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기사
[이영훈 목사 성역 45주년] ‘절대긍정 절대감사’ 신앙으로 지켜온 목회 여정
  • 겸손과 순종으로 주님께 헌신한 ‘성역 45년’ 성령 충만과 말씀 사역 접목해 균형잡힌 오순절 영성 섬김과 화합의 리더십 강력한 영적 새바람 일으켜 이영훈 목사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장로회장을 역임한 고 이경선 장로와 김선실 목사의 4남 1녀 중 둘째아들로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66년 2월 조용기 목사가 인도하는 부흥성회에서 성령 충만을 경험한 이영훈 목사는 1968년 오티스 키너 목사의 설교를 듣고 큰 은혜 속에 ‘일생을 주님께 드리겠다’고 결심했다. 이후 이영훈 목사는 명문사학 대광고와 연세대 신학과,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신학과, 한세대 신학과를 졸업했고, 1978년 12월부터 여의도순복음교회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했다. 영산출판사 편집부장, 순복음뉴스 초대 편집장, 순복음교육연구소장으로 사역한 이영훈 목사는 1982년 5월 목사 안수를 받고 같은 해 7월 백인자 사모와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유학시절 워싱턴제일순복음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이영훈 목사는 매일 새벽기도 운동을 전개해 1991년 1000석 성전 건축을 완성한다. 이영훈 목사는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한 뒤 템플대에서 종교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백인자 사모는 메릴랜드대학교에서 박사 학위(Ph. D. in Applied Mathematics)를 받았다. 이어 순복음동경교회, 로스앤젤레스 나성순복음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사역하다 2006년 11월 여의도순복음교회 2대 담임목사로 청빙됐다. 귀국 후 이영훈 목사는 담임목사 서리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2008년 운영회 및 당회 2차 투표를 거쳐 공동의회를 통해 여의도순복음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취임하면서 아름다운 세대교체를 이뤄 한국 교회와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영훈 목사는 조용기 목사와 화합하며 새로운 리더십으로 교회를 운영해 나아간 결과, 한국과 세계 교계 지도자의 자리에 올랐다. 영적 아버지와 같은 조용기 목사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순복음의 영적 유산은 이영훈 목사에게 이어져 새로운 도전과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원동력이 됐다. 이영훈 목사는 말씀운동과 성령운동을 접목해서 한국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로 풍부한 신학적 지식과 화합의지로 교파를 초월해 국내외 신학자들과의 활발한 교류 펼쳤다. 화해와 일치, 상생과 화합을 실천하며 NCCK, 한기총 등 연합 기구들의 대표회장을 역임했다. 한교총 대표회장을 맡아 한국교회의 하나됨을 모색했고 기하성 대표총회장으로서 교단 통합도 이뤘다. 2013년부터 이영훈 목사는 ‘아시아 리더스 서밋(ALS)’을 설립해 ‘아시아 선교는 아시아인이 이루자’를 외치며 아시아 각국의 목회자들과 교류하며 새시대 선교지평을 넓혔다. 특히 이영훈 목사의 리더십은 코로나19로 인해 현장 예배가 정부로부터 금해지고 많은 교회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빛을 발했다. 더불어 코로나로 연일 고생하는 의료진을 위한 10억 기부, 영세 소상공인, 기초생활수급자, 다자녀가정, 서울 쪽방촌 거주민, 전국 미자립교회에 총 106억원을 지원한 통큰 기부도 이영훈 목사의 섬김의 리더십에서 발현된 일이다. 섬김과 화합에 바탕을 둔 이영훈 목사의 사역에는 최초라는 타이틀이 많이 부여됐다. 2013년 한국 목회자로는 최초로 설교목적으로 종교비자를 받아 중국 항저우 숭일당교회에서 설교했다. 2018년 1월 마틴 루터 킹 목사 추모예배에 초청 돼 한반도 통일과 평화에 대한 꿈을 전했다. 같은 해에 이스라엘 독립 70주년 기념 국가조찬기도회에서도 한국인 최초로 연설했다. 미국의 대표적 기독 사립대인 오럴로버츠대학교 2022학년도 졸업식 예배에서 한국인 첫 설교자로 나섰다. 또한 2022년 글로벌엘림재단 이사장에 취임해 다문화 사역에 관심을 기울이고, 10월에는 조용기 목사가 설립한 CGI(국제교회성장연구원)의 2대 총재로 취임했다. 우리나라에서 2022년 열린 세계오순절대회의 호스트로서 성공적인 대회 개최에 더해 임진각에서 전 세계 기독교 리더들이 모여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장을 마련했다. 더불어 세계 선교를 감당하면서 한반도 평화를 위한 한미 조찬기도회를 다년간 개최해 민간 외교 사절로 활약했다. 이영훈 목사는 “지금은 성령의 시대이다. 향후 10년 안에 10배의 부흥이 다가올 것이다. 우리 모두 부흥의 파도를 타고 새로운 부흥의 주역이 돼야 한다”면서 다음세대를 세우고 믿음으로 전진 또 전진해 갈 것을 강조했다. 글 복순희 / 사진 김용두 기자
  • 2023.11.17 / 복순희 기자

    [교회창립 65주년 특집] 더 넓게 더 멀리 도약하는 순복음 세계 선교 
  • 조용기 목사 전 세계에 복음의 씨앗 뿌려 풍성한 선교의 열매를 수확하는 이영훈 목사 세계를 교구 삼아 지구 120바퀴 이상을 비행하며 71개국에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한 조용기 목사에 이어 2008년 2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이영훈 목사는 세계 곳곳에 심겨진 순복음의 씨앗을 잘 가꿔 아름다운 선교의 열매를 맺고 있다. 이영훈 목사는 지난 15년 동안 5대양 6대주를 종횡무진하며 목회자로 신학자로 민간 외교사절로 활발하게 활동해 왔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오순절 성령을 설파하는 동시에 사랑과 섬김의 모습을 보여 온 이영훈 목사는 이제 세계 교회 부흥의 주역으로 부상하고 있다. 아시아 복음화는 아시아인이! 이영훈 목사는 2009년 본격적인 해외 성회를 시작했다. 중국 일본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 카자흐스탄 등 아시아 전역에 순복음의 영성과 오순절 성령을 전하며 세계 교회 부흥을 이끌었다. 특별히 이영훈 목사는 조용기 목사를 이어 일천만 구령을 이루기 위해 일본 선교에 앞장서고 있다. 이영훈 목사는 공산국가인 중국으로부터 한국 목회자로는 최초로 설교목적 종교비자를 받아 중국 항저우 숭일당교회에서 성령 충만의 메시지를 전파했고 중국 북경, 남경, 상해를 방문해 한·중 기독교 협력과 복음화의 문을 활짝 열었다. 이영훈 목사는 ‘아시아 선교는 아시아인이 담당하자’(Asia by Asians!)라는 슬로건 아래 아시아 지역 대형교회와 목회자를 연결하는 교회 네트워크 ‘아시아 리더스 서밋’(ALS)을 설립해 아시아 복음화에 앞장서고 있으며 ALS 성회와 콘퍼런스를 주최하고 있다. 선교의 원조 유럽에 우리나라 선교위상 빛내 이영훈 목사의 세계 선교는 유럽에서도 빛을 발했다. 2010년 영국 ‘에든버러 2010대회’를 시작으로 유럽 선교를 펼친 이영훈 목사는 이때 아시아 대표이자 오순절 신학자 대표로 초청됐다. 이는 100여 년 전 존 모트 선교사가 ‘한국은 동양의 기독교 국가가 될 것’이라고 말한 예언이 증명된 역사적인 현장이었다. 선교사를 파송 받았던 한국이 이제는 전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 대국이 됐음을 세계적으로 선포하는 시간이었다. 이어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제22차 세계오순절대회에서 ‘성령운동’을 주제로 발표하며 74개국에서 모인 1900명의 지도자들에게 한국교회의 역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령사역을 소개했다. 이밖에도 영국·우크라이나·독일·러시아·프랑스 등 유럽 곳곳에서 현지인과 한인들에게 위로와 회복의 메시지를 전했다. 오순절 본고장 북미에 순복음영성 전해 이영훈 목사는 북미에도 순복음의 영성을 이어갔다. 미국 서부 로스엔젤레스부터 동부 뉴욕까지 전역 곳곳을 순회하며 성령 충만의 메시지를 전한 이영훈 목사는 한국 오순절 순복음 영성을 미국 내에 소개하고 순복음교회의 위상을 떨치며 파장을 일으켰다. 2018년 1월 한국인 목회자로는 최초로 마틴 루터 킹 재단으로부터 공식초청을 받아 ‘마틴 루터 킹 목사 50주기 추모예배’에서 자유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다. 지난해에는 미국 오클라호마주 털사에 위치한 오랄로버츠대학교 졸업식에서 한국인 목회자로서는 처음 설교자로 나서 졸업생들의 앞날을 축복했다. 남미 오순절 운동에 새로운 비전 제시한 이영훈 목사 오순절 부흥으로 현재 급부상하고 있는 중남미 지역에 이영훈 목사는 일찍이 성령의 불씨를 지폈다. 2012년 볼리비아에서 초교파연합성회를 인도하며 “중남미가 세계 기독교의 흐름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콜롬비아로 넘어가 중남미 부흥을 위한 ‘익스플로전 성회’를 인도하며 우리 교회의 성령 충만의 복음과 세계최대 교회로 부흥한 폭발적인 교회성장비결에 대해 전했다. 중남미에서 열린 성회는 성령의 역사를 가속화하는 촉매제가 됐다. 브라질에서도 순복음중남미총회 소속 150여 명의 선교사들을 대상으로 열린 목회자 세미나와 제24차 세계오순절대회에 주 강사로 나서 남미 오순절 운동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조용기 목사 이어 아프리카 대륙에 희망의 메시지 전해 1993년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케냐 나이로비 대성회를 인도하며 아프리카 선교의 시작을 알린 조용기 목사의 배턴을 이어받은 이영훈 목사는 2016년, 2018년 두차례 코트디부아르에서 대성회와 교회성장 세미나를 인도했다. 주최 측은 서아프리카 선교의 중심지 코트디부아르에 이영훈 목사의 오순절 성령의 메시지가 전해져 내전으로 어려움을 겪은 나라에 영적 치유와 함께 제2의 부흥이 일어나길 기대했다. 성회에는 나이지리아, 가봉, 니제르, 가나 등 인근 나라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참석해 교회부흥에 대한 비전을 품었다. 연인원 30만명이 참석해 대성황을 이룬 코트디부아르 성회에 이어 이영훈 목사는 올해 7월 동아프리카 케냐에서 대성회를 인도할 예정이다. 오세아니아에도 임한 오순절 역사 2013년 호주 멜버른에 성령의 새 바람이 불어왔다. 이영훈 목사는 생명의 강 콘퍼런스에서 교회 성장에 관한 하나님의 역사와 기도의 능력을 강조했다. 또한 호주와 오세아니아 복음화를 위한 시드니 대성회와 오세아니아-아세안 선교사 콘퍼런스를 인도하며 순복음의 선교사들을 격려했다. 성회에는 오세아니아와 아시아에서 헌신하는 선교사 150여 명이 참석해 영적 재충전과 선교 사역의 노하우 및 비전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세계 곳곳에서 이영훈 목사의 해외 성회와 각종 세미나 요청이 물밀듯이 쏟아지고 있다.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었던 여호수아와 같이 세계 선교의 기반을 다진 조용기 목사의 영적 리더십을 계승한 이영훈 목사의 세계 선교의 열정과 외침은 이제 더 넓게 더 멀리 퍼지고 있다.
  • 2023.05.19 / 금지환 기자

    [교회창립 65주년 특집] 연합과 일치를 위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노력 - 해외편
  • 순복음의 영성으로 세계 기독교의 흐름 이끌어
    섬김의 리더십 실천하며 온세상 복음으로 연합 전 세계적으로 새로운 부흥의 파도가 일어나는 이 때 이영훈 담임목사의 영적 리더십이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이영훈 목사는 수많은 해외 성회를 통해 K(KOREA) 스타일의 기도운동을 확산시키며 세계 교회 성장의 흐름을 주도 하고 있다. 또한 연합과 일치를 강조하며 세계 기독교의 흐름을 순복음의 영성으로 이끌고 있다. 이영훈 목사의 영적 리더십과 전 세계 기독교에 대한 영향력은 우리 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2010년 6월 영국 ‘에든버러 2010대회’에 아시아 대표이자 오순절 신학자 대표로 초청돼 한국교회의 위상을 높였고 이후 전 세계 교계를 연합하고 리드하는 자리에 빠르게 올랐다. 2018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50주기 추모예배에서 설교하고, 이스라엘 독립 70주년 기념 국가조찬기도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메시지를 전했다. 2022년에는 세계 선교에 대한 영적 리더십으로 오순절 신학을 발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의 대표적 기독 사립 오랄로버츠대학교 졸업식 예배에서 한국인 첫 설교자로 나선 데 이어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영훈 목사의 리더십은 2022년 10월 12~14일에 우리 교회에서 열린 제26차 세계오순절대회(PWC)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대표대회장을 맡은 이영훈 목사는 전 세계 개신교 오순절 교단의 가장 큰 축제인 세계오순절대회를 주관해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한국에서 24년 만의 개최이자 코로나 팬데믹 이후 국내에서 처음 열린 최대 규모의 국제 기독교 행사여서 큰 의미가 있었다. 전 세계 45개국에서 1500명의 오순절 목회자가 방한해 국내 3500명의 교회 리더들과 함께 현장에 참여했고 방언과 기도, 성령 충만의 역사가 넘쳐나며 기독교 역사에 큰 획을 남겼다. 세계오순절협회 총재 윌리엄 윌슨 목사는 “PWC를 성공적으로 치르면서 하나님의 손이 이영훈 목사님과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느꼈다”며 “하나님께서 이영훈 목사님을 미래의 리더로 세우셨다.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더욱 전진해 복음의 지경을 넓힐 것을 믿는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예언가인 신디 제이콥스 목사도 “하나님께서 오순절이 10년간 전 세계적으로 크게 부흥할 텐데 그 중심에 여의도순복음교회와 한국교회가 있다고 하셨다”며 특별히 이영훈 목사를 부흥의 리더로 택하셨음을 여러번 강조한 바 있다. 지난해 10월 제26차 세계오순절대회에 앞서 이영훈 목사는 설립자 조용기 목사의 뒤를 이어 세계교회성장을 이끄는 CGI(Church Growth International) 2대 총재로 취임했다. 이영훈 목사는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교회 회원들 사이에서 활발한 소통이 이루어지도록 헌신하며 조용기 목사가 심은 복음의 씨앗을 거두고 풍성히 열매 맺고 있다. 세계 평화를 위한 행보도 거침없이 이어갔다. 한미수교 140주년이었던 2022년에는 한미수교 140주년 한국기독교기념사업회 대표회장으로서 한미수교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면서 양국의 우호 관계 발전 및 복음통일과 세계 선교에 힘을 쏟았다. 또한 지난해 4월 이영훈 목사는 한-이스라엘 수교 60주년 기도회를 개최하며 민간외교사절 역할로 한·이 우호 관계도 돈독히 했다. 우리 교회 담임으로 취임한지 15년을 맞은 올해도 활발하게 사역했다. 1월에는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주 한인이민 120주년 및 한미동맹 70주년을 기념하는 한미 기독교지도자 조찬기도회를 개최해 한반도 평화를 위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영훈 목사는 섬김의 리더십으로 세계 교회를 이끌고 주 안에 연합하며 오직 성령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상을 비춰 나아가고 있다.
  • 2023.05.19 / 이미나 기자

    Hello, Israel
    가자는 어디인가?-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의 배경인 가자이야기
  • 가자는 성경에 등장하는 지명이다. 일명 가사 지방으로 불리는 곳이다. 가자는 원래 히브리어로 ‘아사’라고 불리며 시나이 반도 북쪽에 자리 잡은 작은 해변지역이다. 해변을 끼고 있는 비옥한 영토이며 그 당시 블레셋 다섯 족속이 다스리던 땅으로 삼손이 죽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풍성한 곡창지대를 끼고 있어서 강대한 부족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다윗 왕이 정복하지 못했던 곳으로 지금도 이스라엘 국가가 골치 아파하는 지역으로 남게 된 것이다. 이 지역을 다스리던 블레셋 족속은 헬라 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멸절 당하고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 이후 제국의 통치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살게 되고 아름다운 해변지구는 지중해에서 유명한 휴양지가 된다. 사실 가자는 그 이후 수많은 제국에 속한 지역이었지만 단 한 번도 팔레스타인이라는 국가가 통치한 적은 없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할 당시 가자지구는 이집트의 영토였다. 이후 1967년 6일 전쟁 당시 이스라엘이 극적으로 아랍 5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얻게 된 영토가 가자지구와 시나이 반도 그리고 요르단의 서안지구였다. 하지만 유엔의 중재로 인해 서안지구와 시나이 반도는 넘겨주게 되고 가자지구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공영지로 다스리게 된다. 이후 1993년 라빈 총리와 아라파트 간의 평화조약이 맺어지면서 공식적으로 가자지구는 팔레스타인의 영토가 된다.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다스리기 이전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곳이었다. 지금도 그 해변과 풍경은 지중해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곳이 하마스로 인해서 전쟁터가 되었고 끊임없는 분쟁의 장소가 되어 버렸다. 현재 가자지구에는 230만명의 팔레스타인들이 갇혀 있다. 많은 이들이 왜 이스라엘이 그렇게까지 가자를 봉쇄하고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된 곳으로 만들었는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가자지구가 2005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협정 가운데 팔레스타인의 영토로 완전히 넘어가고 2006년 서안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선거에 하마스는 큰 승리를 얻게 된다. 이를 위험하게 본 미국과 이스라엘은 현 정부인 파타에게 손을 빌려준다. 서안지구에서 밀리게 된 하마스는 가자로 본진을 옮기고 가자지역에서 파타와의 전쟁을 승리함으로서 완전한 통치권을 갖게 된다. 가자지역은 하마스가 점령하기 전에는 유대인과 팔레스타인들이 적절하게 잘 살아오던 곳이었다. 그러나 하마스가 점령한 이후 이곳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가시가 되어버렸다. 2006년 이스라엘 정부는 가자지역 내의 21개 유대인 정착촌과 마을에 대해 강제 철수를 명령했다. 하루아침에 그들은 집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다. 하마스의 위협을 감지한 이스라엘 정부의 조치였지만 잘못된 판단이었다. 이로 인해 하마스는 이스라엘군의 견제 없이 손쉽게 가자지역 전체에 대한 통제권을 얻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 남부에 커다란 위협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한 번의 잘못된 정치적 판단이 이스라엘을 지금까지 괴롭히는 가시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번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은 그런 배경에 놓여있다. 하마스는 이전에도 없을 가장 참혹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유린했다. 하마스는 지난 20여 년간 반복적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혀 왔다. 그들은 때때로 미사일로 공격을 해왔고 이스라엘은 그런 공격들을 잘 막아왔다. 하마스의 공격에 대항하여 이스라엘도 꾸준히 가자지구 내의 하마스의 공격기지를 파괴해 왔지만 그로 인해서 피해를 보는 것은 일반 시민들이었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것 중 하나는 이스라엘이 인도적 차원에서 가자지구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가 본 상황은 사뭇 달랐다. 몇 년 전 학업을 하던 중 현지답사 학습이 있었다. 가자 인근의 군부대와 키부츠를 방문하는 시간이었는데 가자 접경 지역까지 가면서 보게 된 광경은 놀라웠다. 가자국경을 향해서 수백 대의 트럭이 줄을 서있었다. 모두 가자 내로 들어가는 물자를 실은 트럭이었다. 군과 경찰 그리고 국경 자경단이 트럭들을 조사하고 중립지대로 물자를 실어 나르는 것을 보았다.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하루에 적게는 800대에서 많게는 1,200대까지 물자를 들여온다고 한다. 모두 생필품과 식자재 그리고 건설자재들이라고 한다. 가자지구 폭격이 있고 난 후에는 더 많은 건설자재들이 들어간다고 한다.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자를 폭격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공급해주는 물과 전기, 연료와 함께 들어오는 물자들을 통제한다. 그들은 중간에서 물자들을 빼돌려서 이집트나 인근 국가에 팔아넘기고 자금을 마련하여 미사일 재료를 사 모은다. 그 사이 가자 내의 시민들은 부족한 물자를 가지고 살게 된다. 그리고 그 부족함에서 오는 불만과 불평은 모두 이스라엘 탓이 된다. 이스라엘이 전기를 공급하는 시간에 제한을 두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다. 이스라엘이 공급한 건설 자재들은 하마스가 터널을 만드는 재료로 쓰이고 무너진 집들은 그냥 내버려둔 채 자신들의 삶의 터전과 테러의 터전을 넓히는데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모든 비난은 이스라엘에게 돌리는 것이다. 그들의 거짓말이 가자 시민들의 삶만이 아니라 마음도 피폐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거짓이 가져오는 피폐함과 고통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다. <다음 달에 계속> 김요셉 목사
  • 2023.11.2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 어떻게 봐야 할까?
  • 가슴이 아프다. 공포와 경악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이 휘몰아쳐 온다. 전쟁은 언제나 슬픈 일이다. 지난 10월 7일 이스라엘의 남부 네게브 서쪽 끝에 자리잡은 가자지구에서 미사일이 이스라엘 영토로 발사됐다. 1시간에 무려 2000발에 가까운 미사일이 이스라엘 남부와 중부를 향해서 날아왔다. 이스라엘의 미사일 방어체계인 아이언돔 시스템은 날아오는 미사일을 막기 바빴다. 많은 미사일이 이스라엘의 서남부 도시인 아쉬켈론과 아쉬돗 그리고 브엘세바 인근, 가자 인접 키부츠와 마을에 떨어졌다. 미사일이 발사된 시각 가자와 이스라엘을 나누었던 국경 철책이 하마스 무장 테러리스트의 공격으로 부서지고 인근 국경 경비 부대들은 습격을 받았다. 수많은 군인들이 죽거나 잡혀서 가자로 끌려갔다. 무너진 철책을 넘어서 1000여 명의 무장한 하마스 테러리스트들이 가자 인근 이스라엘 마을과 키부츠로 습격해 왔다. 마을에 들어서면서 보이는 사람들을 모두 사살하고 심지어 집집마다 습격해 들어가서 수많은 가족들과 아이들을 그 자리에서 죽이거나 인질로 끌고 갔다. 그 시간 키부츠 인근 광야에서는 음악축제가 열렸다. 전 세계에서 모인 청년들이 음악을 즐기며 축제를 즐기던 현장은 하마스 테러리스트들의 습격으로 아비규환이 되고 말았다. 이들은 도망가는 무고한 청년들을 향해서 총격을 가하고 로켓포를 쏘면서 거침없이 생명을 빼앗았다. 그 자리에서만 260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하마스와 전쟁을 치르고 있다. 신문과 방송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이라고 하지만 이는 잘못된 말이다. 지금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이 아닌 가자지구를 점령하고 있는 테러단체인 하마스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현대 역사 이야기를 하면서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것이 팔레스타인과의 분쟁이다. 이스라엘이 독립하면서 생겨난 팔레스타인 문제는 지금까지 어떤 해결책도 없이 계속 거론되어 왔다. 75년의 시간 동안 이스라엘이 얻은 것은 비난과 질타 그리고 끝없는 증오의 시선이었다. 과거 이스라엘의 독립전쟁은 팔레스타인과의 전쟁이 아니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공격해 온 것은 주변 아랍국가인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 이란이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이 전쟁이 마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인 것처럼 바뀌었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침공한 점령국으로 탈바꿈 되었다. 이 전쟁은 하마스가 시작한 전쟁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에 대한 비난 여론만 보게 된다. 하마스가 죽인 희생자들의 이야기들은 가자지구 팔레스타인들의 비극에 대한 여론 몰이로 밀려나 버렸다. 심지어는 기독교인들 안에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헬로!이스라엘’을 읽어온 독자라면 이런 이야기들이 얼마나 뒤틀려 있는 거짓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차례 지면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역사와 팔레스타인 문제를 언급하고 설명한 적이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많은 이들이 이런 역사적 배경을 모르기에 조금은 과격하게 느낄 수도 있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서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배경을 다루면서 이스라엘과의 변하지 않는 불편하고 어려운 관계성을 이야기해 보았으면 한다. 하마스는 1987년에 결성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이다. 팔레스타인 대부분의 정당이 무장단체이다. 그 중 하마스는 ‘이슬람 저항 운동’(혹은 이스라믹 지하드 운동)의 줄임말로서 그 단어 자체는 열정 혹은 용기를 뜻하는 아랍어이다. 뉴스를 통해서 보면 마치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위해서 싸우는 독립운동가처럼 그려지고 있다. 팔레스타인이 건재하고 그들의 독립을 위해서 우리는 이스라엘과 싸울 것이라고 한다. 과연 그 말이 맞을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하마스는 창설된 이후 지금까지 무장투쟁이라는 명목 하에 수많은 테러를 이스라엘에 저질러 왔다. 자살폭탄테러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거나 저격 및 민간인 총격사건, 민간인 납치 살해 등을 조작해 왔으며 그 뿌리는 ISIS나 알카에다, 헤즈볼라와 같은 테러단체이다. 필자는 어떤 이들이 이 하마스라는 단체를 우리나라 독립 운동가들과 비교하는 것을 볼 때마다 화가 난다. 역사 속에서 우리 독립 운동가들은 일제를 물리치기 위해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하거나 테러 하지는 않았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죽어도 마땅하다는 논리를 가진 하마스를 독립 운동가들과 같은 선상에 놓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하마스가 외치는 자유 독립은 허구이다. 그들은 독립을 위해서 싸운다고 하지만 그들의 배경에는 철저한 반유대주의와 유대인들에 대한 적개심이 깔려 있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이다.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의 멸절이다. 한 민족을 멸살하는 것이 목표인 이들이 외치는 독립과 종교적 핑계는 허울좋은 포장일 뿐이다. 지금도 그들은 가자의 민간인을 방패로 이스라엘과 맞서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들의 욕심과 야욕을 위해서 생명을 경시하며 거짓말을 일삼은 이들이 칭송받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의 거짓을 간파하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져야 할 것이다. <다음달에 계속> 김요셉 목사
  • 2023.10.27 / 김용두 기자

    어떻게 서쪽 벽은 성지가 되었나…통곡의 벽에 얽힌 이야기
  • 이스라엘을 방문하시는 분들이 많이 물어보는 질문이 있다. 언제 유대인들을 볼 수 있냐는 것이다. 보통 유대인이라고 하면 검은 모자에 검은 옷을 입고 서쪽 벽에서 기도하고 있는 이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들이 대표적인 유대인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대표적인 성지로서 서쪽 벽 혹은 통곡의 벽을 떠올린다. 우리가 흔히 보고 듣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은 항상 이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서쪽 벽은 예루살렘에서 가장 인상 깊고 잘 알려진 장소이다. 유대인들만 아니라 전 세계 기독교인들도 이곳을 방문한다. 이스라엘 하면 떠오는 상징이 되어버린 서쪽 벽 혹은 통곡의 벽이 어떻게 유대인들의 상징이 되었고 우리들은 그것을 대표적인 예로 듣고 알게 되었을까? 오늘은 이 서쪽 벽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짧게 나눠 보고자 한다. 현재 우리가 방문하는 예루살렘은 사실 1세기 예루살렘 성읍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실제적으로 예루살렘 성읍은 1세기 때 큰 화재와 지진으로 무너졌고, 제대로 성읍이 세워진 것은 15세기에 이르러서이다. 오스만제국의 슐레이만 황제가 꿈을 꾸는 가운데 세워진 예루살렘 성읍이 지금의 우리가 방문하는 예루살렘 올드 시티인 것이다. 그 올드 시티에서 가장 동쪽에 자리 잡고 감람산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성전산이다. 이 성전산에는 지금은 이슬람의 사원인 황금 돔 사원과 알아크사 모스크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성전산의 헤롯 성전이 세워졌던 자리의 남은 외벽 중 하나가 바로 서쪽 벽이다. 서쪽 벽의 하단은 1세기 헤롯 대왕이 세웠던 성전의 벽이 약 4~5 정도 남아있고 그 위로는 이후에 세워진 벽들이 서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서쪽 벽 지하에는 1세기 당시 헤롯 대왕이 만들었던 성전의 벽돌이 그대로 남아있으니 서쪽 벽을 방문하시는 분들은 꼭 서쪽 벽 지하에 자리한 유산박물관을 방문해 보길 추천한다. 서쪽 벽은 말 그대로 성전의 서쪽 벽만이 남은 곳이다. 성지가 되려면 오히려 성전산의 뜰이나 동쪽 문이 더 성지가 되어야 할 것만 같지만 그렇지 않고 서쪽 벽만을 찾게 된 것은 이스라엘과 유대인의 역사 속에서 알게 되는 슬픈 배경이 있다. 솔로몬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 이후 다시 세워지게 된 제2성전과 그 성전을 확장시킨 헤롯 성전은 1세기 때까지 유대인들의 중심이었고 예배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A.D 70년 디도 장군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이후 유대인들에게는 더 이상의 성전은 존재하지 않았고 제사도 멈추게 되었다. 그 후 유대인들은 전 세계로 떠돌아다니는 민족이 되었고 그들의 예배 처소는 더 이상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슬람 제국을 거쳐 오스만 제국에 이르러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고 15세기 슐레이만 대제가 지금의 올드 시티(구 예루살렘)를 지은 이후 유대인들은 한시적으로 성전이 있었던 자리를 찾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 자리가 바로 서쪽 벽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거룩한 장소이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였다. 그 장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들을 통곡하게 만들었고 그들이 서쪽 벽에 모여서 그 분통함과 슬픔을 기억한다고 해서 통곡의 벽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하필 서쪽 벽일까? 도대체 역사 가운데 어떤 사건이 서쪽 벽을 거룩한 곳으로 만들게 되었을까? 우리는 성전을 잠깐 떠올릴 필요가 있다. 성전은 현재 성전산의 중앙이 되는 곳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성전의 정문은 동쪽을 향했고 그 성전의 정문으로 향하는 것이 지금의 황금 문-흔적만 남은 문-이다. 황금문이 바라보는 곳이 바로 감람 산-올리브동산이다. 원칙적으로 그들이 더 깊은 종교적 장소를 선택하자면 성전산이나 혹은 동쪽 황금문을 선택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성전산의 출입이나 황금문으로의 접근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곳이 무슬림들이 사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허락된 곳은 서쪽 벽뿐이다. 그런데 이 서쪽 벽은 재미있게도 유대인들이 성전에서도 가장 거룩하게 여기는 곳과 연관되어 있다. 바로 지성소이다. 성전의 정문이 동쪽을 향해 있다면 성전의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지성소는 바로 서쪽 벽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다. 이것이 바로 서쪽 벽이 거룩한 장소가 된 이유이다. 서쪽 벽은 그렇게 거룩한 곳이 되었고 지금도 유대인들은 서쪽 벽에 모여 기도하면서 성전산 지하를 탐사하고 발굴하면서 더욱 성전에 관한 자료와 정보들을 모으고 있다. 유대인들의 가장 큰 소망은 성전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그들의 소망은 하나님의 얼굴을 다시 보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은혜를 얻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유대인의 왕이요 메시야이며 온 땅의 주인으로 오신 이를 보지 못하고 오늘도 서쪽 벽에 서서 그 벽을 어루만지며 잃어버린 성전을 사모하고 있다. 이미 온전한 성전 되시며 온전한 하나님 되신 그리스도를 그들도 어서 발견하기를 바라며 필자도 서쪽 벽에 손을 얹고 잠시 기도해 본다. 김요셉 목사
  • 2023.08.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평신도를 위한 오순절 조직신학
    VII. 죄론(Hamartiology) - 1
  • 죄의 근본적 정의는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
    인간은 죄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선언하고 있는데, ‘모든’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테스는 인류 전체를 포괄적으로 일컫는 단어이다. 우리 나라 말은 ‘죄’, 영어는 ‘sin’이라는 단어로 죄에 대해 포괄적인 의미로 지칭하고 있으나 성경은 ‘죄’에 해당하는 단어를여러 가지로 쓰고 있다. 구약성경은 8가지 다른 단어와 신약은 12가지의 다른 단어가 ‘죄’라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이 여러 단어 중에 헬라어 ‘하마르티아’가 죄론 (Hamartiology)의 어원이 되었다. ‘하마르티아’의 뜻은 ‘과녁에서 벗어나다’는 의미이다. ‘하마르티아’가 의미하듯 죄에 대한 근본적인 정의는 살인과 도둑질과 같은 범법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을 말한다. 최초 인류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서 볼 수 있듯이 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불순종이다. 불순종은 단지 하나님의 공의와 율법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며 인간의 한계성을 넘어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려는 행위로 나타났다(창 3장). 또한 하나님의 보좌를 침범하는 행위와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것을 의미 한다(사 14:13). 바울은 죄를 하나님의 ‘원수’(롬 5:10, 골 1:21)라고 했으며 그것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미워하는 자’(롬 1:30)라고 했다. 1. 죄의 기원 (The Origin of Sin) 죄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죄가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했거나 진정한 행복을 선사한 적은 한 순간도 없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 사역 가운데서 천사의 창조와 죄의 창조는 찾아 볼 수 없다. 모든 것이 다 보시기에 좋았고 악한 것은 없었다. 그럼 죄는 어디에서부터 온 것일까? 죄론에서 다루는 명제들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로 간주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죄 또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할 수는 없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동산 가운데 두셨다고 해서 인간의 타락을 유도했다고 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결단코 악을 행하지 않으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치 않으신다(욥 34:10).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그의 안에는 불의가 전혀 없다(신 32:4; 시 92:16).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기능은 강요가 아닌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위함이다. 인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는 것은 순종의 표현이며 과녁에서 벗어나지 않은 삶을 이어가기 위한 결단이다. 2) 죄는 천사의 세계에서 시작되었다 인간의 타락을 말씀하고 있는 창세기 3장을 보면 인간이 죄를 짓기 이전에 이미 ‘뱀’으로 형상화 된 사탄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창 3:1). 이것은 죄가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사야 14장 12~14절에 계명성으로 대변되는 천사의 타락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이 계명성을 영어 성경 KJV은 루시퍼(Lucifer)라고 번역을 했다. 사탄이 인간의 타락 이전에 이미 존재했으며 이들로부터 죄가 인간에게 들어 왔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죄에 대해 인간의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3) 죄는 인간의 고의적인 행위로 말미암은 것(롬 5:12, 18, 19) 죄는 외부로부터 온 유혹과 그 유혹에 대한 인간의 적극적인 반응에서 시작되었다. 성경은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14)라고 말씀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을 만큼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선한 자유를 잘못 사용함으로서 죄가 인간에게 들어 왔다. 인간은 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면 안 된다. 4) 죄의 이해 (1) 교부 시대의 죄의 이해 동방 교부들은 죄를 포괄적이고 피상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이에 반해 서방 교부들은 죄의 문제를 윤리적인 것으로 심화했다. 그래서 교황을 비롯한 가톨릭의 성인들은 아무 죄(윤리적인 죄)를 짓지 않았다고 주장하게 되었다(아타나시우스). 서방 신학의 아버지인 터툴리안에 의해 처음으로 원죄론이 대두되었으며,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은 타락 전에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지만, 타락 후에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2) 중세시대 토마스 아퀴나스는 죄의 종류를 ‘용서할 수 있는 죄’, ‘죽을 죄’,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이웃에게 범하는 죄’, ‘원죄 또는 유전 죄’, ‘행위 죄’, ‘원래적인 의의 결핍’, ‘질료’, ‘탐욕’ 등으로 나누어서 설명하려고 했다. 루터는 죄를 철저히 인격적으로 이해했다. 루터는 죄를 감각적, 육체적 영역뿐 아니라 인간의 영혼 안까지 도달한다고 생각했다. 멜란히톤은 죄를 ‘원래적인 의의 결핍’과 ‘탐욕’으로 이해했다. 칸트는 죄를 ‘인간의 본성 안에 있는 철저한 악’이라고 선언했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3.10.0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Ⅵ. 인간론(The Doctrine of Humanity) - 3
  • 인간은 하나님의 실존이 투영돼 창조된 존재
    4. 하나님의 형상 (The Image of God, Imago Dei) 많은 기독교인들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았다는 말에 익숙해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첼렘)과 ‘모양’(떼무트)대로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1:26). 히브리어로 형상은 ‘첼렘’이다. 그 뜻은 ‘그늘지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그림자’(시 39:7)라는 뜻이며 ‘모양’은 ‘떼무트’인데 ‘닮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며 이 두 단어가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두 단어가 주는 의미처럼 인간은 하나님을 반영하는 존재이며 하나님의 실존이 그림자처럼 투영되어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천지창조를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다른 피조물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으며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임이 분명하다. 여기서 두 가지의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에 관한 의문이다. 둘째는 타락한 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1)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인가? (1) 형상(Image)과 모양(Appearance)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 둘은 동일시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두 단어가 동일한 의미라며 창세기 1장 26절에서 굳이 이 단어를 구별해서 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관해 가톨릭과 개신교는 서로 다른 이해를 하고 있다. 가톨릭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형상(image)과 하나님의 모양(appearance)을 일반화하지 않고 구별해서 이해해왔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속성(attributes)과 성품(character)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모양은 외형적인 모습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만약 하나님의 형상이나 모양을 하나님의 외형적인 모습으로 이해하면, 인간의 외형적인 모습과 같이 하나님도 눈이 두 개, 팔이 두 개, 손가락과 발가락이 있는 인간의 모습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모양과 틀에 갇혀 있을 수 없는 영이시라고 말씀하고 있다(요 4:24).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외모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은 분명히 아니다. 반론의 여지가 없이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을 가진 피조물로 창조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2) 광의적 하나님의 형상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이 서로 다르다는 것에 동의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의 범위와 의미에 대해서는 이견을 나타내고 있다. 개신교 내에서도 루터파와 개혁주의 뿐만 아니라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존재한다. 루터파는 제한된 의미로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형상을 영적인 요소로 제한시키고 있다. 그 결과 타락 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잃어 버렸다고 생각한다. 칼빈도 인간의 타락을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잃어버린 전적인 타락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후기 개혁주의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광의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광의적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어 주신 하나님의 형상이 영적인 영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사회적 성품, 지성, 인격, 윤리와 가치, 도덕적 성품까지 확대된 것을 말한다.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와 에밀 브루너(Emil Brunner, 1889~1966)와 같은 신정통주의자들은 인간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성 혹은 인간이 인간 사이에 맺고 있는 인격적 관계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2)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는가? 하나님의 형상을 거룩하고 영적인 것으로 제한한다면,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은 남아 있지 않다. 인간의 타락은 영적인 죽음을 의미하며,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과 그의 임재로부터 추방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광의적으로 해석한다면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타락 이후에도 인간 속에 남아 있게 된다(롬 1:19). 에덴동산에서와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이 세상에 살면서 제한된 범위 내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고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는 것(창 4:1~4)은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 이후에도 인간에게 남아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요소가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는 바울이 말한 ‘하나님을 알만한 인간의 지성’을 인간에게 남겨진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해했다.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고 그에게 순종하는 지혜가 인간에게 남아 있기에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그리스도를 통한 은총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회복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하나님을 반영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타락 이전 하나님의 권한을 위임받아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한이 인간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타락 이후 하나님의 형상을 상당부분 잃어 버렸고,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이것을 회복할 수 없다.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유일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3.06.3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VI. 인간론(The Doctrine of Humanity) - 2
  • 영적인 상태와 직결되는 인간의 다섯가지 상태
    3. 인간의 상태 II 조직신학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는 인간에 대한 이해이다. 조직신학의 인간 이해는 사회, 문화, 정치, 경제적 환경보다는 인간의 영적인 상태와 직결된다. 특별히 인간의 상태에 대한 이해는 창조와 타락,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최후의 심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인간의 상태는 다섯 가지로 이해 될 수 있다. 1) 타락 이전의 무죄 상태(Status Integritatis) 무죄의 상태에 있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었으며 언제든 하나님의 임재에 참여 할 수 있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죽음의 공포, 질병, 고통, 슬픔, 불의 등 인간을 괴롭히는 모든 요소에서 벗어나 있었다. 타락 이전의 무죄 상태에 있는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간의 삶 속에 죄가 유입됐으며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2) 타락으로 인한 부패의 상태(status corruptionis) 완전한 선을 추구할 수 있었던 인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부패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에덴동산에서 누렸던 권리는 모두 박탈되었고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다. 인간의 거룩성은 사라졌고 하나님의 거룩 앞에 설 수 없게 되었다. 에덴동산의 풍요, 평화, 자유, 기쁨은 사라지고, 땀을 흘려야 먹고 해산의 수고와 고통을 짊어져야 했다.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창 3:16~18). 만물에 대한 통치권을 잃었으며 하나님의 임재 밖으로 버려졌다. 목숨은 붙어 있었으나 이미 사망 선고가 내려진 상태였고 영혼은 부패했으며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되었다. 죄의 욕망에 따라 살며 결국에는 죄 가운데 죽어갈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마음의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고(창 6:5)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육신은 흙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유한한 존재가 되었다. 3) 그리스도로 인한 선사된 은총의 상태(status gratiae) 칼빈(John Calvin)이 말한 ‘전적인 타락’에 놓인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선물, 즉 은총(카리스)만이 필요하다. 성경은 그 어느 곳에도 다른 길이 없다고 말한다(요 14:6).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사람도 어떤 이름도 주신 적이 없다고 단언한다(행 4:12).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세주로 영접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우리의 영혼은 거듭나고 중생한다(롬 10:9). 이 거듭남과 중생의 결과로 인간은 새로운 피조물, 그리스도의 신부, 성령의 전, 하나님의 자녀라는 은총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진리를 소유함으로써 자유를 누리게 된다(요 8:32).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졌으며 사망의 종이나 지배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법 아래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무죄 상태에 있던 아담과 달리 죄의 속성이 여전히 잔존해 있어서 끊임없이 죄의 유혹과 육체의 소욕과 싸워야 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2~24)라고 절규하는 바울의 모습은 이런 인간의 상태를 잘 묘사해 주고 있다. 4) 구원을 받는 자들의 죽음 후 영광의 상태(status gloriae) 육체의 죽음은 존재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은 죽음을 통해 늙고 병든 육체를 벗고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고전 15:20), 우리 또한 부활의 기쁨과 함께 신령한 옷을 입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영광스런 상태가 된다. 이것이 구원 받는 자들의 죽음 후 영광의 상태이다. 아담과 하와가 잃어 버렸던 무죄의 상태를 회복하며 더 이상 죄와 사망, 질병과 고통에 지배되지 않는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절대적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함에 거리낌이 참여할 수 있다, 모든 희미하고 불분명했던 것들이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과 같이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며(고전 13:12), 상함과 행함이 없는 완벽한 평화를 맛보게 될 것이다. 5) 저주를 받은 자들의 죽음 후 저주 상태(status damnationis) 죽음 후 인간의 상태는 믿는 자들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 믿는 자들에게 주어질 영광의 상태와 정반대되는 인간의 상태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이 죽음 후 놓이게 될 저주의 상태이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는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 기록된 글귀처럼 더 이상 어떤 소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선함을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사랑은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심판의 고통만이 영원히 지속되며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나(마 25:30), 돌이킬 수 있는 방법과 기회는 사라진 상태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는 기대할 수 없고 사탄과 죽음의 권세로 다스려지는 처참한 인간의 상태이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3.03.0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생명과학 이야기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주목나무
  • 주목나무는 성탄절 크리스마스 트리(Christmas tree) 장식용으로 구상나무, 전나무와 함께 인기 있는 나무로 천년주목(千年朱木)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란 수식어에 맞게 위풍당당한 모습은 살아서는 물론이고 죽어 고목이 되어도 유구한 세월을 품고 있는 그 품위를 표현한 것이다. 오랜 세월 성장하면서 거목이 되고 죽어서도 세월의 풍상을 견디면서 그 형상을 유지한다. 주목나무는 특별히 고산지형에 잘 적응하고 내한성이 좋다. 목재가 다른 나무보다 유독 붉은 색을 보여서 한자표기로 붉은 주(朱), 나무 목(木)을 붙여 ‘주목나무’라 부른다. 성장조건이 좋으면 높이가 25m 이상 자란다. 주목나무는 은행나무처럼 암수가 딴 그루이며 사철 푸른 상록수로 잎은 침엽수 중에서 넓은 큰 교목이다. 봄에 수나무에서 꽃이 피면 송홧가루처럼 꽃가루가 바람에 날리며 암나무의 열매는 가을이 되면 주홍색으로 익어간다(사진). 가을에 붉은 색 열매(사진)는 점액성이 있는 달짝지근한 맛을 내며 식용이 가능하다. 붉은 열매는 조선시대에 곤룡포 등 옷감을 염색하는데 사용되었으며 나뭇가지와 잎은 한약재가 됐다. 특이한 점은 과육에 구멍이 있고 익는 과정에서 씨앗이 빠져나와 땅에 떨어진다. 주목나무의 씨앗과 잎과 목질에 택신 알칼로이드(taxine alkaloids)이라는 독이 있어 과거에 사약(賜藥) 제조의 원료로 사용한 기록이 있다. 그런데 최근 그 독성을 이용한 항암제가 개발됐다. 주목나무의 껍질에 있는 파클리탁셀 생약성분이 항암효과가 있음이 입증되면서 미국의 한 제약회사가 ‘택솔(taxol)’이라는 항암제를 판매하고 있는데 일부 부작용이 있으나 ‘기적의 항암제’라 불리고 있다고 한다. 잎에도 쿠마린, 알칼로이드, 플라보노이드, 택솔 성분이 있다. 요즘은 주목나무가 정원수나 낮은 담장의 울타리 장식용으로 심겨진 모습을 자주 본다. 과거에 교회에서 혹은 큰 거리에서 성탄절 장식용으로 원뿔모양의 전지(剪枝)된 주목나무를 자주 사용하였다. 주목나무 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나무는 인류를 위해 아낌없이 주는 생명나무의 예표가 된다.(계 22:2) 이렇게 나무는 외견상 보여주는 멋진 모습 외에도 목재와 연료용은 물론이고 오염된 공기를 정화시키고 각종 약리적 성분은 난치병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역할을 한다. 윤철종 목사(또오고싶은교회, 이학박사)
  • 2023.11.23 / 이미나 기자

    생태계에 영향을 주는 ‘달’
  • 달은 태양처럼 눈이 부시도록 밝지 않아서 하늘을 볼 때 사람의 눈으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낮에 나온 달은 푸른 하늘에 그 모습이 몹시 창백해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이 되면 어떤 별보다 크고 밝게 빛난다. 마치 태양 빛이 없는 밤하늘을 은은한 빛으로 독점한 듯 보인다. 사람들은 특별히 눈에 띄는 자연이나 천체 중에서 큰 위용과 불가항력의 대상을 발견하면 경외심을 갖고 상징성을 부여하며 더 나아가 신성하게 여긴다. 이러한 경우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이방나라나 지역에서 행해지던 각종 우상에 대한 제사와 경배의 대상이 됐다. 예를 든다면 태양을 남성으로 생각하고 달은 여성을 상징하는 일은 동서고금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이며 고대국가의 신화에서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구약의 모세오경에 나오는 당대의 애굽 왕은 태양신의 아들이며 살아있는 신으로 강력한 통치자를 상징하는 남성을 의미하는 ‘바로’(파라오, Pharaoh)였다. 고대 로마시대에 이르러서도 그리스신화에 있는 수많은 신들은 이름만 로마어(라틴어)로 바꿨을 뿐 그대로 이어졌다. 한 예로 ‘제우스’ 신의 쌍둥이 남매 중에 아들은 ‘아폴로’(Apollo)로 태양의 신이라고 했고 딸은 ‘아프로디테’로 달의 신으로 상징하는데서 알 수 있다. 사도 베드로와 바울이 사역하던 시대에 성령을 체험한 성도들에 의해 예루살렘과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지고 고린도교회와 에베소교회가 세워질 때 함께 했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인으로 ‘아볼로’는 성경에 정통했고 언변이 탁월했는데 그의 이름도 알고 보면 태양신 ‘아폴로’이다. 이렇듯 다양한 우상과 신들은 생활 속에 깊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특별히 에베소 도시와 고린도 도시의 주민들은 전쟁으로부터 자신들의 도시를 수호하고 다산의 복을 비는 대상으로 그들의 도시에 주신(主神)으로 숭배하는 여신이었다. 사도행전에서 여러 번 나오는 ‘아데미’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아프로디테’로 사도 바울이 선교할 때 방해하고 큰 피해를 주는 거짓 우상이었다. 태양이 우리가 사는 우주환경과 자연생태계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이에 비해 달의 영향력은 미미해 보일 수 있지만 바다의 밀물과 썰물을 통한 조수간만의 차이를 만들어내며 바다생태계에 생명을 불어 넣어준다. 윤철종 목사(또오고싶은교회, 이학박사)
  • 2023.10.27 / 김용두 기자

    두개의 얼굴을 가진 은행나무
  • 황금빛 노란 잎으로 아름다운 가을을 물들게 하는 은행나무가 있다. 암수딴그루로서 자웅이주(雌雄異株)이며 지구연대기의 식물표본으로 현세까지 살아 있는 화석이란 별명도 있다. 현재 식물분류상 아종이나 변종이 없이 한 종류만 남아있다. 크게 자라며 장수하는 교목으로 현대의 각종 공해에 굴하지 않고 자라며 병충해에도 강한 나무이다. 나뭇잎은 플라보노이드라는 노란색이지만 광합성을 위한 엽록체에 가려져서 초록색으로 보일 뿐이다. 가을이 되어 기온이 떨어지면 엽록체는 파괴되어 본래의 노란색만 보인다. 그러므로 다른 활엽수들처럼 울긋불긋 다양한 색으로 물들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은행나무는 잎이 접이식 부채 모양으로 기존 활엽수들의 다양한 장타원형이나 침엽수의 바늘과 같은 모양과 사뭇 다르다. 가을이 되면 노랗게 익은 은행의 외피에는 빌로볼, 징코톡신 물질이 있어 땅에 떨어져 사람들에게 밟히면 고약한 악취를 풍겨 때로는 보행자와 거주민들에게 민원을 발생시킨다. 냄새도 문제지만 은행을 개울에서 외피를 씻어 제거할 때면 그 독성으로 주변의 물고기를 죽을 수도 있다. 과거 추워지면 화롯불에 둘러앉아서 은행을 구어 먹던 추억도 있다. 지금은 필요에 따라서 껍질을 벗겨 냉장고 보관하였다가 잡곡밥처럼 별미를 즐기기도 한다. 그러나 조심할 일은 독성이 있어서 익혀 먹어야 한다. 만일 익혀 먹지 않으면 개인에 따라 청색증, 알레르기, 구토, 호흡곤란, 발작 증세가 있을 수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은행 중독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성인 기준으로 익힌 은행을 하루 10개, 어린이는 하루 3개 이하로 먹는 것을 권장하고 있으므로 한 번에 많은 양을 먹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한편 은행열매는 푸른보약이란 별명이 있듯 장코플라톤 성분은 혈관에 혈전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고 혈액순환을 돕고 호흡기계에도 좋다. 그 외 베타카로닌, 레시틴, 아스파라긴산 성분은 항산화 성분으로 영양 간식이다. 지난 세기 독일의 제약회사가 초록색 은행잎에서 혈전용해성분을 추출하는 기술로 국내의 은행잎을 수입해 갔으나 현재는 국내기업에서 혈액순환개선제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은행나무와 열매는 유용한 약리적 성분과 함께 독성도 있으나 조리법에 따라 식용이 되고 유용한 성분을 추출하면 특정 질병을 예방하거나 치유를 위한 좋은 약이 될 수 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다. 어떤 물질은 인체에게 유익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해로운 성분이 있어 극단을 달리는 양면성이 있다. 이를 감식하고 처리하는 기술과 방법을 알도록 지혜를 주셨다.(전7:12) 윤철종 목사(이학박사, 또오고싶은교회)
  • 2023.10.04 / 이미나 기자

    성경 Think! 인생 Thank!
    하자 인생… 상처 입은 치유자로 세워져
  • 예수님에게 치유받고 다른 사람을 치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 찐 가족 됨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 했던가. 같은 무리끼리 서로 왕래하여 사귄다는 뜻이다. 매주 대예배를 드리고 봉사를 마친 뒤 한곳에 모이는 소그룹이 있다. 언뜻 보기에는 함께할 공통점이 보이지 않지만 이들이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각자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면 한두 가지 후회되는 사연(?)을 가진 여성들로 나이, 지역 등에 얽매이지 않고 함께하는 모임이다. 추억으로 사라진 소그룹 원래 교회라는 곳이 사랑, 은혜, 용서, 회복 등 은혜로운 단어가 넘친다. 하지만 교인들이 현장에서 느끼는 온도는 다르다. 이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많이 입었기 때문이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사람과의 관계가 제일 어렵다. 이러한 때에 코로나19로 교회 출석이 어려워지자 남의 눈 의식하지 않고 집에서 휴대폰 하나 들고 예배드리는 자유로움을 맛보았다. 교회에 나가는 수고로움도 없이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니 이런 유의 신앙생활이 삶에 스며들었다. 수십 년간 한 교회 한 구역에 있다 보니 사람에 대해 지쳐있고, 소그룹 모임을 해도 형식적으로 진행될 뿐이다. 표면적으로는 적당한 대화가 오고 가는 듯하지만 속 이야기는 전혀 내놓지 않는다. 이런 모임은 피로감을 더하며 더 이상 관계가 진전되지 않는다. 사도행전에서 말하고 있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는” 현장은 추억으로 사라지고 있다(행 2:42~47).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 교회라는 헬라어 ‘에클레시아’는 ‘에크’(~로부터) + ‘칼레이오’(부르다)로 이루어진 합성어다. ‘밖에서 불러 모았다’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자격요건을 만들어 이에 맞는 사람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사랑으로 “내 새끼다”라고 끌어안으셨다. 그러니 세상에서 만날 일이 1도 없는 사람, 별의별 사람들이 한 가족이 되었다. 일찍이 어떤 이는 “공동체란 당신이 가장 함께 살고 싶지 않은 사람과 늘 살고있는 곳”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소그룹 모임 안에서 ‘네 신앙이 좋으냐, 내 자격이 월등하다’ 등의 주장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예수님의 핏값으로 산 교회 공동체는 자신이 자격이 있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이다. 세상에서 상처받은 영혼들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치유되고,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사역자로 세워진다. 이러한 것을 할 수 있는 현장이 바로 소그룹이다. 매주 모이는 소그룹 멤버들은 다양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지난날 부끄럽고 힘든 시간이 있던 사연들이 있기에 우스갯소리로 “다들 하자가 있어!”라고 말한다. 하자 인생 ‘하자’(瑕疵)라는 단어는 옷의 얼룩진 흔적이라는 뜻으로 ‘흠’을 뜻한다. ‘흠’ 많은 인생들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사람들을 피하고 세상을 저주하며 살다 예수를 만난다. 세상 사람들은 정죄하고 기피할 수 있지만 그분의 사랑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라”(요 8:11)라고 말씀하신다. 그 용서하심으로 그 ‘흠’은 지워지고 깨끗해져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롭게 인생을 살아간다(고후 5:17). 상처 입은 치유자!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상처가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이 된다. 하자 많은 인생들은 고통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고, 치유를 통해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고통을 공감하고 그 사람의 치유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자신의 연약함을 끌어 안아주고, 함께 기도해 주고, 무엇을 먹어도 맛있고, 행복하니 소그룹 모임을 기다리고 참여할 수밖에 없다. ‘하자 인생’에서 ‘하나님의 자녀’(하자 인생)로 다시 태어나면 소그룹은 건강해진다. 하나님은 하늘 아래 나 혼자 깨끗하게 신앙생활하는 것을 원하시는 게 아니라 공동체 생활을 하길 원하신다. 건강한 소그룹의 7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다(행 2:42~47). ■ 영성(42절) ■ 사랑과 연합(42, 44, 46절) ■ 이적(43절) ■ 구제(45절) ■ 예배와 찬미(46~47절) ■ 칭송(47절) ■ 전도(47절)가 있다. 그 기본은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맛보는 거다. Think! Thank! Q1. 당신은 어떤 하자가 있나요? Q2.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주님의 용서하심을 받으셨나요?(요 8:11) Q3. 용서함을 받은 당신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용납한 적이 있나요?(골 3:13)
  • 2023.10.1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부모의 자격 … 창조주 하나님 만나야 
  • 수능까지 95일, 하나님 주신 평안함으로 자녀위해 기도 대학 입시 취업 등 인생의 한 부분, 더 큰 그림 그려야 수험생과 취준생을 위한 기도회가 시작되었다. 합격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기도회에 참석하고, 카톡으로 서로의 기도문을 공유한다. 하나님에게 모든 걸 맡긴다고 하면서도 들리고 보이는 것으로 일희일비(一喜一悲)한다. 수능이 95일 남은 시점에서 ‘수능 킬러문항 배제’ 찬반의견이 팽배하고, 세계적인 경제 불황으로 신입 채용시장이 한파일 거라는 뉴스는 불안에 떨게 한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어 상당수의 학생들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없이 세상과 부모가 원하는 기대에 맞추어 산다. 수능 점수에 맞게 학교를 선택하고 취업이 잘 되는 학과에 입학한다. 정작 들어가서는 적성에 맞지 않아 전과를 준비하거나 휴학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3·4학년 때에는 취업을 목표로 자격증을 준비하고 스펙을 쌓느라 분주하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전공 불문하고 많은 학생들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안정된 노후와 평생직장에 대한 기대로 경쟁률이 높았지만 지금은 시들해졌다. 기술과 인터넷의 무서운 발전 속도로 원격 근무, 비대면 업무 등 직장생활의 환경이 수시로 바뀌고 있다. 인공지능의 등장은 인간의 수많은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부모가 꿈꾸고 세상이 말하는 학과, 직업을 선택하는 것은 당장 부와 안정이 보장되는 것 같아 보이나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사랑의 순서는 하나님부터 합격을 위한 기도를 하기 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자녀가 그 대학에 들어가길 원하는 건지? 왜 저 기업에 취업이 되기를 바라는 건지?” 다 자식을 위한 것이라 말하지만 그 내면에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한(恨), 체면, 성공 등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니 자신의 틀 안에서 자녀를 기다려주지 못하고, 제한된 생각 안에서 키울 수밖에 없다. 자신의 계획에 맞춰 돌아가지 않으면 못마땅할 뿐 아니라 절망하게 된다. 팀 켈러는 우리를 절망케 하는 것일수록 우상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전 3:11)을 주셨는데, 대부분 하나님 보다 자녀를 1순위에 두고 삶의 기쁨을 찾는다. 하나님 없이 계획하고 실행하는 모든 것은 망한다. 이 세상에 살면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누린 솔로몬은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7)라고 고백했다. 자녀를 많이 사랑한 게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 연약함을 고백해야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그분의 은혜를 깨달으면 우리의 배포는 커진다.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 전전긍긍하지 않으며, 믿음의 눈으로 자녀를 본다. 자녀는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선물이다(시 127:3). 우리에게 자녀를 맡겨주신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자녀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오류가 없으시며 완벽하시다. 그 좋으신 하나님이 자녀를 붙잡고 계시니 자녀가 잘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 믿음이 우선이다(엡 2:10). 하나님 없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취업이 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녀들이 이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긴 인생 가운데 지금의 시간은 한 부분이다. 이 시간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한다(잠 16:9). 자녀가 때때로 무기력하고, 모의고사 점수가 나오지 않아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에도 채근하지 말아야 한다. 취업의 문을 두드릴 때 이력서를 수백 통을 쓰더라도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 평가하면 안 된다. 그분이 주시는 평안함으로(요 14:27) 자녀를 대할 때 자녀는 부모를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된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불안하다. 95일간 기도의 자리에 나아갈 부모라면 자신이 얼마나 자격 없는 자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그 도우심으로 자녀의 인생을 만들어 가실 하나님의 손길을 보면 ‘절대긍정 절대감사’가 저절로 나온다. Think! Thank! Q1. 자녀가 못마땅하며 자신을 실망시키고 있나요? Q2. 자녀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나요?(살전 5:18) Q3. 10년 뒤에 일어날 일들을 예상할 수 있나요?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세요.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3.08.1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상실, ‘하나님 앞에서 울다’
  • 안전하다고 느껴질 때 이 세상을 영원한 집으로 삼아
    현재의 순간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발견 7, 8월이 되면 각종 성회가 개최되면서 오산리 기도원에 올라간다. 산으로 바다로 해외로 나갈 수 있는 기회임에도 발걸음을 돌린다.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수고한 대로 먹을 수 없는 현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문제들로 인해 가슴이 먹먹해질 때 하늘을 향해 소리친다. “하나님~ 진짜 저와 함께하시는 거 맞죠?” 하나님에게 답이 있다고 믿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간다. 열심히 살았는데 왜? 최근 불의의 사고로 서울아산병원 심장혈관흉부외과 주석중 교수가 세상을 떠났다. 병원 근처 아파트 앞 교차로에서 자전거를 타고 횡단보도를 건너려다 우회전하던 덤프트럭에 치이는, 어이없는 죽음을 맞았다. 외과 분야는 업무 강도가 높아 의사 인력이 부족해 주 교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술을 도맡아 했다. 제대로 식사를 할 시간조차 없이 오로지 환자를 돌보고 연구에만 힘썼다. 죽음을 맞기 전 아내에게 “나는 지금껏 원 없이 살았다. 수많은 환자들 수술해서 잘 됐고, 여러 가지 새로운 수술 방법도 좋았고, 하고 싶었던 논문도 많이 썼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소명을 다한 듯해 감사하고 행복하다”라고 말했다. 주 교수의 연구실에 직접 쓴 몇 개의 기도문이 있었는데 “…but what can I do in the actual healing process? Absolutely nothing. It is all in God’s hands(하지만 실제 치유 과정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살았던 주 교수는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하나님 품에 안겼다. 왜? 이런 죽음을 하나님을 의지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환자를 돌보며 소명을 가지고 살았는데 “왜? 이런 죽음을 당했을까? 하나님은 왜 이런 죽음을 허락하셨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상실(喪失)은 어떤 사람과 관계가 끊어지거나 헤어지게 되는 것, 어떤 것이 아주 없어지거나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 울다』를 쓴 제럴드 싯처는 가족들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 음주운전 차량과 정면충돌하는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아내와 딸, 어머니를 잃고 남은 세 아이들도 큰 부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 사고는 교회봉사를 하고 돌아오던 길에 발생했다. 이게 말이 되는가? 각자의 삶에서 이미 이런 일을 겪고 있거나 당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상실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사건이다. 이러한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고 그 고통 가운데에도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게 한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1). 상실은 성장을 가져와 이러한 상실은 슬픔을 넘어 절망을 가져오게 된다. 슬픔은 위로받을 수 있는 고통으로 여러 좋은 것 중 하나를 잃었을 때 찾아온다. 절망은 위로받을 길이 없다. 궁극적인 것을 잃었을 때 찾아오기 때문이다. 삶이 평안할 때,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는 삶의 에너지와 시선이 내 자신, 내 가족, 내 행복에 맞춰진다. 그러나 상실로 인해 깊은 어둠 속에 빠지게 될 때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더불어 그동안 내가 무엇을 붙잡고 있었는지를 보게 된다.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안정, 자식, 돈, 권력 등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보게 된다. 상실은 나쁜 것이고 삶을 위협하는 어둠인 것이 분명하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선용(善用)하셔서 결국 인간의 영혼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만드신다. 제럴드 싯처는 “나는 잃었지만 또한 얻었다. 나는 사랑하던 세상을 잃었지만 은혜를 깊이 알게 되었다. 은혜야말로 내 삶의 목적을 분명하게 해주었고 현재의 순간이 얼마나 경이로운지를 새삼 발견하도록 해주었다”라고 말한다. 사람은 안전하다고 느껴지기 시작할 때 이 세상을 영원한 집으로 삼으려 한다. 이 땅의 삶은 잠깐이다. 아픔 이전의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어도, 상실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질 수 있다. 상실의 상황이 영혼의 유익을 주는 사건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택이라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상실 앞에서 무기력, 절망이라는 선택을 하게 되면 상실은 계속해서 내 인생에 파괴적인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상실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앞에 놓여있는 삶을 향해 계속 전진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면 상실을 영혼의 유익을 주는 재료로 바꿀 수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Think! Thank! Q1. 하나님이 당신을 버렸다고 느껴진 시간이 있나요? Q2. 지금 당신을 절망케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Q3. 사람이 줄 수 없는 위로를 하나님이 주십니다. 로마서 8장 28절을 암송해 보세요.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3.07.0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고전(古典)에서 길을 찾다
    오스 기니스 '소명(The Call)'
  • 각박한 일상에 복음 한 방울 ‘소명’ MZ 크리스천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 토렴은 밥에 수분을 더하고 온도를 높이는 과정이다. 밥에 뜨거운 육수를 여러 번 부었다가 따라내어 덥히는 과정으로 맛을 배가시킨다. 책 ‘소명’은 각박한 세상에 지쳐있는 젊은이들 마음을 촉촉이 적시며 가슴을 활활 타오르게 할 토렴식 국밥 같은 존재다. 팀 켈러 목사도 “기독교 서적 중에서 오스 기니스의 고전 ‘소명’에 비할 작품은 없다”라고 추천했을 정도다. 이 책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나를 따르라”이다. 세상을 바꾼 위대한 외침이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셔서 우리가 존재하게 됐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을 가장 보람 있게 사는 비결이며 가장 깊은 관계를 여는 열쇠가 된다. 목적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경로, 인생을 사는 가장 도전적이고 매혹적이고 자연스러운 길이 소명을 받아드리는 것이다. 또한 모험적인 도전의 인생을 사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창조주 하나님의 소명에 귀 기울이고 그 소명을 따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 공매도가 금지되어 상승한 주가는 반짝 효과일 뿐,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요즘이다. 자존심이 상대방으로부터 존경받지 못했을 때의 마음 상함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부르신 존귀한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이 자존감이다. 소명을 읽다 보면 가슴속 깊이 치밀어 오르는 자존감을 경험할 수 있다. 부르심인 동시에 명령인 예수님의 초대에 순종하여 따르기로 결심해보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요즘은 할 일도 많고 시간도 없는 세상이다. 피곤한 삶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된다. 결국 우리는 과중한 짐을 진채 삶의 목적을 잃게 된다. 오늘의 관심사가 내일엔 뒷전으로 밀려나기도 한다. 개인주의로 파편화된 우리의 삶, 교회 안에서도 헌신에 발목 잡히지 말라고 서로 암묵적인 신호를 보내기 일쑤다. 이런 탈기독교적 라이프스타일 가운데 소명은 초점 있는 삶을 살도록 길을 열어준다. 물론 소명은 인터넷 쇼핑몰에서 장바구니에 담듯 그렇게 쉽게 손안에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오스왈드 챔버스는 “각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붙잡을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뻗어 나가도록 만들어졌다”라고 용기를 준다. 아직도 내 삶의 목적을 찾지 못했다면 또한 성취의 기쁨을 누리고 싶다면 오스 기니스의 대표작 ‘소명(The Call)’을 한 손에 잡아보자. 뜨끈한 국밥 한 그릇 더한다면 빠르게 지나가는 가을도 아쉽지 않다.
  • 2023.11.09 / 이미나 기자

    존 칼빈의 『쉽게 읽는 기독교 강요』
  • 기독교를 더 깊이 알고자 하는 갈급함으로 읽는 책 최근 EBS 다큐 ‘책맹인류’가 방송됐다. 안읽어도 너무 책을 안읽는 우리 세대에 관한 내용이다. 어려워하지만 싫어하기도 한다. 그런 세대에게 올드(old)하고 두툼한 책, 존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추천한다. 쉽게 읽다 보면 최애가 될 고전 중의 고전이다. 존 칼빈은 종교개혁자이자 신학자였다. 그는 박해받는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가슴 아파했다. 그래서 당시 프랑스 왕인 프랑수아 1세에게 참된 기독교 신앙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이 책을 헌정했다. ‘기독교 강요’는 1536년, 그렇게 세상에 등장했다. 오늘날에도 세상 철학의 거센 바람에 노출된 교회들에게 성경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정확히 알려 주는 이정표가 되고 있다. 우뚝 솟아있는 알람브라 궁전이 그라나다를 대표한다면 기독교 역사 가운데 웅장하게 서 있는 책이 기독교 강요다. 초판은 라틴어로 출간되었고 나중에 프랑스어로도 나왔는데 이 책으로 인하여 프랑스어가 더욱 값어치 있는 언어가 되었다고 프랑스인들이 칭찬할 정도이다. ‘쉽게 읽는 기독교 강요’는 3권 6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 풀어놓았는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전제로 깔고 있다. 자연계와 성경과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은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된다는 것, 우상과 하나님과의 구별, 삼위일체의 하나님, 악의 존재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다. 2권에서는 구속자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해 설명한다. 아담의 타락과 원죄로부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까지이다. 곧 인간의 타락과 자유 의지의 상실을 주장하여 인간에게는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다고 말한다. 제일 방대한 분량인 3권은 성령의 사역에 대한 부분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성령의 역사로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고 설명하며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상급을 논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함을 강조한다. 얼핏 보면 성령에 대한 내용이 많지 않아 보일 수도 있으나, 성령의 신성에 대해서는 1권에서, 성경과 성령의 관계는 1권 성경론에서 또 4권의 성례론에서도 성령의 임재를 다루고 있다. 완역본은 4권으로 되어 있으나 이 책에서는 생략됐다. 교회와 성례와 정치 그리고 국가 등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다. 우리가 성찬을 매달마다 하는 이유도 알 수 있다. 완역판에 도전해봄도 좋다. 칼빈은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를 ‘너의 영혼을 알라’는 뜻으로 인용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나를 알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된다. 기독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갈급함이 있고 기독교를 더 깊이 알고자 원한다면 이 책은 두말 않고 원픽이다.
  • 2023.10.12 / 이미나 기자

    존 오웬 '성도의 견인'
  • 하나님은 끝까지 함께 하신다 요즘 제철인 포도는 냉장고에 보관할 때 단맛이 더해진다. 믿음 또한 하나님 안에 있을 때 더욱 든든해진다. 그러나 상해버리는 음식처럼 때로는 믿음을 잃고 낙심하거나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목사님의 가정에서 태어난 존 오웬도 그런 성도들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책을 썼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석박사 과정을 하면서 수많은 고전을 통달했다. 헬라어와 히브리어 그리고 랍비에 대한 지식도 뛰어났다. 1652년 옥스퍼드대학교 부총장에 오르기도 했던 존 오웬은 수많은 저서를 쓰며 청교도의 황태자로 불리웠다. ‘성도의 견인’은 1674년 집필된 ‘성도의 견인 교리’를 요약한 고전이다. 신학적인 논쟁이 있을 수도 있으나 이 책에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구원’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고 그 근거들이다. 바나나 껍질 벗기듯 이 책을 넘겨서는 안된다. 고전의 특성상 술술 읽히지는 않기에 도로주행 연수받듯 굳은 마음으로 책을 붙들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이 미혹을 당하거나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도들은 주님의 길을 가다가 포기한 사람들을 보고 흔들려서는 안된다. 단지 그것을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자신 안에 거하시는지 점검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에 대한 근거로 존 오웬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독자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 교통사고 현장에 나타나는 레커차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견인’은 환난이나 악영향이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떤 상태, 행위의 과정들을 지속하는 것을 말한다. 성도의 견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강한 소망과 안위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고 말한다. 어린아이가 아빠를 향해 뛰어내릴 수 있는 것은 절대적인 믿음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의도는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자들이 끝 날까지 함께 하시는 주님을 향한 믿음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캡틴 손흥민 선수가 해트트릭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도 끝까지 믿었던 토트넘 감독이 있었기 때문인 것처럼.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므로 우리를 향한 사랑에도 변함이 없다. 말라기 3장 6절에 “나 야훼는 변하지 아니하나니”라는 말씀의 결과로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가장 큰 위로 중 하나는 우리가 영원토록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는 약속일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완전한 기쁨을 누릴 때까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체험하며 살도록 우리를 지키시는 것이다. 오순절 신학자인 로드만 윌리암스의 말을 새겨보자.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다”
  • 2023.09.07 / 이미나 기자

    고민 Tick, 상담 Talk
    심리적인 안전기지 구축된 개인, 공격성 표출 적어 
  • ▶고민 Tick “요즘 칼부림 사건 등이 공공장소에서도 일어나면서 자녀들을 어떻게 키우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걱정이 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상담 Talk 25년간 상담 현장과 강단에 몸담으면서 필자가 내담자들을 만나면 처음으로 떠올리는 상담이론이 애착 이론이다. 한 개인이 생애 초기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주 양육자와 안정 애착을 경험했다면 이후 학교, 직장, 교회 안에서도 큰 무리 없이 인간관계를 맺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안정적인 편이다. 그렇다면 애착 이론이 생애 전반에 걸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이유는 왜일까? 애착 이론은 존 보올비(John Bowlby : 1907~1990)가 UN의 의뢰를 받아 진행된 연구이다. 이 연구는 세계대전 이후 전쟁고아들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충분히 제공 받음에도 불구하고 왜 사회 부적응자로 자라는지에 대한 고민과 걱정 때문에 의뢰된 연구였다. 이 부분이 바로 우리가 최근 접하고 있는 사회 부적응 현상과 관련된 뉴스들과 연관된다.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가정과 교회공동체에서 따뜻하고 친밀한 관계 경험을 통해 심리적인 안전기지(secure base)가 구축된 개인은, 삶 가운데 종종 실망스러운 상황이 발생 되어도 본인의 공격성을 즉각적으로 표출하지는 않는다. 이는 공격성의 욕구를 지연시키며 지탱할 수 있는(sustaining) 마음의 근육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영 유 아동, 청소년, 청년, 장년, 중년, 노년기의 개인은 예배에 참석하면 기도, 찬양, 말씀에 본인을 적용하고 돌아보며 자신의 신체적, 심리적, 영적 상태를 안전하게 점검하고 삶을 버틸 수 있는 능력이 자연스럽게 구축된다. 이러한 이유로 필자는 내담자들과의 상담 마지막 회기에는 좋은 교회 공동체를 찾아가서 신체적, 심리적, 영적 건강성을 유지하기를 바란다는 제언을 하고 마무리한다. 보울비의 제자로서 오늘날 애착 이론의 주춧돌을 제공한 메리 에인스워스(Mary Ainthworth : 1913~1999)에 의하면 자녀가 안정 애착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양육자들의 보살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자녀가 안정 애착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첫째, 자녀의 요구에 신속하고 민감하게 양육자들이 반응하여야 한다. 양육자를 찾아와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안전기지’가 되어주어야 한다. 둘째로는 자녀 스스로 믿음을 갖고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돕는다. 셋째는 양육자들이 자녀들에게 따뜻한 사랑과 돌봄으로 일치된 의사소통을 제공하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실제로 안정 애착이 구축된 자녀를 둔 어머니는 대체로 감수성이 높았다. 이를 ‘응답성’이라고 하는데, 자녀의 바람이나 욕구를 최대한 파악하고 즉각 상응하되 아이가 원하는 수준 이상으로는 하지 않고 아이의 요구에 맞춰 적절하고 민감하게 대응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안전기지가 되어준 양육자들 밑에서 안정 애착을 형성한 아이는 자라면서 다른 사람과도 친밀한 관계를 잘 맺는다. 또한 안정 애착의 특징은 홀로 있을 때도 편안하고 위기 상황에서도 안정적인 편이며 감정 조절도 잘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이해심도 갖춰져 있다. 이러한 성품이 가능한 이유는 자신이 위기에 처했을 때 안전기지가 되어준 양육자들과의 공동체 경험이 토대가 되어 자신과 남에 대한 긍정적 정서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자신과 남 모두를 존중한다. 특히 안정 애착유형은 자신의 문제를 자신만의 관점으로 보지 않고 한 걸음 물러나 타인의 관점에서도 바라볼 수 있는 메타인지가 발전되어 있다. 안정 애착유형인 개인은 어느 한 문제에만 얽매이지 않고 다른 관점으로 현실을 파악하여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는 신앙인 중에서도 인생의 절망스러운 순간에 하나님을 원망만 하기보다는 그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감사의 순간들을 떠올리고 위기를 극복하는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지금 우리의 위기는 그 이전과 다음에 베푸실 축복과 은혜의 과정이라는 메타인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심리적, 신앙적으로 자녀들을 올바로 키운다는 것은 첫째, 자녀들 주위에 있는 양육자들이 최선을 다해 심리적인 안전기지가 되어준다는 것이다. 둘째, 양육자들이 삶에서 종종 어려움에 부닥칠지라도 다시 한번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바라보는 신앙의 태도를 가질 때 그것을 바라본 자녀들이 가장 중요한 안정적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교회공동체도 양육자들과 자녀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안전기지를 경험할 수 있는 예배를 회복하고, 양질의 프로그램들을 부지런히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은 누구나 삶의 여정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나 절망만 할 것이 아니라 건강한 교회 공동체와 함께 머무르며 안정을 찾는 기간을 보낼 수 있다면 오히려 위기가 안정재애착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어린 시절 불안정 애착을 경험한 개인일지라도 좋은 교회공동체를 만날 때 안정재애착을 경험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으며 이러한 경험은 하나님의 안전한 날개 아래로 인도함을 받는 통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른쪽을 살펴 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야훼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시 142:4~5). 박은정 교수(목회상담학)
  • 2023.10.2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MBTI, 서로 반목 아닌 성숙 돕는 도구로 선용해야
  • ▶ 고민 Tick “김 집사님과 저는 외향형(E)과 내향형(I)으로 서로 에너지 방향이 달라서 같은 부서에서 봉사하기 힘들어요”, “이 장로님은 이성적(T)이셔서 늘 옳고 그름을 따지시는데, 저는 감정형(F)이어서 늘 상처받아요” 등 교회 안에서도 요즈음 MBTI 성격유형검사 결과를 두고 서로 오해가 쌓이는 경우들이 많은데요. 어떻게 하면 이 도구를 제대로 알고 지혜롭게 활용할 수 있을까요? ▶ 상담 Talk 코로나 이후 대면 교육이 활성화되면서 교회와 기관들이 아동, 청소년, 청년, 장년과 노년 부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목회 상담 관련 세미나들을 실시하고 있다. 최근 교회에서 가장 많이 의뢰하는 세미나 주제는 성도들이 맹신하고 있는 듯 보이는 MBTI 성격유형검사 세미나이다. 그 이유는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통하여 MBTI 성격유형검사를 간단히 접한 성도들이 반대 성향들을 나름대로 판단한 후 함께 봉사하기 싫어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MBTI 성격유형검사 결과가 지금처럼 편 가르기하는 데만 주로 사용된다면 창시자 융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가고 있는 것이기에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다. 이제는 잘못 활용되고 있는 MBTI 성격유형검사를 교회가 먼저 제대로 알고 화합에 앞장서야 할 시점이다.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 성격유형검사는 목회자와 신학자 집안의 아들이었던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 1842-1896)이 발표한 ‘심리학적 유형(Psychological Types)’ 이론을 토대로 전 세계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질의문답식 심리검사이다. 이 검사는 융의 제자인 이사벨 브리그스 마이어스(Isabel Briggs Myers : 1897-1979)와 그녀의 어머니 캐서린 쿡 브리그스(Katharine Cook Briggs : 1875-1968) 모녀에 의하여 개발됐다. 캐서린은 융이 연구한 심리 유형 이론을 20여 년간 ‘인간 관찰(People Watching)’을 통하여 타당성을 확증한 후 딸인 이사벨이 이어서 연구하였다. 이들은 일반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쉽고, 유용하게 활용하며 서로 다른 성격 유형들을 보완하고 합력하여 전체성을 이루어가야 한다는 목적으로 1900년~1975년에 이 검사를 개발하였고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연구 되어지고 있다. MBTI의 토대가 되는 융의 성격 유형 이론의 중요 점은 한 개인이 정보를 수집하고, 자신이 수집한 정보에 근거하여 행동하기 위한 결정을 내리는 방법이 개인마다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융은 인간 행동이 제각각이고 예측하기 어려우며 변화무쌍해 보이더라도 각자 나름대로 일관성이 있고 몇몇 특징들로 나뉘어져 있음을 강조하였다. 융은 이러한 경향성들을 에너지의 방향에 따라 ‘I는 내향적 태도(Introversion)와 E는 외향적 태도(Extraversion)’, 정보를 수집할 때 자기 감각에 의지하며 지금, 현재를 중시하는 ‘S는 감각형(Sensing)’, 영감에 의존하고 현재보다는 미래의 가능성에 초점을 두며 상상과 아이디어를 중시하는 ‘N은 직관형(iNtuition)’, 논리적, 분석적, 이성적 입장에서 옳고 그름을 중시하는 ‘T는 사고형(Thinking)’, 감성과 공감을 중시하는 ‘F는 감정형(Feeling)’, 의식적 측면에서 질서와 정리, 분명한 계획, 시간 약속 엄수를 중요시하는 ‘J는 판단형(Judging)’과 무의식적 측면에서 자율성, 융통성, 결정을 보류하는 것을 좋아하는 ‘P는 인식형(Perceiving)’이라는 해석에 기본적 이해를 제공하였다. 융은 인간이 타고 난 성향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갈 때 자신에게 잠재된 반대 성향도 개발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강조하는 ‘자기실현’의 과정은 기독교 신앙에 적용해 보자면, 가장 최고의 인격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가 그의 형상을 따라 성숙 되고 변화되는 ‘성화’의 과정과 닮아있다. 사울이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쫓아다니며 박해하던 삶에서 떠나 주님을 만난 후 바울이 되었을 때, 그는 이전에 그가 누리던 모든 특권적 삶과 성격의 페르조나(Persona, 가면)를 벗고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잠재 성품 개발에 성공하였다. 따라서 교회 안의 성도들도 세상의 가면들을 벗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잠재적 성향들을 모두 발견하여 최고의 인격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데 성격유형검사를 유용하게 활용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는 교회 안에서 성격유형검사 결과를 가지고 서로 반목하는 지체들이 있다면 오해를 풀고, 각자의 유형을 제대로 파악하며 성숙을 돕는 도구로 선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일반계시로 허락하신 심리학 이론과 검사 도구들은 특별계시인 성경 말씀과 함께 적용되고 해석될 때만이 우리 안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박은정 교수(목회상담학)
  • 2023.09.1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은둔형 청년들 새벽이슬처럼 주께로 나와야
  • ▶ 고민Tick “교회 공동체는 고립되어가는 청년들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요?” ▶ 상담Talk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 이야기할 때 자신감이 없어요”, “어릴 적부터 부모님과 감정교류가 거의 없어서 다른 사람과도 친밀한 인간관계를 맺기가 어려워요”, “코로나 이후로 대면 예배를 드리는 것이 두려워요”라며 상담 전문가를 찾아오는 크리스천 청년의 급증으로 교회 안팎의 상담사들이 바빠지고 있다. 가족과 교회 공동체,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청년들은 그나마 심각한 단계를 벗어난 수준이다. 정말 심각한 수준의 위기 대상 청년들은 고립된 은둔형 청년들이다. 일본에서는 부모가 집에 함께 있는 상태에서 방 밖을 나오지 않는 은둔형 외톨이 청년들이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심각한 사회 문제이다. 그나마 이들 곁에는 부모라도 있다. 반면 우리나라 고립 청년들의 자살 위험률이 높은 이유는 1인 주거지에서 기본적인 생활환경도 영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울시에서는 올해 1월, 19~30세의 은둔형 고립 청년들이 전국에 61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에릭 에릭슨(Erik Erikson, 1902~1994)은 청년들의 ‘고립’ 상황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것’과 ‘사람들로부터 분리되어 있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표현하였다. 특히 에릭슨은 청년기에 일, 우정, 사랑 분야에서 친근감을 획득하지 못하고 사람에게서 두려움을 느끼게 되면 이 증상은 성인 정신 병리 발생의 핵심 원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고립’은 한순간의 결과가 아닌 성장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주 양육자와의 관계에서 심화 된 갈등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이 갈등적 관계가 청년기의 발달 과제인 친근감을 형성하는 데 장벽이 되는 것이다. 고립 청년들이 친근감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우려면 교회 공동체와 사역자, 목회/기독교 상담 전문가, 이웃과 가족들 모두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사단법인 씨즈는 고립 청년들을 위한 온라인 플랫폼과 오프라인 모임을 제공하는 ‘두더지 땅굴’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두더지들이 땅속에서 열심히 서로 오가듯이 은둔형 고립 청년들이 다른 이들과 건강하게 사회적 상호작용을 할 수 있도록 연습하는 공간을 제공하는 프로젝트이다. 청년의 경우에는 개인 상담을 받더라도 사회공동체에서 적응하려면 집단상담 경험이 꼭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두더지 땅굴’ 프로젝트에서는 고립 청년들이 집 밖으로 나오지 않더라도 온라인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먼저 온라인에서 상호작용을 연습하도록 돕는다. 온라인에서 어느 정도 사회성 훈련이 된 청년들은 오프라인 모임 공간 ‘두더집’에 모인다. ‘두더집’에서는 ‘점심밥 모임’, ‘다양한 동아리’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소외되었던 청년들은 마당이 있는 다세대 주택 ‘두더집’에서 “외갓집에 온 것 같은 편안함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이는 마을공동체와 신앙공동체가 서로 어우러져 함께 자녀들의 고민을 나누고 돕던 시절을 회상하게 한다. 필자가 최근 다시 상담하게 된 청년 내담자도 16년 전 중학생 때 따돌림 문제로 어머니와 상담실로 찾아왔었다. 그 당시 1년 정도 상담을 잘 받고 지금은 멋진 청년이 된 그는 30대가 되어 직장에 잘 적응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친밀하게 지내던 직장 동료의 갑작스러운 자살 때문에 패닉 상태로 다시 필자를 찾아왔다. 그는 신앙생활을 잘하던 청년이었으나 코로나 기간에 일어난 사건이었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의 도움을 받기가 어려웠다. 더군다나 개척교회를 섬기는 청년이었기에 청년부 담당 사역자가 따로 없고 담임 목사님께는 걱정하실까 봐 연락을 못 드렸다는 것이다. 마음이 너무 착하고 예의 바른 성품이 이럴 때는 오히려 본인의 문제를 알리고 도움을 받는 데 방해가 된 것이다. 다행히 이 청년은 본인 의지와 부모님의 권유로 다시 상담받고 기도하면서 교회에 나가서 말씀을 통해 위로받고 용기를 얻어 정상 생활을 회복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도움을 받지 못하는 청년들은 온·오프라인 어떤 방법으로든 적극적으로 찾아서 살려내야 한다.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행 20:9~12)는 말씀에서 유두고는 바울의 설교를 듣고자 나아왔다. 그래서 비록 졸다가 떨어져 죽게 되었어도 다시 사는 은혜를 입고 사람들이 그로 인해 위로받았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청년들이 말씀으로 깨끗하여지고, 주의 권능의 날에 새벽이슬처럼 주께로 나올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야만 하는 이유이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시 119:9).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3). 박은정 교수(목회상담학)
  • 2023.08.1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신앙으로 세상보기
    뉴스 가려보기
  •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출현은 새로운 문명 시대를 열어왔습니다. 학자들은 ‘말’의 발명으로 수렵, 채집 생활이 시작된 1단계, ‘글’의 발명으로 농경사회가 형성된 2단계, ‘인쇄’의 발명으로 산업사회가 본격화된 3단계, 컴퓨터와 결합한 ‘텔레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등장으로 정보사회가 펼쳐진 4단계로 역사 발전과정을 설명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챗GPT’ 등 인공지능, 블록체인, 가상현실과 같은 디지털 범용 기술들이 새로운 4차 산업시대에 선도적 역할을 담당해 나가리라 예측됩니다. 되돌아보면 인터넷, 휴대폰 등 뉴 미디어의 확산은 커뮤니케이션 활동에 획기적 변혁을 초래했습니다. 우선 인터넷은 탁월한 개방성으로 공간의 제한을 무력화시키고 명실상부한 ‘지구촌 공동체’를 실현해 냈습니다. 또한 개인 미디어와 매스 미디어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함으로써 ‘공공영역’과 ‘사적영역’의 구분을 일시에 무너뜨렸습니다. 이 결과 많은 사람들은 IT기술과 접목된 뉴미디어의 등장이 ‘표현의 자유’에 있어 무한한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바람은 상당 부분 실현됐습니다. 하지만 이면에서는 간과할 수 없는 부작용 또한 생겨났습니다. ‘가짜뉴스’는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실제로 현대사회에서 미디어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막강합니다. ‘교과서’며 ‘재판관’이고 ‘세상을 향한 창’입니다. 실제로 영유아들은 부모나 교사보다 TV나 유튜브를 통해 먼저 세상을 배워 나갑니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가 언론의 잣대에 의해 규정됩니다. 또한 개인들은 미디어가 설정해 놓은 프리즘을 통해 외부 환경을 파악하고 사회 현안을 해석합니다. 한 마디로 ‘가짜뉴스’란 ‘뉴스의 형태를 띠지만 실체는 사실이 아닌 거짓된 뉴스’(fake news)를 의미합니다. 이는 언론 매체에 대한 사회 일반의 기본적 신뢰를 숙주로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진실을 조작해 이익을 챙기려는 불순한 시도입니다. 이런 행태는 근래 SNS상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터넷의 기술적 특성으로 인해 뉴스를 취사선택하는 ‘게이트 키핑’(gate keeping)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편집 통제권’(editorial control) 없이 ‘이용자 통제권’(user control)만 존재함을 악용해 가짜뉴스 제작 배포, 마녀사냥식 신상 털기, 테러 수준의 명예훼손 등이 거침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가짜뉴스를 정치적 선동의 수단으로 삼기도 하고, 가공된 뉴스를 활용해 주식시장을 흔들려 한 사례들도 있었습니다. 특히 유튜브 등 개인 미디어의 경우는 ‘조회’와 ‘구독자’ 수가 수익과 직결되는 구조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반인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선정적 내용으로 꾸며진 괴담 수준의 가짜뉴스가 경쟁적으로 쏟아지고 있습니다. “강하고 자극적인 발언을 할수록 보상이 올라 간다”는 것은 이미 통설이 됐고, “유명해진다면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노이즈 마케팅이 일반적인 비즈니스 모델로 정착되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가짜뉴스가 지닌 신속한 전파력입니다. 미국 MIT 공대 연구진에 따르면 자극적인 가짜뉴스는 일반적 뉴스에 비해 전파 속도가 평균 6배 빠른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의표를 찌르는 폭로성 뉴스, 험담과 막말이 섞인 특정인에 대한 인신공격에 더욱 솔깃해하는 인간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언론 자유를 신장시킬 것이라고 기대했던 디지털 공간에서 이처럼 민주 질서를 위협하는 행태들이 거리낌 없이 자행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지금이라도 윤리와 규범을 바로 세우고 사용자들의 책임 의식을 거듭 깨우쳐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밀려오는 정보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 ‘변별력’을 길러나가는 일입니다.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 교육을 통해 초등학교 때부터 각종 매체가 전달하는 내용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힘을 키워나가는 것도 효과적 방안이 될 것입니다. 특히 크리스천들에게는 이 같은 여과 능력의 함양이 더욱 절실히 필요합니다. 성경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전 5:8~9). 온라인을 이용해 범람하는 온갖 반기독교적 정보에 올바르게 대처하기 위해 예리한 통찰력과 분별력을 갖춰 나가야 할 것입니다. 필자는 오늘 이 지면을 빌려 혼탁한 미디어 환경 속에서도 의연히 기독 언론의 정도를 걷고 계신 <순복음가족신문>에 새삼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 신문은 저희가 온 마음 바쳐 사랑하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정체성을 지키는 보루이며, 곳곳에 고귀한 땀과 눈물이 배어있는 생생한 ‘교회행전’입니다. 지난 2년 이 귀중한 신문에 부족한 제가 신앙 시사칼럼을 게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외람되고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 올리며, 한결같이 따뜻한 격려를 보내주신 신문사 여러분과 졸문을 읽어 주시고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영광과 찬송을 주님께! 할렐루야!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 2023.02.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한글, 빛나는 우리의 보물
  • 한국어 학습자가 폭발적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10일 코리아헤럴드가 교육부 자료를 입수해 보도한 바에 의하면 지난해 말 현재 한국어를 외국어 선택 과목으로 채택한 곳은 세계 42개국 1806개 초 중학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3년 만에 40%가 급증한 수치입니다. 온라인상에서의 한국어 열기 또한 뜨겁습니다. 5억 명 회원을 둔 글로벌 외국어 학습 서비스 ‘듀오링고’는 최근 ‘2022년 듀오링고 언어 리포트’를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한국어 학습자는 1070만 명으로 전년 대비 29%가 증가, 수강자 수가 많은 언어 순위 5위에 올랐습니다. 이처럼 한국어에 대한 관심과 향학열이 높아진 데는 물론 ‘한류 열풍’이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한글’ 자체가 지닌 문자로서의 탁월성과 매력입니다. 실제로 한글은 여러 ‘소리글자’ 가운데서도 가장 발달한 ‘음소문자’입니다. 열 자의 모음, 열 네 자의 자음, 27종의 받침을 활용해 수천 개의 말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같은 음소문자로서 세계 공용어화 되어 있는 영어와 견주어도 효율성이 월등합니다. 영어는 인쇄체와 필기체가 다르며, 대문자와 소문자가 구분되고, 꼭 글자대로 읽혀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발음기관과 발음 작용을 본떠 만들어진 한글의 과학성은 정보화 시대의 진전에 따라 더욱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휴대전화의 자판을 보면 하늘을 뜻하는 ‘·’, 땅을 뜻하는 ‘ㅡ’, 사람을 뜻하는 ‘ㅣ’ 석자로 수십 가지의 모음을 다 적을 수 있습니다. 자음은 동일한 자판을 한 번씩 누를 때마다 예삿소리(ㄱ)→거센소리(ㅋ)→된소리(ㄲ) 순으로 변환돼 간단한 조작으로 모든 글자를 쉽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뛰어난 한글의 편이성이 우리의 높은 휴대전화 보급률과 선도적 기술축적을 가능케 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아울러 한글은 ‘배우기 쉽다’는 특장을 지니고 있습니다. 문자를 만든 원리와 사용법을 정연하게 설명한 『훈민정음해례본』의 서두에서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의 동기를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즉 “나라의 말이 공용되는 한자와 통하지 않아 백성들이 제 뜻을 능히 표현하지 못하는 실정임을 긍휼히 여겨 쉽게 익혀 편하게 쓸 수 있는 스물여덟 자를 새로 만든다”는 내용입니다. 이 점을 당시 예조판서 정인지는 보다 실감 있게 설명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다….” 한글은 이런 세종대왕의 애민정신과 자주적 실용주의가 투영돼 구성원리가 간명하고 배우기 쉽습니다. 우리나라가 세계가 주목하는 ‘문맹 퇴치 신화’를 이룩한 배경도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습득의 용이성’이라는 한글의 장점은 복음 전파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한글로 번역된 『성경』은 전도의 사명으로 무장한 기독교인들에 의해 지역, 신분, 성별의 구별 없이 두루 보급되고 읽혀졌습니다. 그들은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한글을 가르쳐가며 전도했고, 신앙을 가지려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기 위해 한글을 배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학자들은 “한글이 진정한 우리 언어로 빠르게 자리 잡는 데 성경이 큰 역할을 했다”고 강조합니다. 국민일보 우성규 기자의 언급대로 “한글 성경과 찬송가의 보급으로 한반도는 문맹에서 벗어났고, 이를 통해 전해진 복음의 메시지는 한국교회 예배와 신앙생활의 중심이 됐던 것”입니다. 이처럼 소중한 한글임에도 근래 우리 사회의 한글 홀대는 선을 한참 넘어섰습니다. 온갖 은어, 비어, 속어, 정체불명의 약어와 합성어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물론 공공 방송에서조차 한글 규범 파괴가 거리낌 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분단 78년의 세월이 초래한 남북한 간의 언어 이질화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민족의 명절인 ‘설’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남북이 함께 기념하는 절기가 점차 사라지는 추세에서 ‘설날’은 지금까지 우리 겨레가 공유하는 몇 안 되는 명일(名日)입니다. 궁극적인 ‘남북통일’은 단순한 ‘제도적 통일’을 넘어 ‘사람 간의 통합’에까지 이르러야 완성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시풍속의 존속과 공유는 통일 여정에서 의미 있는 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언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말과 글은 다름 아닌 생각과 정신의 반영입니다. 따라서 동일한 말과 글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민족공동체로서 기본적 공감대의 토대가 이미 마련돼 있음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이 기반이 더이상 허물어지지 않도록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남북한 언어 이질화의 방지 대책이 시급히 강구돼야만 할 것입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한글은 빛나는 우리의 문화 자산입니다. 겨레의 보물인 우리말, 우리글을 바로 지키고 가꾸어 나가기 위해 온 국민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특히 크리스천들은 성경을 사랑하는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과의 귀중한 소통 매체인 한글에 대해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합니다. 한 나라의 언어가 역사와 문화의 창고를 여는 관건이듯이 성도들에게 한글은 은혜의 보고인 성경을 여는 소중한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 2023.01.1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카타르의 낭보
  • 2002년 한·일 월드컵은 한국 사회를 그 이전과 이후로 구분 짓는 의미 있는 분수령이 됐습니다. 사실 한국 축구대표팀은 1954년 제5회 스위스대회에 첫 출전한 이래 다섯 번이나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음에도 단 1승을 거두지 못하고 있던 형편이었습니다. 하지만 6월 4일 첫 경기에서 폴란드를 2대 0으로 꺾은 후 강호 포르투갈, 이탈리아, 우승 후보 스페인까지 연달아 격파하며 4강에 오르는 대이변을 연출했습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 기간 모두에게 축구는 ‘그냥 축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팀의 경기를 매개로 빨간색 티셔츠를 입은 수백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광장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춤추고 함께 함성을 질렀습니다. 세계적 명물로 자리 잡은 자생적 ‘길거리 응원’의 시작이었습니다. 한국 축구의 4강 신화에 세계가 놀랐지만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우리 스스로였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자신감, 동시대를 살아가는 국민적 유대감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가 됐습니다. 이 열기는 IMF 경제위기 극복, 폭발적인 참여민주주의 확대, 창발적인 한류 문화 확산으로 이어지며 우리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2022년, 제22회 카타르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은 또 한 번의 기적을 일구어냈습니다. 통계전문가들의 ‘16강 진출 가능성 9%’의 예측을 여지없이 깨뜨린 이 반전 드라마는 투철한 ‘원팀 정신’으로부터 비롯됐습니다. 파울루 벤투 감독을 위시한 코치진과 27명의 선수들이 똘똘 뭉쳤습니다. 그 결과 경기장을 종횡무진 누비는 한국형 ‘빌드업 축구’가 가능했고, 어떤 팀과 맞붙어도 밀리지 않는 강인한 뚝심이 발휘될 수 있었습니다. 구성원들 간의 신뢰 역시 돋보였습니다. 특히 주장 손흥민 선수의 리더십은 발군이었습니다. 그는 월드컵을 3주 앞두고 소속팀 경기에서 당한 안와골절로 안면 보호대를 착용한 채 전 경기를 소화했습니다. “불편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3년간 마스크를 쓰고 계신 국민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고 의연히 대답했습니다. 개막 전 “단 1%의 가능성이 있어도 앞만 보고 달려가겠다”며 부상 투혼을 예고했던 그는 약속대로 “몸이 부서지도록” 뛰었습니다. 실제로 H조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벼랑 끝에 몰렸던 한국팀은 후반 추가시간 손흥민-황희찬으로 연결된 극적인 역전 골로 포르투갈에 2대 1 승리를 거두며 16강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16강전 진출이 확정된 직후 권경원, 조규성 선수는 관중에게서 건네받은 태극기를 펼쳐 들었습니다. 그 안에는 눈길을 사로잡는 뚜렷한 한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본래 프로게이머 김혁규 선수가 7수 끝에 세계 대회를 제패하며 했던 이 말은 다시 새롭게 부각되며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우선 대회 내내 보여준 대표팀의 모습이 압축된 표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흔들리는 이 세대에게 던지는 속 깊은 응원의 뜻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정 우리 팀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선제골을 허용하고도 위축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불퇴전의 투혼으로 국민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2022 카타르 월드컵 기간 특별히 우리 팀의 경기가 열렸던 13일간 축구 덕택에 대한민국은 모처럼 하나가 됐습니다.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도전하는 선수들의 모습은 모두에게 커다란 감동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대표팀의 선전은 코로나 블루, 경제 한파, 잦은 사회적 갈등으로 침체돼 있던 한국 사회에 심기일전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어느덧 한 해의 끝자락에 섰습니다. 또 한 번의 ‘송구영신’의 시간을 맞으며 영혼과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을 때입니다. 성경은 신앙생활을 경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우리 선수들이 월드컵 스타디움을 뛰고 달렸듯 성도들도 인생의 경기장을 달음박질하고 있습니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경주자처럼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저마다의 목표를 향해 인생행로를 달려가고 있습니다. 한없이 감사한 것은 이 신앙 노정에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해 주신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저희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한 스타플레이어로 여겨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는 말씀대로 열렬한 서포터가 돼 뜨겁게 응원해 주십니다. 독자 여러분! 다사다난했던 지난 한 해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신발 끈을 고쳐 매고 힘을 내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스타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영원한 팬이 되어주십니다. 다가오는 2023년 새해, 예수님 안에서 항상 승리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 2022.12.1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새책소개
    『성경과 기독교 진실성 파헤치기』(제1권: 구약시대) (제2권:신약시대)
  •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그의 죽음과 부활로 탄생한 기독교가 우주 만사의 정답이 된다. 혼란한 시대를 사는 인생들에게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다.” 이기창 공로장로(반석대교구)가 『성경과 기독교 진실성 파헤치기』(제1권: 구약시대) (제2권:신약시대)를 펴냈다. 저자는 이 두 권의 책을 통해 기독교의 교리와 성경기록은 합리적이며 과학과도 합치하며 오히려 과학을 초월하고 있음을 깊이 있게 분석해 성경과 기독교의 진리성을 논증했다. 이 책은 신, 구약 성경 전체의 핵심 내용을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관통하면서 심도 깊게 해설하고, 기독교 교리와 신앙, 신학적 논리와 이론 및 사상, 우주의 창조로부터 역사, 종말 및 미래 발생할 일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세계관을 다루고 있다. 과학자인 저자는 과학과 철학의 논리로 신의 존재로부터 우주 만물 전체를 물질우주와 정신우주로 균형있게 조망하면서 과학-철학-신학을 통섭해 교집합의 우주론을 밝혀낸다. 이런 방식으로 저자는 인류의 궁극적이고 영원한 질문인 우주, 물질, 영혼, 생명, 죽음, 사후생, 세상종말 등 빅퀘스천 규명을 추구해 나간다. 응용과학인 전자통신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공과대학 정교수를 역임한 이기창 공로장로는 교수 은퇴 후 10년간 물리학, 철학, 신학, 역사 등 인문학 연구에 몰두해 이 책을 만들었다. 그는 현대물리학에서 발견한 빅뱅 우주론과 부합하는 종교를 엄밀히 분석, 조사해 성경에 기반한 기독교만이 현대과학과 부합하는 유일한 종교로서 진실성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책을 읽다보면 기독교가 공학, 물리학 등의 과학과 철학에 합치하는 유일한 종교이며 따라서 성경과 기독교는 ‘우주적 진리’라는 결론을 깨닫게 된다. 어디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몰라 방황하는 현대인에게 추천하는 필수 교양 인문서적이다.
  • 2023.04.07 / 이미나 기자

    성공에 이르는 12가지 지혜
  • - 이영훈 목사 지음 / 교회성장연구소 - 크리스천의 삶을 성공으로 이끄는 12가지 비결 이영훈 목사 “믿음으로 꿈꾸는 자는 반드시 해낼 수 있다” 이영훈 담임목사는 성공에 대해 “정성을 다해 원하는 목표를 이루어 낸 것이 바로 성공”이라고 말하고 있다. 더불어 “성공은 이루고자 하는 꿈과 목표를 가진 자, 그 꿈과 목표를 향해 올바른 방법을 가지고 성실하게 노력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인생의 열매”라고 전한다. 이영훈 목사는 2023년을 맞이하면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주 안에서 품은 꿈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하는 지 깨달은 바를 나누고 싶은 바람을 품었다. 그 바람은 신년 축복 열두 광주리 새벽기도회를 통해 ‘성공에 이르는 12가지 지혜’ 주제의 설교로 이어졌고 이 책은 이를 토대로 집필됐다. 혼란의 시대, 격변하는 세태 속에 모든 사람들은 예측할 수 없는 불안으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다. 이러한 때에 가정과 일터, 교회 등 삶의 영역에서 믿음을 지키고 성공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 중인 크리스천들에게 이 책은 온전한 믿음과 인생의 성공 비결을 알려주는 안내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주 안에서 품은 꿈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성공의 지혜를 12개의 주제로 다룬다. “꿈꾸는 자가 되라,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소유하라, 절대긍정의 믿음을 소유하라, 장애물을 뛰어넘어라,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건히 서라, 분명한 자화상을 가져라, 기도의 사람이 되라, 시간의 관리자가 되라, 자기를 계발하라, 삶의 자세를 바꿔라, 사명에 붙들려 살라, 존경받는 리더가 되라.” 이영훈 목사는 무엇보다 말씀 위에 굳건히 서서 믿음으로 꿈꾸는 자는 반드시 해낼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책에는 12가지 성공의 지혜와 방법을 체크 리스트와 함께 제시해 인생에서 회복해야 할 것을 찾아 바로잡도록 하며,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나은 미래로 도약할 수 있는 성공 다이어리도 적어보도록 구성됐다. 세상을 살아갈 용기와 삶의 터닝 포인트가 필요하다면 이 책을 따라 삶을 관조하고 재정비해보면 어떨까? 단호하지만 진정 어린 저자의 조언은 삶의 무게에 지친 그리스도인들에게 생각 전환의 기회를 만들어줄 것이다.
  • 2023.03.17 / 복순희 기자

    ‘2023 감사QT365’ 출간
  • 성경일독, QT묵상, 감동예화, 감사쓰기가 한 권에
    풍성한 신앙생활을 위한 최고의 선물 2023년 풍성한 신앙생활을 이끌 최고의 안내서 『감사QT365』 가 출간됐다. 이번 감사QT 에디션은 한 권의 책으로 1년 치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지난번에 이어 이영훈 목사의 새 감동 메시지가 365편 수록돼 있고 매일 ‘나의 감사’를 쓸 수 있는 란도 제공됐다. 책이 인도하는 대로 매일 감사 메시지를 읽고, 찬양과 말씀 묵상의 QT를 지속한다면 365일 감사가 넘치는 한 해를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월력과 함께 매일 제시되는 ‘오늘의 일독성경’ 표에 따라 주어진 성경 말씀을 읽으면 신앙 훈련도 가능하다. 한 해 동안 구약 1독, 신약 2독을 하게 되니 이 책 한권이면 말씀과 감사가 충만한 1년을 보낼 수 있다. 그리고 그날의 말씀을 읽은 후에 함께 수록된 찬송가를 부르며 주님의 은혜를 구해보자. 찬송가 전 절의 가사가 제공돼 있어 책을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이후 오늘의 일독성경 범위 내에서 주어진 그날의 감사 말씀을 읽고 ‘나의 감사’를 적으면 큰 감사부터 아주 작은 감사까지 생각나 은혜롭다. 또 이런 감사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주님에 대한 사랑과 받은 은혜를 이웃에게 전한다면 기쁨과 성령 충만함이 배가될 것이다. 이 책에는 오늘 나의 사랑과 전도가 필요한 이들의 이름을 적고 그들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떤 기도를 해야 할지 적는 전도노트가 마련돼 있다. 저자인 이영훈 목사는 책 머리말에 “경건의 습관을 통해 신앙의 기초를 단단히 쌓아가면 어떤 풍랑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집을 지을 수 있다. 매일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며 이 책을 통해 1년 365일 모든 순간 절대감사, 한평생 감사, 넘치는 감사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가 되기를 소망했다. 감사QT365를 통해 범사에 감사하며 마음의 평강을 누리고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전도의 사명을 놓지 않는다면 2023년은 영적 성숙에 이르는 한 해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 2022.12.09 / 김주영 기자

    문화계 소식
    [영화 소개] 천성가는 밝은 길이
  • 사형수들의 아버지로 불렸던 박효진 장로의 간증을 토대로 제작한 ‘천성가는 밝은 길이’ 영화가 지난 4월 유튜브에 올라 큰 감동을 주고 있다. 박 장로는 전직 교도관 출신으로 사형수들에게 복음을 전한 전도자다. 그의 간증은 사형장에서 마지막을 맞이하는 사형수들의 처절한 영적 사투를 통해 복음의 진리와 영적전쟁의 메시지를 담고 있어 이번 영화가 성도들의 신앙생활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수많은 기독교 영화를 제작한 홍의봉 감독이 각색과 연출을 맡았다. 박효진 장로 역은 이경영 배우가 맡아 열연했고, 신인 김양균과 유라성도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였다. 임동진(목사), 한인수 장로, 정욱, 정선일 등의 중견 배우들도 특별 출연했다. 영화는 유튜브에서 제목 검색을 통해 볼 수 있다.
  • 2023.06.09 / 김주영 기자

    기독교 복음 영화 <기적을 믿는 소녀> 7월 5일 국내 개봉  
  • 전미 박스오피스 4주간 연속 TOP 10 하나님의 사랑과 진정한 믿음으로 감동 전해 하나님의 치유 능력과 사랑을 경험케 하며 대한민국에 진정한 믿음에 대한 경종을 울릴 기독교 영화 <기적을 믿는 소녀>가 오는 7월 5일 국내에 개봉한다. 전미 4주 연속 박스오피스 10위권 안에 들며 놀라운 흥행을 기록해 그 해 최고의 종교 영화로 떠올랐다. <기적을 믿는 소녀>는 기도로 믿음을 증명하는 어린 소녀를 통해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한 성도들이 믿음의 불꽃을 키워가는 엔터테이닝 복음 영화다. 가족과 함께 호수에 놀러 간 평범한 어린 소녀가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를 경험케 하며 눈길을 사로잡는다. 죽은 새와 강아지의 부활, 그리고 하반신 마비를 가진 친구가 다시 걷게 되는 등 하나님의 치유 능력을 목격한 믿음의 소녀를 통해 점차 변화해 가는 주변 인물들의 모습은 강렬한 울림과 함께 감동을 전한다. 겨자씨만큼 작은 믿음이 사람들의 삶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메시지뿐만 아니라 보는 내내 미소를 짓게 하는 스토리와 힐링을 선사하는 완벽한 케미스트리 등을 통해 종교인을 넘어서 일반관객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관람 후에는 “하나님을 믿고 간절히 기도하세요, 하나님은 듣고 계세요”라는 대사와 깊은 감동이 가슴에 남게 된다. 특히 <위대한 쇼맨> 오스틴 존슨부터 제68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미라 소르비노, 피터 코요테, 케빈 소르보까지 믿고 보는 최고의 배우들이 총출동해 막강 캐스팅으로 극의 완성도를 높여 이목을 집중시킨다. 한편, GOODTV 기독교복음방송(대표이사 김명전)에서는 개봉 전부터 <기적을 믿는 소녀> 교회 상영을 진행해 한국교회와 성도들로부터 눈물을 흘리며 회심하는 많은 기적의 역사를 체험했다고 밝혔다.
  • 2023.05.25 / 이미나 기자

    스마트폰 생활백서-저절로 성경일독
  • “스마트폰 켤 때마다 성경구절이 보여요!” 잠금화면 활용한 성경 묵상 앱 말씀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에게 매순간 단비와 같은 성경 말씀을 전달해 주는 앱이 있다. 바로 ‘저절로 성경일독’이다. 저절로 성경일독 앱은 스마트폰 화면을 켤 때마다 성경구절이 나타난다. 화면 중앙에는 성경 구절이, 하단에는 다음 구절로 넘어가는 화살표 기호와 북마크, 공유하기, 잠금해제 버튼이 있다. 화면에 나오는 성경 구절은 화면이 꺼졌다 다시 켜지면 다음 절로 넘어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부담 없이 성경을 일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앱에서는 말씀 공유 기능이 가장 눈에 띈다. 묵상하고 있는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면 그 자리에서 말씀 카드를 만들어 SNS로 즉시 공유할 수 있다. 이는 모바일 전도 도구로도 활용이 가능해 전도 대상자에게 유용하다. 성경은 개역개정, 개역한글, 현대어성경, 새번역과 영어 성경인 KJV, NIV, NLT 버전을 제공하고 있는데 한글과 영어 두가지 성경을 동시에 볼 수 있는 특징도 있다. 참고로 개역개정, 개역한글, KJV 성경은 오디오도 함께 제공된다. 저절로 성경일독 앱은 안드로이드기반(삼성 및 LG) 스마트폰에서 제공하는 구글 Play스토어에서만 서비스가 제공된다. 앱을 실행하면 광고가 나타나지만 조금의 불편을 감수하면 말씀을 묵상하고 공유하는데 지장이 없다. 또한 결제해야 이용할 수 있는 ‘읽기모드’는 우리 교회 앱 성경과 동일한 기능이므로 오랜 시간 성경을 읽을 때는 교회 앱을 활용할 것을 추천한다.
  • 2022.07.29 / 금지환 기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31. 후안무치(厚顔無恥) 시므이의 죽음②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솔로몬에 의해 죄의 대가를 받게 된 시므이 "왕이 사람을 보내어 시므이를 불러서 이르되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왕상 2:36~37) 3. 솔로몬의 숙청 작업과 시므이의 죽음 솔로몬은 왕이 된 후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한다. 숙청의 이유, 방법, 숙청당한 인물들만 보면 공포정치를 휘둘렀던 절대군주 못지않다. 숙청의 대상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였던 대제사장 아비아달, 다윗을 섬기며 충성을 다했던 군대사령관 요압, 그리고 자신의 형이자 왕자였던 아도니야까지 잠재적으로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다윗을 조롱했던 시므이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1) 아도니야 아도니야는 다윗의 네 번째 아들이었다. 다윗의 첫째 아들은 암논이었고, 둘째는 갈멜 여인 아비가일이 낳은 다니엘, 셋째는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가 낳은 압살롬, 넷째는 학깃이 낳은 아도니야였다. 솔로몬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서 열 번째쯤 된다(대상 3:1~5). 그런데 첫째 아들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였던 다말을 강간한 사건 때문에 압살롬에게 죽임 당했고, 압살롬은 반란 후 죽임을 당했다. 다윗의 첫째와 셋째 아들이 죽은 것이다. 둘째 아들 다니엘은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윗의 둘째 아들이었다는 기록 외에는 성경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 일찍 죽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다윗의 허락도 없이 스스로 왕이 되었음을 선포한다(왕상 1:5~11). 이때 다윗의 군대 사령관이었던 요압과 대제사장이었던 아비아달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다(왕하 1:7). 하지만 아도니야의 시도는 일일천하에 그쳤다. 솔로몬은 왕이 된 후, 제단 뿔을 잡고 목숨을 구걸하는 아도니야(왕상 1:51)를 살려주며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그것은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왕상 1:52). 하지만 아도니야는 다윗의 침실에서 수종을 들었던 수넴 여인 아비삭을 자신의 아내로 삼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솔로몬은 이것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아도니야를 처형해 버렸다(왕상 2:13~25). 2) 아비아달 아비아달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10번째 대제사장이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기약이 없는 망명길에 올라야만 했다. 이스라엘 땅에 많은 도시와 지역이 있었지만 다윗이 선택한 첫 장소는 대제사장이 있던 놉이었다(삼상 21:1). 심신이 지쳐있던 다윗은 아히멜렉의 도움으로 음식을 먹고 그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였던 골리앗의 칼을 얻었다(삼상 21:4~10). 사울은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와줬다는 것을 문제 삼아 도엑을 시켜 아히멜렉과 놉의 제사장 85명을 한 날에 살육했다(삼상 22:18). 이때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였던 아비아달만이 목숨을 건져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아비아달은 지체 없이 한걸음에 그일라에 있던 다윗에게로 향했다. 아비아달이 제사장의 영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에봇을 가지고 도망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삼상 23:6). 아울러 우림과 둠밈을 대제사장의 에봇 흉패 안에 보관하라고 되어 있기에 우림과 둠밈까지 가지고 온 것으로 볼 수 있다(출 28:30). 다윗은 이렇게 사선을 넘어 온 아비아달을 대제사장으로 삼았다. 그러나 솔로몬은 왕위에 오른 직후 아비아달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던 것 때문에 아비아달을 제사장 직분에서 파면시키고 그의 고향으로 내쫓아 버렸다(왕상 2:27). 3) 요압 요압이라는 이름의 뜻은 ‘야훼는 아버지이다’와 ‘야훼는 하나님이시다’는 뜻이다. 요압은 다윗과 함께 오랜 세월 전쟁터를 누볐던 군대 장관이다. 사울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이 되었고, 헤브론에서 이미 왕이 되어 있던 다윗은 피할 수 없는 전쟁을 하게 되었다. 기브온 전투는 다윗이 사울의 남아있던 세력과 벌인 최초의 전투이다. 이때 이스보셋의 장군인 아브넬과 다윗의 군대를 이끌던 요압이 맞붙게 되었다. 기브온 전투는 요압의 승리로 끝났지만, 요압의 동생 아사헬은 아브넬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요압은 이것에 대한 앙심을 품고 있었다. 한편 아브넬은 사울의 자손들과 다윗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종식하고 통일왕국을 탄생시키려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헤브론에 있던 다윗을 찾아와 평화의 조약을 맺고 통일왕국의 꿈을 향한 큰 걸음을 뗐다(삼하 3:8~21). 뒤늦게 이것을 알게 된 요압은 아브넬을 쫓아가 다시 헤브론으로 유인해 왔다. 그리고 그에게 조용히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속여 무방비 상태에 있던 아브넬을 살해했다(삼하 3:27). 성경 여러 곳에서 정치적 야망을 숨기지 못했던 요압이 평화적인 통일이 이루어진 후 모든 공이 아브넬에게 돌아갈 것을 걱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통일이 이루어진 후 자신의 입지가 약해질 것에 대한 염려와 전쟁 중에 죽은 동생의 원한을 한 번에 갚고자 벌인 일이었다. 다윗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모든 백성에게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큰 용사였던 아브넬이 죽은 것을 애도하도록 했다(삼하 3:31).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요압에게 묻지 않았고 어떤 벌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솔로몬은 달랐다. 표면적인 이유는 요압이 죄 없는 아브넬과 유다 군사령관이었던 예델의 아들 아마사를 죽인 것 때문이었지만(왕상 2:31), 실상은 요압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던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4) 시므이 솔로몬의 서슬이 퍼런 칼날은 그의 왕권을 위협할 현재와 미래의 잠재적 세력을 제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선대왕이었던 다윗이 살려 준 시므이를 향한 솔로몬의 마지막 경고이다. 솔로몬은 시므이의 목숨을 살려 주는 대신 절대 예루살렘을 벗어나지 말라고 경고했다(왕상 2:36~37). 왜 솔로몬은 베냐민 자손이고 바후림에서 터를 잡고 있던 시므이를 굳이 예루살렘 성에 붙잡아 두고 절대 떠나지 말라고 했을까? 사울의 친족이었던 시므이가 예루살렘을 벗어나 어떤 정치적인 행위나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과 다윗을 조롱했던 시므이에 대한 마지막 경고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므이는 이것을 너무나 쉽게 생각했다. 자신의 노예 두 명이 도망을 가자 솔로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벗어났다(왕상 2:39~40). 솔로몬은 브나야에게 명령을 내려 시므이를 단숨에 처형했다(왕상 2:45).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초라한 모습으로 피난길에 올랐을 때 그를 따라가며 조롱하고 멸시하고 저주를 퍼붓던 시므이였다. 하지만 압살롬에 의한 왕자의 난이 실패로 끝나고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선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바싹 엎드려 비굴한 모습을 보였던 사람이었다. 다윗의 아량과 은혜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시므이는 솔로몬에 의해 그의 죄에 대한 대가를 받게 되었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8.01 / 이상윤 목사 기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30.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시므이의 죽음①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책망으로 겸허히 받아들인 다윗 "왕의 가족을 건너가게 하며 왕이 좋게 여기는 대로 쓰게 하려 하여 나룻배로 건너가니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 앞에 엎드려 왕께 아뢰되 내 주여 원하건대 내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왕의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삼하 19:18~19) 사무엘하 15장과 19장은 후안무치한 시므이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무엘하 15장 30절은 다윗의 인생 중 가장 비참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왕이었지만 그의 몰골 어디에도 왕의 위엄과 기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때 다윗은 머리는 산발하고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초라한 모습으로 감람산 고개를 넘고 있었다. 다윗은 천 년의 시간이 지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으며 호산나를 외치던 길을 역방향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눈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방 나라의 왕이나 군사들에게 쫓긴 것도 아니다. 자신의 아들에게 잡혀 죽지 않기 위해 도망가는 신세였다. 압살롬은 아버지인 다윗이 예루살렘에 남겨놓은 10명의 후궁들과 공개적으로 성적인 관계를 맺었다. 다윗은 왕의 권위뿐만 아니라 친부로서의 자존감도 철저히 묵살되었다. 더 낮아질 수도 초라해질 수도 없는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다. 사실 압살롬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다윗의 셋째 아들이었던 압살롬은 가만히 있기만 해도 다윗을 이어 왕이 될 수 있었다. 다윗의 장남이었던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강간한 사건 때문에 이미 죽임을 당해 세상에 없었다. 다윗의 차남은 다니엘이다. 다니엘은 나발의 아내였으나(삼하 2:2) 나발이 죽은 후 다윗의 아내가 된(삼상 25:39~43) 갈멜 여인 아비가일이 낳은 아들이다(대상 3:1). 하지만 그의 이름 외에 추가적인 자료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압살롬이 죽은 후 다윗의 넷째 아들이었던 아도니야가 장남 행사를 한 것으로 보아(왕상 1:5~10) 다니엘은 일찍 죽었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의 장남과 차남이 죽은 상황에서 셋째 아들이었던 압살롬은 조금만 인내력을 가지고 기다렸으면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혀 반란을 일으켰다. 심지어 아버지 다윗을 죽여서라도 왕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압살롬의 반란은 처음에는 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헤브론에서 시작한 반란은 수도인 예루살렘 입성까지 파죽지세로 거칠 것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1. 다윗에게 저주를 퍼붓는 시므이 다윗이 예루살렘을 버리고 바후림을 지나고 있을 때 사울의 친족이요 게라의 아들이었던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기 시작했다(삼하 16:5). 다윗은 물론 그의 추종자들에게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고 저주를 퍼부었다(삼하 16:13). 자신을 그렇게 집요하게 괴롭히고 죽이려고 했던 사울에게 관용을 베풀었던 다윗이다. 그러나 사울이 죽고 난 이후에도 사울의 남은 자손들은 끊임없이 다윗을 참소하고 그의 왕권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다윗이 마음만 먹었다면 사울의 친족을 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친족들에게 많은 특혜와 은혜를 베풀었고 사울의 친족들은 대부분 죽음을 면했다. 그들의 토지나 소유권도 빼앗지 않았다. 이런 다윗의 은혜를 받았던 사울의 자손 중의 한 사람이 시므이다. 그렇게 살아남았던 시므이가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피난길에 오르자 저주를 퍼부었다. 비록 피난길에 올랐지만 전장을 누비며 무수한 공을 세웠던 장수들이 다윗과 함께 있었고 많은 백성이 다윗을 따르고 있었다(삼하 16:6). 시므이의 저주를 듣고 있던 다윗의 군대장관 아비새가 당장 가서 시므이의 목을 베어 버리겠다고 말한다(삼하 16:9).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해 극심한 모멸감에 시달렸을 다윗이다. 그래서 어딘가에 분풀이라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시므이는 더없이 좋은 화풀이 대상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시므이의 목숨을 취하지 않는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책망으로, 또한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고난이 은혜로 바뀌는 전환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므이의 생명을 뺏지 않고 그가 퍼붓는 저주를 묵묵히 참아냈다(삼하 16:11). 2. 급변한 시므이의 태도 다윗이 가장 힘들었을 때, 조롱과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의 태도는 압살롬이 죽고 왕자의 난이 정리된 이후 급변한다. 압살롬이 죽자 제사장들과 신하들은 서둘러 다윗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키는 일을 진행한다(삼하 19:11~12). 다윗은 피난을 왔던 길을 따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예루살렘을 빠져 나올 때 시므이가 저주를 퍼부었던 바후림에 이르렀다. 바후림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4㎞ 정도 떨어진 곳이라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시므이는 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귀환 행렬이 바후림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무엘하 19장 16~18절은 이때 시므이가 취한 행동을 이렇게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1) 유다 사람들과 동행(삼하 19:16) 사울의 혈육으로 베냐민 지파였던 시므이는 급히 유다 사람들과 다윗을 맞으러 나간다. 다윗의 피난 행렬을 쫓아가며 돌을 던지고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에게서 다윗에 대한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다윗이 다시 바후림에 왔을 때 그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2) 시므이의 세력(삼하 19:17) 사무엘하 19장 17절은 사울이 죽은 후 시므이가 어떻게 세력을 키우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다윗을 맞으러 나올 때 시므이는 신변의 위협을 느꼈는지 자기의 모든 세력을 데리고 나온다. 베냐민 사람 1000명과 열다섯 명의 아들, 종으로 부리고 있던 하인 스무 명을 대동했다. 시므이는 호시탐탐 사울 왕조의 재건을 꿈꾸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 고대 근동에서 개인이 이 정도의 규모를 유지하고 운영할 이유도 없다. 3) 용서를 구하는 시므이(삼하 19:18~20) 시므이는 요단강을 건너려고 하는 다윗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한다. 시므이가 특별히 구하고 싶었던 것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나오던 날에 저질렀던 패역한 일'에 대한 용서였다(삼하 19:19). 그가 다윗을 쫓아가며 했던 저주이다. 이 말을 들은 아비새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인 다윗에게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를 살려 둘 수 없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당장 시므이를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삼하 19:21). 이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한 개인이 아니라 정치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시므이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사울의 남은 세력들의 잠재적 위협 요소를 제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시므이를 용서하고 그의 생명을 살려주는 아량을 베푼다(삼하 19:22~23). 다윗은 자신이 시므이를 용서하는 것으로 더는 피를 흘리지 않고 모든 것을 덮고 이 문제를 일단락 지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시므이의 문제는 다윗이 죽은 후 솔로몬에게까지 이어진다. (다음 호에 계속)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7.04 / 이상윤 목사 기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29. 기브온 족속과 사울 왕조의 얽히고 설킨 이야기(Ⅱ)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과 은혜, 화해와 용서 안에서 이뤄져야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그들은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그들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그들에게 물으니라"(삼하21:1~2) 2) 기브온족의 이스라엘 편입 가나안 족속의 종교 혼합주의, 쾌락주의, 윤리적 타락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과학적인 지식이 없었던 시대에 기이한 자연적 현상들은 다신론적 맹신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유대교는 손쉬운 다신론이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 유일신 사상을 갖고 있었다. 유일신 사상은 인간의 감성이나 종교적 편의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율법에 기록된 내용과 방식대로 종교적 행위가 이루어져야 했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한 삶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쾌락주의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아주 쉽게 유혹으로 이끌어 갔다. 그 결과 거룩한 삶은 죄 된 삶으로 쉽게 바뀌었다. 이런 위험에 노출되고 나중에는 헤어날 수 없게 될 것을 아셨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한 것은 가나안 족속과 근원적인 단절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기브온족에게 속아 조약을 체결했다. 그것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이방 족속의 방식대로 계약을 체결했다. 조약 자체도 문제였지만 방법과 절차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고대 근동의 전통에 따라 기브온 사람의 음식을 취하는 방식으로 평화 조약을 맺었다(수 9:15). 서로 먹고 마시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평화의 조약이 이루어졌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기브온족에게 속고 있었다. 성경은 기브온과 체결한 계약 방식이 '그들(기브온 사신)의 양식을 취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수 9:14). 기브온의 사신들이 갖고 온 음식은 곰팡이가 핀 일반적으로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는데 어떻게 이것을 먹을 수 있었을까?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첫째, 계약 체결을 위해 곰팡이가 난 양식의 일부를 실제로 먹었다는 것과 둘째, 그냥 양식을 취하기만 하고 먹지는 않았다는 해석이다. 지금이라면 당연히 곰팡이가 난 음식을 먹지 않았겠지만, 근동 지방의 관습을 고려할 때 계약 체결의 완성을 위해 곰팡이 피지 않은 쪽의 음식 일부를 떼어 나눠 먹었을 가능성이 크다. 음식을 먹고 안 먹고의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기브온 족속과 계약을 체결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수장이었던 여호수아는 기브온족을 죽이지 않고 살리겠다는 조약을 맺었고 이스라엘 지파의 족장들도 모두 동의했다(수 9:15). 그러나 그들이 저지른 엄청난 실수를 깨닫는 데는 3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계략에 넘어간 것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체결했기에(수 9:18) 다시 바꿀 수 없었다. 속임수까지 써가며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했던 기브온 사람들은 그들의 소원대로 이스라엘 민족에 동화되었고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사울 왕 때 완전히 유린당하였고 기브온족 전체가 몰살당할 위기에 처하게 됐다. 2. 역사를 왜곡하는 사울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라는 영예를 안았으나 여러 번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행동을 했다. 여호수아는 기브온족을 살려 하나님의 제단을 위해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자들로 삼았다(수 9:27). 이런 기브온족의 삶은 비록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며 헌신 된 삶을 살았기에 선교적인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구약의 역사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정이야 어쨌든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민족에 편입돼 성전을 섬기며 살아오던 기브온족이었는데 사울왕이 갑자기 그들을 말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 성경은 사울이 이런 일을 계획하고 실행한 것은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삼하 21:2). 이 사건은 기브온 족속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성경은 사울이 언제 얼마나 많은 기브온 사람을 죽였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무엘하 21장 5절은 사울이 기브온족을 '학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칼라누'이다. 이 단어의 뜻은 '끝내다'(finish), '완성하다'(accomplish)는 의미이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 한두 명을 죽인 것이 아니라 기브온족 전체를 말살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고 실제로 실천에 옮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고한 기브온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사울과 다윗의 왕권 교체와 맞물려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완전히 묻혀 버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것을 잊지 않으셨다. 다윗왕 때 3년 동안의 큰 기근이 발생했다. 다윗은 계속되는 가뭄이 무엇 때문인지 알기를 원했고, 하나님께서 사울이 흘린 기브온 사람들의 피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삼하 21:1). 3. 솔로몬의 재판에 비할 다윗의 판결 왕위에 오르기 전, 사울은 한없이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보좌에 오른 뒤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사울은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 기브온족도 마찬가지였다. 피의 순수성을 강조하며 이방 족속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일부 백성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고 있던 기브온족을 완전히 말살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다윗이 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다윗은 왕으로 등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바로잡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다윗은 사울왕 때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울의 때 뒤틀렸던 역사와 공의를 다윗을 통해 다시 바로 세우기를 원하셨다. 성경에 기록된 재판 중에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두 판결은 솔로몬의 판결과 다윗의 판결일 것이다.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한 아기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다투던 두 여인에 대한 솔로몬의 판결(왕상3:16~28)은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판결 중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솔로몬의 판결과 같이 지혜가 번뜩이는 판결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게 한 것이 다윗의 판결이다. 1) 피해자 중심의 판결 다윗은 먼저 기브온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결해 줬으면 좋겠냐'고 묻는다(삼하 21:3). 일방적인 행정명령이나 법 집행이 아니라 피해자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기브온 사람들은 자신들을 살육하는데 가담했던 모든 사람을 벌해 달라고 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 민족을 학살하는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사울의 아들 7명을 내어 달라고 요구한다(삼하 21:6). 사울의 일곱 아들은 한날에 기브온 사람들에 의해 목매달려 죽었다. 그런데 여기서 기브온족의 모든 원한이 풀리고 3년 동안 기근으로 고통을 받던 땅에 비가 내린 것은 아니다. 2) 화해의 판결 비록 죄 없는 기브온 사람을 학살하는 일을 기획하고 실행했다가 그 벌로 죽은 사울의 아들들이었지만 다윗은 목이 매여 죽은 이들의 시체를 거둬들인다. 그리고 사울과 요나단의 뼈와 함께 그들의 할아버지이며 사울의 아버지인 기스의 묘에 가족장으로 합장을 한다. 이렇게 다윗이 죽은 사울의 아들들을 위해 장사 지내는 것을 마쳤을 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삼하 21:14).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것은 단순히 원한과 억울함을 푸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과 은혜, 화해와 용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다윗이 사울의 아들들의 시체를 거둬들여 가족묘에 장사지낸 것처럼,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긍휼함이 공의 가운데 있어야 한다. 사무엘하 21장에 기록된 기브온족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얽히고 설킨 사건은 하나님의 언약과 공의, 공의가 실현된 이후의 화해와 용서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단편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6.06 / 이상윤 목사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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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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