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기사
‘성경학교’ 대면 교육 재개…2020~2023 새가족들 등록비 무료
  • “올 봄 성경교육 함께 들어요”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봄에 시작되는 성경 교육은 특별하다. 봄은 생명력이 넘치는 계절로 각오와 다짐을 새롭게 하기에 충분하다. 국제신학연구원 교육연구소에서 2023 봄학기 성경교육생을 3월 5일까지 모집한다. 국신원에서는 성경학교, 성경대학, 성경대학원, 신학아카데미의 단계별 교육을 제공하며, 특별히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4년 만에 제직필수과정인 ‘성경학교’의 대면 교육을 재개한다. 이로써 신학아카데미와 성경대학원에 이어 성경학교까지 온·오프라인으로 진행하게 되어 수강자들의 선택의 폭이 한층 넓어졌다. 우리 교회 성경교육은 1979년 <평신도성경학교> 개설로 시작되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역사와 전통을 가진 체계적인 성경 교육 프로그램이다. 그중 가장 기초 교육인 성경학교에서는 성경 신·구약 66권의 전체 내용을 수업해 성경 말씀의 전반적인 내용을 가르친다. 온라인 환경에 익숙지 않아 그동안 성경학교를 이수하지 못한 2020~2023 새가족들(교구장 확인서 필요)을 위해 등록비를 받지 않는다고 하니 제직필수과정을 이수할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더 좋은 소식은 성경학교 ‘졸업시험’ 제도가 사라진다. 성경학교는 학기 당 결석 3회 이하, 과제물 제출 3회(1차 과제-6주차/2차 과제-11주차/3차 현장 과제-18주차)를 완료하면 졸업이 가능하다. 졸업시험 때문에 부담을 갖고 도전하지 못했다면 이제 한결 편한 마음으로 교육에 등록해 신앙을 꾸준히 성장시켜나가자. 총 4년 동안 성경학교부터 신학아카데미까지 들으며 큰 은혜를 받았다는 박정창 집사(성경대학원 소망반 반장)는 “교구에서 남성 구역장이 되었는데 말씀을 모르면 안 될 것 같아서 성경 공부를 시작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면 강사들이 말해준 사례가 생각이 나고 말씀이 삶에 적용이 됐다”면서 “신앙의 연수에 상관없이 많은 성도님들이 등록해 매일 말씀의 만나를 먹고 은혜를 나누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최연희 권사(성경대학원 믿음반 찬양팀장)는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말씀을 배워나갈 때 너무 재밌어서 시간가는 줄 몰랐다. 공부하면서 기도도 많이 하게 되어 신앙도 성장했다”고 말했다. 올봄 성경교육에 참여해 말씀이 레마로 다가오는 벅찬 감격을 누려보자.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날 때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생명력처럼 강인한 말씀의 생명력이 우리를 회복시켜줄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 2023.02.17 / 김주영 기자

    2023년 설 가정 예배
  • 부족함이 없는 새해 사람들은 새해가 되면 새로운 희망과 기대를 품습니다. 우리는 지난 3년간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인한 경기침체와 물가상승 등 불안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2023년 계묘년(검은 토끼의 해)의 새 아침이 밝았습니다. 우리는 주변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토끼의 해인 만큼 올 한 해가 풍성하고 복된 날들이 될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검은 토끼’가 무슨 힘이 있어서 우리에게 풍성한 복을 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참된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1. 목자 되신 하나님 시편 23편 1절에서 다윗은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목자로, 자신을 양으로 비유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목동으로서 양을 돌보았던 그는 목자와 양의 관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양은 사나운 들짐승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게다가 방향감각도 무뎌서 스스로 집을 찾아가지도 못합니다. 금세 자라고 더러워지기 쉬운 털은 목자의 돌봄이 없으면 이리저리 엉겨 붙어서 양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양은 스스로 살기에는 너무나 약한 동물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우리 인간이 양과 같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6). 우리도 양같이 한없이 연약한 존재입니다. 사탄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낼 능력이 없고, 영적인 방향감각도 무디기가 짝이 없습니다. 우리의 영은 죄와 허물로 인해 쉽게 더러워지고 위태로워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무력한 양이라 할지라도 목자를 만나는 순간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목자가 있는 양은 사나운 들짐승들로부터 보호받고 안전하게 인도받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목자 되신 하나님을 만나면 평안하고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해에는 우리 모두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모셔들이는 삶에 최고의 목표를 두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2. 인도하시는 하나님 시편 23편 2절에서 다윗은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목자가 하는 일은 양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여 배불리 꼴을 먹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목자이시고 우리가 양이라면, 푸른 풀밭의 꼴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는 우리의 심령을 배부르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의 양식이며 세상을 이기게 하는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목자는 양들을 쉴만한 물가로 인도합니다. 양은 그 쉴만한 물가에서 물을 마시며 생기를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르시는 양 된 우리에게 ‘쉴만한 물가’는 어디입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십자가 밑이 바로 우리의 ‘쉴만한 물가’입니다. 그곳에 죄 사함과 의의 강물이 넘쳐납니다. 그곳에 성령 충만과 축복과 치료의 강물이 넘쳐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 그늘 아래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 아래에 있을 때 죄와 사망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2023년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이 힘을 얻고 날마다 새로워지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3. 소생시키시는 하나님 시편 23편 3절에서 다윗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우묵하게 파인 곳에 눕기를 좋아하는 양은 눕다가 잘 넘어지곤 합니다. 그런데 뒤집힌 양은 일단 혼자 일어서지 못해 버둥거립니다. 뒤집힌 양은 맹수들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되는 등 위험에 처하기 쉽기 때문에 목자는 뒤집힌 양을 바로 가서 일으켜 세워줍니다. 이렇게 뒤집힌 양을 일으켜 세워주는 것이 ‘소생시키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질병, 실패, 상처 등으로 절망하고 넘어질 때마다 우리를 소생시키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를 만나더라도 우리는 목자 되신 주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사야 55장 6~7절은 “너희는 야훼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야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새 힘을 공급받고, 나아가야 할 의의 길을 찾게 될 것입니다. 새해에도 우리가 참 목자 되신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 살면,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며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는 복을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로 참된 평안과 풍요를 누리는 2023년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3.01.1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2023 신년인터뷰] 김천수 장로회장
  • 낮아지고 섬기는 장로회 될 것 절대긍정 절대감사로 청지기 사명 감당 1. 2023년은 우리 교회 창립 65주년입니다. 장로님과 제직들에게 당부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나요? 지금은 교회 창립 70주년을 앞두고 교회 부흥을 위해 힘찬 도약을 이뤄야 할 때입니다. 장로들과 전 제직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곳곳에 전파해 세상을 위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예배가 살아나고 기도가 회복될 수 있도록 장로들이 앞장서 성도들을 섬기고 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 부흥의 파도를 타고 있는 우리 교회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할까요? 담임목사님께서 올해를 ‘부흥의 원년’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이제 곧 코로나19가 종식되고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놀라운 부흥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장로회는 더욱 낮아져서 먼저 다가가고 섬기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7대 기관이 협력하고 하나 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선교와 섬김의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하겠습니다. 3. 교회의 변화와 발전을 위해 어떤 것들을 하고 계시나요? 교회 공간 재조정에 솔선해 장로회 예배실을 벧엘성전으로 바꾸었으며 다른 공간들도 효율적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구역 활성화와 대교구 3040부흥을 위해, 다음세대인 청장년층 부흥을 위해 각 담당 장로들과 꾸준히 소통하며 정기적으로 회의하고 이영훈 담임목사님과 정기적으로 워크숍을 갖고 있습니다. 4. 장로회는 2023년 어떤 사역에 가장 중점을 두고 계시나요? 장로회를 비롯해 전 제직들은 섬김과 나눔에 앞장서시는 이영훈 담임목사님의 뜻을 따라 세상을 향한 사랑 실천에 온 힘을 기울이도록 하겠습니다. 각 교구에서 소외되고 도움이 필요한 성도는 없는지 늘 확인하고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성도들을 돌보는데 힘쓸 것입니다. 서로 연합하여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새로운 부흥을 이루어 가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5. 장로회장님은 새해 어떤 비전을 갖고 계신지요? 교회가 크게 부흥하고 성도들이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장로들이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고 함께 기도하며 성령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 되길 소망합니다. 절대긍정, 절대감사로 청지기의 사명을 감당하는 장로회가 되겠습니다. 정리=이미나 기자
  • 2023.01.06 / 이미나 기자

    Hello, Israel
    우리가 오해하는 이스라엘 이야기②-반유대주의…오해 속에 자라난 미움과 박해의 역사Ⅰ
  •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시 109:1~3). 셰익스피어의 소설 ‘베니스의 상인’에는 유대인 상인이 등장한다. 샤일록이라는 상인은 아주 잔인한 고리대금업자로 돈을 빌려주는 대신 못 갚은 안토니오의 심장 옆 살을 1파운드 베어내겠다는 계약을 하게 된다. 그리고 샤일록은 지혜로운 재판관에게 혹독하게 당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는 대표적인 유대인들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반유대주의적 배경에서 나오는 이해라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장 많이 언급하면서도 많은 분들이 불편해 하는 이야기가 바로 반유대주의에 대한 이야기이다. 많은 분들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자는 과소평가하는 것이 반유대주의에 대한 것이다. 반유대주의는 앞선 글에서 이야기한 시온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현대 기독교 시온주의 안에서도 반유대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기 때문에 우리는 한번쯤 곱씹어 봐야 하는 이야기이다. 반유대주의에 대한 이해가 조금 생기면 현대 이스라엘 사회와 국제 사회 안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이해를 하는데 조금 도움이 될 수 있다. 반유대주의란 무엇일까? 이에 대한 정의는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홈페이지에 아주 잘 나와 있다. “반유대주의란 유대인에 대해 맹목적인 적대감을 보이는 특정 인식을 말합니다. 반유대주의는 유대인 뿐 아니라 그들의 재산과 관련된 기관, 종교 시설, 심지어는 유대인과 관계를 맺은 비유대인을 대상으로 하기도 하며, 이 증오심은 이스라엘 국가를 향해 나타나기도 합니다.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이 인류(HUMANITY)를 해하려는 음모를 가지고, 세계 언론과 경제를 조종하고 있다고 믿으며 그로 인해 반유대주의자들은 세계 정치, 사회적 문제의 책임이 유대인에게 있다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이런 잘못된 인식은 각종 연설이나 글, 시각적 자료와 부정적 고정관념, 직접적인 행동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출처: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반유대주의를 영어로 안티세미티즘(Anti-Semitism)이라고 하며 이는 유대인을 셈족의 대표성으로서 인정하면서 유대인들을 반대하는 흐름을 이야기하고 있다. 역사 속에서 대표적인 반유대주의적 사건은 20세기에 있었던 홀로코스트 사건이 대표적이다.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사건을 언급하면서 반유대주의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불편한 시각이 있다. 그런 학살이 유대인들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며 역사적으로 지역적으로 그와 유사한 학살과 박해 그리고 차별의 역사는 존재했다고 이야기한다. 아시아인들과 아프리카인들에게 행해졌던 노예무역과 차별정책 그리고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인종차별주의가 바로 그런 것들이라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반유대주의가 비단 근·현대 사회에서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지난 2000년의 역사 가운데 민족적 박해와 미움의 형태로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혹자가 말하듯이 역사 속에서 차별과 박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 민족에 대한 지속적인 차별과 박해는 유대민족에게만 있는 비극적인 것이다.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은 예수님이 사시던 2000년 전만이 아니라 성경의 역사 속에도 계속적으로 등장했다. 반유대주의는 위의 정의에서 언급한 것처럼 유대인들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만들려고 하는 배경에서 시작됐다. 성경 속에서도 히브리인들을 두려워한 애굽의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하기 위해서 어린 아이들을 죽였던 예도 있다. 반유대주의적 흐름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기독교의 인물들을 통해서도 언급됐다. 서신서들 속에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있었던 갈등을 언급하고 있다. 그 안에서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비하하고 비판하는 것을 바울은 경고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더욱이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부터는 더욱 더 노골적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비하와 비판 그리고 박해가 두드러지게 드러나기도 했다. 성 어거스틴은 유대인들을 돼지에 비유하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이라고 매도했다. 또한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나 칼뱅도 유대인들을 미워하거나 비판하고 매도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교회사에서는 이를 가르치지 않거나 가르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 민족에 대한 종교적 그리고 민족적 탄압은 유럽의 역사 가운데 확연히 드러나 있었다. 폴란드 바르사뱌에 가면 폴란드 유대인 역사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은 폴란드 유대인들의 역사와 함께 왜 수많은 유대인들이 폴란드에서 살게 되었는가를 밝혀주고 있다. 그 배경에는 유럽 내에 만연한 빈유대주의와 유대인 박해가 그 저변에 깔려 있었다. 우리는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들이 역사 속에서 당한 반유대주의에 따른 고통과 박해의 시간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다음편에 계속> 김요셉 목사
  • 2023.03.17 / 김용두 기자

    우리가 오해하는 이스라엘 이야기①- 시온주의의 탄생 …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
  •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시 43:1~2). 20세기 역사 가운데 커다란 전쟁이 2번이나 있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의 열강의 구도가 탄생하였다. 그 가운데 탄생한 이스라엘 국가는 세계 역사 가운데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남겨두게 된다. 1948년 현대 이스라엘 건국 후 수많은 논쟁들이 계속되어 왔다.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이 땅과 관련된 분쟁과 또 유대인들에 대한 존재성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이 복잡한 역사를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에 대한 역사적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크게 두 가지를 이야기 할 것이다. 하나는 시온주의에 대한 이해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반유대주의이다. 시온주의는 이스라엘을 이야기하면서 많이 거론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국가의 설립이 시온주의 바탕에서 시작되었다. 시온주의는 일반적으로 유대민족주의에 대한 정치적 이념이라고 정의된다. 이것은 19세기 말에 등장하여 유대국가론을 주장한 테오도르 헤르쩰에 의해서 정립된 정치적 사상이자 이념이다. 시온주의는 시온향 혹은 시온사상이라는 유대 민족이 가진 정서적 향수라고 볼 수 있다. 2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고향 땅을 떠나 떠도는 신세가 된 유대민족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은 가고 싶지만 쉽게 갈 수 없는 땅이 되었다. 그 사이 역사 가운데 로마제국 시대에 유대 사마리아 땅에서 쫓겨나 온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들의 소원은 고향 땅으로 돌아가 다시금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매년마다 각자가 사는 곳에서 유대교의 절기를 지키면서 외쳤던 구호가 “내년은 예루살렘에서!”이다. 자신들의 절기를 고향인 이스라엘에서 지키는 것이 그들의 간절한 소원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에서 접한 문화와 양식을 통해서 그런 갈망들을 표현하였다. 그것이 음악이 되고 문학이 되고 시가 되고 그림이 되었다. 이런 시온향(시온을 그리워하는 향수적 표현)들이 14세기에서 18세기 유럽의 문화 속에서 드러나게 되고 그런 흐름들이 시온주의적 문학 혹은 시온주의 정서로 표현되었다. 이 당시까지 드러난 시온주의는 정치적 성향보다는 정서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민족주의 운동의 여파가 유대인들에게도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유럽 민족주의 운동은 각각의 민족들이 고유성과 문화적 특성들을 주장하면서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국가들 안에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민족주의 운동은 그동안 유럽 국가들 안에서 융화되어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오게 된다. 불과 어제까지 같이 공부하고 함께 사업을 하던 사람들을 유대인으로 분류하고 차별하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세기 프랑스에서 있었던 드뢰퓌스 사건이다. 프랑스의 장교였던 알프레드 드뢰퓌스가 간첩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된다. 이는 프랑스 군 전체가 외면한 사건으로 프랑스 전체가 들썩이는 스캔들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드러난 것은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누명을 써도 괜찮다는 프랑스 군부와 정치인들의 생각이었다. 어차피 프랑스인이 아니기에 당연하다는 식의 결론은 그 당시 유럽의 유대인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을 취재하게 된 테오도르 헤르쩰은 이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고 난 후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는 철저한 동화주의자로서 유대인이라는 정체성과 상관없이 각자가 사는 나라에서 잘 융화되어 살면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해서 헤르쩰은 유대인들이 유럽에서 유대민족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립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일명 유대국가론에 등장하는 유대민족주의가 바로 그것이며 이것이 현대 시온주의를 대표하는 것이 된 것이다. 헤르쩰은 자신의 저서인 유대국가론에서 유대민족은 어느 곳에 있든지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외면하고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피력하였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더욱 자신들의 유대적 정체성을 확고히해야 하며 유럽을 떠나 자신들만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국가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전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유대국가의 탄생을 꿈꾸게 된다. 이를 위해서 헤르쩰은 유럽 전역을 다니면서 그동안 흩어져 있던 다양한 시온주의 운동들을 통합하고자 노력했다. 그 가운데 그가 가장 전념했던 것은 바로 언어와 문화 그리고 종교적 바탕을 시온주의 중심으로 끌어당기는 것이었다. 결국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첫 시온주의 대회가 열리게 되고 시온주의는 유대민족주의로서 그 의미를 선포하게 되었다. 이런 시온주의의 배경에는 우리가 또 알아야 하는 아주 중요한 역사적 요소가 있다. 바로 반유대주의이다. <다음편에 계속>
  • 2023.02.17 / 김용두 기자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며…현대 이스라엘을 생각해 보다
  • 2023년도 새해가 밝았다. 지난해는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팬데믹의 공포 속에서 벗어나 조금씩 일상으로의 회복이 되어가는 시기였다. 이스라엘도 그렇다. 어떻게 보면 전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코로나 팬데믹을 벗어난 나라가 되기도 했다. 멈추고 비어있던 성지는 그동안 푹 쉬었다고 할 수 있다. 붐비던 예루살렘과 갈릴리는 자연 그대로 시간이라는 흐름 속에서 잠시 멈추어 있는 듯 했다. 분주하고 복잡함을 벗어나 고요함을 누리는 시간이었다. 2022년 하반기부터 이스라엘은 성지순례가 다시 시작되었고 예루살렘과 텔아비브 공항은 찾아든 여행객과 성지순례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코로나에 대한 공포가 불식되는 듯한 순간들이었다.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팬데믹의 공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은 그런 것들을 잠시 비껴나간 듯 새롭게 다시금 피어나고 있다. 호텔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코로나 이전 수준으로 다시 돌아간 듯 하다고 한다. 호텔 가득 붐비는 순례객들과 여행객들 사이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가이드들과 호텔 직원들의 모습 속에는 바쁨에도 불구하고 미소들이 피어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문이 다시 열리고 손님들이 찾아오는 시점에서 문득 이 나라의 역사를 돌아보게 된다. 과연 이 나라는 어떻게 2000년 만에 다시금 등장할 수 있었을까? 현대 이스라엘은 과연 성경 속의 이스라엘의 연장선상의 나라인가 아니면 전혀 새로운 국가일까? 여전히 갑론을박이 진행되고 있는 이 땅에 대한 논쟁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누가 다윗이고 골리앗이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이야기는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보아야 하는가? 성지 이스라엘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일까? 성경과 이스라엘 그리고 유대인들은 어떤 이야기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가? 열방과 이스라엘은 성경과 역사 가운데 어떤 관계에 놓여 있으며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바라볼 것인가? 많은 질문과 답들이 무수히 떠올랐다. 그 중에는 그 동안 지면을 통해서 이야기 했던 것들도 있고 아직 이야기 하지 못한 것들도 있다. 성지 이스라엘에 관한 이야기들을 조금은 나누었다. 예루살렘과 갈릴리, 나사렛과 브엘세바, 헐몬산과 광야 등의 이야기를 해 보았다. 유대인과 이스라엘의 지역들 그리고 삶에 대한 이야기들도 잠깐 했었다. 유대교적 관점과 풍습 그리고 절기에 대한 것들도 언급했었다. 이런 이야기들이 현재 이스라엘을 다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의 글들은 그런 것들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는 작은 틈새를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면서 돌아보게 되었다. 과연 얼마나 이스라엘을 알려드렸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많은 분들이 있지만 현대 이스라엘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이들은 어떻게 이 곳에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듣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런 이야기들을 해주는 통로도 적거니와 들을 기회도 많이 없다. 순례객들은 본인들이 다녀간 장소를 기억하기도 바쁘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그 뒤에 있는 이야기들에 집중할 시간도 없다. 이스라엘을 위해서 중보하는 이들도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제목 속에서 등장하는 지역과 사건들에 대한 배경지식이 거의 없이 그저 기도하는 것을 종종 발견한다. 그것이야말로 은혜다. 하지만 만약 여행하는 이들과 기도하는 이들이 이 땅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현실적으로 더 자세하게 알고 기도 한다면 얼마나 더 놀라운 응답이 이루어질까 생각해 본다. 필자도 이스라엘에 살면서 배우고 알아가는 과정에서 발견하게 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다. 그런 은혜가 없어도 우리의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고 그 분의 일하심을 바라보는 관점이 더 확장되고 깊어질 수 있다면 이스라엘을 알아가는 시간은 너무나도 귀한 것이 된다. 2023년도는 그런 시간을 가져볼까 한다. 너무 멀리까지는 아니지만 근대와 현대사를 오가면서 이스라엘의 탄생과 역사적 사건들 그리고 그 안에서 바라보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들을 돌아본다면 이후에 이 땅을 방문하게 될 때 남들은 놓쳤던 부분을 찾아보게 되고 더 깊이 있는 만남들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늘도 광야를 걷는다. 예루살렘의 성벽을 지나쳐 간다. 텔아비브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베드로가 묵었던 가죽장인 시몬의 대문 앞을 거닐어 본다. 서쪽벽, 통곡의 벽 앞에서 기도하는 이들을 보면서 예배의 처소를 갈망하는 영혼을 보게 된다. 히스기야 터널을 지나면서 유대인들이 걸어왔던 암울한 역사를 되짚는다. 터널의 끝에서 시온산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리운 순간을 떠올린다. 무너져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터 앞 성전의 문앞 돌계단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 그 너머 성전산 위에 세워진 이슬람 사원을 보면 이 땅의 황폐함을 예언하시면서 눈물 흘리신 예수님이 보인다. 그 모든 시간 속에서 여전히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오늘 이 시간 거리를 바쁘게 지나는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의 삶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역사는 과거를 비추지만 현재를 이끌어가는 견인줄이 된다. 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스라엘과 유대인들 속에서 여전히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해 나아갔으면 한다. 김요셉 목사
  • 2023.01.13 / 김용두 기자

    평신도를 위한 오순절 조직신학
    VI. 인간론(The Doctrine of Humanity) - 2
  • 영적인 상태와 직결되는 인간의 다섯가지 상태
    3. 인간의 상태 II 조직신학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는 인간에 대한 이해이다. 조직신학의 인간 이해는 사회, 문화, 정치, 경제적 환경보다는 인간의 영적인 상태와 직결된다. 특별히 인간의 상태에 대한 이해는 창조와 타락,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최후의 심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인간의 상태는 다섯 가지로 이해 될 수 있다. 1) 타락 이전의 무죄 상태(Status Integritatis) 무죄의 상태에 있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었으며 언제든 하나님의 임재에 참여 할 수 있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죽음의 공포, 질병, 고통, 슬픔, 불의 등 인간을 괴롭히는 모든 요소에서 벗어나 있었다. 타락 이전의 무죄 상태에 있는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간의 삶 속에 죄가 유입됐으며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2) 타락으로 인한 부패의 상태(status corruptionis) 완전한 선을 추구할 수 있었던 인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부패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에덴동산에서 누렸던 권리는 모두 박탈되었고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다. 인간의 거룩성은 사라졌고 하나님의 거룩 앞에 설 수 없게 되었다. 에덴동산의 풍요, 평화, 자유, 기쁨은 사라지고, 땀을 흘려야 먹고 해산의 수고와 고통을 짊어져야 했다.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창 3:16~18). 만물에 대한 통치권을 잃었으며 하나님의 임재 밖으로 버려졌다. 목숨은 붙어 있었으나 이미 사망 선고가 내려진 상태였고 영혼은 부패했으며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되었다. 죄의 욕망에 따라 살며 결국에는 죄 가운데 죽어갈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마음의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고(창 6:5)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육신은 흙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유한한 존재가 되었다. 3) 그리스도로 인한 선사된 은총의 상태(status gratiae) 칼빈(John Calvin)이 말한 ‘전적인 타락’에 놓인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선물, 즉 은총(카리스)만이 필요하다. 성경은 그 어느 곳에도 다른 길이 없다고 말한다(요 14:6).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사람도 어떤 이름도 주신 적이 없다고 단언한다(행 4:12).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세주로 영접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우리의 영혼은 거듭나고 중생한다(롬 10:9). 이 거듭남과 중생의 결과로 인간은 새로운 피조물, 그리스도의 신부, 성령의 전, 하나님의 자녀라는 은총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진리를 소유함으로써 자유를 누리게 된다(요 8:32).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졌으며 사망의 종이나 지배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법 아래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무죄 상태에 있던 아담과 달리 죄의 속성이 여전히 잔존해 있어서 끊임없이 죄의 유혹과 육체의 소욕과 싸워야 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2~24)라고 절규하는 바울의 모습은 이런 인간의 상태를 잘 묘사해 주고 있다. 4) 구원을 받는 자들의 죽음 후 영광의 상태(status gloriae) 육체의 죽음은 존재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은 죽음을 통해 늙고 병든 육체를 벗고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고전 15:20), 우리 또한 부활의 기쁨과 함께 신령한 옷을 입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영광스런 상태가 된다. 이것이 구원 받는 자들의 죽음 후 영광의 상태이다. 아담과 하와가 잃어 버렸던 무죄의 상태를 회복하며 더 이상 죄와 사망, 질병과 고통에 지배되지 않는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절대적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함에 거리낌이 참여할 수 있다, 모든 희미하고 불분명했던 것들이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과 같이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며(고전 13:12), 상함과 행함이 없는 완벽한 평화를 맛보게 될 것이다. 5) 저주를 받은 자들의 죽음 후 저주 상태(status damnationis) 죽음 후 인간의 상태는 믿는 자들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 믿는 자들에게 주어질 영광의 상태와 정반대되는 인간의 상태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이 죽음 후 놓이게 될 저주의 상태이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는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 기록된 글귀처럼 더 이상 어떤 소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선함을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사랑은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심판의 고통만이 영원히 지속되며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나(마 25:30), 돌이킬 수 있는 방법과 기회는 사라진 상태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는 기대할 수 없고 사탄과 죽음의 권세로 다스려지는 처참한 인간의 상태이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3.03.0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VI. 인간론 (The Doctrine of Humanity) - 1
  • 고대로부터 이어진 철학자들의 가장 주된 관심사와 질문은 ‘인간은 무엇인가’이다. 이 질문은 인간이 끊임없이 해 왔던 질문이다. 동·서양의 철학자들은 주로 인간의 본성이나 존엄성과 가치 등 인간 자체에 대한 이해를 하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인간에 대한 이해의 영역은 생물학적인 인간의 이해나 형이상학적 인간에 머물러 있지 않다. 일반적인 인간론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인간론은 인류학적인 인간이나 철학적인 인간 이해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기독교의 인간론은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속에 인간의 삶의 목적과 의미뿐만 아니라 인간의 물리적 사회적 특성 또한 이해되고 논증되어야 한다. 이런 차이는 인간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접근에서부터 시작된다. 인류학적 인간론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기준점은 ‘지금의 인간’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인간을 이해하는 시작은 ‘현세적인 인간’이 아니다. 죄로 인해 일그러진 인간이 아닌 창조 시점의 인간 즉 본래의 인간(original human being)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인간론은 인류의 타락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어야 할 참된 인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1. 인간의 철학적 이해 플라톤(Platon)은 인간을 몸과 영혼으로 구별하는 이원론적 존재로 이해했다. 플라톤의 이런 인간의 이해는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극단적으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고 육체는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나 악한 것으로 여기는 영지주의자들의 사상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 중세를 지나며 인간에 대한 이분법적인 이해는 점차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인간을 영과 육으로 분리해서 이해하는 이분법적 인간 이해보다는 인간의 실존과 이성에 더욱 관심을 두었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고 생각을 했고, 니체, 하이데거, 장 폴 사르트르와 같은 현대 철학자들은 인간의 본질을 단순한 영혼과 육체의 분리와 조합이 아닌 자유와 책임과 같은 존재론적, 사회적-역사적 인간을 인간의 이해 대상으로 보았다. 2. 성경적 인간 이해 성경에서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나눠진 이원론적 존재일까? 아니면 영, 혼, 육으로 구성된 삼원론적 존재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영혼’에 대한 이해에 따라 달라진다. 1) 구약의 인간 이해 창세기 2장 7절을 보면 “야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히브리어 원어로는 하나님께서 땅의 ‘먼지’(히. 아파르)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히. 네페쉬)를 불어 넣어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뜻이다. 간혹 하나님께서 성령(히. 루아흐)을 부어 사람이 되게 하셨다고 말하는 설교자들이 있는데, 창세기 2장 7절은 성령이 아닌 ‘생기’(히. 네페쉬)를 불어 넣어 사람을 만드셨다고 되어 있다. 창세기 2장 7절만 본다면 인간은 ‘육체’와 ‘생기’를 지닌 이원론적 존재이다. 그러나 욥기와 시편의 말씀을 종합하면 인간은 ‘먼지’(창 2:7; 3:19; 시 104:29)이지만 ‘생기’(창 2:7)와 ‘하나님의 숨결’(루아흐, 욥 27:3)을 지니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다. 2) 신약의 인간 이해 구약성경은 ‘영’과 ‘혼’에 대한 구별이 분명하지 않아 ‘영혼’으로 쓰일 때가 많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혼’(헬. 프시케)와 ‘영’(헬. 프뉴마)에 대한 구별이 구약보다는 더욱 선명하다. 신약에서 ‘혼’(헬. 프시케)은 불멸적인 요소가 아니다. ‘프시케’는 종종 ‘인간 자신’(롬 2:9; 13:1)이나 ‘목숨, 생명’(마 10:39; 롬 6:4; 11:3)으로 쓰이고 있다. 신약성경의 삼분법적 인간 이해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프뉴마)과 혼(프시케)과 몸(소마)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육체와 영에 비교되는 ‘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성경은 ‘육체의 부활’과 ‘영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만약 ‘혼’을 ‘몸’과 구별되는 또 다른 영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면 ‘육체와 영의 부활’외에 다른 부활을 이야기해야 한다. 이런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육체의 부활’과 ‘영혼의 부활’을 주장하게 된다면 이것은 이미 ‘영’과 ‘혼’을 하나로 묶어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구분 짓는 이원론적인 인간 이해이다. 삼분법적인 인간관은 기독교 역사 초기의 희랍과 알렉산드리아 교부들(클레멘트, 오리겐, 그레고리)에게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예수님의 인성을 손상시키는 도구로 사용되면서 거부되기 시작했다. 이후 점차 어거스틴과 종교개혁자들을 포함한 서구 신학에서는 인간을 두 부분(육체와 영혼)으로 이해하는 기류가 형성되었다. 현대 신학자들에게 이분법적 혹은 삼분법적 인간 이해는 큰 논쟁의 대상이 못 된다. 칼 바르트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몸과 영혼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을 분리해 ‘육체’만으로 인간을 이해할 수 없으며 (이것은 인간을 동물과 같이 생물학적, 해부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불과하다.),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으로만 인간을 이해하는 것 또한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육체적 제한성과 상황과 환경 속에서 인간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환경과 조건이 달라지면 얼마든지 다른 본성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상태의 인간은 인간의 속성을 가질 수 없으며 반드시 육체와 영혼이 결합된 상태에서만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 3. 인간의 상태 조직신학적 인간이해는 인간의 상태를 다섯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타락 이전의 무죄의 상태, 둘째 타락으로 인한 부패의 상태, 셋째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한 은총의 상태, 넷째 구원을 받은 자들의 죽음 후의 영광의 상태, 다섯째 저주를 받은 자들의 죽음 후의 저주 상태이다. 1) 타락 이전의 무죄의 상태 타락 이전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은 무죄 상태였다(창 1:26~28). 무죄 상태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가운데도 살아 갈 수 있었다.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어 있었으며 고통과 슬픔도 없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선을 추구하며 그것을 행할 자유(전 7:29)와 권한(창 1:26)을 부여 받았다. 타락 이전의 무죄 상태인 인간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회복하게 될 본래의 인간의 모습이다. <다음 호에 계속>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3.02.0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V. 신론 (The Doctrine of God) - 3
  •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강조되면 하나님 모습 왜곡될 수 있어
    4.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믿음의 대상이며 실체인 하나님을 철학적으로 혹은 신학적으로 증명하려는 것은 헤어 나오지 못할 블랙홀을 헤매는 것과 같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인간 속에 두신 하나님의 선재적 행위로 인해(롬 1:19)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려는 시도와 노력을 무모한 신기루를 쫓는 행위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목적론적 증명(Teleological argument)이다. 모든 사물은 의미와 이유를 갖고 있다. 그 어떤 것도 고유한 의미 없이 생성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요소들은 무질서하게 계획과 목적이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교한 질서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하늘의 수많은 별들 중 만약 어느 하나라도 궤도를 이탈하거나 다른 영역을 침범한다면 예기치 못한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것이 일정한 목적과 기능을 수행하도록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세심한 관찰 결과에 근거해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하는 것이 목적론적 증명이다. 목적론적 논증은 고대 철학자들도 사용했던 방법론으로써 대표적인 철학자들은 플라톤(Plato)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를 중심으로 한 스토아(Stoa) 학파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이 신학적인 언어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철학적인 용어인 ‘형상’(形相, form)과 ‘질료’(質料, matter)라는 단어를 썼다. 어떤 질료도 갖고 있지 않은 채 형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을 순수 형상(entelecheia)이라고 규정을 했는데, 이것을 신(God)이라고 생각했다. 철학적인 복잡함을 제거하고 목적론적 증명을 신학적으로 단순하게 접근하면 이렇다. 세상 모든 만물은 의미와 목적을 갖고 있는데, 그 목적을 부여하고 목적대로 사물을 움직이게 하는 근원적인 순수 형상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분이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신 존재 증명에 대한 논쟁과 당위성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현대 신학에서 신 존재 증명은 신학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분야는 아니다. 신 존재 증명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신학자들도 많이 있다(이에 대해서는 지난 호를 참조). 현대 신학자들의 관심은 하나님을 인간의 이성이나 철학, 혹은 학문적 방법론으로 증명하려는 노력보다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있다. 1)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의미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각 사람의 개인 속에 거하시는, 혹은 인간의 삶과 공동체 안에 내재하시는 분이신가?”아니면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초월적이신 분이신가?”에 대한 문제이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대한 문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시작하는 주기도문 서두에도 잘 나타난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은 인간이 가까이 할 수 없는, 분명히 하나님의 초월성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라는 것은 인간의 삶 속에서 인간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맺고 계신 내재적 하나님을 함축적으로 일컫는 단어이다. 2) 하나님의 초월성 하나님의 초월성은 그의 피조물인 인간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초월성은 천지를 창조하시는 모습에서 극명하게 나타고 있다. 천지 창조 속에 인간은 한 피조물일 뿐 천지 창조의 역사에서 철저히 배제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피조물로부터 초월해 계시며 그의 창조물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넘을 수 없는 초월성을 갖고 계시다. 성경에 기록된 기적적인 사건들은 자연적인 현상과 요소, 삶과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은 하나님의 초월성의 산물이다.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내재성마저 하나님의 초월성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칼 바르트(K. Barth)와 브라운(W.A. Brown)이 있다. (1) 칼 바르트(K. Barth)는 인간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보여 주신 것만큼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하나님의 ‘자기계시’조차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바르트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본성, 소유, 행위의 순수한 한계와 순수한 시초이며 인간과 모든 인간적인 것과 완전히 다른 존재로서 무한한 질적인 차이 속에 대립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2) 브라운(W.A. Brown)은 만약 하나님이 세계의 근거와 세계의 깊이로서 이 세상에 매어 있다면 하나님은 세상과 구별되는 자신의 자유와 독자성을 상실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은 언제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의 내재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하나님의 주권은 쉽게 희미해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휴머니즘적인 사랑은 쉽게 동질화 될 수 있다. 즉, 다시 말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것이 하나님 사랑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세우기 위한 심판과 징벌도 하나님 사랑의 일부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구원에서 제외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릴 수는 없다. 그의 초월적 선택과 주권 때문이다. 3) 하나님의 내재성 하나님의 내재성은 역사적으로는 타락과 회개를 반복하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시고 그들의 희생 제사를 받으시고 전쟁에 개입하시며 개인의 삶을 주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내재성을 의미한다.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 본 회퍼(Dietrich Bonhoeffer),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 로빈슨(John A. T. Robinson) 등은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고 있다. (1) 본 회퍼는 하나님은 주변 세계나 배후 세계가 아니라 우리 세계의 중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해서 우리는 ‘세상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D. Bonhoeffer, Widerstand und Ergebung 9 (Aufl, 1959), 184f; 필만, 『교의학』, 189). (2) 틸리히는 관념주의에 영향을 받아 하나님은 내재화된 초월자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지만 하나님의 초월성보다는 인간의 삶 속에 내재화된 모습으로 이해하고 있다. (3) 로빈슨은 하나님은 세계 위에, 또는 세계 밖에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깊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내재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인간의 자율성은 사라지는 위험에 처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이 없으며 세상의 악과 부조리 또한 하나님의 의지로 치부될 수 있다. 하나님의 내재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위험에 빠질 우려도 있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 균형을 잡지 못하면 신앙은 변질되기 쉽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강조되면 하나님의 모습은 심하게 일그러진 모습으로 왜곡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대한 깊은 신학적 고찰과 신앙적 균형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2.11.0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생명과학 이야기
    사계절 달달한 맛, 꿀 이야기
  • 오랜 세월 인류는 야생에서 발견한 토종벌집에서 꿀을 채취하였으나 근대에 들어와서 개량된 양봉기술을 통해 원하는 꿀을 많이 얻게 되었다. 요즘은 국내 양봉업계에 외국 꿀벌종류가 많이 소개되고 있으며 이들을 통해 화분과 로얄젤리, 프로폴리스 등을 얻는다. 이렇듯 꿀벌처럼 인류에게 큰 유익한 곤충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고유종으로 산과 들에 핀 야생화에 체형이 맞게 적응한 토종벌이 있다(사진). 토종벌꿀은 연중 한 장소에 고정된 벌집으로 늦은 가을에 한번만 꿀을 채취한다. 그러므로 계절변화에 따라 숲속에서 피는 다양한 야생화 꿀이 장기간 모아져 숙성된 특유의 꿀을 맛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 꿀은 수입된 서양종의 꿀벌로 특정한 꽃이 피는 장소나 시기에 따라서 자리를 옮겨가면서 연중 여러 번 꿀을 채취하는 이동식 양봉 꿀이다. 서양벌 양봉에서도 다양한 야생화에서 모은 잡화꿀이 있으나 특정 나무이름이 붙은 아카시아꿀이나 밤꽃꿀 혹은 유채꽃꿀처럼 시판되는 대부분의 꿀은 서양벌이 수고한 것이다. 세상에서 공짜는 없는 듯하다. 꽃은 향긋한 냄새를 풍기고 아름다운 꽃잎을 통해 후각과 시각이 잘 발달한 꿀벌을 자신의 꿀샘으로 안내한다. 대신 꿀벌은 풍성한 결실이 되도록 꽃가루를 암술에 전달해 주는 충매(蟲媒)로서 역할을 톡톡히 한다. 그러므로 꿀벌은 꽃에게 보상하는 치밀한 상생관계이다. 꿀벌은 꽃에서 달달한 꿀을 모으는데 타고난 몸이다. 특수한 신체구조와 함께 날개 짓을 하며 꿀이 있는 꽃을 부지런히 찾아 날아다닌다. 흡입한 꿀을 침샘에 담아서 날라다 모으는 천부적 재능이 놀랍다. 어린 유충과 비축해 놓은 꿀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도 아끼지 않고 침입하는 적에게는 강한 통증을 일으키는 벌침으로 공격한다. 꿀벌은 기후변화에 예민하고 환경변화에도 큰 영향을 받는다. 어떤 이유이든지 꿀벌의 개체수가 감소하거나 없어진다면 농작물의 작황뿐만 아니라 자연생태계의 심각한 악영향을 미친다. 근래 2009년부터 시작된 바이러스질환으로 낭충봉아부패병은 2년 동안 국내 토종벌의 75%가 사라졌다. 서양벌은 부저병에 매우 취약해서 과거 유럽과 미국에서 크게 유행해서 큰 피해를 주었고 지금도 종종 발생하는 것으로 양봉을 하는 사람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그뿐 아니라 당시 전염성 질환으로 꿀벌의 개체수가 현격히 줄어들었을 때 농작물과 식생(植生)에도 큰 감소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오늘도 시편107편 말씀을 묵상해 본다. "밭에 파종하며 포도원을 재배하여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시며 또 복을 주사 그들이 크게 번성하게 하시고 그의 가축이 감소하지 아니하게 하실지라도 다시 압박과 재난과 우환을 통하여 그들의 수를 줄이시며 낮추시는도다"(37~39) 윤철종(이학박사·또오고싶은교회 담임목사)
  • 2023.03.05 / 이미나 기자

    입에 쓰지만 몸에 좋은 씀바귀나물
  • 씀바귀는 우리나라에서 쓴 나물을 대표하는 식물(bitter plant)로서 매운 맛을 내는 채소류와 함께 고초(苦草)로 분류된다. 논과 밭둑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씀바귀는 잎과 뿌리와 함께 전체가 쓴 맛을 내며 노란색 꽃과 흰색 꽃이 피고 씨앗은 바람을 타고 퍼진다(사진). 국내에서는 선씀바귀, 노랑선씀바귀, 산씀바귀, 좀씀바귀 등 약 10종이 자생하는 것으로 관찰된다. 봄에 나오는 연한 씀바귀나물은 입맛을 돋울 뿐 아니라 우리 몸에 면역력을 증강시키는 다양한 약리적 성분과 효능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쓴맛을 내는 이눌린 성분은 천연 인슐린으로 혈당을 조절한다고 알려져있다. 씀바귀는 우리 몸에 좋은 성분이 많아 약용식물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쓴 맛을 내는 채소나 나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다’는 말처럼 우리 몸에 이로운 음식이나 약재 중에는 입에 쓰거나 불쾌한 향이 나는 것들이 많다. 인생에서 ‘쓴 맛을 봤다’ 혹은 ‘쓴 잔을 마셨다’는 것은 고통과 실패를 상징하는 은유적인 표현이다. 과거 유대민족은 전통적으로 유월절에 쓴 나물을 먹으며 애굽 땅에서 오랜 세월 고통 받던 생활을 기억하고 자신의 삶을 겸손히 돌아봤다. 유월절은 가족들과 쓴 나물과 함께 무교병과 양고기를 먹으면서 지난 날 고통과 억압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하나님께서 지난 세월 어렵고 고통스러웠던 시절을 잊지 않도록 먹으라고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셨다(출12:8, 민9:11). 여기서 쓴 나물은 종류와 관계없이 쓴 맛을 내는 식물이면 된다. 현재의 자유와 기쁨을 누리고 잘 사는 사람이라도 과거에 피할 수 없었던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견뎌내야 했던 때가 있었다. 이 때 쓴 나물을 먹는 유대인의 풍습은 과거의 고난 받을 때를 잊지 말고 항상 깨어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에 적용하며 바르게 살라는 교훈을 남겨준다. 우리 속담에도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생각하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 형편이 전보다 나아졌다고 해서 지난 날 자신의 미천하고 보잘 것 없던 때를 기억하지 못하면 안되니 매사에 겸손히 행하라는 의미이다. 오늘도 주위를 살펴 가난하거나 병든 이웃과 사정이 어려운 국내외 이웃을 생각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돌봄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출23:9) 윤철종(이학박사·또오고싶은교회 담임목사)
  • 2023.03.05 / 이미나 기자

    시금치와 뽀빠이
  • 비타민 A와 C, 미네랄 풍부한 건강식품 너무 많이 먹으면 결석 생길 수 있어 시금치는 고려 말에 중국을 통해 국내로 들어온 귀화식물이다. 한국 사람이 즐겨 먹는 국물이 있는 잎줄기채소 중에 된장을 풀어서 끓여 먹는 아욱, 근대, 배추, 쑥갓과 함께 시금치는 식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다만 다른 채소에서 느낄 수 없는 약간 달짝지근한 맛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겨울철 불규칙하지만 삼한사온의 반복되는 날씨변화에 잎이 얼었다 풀렸다 하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생존한다. 이때는 잘 성장하지도 못할 뿐더러 잎에 누렇게 마른 것과 가장 자리가 추위에 동상을 입어 상흔이 남아 있는 시금치가 연중 가장 달고 맛있을 때이다. 특히 남쪽 지방 섬이나 해안가에서 겨울에 찬 바닷바람을 맞으며 땅바닥에 낮게 붙어 자란 노지의 섬초, 남해초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재배된 것과 비교되지 않게 맛과 향이 있다. 그 중에서도 경북 포항시 해안에서 10월 말부터 3월까지 노지에서 수확하는 포항초 시금치는 염분을 포함한 다양한 미네랄(minerals)이 많아서 으뜸상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대부분의 식물이 그렇듯이 시금치도 성장하는 기후나 환경에 따라서 다르고 출시되는 계절에 따라서 영향을 받는다. 또한 재래종과 새로운 개량종들은 모양과 크기가 제각각 다를 뿐더러 성장 속도가 다르며 그 맛과 향에서 차이가 있다. 비록 겨울 시금치가 여름 시금치보다 성장이 더디고 크기는 작지만 잎이 두텁고 짙은 초록색으로 풍미가 더 한다. 시금치 하면 미국에서 만들어진 만화영화 시리즈가 생각난다. 해군복을 입고 큰 근육의 팔뚝을 자랑하는 뽀빠이가 악당을 물리칠 때면 시금치통조림을 먹고 초인적인 힘을 냈다. 이것은 사실 시금치의 효능을 과대시킨 것이다. 영양학적으로 보면 시금치는 큰 근육과 힘을 낼 만큼의 단백질이나 열량을 갖추고 있지 않다. 다른 채소나 식품보다 철분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시금치 외에 일부 식물은 수산이라고 하는 옥살산을 포함하고 있다. 옥살산 이온과 칼슘 이온이 체내에서 결합하면 옥살산칼슘이 형성되어 신장과 요로, 그 외의 부위에서 결석이 발견될 수 있다. 일부 연구보고서에서 옥살산이 있는 시금치를 지속적으로 많이 먹는다면 개인에 따라서 결석의 핵물질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보통은 큰 문제가 되지 않으며 대부분의 옥살산칼슘은 소변으로 배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금치는 비타민 A와 C가 풍부하며 각종 미네랄이 많은 잎줄기채소로서 손색이 없는 건강식품이다. 다양한 나물무침이나 국거리가 되며 김밥과 샐러드에서 자주 사용되는 식재료임에는 틀림이 없다.
  • 2022.11.25 / 이미나 기자

    성경 Think! 인생 Thank!
    말의 힘 ... 자신의 마음 및 영적 상태와 연결
  • 누군가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해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해야 ‘감사’와 ‘긍정’의 말들 쏟아져 말이 씨가 된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 갚는다. 말이 얼마나 힘이 있는가를 드러내는 말들이다. 누군가에게 무심코 던진 말이 힘이 되기도 하고 좌절되기도 한다. 자녀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 습관적으로 던진 말들이 결실을 맺기도 한다. 말은 이처럼 마음을 드러내고 파장을 일으키며 파동으로 세상을 움직이며 놀라운 힘을 보여준다. 말대로 해줄까? 개그우먼 이성미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을 아들에게 했다. “이 또라이야, 한심한 놈아, 야~ 정신 나간 놈아.” 시간이 갈수록 욕은 늘어났고, 눈에 차지 않는 아들을 볼 때마다 저렇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욕은 점점 세졌다. 아들이 17살이 되었을 때 여느 때와 같이 분풀이를 하는데 아들이 그녀의 손을 붙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자존심이 상한 그녀는 더 악을 쓰며 막말을 했고, 아들은 “연예인이라는 인간이, 교회 집사라는 인간이! 사람들이 이러는 거 알아?”라고 소리쳤다. 순간 이 말을 듣고 놀란 그녀의 내면에서 ‘네가 말한 대로 해줄까?’라는 소리가 들렸다. 17년간 아들에게 했던 말들을 되돌아보니 비참했다. 아들은 피를 흘리며 갈기갈기 찢겨 있었고 미친개가 되어 있었다. 그녀에게 두려움이 다가왔고 진심으로 아들에게 무릎 꿇고 용서를 구했다. 그녀는 사랑했던 아버지를 잃었고, 미혼모로 아이를 키우는 등 삶 자체가 고난이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분노와 미움이 가득 찼고 그것이 욕으로 나와 아들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내 귀에 들린 대로 성경에도 “내 귀에 들린 대로 해주겠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야훼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 14: 28). 읽다 보면 하나님 앞에서 말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마음속에 화가 나고, 못마땅한 게 있어도 늘 긍정적으로 말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노예로 있을 때 10가지 재앙을 통해 구출해 주셨다. 홍해를 갈라 건너가게 하셨고, 광야에서 만나를 먹이시고,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다. 이러한 광경들을 직접 체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다. 애굽을 그리워하며 원망과 불평을 쏟아냈다(민 14:2~3).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은 단순히 부정적인 말을 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렇게 많은 기적을 체험하고도 눈 앞에 펼쳐진 어려움 앞에서 무너지고 불평의 소리를 냈다. 성경에서 말하는 말의 힘 무언가를 얻기 위해 긍정적인 말을 반복하면 그대로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허나 성경에서는 더 높은 수준의 말의 힘을 강조한다. 우리가 하는 말은 자신의 마음 및 영적 상태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 긍정적인 단어 몇 개를 사용해야 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닌 내 마음의 상태가 어떠하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결국 자신이 어떠한 상태에서 구원받은 자인지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면 남과 비교하여 불안하고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태에서 하는 말은 자신은 물론 상대방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개그우먼 이성미 씨는 자신이 불행하고 불안했을 때 자식에게 죽이는 말만 했다.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고 바뀌고 나니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 달라졌다고 한다. 말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삶의 방향성을 결정한다(잠 18:21). 눈에 보이는 상황은 힘들고 어려울 수 있지만,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기에 ‘감사’와 ‘긍정’의 말들을 쏟아낼 수 있다. 우리 교회는 ‘내가 먼저 인사합니다’라는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마음은 없는데 입으로만 예쁘게 인사하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생각할 때 상대방을 귀하게 여기고 반갑게 인사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 값으로 산 공동체이며 가족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나도 구원해 주셨는데 저 사람도 하나님은 가능케 하실 수 있다고 믿으면 상대방을 살리는 말을 할 수 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지금 당장 10년 전에 헤어졌던 가족을 만난 것처럼 인사하자. “할렐루야!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Think! Thank! Q1. 당신에게 힘이 되었던 말은 무엇이었나요? Q2. 말의 힘에 대한 성경 구절을 나열해 보세요(마 15:11, 잠 18:21, 엡 4:29). Q3. 당신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떠한 말을 해주고 싶나요?
  • 2023.03.1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The Glory’(더 글로리) … 하나님의 영광 반사
  • 월화수목금토일 모든 날이 주의 날
    어떻게 살았는가를 반성하며 삶의 예배자로 살아야 끔찍한 학교 폭력에 시달렸던 한 여자가 가해자를 응징하기 위해 온 生(생)을 거는 이야기 <더 글로리>가 인기다. 이 드라마 곳곳에는 기독교가 형편없이 그려지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끌었던 <오징어게임>, <수리남>, <지옥> 등도 기독교인을 악하게 묘사하거나 기독교 신앙이 위선의 산물처럼 묘사되어 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기독교가 어떻게 비쳤는지 살펴보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예배자로서의 삶을 회복하자. 주일만 주의 날? <더 글로리>에서 주인공 문동은을 괴롭혔던 가해자 중 한 사람인 이사라는 새벽 예배에 나가고 찬양을 부르면서도 학교에서는 잔인하게 친구를 괴롭힌다. 여기에 마약과 문란한 생활을 하면서 주일에는 예배를 드리는 이중적인 행동은 혀를 차게 한다. 교회생활과 세상의 삶이 분리된 이러한 모습은 어떠한가?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세상에서의 삶을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신자는 사람의 눈치를 보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고 있는 자들이다. 존 맥아더 목사는 “참된 예배는 주일 예배시간 축도 후에 비로소 시작 된다”라고 말한다. 월화수목금토일, 모든 요일이 주의 날이며 매일 삶의 자리로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살아내는 자들이다. 소요리문답의 첫 번째 질문이 “사람의 주된 목적이 무엇이냐”로 쉽게 물으면 “너는 왜 사느냐”이다. 답은 “사람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 걸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자들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신에게만 죄를 고했다고? 성인이 된 후 이사라는 문동은이 찾아오자 거액을 건네며 “난 너한테 한 짓 다 회개하고 구원 받았어”라고 말한다. 과연 자신이 지은 죄를 신에게만 고하고 회개하면 죄가 다 없어지고 용서가 되는 걸까? 하나님 나라의 최고 계명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을 사랑할 것이요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세리 삭개오는 일본의 앞잡이 노릇과 같은 일을 하는 자로 동족들에게 경멸 받았던 사람이다. 이런 삭개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라고 고백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며 살아가는 동안 죄짓고 실수하는 일이 태반이다. 이런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졌다. 이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반드시 회개하고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 성령께서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고 깨닫게 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처를 준 상대방에게 용서를 구하고 피해 내용을 변제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누구에게 위로를 받나? 문동은이 학교폭력을 당할 때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 자신을 낳아준 엄마는 가해자들과 한편이 되었고 학교 선생님은 친구들끼리 그럴 수 있는 일이라며 도리어 그녀를 폭행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편을 들어 주지 않았던 그녀는 영혼까지 부서진 여자라고 표현되고 있다. 대부분의 피해자는 약자이며 가난하다. 가난은 재정적인 상황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할 곳이 없는 마음적 상황을 의미하기도 한다. 교회 공동체는 그들이 언제라도 달려올 수 있는 공동체였는지 고민해야 한다. 율법적으로 잣대를 들이대고 정죄하며 교회 문턱을 높이지 않았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야훼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시 86:1). 아무도 내 편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의 편이시며 도와주실 것을 전해야 한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잊으려 해도 몸과 마음에 아픔의 흔적이 남겨졌기 때문이다. 병원치료, 상담치료 등을 통해 치료 받아야 하고 좋은 사람들을 통해 회복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대면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품에 안겨야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은 좋은 분이시다. 그 사랑을 받은 우리도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에게 모든 요일이 주의 날이며 그분의 통치를 받고 그분을 위해 사는 우리는 다르게 살 수밖에 없다. 기독교는 상식적이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기독교가 어떻게 비쳤는지 살펴보고 다시 말씀을 좇아 살아야 한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5). Think! Thank! >>>>>>>>>>>>>> Q1. 주일에 보이는 당신의 모습과 평일의 모습이 다르지는 않은가요? Q2. 세상에서 묘사하는 불편한 기독교의 모습을 보면서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드나요? Q3. 먹든지 마시든지 당신은 누구를 위해서 살아야 하나요?(고전 10:31)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3.02.1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평생 어부바 ... 나는 ‘하나님 껌딱지’
  • 우리가 기대고 의존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연초부터 연말까지 야훼의 눈동자가 지키셔 지난해 12월 25일 성탄절 특집으로 <금쪽같은 오둥이>가 방영됐다.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요즘 세상에서 다섯 쌍둥이라니 놀랄 일이다. 약 6000만 분의 1의 확률을 뚫고 태어났으니 기적 같은 일이요 좌충우돌 육아일지는 감동 그 자체였다. 다섯 아이들은 각자 그들만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치명적인 눈웃음의 소유자, 포동포동 튼튼이, 할머니 껌딱지, 호기심 대왕, 수다쟁이라고 불린다. 그중 제일 약하게 태어난 할머니 껌딱지는 울면서 할머니만 찾는다. 독수리 등에 업혀 출애굽 할머니는 이 아이만 볼 수 없으니 껌딱지를 포대기에 싸 어부바를 한다. 보채고 울던 아이는 할머니 등에서 편하게 안겨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든다. 인생이 힘들고 지칠 때면 할머니가 우는 아이를 어부바한 것처럼 누가 날 좀 업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의 압제에 눌려 숨도 크게 못 쉬고 살았다. 애굽인들에게 어떠한 대항도 하지 못한 채 시키는 것을 이 악물고 해야 했다. 그들이 산파에게 태어나는 남자아이를 죽이라고 하면 죽여야 했고, 태어난 남자아이를 나일강에 던지라 하면 그렇게 해야 했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누리지 못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 열 가지 재앙으로 바로를 굴복시켰고 홍해의 물을 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너게 하셨다(출 14:15~31). 또 바위에서 물을 내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가능하게 하셨다(출 16~17장). 애굽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하나님이 그들을 업으셨을 뿐이다. “야훼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야훼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신 32:10~12). 의존할 대상이 누구인지가 중요 우리는 누군가를 의지하는 것에 저항감을 느낀다. 의존한다는 것이 ‘약하다, 비굴하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독립적인 아이로 키우려 하고, 나이가 들어선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않으려 노후를 준비한다. 성경에서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야훼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 16:20) 등으로 끊임없이 ‘의존적 신앙’을 이야기하고 있다. 세계적인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기독교는 이론의 종교가 아니며 감정의 종교도 아니다. 기독교는 의지의 종교”라고 전한다. 이 의지는 무엇을 적극적으로 하려는 그런 의지, 영어의 ‘윌’(will)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기대려는 그런 의지 ‘디펜던스’(dependence)라고 말한다. 인간은 무엇인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의존하는 ‘대상’이 누구냐의 문제이다. 할머니 껌딱지에게 할머니는 자신이 무엇이 불편한지 배가 고픈지 바로 알아차리며, 불안하고 겁날 때 등에 업히면 편안하고 안정을 주는 신뢰의 존재였다. 2023년 우리에게 들리는 뉴스들은 금리가 오르고, 경제는 곤두박질치고, 집값은 계속 내리고, 코로나는 전혀 종식되지 않는 불안한 내용들로 가득하다. 이러한 불안은 돈을 쌓아두게 되고 사람을 의지하며 미래를 알려주는 점집을 찾아가게 된다.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 할 대상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들이 아니라(시 135:15)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때 다른 것들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은 그것들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이다. 연초부터 연말까지 야훼의 눈동자가 불안하고 마음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 말씀은 우리에게 힘이 된다. “네 하나님 야훼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야훼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신 11:12). 하나님 야훼의 눈동자가 우리를 지키시는데 그것도 연초부터 연말까지 365일 지키신다.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네 하나님 야훼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으로 메마른 땅이 촉촉이 적셔졌으며, 적절한 때에 내려주심으로 가나안 땅의 3대 산물인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얻게 하셨고 가축을 위한 풀도 풍성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신 11:11~15). 땅이 좋아 풍성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돌보아 주시기 때문에 좋은 땅이 된다는 것이다. 2023년 우리에게 펼쳐질 날들의 예상 시나리오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어부바 해주시니 넉넉히 이길 수 있다. 유대인들이 아기를 목욕시킬 때 하는 기도문이 있다. 이걸 좀 변형해서 조석(朝夕)으로 기도하면 좋겠다. 이 기도문의 핵심은 내가 누구를 기대고 살아야 하는지 그 대상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제 얼굴이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의 소망을 품게 하소서 / 제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복된 말이 되게 하소서 / 제 머릿속에 지혜와 지식이 가득하게 하소서 / 제 손은 기도하는 손이요 사람을 칭찬하는 손이 되게 하소서 / 제 가슴에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랑을 품게 하소서 / 제 오장육부가 건강하여 튼튼하게 하소서 / 부지런한 다리가 되어 온 세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소서 / 교만한 자리에 앉게 마시고 하나님이 원하는 자리에 앉게 하소서 / 보이는 부모를 의지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소서” Think! Thank! Q1. 하나님이 언제 어부바를 해주셨으면 좋겠나요? Q2. 당신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대상이 있나요? Q3. 이 말씀을 가족과 함께 암송해 보세요. “네 하나님 야훼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야훼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신 11:12).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3.01.0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고전(古典)에서 길을 찾다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 ‘힘쓰고 애써서’ 하는 무릎 기도 기도가 최고의 동력임을 알려주는 책 이 책을 손에 들면 걱정이 앞설 수도 있다. 무릎으로 살아야 한다니. 무릎을 꿇었을 때 땅에 닿는 부분이 화끈거리고 아픈 증상이 점액낭염이다. 무릎을 구부릴 경우 체중의 몇 배에 달하는 하중이 무릎에 가게 되므로 조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총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본 책 3장에 흥미로운 얘기가 등장한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에 대한 언급이다. 서양인의 눈으로 본 한국에서의 부흥에 대한 관점을 엿볼 수 있다. 물론 기도의 능력을 체험한 이들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마지막 장 12장에는 이런 얘기도 나온다. ‘여섯 명의 대학생이 단지 서로의 방에서 기도 모임을 가지고서 기도문 없이 즉석에서 기도했다는 이유로 옥스퍼드대학에서 퇴학을 당하고 쫓겨난 것이 겨우 두 세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옥스퍼드대학교 출신인 저자의 기도에 대한 열정과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저자는 끊임없이 기도에 대해 강조하며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한다. 앞부분 1장부터 5장까지에서는 기도에 대한 정의를 통해 기도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한다. 뒷부분 8장부터 12장까지에는 기도 응답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고, 중간부분 6장과 7장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특별히 저자는 ‘힘쓰고 애써서’하는 기도를 강조한다. 새뮤얼 콜리지(Samuel T. Coleridge)의 말도 인용하고 있다. ‘기도는 인간의 본성에서 가능한 최고의 동력이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기도하는 것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이 수행하는 전쟁에서 이루어 낼 수 있는 마지막이자 최고의 위업이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것은 다름 아닌 기도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또는 사람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이 기도하는 것이다. 어떤 자세로 기도를 드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든 서거나 앉거나 걷거나 일하며 기도하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얼마나 길게 하느냐’의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소홀히 하면서까지 기도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동시에 우리가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기도하는 시간을 더 늘린다면 일을 더 잘할 수 있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존 녹스(John Knox)처럼 “하나님, 내게 스코틀랜드를 주시든지 아니면 나를 죽여 주십시오”라며 울고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책을 덮으면서 마음에 깊이 남는 것은 무릎으로 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다. 곧 ‘힘쓰고 애씀’이다. 임 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군산교회 담임)
  • 2023.03.09 / 이미나 기자

    고백록 /어거스틴
  • 어거스틴이 쓰면서 울었다는 그 책
    ‘죄의 고백’과 ‘하나님 찬양’이 가득한 고전 이 책은 두껍다. 고전답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스토리로 읽어야 한다.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는 ‘스토리’를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6가지 요소 중 하나로 뽑았다. 이미 손쉬운 검색으로 체크가 가능해진 시대여서 팩트(fact)는 즉각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거기에 감성적 임팩트가 더해진 것이 ‘스토리’이다. 세계 3대 고백록 또는 참회록으로 불리워지는 본서는 지성적인 어거스틴이 감성적으로 쓴 눈물의 스토리이다. 쉽게 접근하기 위해선 먼저 저자 자신의 평가를 들어보는게 빠르겠다. “그 책은 내가 그것을 쓰고 있을 때 나에게 그러한 영향을 끼쳤고, 내가 지금 그것을 읽을 때에도 나에게 그러한 영향을 아직도 끼치고 있다” 이 책이 고전중의 고전으로 빛을 발하는 고백이다. 또 어거스틴은 “나의 악한 행동과 선한 행동을 말함으로 공의롭고 선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이해와 사랑을 자극하여 하나님에게 향하고 하고 있다”고 평가함으로 자서전의 분명한 목적을 밝히고 있다. 어거스틴의 회심은 방탕한 생활을 하던 그가 아이들이 부르는 ‘들어서 읽어라’ 노랫소리를 듣고 성경을 펴서 보게 된 로마서 13장 11~14절 말씀을 읽고서였다. 그의 회심은 ‘지적인 회심’과 ‘마음의 회심’으로 나뉜다. 이 책은 어거스틴의 죄에 대한 자서전이라고 볼 수 있지만 실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언어들이 더 많이 나온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어린시절을 표현하면서 “주님은 인간에게 빚진 것이 하나도 없으시면서 마치 빚진 것처럼 그들에게 갚아 주십니다”라는 표현을 쓴다. C.S.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에도 비슷한 표현이 나온다. 어거스틴은 다리우스(Darius)에게 보낸 서신에서 “내 고백록을 받아 선한 동기를 가지고 읽어라. 피상적으로 읽지 말고 기독교인의 사랑을 가지고 읽어라”라고 권면한다. 우리에게 주는 이 책을 읽는 길잡이다. 그는 포기하지 않은 어머니의 기도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자신을 덮었다고 고백한다. 우리 모든 부모들이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때 빼먹지 말아야하는 부분이다. 미래학자들의 지적과 성경의 예언처럼 요즘 시대는 바쁘다. 미국의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바쁘게 움직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개미들도 늘 바쁘지 않은가.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 때문에 바삐 움직이는가이다”라는 말을 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뚜렷한 우선순위를 가지고 일한다” 세계 2위의 투자개발회사 대표인 게리 캘러의 조언이다. 우리가 고전을 읽는 이유가 ‘성공한 크리스천의 좋은 영향력’ 때문이라면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맨 앞자리에 서있다.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면서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결코 두꺼운 책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임 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군산교회 담임)
  • 2023.02.09 / 이미나 기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 찰스 쉘던
  • 선한 영향력 행사할 수 있는 로드맵 제시
    찰스 쉘던은 많은 사람이 명목상의 크리스천으로 아무런 변화 없이 사는 데에 안타까움을 느껴 우리의 삶 속에서 크리스천들이 “나의 입장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묻고 그 대답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사회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실직한 인쇄공으로 가장하여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와중에 크리스천들의 무관심에 충격을 받았고 저술의 소재를 모을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배경은 레이먼드시. 사회 지도자층과 유복해 보이는 교인들이 많이 출석하는 레이먼드 제일교회에 한 실직당한 노숙자가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담임목회자 헨리 맥스웰은 노숙자가 쓰러져 죽은 후 큰 충격에 휩싸인다. 맥스웰 목사는 교회 안에 머무는 믿음이 아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변화를 위해 교인들과 함께 서약서를 작성한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하는 행동강령이다. 찬양대에서 봉사하는 레이첼 윈슬로우는 대형 오페라단 입단 요청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전념하기로 결단한다. 레이먼드시의 가장 큰 신문사인 ‘레이먼드 데일리 뉴스’의 사장 에드원드 노먼은 적자를 감수하면서까지 편집자를 예수님을 모시고 경영의 변화를 꾀한다. 사역자들은 부패와 죄악의 오지인 렉텡글에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찐하게 실천한다. 개인의 결단은 사회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1년 동안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성도들의 결단은 캠페인이 되었다. 대도시 시카고에도 그 열기가 전달되었으며 전국 교회들로 퍼지는 거대한 물결이 되었다. 소금과 빛의 영향력은 변화를 가져온다. 변화는 사회 전반에 만연되어 있는 부패를 씻어내고 이타적인 영적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다. 그 주변을 온통 쑥 세상으로 만드는 쑥의 번식력 같이 크리스천의 영향력 또한 강력해야 한다. 가마솥은 무쇠로 만들어 웬만한 화력으로는 잘 달구어지지 않지만, 한번 달구어지면 쉽게 식지 않는다. 이 책은 지금까지 5천만부 이상 팔린 스테디셀러이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바라건대 본서를 통해 말씀을 실천하는 결단이 우리에게 있기를 기대해본다. 미래를 전망하는 책들이 공통적으로 내놓는 키워드 중 하나가 ‘선제적 대응기술’이다. 살면서 마주치게 되는 모든 순간에 미리 알아서 배려해주는, 현재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기술이다. 사회적 약자를 적극적으로 돕고 사고 예방 차원에서도 유용하다. 낮아진 한국교회의 신뢰도 회복을 위한 퍼블릭 처치(Public Church)에 대한 요구도 선제적 대응기술의 적용으로 답할 수 있다. 오늘 소개한 찰스 쉘던의 책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는 그 모티브를 적절하게 제공한다. 임 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군산교회 담임)
  • 2023.01.06 / 이미나 기자

    고민 Tick, 상담 Talk
    ‘자기평가’와 ‘자기조절’로 중독 예방
  • ▶ 고민 Tick 저는 바로 해야 할 일들을 미룬 채 스마트 기기 사용을 끊지 못하고 있어요. 저도 ‘중독’인가요? ▶ 상담 Talk 지난 25년간 상담 현장에서 내담자들의 삶의 고민들을 다양하게 만나왔다. 최근 남녀노소 내담자들의 가장 큰 고민은 ‘스마트기기 중독’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조사 결과 우리 국민 5명 중 1~2명이 스마트기기 과의존 증상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영유아동 청소년의 경우에는 수면의 질이 떨어지고 정상적인 호르몬 분비를 교란시켜 정상적인 신체 발달도 저해된다. 스마트기기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뇌는 어떻게 될까? 한양대 정신건강의학과 노성원 교수는 뇌 전두엽의 기능인 생각하는 능력의 발달은 멈추고 계속 쉬운 것과 즐거운 것만 추구하게 되어 자기조절능력과 통제력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된다고 조언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19년 4월 24일 회원국들에게 다음과 같은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만 2~4세 어린이가 하루 1시간 이상 스마트폰기기 화면을 보는 것을 금지해야 하며 특히 생후 1년 이하의 영아는 스마트기기에 절대로 노출되면 안 된다고 WHO는 경고한다. 스티브 잡스는 ‘자녀들이 아이패드를 좋아하느냐’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아이들이 아이패드를 써 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고, 빌 게이츠는 자신의 자녀들이 만13세(중2~3학년)가 되고 나서야 휴대폰을 사주었다고 고백했다. 2019년 3월부터 6월까지 덕양중학교에서는 중학생들에게 스마트폰이 아닌 폴더폰으로 생활해보도록 하는 ‘스마트폰 절제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들의 보고에 의하면 처음 일주일간은 불안하고 감정조절이 어려운 금단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점차 부모님과의 눈 마주치는 시간과 대화시간, 산책 시간이 늘어났다. 이전에는 관심 없던 책을 보게 됐다. 무엇보다 일찍 자고 깊이 자기 때문에 낮에 기분이 좋고, 학교생활도 즐거워졌다고 보고했다. 이들의 뇌 영상을 촬영한 김은주 세브란스 정신과 전문의는 프로그램 참여 후 전두엽 기능이 몰라보게 향상됐다고 보고했다. 창세기 1장 28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모든 생물을 다스릴 수 있도록 동물의 뇌와는 달리 전두엽이라는 기관을 선물로 주셨다. 이 전두엽의 중요성은 최근 뇌 과학 분야와 인지심리학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메타인지’의 기능으로 설명된다. ‘메타인지’ 연구로 저명한 콜롬비아대학 심리학과 리사 손 교수는 메타인지의 두 가지 기능이 ‘자기평가’와 ‘자기조절’이라고 설명한다. ‘자기평가’는 본인이 현재 보고 듣는 것이 정말 자신의 뇌에서 잘 생각, 적용, 기억되고 있는지에 대하여 스스로 점검하는 것이다. ‘자기조절’은 언어와 행동을 언제까지 지속하고 그만해야 할지를 스스로 조절하는 기능이다. 이는 욕구 지연 능력의 중요성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스마트 기기를 내려놓지 못하도록 조종하고 있는 ‘자동 재생 기능’이 바로 문제이다. 이 기능은 ‘알고리즘’의 지시대로 우리의 뇌가 생각, 자기조절, 욕구지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성인과 노인의 경우에도 스마트기기에 과의존하는 경우 기억력과 생각하는 능력의 기능이 현저하게 떨어져 조기 치매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스마트기기 과의존 중독’의 폐해이다. 사실 이 유혹을 이기는 첫 번째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대부분의 플랫폼에서는 이 ‘자동 재생 기능’을 중지시킬 수 있다. 하지만 초기 설정에서 이 기능이 보통 켜져 있기 때문에 사용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 플랫폼에서 좀 더 오래 머물며 서서히 노예가 되어가는 것이다. 실제 상담에서도 내담자의 스마트폰에서 ‘자동 재생 기능’을 중지하도록 코칭하여 중독을 예방하기도 한다. 우리는 코로나 기간 동안 스마트기기를 통해 비대면으로 예배드리는 것에 거의 중독에 가까울 만큼 매우 익숙해졌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다시 일상을 회복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 따라서 서로 대면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예배를 통해 우리의 죄 된 본성과 연약한 의지를 하나님 앞에 스스로 고백하고 믿음을 확고히 다지는 ‘자기평가’와 ‘자기조절’ 기능이 회복돼야 한다. 특히 가정에서는 가족회의를 통해 자녀와 부모가 함께 눈을 마주치며 드리는 가정예배를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말씀을 읽고 자기 삶에 적용하는 것은 ‘자기평가’이다. 또 스마트 기기를 내려놓고 예배에 집중하는 것은 ‘자기조절’이다. 예배시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특별히 선물로 주신 전두엽의 성숙에 직접적인 도움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실천이 ‘스마트기기 중독’을 예방할 수 있는 기독교 가정과 교회의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박은정 교수(목회상담학)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 2023.03.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신앙으로 세상보기
    뉴스 가려보기
  •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출현은 새로운 문명 시대를 열어왔습니다. 학자들은 ‘말’의 발명으로 수렵, 채집 생활이 시작된 1단계, ‘글’의 발명으로 농경사회가 형성된 2단계, ‘인쇄’의 발명으로 산업사회가 본격화된 3단계, 컴퓨터와 결합한 ‘텔레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등장으로 정보사회가 펼쳐진 4단계로 역사 발전과정을 설명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챗GPT’ 등 인공지능, 블록체인, 가상현실과 같은 디지털 범용 기술들이 새로운 4차 산업시대에 선도적 역할을 담당해 나가리라 예측됩니다. 되돌아보면 인터넷, 휴대폰 등 뉴 미디어의 확산은 커뮤니케이션 활동에 획기적 변혁을 초래했습니다. 우선 인터넷은 탁월한 개방성으로 공간의 제한을 무력화시키고 명실상부한 ‘지구촌 공동체’를 실현해 냈습니다. 또한 개인 미디어와 매스 미디어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함으로써 ‘공공영역’과 ‘사적영역’의 구분을 일시에 무너뜨렸습니다. 이 결과 많은 사람들은 IT기술과 접목된 뉴미디어의 등장이 ‘표현의 자유’에 있어 무한한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바람은 상당 부분 실현됐습니다. 하지만 이면에서는 간과할 수 없는 부작용 또한 생겨났습니다. ‘가짜뉴스’는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실제로 현대사회에서 미디어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막강합니다. ‘교과서’며 ‘재판관’이고 ‘세상을 향한 창’입니다. 실제로 영유아들은 부모나 교사보다 TV나 유튜브를 통해 먼저 세상을 배워 나갑니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가 언론의 잣대에 의해 규정됩니다. 또한 개인들은 미디어가 설정해 놓은 프리즘을 통해 외부 환경을 파악하고 사회 현안을 해석합니다. 한 마디로 ‘가짜뉴스’란 ‘뉴스의 형태를 띠지만 실체는 사실이 아닌 거짓된 뉴스’(fake news)를 의미합니다. 이는 언론 매체에 대한 사회 일반의 기본적 신뢰를 숙주로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진실을 조작해 이익을 챙기려는 불순한 시도입니다. 이런 행태는 근래 SNS상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터넷의 기술적 특성으로 인해 뉴스를 취사선택하는 ‘게이트 키핑’(gate keeping)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편집 통제권’(editorial control) 없이 ‘이용자 통제권’(user control)만 존재함을 악용해 가짜뉴스 제작 배포, 마녀사냥식 신상 털기, 테러 수준의 명예훼손 등이 거침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가짜뉴스를 정치적 선동의 수단으로 삼기도 하고, 가공된 뉴스를 활용해 주식시장을 흔들려 한 사례들도 있었습니다. 특히 유튜브 등 개인 미디어의 경우는 ‘조회’와 ‘구독자’ 수가 수익과 직결되는 구조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반인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선정적 내용으로 꾸며진 괴담 수준의 가짜뉴스가 경쟁적으로 쏟아지고 있습니다. “강하고 자극적인 발언을 할수록 보상이 올라 간다”는 것은 이미 통설이 됐고, “유명해진다면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노이즈 마케팅이 일반적인 비즈니스 모델로 정착되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가짜뉴스가 지닌 신속한 전파력입니다. 미국 MIT 공대 연구진에 따르면 자극적인 가짜뉴스는 일반적 뉴스에 비해 전파 속도가 평균 6배 빠른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의표를 찌르는 폭로성 뉴스, 험담과 막말이 섞인 특정인에 대한 인신공격에 더욱 솔깃해하는 인간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언론 자유를 신장시킬 것이라고 기대했던 디지털 공간에서 이처럼 민주 질서를 위협하는 행태들이 거리낌 없이 자행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지금이라도 윤리와 규범을 바로 세우고 사용자들의 책임 의식을 거듭 깨우쳐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밀려오는 정보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 ‘변별력’을 길러나가는 일입니다.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 교육을 통해 초등학교 때부터 각종 매체가 전달하는 내용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힘을 키워나가는 것도 효과적 방안이 될 것입니다. 특히 크리스천들에게는 이 같은 여과 능력의 함양이 더욱 절실히 필요합니다. 성경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전 5:8~9). 온라인을 이용해 범람하는 온갖 반기독교적 정보에 올바르게 대처하기 위해 예리한 통찰력과 분별력을 갖춰 나가야 할 것입니다. 필자는 오늘 이 지면을 빌려 혼탁한 미디어 환경 속에서도 의연히 기독 언론의 정도를 걷고 계신 <순복음가족신문>에 새삼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 신문은 저희가 온 마음 바쳐 사랑하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정체성을 지키는 보루이며, 곳곳에 고귀한 땀과 눈물이 배어있는 생생한 ‘교회행전’입니다. 지난 2년 이 귀중한 신문에 부족한 제가 신앙 시사칼럼을 게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외람되고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 올리며, 한결같이 따뜻한 격려를 보내주신 신문사 여러분과 졸문을 읽어 주시고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영광과 찬송을 주님께! 할렐루야!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 2023.02.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한글, 빛나는 우리의 보물
  • 한국어 학습자가 폭발적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10일 코리아헤럴드가 교육부 자료를 입수해 보도한 바에 의하면 지난해 말 현재 한국어를 외국어 선택 과목으로 채택한 곳은 세계 42개국 1806개 초 중학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3년 만에 40%가 급증한 수치입니다. 온라인상에서의 한국어 열기 또한 뜨겁습니다. 5억 명 회원을 둔 글로벌 외국어 학습 서비스 ‘듀오링고’는 최근 ‘2022년 듀오링고 언어 리포트’를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한국어 학습자는 1070만 명으로 전년 대비 29%가 증가, 수강자 수가 많은 언어 순위 5위에 올랐습니다. 이처럼 한국어에 대한 관심과 향학열이 높아진 데는 물론 ‘한류 열풍’이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한글’ 자체가 지닌 문자로서의 탁월성과 매력입니다. 실제로 한글은 여러 ‘소리글자’ 가운데서도 가장 발달한 ‘음소문자’입니다. 열 자의 모음, 열 네 자의 자음, 27종의 받침을 활용해 수천 개의 말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같은 음소문자로서 세계 공용어화 되어 있는 영어와 견주어도 효율성이 월등합니다. 영어는 인쇄체와 필기체가 다르며, 대문자와 소문자가 구분되고, 꼭 글자대로 읽혀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발음기관과 발음 작용을 본떠 만들어진 한글의 과학성은 정보화 시대의 진전에 따라 더욱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휴대전화의 자판을 보면 하늘을 뜻하는 ‘·’, 땅을 뜻하는 ‘ㅡ’, 사람을 뜻하는 ‘ㅣ’ 석자로 수십 가지의 모음을 다 적을 수 있습니다. 자음은 동일한 자판을 한 번씩 누를 때마다 예삿소리(ㄱ)→거센소리(ㅋ)→된소리(ㄲ) 순으로 변환돼 간단한 조작으로 모든 글자를 쉽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뛰어난 한글의 편이성이 우리의 높은 휴대전화 보급률과 선도적 기술축적을 가능케 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아울러 한글은 ‘배우기 쉽다’는 특장을 지니고 있습니다. 문자를 만든 원리와 사용법을 정연하게 설명한 『훈민정음해례본』의 서두에서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의 동기를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즉 “나라의 말이 공용되는 한자와 통하지 않아 백성들이 제 뜻을 능히 표현하지 못하는 실정임을 긍휼히 여겨 쉽게 익혀 편하게 쓸 수 있는 스물여덟 자를 새로 만든다”는 내용입니다. 이 점을 당시 예조판서 정인지는 보다 실감 있게 설명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다….” 한글은 이런 세종대왕의 애민정신과 자주적 실용주의가 투영돼 구성원리가 간명하고 배우기 쉽습니다. 우리나라가 세계가 주목하는 ‘문맹 퇴치 신화’를 이룩한 배경도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습득의 용이성’이라는 한글의 장점은 복음 전파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한글로 번역된 『성경』은 전도의 사명으로 무장한 기독교인들에 의해 지역, 신분, 성별의 구별 없이 두루 보급되고 읽혀졌습니다. 그들은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한글을 가르쳐가며 전도했고, 신앙을 가지려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기 위해 한글을 배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학자들은 “한글이 진정한 우리 언어로 빠르게 자리 잡는 데 성경이 큰 역할을 했다”고 강조합니다. 국민일보 우성규 기자의 언급대로 “한글 성경과 찬송가의 보급으로 한반도는 문맹에서 벗어났고, 이를 통해 전해진 복음의 메시지는 한국교회 예배와 신앙생활의 중심이 됐던 것”입니다. 이처럼 소중한 한글임에도 근래 우리 사회의 한글 홀대는 선을 한참 넘어섰습니다. 온갖 은어, 비어, 속어, 정체불명의 약어와 합성어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물론 공공 방송에서조차 한글 규범 파괴가 거리낌 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분단 78년의 세월이 초래한 남북한 간의 언어 이질화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민족의 명절인 ‘설’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남북이 함께 기념하는 절기가 점차 사라지는 추세에서 ‘설날’은 지금까지 우리 겨레가 공유하는 몇 안 되는 명일(名日)입니다. 궁극적인 ‘남북통일’은 단순한 ‘제도적 통일’을 넘어 ‘사람 간의 통합’에까지 이르러야 완성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시풍속의 존속과 공유는 통일 여정에서 의미 있는 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언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말과 글은 다름 아닌 생각과 정신의 반영입니다. 따라서 동일한 말과 글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민족공동체로서 기본적 공감대의 토대가 이미 마련돼 있음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이 기반이 더이상 허물어지지 않도록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남북한 언어 이질화의 방지 대책이 시급히 강구돼야만 할 것입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한글은 빛나는 우리의 문화 자산입니다. 겨레의 보물인 우리말, 우리글을 바로 지키고 가꾸어 나가기 위해 온 국민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특히 크리스천들은 성경을 사랑하는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과의 귀중한 소통 매체인 한글에 대해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합니다. 한 나라의 언어가 역사와 문화의 창고를 여는 관건이듯이 성도들에게 한글은 은혜의 보고인 성경을 여는 소중한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 2023.01.1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카타르의 낭보
  • 2002년 한·일 월드컵은 한국 사회를 그 이전과 이후로 구분 짓는 의미 있는 분수령이 됐습니다. 사실 한국 축구대표팀은 1954년 제5회 스위스대회에 첫 출전한 이래 다섯 번이나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음에도 단 1승을 거두지 못하고 있던 형편이었습니다. 하지만 6월 4일 첫 경기에서 폴란드를 2대 0으로 꺾은 후 강호 포르투갈, 이탈리아, 우승 후보 스페인까지 연달아 격파하며 4강에 오르는 대이변을 연출했습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 기간 모두에게 축구는 ‘그냥 축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팀의 경기를 매개로 빨간색 티셔츠를 입은 수백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광장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춤추고 함께 함성을 질렀습니다. 세계적 명물로 자리 잡은 자생적 ‘길거리 응원’의 시작이었습니다. 한국 축구의 4강 신화에 세계가 놀랐지만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우리 스스로였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자신감, 동시대를 살아가는 국민적 유대감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가 됐습니다. 이 열기는 IMF 경제위기 극복, 폭발적인 참여민주주의 확대, 창발적인 한류 문화 확산으로 이어지며 우리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2022년, 제22회 카타르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은 또 한 번의 기적을 일구어냈습니다. 통계전문가들의 ‘16강 진출 가능성 9%’의 예측을 여지없이 깨뜨린 이 반전 드라마는 투철한 ‘원팀 정신’으로부터 비롯됐습니다. 파울루 벤투 감독을 위시한 코치진과 27명의 선수들이 똘똘 뭉쳤습니다. 그 결과 경기장을 종횡무진 누비는 한국형 ‘빌드업 축구’가 가능했고, 어떤 팀과 맞붙어도 밀리지 않는 강인한 뚝심이 발휘될 수 있었습니다. 구성원들 간의 신뢰 역시 돋보였습니다. 특히 주장 손흥민 선수의 리더십은 발군이었습니다. 그는 월드컵을 3주 앞두고 소속팀 경기에서 당한 안와골절로 안면 보호대를 착용한 채 전 경기를 소화했습니다. “불편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3년간 마스크를 쓰고 계신 국민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고 의연히 대답했습니다. 개막 전 “단 1%의 가능성이 있어도 앞만 보고 달려가겠다”며 부상 투혼을 예고했던 그는 약속대로 “몸이 부서지도록” 뛰었습니다. 실제로 H조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벼랑 끝에 몰렸던 한국팀은 후반 추가시간 손흥민-황희찬으로 연결된 극적인 역전 골로 포르투갈에 2대 1 승리를 거두며 16강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16강전 진출이 확정된 직후 권경원, 조규성 선수는 관중에게서 건네받은 태극기를 펼쳐 들었습니다. 그 안에는 눈길을 사로잡는 뚜렷한 한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본래 프로게이머 김혁규 선수가 7수 끝에 세계 대회를 제패하며 했던 이 말은 다시 새롭게 부각되며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우선 대회 내내 보여준 대표팀의 모습이 압축된 표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흔들리는 이 세대에게 던지는 속 깊은 응원의 뜻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정 우리 팀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선제골을 허용하고도 위축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불퇴전의 투혼으로 국민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2022 카타르 월드컵 기간 특별히 우리 팀의 경기가 열렸던 13일간 축구 덕택에 대한민국은 모처럼 하나가 됐습니다.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도전하는 선수들의 모습은 모두에게 커다란 감동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대표팀의 선전은 코로나 블루, 경제 한파, 잦은 사회적 갈등으로 침체돼 있던 한국 사회에 심기일전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어느덧 한 해의 끝자락에 섰습니다. 또 한 번의 ‘송구영신’의 시간을 맞으며 영혼과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을 때입니다. 성경은 신앙생활을 경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우리 선수들이 월드컵 스타디움을 뛰고 달렸듯 성도들도 인생의 경기장을 달음박질하고 있습니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경주자처럼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저마다의 목표를 향해 인생행로를 달려가고 있습니다. 한없이 감사한 것은 이 신앙 노정에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해 주신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저희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한 스타플레이어로 여겨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는 말씀대로 열렬한 서포터가 돼 뜨겁게 응원해 주십니다. 독자 여러분! 다사다난했던 지난 한 해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신발 끈을 고쳐 매고 힘을 내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스타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영원한 팬이 되어주십니다. 다가오는 2023년 새해, 예수님 안에서 항상 승리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 2022.12.1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새책소개
    성공에 이르는 12가지 지혜
  • - 이영훈 목사 지음 / 교회성장연구소 - 크리스천의 삶을 성공으로 이끄는 12가지 비결 이영훈 목사 “믿음으로 꿈꾸는 자는 반드시 해낼 수 있다” 이영훈 담임목사는 성공에 대해 “정성을 다해 원하는 목표를 이루어 낸 것이 바로 성공”이라고 말하고 있다. 더불어 “성공은 이루고자 하는 꿈과 목표를 가진 자, 그 꿈과 목표를 향해 올바른 방법을 가지고 성실하게 노력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인생의 열매”라고 전한다. 이영훈 목사는 2023년을 맞이하면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주 안에서 품은 꿈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하는 지 깨달은 바를 나누고 싶은 바람을 품었다. 그 바람은 신년 축복 열두 광주리 새벽기도회를 통해 ‘성공에 이르는 12가지 지혜’ 주제의 설교로 이어졌고 이 책은 이를 토대로 집필됐다. 혼란의 시대, 격변하는 세태 속에 모든 사람들은 예측할 수 없는 불안으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다. 이러한 때에 가정과 일터, 교회 등 삶의 영역에서 믿음을 지키고 성공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 중인 크리스천들에게 이 책은 온전한 믿음과 인생의 성공 비결을 알려주는 안내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주 안에서 품은 꿈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성공의 지혜를 12개의 주제로 다룬다. “꿈꾸는 자가 되라,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소유하라, 절대긍정의 믿음을 소유하라, 장애물을 뛰어넘어라,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건히 서라, 분명한 자화상을 가져라, 기도의 사람이 되라, 시간의 관리자가 되라, 자기를 계발하라, 삶의 자세를 바꿔라, 사명에 붙들려 살라, 존경받는 리더가 되라.” 이영훈 목사는 무엇보다 말씀 위에 굳건히 서서 믿음으로 꿈꾸는 자는 반드시 해낼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책에는 12가지 성공의 지혜와 방법을 체크 리스트와 함께 제시해 인생에서 회복해야 할 것을 찾아 바로잡도록 하며,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나은 미래로 도약할 수 있는 성공 다이어리도 적어보도록 구성됐다. 세상을 살아갈 용기와 삶의 터닝 포인트가 필요하다면 이 책을 따라 삶을 관조하고 재정비해보면 어떨까? 단호하지만 진정 어린 저자의 조언은 삶의 무게에 지친 그리스도인들에게 생각 전환의 기회를 만들어줄 것이다.
  • 2023.03.17 / 복순희 기자

    ‘2023 감사QT365’ 출간
  • 성경일독, QT묵상, 감동예화, 감사쓰기가 한 권에
    풍성한 신앙생활을 위한 최고의 선물 2023년 풍성한 신앙생활을 이끌 최고의 안내서 『감사QT365』 가 출간됐다. 이번 감사QT 에디션은 한 권의 책으로 1년 치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지난번에 이어 이영훈 목사의 새 감동 메시지가 365편 수록돼 있고 매일 ‘나의 감사’를 쓸 수 있는 란도 제공됐다. 책이 인도하는 대로 매일 감사 메시지를 읽고, 찬양과 말씀 묵상의 QT를 지속한다면 365일 감사가 넘치는 한 해를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월력과 함께 매일 제시되는 ‘오늘의 일독성경’ 표에 따라 주어진 성경 말씀을 읽으면 신앙 훈련도 가능하다. 한 해 동안 구약 1독, 신약 2독을 하게 되니 이 책 한권이면 말씀과 감사가 충만한 1년을 보낼 수 있다. 그리고 그날의 말씀을 읽은 후에 함께 수록된 찬송가를 부르며 주님의 은혜를 구해보자. 찬송가 전 절의 가사가 제공돼 있어 책을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이후 오늘의 일독성경 범위 내에서 주어진 그날의 감사 말씀을 읽고 ‘나의 감사’를 적으면 큰 감사부터 아주 작은 감사까지 생각나 은혜롭다. 또 이런 감사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주님에 대한 사랑과 받은 은혜를 이웃에게 전한다면 기쁨과 성령 충만함이 배가될 것이다. 이 책에는 오늘 나의 사랑과 전도가 필요한 이들의 이름을 적고 그들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떤 기도를 해야 할지 적는 전도노트가 마련돼 있다. 저자인 이영훈 목사는 책 머리말에 “경건의 습관을 통해 신앙의 기초를 단단히 쌓아가면 어떤 풍랑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집을 지을 수 있다. 매일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며 이 책을 통해 1년 365일 모든 순간 절대감사, 한평생 감사, 넘치는 감사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가 되기를 소망했다. 감사QT365를 통해 범사에 감사하며 마음의 평강을 누리고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전도의 사명을 놓지 않는다면 2023년은 영적 성숙에 이르는 한 해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 2022.12.09 / 김주영 기자

    위대한 복음전도자 조용기 목사 평전 『희망의 목회자』발간
  • 편저자 이영훈 목사 “신앙 유산 계승 발전 되길”
    지난해 9월 14일 하나님 품에 안긴 영산 조용기 목사의 생애와 신학을 담은 평전 『희망의 목회자』(서울말씀사)가 발간됐다. 편저자는 이영훈 목사로 조용기 목사가 평생 몸담고 사역했던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국제신학연구원과 정확한 사료와 증언들을 기반으로 조 목사의 삶과 신학을 반추하여 출간한 평전이기에 의미가 크다. 평전을 펴낸 이영훈 목사는 “영적인 아버지이자 스승이셨으며 사역을 위한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셨던 조용기 목사님의 빈자리는 남은 평생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것”이라며 “목사님을 따라 신앙의 길을 걷던 사람들은 그 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삶의 희망을 얻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목사님의 일생과 남기신 신학의 유산이 잘 계승·발전되어 새로운 세대 가운데에서도 오순절 성령 충만의 영성이 거대한 불꽃처럼 일어나길 기도한다”고 소원했다. 평전은 1부 ‘조용기 목사의 생애와 목회’ 2부 ‘조용기 목사의 신학으로 구성돼 있으며 500여 페이지 분량이다. 폐병으로 만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주의 종이 되고 가난한 곳에서 시작된 천막교회 사역, 이후 서대문 그리고 여의도로 교회가 이전하면서 폭발적 교회 성장을 이루고 세계복음화와 사회구원을 향한 헌신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 삼중축복과 오중복음, 4차원의 영성을 통해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 피어난 희망의 복음, 십자가의 은혜 속에 탄생한 순복음 신앙이 성도들의 삶에 가져다준 변화를 그리고 있다. 평전이 발간되자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는 “조 목사님은 세계적인 부흥사, 탁월한 설교가, 기도와 성령의 사람이요 참 목회자, 목회자들의 스승, 해외 교계 지도자들이 가장 만나보고 싶어 하는 분이셨다”고 회상했다. 독일 튀빙겐대학교 위르겐 몰트만 명예교수는 “목사님은 위대한 복음 증거자이자 뛰어난 신학자이면서 동시에 기도의 사람이셨다”라고 추모사를 전했다. 조용기 목사는 이제 우리 곁에 없지만 책을 읽다보면 생생했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 하다. “믿음은 희망에서, 희망은 심음에서, 심음은 입술의 고백에서 나옵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하면 됩니다. 해 봅시다.”
  • 2022.10.21 / 오정선 기자

    문화계 소식
    스마트폰 생활백서-저절로 성경일독
  • “스마트폰 켤 때마다 성경구절이 보여요!” 잠금화면 활용한 성경 묵상 앱 말씀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에게 매순간 단비와 같은 성경 말씀을 전달해 주는 앱이 있다. 바로 ‘저절로 성경일독’이다. 저절로 성경일독 앱은 스마트폰 화면을 켤 때마다 성경구절이 나타난다. 화면 중앙에는 성경 구절이, 하단에는 다음 구절로 넘어가는 화살표 기호와 북마크, 공유하기, 잠금해제 버튼이 있다. 화면에 나오는 성경 구절은 화면이 꺼졌다 다시 켜지면 다음 절로 넘어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부담 없이 성경을 일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앱에서는 말씀 공유 기능이 가장 눈에 띈다. 묵상하고 있는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면 그 자리에서 말씀 카드를 만들어 SNS로 즉시 공유할 수 있다. 이는 모바일 전도 도구로도 활용이 가능해 전도 대상자에게 유용하다. 성경은 개역개정, 개역한글, 현대어성경, 새번역과 영어 성경인 KJV, NIV, NLT 버전을 제공하고 있는데 한글과 영어 두가지 성경을 동시에 볼 수 있는 특징도 있다. 참고로 개역개정, 개역한글, KJV 성경은 오디오도 함께 제공된다. 저절로 성경일독 앱은 안드로이드기반(삼성 및 LG) 스마트폰에서 제공하는 구글 Play스토어에서만 서비스가 제공된다. 앱을 실행하면 광고가 나타나지만 조금의 불편을 감수하면 말씀을 묵상하고 공유하는데 지장이 없다. 또한 결제해야 이용할 수 있는 ‘읽기모드’는 우리 교회 앱 성경과 동일한 기능이므로 오랜 시간 성경을 읽을 때는 교회 앱을 활용할 것을 추천한다.
  • 2022.07.29 / 금지환 기자

    부활절 맞아 ‘기독 영화 특별전’열려
  • 유명 기독영화인『천로역정: 천국을 찾아서』, 『바울』등을 극장에서 볼 수 있는 특별전이 열린다. CBS가 부활절을 맞이해 진행하는 기독영화 특별전은 4월 1일부터 14일까지 진행된다. 서울 지역은 서울극장, 인천 경기 지역은 CGV계양, 인천, 일산, 소풍, 롯데시네마 안산, 안산명화극장 등에서 볼 수 있다. 기독 영화 특별전에서는 영화 『바울』이 마지막으로 상영돼 아직 관람하지 못한 관객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누적 관객 수 약 30만 명을 기록한 『천로역정: 천국을 찾아서』와 개봉 이후 꾸준한 관심을 받고 있는 『예수는 역사다』, 『가나의 혼인잔치: 언약』등은 관객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예정이다. 이어 코로나19로 IPTV에서 런칭한 영화들도 처음으로 극장에서 상영된다. IPTV 최초 개봉 영화 『내게 찾아온 사랑』,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담은 『아버지의 기억』에 이어 낮에는 목사님, 밤에는 프로레슬러가 된 목사님의 숨겨진 비밀이 담긴 『복면목사』 등 다양한 장르와 선호를 충족시킬 수 있는 영화를 선보인다.
  • 2021.03.25 / 이미나 기자

    가슴 뻥 뚫리는 뮤지컬 ‘지저스’
  • 혼돈한 세상에서 행복 찾는 사람들을 위한 메시지 영원한 지혜 담긴 성경 말씀으로 용기와 희망 선사 나를 짓누르는 모든 것을 한 번에 날려줄 뮤지컬, 성경 속 위로의 이야기를 락으로 전달한다.’뮤지컬 ‘지저스’가 서울 대학로 원패스아트홀에서 상영되고 있다. 지저스는 1971년 뉴욕 오프 브로드웨이 초연 후 총 3000회 이상을 공연한 흥행작 뮤지컬 ‘가스펠’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신약성경 마태복음의 총 43개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를 통해 교훈과 가치를 전한다. 목적과 방향을 잃고 문제를 겪는 많은 현대인들에게 길 되신 예수님의 지혜를 알려주기 위한 메시지를 담아냈다. 예수님의 일대기보다 가르침에 초점을 맞춰 연극놀이식으로 스토리를 이어가니 지루함이 없다. 거기에 음악 장르 중 하나인 락을 뮤지컬에 접목하여 듣기만 해도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한 보이스는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뮤지컬 1막에서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 ‘부자와 나사로’ ‘돌아온 탕자’ 등 초신자들도 알만한 이야기들을 재밌게 풀어내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전달하고 ‘날마다’ ‘이 백성 구원’ ‘내 영혼의 은총’ ‘세상의 빛’ 등 찬양으로 분위기가 고조된다. 2막에서는 바리새인의 시험과 간음한 여인 등 진지한 주제로 ‘돌아와요’ ‘내 곁에’ ‘버드나무 가지위에’ 등의 노래를 들려주며 관객의 감성을 자극한다. 연극 보잉보잉, 마술가게 등 탁월한 연출력으로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해온 연출가 손남목과 뮤지컬 그림자를 판 사나이, 록키호러쇼, 신흥무관학교 등 화려한 안무로 뮤지컬계의 트렌드를 이끌고 있는 안무가 채현원이 함께해 뮤지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보이고 있다. 또한 걸그룹 베이비복스 출신 간미연 타히티 제리 안소현을 비롯해 문장원 김현국 윤소미 신시온 등 실력파 배우들이 출연해 폭발적인 락 음악과 안무, 웃음과 가슴 뭉클함으로 하나 되는 무대와 객석을 만들어내고 있다. 소극장의 이점을 살려 관객과 함께 호흡하며 뜨거운 감동과 전율을 선사한다. 뮤지컬 지저스는 인터파크와 네이버 평점이 9.2에 달하며 ‘기독교인들이 본다면 은혜로운 공연이고 비기독교인이라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공연이다. 예수님의 일생을 락음악과 함께하는 최고의 공연이었다(actor***)’ 등의 평을 얻고 있다. 상영기간이 정해지지 않은 오픈런 공연으로 매주 월, 화요일에만 공연이 없다. 본 공연은 총 130분 공연(인터미션 10분)이며 만 10세 이상 관람가로 초등학교 저학년 관객의 경우 생년월일 확인이 가능한 증빙자료를 필요로 한다. 티켓구매는 인터파크에서 가능하다. <공연안내> - 기간 : 2020.01.15.~ 오픈런 - 시간 : 수·목요일 - 19:30 / 금요일 - 16:30, 19:30 / 토요일 - 15:00, 19:00 / 일요일 - 14:00, 18:00 ※ 매주 월·화요일 공연 없음 - 장소 : 원패스아트홀
  • 2020.02.23 / 김주영 기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31. 후안무치(厚顔無恥) 시므이의 죽음②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솔로몬에 의해 죄의 대가를 받게 된 시므이 "왕이 사람을 보내어 시므이를 불러서 이르되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왕상 2:36~37) 3. 솔로몬의 숙청 작업과 시므이의 죽음 솔로몬은 왕이 된 후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한다. 숙청의 이유, 방법, 숙청당한 인물들만 보면 공포정치를 휘둘렀던 절대군주 못지않다. 숙청의 대상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였던 대제사장 아비아달, 다윗을 섬기며 충성을 다했던 군대사령관 요압, 그리고 자신의 형이자 왕자였던 아도니야까지 잠재적으로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다윗을 조롱했던 시므이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1) 아도니야 아도니야는 다윗의 네 번째 아들이었다. 다윗의 첫째 아들은 암논이었고, 둘째는 갈멜 여인 아비가일이 낳은 다니엘, 셋째는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가 낳은 압살롬, 넷째는 학깃이 낳은 아도니야였다. 솔로몬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서 열 번째쯤 된다(대상 3:1~5). 그런데 첫째 아들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였던 다말을 강간한 사건 때문에 압살롬에게 죽임 당했고, 압살롬은 반란 후 죽임을 당했다. 다윗의 첫째와 셋째 아들이 죽은 것이다. 둘째 아들 다니엘은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윗의 둘째 아들이었다는 기록 외에는 성경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 일찍 죽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다윗의 허락도 없이 스스로 왕이 되었음을 선포한다(왕상 1:5~11). 이때 다윗의 군대 사령관이었던 요압과 대제사장이었던 아비아달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다(왕하 1:7). 하지만 아도니야의 시도는 일일천하에 그쳤다. 솔로몬은 왕이 된 후, 제단 뿔을 잡고 목숨을 구걸하는 아도니야(왕상 1:51)를 살려주며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그것은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왕상 1:52). 하지만 아도니야는 다윗의 침실에서 수종을 들었던 수넴 여인 아비삭을 자신의 아내로 삼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솔로몬은 이것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아도니야를 처형해 버렸다(왕상 2:13~25). 2) 아비아달 아비아달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10번째 대제사장이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기약이 없는 망명길에 올라야만 했다. 이스라엘 땅에 많은 도시와 지역이 있었지만 다윗이 선택한 첫 장소는 대제사장이 있던 놉이었다(삼상 21:1). 심신이 지쳐있던 다윗은 아히멜렉의 도움으로 음식을 먹고 그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였던 골리앗의 칼을 얻었다(삼상 21:4~10). 사울은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와줬다는 것을 문제 삼아 도엑을 시켜 아히멜렉과 놉의 제사장 85명을 한 날에 살육했다(삼상 22:18). 이때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였던 아비아달만이 목숨을 건져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아비아달은 지체 없이 한걸음에 그일라에 있던 다윗에게로 향했다. 아비아달이 제사장의 영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에봇을 가지고 도망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삼상 23:6). 아울러 우림과 둠밈을 대제사장의 에봇 흉패 안에 보관하라고 되어 있기에 우림과 둠밈까지 가지고 온 것으로 볼 수 있다(출 28:30). 다윗은 이렇게 사선을 넘어 온 아비아달을 대제사장으로 삼았다. 그러나 솔로몬은 왕위에 오른 직후 아비아달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던 것 때문에 아비아달을 제사장 직분에서 파면시키고 그의 고향으로 내쫓아 버렸다(왕상 2:27). 3) 요압 요압이라는 이름의 뜻은 ‘야훼는 아버지이다’와 ‘야훼는 하나님이시다’는 뜻이다. 요압은 다윗과 함께 오랜 세월 전쟁터를 누볐던 군대 장관이다. 사울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이 되었고, 헤브론에서 이미 왕이 되어 있던 다윗은 피할 수 없는 전쟁을 하게 되었다. 기브온 전투는 다윗이 사울의 남아있던 세력과 벌인 최초의 전투이다. 이때 이스보셋의 장군인 아브넬과 다윗의 군대를 이끌던 요압이 맞붙게 되었다. 기브온 전투는 요압의 승리로 끝났지만, 요압의 동생 아사헬은 아브넬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요압은 이것에 대한 앙심을 품고 있었다. 한편 아브넬은 사울의 자손들과 다윗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종식하고 통일왕국을 탄생시키려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헤브론에 있던 다윗을 찾아와 평화의 조약을 맺고 통일왕국의 꿈을 향한 큰 걸음을 뗐다(삼하 3:8~21). 뒤늦게 이것을 알게 된 요압은 아브넬을 쫓아가 다시 헤브론으로 유인해 왔다. 그리고 그에게 조용히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속여 무방비 상태에 있던 아브넬을 살해했다(삼하 3:27). 성경 여러 곳에서 정치적 야망을 숨기지 못했던 요압이 평화적인 통일이 이루어진 후 모든 공이 아브넬에게 돌아갈 것을 걱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통일이 이루어진 후 자신의 입지가 약해질 것에 대한 염려와 전쟁 중에 죽은 동생의 원한을 한 번에 갚고자 벌인 일이었다. 다윗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모든 백성에게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큰 용사였던 아브넬이 죽은 것을 애도하도록 했다(삼하 3:31).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요압에게 묻지 않았고 어떤 벌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솔로몬은 달랐다. 표면적인 이유는 요압이 죄 없는 아브넬과 유다 군사령관이었던 예델의 아들 아마사를 죽인 것 때문이었지만(왕상 2:31), 실상은 요압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던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4) 시므이 솔로몬의 서슬이 퍼런 칼날은 그의 왕권을 위협할 현재와 미래의 잠재적 세력을 제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선대왕이었던 다윗이 살려 준 시므이를 향한 솔로몬의 마지막 경고이다. 솔로몬은 시므이의 목숨을 살려 주는 대신 절대 예루살렘을 벗어나지 말라고 경고했다(왕상 2:36~37). 왜 솔로몬은 베냐민 자손이고 바후림에서 터를 잡고 있던 시므이를 굳이 예루살렘 성에 붙잡아 두고 절대 떠나지 말라고 했을까? 사울의 친족이었던 시므이가 예루살렘을 벗어나 어떤 정치적인 행위나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과 다윗을 조롱했던 시므이에 대한 마지막 경고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므이는 이것을 너무나 쉽게 생각했다. 자신의 노예 두 명이 도망을 가자 솔로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벗어났다(왕상 2:39~40). 솔로몬은 브나야에게 명령을 내려 시므이를 단숨에 처형했다(왕상 2:45).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초라한 모습으로 피난길에 올랐을 때 그를 따라가며 조롱하고 멸시하고 저주를 퍼붓던 시므이였다. 하지만 압살롬에 의한 왕자의 난이 실패로 끝나고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선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바싹 엎드려 비굴한 모습을 보였던 사람이었다. 다윗의 아량과 은혜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시므이는 솔로몬에 의해 그의 죄에 대한 대가를 받게 되었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8.01 / 이상윤 목사 기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30.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시므이의 죽음①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책망으로 겸허히 받아들인 다윗 "왕의 가족을 건너가게 하며 왕이 좋게 여기는 대로 쓰게 하려 하여 나룻배로 건너가니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 앞에 엎드려 왕께 아뢰되 내 주여 원하건대 내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왕의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삼하 19:18~19) 사무엘하 15장과 19장은 후안무치한 시므이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무엘하 15장 30절은 다윗의 인생 중 가장 비참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왕이었지만 그의 몰골 어디에도 왕의 위엄과 기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때 다윗은 머리는 산발하고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초라한 모습으로 감람산 고개를 넘고 있었다. 다윗은 천 년의 시간이 지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으며 호산나를 외치던 길을 역방향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눈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방 나라의 왕이나 군사들에게 쫓긴 것도 아니다. 자신의 아들에게 잡혀 죽지 않기 위해 도망가는 신세였다. 압살롬은 아버지인 다윗이 예루살렘에 남겨놓은 10명의 후궁들과 공개적으로 성적인 관계를 맺었다. 다윗은 왕의 권위뿐만 아니라 친부로서의 자존감도 철저히 묵살되었다. 더 낮아질 수도 초라해질 수도 없는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다. 사실 압살롬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다윗의 셋째 아들이었던 압살롬은 가만히 있기만 해도 다윗을 이어 왕이 될 수 있었다. 다윗의 장남이었던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강간한 사건 때문에 이미 죽임을 당해 세상에 없었다. 다윗의 차남은 다니엘이다. 다니엘은 나발의 아내였으나(삼하 2:2) 나발이 죽은 후 다윗의 아내가 된(삼상 25:39~43) 갈멜 여인 아비가일이 낳은 아들이다(대상 3:1). 하지만 그의 이름 외에 추가적인 자료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압살롬이 죽은 후 다윗의 넷째 아들이었던 아도니야가 장남 행사를 한 것으로 보아(왕상 1:5~10) 다니엘은 일찍 죽었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의 장남과 차남이 죽은 상황에서 셋째 아들이었던 압살롬은 조금만 인내력을 가지고 기다렸으면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혀 반란을 일으켰다. 심지어 아버지 다윗을 죽여서라도 왕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압살롬의 반란은 처음에는 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헤브론에서 시작한 반란은 수도인 예루살렘 입성까지 파죽지세로 거칠 것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1. 다윗에게 저주를 퍼붓는 시므이 다윗이 예루살렘을 버리고 바후림을 지나고 있을 때 사울의 친족이요 게라의 아들이었던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기 시작했다(삼하 16:5). 다윗은 물론 그의 추종자들에게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고 저주를 퍼부었다(삼하 16:13). 자신을 그렇게 집요하게 괴롭히고 죽이려고 했던 사울에게 관용을 베풀었던 다윗이다. 그러나 사울이 죽고 난 이후에도 사울의 남은 자손들은 끊임없이 다윗을 참소하고 그의 왕권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다윗이 마음만 먹었다면 사울의 친족을 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친족들에게 많은 특혜와 은혜를 베풀었고 사울의 친족들은 대부분 죽음을 면했다. 그들의 토지나 소유권도 빼앗지 않았다. 이런 다윗의 은혜를 받았던 사울의 자손 중의 한 사람이 시므이다. 그렇게 살아남았던 시므이가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피난길에 오르자 저주를 퍼부었다. 비록 피난길에 올랐지만 전장을 누비며 무수한 공을 세웠던 장수들이 다윗과 함께 있었고 많은 백성이 다윗을 따르고 있었다(삼하 16:6). 시므이의 저주를 듣고 있던 다윗의 군대장관 아비새가 당장 가서 시므이의 목을 베어 버리겠다고 말한다(삼하 16:9).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해 극심한 모멸감에 시달렸을 다윗이다. 그래서 어딘가에 분풀이라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시므이는 더없이 좋은 화풀이 대상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시므이의 목숨을 취하지 않는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책망으로, 또한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고난이 은혜로 바뀌는 전환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므이의 생명을 뺏지 않고 그가 퍼붓는 저주를 묵묵히 참아냈다(삼하 16:11). 2. 급변한 시므이의 태도 다윗이 가장 힘들었을 때, 조롱과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의 태도는 압살롬이 죽고 왕자의 난이 정리된 이후 급변한다. 압살롬이 죽자 제사장들과 신하들은 서둘러 다윗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키는 일을 진행한다(삼하 19:11~12). 다윗은 피난을 왔던 길을 따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예루살렘을 빠져 나올 때 시므이가 저주를 퍼부었던 바후림에 이르렀다. 바후림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4㎞ 정도 떨어진 곳이라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시므이는 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귀환 행렬이 바후림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무엘하 19장 16~18절은 이때 시므이가 취한 행동을 이렇게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1) 유다 사람들과 동행(삼하 19:16) 사울의 혈육으로 베냐민 지파였던 시므이는 급히 유다 사람들과 다윗을 맞으러 나간다. 다윗의 피난 행렬을 쫓아가며 돌을 던지고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에게서 다윗에 대한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다윗이 다시 바후림에 왔을 때 그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2) 시므이의 세력(삼하 19:17) 사무엘하 19장 17절은 사울이 죽은 후 시므이가 어떻게 세력을 키우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다윗을 맞으러 나올 때 시므이는 신변의 위협을 느꼈는지 자기의 모든 세력을 데리고 나온다. 베냐민 사람 1000명과 열다섯 명의 아들, 종으로 부리고 있던 하인 스무 명을 대동했다. 시므이는 호시탐탐 사울 왕조의 재건을 꿈꾸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 고대 근동에서 개인이 이 정도의 규모를 유지하고 운영할 이유도 없다. 3) 용서를 구하는 시므이(삼하 19:18~20) 시므이는 요단강을 건너려고 하는 다윗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한다. 시므이가 특별히 구하고 싶었던 것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나오던 날에 저질렀던 패역한 일'에 대한 용서였다(삼하 19:19). 그가 다윗을 쫓아가며 했던 저주이다. 이 말을 들은 아비새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인 다윗에게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를 살려 둘 수 없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당장 시므이를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삼하 19:21). 이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한 개인이 아니라 정치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시므이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사울의 남은 세력들의 잠재적 위협 요소를 제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시므이를 용서하고 그의 생명을 살려주는 아량을 베푼다(삼하 19:22~23). 다윗은 자신이 시므이를 용서하는 것으로 더는 피를 흘리지 않고 모든 것을 덮고 이 문제를 일단락 지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시므이의 문제는 다윗이 죽은 후 솔로몬에게까지 이어진다. (다음 호에 계속)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7.04 / 이상윤 목사 기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29. 기브온 족속과 사울 왕조의 얽히고 설킨 이야기(Ⅱ)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과 은혜, 화해와 용서 안에서 이뤄져야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그들은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그들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그들에게 물으니라"(삼하21:1~2) 2) 기브온족의 이스라엘 편입 가나안 족속의 종교 혼합주의, 쾌락주의, 윤리적 타락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과학적인 지식이 없었던 시대에 기이한 자연적 현상들은 다신론적 맹신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유대교는 손쉬운 다신론이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 유일신 사상을 갖고 있었다. 유일신 사상은 인간의 감성이나 종교적 편의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율법에 기록된 내용과 방식대로 종교적 행위가 이루어져야 했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한 삶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쾌락주의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아주 쉽게 유혹으로 이끌어 갔다. 그 결과 거룩한 삶은 죄 된 삶으로 쉽게 바뀌었다. 이런 위험에 노출되고 나중에는 헤어날 수 없게 될 것을 아셨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한 것은 가나안 족속과 근원적인 단절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기브온족에게 속아 조약을 체결했다. 그것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이방 족속의 방식대로 계약을 체결했다. 조약 자체도 문제였지만 방법과 절차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고대 근동의 전통에 따라 기브온 사람의 음식을 취하는 방식으로 평화 조약을 맺었다(수 9:15). 서로 먹고 마시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평화의 조약이 이루어졌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기브온족에게 속고 있었다. 성경은 기브온과 체결한 계약 방식이 '그들(기브온 사신)의 양식을 취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수 9:14). 기브온의 사신들이 갖고 온 음식은 곰팡이가 핀 일반적으로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는데 어떻게 이것을 먹을 수 있었을까?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첫째, 계약 체결을 위해 곰팡이가 난 양식의 일부를 실제로 먹었다는 것과 둘째, 그냥 양식을 취하기만 하고 먹지는 않았다는 해석이다. 지금이라면 당연히 곰팡이가 난 음식을 먹지 않았겠지만, 근동 지방의 관습을 고려할 때 계약 체결의 완성을 위해 곰팡이 피지 않은 쪽의 음식 일부를 떼어 나눠 먹었을 가능성이 크다. 음식을 먹고 안 먹고의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기브온 족속과 계약을 체결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수장이었던 여호수아는 기브온족을 죽이지 않고 살리겠다는 조약을 맺었고 이스라엘 지파의 족장들도 모두 동의했다(수 9:15). 그러나 그들이 저지른 엄청난 실수를 깨닫는 데는 3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계략에 넘어간 것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체결했기에(수 9:18) 다시 바꿀 수 없었다. 속임수까지 써가며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했던 기브온 사람들은 그들의 소원대로 이스라엘 민족에 동화되었고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사울 왕 때 완전히 유린당하였고 기브온족 전체가 몰살당할 위기에 처하게 됐다. 2. 역사를 왜곡하는 사울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라는 영예를 안았으나 여러 번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행동을 했다. 여호수아는 기브온족을 살려 하나님의 제단을 위해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자들로 삼았다(수 9:27). 이런 기브온족의 삶은 비록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며 헌신 된 삶을 살았기에 선교적인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구약의 역사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정이야 어쨌든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민족에 편입돼 성전을 섬기며 살아오던 기브온족이었는데 사울왕이 갑자기 그들을 말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 성경은 사울이 이런 일을 계획하고 실행한 것은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삼하 21:2). 이 사건은 기브온 족속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성경은 사울이 언제 얼마나 많은 기브온 사람을 죽였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무엘하 21장 5절은 사울이 기브온족을 '학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칼라누'이다. 이 단어의 뜻은 '끝내다'(finish), '완성하다'(accomplish)는 의미이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 한두 명을 죽인 것이 아니라 기브온족 전체를 말살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고 실제로 실천에 옮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고한 기브온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사울과 다윗의 왕권 교체와 맞물려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완전히 묻혀 버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것을 잊지 않으셨다. 다윗왕 때 3년 동안의 큰 기근이 발생했다. 다윗은 계속되는 가뭄이 무엇 때문인지 알기를 원했고, 하나님께서 사울이 흘린 기브온 사람들의 피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삼하 21:1). 3. 솔로몬의 재판에 비할 다윗의 판결 왕위에 오르기 전, 사울은 한없이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보좌에 오른 뒤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사울은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 기브온족도 마찬가지였다. 피의 순수성을 강조하며 이방 족속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일부 백성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고 있던 기브온족을 완전히 말살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다윗이 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다윗은 왕으로 등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바로잡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다윗은 사울왕 때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울의 때 뒤틀렸던 역사와 공의를 다윗을 통해 다시 바로 세우기를 원하셨다. 성경에 기록된 재판 중에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두 판결은 솔로몬의 판결과 다윗의 판결일 것이다.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한 아기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다투던 두 여인에 대한 솔로몬의 판결(왕상3:16~28)은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판결 중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솔로몬의 판결과 같이 지혜가 번뜩이는 판결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게 한 것이 다윗의 판결이다. 1) 피해자 중심의 판결 다윗은 먼저 기브온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결해 줬으면 좋겠냐'고 묻는다(삼하 21:3). 일방적인 행정명령이나 법 집행이 아니라 피해자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기브온 사람들은 자신들을 살육하는데 가담했던 모든 사람을 벌해 달라고 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 민족을 학살하는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사울의 아들 7명을 내어 달라고 요구한다(삼하 21:6). 사울의 일곱 아들은 한날에 기브온 사람들에 의해 목매달려 죽었다. 그런데 여기서 기브온족의 모든 원한이 풀리고 3년 동안 기근으로 고통을 받던 땅에 비가 내린 것은 아니다. 2) 화해의 판결 비록 죄 없는 기브온 사람을 학살하는 일을 기획하고 실행했다가 그 벌로 죽은 사울의 아들들이었지만 다윗은 목이 매여 죽은 이들의 시체를 거둬들인다. 그리고 사울과 요나단의 뼈와 함께 그들의 할아버지이며 사울의 아버지인 기스의 묘에 가족장으로 합장을 한다. 이렇게 다윗이 죽은 사울의 아들들을 위해 장사 지내는 것을 마쳤을 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삼하 21:14).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것은 단순히 원한과 억울함을 푸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과 은혜, 화해와 용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다윗이 사울의 아들들의 시체를 거둬들여 가족묘에 장사지낸 것처럼,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긍휼함이 공의 가운데 있어야 한다. 사무엘하 21장에 기록된 기브온족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얽히고 설킨 사건은 하나님의 언약과 공의, 공의가 실현된 이후의 화해와 용서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단편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6.06 / 이상윤 목사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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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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