈 목사는 17일 성령대망회에서 ‘성령을 받았느냐’(행 19:1~7)는 제목으로 설교하고 “일본 교회에 불같은 성령이 일어나 권능을 받고 복음의 증인으로 변화되길 기대한다. 10년 동안 일본에 1만 교회가 세워질 것을 기대하며 이 일에 순복음 선교사들이 앞장서 주길 바란다. ‘일본 일천만 구령’이 머지않아 이뤄질 것을 믿는다”라고 강조했다 18일 오전 이영훈 목사는 ‘조용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 오순절 성령 운동’는 주제로 세미나 강의를 이끌며 “순복음 신앙의 핵심은 십자가에서 완성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라고 말했다. 이영훈 목사는 세미나에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과정을 교회 개척기(1958~1961), 성장발전기(1961~1973), 세계화 시기(1973~현재)로 나눠 조용기 목사의 목회 철학 ‘삼중축복, 오중복음, 4차원영성의 적용’을 설명했다. 이영훈 목사는 “조용기 목사님의 삼중축복 메시지는 절망에 처해있던 한국사회에 꿈과 희망을 전했고 십자가 대속의 결과로 나온 삼중축복은 오중복음으로 확대돼 전파됐다”며 “십자가 대속을 통해 이미 이뤄진 삼중축복·오중복음이 오늘날 삶속에 적용되려면 우리의 생각 꿈 믿음 말이 절대긍정으로 바뀌어야 한다. 선교사들이 일본 성도들에게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신앙을 전하는 주역이 되어 조용기 목사님의 목회 신앙을 계승해 나가길 기도한다”고 말했다. 이번 총회에 참석한 순복음일본총회 선교사들은 18일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 묘지의 조용기 목사 산소를 찾아 추모예배를 드리고 조용기 목사 기념관도 둘러봤다. 같은 날 저녁에는 찬양예배가 열려 사단법인 순복음실업인선교연합회 동아시아선교회 전규원 회장과 부회장단이 참석해 일본 복음화를 위해 함께 기도했다. 이 밖에도 총회에서는 목사안수식 및 총회 보고, 각 지방회 모임, 실행위원회 등이 진행됐다. 순복음일본총회장 시가끼 시게마사 목사는 “조용기 목사님이 강조하신 일천만 구령 비전을 위해 일본 주요 도시마다 순복음교회가 세워졌다. 순복음 사명으로 일본 복음화의 열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2022.10.21 / 오정선 기자

    김원일 선교사, 알래스카로 파송
  • 재단법인 순복음선교회는 9월 25일 주일 4부 예배 후 대성전에서 김원일B 목사에 대한 선교사 파송식을 진행했다. 이사장 이영훈 목사는 미국으로 파송되는 김원일 목사에게 파송장을 수여하고 교민 목회 및 지역 복음화를 위해 안수 기도했다. 김원일 목사는 미국 알래스카 은혜와평강순복음교회가 페어뱅크스 지역에 설립하는 지교회에서 교민 목회를 할 예정이다. 김원일 목사는 교회창립60주년행사단, 은평대교구, 복지사업국 등에서 사역해왔다.
  • 2022.09.29 / 오정선 기자

    선교지 소식
    세노 미츠키 목사(일본)
  • 크리스천의 비율이 1%도 안 되는 나라, 일본
    항공사 크리스천 기도모임으로 시작된 순복음나리타교회 순복음 신앙으로 ‘일본 일천만 복음화’ 위해 전진 할렐루야, 순복음 가족 여러분! 일본 일천만 영혼의 구원을 위해 언제나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복음이 많이 자라지 못한 일본 땅(크리스천 비율 0.6%)에서 순복음의 선교사들이 40년에 걸쳐 하나님의 역사를 계속 지켜온 것은 성도 여러분의 기도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순복음 가족 여러분의 기도로 순복음선교회 순복음일본총회(총회장 시가끼 시게마사 목사)소속 순복음 교회는 지금도 성령의 불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40년 전 조용기 목사님이 일본 땅에 뿌리신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복음의 씨가 90개 교회로 자라났습니다. 제가 목회하는 곳은 도쿄 국제공항이 있는 나리타입니다. 이곳에는 1년에 3000만명이라는 가장 많은 참배자가 방문하는 나리타산 신쇼지라는 절이 있습니다. ‘절과 함께 발전해 온 300년’이라 표현할 만큼 나리타는 이 절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더 기도 없이는 복음을 전할 수 없는 곳이 바로 이 나리타입니다. 25년 전, 대한항공 및 아시아나 항공 소속 크리스천이 모여 기도 모임을 결성해 순복음치바교회(고 김재현 목사)에서 모임을 이어오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계기가 돼 개척된 교회가 바로 순복음나리타교회입니다. 순복음나리타교회는 현재 한국인과 일본인을 중심으로 9개국 성도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예배는 일본어 및 한국어로 드려지고 있으며, 모든 예배에서 영어로 통역이 되면서 국제 교회가 됐습니다. 지난 3년간 코로나19로 인해 나리타공항이 제 기능을 못하면서 공항 관련 업무 종사자였던 많은 한국인 성도들이 한국으로 귀국하게 됐고 저희는 2년 반 동안 훈련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신앙으로 예배의 자리를 지키자 지금은 이전보다 더 많은 성도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교회로 회복됐습니다.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저희는 나리타 지역을 중심으로 순복음 교회가 없는 치바현 동부 지역 100만명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전도에 힘쓰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감염 확대 방지를 위해 대면 예배 인원수가 한정돼 한때 참석자가 감소했지만 하나님께서 많은 은혜와 지혜를 주셔서 순복음 신앙을 가진 자들을 위해 온라인 선교가 시작됐습니다. 가장 먼저 코로나로 인해 드리지 못했던 새벽기도회와 철야기도회를 줌(Zoom)을 통한 온라인으로 바꿔 진행했습니다. 온라인 사역은 전 세계 어디서나 접속이 가능해 평균 70여 명이 모였습니다. 평소 대면예배 참석자수를 생각해보면 이는 불가능한 인원이었습니다. 이 기적 같은 일은 온라인 사역을 시작한 첫 날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일예배 온라인 생방송(YouTube Live)의 경우는 100여 명이 참석해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이는 등록 성도 70명, 출석 성도 30여 명이던 일본의 작은 교회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숫자였습니다. 전세계에서 일본은 기독교 인구 비율이 가장 적습니다. “두 J의 복음화는 불가능하다”는 말이 있듯 일본(Japan)과 이스라엘(유대인·Jewish)의 복음화는 어렵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귀환 정책(아리아 운동)을 통해 100만이 넘는 크리스천(6%)인구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일본뿐입니다. 일본 복음화를 위해 계속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지난 9월 도쿄에서 열린 조용기 목사님 추모예배에서 이영훈 목사님은 강렬한 순복음 메시지를 전해주셨습니다. 일본은 반드시 부흥할 것입니다. 정말 작고 볼 품 없는 저이지만, 저도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는 믿음으로 열심히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일본 정부는 지난 10월 11일부터 코로나 관련 입국 규제를 완화하고 개인 관광을 허용했습니다. 여행으로, 비즈니스로 일본 나리타 공항을 이용하신다면 꼭 순복음나리타교회에 오셔서 함께 예배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교회의 기도제목을 공유합니다. ①치바 동부지역 100만명을 섬기는 교회가 되도록 ②300명의 예배자가 모이는 교회가 되도록 ③기도를 토대로 봉사와 전도하는 교회가 되도록 ④찬양과 기쁨, 감사가 넘치는 교회가 되도록 함께 중보기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2022.11.04 / 오정선 기자

    김주영 선교사(콜롬비아)
  • 보고타를 중심으로 순복음교회 세워 현지 복음화에 헌신
    도둑 두 번 침입해 선교비 전부 털려 큰 낙심 그러나 ‘선교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 깨달아 주님 주신 새 비전 ‘교회 개척 넘어 소외 계층 섬김’ 할렐루야! 남미 살사와 커피의 나라 콜롬비아에서 현지인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김주영 선교사입니다. 저는 2016년 11월 콜롬비아에 도착해 2년 여 준비과정을 거쳐 2018년 4월 수도인 보고타에 콜롬비아순복음교회를 창립하고 지금까지 주님께서 명령하신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콜롬비아에 도착한 후 사택에 두 번이나 도둑이 침입해 사역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선교비 전부를 털려 낙심이 컸지만 그 일로 ‘선교는 물질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경험한 것입니다. 생각지도 않은 분들이 저희를 찾아오셨고 그분들로 인해 성전과 사택을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집을 임대 계약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경험으로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에 때를 따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있음을 고백하게 됐습니다. 선교지를 위해 끊임없이 중보하시는 이영훈 목사님과 모교회 성도님들의 중보기도의 힘도 다시 한번 알게 되었습니다. 현재 저는 보고타에 세워진 콜롬비아순복음교회를 중심으로 베네수엘라와 가까운 리오아차 시에 현지인 교역자 가정을 파송해 리오아차순복음교회를 세우고 복음증거와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전진기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라과히라 주에 위치한 리오아차는 베네수엘라 국경에 인접한 마이카오를 거쳐 베네수엘라 난민들이 일자리를 찾고 몰려드는 도시로 난민촌들이 형성되어 있는 지역입니다. 또 콜롬비아순복음교회는 성도 개개인의 신앙성장을 우선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데 초점을 맞춰 사역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주일예배를 드린 후에는 성도들과 주일 말씀을 토대로 나눔의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나눔 사역을 통해 성도들이 말씀 안에서 자신의 삶을 비춰보고 실생활에 적용하는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앞으로 저희 사역 비전은 교회 개척을 넘어 현지 소외계층을 향한 섬김입니다. 지난 선교대회 때 한국에서 특수선교(장애인)를 하시는 목회자를 만나 교제하면서 콜롬비아에서도 접목할 수 있는 귀한 사역으로 생각하게 됐습니다. 사역지로 돌아온 후 이러한 비전을 현지 성도들과 공유했는데 모두가 한 마음으로 섬김 사역을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올해에는 사단법인 신청을 위한 서류준비를 진행하고 주변 장애우시설과 가정을 방문해 장애우와 장애우 가정들이 겪는 어려움을 듣고 공감하는 시간을 갖도록 했습니다. 내년에는 사역의 구체적인 계획과 프로젝트를 준비할 예정입니다. 또한 필요한 인적 및 물적 재원을 확보하는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특별히 특수 선교에 사용될 공간(1000평)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는 말씀을 붙들고 열심히 기도하며 나아가려 합니다. 모교회 성도님들의 관심과 중보기도를 부탁드립니다.
  • 2022.09.30 / 오정선 기자

    이한용 선교사(케냐)
  • 아프리카에 절대긍정 절대감사 신앙으로 희망 복음 전파
    현지인 제자 양성 통해 인근 선교 제한국으로 재파송 해 할렐루야! 2011년에 선교사 파송을 받아 케냐 나이로비 외곽에 위치한 영산 아프리카 미션센터를 맡아 사역하고 있는 이한용 선교사입니다. 동부 아프리카에 위치한 케냐는 한반도 면적의 2.6배 크기로 한국과 비슷한 인구수를 가지고 있으며 공용어로 영어와 스와힐리어를 사용합니다. 케냐는 약 50개 언어를 사용하는 부족이 어울려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케냐의 종교는 역사적으로 전통종교와 이슬람과 기독교로 나눌 수 있습니다. 케냐의 이슬람은 온순한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소말리아의 급진적이고 과격한 무슬림 세력들이 케냐에서 활동하면서 크고 작은 테러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케냐 무슬림들은 케냐 전역에 도로, 주유소와 식당 그리고 작은 모스크를 세우는 일에 공격적인 투자를 하고 있으며 도시와 지방 구분 없이 들어가 사회경제를 장악하기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정치와 교육, 법률, 군사 쪽으로도 새로운 엘리트들을 배치하고 있으며 아프리카를 대상으로 진행하는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동조해 동부 아프리카 관문인 케냐를 식민지 이전 이슬람 국가로 되돌리려는 거대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교지 상황 속에서 우리는 세 가지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첫째, 목회자 양성 사역(영산신학교, 목회자 훈련, 현지인 사역자 파송) 둘째, 차세대 리더 양성 사역(어린이 사역, 장학 사역) 그리고 셋째 교회개척 사역(성전건축 및 자립교회)입니다. 우리는 케냐 영산 미션센터를 중심으로 케냐 영산신학교 특히 남·북수단, 에티오피아 무슬림 지역처럼 복음의 문이 닫혀 있는 국가의 학생들을 훈련시켜 본국으로 파송해 목회사역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오순절신학과 4차원의 영성 등 필수과목을 반드시 이수시키고 매학기 영성훈련 특별주간을 마련해 졸업생들이 개척한 교회로 전도 여행을 떠나 노방전도, 축호전도, 설교 훈련 등 다양하고 실질적인 사역 경험들을 쌓도록 돕고 있습니다. 케냐 영산신학교는 케냐 뿐 아니라 복음이 닫혀있는 인근국가로 현지인 제자들을 파송시켜 복음 전파를 확장시킬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영산신학교에서 배출한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나이로비 슬럼지역을 비롯한 지방도시에는 20개의 지교회와 5개의 학교가 세워져 있습니다. 또한 성도들의 소득증대를 위한 자립프로젝트로 2018년부터 젖소 분양 사역을 시작해 지금까지 50가정에 젖소를 분양하였는데 코로나로 인한 기근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사역을 간략히 소개하면, 젖소를 분양받은 성도는 첫 출생 송아지(첫 열매)를 교회에 봉헌해야만 분양받은 소가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있습니다. 이때 생긴 첫 열매 송아지는 다음 성도에게 돌아가 같은 과정을 반복하는 선순환 구조로, 교회 공동체가 함께 젖소 프로젝트에 동참하며 선한 일들을 하는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우유를 팔아 얻은 수입 중 일부를 헌금해 교회를 건축했고 코로나 때 식량이 없어 끼니를 굶고 있는 다른 성도들을 위해 구제헌금을 걷어 식량이 필요한 곳에 나눠 주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선한 일들과 교회에 출석하면 젖소를 분양받을 수 있다는 소문이 마을에 퍼져 교회는 부흥하고 있고 젖소를 분양받은 성도 가정마다 경제적 자립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1993년 케냐에서는 조용기 목사님을 주강사로 아프리카성령화대성회가 열렸습니다. 2023년 7월 이영훈 담임목사님을 강사로 모시고 ‘케냐 성회 30주년 기념 성회’가 개최될 예정입니다. 오순절 성령운동이 다시 한번 아프리카 케냐를 중심으로 부흥되길 기대하며 이곳 목회자들과 기도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신앙을 통해 큰 회개와 성령의 역사가 이곳에서 나타날 수 있도록 기도로 동참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2022.08.05 / 오정선 기자

    선교사를 위한 중보 기도
    김미정 선교사(우크라이나)
  • - 전쟁이 속히 끝나도록 - 드니프로교회 성도들이 안전할 수 있도록 - 난민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 생활이 아름답게 열매 맺도록 - 동역하는 ‘믿음의말씀교회’와의 연합사역을 위해 - 선교사 훈련학교 진행과 선교사 파송, 재정이 채워지도록
  • 2022.11.25 / 오정선 기자

    박성택 선교사(태국)
  • - 새벽기도회 참여 성도가 늘어나도록 - 중·고등학생 대상 한국어 수업(기초반, 회화반)이 속히 개강되도록 - 필요한 교회 차량이 공급되도록 - 문화 선교를 위한 ‘글로벌순복음아카데미’ 진행을 위해
  • 2022.11.18 / 오정선 기자

    이호영 선교사(멕시코)
  • - 멕시코순복음교회 재정 상황이 나아지도록 - 교회에 새로운 가정이 채워지도록 - ‘평강의왕순복음교회’ 교육관 건축 공사가 잘 마무리 되도록 - 5개 선교지 교회 부흥과 성장을 위해 - 선교사 가족의 건강과 성령 충만을 위해
  • 2022.11.11 / 오정선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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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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