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기사
[CGI 특집] (3) CGI, 국내외 교회 성장과 부흥의 다리를 놓다
  • 순복음의 영성으로 전 세계 복음화에 앞장서고 있는 우리 교회가 23일부터 26일까지 50여 개국 지구촌 대형 교회 리더가 한자리에 모이는 CGI 세계교회성장대회(The 30th CGI CONFERENCE, 이하 CGI대회)를 개최한다. 코로나 이후 5년 만에 열리는 이번 CGI대회는 23일 개회예배를 시작으로 24일까지 CGI 콘퍼런스를, 25일에는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 대성전에서 성령불 기도회, 26일 토요일에는 국내외 목회자와 1만여 성도가 함께 모여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세계평화와 교회 부흥을 위해 뜨겁게 기도한다. 본지에서는 올해 30회를 맞은 CGI대회의 역사와 세계 교회에서의 역할과 중요성을 시작으로 3주간 기획 연재를 진행한다. <편집자 주> 교회 성장 비결 공유하는 네트워크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해 이영훈 목사, 세계 기독교 리더들에게 교회 성장의 꿈과 비전 심어 복음화가 어렵다고 판단됐던 대한민국이 140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큰 영적 성장과 부흥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교회 성장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우리 교회 CGI가 세계교회로부터 이목을 끌었다. CGI는 세계 기독교 중심축이 서구권에서 비서구권으로 옮겨지고 있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 전 세계적으로 교회 성장을 촉진하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왔다. 우리 교회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는 순복음의 절대 긍정과 절대 감사의 신앙을 바탕으로 교회 성장을 갈망하는 세계 기독교 리더들에게 교회 성장의 거룩한 꿈과 비전을 심어줬다. 이는 세계 각국에서 온 리더들로 하여금 새로운 도전이었고 이를 접목한 목회자들은 실제로 각 나라를 대표하는 교회로 부흥 성장을 이루었다. CGI, 세계교회 네트워크 허브로 거듭나다 CGI세계교회성장대회는 교회 성장 비결을 전수했던 대회였다. 하지만 이제는 열방의 대형교회들이 서로의 교회 성장 비결을 공유하는 네트워크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했다. 미국, 영국, 호주, 일본 등 전 세계 25개국 60여 명의 이사회로 구성된 CGI는 단일교회로서는 최대 규모의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이제는 국내외로 더욱 확장되면서 교파를 초월한 세계교회 네트워크 허브가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세대와 세대를 잇는 역할 CGI는 국경과 교파를 초월해 오직 교회 성장을 꿈꾸는 목회자들이 모여 함께 교회 성장 비결과 사례들을 기반으로 실질적인 방안을 논의한다. 현재 CGI에는 은퇴한 1세대 목회자와 다음세대를 이끌어 갈 2세대 목회자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CGI는 세대가 교체되는 중차대한 시점에 이들이 서로 협력해 부흥 방안을 모색하고 비전을 나누는 귀한 자리로 세대 간 가교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38년 만에 국내 목회자들에게 문호 개방 CGI는 제30차 CGI세계교회성장대회부터 최초로 국내 목회자들에게 문호를 개방한다. 역대 최대 규모로 진행되는 이번 CGI대회에 국내 목회자를 초청한 이유는 한국교회가 앞으로 세계교회 부흥을 이끌어가는 주역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이영훈 목사는 “한국교회가 2022년 PWC 이후부터 영적 부흥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올해부터 격년마다 국내에서 개최되는 대회에는 초교파적으로 국내 목회자들도 참석할 수 있게 했다. 앞으로 교회 부흥을 꿈꾸는 국내 목회자 참석 비중이 높아질 것으로 전망한다”고 전했다. 이로써 대한민국 전역에서 사역하는 교회 목회자들도 참석할 수 있게 돼 지방의 소형 교회들도 부흥을 위한 실질적 논의를 할 수 있게 됐다. 이는 동반 성장의 전략을 새롭게 구축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연세대학교에서 울리는 세계평화와 부흥의 기도 CGI 세계교회성장대회의 대미를 장식할 ‘세계평화와 영적 대부흥을 위한 기도대성회’는 위기에 빠진 세계 평화와 침체된 세계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다. 우리 교회는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연세대학교에서 원산과 평양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의 역사가 재현되기를 소망하고자 이곳 노천극장을 기도회 장소로 정했다. 2022년 DMZ평화누리공원에서 한반도 평화와 다음세대를 위한 기도의 함성이 울려퍼졌다면, 이번엔 서울 한복판 연세대학교에서 전 세계 목회자들과 국내 목회자 및 1만여 성도가 함께 모여 세계 평화와 영적 대부흥을 위해 기도해 큰 의미가 있다. 이영훈 목사는 대부흥의 시대 세계 선교를 이끌어갈 차세대 리더들로부터 큰 이목과 집중을 받고 있다. 이는 코로나19 이후 교회 회복이 어려운 상황에서 위기를 기회로 삼고 이겨낸 이영훈 목사의 영적 리더십이 더욱 돋보이는 대목이다. 회복을 넘어 부흥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이영훈 목사의 리더십과 교회 성장의 비결은 해를 거듭할수록 빛을 발하고 있다. 이를 방증하듯 CGI세계교회성장대회 참석자도 지난 대회보다 갑절로 증가했다. 지난 2019년 CGI세계교회성장대회에서 40여 개국 2000여 명이 등록한 것에 비하면 올해는 50여 개국 4300여 명이 접수했다. 뿐만 아니라 베트남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와 유럽, 중남미와 아프리카, 공산권 국가에서도 이영훈 목사를 초청해 영적 쇄신을 바라는 국가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세계 곳곳을 순복음의 영성으로 물들이고 있는 이영훈 목사의 리더십은 CGI를 통해 더욱 빛나고 있다. 복순희·금지환 기자 ※ [CGI 특집] (1) 전 세계 50여 개국 교회 리더 한자리에 ※ [CGI 특집] (2) CGI 세계교회성장대회 통해 교회 부흥 이끌어
  • 2024.10.17 / 금지환 기자

    [CGI 특집] (2) CGI 세계교회성장대회 통해 교회 부흥 이끌어
  • 순복음의 영성으로 전 세계 복음화에 앞장서고 있는 우리 교회가 23일부터 26일까지 50여 개국 지구촌 대형 교회 리더가 한자리에 모이는 CGI 세계교회성장대회(The 30th CGI CONFERENCE, 이하 CGI대회)를 개최한다. 코로나 이후 5년 만에 열리는 이번 CGI대회는 23일 개회예배를 시작으로 24일까지 CGI 콘퍼런스를, 25일에는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 대성전에서 성령불 기도회, 26일 토요일에는 국내외 목회자와 1만여 성도가 함께 모여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세계평화와 교회 부흥을 위해 뜨겁게 기도한다. 본지에서는 올해 30회를 맞은 CGI대회의 역사와 세계 교회에서의 역할과 중요성을 시작으로 3주간 기획 연재를 진행한다.<편집자 주> 전 세계 메가처치 리더들 강사로 초청 2세대 목회자들 참석…부흥 전략과 노하우 공유 10월 23일부터 26일까지 열릴 제30차 CGI 세계교회성장대회와 ‘세계 평화와 교회 부흥을 위한 기도대성회’는 전 세계적으로 뜨겁게 성장하고 있는 교회들의 부흥 전략과 노하우를 한 자리에서 배울 수 있는 기회다. 해외 교회의 동향과 사역 전략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이기 때문에 많은 목회자와 교계 리더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더불어 코로나 팬데믹이 발생하기 직전 열린 2019년 대회 이후 5년 만에 대회가 열려 팬데믹 시대를 지내는 동안 축적된 강사들의 경험과 통찰력이 더욱 돋보일 것이다. 팬데믹 이후 각 교회의 성장 전략과 회복에 관한 논의가 중심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세계 교회 기독교 연합단체의 수장들과 해외 각국에서 교회 부흥을 이끌어가고 있는 지도자들이 대거 강사로 포진되어 대회에 대한 기대감을 고조시키는 중이다. 세계오순절협회(PWF, Pentecostal World Fellowship) 총재 윌리엄 윌슨 목사, 세계복음주의연맹(WEA, World Evangelical Alliance) 부회장 프랭크 힌켈만 목사, 세계하나님의성회(WAGF, World Assemblies of God Fellowship) 총회장 도미닉 여 목사, 트럼프 전 대통령 정부의 복음주의 자문위원을 지낸 폴라 화이트 목사 등이 참석한다. 세계 기독교 단체 수장들 한자리에… 우리 교회 대성전에서 성대한 막을 올리는 23일 개회예배는 CGI 총재 이영훈 목사, 김장환 목사(극동방송 이사장), 제임스 마로코 목사(King’s Cathedral & Chapels, 미국)가 주강사로 나서 성령 운동과 교회 부흥에 대해 강연할 예정이다. 이어 WEA 부회장 프랭크 힌켈만 목사(오스트리아), WAGF 총회장 도미닉 여 목사(싱가포르) 등이 강사로 나서 교회 성장에 대한 세미나와 워크숍을 24일까지 진행한다. 25일에는 파주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서 폴라 화이트 목사(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정부의 복음주의 자문위원, 미국), 사티쉬 쿠마르 목사(Calvary Temple Church, 인도), 콩히 목사(City Harvest Church, 싱가포르) 등이 인도하는 기도원성령대망회가 열리며 이어 저녁에는 본 교회 대성전에서 댁 휴워드 밀스 목사(Lighthouse Chapel International, 가나)의 금요성령대망회가 진행된다. 마지막 날인 26일에는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세계 평화와 교회 부흥을 위한 기도대성회’가 개최된다. 이날 이영훈 목사를 비롯해 데비이드 섬럴 목사(Cathedral of Praise, 필리핀), 프랑수아 포슐레 목사(International Evangelistic Centre Evidence, 프랑스), 윌리엄 윌슨 목사(PWF 총재, 미국)가 말씀을 선포한다. CGI, 각 나라에서 폭발적 성장 이뤄 주요 강사진들은 CGI의 이사로서 조용기 목사의 4차원의 영성에 영향을 받고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을 실제로 목격한 후 교회성장에 대해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고 각 나라와 대륙에서 대형교회와 신앙공동체를 이룬 공통점이 있다. 조용기 목사의 제자를 자처하는 제임스 마로코 목사는 1980년에 미국 하와이에서 King’s Cathedral & Chapels을 창립했다. 그는 사역 초기부터 세계선교에 비전을 품고 사역에 나선 결과 하와이, 미국 본토 및 14개국 165개 교회를 세운 교회 성장 전문가로 활약 중이다. 인도 사티쉬 쿠마르 목사의 갈보리교회는 18년 만에 3만5000명으로 급성장시켰고 52일 만에 1만8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성전을 짓는 등 놀라운 사역을 펼쳐 세계에서 가장 성장하는 교회로 주목을 받았다. 싱가포르 콩히 목사가 담임하는 City Harvest Church는 매주 평균 2만3000명이 예배에 참석하는 교회이다. 모든 지부와 지교회를 포함 총 4만5000여 성도가 등록되어 있으며 2012년 10대 글로벌 대형교회 중 하나로 선정됐다. 30년 간 열정적으로 CGI에 헌신해 온 댁 휴워드 밀스 목사가 설립한 Lighthouse Chapel International은 아프리카 가나 아크라 지역에 기반을 둔 교회로 현재 94개국에 지부를 두고있다. 밀스 목사는 대규모 전도집회를 개최하며 끊임없이 교회를 개척하고 지부를 설립하고 있다. 필리핀 데이비드 섬럴 목사가 담임하는 The Cathedral of Praise(COP)는 현재 필리핀 국내와 국외에 5개의 위성 교회와 10개의 지교회를 둔 필리핀 최대교회로 성장했다. COP는 앞으로도 200개 교회 개척 비전을 품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프랑스 프랑수아 포슐레 목사가 설립한 International Evangelistic Centre Evidence는 창립 당시 2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현재는 2000여 명의 다민족 신앙공동체로 성장했다. 또한 다문화라는 벽을 넘어 믿음 안에서 하나 된 신앙공동체를 이뤘다. 이번에는 CGI 대회 역사상 가장 많은 강사가 참여한다. 특히 CGI 이사들의 자녀들과 후계자들이 강의하는 워크숍에 주목하고 있다. 이들은 CGI의 48년간 이어져 온 역사의 산 증인이다. 이번 대회는 CGI가 교회성장 1세대의 유산을 바탕으로 2세대에까지 이어지는 지속적인 교회성장과 부흥의 장을 만드는 중요한 시점이라 볼 수 있다. 이영훈 목사는 2022년 CGI 2대 총재로 취임한 후 세계 각국의 대형교회 리더들과의 네트워크 확대로 미래 세대 부흥을 위한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조용기 목사의 뒤를 이어 순복음 세계 선교를 강화하면서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믿음으로 진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오순절 성령을 가나와 케냐 등 아프리카 대륙과 중남미의 중심 콜롬비아, 인도와 일본 등 아시아 전역, 북미와 유럽 등지를 다니며 세계 선교의 열매를 맺고 있다. 복순희·금지환 기자 ※ [CGI 특집] (1) 전 세계 50여 개국 교회 리더 한자리에 ※ [CGI 특집] (3) CGI, 국내외 교회 성장과 부흥의 다리를 놓다
  • 2024.10.11 / 복순희 기자

    [CGI 특집] (1) 전 세계 50여 개국 교회 리더 한자리에
  • 순복음의 영성으로 전 세계 복음화에 앞장서고 있는 우리 교회가 23일부터 26일까지 50여 개국 지구촌 대형 교회 리더가 한자리에 모이는 CGI 세계교회성장대회(The 30th CGI CONFERENCE, 이하 CGI대회)를 개최한다. 코로나 이후 5년 만에 열리는 이번 CGI대회는 23일 개회예배를 시작으로 24일까지 CGI 콘퍼런스를, 25일에는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 대성전에서 성령불 기도회, 26일 토요일에는 국내외 목회자와 1만여 성도가 함께 모여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세계평화와 교회 부흥을 위해 뜨겁게 기도한다. 본지에서는 올해 30회를 맞은 CGI대회의 역사와 세계 교회에서의 역할과 중요성을 시작으로 3주간 기획 연재를 진행한다.<편집자 주> 제30차 CGI 세계교회성장대회 개최 총재 이영훈 목사, 세계 교회 부흥의 물결 주도 전 세계 교회 성장의 초석이 된 CGI CGI는 1976년 11월, 우리 교회의 성장과 부흥의 비결을 전 세계 교회에 전수해 교회 성장을 촉진 시키고자 설립됐다. 설립자 조용기 목사는 이듬해 6월 미국 수정교회(Crystal Cathedral Church) 로버트 슐러 목사와 교회 성장 전문가 피터 와그너 박사, 20세기 선교 운동에 큰 영향을 끼친 도널드 맥가브란 박사 등 저명한 신학자와 대형교회 목회자와 함께 제1차 CGI 세계교회성장대회를 개최했다. CGI대회는 세계 교회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의 대통령은 몰라도 조용기는 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오늘날 세계가 열광하는 ‘K-문화’ 이전에 이미 조용기 목사는 CGI를 통해 세계 각국에 ‘K-선교’를 알리며 세계 교회 성장의 초석이 됐다. 세계 교회 성장 기구로 우뚝 서다 CGI는 미국, 영국, 호주, 일본 등 전 세계 25개국 60여 명의 이사회로 구성된 세계적인 기구로 성장했다. 지금까지 100개국에서 600회 이상의 세미나를 개최했으며 누적 인원은 1220만명에 달한다. 현재 2대 총재 이영훈 목사는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초석 위에 성령 충만과 절대 긍정, 절대 감사의 신앙을 선포하며 교회와 성도들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주고 있다. 이는 코로나19 이후 침체된 세계 교회에게 큰 도전이 됐다. 이번 대회에는 교회 회복을 간절하게 소망하는 전 세계 4000여 명이 등록을 마쳤다. 세계 교계 이끄는 강사진, CGI의 위상과 영향력 전 세계 6억 8000만 멤버십을 가진 세계오순절협회(PWF)가 코로나 이전에 개최한 제25회 세계오순절대회에는 72개국 40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번 대회에는 국내 포함 전세계 4000여 명의 목회자가 등록했으며 일반성도 1만여 명이 함께한다. 이는 단일 교회 행사로서는 최대 규모이다. 강사진 또한 세계 교회를 이끄는 3대 기관 중 2곳인 세계오순절협회(Pentecostal World Fellowship, PWF)와 세계복음주의연맹(World Evangelical Alliance, WEA)의 수장인 총재 윌리엄 윌슨 목사와 부회장 프랭크 힐켄만 목사와 더불어 세계하나님의성회(World Assemblies of God Fellowship) 총회장 도미닉 여 목사, 트럼프 전 대통령의 영적 멘토로 알려진 폴라 화이트 목사 등이 주 강사로 나선다. 이들이 강사로 초청된 것만 봐도 우리 교회와 CGI의 영향력이 세계 교회에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대형교회를 이끌고 있는 목회자들도 주 강사로 나서 각 나라와 대륙의 교회 현황과 교회 성장의 향후 전망, 비전을 공유할 예정이다. 국내에서는 한국교회총연합(대표회장 장종현 목사)과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소속 목회자와 교회 리더들도 대거 참석할 예정이다. 실천적 운동으로 세계 교회 부흥을 기대하다 팬데믹 이후 교회의 회복을 넘어 부흥을 갈망하고 있는 세계 모든 교회들은 제30차 CGI대회가 제2의 성장과 부흥을 이룰 열쇠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영훈 목사는 “세계 교회가 기도를 통한 부흥, 교회 성장,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새로이 경험하고 영광스러운 간증의 주역들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고 전하며 강력한 기도와 성령 충만이라는 실천적인 운동을 전개하는 CGI대회에 참석한 목회자들이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게 될 것을 기대했다. 세계 교회에 순복음 교회의 성장 비결을 전하고자 설립된 CGI는 세계 수많은 교회가 성장하는 견인차 역할을 감당해 왔다. 이번 대회에는 우리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과 부흥을 자국에서 적용해 크게 성장시킨 목회자들과 그 뒤를 잇는 2세 목회자들도 강사로 나선다. 복순희·금지환 기자 ※ [CGI 특집] (2) CGI 세계교회성장대회 통해 교회 부흥 이끌어 ※ [CGI 특집] (3) CGI, 국내외 교회 성장과 부흥의 다리를 놓다
  • 2024.10.0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Hello, Israel
    이스라엘의 외로운 투쟁 (2)- 반유대주의, 생존의 싸움
  • 이스라엘과 가자지구 전쟁이 발발한지 벌써 1년이 되어가고 있다. 지난해 10월 7일 가자지구를 점령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인 하마스가 이스라엘 남부 가자인근 네게브에 위치한 키부츠 마을을 침공하여 1500여 명을 강간, 살해하고 240여 명을 납치해서 가자로 끌고 갔다. 이후 이스라엘은 즉각적인 반격과 함께 하마스 척결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가자지구로 진격했다. 이스라엘 군대인 IDF는 인질의 구출과 하마스를 궤멸시키기 위해서 지금까지 가자 지구에서 전투와 함께 민간인 보호를 진행하고 있다. 여전히 돌아오지 못한 인질들이 130여 명이나 되며 그 중 몇명이 살아 있는지 아직까지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하마스의 공격을 받고 민간인들이 살해당했을 때, 전 세계는 깜짝 놀라며 이스라엘을 향해 위로의 메시지를 보내고 이와 관련된 보도를 시작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난 이후 전 세계 언론들은 이스라엘을 향해서 반대하는 메시지와 하마스가 다스리던 가자지구에 대한 피해에 대해 집중보도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의 시민들의 참혹한 죽음에 대한 언급은 어느새 인가 사라지고 팔레스타인들에 대한 옹호, 하마스에 대한 지지의 목소리가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심지어 미국 캠퍼스 내에서는 반이스라엘 운동과 함께 반유대주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났다. 미국 지성의 선두에 있다는 아이비리그 대학만이 아니라 수많은 미국의 대학 내에서 반이스라엘 운동과 하마스, 팔레스타인 지지 운동이 일어났다. 물론 전쟁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반전 운동을 한다던 지 이스라엘의 작전 수행 중 일어나는 민간인 피해를 줄이기 위한 시위는 얼마든지 이해되지만 학교 내 성조기를 태우고 팔레스타인 국기를 거는 일이나 유대인 학생들을 위협하는 폭력적인 행위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스라엘은 이 속에서 외로운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반유대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다시금 일어나고 있다. 비단 지금의 전쟁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도 모르게 반유대주의적 정서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유럽 사회에서 만이 아니라 지금 미국 사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반유대주의는 2차 세계대전 나치가 유대인 학살을 주도하기 이전과 비슷한 양상을 지니고 있다. 솔직히 지금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유대주의 반이스라엘 시위에서 “강에서 바다까지”라고 하는 시위대의 외침은 어떤 의미인지를 모른 채 왜곡된 역사와 잘못된 이해 가운데서 무조건적인 유대인을 향한 미움으로 외쳐지고 있다. 강은 요단강이며 바다는 지중해이다. 다시 말하면 요단강에서부터 지중해까지 팔레스타인들에게 돌려주라는 외침이다. 현재의 이스라엘 영토 지배를 부정하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존재를 무시하는 이야기이다. 한 리포터가 시위대의 대학생에게 질문했다. “이런 주장 속에서 유대인들은 어디로 가라는 말인가?” 학생의 대답은 나를 실소하게 했다. 그것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어디로 갈지 내가 알바인가”라는 대답을 들으면서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 사이프러스의 난민캠프에 모였던 수십만 명의 유대인들을 향하여 던져진 질문이 그것이었다. ‘우리는 어디로 가란 말인가?’ 반유대주의 흐름 속에서 유대인들은 어디로든 갈 수가 없는 신세가 되었다. 역사 속에서 유린하는 백성이라는 타이틀이 이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어렵게 UN을 통해서 얻어낸 땅에서 살고자 했던 이들이 마주한 것은 4차례의 큰 전쟁이었다. 그 전쟁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에게 또다시 학살과 죽음을 마주하게 한 사건이 작년 10월 7일의 사건이었고 이 세계 어디에도 그들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알게 한 것이 지금의 반유대주의 시위와 반이스라엘 시위이다. 그것도 자신들이 우방이라고 여겼던 미국과 서구 국가에서 말이다. 한 유대인 친구의 집에서 샤밧 금요일 저녁을 먹으면서 나누었던 대화가 문득 떠오른다. 그 친구는 내 종교가 무엇인지 물었다. 나는 기독교인이라고 말하고 개신교 복음주의자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함박 웃으며 말했다. “우리 이스라엘에는 더 많은 복음주의자 친구들이 필요해. 그들은 우리가 여기 살아도 된다고 믿고 지지하고 있으니까!” 함께 크게 웃었지만 씁쓸한 이야기였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이 땅에 살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이들에게 총칼을 들이밀며 나가라는 세력들은 진짜 이 땅을 사는 팔레스타인들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유대인들이 미워서이다. 그들에게 목표는 이스라엘의 전멸이니까. 정말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시기이다. 오늘도 난 광야로 나가 하나님께 이 땅의 평화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한다. 김요셉 목사
  • 2024.08.23 / 김용두 기자

    이스라엘의 외로운 투쟁 … 하나님의 지혜로 세상을 바라봐야
  • 성경 여호수아서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의 족속들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진멸하는 이야기는 많은 이들이 전쟁의 이야기로만 오해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성경 신명기에서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한다.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야훼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신 7:1~2). 여기에 등장하는 진멸이라는 단어는 헤렘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심판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고 제명이라는 뜻도 담겨 있다. 민족의 진멸에는 그 민족에 대한 절대적 멸족이라는 의미보다는 심판과 하나님의 언약에서의 제외라는 커다란 의미가 담겨 있다. 여호수아는 이 말을 받아서 가나안 족속들을 복속시켰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과 어긋난 방식으로 되어진 점령과정에서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그 일을 이루질 못하고 옆구리에 가시가 되는 민족들과 화합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한 이스라엘의 타락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가나안 땅의 민족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은 심판에 대한 이야기였다. 누군가를 해치거나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함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임과 동시에 하나님을 떠나 사는 이들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이다. 과거 기독교는 이 단어를 이용하여 이교도들에 대한 심판으로 이용했다. 또한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심판과 탄압 그리고 폭력과 학살의 정당성으로 사용해 왔다. 지금도 우리의 생각 저변에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부분이 먼저이면서 그로 인해 타민족 특히나 이방종교 민족에 대해서 행해지는 전쟁과 폭력에 묵인해 오는 것이 많았다. 과거 이스라엘, 유대 민족이 당했던 학살과 박해는 이에 기인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지난 역사 속에서 유대인들은 이방민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민족, 구세주를 외면한 이들이라고 낙인 찍혀서 온갖 박해와 핍박 그리고 심지어 학살을 당했다. 현대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한 이후 유대인들은 또 다른 왜곡 프레임에 놓여 핍박과 미움을 당하게 된다. 이스라엘 국가의 탄생이 유대인들의 돈과 권력으로 탄생했다고 하거나 미국이 밀어줘서 팔레스타인들을 내쫓고 그 땅을 차지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런 오해들 속에서 이스라엘은 독립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계속 전쟁의 위협과 위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향한 거짓과 왜곡 속에서 유대인들과 이스라엘 국가를 바라보고 있다. 하마스와의 전쟁만 하더라도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잘못만을 뉴스 미디어와 매체들이 보도하고 있다. 2023년도 10월 7일 이후 전 세계의 여론은 반이스라엘로 돌아섰다고 본다. 세계 곳곳에서는 반이스라엘(Anti-Israel) 시위가 일어나고 있으며 지성의 최고봉이라는 미국의 아이비리그 대학가에서는 반이스라엘 시위와 함께 친하마스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하마스가 일으킨 전쟁이 언젠가부터 이스라엘이 일으킨 전쟁으로 바뀌었고 하마스가 일으킨 유대인 민간인 학살과 납치는 사라지고 이스라엘의 공격만 보도된다. 이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전쟁을 일으킨 국가가 되고 왜곡된 이야기들은 일파만파 세계에 퍼지게 되어서 유대인들과 이스라엘은 점점 고립되고 있다.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던 유대인들은 전쟁국가의 자손으로 치부되어 학교에서 고립되거나 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유엔은 이스라엘에게 부당한 책임을 부여하고 있고 누구도 진짜 사실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는다. 폭력적으로 쏟아지는 비난과 비판 그리고 왜곡된 사실들만이 이스라엘을 옥죄고 있다. 이스라엘의 적은 누구일까? 오히려 이스라엘의 적이 아닌 이들을 찾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다. 이미 이스라엘은 홀로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다. 이제는 남쪽의 하마스만이 아닌 북쪽의 헤즈볼라 그리고 시리아와 이란까지 싸워야 하는 어려움에 놓여 있다. 이럴 때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의 편을 들며 서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실들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지혜를 얻도록 기도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지혜로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도록 기도하자. 김요셉 목사
  • 2024.07.2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이스라엘 건국 76주년을 맞이하면서-삶의 여유가 아닌 생존의 싸움
  • 1948년 5월 15일 이스라엘 국가의 설립이 선포되었다. 당시 뉴욕타임즈의 1면에는 “시오니스트들이 새로운 이스라엘 국가를 선포하다”라고 대서특필 됐다. 당시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하였다는 기사와 함께 텔아비브가 폭격을 당하고 이집트가 침공을 명했다고 쓰여있다. 이스라엘은 올해 2024년에 건국 76주년을 맞이했다.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이스라엘은 현재 너무나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난해 10월 7일 가자지구를 점령한 하마스의 무차별 공격과 침입으로 인해서 21개의 가자 인근 키부츠와 마을이 공격을 당했다. 7000명 이상이 죽었고 아직까지 인질 130명이 가자지구에 붙잡혀 있다. 뿐만 아니라 지난 하마스의 공격에 대응하여 보복공격을 감행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북부와 중부를 점령해 나갔고 200만명의 팔레스타인 피난민들은 전쟁을 피해서 가자 남쪽으로 피신했다. 이를 계기로 북쪽 레바논 접경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테러단체인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마스를 돕는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스라엘 북부는 헤즈볼라의 미사일 폭격으로 인해서 20만명의 피난민이 마을과 도시를 버리고 남으로 피난을 가야 했다. 이스라엘 국가가 전란에 휩싸이고 새로운 중동전쟁이 시작될 것만 같았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250여 일이 지나는 시점에서 위협은 여전히 남아있다. 이스라엘 국가는 현재 여러 측면에서 위협과 비난을 마주하고 있다. 작년 이스라엘의 보복공격이 감행된 이후부터 서서히 일어난 반유대주의와 반이스라엘 운동은 본격적으로 미국과 유럽 등지의 대학가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너무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세계에서 제일가는 학문을 자랑하는 미국의 대학가에서 역사적 근거가 없는 외침과 일방적인 비난이 이스라엘을 향해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번 사태의 원흉이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이라고 비난을 쏟아내면서 미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발언을 하기도 한다. 국가가 설립된 이후 지난 76년 동안 이스라엘은 한번도 평화롭게 지내온 적이 없었다. 잠시의 평안이 존재는 했지만 계속적으로 위협과 도발 속에서 살아온 것이 이 국가의 역사이다. 건국 이래 4번의 커다란 중동전쟁이 있었고, 2차례의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민중항쟁)가 있었다. 이스라엘 국가 설립 이후 유대인들은 안전하고 인정받는 삶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꿈꾸면서 이룩하고 살아왔다. 76년 동안의 노력으로 이스라엘은 전쟁의 여파 속에서도 다시금 일어나 지금의 놀라운 모습들을 만들어 왔다. 열심히 노력하고 이루어 낸 것들 속에는 자신들만의 삶이 아닌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노력들도 담겨 있었다. 누군가가 주장하는 것처럼 유대인들만의 국가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아랍인도, 베두인도, 소수민족들도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유대국가를 만들어 가는 것이 테오도르 헤르쩰과 다비드 벤구리온의 꿈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꿈이 위협을 받고 있다. 삶을 누리는 것보다 삶을 생존해 가는 것,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의 생존의 싸움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 대학가에서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부르짖는 그들의 외침 속에서는 유대인들의 홀로코스트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전을 외치고 전쟁을 그만두라는 외침 속에서는 이 전쟁의 시작인 하마스라는 테러단체에 대한 고발과 비판은 없다. 학살을 멈추라는 외침은 하마스 테러리스트들의 손에 무차별 학살을 당한 유대인 민간인들과 어린 아이들의 피는 무시하고 있다. 전쟁의 피해자는 팔레스타인만이 아니라 유대인들도 포함되어 있으나 엄격한 이들의 잣대에는 유대인들은 학살자이고 전쟁과 피를 좋아하는 사람들로 표현되고 있다. 생존의 싸움을 살아가는 유대인들은 이런 비난과 매도 속에서 꾸준히 삶을 이어가고 있다. 하루하루 잡혀간 이들이 돌아오기를 기도하면서 오늘의 삶에서 나의 가족들이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다. 휴전을 요구하면서 여전히 민간인 지역을 향해서 미사일을 쏘아 올리는 하마스에 대응하면서 이스라엘은 묵묵히 생존해 가고 있다. 누군가는 이 싸움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영토싸움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 싸움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생존의 싸움이다. 하마스와 이란은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의 존재를 말살하기를 원하고 있고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생존을 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가운데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이스라엘에게 있기를 기도해야 한다. 폭력으로 누군가를 해쳐서 얻으려는 자들을 잠재우고 자비와 긍휼로 이 땅을 돌볼 수 있는 지혜와 마음을 이스라엘이 가질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들이 중보해야 할 것이다. 김요셉 목사
  • 2024.05.24 / 김용두 기자

    평신도를 위한 오순절 조직신학
    VII. 죄론(Hamartiology) - 4
  • 율법은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된 삶을 위한 기준 제시
    죄와 율법 죄론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죄와 율법의 관계이다. 죄와 율법의 관계에 분명한 명제가 존재한다. 그것은 죄의 선재성(pre-existence)이다. 죄가 율법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율법은 광야시대에 성문화 되었다. 성문화 되었다는 말의 의미는 이렇다. 예를 들면 십계명이 생기고 나서 사람들이 열 가지 계명을 지키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이미 유대 공동체 내에 우상숭배, 살인, 간음, 절도, 위증 등과 같은 죄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것에 대한 죄 의식도 존재하고 있었다. 이런 죄들과 그 죄에 대한 형벌이 모세의 율법을 통해 문자화 된 것이다. 모세의 율법은 십계명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율법은 출애굽기 20장 22절~23장 33절로 대표 되는 계약법전이 있고, 레위기 17~26장의 성결법전이 있다. 이것을 종합하고 보완한 신명기법전(신 12~26장)이 있다. 이 외에 율법의 행동지침과 해석이라 할 수 있는 장로의 유전과 규례가 있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셨던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장로들의 유전과 규례이다. 1. 율법의 본질 바울은 율법의 한계와 은혜의 법 사이의 긴장관계를 그의 서신 거의 모든 곳에서 날카롭게 드러내고 있다. 바울은 회심 이전 그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유대인 중의 유대인으로서 목숨을 다해 신봉해 왔던 율법에 대한 무한 신뢰를 파기하고 율법을 ‘초등학문’(골 2:20)과 ‘초등교사’(갈 3:24)로 평가절하시킨다. 바울은 유대교의 언약적 율법주의(convenantal nomism)를 포기하고 은혜의 법에 기초한 믿음과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범과 윤리, 도덕적 가치에 더욱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율법을 그리스도인들이 버려도 되는 것 혹은 무가치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율법의 본질 때문이다. 율법의 본질은 다음과 같다. 1)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유래된 것이다. 율법의 제사법은 인간의 범죄와 정결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죄를 가지고 그 앞에 설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한 성결법전의 내용과 목적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2) 율법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바울은 율법의 옹호자는 아니다. 그러나 파괴주의자도 아니다.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 7:7a)라는 말로 율법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항변하고 있다. 율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 인간의 죄성(sinful nature)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2. 율법의 한계성 바울의 율법에 대한 의도는 율법의 오류를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한계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율법은 율법 그 자체만으로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거나 의롭게 할 수 없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루터는 로마서 서문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통해 율법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인의 당위성(롬 1:17)과 율법의 한계성을 역설하고 있다. 율법은 구원의 도구가 될 수 없다. 율법은 죄를 정죄하는 기능은 있으나 죄를 사하는 권세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끊임없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율법)을 대조시키고 있다(롬 8:2). 히브리서 또한 율법의 불완전성과 대제사장의 유한성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3. 율법의 목적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분별한 반율법주의(antinomism)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반율법주의를 넘어 극단적 율법파괴주의에 빠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율법의 목적과 효용가치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1)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인간들이 그것을 다 준수할 것이라고 기대하셨을까? 물론 아니다.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과 뜻은 로마서 3장 2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만약 율법이 없다면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갈 것이다. 2) 율법에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향한 목적이 있다. 율법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적, 도덕적 잣대가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준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구원 받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유용한 가치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 학장)
  • 2024.08.3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VII. 죄론(Hamartiology) - 3 
  • 성경은 죄와 인간의 필연적 관계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로마서 3장 23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말씀한다. 이것은 아무도 죄를 피할 수 없다는 선언이다. 더 나아가 죄의 삯(wage, 급여, 보수)은 사망이라고 단언하고 있다(롬 6:23). 인간의 수고와 이마의 땀으로 얻게 되는 급여는 ‘사망’이라는 비극적인 선고이다. 한글성경에서는 복수와 단수를 구별하지 않고 ‘삯’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헬라어 원본에서는 복수형을 써서 ‘옵소니아’, 즉 ‘급여들’, ‘보수들’이라고 복수형을 쓰고 있다. 죄에 대한 형벌이 죄의 종류와 가지 수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부과될 것임을 말씀한 것이다. 4) 죄에 대한 형벌 칼빈(John Calvin)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리신 죄에 대한 형벌을 영혼과 육체의 분리로 이해했다. 그는 인간의 창조를 세 단계로 이해했다. 첫째, 인간은 땅의 먼지(KJV, dust)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둘째, 먼지로 지음을 받은 육체에 네페쉬(혼, 생명)를 가지게 되었으며, 셋째, 하나님의 형상이 주어졌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영혼과 육체, 하나님의 형상의 결합이 분리되는 죽음 맞게 되었다. 이것은 곧 영적인 죽음, 삶의 고통, 육체적인 죽음, 영원한 죽음을 낳게 된다. (1) 영적인 죽음 죄는 인간과 하나님을 분리시킨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죄를 허용할 수 없다. 하나님의 거룩성으로 인해 죄를 품은 인간은 그의 임재 가운데 공존할 수 없었다. 그 결과가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이었다. 죄로 인해 인간의 영혼은 생명력을 상실했으며 더 이상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영적인 죽음으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으며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인”상태가 되었다(창 6:5). 이것이 죄의 형벌로서의 영적인 죽음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 죄를 깨끗하게 할 수는 없다(롬 3:20; 7:7). 이런 영적인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행위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2) 삶의 고통 타락 이후 고통은 인간 삶의 일부가 되었다. 인간의 삶은 쉽게 무너지고 각종 질병의 포로가 되었으며 불안과 고통을 늘 겪게 되었다. 풍족했던 에덴동산의 삶은 사라졌고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이 더해 졌으며 인간은 땀을 흘려야 먹을 수 있게 되었다(창 3:16, 19). 창조 이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하나님의 복은(창 1:28) 인간의 타락 이후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타락 이후의 하나님의 뜻은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인간의 삶 곳곳에 돋아나는 것이었다(창 3:18). (3) 육체적인 죽음 히브리서 9장 27절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근거로 최초 인간 아담이 죽음을 전제로 한 유한한 존재로서 창조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 죽음을 전제로 창조하셨다는 근거는 창조역사 속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주후 418년,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첫 사람 아담이 죽을 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으므로, 아담이 죄를 지었든 안 지었든 상관없이 아담이 죽은 것은 죄의 삯이 아니라 자연의 필연성 때문이라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육체적인 죽음, 즉 흙으로 창조된 인간이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형벌은 인간이 죄를 지은 후에 언급되었다(창 3:19). 육체적인 죽음은 영적인 죽음과 함께 불순종한 인간에게 주어진 형벌인 것이다. 이 육체적인 죽음에서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4) 영원한 죽음 유물론자들은 죽음을 존재의 소멸로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유물론적 사관으로 죽음을 이해하는 것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죽음은 삶의 종결, 혹은 죽음의 완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원한 죽음은 벗어 날 수 없는 고통의 끊임없는 연속성을 말한다. 단테(Dante Alighieri)의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 지옥편에 보면 지옥문에 쓰여 있는 글귀가 있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마치 이 표현처럼, 영원한 죽음은 어떤 희망도 품을 수 없는, 즉 죽음의 소망조차 품을 수 없는 고통의 연속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요 11:26). 이 말씀은 육체가 죽지 않는다는 말씀은 아니다. 믿는 자에게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통로이며 육체의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경험할 것에 대한 약속이다. 죄는 형벌을 동반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형벌은 영생의 기쁨과 환희로 바뀌게 될 것이다.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 학장)
  • 2024.07.0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VII. 죄론(Hamartiology) - 2
  • 현대의 논쟁
    타락한 이후 인간은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동양에서는 순자(荀子)가 주장한 인간의 본성은 악(惡)하다는 성악설(性惡說)과 맹자(孟子)가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인간은 선하게 태어난다는 성선설(性善說)이 팽배하게 대립하고 있다. 성경은 이 두 학설 중 성선설에 가깝다. 전도서 7장 29절은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힛솨본’인데 영어 성경(NKJV)은 ‘계략, 음모’(scheme)로 번역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하게 창조하셨으나 죄가 인간에게 들어온 이후 수많은 악한 꾀를 내는 존재가 됐다는 의미이다. 죄론에 대한 현대적 논쟁은 죄의 본질과 인식, 죄의 본편성과 전가성 그리고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원죄론에 대한 논쟁과 죄성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 죄의 본질 죄는 단지 인간이 행하는 그 무엇일 뿐만 아니라 죄가 인간 안에서 행하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 죄는 단지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 너머로 오기도 한다. 이전에 살펴본 것처럼 아담과 하와의 근원적 죄는 인간 내면에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사탄이라는 외부적 유혹에서부터 시작됐다. 인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행동을 함으로서 죄에 빠졌다. 죄에 대한 웨스트민스터의 대요리문답은 ‘죄란 하나님께서 이성적인 피조물에게 삶의 기준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일치의 결여 또는 위반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2) 죄의 인식 죄는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의 실존적 일치성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하나님과 동떨어진 자신의 세계와 자기 자신을 목표점으로 지향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없는 곳에 살며 어떻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을까? 자신도 철저하게 부패한 인간이 죄 가운데 살면서 어떻게 죄를 인식 할 수 있을까? 선은 악이 있을 때 선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반대로 악은 선이 있을 때 악을 인식 할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해 칼 바르트(Karl Barth)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죄인이 죄를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죄를 인간을 감금하는 ‘감옥’으로 생각했다. 이 감옥은 안에서 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밖에서만 열 수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만 그 열쇠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가 없다면 죄를 인식할 수도 없고 죄에서 나올 수도 없다는 말이다. 3) 죄성(the nature of sin) 인간은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죄의 속성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내면 깊숙한 곳에 간직하고 있는 죄성으로 말미암아 기회가 주어지면 죄를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 죄의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은 것은 환경과 조건이 형성되지 않았을 뿐이다. 신약성경은 죄(Sin)와 죄들(sins)을 구별 짓고 있는데, 보통 전자는 죄의 본성을 말하고 후자는 죄성의 결과 및 표현들을 의미한다. 죄의 속성을 갖고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나 죄는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죄성을 갖고 태어나지 않았기에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이다. (1) 죄의 보편성 성경은 모든 인류가 죄인이라고 선언한다(왕상 8:46; 시 143:2; 잠 20:9; 전 7:20; 롬 3:10~12; 롬 3:23; 요일 1:8). 죄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결코 피할 수 없는 보편적 욕구라고 할 수도 있다. 로마서 3장 23절은 예외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과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죄에 무방비로 노출된 피조 세계의 보편적이고 전 우주적인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 가셨다(롬 5:19). (2) 죄의 전가성(the imputation of sin) 구약시대의 제사를 보면 죄인은 제사장에게 번제물을 가져가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번제물에게 전가하기 위해 제물의 머리에 안수해야 했다(레 1:4). 이 행위를 통해 죄인의 죄가 희생 제물에게 전가 되었다. 번제물은 죄인의 죄를 위해 희생되었고 죄인은 죄로부터 놓임을 받았다. 죄는 이런 전가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죄의 전가성은 제물에게로 국한된다는 점이다. 나이든 부모가 자식의 죄를 대신해서 처벌을 받겠다고 아무리 하소연을 해도 법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듯이 성경에서 죄는 사람을 포함한 어떤 것에도 전가되지 않으며 오직 제물에게만 전가된다. 죄의 전가에 대한 제한적 적용은 구약과 신약에서 동일하게 볼 수 있는데 구약에서는 오직 희생제물에게만 적용되며,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은 대상이 될 수 없다.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 학장)
  • 2024.05.0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생명과학 이야기
    생명과 풍성한 땅을 상징하는 ‘부들’
  • 여름철 연못이나 물의 흐름이 느린 시냇가에 가면 부들을 볼 수 있다. 요즘은 도심에 조경한 연못이나 습지에 부들을 심어놓아 더욱 발견하기 쉽다. 종류마다 다르지만 수면 위로 약 1∼1.5m 높이로 자라며 물속에 뿌리를 안정적으로 착상하고 잎과 꽃줄기를 밖으로 뻗는다(사진1). 부들은 우리나라 어디서나 자라는 다년생 습지식물이다. 원통형으로 긴 꽃대가 바닥에서 길게 올라오는데 약 7~10cm의 크기로 작은 핫도그 같다. 봄에 피는 꽃은 옅은 주황색 수술과 암술이 밀착해서 꽃대를 원통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사진2). 가을이 되면서 적갈색으로 짙어지며 겨울이나 이른 봄에 꽃대에서 흰 솜털처럼 씨앗이 떨어져 나와 바람 따라 흩어져 날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과거에 꽃은 여성질환과 지혈, 이뇨제 등 약제로 사용했다. 부들부들한 잎은 엮어서 방석이나 돗자리, 깔판 등 생활용품으로 만들기도 했다. 요즘은 꽃대를 잘라서 꽃꽂이 장식용으로 사용하는데 여름에는 좋으나 늦가을에는 씨앗이 솜털이 되어 빠져나와 실내를 날아다닐 수도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미래에 부들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사 35:7)라고 했다. 거친 광야에 풍성한 물은 연못을 만들고 사막을 흐르며 그곳에 갈대와 ‘부들’이 자란다는 의미는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며 우리에게 희망이며 기쁨을 상징한다.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지리적 배경에서 사막과 광야가 있으나 하나님께서 늦은 비와 이른 비를 적절히 내려주시고 바위에서 솟아나는 물로 사람과 다양한 동식물이 잘 살도록 도왔다. 사막이 옥토로 변하고 사람들이 왕래하기 시작하면서 그곳에 큰 길이 생긴다. 광야에 연못이 생기고 강변에 갈대와 ‘부들’이 자라는 풍요는 성도의 아름다운 미래이다. 윤철종 목사(또오고싶은교회, 이학박사)
  • 2024.08.23 / 이미나 기자

    흑차에 핀 금꽃 관돌산낭균
  • 차나무(Camellia sinesis)는 중국이 원산지로 한국과 일본 등 주변 국가로 재배지가 확대됐다. 현재 세계에서 생산되는 모든 종류 차 중에 중국산이 약 25%로 최대 차원(茶園)이다. 차는 재배지역과 위도, 기후, 채취하는 부위와 시기에 따라 다를 수 있으며 이에 따른 상품의 품질과 등급이 정해지기도 한다. 찻잎의 채취 후에는 말리거나 볶는 여러 과정을 반복해서 산화시키고 추가로 발효시키는 정도에 따라 색상과 차의 이름이 부여된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중국의 7대 전통차로는 녹차, 백차, 황차, 오룡차, 홍차, 흑차, 화차가 있으며 개인의 기호에 따라 선호도가 다를 수 있다. 국내 대중매체를 통해서 잘 알려진 차마고도(茶馬古道)와 마방(馬幇)의 이야기는 지역적으로 중국의 윈난성(운난성)이다. 평균 해발고도가 1980미터로 전역의 94%가 고산지이며 인근 쓰촨성(사북성)과 같이 높은 산지의 고원으로 척박한 땅이다. 이곳에서 생산된 차는 말과 당나귀를 이용한 실크로드와 함께 오랜 세월 무역로였다. 가파르고 험한 길을 따라 차가 티베트로 전해지고 그 곳의 말들이 중국으로 들어오는 무역상들의 통로를 일컫는 말이다. 복전차로도 알려진 안화흑차(安化黑茶)에서 발견되는 일명 금화(Golden flowers)균이 있다. 보통 거친 찻잎을 검게 산화시켜 벽돌처럼 틀에 넣고 압착하여 ‘흑벽돌차’라고도 한다. 시간이 지나면 여기서 사상진균(絲狀眞菌)의 일종으로 마치 노랗게 익은 좁쌀이나 사금(砂金)을 흩뿌려 놓은 듯 금빛의 작은 구슬 같은 주머니들이 발견된다(전자현미경 사진). 자실체 안에는 홀씨가 가득 들어 있어 크고 작은 낭(囊)들을 형성한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전자현미경 사진). 과거에 장거리 운반된 흑차에서 노란 곰팡이가 핀 것을 발견했을 때 크게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곰팡이가 자라면 일단 음용할 수 없는 부패 된 차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차를 제조하는 과정에서 잘못 취급했거나 혹은 먼 거리로 운반하는 과정에서 생긴 부패한 상품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는 가치를 인정받아 노란 곰팡이가 핀 것을 흑차에 “금꽃이 피었다”고 여겨 금화균이라 불렀으며 티베트에서는 금화가 많이 발견된 흑차를 더 선호하게 되었다고 한다. 관련해서 필자도 일부 실험과 자료검색에서 확인해 본 결과 누룩의 일종으로 금화균(관돌산낭균, Eurotium cristatum)으로 차가 가진 특유의 떫은맛과 쓴맛, 신맛을 완화하고 혈액의 중성지방을 낮추며 체지방을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다양한 임상실험에서 항산화작용과 항암효과가 있으며 유해하지 않은 유익균으로 보고되고 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우리에게 삶이 풍요롭고 지친 몸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선물을 준비하셨다(창 1:11). 현대인의 바쁜 생활 중에 차를 마시는 여유와 쉼, 그리고 차와 함께 발효균이 주는 유익함도 누려보길 바란다(신 6:24). 윤철종 목사(또오고싶은교회. 이학박사)
  • 2024.07.26 / 이미나 기자

    몸 값하는 호박벌의 능력
  • 전 세계에서 “벌이 사라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자연생태계에서 벌의 개체 수가 급감하고 있다는 경고이다. 빈 벌통을 바라보는 양봉가의 시름이 깊어져 갈 때 농작물 수확량도 감소하므로 농가의 시름도 깊어진다. 이와 같은 자연재해는 심각한 식량난을 예고한다. 원인으로 기후변화와 농약 및 환경오염, 바이러스 혹은 세균감염, 진드기의 일종인 응애(mites) 외에도 여러 가지 알 수 없는 요인이 있다. 특별히 벌은 유익한 곤충으로 그 위치가 남다른 면에서 더욱 그렇다. 벌이 사라지면 꽃을 피워 충매(蟲媒)로 결실하는 농작물의 수확량이 절대 감소한다. 벌이 없으면 열매를 맺기 어려운 작물이 생각보다 많은 이유이다. 충매화(蟲媒花)는 향기로 곤충을 초대하고 답례품으로 꿀을 만들어 놓는다. 이때 초대받은 벌의 꿀을 빨기 위한 몸놀림은 꽃가루를 묻혀줘 열매가 잘 결실하도록 한다. 각각이 필요에 따라 행하는 일인데 결국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공생관계로 상생의 순기능이 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만일 벌이 사라진다면 이들에게 큰 충격일 수밖에 없다. 꽃을 피워 향기를 뿜어내고 달콤한 꿀을 준비해도 벌이 없다면 결실할 기회가 없어진다. 화분을 매개하는 여러 종류의 벌 중에서 호박벌(뒤영벌)이 여러 면에서 탁월하다(사진). 농가에서 인기 높은 호박벌이 꿀벌보다 나은 예가 다음과 같이 있다. 첫째, 날씨가 흐리거나 약간의 비가 오는 습한 날씨에는 꿀벌은 활동하지 않으나 호박벌은 궂은 날씨에도 영향을 덜 받고 주어진 미션을 수행한다. 둘째, 기온이 7℃ 이하로 떨어지면 꿀벌은 활동을 멈추는데 호박벌은 5℃ 이하가 되면 가슴에 있는 강한 근육을 진동시켜 체온을 올려 추운 날씨에도 견딘다. 셋째, 향기이나 꿀이 없거나 있어도 적은 토마토, 가지, 피망 등 꽃을 가리지 않는다. 넷째, 꿀벌은 위협을 받으면 그 대상을 집단으로 공격을 하지만 호박벌은 보기보다 순하고 안전하다. 다섯째, 호박벌은 긴 털이 체표를 덮고 있을뿐더러 세찬 날갯짓으로 꽃가루를 털고 날려 수분율이 높다. 여섯째, 꿀벌은 비교적 한 꽃에 머무는 시간이 길고 잠깐이라도 날개를 접으나 호박벌은 짧게 머물고 분주하게 옮겨 다니므로 같은 시간에 10배 이상 많은 꽃을 찾아다닌다. 일곱째, 꿀벌은 활동반경이 집에서 약 2㎞인데 비하여 호박벌은 약 500m로 화훼나 농작물 비닐하우스에 방사하면 멀리 날아가지 않는다. 한편 우리에게 알려진 ‘트랜스포머’ 영화 시리즈 속에서 멋진 역할을 하는 ‘범블비(Bumblebee)’의 애칭은 ‘호박벌’ 이름에서 인용했다. 요즘 반려곤충으로 호박벌을 키우는 일부 동호인도 있다. 호박벌은 큰 몸통에 비해 날개가 왜소해서 날 수 없을 것 같아도 가슴 근육의 힘으로 빠른 날갯짓을 하며 이를 극복한다. 성도가 믿음의 영적 근육이 강하면 능히 못 할 일이 없다. 현대를 살아가는 신앙공동체가 각자 주어진 믿음의 역량을 잘 활용한다면 분명 아름다운 결실이 있다(엡4:11~13). 윤철종 목사(또오고싶은교회, 이학박사)
  • 2024.05.24 / 이미나 기자

    성경 Think! 인생 Thank!
    빼기의 기술 … 자신이 의지했던 것 내려놔야 
  • 한 가지에 집중해서 그 한 곳에 힘을 모으는 것
    힘을 뺀다는 건 주님께 집중하는 것 제33회 파리 올림픽 경기가 오늘(11일) 폐막한다. 평소 운동경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대한민국 결승전 앞에선 손에 땀을 쥐고 보게 된다. 여러 경기 중 단연 활·총·칼이 눈에 띈다. 큰 경기 앞에서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경기를 이어나가는 선수들의 모습은 경이로울 따름이다. 예상치 못한 변수 사격 경기에서 맹활약을 펼친 김예지 선수의 영상에 일론 머스크가 댓글을 두 번이나 달아 화제다. 영상 속 김예지 선수는 모자를 뒤로 쓴 채 마지막 한 발을 쐈다. 정지화면인 듯 인조인간 로봇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인도의 마누 바케르 선수를 0.1점 차이로 밀어냈다. 당시 중압감과 긴장감이 어마어마했을 텐데 이를 이겨내고 침착하게 2위를 차지했다. 여자 양궁팀 경기에서는 강한 바람이 변칙적으로 부는데도 이를 극복하고 금메달 10연패를 달성했다. 올림픽 단체전 3연패를 달성한 남자 양궁팀의 막내 김제덕 선수는 손등에 벌이 앉은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10점을 쏘았다. 우리나라 선수들은 바람, 벌 등 예상치 못한 변수에도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메달을 따냈다. 힘을 빼야 큰 대회는 물론 운동을 처음 배울 때 누구나 긴장하기 마련이다. 하면 할수록 더 잘하려는 마음에 힘을 주게 되고, 피곤해지고 여기저기 근육통이 생기게 된다. 중간 중간에 누군가 “힘을 빼세요”라고 말하는데 더 세게 힘이 들어간다. 운동이라는 것은 힘을 쓰는 것이 기본인데 왜 자꾸 힘을 빼라고 말하는 것일까? 힘을 빼면 원하는 게 되지 않을까 봐 힘을 못 뺀다. 운동선수들에게도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것 중 하나가 ‘힘을 빼는 것’이다. 한 가지 종목에서 오랫동안 운동을 한 레전드 선수도 “힘을 빼는 데 10년이 걸렸다”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그만큼 어렵다. 힘을 뺀다는 건 한 가지에 집중해서 그 한 곳에 온 힘을 모으는 것을 말한다. 힘을 쓸 때와 뺄 때를 아는 지혜는 시간과 경험에서 나온다. 시간과 경험이 쌓여야 양궁 대표팀 훈련은 혹독하기로 유명하다. 주 6일 동안 하루 400여 발의 화살을 꾸준히 쏘게 한다. 쉬는 일요일에도 선수 스스로가 훈련을 멈추지 않는다. 예전에는 한밤에 공동묘지 다녀오기, 옷 속에 뱀 집어넣기 등 엽기에 가까운 담력 훈련을 자주 했었다. 관중들의 소음과 거센 바람 속에서도 과녁을 맞히는 특수 훈련도 포함됐다.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는 로봇과의 대결로 실력을 키웠다. 이 슈팅 로봇은 센서로 바람 방향과 세기를 정확하게 측정해 계산에 놓고 정확히 조준했다. 무서운 건 이 로봇은 감정이 없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 없이 10점을 쏘는 로봇과 대결하니 처음엔 쉽지 않았지만 어느새 선수들은 강심장이 되었다. 양궁의 전훈영 선수는 1분당 심장박동수가 76이었다. 힘 빼기 이런저런 변수를 경험하다 보면 불필요한 부분에 힘을 쓰지 않게 된다. 『빼기의 기술』에서 라이디 클로츠 교수는 “더하기 방식은 틀렸다”라고 말한다. 너무 애쓴 나머지 불필요한 것에 감정을 소비하고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음은 더 조급해지고 심장은 터질 듯하다. 아무리 애써도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경험들을 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이 쌓이다 보면 저절로 힘을 못 쓰는 상황에 직면한다. 이때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자신이 어디에 힘을 쓰고, 무엇을 놓지 못하고 있는지를 보게 된다. 이 무더위 속에서 잠깐 멈추는 시간이 주어졌다.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조용히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다. 자신이 미쳐 힘쓰지 않았음에도 받았던 것, 지켜주셨던 것들을 세어 보니 모든 것이 은혜였음을 고백하게 된다. 믿는 우리들은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깨달을 때 몸이 편안해진다. 믿음의 선진들의 힘 빼기 믿음의 선진들도 오랜 시간 여러 경험들을 통해 힘을 빼는 시간들이 있었다. 모세에게는 능력의 지팡이가 있었다. 물이 필요할 때 지팡이로 반석을 치니 샘물이 솟아 나왔다. 지팡이를 던지니 지팡이가 뱀이 되었고 지팡이를 들고 홍해 바다를 가리키니 바다가 갈라졌다. 모세에게 지팡이는 또 다른 능력과 힘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셨다. 힘을 빼고 자신이 의지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후 세상에서 누렸던 모든 기득권을 배설물로 여겼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따를 때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즉시 예수님 뒤를 쫓아 위대한 제자가 되었다. 당신이 붙잡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인생은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힘을 빼는 데서 시작된다. “네 길을 야훼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시 37:5). Think! Thank! Q1. 올림픽 결승전을 보는 당신의 심장 박동 수는 얼마나 될까요? Q2. 온몸이 아플 정도로 붙잡고 있는 문제는 무엇일까요? Q3. 다음 성경구절을 암송해 보세요. “네 길을 야훼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그가 이루시고”(시 37:5).
  • 2024.08.0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프레임 …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창 
  • 우물 안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려면 예수님의 마음 품어야 한 분야에서 30년 이상 일했다는 건 자신의 일에 성실하게 임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 분야를 오래 파고든 만큼 사고가 유연하지 않다는 걸 말한다. 같은 사실을 놓고도 서로의 지식이 다르고, 같은 사건을 보고도 서로 보는 각도가 가지각색이니 충돌이 발생한다. 우물 안 개구리 우물 안에서만 사는 개구리가 있다. 그 개구리는 하늘의 넓이와 바다의 깊이를 우물만큼의 넓이와 깊이로만 이해한다. “우물 안 개구리”라는 이 말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존재가 상식적인 문제나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일 때 쓰인다. 이 속담은 장자에 나오는 “정와불가이어해(井蛙不可以語海)”에서 기원한다. 황하의 하백(河伯)이 자신이 다스리는 황하가 물이 불어 끝없이 펼쳐진 것을 보고 매우 흡족했다. 그런데 바다를 보고는 경악했다. 자신이 가장 크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너진 것이다. 이를 보고 바다를 지키는 약(若)이 하백에게 세 가지 충고를 한다. 첫째, 우물 속에 있는 개구리에게는 바다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다. 그 개구리는 우물이라는 공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둘째, 한여름에만 사는 여름 곤충에게는 얼음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없다. 그 곤충은 자신이 사는 여름이라는 시간만 고집하기 때문이다. 셋째, 편협한 지식인에게는 진정한 도의 세계를 설명해 줄 수 없다. 그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가르침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색안경 끼고 봐 오랫동안 자신의 공간에 갇혀 있던 사람은 다른 공간에 대해 알지 못한다. 자신이 겪은 것으로만 일을 처리하거나 아는 것으로만 판단한다. 상대방의 지식과 행동이 자신과 다르면 그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틀렸다고 말한다. 이처럼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어떤 문제를 바라보는 틀을 프레임이라고 한다. 『지혜로운 사람의 11가지 프레임』의 저자 최인철 교수는 프레임을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창’이라고 정의한다. 건물 어느 곳에 창을 내더라도 그 창만큼의 세상을 보게 되듯이, 우리도 마음의 창을 통해 보게 되는 세상만을 볼 뿐이다. <더짠내투어>라는 프로그램에서 개그맨 이용진이 파란색 접시에 초록 야채들이 담긴 음식을 보고 “왜 이렇게 음식이 전체적으로 노랗지?”라고 말한다. 가수 광희가 “형이 노란 안경 끼고 있어요”라고 말하자 본인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광희가 “여지껏 색안경 끼고 봤네”라고 외친다. 저마다 자신만의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해석보고 바라본다. 우물 안에서 나와야 자신이 살아온 경험, 믿고 있는 신념, 공간적 제약들을 벗어나긴 쉽지 않다. 어떻게 해야 우물 안에 살고 있는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우선 우물 안에서 나와야 한다. 의식적으로 낯선 곳에 자신을 던져보는 것이다. 휴가와 방학을 이용해 국내든 국외든 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다. 여행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얼마나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사색할 수 있게 되고, 낯선 긴장감을 통해 뭔가에 도전하게 된다. 책이나 유튜브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방법도 있다. 책을 읽는다는 건 단순히 지식의 습득만이 아니라 사색과 사유를 통해 심성을 기른다. 책 읽는 걸 싫어한다면 유튜브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다. 무언가를 배우는 것도 괜찮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소통하다 보면 다양한 경험을 체험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자신만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반화시키려는 아집과 고집을 버리고 지식을 재구성할 수 있다. 예수님의 마음 품어야 노란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노랗게 보이듯 구속의 은혜를 받은 우리는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겔 11:19).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의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신다. 부드러운 마음은 모든 관계에서 상대방을 아프지 않게 하며 자신 역시 무너지지 않게 한다. 모든 열등의식에서 벗어나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그의 아픔을 공감하고 위로해 주며 따뜻함을 준다. 성경에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3~5)라고 말씀한다. “상대방이 우물 밖 하늘을 볼 때 우물 크기만큼 본다고 답답해하지. 너도 마찬가지구나. 위에서 우물을 내려다보는데 결국 우물 안 크기만큼만 보는구나.” Think! Thank! Q1. 당신이나 상대방의 모습을 보고 우물 안 개구리라고 느끼신 적이 있나요? Q2. 당신은 우물 안에서 나와 무엇을 해보고 싶은가요? Q3. 성령께 부드러운 마음을 달라고 기도문을 적어보세요.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4.07.1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진로를 디자인해라 ... 의대 열풍 속에서도 마이 웨이
  • 평생직장 사라져, 평생학습해야** **단순한 밥벌이가 아닌 그 일로 부르셨다
    “초등학생 꿈까지 접수한 의대열풍”, “초등학생 4명 중 1명 의대 입시 준비”, “대치동 학원가에 초등학생 대상 의대 진학 준비반 유행”. 일간지 헤드라인 제목들이다. 비수도권 의대의 지역인재전형 선발 비율을 60%까지 늘리겠다고 발표해 ‘지방 유학’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직장을 다니거나 대학을 졸업한 뒤 의대에 입학하는 25세 이상 ‘늦깎이 의대생’ 또한 늘어나고 있다. 이런 내용의 기사를 접하다 보면 우리 아이도 뛰어들어야 하는 건 아닌지, 다시 제 2의 인생을 설계해야 되는 건 아닌지 불안과 고민이 커질 수밖에 없다. 시대마다 직업 열풍 있어 교육부와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이 발표한 ‘2023년 초·중등 진로교육 현황조사’ 결과를 보면, 의사를 꿈꾸는 초등학생 비율이 지난해 4위에서 올해 2위(7.1%)로 올랐다. 고교에서도 7위에서 5위(3.1%)로 두 계단 높아졌다. 지난해 서울대에서 341명이 자퇴했고, 자퇴생 대부분이 의대 진학을 준비한다고 했다. 의대를 가장 많이 보내는 학교가 서울대 공대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니 의대열풍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번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지난 2016년에는 공무원시험 열풍이 불어 전공불문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공무원이 되는 일이 하버드대에 입학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왜 이런 열풍들이 시대마다 부는 걸까? 사람들은 미래가 불확실하고 경제가 불안할수록 안정된 직업을 찾게 되어 있다. 대기업보다 연봉이 높고 직업 안정성이 보장되는 직업으로 현재 의사가 최고인 셈이다. 영원한 직업은 없다 최근 국회입법조사처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임용 후 5년 미만 공무원들 중 퇴직자는 1만 3566명으로 2019년 6500명에 비해 갑절 이상 늘어났다. 한때 각광받던 직업인데 사람들은 왜 그만두는 것일까? 미래를 책임져줄 것 같은 직업을 좇아 어렵게 입사했지만, 생각보다 직무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낮은 보수, 잦은 민원으로 퇴사했다. 시간이 지나니 사회에서 말하는 인기 직업이 바뀌었다. 이 세상에 영원한 직업은 없다. 오늘 인정받는 직업일수록 10년 후에는 그렇지 못할 확률이 더 높다. 빠르게 변화하는 미래, 점점 더 모호해지는 일의 경계 그리고 다양한 직업의 등장은 이를 뒷받침해 준다. 기대수명이 증가하면서 일자리에서 은퇴하더라고 꽤 많은 시간을 살아야 한다. 인생 후반부를 살아내기 위해 재취업이나 창업을 해야 한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끊임없이 인생을 설계하고 계속해서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진로 선택 일반적으로 진로 선택을 하는 데 있어서 성격, 적성, 직업가치관 검사를 해보는 게 좋다. 워크넷(www.work.go.kr)에 들어가면 청소년과 성인을 대상으로 20여 종의 심리검사를 해볼 수 있다. 검사 후 결과를 통해 객관적으로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탐색할 수 있다. 직업을 갖더라도 꾸준한 자기계발이 필요하다. 국가평생교육진흥원에서는 국민을 대상으로 다양한 학습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퇴근 후 학습 한 잔 어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직장인들을 위해 지하철 근처에 학습관을 열어주고, K-MOOC(한국형온라인공개강좌)를 통해 대학, 기업 등의 우수강좌를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게 열어줬다. <평생학습계좌제>라는 제도는 다양한 학습 경험을 계좌에 누적, 관리하고 학력, 자격으로 인정하거나 고용정보로 활용케 했다. 이를 통해 다가올 미래를 대비할 수도 있고, 새로운 직업의 세계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분이 맡겨주신 일 부모로서, 한 개인으로서 시대의 흐름을 읽고,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진로를 디자인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고전 7:17) 하나님이 사람마다 부르신 목적이 있다. 독일어로 직업은 Beruf(베루프)로 Berufen(베루펜)이라는 동사 ‘부르다’에서 왔다. 누가 부르는가 하면 하나님이 부른다는 뜻이다. 기독교인에게 있어 일은 생활의 필요를 채우는 단순한 밥벌이가 아니라 그 일로 부르셨다는 의미가 있다. 세상에서 말하는 직업을 좇아 우왕좌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다. 훗날에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할 수 있게. “숲속에 두 갈래 길이 나 있었다고 /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로버트 프로스트 <가지 않은 길> 중에서). Think! Thank! Q1. 당신은 어떤 직업을 갖길 원하시나요? Q2. 그 직업이 평생토록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시나요? Q3. 그 직업으로 부르신 분은 누구실까요?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4.04.1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고전(古典)에서 길을 찾다
    탕자의 귀향 - 헨리 나우웬
  • ↵ 아버지가 되는 것 앙드레 지드는 ‘탕자의 비유’에 동생(셋째)을 등장시켜 재해석한 단편 『탕자 돌아오다』를 썼다. 일본 도호쿠대(東北大學) 명예교수 미야타 미츠오가 정리한 책 『탕자의 정신사』라는 책도 있다. 모두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모티브로 했다. 그 중 군계일학(群鷄一鶴)의 작품은 헨리 나우웬의 『탕자의 귀향』이다. 이 책은 프롤로그가 더 재밌다. 저자는 각종 강의와 세미나로 걷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죽을 만큼 피곤했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친구 시몽을 만나러 간 자리에서 그림 한 장에 감동을 받고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새 힘을 얻게 된다. <플랜더스의 개>에서 주인공 네로가 루벤스의 <십자가에 달리시는 예수>를 볼 수만 있다면 “죽어도 좋다”고 했던 것처럼, 렘브란트의 작품 <탕자의 귀향>은 그렇게 그의 인생 속으로 들어왔다. 나우웬은 작은아들, 큰아들, 그리고 아버지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첫 단추는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둘째아들이 되는 경험이다. 당시 유대지방 상황으로 볼 때 둘째아들은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던 희대의 불효자다. 불효자라고 욕하면서도 “내 인생 또한 둘째 아들의 모습입니다”라고 규정짓는 우리는 또 어떤가. 아버지를 떠났지만 언제든 달려가면 아버지가 반가이 맞아주기를 기대하는 또 그래야 한다고 믿는 자기 합리화이다. 자신을 큰아들로 투영하고 싶은 사람들도 있다. 집을 나가거나 육신의 쾌락을 쫓아 시간과 돈을 낭비한 일도 없었다. ‘방탕함과 술취함’(눅 21:34)에 몰두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실제로는 둘째 아들인것처럼 살고 있다. 질투, 분노, 과민하고 완고한 태도 그리고 독선까지. 평생 교회를 떠나지는 않았지만 길을 잃고 방황하기는 매한가지이다. 헨리 나우웬은 날카로운 권고를 날린다. “스스로 작은 아들이라고 생각하든 큰아들로 여기든, 아버지처럼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바로 작은아들이었고, 큰아들이었으며, 이제 아버지가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에필로그에서도 ‘아버지가 되는 것’의 의미를 강조한다. 긍휼, 용서 그리고 너그러운 마음을 품는 것이다. 쉽진 않지만 우리가 지향해야 할 품성들이다. 폭염을 잊게 할 매력있는 책이다. 제임스 마틴의 추천사처럼, 나우웬의 풀이를 보고 미소 짓고 거기서 끌어낸 원리들에 손뼉을 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본다. 임훈 목사 (여의도순복음군산교회)
  • 2024.08.08 / 이미나 기자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 고든 맥도날드
  • 쫓겨 다니는 사람인가 부름 받은 사람인가
    정원을 가꾸다보면 손이 많이 가는 튤립이 있는가 하면 구석 어디에선가 꿋꿋하게 존재감을 잃지 않는 국화도 있다. 우리의 서재에도 깊숙이 먼지 가득한 책, 평소에 손이 잘 안가지만 꼭 읽어야 하는 책들이 있다. 닐 앤더슨의 ‘내가 누구인지 이제 알았습니다’와 고든 맥도날드의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 두 책 모두 마음치유(Inner Healing) 입문자에게 필독서이다. 저자는 책 앞부분에서 중요한 질문을 한다. 우리는 무엇엔가 늘 쫓겨 다니는 사람(driven people)인가? 아니면 주님의 은혜로운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부름 받은 사람(called people)인가? 전자는 우리의 내면을 무질서하게 만들고 힘들게 한다. 고든은 자신의 탈진 경험을 언급하면서 그날을 ‘벽에 부딪힌 날’이라고 지칭한다. 타고난 재능으로 빠른 출발을 했고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지만 내면은 무너져 내려 웅덩이에 빠진 상태였다. 탈진 상태에서 저자는 의도적(intentionality)으로 내면세계의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권고한다. 함몰 웅덩이 증후군, 내면세계의 조종실에 이상이 생기면 나타나는 탈진, 신경쇠약, 분노의 폭발 등 쫓겨 다니는 자가 드러내는 경향은 다양하다. 쫓겨 다니는 사람은 오직 무엇인가를 성취했을 때만 만족감을 느낀다. 그것은 일시적이다. 또한 통제되지 않는 강한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분노는 보너스이다. 성경에는 사울의 분노가 폭발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오는데 그는 난폭한 행동을 하고 나서 곧 비통한 자기 연민에 빠지곤 했다. 그는 애초부터 쫓겨 다니는 사람이었고, 단 한번도 내면세계의 질서를 가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면세계의 질서를 잡아가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덕목이 영적성장이다. 저자 고든은 하나님의 음성 듣기, 사색과 묵상 그리고 중보기도를 강조한다. 영적성장은 외부로의 뛰쳐나감이다. 스티븐 코비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에서 이것을 ‘내면으로부터 외부로 향하는 접근’(inside-out approach)라고 부른다. 바울은 쫓겨다니던 사람이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내면세계의 극적 해방감을 맛보았다. 쫓겨다니는 사람이 부름 받은 사람으로 변화된 것이다. 바울은 결코 영적성장을 놓치지 않았다. 이 책은 부름 받은 사람으로서 갖추어져 가야하는 덕목들을 우리에게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다. 반면에 다시 한번 엄격하게 묻는다. 여전히 쫓겨다니는 삶을 자기변명으로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지. 임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군산교회 담임)
  • 2024.07.12 / 이미나 기자

    『허드슨 테일러의 생애』 하워드 테일러
  • 기도 하나만으로 하나님 통해 사람을 움직인다
    중국내륙선교사로 평생 헌신했던 허드슨 테일러. 이 책은 그의 아들 하워드 테일러가 아버지에 대해 쓴 선교 필독서이다.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신앙생활의 풍요로움을 주는 고전중의 고전 『허드슨 테일러의 생애』를 만나보자. 이 책의 두 가지 키워드는 ‘고난을 통한 믿음의 성장’과 ‘기도를 통한 역사’이다. 허드슨 테일러의 중국 선교 준비 과정은 어려움 자체였다. 환경적인 불편함과 경제적인 궁핍이 그의 출발을 가로막았다. 의학생이던 그는 매일 병원에서 집까지 13㎞를 걸어 다녀야 했고 수개월 동안 흑빵과 사과를 주식으로 먹어야했다. 모든 공급원이 차단되고 극한 외로움에 처하면서 그는 한 가지 원리에 매달렸다. “기도 하나만으로 하나님을 통해 사람을 움직인다”는 것이다. 아무런 연고도 없던 중국 내륙 선교를 위한 비법을 그는 고난을 통해 습득했던 것이다. 허드슨 테일러의 비범함은 책 곳곳에서 나타난다. 그는 최고를 지향하는 신앙을 가지고 살았다. 순간순간 하나님을 의식하며 믿음을 키워나갔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없다면 태양 없이 사는 것과 같고 주시는 능력을 거부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절대적으로 그리스도의 무한한 풍부함을 의지했다. 그런 그가 믿음의 진보를 이루기 위해서 수많은 고통의 순간과 고난의 시간을 지나야 했음이 구절구절마다 책 깊이 스며져 있다. 선교의 지치지 않는 힘은 그렇게 준비됐다. 그가 이것을 어떻게 실천했는지를 책은 담담히 증언하고 있다. 우리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지난 팬데믹은 우리를 고민하게 했다.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했고 패러다임의 전환을 받아드렸다. 교회들도 프로그램과 이벤트에서 전인적 돌봄과 훈련으로 변화를 모색했다. ‘다시 선교적 교회’개념으로 지역사회를 품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시도 또한 매우 긍정적이다. 이 시점에서 기도의 사람 이 엠 바운즈(E.M.Bounds)의 책 추천사는 그래서 값지다. “교회는 더 나은 방법을 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더 나은 사람을 구하신다”. 생육조건에 맞춰 키우려면 손이 많이 가는 게 튤립이다. 이 책은 아름답게 피는 과정을 적절하게 제시하고 있다. 임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군산교회 담임)
  • 2024.05.09 / 이미나 기자

    고민 Tick, 상담 Talk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기
  • "닥쳐오는 명절 증후군, 스트레스를 물리쳐라"
    ▶ 고민 Tick 명절만 가까워지면 시험에 든다는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저와 자녀들의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상담 Talk 최근 간소하게 명절을 보내는 가정들도 많아졌지만, 상담실에는 여전히 명절증후군을 호소하는 사례가 많다. 특히 과거에 가족들로부터 받았던 상처들이 명절 때 다시 만나면 그대로 드러나서 더 괴롭다고도 한다. 과거 또는 요즘까지도 명절 준비 스트레스로 지쳐가는 어머니와 며느리, 가족들의 힘든 마음은 쉽게 다른 누군가와 솔직히 나누지도 못한다. 이는 우리나라의 체면문화 때문이기도 하다. 크리스천의 경우에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면 되지 신앙 수준이 왜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느냐”는 비난을 받을까봐 솔직히 말하기 전에 불안이 앞서게 된다. 목회상담학자 에드워드 윔버리(Edward P. Wimberly)는 종종 성도들이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기도드리지만, 기도만으로는 불안을 완전히 없애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였다. 교회에는 가족 안에서 받은 상처로 인해 지치고 신앙과 자존감까지 처참히 무너져 기도할 힘조차 없이 만성 불안을 겪고 있는 성도들도 많다. 이들에게 기도만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기도조차 시도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어 더 우울하게 만들 수도 있다. 마크 맥민(Mark R. McMinn)은 가족 안에서 받은 상처로 인해 낮은 자존감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이를 전문적으로 치료받지 못하면 만성 불안으로 발전된다고 경고하였다. 따라서 성도들이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한 만성 불안을 치유 받기 위해서는 신뢰로운 대상과의 공감적 상호작용을 통해 건강한 하나님과의 관계 경험을 체험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성도들도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인간관계에서의 공감적 상호작용을 통해 사랑과 인정을 받고 성장하고 싶은 욕구를 모두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타인의 마음을 알고 느끼는 공감 훈련은 성도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리차드 얼스킨(Richard G. Erskine)은 인간이 상처로 고통스러워할 때 치유 받고자 하는 욕구, 수용 받고자 하는 욕구, 상호 관계를 갖고자 하는 욕구 등이 충족되어지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이 욕구들이 인간 상호작용으로부터 성장하는 욕구이고 반대로 상호작용에 자양분을 공급하여 성장하게 하는 욕구라고 하였다. 우리 주위에는 비록 건강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깊은 우울이나 공황, 불안장애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성숙한 크리스천들 중에서도 주위의 기대 때문에 아픔과 상처를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해 거짓으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는 가면우울증을 겪고 있는 성도들이 상담 현장에 정말 많다. 이들을 돕기 위해 목회상담이 일반 심리치료 영역을 부정하기보다는 신앙인도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치료를 받듯이 심리치료 전문가의 치료와 영적 지도가 함께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성도들을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는 여러 가지 심리치료 방법론들 중, ‘지금 여기(Here and Now)’에서 자신의 내면을 알아차리고 표현하는 것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게슈탈트 심리학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게슈탈트 심리학의 접근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다. 현재에 집중함으로써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당면 문제에 대한 알아차림이 생긴다. 이어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발성이 표현된다. 자발적인 표현을 통해 드러나는 문제는 다루어지고 치유 받은 후 해소로 이어진다. 가족으로부터 받았던 상처에만 머무르며 과거 속에서만 살거나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만 집중하고 살려는 인생은 현재의 힘과 접촉하고 현재를 충실하게 사는 것을 회피하는 인생에 불과하다. 현재를 충실하게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교회에서도 현재보다는 성경의 영웅들을 강조하며 ‘과거를 기억하라’고 늘 훈계하는 일이 적지 않다. 물론 기독교 본질의 핵심인 예수님의 구원 사역과 성경의 역사는 늘 기억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적 사실이 기억과 생각에만 머무르고 현재를 살아가는 개인의 삶에 적용과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교회를 이 땅에 허락하신 목적에 위배 되는 일일 것이다. 게슈탈트 치료에서는 내담자가 과거에 가족 안에서 경험했던 상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전에 경험했던 여러 가지 감정들을 재생시키고 목회 상담자와의 신뢰 관계 안에서 안전하고 따뜻하게 재경험하게 함으로써 치유 받고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도록 돕는다. 또한 가장 안전해야 할 가족으로부터 상처를 받았던 당시,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본인과 함께 해주셨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목회 상담에서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이러한 목회상담을 통해 지금 여기의 삶 가운데 생존해 있는 성도는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목회상담가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살아남아 있을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이때부터 성도는 전문 상담을 받지 않더라도 각자 교회 공동체에서 예배와 찬양, 기도로 위로받으며 하루 하루의 삶에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우리 삶의 희로애락, 가족, 사회, 교회에서 겪는 모든 여정은 하나님께서 우리 삶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도록 빚어가시는 과정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박은정 교수(목회상담학)
  • 2024.09.15 / 복순희 기자

    “자녀들이 재미있게 교회학교에 다녔으면 좋겠어요!”
  • ▶ 고민 Tick 자녀들이 교회학교에서 신나고 재미있게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경험을 하였으면 좋겠고 이 경험이 평생 신앙의 유산으로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 상담 Talk 자녀들은 부모님, 사역자님들과 함께하는 예배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 성령님의 교통하심을 경험하고 점점 기독교 문화에 적응하게 된다. 이렇게 자란 자녀들은 청소년기에 들어서면서 자아정체성을 찾게 되므로 자연스럽게 스스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에 갈급하게 된다. 이 시점이 부모가 자녀들이 태중에 있을 때부터 공 들여온 신앙 유산 물려주기 전략이 열매를 맺게 되는 때이다. 자녀들은 청소년기에 세례나 침례를 통해 하나님을 자신의 구원자로 인정하고 그 앞에 엎드리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아동기까지는 대기업에 근무하시던 장로님의 딸로, 청소년기부터는 신학교에 입학하신 전도사님의 딸로, 청년기부터는 목사님의 딸로 매우 혼란스러운 정체성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학과를 전공하던 대학 2학년 때 필자는 “아버지, 기독교는 허무해요”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으신 아버지와 어머니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보셨다. 목회자 딸의 입에서 나온 청천벽력과 같은 말에 부모님께서는 필자를 1년간 휴학하도록 권유하셨다. 부모님과 의논 후 필자는 영국에 있는 WEC International 선교본부로 가서 선교사 훈련생들과 선교 사역 마지막 여생을 보내는 선교사님들을 돌보는 자원봉사자로 훈련받았다. 가을부터는 전세계에서 신앙 질문을 가지고 모여든 젊은이들과 함께 반나절 일하고 반나절 신학 토론을 하는 L’Abri(라브리 공동체)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때 담당 교수님께서 필자에게 건넨 첫 질문은 “당신의 기독교 신앙은 어떻습니까?”라는 질문이었다. 이때 필자는 즉각적으로 “저는 3대째 기독교 집안이며 할머니는 권사님, 아버지는 목사님이시고요…”라고 대답하는 순간 지도 교수님께서 던진 한 마디가 필자의 머리에 철퇴를 내리쳤다. “기독교 신앙은 집안 문화가 아닙니다! 로마서를 다시 집중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당신의 신앙을 찾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세요!” 그때부터 필자는 기독교 집안 배경이 아닌 나 자신의 죄 때문에 피 흘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었다는 회심의 과정을 하염없는 눈물과 기도로 강력하게 경험하였다. 장로님과 목사님 딸로 성장했지만 정작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은 22세가 되어서야 하게 된 것이다. 필자의 인생은 회심 전과 후로 나뉜다. 회심 후에 필자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이끄시며 주님이 함께 하시는 가운데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삶으로 이어져 왔다. 필자는 크리스천 놀이치료사를 지칭하는 놀이목회상담가라는 용어를 가장 먼저 언급한 박사 논문을 쓰면서 25년간 놀이목회상담가와 기독교 상담가로서 수많은 아동, 청소년, 청년, 부부, 중년, 노년의 내담자들을 만났다. 이들은 필자와 놀이치료실에서 진정한 어린아이가 되어 모래를 만지고 보드게임을 하며 주님이 처음부터 주셨던 천진난만함과 깨끗한 인격으로의 퇴행을 경험하고 주님의 눈에 비친 사랑스러운 존재들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자녀가 먼저 변하면 부모가 이어서 변하고 부모가 먼저 변하면 자녀가 따라서 변했다. 제롬 베리만(Jerome W. Berryman, 1937~)은 놀이 성경 이야기를 가정과 예배에 적용한 ‘성스러운 놀이(Godly Play)’를 통해 교회 공동체와 가정에서 자녀들과 부모들이 서로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음을 제안하였다. 예를 들어, 교회 교사와 아이들 또는 가족이 함께 ‘노아와 홍수’ 이야기를 나눈 후 각자 방주를 대신할 만한 놀잇감을 가져온다. 이들은 저마다 방주라고 생각되는 물건들을 가져올 것이며 그 이유에 대하여 신이 나서 설명할 것이다. 이때 부모나 교회 교사는 “홍수로 계속 비가 오는 동안 배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라고 묻는다면 동물에 관심이 많은 아동들은 동물에 관하여 긴 이야기를 할 것이다. 사람에게 관심이 많은 아동들은 노아와 가족들의 배 안에서의 생활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칠 것이다. 오랫동안 집 안에 갇혀서 학대를 받아 온 아동이라면 자신의 답답하고 두려웠던 상황을 노아의 방주에 투사하여 이야기하면서 그동안 마음에만 담아두고 표현하지 못했던 아픔들을 안전하게 드러내고 치유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막 10:15~16). 박은정 교수(목회상담학)
  • 2024.08.1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원망하는 마음과 우울의 처방전은 ‘시편 23편’
  • 치유와 회복의 역사 일어나
    ▶ 고민 Tick 저는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일찍 돌아가셨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를 너무 일찍 데려가신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우울해지는 마음에서는 아직까지 자유롭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원망과 우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 상담 Talk 스위스의 의사이자 기독교 상담사였던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 1898~1986)는 그를 찾아오는 노이로제 환자들과 우울증 환자들에게 시편 23편을 하루에 6번 읽으라고 처방한 것으로 유명하다. 투르니에는 환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면서 약을 먹는 것처럼 시편 23편을 읽게 했다. “시편을 하루에 아침 2번, 점심 2번, 저녁 2번씩 6번 읽으십시오. 이 처방대로 하여야 당신의 병이 나을 수 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가장 먼저 시편 23편을 읽어야 합니다. 읽을 때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침부터 마지막 잠자리 들기 전까지 최소 6번을 읽어야 합니다. 분주하다고 너무 빨리 생각 없이 읽으면 안 됩니다.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을 본인에게 적용하고 음미하면서 의미를 최대한 머리와 마음속에 새겨야 합니다. 이렇게 일주일만 지속하면 당신의 증상은 분명히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투르니에의 처방대로 순종한 환자들에게서는 마음의 병이 떠나가기 시작했다. 투르니에는 스위스의 의사이자 기독교 상담사이며 작가였다. 그가 시편 23편을 처방한 것과 같은 기독교 상담사로서 이룩한 그의 업적 때문에 그는 세계적으로도 명성을 얻었다. 투르니에의 연구와 임상은 기존의 일상적인 환자 돌봄에서 더 나아가 영적 및 사회심리적인 관점이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내는데 매우 중요한 사례가 되었다. 그리하여 투르니에는 20세기에 가장 유명한 기독교인 의사로도 알려져 있다. 투르니에는 목사님인 아버지 루이스 투르니에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오르먼드 사이에서 태어났다. 투르니에의 아버지는 세인트 피터 교회당의 존경받는 목회자였으나 투르니에가 태어난 지 100일이 되기 전인 3개월 때, 투르니에가 6살 때는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42세 이른 나이에 소천했다. 6세에 고아가 된 투르니에와 10살 누나는 함께 그의 삼촌과 숙모에게 양육을 받았다. 부모님 모두를 아동기 전에 잃게 되는 인생 중 가장 큰 상실과 고통의 경험은 그에게 삶에 대해 늘 깊이 묵상하도록 만들었다. 부모를 모두 잃은 사춘기의 투르니에는 외롭고 수줍음이 많은 소년이었다. 그는 수학과 헬라어에 뛰어난 자기의 지적인 면들 뒤로 숨어서 자신의 불안 증상을 숨기면서 청소년기를 보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삼촌, 숙모, 누나의 돌봄 가운데 잘 성장하였고 말씀 묵상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상실을 애도하고 불안 감정을 내어놓은 체험을 바탕으로 크리스천 의사이며 기독교 상담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후 성숙해진 투르니에는 1923년 제네바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고 스위스 학생 운동 회장 역할도 하였으며 적십자 대표가 되어 비엔나에 있는 러시아 포로들의 본국 송환을 돌보기도 하였다. 투르니에는 말씀 중심의 개혁 신앙에 관하여서도 깊이 연구하였기에 세계교회협의회에서도 활동하였으며, 본인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경험을 토대로 기독교 상담의 획기적인 관점을 제시하였다. 부모님 두 분을 영유아기에 잃고 상실과 허무감으로 인생을 허비하며 우울과 불안장애에 사로잡혔을 수도 있었을 그가 자신에게 적용하여 치유 받은 말씀이 시편 23편이었을 것이다. 다윗이 시편 23편을 쓸 때는 셋째 아들 압살롬이 자신을 배신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쫓기는 신세였다. 그러나 다윗은 아들을 원망하지 않고 절망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부르며 시편 23편을 쓴다. 투르니에도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일찍 데려가신 하나님을 원망하고 절망하기보다는 야훼께서 자신의 목자이시기에 부족함이 없음을 고백하는 삶이었다. 그는 평생에 야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그를 따르며 야훼의 집에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직접적인 체험을 환자들에게 나누었을 때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원망과 우울이 찾아올 때 시편 23편을 투르니에의 처방처럼 잠에서 깨자마자, 아침, 점심, 저녁, 자기 전에 깊이 묵상하며 자신의 노래로 부를 수 있다면 절대로 마음과 영혼의 병이 찾아올 수 없는 백신을 맞는 것과 같을 것이다.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야훼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1~6). 박은정 교수(목회상담학)
  • 2024.07.1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신앙으로 세상보기
    뉴스 가려보기
  •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출현은 새로운 문명 시대를 열어왔습니다. 학자들은 ‘말’의 발명으로 수렵, 채집 생활이 시작된 1단계, ‘글’의 발명으로 농경사회가 형성된 2단계, ‘인쇄’의 발명으로 산업사회가 본격화된 3단계, 컴퓨터와 결합한 ‘텔레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등장으로 정보사회가 펼쳐진 4단계로 역사 발전과정을 설명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챗GPT’ 등 인공지능, 블록체인, 가상현실과 같은 디지털 범용 기술들이 새로운 4차 산업시대에 선도적 역할을 담당해 나가리라 예측됩니다. 되돌아보면 인터넷, 휴대폰 등 뉴 미디어의 확산은 커뮤니케이션 활동에 획기적 변혁을 초래했습니다. 우선 인터넷은 탁월한 개방성으로 공간의 제한을 무력화시키고 명실상부한 ‘지구촌 공동체’를 실현해 냈습니다. 또한 개인 미디어와 매스 미디어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함으로써 ‘공공영역’과 ‘사적영역’의 구분을 일시에 무너뜨렸습니다. 이 결과 많은 사람들은 IT기술과 접목된 뉴미디어의 등장이 ‘표현의 자유’에 있어 무한한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바람은 상당 부분 실현됐습니다. 하지만 이면에서는 간과할 수 없는 부작용 또한 생겨났습니다. ‘가짜뉴스’는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실제로 현대사회에서 미디어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막강합니다. ‘교과서’며 ‘재판관’이고 ‘세상을 향한 창’입니다. 실제로 영유아들은 부모나 교사보다 TV나 유튜브를 통해 먼저 세상을 배워 나갑니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가 언론의 잣대에 의해 규정됩니다. 또한 개인들은 미디어가 설정해 놓은 프리즘을 통해 외부 환경을 파악하고 사회 현안을 해석합니다. 한 마디로 ‘가짜뉴스’란 ‘뉴스의 형태를 띠지만 실체는 사실이 아닌 거짓된 뉴스’(fake news)를 의미합니다. 이는 언론 매체에 대한 사회 일반의 기본적 신뢰를 숙주로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진실을 조작해 이익을 챙기려는 불순한 시도입니다. 이런 행태는 근래 SNS상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터넷의 기술적 특성으로 인해 뉴스를 취사선택하는 ‘게이트 키핑’(gate keeping)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편집 통제권’(editorial control) 없이 ‘이용자 통제권’(user control)만 존재함을 악용해 가짜뉴스 제작 배포, 마녀사냥식 신상 털기, 테러 수준의 명예훼손 등이 거침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가짜뉴스를 정치적 선동의 수단으로 삼기도 하고, 가공된 뉴스를 활용해 주식시장을 흔들려 한 사례들도 있었습니다. 특히 유튜브 등 개인 미디어의 경우는 ‘조회’와 ‘구독자’ 수가 수익과 직결되는 구조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반인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선정적 내용으로 꾸며진 괴담 수준의 가짜뉴스가 경쟁적으로 쏟아지고 있습니다. “강하고 자극적인 발언을 할수록 보상이 올라 간다”는 것은 이미 통설이 됐고, “유명해진다면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노이즈 마케팅이 일반적인 비즈니스 모델로 정착되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가짜뉴스가 지닌 신속한 전파력입니다. 미국 MIT 공대 연구진에 따르면 자극적인 가짜뉴스는 일반적 뉴스에 비해 전파 속도가 평균 6배 빠른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의표를 찌르는 폭로성 뉴스, 험담과 막말이 섞인 특정인에 대한 인신공격에 더욱 솔깃해하는 인간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언론 자유를 신장시킬 것이라고 기대했던 디지털 공간에서 이처럼 민주 질서를 위협하는 행태들이 거리낌 없이 자행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지금이라도 윤리와 규범을 바로 세우고 사용자들의 책임 의식을 거듭 깨우쳐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밀려오는 정보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 ‘변별력’을 길러나가는 일입니다.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 교육을 통해 초등학교 때부터 각종 매체가 전달하는 내용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힘을 키워나가는 것도 효과적 방안이 될 것입니다. 특히 크리스천들에게는 이 같은 여과 능력의 함양이 더욱 절실히 필요합니다. 성경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전 5:8~9). 온라인을 이용해 범람하는 온갖 반기독교적 정보에 올바르게 대처하기 위해 예리한 통찰력과 분별력을 갖춰 나가야 할 것입니다. 필자는 오늘 이 지면을 빌려 혼탁한 미디어 환경 속에서도 의연히 기독 언론의 정도를 걷고 계신 <순복음가족신문>에 새삼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 신문은 저희가 온 마음 바쳐 사랑하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정체성을 지키는 보루이며, 곳곳에 고귀한 땀과 눈물이 배어있는 생생한 ‘교회행전’입니다. 지난 2년 이 귀중한 신문에 부족한 제가 신앙 시사칼럼을 게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외람되고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 올리며, 한결같이 따뜻한 격려를 보내주신 신문사 여러분과 졸문을 읽어 주시고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영광과 찬송을 주님께! 할렐루야!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 2023.02.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한글, 빛나는 우리의 보물
  • 한국어 학습자가 폭발적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10일 코리아헤럴드가 교육부 자료를 입수해 보도한 바에 의하면 지난해 말 현재 한국어를 외국어 선택 과목으로 채택한 곳은 세계 42개국 1806개 초 중학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3년 만에 40%가 급증한 수치입니다. 온라인상에서의 한국어 열기 또한 뜨겁습니다. 5억 명 회원을 둔 글로벌 외국어 학습 서비스 ‘듀오링고’는 최근 ‘2022년 듀오링고 언어 리포트’를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한국어 학습자는 1070만 명으로 전년 대비 29%가 증가, 수강자 수가 많은 언어 순위 5위에 올랐습니다. 이처럼 한국어에 대한 관심과 향학열이 높아진 데는 물론 ‘한류 열풍’이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한글’ 자체가 지닌 문자로서의 탁월성과 매력입니다. 실제로 한글은 여러 ‘소리글자’ 가운데서도 가장 발달한 ‘음소문자’입니다. 열 자의 모음, 열 네 자의 자음, 27종의 받침을 활용해 수천 개의 말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같은 음소문자로서 세계 공용어화 되어 있는 영어와 견주어도 효율성이 월등합니다. 영어는 인쇄체와 필기체가 다르며, 대문자와 소문자가 구분되고, 꼭 글자대로 읽혀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발음기관과 발음 작용을 본떠 만들어진 한글의 과학성은 정보화 시대의 진전에 따라 더욱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휴대전화의 자판을 보면 하늘을 뜻하는 ‘·’, 땅을 뜻하는 ‘ㅡ’, 사람을 뜻하는 ‘ㅣ’ 석자로 수십 가지의 모음을 다 적을 수 있습니다. 자음은 동일한 자판을 한 번씩 누를 때마다 예삿소리(ㄱ)→거센소리(ㅋ)→된소리(ㄲ) 순으로 변환돼 간단한 조작으로 모든 글자를 쉽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뛰어난 한글의 편이성이 우리의 높은 휴대전화 보급률과 선도적 기술축적을 가능케 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아울러 한글은 ‘배우기 쉽다’는 특장을 지니고 있습니다. 문자를 만든 원리와 사용법을 정연하게 설명한 『훈민정음해례본』의 서두에서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의 동기를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즉 “나라의 말이 공용되는 한자와 통하지 않아 백성들이 제 뜻을 능히 표현하지 못하는 실정임을 긍휼히 여겨 쉽게 익혀 편하게 쓸 수 있는 스물여덟 자를 새로 만든다”는 내용입니다. 이 점을 당시 예조판서 정인지는 보다 실감 있게 설명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다….” 한글은 이런 세종대왕의 애민정신과 자주적 실용주의가 투영돼 구성원리가 간명하고 배우기 쉽습니다. 우리나라가 세계가 주목하는 ‘문맹 퇴치 신화’를 이룩한 배경도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습득의 용이성’이라는 한글의 장점은 복음 전파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한글로 번역된 『성경』은 전도의 사명으로 무장한 기독교인들에 의해 지역, 신분, 성별의 구별 없이 두루 보급되고 읽혀졌습니다. 그들은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한글을 가르쳐가며 전도했고, 신앙을 가지려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기 위해 한글을 배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학자들은 “한글이 진정한 우리 언어로 빠르게 자리 잡는 데 성경이 큰 역할을 했다”고 강조합니다. 국민일보 우성규 기자의 언급대로 “한글 성경과 찬송가의 보급으로 한반도는 문맹에서 벗어났고, 이를 통해 전해진 복음의 메시지는 한국교회 예배와 신앙생활의 중심이 됐던 것”입니다. 이처럼 소중한 한글임에도 근래 우리 사회의 한글 홀대는 선을 한참 넘어섰습니다. 온갖 은어, 비어, 속어, 정체불명의 약어와 합성어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물론 공공 방송에서조차 한글 규범 파괴가 거리낌 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분단 78년의 세월이 초래한 남북한 간의 언어 이질화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민족의 명절인 ‘설’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남북이 함께 기념하는 절기가 점차 사라지는 추세에서 ‘설날’은 지금까지 우리 겨레가 공유하는 몇 안 되는 명일(名日)입니다. 궁극적인 ‘남북통일’은 단순한 ‘제도적 통일’을 넘어 ‘사람 간의 통합’에까지 이르러야 완성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시풍속의 존속과 공유는 통일 여정에서 의미 있는 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언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말과 글은 다름 아닌 생각과 정신의 반영입니다. 따라서 동일한 말과 글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민족공동체로서 기본적 공감대의 토대가 이미 마련돼 있음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이 기반이 더이상 허물어지지 않도록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남북한 언어 이질화의 방지 대책이 시급히 강구돼야만 할 것입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한글은 빛나는 우리의 문화 자산입니다. 겨레의 보물인 우리말, 우리글을 바로 지키고 가꾸어 나가기 위해 온 국민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특히 크리스천들은 성경을 사랑하는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과의 귀중한 소통 매체인 한글에 대해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합니다. 한 나라의 언어가 역사와 문화의 창고를 여는 관건이듯이 성도들에게 한글은 은혜의 보고인 성경을 여는 소중한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 2023.01.1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카타르의 낭보
  • 2002년 한·일 월드컵은 한국 사회를 그 이전과 이후로 구분 짓는 의미 있는 분수령이 됐습니다. 사실 한국 축구대표팀은 1954년 제5회 스위스대회에 첫 출전한 이래 다섯 번이나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음에도 단 1승을 거두지 못하고 있던 형편이었습니다. 하지만 6월 4일 첫 경기에서 폴란드를 2대 0으로 꺾은 후 강호 포르투갈, 이탈리아, 우승 후보 스페인까지 연달아 격파하며 4강에 오르는 대이변을 연출했습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 기간 모두에게 축구는 ‘그냥 축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팀의 경기를 매개로 빨간색 티셔츠를 입은 수백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광장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춤추고 함께 함성을 질렀습니다. 세계적 명물로 자리 잡은 자생적 ‘길거리 응원’의 시작이었습니다. 한국 축구의 4강 신화에 세계가 놀랐지만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우리 스스로였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자신감, 동시대를 살아가는 국민적 유대감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가 됐습니다. 이 열기는 IMF 경제위기 극복, 폭발적인 참여민주주의 확대, 창발적인 한류 문화 확산으로 이어지며 우리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2022년, 제22회 카타르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은 또 한 번의 기적을 일구어냈습니다. 통계전문가들의 ‘16강 진출 가능성 9%’의 예측을 여지없이 깨뜨린 이 반전 드라마는 투철한 ‘원팀 정신’으로부터 비롯됐습니다. 파울루 벤투 감독을 위시한 코치진과 27명의 선수들이 똘똘 뭉쳤습니다. 그 결과 경기장을 종횡무진 누비는 한국형 ‘빌드업 축구’가 가능했고, 어떤 팀과 맞붙어도 밀리지 않는 강인한 뚝심이 발휘될 수 있었습니다. 구성원들 간의 신뢰 역시 돋보였습니다. 특히 주장 손흥민 선수의 리더십은 발군이었습니다. 그는 월드컵을 3주 앞두고 소속팀 경기에서 당한 안와골절로 안면 보호대를 착용한 채 전 경기를 소화했습니다. “불편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3년간 마스크를 쓰고 계신 국민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고 의연히 대답했습니다. 개막 전 “단 1%의 가능성이 있어도 앞만 보고 달려가겠다”며 부상 투혼을 예고했던 그는 약속대로 “몸이 부서지도록” 뛰었습니다. 실제로 H조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벼랑 끝에 몰렸던 한국팀은 후반 추가시간 손흥민-황희찬으로 연결된 극적인 역전 골로 포르투갈에 2대 1 승리를 거두며 16강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16강전 진출이 확정된 직후 권경원, 조규성 선수는 관중에게서 건네받은 태극기를 펼쳐 들었습니다. 그 안에는 눈길을 사로잡는 뚜렷한 한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본래 프로게이머 김혁규 선수가 7수 끝에 세계 대회를 제패하며 했던 이 말은 다시 새롭게 부각되며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우선 대회 내내 보여준 대표팀의 모습이 압축된 표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흔들리는 이 세대에게 던지는 속 깊은 응원의 뜻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정 우리 팀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선제골을 허용하고도 위축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불퇴전의 투혼으로 국민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2022 카타르 월드컵 기간 특별히 우리 팀의 경기가 열렸던 13일간 축구 덕택에 대한민국은 모처럼 하나가 됐습니다.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도전하는 선수들의 모습은 모두에게 커다란 감동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대표팀의 선전은 코로나 블루, 경제 한파, 잦은 사회적 갈등으로 침체돼 있던 한국 사회에 심기일전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어느덧 한 해의 끝자락에 섰습니다. 또 한 번의 ‘송구영신’의 시간을 맞으며 영혼과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을 때입니다. 성경은 신앙생활을 경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우리 선수들이 월드컵 스타디움을 뛰고 달렸듯 성도들도 인생의 경기장을 달음박질하고 있습니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경주자처럼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저마다의 목표를 향해 인생행로를 달려가고 있습니다. 한없이 감사한 것은 이 신앙 노정에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해 주신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저희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한 스타플레이어로 여겨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는 말씀대로 열렬한 서포터가 돼 뜨겁게 응원해 주십니다. 독자 여러분! 다사다난했던 지난 한 해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신발 끈을 고쳐 매고 힘을 내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스타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영원한 팬이 되어주십니다. 다가오는 2023년 새해, 예수님 안에서 항상 승리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 2022.12.1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새책소개
    2024년 『감사QT365』 하루 한 장으로 하나님과 동행
  • 매일 통독, 말씀 묵상, 말씀 필사, 감사 쓰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절대긍정, 절대감사하는 새해를 계획했다면 『감사QT365』 2024년 판을 추천한다. 이번에 발간된 『감사QT365』는 감사와 QT, 필사가 어우러져 일 년 동안 매일의 삶을 말씀으로 채우고 영적 성장에 힘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구성했다. 특히 이 책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돕기 위해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집필됐다. 본문을 예화 중심이 아닌 말씀 중심으로 편성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은혜로운 예화를 선별해 요약했다. 더불어 성경 말씀을 필사할 수 있는 지면과 말씀 묵상의 적용을 돕기 위한 질문을 추가했다. 또한 매달 시작점에 월별 계획표(monthly plan)를 수록해 매일 성경통독 진도를 표시할 수 있도록 했다. 이영훈 목사의 감사 목회 철학이 체험적으로 녹아 있는 365편의 묵상의 글과 은혜로운 예화들을 매일 읽고 ‘나의 감사’란에 주님께 감사할 제목들을 적어 나가다 보면 저절로 감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이영훈 목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묵상한 말씀대로 살아가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2023.12.15 / 복순희 기자

    『성경과 기독교 진실성 파헤치기』(제1권: 구약시대) (제2권:신약시대)
  •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그의 죽음과 부활로 탄생한 기독교가 우주 만사의 정답이 된다. 혼란한 시대를 사는 인생들에게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다.” 이기창 공로장로(반석대교구)가 『성경과 기독교 진실성 파헤치기』(제1권: 구약시대) (제2권:신약시대)를 펴냈다. 저자는 이 두 권의 책을 통해 기독교의 교리와 성경기록은 합리적이며 과학과도 합치하며 오히려 과학을 초월하고 있음을 깊이 있게 분석해 성경과 기독교의 진리성을 논증했다. 이 책은 신, 구약 성경 전체의 핵심 내용을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관통하면서 심도 깊게 해설하고, 기독교 교리와 신앙, 신학적 논리와 이론 및 사상, 우주의 창조로부터 역사, 종말 및 미래 발생할 일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세계관을 다루고 있다. 과학자인 저자는 과학과 철학의 논리로 신의 존재로부터 우주 만물 전체를 물질우주와 정신우주로 균형있게 조망하면서 과학-철학-신학을 통섭해 교집합의 우주론을 밝혀낸다. 이런 방식으로 저자는 인류의 궁극적이고 영원한 질문인 우주, 물질, 영혼, 생명, 죽음, 사후생, 세상종말 등 빅퀘스천 규명을 추구해 나간다. 응용과학인 전자통신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공과대학 정교수를 역임한 이기창 공로장로는 교수 은퇴 후 10년간 물리학, 철학, 신학, 역사 등 인문학 연구에 몰두해 이 책을 만들었다. 그는 현대물리학에서 발견한 빅뱅 우주론과 부합하는 종교를 엄밀히 분석, 조사해 성경에 기반한 기독교만이 현대과학과 부합하는 유일한 종교로서 진실성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책을 읽다보면 기독교가 공학, 물리학 등의 과학과 철학에 합치하는 유일한 종교이며 따라서 성경과 기독교는 ‘우주적 진리’라는 결론을 깨닫게 된다. 어디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몰라 방황하는 현대인에게 추천하는 필수 교양 인문서적이다.
  • 2023.04.07 / 이미나 기자

    성공에 이르는 12가지 지혜
  • - 이영훈 목사 지음 / 교회성장연구소 - 크리스천의 삶을 성공으로 이끄는 12가지 비결 이영훈 목사 “믿음으로 꿈꾸는 자는 반드시 해낼 수 있다” 이영훈 담임목사는 성공에 대해 “정성을 다해 원하는 목표를 이루어 낸 것이 바로 성공”이라고 말하고 있다. 더불어 “성공은 이루고자 하는 꿈과 목표를 가진 자, 그 꿈과 목표를 향해 올바른 방법을 가지고 성실하게 노력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인생의 열매”라고 전한다. 이영훈 목사는 2023년을 맞이하면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주 안에서 품은 꿈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하는 지 깨달은 바를 나누고 싶은 바람을 품었다. 그 바람은 신년 축복 열두 광주리 새벽기도회를 통해 ‘성공에 이르는 12가지 지혜’ 주제의 설교로 이어졌고 이 책은 이를 토대로 집필됐다. 혼란의 시대, 격변하는 세태 속에 모든 사람들은 예측할 수 없는 불안으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다. 이러한 때에 가정과 일터, 교회 등 삶의 영역에서 믿음을 지키고 성공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 중인 크리스천들에게 이 책은 온전한 믿음과 인생의 성공 비결을 알려주는 안내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주 안에서 품은 꿈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성공의 지혜를 12개의 주제로 다룬다. “꿈꾸는 자가 되라,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소유하라, 절대긍정의 믿음을 소유하라, 장애물을 뛰어넘어라,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건히 서라, 분명한 자화상을 가져라, 기도의 사람이 되라, 시간의 관리자가 되라, 자기를 계발하라, 삶의 자세를 바꿔라, 사명에 붙들려 살라, 존경받는 리더가 되라.” 이영훈 목사는 무엇보다 말씀 위에 굳건히 서서 믿음으로 꿈꾸는 자는 반드시 해낼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책에는 12가지 성공의 지혜와 방법을 체크 리스트와 함께 제시해 인생에서 회복해야 할 것을 찾아 바로잡도록 하며,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나은 미래로 도약할 수 있는 성공 다이어리도 적어보도록 구성됐다. 세상을 살아갈 용기와 삶의 터닝 포인트가 필요하다면 이 책을 따라 삶을 관조하고 재정비해보면 어떨까? 단호하지만 진정 어린 저자의 조언은 삶의 무게에 지친 그리스도인들에게 생각 전환의 기회를 만들어줄 것이다.
  • 2023.03.17 / 복순희 기자

    문화계 소식
    [영화 소개] 천성가는 밝은 길이
  • 사형수들의 아버지로 불렸던 박효진 장로의 간증을 토대로 제작한 ‘천성가는 밝은 길이’ 영화가 지난 4월 유튜브에 올라 큰 감동을 주고 있다. 박 장로는 전직 교도관 출신으로 사형수들에게 복음을 전한 전도자다. 그의 간증은 사형장에서 마지막을 맞이하는 사형수들의 처절한 영적 사투를 통해 복음의 진리와 영적전쟁의 메시지를 담고 있어 이번 영화가 성도들의 신앙생활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수많은 기독교 영화를 제작한 홍의봉 감독이 각색과 연출을 맡았다. 박효진 장로 역은 이경영 배우가 맡아 열연했고, 신인 김양균과 유라성도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였다. 임동진(목사), 한인수 장로, 정욱, 정선일 등의 중견 배우들도 특별 출연했다. 영화는 유튜브에서 제목 검색을 통해 볼 수 있다.
  • 2023.06.09 / 김주영 기자

    기독교 복음 영화 <기적을 믿는 소녀> 7월 5일 국내 개봉  
  • 전미 박스오피스 4주간 연속 TOP 10 하나님의 사랑과 진정한 믿음으로 감동 전해 하나님의 치유 능력과 사랑을 경험케 하며 대한민국에 진정한 믿음에 대한 경종을 울릴 기독교 영화 <기적을 믿는 소녀>가 오는 7월 5일 국내에 개봉한다. 전미 4주 연속 박스오피스 10위권 안에 들며 놀라운 흥행을 기록해 그 해 최고의 종교 영화로 떠올랐다. <기적을 믿는 소녀>는 기도로 믿음을 증명하는 어린 소녀를 통해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한 성도들이 믿음의 불꽃을 키워가는 엔터테이닝 복음 영화다. 가족과 함께 호수에 놀러 간 평범한 어린 소녀가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를 경험케 하며 눈길을 사로잡는다. 죽은 새와 강아지의 부활, 그리고 하반신 마비를 가진 친구가 다시 걷게 되는 등 하나님의 치유 능력을 목격한 믿음의 소녀를 통해 점차 변화해 가는 주변 인물들의 모습은 강렬한 울림과 함께 감동을 전한다. 겨자씨만큼 작은 믿음이 사람들의 삶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메시지뿐만 아니라 보는 내내 미소를 짓게 하는 스토리와 힐링을 선사하는 완벽한 케미스트리 등을 통해 종교인을 넘어서 일반관객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관람 후에는 “하나님을 믿고 간절히 기도하세요, 하나님은 듣고 계세요”라는 대사와 깊은 감동이 가슴에 남게 된다. 특히 <위대한 쇼맨> 오스틴 존슨부터 제68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미라 소르비노, 피터 코요테, 케빈 소르보까지 믿고 보는 최고의 배우들이 총출동해 막강 캐스팅으로 극의 완성도를 높여 이목을 집중시킨다. 한편, GOODTV 기독교복음방송(대표이사 김명전)에서는 개봉 전부터 <기적을 믿는 소녀> 교회 상영을 진행해 한국교회와 성도들로부터 눈물을 흘리며 회심하는 많은 기적의 역사를 체험했다고 밝혔다.
  • 2023.05.25 / 이미나 기자

    스마트폰 생활백서-저절로 성경일독
  • “스마트폰 켤 때마다 성경구절이 보여요!” 잠금화면 활용한 성경 묵상 앱 말씀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에게 매순간 단비와 같은 성경 말씀을 전달해 주는 앱이 있다. 바로 ‘저절로 성경일독’이다. 저절로 성경일독 앱은 스마트폰 화면을 켤 때마다 성경구절이 나타난다. 화면 중앙에는 성경 구절이, 하단에는 다음 구절로 넘어가는 화살표 기호와 북마크, 공유하기, 잠금해제 버튼이 있다. 화면에 나오는 성경 구절은 화면이 꺼졌다 다시 켜지면 다음 절로 넘어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부담 없이 성경을 일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앱에서는 말씀 공유 기능이 가장 눈에 띈다. 묵상하고 있는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면 그 자리에서 말씀 카드를 만들어 SNS로 즉시 공유할 수 있다. 이는 모바일 전도 도구로도 활용이 가능해 전도 대상자에게 유용하다. 성경은 개역개정, 개역한글, 현대어성경, 새번역과 영어 성경인 KJV, NIV, NLT 버전을 제공하고 있는데 한글과 영어 두가지 성경을 동시에 볼 수 있는 특징도 있다. 참고로 개역개정, 개역한글, KJV 성경은 오디오도 함께 제공된다. 저절로 성경일독 앱은 안드로이드기반(삼성 및 LG) 스마트폰에서 제공하는 구글 Play스토어에서만 서비스가 제공된다. 앱을 실행하면 광고가 나타나지만 조금의 불편을 감수하면 말씀을 묵상하고 공유하는데 지장이 없다. 또한 결제해야 이용할 수 있는 ‘읽기모드’는 우리 교회 앱 성경과 동일한 기능이므로 오랜 시간 성경을 읽을 때는 교회 앱을 활용할 것을 추천한다.
  • 2022.07.29 / 금지환 기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31. 후안무치(厚顔無恥) 시므이의 죽음②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솔로몬에 의해 죄의 대가를 받게 된 시므이 "왕이 사람을 보내어 시므이를 불러서 이르되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왕상 2:36~37) 3. 솔로몬의 숙청 작업과 시므이의 죽음 솔로몬은 왕이 된 후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한다. 숙청의 이유, 방법, 숙청당한 인물들만 보면 공포정치를 휘둘렀던 절대군주 못지않다. 숙청의 대상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였던 대제사장 아비아달, 다윗을 섬기며 충성을 다했던 군대사령관 요압, 그리고 자신의 형이자 왕자였던 아도니야까지 잠재적으로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다윗을 조롱했던 시므이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1) 아도니야 아도니야는 다윗의 네 번째 아들이었다. 다윗의 첫째 아들은 암논이었고, 둘째는 갈멜 여인 아비가일이 낳은 다니엘, 셋째는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가 낳은 압살롬, 넷째는 학깃이 낳은 아도니야였다. 솔로몬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서 열 번째쯤 된다(대상 3:1~5). 그런데 첫째 아들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였던 다말을 강간한 사건 때문에 압살롬에게 죽임 당했고, 압살롬은 반란 후 죽임을 당했다. 다윗의 첫째와 셋째 아들이 죽은 것이다. 둘째 아들 다니엘은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윗의 둘째 아들이었다는 기록 외에는 성경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 일찍 죽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다윗의 허락도 없이 스스로 왕이 되었음을 선포한다(왕상 1:5~11). 이때 다윗의 군대 사령관이었던 요압과 대제사장이었던 아비아달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다(왕하 1:7). 하지만 아도니야의 시도는 일일천하에 그쳤다. 솔로몬은 왕이 된 후, 제단 뿔을 잡고 목숨을 구걸하는 아도니야(왕상 1:51)를 살려주며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그것은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왕상 1:52). 하지만 아도니야는 다윗의 침실에서 수종을 들었던 수넴 여인 아비삭을 자신의 아내로 삼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솔로몬은 이것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아도니야를 처형해 버렸다(왕상 2:13~25). 2) 아비아달 아비아달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10번째 대제사장이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기약이 없는 망명길에 올라야만 했다. 이스라엘 땅에 많은 도시와 지역이 있었지만 다윗이 선택한 첫 장소는 대제사장이 있던 놉이었다(삼상 21:1). 심신이 지쳐있던 다윗은 아히멜렉의 도움으로 음식을 먹고 그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였던 골리앗의 칼을 얻었다(삼상 21:4~10). 사울은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와줬다는 것을 문제 삼아 도엑을 시켜 아히멜렉과 놉의 제사장 85명을 한 날에 살육했다(삼상 22:18). 이때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였던 아비아달만이 목숨을 건져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아비아달은 지체 없이 한걸음에 그일라에 있던 다윗에게로 향했다. 아비아달이 제사장의 영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에봇을 가지고 도망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삼상 23:6). 아울러 우림과 둠밈을 대제사장의 에봇 흉패 안에 보관하라고 되어 있기에 우림과 둠밈까지 가지고 온 것으로 볼 수 있다(출 28:30). 다윗은 이렇게 사선을 넘어 온 아비아달을 대제사장으로 삼았다. 그러나 솔로몬은 왕위에 오른 직후 아비아달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던 것 때문에 아비아달을 제사장 직분에서 파면시키고 그의 고향으로 내쫓아 버렸다(왕상 2:27). 3) 요압 요압이라는 이름의 뜻은 ‘야훼는 아버지이다’와 ‘야훼는 하나님이시다’는 뜻이다. 요압은 다윗과 함께 오랜 세월 전쟁터를 누볐던 군대 장관이다. 사울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이 되었고, 헤브론에서 이미 왕이 되어 있던 다윗은 피할 수 없는 전쟁을 하게 되었다. 기브온 전투는 다윗이 사울의 남아있던 세력과 벌인 최초의 전투이다. 이때 이스보셋의 장군인 아브넬과 다윗의 군대를 이끌던 요압이 맞붙게 되었다. 기브온 전투는 요압의 승리로 끝났지만, 요압의 동생 아사헬은 아브넬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요압은 이것에 대한 앙심을 품고 있었다. 한편 아브넬은 사울의 자손들과 다윗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종식하고 통일왕국을 탄생시키려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헤브론에 있던 다윗을 찾아와 평화의 조약을 맺고 통일왕국의 꿈을 향한 큰 걸음을 뗐다(삼하 3:8~21). 뒤늦게 이것을 알게 된 요압은 아브넬을 쫓아가 다시 헤브론으로 유인해 왔다. 그리고 그에게 조용히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속여 무방비 상태에 있던 아브넬을 살해했다(삼하 3:27). 성경 여러 곳에서 정치적 야망을 숨기지 못했던 요압이 평화적인 통일이 이루어진 후 모든 공이 아브넬에게 돌아갈 것을 걱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통일이 이루어진 후 자신의 입지가 약해질 것에 대한 염려와 전쟁 중에 죽은 동생의 원한을 한 번에 갚고자 벌인 일이었다. 다윗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모든 백성에게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큰 용사였던 아브넬이 죽은 것을 애도하도록 했다(삼하 3:31).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요압에게 묻지 않았고 어떤 벌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솔로몬은 달랐다. 표면적인 이유는 요압이 죄 없는 아브넬과 유다 군사령관이었던 예델의 아들 아마사를 죽인 것 때문이었지만(왕상 2:31), 실상은 요압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던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4) 시므이 솔로몬의 서슬이 퍼런 칼날은 그의 왕권을 위협할 현재와 미래의 잠재적 세력을 제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선대왕이었던 다윗이 살려 준 시므이를 향한 솔로몬의 마지막 경고이다. 솔로몬은 시므이의 목숨을 살려 주는 대신 절대 예루살렘을 벗어나지 말라고 경고했다(왕상 2:36~37). 왜 솔로몬은 베냐민 자손이고 바후림에서 터를 잡고 있던 시므이를 굳이 예루살렘 성에 붙잡아 두고 절대 떠나지 말라고 했을까? 사울의 친족이었던 시므이가 예루살렘을 벗어나 어떤 정치적인 행위나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과 다윗을 조롱했던 시므이에 대한 마지막 경고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므이는 이것을 너무나 쉽게 생각했다. 자신의 노예 두 명이 도망을 가자 솔로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벗어났다(왕상 2:39~40). 솔로몬은 브나야에게 명령을 내려 시므이를 단숨에 처형했다(왕상 2:45).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초라한 모습으로 피난길에 올랐을 때 그를 따라가며 조롱하고 멸시하고 저주를 퍼붓던 시므이였다. 하지만 압살롬에 의한 왕자의 난이 실패로 끝나고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선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바싹 엎드려 비굴한 모습을 보였던 사람이었다. 다윗의 아량과 은혜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시므이는 솔로몬에 의해 그의 죄에 대한 대가를 받게 되었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8.01 / 이상윤 목사 기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30.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시므이의 죽음①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책망으로 겸허히 받아들인 다윗 "왕의 가족을 건너가게 하며 왕이 좋게 여기는 대로 쓰게 하려 하여 나룻배로 건너가니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 앞에 엎드려 왕께 아뢰되 내 주여 원하건대 내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왕의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삼하 19:18~19) 사무엘하 15장과 19장은 후안무치한 시므이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무엘하 15장 30절은 다윗의 인생 중 가장 비참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왕이었지만 그의 몰골 어디에도 왕의 위엄과 기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때 다윗은 머리는 산발하고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초라한 모습으로 감람산 고개를 넘고 있었다. 다윗은 천 년의 시간이 지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으며 호산나를 외치던 길을 역방향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눈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방 나라의 왕이나 군사들에게 쫓긴 것도 아니다. 자신의 아들에게 잡혀 죽지 않기 위해 도망가는 신세였다. 압살롬은 아버지인 다윗이 예루살렘에 남겨놓은 10명의 후궁들과 공개적으로 성적인 관계를 맺었다. 다윗은 왕의 권위뿐만 아니라 친부로서의 자존감도 철저히 묵살되었다. 더 낮아질 수도 초라해질 수도 없는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다. 사실 압살롬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다윗의 셋째 아들이었던 압살롬은 가만히 있기만 해도 다윗을 이어 왕이 될 수 있었다. 다윗의 장남이었던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강간한 사건 때문에 이미 죽임을 당해 세상에 없었다. 다윗의 차남은 다니엘이다. 다니엘은 나발의 아내였으나(삼하 2:2) 나발이 죽은 후 다윗의 아내가 된(삼상 25:39~43) 갈멜 여인 아비가일이 낳은 아들이다(대상 3:1). 하지만 그의 이름 외에 추가적인 자료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압살롬이 죽은 후 다윗의 넷째 아들이었던 아도니야가 장남 행사를 한 것으로 보아(왕상 1:5~10) 다니엘은 일찍 죽었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의 장남과 차남이 죽은 상황에서 셋째 아들이었던 압살롬은 조금만 인내력을 가지고 기다렸으면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혀 반란을 일으켰다. 심지어 아버지 다윗을 죽여서라도 왕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압살롬의 반란은 처음에는 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헤브론에서 시작한 반란은 수도인 예루살렘 입성까지 파죽지세로 거칠 것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1. 다윗에게 저주를 퍼붓는 시므이 다윗이 예루살렘을 버리고 바후림을 지나고 있을 때 사울의 친족이요 게라의 아들이었던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기 시작했다(삼하 16:5). 다윗은 물론 그의 추종자들에게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고 저주를 퍼부었다(삼하 16:13). 자신을 그렇게 집요하게 괴롭히고 죽이려고 했던 사울에게 관용을 베풀었던 다윗이다. 그러나 사울이 죽고 난 이후에도 사울의 남은 자손들은 끊임없이 다윗을 참소하고 그의 왕권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다윗이 마음만 먹었다면 사울의 친족을 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친족들에게 많은 특혜와 은혜를 베풀었고 사울의 친족들은 대부분 죽음을 면했다. 그들의 토지나 소유권도 빼앗지 않았다. 이런 다윗의 은혜를 받았던 사울의 자손 중의 한 사람이 시므이다. 그렇게 살아남았던 시므이가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피난길에 오르자 저주를 퍼부었다. 비록 피난길에 올랐지만 전장을 누비며 무수한 공을 세웠던 장수들이 다윗과 함께 있었고 많은 백성이 다윗을 따르고 있었다(삼하 16:6). 시므이의 저주를 듣고 있던 다윗의 군대장관 아비새가 당장 가서 시므이의 목을 베어 버리겠다고 말한다(삼하 16:9).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해 극심한 모멸감에 시달렸을 다윗이다. 그래서 어딘가에 분풀이라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시므이는 더없이 좋은 화풀이 대상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시므이의 목숨을 취하지 않는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책망으로, 또한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고난이 은혜로 바뀌는 전환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므이의 생명을 뺏지 않고 그가 퍼붓는 저주를 묵묵히 참아냈다(삼하 16:11). 2. 급변한 시므이의 태도 다윗이 가장 힘들었을 때, 조롱과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의 태도는 압살롬이 죽고 왕자의 난이 정리된 이후 급변한다. 압살롬이 죽자 제사장들과 신하들은 서둘러 다윗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키는 일을 진행한다(삼하 19:11~12). 다윗은 피난을 왔던 길을 따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예루살렘을 빠져 나올 때 시므이가 저주를 퍼부었던 바후림에 이르렀다. 바후림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4㎞ 정도 떨어진 곳이라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시므이는 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귀환 행렬이 바후림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무엘하 19장 16~18절은 이때 시므이가 취한 행동을 이렇게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1) 유다 사람들과 동행(삼하 19:16) 사울의 혈육으로 베냐민 지파였던 시므이는 급히 유다 사람들과 다윗을 맞으러 나간다. 다윗의 피난 행렬을 쫓아가며 돌을 던지고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에게서 다윗에 대한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다윗이 다시 바후림에 왔을 때 그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2) 시므이의 세력(삼하 19:17) 사무엘하 19장 17절은 사울이 죽은 후 시므이가 어떻게 세력을 키우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다윗을 맞으러 나올 때 시므이는 신변의 위협을 느꼈는지 자기의 모든 세력을 데리고 나온다. 베냐민 사람 1000명과 열다섯 명의 아들, 종으로 부리고 있던 하인 스무 명을 대동했다. 시므이는 호시탐탐 사울 왕조의 재건을 꿈꾸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 고대 근동에서 개인이 이 정도의 규모를 유지하고 운영할 이유도 없다. 3) 용서를 구하는 시므이(삼하 19:18~20) 시므이는 요단강을 건너려고 하는 다윗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한다. 시므이가 특별히 구하고 싶었던 것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나오던 날에 저질렀던 패역한 일'에 대한 용서였다(삼하 19:19). 그가 다윗을 쫓아가며 했던 저주이다. 이 말을 들은 아비새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인 다윗에게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를 살려 둘 수 없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당장 시므이를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삼하 19:21). 이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한 개인이 아니라 정치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시므이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사울의 남은 세력들의 잠재적 위협 요소를 제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시므이를 용서하고 그의 생명을 살려주는 아량을 베푼다(삼하 19:22~23). 다윗은 자신이 시므이를 용서하는 것으로 더는 피를 흘리지 않고 모든 것을 덮고 이 문제를 일단락 지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시므이의 문제는 다윗이 죽은 후 솔로몬에게까지 이어진다. (다음 호에 계속)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7.04 / 이상윤 목사 기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29. 기브온 족속과 사울 왕조의 얽히고 설킨 이야기(Ⅱ)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과 은혜, 화해와 용서 안에서 이뤄져야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그들은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그들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그들에게 물으니라"(삼하21:1~2) 2) 기브온족의 이스라엘 편입 가나안 족속의 종교 혼합주의, 쾌락주의, 윤리적 타락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과학적인 지식이 없었던 시대에 기이한 자연적 현상들은 다신론적 맹신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유대교는 손쉬운 다신론이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 유일신 사상을 갖고 있었다. 유일신 사상은 인간의 감성이나 종교적 편의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율법에 기록된 내용과 방식대로 종교적 행위가 이루어져야 했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한 삶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쾌락주의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아주 쉽게 유혹으로 이끌어 갔다. 그 결과 거룩한 삶은 죄 된 삶으로 쉽게 바뀌었다. 이런 위험에 노출되고 나중에는 헤어날 수 없게 될 것을 아셨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한 것은 가나안 족속과 근원적인 단절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기브온족에게 속아 조약을 체결했다. 그것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이방 족속의 방식대로 계약을 체결했다. 조약 자체도 문제였지만 방법과 절차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고대 근동의 전통에 따라 기브온 사람의 음식을 취하는 방식으로 평화 조약을 맺었다(수 9:15). 서로 먹고 마시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평화의 조약이 이루어졌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기브온족에게 속고 있었다. 성경은 기브온과 체결한 계약 방식이 '그들(기브온 사신)의 양식을 취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수 9:14). 기브온의 사신들이 갖고 온 음식은 곰팡이가 핀 일반적으로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는데 어떻게 이것을 먹을 수 있었을까?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첫째, 계약 체결을 위해 곰팡이가 난 양식의 일부를 실제로 먹었다는 것과 둘째, 그냥 양식을 취하기만 하고 먹지는 않았다는 해석이다. 지금이라면 당연히 곰팡이가 난 음식을 먹지 않았겠지만, 근동 지방의 관습을 고려할 때 계약 체결의 완성을 위해 곰팡이 피지 않은 쪽의 음식 일부를 떼어 나눠 먹었을 가능성이 크다. 음식을 먹고 안 먹고의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기브온 족속과 계약을 체결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수장이었던 여호수아는 기브온족을 죽이지 않고 살리겠다는 조약을 맺었고 이스라엘 지파의 족장들도 모두 동의했다(수 9:15). 그러나 그들이 저지른 엄청난 실수를 깨닫는 데는 3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계략에 넘어간 것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체결했기에(수 9:18) 다시 바꿀 수 없었다. 속임수까지 써가며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했던 기브온 사람들은 그들의 소원대로 이스라엘 민족에 동화되었고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사울 왕 때 완전히 유린당하였고 기브온족 전체가 몰살당할 위기에 처하게 됐다. 2. 역사를 왜곡하는 사울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라는 영예를 안았으나 여러 번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행동을 했다. 여호수아는 기브온족을 살려 하나님의 제단을 위해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자들로 삼았다(수 9:27). 이런 기브온족의 삶은 비록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며 헌신 된 삶을 살았기에 선교적인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구약의 역사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정이야 어쨌든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민족에 편입돼 성전을 섬기며 살아오던 기브온족이었는데 사울왕이 갑자기 그들을 말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 성경은 사울이 이런 일을 계획하고 실행한 것은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삼하 21:2). 이 사건은 기브온 족속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성경은 사울이 언제 얼마나 많은 기브온 사람을 죽였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무엘하 21장 5절은 사울이 기브온족을 '학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칼라누'이다. 이 단어의 뜻은 '끝내다'(finish), '완성하다'(accomplish)는 의미이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 한두 명을 죽인 것이 아니라 기브온족 전체를 말살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고 실제로 실천에 옮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고한 기브온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사울과 다윗의 왕권 교체와 맞물려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완전히 묻혀 버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것을 잊지 않으셨다. 다윗왕 때 3년 동안의 큰 기근이 발생했다. 다윗은 계속되는 가뭄이 무엇 때문인지 알기를 원했고, 하나님께서 사울이 흘린 기브온 사람들의 피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삼하 21:1). 3. 솔로몬의 재판에 비할 다윗의 판결 왕위에 오르기 전, 사울은 한없이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보좌에 오른 뒤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사울은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 기브온족도 마찬가지였다. 피의 순수성을 강조하며 이방 족속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일부 백성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고 있던 기브온족을 완전히 말살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다윗이 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다윗은 왕으로 등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바로잡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다윗은 사울왕 때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울의 때 뒤틀렸던 역사와 공의를 다윗을 통해 다시 바로 세우기를 원하셨다. 성경에 기록된 재판 중에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두 판결은 솔로몬의 판결과 다윗의 판결일 것이다.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한 아기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다투던 두 여인에 대한 솔로몬의 판결(왕상3:16~28)은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판결 중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솔로몬의 판결과 같이 지혜가 번뜩이는 판결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게 한 것이 다윗의 판결이다. 1) 피해자 중심의 판결 다윗은 먼저 기브온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결해 줬으면 좋겠냐'고 묻는다(삼하 21:3). 일방적인 행정명령이나 법 집행이 아니라 피해자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기브온 사람들은 자신들을 살육하는데 가담했던 모든 사람을 벌해 달라고 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 민족을 학살하는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사울의 아들 7명을 내어 달라고 요구한다(삼하 21:6). 사울의 일곱 아들은 한날에 기브온 사람들에 의해 목매달려 죽었다. 그런데 여기서 기브온족의 모든 원한이 풀리고 3년 동안 기근으로 고통을 받던 땅에 비가 내린 것은 아니다. 2) 화해의 판결 비록 죄 없는 기브온 사람을 학살하는 일을 기획하고 실행했다가 그 벌로 죽은 사울의 아들들이었지만 다윗은 목이 매여 죽은 이들의 시체를 거둬들인다. 그리고 사울과 요나단의 뼈와 함께 그들의 할아버지이며 사울의 아버지인 기스의 묘에 가족장으로 합장을 한다. 이렇게 다윗이 죽은 사울의 아들들을 위해 장사 지내는 것을 마쳤을 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삼하 21:14).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것은 단순히 원한과 억울함을 푸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과 은혜, 화해와 용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다윗이 사울의 아들들의 시체를 거둬들여 가족묘에 장사지낸 것처럼,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긍휼함이 공의 가운데 있어야 한다. 사무엘하 21장에 기록된 기브온족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얽히고 설킨 사건은 하나님의 언약과 공의, 공의가 실현된 이후의 화해와 용서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단편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6.06 / 이상윤 목사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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