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과 변화
한명희 권사(서대문대교구) - 기도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꿉니다
  • 경제적 어려움과 남편 소천에도 다시 일어서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크고 작은 어려움을 만나게 된다. 최근 예배 시간에 청년들이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 생을 포기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마음이 아팠다.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생명을 어떤 이유로도 스스로 끊어서는 안 되건만, 그만큼 지금 세상이 힘들고 마음이 병든 시대임을 실감했다. 오늘날 우울과 절망이 만연한 사회 속에서 인생의 고난과 위기를 이길 수 있는 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 나 또한 수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예수님이 함께하셨기에 포기하지 않았고 슬픔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예수님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시는 유일한 분이심을 확신한다. 나는 결혼 후 시어머니를 따라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출석하면서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됐다. 믿음 생활을 시작했지만 환경은 녹록치 않았다. 남편의 사업 부도와 파산으로 경제적 어려움이 닥쳤고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힘든 시절을 겪었다. 남편과 함께 생계를 이어가며 서울과 경기 지역을 옮겨 다닌 이사가 20번이 넘는다. 예배와 기도는 나의 유일한 힘이었다. 순복음교회에서 예배드리고 기도할 때면 답답했던 마음이 풀리고 평안이 찾아왔다. 특히 철야예배에서 부르짖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는 말씀을 주시며 고난 속에서도 위로와 힘을 얻게 하셨다. 우리 가족은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매년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서 열리는 청장년금식기도회에 참여했다. 문제의 해결자이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믿음으로 나아갔다. 경제적 어려움과 풍파 속에서도 가족 간 불화가 없었던 것은 하나님 안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기도로 하나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빚을 갚고 이제 행복할 날만 기다리던 2015년 설날 예상치 못한 비극이 찾아왔다. 평소 건강해 병원 한 번 가지 않던 남편이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나는 어려운 순간마다 복음성가 ‘주님 손잡고 일어서세요’라는 찬양을 부르며 하나님께 매달렸고 슬픔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다. 어느덧 남편이 소천한 지 10년이 됐다. 힘들고 외로웠던 시간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붙잡아 주셨고 그 은혜 속에서 2018년에는 권사로 취임하는 축복도 받았다. 자녀들도 “엄마는 하나님 때문에 살았다”고 고백하며 철야예배에서 기도하던 내 모습을 가장 깊이 기억한다고 한다. 온 가족이 교회에서 봉사하기를 소원했던 시어머니의 기도처럼 시동생과 시누이 모두 교회 중직으로 섬기고 있고 우리 가정 또한 3대가 믿음을 이어가는 축복을 누리고 있다. 할렐루야! 지금 당장은 어려움을 겪더라도 고난의 때 하나님께 나아가면 고난이 큰 축복이 될 것을 나는 확신한다. 세상 모든 이들이 하나님 안에서 참된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되기를 소망한다. 정리=금지환 기자
  • 2025.10.17 / 금지환 기자

    이재훈 집사(대학청년국) - 헌혈 400회, 생명 나눔 33년째 이어가 
  • 헌혈 증서 모아 중증질환 어린이들에게 기부해 1992년 고등학교 3학년이던 나는 어머니의 권유로 마지못해 여의도순복음교회 안수집사회 헌혈행사에 참여하게 됐다. 그때의 작은 순종이 지금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헌혈이 어렵지 않으면서도 작은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즐거움으로 참여했다. 그러다 은장, 금장, 명예의 전당이라는 목표를 세우며 꾸준히 헌혈을 이어갔다. 어느새 200회, 300회를 지나 400회를 맞이했을 때는 더 이상 기록이나 선물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저 하나님께 받은 건강을 이웃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었다. 400번째 헌혈을 마친 날 가족이 함께 축하해줬다. 아직은 헌혈의 의미를 모르는 8살 아들과 6살 딸이 자라서 사랑을 나누는 일에 동참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것 같다. 나는 33년 동안 180,350㏄라는 혈액을 나누며 생명 나눔을 내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계속 전혈만 하던 중 간호사의 권유로 혈소판 헌혈을 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시간이 오래 걸려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헌혈이 끝난 후 고가의 장비에 새 키트를 교체하는 모습을 보며 한 팩의 혈소판(400㎖)을 얻기 위해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가능한 한 혈소판 헌혈에 참여하며 더 값진 나눔을 실천하려 노력했다. 그간 차곡차곡 모아온 헌혈 증서는 타인을 돕기 위해 사용하거나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에 기부하고 있다. ‘헌혈(Blood Donation)’이라는 영어 표현도 내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그동안 Donation(기부)이라는 단어는 주로 ‘돈을 주는 행위’로만 여겨졌지만 피도 기부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울렸다. 하나님께서 주신 건강한 몸으로 누군가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였다. 나는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하는 CAM대학선교회 간사로 섬기며 대학생들에게 기부가 꼭 돈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따뜻한 생명 나눔의 의미를 담아 ‘온레드 캠페인(溫Red Campaign)’을 진행하고 있다. 청년들이 헌혈에 동참해 수혈이 필요한 이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함께 행복한 나눔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나 또한 큰 힘을 얻는다. 성경 히브리서 13장 16절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나누라고 주신 것이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그 건강을 나누고, 가진 것이 있다면 흘려보내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 믿는다. “한 사람이 100번 헌혈하는 것보다, 100명이 한 번 헌혈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 많은 청년들이 주님이 주신 건강으로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기쁨을 누리기를 소망한다. 나의 헌혈이 작은 씨앗이 되어 더 많은 이웃에게 주님의 사랑이 흘러가기를 기도한다. 정리=김주영 기자
  • 2025.10.10 / 김주영 기자

    오홍철 평신도선교사(잠비아 패밀리처치) - 잠비아 성도들과 함께 이룬 성전 건축의 꿈
  • “여보 딱 한 번 만 교회 가요.” 아내의 전도를 처음에는 마다했지만 어느 날 나랑 살아주는 것만도 고마운데 아내의 간청을 무시하는 게 남편이냐 싶어서 따라나선 것이 40여 년 전 내가 처음 교회를 오게 된 계기다. 아내를 따라 주일 성수 하며 교회를 다니다 교회 내 순복음선교연합회 아프리카선교회를 알게 되어 열방을 품고 기도하는 회원이 됐다. 내 직업은 목수인데 일을 하던 중 돈을 안 갚는 사람이 있어 사기로 고소했다. 처음 고소라는 것을 하니 그날부터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교회 전도사님께 상담을 하니 “다 내려놓으세요.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라고 말씀해주셨다. 이튿날 바로 고소를 취하했고 비로소 평안이 생겼다. 일주일 뒤 고소했던 사람에게서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돈을 갚겠다는 게 아니라 고소를 당했기 때문에 외국에 일을 못하러 가게 됐다면서 대신 나더러 건축 현장에 가달라고 했다. 그렇게 뜻하지 않게 1996년 잠비아에 가서 일을 하며 아프리카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제를 나누면서 기쁨과 사랑이 솟는 경험을 했다. 이후 한국에서 2년 동안 교육을 받고 평신도선교사로서 2012년 잠비아로 파송을 받았다.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기쁨으로 집을 팔아 전셋집으로 옮기고 선교사의 삶을 시작했다. 그들을 이해하고 소통하기 위해 늦은 나이에 영어를 배우고 무엇보다 문화를 익히기 위해 노력했다. 2년을 그렇게 지내다 말라리아에 걸렸다. 처음에는 병명도 모르고 3일간 물조차 마시지 못하고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동네 반장 역할을 하는 에바 집사가 광산에 의사가 있다며 의료진을 불러줬고, 이들이 말라리아라면서 주사를 놓고 약을 줘서 살아났다. 사경을 헤맬 때도 나는 걱정이 없고 마음은 평안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었다. 이후 에바 집사와 현지인 목회자 케네디 전도사님과 함께 패밀리처치를 개척하게 됐다. 가정집에서 교회가 시작됐고 이후 학교 교실을 빌려서 토요일과 일요일 예배를 드렸다. 30~40명이 된 후에는 더 큰 교실로 옮겼고 교회는 부흥했다. 나는 한국과 잠비아를 오가면서 돈을 벌면 교회 건축 자재를 샀고 교인들이 직접 건축을 해서 드디어 올해 성전이 완공됐다. 큰 도로 바로 옆 500평 땅에 250평 규모의 성전이 지어졌다. 강서1대교구 소성호 장로님, 아프리카선교회 김병현 장로님, 박영이 장로님, 조애자 권사님을 비롯해 회원들의 후원으로 성전 건축 뿐 아니라 교회 마당에 생수가 나오는 우물도 생겼다. 이제 이웃 마을로 물을 뜨러 다니던 마을 사람들이 다 교회로 온다. 또 내년 1월에는 유치원을 개원한다. 내가 사역하고 있는 솔웨지 마냐마 지역의 아이들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양육되어 더 큰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로 성장하길 꿈을 꾼다. 나를 이끄시고 지금도 꿈꾸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린다. 정리=복순희 기자
  • 2025.10.03 / 복순희 기자

    황미자 권사(종로중구대교구) - “최고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요”
  • 뜨거웠던 올 여름 대교구 3450달란트에서 일본 군마로 단기 선교를 다녀왔다. 큰 아들 내외와 44개월 손자가 선교 여정에 동행했는데 아이를 통해 팀원들이 웃을 수 있었고 한 마음으로 사역에 임할 수 있었다. 내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것은 큰 아들이 태어난 지 백일 무렵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이유 없이 계속 울던 아이는 밤이 되면 울음이 더 심해졌다. 건강에 문제가 있나 싶어 병원 진료를 받아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옆집에 살던 여의도순복음교회 지역장님이 나를 전도했고 교회를 갔다 오면 신기하게도 아이는 울지 않았다. 진짜 신앙생활은 큰 아들이 사춘기에 접어들면서였다. 질풍노도 시기의 아들을 잡기 위해 나는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며 아이를 하나님께 맡겼다. 그때부터 새벽 예배에 참석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좋으신 하나님은 나의 기도에 마침내 응답해 주셨고 아들은 교회 안에서 좋은 배우자를 만나 지금은 3450 예배에 적극 참여하며 열심히 주를 섬기는 일꾼이 됐다. 할렐루야! 1교구 안에서 장년층을 위한 예배가 시작된 건 2018년 무렵으로 나에게 대표지역장이라는 직분이 주어졌다. 토요일 오전 쉬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모여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자 놀라운 은혜가 임했다. 한 구역장이 대장에서 시작된 암이 간과 그 주변으로 전이된 친구를 예배 모임에 데려왔다. 성도들은 내 아픔처럼 주께 살려달라고 매달렸고 자매가 완치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우리 안에 ‘문제가 있을 때는 기도가 답’임을 깨닫는 은혜가 임했다. 분당에 사는 아들 내외도 토요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3450예배에 참여했다. 3명으로 시작한 1교구 3450예배는 인원이 30명으로 늘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50명 참석이라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예배를 사모하며 주를 위해 열심을 다할 때 하나님은 우리 가족에게 한없는 복을 허락해주셨다. IMF가 터졌을 때 남편이 다니던 사업장이 문을 닫게 됐다. 기술이 남달랐던 남편은 문 닫힌 회사의 기계를 인수받아 개인 사업을 시작했다. 나는 국민일보를 통한 문서 사역 확장을 위해 하나님께 믿음의 씨앗을 심었고, CIS중동선교회에 들어가 선교 활동도 동참했다. 무엇이든 하나님께 기도하며 믿음으로 순종하자 사업이 날로 번창했고 코로나 팬데믹 때도 공장은 쉼 없이 돌아가 사업 확장이라는 복도 받았다. 나는 2022년에 권사직분을 받았다. 나를 구원하시고 자녀 삼아주신 주께 감사해 내게 주어진 지금이라는 시간, 최고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서였다. 지난해 처음 대교구 3450에서 인도네시아로 단기 선교를 갔을 때 하나님은 ‘너를 사랑한다’는 음성과 함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하나님을 섬길 것을 당부하셨다. 나는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고난없이 하나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힘써 봉사하고 싶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내 자녀, 다음 세대로 계속 이어져 하나님께 헌신하길 기도한다. 정리=오정선 기자
  • 2025.09.26 / 오정선 기자

    조영남 원로1장로(여의도순복음새성북교회) - 아들 살려주신 주님 은혜에 감사
  • 고난 중에 하나님만 의지하며 기도 나는 전라남도 무안에서 태어나 아홉 남매 중 막내로 자랐다. 어린 시절 7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서지도 앉지도 못한 채 10년을 누워 지냈다. 아버지는 나를 지게에 태워 30리 되는 한의원까지 침을 맞으러 다녔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15살이 되던 해 시골 교회 전도사님의 등에 업혀 전주 예수병원에서 열린 조용기 목사님의 집회에 참석해 기적을 체험했다. 누워만 있던 내가 다리에 힘이 생겨 일어나자 모두가 놀랐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직접 경험했다. 이후 불편한 몸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와 공업사에서 일을 배우며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출석하게 됐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셔서 1986년부터 20년간 남선교회 보호실에서 봉사하며 보호실장, 부회장까지 섬길 수 있었다. 1995년 40세에 최연소 장로로 장립되어 30년간 교회를 섬길 수 있었던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후 안전분과위원회, 70주년위원회에서 봉사하고 성북교회 장로회장, 새성북교회 지구장, 교회발전위원장 등 여러 곳에서 섬겨왔다. 올해는 원로장로로서 새로운 사명을 이어가게 됐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은 사랑하는 아들 민식이를 통해 찾아왔다. 민식이는 호주 유학 후 IT 전문가로 활동하던 촉망받는 청년 창업가였다. 그런데 2010년 사업차 방문한 필리핀에서 괴한이 쏜 총에 머리를 맞았다. 의사들은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했지만 나는 하나님이 반드시 살려주신다고 믿음으로 선포했다. 이영훈 담임목사님은 새벽예배 때 전 성도와 함께 기도해주셨다. 필리핀 병원에 의식불명으로 누워 있던 아들의 귀에 휴대폰을 대고 조용기 목사님의 기도를 받았는데, 그 순간 손이 떨릴 정도로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다. 필리핀에서 두 차례 수술을 통해 탄피와 총알을 제거했다. 수술이 불가능한 위치에 있던 총알이 기도 덕분에 움직여져 수술이 가능했다. 한국으로 옮긴 아들은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3번의 추가 수술을 받았다. 위기가 올 때마다 우리 가족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며 감사했다. 뇌척수가 눈과 코로 흘러 세균감염으로 사망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지켜주셨다. 재수술에서는 필리핀에서 수술한 부위의 뼈가 썩어 들어가 있었으나, 상한 부분을 제거하고 자가이식을 통해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조용기 목사님과 이영훈 목사님의 기도를 여러 번 받으며 큰 위로와 희망을 얻었다. 나와 아내 박순애 권사는 7년 동안 아들과 병원에서 함께 생활하며 절대 긍정, 절대 감사의 신앙을 붙잡았다. 우리 부부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일성수하고 날마다 말씀을 읽으며 주님께 순종했다. 아들은 지금도 휠체어를 타지만 스스로 먹고 대화하며 벽을 붙잡고 설 수도 있다. 최근에는 신학공부까지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또 한 번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다. 내 인생 전체를 돌아보면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 앞으로도 절대 긍정, 절대 감사의 믿음으로 하나님께 충성하며 사랑의 본을 보이는 삶을 살아가겠다. 정리=이미나 기자
  • 2025.09.19 / 이미나 기자

    타나베 마사히토 안수집사(순복음가와고에교회) - 야훼 라파, 치유의 하나님께 영광 
  • 폐암과 전립선암에서 치유 받아 기도할 때 기적 체험, 주님께 감사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던 나는 결혼 후 교회에 다니면서 야훼 라파, 치유의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를 경험했다. 아내가 유산 후 어렵게 아이를 가졌는데 6개월 만에 1㎏ 미숙아로 아들을 출산했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울지 않고 심장이 멈춰버렸지만 나와 아내는 “이 아이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간절히 기도하며 서원했고 기적적으로 다시 숨을 쉬게 됐다. 3개월 동안 인큐베이터에서 치료받으며 살아난 아들 야베스는 건강히 자라 지금 목회자가 됐다. 순복음동경교회를 다녔던 우리 가족은 1990년대 조용기 목사님이 인도하신 지저스 페스티벌 성회에 참석해 수많은 사람들이 치유받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17년간 교회 사무국장으로 섬기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002년 이영훈 목사님이 계실 때 순복음동경교회 성전 구입이 이루어진 일이다. 교회 전 성도가 1년간 매일 기도해 성전 구입의 기적이 일어났고 성도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3억엔의 리모델링 비용까지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 내가 58세에 동경교회 신학교에 입학해 수석 졸업한 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축복이었다. 2021년 아들 타나베 야베스 목사가 순복음가와고에교회로 부임하게 됐다. 그 무렵 나에게 폐암이 발견됐다. 2021년 7월 정기 건강검진에서 흉부 엑스레이에 이상 소견이 나타났다. 담당 의사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했지만 기도 중에 “큰 병원으로 가라”는 분명한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일본 최대의 암센터에서 정밀검사를 받고 작은 암이 발견돼 2021년 10월 우측 폐 상부 절반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 만약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더 늦게 발견되어 위험했을 것이다. 또한 7년 전부터 전립선 비대증과 경구항암제로 전립선암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괜찮았던 전립선특이항원(PSA) 수치가 지난해 4월 혈액검사에서 정상 수치인 범위(0~4ng/mL)를 크게 벗어나 11.5까지 올라갔고 전립선암이 악화되는 상황이 됐다. 9월에는 우측 폐에 물이 고여 10m만 걸어도 심한 호흡곤란을 겪을 정도였다. 대형 병원에서 검사와 관찰을 계속했지만 원인을 찾지 못해 당혹스러웠다. 전립선암 치료를 받던 동네 병원 호흡기내과에서 다시 검사하니 폐렴과 폐수종이 발견됐고 바로 등에 주사침을 삽입해 500㏄의 물을 제거하는 시술을 받았다. 알고 보니 폐질환의 원인이 전립선 항암제의 부작용이었다. 폐수종 치료를 마친 뒤 암이 재발한 것이 확인돼 곧바로 항암 요법을 시작했고, 두 달 후 암세포가 사라졌다. 지금은 흔적만 있는 상태이다. 폐를 치료하는 동안 전립선암 경구항암제는 중단했었는데 11.5까지 올랐던 전립선 PSA 수치도 0.017까지 떨어져 암의 위험이 완전히 사라지는 기적을 체험했다. 의료진도 설명하기 어려운 치유의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났고, 교회 성도들의 중보기도가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지 몸소 체험했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린다. 정리=이미나 기자
  • 2025.09.12 / 이미나 기자

    박희자 권사(영등포대교구) - 최고의 전도는 복음을 삶으로 드러내는 것
  • 8남매와 손주들까지 모두 교회 나와 봉사 나는 1981년 이웃 권사님의 전도로 처음 교회에 나와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고 그때부터 오직 주님만 의지하며 살기로 마음을 정했다. 남편은 1995년에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나부터 믿음으로 잘 살아야 복음의 영향력이 있다는 생각으로 남편을 존중하고 사랑으로 섬겼더니 남편의 마음이 변화되어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이후 우리는 함께 교구 사역에 헌신하며 자녀들도 믿음 안에서 잘 자라날 수 있었다. 2021년 남편은 천국에 갔지만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랑을 실천했던 남편의 삶이 가족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나는 8남매 중 장녀로서 가족들에게 한 번도 믿음을 강요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한 가정 한 가정 믿음 위에 세워 주셔서 가족 모두가 구원받는 기적을 허락하셨다. 가족들은 우리 교회 곳곳에서 봉사하며 귀하게 쓰임 받고 있다. 특히 유교 사상이 강하셨던 아버지가 90세 되던 해 증손주들의 기도를 통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신앙생활을 하시다가 천국가신 것은 놀라운 은혜였다. 여름이면 삼척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찾아가 30명이 넘는 대가족이 그곳 교회에서 봉사를 하는데 그 모습은 단기선교 현장을 방불케 하며 교회와 목사님에게 큰 힘이 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식구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기쁨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물론 내 삶에도 어려움은 있었다. 남편의 사업 실패, 딸의 난소 혹 진단 등 힘든 순간들이 찾아왔지만 나는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갔다. 말씀에 비추어 살았기에 고난은 오히려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는 기회가 됐다. 특히 딸이 고등학생 시절 난소에 혹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 100일 동안 기도한 끝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기적을 체험했다. 지금 딸은 결혼하여 두 자녀의 엄마가 되었고 유학 경험이 없음에도 국립대 교수로 세워지는 은혜를 입었다. 나는 1990년대 쁄라찬양대에서 14년간 봉사하며 조용기 목사님의 해외 성회에도 함께했다. 지금은 권사찬양대에서 봉사하며 늘 찬양 가운데 은혜를 누리고 있다. 조용기 목사님의 첫 몽골 성회에 이어 21년 만에 이영훈 담임목사님의 몽골 성회에 참석했을 때, 성도들이 믿음 안에 단단히 세워진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곳에서 찬양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며 가슴 벅찬 은혜를 누렸다. 찬양으로 봉사하며 주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나는 선교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최근에는 아프리카 가나에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작은 정성을 보탰다. 이 일을 통해 좋으신 하나님이 널리 전파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앞으로도 내 남은 생애가 복음의 통로로 쓰임받기를 기도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린다. 정리=김주영 기자
  • 2025.09.05 / 김주영 기자

    정재관 집사(서대문대교구) - 신경 손상 영구장애 위험 기도로 극복
  • 지난 3월 25일 횡단보도를 빨리 건너기 위해 서두르던 중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허리가 아파서 병원에 가던 중이었기 때문에 넘어질 때 자세가 좋지 않았다. 쓰러지면서 다친 오른쪽 어깨에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일단 가려던 병원으로 갔더니 엑스레이 촬영 후 오른쪽 어깨가 탈구되어 응급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재활의학과 의사의 말을 듣고 급하게 수술이 가능한 큰 병원으로 옮겼다. 병원에서 마취를 하고 어깨를 맞췄다. 하지만 넘어지면서 신경이 손상되어 오른쪽 팔에 힘이 빠지고 손끝까지 마비가 돼 손가락을 펼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는 이 이상의 치료는 해줄 게 없다며 진통제만 처방해 줄 뿐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보조기구를 하고 아내와 함께 틈나는 대로 새벽기도회에 나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교구에도 중보기도를 요청했다. 토요일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하면 서대문대교구장님과 교구장님이 따뜻한 위로와 사랑으로 기도해 주셨다. 당시 나는 30분이면 된다는 신경근전도검사를 1시간 반 넘게 받았지만 전기 자극을 아무리 줘도 나타나는 게 없었다. 의사는 다시 신경이 돌아오려면 인내를 가지고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께서 속히 치유해 주실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기도했다. 자꾸 오그라지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당기고 멍이 들 정도로 왼손으로 열심히 주물렀다. 보름 후부터 아주 미세하게 회복되는 느낌이 들더니 점점 나아져 45일 정도 됐을 때 손이 펴졌고 지금은 예전처럼 정상 생활이 가능하다. 이후 맨 처음에 나의 상태를 확인했던 의사를 만났는데 나를 보자마자 손을 들어보라며 확인한 후 영구장애가 될 거라고 예상했는데 정상으로 돌아온 것에 놀라워했다. 나는 손가락을 당기면서 기도했더니 이렇게 좋아졌다고 말씀을 드렸다. 의사는 그렇게 해서 좋아질거면 안 나을 환자가 하나도 없을 거라며 기적이라고 말했다. 나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났지만 오랜 세월 주일 예배만 참석하는 선데이 크리스천이었다. 이번에 하나님의 치료하심을 경험하고 성경 말씀을 매일 읽기 시작했다. 어머니께서 생전에 눈 밝을 때 성경 많이 읽으라고 하셨던 말씀을 이제야 깨닫는다. 예전에는 아내 방현숙 권사가 금요성령대망회에 같이 가서 기도하자고 했을 땐 기도 시간이 너무 길고 5분만 기도해도 더 기도할 게 없어 금요성령대망회에 참석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금요성령대망회 통성기도 시간이 너무나 짧고 빨리 지나간다. 평생 나를 위해 기도하신 아버지 정성한 원로장로님의 사랑도 깊이 느끼고 있다. 앞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며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 정리=복순희 기자
  • 2025.08.29 / 복순희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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