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마웅갑 목사(여의도순복음신안산교회 담임) - 하나님 나라의 확장자로 살아가기
  • 최근 교회에 등록한 성도가 출석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회사의 과도한 업무로 항상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승진 경쟁, 인간관계, 경제적 부담이 그를 짓눌렀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일하는 동료의 모습에서 뭔가 다른 점을 발견했다. 같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평안함과 여유로움이 있었다. 도대체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 지 궁금했던 차에 교회 출석을 권유 받고 전도의 열매가 맺어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도의 자연스러운 출발점이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삶을 살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다름의 근원’에 대해 궁금해 한다. 폴 트립은 『지금 누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 실재라고 강조했다. 이는 전도에 있어 핵심적인 통찰을 제공한다. 우리는 미래의 천국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나누는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한 간호사는 환자들을 대할 때 다른 동료들과 달리 두려움 대신 평안함을 보였다. “죽음도 두렵지 않아요. 저에게는 영원한 소망이 있거든요.” 그녀의 고백을 들은 동료들이 하나둘씩 교회를 찾기 시작했다. 또 다른 자연스러운 전도의 열매였다. 그것은 말이 아닌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증명한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전도를 ‘부담스러운 의무’로 생각한다. 하지만 리처드 포스터가 『영적 훈련』에서 말했듯 진정한 영적 실재를 경험한 사람은 그것을 나누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평안을 맛본 사람에게 전도는 자연스러운 흘러넘침이다. 제리 브릿지스가 『거룩한 삶의 추구』에서 말했듯 우리의 일상적인 거룩함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전도 도구다. 직장에서의 정직함, 가정에서의 희생적 사랑, 이웃을 향한 친절함이 모두 하나님 나라를 증명하는 증거가 된다. 전도를 의무가 아닌 특권으로 생각하자.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소식을 가진 사람들이다.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베드로와 요한처럼 우리에게 은과 금은 없지만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외로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두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평안을 전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가치를 아는 그리스도인으로의 특권을 누리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면 우리 삶 자체가 전도가 된다.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증명할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근원이신 하나님을 찾게 된다. 전도하기 복된 계절이 왔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자로서 이 땅에 복음의 향기를 퍼뜨리며 살아가자.
  • 2025.09.1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이용우 목사(여의도순복음횡성교회 담임) - 뜻 밖의 손님, 나그네 대접의 즐거움
  • 강원도 횡성에서 목회한지 어느덧 2년이 훌쩍 넘어 3년을 바라보고 있다. 지리적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1시간 20분이면 오는 거리이기 때문이다. 횡성이라는 위치상 심리적 거리가 멀어서 많은 분들이 시골 목회를 하는 줄 아신다. 그래서 이번 여름에는 선교하러 청년들이 많이 다녀갔다. 오지 선교를 꿈꾸고 온 청년들에게 미안했지만 여름사역에 함께 힘을 쏟아주어 너무 반갑고 고마웠다. 여의도순복음횡성교회는 읍내에 위치하고 있고, 주변에 아파트와 초, 중, 고등학교에 둘러 쌓여 도시 목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성도들 가운데 소를 키우시는 분이 한 분도 없을 정도다. 횡성은 인구가 2024년 7월 기준, 4만 6000명 정도이며 횡성하면 유명한 한우 사육두수는 6만 1000두정도 된다. 춘천에서 사역하는 친구 목사님이 계시는데, 그 목사님은 손님이 오시면 늘 ‘춘천 닭갈비’를 대접한다. 하지만 횡성은 한우가 유명해서 손님이 오시면 늘 난감하다. 횡성 한우는 일반 한우보다 값이 더 비싸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뜻 밖에 손님이 오면 대접에 고민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우리 교회는 1층에 요양원을 운영 중이다. 대부분의 치매 어르신을 천국 갈 때 까지 모시고 있다. 요양원은 우리 인생이 나그네임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현장이다. 교회에도 수많은 나그네가 다녀간다. 아는 지인 뿐 아니라 뜻 밖에 찾아오는 손님들도 많다. 2년 전 여름, 태풍 카눈이 북상했을 때 파주 예수전도단에 속한 팀이 2박 3일간 거처를 찾고, 사역을 하겠다고 해 극진히 대접했다. 그 팀을 통해서 우리 교회에 잃어버린 한 청년의 영혼이 소생되는 기쁨이 있었다. 그 팀은 매년 여름 마다 찾아와 위로를 더해주고 간다. 최근 교회 인근 어르신들에게 ‘말복 삼계탕’을 대접한 것도 그분들의 후원이 큰 몫을 했다. 올해 여름 우리교회에 본교회 가스펠청년들과 순복음강남교회 청년들, 여의도순복음구로교회 청년들이 와서 RK사역을 하고 돌아갔다. 그들도 우리 교회도 모두 대접하기에 서로 힘썼다. 그래서 모두에게 큰 기쁨이 있었다. 나그네 대접의 힘씀은 당연하다. 성경은 나그네를 대접하라고 당부하고 있으며 뜻 밖의 손님 대접에는 하나님의 큰 보상이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서 세 나그네(주의 천사)를 극진히 대접한 이야기는 후에 아내 사라에게 아들 이삭이 태어날 것을 예고 받고, 이어서 소돔을 위해 아브라함이 중재하는 장면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횡성에 뜻 밖에 오실 분들은 극진히 환영한다. 오셔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가시길 바란다. 대접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 2025.09.0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임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군산교회 담임) - 도전, 살아난다
  • 출석 교인이 아직 100명이 안 된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라는 사자성어를 되뇌며 어느 날 면접장으로 향했다. ‘우리 목사님! 우리 통장님!’이라고 3년 후 쓸 책 제목까지 정해놓고 말이다. 동네 주민들을 밑바닥부터 쌍끌이 조업으로 건져 올리려면 합법적인 신분이 필요하다. 집집마다 전도할 때 “안녕하세요. 통장입니다!”만한 명찰이 또 없겠다 싶었다. 면접 당일, 탱탱한 꼬치어묵 같았던 그 확신은 부풀렸던 복어 배 꺼지듯 축 처져버렸다. “목사님! 통장 지원은 왜 하신 거예요? 저희 일하기 부담스러워요.” 면접관들의 볼멘소리였다. 강원도에서만 잡히는 도루묵을 왜 군산 어시장에서 찾느냐는 소리처럼 들렸다. 다시스로 도망가던 배 밑창 요나의 깨어남처럼 당황스러웠다. 여리고성을 돌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끝날 외마디 함성을 외쳤을 때 여리고성이 무너졌던 기적은 내게 일어나지 않았다. 목적은 분명했으나 적확한 전술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군산에는 예수님 제자 마태가 앉아있을 법한 ‘호남관세박물관’이 있다. 세워진 지 120년이 되어가는 일본식 근대 건축물이다. 군산은 이렇게 지역의 역사성이 깊다. 한 발 더 뻗으면 광활한 고군산 군도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는데 ‘환경으로서의 지역’이 주는 자산이다. 로컬전문가들은 지방 소도시가 살아나려면 ‘지역과 환경과 사람’이 필요하다고 진단한다. 이 모든 것을 움직이는 것은 역시 ‘사람’이다. 교회가 그 ‘살아남’의 중심에 있을 수밖에 없는 근거다. 살리려면 끌어내야 한다. 한국인의 사회적 고립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우울증 환자는 100만명을 넘어섰고 외로움 지수도 영국보다 더 높다. 교회가 멘탈 케어 커뮤니티로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목회데이터연구소의 주장도 과하지 않다. 얼핏 서울 등 대도시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실제는 지방 소도시에서 그 고립도는 더욱 심각하다. 교회는 사회적으로 붐을 일으킬 수 있는 어젠다를 생성해 내야하고 사람들을 끌어낼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야 한다. 동시에 불신자들이 자연스럽게 성도들과 섞일 수 있는 커뮤니티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남녀노소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인프라가 축적된다면 교회의 도전도 더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혁신과 성장을 향한 도전은 계속되어야 한다. 주한 외국인들을 선교적 자원으로 품기 위해 내가 ‘한국어교원자격’에 도전하고 있듯이… 도전 100명, 살려내야 한다.
  • 2025.08.2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평신도를 위한 사도행전 이야기
    (107) 사도행전의 설교에 관한 가르침 ③
  • 계속해서 사도행전에 기록된 베드로의 설교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6) 상황: 성령 침례의 능력을 돈으로 사려는 마술사 시몬과의 충돌(8:18~24) (1) 대상: 마술사 시몬(18~19절)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2) 베드로의 책망: ① 저주: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20절) ② 회개 권면: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22~23절) (3) 결과: 마술사 시몬이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라고 요청함(24절) 7) 상황: 백부장 고넬료 집 설교(10:24~48) (1) 대상: 고넬료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24절) (2) 베드로의 설교(34~43절) ① 베드로의 깨달음: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34b~35절) ②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화평의 복음”이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됨(36~37절) -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38절) ③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과 십자가, 부활의 증인(39~41절)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39b~41절) ④ 우리에게 하신 명령(42절): 백성에게 전도;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심; 모든 선지자도 그에 대해서 증거(42~43a절) ⑤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43절) (3) 결과: ① 성령 침례와 방언: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44~45절) ② 침례: 베드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라”(47~48절) 8) 상황: 베드로의 고넬료 집 방문을 비난하는 할례자들(유대인들) 앞에서의 변증(11:1~18) (1) 대상: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1절), 예루살렘의 “할례자들”(2절) (2) 베드로의 해명(4~17절) ① 지난 일을 차례대로 설명(4~14절) 베드로의 환상(5~10절 = 10:10~16); 가이사랴 도착(11~12절); 고넬료의 환상(13~14절) ② 베드로가 말을 시작할 때 성령이 오순절에 체험한 것과 똑같이 그들에게 임하심(15절)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라는 말씀(16절) ③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17절) (3) 결과: 청중들 공감 -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18절) 김호성 목사(여의도순복음동부교회 담임)
  • 2025.09.1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06) 사도행전의 설교에 관한 가르침 ②
  • 지난 호에 이어서 사도행전에 기록된 베드로의 설교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4) 상황: 성전 미문 앞 못 걷던 자를 고친 후 공회에 잡혀가 심문 받을 때 (4:5~22) (1) 대상: 관리, 장로, 서기관; 대제사장 안나스, 가야바, 요한, 알렉산더와 대제사장의 문중(6절); “백성의 관리과 장로들”(8절); “이스라엘 백성들”(10절) (2) 베드로의 설교(4:9~12) ①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됨(9~10절) ② 구약 예언의 성취: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11절; 시 118:22 인용) ③ 유일한 구원의 길 예수: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12절) (3) 결과: ① 유대 지도자들의 반응: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이상히 여기며,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자 그들에게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경고함(13~18절) ② 베드로와 요한의 대답: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19~20절) ③ 관리들: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에 따라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줌(21절) 5) 상황: 베드로의 두 번째 투옥과 두 번째 공회 앞에서의 재판시(5:17~44) (1) 대상: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21절) 대제사장: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28절) (2) 베드로와 사도들의 설교(5:29~32) ①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29절; 4:19과 동일함) ②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높아지심: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 하나님이 살리시고 …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30~31절) ③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32절) (3) 결과: ① 공회의 반응 -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함(33절) ② 백성에게 존경 받는 바리새인 율법교사 가말리엘의 발언(34~39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38~39절) ③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자 사도들은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남(40~41절) ④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42절) 김호성 목사(여의도순복음동부교회 담임)
  • 2025.08.1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05) 사도행전의 설교에 관한 가르침 ①
  • 지금까지 우리는 사도행전의 (1)성령에 대한 가르침과 (2)기도에 관한 가르침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사도행전 전반에 걸쳐 기록된 설교(연설 포함)에 대해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베드로의 설교 1) 상황: 가룟 유다의 빈자리를 맛디아로 채울 때(1:15~26) (1) 설교 대상: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인 약 120명의 제자들 (2) 베드로의 설교(제의) (1:16~22) ① 가룟 유다의 죽음과 그의 자리를 메꾸는 것은 구약 예언의 성취(16~20절) ② 새 사도의 자격과 임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부활의 증인 -자격: “요한의 침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 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21~22a절) -임무: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해야(22b절) (3)결과: 기도한 후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선출(1:23~25) 2) 상황: 오순절 성령 강림 시 방언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이 엇갈릴 때(2:5~13) (1) 대상: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14절), “이스라엘 사람들”(22, 36절) (2) 베드로의 “오순절 성령 강림 설교”(2:14~36) ① 청중들의 오해 시정: ‘때가 제 삼 시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다’(15절) ②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선지자 요엘의 예언이 성취된 것(16~21절; 욜 2:28~32)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17~18절) ③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결과로 성령을 부어 주심(22~35절) ④ 소결론: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36절) (3) 회개와 구원 메시지(2:37~40) ① 청중들의 반응: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37절) ② 베드로의 회개와 구원 메시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38절),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40b절) (4) 결과: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41절) 3) 상황: 성전 미문 앞의 못 걷던 사람을 일으킨 후(3:1~10) 그 기적에 대한 설명(3:11~4:4) (1) 대상: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모인 “모든 백성”(11절) (2) 베드로의 설교(3:12~26): ① 청중들의 오해 시정: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걷게 한 것이 아니다’(12절) ② 부활하신 예수의 이름과 믿음이 이 사람을 낫게 함(13~16절) ③ 회개하고 돌이켜 죄 사함을 받으라(17~19절) ④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20~24절) ⑤ 너희가 악함을 버림으로써 복 받게 하시려고 예수를 보내심(25~26절) (3) 결과: 두 가지 상반된 반응 ① 제사장들,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이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잡아 가둠(4:1~3) ②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4:4) 김호성 목사(여의도순복음동부교회 담임)
  • 2025.07.1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쉽게 풀어 쓴 교회사 산책
    (81) 종교개혁㉑
  •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 ② 비텐베르크 시는 루터를 위해 금세공 장인이 만든 마차를 제공하고 추위와 비바람을 막기 위한 지붕을 달아주었다. 비텐베르크 대학은 여행 경비로 20굴덴을 지원했으며 동료 수도사와 교수 그리고 친구들이 루터와 길을 나섰다. 루터 일행이 라이프치히와 바이마르를 지나 에어푸르트에 도착했을 때 도시 입구에는 에어푸르트 대학 총장이 기사 40명과 함께 루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엄한 행렬이 루터를 호위하며 성 안으로 안내했다. 이튿날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대성당에 몰려든 군중 앞에 서서 설교했다. 인파의 무게로 발코니가 무너지려고 하자 사람들이 창문을 깨고 대피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루터는 거의 모든 도시에서 큰 환영을 받았으나 심적 갈등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여행 내내 스트레스로 인한 심한 복통과 변비에 시달렸으며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한편 보름스는 이미 연초부터 제국의회를 위해 1만명이 넘는 인파로 들끓고 있었다. 80명의 제후와 130명의 귀족 그리고 여러 나라의 왕이나 군주가 파견한 사절단이 모여들었고, 여기에 평의원, 성직자, 기사, 음악가, 하인, 광대들까지 몰려들었다. 인구가 7000명 남짓이던 도시는 갑작스러운 인구 폭증으로 큰 혼란에 빠졌다. 몇 달 전부터 이미 숙소가 동이 났고 의회와 총회를 열 장소와 사무국 및 법정을 마련하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루터의 소환 소식은 더욱 큰 기대를 모았다. 마침내 4월 16일 오전 10시 루터의 도착을 알리는 대성당 나팔수의 신호가 울리자 사람들은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2000명가량의 인파가 몰려들어 거리는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황제의 전령 슈투름이 선두에 섰고 루터의 마차가 뒤따랐다. 루터는 요한 기사단 건물을 숙소로 배정받았으나 두 명의 작센 관료와 함께 한 방을 사용해야 했다. 그럼에도 교회 개혁의 주창자를 직접 만나고 싶어 한 헤센 지방의 귀족들, 학자들, 그리고 평의원들이 잇달아 그를 찾아왔다. 4월 17일 수요일 루터는 황제와 제국의회 앞에서 심문받기 위해 오후 4시까지 의회에 출두해야 했다. 황제의 전령과 총사령관이 루터를 데리러 왔다. 그는 자신이 속한 수도회의 수도복을 입고 정수리를 말끔하게 깎은 차림으로 회의장에 들어섰다. 작고 초라한 방 안에는 젊은 황제 칼 5세가 앉아 있었다. 제국 통치자와 교회의 반항아가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루터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황제는 교황의 특사 알레안더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저자가 나를 이단으로 만드는 일은 없을 걸세!” 루터는 논쟁을 기대했지만 트리어 대주교의 신하 요한 폰 데어 엑켄이 진행한 심문은 예상과 크게 달랐다. 엑켄은 루터에게 탁자에 쌓아놓은 스무 권 가량의 책들을 가리키며 그것이 루터의 저술이 맞는지 또한 그 내용을 철회할 것인지 물었다. 질문은 라틴어와 독일어로 두 차례 반복됐다. 루터는 먼저 독일어로 이어 라틴어로 자신이 그 책들을 썼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철회 여부에 관한 즉답은 하지 않았다. 대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의 눈빛은 불안했고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확고하고 담대한 대답을 기대하던 많은 이들의 탄식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의회는 황제와 상의한 끝에 루터에게 하루의 시간을 주되 반드시 서면이 아닌 구두로 답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그렇게 루터는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학장)
  • 2025.08.2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80) 종교개혁⑳
  •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 ① “인쇄술은 이를 통해 하나님이 복음의 일을 전파시키기 위한 최고의 그리고 최근의 선물이다. 그것은 세상의 멸망에 앞선 마지막 불꽃이다.” 탁상담화에 남아 있는 루터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종교개혁 사상의 전파에 있어서 당시 인쇄술의 발달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다. 인쇄술은 사실 동양에서 개발되었지만 이를 본격적으로 활용한 곳은 유럽이었다. 1454년경 구텐베르크가 독일 마인츠에 첫 인쇄소를 세운 이후 유럽 전역으로 인쇄 기술이 확산됐다. 1480년에는 유럽 전역에 121개의 인쇄소가 운영됐고, 1500년에는 252개로 늘어났으며 그중 62개는 독일에 있었다. 1500년까지 252개 인쇄소에서 2만7000여 종의 작품이 약 2000만 부가 인쇄됐고, 그 가운데 약 3분의 1은 독일에서 생산됐다. 독일은 인쇄술의 중심지였으며 이러한 배경에서 루터의 논문들도 몇 달 만에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갈 수 있었다. 루터의 사상이 빠르게 확산되자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이를 저지하고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5세에게 기롤라모 알레안더를 포함한 추기경 사절단을 파견했다. 교황은 루터의 개혁 사상을 어떻게든 막으려 했고 먼 친척이자 정치적 동맹이었던 칼 5세에게 적극적인 개입을 요청했다. 당시 칼 5세는 1521년 1월 23일부터 보름스에서 제국의회를 소집해 독일 내 주요 사안을 다루고 있었는데 루터 문제에 대해서는 국외 추방으로 정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작센의 프리드리히 선제후를 비롯한 여러 제후들은 이에 강하게 반대했다(2023년 12월 29일자 기사 참조). 교황의 사절들과 이를 지지하던 제후들은 루터 문제를 조용히 마무리하길 원했다. 이미 루터에 대한 파문 교서가 공포됐기 때문에(1521년 4월 25일자 기사 참조), 교황의 판단을 재검토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을 꺼렸던 것이다. 반면 루터를 지지하는 제후들은 민중의 지지를 의식했다. 루터를 성급히 처벌할 경우 민심의 반발을 살 수 있다고 우려했다. 논쟁이 격화된 나머지 루터를 반대하던 브란덴부르크의 요아킴 선제후와 지지하던 프리드리히 선제후 사이에 멱살잡이까지 벌어졌고 평소 조용했던 팔츠의 루드비히 선제후도 소리를 치며 루터를 옹호하고 나섰다. 결국 황제는 루터를 제국의회에 직접 소환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토론은 생략한 채 루터에게 이단적인 주장을 철회할 것인지 여부만 묻는 방식으로 심문을 진행하고자 했다. 의회는 루터가 일부 주장을 철회한다면 다른 사안에 대한 답변도 들을 수 있겠지만 끝내 입장을 고수한다면 칙령을 발표해 루터의 법적 권리를 박탈하는 데 합의하기로 했다. 황제는 의회의 제안을 수용하여 루터에게 안전통행증과 함께 초청장을 보냈다. 제국의회의 회원들에게서 나오 는 세금을 크게 의존하고 있던 황제는 그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황제는 루터를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제국 전역에 루터의 책을 몰수하고 새로운 인쇄물을 찍어내는 것에 대한 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보름스에서 청문회를 열어 루터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전에 교황이 루터에게 내린 일방적인 판결을 지지한 셈이었다. 황제의 초청장은 3월 6일 발송됐고 같은 달 15일이 돼서야 루터에게 전달됐다. 루터는 이제 정말 보름스로 출두해야 했다. 정작 보름스에서는 루터가 진짜 오면 어떡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지만 루터는 제국의 대중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칠 소중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지체 없이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학장)
  • 2025.07.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79) 종교개혁⑲
  • 『크리스천의 자유』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 가운데 마지막은 그가 1520년 가을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낸 『크리스천의 자유』이다. 이 글은 단순히 교회의 잘못된 교리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복음이 한 사람의 마음과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공개서한 형식으로 작성되었고 라틴어와 독일어로 동시에 발표되었다. 루터는 인간을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보며 이를 바탕으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행위, 자유와 순종의 관계를 설명한다. 루터는 먼저 영혼의 자유 곧 인간의 내적인 자유에 대해 말한다. 그는 외적인 조건이나 종교적 행위만으로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사람은 비로소 의롭고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롬 10:10)라는 말씀에 근거한 이해이다. 루터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성도가 마치 신랑과 신부처럼 하나가 된다고 보았다. 그리스도께 속한 생명과 구원은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의 죄와 죽음은 그리스도께 전가되어 십자가에서 소멸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과 믿음이 주는 참된 자유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이다. “믿음만 있으면 되는데, 굳이 선행은 왜 필요한가?” 루터는 이 질문에 대해 명확하게 답한다. 진정한 믿음은 반드시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내적으로는 어떤 사람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완전한 자유인이지만 동시에 그 자유를 가지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받은 사랑은 자연스럽게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흘러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결코 게으를 수 없으며,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선한 일을 실천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이러한 선행은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한 조건이 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를 얻은 사람이 감사와 사랑으로 드리는 삶의 열매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올려드리고 사랑으로 이웃을 향해 자신을 낮추는 삶. 이것이 복음이 말하는 자유를 얻은 크리스천의 삶이다.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딤전 1:9)라는 바울의 말처럼 루터는 이러한 자유를 통해 크리스천이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제시하며 당시 교회와 성도들에게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촉구했다. 다음은 『크리스천의 자유』 중 한 단락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크리스천의 진정한 자유와 섬김의 의미를 곱씹어 보자.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 대하여 완전히 자유로운 주인이며 누구에게도 종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 대하여 완전히 섬기는 종이며 누구에게나 종이다. 이 두 명제는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서로 잘 조화된다. 이 두 명제는 모두 바울 자신이 말한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19절에서 “나는 자유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을 만인의 종으로 만들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로마서 13장 8절에서는 “너희는 서로 간에 사랑하는 것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빚을 지지 말라”라고 말한다. 사랑이란 그 본질상 기꺼이 섬기고자 하는 것이요 사랑하는 그 대상에 대하여 기꺼이 그의 뜻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그러하시다. 그는 만물의 주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여인에게서 나셨으며 율법에 굴복하셨다(갈 4:4). 그는 자유자이며 동시에 종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계시며, 동시에 종의 형상으로 계신다(빌 2:6f).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담당)
  • 2025.06.2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뿌리깊은 순복음
    (163)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76>
  • 참된 사랑은 그 누구에게라도 무례히 행하거나 소홀히 대하지 않아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 교만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하루는 시몬이라 불리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청했고 예수님은 그 초대에 응해 그 집에 들어가 앉으셨다. 때마침 그 동네에 살던 한 여인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왔다. 성경에는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기록돼 있다. 추측하기는 아마도 몸을 파는 창기였을 것이다. 그 여인은 먼저 자신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셨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냈다. 뒤이어 그 발에 입을 맞추더니 값비싼 향유를 그 발에 부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집주인 바리새인 시몬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그런 죄지은 여자가 자기의 집에 들어온 것조차도 탐탁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만일 이 사람이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라고 생각하였다(눅 7:36~39). 그 순간 이미 시몬의 생각을 간파하신 예수님은 시몬이 그 여인에게 무례히 행하기 전에 먼저 이렇게 물으셨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그러자 시몬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많이 탕감을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대답을 들으시고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네 판단이 옳도다.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인은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인은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다(눅 7:40~50). 바리새인 시몬은 율법의 눈으로 그 여인을 판단하고 무시했다. 그에게는 율법의 기준과 잣대는 있었으나 사랑과 긍휼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예수님은 사랑으로 그 여인을 감싸 주셨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불쌍한 여인을 시몬의 무례함에서 건져주신 것이다. 더불어 예수님은 바리새인 시몬 앞에서 다음과 같이 그 여인을 칭찬해 주셨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예수님은 참된 사랑으로 자신을 섬겼던 그 여인을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해 주셨다. 이처럼 사랑은 아무리 하찮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 비록 그가 흉악한 죄인이라도 말이다. 진정한 사랑은 누구에게도 무례히 행치 않는다. “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라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만으로 행함이니라”(잠 21:24).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5.08.2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62) 순복음의 7대 신앙-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75>
  • 예수님처럼 공손하며 언행에 무례함이 없어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 교만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참된 사랑은 절대로 무례히 행치 않는다. 이 말씀을 몸소 행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라고 기록한다. 이렇듯 예수님은 언제나 “내가 너한테 들어가도 되겠니?”하고 노크를 하시며 정중하고 친절하게 모든 이들을 대하는 분이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에게도 절대 무례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으셨다. 병든 사람에게, 고난받고 외로운 이들에게, 주리고 목마른 이들에게, 귀신 들린 이들에게 먼저 찾아와 주셨다. 무조건 자신을 따르고 믿으라고 명령하고 윽박지르지 않으셨다. 위로하시며 고쳐주시고 친구가 되어주시고 배불리 먹이시고 친히 귀신을 쫓아내셨다. 결국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저절로 그분을 따를 수밖에 없도록 만드셨고 절로 고개를 숙이도록 이끄셨다. 세상 사람들은 서로에게 함부로 대하고 사랑이 없어 무례히 행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앞세워 무례하고 지배적이며 폭력적이고 공격적으로 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 특히 함부로 반말을 내뱉고 말로 상처를 주고 무례히 행하는 것은 성령 충만하고 사랑이 넘쳐야 할 성도들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예수님처럼 누구에게든 공손하고 상대방을 높여 존중하며 무례함 없이 친절하게 정중한 태도로 대해야만 한다. 경북 예천군 대죽리 마을에는 언총(言塚)이라고 불리는 500년의 역사를 가진 고분(古墳)이 있다. 그 뜻은 입에서 나오는 ‘말의 무덤’이라는 뜻이다. 오래전 그 마을에 살던 여러 문중이 크게 싸웠는데 그 발단은 사소한 말 한마디였다고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들은 ‘말의 무덤’을 만들었다. 이웃을 향한 험담과 비방이나 원망과 불평이 담긴 거친 말이나 욕설을 사발에 뱉어 담은 후에 그 나쁜 말들에 대한 장례를 치르고 그것을 땅에 묻어 무덤을 만든 것이다. 상징적인 행동이었지만 놀랍게도 그 이후 더 이상 거칠고 부정적인 말들을 하지 않으려 노력한 결과 그 마을은 평화를 되찾았다. 이처럼 혀를 길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항상 긍정적이고 무례하지 않고 예의 바른 언어생활을 위해 노력하며 입술의 파수꾼을 붙여달라고 기도해야 한다(시 141:3). 거칠고 무례해 후회될 말이나 누군가를 낙심케 하는 부정적인 말은 입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한다. 거룩한 성도의 언어는 생명과 진리의 언어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며 범사에 은혜와 감사의 말로 온전해 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약 3:2).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5.07.1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61)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74>
  • 무례함의 기준은 나 자신이 아닌 상대방, 항상 조심하며 살펴 행동해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 교만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무례히 행하지 않으려는 행동은 존중과 배려로 가득 찬 선한 마음을 의미한다.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은 예의 바르다는 의미이고 그것은 경솔하거나 가볍지 않고 깊이 있는 행동을 의미한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가볍게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밖에 없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무례히 행치 않는 ‘예의 바름’을 사랑의 한 모습으로 이해하고 가르치고 있다. 다시 말해 사랑하면 상대를 대할 때 예의 바르고 따뜻하며 정중하게 행동하게 된다. 그런 예의 바른 행실을 통해 사랑의 마음이 전해지고 표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례히 행하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그것은 상대가 싫어하고 불편하게 여기는 행동이나 기분을 상하게 하는 행동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무례함의 기준이 나 자신이 아닌 상대방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경우든 상대가 무례히 여겨졌다고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예의 바름의 기준은 곧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진실한 배려의 마음으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무례히 행치 않으려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참된 사랑의 모습이다. 사도 바울은 왜 무례히 행치 않음을 사랑으로 보았을까? 당시 고린도 교회의 모습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초대 교회 시대의 성만찬 식사는 지금의 성만찬 의식과는 달리 규모가 큰 공동체의 식사였다. 문제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성도가 교회에서 그 식사에 참여하고 싶어도 그들에게까지 차례가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빈번했다. 소위 교회의 지도자급 성도들, 즉 지금으로 치면 제직들이 앞에서 먼저 배부를 정도로 음식을 다 먹고 성만찬 포도주도 취할 정도로 마셔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한 모습을 보며 바울은 그들의 무례함을 곧 사랑이 없는 모습으로 이해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1장 34절을 통해 바울은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고 책망하며 그런 행동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사랑이 없어 무례히 행하는 그 모습으로 그 모임이 심판받지 않기를 바란다고 엄중히 경고한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비판과 경고는 현재의 교회에도 유효하다. 교회가 무례히 행하면 비판받는 모임이 될 수 있다. 교회와 성도들은 진정 무례히 행치 않고 치열하고 치밀하게 빈틈없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행하고 실천해야 한다. 성령 충만한 교회와 성도는 마치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성령의 공동체처럼 무례히 행치 않는 사랑의 모습으로 세상의 칭송을 받아야 한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6~47).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5.06.2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기독교 설교자 열전
    찬가 설교의 대가 로마노스
  • 성경이나 교리 등을 시 형식으로 노래해 이영훈 목사의 설교에서도 그 흔적 발견 설교학자 다간은 방대한 분량의 책 『설교의 역사』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죽은 5세기 초부터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는 11세기까지의 시기를 설교 역사의 두 번째 기간으로 분류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이 시기는 거대한 제국 로마가 부패로 치닫고 있었고 그에 따라 미래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고 종말 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제국 로마의 멸망을 알리는 종소리가 저 멀리에서 들려오고 있었고 이제 온 유럽에 중세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사람 중의 하나가 동방교회 전통에 속해있던 로마노스(Romanos the Melodist)이다. 로마노스는 설교자라기보다는 콘타키온(Kontakion) 형식의 찬가 작곡자였다. 폴 스캇 윌슨은 설교 역사를 인물별로 정리하는 자신의 책 『그리스도 설교의 역사』에서 로마노스를 “동방교회 내의 시적인 설교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설교자요 모든 시대에 걸쳐서 위대한 종교적인 시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다(폴 스캇 윌슨, 『그리스도 설교의 역사』, 대한기독교서회, p 62). 로마노스를 설교자로 분류할 수 있는 이유는 콘타키온이 무엇인지를 살펴봄으로써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콘타키온은 비잔틴교회의 교회 전례음악으로 6세기경 콘스탄티노플에서 한창 발전했다. 성경 이야기나 교리를 운문(시) 형식으로 서술하는 장문의 찬가인 콘타키온은 성도들에게 성경 이야기, 교리, 성인들의 생애 등을 감성적이고 시적인 언어로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콘타키온의 구조는 서곡에 해당하는 프로이미온(prooimion)과 여러 개의 연으로 구성된 오이코이(oikoi)로 되어있다. 프로이미온은 1절로 된 짧은 도입부분으로 전체 주제를 요약해주고 계속되는 후렴구를 제시한다. 18개에서 24개의 연으로 구성된 오이코이는 각 연이 동일한 운율과 리듬 구조를 가지고 있고 프로이미온에서 소개된 후렴구를 사용함으로써 통일성을 유지한다. 현재에도 동방교회 전통의 교회에서는 콘타키온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전의 긴 형식 대신 서곡만을 부르는 경우가 많다. 다른 설교학자들과는 달리 폴 스캇 윌슨은 강단에서 행해진 설교뿐만 아니라 순교자의 죽음이나 찬가 역시 하나의 설교로 간주한다. 그런 이유에서 윌슨은 로마노스를 한 설교자로 분류하고 있다. 윌슨에 따르면 기독교 역사 속에서 운율과 박자에 따른 설교의 전통이 있어왔다. 165년 소아시아의 줄 사르디스의 멜리토(Bishop Melito of Sardis)가 발견한 ‘수난에 관한 설교’가 그 대표적인 예이며 아우구스티누스의 라틴어 설교 역시 운율, 박자, 평행법, 대조법, 모음을 통한 협음 만들기 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운율과 박자에 근거한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전승에 따르면 성가대원이었던 로마노스는 노래를 잘 부르지 못했다고 한다. 어느 성탄절 전야에 찬가를 불러야 했던 그는 성모 마리아에게 전심으로 기도하며 도움을 구했다. 그날 밤 꿈속에서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이 두루마리를 먹어라”라고 말했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두루마리를 입에 넣어 삼켰고 다음 날부터 놀라운 음성과 즉흥적인 찬송시를 만드는 능력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로마노스는 1000개 이상의 콘타키온을 썼지만 오직 59개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로마노스가 작곡한 콘타키온은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개인적인 삶에 대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특징은 당시 예술가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겸손한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그들의 작업이 교회에 속한 것이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작곡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윌슨은 추정한다. 둘째, 로마노스의 시적인 설교들은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보통 24개의 연으로 구성된 설교들은 행마다 하나의 해설이 곁들여졌고 어떤 경우는 각 행에 들어있는 음절의 숫자에까지도 해설이 덧붙여졌다. 셋째, 설교를 행하는 설교자는 음율과 박자에 맞추어 노래하면서 이야기를 진행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여러 등장인물을 다른 목소리로 표현해야 했다. 이렇게 여러 등장인물을 통해 성경과 교리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가르침도 전달됐다. 이렇게 진행되는 설교의 마무리 과정에서 “회중은 합창단이 그 설교의 중심 주제로 사용하는 동일한 후렴구를 최소한 25회나 반복해서 부르는 것을 들었고, 또한 그 회중도 합창단에 합세해서 따라 부르곤 했다”(『그리스도 설교의 역사』, p 65). 오늘날 로마노스가 행했던 찬가 설교는 찾기 어렵다. 그러나 그가 강조했던 감성적이고 이야기 중심의 설교 전통은 지금도 많은 설교자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이야기 중심의 설교, 감성을 자극하는 설교는 현대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게 하는 좋은 매개체가 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로마노스의 콘타키온의 마지막 부분에 회중들이 성가대와 함께 부르는 찬양을 자신의 설교에 적용하는 현대 설교자들도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는 설교 마지막 부분에 예화를 하고 이어 설교 주제에 맞는 찬송으로 설교를 마무리한다. 설교 후반부를 찬송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성도들이 지금까지 들은 설교의 내용을 되돌아보게 하고 그 내용을 따라 한 주간을 살아가도록 결단하게 한다. 로마노스의 찬가 설교의 흔적을 이영훈 목사의 설교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다. 조지훈 목사(한세대학교 설교학 교수)
  • 2025.05.09 / 이미나 기자

    교회의 역사는 설교의 역사라 할 수 있어
  • 김운용 교수 『한국교회 설교 역사』, 조용기 목사 다뤄 교회는 설교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베드로의 설교로부터 초대교회가 시작됐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에드워드 다간은 “기독교의 역사는 설교의 역사”라고까지 말했다. 이번 호에서는 그와 같은 기독교회의 설교 역사를 기록한 책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에드워드 다간(Edward Dargan)이 쓴 『설교의 역사』(A History of Preaching)일 것이다. 모두 2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1905년에 출판됐으며 무려 1200여 쪽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으로 교부들로부터 종교개혁 시기까지(1권, 70~1572년), 종교개혁 말기로부터 19세기까지(2권, 1572~1900년)의 설교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은 솔로몬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모두 3권으로 출간됐다. 스웨덴의 신학자이자 교회사 교수였던 잉베 브릴리오트(Yngve T. Brilioth)가 1945년에 쓴 『간략한 설교의 역사』(A Brief History of Preaching)라는 책도 있다. 1965년 영어로 번역된 이 책은 유대의 회당에서 시작된 설교로부터 초대교회의 설교, 헬라의 설교, 아우구스티누스의 설교, 중세 설교, 루터로부터 카르프조프(Carpzov)의 설교, 에큐메니칼적인 관점에서의 설교 연구(가톨릭교회 설교, 스위스 개혁주의 설교, 프랑스 개혁주의 설교, 청교도 전통의 설교, 미국의 설교, 성공회 설교)를 다루고 있다. 최근에 나온 설교 역사에 대한 책은 O. C. 에드워드 Jr.(O. C. Edwards Jr.)가 쓴 『설교의 역사』가 있다. 2004년에 출판된 이 책은 신약의 설교와 유대의 회당 설교로부터 시작해서 기독교 설교의 기원에 대해 살핀 후에 초대교부들의 설교, 중세 교회의 설교, 13~14세기의 설교, 르네상스로부터 계몽주의까지의 설교, 근대의 설교, 현대의 설교 등을 다루고 있다. 에드워드의 책은 기독교 설교의 시작을 2세기 이후, 곧 신약성경이 집대성된 이후로 잡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에 의하면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설교는 오늘날의 설교와 차이가 있는데 그 이유는 오늘날의 설교는 성경 해석을 근거로 행해지지만 신약성경의 설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설교를 이렇게 정의한다. “설교란 권위를 부여받은 설교자가 성경 구절에 근거한 교리에 대해 예배에 모인 기독교 청중들에게 말하는 것으로 설교자는 청중들이 자신의 설교 내용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근거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비유적인 이야기나 다양한 수사학적인 장치들을 사용한다.” 한편 그의 주장을 반박하며 다른 입장을 제시하는 학자들도 있다.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임마누엘 칼리지의 교수였던 폴 스캇 윌슨이 그런 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설교란 성경 해석 이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신약성경이 집대성되기 훨씬 이전부터 복음을 증거하는 기독교 설교는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폴 스캇 윌슨에게 예수님을 비롯해 복음을 전했던 사도들과 제자들은 이미 설교를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사도들이 보냈던 서신들 역시 하나의 설교라고 생각한다. 그 서신들은 수신자들의 교회와 교회가 당면하고 있던 문제를 복음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대안을 제시한 사도들의 설교라는 것이다. 에드워드의 책은 『교부들의 설교』(은혜출판사, 2017)라는 제목으로 번역됐다. 폴 스캇 윌슨 역시 설교 역사에 관한 책을 썼다. 이 책은 한신대에서 설교학을 가르친 김윤규 교수에 의해 『그리스도교 설교의 역사』(A Concise History of Preaching, 대한기독교서회, 2015)라는 제목으로 번역됐다. 이 책의 특징은 책 제목 그대로 기독교 설교 역사를 간략하게 인물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는 점이다. 또한, 신약성경을 하나의 설교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설교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를 살펴보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우리나라의 설교학자가 쓴 설교 역사에 관한 책 중에는 정장복 교수가 쓴 『인물로 본 설교의 역사』(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라는 책이 있다. 1986년 출판된 상권은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해서 미국의 찰스 그랜디슨 피니까지 인물별로 살펴보고, 1990년에 출판된 하권에서는 비이처를 비롯해 20세기 미국의 설교자들을 거쳐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까지 살펴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장신대 김운용 교수가 쓴 『한국교회 설교 역사』가 있다. 904쪽이나 되는 이 책에서 김 교수는 초창기 선교사들의 설교로부터 시작해서 일제 강점기의 설교, 해방 이후부터 1970년대의 설교, 1970년대 이후 교회 성장기의 설교 등을 인물로 살펴보고 있다. 이 책의 특징은 각 시대를 대표했던 설교자들의 삶과 설교를 잘 분석해놓았다는 점이다. 우리 교회 설립자이신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를 분석해 놓은 부분이 눈에 띈다. 조지훈 목사(한세대 설교학 교수)
  • 2025.04.18 / 이미나 기자

    아우구스티누스(Ⅳ)
  • 다양한 문장 반복으로 리듬감과 속도감 높여 질문과 대답 통해 청중과 대화 이끌어 현대 설교자들에게 설교학적 가르침 전달 지난 호에 이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설교를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설교가 그가 목회자로 안수 받았던 391년 성탄절에 행한 설교이다. 모두 세 개의 단락 ‘겸손한 자들은 하나님의 겸손을 굳게 붙들지어다’, ‘기뻐하라, 모든 그리스도인이여, 그리스도의 탄생일이라’, ‘그리스도의 두 탄생’으로 구성된 이 설교 중에 지난 호에서는 첫 번째 단락을 살펴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성탄절 설교의 두 번째 단락에서도 그의 수사학적 재능이 발현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가장 먼저는 짧은 문장들을 여럿 열거함으로써 설교의 속도감을 주는 부분이다. 두 번째 단락의 서두를 언급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남자들도 기뻐하고 여자들도 기뻐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각 성별이 영광을 받았습니다”라고 선포한다. 이런 짧은 문장이 연속해서 나옴으로써 청중들은 설교의 속도감을 느끼게 된다. 한편 짧은 문장들에 이어 등장하는 문장을 좀 더 길게 만듦으로서 앞에서 언급한 짧은 문장들이 하나로 정리되는 느낌이 들게 한다. 음악의 강약의 효과처럼 짧은 문장과 긴 문장을 의도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설교를 듣는 청중들이 문장을 통한 속도감과 리듬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반대되는 표현을 통해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스도가 남자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여자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남자[아담] 안에서 저주받은 모든 사람이 두 번째 남자[그리스도]에게로 오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죽음에 팔아넘긴 것은 여자[하와]였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준 것도 여자[마리아]였습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the likeness of the flesh of sin, 롬 8:3)이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죄의 육신(the flesh of sin)이 깨끗케 되고 정결케 되었습니다.” 이어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뻐하라’(rejoice)라는 선언구를 통해 거룩한 형제들, 거룩한 자매들을 언급한다. 여기서 거룩한 형제들은 결혼하지 않기로 서약한 사람들이다. 인간은 남녀의 결혼과 육체적 결합을 통해 태어나지만 예수님은 영적인 결혼, 곧 성령님을 통해 마리아에게서 잉태되고 태어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육신의 결혼을 포기한 사람들을 부르고 계신다. 거룩한 자매들이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동정을 잃지 않고 그리스도와 결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단락은 의로운 자들, 약하고 병든 자들, 종들, 자유로운 사람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기뻐하라는 권면을 함으로써 마감된다. 성탄절 설교의 마지막 단락은 “그리스도의 두 탄생”을 다룬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단락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이 갖는 영적인 의미와 육적인 의미를 언급한다. 그의 탄생은 한마디로 ‘역설’이다. 육체적으로 어머니에게 태어남으로서, 예수님은 그 날[성탄의 날]을 모든 세대에게 [선물로] 주셨으며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심으로서, 모든 세대를 창조하셨다. 그와 같은 탄생은 육신의 어머니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육신의 아버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육신의 어머니에게서 나셨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셨던 분인 것이다. 이어 아우구스티누스는 일련의 질문과 ‘혹은’(or)이라는 접속사를 통해 신성을 가지신 분으로서 예수님의 출생에 대해 말한다. “누가 그의 출생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사 53:8) 시간 밖에서 태어나신 분을, 혹은(or) 씨 없이 태어나신 분을? 시작이 없는 그 탄생을, 혹은(or) 전례 없는 이 탄생을?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없는 그 탄생을, 혹은(or)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던 이 탄생을? 끝이 없는 그 탄생을, 혹은(or) 시작이 곧 끝인 이 탄생을.” 세 번째 단락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님이 온전한 아이로 태어나신 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의 주인이신 그가 한 여인의 돌봄을 받으셨고, 우리의 존재 근원이신 그가 그녀의 품에 안기셨으며, 우리의 양식이신 그가 그녀의 젖을 빨고 계셨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의 그런 연약함과 경이로운 겸손 속에 ‘온전한 신성’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장은 그 아기 예수가 어머니 마리아보다 더 큰 분임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능하신 분이 자신에게 의존하는 어머니를 다스리고 계셨으며, 어머니의 젖을 먹으시면서도 진리로 그녀를 양육하고 계셨다.” 이상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성탄절 설교를 살펴보았다. 이 설교를 통해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뛰어난 설교자 이전에 작가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비록 그의 설교를 직접 들을 수는 없지만 그가 남긴 글을 보면서 우리는 그가 다양한 수사학적 표현을 사용했으며 이런 표현을 통해 청중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매우 효과적으로 전달했음을 알 수 있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우구스티누스는 현대 설교자들에게 설교학적으로 다양한 가르침과 테크닉을 전수해주고 있는 것이다. 조지훈 목사(한세대 설교학 교수)
  • 2025.03.14 / 이미나 기자

    기독교 렌즈로 보는 문화
    샘물과 같은 보혈은
  • 피는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이 땅의 수많은 생물이 피를 가지고 있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보혈(寶血)’이라 불린다. ‘보혈’은 문자 그대로 ‘보배로운 피’를 의미하며 신학적으로는 ‘인류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흘리신 피’를 가리킨다. 이 보혈의 참된 의미와 능력을 깊이 깨닫고 시로 고백한 인물이 있다. 바로 18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찬송가 작사가인 윌리엄 쿠퍼(William Cowper)이다. 1731년 영국 하트퍼드셔에서 태어난 쿠퍼는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허약한 체질에 우울증까지 겹친 그는 오랜 시간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터널을 지나야 했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으로 학교생활에도 어려움을 겪었고 간신히 학업을 마친 후 변호사가 되었지만 극심한 불안 증세로 인해 법정에 한 번도 서지 못했다. 이후 쿠퍼는 의회 서기직 면접을 준비하던 중 갈수록 커지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공황장애를 겪었다. 마음의 병이 늘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녔고 실패를 거듭할수록 절망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스스로를 무능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며 하나님조차 그런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실 것이라 단정했다. 끝내 세 차례에 걸쳐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했고 인생의 벼랑 끝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하지만 쿠퍼는 요양원에 입원한 후 신실한 그리스도인 코튼 박사의 따뜻한 돌봄을 받으며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마서를 묵상하다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3~25). 이 말씀이 그의 마음 깊은 곳을 울렸다. 예수님이 보잘것없는 자신을 위해서도 보혈을 흘리셨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달은 것이다. 그는 구원이 자격이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임을 믿게 되었다. 그렇게 쿠퍼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고 그의 인생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후 올니라는 작은 마을로 이주한 쿠퍼는 그곳에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지은 존 뉴턴을 만나 그의 목회를 돕게 되었다. 뉴턴은 쿠퍼에게 든든한 친구이자 믿음의 동역자가 되어주었고 덕분에 쿠퍼는 점차 몸과 마음의 안정을 되찾으며 신앙 또한 더욱 깊어졌다. 뉴턴은 쿠퍼의 문학적 재능을 알아보고 찬송시를 쓰도록 격려했다. 쿠퍼는 펜을 들고 지난 고통의 나날과 회심의 순간을 떠올렸다. 지나온 모든 여정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음을 고백하며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께 깊이 감사드렸다. 그러던 중 말씀 한 구절이 그의 마음을 두드렸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슥 13:1). 이 말씀에 영감을 받은 쿠퍼는 보혈의 은혜를 글로 써 내려갔다. 그렇게 나오게 된 찬송시가 오늘 우리가 부르는 새찬송가 258장 ‘샘물과 같은 보혈은’이다. 이 찬송의 영어 원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There is a fountain filled with blood drawn from Emmanuel’s veins”(임마누엘의 핏줄에서 흘러나온 피로 가득 찬 샘이 있다). 쿠퍼에게 예수님의 보혈은 생명수가 흘러나오는 샘과도 같았다. 샘이 목마른 자에게 생명을 주고 더러움을 씻어내듯 예수님의 보혈은 죄로 인해 죽은 자를 살리며 죄를 깨끗이 씻어준다. 쿠퍼는 한 줄기 빛조차 없는 암흑 속에서 자신을 건져낸 샘물 같은 보혈의 은혜를 찬양하고 또 찬양했다. 예수님의 보혈은 과거의 사건에 머무르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역사하는 능력이다. 때로 우리는 아무런 소망도 보이지 않는 깊은 절망의 순간을 마주한다. 그러나 찬송가 ‘샘물과 같은 보혈은’의 가사처럼 예수님의 보혈에는 지금도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깨끗이 씻어내고 우리를 새롭게 하는 능력이 있다. 혹시 지금 어둠 가운데 있거나 영적인 목마름을 느끼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보혈의 샘이다. 예수님의 피로 가득한 그 샘은 오늘도 우리에게 열려 있으며, 누구든지 와서 마음껏 마실 수 있다. 오늘 이 찬송의 가사를 묵상하며 마음 다해 불러보자. 나를 위해 흘리신 그 보배로운 피를 힘입어 다시 일어설 용기와 소망을 얻게 될 것이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주님의 피로다/ 보혈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보혈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국제신학연구원>
  • 2025.08.2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반 다이크의 <성령강림>을 바라보며
  • 성령강림절이 지나고 교회력은 다시 ‘보통의 시간’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성령은 ‘보통의 시간’에도 여전히 살아 역사하신다. 이때 오래된 그림 한 점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17세기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1599~1641)의 <성령강림>(The Descent of the Holy Spirit)이다. 반 다이크는 벨기에 안트베르펜 출신으로 16세에 이미 자신의 화실을 가질 만큼 탁월한 재능을 지닌 화가였다. 루벤스의 조수로 활동하며 종교화와 초상화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20세기 중반에는 이탈리아로 건너가 르네상스와 베네치아 화풍을 배웠다. 또한 이탈리아 화가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와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의 색채와 구도에서 큰 영향을 받으며 더욱 성숙한 작가로 성장했다. 이후 영국 궁정화가로 초빙되어 왕과 귀족들의 초상을 다수 그리며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의 작품은 루벤스의 화려한 색채를 계승하면서도 섬세하고 절제된 감정 표현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다. 특히 그는 성경 인물을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리기보다는 실제 인간의 감정과 몸짓을 담아내어 그림을 보는 이가 그 장면에 참여하도록 이끈다. 바로크 시대가 강조한 ‘극적인 순간’과 ‘신앙의 감각적 체험’을 탁월하게 구현해낸 그의 작품이 바로 <성령강림>이다. 이 그림은 1620년경 반 다이크가 루벤스의 화실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날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 위에 불의 혀처럼 임한 성령강림 사건을 생생하게 그려낸 이 작품은 오늘날 성령 충만을 사모하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그림 상단에는 어두운 구름이 드리워져 있다. 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고 모여있던 제자들의 현실을 반영한다(요 20:19). 그러나 그 구름을 뚫고 삼각형 모양으로 빛이 내려온다. 삼각형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상징하며 그 빛 위쪽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그려져 있다. 이 빛은 명확한 경계 없이 아래로 퍼지며 방 안에 있는 각 사람에게 닿는다. 그림 속 인물은 총 14명이다. 열두 사도, 마리아로 보이는 한 여성 그리고 오른쪽 기둥 뒤에 얼굴이 반쯤 가려진 인물이 포함된다. 이들은 성별, 나이, 옷차림, 표정, 자세가 모두 제각각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머리 위에 성령의 불이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는 성령이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임한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함께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임하셨음을 보여준다. 가운데 푸른색 옷을 입은 마리아는 두 손을 모은 채 성령을 간절히 사모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녀 앞에 강한 바람에 밀려 넘어질 듯한 인물은 성령의 임재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강력하고 실제적인 사건임을 보여준다. 그림 오른쪽 기둥 아래에는 두 권의 책이 있다. 하나는 독서대 위에 펼쳐져 있고, 다른 하나는 바닥에 놓여 있다. 이는 오순절 날이 이르기 전에 제자들이 기도에 힘쓰며 읽었던 구약의 율법서나 시편을 상징한다(행 1:14). 반 다이크는 이를 통해 성령 충만이 말씀과 기도 위에 세워진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또한 오른편 한 사도는 기둥에 팔을 두르고 있다. 기둥은 교회를 상징하며(딤전 3:15), 이 장면은 혼란과 두려움 속에서도 진리의 기둥을 붙잡고 서 있는 성도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눈길이 머무는 곳 오른쪽 가장자리 기둥 뒤에 얼굴이 가려진 인물이 있다. 반 다이크는 그 사람을 의도적으로 가려놓았다. 그는 누구일까? 열두 사도도 아니고 동정녀 마리아도 아니다. 반 다이크는 이 인물을 통해 시대를 넘어 지금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이 자리는 바로 당신의 자리다.” 이 그림을 바라보는 구경꾼으로 머물 것이 아니라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속으로 참여하라는 부르심이다. 성령의 충만함은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회복되어야 할 현재의 역사다. 성령은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사람에게만 임하지 않는다. 성령은 오늘, 지금 여기에, 사모하는 모든 이들에게 임하신다. 반 다이크의 <성령강림>은 다시금 우리의 시선을 성령의 충만함으로 이끈다. 지금은 무엇보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절실한 때이다. 지나온 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며 간절하게 기도하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대한민국과 세계 온 열방 위에 예수 그리스도 참 소망의 빛이 비치길 간절히 구하자. <국제신학연구원>
  • 2025.07.18 / 김용두 기자

    살아있는 예배로의 첫걸음 … 회중 찬송
  • 예배 중 성도들의 찬송이 대성전을 가득 메우는 순간은 언제나 감격스럽다. 찬송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선포하는 거룩한 예배 행위이다. 우리는 찬송을 통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사랑을 고백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회중 찬송’은 우리의 신앙고백이 더욱 풍성하고 아름답게 드러나는 방식이다. 각기 다른 삶의 자리에서 모인 우리가 한마음으로 찬송할 때 우리는 성령 안에서 연합하며 하나님 앞에 하나 된 공동체임을 드러내게 된다. 회중 찬송의 기원은 성경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미리암의 인도를 따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며 구원의 은혜에 응답했다(출 15장).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긴 후 레위 사람들을 세워 회중과 더불어 찬송하게 함으로써 예배 가운데 찬양을 공식화했다(대상 16장). 또한 이스라엘 백성은 매년 세 차례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며 시편을 함께 노래했다(시 120~134편). 초대교회 역시 함께 하나님을 찬미했고(행 2:47), 바울은 성도들에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권면하며 회중 찬송의 전통을 이어갔다(골 3:16).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부르는 찬양 속에 은혜의 감격과 공동체의 연합이 살아있음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그러나 교회 역사 속에서 회중 찬송의 자리는 위축되기도 했다.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교회는 제도화되며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지만 동시에 찬송 가사에 이단적 사상이 스며드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따라 4세기 라오디게아 공의회는 공인된 성가만을 허용하고 회중 찬송을 제한하는 조치를 내렸다. 이 결정은 이단 사상의 확산을 막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회중의 예배 참여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찬송은 성직자와 성가대의 전유물이 되었고, 일반 성도는 예배에서 소극적인 위치에 머물게 됐다. 이 흐름을 뒤흔든 것은 16세기 종교개혁이었다. 종교개혁의 핵심 취지 중 하나는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예배의 주체가 되는 회중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루터는 이 과정에서 음악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성도 중심의 음악을 적극적으로 추구했다. 그는 음악을 “신앙을 지키고 영혼을 맑게 하는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라 표현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음악을 통해 마음에 새겨질 때 믿음이 자라고 굳건해진다고 강조했다. 루터는 특히 성도들이 함께 찬송하며 열정적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가운데 이러한 유익이 더욱 커진다고 믿었다. 그래서 찬송의 주체를 다시 회중에게 돌려주고자 했고 그의 열정은 결국 독일 개신교의 대표적인 회중 찬송인 ‘코랄’(Chorale)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당시 예배에서는 라틴어로 된 그레고리안 성가가 사용되어 주로 성직자와 전문음악인만이 부를 수 있었다. 루터는 이러한 장벽을 허물기 위해 찬송의 가사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복잡한 다성 음악을 단순한 단선율로 개편하여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1524년 자신이 창작한 37곡의 코랄을 엮어 『기독교 가곡집』(Etliche Christliche Lieder)을 출간하면서 회중 찬송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그중 오늘날에도 널리 불리는 곡이 바로 새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Ein feste Burg ist unser Gott)이다. 종교개혁을 통해 회복된 회중 찬송은 단순히 음악에 참여하는 차원을 넘어 성도들이 예배의 주체로서 하나님 앞에 능동적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었다. 찬송을 통해 성도들은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마음에 새기며 더 깊은 신앙으로 자라났다. 나아가 회중 찬송은 성도 간의 연합을 북돋아 공동체 중심의 예배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지금까지 회중 찬송은 시대마다 문화와 언어를 달리하며 발전해왔고, 그 중심에는 늘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부르는 믿음의 노래’라는 본질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오늘날 자유롭게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은혜를 누리고 있다. 수많은 찬양곡이 넘쳐나는 가운데 회중 찬송은 여전히 교회 예배의 핵심 축을 이룬다. 그러나 때로는 찬송이 예배 전 의례적인 순서처럼 여겨지거나 의무적이고 습관적으로 불리는 현실도 부인할 수 없다. 이럴수록 우리는 회중 찬송의 의미와 가치를 마음에 새겨야 한다. 찬송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는 경건한 응답이며 살아있는 신앙고백이다. 함께 부르는 노래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되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로 묶인다. 찬송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믿음의 다리이자 세대를 넘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는 영적 유산이다. 이 귀한 유산을 소중히 지켜가며 찬송을 통해 예배가 살아나고 성령 안에서 하나 되는 연합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우리의 찬송이 대성전을 넘어 하늘에 닿아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이 되고 교회가 새롭게 되는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국제신학연구원>
  • 2025.05.1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선교 뉴스
    순복음가와고에교회, 여름축복성회
  • 일본 순복음가와고에교회는 5일 여름축복성회를 개최하고 성도들과 함께 영적 성장을 도모하며 ‘일본 일천만 구령’을 위해 기도에 힘을 모았다. 성회는 순복음가와고에교회 담임 타나베 야베스 목사의 사회로 진행됐으며 천안순복음소망교회 담임 임지택 목사가 강사로 초청돼 말씀을 전했다. 임 목사는 마태복음 15장 21~28절을 본문으로 ‘그 믿음이 기적을 불렀다’라는 설교를 통해 귀신들린 딸의 치유를 간절히 구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조명했다. 임 목사는 “믿음은 기적을 여는 열쇠”라며 “가나안 여인처럼 환경을 뛰어넘어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와 부르짖을 때 하늘 문이 열리고 응답이 임한다”고 강조했다. 성도들은 영혼 구원을 향한 헌신과 복음 전파의 확장을 위해 마음모아 기도했다.
  • 2025.08.15 / 오정선 기자

    일본 순복음사카이교회 새성전 입당
  • 일본 오사카 순복음사카이교회 성전 입당기념 감사예배가 7월 27일 개최됐다. ‘새성전, 새로운 시작’(왕상 8:27~30, 41~43)을 제목으로 설교한 순복음일본총회 양현근 간사이지방회장은 나까하다 미경 목사와 순복음사카이교회를 통해 순복음의 열정으로 ‘일천만 구령’의 역사가 일어나길 기대했다. 이날 예배에는 순복음사카이교회 성도들과 간사이지방회 목회자들, 23~24일 단기 선교를 위해 이 교회를 방문 중인 순복음예수가족교회 예가미션 선교팀, 성전 리모델링을 위해 헌신한 부산 지역 교회 성도 등이 참여해 순복음사카이교회 부흥을 중보하면서 은혜가 넘쳤다. 나까하다 미경 목사는 “노방전도 및 어린이 사역을 위해 한국에서 온 선교팀이 무더위 속에 이사까지 힘써 도왔다”고 고마워했다. 나까하다 미경 목사는 “이번에 무엇보다 큰 은혜는 구원의 열매였다. 일본에 함께 온 리모델링 팀장의 지인이 선교팀과 연합한 금요철야예배에서 감동을 받고 주님을 영접했다”며 “수많은 영혼이 주 앞에 나오는, 초대교회 부흥과 같은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새성전에서 일어나길 간절히 소망한다”고 말했다.
  • 2025.08.01 / 오정선 기자

    제51회 순복음세계선교대회 결과보고회 
  • 이영훈 목사 “150개국으로 순복음의 선교 영역 확장 생각”
    제51회 순복음세계선교대회 결과보고회가 16일 오전 CCMM빌딩 루나미엘레 컨벤션홀에서 개최됐다. 선교국 담당 김영석 목사는 ‘오직 말씀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성령으로’라는 주제로 펼쳐진 선교대회 및 선교사 수련회 관련 행사 내용, 예산 집행, 후원 내역, 총평 등을 공유하고 관계자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올해는 67개국에 파송된 673명 선교사 중 351명 선교사와 배우자, 자녀 총 635명이 본국을 방문해 선교대회 및 선교사 수련회, 자녀 캠프에 참여해 영성 회복 및 공동체 연합의 시간을 보냈다. 이영훈 담임목사는 “교회의 존재 목적은 선교이며 모든 걸 다 쏟아 부어도 전혀 아깝지가 않은 가장 가치 있고 귀한 사명이 선교”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현지에서 훈련된 제자들이 인근으로 파송돼 선교를 이어가는 시대로 150개국으로 순복음의 선교 영역을 확장해 나갈 생각”이라며 선교 비전을 제시했다. 또한 “각 지역의 신학교와 선교센터가 지역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야 하며, 국내에 체류 중인 다문화가족과 거주 외국인을 선교적 자산으로 삼아 훈련 및 제자화를 통해 선교 인재로 세워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말했다. 이날 모임에는 이번 선교대회를 후원한 장로회를 비롯한 교회 기관과 제자교회들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전 세계에 순복음 성령의 깃발을 꽂을 수 있도록 선교 관련기관과 교회들 간의 긴밀한 네트워크화를 다짐했다.
  • 2025.07.18 / 오정선 기자

    선교지 소식
     남광우 선교사(남아프리카공화국) 
  • “선교는 내가 아닌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열방선교교회 통해 선교와 미혼모 돕기 등 나서 다음 세대 깨워 아프리카 복음화 힘써 할렐루야! 아프리카 대륙 남단에 위치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사역하는 남광우 선교사입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대한민국의 약 12배 크기의 나라로 저는 수도인 케이프타운 더눈(Dunoon) 지역에서 열방선교교회를 담임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 남아프리카에 처음 온 것은 IMF 외환위기가 터진 이듬해인 1998년 4월이었습니다. 결혼 후 첫 아이가 백일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참으로 힘든 시기였습니다. 순복음의 정식 선교사로 파송 받은 것은 그 뒤 2008년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사역한 지도 벌써 26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그동안 여기저기에 건물들이 세워졌고 제자 교회도 3개가 됐습니다. 섬기고 있는 열방선교교회는 비록 큰 교회는 아니지만 선교하는 교회로서 동남부 아프리카 내륙에 위치한 말라위로 선교사를 파송해 두 가정이 사역 중에 있습니다. 넉넉지 않은 재정이지만 조금씩 후원을 하면서 함께 사역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말라위는 아프리카의 최빈국들 중의 한 국가로서 여전히 가난합니다. 음식 재료가 거의 없으며 주식으로 옥수수를 가루로 만들어 식사를 합니다. 이곳에서 3개 초등학교(음칼란조카, 음판데, 고고)를 대상으로 급식 사역을 진행하며 3000명 아이들의 배고픔을 달래주고 있습니다. 혼자하기에는 어려운 일이나 도움의 손길들이 있어 감사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면 굶어 죽는 일은 절대 없다는 것을 아이들의 기도와 간증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 굶기지 않으십니다. 세워진 현지인 목사들이 다 각자 자기의 교회를 맡아 열심히 봉사하고 섬기는 모습을 볼 때면 감사가 먼저 나옵니다. 제가 아프리카 선교지에서 사역하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면 ‘선교는 내가 아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차려놓으신 밥상에 저를 초대해 주셔서 함께 사역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때문에 선교는 내 생각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생각을 가지면 됩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사역에 어려움을 겪고 떠나신 분들이 많습니다. 제가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는 제 주변에 저희를 포함해 일곱 가정이 있었는데 지금은 저희 가족만 남았습니다. 자신을 내려놓고 사역할 때 점점 예수님께 가까이 가려했고 예수님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제 생각이 바뀌자 삶이 바뀌었고, 저희를 만나는 현지인들이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곳에서 저희가 두 가지 사역을 하게 하셨습니다. 첫째가 미혼모를 위한 사역입니다. 아프리카에는 미혼모가 많은데 10대 여자 아이들의 소원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이들의 소원이 직장을 가진 유부남의 아이를 낳아 그 집에서 아이를 키우며 사는 것이라 합니다. 축복된 결혼 속에 자녀를 잉태하고 출산해야할 여성들이 임신으로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안타까워 아내와 저는 미혼모를 위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에게 올바른 성교육과 함께 잉태된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요, 결혼과 가정의 소중함을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2년 전 아내가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에 가면서 미혼모를 위한 사역은 제자 목회자의 사모들이 맡아 진행하게 됐습니다. 또 다른 사역은 다음 세대를 위한 사역입니다. 하나님은 이곳에서 소중한 보석들을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다음 세대를 세우고 부흥시키는 일을 위해 저는 제자들과 힘써 달려갈 것입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아프리카를 위해 기도해주셨으면 합니다. 모두 보내는 선교사, 힘써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동역해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선교 사역에 귀한 열매가 맺히길 기도합니다.
  • 2025.09.05 / 오정선 기자

    허광명 선교사(인도네시아)
  •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인도네시아에 꿈과 희망 전하는 좋은 친구 되길 희망 저는 2014년 12월 28일 인도네시아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사역지인 반둥은 인도네시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며, 인구는 인도네시아 전체(2억 8400만명) 중 약 250만명에 이릅니다. 반둥은 인구의 92%가 이슬람을 믿는 가운데 기독교 인구는 5.1%에 불과합니다. 이곳에서 저는 에바다순복음교회를 중심으로 여러 사역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에바다순복음교회 저의 사역은 ‘꿈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라는 비전에서 시작됐습니다. 처음 도착했을 때 이곳 사람들의 눈빛과 언어, 삶 전반에서 소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나누기 시작하면서 성도들의 생각과 말, 행동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도들은 자발적으로 청소, 요리, 주일학교, 찬양팀 등의 봉사에 참여했고 교회가 살아났습니다. 부모가 변화하자 아이들도 매일 기도와 말씀 묵상을 실천하게 되었고, 장학금을 받아 대학에 진학하는 아이들도 생겼습니다. 그 결과 주일학교는 세 부서로 나뉘어 전임 교역자들이 사역하게 되었습니다. 단기선교팀의 헌신으로 보르네오섬까지 선교 범위가 확장되었습니다. 에바다 유치원 에바다 유치원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시작한 교육 사역입니다. 이슬람의 영향력이 강한 반둥 남부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유치원을 설립하였고 2023년 11월 7일 정식 교회 인가를 받았습니다. 인도네시아의 교육 기관에서는 예배가 가능하기 때문에 매일 아침 찬양과 말씀 묵상, 부모와의 공동 예배를 통해 아이들이 신앙 기초를 세워가고 있습니다. 신당라야 공부방 2015년부터 무슬림 밀집 지역에서 공부방을 열어 초·중·고 검정고시 준비를 돕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유리창이 깨지고 담뱃불로 창문에 구멍이 나는 등 핍박이 있었지만 성실히 아이들을 섬기자 점차 학부모들이 마음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현재는 140명 이상의 아이들이 등록되어 있으며 정식 교육기관으로 인가받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공부방이 예배 공동체로 성장하기를 소망합니다. 사하밧꾸 노숙자 사역 2020년 코로나 시기 한 성도가 노숙자 아이들에게 2000루피아를 건넨 일이 계기가 되어 이 사역이 시작됐습니다. 아이는 “이 돈으로 밥은 못 사먹지만 본드를 사서 흡입하면 배고픔을 잊고 하루를 버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나눈 성도들이 2개월간 금식하며 헌금을 모아 구제품 박스를 나누기 시작했고 이후 도시락 사역으로 발전했습니다. 3년이 지나 재봉틀이 교회에 들어오면서 하나님께서는 사역이 교회 밖으로 나가야 함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지금은 사역지를 임대하여 노숙자들이 목욕하고, 옷을 세탁하고, 재봉교육을 받으며 삶을 정비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공부방에서 교육을 받고 어른들은 기술 훈련을 받습니다. ‘사하밧꾸’(SahabaKu)는 ‘나의 가장 좋은 친구’라는 뜻으로 이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BKI 수카묵티 초등학교 2020년 12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학교 부지를 구입했지만 무슬림의 반대와 위협으로 건축 허가를 받는 데 4년이 걸렸습니다. 지역 목회자들은 이곳에 교회를 세우는 것은 기적이라 했지만 성도들은 믿음으로 기도하며 교육자 양성에도 힘썼습니다. 마침내 2025년 7월 14일, 20여 명 학생들과 함께 초등학교가 개교했습니다. 이 일은 성도들의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했고 이제는 더 깊은 무슬림 지역에 또다른 학교 설립을 꿈꾸고 있습니다. 이 학교가 어둠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빛과 소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인도네시아 선교의 모든 현장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사역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가 있었고 현지인들의 삶에 작지만 분명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성령의 능력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도록 그리고 더 많은 생명이 복음을 통해 회복되도록 기도하며 나아가겠습니다.
  • 2025.08.01 / 오정선 기자

    나카하타 미경 선교사(일본)
  • ‘9평의 기적’ 교회 건축의 꿈을 꾸게 하다 일본 일천만 구령을 위한 선교 여정 이어가 고난의 시간 통해 새 비전 주신 하나님께 감사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성도님들에게 문안드립니다. 저는 일본 오사카부 사카이시에 위치한 순복음사카이교회에서 ‘일본 일천만 구령’의 비전을 가지고 사역하는 나카하타 미경 선교사입니다. 일본인 사업가와 결혼해 평범한 주부로 순복음오사카교회에서 신앙생활 했던 저는 한국어-일본어 통역 봉사를 했고, 2000년 신학교를 졸업한 후 본격적인 사역자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순복음오사카교회 지성전을 담당했던 저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사카이시에 교회를 개척했고 지금까지 지역복음화를 위해 힘써왔습니다. 돌봄이 필요한 성도들을 보듬으며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왔던 저는 코로나 기간 교회 사역에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50명 가까이 됐던 성도들이 현장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되면서 성도들이 떠나는 등 5년간 고난의 시간을 겪었습니다. 매일 눈물로 교회 회복을 위해 기도하던 저희는 교회를 개척한 지 10주년이 되던 2023년 미국에서 사역하시는 윤호용 목사님을 모시고 성회를 가지게 됐습니다. 미국에서 몇몇 목사님이 동행하셨고 한국에서도 성도님들이 방문하셨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상황 속에 우리는 그때 ‘교회 건축’에 대한 비전을 가지게 됐습니다. 부득이 교회를 옮겨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땅을 살 돈도 없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주신 비전은 너무나도 크게 느껴졌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했기에 저는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 들어가 금식하며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당시 교회 건축에 필요한 최소한의 땅 구입비가 한화로 3억원 정도였기에 만일 건축이 하나님의 뜻이면 10분의 1의 헌금이 들어오길 기도했습니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기도원에서 기도하는데 알고 지내던 한 권사님으로부터 갑자기 연락이 왔습니다. 기도원으로 나를 만나러 오신 권사님은 남편과 1000만원을 선교 헌금으로 심기로 했다고 했습니다. 이후 아는 목사님을 통해, 교회들을 통해 3000만원이라는 건축 헌금이 모였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인이었습니다. 올해 3월에는 알래스카에서 사역하는 윤호용 목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믿음의 결단을 하고 알래스카를 방문하기로 결정하고는 목사님 저서인 『알래스카에서 하나님 나라를 꿈꾸다』를 단숨에 읽었습니다. 책을 통해 알래스카 복음의 현장을 직접 보게 되면서 교회 건축에 대한 꿈은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저는 교회 개척을 시작할 때 처치 스쿨(Church school)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택 1층에 지역 사회의 허가를 받아 어린이 식당을 차려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사카이 지역은 어려운 이웃들이 많아 저희는 초등학교~중학교 아이를 대상으로 30여 명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월 1회가 기본이지만 저희는 교회 절기, 월드미션 팀의 사역 등과 연계해 월 3회 후원에 나서는 등 지역사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넉넉한 재정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도움으로 사역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쌀 파동으로 힘들어하는 요즘은 홈리스들을 찾아 쌀을 전달하는 사역도 이어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현재 저는 큰 딸과 목사인 큰 사위, 둘째 딸의 도움으로 목회 사역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살고 있는 사택을 리모델링해 성전으로 꾸며 7월 27일 입당예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교회 건축 비전을 위해 재정을 최소화하기 위해 교회를 옮기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리모델링 과정에서도 하나님은 깊이 개입하셔서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셨습니다. 현재까지 사용 중인 성전은 빌린 곳으로 9평 규모이지만 우리는 이곳에서 많은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귀신이 쫓겨 나가고 병든 자들이 고침을 받는 등 순복음의 성령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교회 건축에 대한 비전도 얻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를 두고 ‘9평의 기적’이라고 이야기하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성전을 옮겨 1층에서는 어린이 식당 사역을, 2층에서는 예배 사역이 이뤄지면 더 큰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 기대합니다. 지금은 정말 기도하고 교회 건축을 위해 하나님만 바라보고 뛰어가야 할 때라는 걸 압니다. 고난의 시간, 어떻게든 영혼이 살아야 하니까 몸부림치며 성경 필사를 했고, 기도하던 제게 하나님은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특히 올해 제51회 순복음세계선교대회를 통해 선교 사명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신 이영훈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오직 하나님의 명령 따라 복음을 전할 뿐입니다. 심겨진 하나님의 복음이 귀한 열매를 맺어 ‘일천만 구령’의 큰 구원의 역사를 이뤄가도록 성도님들의 많은 중보를 요청드립니다.
  • 2025.07.04 / 오정선 기자

    선교사를 위한 중보 기도
    네팔을 위한 긴급 중보
  • - 네팔 비상사태가 속히 안정화되도록 - 선교 사역에 어려움이 없도록 - 사역 중인 선교사 및 가족의 신변 안전을 위해
  • 2025.09.12 / 오정선 기자

    홍정연 선교사(대만)
  • - 교회 영적 부흥과 성장을 위해 - 원더풀 실버 사역을 위해 - 성경공부 및 소그룹 모임 통해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 2025.09.05 / 오정선 기자

    유다니엘 선교사(Y국)
  • - 교회 성도들이 성경필사와 묵상 등 경건 훈련을 통해 주님의 증인이 되도록 - 난민들이 올바른 복음을 믿고 성장해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있도록
  • 2025.08.29 / 오정선 기자

    순복음영성스케치
    기도의 종류(Ⅳ) - 중보 기도
  • 세계적인 설교자 찰스 스펄전 목사는 “위대한 일을 행하실 때마다 하나님은 먼저 기도의 사람을 세우신다”고 말했다. 그가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본인 스스로가 기도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며, 특히 그를 위해 중보하며 기도하던 무명의 기도 동역자들의 영적 지원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 역시 그의 사역에 있어 중보 기도의 능력을 인정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만 사랑하는 기도의 사람 백 명을 원했다고 한다. 타인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기도하고 연약함과 어려움을 지탱해주고자 하는 중보 기도는 영적 지도자를 위한 중보 기도로 이어질 때 더욱 강한 능력으로 나타난다. 1. 중보의 의미와 예수 그리스도 중보(intercession)의 문자적 의미는 ‘사이에 나아가다’, ‘상치하는 양자를 화해하기 위해 행동하다’의 의미가 있으며 법정에서 의뢰인을 돕는 변호사나 법률적 행위를 대신해주는 대리인의 개념을 갖고 있다. 요한복음 1장 18절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증거하고 있는데, 앞선 중보의 개념에 따르면 예수님이 하나님과 인간을 중보하는 최고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은 지금도 성령님을 통하여 계속되고 있으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 기도할 때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도와주신다. 2. 예수님의 중보 기도와 훈련 모델 능력 있는 중보 기도자가 되고자 소원하는 사람은 단연코 최고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한 명의 중보 기도자가 세워지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중보 기도자로서의 소원과 결심이 있어야 하며 더 나아가 훈련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의 최우선 순위는 기도였는데 어떠한 때에 기도하셨는지를 알아보면 중보 기도자로 서는 훈련에 도움이 될 수 있다. (1)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침례를 받으실 때 기도하셨다(눅 3:21~22). (2) 사람들에게 인정받던 전성기 때에 많이 기도하셨다. (3) 진리에 대한 계시가 필요할 때 기도하셨다. (4) 제자들을 선택하고 훈련하실 때 기도하셨다. (5) 사랑과 용서가 필요할 때 기도하셨다. 3. 중보 기도의 올바른 태도 중보 기도자로서 훈련을 받고자 하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훈련 방법은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매일 일정한 시간을 내어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 증진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아래의 5가지 올바른 태도를 유지하기만 해도 효과적인 중보 기도자로 설 수 있다. (1) 자발적으로 중보 기도하라 억지로 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가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이다. (2) 구체적으로 중보 기도하라 중언 부언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마 6:7). 구체적인 기도는 응답을 통하여 능력을 체험하는 통로가 된다. (3) 올바르게 중보하며 구하라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고 정당한 것을 구해야 한다. 응답이 올 때까지 찾고 두드리는 실행의 과정을 능동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4) 전심으로 중보하며 구하라 두 마음을 품는 것을 하나님은 싫어하신다(약 1:8). 이런저런 생각이 많으면 기도에 집중하기 어렵다. 마음이 분산되는 것을 막는 실제적인 방법은 크게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이다. (5) 쉬지 말고 중보 기도하라 기도는 호흡이요 습관이 되어야 한다. 한꺼번에 일시적으로 많은 기도를 드리는 것보다는 매일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자주 드리는 기도가 효과적이다. 4. 영적 지도자를 위한 중보 기도 중보 기도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 지도자를 위한 기도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지도자를 판단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을 갖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시 66:18). 그리고 아래와 같이 영적 지도자의 영성과 생활과 사역의 3가지 영역에서 중보하며 기도하면 사역에 큰 능력이 나타난다. (1) 영성을 위하여(마음의 짐을 덜어주는 기도) 지도자의 위치에서 듣게 되는 비난과 겪게 되는 억울한 일들을 견디고 이길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2) 생활을 위하여(개인적인 삶을 위한 기도)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추구하며, 행복한 가정의 모범이 되고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도록 기도해야 한다. (3) 사역을 위하여(사명 감당을 위한 기도) 교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는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끝까지 사명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귀한 뜻을 이루어 가야 한다. 성도들은 영적 지도자의 권위에 순종하고 그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하나되게 하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끝> 김현동 선임목사(교무국 기도처지원팀)
  • 2023.12.2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기도의 종류(Ⅲ) - 방언 기도
  • 올해는 우리 교회가 속한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교단이 창립한 지 70년이 되는 해로서 한국의 복음화를 위한 오순절 운동을 되돌아보게 한다. 오순절 운동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의 생명력을 회복시키려는 운동으로서 성령 침례의 결과가 방언, 신유, 능력으로 나타남을 강조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도 성령 충만과 방언 기도를 강조해 왔고, 이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신유 사역과 사회 참여를 통하여 세계 최대의 교회로 성장했다. 오늘은 우리 교회와 교단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 부흥의 큰 원동력이 된 방언 기도에 대해 알아보고, 방언 기도를 통해 성령 충만의 영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다짐의 시간이 되기를 기도한다. 1. 방언 기도의 의미와 성경 상의 언급 방언 기도는 영적인 언어로 말하는 기도로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통을 가능하게 하며 개인 신앙 발전에 큰 유익을 주는 기도이다. 방언은 성령 침례의 외적 증거이며 성경 많은 곳에서 성령 침례의 표적으로 나타난 방언 기도의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의 임재(행 2:1~4), 둘째는 베드로가 고넬료와 집안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을 때의 성령의 임재(행 10:44~46), 덧붙여 바울이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안수할 때의 성령의 임재(행 19:5~6)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2. 현대 오순절 운동과 방언 기도 성경 상에 등장하였던 방언 기도는 20세기 초 현대 오순절 운동에서 재발견된다. 1901년에 감리교 목사 찰스 팔함(Charles F. Parham)은 그가 가르치는 신학교 학생들과 함께 성경을 철저히 연구하던 중, ‘방언이 성령 침례의 최초의 증거’임을 깨닫게 된다. 이들은 이렇게 발견한 말씀의 내용을 철저히 믿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 침례와 방언을 체험하게 되었고 이것이 현대 오순절 운동의 시작이다. 이어 방언 기도를 강조하는 오순절 운동은 1906년 윌리엄 시무어(William J. Seymour)의 아주사 부흥으로 이어졌다. 방언과 방언 통역, 예언, 축사, 신유 등이 강력하게 나타났던 아주사 거리 집회는 무려 3년이나 지속되며 기도의 불길을 이어갔다. 3. 방언 기도의 유익 성령 침례의 최초의 증거로서 방언 기도는 다음과 같은 유익을 가져다준다. (1) 방언 기도는 성령 충만의 확신을 준다. 성경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방언)로 말하기를 시작하였다고 증거하고 있다(행 2:4). 한편 믿는 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한다고 분명히 적고 있다(막 16:17). 성령 침례를 받으면 방언이라는 표적을 통하여 분명하게 성령 충만의 증거를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방언 기도를 한다는 것은 기도하는 자에게나 듣는 자에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성령 충만의 확신을 가져다준다. (2) 방언 기도는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통을 나누는 비밀한 언어이다. 방언 기도에 대해 비교적 많은 언급을 하고 있는 고린도전서에서는 방언을 하나님과 비밀한 영적 교통을 나누는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 14:2)고 하면서 또한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고전 14:14)라고 증거하고 있다. 이러한 방언 기도는 하나님과 비밀의 기도이기 때문에 사탄도 알아듣지 못한다. (3) 방언 기도는 자기 신앙의 덕을 세운다. 성경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운다(고전 14:4)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덕’을 세운다는 것의 원어적 의미는 ‘집을 지어 올라간다’는 의미가 있다. 우리는 방언 기도를 통하여 마치 집을 짓듯이 우리의 신앙을 더욱 견고히 할 수 있다. (4) 방언 기도는 마음을 부정적인 상태에서 해방시켜준다. 방언으로 기도하면 우리의 잠재 의식 속에 있는 모든 불안, 초조, 절망, 미움, 원한, 상처 입은 것을 깨끗이 청산해 준다. 마음의 공간이 방언 기도를 통하여 깨끗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부정적인 상태에서 해방되어 절대긍정의 마음으로 변화 된다. (5) 방언 기도는 연약함을 돕는 탄식의 기도이다. 성경은 성령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하고 있다(롬 8:26~27). 방언 기도를 통하여 탄식하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6) 방언은 깊고 오랜 기도를 가능하게 한다 고린도전서 14장 15절에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 증거하고 있다.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기 위해서는 기도의 시간이 길어야 한다. 방언 기도는 기도의 언어로서 기도를 오래 할 수 있게 하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코로나19 엔데믹 선언 이후인 지금은 성도 개개인이 기도를 통해 성령 충만한 영성을 회복하고 교회 내외적으로 전례 없는 부흥을 꿈꾸어야 할 때이다. 이러한 때에 우리 교회 성령 충만과 부흥의 토대가 된 오랜 시간의 깊은 방언 기도를 회복하는 것은 교회와 성도 모두가 부흥으로 향하는 최선의 지름길을 제공해 줄 것이다. 김현동 선임목사(목회자제직훈련소)
  • 2023.11.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기도의 종류(Ⅱ): 대적 기도
  • 그리스도인들에게 악한 영들과의 영적 전쟁은 선택 사항이 아닌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과정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영적 전쟁에 대해 무의미하게 여기거나 막연히 신비적인 것이라고 오해하곤 한다. 그러나 영적 전쟁은 성경 여러 곳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으며 오늘날도 실제적으로 많은 이들에 의해 체험되고 있다. 이러한 영적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대적 기도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신 권세(창 3:15)에 힘입어 선포하는 대적 기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 대적 기도의 의미와 특징 대적 기도는 문자 그대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권세에 힘입어 악한 영들에게 명령하고 선포하는 기도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도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의 형식이지만 대적 기도는 악한 영들에 대한 것으로 간구가 아닌 명령과 선포의 형태를 지닌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는 권세를 주셨다(눅 10:19). 이 말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악한 영들을 대적함으로써 승리하였던 것과 같이 오늘날 우리들도 예수님이 주신 권세와 능력을 믿고 명령하며 선포함으로써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2. 성경에 나타난 대적 기도 성경은 영적 전쟁을 실제적으로 묘사하면서 대적 기도의 상대인 악한 영들과 이들을 어떻게 상대하여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1) 대적 기도의 대상 성경은 우리가 물리쳐야 할 대상에 대해 직접적으로 ‘대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하거나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고 말한다. 이러한 성경의 언급을 통해 우리의 대적이 바로 ‘마귀’임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2) 대적 기도의 사례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는 방법(막 9:25)과 명하여 내어 쫓는 방법(눅 8:29)을 통하여 대적 기도를 행하셨다. 바울은 이러한 예수님의 권세에 힘입어 빌립보의 귀신 들린 여종을 향하여 명하였고, 귀신은 즉시 나오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행 16:18)는 명령과 선포는 오늘날 대적 기도의 대표적인 형태로 활용되고 있다. 3. 대적 기도의 방법 대적 기도는 보이지 않는 적과의 영적 대결이므로 마치 전쟁터에서 배수의 진을 친 것과 같은 비장한 각오로 준비하고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기도해야 한다. (1) 보혈을 의지하는 기도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예수님의 보혈에 대한 예표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음에서 보호하실 것에 대한 약속이었다(출 12:13).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친히 흘려주신 보혈의 권세를 갖고 있으므로, 보혈에 의지하는 기도는 마귀에게 대적하는 가장 큰 기초가 된다.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는 우리들은 매일 같이 마귀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데 특별히 개인의 감정과 사회적 관계 그리고 환경 가운데 보혈을 뿌리며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2) 예수 이름의 권세를 의지하는 기도 예수님이 이 땅에 성육신하시어 오신 이유는 우리의 상실한 권세를 회복해 주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셨으나 부활하셔서 승리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히 8:1). 이러한 예수님의 권세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됨과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요 1:12). 성경은 예수님의 권세에 의지할 때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하였고(마 16:18), 매고 푸는 권세가 있어서 마귀들을 묶고 포로된 자들을 구원하는 권세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마 16:19). (3)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갖는 기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이긴 싸움을 싸우는 중이다. 그러나 아직 대적의 수중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겼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패배 의식에 빠지고 좌절과 낙심 가운데 살아가게 된다. 우리는 대장 되신 예수님이 죽음을 정복하셨고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주셨으며, 흉악과 결박에서 놓임 받게 해주심을 굳게 믿고 마귀를 대적하며 기도해야 한다. 4. 대적 기도의 실제와 유익 대적 기도를 통하여 의심, 두려움, 교만, 불안, 낙심과 염려 등 마음의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사라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대적 기도는 육체의 치유와 믿음의 회복도 가져다준다. 우리는 각종 암, 우울증, 중풍, 고혈압, 당뇨병, 만성 피로 등 육체의 질병에 대해 꾸짖고 명령하고 선포하여 승리할 수 있고, 영적 성장과 신앙생활에 방해를 주는 악한 영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대적하며 기도할 수 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노니, 사람의 육체와 정신과 영혼을 괴롭히는 악한 원수 마귀야! 지금 즉시 하나님의 자녀에게서 떠나갈지어다!” 이러한 선포를 통하여도 우리는 마귀와 효과적으로 대결하고 영적 전쟁의 승리에 다가설 수 있다. 김현동 선임목사(목회자제직훈련소)
  • 2023.10.2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구속사적 성경읽기
    (19)영적 무장을 위한 3대 신앙
  •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로 했다면 영적 전쟁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영적 무장이다. 영적 무장이 없이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전쟁에 임하는 병사가 무장 없이 맨몸으로 나서는 법이 없듯이 영적 전쟁에서도 영적 무장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번 시간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무장, 곧 3가지 신앙적 무장에 대해서 알아보자. 1. 창조 신앙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자 우리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장본인이시다. 이 세상 모든 만물 가운데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아무리 과학이 하나님을 배제하고 진화론과 같은 이론으로 이 세상을 설명하려고 해도 그런 과학은 극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다음과 같은 우화가 있다. 어느 날 과학자 한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와 말했다. “우리 과학이 발전해 흙으로 사람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과학이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다 할 수 있다는 의미죠.” 하나님이 답하셨다. “정말 그러한가? 그렇다면 네 말대로 흙으로 사람을 만들어 보아라. 대신 네 흙으로 해라.” 이 우화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생명의 근원, 우주의 근원은 밝혀낼 수 없다는 것이다. 생명의 근원, 우주의 근원은 어디 있는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셨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2:1~2).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렇다면 창조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 달리 말해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 영광을 올려 드리며 살아야 한다. 2. 십자가 신앙 예수님의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은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함을 얻으며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축복을 얻은 것이다. 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말했다.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마르틴 루터는 이 말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어야 함을 천명한 것이다. 달리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빼놓고서는 기독교 신앙을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갈라디아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3~14). 예수님이 율법이 정한 대로 나무에 달려 죽는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우리를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브라함의 복과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셨다. 그렇다면 십자가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담대한 복음 증거자가 되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세상 앞에 절대로 주눅 들지 않는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만큼 나를 사랑하셨고 모든 저주의 굴레에서 해방하셨다. 또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우리가 삶의 형편과 조건, 세상의 시선에 위축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3. 부활 신앙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은 부활 신앙에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정사실이다. 그 증거가 무엇일까? 첫째,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 둘째, 부활의 목격자들이 있다. 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4~8). 특히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당하실 때 비겁한 도망자들이 되었던 제자들이 어떻게 다시 그 예수님을 전하다 순교자까지 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부활이 거짓일 수 없는 이유다. 물론 이런 증거에도 부활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셋째, 부활이 거짓이라면 그 거짓이 2000년 넘게 지속될 수 있었을까? 수없이 많은 사람이 그 거짓에 자기 목숨을 걸 수 있었겠으며 자기 인생을 헌신해 가며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을까? 부활은 사실이고 진리이다. 그렇다면 부활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결단코 세상에 얽매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안개처럼 쉽게 사라지는 인생길을 걷고 있으며 잠시 왔다가 떠날 나그네 인생을 살고 있다. 이 세상은 우리 삶의 종착지가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단기 선교 온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다. 바울 사도는 말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이 세상에 얽매여 잠시 잠깐뿐인 헛된 것을 찾다가 인생의 허망함에 무릎을 치며 후회하지 말고 부활 후 누릴 영원한 생명을 바라며 살아가자. 오정섭 목사
  • 2022.07.1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절대긍정의 믿음
  •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선교라고 정의되는 시대가 찾아왔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복음 증거만큼이나 그리스도인의 삶이 주목받는 시대라는 뜻이다. 요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전하는 복음의 진정성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에서 찾는다. 따라서 성경을 삶의 원리 원칙으로 삼는 성경적인 삶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성경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절대긍정의 믿음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결론은 성도의 최후 승리를 말하고 있으며 다시 오실 예수님이 성도의 최후 승리를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 할 절대긍정의 믿음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그 땅을 정탐 다녀온 여호수아와 갈렙의 반응에서 절대긍정의 믿음이 지녀야 할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1.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을 갖고 싶어 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각 지파에서 대표 한 사람씩을 선발해 모두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에 보낸다. 그들은 40일간 그 땅을 돌아본 후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며 그 땅의 과일들은 극상품이라고 할 수 있고 그들이 누리는 것은 풍요롭다는 데에 일치된 의견을 내놓는다(민 13:25~27). 그러나 그 땅을 정복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의견은 긍정적인 의견 2명, 부정적인 의견 10명으로 갈린다. 긍정적인 의견을 내놓은 두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이다. 갈렙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한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민 13:30).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을 취하고자 하는 데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땅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비관적인 전망과 비판적인 어조에 쉽게 동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사람은 미래를 알 수 없고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매일 마주하는 삶의 과제 앞에 불안, 염려,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대면하는 문제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시고 자녀 된 우리의 삶을 위해 좋은 것을 예비해 놓고 계신 분이시다. 로마서 8장 32절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한다. 2.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는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의견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야훼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야훼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야훼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민 14:7~9). 그러나 나머지 10명의 정탐꾼들은 육신의 눈으로 확인되는 그 땅 주민들의 어떠함에 주목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2~33).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았기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땅에 대해 악평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라며 자신들에 대해서도 악평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이 무너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삶에 부정적이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분명히 차지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하나님은 그 땅을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고, 모세에게 정탐꾼을 보내라고 말씀하실 때도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했기에 그 땅을 차지하는 데에 긍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성경 말씀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책이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온갖 좋은 약속을 붙잡는 적극적인 신앙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은 절대긍정의 믿음을 소유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에 대한 기대로 가득하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실 것에 대한 거룩한 원함,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으로 충만한 절대긍정의 믿음으로 살아가자.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약속하신 가나안을 차지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정섭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신학연구소)
  • 2022.06.1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구속사적인 삶 - 감사(2)
  • 대한민국 법 중에 최고 상위법은 헌법이다. 헌법 10조에 보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흔히 말하는 행복추구권이다. 그런데 행복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국가도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해 줄 따름이다. 다시 말해 행복은 어떤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정해진 조건이 있으면 국가가 일정 수준의 국민은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1. 행복의 근원, 감사 그렇다면 행복은 어디 있을까? 감사하는 마음에 있다. 감사하면 행복해진다. 감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사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감사가 저절로 되거나 쉽게 되지 않는다. 만약 감사가 저절로 되고 쉽게 되는 것이면 감사가 하나님의 뜻이니 범사에 감사하라고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감사는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감사가 쉬운가? 불평이 쉬운가?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한 달 동안 5층 집까지 매일 걸어가야 한다고 가정하자. 억지로라도 계단을 오를 일이 생겨 운동할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할까? 아니면 곧바로 불평할까? 감사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원망 불평이 자연스러운 우리 본성이라는 중력, 그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감사가 등산처럼 힘든 이유다. 그러나 등산도 하면 할수록 쉬워진다. 감사가 그렇다. 산 정상을 향해 오르다 보면 달라지는 것이 있다. 시야다.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감사하면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못 보던 것을 보게 된다. 감사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불평하는 일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그 일들 외에는 제대로 못 본다. 불평하는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마음이 계속 불편하다. 물론 해결이 돼도 불평할 거리는 또 있다. ‘왜 이제야 해결이 되는 거지?’ 감사하는 사람은 시야가 다르다. 보이는 것이 다르다. 눈에 거슬리는 것보다 세상 아름다운 것이 훨씬 더 많다. 보이는 게 다르니 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왜 그렇게 사소한 일에 집착했지?’ 하는 생각이 드니까 감사하는 사람의 말에는 여유가 있다. 타인에 대한 포용의 한도가 그만큼 크다. 원망 불평으로 마음의 용량이 늘 마이너스가 되어 가면 타인에 대한 용납의 한도가 계속 줄어든다. 감사를 결단하고 훈련하자. 감사한 다음에 기쁨이 따라오고 불평한 다음에 짜증이 따라온다. 감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이끌어 가지만 불평은 사탄이 원하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이끌어 간다. 감사의 종점은 천국이고 원망 불평의 종점은 지옥이다. 2. 그리스도인의 감사, 넘치는 감사 우리의 감사가 어떠한 감사가 되어야 하는지 바울 사도의 권면을 들어 보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우리 삶은 예수님 안에 있다. 예수님께 우리 인생의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이다. 여기저기 왔다 갔다, 이리저리 오락가락하지 않고 예수님 안에 콕 박혀서 사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예수님 안에서 성장하는 여정이다. 말씀대로 살면서 굳센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는 것이다. 정리하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셨으니 예수님 안에 뿌리내리고 말씀 따라 사는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감사가 넘치게 하라고 권면한다. 누가 믿음이 강한 사람일까? 감사하는 사람이다. 내 믿음의 강도는 감사가 말해 준다. 내 믿음이 명품인지 불량품인지는 감사가 보여 준다. 감사는 명품 믿음의 보증서다. 감사가 없다면 불량품 믿음이다. 감사는 넘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넘치는 감사다. 자기 분량 이상의 감사를 하는 것이다. 내 기준 이상의 감사, 내 판단 이상의 감사, 내 감정 이상의 감사, 내 선택 이상의 감사다. 그러려면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가 가능한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예수님을 주로 영접했기 때문이다. 주는 ‘주인’을 말한다.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시니까 감사하라는 것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했으니”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영접했으니”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직분, 예수는 이름이다. ‘그리스도 예수’와 ‘예수 그리스도’는 강조하는 바가 다르다. 그리스도가 먼저 나오면 예수님이 그리스도, 곧 구원자로서 하신 일에 강조점이 있다. 구원자 예수님이 하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떠난 내 죄 때문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다. 나의 주님이 되셔서 천국 가는 그날까지 내 삶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고, 도우시며 책임져 주신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다. 성경이 다시 쓰이기 전까지는 변하지 않는다. 내 삶의 형편과 조건은 오락가락해도 나를 향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주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 되셔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도록 역사해 주실 것임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 삶의 형편, 조건, 기분, 감정과 상관없이 감사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 일평생 감사할 수 있다. 감사하자.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어렵고 힘들고 괴로울 때 인생이 마음대로 안 될 때 감사하자. 감사하면 사탄이 틈타지 못한다. 영적 시야가 넓어지고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 관계가 회복되고 인생이 달라지고 행복해진다. 아니 이미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Thanksgiving’뿐만 아니라, ‘Thanks-living’하자! 오정섭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신학연구소)
  • 2022.05.0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다시보는 영산 신학과 목회
    영산의 세계선교
  • 선교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복음 전도와 선교에 대한 꿈과 비전으로 충만하게 된다(행 1:8). 성령님은 영산에게 대조동 천막교회 시절부터 세계선교의 꿈을 부어주셨다. 그때부터 영산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은빛 날개를 타고 전 세계를 다니며 선교하는 꿈’을 품었다. 그 꿈처럼 영산은 당시 해외 여권을 얻기도 쉽지 않았을 때 이미 여러 나라를 다니며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다. “전 세계는 주님의 교구입니다.” 웨슬리의 유명한 말을 떠올리게 하는 영산의 고백은 절대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는 세계 최대 교회를 세우고 오대양 육대주를 다니며 선교 사역을 감당했다. 그가 머물렀던 수많은 선교 현장은 성령님이 역사하는 기적의 장소였다. 영산이 세계선교를 위한 뜨거운 열정을 갖게 된 배경은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7년 5월 세계오순절총회를 마친 영산은 100일 동안 18개국, 39개 도시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던 그는 결국 스위스에서 쓰러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침대 밑에 놓인 엽서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주님의 종으로 부름 받았으니 이 시대에 한 획을 긋는 종이 되리라”라는 글귀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적고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다. 다시는 못 일어날 만큼 쇠약해졌던 영산의 몸은 이튿날이 되자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얻고 기적처럼 회복되었다. 그때의 체험은 영산의 사역 가운데 세계선교를 항상 강조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영산은 유럽 선교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세계 교회성장을 위해 봉사하는 국제기관을 조직하라”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1976년 11월 4일 국제교회성장연구원(이하 CGI: Church Growth International)을 설립했다. 영산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부흥성장에 관한 노하우를 전 세계 교회와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에만 집중하지 않고 전 세계 교회가 함께 부흥하는 일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CGI는 설립 이래 2022년 현재까지 한국을 비롯한 100여 개국 이상에서 총 600회 이상 CGI 콘퍼런스를 개최했고, 여기에 전 세계에서 연인원 120만명이 참석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세계선교와 교회 성장에 이바지한 CGI는 2022년 10월 이영훈 목사를 제2대 총재로 만장일치 추대하면서 ‘다음 세대의 부흥’을 외치며 제2기 사역에 돌입하게 되었다. 영산은 세계선교의 사역을 더욱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2000년 3월 28일 DCEM(David Cho Evangelistic Mission)을 설립했다. 이 기구를 통해 전 세계 선교지와 선교단체 간에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선교 자원의 교류에 힘썼다. DCEM은 교파를 초월해 영적으로 갈급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 그리고 복음의 사명을 심어주는 기관으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 영산은 그 목회 사역 동안에 약 600회 이상의 해외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이런 왕성한 사역은 성령님이 주시는 비전과 열정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럼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영산의 선교 사역의 의미는 무엇일까? 20세기 기독교의 가장 큰 특징은 기독교의 무게 중심이 서구권에서 비서구권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1980년대에 들어와서 비서구권의 기독교 인구가 서구권의 기독교 인구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기독교 신학이나 선교가 서구권 교회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서구권 교회는 갈수록 쇠퇴를 거듭했고, 반대로 비서구권의 교회는 급속히 성장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역사적 맥락 속에서 영산의 세계선교 사역은 기독교 선교의 주체를 서구권 교회에서 비서구권 교회로 전환하는 데 아주 지대한 역할을 했다. 영산은 선교가 ‘순복음’의 최우선 과제임을 보여주었다. 선교하는 교회가 진정한 ‘순복음교회’(Full Gospel Church)이고 선교하는 성도가 진짜 ‘순복음성도’(Full Gospel Christian)이다. 교회가 선교를 멈추는 순간 침체와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영산 안에 넘쳤던 복음의 확신과 순복음의 영성은 많은 사람의 가슴에 희망을 불러일으켰고 나도 하나님 사명에 쓰임 받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의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David Yonggi Cho’라는 이름은 안다”라는 말이 수많은 증인에 의해 회자된 것만 보아도 그가 가진 세계선교의 열정과 영향력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만약 누군가 “순복음 신앙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에 나아가 선교하는 삶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선교에 평생을 바친 영산의 삶이었고, 그의 선교 정신을 이어받은 모든 순복음 성도들의 꿈이 되어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선배의 본을 따라 인내로써 믿음의 경주를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히 12:1). 오늘날 교회가 영산으로부터 반드시 전해 받아야 하는 믿음의 영적 바통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선교의 바통’이다. 이제 영산의 뒤를 이어 우리도 성령 충만함 가운데 ‘선교 바통’을 이어받아 주님 오시는 날까지 세계선교의 꿈을 이뤄가야 할 것이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2.11.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영산의 신유 사역 
  • 영산에게 신유 사역은 그의 핵심적인 목회 철학 중 하나였다. 영산은 신유의 기적이 과거 예수님 시대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사역임을 확고히 믿었다.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을 받았으면 믿음으로 값없이 병 고침 받는 것도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영산이 믿었던 신유의 은사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은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영산에게 신유 사역은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자 ‘아직’, 그러나 반드시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었다. 영산은 치유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임재를 보았고 하나님 나라에서의 믿는 자의 부활을 보았다. 그래서 영산은 목회 현장이나 부흥회 사역에서도 병 고침을 강조했는데, 그가 인도하는 집회에서 질병의 치료를 경험한 사람들의 간증거리는 수없이 많다. 영산이 이같이 신유를 강조하게 된 것은 어떤 특정한 치유 신학을 공부한 결과가 아니었다. 그를 ‘신유의 종’으로 만든 것은 그가 처한 삶의 현장 속에서 실제 경험했던 치유의 하나님 때문이었다. 폐결핵 3기로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을 때 주님을 만나서 완치되었던 경험이 그것이다. 또 대조동 천막교회 시절 중풍에 걸린 여인이 낫고 걷지 못했던 소년이 일어나 뛰며 듣지 못했던 사람이 듣게 되는 기적이 나타났다. 이런 경험을 통해 영산은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병든 자를 치료하신다는 사실을 체득할 수 있었다. 자신의 삶과 목회 현실에서 신유의 역사를 분명하게 체험했기에 영산은 가는 곳마다, 서는 곳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영산의 신유 사역은 교회 부흥에도 크게 기여했다. 실제로 영산의 개척교회가 빈민촌 지역사회에 깊이 뿌리 내리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치유의 기적이었다. 그래서 영산은 신유를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인 표적으로 보고 목회 사역에 열심히 적용하고 실행했다.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으로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낫게 되는 신유 사역”(막 16:18)이 복음 전파에 동반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이후에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에 대해서 회고할 때도 신유 사역의 중요성을 언급한 적이 있다. 복음에 저항적이던 사람들이 육체의 질병을 치료받고 은혜를 받아 복음의 말씀을 세상에 나아가 강력하게 전하기 때문에 교회가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교회 공동체를 신유 공동체로 보았다. 영산의 신유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믿음이다. 영산은 그 어느 목회자보다도 병 고침에 대한 메시지를 많이 선포했고 신유의 기적도 많이 행했지만 정작 자신이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성령이 필요에 따라 자신을 통해 은사를 나타내실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영산 자신이 분명히 받았다고 주장하는 은사가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믿음의 은사’였다. “내가 받은 은사를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담대한 믿음입니다. 담대함을 가지고 믿음으로 선포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성경은 표적이 여러분의 믿음보다 앞선다고 하지 않습니다. 표적이 여러분의 믿음 뒤에 따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믿음의 역사는 천막교회 시절에 나타났다. 걷지 못하던 소년이 영산을 찾아왔을 때 처음에는 그가 낫는다는 것을 믿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영산이 한 시간이 넘도록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자 뭉게구름 같은 믿음이 그의 마음으로부터 차오르기 시작했다. 영산은 그때의 기분이 마치 지구를 자기 손으로 밀면 지구가 밀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간증한 바 있다. 하나님이 주신 이러한 믿음으로 기도하고 선포할 때 영산은 그 소년을 포함한 수많은 이들의 병을 고칠 수 있었다. 영산은 오늘날 병 낫기를 간구하는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의 기도를 잘 드리지 못하거나 주님의 말씀에 담긴 뜻을 잘 알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다고 말했다. 영산에 따르면 신유의 역사는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때까지 성령님이 살아 역사하셔서 은사를 베푸시고 병든 자들을 일으키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영산은 신유가 지금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임을 분명히 믿었다. 따라서 성도는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써 신유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기에 자신의 아픈 부분에 손을 얹고 믿음으로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영산을 통한 성령의 신유 사역은 여의도순복음교회뿐 아니라 국내외 수많은 교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신유의 복음을 포함한 예수 그리스도의 전인적인 순복음을 이해하는데 큰 유익을 주었다. 앞으로도 영산의 신유 사역의 원리를 계속 연구하고 실행함으로 새로운 신유행전의 역사가 계속 나타나길 희망한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2.10.2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문서·방송 선교의 선구자…1988년 기독교 일간지 국민일보 창간
  • 영산은 미디어의 활용이 미미하던 시절, 문서 선교와 방송 선교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사역에 적용한 선구자였다. 영산은 자신이 가진 뜨거운 선교적 영성을 담아내어 빠르게 전파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 놀라운 교회 성장을 이루었다. 순복음의 신앙이 한국과 세계에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의 그 어떤 교회보다 멀티미디어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문서 전도』의 저자 조지 버워는 “기독교 문서는 인쇄된 선교사”라고 말한 바 있다. 문서 선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보게 하는 말이다. 영산은 누구보다도 문서 선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사역에 적용하였다. 1964년 당시 순복음교회 성도들에게 교회와 관련된 각종 소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순복음지』를 발간했다. 이것이 점점 발전하여 1978년에 이르러서는 영산의 설교와 칼럼, 성도들의 신앙 간증과 구역 성경 공부 및 교회 소식을 담은 『순복음뉴우스』가 되었다. 이후 『순복음가족신문』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날까지 문서 선교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다. 영산은 또한 순복음교회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한국교회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월간 잡지 『신앙계』를 창간함으로 문서 선교의 폭을 확장했다. 『신앙계』는 기독교의 대중지,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위한 교양지, 불신자들을 위한 전도지, 교회를 하나로 묶는 기독교 잡지로서 자리매김했다. 해방 이후 대중적인 기독교 잡지로는 『신앙계』를 능가하는 잡지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신앙계』가 말씀에 기초한 성령운동의 건전한 보급과 한국교회 평신도들의 신앙 성장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인 박명수 박사는 “『신앙계』야말로 오순절 신앙을 한국교회에 널리 전파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영산의 문서 선교의 열정은 『순복음가족신문』과 『신앙계』의 성공으로 끝나지 않았다. 1987년 한 이단 종교 단체가 일간 신문을 발간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영산은 만약 그 단체에서 신문을 발간하게 된다면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것이 자명하다고 판단했다. 이를 두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기독교 일간지 창간에 대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1988년 세계 최초의 기독교계 일간지 『국민일보』가 창간되었다. 정부와 사회에 기독교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언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영산은 신문사를 설립하는 과정 가운데 막대한 재정적 부담과 근거 없는 비난의 목소리로 큰 고통을 받았지만, 믿음의 확신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다. 복음 실은 일간지 『국민일보』는 매일 하나님의 복음을 한국 땅에 전파하는 발 없는 전도사로서 한국 기독교의 성장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기독교 정신으로 발간된 최초의 기독교 일간지로서 한국 교계의 대사회적인 발언의 장으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나아가 기독교 문화의 채널로써 한국 사회에 기독교 세계관을 전파하는 사명도 이뤄가고 있다. 영산의 『국민일보』 창간은 대한민국 1200만 기독교인을 대변하는 신문으로서 한국 기독교 역사 가운데 매스컴 선교의 새 장을 열었다는 데 큰 의의를 가진다. 영산은 문서 선교뿐 아니라 방송 선교를 통해서도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당시 영산은 복음 전도의 방법을 새로운 형태로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도 방송 선교의 파급력과 중요성을 일찍 깨달았던 영산은 1966년 라디오 설교와 1979년 컬러TV 방송을 송출했다. 영산의 라디오 설교 방송은 1979년, 1980년 연속, 전국 청취자 애청 프로그램 조사 결과 청취율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청취자가 많았다. 이처럼 한국교회 방송 선교의 선구자는 단연 영산이었다. 당시 흑백 TV에 익숙했던 공중파 제작자들이 방송 장비와 시스템을 구경하기 위해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견학을 올 정도였다. 방송 선교는 교단의 장벽을 뛰어넘는 데 중요한 매체가 되었을 뿐 아니라 기독교의 울타리를 넘어 일반인들에게 오순절 신앙을 전하는 통로가 되었다. 영산의 방송 선교를 통해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이 설교 말씀을 듣고 구원받는 역사가 나타났다. 또 위성과 인터넷을 활용한 예배와 설교 실황은 각 지성전 및 지교회 설립과 더불어 교세 확장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영산의 방송 선교는 국내를 넘어 전 세계에 이르기까지 사상과 국경을 초월하여 복음이 전파되었다. 1982년에는 미국 TV 프로그램 제작 회사인 KCWC사의 특별 기획으로 주일 예배 실황이 미국, 캐나다, 중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멕시코, 이스라엘, 홍콩, 필리핀, 남아공 등 25개국에 동시 위성 중계되기도 했다. 이처럼 영산의 성령 충만의 복음은 21세기 정보화 시대와 함께 전 세계에 발 빠르게 퍼져나갔다. 영산은 커뮤니케이션의 대가였다. 설교뿐 아니라 설교를 전달하는 매체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아무리 훌륭한 설교라도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면 세계적인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을 것이다. 영산의 설교와 성령 충만의 영성은 멀티미디어 사역 시스템을 통하여 세계 곳곳에까지 전파될 수 있었고 이러한 사역이 세계 교회에 끼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복음의 메시지는 불변해도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은 시대에 맞게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영산의 멀티미디어 사역이 우리에게 남겨준 값진 유훈이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2.09.23 / 김용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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