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기사
역사의 흔적 가득한 터키를 가다-(2)콘야, 파묵칼레
  • 바울의 발자취 따라 도착한 비시디아 안디옥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신앙 질책 받은 라오디게아 교회 사도 빌립이 순교한 히에라볼리에서 전도자의 삶 다짐 터키에 도착한지 3일 째 되는 날 순복음 성지순례단은 끝없이 펼쳐지는 비옥한 평야를 지나 콘야에 도착했다. 콘야의 옛 이름은 이고니온.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지로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곳이다. 갑바도기아에서 고대 그리스 도시인 에베소, 소아시아 일곱 교회로 가려면 콘야를 지나야 한다. 신약시대의 이고니온은 비시디아 안디옥과 루스드라와 더베와 함께 갈라디아 지방에 속해 있는 로마 영토였다. 로마의 기독교 국교화 이후 점차 기독교가 이고니온으로 들어오게 되고 교회가 서기 시작했다. 비시디아 안디옥 순례는 내가 가장 기대했던 곳이다. 사도 바울이 제1차(행 13~14장) 전도여행 때 방문했던 곳이 비시디아 안디옥이다. 비시디아는 소아시아 지방 내륙의 중심지가 되는 중요한 지역이며 안디옥은 이 지역의 중심도시였다.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선교여행 중에 이곳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중략)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14~48). 복음의 확산을 시기한 유대인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그곳에서 이고니온으로 쫓아냈고 심지어 루스드라까지 쫓아가서 복음 전파를 방해했다. 이후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행 14:1)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다시 열심히 전도사역을 펼쳤다. 사도 바울이 1차 전도여행 때 말씀을 전했던 비시디아 안디옥의 옛 회당 자리에 모인 순례단은 가슴 벅찬 감동을 느꼈다. 이곳에 세워진 비잔틴 시대의 바울교회에서 이영훈 목사는 “사도 바울이 가졌던 복음의 열정을 우리의 신앙에서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들은 사도 바울이 피로써 복음을 전한 이 땅에 다시 한 번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 큰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기를 소망했다. 바울과 바나바도 이 공기를 마시고 바람을 느꼈으리라. 순복음 성지순례단은 비시디아 안디옥을 자세히 둘러보며 바울의 발자취를 느껴보았다. 부름 받은 사명에 순종해 떠난 길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닌데 바울은 그 고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이곳에서 기도를 마친 순례단은 작은 바울이 되어 주님과 함께 걷는 복음의 전도자가 되길 다짐했다. 우리는 목화의 성으로 불리는 파묵칼레로 이동해 라오디게아 유적을 둘러봤다. 현재 라오디게아 유적지에는 두 개의 원형극장, 고대 올림픽경기장, 물 저장소와 목욕탕, 제우스 신전과 기둥이 하늘로 높게 뻗은 아테나 신전, 카루도와 아고라(시장) 및 주택들, 비잔틴 시대의 여러 교회들, 전차 자국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은 대리석 바닥 등이 있으며 아직까지도 발굴 작업이 진행 중에 있다. 라오디게아는 바울이 3차 선교여행 당시 에베소에서 머물 때에 그의 동역자인 골로새 출신의 에바브라에 의해 복음이 전해졌고(골 1:6~7; 4:12~13), 교회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사도 요한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신앙을 지적했다(계 3:14~19). 그리고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실상은 가난하고 눈 멀었다”고 질책하며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고 영적 무지를 깨우쳤다. 실제로 라오디게아는 안약 제조 학교가 있을 정도로 연고로 된 안약 제조 기술이 유명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인근에 히에라볼리 교회, 골로새 교회와 더불어 사도 바울의 서신을 회람하는 등 서로 긴밀한 영적 교류를 나눴다(골 4:16). 라오디게아와 골로새, 히에라볼리(현 히에라폴리스)는 서로 리쿠스강 유역에 위치해 있었기에 기독교 사회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파묵칼레는 기이하고 아름다운 자연과 유서 깊은 고대도시 유적이 어우러진 곳이다. 198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석회 성분의 온천수가 수세기 동안 바위 위를 흐르면서 표면을 탄산 칼슘 결정체로 뒤덮어 하얀 목화로 만든 성을 떠올리게 한다. 로마 시대에 여러 황제와 고관들이 찾아 치료했다는 곳으로 로마시대 때부터 최고의 휴양지였다. 파묵칼레 위에 세워진 히에라볼리의 깊은 지하 동굴에서 솟아난 온천수가 경사면을 흐르며 장관을 빚어낸다. 파묵칼레의 언덕 위에 세워진 고대도시 히에라볼리는 원형극장과 당시의 성벽, 온천장 등 로마 유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히에라볼리는 성경 골로새서에 한 번 등장한다.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언하노라”(골 4:13) 에바브라가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에 있는 교인들을 위해 애써 기도하고 수고하는 것을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에 기록한 것이다. 히에라볼리는 사도 빌립이 복음을 증거하다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히에라볼리 원형극장 뒤편 언덕으로 1시간 정도 올라가면 사도 빌립의 무덤과 순교기념교회가 나온다. 사도 빌립은 복음을 전하다 히에라볼리 성 밖으로 끌려나가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우리 일행은 사도 빌립 순교기념교회에서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를 찬양하며 기도했다. 일산순복음영산교회 강신호 목사는 “믿음의 선진들을 따라 삶의 자리에서 열심을 다해 믿음의 일꾼으로 살아가자”며 기도를 인도했다. 순례단 일행은 산중턱에 있는 사도 빌립의 순교기념교회에서 석양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는 히에라볼리를 내려다보며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주의 신실한 증언자가 되길 기도했다. 터키=글·이미나/사진·김용두 기자
  • 2022.11.25 / 이미나 기자

    역사의 흔적 가득한 터키를 가다-(1) 이스탄불, 갑바도기아
  • [순복음실업인선교연합회-교회성장연구소 주관 2022 이영훈 담임목사와 함께 하는 성지순례] 모스크로 바뀐 아야 소피아 대성당 보며 신앙 돌아보게 돼 갑바도기아 동굴, 지하도시 보며 믿음의 열정 배워 인천공항에서 11시간 40분 동안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터키 이스탄불 국제공항.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의 명성답게 이스탄불은 보스포러스 해협을 끼고 고대와 현대가 함께 존재하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이영훈 담임목사를 포함하여 233명의 성지순례 일행은 3팀으로 나눠져 성지순례를 시작했다. 이영훈 목사팀은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사원(옛 성 소피아대성당)을 가장 먼저 탐방하며 순례를 시작했다. 복음의 시작이 이스라엘에서 시작됐다면 복음이 확장된 곳은 터키다. 사도 바울과 그 제자들이 목숨걸고 복음을 전했던 그 곳에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와 기독교가 최초로 공인된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옛 이름)의 아야 소피아 대성당을 둘러본다는 기쁨과 흥분에 온 몸에 전율이 흘렀다. 터키는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곳이자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을 보존하고 있는 역사의 땅이다. 기독교가 가장 왕성했던 비잔틴 시대, 그 위에 뿌리내린 이슬람의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터키에는 수많은 교회나 박물관이 모스크로 바뀌어져 있었다. 대표적인 곳이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 대성당이다. 르네상스 이전에 가장 크고 화려했던 아야 소피아는 당시 찬란했던 기독교 역사의 상징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주후 537년 파괴된 성당을 다시 재건하고 난 뒤 그 아름다움에 감동해 입성식 때 “솔로몬, 내가 그대를 이겼다”라는 말을 남길 정도였다. 기독교 역사의 귀한 성화와 벽화들은 지금 무슬림에 의해 회칠되어져 있었다. 아야 소피아는 동방정교회 예배당에서 가톨릭 성당으로, 이슬람 사원에서 박물관으로, 다시 박물관에서 사원으로 바뀌었다. 현재 공식명칭은 하기아 소피아 그랜드 모스크. 회칠된 벽화를 보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물질적 풍요로움 때문에 영적인 능력을 잃어버린 탓에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에게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된 뒤 모스크로 변해 버린 아야 소피아 대성당을 보며 크리스천이 기독교 영성을 잃어버린다면 모스크로 변해버린 터키의 교회처럼 한국 교회에도 위기가 오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오스만 제국 때 술탄과 중신들의 생활을 볼 수 있는 톱카프 궁전의 첫 번째 문을 지나면 제1정원 왼쪽으로 이레네 교회가 보인다. 신성한 평화라는 뜻의 이 교회는 옛 비잔틴 제국 때 세워진 첫 번째 교회였다. 주후 381년, 첫 종교회의(325년, 니케아) 때 확정된 니케아 신조의 재확립과 삼위일체 교리가 확정되어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획을 담은 두번 째 종교회의가 열렸던 곳이다. 성지순례단은 다시 비행기를 타고 갑바도기아의 카이세리로 이동해 이튿날부터 갑바도기아에서 일정을 시작했다. 낙타바위로 유명한 데브란트 계곡, 젤베 계곡, 비둘기 집으로 가득한 바위산 우치히사르를 둘러본 일행들은 동굴교회가 있는 괴레메 골짜기,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낸 지하도시 데린구유를 순례하며 신앙을 목숨 걸고 지킨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됐다. 갑바도기아의 괴레메 지역은 응회암의 침식작용이라는 지질현상으로 인해 기이한 바위가 끝없이 펼쳐지며 신비로운 장관을 이룬다. 198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괴레메 골짜기는 주전 2000년부터 사람들의 피난처로 사용됐다. 주후 1세기경부터 기독교 박해를 피해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숨어들어온 피난처이기도하다. 기독교인들은 이 계곡의 바위를 파서 동굴을 만들어 교회를 짓고 집을 지어 살았다고 한다. 이후 313년 기독교 공인 이후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장소와 기도하며 수도하는 영성훈련의 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서 유리하였느니라”(히 11:37~38)는 말씀대로 믿음의 선진들은 암굴과 토굴 등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아갔다. 7세기 후반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터키가 점령되면서 갑바도기아로 이주하는 기독교인들의 수는 더욱 늘어나 11세기 무렵에는 인구가 7만명에 달했고, 그들이 바위를 파서 만든 성당이나 수도원이 360여 개에 이르렀다. 이곳의 동굴교회에서 우리 순복음 성지순례단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이영훈 목사는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신앙생활한 초기 기독교 신앙인들을 본받아 신앙을 지키는 성도들이 되길 당부했다. 데린구유의 지하도시는 로마제국과 이슬람 시대에 박해받던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재발견할 수 있는 곳이다. ‘깊은 우물’이라는 의미를 지닌 데린구유는 마치 개미굴처럼 지하 85까지 11층 규모로 파내려가 2만명이 생활할 수 있는 도시였다. 아직도 완전히 발굴해 낸 것이 아니라 지하 8층까지 공개하고 있는데 좁은 통로를 따라 가장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십자가 모양으로 되어있는 교회가 나온다. 지하도시는 주거지로 사용하던 방이나, 부엌, 교회, 곡물저장소, 성찬 및 침례식을 행한 장소, 신학교, 지하매장지 등 완전한 도시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다른 지하도시로 피신할 수 있는 지하터널도 9㎞나 이어져 있다. 거대한 규모의 지하도시를 보며 초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을지 ‘죽으면 죽으리다’라는 순교의 각오로 목숨 건 신앙의 여정을 이어갔을 것을 생각하며 나의 신앙은 어떤 상태인지 되돌아보게 됐다. 터키=글·이미나 /사진·김용두 기자
  • 2022.11.18 / 이미나 기자

    [한미수교 140주년 특집] 조미조약의 체결과 개신교 선교의 시작
  • 박명수 (서울신대 명예교수) 올해는 한미수교 140주년의 해이다. 올초 이영훈 담임목사는 한미수교가 갖는 의미를 되새기며 수교 140주년을 맞아 한미동맹을 더욱 굳건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7월 국민일보가 마련한 한미수교 140주년 대담에서 박명수 서울신대 명예교수는 한미수교로 인해 개신교의 선교가 유교국가인 조선 정부의 탄압 없이 자유롭게 이루어졌고 나라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지금 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주의와 중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진영이 충돌하는 양상으로 전개되면서 국가의 안보와 경제에 전략적 정책이 필요하게 됐다. 이러한 때 140년 전 한미수교가 우리나라에 끼친 영향과 의미 그리고 미래 전망을 2회에 걸쳐 다룬다. <편집자 주> 한국 개신교 선교는 1884년도에 시작되었다. 1884년 여름 일본에 와 있던 감리교 매클레이 선교사가 조선을 찾아와 고종으로부터 교육과 의료사업에 대한 허락을 받았다. 같은 해 9월 중국에 있던 장로교 선교사 알렌이 조선주재 미국공사관의 공의로 왔다. 전자가 조선 정부로부터 최초로 선교활동을 허락받은 것이라면 후자는 최초로 조선 땅에 선교사가 정주하게 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기반 위에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한국에 오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개신교 선교의 시작은 1882년 5월에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이하 조미조약)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 조미조약이 개신교 선교를 허락한 것은 아니었다. 유교국가인 조선은 개항을 하면 기독교가 들어오지나 않을까 염려하였고, 조미조약을 맺을 때 개신교의 선교를 금지하는 조항을 명문화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조미조약을 맺도록 중재역할을 하는 중국의 이홍장은 미국이 그런 조항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이홍장이 생각해낸 방법은 조미조약에 종교에 관해서 아예 언급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홍장은 이렇게 함으로써 조선 정부는 유생들에게 선교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고, 미국은 기독교인들에게 선교가 금지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했다. 당시 미국도 선교문제 때문에 조선의 개항이 지연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홍장의 제안을 수용했다. 조미조약이 체결되고 1883년 5월 푸트가 초대 조선 주재 미국 공사로 부임하자 지금까지 숨어서 활동하던 천주교 신부들이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런 소식이 중국 지푸에 있는 천주교인들에게 알려졌다. 이들은 지푸에 있는 미국영사에게 조미조약이 조선에 있는 천주교 신앙에 어떤 영향이 있는지를 문의하였다. 사실 지푸는 오랫동안 조선 선교의 거점이었다. 조선 천주교인들은 지푸의 천주교인들과 교류하였고, 개신교 선교사들도 지푸를 통해서 조선 선교의 가능성을 탐색하였다. 따라서 이곳의 미국 영사는 미국 정부에게 조미조약으로 인해서 조선 선교가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 물어본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미 국무부는 1883년 10월 23일 푸트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리고 있다. “일반적인 외국 종교의 전파는 어떤 조약에도 포함시켜야할 적절한 주제는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양심의 지시를 따라 행동할 자유는 조선에 있는 모든 미국인들에게 확보되어져야 한다. 지금까지 미국 정부가 해 왔던 것처럼 신앙에 대한 관용은 모든 계몽된 국가의 진정한 정책이라고 믿으면서 국무부는 적절한 근거를 갖고 당신의 거중조정의 역할을 잘 확대해서 조선인들로 하여금 모든 선교사들을 친절하게 대우할 것을 권고하는 것을 보기를 원한다.” 이것을 통해서 미국 정부는 조선 정부에 양심의 자유와 다른 신앙에 대한 관용을 권고할 것을 푸트 공사에게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시를 받은 푸트는 조선 정부에 미국 정부의 입장을 분명하게 전달하였다. 그는 종교의 자유는 미국이 건국된 다음에 오랫동안 지켜온 근본적인 원칙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종교적인 핍박을 극히 혐오한다는 것을 조선 정부에 전했다. 당시 미국 기독교는 조선에 선교를 시작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푸트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본부의 총무인 엘린우드에게 서구의 여러 나라는 국민들에게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부여하고 있으며 기독교는 지배자나 법에 대한 복종, 정직과 도덕을 가르치기 때문에 조선 사회에 유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조용한 방법’으로 조선에 전달했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가 기독교 선교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1884년 개신교 선교의 시작은 이런 배경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1884년 1월 일본에 있는 매클레이 선교사는 미국에 있는 자신의 친구 가우쳐로부터 조선 선교의 가능성을 탐색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리고 이 문제를 당시 일본주재 미국 공사 빙햄과 조선 주재 미국 공사 푸트에게 상의하였다. 이들은 모두 푸트에게 호의적이었고 조선 선교는 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매클레이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1884년 6월 하순 조선에 왔고, 그 해 여름에 고종으로부터 교육과 의료사업에 대한 승인을 받았다. 이때 매클레이는 일본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김옥균의 도움을 받았다. 김옥균은 고종의 윤허를 전하면서 “과거 한국에서 기독교로 인해서 상당한 반대와 곤란한 일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정부는 개신교를 반대하지 않으며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와 일하는데 어떠한 방해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일이 있은 다음 얼마 후 알렌이 조선에 들어왔고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았다. 한국 개신교 선교는 이렇게 조미조약을 통해서 열려진 좁은 문을 통하여 시작되었다.
  • 2022.11.1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Hello, Israel
    절기를 바라보는 시야 … 광야에서 보내는 초막절
  • 이스라엘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필자가 추천하는 것은 절기 때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것이다. 절기가 되면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전통에 따라서 그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많은 것들을 준비한다. 태양력으로 10월 15일부터 일주일간 진행되는 초막절은 이스라엘의 가장 큰 명절이자 가을 절기의 마지막이다. 일명 하이 홀리데이(대명절)라고 불리는 이 시기에는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온다. 모두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서 찾아오는 것이다. 초막절은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에게도 의미가 깊은 날로 이해된다. 물론 두 그룹 간의 이해는 다르기는 하다. 하지만 이 절기를 대하는 자세는 사뭇 비슷하면서도 다른 양상을 지닌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초막절은 많이 분주해진다. 가을 절기가 시작하기 전부터 시장과 상점에서는 초막절을 위한 상품들이 쏟아져 나온다. 특히 초막절에는 집집마다 작은 초막을 짓는 것이 전통이다. 그래서 상점들은 간이 초막부터 시작하여 초막을 짓기 위한 자재들을 쌓아 놓고 판다. 그리고 대속죄일이 끝나는 날부터 많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마당이나 베란다 혹은 집근처 공터에 초막을 짓는 것을 보게 된다. 초막의 형태가 딱히 정해진 것은 아니다. 예전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현재 이스라엘에서 본 초막들은 재미있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사면의 벽을 이루는 형태로 직사각형 혹은 정사각형의 벽을 세우고 그 위에 조릿대 같은 발을 올리거나 종려나무 가지를 덮어서 지붕을 만든다. 그리고 그 초막에서 일주일을 살게 된다. 식탁을 차려놓고 음식을 집에서 해 나와 그 초막 안에서 먹고 마시면서 일주일을 보내는 것이 전통이다. 물론 현대의 유대인들 중에 그렇게 하는 이들은 정통 종교 유대인들 밖에는 없다. 대부분이 초막을 간이 식탁처럼 사용하거나 손님들과 분위기를 즐기는데 사용한다. 이곳 네게브에 사는 필자도 처음으로 초막을 만들었다. 물론 내 손으로 모든 것을 짓고 싶었지만 초보자가 만들기엔 아직 버거워서 상점에서 파는 초막세트를 사다가 만들었다. 그래도 기둥을 세우고 사면을 천으로 두른 뒤에 지붕에 발을 올리고 종려나무 가지로 꾸며서 그럴듯하게 초막을 만들었다. 이곳 주일학교 아이들과 함께 내부 장식도 하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 절기를 지내면서 과연 초막절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깊이 묵상해 보게 된다. 유대인들에게조차도 지금의 초막절은 이스라엘 민족의 명절인 것으로 그치는 것을 보게 된다. 그저 먹고 마시면서 자신들의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명절로만 기억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초막절은 성경 레위기 23장에 다른 절기들과 함께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절기가 유대인들이 제정한 날이 아닌 야훼 하나님이 지정하신 절기라는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초막절을 “야훼를 위해서 칠일동안 지킬 것”을 명하셨다(레 23:27~32). 초막절뿐만 아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절기는 많다. 하나님은 유월절, 초실절, 칠칠절(오순절), 나팔절, 대속죄일, 초막절, 안식일, 월삭 등 절기들을 지명하시고 지키라고 명하셨다. 초막절은 특별히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가지는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종말에 대한 요소이다. 유대인들은 초막절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영원한 처소이자 그 나라를 갈망하는 기도를 한다. 유대인들에게 초막절은 지금의 모습만이 아니라 과거의 은혜와 현재의 감사 그리고 미래의 소망을 담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에게도 초막절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 땅에 오셨고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부활하셨다. 그리고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셨다. 이제 다시 오실 것은 그 어느 때도 아닌 가을의 마지막 추수가 끝나고 우리를 영원한 주의 처소에 이끄실 그 날이다. 그렇기에 초막절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상징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종말의 신앙 가운데 있어서 절기를 바라보는 것은 미래만을 바라본 치우친 시야가 될 수도 있다. 위에 언급했지만 유대인들은 초막절 안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바라보려고 한다. 하나님은 초막절을 언급하시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을 상기 시키셨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아닌 이미 구약 속에서 말씀하고 계셨던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초막절을 지키지 않는다. 하지만 절기를 지키다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그리고 말씀이 우리에게 비추는 것들이 보인다. 단순한 참조가 아닌 실질적인 우리의 삶에 여전히 남아있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는 렌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우리 교회 마당에 초막을 세우고 우리 성도들과 아이들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역사하신 순간들을 이야기하면서 그 하나님이 지금 우리의 하나님 되심을 이야기 해줄 수 있다면 아마도 우리의 믿음과 삶은 휘청거리지 않고 굳건한 반석 위에 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마치 광야의 초막을 꾸미며 즐거워하던 이곳의 주일학교 아이들이 하나님의 살아있는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임을 이해했던 것처럼 말이다. 김요셉 목사
  • 2022.11.18 / 오정선 기자

    반유대주의의 최전선에서 벤구리온의 유지를 이어가다
  • “시오니즘과 이스라엘학 벤구리온 연구소”
    필자가 살고 있는 네게브의 작은 마을인 미드라셋 벤구리온에는 두개의 연구소가 있다. 두 연구소 모두 벤구리온 대학 산하의 연구소로 하나는 지난번에 소개한 사막 연구소이고 다른 하나는 벤구리온 연구소이다. 네게브는 이스라엘 전체 영토에서 약 3분의1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광활한 사막지대이다. 이스라엘이 독립할 당시 초대 수상이었던 벤구리온은 유엔에서 제시한 영토 분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그 당시 세계시오니즘기구의 대부분 의원들은 분할 안에 반대했지만 벤구리온은 그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네게브를 포함한 이스라엘 영토 안에 찬성해 1948년에 독립할 수 있었다. 벤구리온은 이스라엘이 독립하기 이전부터 오랜 시간 동안 유대국가(현 이스라엘 국가)의 설립을 위해서 꾸준히 준비해 왔고 이를 위해 동분서주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미래를 네게브에 두었다고 한다. 그는 독립 이전부터 이스라엘 땅을 찾아와 살면서 이 네게브의 광활한 광야를 푸르게 만든다면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가장 부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벤구리온 대학 부설 연구소인 벤구리온 연구소 ‘시오니즘과 이스라엘학’(이하 벤구리온 연구소)은 이스라엘의 초대 수상인 벤구리온 그리고 현대 이스라엘과 시오니즘에 대해서 연구하고 공부하는 곳이다. 필자도 이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에 대한 많은 이해를 얻을 수 있었다. 이스라엘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경제나 전쟁의 위협이 아닌 바로 반유대주의이다. 반유대주의는 영어로 ‘안티세미티즘’이라고 한다. 이는 셈족에 대한 반발적인 흐름을 이야기하며 그 중심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적 반대주의 흐름이다. 또 반유대주의는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유럽과 미국에 많이 대두되고 있는 현대 사회의 부정적인 흐름이다. 과거 역사 속에서 이 반유대주의 영향에 의해 일어난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홀로코스트이다.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럽 유대인들의 학살 배경에는 이 반유대주의가 내포되어 있다. 현재 많은 수의 아랍인들과 팔레스타인들이 이런 반유대주의 정서를 일으키고 있으며 BDS(보이콧, 투자철회 및 제재) 운동도 이런 맥락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벤구리온 연구소의 주된 목적은 벤구리온의 유산에 대한 연구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팽배해져 가는 반유대주의의 흐름을 막기 위한 연구자들을 세우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연구소는 이스라엘 독립 이전부터 지금까지의 수많은 자료들을 기록보관소에 보관하고 있으며 벤구리온과 연관된 수많은 자료들을 수집해 연구하고 후대를 위한 디지털화 작업을 하고 있다. 연구소는 이스라엘과 시오니즘에 관심을 두고 있는 많은 학생들을 유치해 그들을 통해서 더 다양한 시각으로 이스라엘과 시오니즘 그리고 벤구리온에 대한 객관적 연구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연구소에서 공부한다고 하면 시오니즘을 왜 공부하는가 하는 의문을 표하기도 한다. 시오니즘에 대한 이해가 없는 이들이 보기에 다른 나라의 이념을 왜 배우는가 하는 궁금증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시오니즘은 어떻게 보면 근대 유럽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현대 이스라엘의 탄생에 있어서 이해를 가져오는 중요한 이념이다. 뿐만 아니라 현대 이스라엘을 이해함에 있어서 시오니즘은 필수불가결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연구소에는 이런 역사의 편린 속에 빛나는 이야기들을 캐내는 연구자들이 전 세계에서 몰려와 공부하고 있다. 이들은 세계 속에서 왜곡되고 와전되는 유대인들에 대한 인식과 이스라엘에 대한 이해를 바꾸려한다. 그들의 작은 노력들이 현재 많은 글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이해를 바꾸어 나가고 있다. 벤구리온 연구소는 이스라엘 네게브 작은 마을의 한 구석에 있다. 벤구리온의 무덤을 끼고 있는 이 작은 연구소는 큰일을 해나가고 있다. 역사의 한 구석을 집요하게 파내고 한 인물을 통해서 이스라엘 그리고 유대인의 사회를 전 세계에 드러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작은 연구소가 큰 세계를 상대로 커다란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연구와 학문이라는 필드에서 이들은 반유대주의와 싸우고 있으며 그들은 여전히 어려운 싸움을 해 나가고 있다. 이스라엘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다. 성경 속의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현대의 이스라엘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결코 작지 않다. 2000년 동안 나라 없던 백성이 다시금 나라를 얻게 되는 과정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런 흐름 속에서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학문적으로 이스라엘을 대변하는 이 학교는 작은 거인처럼 세상의 학문들과 맞서고 있다. 오늘도 학교의 도서관을 둘러보면서 반유대주의에 맞서는 이 학교와 학생들의 다짐이 더욱 공고해지기를 기도해 본다. 김요셉 목사
  • 2022.09.16 / 김용두 기자

    광야에서 푸르름을 꿈꾼다- 네게브 벤구리온 대학 사막연구소
  • 필자는 현재 이스라엘에서도 남단에 위치한 네게브 사막 한가운데 살고 있다. 이스라엘 영토 중 가장 넓은 곳을 차지하는 곳이 바로 이곳 네게브 사막이다. 네게브에서 가장 큰 도시인 브엘세바는 아브라함과 관계가 깊고 그가 브엘세바 인근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야훼의 이름을 부르고 제단을 쌓은 것은 이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많은 분들이 미처 알지 못하고 지나가는 사실 중 하나는 이 네게브가 성경에서 유다 지파의 영토였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지파이자 이스라엘 지파 중 사자라고 불리는 유다 지파는 가장 척박한 땅인 네게브를 얻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이 독립할 당시에도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나 불리한 영토분할이 있었고 그 영토 중의 절반이 네게브 광야였다. 아무것도 없는 이곳을 유대인들에게 분할한 유엔의 결정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초대 수상인 벤구리온은 이 네게브에서 이스라엘의 소망을 보았다. 독립한 이후 그는 의회에서도 네게브야말로 이스라엘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네게브는 많은 의미를 지닌 곳이다. 이곳에는 벤구리온의 무덤이 있고 광야를 탐험할 수 있는 체험 학교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특별한 이유는 바로 ‘벤구리온 대학 부설 사막 연구소’(Ben-Gurion University of the Negev Jacob Blaustein Institute for Desert Research)가 이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스라엘에는 세계에서 순위권 안에 드는 대학이 여럿이 있다.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 하이파의 테크니온 그리고 브엘세바의 벤구리온 대학이 그들 중 하나이다. 특히 벤구리온 대학은 많은 한국 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농업과 의학 그리고 근래는 사이버보안에 대해서 세계에서 상위권을 다투고 있다. 더 나아가 네게브 광야 한가운데 자리 잡은 이 사막연구소는 세계 유수의 학자들이 매년 모이는 국제 사막연구 세미나를 연다. 전 세계의 석학들은 지구 사막화와 함께 그 척박한 땅을 어떻게 해야 발전시키고 농지화 시킬 수 있는지를 연구하고 있다. 이 연구소의 가장 큰 목적은 바로 광야를 푸르게 만드는 것이다. 일 년 중 비가 오는 날이 채 한달도 안 되는 광야에서 작물을 키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한다. 일 년 중 한 달도 안 되는 사이에 작물을 키우는 것은 이스라엘의 겨울에만 작농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연구소는 겨울만이 아니라 일 년 사계절 동안 광야에서 작농이 가능한 농법과 방법들을 연구하고 더 나은 품종과 강한 모종을 만들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다. 이렇게 얻어진 연구는 인근 키부츠와 농장을 통해 실제적으로 활용되고 또 데이터를 얻고 있다. 농장들은 더 나은 농법을 적용할 수 있게 되고 연구소는 그 농장을 통해 계속적인 데이터를 얻는다. 최근 들어 네게브가 주력하고 있는 것은 와이너리(포도주 농장)이다. 포도를 심어서 포도주를 생산하는 것이 네게브가 새로이 추진하고 하는 특산물이다. 한 친구가 연구소에서 포도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어서 이야기를 들었다. 척박하고 물이 적은 땅에서 길러지는 포도주는 어떤 맛이 날지 궁금한 이들이 있었다. 그래서 연구소에서 실험적으로 100그루의 포도나무를 심고 나무마다 같은 토양의 조건에서 각기 다른 물의 양과 주는 시간 등을 달리 하고 비료의 분량과 내용물들에 대한 차이 또한 두어서 3년 동안 연구했다고 한다. 얻어진 포도를 분광 스펙트럼 분석을 통해 포도의 당도를 테스트한 결과 인근 농장에서 포도를 재배하고 포도주를 생산하게 되었다. 아직까지 네게브 와인은 유명하지는 않지만 많은 애호가들 사이에서 호평받는 맛이 되고 있다. 네게브를 푸르게 만들겠다는 벤구리온의 꿈과 현대 연구자들의 꿈은 직접 네게브를 방문하고 풍경을 보는 이들에게 ‘과연 될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한다. 하지만 이 곳 네게브에 사는 이들은 겨울이 되어 비가 내리고 나면 푸르게 변하는 광야를 보고 알고 있다. 네게브가 푸르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이 광야를 푸르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 약속을 우리는 믿고 있다. 기적으로 푸르게 만드실 것을 본다. 이곳 사막 연구소에는 수많은 크리스천 학생들이 있다. 그들 대부분은 동일하게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허락하신 축복과 약속을 바라보고 왔다. 어쩌면 자신들의 손을 통해 하나님이 이 땅을 푸르게 하실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함께 모여 우리를 통하여 일하실 하나님께서 이 연구소를 통해서도 역사하여 달라고 기도한다. 이 글을 읽고 이스라엘을 찾아오실 많은 사람들이 꼭 한 번 이 곳을 방문하여 네게브 광야의 푸르른 미래를 함께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한다. 김요셉 목사
  • 2022.08.19 / 김용두 기자

    평신도를 위한 오순절 조직신학
    V. 신론 (The Doctrine of God) - 3
  •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강조되면 하나님 모습 왜곡될 수 있어
    4.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믿음의 대상이며 실체인 하나님을 철학적으로 혹은 신학적으로 증명하려는 것은 헤어 나오지 못할 블랙홀을 헤매는 것과 같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인간 속에 두신 하나님의 선재적 행위로 인해(롬 1:19)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려는 시도와 노력을 무모한 신기루를 쫓는 행위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목적론적 증명(Teleological argument)이다. 모든 사물은 의미와 이유를 갖고 있다. 그 어떤 것도 고유한 의미 없이 생성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요소들은 무질서하게 계획과 목적이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교한 질서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하늘의 수많은 별들 중 만약 어느 하나라도 궤도를 이탈하거나 다른 영역을 침범한다면 예기치 못한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것이 일정한 목적과 기능을 수행하도록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세심한 관찰 결과에 근거해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하는 것이 목적론적 증명이다. 목적론적 논증은 고대 철학자들도 사용했던 방법론으로써 대표적인 철학자들은 플라톤(Plato)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를 중심으로 한 스토아(Stoa) 학파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이 신학적인 언어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철학적인 용어인 ‘형상’(形相, form)과 ‘질료’(質料, matter)라는 단어를 썼다. 어떤 질료도 갖고 있지 않은 채 형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을 순수 형상(entelecheia)이라고 규정을 했는데, 이것을 신(God)이라고 생각했다. 철학적인 복잡함을 제거하고 목적론적 증명을 신학적으로 단순하게 접근하면 이렇다. 세상 모든 만물은 의미와 목적을 갖고 있는데, 그 목적을 부여하고 목적대로 사물을 움직이게 하는 근원적인 순수 형상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분이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신 존재 증명에 대한 논쟁과 당위성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현대 신학에서 신 존재 증명은 신학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분야는 아니다. 신 존재 증명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신학자들도 많이 있다(이에 대해서는 지난 호를 참조). 현대 신학자들의 관심은 하나님을 인간의 이성이나 철학, 혹은 학문적 방법론으로 증명하려는 노력보다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있다. 1)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의미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각 사람의 개인 속에 거하시는, 혹은 인간의 삶과 공동체 안에 내재하시는 분이신가?”아니면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초월적이신 분이신가?”에 대한 문제이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대한 문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시작하는 주기도문 서두에도 잘 나타난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은 인간이 가까이 할 수 없는, 분명히 하나님의 초월성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라는 것은 인간의 삶 속에서 인간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맺고 계신 내재적 하나님을 함축적으로 일컫는 단어이다. 2) 하나님의 초월성 하나님의 초월성은 그의 피조물인 인간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초월성은 천지를 창조하시는 모습에서 극명하게 나타고 있다. 천지 창조 속에 인간은 한 피조물일 뿐 천지 창조의 역사에서 철저히 배제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피조물로부터 초월해 계시며 그의 창조물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넘을 수 없는 초월성을 갖고 계시다. 성경에 기록된 기적적인 사건들은 자연적인 현상과 요소, 삶과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은 하나님의 초월성의 산물이다.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내재성마저 하나님의 초월성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칼 바르트(K. Barth)와 브라운(W.A. Brown)이 있다. (1) 칼 바르트(K. Barth)는 인간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보여 주신 것만큼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하나님의 ‘자기계시’조차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바르트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본성, 소유, 행위의 순수한 한계와 순수한 시초이며 인간과 모든 인간적인 것과 완전히 다른 존재로서 무한한 질적인 차이 속에 대립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2) 브라운(W.A. Brown)은 만약 하나님이 세계의 근거와 세계의 깊이로서 이 세상에 매어 있다면 하나님은 세상과 구별되는 자신의 자유와 독자성을 상실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은 언제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의 내재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하나님의 주권은 쉽게 희미해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휴머니즘적인 사랑은 쉽게 동질화 될 수 있다. 즉, 다시 말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것이 하나님 사랑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세우기 위한 심판과 징벌도 하나님 사랑의 일부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구원에서 제외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릴 수는 없다. 그의 초월적 선택과 주권 때문이다. 3) 하나님의 내재성 하나님의 내재성은 역사적으로는 타락과 회개를 반복하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시고 그들의 희생 제사를 받으시고 전쟁에 개입하시며 개인의 삶을 주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내재성을 의미한다.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 본 회퍼(Dietrich Bonhoeffer),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 로빈슨(John A. T. Robinson) 등은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고 있다. (1) 본 회퍼는 하나님은 주변 세계나 배후 세계가 아니라 우리 세계의 중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해서 우리는 ‘세상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D. Bonhoeffer, Widerstand und Ergebung 9 (Aufl, 1959), 184f; 필만, 『교의학』, 189). (2) 틸리히는 관념주의에 영향을 받아 하나님은 내재화된 초월자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지만 하나님의 초월성보다는 인간의 삶 속에 내재화된 모습으로 이해하고 있다. (3) 로빈슨은 하나님은 세계 위에, 또는 세계 밖에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깊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내재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인간의 자율성은 사라지는 위험에 처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이 없으며 세상의 악과 부조리 또한 하나님의 의지로 치부될 수 있다. 하나님의 내재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위험에 빠질 우려도 있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 균형을 잡지 못하면 신앙은 변질되기 쉽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강조되면 하나님의 모습은 심하게 일그러진 모습으로 왜곡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대한 깊은 신학적 고찰과 신앙적 균형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2.11.0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V. 신론 (The Doctrine of God) - 2
  • 신 존재 증명은 이성적 측면에서 하나님을 증명하고자 한 노력 조직신학은 신학의 여러 주제들을 조직적으로 세분화하고 체계화시켜 다루는 학문이다. 예를 들면 성령론은 성령에 대해서만 구원론은 구원에 대해서만 기독론은 그리스도에 대한 것만을 다루게 된다. 같은 맥락으로 신론은 하나님에 대해서만 다루는 것인데 신론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신 존재 증명’이다. ‘신 존재 증명’은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말일 수 있다. 어원적인 뜻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 존재 증명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음의 차원이 아니라 이성적인 측면에서 증명하고자 하는 다소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신 존재 증명의 대표적인 방법으로는 목적론적, 우주론적, 존재론적, 도덕적 신 존재 증명 등이 있다. 하지만 이런 신 존재 증명에 대한 이론과 신학적 접근에 대해 부정적인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1) 우주론적 논증(cosmological argument) 신 존재 증명 이론들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 우주론적 증명이다. 우주론적 증명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322)에 의해 처음 시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적 논증은 복잡한 이론이나 수사학적 기교가 아닌 간결한 논증으로 시작한다. 그는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발전하고 확장되고 있는 우주의 근원을 소급해 올라가면 우주의 시작이 된 제1원인(prima causa)을 발견하게 될 텐데 이 제1원인이 되는 존재가 신이라고 생각했다. 우주의 근본 원인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신 존재 증명에 관한 논쟁은 이후 활발히 진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중세를 지나면 인간의 이성에 대한 자각과 인식이 발달하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믿음의 차원이 아닌 이성의 차원에서 증명하고자 하는 논쟁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중세시대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신 존재 증명을 받아들여 신 존재 증명을 더욱 세분화하고 확장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인 모든 우주의 근원이 되는 ‘제1원인’이라는 말 대신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모든 움직임(movement)에는 그것을 일으킨 힘과 움직임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시작된 움직임은 또 다른 운동을 만들어가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간다. 이렇게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모든 움직임의 원인을 찾아 올라가면 결국 최초의 움직임을 가능케 한 근원적인 힘의 요소가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 힘은 어떤 외부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즉 다른 것에는 영향을 줄 수 있으나 그 어떤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것을 ‘부동(不動)의 동자(動者)’라고 했으며 이것이 하나님이라고 논증했다. 2) 존재론적 논증(ontological argument) 존재론적 증명은 철학적 사고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인데 중세 시대 더욱 활발해졌다. 중세의 철학자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는 존재론적 논증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다. 안셀무스는 스콜라 철학을 발전시킨 사람이다. 스콜라학파는 성경과 신학을 해석하는데 철학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며 이성으로 기독교 신앙을 증명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 안셀무스는 하나님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존재론적으로 증명하려 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인간은 불완전하다’는 말에 모두가 동의한다.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완전’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한’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기에 한계가 있는 ‘유한’의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참과 거짓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런 능력도 없는 무능하고 무기력한 인간을 발견하는 순간 전능하신 하나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중세의 위대한 철학자이며 신학자인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는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증명을 이어받았다. 데카르트는 안셀무스와 달리 존재론적 증명을 조금 더 구체화했다. 그는 하나님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논증함에 있어 인간의 이성과 사고 능력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신과 인간의 연관성’ 속에서 존재론적 증명을 논증해 나갔다. 데카르트에게 ‘생각하는 자아’는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이다. 그래서 데카르트가 증명하려고 했던 신 존재 증명은 기독교의 진정한 하나님이 아니라 ‘철학자의 신’이라는 비평을 듣기도 한다. 3) 도덕적 증명(moral argument)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서로 다른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설명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존재가 증명됐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칸트는 신 존재 증명에 대해 기본적으로 회의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지만 그가 주장한 신 존재 증명은 ‘도덕적 증명’이다. 비록 인간의 한계와 죄를 짓고자 하는 본성으로 인해 좌절될지라도 인간은 선과 도덕적인 삶을 추구한다. 여기에는 인종, 성별, 나라, 언어, 문화적인 차이가 없다. 종교가 다를지라도 모든 인간은 도덕적인 삶을 추구한다. 이것은 모든 인류가 추구하고 있는 최고의 도덕적 개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도덕적 개념을 인간에게 창조한 분이 존재하며 그분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 중 신 존재 증명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학자가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증명되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인간은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자기 계시’에 의해서만 제한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오토 베버(Otto Weber, 1902~1966)는 신 존재 증명을 ‘하나님을 세계화 또는 이성화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왜냐하면 신 존재 증명은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규정하는 오류에 빠질 위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오순절적 입장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이성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그의 존재를 인정하고 증명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증명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인식의 세계와 인간의 이해와 한계의 밖에 스스로 계신 분으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2.07.0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V. 신론 (The Doctrine of God)-1
  • 인간의 역사와 삶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존재 조직신학의 신론은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 속성과 사역에 관한 신학적 접근과 이해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다.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고 이에 반에 유신론자들은 하나님의 실존을 증명하려고 한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신존재 증명'이라고 한다. 키에르케고르(So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는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을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한 모욕"으로 치부하기도 했다(앤터니 티슬턴, 『조직신학』, 61).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하나님이 누구신지 규정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것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존재는 인간의 역사와 삶 속에서 드러나며 인간과의 소통을 통해 어떤 분인지 그의 속성을 알 수 있다. 1. 하나님에 대한 이해 신약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구약의 하나님 이해는 차이점이 있다. 이 말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르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시다. 다만 구약시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이해한 것과 예수님의 구원 사역과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신약시대 기독교인의 하나님 이해가 다르다는 것이다. 1) 구약의 하나님 이해 구약시대의 하나님을 대표하는 말은 '거룩'이다. '거룩'은 하나님과 인간을 구별함과 동시에 전적인 차별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다윗이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거룩의 집약체인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길 때 흔들리는 법궤를 잡았다가 죽은 웃사의 이야기(삼하 6:1~7)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에 근접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임재 속으로 자의적으로 들어갈 수 없다. 민수기는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민 23:19)라는 말로 하나님과 인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주인(아도나이)이며 인간은 그의 피조물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구약의 하나님 이해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과 구원 사역을 통해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2) 신약의 하나님 이해 구약의 하나님 이해가 '거룩'이라면 신약의 하나님 이해는 '사랑'이다. 셀 수 없이 많은 구약의 구절에서 하나님의 거룩이 강조되고 있는 것처럼 수많은 신약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요한일서는 하나님이 곧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다(요일 4:8, 16). 또한 구약의 거룩하고 죄를 심판하시는 무서운 전능자 하나님은 신약에서 '아빠, 아버지'로 기록되고 있다(롬 8:15). 이런 '하나님 이해'의 전환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이루어졌다.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과 같이 되셨고, 인간을 심판이 아닌 사랑으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빌 2:6~8). 거룩하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하나님이 되었고,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이 되었으며, 주인이 자신의 아들 안에서 자신을 배반하고 타락한 인간의 '아빠, 아버지'가 되셨다. 신약과 구약의 성서적 '하나님 이해' 외에도 교부와 중세시대는 물론 현대 신학자들에게 하나님 이해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3) 교부와 중세시대의 '하나님 이해' 교부들은 이성과 논리를 통한 철학적 신학적 '하나님 이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초기 기독교 변증가인 저스틴(Justin, 100~165)은 하나님을 인간의 언어로 '말할 수 없는 분'이라고 규정했으며, 클레멘트(Clement, 150~215)는 하나님은 '증명될 수 없고, 파악될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중세 신학자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 철학적 언어를 사용해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했다. 『신학대전』을 쓴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하나님을 '최초의 원인'(causa prima), '순수한 현실'(actus purus)이라고 이해했다.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하나님은 진노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이고, 은총 속에서 '계시된 하나님'이라고 이해했다. 이 말은 무서움과 파괴적인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는 진정한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없으며, 은총 가운데 하나님의 참모습이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 충만한, 불타는 화로'이며 선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루터 못지않게 종교개혁에 앞장섰던 멜란히톤(Melanchthon, 1497~1560)은 하나님을 율법과 복음의 이중적 인식론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그는 '율법은 하나님의 생소하고 익숙하지 않는 활동이고, 복음은 고유한 본래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진노를 하나님의 또 다른 속성이나 본질로 보지 않고 사랑인 하나님에게 따라오는 불가피한 그림자로 이해했다. 2.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론(Erroneous Theories about God) 하나님을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잘못된 접근 방법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들이 무신론(atheism), 불가지론(agnosticism), 유물론(materialism), 범신론(pantheism), 이원론(dualism), 다신론(polytheism), 이신론(deism) 등이다. 1) 무신론(atheism) 무신론은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이다. 무신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철학적 무신론이다. 니체(F.W. Nietzsche)가 말한 '신은 죽었다'와 같이 하나님의 존재를 철학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둘째는 실존론적 무신론이다. 하나님이 실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증명할 수도 없고 인간의 삶에 개입할 수도 없다는 주장이다. 2) 불가지론(agnosticism) 불가지론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지만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식과 지혜의 한계를 인정한 기독교적 사고 같으나 반기독교적인 사상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인간 속에 두셨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롬1:19). 3) 유물론(materialism)과 이원론(dualism) 유물론은 영(spirit)과 영적인 존재(spiritual being) 자체를 부인한다. 모든 영적인 현상은 뇌의 작용일 뿐이고, 유물론자들에게 죄는 불완전한 것일 뿐이다. 이원론은 영과 물질의 영역을 구분하고, 모든 물질은 악하고 오직 영만이 선하다고 믿는다. 4) 다신론(polytheism), 범신론(pantheism), 이신론(deism) 다신론과 범신론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다신론은 '많음'을 의미하는 'poly'와 '신(神)'을 의미하는 'theos'가 합쳐진 헬라어 합성어로서 많은 신의 존재를 믿으며 하나님도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범신론은 힌두교와 같이 하나님과 우주만물을 동일시하는 사상으로 우주가 곧 하나님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이신론은 하나님과 피조 세상을 분리하는 것이다. 전능자가 우주와 인간을 창조했지만 피조물을 유기했으며 더 이상 인간 세상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이런 종교적 철학적 사상으로는 하나님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으며, 그의 본질과 속성에 가까이 갈 수도 없다. (다음 호에 계속)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2.04.03 / 이상윤 목사 기자

    신앙으로 세상보기
    링컨의 추수감사절
  • 현직인 조 바이든 대통령을 포함해 46명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미국민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입니다. 이런 현상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그가 이룬 위대한 업적과 그가 지닌 비범한 인격 때문입니다. 먼저 링컨은 ‘남북전쟁’(1861~1865년)을 승리로 이끌어 미합중국을 붕괴 위기에서 구했습니다. 또한 반윤리적인 노예제도의 종식을 주도해 민주주의 체제 확립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역사학자들은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세계 최고의 공화정,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못지않게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링컨의 인품입니다. 우선 그는 정직했습니다. ‘정직한 에이브’(Honest Abe)라는 단어는 보통명사화 되어 에이브러햄 링컨의 애칭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또한 링컨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했습니다. 승전 소식을 듣고 “주님은 우리 북군 편”이라며 기뻐하는 참모들에게 대통령은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인지 아닌지는 내 관심사가 아닙니다. 오직 내가 그분의 편에 서 있는지를 저는 늘 성찰합니다.” 아울러 링컨은 성실했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정규교육이라곤 초등학교 8개월 수학이 전부였던 그였습니다. 그러나 끊임없는 독서와 독학으로 미국 역사상 손꼽히는 성공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가 행한 연설과 직접 쓴 글들은 국민의 마음을 움직였고 역사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링컨은 신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기독교계의 스테디셀러인 전광 목사님의 책 제목 그대로 그는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대통령’이었으며,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며 인생을 개척해 간 실천하는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실로 미국 역사에 있어 ‘남북전쟁’은 국가 존립이 달린 절체절명의 위기였습니다. 합중국을 구성하는 각 지역 간의 첨예한 이해 갈등이 ‘노예제도 존폐 논쟁’으로 표출돼 내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 국난의 한복판에 에이브러햄 링컨이 있었습니다. 그는 ‘친노예주의’‘친분리주의’를 내세운 ‘남부국가연합’에 맞서 연방을 지켜내고 반인권적인 노예제도를 종식시켰습니다. ‘정의의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인품, 경륜, 믿음,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었습니다. 역사학자이며 전기작가인 굿윈(Doris Kearns Goodwin)은 전시 위기 상황에서 국가의 기틀을 지켜낸 링컨을 ‘정치적 천재’(political genius)로 묘사했습니다. 과거의 정치적 경쟁자들과 우정을 만들어내고, 적대감으로 확대될 수 있는 그들의 상처받은 감정을 미연에 치유했습니다. 부하들의 실패의 책임은 자신이 떠맡는 대신 공훈은 그들과 공유했습니다. 또 실수로부터 겸허히 배울 줄 아는 비범한 역량을 발휘했기 때문입니다. 1863년 7월 게티즈버그 대회전(大會戰)을 분기점으로 전황은 달라졌습니다. 전쟁 초기 수세에 몰렸던 북군이 이 전투를 계기로 확연한 승기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링컨의 관심은 전후 남부와 북부 간의 화해와 통합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여러 강연 등을 통해 용서와 관용, 단합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내전은 끝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이미 피해와 상처는 막대했습니다. 게티즈버그 전투에서의 사상자만 4만3000명에 달했습니다. 9개월 후 전쟁이 종결됐을 때 집계된 전사자는 무려 61만명이었습니다. 특히 남부의 경우 경제 사회 전 분야가 재기불능의 상태로 몰려 전후 재건 방안이 신속히 강구되어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깊어진 적대감의 골을 메우는 범국가적 차원의 치유(healing)가 절실히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런 환경 속에 1863년 10월 3일 링컨 대통령은 ‘추수감사절’을 ‘국가 경축일’로 선포했습니다. 본래 1621년 신대륙에 정착한 청교도 개척자들에 의해 처음 지켜졌던 이 절기는 1789년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에 의해 국경일로 제정된 바 있습니다. 그러나 3대 제퍼슨 대통령 정부 이래 “영국 왕정 시대의 관습”이라는 이유로 국경일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링컨은 참혹한 내전의 와중에서 50년 만에 이 뜻 깊은 국가적 감사의 날을 부활시켰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현명한 왕들은 나라의 위기 때마다 우상을 철폐하고 절기를 바로 지킴으로서 국가 쇄신의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링컨 또한 경건했던 선조들의 순수한 신앙 유산을 되새기고 계승하는 것에서 전후의 평화, 화합, 통일의 계기를 찾으려 했습니다. 지난 10월 29일 발생한 이태원 참사로 나라 전체가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습니다. 최악의 압사 사고로 158명의 고귀한 생명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모두가 할 말을 잃었습니다. 이 엄청난 충격과 비탄을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서로를 따뜻이 감싸는 관심과 배려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11월은 감사의 계절입니다. ‘추수감사절’의 국경일 부활을 통해 찢겨진 나라와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려 했던 링컨의 예지를 새삼 반추하게 됩니다. 감사는 신앙의 원점이며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기도입니다. 어려운 시대이기에 더욱 절절한 감사의 마음으로 이번 추수감사절을 맞게 됩니다.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 2022.11.1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새마음운동 새마을운동
  • 빈농의 아들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평소 “가난은 나의 스승이자 은인이다. 그러므로 나는 24시간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스승인 가난과 관련된 일에서 결코 떠날 수가 없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사실 5·16을 통해 정권을 잡은 박 대통령에게 빈곤 추방, 경제 부흥, 국력 신장은 가장 설득력 있는 집권 명분이며 이유였습니다. 실제로 이때의 나라 형편은 처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자원이 없는 좁은 국토, 높은 인구밀도, 6·25 한국전쟁으로 인한 폐허” 속에 절망의 수렁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1960년에 발표된 미국 유명 연구기관의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의 1인당 GNP는 87달러로 최하위였던 인도에 이어 바닥에서 두 번째였습니다. 재정 상황도 곤궁해 국가 예산 중 48%가 우리 돈이고 52%가 미국에 의존하는 실정이었습니다. 외국의 원조 없이는 기본적인 나라 살림조차 꾸려 갈 수 없는 참담한 상황이었습니다. 묵은 곡식은 떨어지고 햇보리는 여물지 않아 농촌의 식량 사정이 가장 어려운 4, 5월경에는 ‘보릿고개’ ‘춘궁기’(春窮期) ‘절량농가’(絶糧農家) 등의 단어가 신문 사회면에 늘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1960년 발행된 저명 학술지 ‘Foreign Affairs’는 당시 한국 경제를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실업자는 노동인구의 25%, 전력 산출량은 멕시코의 1/6, 수출은 200만 달러, 수입은 2억 달러, 한 마디로 한국의 경제 회생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이처럼 절대빈곤의 빈사 상태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재건의 대역사(大役事)는 시작되었습니다. 우선 그는 1962년 1월 1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착수했습니다. 5년을 단위로 한 ‘경제개발 계획’은 이후 1979년 10월 박 대통령이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칠 때까지 ‘제4차 5개년 계획’으로 이어지며 중단 없이 진행됐습니다. 경제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대통령은 무엇보다도 먼저 국민 의식 전환이 필요함을 절감했습니다. 사회 구석구석에 깊이 뿌리내려져 있는 체념과 좌절, 냉소와 허무주의를 타개하지 않고서는 경제 부흥은 불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워낙 가난한 이 나라 바탕에서 우리가 살길은 ‘하면 된다’는 굳은 신념밖에 없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박 대통령은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과의 만남을 청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여기에 대해 조 목사님께서는 저서 『4차원의 영성』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이 저를 청와대에서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조 목사님, 우리 민족을 새롭게 하고 농어촌을 변화시킬만한 새로운 아이디어가 없으십니까?’ 저는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대통령 각하,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만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갖도록 새마음 운동을 시작하십시오. 각 곳에 교회가 있으니 그 교회를 중심으로 새마음 운동을 시작하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후 각료들의 논의 과정에서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는 이유로 ‘새마음 운동’은 ‘새마을운동’으로 개칭되었습니다. 하지만 국민 각자의 마음을 먼저 바꾸어야 한다는 목사님의 주장은 그대로 수용돼 이 운동의 핵심 목표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새마을운동은 “근면 자조 협동의 국민정신을 진작시킨 성공적인 의식혁명”으로 평가받으며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모범적인 국가발전 전략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한 번 잘살아보자”라는 국민적 염원의 결집이 잠자던 민족의 역량을 깨워 한국의 기적을 일궈 낸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목사님 소천하신 바로 다음 날 <조선일보>에 실린 김태훈 논설위원 칼럼의 언급은 적확합니다. “순복음교회의 역사는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우리가 이룬 기적과도 같은 압축 성장사를 닮았다. 조용기 목사는 그 기적에 뛰어들어 뜨겁게 삶을 불태웠던 한국 현대사의 인물이었다.” 원로목사님 1주기를 맞았습니다. 1년의 시간은 살 같이 흘렀지만 목사님을 향한 추모와 흠모의 정은 갈수록 깊어지고 있습니다. 삶이 고달파 좌절할 때 목사님께서는 불꽃같은 희망의 메시지로 재기의 용기를 주셨습니다. 나라의 현실이 캄캄할 때 이사야와 같은 영감으로 ‘일어나 빛을 발할’ 민족의 미래를 담대히 선포하셨습니다. 국제사회의 변방에 위치한 한국의 목회자가 세계를 교구 삼아 헌신하시며 방황하는 수많은 지구촌 이웃들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했습니다. 해외 성회 개최국은 71개국이었고 이동 거리는 지구를 120바퀴 돈 것에 해당합니다. 원로목사님의 ‘희망의 신학’ ‘창조적 목회’가 가져온 경이로운 부활의 역사는 지금도 생생한 간증이 되어 우리 주변 곳곳에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잠자던 민족이 깨어났으며 죽었던 영혼과 육신이 살아났습니다. “조용기 목사 소천, 하늘의 별이 되다.” 목사님 소천의 뉴스 1보를 전하면서 한 기독 언론이 붙였던 제목입니다. 진정 조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큰 별이었으며 세계 선교의 밝은 빛”이었습니다. 부디 저희들 신앙생활에 반짝이는 별이 돼 영원한 사표(師表)가 되어주시기를 눈물로 간구하는 오늘입니다.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 2022.09.1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스포츠와 국력
  • 1948년 8월 15일 오랜 진통 끝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습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기반한 ‘민주공화국’의 출범이었습니다. 놀라운 일은 정부가 정식으로 출발하기도 전인 같은 해 7월 ‘제14회 런던올림픽’(7.29~8.14)에 67명의 우리 선수단이 출전했다는 사실입니다. 예비 신생국 ‘대한민국 선수단’은 59개국 4689명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태극기를 앞세워 ‘웸블리 스타디움’에 당당히 입장했습니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했던 올림픽 참가가 현실이 되기까지 선각자들이 쏟은 희생과 헌신은 실로 눈물겨웠습니다. 1947년 6월 올림픽의 선행조건인 ‘조선체육회’의 ‘IOC’(국제올림픽위원회) 가입을 위해 스톡홀름으로 떠난 전경무 선생이 항공기 충돌로 순직하는 비극적 사고도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턱없이 부족했던 출전경비는 ‘올림픽 후원권’ 등 국민공채와 재외동포들의 성금으로 충당했습니다. 정식으로 건국이 되지 않았던 형편에서 선수들은 여권 대신 종이에 타자로 기재된 미 군정청 발행의 신분증명서를 지참하고 장도에 올랐습니다. 지금은 항공편으로 12시간 걸리는 거리임에도 기차, 배, 비행기를 13차례 갈아타며 9개국 12개 도시를 거쳐 20박 21일 만에 런던에 도착했습니다. 이처럼 극도로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선수들의 투혼은 빛났습니다. 복싱 한수안, 역도의 김성집 선수가 동메달을 획득하는 등 첫 올림픽 출전에서 32위를 차지하는 의미 있는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4년 뒤인 1952년 한국은 6.25 전란 중이었습니다. 이 와중에도 ‘제15회 헬싱키올림픽’에 육상·역도·복싱 등 6개 종목, 19명의 선수단을 파견했습니다. 핀란드 대통령은 숭고한 올림픽 참가 정신을 기려 한국 선수단에 ‘최고체육문화상’을 수여했습니다. 비록 소수의 선수들이 출전했지만 역도와 복싱에서 동메달을 따내 참가 69개국 중 종합 순위 37위를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험난하게 출발했지만 이후 한국 스포츠는 국력의 신장과 궤를 같이하며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특히 1988년 9월 대망의 올림픽 주최국이 되어 서울올림픽을 훌륭히 치러냈습니다. 세계 변방에서 중심권으로 도약한 국가적 위상을 마음껏 과시한 쾌거였습니다. 더욱이 2018년 2월에는 제23회 동계올림픽이 강원도 평창에서 열렸습니다. 여름올림픽과 달리 겨울올림픽은 경제적 기술적 자연적으로 대회 운영 능력을 갖춘 나라가 극히 제한돼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 차례의 도전 끝에 세계 열두 번째 동계올림픽 주최국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결과 동 하계 올림픽, FIFA 월드컵, 세계육상선수권대회의 4대 스포츠 이벤트를 모두 개최한 세계 여섯 번째 “그랜드슬램 국가”가 됐습니다. 외형뿐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한국 스포츠는 장족의 발전을 이루어 냈습니다. 사실 우리의 초창기 올림픽 강세 종목은 복싱, 역도, 레슬링 등에 편중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영역이 확대되어 양궁, 수영, 펜싱, 체조 등은 물론 쇼트트랙, 피겨와 스피드스케이팅, 스켈레톤, 봅슬레이, 컬링 등 다양한 동계 스포츠 분야에서까지 세계 정상급 실력을 보유한 ‘스포츠 강국’이 된 것입니다. 또한 주목할 것은 선수들의 활동무대 역시 점점 넓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지난 11일 북마케도니아 스코페에서 열린 18세 이하(U-18) ‘세계여자청소년핸드볼선수권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은 돌풍을 일으키며 정상에 올랐습니다. 루마니아, 네델란드, 스웨덴, 헝가리 등 강호들을 연달아 격파하고, 결승에선 강력한 우승 후보 덴마크마저 물리쳤습니다. 8연승 무패행진을 거둔 대표팀은 비유럽 국가로는 처음으로 이 대회 정상에 오르는 감격을 맛보았습니다. ‘국제핸드볼연맹’(IHF)은 “빠른 스피드, 정교한 패스, 선수들 간의 호흡이 완벽했다”며 “다른 나라 팬들도 한국 핸드볼에 매료돼 사랑에 빠졌다”고 평했습니다. 실제로 영국 프리미어리그 득점왕 손흥민, ‘세계실내육상선수권대회’ 남자 높이뛰기 금메달리스트 우상혁을 비롯해 황선우, 차준환, 정현 등 여러 종목의 선수들이 세계 각지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습니다. 국제사회에서 스포츠가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하면 이들이야말로 국위를 선양하고 ‘스포츠 한류’를 확산하는 대표적인 민간외교관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나라의 스포츠 경쟁력은 국력과 정비례합니다. “역대 올림픽에서 국가별 성적에 가장 영향을 미친 변수는 1인당 국내 총생산(GDP)”이라는 실증적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세계 최빈국으로 출발했던 우리나라에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주신 하나님께서 비약적 국력 신장에 따른 한국 스포츠의 대반전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스포츠는 평화의 전령, 화합의 촉매 역할을 해 왔습니다. 1971년 미국과 중국 간의 ‘핑퐁외교’, 2002년 ‘한일월드컵’, 축구나 탁구의 남북한 교류 등이 실례가 될 것입니다. 현재 한반도 주변 정세는 긴장이 점증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국내적으로도 사회 세력 간의 갈등과 대립이 갈수록 첨예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절박한 시점에 한국의 스포츠가 화해와 단합의 가교 역할을 해 줄 것을 기대합니다. 그것이 새로운 위상에 부응하는 시대적 소명이라 할 것입니다.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 2022.08.1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생명과학 이야기
    시금치와 뽀빠이
  • 비타민 A와 C, 미네랄 풍부한 건강식품 너무 많이 먹으면 결석 생길 수 있어 시금치는 고려 말에 중국을 통해 국내로 들어온 귀화식물이다. 한국 사람이 즐겨 먹는 국물이 있는 잎줄기채소 중에 된장을 풀어서 끓여 먹는 아욱, 근대, 배추, 쑥갓과 함께 시금치는 식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다만 다른 채소에서 느낄 수 없는 약간 달짝지근한 맛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겨울철 불규칙하지만 삼한사온의 반복되는 날씨변화에 잎이 얼었다 풀렸다 하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생존한다. 이때는 잘 성장하지도 못할 뿐더러 잎에 누렇게 마른 것과 가장 자리가 추위에 동상을 입어 상흔이 남아 있는 시금치가 연중 가장 달고 맛있을 때이다. 특히 남쪽 지방 섬이나 해안가에서 겨울에 찬 바닷바람을 맞으며 땅바닥에 낮게 붙어 자란 노지의 섬초, 남해초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재배된 것과 비교되지 않게 맛과 향이 있다. 그 중에서도 경북 포항시 해안에서 10월 말부터 3월까지 노지에서 수확하는 포항초 시금치는 염분을 포함한 다양한 미네랄(minerals)이 많아서 으뜸상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대부분의 식물이 그렇듯이 시금치도 성장하는 기후나 환경에 따라서 다르고 출시되는 계절에 따라서 영향을 받는다. 또한 재래종과 새로운 개량종들은 모양과 크기가 제각각 다를 뿐더러 성장 속도가 다르며 그 맛과 향에서 차이가 있다. 비록 겨울 시금치가 여름 시금치보다 성장이 더디고 크기는 작지만 잎이 두텁고 짙은 초록색으로 풍미가 더 한다. 시금치 하면 미국에서 만들어진 만화영화 시리즈가 생각난다. 해군복을 입고 큰 근육의 팔뚝을 자랑하는 뽀빠이가 악당을 물리칠 때면 시금치통조림을 먹고 초인적인 힘을 냈다. 이것은 사실 시금치의 효능을 과대시킨 것이다. 영양학적으로 보면 시금치는 큰 근육과 힘을 낼 만큼의 단백질이나 열량을 갖추고 있지 않다. 다른 채소나 식품보다 철분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시금치 외에 일부 식물은 수산이라고 하는 옥살산을 포함하고 있다. 옥살산 이온과 칼슘 이온이 체내에서 결합하면 옥살산칼슘이 형성되어 신장과 요로, 그 외의 부위에서 결석이 발견될 수 있다. 일부 연구보고서에서 옥살산이 있는 시금치를 지속적으로 많이 먹는다면 개인에 따라서 결석의 핵물질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보통은 큰 문제가 되지 않으며 대부분의 옥살산칼슘은 소변으로 배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금치는 비타민 A와 C가 풍부하며 각종 미네랄이 많은 잎줄기채소로서 손색이 없는 건강식품이다. 다양한 나물무침이나 국거리가 되며 김밥과 샐러드에서 자주 사용되는 식재료임에는 틀림이 없다.
  • 2022.11.25 / 이미나 기자

    가을이 주는 숲의 선물 도토리
  • 가을의 숲은 초록색에서 형형색색 다양한 색으로 울긋불긋 저마다 새롭게 단장한다. 그 중에 일부열매 맺는 식물은 붉거나 갈색 열매를 맺고 시간차이가 있을 뿐 성숙과정을 거쳐 가을낙엽과 함께 땅에 떨어진다. 잘 익은 밤이나 도토리들은 작은 바람에도 우박이 떨어지는 소리를 내면서 낙엽사이를 뒹구는 열매들이다. 동물들이 긴 겨울을 견디고 살아남으려면 가을에 잘 먹어두어야 한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도 예외는 아니어서 가을에 피하지방과 복부지방을 최대한 두툼하게 쌓아두어야 겨우내 안심이다. 숲은 봄에 연한 싹을 내고 꽃을 피운다. 여름에는 무성한 잎의 먹거리를 동물에게 제공한다. 가을에는 앞으로 닥쳐올 겨울의 빈숲에서 살아남기 위한 준비기간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이 때 동물들이 가능한 잘 먹어두어야 비축한 영양분으로 추위와 굶주림의 기간인 겨울에 살아남을 수 있다. 자연의 숲은 이들에게 겨울 준비를 위해 풍성한 먹거리를 제공하는데 도토리가 좋은 식량이 될 수 있다. 도토리는 국내에 자생하는 참나무에서 맺히는 열매인데 그 종류마다 모양과 크기가 제각각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모양과 색은 비슷하다. 모두가 탄닌산을 많이 포함하고 있어서 쓰고 떫은 맛으로 인해 그냥 먹기 어렵다. 열매를 잘 말려서 껍질을 벗겨내고 가루로 만들어 물에 담가서 여러 번 떫은맛을 우려낸 후 도토리분말을 밀가루 풀을 쑤듯이 저어가면서 끓여 적당한 용기에 담아 식히면 된다. 이렇듯 도토리묵을 만드는 방법과 조리하는 방법은 비교적 단순하고 쉽다. 먹을 때도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양념간장을 만들어 먹는다. 그 외에 도토리묵의 조리법은 오래전부터 민간에 소개되어 있다. 각종 묵 종류에서도 도토리묵이 우리나라 국민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음식일 것이다. 여름철에 무더위로 지친 이들을 위한 시원한 묵사발은 얼음을 넣고 신선한 오이와 감칠 맛 나는 육수를 넣어 만들어 먹는다.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상큼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어디 여름뿐이겠는가. 4계절 언제 먹어도 그 독특한 맛을 즐길 수 있다. 도토리묵은 외국사람들은 먹지 않는 식품으로 우리나라 사람만 먹었다. 과거 심한 흉년이 들었을 때 먹을 것이 없던 때에 구황식품으로 먹던 식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국민건강식품으로 누구나 좋아하는 식품이 되었다. 도토리의 탄닌산과 함께 아콘성분은 인체에 유해한 중금속을 간과 신장에서 제거하는 해독효과가 있을 뿐더러 설사를 멈추게 하며 숙취와 피로회복 등 좋은 식품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도토리의 탄닌성분은 인체의 철분과 결합하여 혈색소 생성에 방해가 됨으로 빈혈을 유발한다. 또한 변비가 있는 사람은 증세를 더욱 심화시키는 부정적인 효과가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 2022.10.20 / 이미나 기자

    가장 큰 육상동물 코끼리  
  • 바다에서 가장 큰 포유류는 고래지만 육상동물 중에 가장 큰 동물은 체중이 6톤이나 되는 코끼리이다. 코끼리 무리가 지나가면 숲 속에 길이 생길정도이다. 가끔은 힘을 자랑하듯 웬만한 크기의 나무를 흔들어 쓰러뜨리기도 하고 큰 나뭇가지를 부러뜨려 잎이나 열매를 먹기도 한다. 힘으로는 당해 낼 수 없는 괴력의 소유자로서 금수(禽獸)의 왕인 사자 같은 맹수도 감히 주변을 어슬렁거리지 못할 만큼 거대한 초식동물이다. 다 큰 성체는 하루에 약 300~400㎏의 풀을 먹는 초원의 대식가이다. 한편 물가에서 자주 발견되는데 코로 빨아드린 흙탕물을 온몸에 뿌려 각종 해충을 퇴치하는 목욕도 하고 한 번에 약 100ℓ의 물을 마신다. 임신기간이 약 21~22개월로 성체로 성장하는 기간은 10년이며 수명은 60~70년을 산다. 현재 아프리카코끼리와 아시아코끼리 두 종류가 있다. 아프리카대륙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는 야생 코끼리는 몸집이 크고 거칠며 사나운데 비하여 아시아코끼리는 몸집이 작고 온순하다. 가축으로 길들여 운송수단으로 사용하는 인도코끼리를 볼 수 있다. 신체 중에 코가 유난히 길어서 코끼리라고 부르는데 강한 근육과 함께 민첩해서 마치 손과 같이 세밀하게 움직이며 작은 땅콩이나 비스킷도 받아서 먹을 수 있다. 긴 코는 후각세포가 많아서 개보다 2배나 더 잘 맡을 수 있다. 그 외의 특징은 치아 중에 윗니로 2개의 송곳니가 길게 자란 엄니가 있다. 마치 뿔처럼 보이는 상아(Ivory)가 긴 코와 더불어 코끼리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아프리카의 중서부 해안에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코트디부아르(Cote d‘Ivoire)국가가 있다. ‘상아해안’이라는 뜻으로 당시 많은 상아가 남획되어 유럽으로 팔려나가던 시대의 이름이다. 그 배경에는 상아를 얻기 위해 대량 코끼리밀렵이 성황을 이루던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호하고 개체를 보존하는 청지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 2022.09.21 / 이미나 기자

    성경 Think! 인생 Thank!
    거룩한 독서 ‘렉시오 디비나’
  • 쉬운 성경들 통해 어려운 단어 쉽게 이해해
    단순한 읽기 뛰어 넘어 하나님의 목적에 이르게 해 지난 8월 한 웹툰 작가의 사인회 예약 과정에서 시스템 오류가 발생했다. 주최 측은 ‘심심한’ 사과의 뜻을 밝혔는데, “나는 하나도 안 심심한데 무슨 소리냐”라는 트윗이 쏟아졌다. ‘매우 깊고 간절하다’라는 의미의 ‘심심하다’ 단어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뿐이 아니다. 교사가 한 학생에게 ‘좀 고지식한 면이 있는 것 같다’라고 면박을 줬는데 오히려 학생은 기뻐했다. ‘융통성이 없고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을 지칭하는 고지식(固知識)을 ‘지식이 높다’(高知識)라는 뜻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짧은 채팅 위주의 대화가 습관화되면서 어휘력과 표현력 즉 문장을 이해하는 ‘문해력’의 저하가 심각해졌다. 여기에 무분별한 신조어 사용으로 기본 단어에 대한 무지를 가져왔다.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애써 찾아보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경읽기는 어떨까? 옛날말로 쓰여진 고리타분한 책이며 알아들을 수 없는 암호의 세계와도 같다. 하나님의 러브레터인 성경을 어떻게 하면 단어 해석에서 넘어지지 않고 달콤하게 읽을 수 있을까? 거룩한 독서 ‘렉시오 디비나’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는 독서 또는 읽기를 뜻하는 ‘렉시오’(Lectio)와 거룩, 신성을 의미하는 ‘디비나’(divina)의 합성어이다. 거룩한 독서를 의미하는 말로, 성경 본문을 눈으로 읽고 마음에 곱씹으면서 좀 더 주님을 깊게 만날 수 있다. 성경을 읽을 때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성경 속 단어가 생경하기 때문이다. 어려운 단어를 일상적인 용어로 풀어낸 성경을 읽으면 좀 더 쉽게 읽을 수 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이나 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등을 추천한다. 요즘은 핸드폰에서 다양한 종류의 성경 앱을 내려 받아 읽고 보고 들을 수 있다. 갓피플성경어플, 홀리넷 등에 들어가면 개역개정과 비교해서 읽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시편 8편 4절에 인자(人子)를 사람의 아들, 우리로 풀어쓴 것을 볼 수 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개역개정)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새번역) “사람이 무엇인데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인데 주께서 그를 돌보십니까?”(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걱정하시고 우리 인생길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살뜰히 살피십니까?”(메시지 성경) 거룩한 독서의 순서 현재 읽고 있는 성경 본문이거나 『감사큐티 365』를 본문으로 시작하면 된다. 본문의 분량 제한은 없지만 최소 4절에서 최대 10절 사이로 읽기를 권장한다. 추천하는 거룩한 독서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정독 묵상과 깨달음을 위해 성령을 초대하는 짧은 기도를 여러 차례 드린다. “성령님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입니다” 그 뒤에 성경 본문에 관심을 집중하여 온 마음으로 꼼꼼하게 편견 없이 정확하게 읽어 나간다. 2) 묵상 본문에서 자신에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단어나 구절이 무엇인지 주목하면서 자신의 삶의 어떠한 부분과 연결되는지를 생각하고 정리한다. 이 단계에서는 주님이 참으로 자신에게 어떠한 존재인가를 묻고 계시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갈망하게 된다. 3) 기도 말씀을 통해 우리를 만지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는 시간을 갖는다. 자신과 이웃을 위해 기도하게 되며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게 된다. 이 시간을 통해 더더욱 하나님과 친밀한 내적 대화를 나누게 된다. 4) 관조 특별히 무슨 생각이나 궁리를 하기보다는 그냥 말씀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된다. 이 때 하나님의 생각에 자신의 마음을 얻는 시간을 가지게 되면서 하나님의 시선으로 사람과 모든 사건을 보게 된다. 어디에서건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 “기독교인이니 성경을 일독해야지 말씀 안에서 위로를 받아야지”라고 읽기 시작한 성경읽기가 어려운 단어로 성경책을 덮기도 하지만 나를 넘어 하나님의 목적에 이르게 한다. 단순히 정보를 얻는 단계에 머물지 않고 변화로 나아가게 한다. 칼 바르트는 <플라톤의 동굴> 비유를 통해 성경 읽기를 “어둡고 통제된 창고에서 나와, 확 트이고 햇살이 비치는 바깥세상으로 들어서는 것”이라 설명한다. 유진 피터슨은 “우리가 성경을 펼칠 때… 우리는 전적으로 낯선 하나님의 세상, 창조와 구원의 세상이 끝도 없이 우리 위로 그리고 우리 너머로 펼쳐져 있는 그러한 세상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성경읽기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삶의 자리로 나아가게 한다. 성 어거스틴은 그의 어머니 모니카 여사가 눈물을 흘리면서 성경을 보다가 펴놓은 로마서 13장을 읽다가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어 성자가 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갈라디아서를 읽다 은혜를 받고 중세의 죽은 교회를 살려내는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말씀을 읽고 자신을 넘어선 구름 같은 증인의 대열에(히 12:1) 이번엔 당신이 설 차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Think! Thank! Q1. 성경을 읽을 때 단어의 뜻이 어려워 무슨 말인지 몰라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나요? Q2.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단순히 문자를 아는 것에서 뛰어넘어 당신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Q3. 렉시오 디비나의 순서를 적어보세요.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2.10.0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쉼’ 모든 것에서의 ‘그침’
  • 하나님이 시간의 주인 되심 기억하고 ‘쉼’을 통해 소명 발견하고 주어진 것들에 감사 해야
    ‘번아웃’된 그대 “월급만 빼고 다 올랐습니다!” 수입은 그대로인데 물가 금리 환율이 모두 상승하는 ‘3고(高)’에 접어들면서 월급만으로 생활이 되지 않는다고 아우성이다. 코인, 주식 등이 폭락하면서 ‘빚투족’(빚내서 투자하는 사람)들의 곡소리 또한 여기저기서 들린다. 해결되지 않는 빚의 무게로 자식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동반자살을 하는 등 가슴 아픈 뉴스가 연이어 나오고 있다. 휴가철을 맞이했지만 삶의 불안과 고민으로 편안한 쉼을 가지기가 쉽지 않다. 행여 시간이 주어진다 해도 어떻게 쉬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충전 없이 달리기만 하면 엔진 과열이 일어나 억지로 멈춰지게 된다. 우리도 스스로를 살펴보고 쉬어주지 않으면 탈진하게 되는데 이를 번아웃(burnout)이라 한다. 이 단어에는 ‘에너지를 소진하다, 다 타다, 가열되어 고장이 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다 소진하여 번아웃되지 않게, 우리에게 진정한 ‘쉼’의 시간을 갖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쉼에 대한 오해 막상 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도 어떻게 쉬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무조건 알차게 보내야 한다는 강박에 스케줄을 빡빡하게 짠다. 열심히 여행을 다니거나, 맛집을 찾아다니고, 체력을 보충한다며 하루종일 잠을 자기도 한다. 당장은 쉬는 것 같지만 그것도 잠시, 피로가 더 쌓일 뿐이다. 휴식(休息)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자어 휴(休)를 보면 사람(人)이 나무(木)에 기대어 있는 모습이다. 일을 멈추고 그늘 드리운 나무에 기대어 쉬는 것을 말한다. 『휴식』의 저자 울리히 슈나벨은 휴식을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가장 깊숙한 내면과 만나는 시간”이라고 정의한다. 카피라이터 정철 역시 “충전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사람 많고 복잡하고 많이 듣고 눈에 무언가를 많이 담는 곳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성경에 나오는 쉼 지쳐있는 당신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자신의 짐이 덜어지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여기서 ‘수고하고’는 스스로 많은 일들을 계속하여 지친 상태를 말한다. ‘무거운 짐 진 자’라는 표현은 다른 사람에 의해 무거운 짐이 계속 지워진 채 살아가서 지쳐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과거에 ‘왜 그랬을까?’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하루하루가 고행이다. 이 짐을 지고 간다는 것은 스스로 만사를 해결할 수 있으며, 미래 또한 자신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어리석음은 끊임없이 흐르는 물살을 맨손으로 붙잡으려는 것과 같다. 먹고살기 위해 일하고, 일하기 위해 먹었던 당신이 ‘쉼’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모든 것을 통제하고 삶의 주인이 되려는 노력을 의도적으로 그치고, 하나님이 시간의 주인 되심을 마음과 영혼에 다시 새기는 것이 필요하다. 소명 발견하기 한쪽 눈은 보이지 않고, 다리에는 장애가 있어 걷기 힘들고 45년간 당뇨로 투병한 한 여인이 있었다. 극심한 저혈압에 시달렸고 신장 이식 수술을 받은 뒤엔 정해진 시간에 맞춰 하루 열한 번 약을 먹어야 했다. 평생 질병과 병마에 시달린 삶을 살았던 여인은 바로 미국의 영성 신학자 마르바 던이다. 일상의 안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녀가 평생 평안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추구하며, 부활의 약속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안식에 대해 4단계로 설명한다. 첫 번째 자기 안에 있는 염려, 근심, 불안을 ‘그치는 것’으로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욕심을 그치라는 뜻이다. 두 번째 ‘쉬는 것’이다. 정신적, 육체적, 영적, 사회적으로 휴식하라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말하고 아는 바이다. 이걸 뛰어넘어 세 번째, 진정한 안식은 ‘받아들임’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는 것을 재인식하고, 그것을 소명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네 번째, ‘축제와 향연의 단계’로 서로를 축복하고 격려하며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라는 것이다. 로뎀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에 앉아서 죽기를 간청하며 기도한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쉼’을 주셨다(왕상 19:1~8). 그 가운데 엘리야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쉼의 시간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 되었다. 그 길로 엘리야는 40일 밤낮으로 달려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러 새로운 사명을 받게 됐다(왕상 19:9~21). 지쳐있던 당신도 ‘쉼’을 통해 소명을 발견하고 힘을 얻게 되면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세우는 사람으로 나아갈 수 있다. Think! Thank! Q1. 지금 무엇으로 지쳐있나요? Q2. 나 혼자 오롯이 쉴 수 있는 장소가 있나요? 그곳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어떠한 소명을 발견하였나요? Q3. ○○안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말씀을 외워 보세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2.08.1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기독교 교육, 단절 아닌 평생에 걸쳐 이루어져야
  •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새로운 인생 살게 해 영혼을 사랑하고 수고하는 일 우선돼야 전남 곡성에 사는 할머니들은 글을 알지 못했다. 작은 도서관에서 한글을 배운 할머니들은 시를 쓰고 책을 냈다. 배움 앞에 선 이들은 연필과 공책 대신 핸드폰을 켜고 사진을 찍고 펜을 꺼내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고 이름을 남긴다. 기기를 다루는 할머니들의 얼굴에는 신기함과 즐거움이 가득했다. 전화만 걸 줄 알았던 할머니들의 놀라운 반전이다(S전자 휴대폰 광고 중에서). 계속적으로 학습해야 힘들게 준비해서 취업에 성공하면 “이 직장에 뼈를 묻어야지!”라고 외치던 다짐은 이제 사라져간다. 연수에 따라 진급하고 정년이 보장됐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에는 직장인 10명 중 9명이 첫 직장을 떠났다는 보고가 있을(동아일보 2020년 1월 9일자) 정도로 더 이상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없다. 여기에 인공지능(AI) 도입이 확산됨에 따라 일자리가 늘어날지 줄어들지에 대한 불안으로 기업도 개인도 재교육에 열심이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지식에도 유통 기한이 있다며 유통 기한이 지나기 전에 새로운 정보를 습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옵솔리지 Obsoledge). 퇴직 후의 삶은 어떠한가? 일자리로부터의 빠른 퇴직으로 5060 세대의 인생 이모작 설계와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평생교육 기관 등을 통해 배움이 확산되고 있다. 미래사회가 급격하게 변하기 때문에 빠르게 대처하지 않으면 살아낼 수 없는 상황이다. 누구나 원하든 원치 않든 계속적으로 학습해야 하는 평생학습사회에 살고 있다. 새로운 시대 이미 와 코로나 사태 이후 반강제적으로 재택근무에 돌입했던 기업들이 ‘위드 코로나’ 시대를 맞아 새로운 근무 형태를 마련하고 있다. 현대모비스는 재택근무제를 공식 제도화했고, LG전자와 SK텔레콤은 직원들이 근무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일하는 ‘원격근무’를 시행 중이다. 때가 되면 진급하던 시절에서 능력제로 서열에서 밀려날 수 있고 내 연봉과 상여금 등을 스스로 정하는 제도가 도입되는 등 과거에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교육 현장에서도 온라인으로 전환되면서 디지털 바람이 불고 있다. 교육에 IT 기술이 접목되면서 증강현실(AR), 가상현실(VR) 등 새로운 학습 형태를 제공하고 있다. 학교 울타리를 넘어서 점점 더 개방적인 체재로 변모하고 있다. 손가락으로 클릭만 하면 언제 어디서나 무크(온라인 공개 수업), 코세라(온라인 공개 수업 플랫폼) 등 무료로 고급 강의를 들을 수 있다. 학교라는 공간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시대가 이미 와 있다. ‘기독교 교육 이력’ 관리 필요 기독교 교육하면 주일학교 교육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어린 시절 예배 후 공과를 하고, 중·고등학교 때는 공부를 한답시고 예배만 왔다 갔다 하다 졸업했다. 이후 대학부에 들어가고 취업을 하거나 재수 삼수를 하면 세상에 휩싸여 교회에서 점점 멀어졌다. 직분을 받으려고 수강했던 성경학교, 성경대학이 교회에서 받았던 교육의 전부다. 기독교 교육이 단절되지 않고 세상에서 말하는 평생교육 ‘요람에서부터 무덤까지’의 배움이 계속 실시되어야 한다. 교회는 다니는데 지식이 부재하니 세상에서 살아낼 힘이 부족하다. 기독교 교육은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 것이다. 국가에서는 <평생학습계좌제>라는 것을 만들어 개인마다 ‘학습이력통합관리’를 해주고 있다. 이처럼 교회도 성도들의 ‘기독교 교육 이력’ 관리를 해줘야 한다. 성도들의 신앙 발달 단계에 맞춰 대면과 온라인 등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교육받을 수 있도록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교육이 실시되어야 한다. 불쌍히 여기는 것이 우선돼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때에 맞게 기독교 교육을 시켜줘야 한다. 이보다 앞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사랑이다. 작은 도서관 관장이 노인들을 사랑하고 필요를 읽고 글을 가르쳤던 것처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막 6:34).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노년기의 어르신들을 생각해보자. 몸이 노화돼 눈이 안 보이고 귀도 잘 들리지 않는다. 걷는 것도 불편하고 하루 종일 누구 하나 말 걸어주는 사람이 없다. 홀로 살고 있는 어르신들이 어떻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줌을 켤 수는 있는지, 와이파이는 터지는지 관심을 가지는 것,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바울이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고 말한 것처럼 영혼을 사랑하고 수고하는 일이 우선되면 그들의 필요가 보인다. Think! Thank! Q1. 교회에서 받은 교육을 나열해 보세요. Q2. 기독교 교육을 성도들에게 시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엡 4:13)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2.04.10 / 김선희 교수 기자

    고전(古典)에서 길을 찾다
    순전한 기독교 / C.S 루이스
  • 벽 앞에 서있는 청년들이 읽으면 좋은 책
    팔로잉하는 청년 중에 시도 때도 없이 달리는 형제가 있다. 운동선수도 아닌 그는 바쁜 직장 생활 중에도 곶감 빼먹듯이 시간을 내어 달린다. 급기야는 지난달 개최됐던 베를린마라톤에서 풀코스를 완주했다. 그런 그가 절대 빼먹지 않는 것이 온라인예배다. ‘플로팅 크리스천’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 자유로운 신앙 패턴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하는 신조어다. 온라인예배를 드리며 사회변화에 따라 계속해서 움직이고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신앙생활을 추구한다. 그들에게는 신앙적 돌봄이 더욱 필요하다. 교회생활은 마라톤과 같은 경주다. 푯대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 그런 우리가 팬데믹이라는 벽 앞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험을 했다. C.S.루이스 교수가 방송을 통해 강연했던 당시도 그러했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사건은 많은 이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루이스는 그 혼란함을 통해 흔들리는 기존 기독교인들을 보았을 것이고, 더욱더 교회로부터 멀어지는 불신자들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일터에서 때로는 술집에서 영국 국민들은 루이스의 강연을 청취했다. “제 얘기가 별로 도움이 안된다면 그냥 무시해버리십시오”라고 말하는 저자의 당당함이 강연을 묶어 펴낸 책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 곳곳에서 나타난다. 이 책은 ‘옳고 그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옳고 그름을 따지며 살아간다. 지구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자연법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스스로는 지키지 않는다. 인간은 도덕율이라는 규정을 만들어냈다. 문제는 그 규정의 잣대가 상대방에 대한 것과 스스로에 대한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옳고 그름’의 문제는 논쟁의 의미가 아닌, 하나님에 대해 매력적인 설명을 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 되어야 한다. 이 책은 기독교의 핵심을 논리적인 변증법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짜장면은 맛없다. 짬뽕은 먹을 만하다. 그래서 짬뽕을 먹는 게 낫다. 쉬운 변증법의 예다. 옥스퍼드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를 역임했던 그 만의 화법으로 기독교를 맛깔나게 소개한다. 교회를 떠난 청년들은 믿음을 잃어서가 아니다. 청년들에게 신학적 논쟁이나 교회사적 토론은 큰 의미가 없다. 복음의 핵심이 들려져야 한다. 그들의 언어로 들려져야 하며 토론돼야 한다. 변증법으로 복음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변증법이든 아니든 최상이 아니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자세다. ‘안읽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읽는 사람은 없다’라는 말로 이 책을 자신 있게 추천한다. 특별히 교회 안팎에서 영끌로 지쳐있는 청년들에게. 임 훈(여의도순복음군산교회 담임)
  • 2022.10.06 / 이미나 기자

    영적 감정을 분별하라 / 조나단 에드워즈
  • 영적 감정의 핵심은 ‘사랑’
    일론머스크의 하이퍼루프는 비행기보다 빠른 이동수단이다. 한국에서는 하이퍼튜브를 개발 중인데 서울에서 부산까지 16분 걸린다. 더 빠른 것이 흔들리는 사람 마음이다. 어느 책에선가 ‘감정 강아지는 우리에 잠시 가둬라. 지금은 이성 고양이가 움직여야 할 때다’라는 구절을 보았다. 다산 정약용이 마주했던 마지막 삶의 주제도 ‘마음’이었다. 기독교 사상가들은 한결같이 마음 즉, ‘영적 감정’을 이야기한다. 오늘 소개하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영적 감정을 분별하라’는 책이 그렇다. 신학자이면서 사회학자, 목회자이면서 철학자, 부흥사이면서 심리학자였던 그의 책이기에 탁월하다. 로이드 존스는 “청교도들을 알프스 산에 비유하고, 루터와 칼빈을 히말라야 산에 비유한다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 산에 비유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살아가면서 뚜렷한 이유 없이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런 감정을 C.S.루이스는 세상적 가치로는 채울 수 없는 ‘실존적 빈 공간’으로 지칭했고, 존 오웬은 그 자리를 성령의 사역이 시작되는 곳으로 인식했다. 에드워즈 또한 깊은 거룩을 향한 갈망이 존재하는 공간으로 설명한다. 에드워즈는 우리에게 두 가지 영적 감정을 권면한다. ‘사랑’과 ‘기쁨’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봉사와 섬김, 금방 식어버리는 찬양의 감정, 겉모양만 그리스도인’ 등 12가지의 거짓된 영적 감정을 대신한다. 사랑은 많은 감정들 중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영적 감정들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사랑과 반대되는 감정인 증오도 사랑으로부터 싹튼다고 한다. 죄에 대한 증오, 하나님을 분노케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감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기쁨, 하나님의 곁을 떠났을 때의 애통, 하나님을 바라는 소망,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자 하는 열심 등도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부터 우러나온다. 영적 사랑과 영적 기쁨은 한 몸이다. 9월부터 eSIM 시행으로 한 휴대폰에 두 개의 번호를 쓸 수 있듯이 말이다. 영적 기쁨이 가져다주는 만족감과 끊임없는 추구가 일치할 수 있을까? 영적 기쁨은 인간의 본성과 영혼의 요구에 완벽하게 반응한다. 또한 기대를 갖고 살게 한다. 영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만족의 한도 내에서 우리를 만족시키는 것이 영적 기쁨이다. 저자는 사랑과 기쁨의 영적 감정들이 믿음의 실천을 통해 열매 맺는다고 역설한다. 무엇보다도 나타나는 열매를 통해 분별하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생애 동안 두 번의 큰 부흥을 경험했던 에드워즈였기에 ‘영적 감정’에 대한 그의 관찰력은 프로파일러 이상 디테일하다.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고전이다. 임 훈(여의도순복음군산교회 담임)
  • 2022.09.07 / 이미나 기자

    기도의 능력 / E.M.바운즈
  •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거지’다
    시간 없어서 기도 못하는 분들을 위한 책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거지’다. 이 책의 저자 E.M.바운즈가 우리에게 주는 경고다. 성도의 능력도 아름다움도 향기도 없는 거지와 같다고 한다. 궁금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읽는이의 가슴을 후벼파는 그 힘을 알고 싶었다. 한 단원을 넘기기도 전에 아무리 고고한 척 해보려 해도 모세혈관까지 밝히 드러난 듯 부끄러워진다. E.M.바운즈의 삶은 무릎으로 기도한 인생이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3시간씩 기도했던 그의 영성이 이 책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무릎의 영성으로 쓴 책이기에 검색엔진으로 지식을 탐닉하는 얄팍한 우리에겐 따라잡지 못할 레벨이다. 천재성, 두뇌, 똑똑함, 힘, 재능이 있다고 믿었던 우리의 모습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거침없이 무너져 내린다. 저자의 주장은 한결같다. 복음은 마음을 통해 흐르며, 마음이 세상을 구한다는 것이다. 머리로도 할 수 없고, 그 어떠한 경영방식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오직 기도만이 할 수 있다고 강력히 말한다. 철학자 파스칼도 “하나님이 기도를 만드신 목적은 피조물에게 ‘어떤 일을 유발하는 존재’로서의 특권을 부여하시기 위해서다”라고 뒷받침한다. 이 책의 저자는 짧게 드리는 기도와 아예 기도하지 않는 삶의 모습 중에 더 나쁜 행태는 바로 짧게 기도하는 삶이라고 말한다. 짧게 드리는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나는 짧게라도 기도했으니까 나의 신자된 의무는 다한 것’이라는 책임회피용으로 쓰이는 잘못된 습관이다. E.M.바운즈는 기도의 절대적인 양을 권면한다. 꽉찬 스케줄대로 살아가는 우리에겐 긴 기도 시간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골방에서 하나님과 함께 머무를 수 있는 능력은 우리가 골방 밖에서 하나님과 같이 할 수 있는 능력을 결정한다고 한다. 반드시 하루 한 시간 기도해야 하는 이유다. 저자는 새벽시간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마틴 루터도 너무 바빠서 기도하기 위해 한 시간 더 일찍 일어났다고 한다. 성경 번역자 필립 브룩스는 “기도 없이 사는 것은 가장 저주스러운 일이며, 말할 수 없이 어리석은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설교자 스펄젼은 “기도만이 부흥과 성장의 비결이다”라고 했다. 기도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다른 다양한 방법으로 목표를 이루려 했다. 출발부터가 잘못됐다. 다시 기도로 시작하자. ‘당신의 최고의 시간과 능력을 기도에 쏟으라’는 100년 전 저자의 외침이 오늘을 무릎 꿇게 한다. 궁금증에 대한 답을 ‘기도의 절대적인 양’에서 찾았다. 기도해야겠다고 매번 결심하나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한 분들에게 이 책을 강력 추천한다. 임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군산교회 담임)
  • 2022.08.11 / 이미나 기자

    하나님과의 동행
    [강신호 목사의 하나님과의 동행]믿음은 무조건 순종을 요구하나요?
  • 우리는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을 통해서 주님께서 부르시면 무조건 그물을 던져두고 생업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도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내가 말하는 것이니까 무조건 따라라”고 하셨을까요? 요한복음에서는 갈릴리호수에서 제자들을 만나신 사건 이전의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35~42절 말씀입니다.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침례 요한이 요단강에 침례 받으러 온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 중 두 명에게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말했습니다. 두 명 중에 한 명은 본문을 기록한 요한이며, 다른 한 명은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입니다. 그들은 먼저 예수님과 반나절 교제한 후에 안드레가 그의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리고 나와서 주님을 소개했고,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이름을 ‘게바’로 고쳐 주십니다. 이후에 그들은 다시 생업을 하러 갈릴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현장인 그들의 생업의 자리로 찾아가셨고, 이미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서 예수님을 알고 있었던 베드로, 요한, 안드레, 야고보는 자신의 배와 그물을 던져두고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믿음은 순종을 요구하지만, 맹목적인 순종이 아닌 인격적인 순종입니다. 이 인격적인 순종은 신뢰를 바탕으로 합니다. 주님은 우리들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우리들이 주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 인격적인 신뢰의 관계 속에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강신호 목사(청장년국장)
  • 2022.03.13 / 강신호 목사 기자

    [강신호 목사의 하나님과의 동행] 스펙을 쌓기 위해 분주한 청년들을 위해
  • 하나님과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어 보자 유럽의 3대 허무 관광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가 벨기에 브뤼셀의 [오줌싸개 동상], 두 번째가 덴마크 코펜하겐의 [인어공주 동상], 세 번째가 독일 라인강의 [로렐라이 언덕]입니다. 유명하다고 해서 가 보면 휑~ 하고 돌덩이 하나 덩그러니 서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이 곳이 유명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그 돌덩어리에 이야기가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벨기에 브뤼셀의 오줌싸개 동상은 14세기 프라방드 제후의 왕자가 오줌을 누어 적군을 모욕했다는 이야기 때문에 유명해졌고, 덴마크 코펜하겐 인어공주 동상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의 이야기가 있으며, 독일 라인강 로렐라이 언덕은 라인강을 항해하는 뱃사람들이 요정의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도취되어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배가 물결에 휩쓸려서 암초에 부딪쳐 난파한다는 이야기가 있는 곳입니다. 만약 그저 동상만 세워져 있고 이런 이야기가 없었다면 사람들은 굳이 그곳에 가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회생활을 준비하는 청년들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기 보다는 스펙 쌓기에 전념하는 것 같습니다. 워렌 버핏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버드 대학 졸업장은 입사 후 3일까지만 효력이 있다.” 즉, 스펙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스펙은 너도나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좋은 스펙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 결국 나는 밀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스펙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스토리입니다. 왜냐하면 스토리는 모두 똑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펙은 ‘최초 최대’라는 말을 좋아하고, 스토리는 ‘유일한 독특한 특별한’ 같은 말을 좋아합니다. 스펙은 숫자로 표현되고, 스토리는 가슴으로 표현됩니다. 스펙은 자랑하려 하고 스토리는 사랑하려 합니다. 스펙은 ‘올라온 높이’가 보이지만, 스토리에는 ‘헤쳐 나온 깊이’가 보입니다. 스펙에는 나의 성공만이 나열되지만 스토리에는 나의 약점이 오히려 경쟁력이 됩니다. 스펙은 사람을 상품처럼 순위를 매기고 스토리는 사람을 작품처럼 존중합니다. 그리하여 스펙은 자신만 1등이 되려 하고 스토리는 모두를 1등으로 만듭니다. 하나님과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었던 아브라함, 요셉, 다윗, 다니엘 등 수많은 성경인물들은 자신의 고난과 시련과 역경을 하나님과 만난 이야기로 승화시킨 사람들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청년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야기로 이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할렐루야!
  • 2021.12.12 / 강신호 목사 기자

    새책소개
    위대한 복음전도자 조용기 목사 평전 『희망의 목회자』발간
  • 편저자 이영훈 목사 “신앙 유산 계승 발전 되길”
    지난해 9월 14일 하나님 품에 안긴 영산 조용기 목사의 생애와 신학을 담은 평전 『희망의 목회자』(서울말씀사)가 발간됐다. 편저자는 이영훈 목사로 조용기 목사가 평생 몸담고 사역했던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국제신학연구원과 정확한 사료와 증언들을 기반으로 조 목사의 삶과 신학을 반추하여 출간한 평전이기에 의미가 크다. 평전을 펴낸 이영훈 목사는 “영적인 아버지이자 스승이셨으며 사역을 위한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셨던 조용기 목사님의 빈자리는 남은 평생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것”이라며 “목사님을 따라 신앙의 길을 걷던 사람들은 그 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삶의 희망을 얻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목사님의 일생과 남기신 신학의 유산이 잘 계승·발전되어 새로운 세대 가운데에서도 오순절 성령 충만의 영성이 거대한 불꽃처럼 일어나길 기도한다”고 소원했다. 평전은 1부 ‘조용기 목사의 생애와 목회’ 2부 ‘조용기 목사의 신학으로 구성돼 있으며 500여 페이지 분량이다. 폐병으로 만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주의 종이 되고 가난한 곳에서 시작된 천막교회 사역, 이후 서대문 그리고 여의도로 교회가 이전하면서 폭발적 교회 성장을 이루고 세계복음화와 사회구원을 향한 헌신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 삼중축복과 오중복음, 4차원의 영성을 통해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 피어난 희망의 복음, 십자가의 은혜 속에 탄생한 순복음 신앙이 성도들의 삶에 가져다준 변화를 그리고 있다. 평전이 발간되자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는 “조 목사님은 세계적인 부흥사, 탁월한 설교가, 기도와 성령의 사람이요 참 목회자, 목회자들의 스승, 해외 교계 지도자들이 가장 만나보고 싶어 하는 분이셨다”고 회상했다. 독일 튀빙겐대학교 위르겐 몰트만 명예교수는 “목사님은 위대한 복음 증거자이자 뛰어난 신학자이면서 동시에 기도의 사람이셨다”라고 추모사를 전했다. 조용기 목사는 이제 우리 곁에 없지만 책을 읽다보면 생생했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 하다. “믿음은 희망에서, 희망은 심음에서, 심음은 입술의 고백에서 나옵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하면 됩니다. 해 봅시다.”
  • 2022.10.21 / 오정선 기자

    [신간 안내]영산의 기슭에서
  • "나의 스승, 나의 영적 아버지 영산을 기억하다" 한국 교회의 큰 산 조용기 목사에 대한 추억 담겨 제자들, 영적 거장이 남긴 신앙 유산 공유하며 은혜 고백 "스승님 너무나도 그립습니다. 사랑합니다." 신간 『영산의 기슭에서』 는 조용기 목사의 신앙과 신학을 계승하는 제자들의 모임인 영산목회자선교회(영목회)의 회원들이 저마다의 가슴에 꽉찬 조용기 목사에 대한 추억담을 모은 책이다. 삶과 목회로 보여 주신 스승의 가르침을 체험한 제자들은 조용기 목사를 어떻게 만나, 무엇을 배웠으며, 어떻게 사역해 왔는지 각자의 추억과 마음속 이야기를 공개하며 스승을 향한 절절한 그리움과 눈물 맺힌 감사의 고백들을 전한다. 이영훈 목사는 책에서 조용기 목사에게 배운 신앙과 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조용기 목사님의 제자로서 좋으신 하나님 신앙을 통해 은혜를 체험하고 항상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메시지를 선포해 왔습니다. 절대긍정의 신앙은 좋으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산물입니다. 좋으신 하나님 신앙은 성경 전체를 통해 보여 주고 있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신앙을 깊이 반영하고 있습니다. 절대긍정의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믿는 것으로,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다'라는 신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어 이 목사는 "로마서 8장 28절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절대긍정의 신앙을 가져야 한다"며 "절대긍정의 신앙은 고난조차도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절대긍정의 신앙으로 무장할 때 우리는 날마다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라고 조용기 목사의 영적 유산을 소개했다. 이 책을 읽으면 제자들의 시선을 통해 63년 동안 세계 곳곳을 누비며 복음을 전한 조용기 목사의 선교 여정들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따뜻한 심장을 갖고 제자들과 성도들을 뜨겁게 사랑한 조용기 목사를 그리워하는 애틋한 이야기가 우리의 눈시울을 적신다. 영목회장인 전호윤 목사는 책을 헌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글을 읽는 이마다 마음이 향기로울 것이며 은혜의 감동을 받게 될 것입니다. 누구보다 영산이신 스승 조용기 목사님께서 즐거워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사님도 알지 못하시는 목사님을 향한 제자들의 추억이 옥합처럼 깨어져 향유처럼 향기를 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2022.04.17 / 복순희 기자

    사랑의 기적
  • 코로나19로 지친 신앙인 위한 힐링 서적 말씀과 기도문 통해 매일묵상도 가능해 크리스천들의 신앙과 삶의 회복을 돕는 이영훈 담임목사의 저서 『사랑의 기적』이 출간됐다. 이 책은 코로나19를 비롯해 환경오염, 각종 사회적 문제로 인한 현실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고 나아가 사랑을 통한 문제 해결 방법까지 제시한다. 이영훈 목사는 머리말에서 크리스천들이 어려운 시기일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하는 일에 힘써야 함을 강조한다. 이영훈 목사는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로 불리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사랑을 세상에 전해야하는 사명이 있기 때문”이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한 우리가 그 사랑을 세상에 실천하면 지금보다 더 따뜻한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랑의 기적』은 총 3개의 파트 ‘사랑의 본질’, ‘사랑의 능력’, ‘사랑의 실천’으로 구성되어 있다. 파트별로 7개 총 21개 장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해당 주제와 연관된 ‘암송말씀’과 ‘기도문’이 게재돼 있어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21일 동안 묵상할 수 있도록 돕는다. 아울러 이 책은 독자들에게 사랑의 본질을 알리고 사랑의 능력을 소개한다. 또한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어 막막한 성도들에게 예화를 들어 사랑의 대상과 구체적인 사랑 실천 방법도 알려주고 있다.
  • 2021.07.1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문화계 소식
    스마트폰 생활백서-저절로 성경일독
  • “스마트폰 켤 때마다 성경구절이 보여요!” 잠금화면 활용한 성경 묵상 앱 말씀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에게 매순간 단비와 같은 성경 말씀을 전달해 주는 앱이 있다. 바로 ‘저절로 성경일독’이다. 저절로 성경일독 앱은 스마트폰 화면을 켤 때마다 성경구절이 나타난다. 화면 중앙에는 성경 구절이, 하단에는 다음 구절로 넘어가는 화살표 기호와 북마크, 공유하기, 잠금해제 버튼이 있다. 화면에 나오는 성경 구절은 화면이 꺼졌다 다시 켜지면 다음 절로 넘어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부담 없이 성경을 일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앱에서는 말씀 공유 기능이 가장 눈에 띈다. 묵상하고 있는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면 그 자리에서 말씀 카드를 만들어 SNS로 즉시 공유할 수 있다. 이는 모바일 전도 도구로도 활용이 가능해 전도 대상자에게 유용하다. 성경은 개역개정, 개역한글, 현대어성경, 새번역과 영어 성경인 KJV, NIV, NLT 버전을 제공하고 있는데 한글과 영어 두가지 성경을 동시에 볼 수 있는 특징도 있다. 참고로 개역개정, 개역한글, KJV 성경은 오디오도 함께 제공된다. 저절로 성경일독 앱은 안드로이드기반(삼성 및 LG) 스마트폰에서 제공하는 구글 Play스토어에서만 서비스가 제공된다. 앱을 실행하면 광고가 나타나지만 조금의 불편을 감수하면 말씀을 묵상하고 공유하는데 지장이 없다. 또한 결제해야 이용할 수 있는 ‘읽기모드’는 우리 교회 앱 성경과 동일한 기능이므로 오랜 시간 성경을 읽을 때는 교회 앱을 활용할 것을 추천한다.
  • 2022.07.29 / 금지환 기자

    부활절 맞아 ‘기독 영화 특별전’열려
  • 유명 기독영화인『천로역정: 천국을 찾아서』, 『바울』등을 극장에서 볼 수 있는 특별전이 열린다. CBS가 부활절을 맞이해 진행하는 기독영화 특별전은 4월 1일부터 14일까지 진행된다. 서울 지역은 서울극장, 인천 경기 지역은 CGV계양, 인천, 일산, 소풍, 롯데시네마 안산, 안산명화극장 등에서 볼 수 있다. 기독 영화 특별전에서는 영화 『바울』이 마지막으로 상영돼 아직 관람하지 못한 관객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누적 관객 수 약 30만 명을 기록한 『천로역정: 천국을 찾아서』와 개봉 이후 꾸준한 관심을 받고 있는 『예수는 역사다』, 『가나의 혼인잔치: 언약』등은 관객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예정이다. 이어 코로나19로 IPTV에서 런칭한 영화들도 처음으로 극장에서 상영된다. IPTV 최초 개봉 영화 『내게 찾아온 사랑』,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담은 『아버지의 기억』에 이어 낮에는 목사님, 밤에는 프로레슬러가 된 목사님의 숨겨진 비밀이 담긴 『복면목사』 등 다양한 장르와 선호를 충족시킬 수 있는 영화를 선보인다.
  • 2021.03.25 / 이미나 기자

    가슴 뻥 뚫리는 뮤지컬 ‘지저스’
  • 혼돈한 세상에서 행복 찾는 사람들을 위한 메시지 영원한 지혜 담긴 성경 말씀으로 용기와 희망 선사 나를 짓누르는 모든 것을 한 번에 날려줄 뮤지컬, 성경 속 위로의 이야기를 락으로 전달한다.’뮤지컬 ‘지저스’가 서울 대학로 원패스아트홀에서 상영되고 있다. 지저스는 1971년 뉴욕 오프 브로드웨이 초연 후 총 3000회 이상을 공연한 흥행작 뮤지컬 ‘가스펠’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신약성경 마태복음의 총 43개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를 통해 교훈과 가치를 전한다. 목적과 방향을 잃고 문제를 겪는 많은 현대인들에게 길 되신 예수님의 지혜를 알려주기 위한 메시지를 담아냈다. 예수님의 일대기보다 가르침에 초점을 맞춰 연극놀이식으로 스토리를 이어가니 지루함이 없다. 거기에 음악 장르 중 하나인 락을 뮤지컬에 접목하여 듣기만 해도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한 보이스는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뮤지컬 1막에서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 ‘부자와 나사로’ ‘돌아온 탕자’ 등 초신자들도 알만한 이야기들을 재밌게 풀어내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전달하고 ‘날마다’ ‘이 백성 구원’ ‘내 영혼의 은총’ ‘세상의 빛’ 등 찬양으로 분위기가 고조된다. 2막에서는 바리새인의 시험과 간음한 여인 등 진지한 주제로 ‘돌아와요’ ‘내 곁에’ ‘버드나무 가지위에’ 등의 노래를 들려주며 관객의 감성을 자극한다. 연극 보잉보잉, 마술가게 등 탁월한 연출력으로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해온 연출가 손남목과 뮤지컬 그림자를 판 사나이, 록키호러쇼, 신흥무관학교 등 화려한 안무로 뮤지컬계의 트렌드를 이끌고 있는 안무가 채현원이 함께해 뮤지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보이고 있다. 또한 걸그룹 베이비복스 출신 간미연 타히티 제리 안소현을 비롯해 문장원 김현국 윤소미 신시온 등 실력파 배우들이 출연해 폭발적인 락 음악과 안무, 웃음과 가슴 뭉클함으로 하나 되는 무대와 객석을 만들어내고 있다. 소극장의 이점을 살려 관객과 함께 호흡하며 뜨거운 감동과 전율을 선사한다. 뮤지컬 지저스는 인터파크와 네이버 평점이 9.2에 달하며 ‘기독교인들이 본다면 은혜로운 공연이고 비기독교인이라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공연이다. 예수님의 일생을 락음악과 함께하는 최고의 공연이었다(actor***)’ 등의 평을 얻고 있다. 상영기간이 정해지지 않은 오픈런 공연으로 매주 월, 화요일에만 공연이 없다. 본 공연은 총 130분 공연(인터미션 10분)이며 만 10세 이상 관람가로 초등학교 저학년 관객의 경우 생년월일 확인이 가능한 증빙자료를 필요로 한다. 티켓구매는 인터파크에서 가능하다. <공연안내> - 기간 : 2020.01.15.~ 오픈런 - 시간 : 수·목요일 - 19:30 / 금요일 - 16:30, 19:30 / 토요일 - 15:00, 19:00 / 일요일 - 14:00, 18:00 ※ 매주 월·화요일 공연 없음 - 장소 : 원패스아트홀
  • 2020.02.23 / 김주영 기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31. 후안무치(厚顔無恥) 시므이의 죽음②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솔로몬에 의해 죄의 대가를 받게 된 시므이 "왕이 사람을 보내어 시므이를 불러서 이르되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왕상 2:36~37) 3. 솔로몬의 숙청 작업과 시므이의 죽음 솔로몬은 왕이 된 후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한다. 숙청의 이유, 방법, 숙청당한 인물들만 보면 공포정치를 휘둘렀던 절대군주 못지않다. 숙청의 대상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였던 대제사장 아비아달, 다윗을 섬기며 충성을 다했던 군대사령관 요압, 그리고 자신의 형이자 왕자였던 아도니야까지 잠재적으로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다윗을 조롱했던 시므이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1) 아도니야 아도니야는 다윗의 네 번째 아들이었다. 다윗의 첫째 아들은 암논이었고, 둘째는 갈멜 여인 아비가일이 낳은 다니엘, 셋째는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가 낳은 압살롬, 넷째는 학깃이 낳은 아도니야였다. 솔로몬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서 열 번째쯤 된다(대상 3:1~5). 그런데 첫째 아들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였던 다말을 강간한 사건 때문에 압살롬에게 죽임 당했고, 압살롬은 반란 후 죽임을 당했다. 다윗의 첫째와 셋째 아들이 죽은 것이다. 둘째 아들 다니엘은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윗의 둘째 아들이었다는 기록 외에는 성경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 일찍 죽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다윗의 허락도 없이 스스로 왕이 되었음을 선포한다(왕상 1:5~11). 이때 다윗의 군대 사령관이었던 요압과 대제사장이었던 아비아달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다(왕하 1:7). 하지만 아도니야의 시도는 일일천하에 그쳤다. 솔로몬은 왕이 된 후, 제단 뿔을 잡고 목숨을 구걸하는 아도니야(왕상 1:51)를 살려주며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그것은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왕상 1:52). 하지만 아도니야는 다윗의 침실에서 수종을 들었던 수넴 여인 아비삭을 자신의 아내로 삼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솔로몬은 이것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아도니야를 처형해 버렸다(왕상 2:13~25). 2) 아비아달 아비아달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10번째 대제사장이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기약이 없는 망명길에 올라야만 했다. 이스라엘 땅에 많은 도시와 지역이 있었지만 다윗이 선택한 첫 장소는 대제사장이 있던 놉이었다(삼상 21:1). 심신이 지쳐있던 다윗은 아히멜렉의 도움으로 음식을 먹고 그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였던 골리앗의 칼을 얻었다(삼상 21:4~10). 사울은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와줬다는 것을 문제 삼아 도엑을 시켜 아히멜렉과 놉의 제사장 85명을 한 날에 살육했다(삼상 22:18). 이때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였던 아비아달만이 목숨을 건져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아비아달은 지체 없이 한걸음에 그일라에 있던 다윗에게로 향했다. 아비아달이 제사장의 영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에봇을 가지고 도망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삼상 23:6). 아울러 우림과 둠밈을 대제사장의 에봇 흉패 안에 보관하라고 되어 있기에 우림과 둠밈까지 가지고 온 것으로 볼 수 있다(출 28:30). 다윗은 이렇게 사선을 넘어 온 아비아달을 대제사장으로 삼았다. 그러나 솔로몬은 왕위에 오른 직후 아비아달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던 것 때문에 아비아달을 제사장 직분에서 파면시키고 그의 고향으로 내쫓아 버렸다(왕상 2:27). 3) 요압 요압이라는 이름의 뜻은 ‘야훼는 아버지이다’와 ‘야훼는 하나님이시다’는 뜻이다. 요압은 다윗과 함께 오랜 세월 전쟁터를 누볐던 군대 장관이다. 사울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이 되었고, 헤브론에서 이미 왕이 되어 있던 다윗은 피할 수 없는 전쟁을 하게 되었다. 기브온 전투는 다윗이 사울의 남아있던 세력과 벌인 최초의 전투이다. 이때 이스보셋의 장군인 아브넬과 다윗의 군대를 이끌던 요압이 맞붙게 되었다. 기브온 전투는 요압의 승리로 끝났지만, 요압의 동생 아사헬은 아브넬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요압은 이것에 대한 앙심을 품고 있었다. 한편 아브넬은 사울의 자손들과 다윗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종식하고 통일왕국을 탄생시키려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헤브론에 있던 다윗을 찾아와 평화의 조약을 맺고 통일왕국의 꿈을 향한 큰 걸음을 뗐다(삼하 3:8~21). 뒤늦게 이것을 알게 된 요압은 아브넬을 쫓아가 다시 헤브론으로 유인해 왔다. 그리고 그에게 조용히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속여 무방비 상태에 있던 아브넬을 살해했다(삼하 3:27). 성경 여러 곳에서 정치적 야망을 숨기지 못했던 요압이 평화적인 통일이 이루어진 후 모든 공이 아브넬에게 돌아갈 것을 걱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통일이 이루어진 후 자신의 입지가 약해질 것에 대한 염려와 전쟁 중에 죽은 동생의 원한을 한 번에 갚고자 벌인 일이었다. 다윗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모든 백성에게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큰 용사였던 아브넬이 죽은 것을 애도하도록 했다(삼하 3:31).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요압에게 묻지 않았고 어떤 벌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솔로몬은 달랐다. 표면적인 이유는 요압이 죄 없는 아브넬과 유다 군사령관이었던 예델의 아들 아마사를 죽인 것 때문이었지만(왕상 2:31), 실상은 요압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던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4) 시므이 솔로몬의 서슬이 퍼런 칼날은 그의 왕권을 위협할 현재와 미래의 잠재적 세력을 제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선대왕이었던 다윗이 살려 준 시므이를 향한 솔로몬의 마지막 경고이다. 솔로몬은 시므이의 목숨을 살려 주는 대신 절대 예루살렘을 벗어나지 말라고 경고했다(왕상 2:36~37). 왜 솔로몬은 베냐민 자손이고 바후림에서 터를 잡고 있던 시므이를 굳이 예루살렘 성에 붙잡아 두고 절대 떠나지 말라고 했을까? 사울의 친족이었던 시므이가 예루살렘을 벗어나 어떤 정치적인 행위나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과 다윗을 조롱했던 시므이에 대한 마지막 경고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므이는 이것을 너무나 쉽게 생각했다. 자신의 노예 두 명이 도망을 가자 솔로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벗어났다(왕상 2:39~40). 솔로몬은 브나야에게 명령을 내려 시므이를 단숨에 처형했다(왕상 2:45).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초라한 모습으로 피난길에 올랐을 때 그를 따라가며 조롱하고 멸시하고 저주를 퍼붓던 시므이였다. 하지만 압살롬에 의한 왕자의 난이 실패로 끝나고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선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바싹 엎드려 비굴한 모습을 보였던 사람이었다. 다윗의 아량과 은혜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시므이는 솔로몬에 의해 그의 죄에 대한 대가를 받게 되었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8.01 / 이상윤 목사 기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30.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시므이의 죽음①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책망으로 겸허히 받아들인 다윗 "왕의 가족을 건너가게 하며 왕이 좋게 여기는 대로 쓰게 하려 하여 나룻배로 건너가니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 앞에 엎드려 왕께 아뢰되 내 주여 원하건대 내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왕의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삼하 19:18~19) 사무엘하 15장과 19장은 후안무치한 시므이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무엘하 15장 30절은 다윗의 인생 중 가장 비참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왕이었지만 그의 몰골 어디에도 왕의 위엄과 기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때 다윗은 머리는 산발하고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초라한 모습으로 감람산 고개를 넘고 있었다. 다윗은 천 년의 시간이 지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으며 호산나를 외치던 길을 역방향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눈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방 나라의 왕이나 군사들에게 쫓긴 것도 아니다. 자신의 아들에게 잡혀 죽지 않기 위해 도망가는 신세였다. 압살롬은 아버지인 다윗이 예루살렘에 남겨놓은 10명의 후궁들과 공개적으로 성적인 관계를 맺었다. 다윗은 왕의 권위뿐만 아니라 친부로서의 자존감도 철저히 묵살되었다. 더 낮아질 수도 초라해질 수도 없는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다. 사실 압살롬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다윗의 셋째 아들이었던 압살롬은 가만히 있기만 해도 다윗을 이어 왕이 될 수 있었다. 다윗의 장남이었던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강간한 사건 때문에 이미 죽임을 당해 세상에 없었다. 다윗의 차남은 다니엘이다. 다니엘은 나발의 아내였으나(삼하 2:2) 나발이 죽은 후 다윗의 아내가 된(삼상 25:39~43) 갈멜 여인 아비가일이 낳은 아들이다(대상 3:1). 하지만 그의 이름 외에 추가적인 자료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압살롬이 죽은 후 다윗의 넷째 아들이었던 아도니야가 장남 행사를 한 것으로 보아(왕상 1:5~10) 다니엘은 일찍 죽었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의 장남과 차남이 죽은 상황에서 셋째 아들이었던 압살롬은 조금만 인내력을 가지고 기다렸으면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혀 반란을 일으켰다. 심지어 아버지 다윗을 죽여서라도 왕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압살롬의 반란은 처음에는 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헤브론에서 시작한 반란은 수도인 예루살렘 입성까지 파죽지세로 거칠 것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1. 다윗에게 저주를 퍼붓는 시므이 다윗이 예루살렘을 버리고 바후림을 지나고 있을 때 사울의 친족이요 게라의 아들이었던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기 시작했다(삼하 16:5). 다윗은 물론 그의 추종자들에게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고 저주를 퍼부었다(삼하 16:13). 자신을 그렇게 집요하게 괴롭히고 죽이려고 했던 사울에게 관용을 베풀었던 다윗이다. 그러나 사울이 죽고 난 이후에도 사울의 남은 자손들은 끊임없이 다윗을 참소하고 그의 왕권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다윗이 마음만 먹었다면 사울의 친족을 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친족들에게 많은 특혜와 은혜를 베풀었고 사울의 친족들은 대부분 죽음을 면했다. 그들의 토지나 소유권도 빼앗지 않았다. 이런 다윗의 은혜를 받았던 사울의 자손 중의 한 사람이 시므이다. 그렇게 살아남았던 시므이가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피난길에 오르자 저주를 퍼부었다. 비록 피난길에 올랐지만 전장을 누비며 무수한 공을 세웠던 장수들이 다윗과 함께 있었고 많은 백성이 다윗을 따르고 있었다(삼하 16:6). 시므이의 저주를 듣고 있던 다윗의 군대장관 아비새가 당장 가서 시므이의 목을 베어 버리겠다고 말한다(삼하 16:9).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해 극심한 모멸감에 시달렸을 다윗이다. 그래서 어딘가에 분풀이라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시므이는 더없이 좋은 화풀이 대상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시므이의 목숨을 취하지 않는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책망으로, 또한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고난이 은혜로 바뀌는 전환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므이의 생명을 뺏지 않고 그가 퍼붓는 저주를 묵묵히 참아냈다(삼하 16:11). 2. 급변한 시므이의 태도 다윗이 가장 힘들었을 때, 조롱과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의 태도는 압살롬이 죽고 왕자의 난이 정리된 이후 급변한다. 압살롬이 죽자 제사장들과 신하들은 서둘러 다윗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키는 일을 진행한다(삼하 19:11~12). 다윗은 피난을 왔던 길을 따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예루살렘을 빠져 나올 때 시므이가 저주를 퍼부었던 바후림에 이르렀다. 바후림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4㎞ 정도 떨어진 곳이라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시므이는 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귀환 행렬이 바후림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무엘하 19장 16~18절은 이때 시므이가 취한 행동을 이렇게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1) 유다 사람들과 동행(삼하 19:16) 사울의 혈육으로 베냐민 지파였던 시므이는 급히 유다 사람들과 다윗을 맞으러 나간다. 다윗의 피난 행렬을 쫓아가며 돌을 던지고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에게서 다윗에 대한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다윗이 다시 바후림에 왔을 때 그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2) 시므이의 세력(삼하 19:17) 사무엘하 19장 17절은 사울이 죽은 후 시므이가 어떻게 세력을 키우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다윗을 맞으러 나올 때 시므이는 신변의 위협을 느꼈는지 자기의 모든 세력을 데리고 나온다. 베냐민 사람 1000명과 열다섯 명의 아들, 종으로 부리고 있던 하인 스무 명을 대동했다. 시므이는 호시탐탐 사울 왕조의 재건을 꿈꾸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 고대 근동에서 개인이 이 정도의 규모를 유지하고 운영할 이유도 없다. 3) 용서를 구하는 시므이(삼하 19:18~20) 시므이는 요단강을 건너려고 하는 다윗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한다. 시므이가 특별히 구하고 싶었던 것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나오던 날에 저질렀던 패역한 일'에 대한 용서였다(삼하 19:19). 그가 다윗을 쫓아가며 했던 저주이다. 이 말을 들은 아비새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인 다윗에게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를 살려 둘 수 없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당장 시므이를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삼하 19:21). 이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한 개인이 아니라 정치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시므이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사울의 남은 세력들의 잠재적 위협 요소를 제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시므이를 용서하고 그의 생명을 살려주는 아량을 베푼다(삼하 19:22~23). 다윗은 자신이 시므이를 용서하는 것으로 더는 피를 흘리지 않고 모든 것을 덮고 이 문제를 일단락 지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시므이의 문제는 다윗이 죽은 후 솔로몬에게까지 이어진다. (다음 호에 계속)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7.04 / 이상윤 목사 기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29. 기브온 족속과 사울 왕조의 얽히고 설킨 이야기(Ⅱ)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과 은혜, 화해와 용서 안에서 이뤄져야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그들은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그들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그들에게 물으니라"(삼하21:1~2) 2) 기브온족의 이스라엘 편입 가나안 족속의 종교 혼합주의, 쾌락주의, 윤리적 타락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과학적인 지식이 없었던 시대에 기이한 자연적 현상들은 다신론적 맹신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유대교는 손쉬운 다신론이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 유일신 사상을 갖고 있었다. 유일신 사상은 인간의 감성이나 종교적 편의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율법에 기록된 내용과 방식대로 종교적 행위가 이루어져야 했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한 삶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쾌락주의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아주 쉽게 유혹으로 이끌어 갔다. 그 결과 거룩한 삶은 죄 된 삶으로 쉽게 바뀌었다. 이런 위험에 노출되고 나중에는 헤어날 수 없게 될 것을 아셨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한 것은 가나안 족속과 근원적인 단절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기브온족에게 속아 조약을 체결했다. 그것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이방 족속의 방식대로 계약을 체결했다. 조약 자체도 문제였지만 방법과 절차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고대 근동의 전통에 따라 기브온 사람의 음식을 취하는 방식으로 평화 조약을 맺었다(수 9:15). 서로 먹고 마시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평화의 조약이 이루어졌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기브온족에게 속고 있었다. 성경은 기브온과 체결한 계약 방식이 '그들(기브온 사신)의 양식을 취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수 9:14). 기브온의 사신들이 갖고 온 음식은 곰팡이가 핀 일반적으로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는데 어떻게 이것을 먹을 수 있었을까?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첫째, 계약 체결을 위해 곰팡이가 난 양식의 일부를 실제로 먹었다는 것과 둘째, 그냥 양식을 취하기만 하고 먹지는 않았다는 해석이다. 지금이라면 당연히 곰팡이가 난 음식을 먹지 않았겠지만, 근동 지방의 관습을 고려할 때 계약 체결의 완성을 위해 곰팡이 피지 않은 쪽의 음식 일부를 떼어 나눠 먹었을 가능성이 크다. 음식을 먹고 안 먹고의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기브온 족속과 계약을 체결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수장이었던 여호수아는 기브온족을 죽이지 않고 살리겠다는 조약을 맺었고 이스라엘 지파의 족장들도 모두 동의했다(수 9:15). 그러나 그들이 저지른 엄청난 실수를 깨닫는 데는 3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계략에 넘어간 것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체결했기에(수 9:18) 다시 바꿀 수 없었다. 속임수까지 써가며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했던 기브온 사람들은 그들의 소원대로 이스라엘 민족에 동화되었고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사울 왕 때 완전히 유린당하였고 기브온족 전체가 몰살당할 위기에 처하게 됐다. 2. 역사를 왜곡하는 사울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라는 영예를 안았으나 여러 번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행동을 했다. 여호수아는 기브온족을 살려 하나님의 제단을 위해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자들로 삼았다(수 9:27). 이런 기브온족의 삶은 비록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며 헌신 된 삶을 살았기에 선교적인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구약의 역사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정이야 어쨌든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민족에 편입돼 성전을 섬기며 살아오던 기브온족이었는데 사울왕이 갑자기 그들을 말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 성경은 사울이 이런 일을 계획하고 실행한 것은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삼하 21:2). 이 사건은 기브온 족속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성경은 사울이 언제 얼마나 많은 기브온 사람을 죽였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무엘하 21장 5절은 사울이 기브온족을 '학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칼라누'이다. 이 단어의 뜻은 '끝내다'(finish), '완성하다'(accomplish)는 의미이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 한두 명을 죽인 것이 아니라 기브온족 전체를 말살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고 실제로 실천에 옮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고한 기브온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사울과 다윗의 왕권 교체와 맞물려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완전히 묻혀 버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것을 잊지 않으셨다. 다윗왕 때 3년 동안의 큰 기근이 발생했다. 다윗은 계속되는 가뭄이 무엇 때문인지 알기를 원했고, 하나님께서 사울이 흘린 기브온 사람들의 피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삼하 21:1). 3. 솔로몬의 재판에 비할 다윗의 판결 왕위에 오르기 전, 사울은 한없이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보좌에 오른 뒤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사울은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 기브온족도 마찬가지였다. 피의 순수성을 강조하며 이방 족속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일부 백성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고 있던 기브온족을 완전히 말살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다윗이 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다윗은 왕으로 등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바로잡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다윗은 사울왕 때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울의 때 뒤틀렸던 역사와 공의를 다윗을 통해 다시 바로 세우기를 원하셨다. 성경에 기록된 재판 중에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두 판결은 솔로몬의 판결과 다윗의 판결일 것이다.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한 아기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다투던 두 여인에 대한 솔로몬의 판결(왕상3:16~28)은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판결 중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솔로몬의 판결과 같이 지혜가 번뜩이는 판결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게 한 것이 다윗의 판결이다. 1) 피해자 중심의 판결 다윗은 먼저 기브온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결해 줬으면 좋겠냐'고 묻는다(삼하 21:3). 일방적인 행정명령이나 법 집행이 아니라 피해자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기브온 사람들은 자신들을 살육하는데 가담했던 모든 사람을 벌해 달라고 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 민족을 학살하는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사울의 아들 7명을 내어 달라고 요구한다(삼하 21:6). 사울의 일곱 아들은 한날에 기브온 사람들에 의해 목매달려 죽었다. 그런데 여기서 기브온족의 모든 원한이 풀리고 3년 동안 기근으로 고통을 받던 땅에 비가 내린 것은 아니다. 2) 화해의 판결 비록 죄 없는 기브온 사람을 학살하는 일을 기획하고 실행했다가 그 벌로 죽은 사울의 아들들이었지만 다윗은 목이 매여 죽은 이들의 시체를 거둬들인다. 그리고 사울과 요나단의 뼈와 함께 그들의 할아버지이며 사울의 아버지인 기스의 묘에 가족장으로 합장을 한다. 이렇게 다윗이 죽은 사울의 아들들을 위해 장사 지내는 것을 마쳤을 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삼하 21:14).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것은 단순히 원한과 억울함을 푸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과 은혜, 화해와 용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다윗이 사울의 아들들의 시체를 거둬들여 가족묘에 장사지낸 것처럼,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긍휼함이 공의 가운데 있어야 한다. 사무엘하 21장에 기록된 기브온족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얽히고 설킨 사건은 하나님의 언약과 공의, 공의가 실현된 이후의 화해와 용서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단편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6.06 / 이상윤 목사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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