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생각을 바꿔라 - 박찬대 목사(반석대교구장)
  • 지금 세상은 너무나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한 번은 인문학을 저술하시는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매년 책 한 권씩을 집필했는데 요즘은 책을 쓰다보면 세상이 또 다르게 변화되어 다시 책을 써야하는 상황이 와서 책을 집필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십년이면 세상이 변한다고 하는데 지금 시대는 일 년에도 몇 번씩 세상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로마(비잔틴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은 20여 ㎞에 이르는 견고한 성벽과 강풍으로 접근이 불가능한 마르마라 해변과 폭이 800m에 불과한 골드혼(금각만)으로 둘러싸여 난공불락의 성으로 불렸다. 그런데 오스만제국은 1000년 이상 버텨온 철옹성을 불과 2개월 만에 차지했다. 오스만제국은 도저히 공격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다른 이들이 생각하지 못한 전략을 펼쳤다. 황소와 병력, 장비를 총동원해 군함을 산으로 끌어 올린 후 기름칠을 한 목재 레일을 이용해 약 2㎞ 떨어진 골드혼에 이동 배치했다. 이렇게 70여 척의 군함이 골드혼에 배치되자 이 광경을 목격한 비잔틴 군대는 공포에 휩싸였다. 오스만은 육군과 해군의 협공으로 57일 만에 천해의 요새인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다. 이처럼 고정관념의 틀에 빠져 무사 안일한 콘스탄티노플성과 생각의 틀을 바꾼 오스만제국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던 멈춤이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이때 우리는 생각의 틀을 깨야한다. 갈수록 교회의 부흥은 어려워진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을 한다. 그러나 이때가 다시 부흥의 시작이 될 것이다. 태풍이 불어와 바다를 다시 정화 하듯이 문제의 폭풍은 우리의 신앙을 다시 돌아보게 하였고, 2023년 2월 8일 수요일에 채플 후 현장에 남아 있던 19명의 학생들의 찬양과 기도로 시작된 미국의 애즈베리 부흥은 다시 새로운 부흥의 파도가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는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가 그 파도를 타고 전 세계에 부흥의 파도를 몰고 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라는 세상의 고정관념을 벗어버리고 ‘할 수 있다. 하면 된다’의 믿음으로 배를 가지고 산으로 올라가 보자. 산에 오르면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상이 보일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 2023.03.2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지워짐의 은혜 - 오혁진 목사(장애인대교구장)
  • 오늘날 세계를 움직이는 최고의 지성인들이 전문적 의견과 성과를 토론하기 위해 만든 것이 엣지재단(Edge Foundation, Inc.)이다. 회장인 존 브록만(John Brockman)은 각 분야의 지성인에게 지난 2천년 동안의 가장 위대한 발명이 무엇인가를 물어 『지난 2천년 동안의 위대한 발명』이란 책을 편집했다. 지성인들답게 대부분이 개념(교육, 민주주의, 과학적방법론 등)과 과학기술(인쇄, 컴퓨터, 인터넷 등)을 답했고, 특이하게 제시된 발명품으로 보온병, 말가죽, 클래식 음악 등이 있었다. 작가이자 평론가인 더글러스 러시코프(Douglas Rushkoff)는 이 질문에 ‘지우개’라고 답했다. 컴퓨터의 ‘del’키, 수정용 화이트, 헌법 수정 조항, 그 밖에 인간의 실수를 수정하는 모든 것들을 꼽았다. 돌아가서 지우고 다시 시작할 수 없었다면 과학, 정부, 문화, 도덕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지우개는 우리의 참회소이자 용서하는 자며 타임머신이기도 하다.” 지우개는 실수를 지우고 깨끗하게 하면서 또한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준다. 시대와 도구가 다양한 만큼 지우는 방법들도 다양하다.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은 아직 마르지 않은 진흙판에 잘못 쓴 글자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이집트의 파피루스는 마르기 전에는 젖은 헝겊으로, 잉크가 마른 다음에는 칼날로 긁어냈다. 돌에 잘못 새긴 글자는 쪼아내고 석회로 메운 뒤 다시 쪼아 새긴다.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은혜가 지우개이다. 지울 수 없는 우리의 죄와 죄 자국들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대신 지워주셨다. 오늘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죄를 지워주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으로 옷 입은 우리를 의인이라 여겨주시고 만나주신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 4:3). 십자가는 실수와 실패, 상처와 미움을 딛고 다시 시작하는 힘을 주신다. 새로워질 주님의 기회를 나와 우리에게 허락하신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 43:18~19). 사순절 기간에 십자가를 묵상하자. 지워짐의 은혜는 다시 시작하는 놀라운 기회임을 기억해보자.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 2023.03.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Change or Die) - 변원중 목사(영등포대교구장)
  • 미국의 교회 컨설팅으로 명성을 떨치는 톰 레이너 목사는 그의 책 『죽은 교회를 부검하다』에서 한 환자의 이야기를 전해 준다. 그녀는 무척이나 아팠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철저한 변화가 없다면 그녀가 가진 모든 희망은 결코 현실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의사는 진단을 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어떤 변화도 한사코 거부했다. 의사는 최대한 연민의 감정을 담아 이야기하려 했지만 “당신은 죽어가고 있습니다”라고 전하는 것만이 그녀를 정말 위하는 일임을 알았다. 기껏해야 5년이지… 5년도 길게 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의사의 소견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단호함과 저항, 분노를 담아 “저는 전혀 죽어가고 있지 않아요”라고 대답하고는 5년 이상을 살아냈다. 그리고 그녀는 10년을 더 생존하는 끈기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그녀는 말이 살아 있는 것이지 고통과 질병과 절망으로 가득한 채 겨우 숨만 쉬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죽었다. 저자는 그녀의 이름을 ‘교회’라고 알려준다. 거창한 비전 가운데 탄생했을 교회이지만 문을 닫는 교회들을 수도 없이 보며 저자는 그 교회의 갖은 실패의 원인을 부검하여 생명을 잃어가는 교회에 즉각적인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을 잘 지켜온 부자 청년에게 영생을 얻으려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들은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다.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오히려 쉽다고 말씀하신다. 이렇듯 영생을 위한 변화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영원한 삶을 원한다면 반드시 변화가 필요하다. 바울 사도는 성도와 교회가 생명력이 넘치게 살기 위해서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해야 한다고 가르친다(롬 12:2). 성도와 교회는 이 세상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요구를 뛰어넘는 변화가 필요함을 알려준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것이 교회다. 주님께서 십자가로 음부의 권세를 이기셨기 때문이다. 사순절 기간 주님의 수난이 우리에게 소망이 됨은 고난 뒤에 따라오는 부활의 영광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교회인 성도는 고난의 자리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의 자리에서 절대긍정과 절대감사로 새롭게 변화되어야 한다.
  • 2023.03.1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평신도를 위한 사도행전 이야기
    (77)제3차 선교여행 - 바울의 밀레도 고별설교(하)
  • 제3차 선교여행을 마무리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전에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 항구로 초청해서 마지막 설교를 한다. 그의 설교의 요지는 양떼들을 그들에게 맡기니 자신이 소아시아에 들어온 첫 날부터 나갈 때까지 행한 바를 잘 기억해서 그대로 따르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그가 믿는 자들을 위해 사랑과 헌신, 희생과 수고를 아끼지 않은 그의 언행 하나하나가 교회 지도자들의 교과서가 된 것이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것을 곳곳의 성령 충만한 형제들이 만류하면서 거기에 가면 결박과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성령에 매여” 그곳으로 간다고 하면서 무슨 일이 있다 해도 복음 전파 사명 완수를 위해서라면 목숨조차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바울은 그들에게 앞으로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그동안 제2차 선교여행 때부터 자신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러 지역을 오가며 하나님의 뜻을 다 전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다”고 증언했다. 이 말은 자신이 복음 전파 사역을 할 만큼 다 했으니 말씀을 듣고도 구원 받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본격적으로 에베소 장로들에게 영적 지도자로서의 품격을 두려운 마음으로 갖출 것을 당부한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여기에서의 “감독자”는 초대 교회에서 “감독”의 직분(빌 1:1)을 말할 때와 동일한 단어이다. 이들은 장로들로서 감독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맡은 양 떼들을 잘 살펴야할 책무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성령께서 그들에게 친히 주신 직무였다. 양 떼의 감독자로서 그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영적으로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사나운 이리”(요 10:10)로부터 양 떼를 보호하고 지키는 일이었다. 이단과 사설, 거짓 교사와 거짓 선지자들을 옳게 분별해서 양 떼들로부터 철저하게 차단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후에 에베소 교회를 맡게 된 바울의 제자 디모데는 이들과 맞서서 싸워야 했다(딤전 1:19~20, 4:1~3, 딤후 2:17~18, 3:1~9 참조). 또한 요한계시록에도 주님께서 미워하시는 “니골라 당”의 행위를 에베소 교회가 미워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계 2:6). 바울은 그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한 것을 상기시키면서 에베소 장로들을 주와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며 그들을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하실 것을 간구했다(행 20:32). 끝으로 그는 남의 물질을 탐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일해서 자신뿐만 아니라 동행들의 쓸 것을 충당하며 보여준 모본을 따라 그들도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할 것을 장로들에게 당부했다. 고별 설교를 마치고 바울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했다. 그들은 이제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바울의 말로 인해 근심하며 크게 울며 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배 타는 곳까지 그를 전송했다. 그리하여 바울은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갔다. 김호성 부목사(목회신학)
  • 2023.03.1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76)제3차 선교여행 - 바울의 밀레도 고별설교(상)
  • 바울의 제3차 선교여행도 이제 막바지에 다다랐다. 이 부분의 사도행전 기록에 따르면 저자인 누가가 포함된 것이 확실한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앗소에 가서 그곳까지 32㎞를 걸어온 바울을 태우고 사흘에 걸쳐 미둘레네, 기오, 사모 등지를 들려서 밀레도에 도착했다. 밀레도는 에베소에서 남쪽으로 약 48㎞ 떨어져 있는 항구 도시였다. 바울은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가기 위해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하면서 에베소 장로들을 밀레도 항구로 초청했다. 그리하여 유명한 ‘밀레도 고별설교’를 하게 된다. 바울의 밀레도 설교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다른 많은 설교들과 비교할 때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 첫째로, 그것은 바울의 2, 3차 선교여행의 사역지를 떠나면서 남긴 유언에 해당하는 고별설교이다. 성경에는 여러 편의 고별설교가 나오는데 야곱(창 49장), 모세(신명기), 여호수아(수 23~24장), 사무엘(삼상 12장), 예수님(요 13~17장)의 설교가 그것이다. 이런 고별설교는 대개 지나간 날에 대한 회고와 앞날에 대한 권면과 전망으로 이루어져 있다. 둘째로, 바울의 밀레도 설교는 그가 사도행전에서 유일하게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이다.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행 13:16~41)에서는 유대인들과 유대교를 믿는 이방인들에게, 루스드라(14:15~17)와 아덴(17:22~31)에서는 이방인 불신자들에게 말씀을 전한 바 있다. 셋째로, 이 설교에는 바울서신의 내용과 유사한 요소들이 많이 나온다. 예를 들면, 바울이 어떤 선교지에 처음 들어갈 때부터 사역을 마치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기울인 수고와 희생, 겸손과 사랑, 물질에 대한 깨끗한 자세 등이 잘 나타나 있다(예를 들어 살전 2:1~12). 또한 적대자들의 끊임없는 반대와 박해를 극복하면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선포한 것(고후 11:23~33)과 이단과 사설에 대한 경고(롬 16:17~18)도 나와 있다.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에게 양떼들을 맡기면서 그들에게 본이 될 것을 당부한 것(딤전 4:12)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바울은 먼저 그가 아시아 지역(지금의 튀르키예 서부)에 들어온 첫날부터 떠나는 그날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누구보다 에베소 장로들이 잘 알 것이라는 말로 설교를 시작한다. 그가 어떻게 겸손과 눈물로 양떼들을 섬겼고, 유대인들의 간계로 박해를 당할 때도 인내와 믿음으로 이겨내면서 주를 섬겨왔는지를 교회 지도자들이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다음으로 바울은 그의 말씀 사역에 대해서 말한다. 그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 전파에 힘을 다했다. ‘공중 앞에서나’(회당과 두란노 서원 사역 등) ‘각 집에서나’ 양떼들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담대하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을 상기시킨다(행 20:21). 그리고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어떤 일이 닥친다 해도 결코 그것을 피하지 않고 사명을 완수하겠다고 다짐한다. 사실상 바울은 여러 지역의 성령 충만한 다수의 형제자매들로부터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과 환난을 겪을 것이라는 우려의 말을 들어왔다. 그렇지만 그는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라고 담대히 선언한다. 이처럼 투철한 바울의 사명감과 그가 보인 복음 전파와 성도를 섬긴 모범은 그가 떠난 후의 에베소 교회를 이끌어 갈 장로들에게 너무나도 값진 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감명과 교훈을 주고 있다. 김호성 부목사(목회신학)
  • 2023.02.1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75) 제3차 선교여행 - 에베소에서 드로아까지
  • 에베소에서 아데미 여신의 형상을 은으로 만들어 팔아 부를 축적하던 은장색(銀匠色) 중 데메드리오가 일으킨 소란(행 19:23~35)이 진정되자 바울은 제자들(믿는 자들)을 불러서 권면(위로)한 후에 작별하고 에베소를 떠나 제2차 선교여행 지역이었던 마게도냐로 갔다. 그곳에서도 제자들을 권면한 후 ‘헬라’(좁은 의미로는 남부 아가야)에 도착해 거기서 석 달을 지냈다. 이러한 여정은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행 19:21)라는 구절과 일치한다. 성경학자들은 이때 바울이 고린도에서 가이오의 환대를 받으며 로마서를 저술했다고 본다(참조. 롬 16:23). 그 후 바울이 배편으로 수리아(여기에서는 예루살렘)로 가려고 했으나 그 배에서 유대인들이 항해 중에 바울을 죽일 음모를 꾸민 것이 알려져서 경로를 바꾸어 다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했다. 바울은 다양한 지역 출신의 회심자이자 동역자 일곱 명을 먼저 드로아로 보내고 자신은 후에 합류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바울이 얼마나 광활한 지역에서 선교 사역을 수행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사도행전의 이 부분에서 다시 1인칭 복수 관점에서 여행기를 서술하는 “우리-본문”이 시작된다(행 20:5~15; 이전. 16:10~17).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가서 먼저 간 제자들과 재회했다. 이 여정은 바울이 제2차 선교여행을 출발할 때 드로아에서 빌립보까지 사흘 만에 갔던 것(행 16:11~12)의 역방향이었다. 일주일 후 “그 주간의 첫날”(주일)에 “떡을 떼려 하여”(성찬, 예배를 위해, 행 2:42 참조) 모였을 때 바울이 다음날 그곳을 떠날 계획이었기 때문에 밤새도록 말씀을 전했다. 성도들이 많이 모여서 다락에까지 등불을 많이 켰는데 밤은 깊어가고 등불의 그을음과 연기가 천장에 가득하다 보니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뚫려 있는 공간)에 걸터앉아서 듣다가 졸음에 빠져 3층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러자 바울이 그 즉시 옛날 선지자 엘리야(왕상 17:17~24)와 엘리사(왕하 4:33~36)처럼 죽은 청년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음으로써 그의 생명을 되살려 놓았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신유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나서 심지어 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자에게 얹어도 나을 정도였는데(행 19:12) 이번에는 죽은 사람까지 살리는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유두고는 그의 이름이 ‘운이 좋은 친구’라는 뜻 그대로 바울과 같이 있었기 때문에 운 좋게 ‘제2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성경학자들은 유두고가 졸다가 떨어져 죽은 것은 그의 영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신분이 낮은 종이었기 때문에 예배에 늦을 수밖에 없었고, 가장 높은 곳에 앉을 수밖에 없었으며 바울의 설교가 길어짐에 따라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참조. 고전 11:17~34). 하마터면 가장 비극적인 불상사가 될 일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가장 은혜로운 기적으로 바뀜에 따라 성도들이 유두고로 인해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다”(행 20:12). 이처럼 바울 일행이 에베소에서 드로아까지 이동하는데도 흑암의 세력의 위협과 방해는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렇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위험에서 건져주시며 어두운 길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큰 능력을 베푸심으로써 복음 전파의 길은 중단 없이 계속될 수 있었다. 김호성 부목사(목회신학)
  • 2023.01.0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쉽게 풀어 쓴 교회사 산책
    (52)중세후기②
  • 피렌체, 르네상스의 중심지
    ‘르네상스’라는 말의 뜻은 ‘다시 태어남(재생)’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로서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일어난 고대 그리스 문화의 부활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시기에는 문학, 예술, 철학, 정치, 과학, 신학, 법률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그리스 고대 문화에 대한 재해석과 적용이 일어났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는 한두 가지의 원인 때문에 촉발된 것은 아니었다. 먼저 교황권의 부패와 타락은 로마 가톨릭 중심의 교회 권위를 약화시켰다. 설상가상으로 십자군 전쟁의 연이은 실패와 흑사병의 창궐을 통해 중세의 경제, 사회 및 정치 구조를 지탱해 오던 봉건제까지 무너져 내렸다. 교황권의 약화로 인해 대립 관계에 있던 왕권이 강화되면서 200여 개가 넘는 도시국가들이 난립했다. 이들 가운데 특히 지중해와 인접한 이탈리아는 지리적으로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잇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기에 상인들이 몰려들면서 상업과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십자군 전쟁 이후 경제적인 호황으로 엄청난 인구가 도시로 모여들었다. 막대한 부를 쌓은 이탈리아의 상인들은 ‘길드’라는 조합을 만들어 경제 권력을 형성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교육에 대한 수요가 폭발했다. 수많은 수도원과 학교들이 설립되었고 더 나아가 대학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교육기관을 등장시키면서 학문과 문학 및 예술 등에 대한 대중들의 의식과 소비가 발달했다. 이탈리아 내에서도 피렌체공화국은 상공업이 매우 발달한 곳이었다. 도시 중앙을 흐르는 아르노 강을 중심으로 상거래가 활발했는데, 고대 로마시대에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다면 르네상스 시대의 모든 길은 피렌체로 통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특별히 피렌체는 황금 거래의 중심지였으며, 양모 무역과 고리대금업 등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많았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피렌체에서 태어난 단테는 르네상스의 신호탄이라고 일컬어지는 『신곡』을 출판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단테 자신이었는데, 그가 연모했던 베아트리체를 찾아 지옥, 연옥, 천국으로 이루어진 지하세계를 방문하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에서 ‘연옥’이라는 천국과 지옥의 중간단계가 등장하는데, 중세 사람들은 비록 죽은 자일지라도 여기에서 머무는 동안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면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경제의 호황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들은 이 ‘연옥’이란 개념에 열광했다. 기독교 세계관이 지배하던 당시 사회에서 돈에 대한 인식은 아주 부정적이었다. 성경에도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4)라는 말씀이 있는 것처럼 돈 많은 상인들은 결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했으며, 중세 상인들에게 이러한 사실은 매우 큰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이러한 까닭에 당시 부자 상인들은 죽을 때 수도원 지하에 묻혀있는 수호성인들의 유골과 가장 가까운 곳에 묻히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그 성인들이 최후의 심판장에서 자신들을 변호해주리라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재정적인 문제로 수도원이나 성당에서도 당시 성직자에게만 허용했던 묘지를 부자 상인에게 팔기 시작하면서 상인들에게 예배당 내부를 아름답게 장식하도록 했다. 당시 가장 유력했던 메디치 가문을 비롯한 피렌체의 많은 부자 상인들은 저마다 최고의 예배당을 만들기 위해 앞다투어 당시 제일 유명한 화가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무역과 상업활동을 통해 쌓은 부로 특권층에 편입된 상인들의 구원에 대한 열망이, 마침내 르네상스를 촉발한 예술작품의 생산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킨 원인이 된 것이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3.03.2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51)중세후기①
  • 르네상스 운동과 인문주의
    중세후기는 스콜라철학의 쇠퇴기에 해당하는 기간으로서 14~15세기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 시기 정치적으로는 왕권을 중심으로 강력한 민족국가가 형성되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시민계급과 민족의식이 고조되어 있었다. 사상적으로는 오캄의 윌리엄으로 대표되는 유명론과 민중경건운동이 대두되었으며, 종교적 절대권위를 상실한 교황청이 몰락하자 그 자리는 제후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렇듯 중세후기는 지금까지 중세를 지탱해오던 전통들이 와해되고 새로운 질서들이 부상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교회가 분열로 난립되고 있을 무렵, 새로운 정신 문화가 등장하고 있었다. 14세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활발했던 르네상스 운동이었다. 기존의 신중심적인 세계 구조와 이해에 대해 반기를 들며 인간에 관한 관심을 주제로 한 인간 재발견 운동이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도전적인 시도들이 등장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신앙적인 차원에 머물던 관심이 인간과 세속으로까지 확대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르네상스 운동은 중세의 구조적 변화를 가속했고, 가톨릭교회의 약화와 교황중심의 교회구조를 쇠퇴시켰다. 르네상스 운동과 연관되어 시작된 인문주의는 인간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그리스 로마 시대의 고전문헌 연구를 통해 그 시대의 문화를 재조명하고 그 가치를 추구하려했던 학문적 기풍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문주의자들은 중세를 지탱해오던 기독교 신앙 위에 고전문학에서 발견되는 지혜를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다. 고전연구를 위해서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플라톤이나 세네카 등의 고전문헌 연구가 성행했다. 이 외에도 수많은 고대 기독교 문헌들이 발굴되고 재생산됐다. 인문주의의 기풍은 이성적인 연구에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배경 가운데 기존에 전래되던 문헌에 대해서 여러 가지 비평작업을 통해 그 진위를 검토하는 연구가 활발했으며, 이를 통해 위조로 밝혀진 문서들도 매우 많았다. 그 가운데 압권은 가톨릭교회에 전래되어 오던 ‘콘스탄티누스 증여’가 위조로 밝혀진 사건이었다. 이 문서의 내용은 로마제국의 통일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가 자신의 나병을 치료해 준 교황 실베스테르 1세에게 감사의 표시로 로마 서부에 대한 통치권을 양도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이 문서는 중세 교황의 세속 지배권을 뒷받침하던 가장 강력한 증거로 사용되어왔다. 11세기 이후 교황들은 서임권 다툼(22년 1월 23일자 기사 참조)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대항해 교황의 권력이 세속 군주의 권력보다 우위에 있다는 근거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이 문서는 인문주의자들의 연구에 의해 8세기경 위조된 가짜문서임이 드러났다. 당시 부패와 타락으로 위기에 몰린 교황청이(21년 8월 29일자 기사 참조) 이를 타개하기 위해 자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교황청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간섭을 배격하고 더 나아가 과거 서로마제국의 지역에 대한 실질적 지배권을 주장하기 위해 가짜문서를 위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문주의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이 문서의 진위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결국 1440년 이탈리아의 역사학자 로렌초 발라는 그의 연구 <콘스탄티누스 증여의 위조에 관한 선언>에서 논리적인 모순들과 문헌학적 오류들 그리고 역사시대적 착오 등을 근거로 이 문서가 위조임을 밝혔다. 그는 이 문서의 위조는 교황의 권위에 대항하던 선구자들의 죽음을 불러일으킨 살인죄에 해당하며 인류에게는 일대 재앙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Eugenius IV, 1431~1447)는 이 문서가 교황청의 주도적인 위조가 아닌 누군가의 위서임을 인정한 바 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3.02.2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50)십자군 전쟁 이후 중세의 변화⑥
  • 스콜라철학
    ‘스콜라’는 ‘학교’ 또는 ‘학파’를 의미하는 라틴어이다. ‘스콜라철학’이란 중세 유럽에 생겨난 수많은 학교(2022년 12월 23일자 기사 참조)에서 성행했던 진리탐구의 사조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조직이 발전하고 신앙의 규범이 완성되어가면서 당시 세계관이었던 플라톤철학 사상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탐구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이러한 사상의 흐름을 가리켜 신플라톤주의라고 한다. 특별히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적 통찰력을 기반으로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조명하는데 크게 기여했는데, 인간의 이성을 통해 하나님의 신비를 설명하려 했던 그의 신학 방법론은 스콜라철학의 뿌리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이후에도 기독교 세계관 아래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이성적이고 사색적인 철학 방법론을 통해 신앙의 내용을 관찰하고 이해하고자 했다. 5~6세기경 위(가짜)-디오니시우스의 부정신학이 대표적인 예이다. 부정신학이란 사람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언어로는 전부 묘사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부정적인 표현으로만 서술해야 한다는 신학 사상을 말한다(예: “하나님은 태어나지 않으신 분이다”). 특별히 8세기 말 프랑크 왕국의 칼 대제가 세운 궁정학교는 이러한 초기 스콜라철학의 모판이 됐다(2021년 4월 25일자 기사 참조). 여기에서 발달한 스콜라철학의 방법론은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기 시작했고, 11세기까지 이어지면서 중세신학의 기틀을 마련했다.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이성적으로 증명하려는 스콜라철학의 경향은 켄터베리의 안셀름(?~1109)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신앙의 차원을 넘어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했다. 한마디로 그가 강조한 것은 이성을 추구하는 신앙으로 스콜라철학의 핵심을 잘 보여준다. 예를 들어 그의 유명한 ‘신존재증명’을 살펴보자: (1) 신은 그 이상으로 크게 생각될 수 없는 존재이다. (2) 이렇게 큰 존재는 인간의 생각 속에만 존재할 수 없다. (3) 그러므로 신은 반드시 실존해야 한다. 안셀름을 이어 페트루스 아벨라르두스(1079~1142)와 페트루스 롬바르두스(1096~1160)는 이성적이고 비평적인 방법으로 성경의 명제들이 설명돼야 함을 강조하면서 스콜라철학의 위치를 더욱 공고하게 했다. 때마침 이런 상황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저작들이 서방으로 전해졌다. 십자군 전쟁 가운데 상인들에 의해 동·서방 문물이 전해지면서 아랍어로 번역돼 보존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재발견됐다. 플라톤 사상 위에서 공고하게 서 있던 그리스도교 학자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플라톤 사상과 대조적인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도전 앞에 서게 됐다. 13세기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수사였던 알베르투스 마그누스(1193~1280)와 그의 제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그리스도교 신앙과 조화시켜 스콜라철학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특별히 아퀴나스는 계시 없이도 이성의 도움을 통해 계시된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주지주의). 이와 반대로 둔스 스코투스와 오캄의 윌리엄은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의 지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의지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자유 안에서 선택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주의주의). 이렇듯 중세 스콜라철학과 신학의 전성기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도전에 대한 진지한 응답에서 비롯됐고 이는 계몽주의와 르네상스 그리고 종교개혁의 사상적 배경이 됐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3.01.2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뿌리깊은 순복음
    (134)순복음의 7대 신앙-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47>
  • 육체적이고 허탄한 자랑 던져 버리고 오직 십자가만 자랑해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4절). 성경에서 ‘자랑’은 영적으로 가치 있는 일로 지칭되는 예가 드물다. 시편 10편 3절은 “악인은 그의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며 탐욕을 부리는 자는 야훼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라고 기록하며, 고린도후서 11장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라고 말했다. ‘자랑’은 이처럼 현저히 육체적이고 허탄한 행위로 이해된다. 자랑의 대상들은 대부분 가치 없는 것이거나 그 가치가 한시적인 것들이다. 비록 지금 자랑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잠시 잠깐 후에는 쓸모없는 것이 돼 버리거나 창피스럽고 민망한 일이 돼 버리고 마는 경우가 많다. 평등 시리즈라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우선 사람의 나이 40대가 되면 지식의 평등이 찾아온다고 한다. 공부 잘하고 못하고 하는 것은 어릴 때 학창 시절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40이 넘어가면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똑같다. 또한 50대가 되면 외모의 평등이 찾아온다고 한다. 예쁜 사람 못생긴 사람의 차이는 어리고 젊은 시절 이야기이다. 50이 넘어가면 똑같이 배도 나오고 엉덩이도 쳐져 외모도 다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아진다는 것이다. 이어서 60대가 되면 성의 평등이 찾아와 남자나 여자나 평준화가 된다. 남자는 순해지고 여자들은 상대적으로 강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남자나 여자나 비슷하게 된다는 것이다. 70대가 되면 건강의 평등이 찾아온다. 건강한 사람이나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나 고만고만하다는 것이다. 그만큼 같이 늙어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80대가 되면 재물의 평등이 찾아온다고 한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데 돈이 많으면 무엇하겠는가? 즉 가진 사람이나 못 가진 사람이나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90대가 되면 생사의 평등이 찾아온다. 다시 말해 이 나이쯤 되면 삶과 죽음이 별 차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 살고 내일 죽으나 내일 살고 모레 죽으나 따질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금은 서글픈 이야기지만 그만큼 우리네 인생에는 자랑할 것이 별로 없다는 의미를 이해하는 예로는 적절한 이야기로 보인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5절을 통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고백하듯 말하였다. 이처럼 성령 충만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거룩한 성도들에게는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3.03.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33)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46>
  • 받은 은사 자랑하고 과시하면 교회공동체 덕이 없고 무질서해져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누구든 자랑하고 나면 스스로 우월감을 느끼게 된다. 상대적으로 그것을 들은 상대방은 열등감을 느끼게 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시기심과 질투심의 원천이 된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자랑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 시기심을 불러일으키니 자랑하는 것은 이처럼 진정 여러 면에서 좋지 않은 행동이다. 아마도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자랑하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고린도전서 14장 26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권면했다. 이 말씀을 잘 풀이해 보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민낯이 드러난다. 그들은 함께 모였다. 함께 모였지만 사실 그들은 하나 되지 못해 제각각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는 열광적으로 찬송을 부르고 그에 뒤질세라 다른 누군가는 성경 말씀을 큰소리로 가르치려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또 스스로 계시를 받았다고 큰소리를 치는 사람도 있었으며 어떤 누군가는 자기는 방언을 한다고 떠들었다. 거기에 또 다른 이는 방언을 통역한다고 큰소리로 말했을 것이다. 얼마나 무질서하고 소란했을까? 도무지 덕(德)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아마도 서로서로 “너만 은사 받았냐? 나도 은사 받았다!”고 뽐내면서 자신이 받은 은사를 자랑하고 과시하려고 하다 보니 교회공동체가 덕이 없이 무질서했을 것이다. 성령 충만으로 실천하는 사랑은 결코 그 무엇도 뽐내며 자랑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모습을 한 번 살펴보자. 주님은 사실 자랑할 모든 것을 갖추신 분이셨다. 그럼에도 단 한 번도 자랑치 않으셨다. 예수님은 많은 기적을 행하셨으나 결코 자기 스스로 영광을 받지 않으셨다.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영광을 돌리셨다. 심지어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하실 때도 스스로 높여 말씀치 않으셨다. 언제나 하나님이 주신 말씀만 전한다고 말씀하셨다(요 12:49).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해야 할까? 우리도 스스로 자랑하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할 수 있기를 소망하며 스스로를 자랑할 그 시간에 다른 사람을 칭찬하려 노력하기를 바란다.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하지 말며 외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하지 말지니라”(잠 27:2).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3.02.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32)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45>
  • 스스로 높아져 자랑치 말고 우릴 구속하신 예수님만 자랑해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아마도 고린도 교인들은 자랑하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자신에게 침례를 베푼 사도들을 자랑했고 신령한 은사들을 자랑했다. 이를 지적하며 사도 바울은 고전 1장에서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며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했다(고전 1:29~31). 아무리 세상 것을 자랑해도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속담처럼 세상에는 나보다 더 큰 자랑거리를 가진 사람이 분명히 있다. 스스로 가진 것이나 이룬 것 자랑치 말고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속하신 예수님만을 자랑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내신다(고전 1:26). 다시 말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육체라도 자랑치 못하도록 연약한 우리를 택하신 것이다. 고린도전서 4장 7절은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라고 기록한다. 이것은 ‘나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졌다’고 자랑치 말라는 의미다. 사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에 어떤 자랑도 헛되다. 인생들이 주로 자랑하는 것은 돈·명예·자식·권력·힘 같은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그 가치가 오래 보존되지 않는다. 육체적이며 세속적인 가치는 그 한계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가치를 자랑할 수 없는 사람은 육체적인 가치라도 자랑하며 살 수밖에 없다. 자랑은 영적이기 보다는 육적인 것으로 성경은 기록한다(갈 6:13). 이처럼 자랑은 헛된 것이 대부분이다. 진정 가치 있는 것은 자랑치 않고 자랑할 필요도 없으며 오히려 자랑하면 어색하고 그 가치를 추락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령 충만한 성도들은 스스로 약하고 부족한 것을 채우신 예수님만 자랑해야 한다. 우리들의 입에는 하나님 자랑하는 이야기, 예수님 자랑하는 이야기, 성령님 자랑하는 이야기, 우리 교회, 우리 담임목사님 자랑하는 이야기, 성도 자랑하는 이야기 그리고 온전히 예수님을 믿어 복을 받은 이야기만 가득해야 한다. 이를 통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야 복을 받고 병이 나으며 예수님을 믿어야 천국에 가는 거구나 이제 나도 예수님을 믿어야 겠다” 고백하며 교회를 찾아오게 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번성하고 더불어 예수님이 영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 충만한 성도의 본분이다(갈 6:14).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3.01.1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기독교 설교자 열전
    설교자 베드로(Ⅱ)
  •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희망, 새로운 시작 뜻하는 종말론적 설교 전해 성경 뜻 풀고 적용시켜 크리스천의 삶 가르쳐 베드로의 설교가 갖는 세 번째 특징은 종말론적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종말’을 강조하고 왜곡하는 많은 이단으로 인해 한국교회에서 ‘종말’ 또는 ‘종말론’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될 때가 많다. 종말은 단순하게 역사의 끝이나 세상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세상에서 구원을 이루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것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며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종말은 하나님의 뜻이 세상 가운데 이루어지고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사 22:2; 미 4:1; 렘 3:17). 하나님의 평화와 공의가 세상에 있을 것이며(사 2:4) 자연에는 평화가 깃들 것이다(사 11:6, 65:25). 하나님의 율법이 사람들의 마음에 기록될 것이다(렘 31:31~34). 베드로는 구약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며 하나님의 종말의 시간, 곧 하나님의 뜻과 구원의 완성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선포했다. 또한 성령 강림 사건이야말로 종말의 때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증거라고 강변했다.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행 2:16~18). 예수님의 부활은 베드로를 비롯해 오순절 날 성령 침례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종말론적인 사건’이었다. 그들은 “이전의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예수의 부활로 인해 종말은 이미 시작됐다고 확신”하게 된 것이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되는 종말의 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행 2:20~21). 예수님의 재림은 그와 같은 종말의 시간의 완성을 의미한다. 넷째로 베드로는 자신의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를 제시한다. 설교는 크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의미를 풀어주고 그 의미를 삶 속에서 적용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벧전 1:1)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베드로전서는 전반부에 신학적인 내용을 제시하고 이후에 실천적인 내용이 덧붙여져 있다. 베드로는 그리스인들이 예수님을 통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다룬 뒤에 곧이어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시한다. 자신의 설교를 통해 말씀을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설명한 것이다. 베드로에게 그의 청중들은 ‘거듭난’ 사람들이고(벧전 1:3), “산 소망”(벧전 1:3)이 있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유업을 얻고(벧전 1:4), 이 땅을 사는 동안 하나님이 크신 능력으로 보호해주시는 사람들(벧전 1:5)이다. 이제 그들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며(벧전 2:9),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긍휼”을 얻는 사람들이다(벧전 2:10).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답게 이 세상을 살아내야 한다. ①먼저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영원히 거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거류민과 나그네”와 같다는 것을 상기시킨다(벧전 2:11). 이 땅에 잠시 머물고 떠나는 방문객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본향은 천국이며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때를 기다리며 이 땅을 살아가야 한다. ②베드로는 나그네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 상태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한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예수님이 재림하는 날까지 그들은 죄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기에 죄와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금할 수 있다. 그들 안에 있는 욕심과 욕망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어하라’는 것은 문자적으로 “계속해서 거리를 두라”는 것이다. 또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은 이 땅을 사는 동안 계속해서 선한 일을 행해야 한다고 권면한다(벧전 2:12). 육체를 제어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내면의 노력이라면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외적으로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는 그들을 향해 악행한다고 비방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선을 행함으로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유자인 동시에 종이다(벧전 2:16). 결론적으로 베드로는 그들을 향해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벧전 2:17)고 설교하고 있다. 조지훈 목사(굿피플 사목)
  • 2023.03.09 / 이미나 기자

    설교자 베드로(Ⅰ)
  • 베드로 설교의 큰 특징은 성령 충만 담대히 복음 전할 때 3000명 구원 받아 고대 사회에서 ‘편지’(서신)는 그 편지를 보낸 발신인과 동일시됐다. 편지는 발신인의 의견이나 생각을 대변했고 그것을 읽는 수신인들은 편지를 통해 발신인을 만난다고 믿었다. 특히나 통신과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지역 교회의 문제를 다룰 때 편지만큼 좋은 수단은 없었다. 편지는 그 편지를 보내는 사람의 목소리를 대신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신약성경에 기록된 서신을 하나의 설교로 보려는 학자들이 많다. 설교자들이 각 지역 교회의 문제를 다룰 때 편지라는 형식을 빌려 자신의 설교를 행했다는 것이다. 폴 스캇 윌슨 교수는 신약의 서신들 가운데 처음부터 설교로 작성된 것도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신약성경에 담긴 베드로나 바울의 서신들은 그들의 설교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번 호에는 사도행전과 베드로전·후서를 중심으로 베드로의 설교가 갖는 특징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 베드로의 설교와 성령 충만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베드로의 설교가 가장 먼저 등장하는 곳은 사도행전 2장이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예루살렘에 모여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오순절 날 성령이 임했고 그들은 여러 나라의 말, 곧 방언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큰일을 말하기 시작했다(행 2:11).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술에 취했다고 놀리는 사람들이 있었고 베드로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설교하기 시작했다. 성령침례사건은 구약성경 요엘서 예언의 성취이며 예수님의 십자가사건과 부흥의 결과라는 것이 오순절날 베드로 설교의 요지이다. 오순절날 베드로가 행한 설교의 모든 과정은 성령님의 역사였음을 알 수 있다. 성령이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임했고(행 2:1~4), 이로 인해 베드로가 담대히 복음을 전했고(행 2:14~40), 그날 3000명의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행 2:41). 성령 충만을 통해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았던 것이다. 둘째, 베드로의 설교는 예수님 중심(Jesus-centeredness) 설교였다. 예수님 중심 설교란 단순히 설교 가운데 예수님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 설교가 아니다. 예수님 중심 설교란 설교의 전 과정, 곧 성경 해석으로부터 청중을 이해하고 실제 설교를 행하는 모든 과정을 예수님과의 연관성 속에서 행한다는 의미이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베드로의 설교는 철저히 예수님 중심적이다. 먼저 그는 성령침례 사건의 근거를 구약 요엘서에서 가져온다. 요엘 2장 28~32절에 기록된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라는 예언이 지금 성취되었다는 것이 베드로의 주장이다. 그가 요엘서의 예언이 지금 성취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승천 전에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 때문이다(행 1:5, 8). 또한 베드로는 시편 16편 8~11절 역시 예수님을 통해 해석한다(행 2:25~28). 베드로의 구약 해석은 철저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해석된 구약성경 이야기를 자신의 청중들(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던 사람들, 대부분이 유대인들이었을 것이다)에게 적용하는 과정에서도 예수님 중심성을 철저히 고수하고 있다. 그는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는 그들에게 다윗과 예수님의 관계에 대해 설명했고 동시에 그들이 얼마 전 십자가에서 처형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이야기했다. 유대 율법에 대한 그들의 지적인 면과 예수 처형이라는 경험적인 면 모두를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베드로의 설교는 철저히 예수님 중심성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계속>
  • 2023.02.09 / 이미나 기자

    설교자 예수
  • 신학자 알프레드 가비는 “어떤 주제에 접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주제의 역사를 아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 속 설교자들을 살펴보는 것은 기독교 설교를 알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그들의 삶과 설교를 살펴봄으로써 말씀 기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설교자 열전’을 통해 기독교 역사 속 설교자들의 삶과 설교를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은 선언으로 시작된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2).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아들 되신 예수님을 통해 세상을 향해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히브리서의 선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이시라는 요한복음의 내용과 맥이 닿아있다(요 1:14).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셨고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분이기도 했다. 기독교의 시작점인 예수님이 기독교 설교의 출발점인 이유가 이것이다. 예수님의 설교 속에서 발견되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님은 설교자로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명확히 아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명확히 알고 계셨다. 바로 복음 전파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눅 4:43). 이와 같은 자신의 임무에 대한 예수님의 인식은 갈릴리 회당에서 처음으로 행했던 설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예수님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선포하심으로써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셨다. 둘째, 예수님의 설교는 하나님 나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 하나님 나라를 청중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은 비유를 사용하셨다. 비유는 예수님의 설교가 가지는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설교 방법이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다(막 4:34). 그것은 비유라는 것이 “다른 방식으로 전달될 수 없는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볼 것을 요구한다.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된 세상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살아갈 것을 요청한다. 그러기에 비유라는 설교 방법을 통해 예수님은 청중에게 일상적인 풍경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도록 인도하셨다. 매일 만나는 사람들과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요청하셨다. 양들을 통해(눅 15:3~10), 처녀들을 통해(마 25:1~13), 누룩(마 13:33)과 동전(눅 15:3~10)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하셨다. 특히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바로 자기 자신이시며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가르치셨다(요 14:6). 그러기에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주께서 내게 이르시기를”이나 “야훼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셋째, 예수님의 설교를 들었던 대상들은 대부분 일반인이었다. 당시 종교 지도자나 정치 지도자 중에 예수님의 설교를 청종했던 사람들은 극히 소수였다. 넷째, 예수의 설교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약부터 있어 온 예언자들과 회당의 랍비들이 계속해 온 하나님 말씀의 선포와 해석이었다. 다섯째, 예수님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설교를 행하셨다. 복음은 언제 어디에서나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여섯째, 예수님은 자신의 복음 선포 사역을 제자들에게 일임하셨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조지훈 목사(은평대교구장, 한세대 설교학 겸임교수)
  • 2023.01.06 / 김용두 기자

    순복음영성스케치
    기도 훈련 - ② 체계적인 기도 훈련의 필요성과 단계들
  • 성령 충만을 통한 영적 성장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성도라면 누구나 추구해야 할 거룩한 목표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 생활을 스스로 점검하고, 기도의 자리를 찾아 적극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성도 스스로 이러한 기도의 삶을 지속해 나아가기란 쉽지 않다. 성도 한 명, 한 명이 기도의 용사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체계적인 훈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수영이나 볼링 등 운동을 처음 배울 때를 생각해보자. 올바른 자세 또는 기초적인 이론 등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못한다면 실력이 늘지 않는다. 오히려 올바르지 않은 자세로 무리하게 연습하다가 부상당하기 십상이다.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성도 개개인이 일단 기도를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체계적인 훈련 과정을 통해 성령 충만한 기도 용사로서 성장해 나아갈 수 있다. 오늘은 영적 성장을 위한 기도 훈련의 단계들을 살펴보고, 실제 기도 훈련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유용한 지침들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1. 기도 훈련의 단계들 군대에서 병사들을 훈련할 때도 단계가 있듯이 기도 훈련에도 단계가 있다. 각자의 수준에 맞춰서 차근차근 노력하다 보면 누구나 성령으로 충만한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다. (1) 기도의 방해 요소 제거하기 기도 생활에는 상당한 장애물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도의 장애물들을 제거하여 기도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① 이기적인 목적(약 4:3) ② 회개하지 아니한 죄(사 59:1,2) ③ 마음속의 우상(겔 14:3) ④ 가난한 사람과 하나님의 사역에 인색한 마음(잠 21:13) ⑤ 용서하지 못하는 영혼(막 11:25) ⑥ 부부간의 갈등(벧전 3:7). (2) 기도를 습관으로 만들기 “우리가 가진 모든 탁월함은 습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기도 역시 습관이 될 때 우리는 탁월한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다. 공생애 동안 습관을 따라 기도하셨던 예수님처럼(눅 22:39) 우리도 개인적인 기도의 시간과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새벽이나 오전이나 저녁 등 지혜롭게 시간과 장소를 정하되 꾸준한 기도 생활의 루틴(일정하게 반복하는 절차)을 만들어야 한다. 주일예배, 새벽예배, 소그룹 기도 모임, 가정예배 등을 활용해 정기적인 기도의 자리를 만드는 것도 바람직하다. (3) 순종하는 기도자 되기 우리가 힘써야 할 기도의 다음 단계는 순종의 단계이다. 기도 가운데 깨닫게 된 바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인정하고, 그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기도자가 되어야 한다. 주님은 자기 뜻과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려는 의지를 갖추고 기도하는 사람을 찾으신다(막 8:34). (4) 중보자로서 기도하기 성숙한 기도자는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이 우리 자신과 공동체에 역사하실 것을 바라며 기도하는 사람이다(마 6:9~10). 이러한 사람은 자신을 위한 기도뿐만 아니라 이웃과 공동체를 위한 기도의 짐을 기꺼이 지려 한다.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결렬된 틈을 막고 서는 중보자의 심정을 가지고 꾸준히 타인을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는 기도 생활이야말로 가장 높은 수준의 기도 훈련이다. 2. 기도 훈련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침들 앞서 설명한 기도 훈련의 단계들 안에서 아래의 영적 지침들을 적용할 때 더욱 효과적인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있다. (1) 회개하며 드리는 기도 성경은 기도를 통한 회개와 자백의 유익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2) 찬양하며 드리는 기도 하나님은 찬송 가운데 임하신다(시 22:3). 모든 기도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고백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구속의 은혜, 성령님의 인도하심 등을 진심으로 찬양할 때 우리 마음에 뜨거운 감동이 일어나고, 이는 우리를 더욱 깊은 기도로 이끈다. (3) 감사하며 드리는 기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을 믿고 기도 가운데 항상 감사의 고백을 드려야 한다. 우리는 많은 경우 부지불식간에 감사 없는 기도, 형식적인 감사로 기도하곤 한다. 진심으로 감사하는 한 두 마디의 기도가 때로는 백 마디 간구보다 더욱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가 된다. (4) 기록하며 드리는 기도 기도 훈련으로 유명한 미국의 존 맥스웰(John C. Maxwell) 목사는 기도의 제목이나 응답의 기록을 강조했다. 기도의 제목을 바라보며 기도할 때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 수준의 믿음을 갖게 된다. 받은 것을 헤아릴 때 의심의 구름이 걷히고 이성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성령 충만한 기도의 사람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도 훈련에 유용한 지침들을 숙지하고 단계적인 기도 훈련의 과정을 차곡차곡 밟아가다 보면 어느새 기도의 사람으로 변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김현동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영성훈련소장)
  • 2023.03.2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기도 훈련 - ① 기도의 의미와 중요성
  • 여의도순복음교회는 명실상부 우리나라의 성령운동을 견인해온 대표적인 교회이다. 크리스천이라면 우리 교회를 생각할 때 ‘성령 충만한 교회’와 ‘기도가 뜨거운 교회’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지금도 우리 교회의 주일예배와 기도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성령침례를 받아 방언을 말하고, 기적의 체험과 신유의 역사를 간증하는 일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이렇듯 우리 교회의 모든 예배와 사역의 핵심은 성령 충만을 사모하며 뜨겁게 기도하는 전통과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한 신앙은 어느 날 갑자기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성령 충만은 말씀과 기도 안에서 지속적인 신앙의 훈련을 통해 도달하는 것이다. 이에 국제신학연구원 영성훈련소에서는 ‘순복음 영성 스케치’라는 제목으로 성도들의 영적 훈련의 과정을 돕는 자료들을 연재하고 영적 성장의 길잡이가 되고자 한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서 영성 훈련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도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1. 기도의 의미 가장 일반적인 기도의 정의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이는 성경 말씀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시편 기자는 34편에 “내가 야훼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4절), “너희 자녀들아 와서 내 말을 들으라…”(11절)라고 말씀한다. 즉, 기도란 ‘우리가 간구할 때 하나님이 들으시고, 하나님이 응답하실 때 우리가 듣는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관점에서 바라봄으로 성경 안에서 다양한 의미들을 발견해 볼 수 있다. (1)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화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말하고 듣고 순종하는 것이다. 대화는 나 혼자만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는 상호 관계 속에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에게 가까이 하신다(신 4:7). 또한 기도하는 성도는 하나님이 말씀하실 것을 기대하고 귀를 기울여 듣는다(시 85:8). 이와 같이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 대화이자 호흡이다. 우리는 기도라는 영적 호흡을 통해서 하나님 사랑의 숨결을 느낄 수 있고 비로소 삶의 보람과 의미를 찾을 수 있다. (2) 문제 해결의 열쇠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하다. 우리가 전도를 하거나 말씀을 전할 때, 기도로 미리 준비하면 듣는 사람들의 마음 문이 쉽게 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이 구하는 자에게 후히 주시기 때문이다(약 1:5).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복을 주시는데 어떤 이에게는 일용할 양식을, 어떤 이에게는 질병의 치료함을 또 어떤 이에게는 생명의 연장을 주시기도 하신다(왕하 20:6). 2. 기도의 중요성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기도이다. 25년간 인도에서 선교한 웨슬리 듀웰 박사(동양선교회 및 복음주의외지선교협회의 회장 역임)는 기도의 중요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도는 우리가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은 아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이다.” 즉, 기도가 주님의 사역을 수행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자 놀라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이라는 뜻이다. 이같이 크리스천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인 기도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그 중요성이 더욱 극대화된다. (1) 하나님의 뜻이요 명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이 바로 ‘교제’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창조하셨고 그 사랑을 계속 유지하시기 위해서 우리와 기도로 함께하기 원하신다. 바로 이 사랑의 하나님의 뜻이자 명령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라는 말씀이다. (2) 기도 자체가 능력 기도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통로이다. 죄를 이기는 능력, 질병을 치료하는 능력,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주의 일을 감당하는 능력 등 모든 영적 능력을 얻는 길이 바로 ‘기도’이다. 성경은 특별히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는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고 강조해 말씀한다. (3)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게 됨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알게 하는 중요한 통로이다. 하나님은 부지불식간에 모든 일을 스스로 다 하실 수 있지만 이 같은 경우 사람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인지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기도하고 응답받는 과정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하나님의 개입하심과 역사하심을 깨달아 알게 된다. 이상으로 ‘기도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알아보았다. 다음 시간에는 ‘기도 훈련의 필요성과 단계’에 관하여 알아보자. 김현동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영성훈련소장)
  • 2023.02.2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선교 뉴스
    송준혁 목사, 호주 선교사 파송
  • 재단법인 순복음선교회 이사장 이영훈 목사는 19일 성전비서실에서 호주 브리즈번순복음교회 부교역자로 파송되는 송준혁 목사에게 파송장을 수여하고 선교 사역을 위한 헌신을 당부했다.
  • 2023.03.24 / 오정선 기자

    이석병 목사, 브라질 선교사 파송
  • 재단법인 순복음선교회 이사장 이영훈 목사는 2월 26일 주일 4부 예배 후 대성전에서 브라질 선교사로 파송되는 이석병 목사에게 파송장을 수여하고 안수기도했다. 이영훈 목사는 이석병 목사에게 남미 복음화 사역과 더불어 상파울루순복음교회를 남미 지역 큰 교회로 부흥시켜 세계선교에 헌신할 것을 당부했다. 이석병 목사는 은평·동작·용산대교구장, 동대문성전 담임 등을 역임했다.
  • 2023.03.03 / 오정선 기자

    김성준A 목사 캐나다 선교사로 파송
  • 재단법인 순복음선교회 이사장 이영훈 목사는 1월 29일 주일3부 예배 후 대성전에서 캐나다 선교사로 파송되는 김성준A 목사에게 파송장을 수여하고 동행한 가족을 위해 안수기도했다. 김성준 목사는 그동안 대학청년국 프뉴마선교부장, 전도새가족부장 그리고 양서성전 담임 등으로 사역해왔다. 캐나다에서는 밴쿠버순복음교회 담임으로 사역한다.
  • 2023.02.02 / 오정선 기자

    선교지 소식
    타나베 야베스 선교사(일본)
  • ‘일본 일천만 구령’과 이웃 사랑 실천 위해 전진합니다 5명 성도로 출발해 60여 명 성도 함께 예배 드려 우크라이나 이어 튀르키예 등 지진 피해 성금 전달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일본 사이타마현에 위치한 순복음가와고에교회를 2021년 8월부터 섬기고 있는 타나베 야베스 선교사입니다. 가와고에는 도쿄에서 북쪽으로 약 40㎞ 정도 떨어진 곳으로 인구 35만명의 핵심 도시입니다. 가와고에는 역사가 깊고, 에도 시대에 성곽도시로 번영한 도시로 작은 에도 ‘고에도’(小江戶)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터, 유적, 역사적 건축물이 많아 국가로부터 ‘역사도시’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순복음가와고에교회는 1999년 4월 4일 한 음식점에서 5명이 모여 예배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 해 11월 예배할 장소가 주어져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2008년에는 약 142평의 건물을 주셔서 지금의 자리에 입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23년 현재 일본, 한국, 중국, 대만 출신 성도 약 60명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가와고에에는 약 20개의 교회가 있어 매월 목회자 모임을 통해 가와고에 부흥과 교회 발전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현재 담임 목사님들 나이가 대부분 70세 이상이고, 가장 많은 분은 90세이십니다. 모두 현역으로 교회를 섬기고 계십니다. 놀랍게 보이지만 일본 교회에서는 당연한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든 목사님들이 후임자가 없어서 계속 목회를 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일본에서는 무목교회가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일본의 기독교는 전체인구의 1%도 안 되고, 개신교는 그 중 0.4%도 안 되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의 첫 번째 비전은 하나님께서 주신 ‘일본 일천만 구령’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 교인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교회를 사랑하고 일본을 사랑하고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날마다 실천하고 있습니다. 예배와 기도, 말씀을 통해 신앙과 영적 성장 그리고 성령 충만함을 항상 추구하며 기쁨과 감사 그리고 평안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비전은 성도들의 가족 구원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아직 가족이 구원받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자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교회에서 멀어졌다는 가정도 있습니다. 우리의 가장 가까운 가족, 자녀들이 교회에 와서 함께 손을 잡고 예배를 드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조금씩이지만 행사 때 얼굴을 보여주시고, 교회 예배에 참여해주시는 가족들도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며,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모두 실천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비전은 이웃에 대한 사랑 나눔으로 우리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 편부모 자녀, 독거노인 등 사회적 약자인 분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봉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삶의 의미와 꿈과 희망을 나누며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시설을 운영하는 기독교 단체와 협력 및 지원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 교회는 전쟁과 지진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 튀르키예와 시리아의 이재민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며 2022년 7월에 이어 올해 2월에 각국 선교사님들에게 주님의 사역을 위해 총 100만엔(1000만원)을 후원했습니다. 이렇게 국내 뿐 아니라 해외의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누고 증거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얼마 전 이영훈 목사님이 일본에 오셔서 강렬한 순복음의 메시지를 전해주셨습니다. 일본은 반드시 부흥하고 복음화가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우리 신앙의 실천을 통해 가와고에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기를 기도하고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첫째, 일본에 부흥의 불길이 곳곳에서 타오르도록, 순복음의 뜨거운 기도와 함께 성령운동이 다시 한번 일어나 모든 교회에 폭발적인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기도의 용사인 우리 순복음교회가 이 일본에 세워진 줄 믿습니다. 둘째, 가와고에에 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크리스천들이 일어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신사, 절 등 역사적인 건물과 문화가 있기 때문에 영적인 싸움이 많이 있습니다. 셋째, 다음세대의 부흥과 신앙의 계승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젊은 세대들이 속속 일어나 우리의 신앙을 이어받아 복음의 밭을 경작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줄 믿습니다. 한 분 한 분의 중보기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기도할 때마다 항상 일본을 위해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도 항상 한국을 위해 여의도순복음교회 성도님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 2023.03.03 / 오정선 기자

    이상용 목사(베트남순복음교회)
  • 순복음의 영성으로 지역 교민 섬기며 현지 복음화 꿈꿔 법인 설립 및 세금 문제, 하나님의 뜻 안에 해결 되기를 ‘안끄’ 지역 집짓기 프로젝트 … 교회 처소 되길 기도 여의도순복음교회 성도님들에게 주님의 평강이 넘치시기를 소망합니다. 멀리 베트남 호치민에서 인사를 드립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는 베트남 남부 지역인 호치민에 위치합니다. 2004년에 창립된 베트남순복음교회는 지역 교민들을 섬기는 교회로 순복음의 영성과 신앙을 전하고 있습니다. 저는 베트남순복음교회 4대 담임목사로 2019년에 파송됐습니다. 파송되자마자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됐고 3년이라는 긴 코로나의 기간을 하나님의 은혜로 지나오게 되었습니다. 베트남순복음교회에는 오랜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2012년 부과된 세금이 10년간 연체되어 베트남 정부 당국에 우리가 내야 할 세금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액수로 불어났습니다. 지난해 9월에는 베트남 정부가 10년간 세금을 내지 않았기에 강제집행을 하겠다는 공문을 보내왔습니다. 정부가 토지와 건물을 회수하기 전에 마지막 절차로 소유자에 대한 모든 재산 정보를 공개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해부터 세금 납부를 위한 계획을 세우고 진행하는데 주님의 은혜로 지난해 6월 이영훈 목사님께서 세금에 대한 비용을 지원해주시기로 하셨습니다. 모교회에서 세금 원금을 은행을 통해 보내 주셨는데 베트남 은행에서 지급을 거절했습니다. 그 당시 보내준 금액을 찾지 못하면 베트남 정부 당국의 절차대로 토지와 건물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뿐’이었는데 하나님이 그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은행으로부터 돈을 찾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베트남은 공산주의 국가이기도 하고 대한민국의 세법이나 토지 사용의 개념과 차이가 있어 현재 우리 교회가 처한 상황을 조사하고 해결하는 과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특히 어려운 법률용어와 세무용어를 통역해 듣다 보니 해석의 차이가 생기기도 했고 토지와 건물에 대한 서류 중 없는 것들이 많아 준비 과정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해 11월 이영훈 목사님께서 우리 교회에 방문하시고 성도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더불어 우리 교회 리더들과 만난 자리에서 세금 문제의 해결과 재산권을 보호하는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독려해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올해 세금과 관련한 모든 문제를 마무리하고 재산권 보호를 위해 법인 설립과 외국인단독교회(International Church) 등록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베트남과 베트남순복음교회를 위해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저희 가족을 비롯한 성도님들의 체류 비자 발급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길었던 코로나를 이겨내고 성도님들이 베트남 땅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이 땅에 순복음의 깃발을 높이 들고 많은 영혼을 살리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또한 우리 교회는 선교의 마음을 품고 기도하는 지역이 있습니다. ‘안끄’라는 곳으로 이 지역은 호치민에서 차로 1시간 30분 정도 떨어져 있고 5개의 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농업이 주된 지역으로 가난한 소작농이나 품꾼, 빈민들이 많은 곳입니다. 최근에는 해수면의 상승으로 인해 바닷물이 역류해 농사를 망치는 일들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안끄 지역에는 아직 교회가 없습니다. 베트남순복음교회는 작년부터 안끄 지역의 적십자와 인민위원회를 통해 장학금 전달과 빈민 구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복음 전파와 함께 교회 이름으로 구제사역을 하며 더불어 베트남 현지 사역자들이 지역 사회에 흡수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안끄 지역의 많은 집들은 흙바닥에 바나나 잎으로 비와 햇빛만 피할 수 있는 형편입니다. 올해 이곳에 집짓기 프로젝트가 이루어지는데 기도하기는 세워지는 가정이 교회의 처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안끄 지역 인민위원회와 함께 하는 집짓기 프로젝트를 통해 복음이 전해지기를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현지인 사역자들이 세워지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라 베트남순복음교회는 베트남을 섬기며, 선교에 앞장서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모교회 성도님들의 많은 관심과 중보를 부탁드리며 성도님들의 가정과 삶의 자리 가운데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 2023.02.03 / 오정선 기자

    조대희 선교사(몽골)
  • 날라이흐와 거르덕 순복음교회 통한 성령의 역사 현지인 목회자 양성으로 복음 전진 나서 다음세대·목회자 지원 위한 센터처치 설립 추진 1990년 구소련이 무너지면서 1991년 몽골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새롭게 태동하게 되었습니다. 몽골은 칭기즈칸의 후예로 지금도 13세기 당시의 유목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21세기를 살아가는 도시 사람들 모습도 볼 수 있어 21세기와 13세기가 공존하는 사회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저희는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에서 32㎞ 떨어진 날라이흐라는 도시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구소련 연방공화국 시절에 질이 좋은 석탄이 나오는 탄광촌 작은 마을로 시작해 이제는 한국의 분당, 일산과 같은 곳으로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지역민 대부분은 울란바타르로 매일 출퇴근하는 사람들이며 그 수가 계속 늘고 있는 상황입니다. 날라이흐는 28개 교회가 있는 축복받은 지역입니다. 지역 관할구청이 종교에 대해 관용적인데다 최근에는 지역교회 연합으로 관할구청과 협업해 추진하는 일들이 많아져 좋은 관계 속에서 사역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날라이흐순복음교회는 올해로 설립된 지 14년이 지났습니다. 작은 아파트 거실에서 시작된 교회는 비밀경찰과 지역 관공서로 신고가 들어가면서 전통 게르로 교회를 옮겼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현재의 교회 건물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처음 시작한 사역은 예배와 기도사역(새벽기도) 그리고 한 장로님의 후원으로 시작된 어린이 무료급식 사역이었습니다. 어린이 무료급식은 몇 년 후 지역 학교, 이어 어린이 유치원 사역으로 변경 돼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올 9월 신학기에 건물주의 갑작스런 계약 해지 통보로 신학기 어린이를 받아야 하는 기간에 쫓겨나 거리에 나앉게 되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임시 건물에서 유치원을 여는 경험을 하게 됐습니다. 이번 일로 ‘하나님께 입을 크게 벌려 유치원 건물을 구입 해야겠다’는 마음을 주셔서 현재 이를 추진 중입니다. 유치원은 현재 원아 18명, 방과 후 학교 17명 총 35명 아이들이 이용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청소년 문화 공간으로 작은 카페 사역도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의 어려움을 하나님의 은혜로 잘 견디고 이제 이곳은 날라이흐순복음교회의 나라 목사 부부가 카페를 넘겨받아서 사역을 잘 이어가고 있습니다. 날라이흐에서 8㎞ 떨어진 거르덕 지역에 거르덕순복음교회를 개척한지도 7년이 지났습니다. 유목민으로 형성된 작은 게르촌에서 시작된 교회는 예배 사역에 이어 ‘실로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게르촌은 따뜻한 물로 씻을 수 있는 공중샤워장이 한 곳도 없습니다. 저희가 공중샤워장을 건축한다는 소문이 알려지자 지역민 모두 환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지난 5년 동안 재정을 모아 건축하려했는데 코로나에 이어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가 몽골에도 닥치면서 건축 회사를 통해 건축 하는게 어려워 직접 나서기로 했습니다. 지난 5월부터 10월까지 모든 재정을 동원해 공중샤워장을 지었는데 현재는 70% 정도 지어진 상황입니다. 부족한 재정은 여의도순복음분당교회의 지원으로 마무리 중에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루 빨리 ‘실로암 프로젝트’가 완공 돼 지역민들에게 따뜻한 물을 공급하기를 원합니다. 아울러 이들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영적 생수인 복음도 함께 전해져 열린 문의 복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지난 10월 2일 날라이흐·거르덕순복음교회에서 헌신하는 나랑게를·에르뜬바타르 사역자가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현지인 목회자에게 교회를 위임하고, 저는 새롭게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이루기 위해 울란바타르 시내에서 다음세대와 몽골 목회자 지원 그룹을 운영할 수 있는 센터처치를 설립하고자 합니다. 이곳에서는 앞으로 몽골 사역에 필요한 다양한 사역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첫 번째 문서사역입니다. 신학교 교재와 각종 필요한 책을 몽골어로 번역하는 사역입니다. 둘째는 몽골 다음세대 세우기와 회복·중보기도 사역입니다. 몽골은 청소년의 80%가 학교나 가정, 친구들 관계에서 왕따를 겪은 경험이 있습니다. 이들의 상한 마음 회복은 물론 청소년들이 바로 세워질 수 있도록 중보기도 사역에 나설 겁니다. 셋째로 몽골 목회자 지원 그룹 사역입니다. 이 사역은 몽골 전역을 다니면서 목회자 보수 및 성경 교육을 집중적으로 하는 사역입니다. 교회 설립과 동시에 센터 사역을 위해 많은 기도와 재정적 지원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이러한 사역들이 온전한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 가운데 또 하나님의 시간에 잘 이뤄질 수 있도록 성도님들의 중보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에르뜨네 전도사(간경화, 간암1기)의 회복과 막내딸 인느넬(중증뇌성마비)의 건강을 위해서도 기도해주시길 요청드립니다.
  • 2022.12.02 / 오정선 기자

    선교사를 위한 중보 기도
    황신 선교사(캄보디아)
  • - 각 제자 교회에 부흥의 불이 일어나도록 - 11개 제자교회의 영적·재정적 자립 - 황신 선교사와 사모 건강을 위해
  • 2023.03.24 / 오정선 기자

    배드보라 선교사(I국)
  • - 사역을 위한 성령의 기름 부으심 - 전 성도 1시간 기도, 1시간 말씀 읽기, 1명 영혼 전도(1:1:1 목표)를 위해 - 사회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플랫폼 구축, 청년 지도자들을 위해 - 2023~2025년 센터가 전진기지 역할을 감당하고 동역자로 세워지도록
  • 2023.03.17 / 오정선 기자

    김원일 선교사(영국)
  • - 벨파스트순복음교회 예배와 모임 장소 또는 장소를 구할 재정을 위해 - 사역을 위한 승합차 마련 - 접촉점을 위한 전략과 예비된 동역자, 예배팀이 세워질 수 있도록 - 한국어 또는 문화 사역을 위한 중보
  • 2023.03.10 / 오정선 기자

    구속사적 성경읽기
    (19)영적 무장을 위한 3대 신앙
  •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로 했다면 영적 전쟁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영적 무장이다. 영적 무장이 없이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전쟁에 임하는 병사가 무장 없이 맨몸으로 나서는 법이 없듯이 영적 전쟁에서도 영적 무장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번 시간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무장, 곧 3가지 신앙적 무장에 대해서 알아보자. 1. 창조 신앙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자 우리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장본인이시다. 이 세상 모든 만물 가운데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아무리 과학이 하나님을 배제하고 진화론과 같은 이론으로 이 세상을 설명하려고 해도 그런 과학은 극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다음과 같은 우화가 있다. 어느 날 과학자 한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와 말했다. “우리 과학이 발전해 흙으로 사람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과학이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다 할 수 있다는 의미죠.” 하나님이 답하셨다. “정말 그러한가? 그렇다면 네 말대로 흙으로 사람을 만들어 보아라. 대신 네 흙으로 해라.” 이 우화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생명의 근원, 우주의 근원은 밝혀낼 수 없다는 것이다. 생명의 근원, 우주의 근원은 어디 있는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셨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2:1~2).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렇다면 창조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 달리 말해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 영광을 올려 드리며 살아야 한다. 2. 십자가 신앙 예수님의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은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함을 얻으며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축복을 얻은 것이다. 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말했다.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마르틴 루터는 이 말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어야 함을 천명한 것이다. 달리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빼놓고서는 기독교 신앙을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갈라디아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3~14). 예수님이 율법이 정한 대로 나무에 달려 죽는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우리를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브라함의 복과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셨다. 그렇다면 십자가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담대한 복음 증거자가 되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세상 앞에 절대로 주눅 들지 않는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만큼 나를 사랑하셨고 모든 저주의 굴레에서 해방하셨다. 또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우리가 삶의 형편과 조건, 세상의 시선에 위축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3. 부활 신앙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은 부활 신앙에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정사실이다. 그 증거가 무엇일까? 첫째,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 둘째, 부활의 목격자들이 있다. 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4~8). 특히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당하실 때 비겁한 도망자들이 되었던 제자들이 어떻게 다시 그 예수님을 전하다 순교자까지 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부활이 거짓일 수 없는 이유다. 물론 이런 증거에도 부활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셋째, 부활이 거짓이라면 그 거짓이 2000년 넘게 지속될 수 있었을까? 수없이 많은 사람이 그 거짓에 자기 목숨을 걸 수 있었겠으며 자기 인생을 헌신해 가며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을까? 부활은 사실이고 진리이다. 그렇다면 부활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결단코 세상에 얽매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안개처럼 쉽게 사라지는 인생길을 걷고 있으며 잠시 왔다가 떠날 나그네 인생을 살고 있다. 이 세상은 우리 삶의 종착지가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단기 선교 온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다. 바울 사도는 말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이 세상에 얽매여 잠시 잠깐뿐인 헛된 것을 찾다가 인생의 허망함에 무릎을 치며 후회하지 말고 부활 후 누릴 영원한 생명을 바라며 살아가자. 오정섭 목사
  • 2022.07.1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절대긍정의 믿음
  •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선교라고 정의되는 시대가 찾아왔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복음 증거만큼이나 그리스도인의 삶이 주목받는 시대라는 뜻이다. 요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전하는 복음의 진정성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에서 찾는다. 따라서 성경을 삶의 원리 원칙으로 삼는 성경적인 삶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성경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절대긍정의 믿음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결론은 성도의 최후 승리를 말하고 있으며 다시 오실 예수님이 성도의 최후 승리를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 할 절대긍정의 믿음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그 땅을 정탐 다녀온 여호수아와 갈렙의 반응에서 절대긍정의 믿음이 지녀야 할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1.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을 갖고 싶어 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각 지파에서 대표 한 사람씩을 선발해 모두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에 보낸다. 그들은 40일간 그 땅을 돌아본 후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며 그 땅의 과일들은 극상품이라고 할 수 있고 그들이 누리는 것은 풍요롭다는 데에 일치된 의견을 내놓는다(민 13:25~27). 그러나 그 땅을 정복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의견은 긍정적인 의견 2명, 부정적인 의견 10명으로 갈린다. 긍정적인 의견을 내놓은 두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이다. 갈렙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한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민 13:30).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을 취하고자 하는 데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땅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비관적인 전망과 비판적인 어조에 쉽게 동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사람은 미래를 알 수 없고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매일 마주하는 삶의 과제 앞에 불안, 염려,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대면하는 문제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시고 자녀 된 우리의 삶을 위해 좋은 것을 예비해 놓고 계신 분이시다. 로마서 8장 32절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한다. 2.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는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의견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야훼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야훼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야훼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민 14:7~9). 그러나 나머지 10명의 정탐꾼들은 육신의 눈으로 확인되는 그 땅 주민들의 어떠함에 주목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2~33).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았기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땅에 대해 악평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라며 자신들에 대해서도 악평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이 무너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삶에 부정적이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분명히 차지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하나님은 그 땅을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고, 모세에게 정탐꾼을 보내라고 말씀하실 때도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했기에 그 땅을 차지하는 데에 긍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성경 말씀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책이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온갖 좋은 약속을 붙잡는 적극적인 신앙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은 절대긍정의 믿음을 소유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에 대한 기대로 가득하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실 것에 대한 거룩한 원함,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으로 충만한 절대긍정의 믿음으로 살아가자.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약속하신 가나안을 차지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정섭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신학연구소)
  • 2022.06.1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구속사적인 삶 - 감사(2)
  • 대한민국 법 중에 최고 상위법은 헌법이다. 헌법 10조에 보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흔히 말하는 행복추구권이다. 그런데 행복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국가도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해 줄 따름이다. 다시 말해 행복은 어떤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정해진 조건이 있으면 국가가 일정 수준의 국민은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1. 행복의 근원, 감사 그렇다면 행복은 어디 있을까? 감사하는 마음에 있다. 감사하면 행복해진다. 감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사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감사가 저절로 되거나 쉽게 되지 않는다. 만약 감사가 저절로 되고 쉽게 되는 것이면 감사가 하나님의 뜻이니 범사에 감사하라고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감사는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감사가 쉬운가? 불평이 쉬운가?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한 달 동안 5층 집까지 매일 걸어가야 한다고 가정하자. 억지로라도 계단을 오를 일이 생겨 운동할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할까? 아니면 곧바로 불평할까? 감사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원망 불평이 자연스러운 우리 본성이라는 중력, 그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감사가 등산처럼 힘든 이유다. 그러나 등산도 하면 할수록 쉬워진다. 감사가 그렇다. 산 정상을 향해 오르다 보면 달라지는 것이 있다. 시야다.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감사하면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못 보던 것을 보게 된다. 감사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불평하는 일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그 일들 외에는 제대로 못 본다. 불평하는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마음이 계속 불편하다. 물론 해결이 돼도 불평할 거리는 또 있다. ‘왜 이제야 해결이 되는 거지?’ 감사하는 사람은 시야가 다르다. 보이는 것이 다르다. 눈에 거슬리는 것보다 세상 아름다운 것이 훨씬 더 많다. 보이는 게 다르니 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왜 그렇게 사소한 일에 집착했지?’ 하는 생각이 드니까 감사하는 사람의 말에는 여유가 있다. 타인에 대한 포용의 한도가 그만큼 크다. 원망 불평으로 마음의 용량이 늘 마이너스가 되어 가면 타인에 대한 용납의 한도가 계속 줄어든다. 감사를 결단하고 훈련하자. 감사한 다음에 기쁨이 따라오고 불평한 다음에 짜증이 따라온다. 감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이끌어 가지만 불평은 사탄이 원하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이끌어 간다. 감사의 종점은 천국이고 원망 불평의 종점은 지옥이다. 2. 그리스도인의 감사, 넘치는 감사 우리의 감사가 어떠한 감사가 되어야 하는지 바울 사도의 권면을 들어 보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우리 삶은 예수님 안에 있다. 예수님께 우리 인생의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이다. 여기저기 왔다 갔다, 이리저리 오락가락하지 않고 예수님 안에 콕 박혀서 사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예수님 안에서 성장하는 여정이다. 말씀대로 살면서 굳센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는 것이다. 정리하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셨으니 예수님 안에 뿌리내리고 말씀 따라 사는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감사가 넘치게 하라고 권면한다. 누가 믿음이 강한 사람일까? 감사하는 사람이다. 내 믿음의 강도는 감사가 말해 준다. 내 믿음이 명품인지 불량품인지는 감사가 보여 준다. 감사는 명품 믿음의 보증서다. 감사가 없다면 불량품 믿음이다. 감사는 넘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넘치는 감사다. 자기 분량 이상의 감사를 하는 것이다. 내 기준 이상의 감사, 내 판단 이상의 감사, 내 감정 이상의 감사, 내 선택 이상의 감사다. 그러려면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가 가능한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예수님을 주로 영접했기 때문이다. 주는 ‘주인’을 말한다.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시니까 감사하라는 것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했으니”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영접했으니”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직분, 예수는 이름이다. ‘그리스도 예수’와 ‘예수 그리스도’는 강조하는 바가 다르다. 그리스도가 먼저 나오면 예수님이 그리스도, 곧 구원자로서 하신 일에 강조점이 있다. 구원자 예수님이 하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떠난 내 죄 때문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다. 나의 주님이 되셔서 천국 가는 그날까지 내 삶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고, 도우시며 책임져 주신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다. 성경이 다시 쓰이기 전까지는 변하지 않는다. 내 삶의 형편과 조건은 오락가락해도 나를 향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주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 되셔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도록 역사해 주실 것임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 삶의 형편, 조건, 기분, 감정과 상관없이 감사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 일평생 감사할 수 있다. 감사하자.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어렵고 힘들고 괴로울 때 인생이 마음대로 안 될 때 감사하자. 감사하면 사탄이 틈타지 못한다. 영적 시야가 넓어지고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 관계가 회복되고 인생이 달라지고 행복해진다. 아니 이미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Thanksgiving’뿐만 아니라, ‘Thanks-living’하자! 오정섭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신학연구소)
  • 2022.05.0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다시보는 영산 신학과 목회
    영산의 세계선교
  • 선교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복음 전도와 선교에 대한 꿈과 비전으로 충만하게 된다(행 1:8). 성령님은 영산에게 대조동 천막교회 시절부터 세계선교의 꿈을 부어주셨다. 그때부터 영산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은빛 날개를 타고 전 세계를 다니며 선교하는 꿈’을 품었다. 그 꿈처럼 영산은 당시 해외 여권을 얻기도 쉽지 않았을 때 이미 여러 나라를 다니며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다. “전 세계는 주님의 교구입니다.” 웨슬리의 유명한 말을 떠올리게 하는 영산의 고백은 절대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는 세계 최대 교회를 세우고 오대양 육대주를 다니며 선교 사역을 감당했다. 그가 머물렀던 수많은 선교 현장은 성령님이 역사하는 기적의 장소였다. 영산이 세계선교를 위한 뜨거운 열정을 갖게 된 배경은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7년 5월 세계오순절총회를 마친 영산은 100일 동안 18개국, 39개 도시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던 그는 결국 스위스에서 쓰러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침대 밑에 놓인 엽서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주님의 종으로 부름 받았으니 이 시대에 한 획을 긋는 종이 되리라”라는 글귀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적고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다. 다시는 못 일어날 만큼 쇠약해졌던 영산의 몸은 이튿날이 되자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얻고 기적처럼 회복되었다. 그때의 체험은 영산의 사역 가운데 세계선교를 항상 강조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영산은 유럽 선교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세계 교회성장을 위해 봉사하는 국제기관을 조직하라”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1976년 11월 4일 국제교회성장연구원(이하 CGI: Church Growth International)을 설립했다. 영산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부흥성장에 관한 노하우를 전 세계 교회와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에만 집중하지 않고 전 세계 교회가 함께 부흥하는 일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CGI는 설립 이래 2022년 현재까지 한국을 비롯한 100여 개국 이상에서 총 600회 이상 CGI 콘퍼런스를 개최했고, 여기에 전 세계에서 연인원 120만명이 참석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세계선교와 교회 성장에 이바지한 CGI는 2022년 10월 이영훈 목사를 제2대 총재로 만장일치 추대하면서 ‘다음 세대의 부흥’을 외치며 제2기 사역에 돌입하게 되었다. 영산은 세계선교의 사역을 더욱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2000년 3월 28일 DCEM(David Cho Evangelistic Mission)을 설립했다. 이 기구를 통해 전 세계 선교지와 선교단체 간에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선교 자원의 교류에 힘썼다. DCEM은 교파를 초월해 영적으로 갈급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 그리고 복음의 사명을 심어주는 기관으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 영산은 그 목회 사역 동안에 약 600회 이상의 해외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이런 왕성한 사역은 성령님이 주시는 비전과 열정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럼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영산의 선교 사역의 의미는 무엇일까? 20세기 기독교의 가장 큰 특징은 기독교의 무게 중심이 서구권에서 비서구권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1980년대에 들어와서 비서구권의 기독교 인구가 서구권의 기독교 인구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기독교 신학이나 선교가 서구권 교회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서구권 교회는 갈수록 쇠퇴를 거듭했고, 반대로 비서구권의 교회는 급속히 성장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역사적 맥락 속에서 영산의 세계선교 사역은 기독교 선교의 주체를 서구권 교회에서 비서구권 교회로 전환하는 데 아주 지대한 역할을 했다. 영산은 선교가 ‘순복음’의 최우선 과제임을 보여주었다. 선교하는 교회가 진정한 ‘순복음교회’(Full Gospel Church)이고 선교하는 성도가 진짜 ‘순복음성도’(Full Gospel Christian)이다. 교회가 선교를 멈추는 순간 침체와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영산 안에 넘쳤던 복음의 확신과 순복음의 영성은 많은 사람의 가슴에 희망을 불러일으켰고 나도 하나님 사명에 쓰임 받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의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David Yonggi Cho’라는 이름은 안다”라는 말이 수많은 증인에 의해 회자된 것만 보아도 그가 가진 세계선교의 열정과 영향력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만약 누군가 “순복음 신앙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에 나아가 선교하는 삶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선교에 평생을 바친 영산의 삶이었고, 그의 선교 정신을 이어받은 모든 순복음 성도들의 꿈이 되어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선배의 본을 따라 인내로써 믿음의 경주를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히 12:1). 오늘날 교회가 영산으로부터 반드시 전해 받아야 하는 믿음의 영적 바통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선교의 바통’이다. 이제 영산의 뒤를 이어 우리도 성령 충만함 가운데 ‘선교 바통’을 이어받아 주님 오시는 날까지 세계선교의 꿈을 이뤄가야 할 것이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2.11.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영산의 신유 사역 
  • 영산에게 신유 사역은 그의 핵심적인 목회 철학 중 하나였다. 영산은 신유의 기적이 과거 예수님 시대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사역임을 확고히 믿었다.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을 받았으면 믿음으로 값없이 병 고침 받는 것도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영산이 믿었던 신유의 은사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은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영산에게 신유 사역은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자 ‘아직’, 그러나 반드시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었다. 영산은 치유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임재를 보았고 하나님 나라에서의 믿는 자의 부활을 보았다. 그래서 영산은 목회 현장이나 부흥회 사역에서도 병 고침을 강조했는데, 그가 인도하는 집회에서 질병의 치료를 경험한 사람들의 간증거리는 수없이 많다. 영산이 이같이 신유를 강조하게 된 것은 어떤 특정한 치유 신학을 공부한 결과가 아니었다. 그를 ‘신유의 종’으로 만든 것은 그가 처한 삶의 현장 속에서 실제 경험했던 치유의 하나님 때문이었다. 폐결핵 3기로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을 때 주님을 만나서 완치되었던 경험이 그것이다. 또 대조동 천막교회 시절 중풍에 걸린 여인이 낫고 걷지 못했던 소년이 일어나 뛰며 듣지 못했던 사람이 듣게 되는 기적이 나타났다. 이런 경험을 통해 영산은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병든 자를 치료하신다는 사실을 체득할 수 있었다. 자신의 삶과 목회 현실에서 신유의 역사를 분명하게 체험했기에 영산은 가는 곳마다, 서는 곳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영산의 신유 사역은 교회 부흥에도 크게 기여했다. 실제로 영산의 개척교회가 빈민촌 지역사회에 깊이 뿌리 내리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치유의 기적이었다. 그래서 영산은 신유를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인 표적으로 보고 목회 사역에 열심히 적용하고 실행했다.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으로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낫게 되는 신유 사역”(막 16:18)이 복음 전파에 동반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이후에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에 대해서 회고할 때도 신유 사역의 중요성을 언급한 적이 있다. 복음에 저항적이던 사람들이 육체의 질병을 치료받고 은혜를 받아 복음의 말씀을 세상에 나아가 강력하게 전하기 때문에 교회가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교회 공동체를 신유 공동체로 보았다. 영산의 신유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믿음이다. 영산은 그 어느 목회자보다도 병 고침에 대한 메시지를 많이 선포했고 신유의 기적도 많이 행했지만 정작 자신이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성령이 필요에 따라 자신을 통해 은사를 나타내실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영산 자신이 분명히 받았다고 주장하는 은사가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믿음의 은사’였다. “내가 받은 은사를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담대한 믿음입니다. 담대함을 가지고 믿음으로 선포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성경은 표적이 여러분의 믿음보다 앞선다고 하지 않습니다. 표적이 여러분의 믿음 뒤에 따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믿음의 역사는 천막교회 시절에 나타났다. 걷지 못하던 소년이 영산을 찾아왔을 때 처음에는 그가 낫는다는 것을 믿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영산이 한 시간이 넘도록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자 뭉게구름 같은 믿음이 그의 마음으로부터 차오르기 시작했다. 영산은 그때의 기분이 마치 지구를 자기 손으로 밀면 지구가 밀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간증한 바 있다. 하나님이 주신 이러한 믿음으로 기도하고 선포할 때 영산은 그 소년을 포함한 수많은 이들의 병을 고칠 수 있었다. 영산은 오늘날 병 낫기를 간구하는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의 기도를 잘 드리지 못하거나 주님의 말씀에 담긴 뜻을 잘 알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다고 말했다. 영산에 따르면 신유의 역사는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때까지 성령님이 살아 역사하셔서 은사를 베푸시고 병든 자들을 일으키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영산은 신유가 지금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임을 분명히 믿었다. 따라서 성도는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써 신유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기에 자신의 아픈 부분에 손을 얹고 믿음으로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영산을 통한 성령의 신유 사역은 여의도순복음교회뿐 아니라 국내외 수많은 교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신유의 복음을 포함한 예수 그리스도의 전인적인 순복음을 이해하는데 큰 유익을 주었다. 앞으로도 영산의 신유 사역의 원리를 계속 연구하고 실행함으로 새로운 신유행전의 역사가 계속 나타나길 희망한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2.10.2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문서·방송 선교의 선구자…1988년 기독교 일간지 국민일보 창간
  • 영산은 미디어의 활용이 미미하던 시절, 문서 선교와 방송 선교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사역에 적용한 선구자였다. 영산은 자신이 가진 뜨거운 선교적 영성을 담아내어 빠르게 전파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 놀라운 교회 성장을 이루었다. 순복음의 신앙이 한국과 세계에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의 그 어떤 교회보다 멀티미디어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문서 전도』의 저자 조지 버워는 “기독교 문서는 인쇄된 선교사”라고 말한 바 있다. 문서 선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보게 하는 말이다. 영산은 누구보다도 문서 선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사역에 적용하였다. 1964년 당시 순복음교회 성도들에게 교회와 관련된 각종 소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순복음지』를 발간했다. 이것이 점점 발전하여 1978년에 이르러서는 영산의 설교와 칼럼, 성도들의 신앙 간증과 구역 성경 공부 및 교회 소식을 담은 『순복음뉴우스』가 되었다. 이후 『순복음가족신문』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날까지 문서 선교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다. 영산은 또한 순복음교회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한국교회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월간 잡지 『신앙계』를 창간함으로 문서 선교의 폭을 확장했다. 『신앙계』는 기독교의 대중지,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위한 교양지, 불신자들을 위한 전도지, 교회를 하나로 묶는 기독교 잡지로서 자리매김했다. 해방 이후 대중적인 기독교 잡지로는 『신앙계』를 능가하는 잡지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신앙계』가 말씀에 기초한 성령운동의 건전한 보급과 한국교회 평신도들의 신앙 성장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인 박명수 박사는 “『신앙계』야말로 오순절 신앙을 한국교회에 널리 전파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영산의 문서 선교의 열정은 『순복음가족신문』과 『신앙계』의 성공으로 끝나지 않았다. 1987년 한 이단 종교 단체가 일간 신문을 발간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영산은 만약 그 단체에서 신문을 발간하게 된다면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것이 자명하다고 판단했다. 이를 두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기독교 일간지 창간에 대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1988년 세계 최초의 기독교계 일간지 『국민일보』가 창간되었다. 정부와 사회에 기독교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언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영산은 신문사를 설립하는 과정 가운데 막대한 재정적 부담과 근거 없는 비난의 목소리로 큰 고통을 받았지만, 믿음의 확신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다. 복음 실은 일간지 『국민일보』는 매일 하나님의 복음을 한국 땅에 전파하는 발 없는 전도사로서 한국 기독교의 성장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기독교 정신으로 발간된 최초의 기독교 일간지로서 한국 교계의 대사회적인 발언의 장으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나아가 기독교 문화의 채널로써 한국 사회에 기독교 세계관을 전파하는 사명도 이뤄가고 있다. 영산의 『국민일보』 창간은 대한민국 1200만 기독교인을 대변하는 신문으로서 한국 기독교 역사 가운데 매스컴 선교의 새 장을 열었다는 데 큰 의의를 가진다. 영산은 문서 선교뿐 아니라 방송 선교를 통해서도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당시 영산은 복음 전도의 방법을 새로운 형태로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도 방송 선교의 파급력과 중요성을 일찍 깨달았던 영산은 1966년 라디오 설교와 1979년 컬러TV 방송을 송출했다. 영산의 라디오 설교 방송은 1979년, 1980년 연속, 전국 청취자 애청 프로그램 조사 결과 청취율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청취자가 많았다. 이처럼 한국교회 방송 선교의 선구자는 단연 영산이었다. 당시 흑백 TV에 익숙했던 공중파 제작자들이 방송 장비와 시스템을 구경하기 위해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견학을 올 정도였다. 방송 선교는 교단의 장벽을 뛰어넘는 데 중요한 매체가 되었을 뿐 아니라 기독교의 울타리를 넘어 일반인들에게 오순절 신앙을 전하는 통로가 되었다. 영산의 방송 선교를 통해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이 설교 말씀을 듣고 구원받는 역사가 나타났다. 또 위성과 인터넷을 활용한 예배와 설교 실황은 각 지성전 및 지교회 설립과 더불어 교세 확장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영산의 방송 선교는 국내를 넘어 전 세계에 이르기까지 사상과 국경을 초월하여 복음이 전파되었다. 1982년에는 미국 TV 프로그램 제작 회사인 KCWC사의 특별 기획으로 주일 예배 실황이 미국, 캐나다, 중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멕시코, 이스라엘, 홍콩, 필리핀, 남아공 등 25개국에 동시 위성 중계되기도 했다. 이처럼 영산의 성령 충만의 복음은 21세기 정보화 시대와 함께 전 세계에 발 빠르게 퍼져나갔다. 영산은 커뮤니케이션의 대가였다. 설교뿐 아니라 설교를 전달하는 매체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아무리 훌륭한 설교라도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면 세계적인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을 것이다. 영산의 설교와 성령 충만의 영성은 멀티미디어 사역 시스템을 통하여 세계 곳곳에까지 전파될 수 있었고 이러한 사역이 세계 교회에 끼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복음의 메시지는 불변해도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은 시대에 맞게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영산의 멀티미디어 사역이 우리에게 남겨준 값진 유훈이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2.09.23 / 김용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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