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과 변화
정성금 성도(통일대교구) - 고난 가운데 찾은 하늘의 소망
  • 죽음의 고비마다 임한 주님의 손길 나는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태어나 북한에서는 중류 계급이라 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 부모를 비롯한 친척들도 당 간부이거나 군 고위 관계자였기 때문에 북한 제도를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충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난의 행군 시기가 오면서 남동생이 길거리에서 죽고 아버지는 더는 살 희망이 없다면서 아편을 먹고 자살했다. 남편이 회사에 출근하지 않고 매일 도박과 음란한 생활을 이어가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에 1999년 말, 30대 초반에 북한을 탈출할 결심을 하게 됐다. 아들과 함께 두 차례 탈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세 번째 시도에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을 두고 먼저 중국에 가서 자리를 잡고 데리러 오겠다는 굳은 약속을 한 뒤 탈출에 성공했다. 두만강을 넘어 중국 길림성 산골에 사는 총각에게 인신매매로 팔려 15년을 생활했다. 북한에 두고 온 아들과 부모 형제를 생각하면 제대로 잠을 못 이루고 눈물로 지새우다 보니 심장병으로 고생을 하고, 심한 출혈로 병원에 가보니 자궁에 문제가 생겨 수술하지 않으면 3개월을 넘기지 못한다고 했다. 동네 이웃의 전도로 한족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나를 안타깝게 여긴 한 교인이 벼를 팔아 번 돈을 주며 빨리 수술하라고 도와줬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나는 마태복음 10장 1절 말씀이 떠오르며 나를 치료한 것은 전적인 주님의 뜻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북한사람이라고 고발당해 공안차에 실려 길림성 감옥으로 가게 됐다. 나는 3일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밤낮으로 중국어 찬양을 불렀다. 밤이 되고 내 찬양소리가 울려 퍼지던 중, 한 경찰이 다가와 자신도 기독교인이라며 내일 오후에 버스가 오면 북송될 텐데 지금부터 가짜로 죽는 흉내를 내면 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알려줬다. 나는 입에 거품을 물고 바지에 물을 부어 실수한 것처럼 쓰려져 있었다. 다음 날 경찰들이 내게 다가와 눈을 뒤집으며 “죽어가고 있다”며 집으로 후송시켰다. 그 후 몇 차례 공안이 잡으러 왔지만 하나님과 교인들의 보살핌 속에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고 2014년 제3국을 거쳐 대한민국에 입국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늦은 나이에 대학에 입학해 사회복지학과 4년을 졸업하고 치열하게 생활하다보니 연골이 심하게 닳아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해야만 했다. 교회 목사님과 성도들의 기도와 격려 가운데 수술은 잘 되었지만 수술비가 문제였다. 그런데 “모든 것을 근심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리고 바로 병원 접수처에서 구청과 주민센터가 협력해서 수술비를 해결해줬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현재 평화나눔 봉사단의 사회복지사로 활동하고 있다. 앞으로의 비전은 탈북민들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돕는 작은 시설을 운영하는 것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하늘의 소망을 품고 감사히 살아가겠다. 정리=김주영 기자
  • 2025.03.14 / 김주영 기자

    김용연 장로(강서1대교구) - 뇌경색으로 마비 왔지만 후유증 없이 회복
  • 하나님 은혜로 남선교회 28년 봉사 교구 성도들의 중보기도와 사랑받아 감사 지난해 11월 14일 새벽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눈앞에 글자가 두 개로 보였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출근을 하고 근무를 다 마치고 퇴근을 일찍 했다. 집에서 딸을 만났는데 간호사인 딸이 나를 보더니 어서 빨리 병원에 가자고 재촉을 했다. 응급센터로 가는 중에도 나는 내일 교회 감사위원회 일로 제주도를 가야하는데 내가 몸이 안 좋아 갈 수가 없을 것 같다고 장로님들께 연락을 했다. 검사 결과 뇌경색이었다. 목 뒤쪽이 혈전으로 막힌 것이었다. 그때부터 장로님들과 교구 목사님과 성도들의 중보기도가 물밀듯이 시작됐다. 금요성령대망회에서도 내 기도제목이 대성전 전광판에 올려져 예배에 참석한 전 성도가 함께 기도해 주셨다. 입원을 하고 3~4일 후 얼굴 감각이 이상해지고 입이 돌아가고 몸 왼쪽으로 마비가 왔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기에 마음속에는 걱정이나 불안함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계속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 53장 5절 말씀을 암송하면서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렸다. 집중치료실에 가서 보름 정도 있다가 일반병실로 옮겨졌고 한 달 만에 퇴원을 하고 수술 없이 재활치료와 약물 치료를 받았다. 병원에서 그만 오라고 할 정도로 성도들이 면회를 많이 와주셨다. 많은 분들의 기도 덕분에 지금은 후유증 없이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 정말 감사한 것은 딸 결혼이 12월 14일이었는데 딸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재활치료를 받으면서 의료진도 이렇게 회복이 빠른 경우는 본 적이 없다며 놀라워했다. 아내의 끈질긴 전도 덕분에 교회를 다니게 된 후 28년 동안 남선교회 봉사를 내려놓은 적이 없다. 하나님을 통해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내 모든 아픔과 슬픔을 다 치유 받을 수 있었고 항상 샘솟는 기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항상 하나님이 주신 열정으로 교회를 섬기고 열심히 직장 생활할 수 있었다. 믿음의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자녀들도 장성하여 각자의 분야에서 성실하게 생활하고 있다. 아들은 약사를 하다가 의대로 편입을 하고 지금은 전공의 3년 차이다. 딸도 간호사로서 환자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나도 그동안 직장 생활을 하면서 사이버대학으로 사회복지사가 되기 위해 공부해 왔다. 실습만 남았는데 앞으로도 더 많이 공부하고 자격을 갖출 계획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내가 공부하고 있는 사회복지 분야에서도 더 구체적으로 내가 헌신할 수 있는 분야를 찾고 전문성을 갖춰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함께 믿음 생활하며 중보기도해주신 교우들과 주의 종들께도 감사드린다.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속히 하나님 아버지께로 와서 이 행복을 누리기를 바란다. 정리=복순희 기자
  • 2025.03.07 / 복순희 기자

    동영탁 집사(서대문대교구) - 가족이 함께 예배드려 행복합니다
  • 이영훈 목사 설교와 찬양에 큰 감동 큰 사위 암 고쳐주신 하나님께 감사 코로나 기간 교회 현장 예배 제한으로 인터넷으로 영상 예배를 드릴 때였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데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더욱이 찬양을 부르시는데 성악을 전공한 사람 이상이었다. ‘저렇게 찬양을 잘하는 목사님이 또 계실까?’ 나는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등록해 현장에서 목사님의 설교와 찬양을 듣고 싶어졌다. 그렇게 시작된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은 참으로 행복했다. 새가족으로 등록하고 예배를 드리면서 이곳에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배를 마치고 주기도송을 할 때면 마음이 뭉클했다. 무엇보다 음악을 좋아하는 내가 넓은 성전에서 큰 목소리로 주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함께 예배드리는 딸아이는 목소리 좀 낮추라고 하지만 나는 찬양을 부를 때가 가장 행복하다. 나는 공과대학을 나왔지만 음악이 좋았다. 색소폰을 취미로 배우던 중, 전에 출석하던 교회의 목사님의 권유로 콘서바토리에서 지휘와 성악을 공부했고 교회 찬양대 지휘를 맡았다. 전공자가 아니라 힘든 공부였지만 재밌었고 지휘의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나는 40대 후반 음악대학원 입학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고 합격의 기쁨도 누렸다. 찬양은 내 인생에 언제나 나를 지켜준 버팀목이었다. 어머니는 크리스천이셨고 나는 어릴 적 선물을 준다기에 교회를 출석했다. 본격적인 신앙생활은 군 제대 후였다. 돌아보면 힘들 때마다 찬양을 불렀고 찬양으로 위로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와서도 찬양대의 찬양, 지휘자의 지휘를 유심히 보게 됐다. 예배의 모든 요소가 다 감동적이었다. 지난해 11월에는 파더스드림(아버지학교)도 수료했다. 아내가 먼저 마더스드림(어머니학교) 훈련을 받더니 좋다며 나에게 파더스드림을 권했다. 아버지의 뒤를 보면서 자식이 성장한다는 얘기를 듣고 ‘아, 내가 자식들을 위해서 더 올바르게 살아야 되겠구나’하는 다짐도 했다. 몇 해 전 큰 사위가 침샘 암 진단을 받았다. 지금은 거의 완치 판정을 받고 3~4개월에 한 번씩 추적검사만 하는 단계이다.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만지심을 특별히 경험했다. 열심히 주님을 섬겼던 딸아이가, 그 가정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이끄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기에 사위가 병에서 고침 받을 것을 확신했다. 우리는 하나님께 복을 많이 받았다. 건강 주시고 자녀들과 함께 하는 사업을 번창하게 해주신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크리스천의 사명이라는 게 주어진 환경에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거라 생각한다. 항상 이 생각을 되새김질하며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신앙의 뿌리를 잘 내려 마음껏 찬양하며 하나님께 예배드릴 것이다. 정리=오정선 기자
  • 2025.02.28 / 오정선 기자

    최민경 집사(통일대교구) - 자유 대한민국으로 이끄신 하나님께 감사
  • 찬양과 기도로 모진 교화소 생활 이겨내 5번 시도 끝에 기적적으로 탈북 성공 나는 다섯 번의 탈북 시도 끝에 2012년 자유의 땅 대한민국에 도착했다. 마지막 강제 북송 때는 극심한 영양실조로 몸무게가 27㎏까지 감소해 교화소 시체실에 버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고 다시 살려주셨다. 나는 북한 엘리트 출신 배경에서 자라 사상교육을 철저하게 받았다. 북한에서도 강사를 했던 내가 탈북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최악의 식량난을 겪었던 ‘고난의 행군’ 시기에 300만명이 굶어 죽어갈 때 가족을 잃었기 때문이다. 오직 살기 위해 탈북했던 나는 1997년 첫 번째 탈북에 성공해 중국으로 넘어갔다. 당시 나는 라디오 극동방송을 통해 복음을 처음 전해 들었는데, 20년 넘게 사상교육을 받아온 나에게 성경책은 김일성과 하나님을 바꿔놓은 책과 같았다. 딸아이를 출산하고 교회를 꾸준히 다녔지만 하나님을 믿지 못했고 그렇게 3번의 탈북과 강제송환을 반복했다. 네 번째 북송 당시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교화소 3년 형을 선고받고 고된 노동이 반복됐다. 식량은 턱없이 부족해 영양실조는 물론 열악한 시설로 전염병에도 노출됐다. 이제 그만 생을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던 어느 새벽 갑자기 마음속에 ‘너는 살아야 한다’라는 음성이 강력하게 들렸다. 나는 그 순간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절 살려주세요’라고 기도했다. 눈물로 기도하며 중국에서 예배드릴 때 불렀던 ‘나의 영원하신 기업’ ‘돌아온 탕자’를 마음속으로 찬양하고 또 찬양했다. 찬양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평안과 위로가 임했고 다시 삶의 소망을 얻게 됐다. 나는 이후 무릎 꿇고 앉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고문 시간에도 주기도문을 외우며 기도했고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찬양했다. 2010년 당시 세계적으로 ‘사스 바이러스’가 유행했는데 북한에서도 많은 사람이 감염됐고 나도 사스 바이러스에 감염돼 시체실에 버려졌다. 당시 몸무게는 27㎏까지 줄어 더 이상 가망이 없었다. 정말 숨만 붙어있던 그때 갑자기 대사면이 결정됐다. 김정은이 후계자로 내정되면서 대사면을 내린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기적적으로 석방됐다. 석방 소식을 듣고 나는 하나님이 나를 살리셨음을 깨달았다. 정말 하나님이 일하셨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할렐루야! 석방 이후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후 마지막 탈북을 감행해 드디어 대한민국에 도착했다. 지금은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다니며 이영훈 목사님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통일 한국을 위해 신앙과 믿음 훈련을 받고 있다. 또한 북한 여성 수감 실태와 인권 침해 실상을 국제 사회에 알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지난해 7월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탈북과 강제북송 경험을 담은 『북한 탈출기』 에세이를 출간했다. 나는 오늘도 하루속히 한반도에 복음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정리=금지환 기자
  • 2025.02.21 / 금지환 기자

    김성열 원로장로(반석대교구) - 유튜브 사역 통해 얻은 은혜와 감사
  • 말씀으로 역경 이기고 기적 체험 나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며 조용기 목사님과 이영훈 담임목사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다. 나는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를 10분 영상으로, 이영훈 담임목사님의 설교를 짧은 숏폼 영상으로 매일 업로드하고 있다. 이 사역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단순했지만 하나님의 크신 섭리가 담겨 있었다. 처음에는 목사님들의 귀한 말씀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실천으로 옮기는 데는 여러 가지 두려움이 있었다. 영상 편집 기술이 부족하고 내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할 자격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기도할수록 하나님께서 나의 순종을 통해 기뻐하시고 이를 통해 일하신다는 확신을 주셨다. 작은 순종의 시작은 놀라운 열매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영상 하나를 만드는 데 몇 시간이 걸렸고, 결과물도 마음에 들지 않아 여러 번 좌절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에 새기고 한 걸음씩 나아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영상 편집 기술도 조금씩 나아졌고, 더 많은 사람들이 채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현재 운영하는 킴튜버(Kimtuber) 채널의 구독자가 약 2만명에 이르는 동안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놀라웠다. 영상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내 마음에도 큰 은혜가 임했다. “이 말씀으로 삶의 방향을 찾았다”,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는 계기가 됐다”는 구독자들의 댓글은 큰 위로가 됐고 내가 하는 일이 영혼을 살리는 귀한 사역임을 깨달았다. 나도 어려운 시절을 하나님 말씀으로 이겨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고난 중에 있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사업체를 운영하던 나는 1998년 IMF때 환차손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됐다. 하지만 예배시간 마다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신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고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절대 긍정 절대 감사를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변해갔다. 기적은 일어났고 주님의 은혜로 25년 만에 모든 채무를 갚을 수 있었다. 2020년 11월부터 시작한 유튜브 사역은 내 신앙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설교를 편집하면서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적용하게 됐고 목사님들의 설교 한 구절 한 구절을 편집하는 동안 내 삶에 그대로 적용되는 은혜를 체험했다. 이 과정에서 내가 느낀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작은 헌신을 통해 큰일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앞으로의 목표는 구독자 수 10만 명을 달성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단순히 숫자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많은 영혼을 살리고 예수님께로 인도하고 싶다. 나는 이 채널을 통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정리=이미나 기자
  • 2025.02.14 / 이미나 기자

    최명철 성도(대학청년국) - 끝까지 기도할 때 기적으로 응답하신 하나님
  • 나는 매월 셋째 주 토요일 용산역 인근에서 200여 명 노숙인에게 따뜻한 점심식사를 제공하는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남들은 쉬는 휴일 아침에 식자재를 구매하고 요리, 운반까지 쉬운 것 하나 없지만 추운 겨울에는 더욱 간절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이들을 생각하며 열심을 내게 된다.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모태신앙으로 성장한 나는 늘 믿음 안에서 지내왔지만 성인이 되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고 싶었다. 대학생이던 2006년 교회 선배들의 권유로 해외단기선교 사역인 월드미션 루마니아팀에 지원했다. 열심히 훈련받고 준비했지만 당시 집안 형편이 어려워 출발 일주일 전까지 필요한 선교비를 마련하지 못했다. 이때 등록금 미납으로 학교에서 경고도 받고 휴대전화도 끊길 만큼 어려웠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보내주실 것이란 확신으로 포기하지 않고 기도했다. 선교를 앞두고 ‘더 홀리스피릿 페스티벌’로 불리는 전국청년부흥대성회가 개최돼 참석했는데 나도 선교를 갈 수 있다는 평안한 마음이 들었다. 금요철야예배에서 기도할 때 ‘네 것이 이미 준비돼 있는데 무슨 걱정을 하느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확신을 얻게 됐다. 정말 신기한 것은 출발하기 3일 전 선교팀 계좌에 누군가 내 이름으로 100만원을 후원해 선교지에 갈 수 있었다. 또 팀원들보다 늦게 항공권을 구매했지만 비행기 좌석이 있어 함께 출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출발한 루마니아의 자연을 보자마자 “우연히 만들어 질 수 없을 만큼 너무 아름답다”고 느끼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달았다. 월드미션을 마치고 군대에 다녀온 나는 전역 후 다시 루마니아에 갔다. 식당에서 일을 하며 현지 언어를 습득하고 식료품점도 함께 운영하며 주말마다 선교사님과 함께 거리의 부랑자로 살아가는 집시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5년의 시간을 루마니아에서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와 2019년부터는 카리스선교회 사회사업부에서 봉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봉사하면서 집시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은 노숙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전해져 한 끼 식사를 넘어 함께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날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봉사하고 있다. 지금은 인테리어 회사를 운영하고 있지만 신학 공부에 대한 소원이 있던 나는 올해 한세대학교 신학대학원에 합격해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받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루마니아에서의 다양한 경험과 귀국해서는 건물시설관리 등 여러 직업을 거쳐 왔다. 이러한 경험이 단순히 생계를 위한 일이 아닌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께서 나를 준비시킨 시간임을 깨달았다. “네 길을 야훼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시 37:5)라는 말씀처럼 명하신 곳이 어디든 담대히 나아가 철옹성처럼 단단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싶다. 정리=박찬웅 기자
  • 2025.02.07 / 박찬웅 기자

    박은혜 집사(마포1대교구) - 넘어져 척추 다친 딸, 중보기도로 회복
  • 합심 기도는 위력 있어 기적 가져와 나에게 2024년은 기도할 게 풍성했던 한 해였다. 그 중 가장 감격스러웠던 것은 성도들과 단합된 기도로 빠른 응답을 체험했다는 것이다. 나는 고등학생 남녀 쌍둥이를 키우고 있다. 요즘 학생들이 그렇듯 자세가 좋지 않은 딸은 허리가 아프다고 징징거리며 매일 등교했다. 한의원에서 침과 물리치료를 받던 중 지난해 10월 30일 늦은 오후 학교에서 갑자기 전화가 왔다. 딸이 복도에서 미끄러져 움직이지 못한다는 연락이었다. 방과 후 청소 시간에 쓰레기통을 비우려 복도를 지나가던 중 물걸레 청소한 곳이 마르지 않아 미끄러지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딸의 말로는 일어서려했지만 도저히 일어 설 수가 없었다고 했다. 계속 주저앉아 있던 딸은 남편과 간신히 연락해 병원으로 이송됐다. 엑스레이 촬영 결과 골절은 아니었지만 통증을 호소하는 아이의 상태면 척추가 3단계 이상으로 터졌을 거란 진단이었다. 의사는 아직 학생이라 수술은 할 수 없고 상태를 지켜보자고 했다. 아이의 상황을 더드림(The Dream) 3450과 문명철 목사님께 알리자 목사님이 매일 딸에게 전화로 기도해주셨다. 목사님은 교구 연합예배에도 딸의 기도를 부탁해주셨고, 금요성령대망회에도 기도 제목을 올려주셔서 모든 성도들이 딸의 치유를 위해 한 마음으로 기도해 주셨다. 딸은 통증으로 앉지도 못하는 등 활동에 제약이 많아 힘들면서도 잘 참고 견뎠다. 문제는 학교 모둠별 수행활동이었다. 그런데 이 또한 담임선생님의 도움으로 잘 마무리할 수 있어 감사했다. 11월 1일 경 딸은 진료를 받기 위해 병원을 갔다. 의사는 먼저 신경주사를 맞고 MRI 검사와 결과를 본 후 다른 병원 이송과 입원을 결정하자고 했다. 그런데 신경주사를 맞은 아이가 순간 자리에서 쓰러졌다. 신경주사 쇼크였다. 한바탕 소동이 있고나서 호전을 보이는 듯 했는데 3일이 지나도록 회복이 어려웠다. 교구에선 다시 기도가 이어졌다. 며칠 후 MRI를 촬영했는데 감사하게도 터진 것이 아니라 요추 5번과 천추 1번 추간판 탈출증으로 확인됐다. 주일 교구사무실로 목사님을 찾아뵙고 말씀을 드리니 성도들 합심기도의 힘이라고 하셨다. 그 때 깨달았다. ‘예수님이 터지지 않도록 막아주셨구나!’ 딸은 자신이 못 걷게 되는 줄 알고 걱정했다고 했다. 우리는 합심기도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딸의 회복은 엄청 빨랐다. 합심기도를 통해 호전이 빨라 혼자 걸어 식탁에 앉는 것을 보고 “할렐루야!”를 외쳤다. 딸은 그 후 정상 수업을 할 수 있었다. 지난해 12월에는 교회에서 열린 3040 성탄축하찬양경연대회에 동참해 찬양도 불렀다. 2024년 초 아들의 인대파열을 완전히 고쳐주시고 연말에는 딸의 허리 디스크까지 고쳐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중보기도에 힘써주신 모든 성도들에게 감사드린다. 홀로 드리는 기도도 중요하지만 합심 기도가 큰 위력이 있고 기적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간증을 통해 전하고 싶었다. 정리=오정선 기자
  • 2025.01.31 / 오정선 기자

    김미정 집사(강서1대교구) - 자녀를 보호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 부모·자녀 문제와 암의 위험에서 벗어나 나의 친정은 할머니의 신앙으로 기독교 가정을 이루었는데 어머니가 절을 가시면서 나는 몰래 교회를 다녀야 했다. 어린 시절부터 밤에 누우면 조용기 목사님께서 여의도광장에서 설교하시는 꿈을 꿨다.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지만 나도 저 교회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2002년 월드컵 때 서울로 발령이 났다. 이사한 집 아래층에 여의도순복음교회 집사님이 살고 계셔서 꿈에 그리던 교회에 올 수 있었다. 수요예배가 첫 예배였는데 성령님께 꽉 붙잡힘을 당해서 눈물 콧물을 다 쏟을 정도로 평안했고 감동과 은혜를 받았다. 교구에 소속되어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 친정 부모님 사업이 어려워져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으신 적이 있다. 나는 부모님께 재산은 다 잃었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됐으니 하나님을 믿으라고 전도했다. 당시 단칸방에 부모님을 모셔놓고 눈물을 흘렸는데 아버지가 기적처럼 대기업 건설사 감독관으로 채용되시고 어머니도 일을 하셔서 5년 만에 집을 마련할 만큼 회복되었고 형제들도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 어느 날 초등학생인 아들에게 우울증이 생겼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그때까지 교회에 다니지 않던 남편이 하나님께 엎드렸다. 약물 치료를 받는데 부작용이 너무 심했다. 기도원에 올라가서 울면서 기도하니 하나님은 ‘네 자식이기도 하지만 내 아이다. 왜 나한테 온전히 맡기지 못하느냐’라는 마음을 주셨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도했다. 이후 아이는 약 처방 없이 치료를 했고 건강하게 성장해 일본 유학을 다녀와 입대를 앞두고 있다. 2021년에도 놀라운 일이 있었다. 병원에서 건강검진 중 의사로부터 급히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유방암이 되기 전 단계였고 바로 제거 수술을 했다. 이후 정기 검사만 받고 있다. 이전에는 나 자신을 믿고 행했던 적도 있는데 이제는 나의 약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더욱 의지하면서 겸손하게 살아가고 있다. 천국 소망을 품으며 더욱 담대해진 부분도 있다. 특히 창세기 12장 말씀을 소명으로 받아 아브라함의 축복을 생각하며 기도한다. 교구에서는 30, 40대 성도들의 부흥에 동참하면서 재미있고 따뜻하게 함께 신앙생활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시대가 변함에 따라 남선교회에도 여성봉사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보호실은 목회자들과 성도들, 성전을 지키고 질서를 유지하는 중요한 봉사인데 하나님 은혜로 보호실 1호 여성 봉사자가 됐다. 여성 남선교회 회원으로서 성별 간 소통, 세대 간 소통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어 뿌듯하다. 남성들만 있었다면 분쟁이 생길만한 상황을 좋게 해결했던 일들이 가장 보람 된다. 하나님은 항상 자녀들을 보고 계시고 지켜주신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꼭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시길 바란다. 정리=복순희 기자
  • 2025.01.24 / 복순희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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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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