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Q&A
크리스마스의 유래가 궁금해요
  • 크리스마스(Christmas)는 성탄절의 영어표현이다. 먼저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께 드리는 미사’(Christ mass)라는 단어의 줄임말로서 세상의 구원자로 오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예배 의식을 드리는 날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성탄절은 X-mas라고도 표기하는데 X는 희랍어로 그리스도를 뜻하는 크리스토스(Xristos)의 첫 글자이다. 결국 크리스마스와 같은 뜻의 명칭이다. 사실 크리스마스처럼 거의 전 세계가 함께 축제로 보내는 날도 참 드물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탄생을 축하해야 하는 ‘성탄절’인 크리스마스가 세상의 여흥과 환락 그리고 상술만이 판치는 날이 돼버렸다. 심지어 일부 아이들은 크리스마스가 “산타크로스 할아버지의 생일”로 알고 있다는 웃픈(=웃기고도 슬픈) 이야기도 들려오니 입맛이 참 씁쓸하다. 하지만 성탄절이 왜 그토록 기쁜 날인지 그 본질을 올바로 이해하며 진정한 마음과 몸가짐으로 감사하고 즐거워하고 있는지는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구세주 예수님의 온 인류의 죄를 사하기 위해 대신 죽으신 사역과 구원의 의미가 왜곡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12월 25일 성탄절이 공식적인 교회 절기로 교회력에 제정된 것은 354년에 로마 교회의 리베리우스 교황에 의해 제정되었고 성경에는 그 분명한 날짜는 기록돼 있지는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선교사들이 들어온 1885년부터 성탄절을 지키게 되었다. 기쁘다 구주오셨네…! 김에녹 목사
  • 2024.12.20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요?
  •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는 사랑이 많이 있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곧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 성품의 본질이며 그분의 본성 자체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한다. 십자가는 우리 인간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의 표현이다(요일 4:7~12). 이 세상의 어떤 부모가 아니 우리 중에 과연 누가 남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킬 수 있을까?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다. 바로 우리를 위해 말이다.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애절하고도 피맺힌 사랑을 알지 못한다. 세상의 사람들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깨닫지 못한 채 여전히 죄악 가운데 살고 있다(요일 4:9). 노르웨이의 탐험가 난센(F. Nansen, 1861~1930)이 북극 근방 바다의 깊이를 재려고 동아줄을 내렸으나 그 끝이 도저히 해저에 닿지 않았다. 결국 “이 동아줄보다 더 깊음”이라고 기록하고는 다음날 더 긴 줄을 사용했지만 역시 해저에 이르지 못했다. 같은 작업을 며칠 계속하던 그는 일기에 결국 이렇게 적었다. “이 근방의 바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같다. 진정으로 끝없이 깊은 바다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잴 수 있는 측량 도구는 세상에 없다. 십자가는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상징이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다음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4.11.22

    “율법과 죄, 그리고 십자가는 어떤 관계인가요?”
  • 인간의 모든 고통의 근원은 사실 모두 ‘죄’의 문제이다. 그 ‘죄’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율법이다. 율법은 곧 ‘죄의 멍에’를 상징한다. 초대 교부 제롬(Jerome)은 “율법은 속박의 멍에이다”라고 말했다. 율법으로 의로움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멍에를 맨 황소와 같다. 황소는 열심히 밭을 갈고 수고하지만 결국에는 도살장으로 끌려가 죽고 만다. 이처럼 스스로 의로움을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헛되이 힘쓰고 애만 쓰다 율법의 정죄 아래서 마침내 죽고 마는 것이다. 그러한 죽음을 헛된 죽음으로 끝나지 않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율법을 도말하여 제하며(골 2:14), 율법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갈 3:13), 율법의 완성을 감당한다.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17). 율법은 죄의 문제를 들춰 드러나게 하지만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죄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을 때, 우리는 죄의 멍에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능력에 힘입어 영혼육이 모두 구원받고 새생명을 얻게 된다. 율법이 할 수 없는 것들을 십자가는 온전히 이뤄낸 것이다. 십자가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요한은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고 기록했다(요 8:36).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이다(갈 5:1). 우리의 자유는 은과 금으로 산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믿음으로 얻게 된 것이다(롬 8:1~4).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4.10.25

    ‘십자가의 순종’이란 무슨 뜻인가요? 
  •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몸소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모범이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철저한 순종’을 보여준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단지 죄의 문제만을 해결하고자 하는 목적이 전부였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33년간 스스로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시며 고생하시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사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으시기 위해서 성자 하나님으로서 자신이 가지고 계신 영광을 포기하고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또한 그분은 사람의 모양으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다(빌 2:5~11). 예수님의 이러한 순종은 첫 사람인 아담 단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시작된 인간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이기시기 위한 위대한 ‘순종’이었다. 로마서 5장 19절은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 땅에서 고통받을 이유도 아픔을 겪을 이유도 없으셨던 예수님은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기 위해 몸소 고난과 고통을 겪으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히 5:8~9).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고난의 길을 걸으면서 스스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고, 이러한 순종의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몸소 가르쳐주신 것이다. 이렇듯 진정한 ‘순종’이나 ‘헌신’이 사라져 버린 이 시대에 던져주는 위대한 ‘순종’의 모범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4.09.20

    ‘십자가의 대속(代贖)’이란 무슨 뜻인가요?
  • 십자가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완성을 상징한다. 원래 범죄자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 자들에게 집행되었던 형벌이 십자가형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를 대신해 그가 당하셨던 고난과 수치와 굴욕을 상징하며 죄악 중에 출생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한 대속 행위의 증표였다. ‘대속(代贖)’이란 바로 ‘누군가를 대신해 대가를 치르고 속량해 주다’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인류의 죄를 속하기 위해 죽음으로 대속하신 희생에 대한 상징이다(막 10:45). 십자가는 죄로 인하여 완전히 단절돼 버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는 ‘화평과 화목’의 의미를 지닌다. 골로새서 1장 20절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기록했고, 에베소서 2장 15절에서 16절은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리시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하셨다. 우리를 대신해 징계를 당함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됐고, 그가 채찍에 맞으시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됐다(사 53:5~11). 이 모든 것을 이루신 가장 중요한 자리요 사건이 바로 ‘십자가’다. 고대로부터 죄인들에게 집행된 저주받은 형벌의 상징이었던 십자가는 이제 더 이상 형벌이 아니다. 십자가는 이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로운 신분으로 거듭나게 됨을 의미하게 됐다(히 12:2). <다음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4.08.23

    ‘십자가’는 왜 기독교의 상징인가요?
  • 개신교 교회와 가톨릭 성당에서 공통으로 볼 수 있는 것 중에 쉽게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십자가’이다. 또한 십자가는 일반인들에게도 익숙한 형상이다. 여성들이 즐겨 사용하는 목걸이와 귀걸이 중에는 ‘십자가’의 형상을 사용한 것들이 많다. 이처럼 십자가가 기독교의 대표적 상징이라는 것은 크리스천이 아닌 일반인들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원래 십자가는 노예 도적 암살자 등을 처형하던 고대 사회의 처형 도구였다. 구약성경 신명기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신 21:22~23)고 기록한다. 이처럼 십자가는 법률적으로 죄인들을 처형하는 형틀이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유대인들에게는 끔찍한 형상이요 도구였다. 따라서 십자가는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것이었다(고전 1:23; 갈 3:13). 이 점은 로마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십자가형은 형틀에 못 박혀 매달린 사형수를 근육경련과 질식으로 혼수상태에 빠지게 해 고통스럽게 죽게 하는 공개처형이었다. 사형수들은 겉옷과 속옷을 강제로 빼앗겨 벌거벗겨지고 부끄러운 부분만 겨우 가린 상태로 처형되며(눅 23:34), 자기가 못 박힐 십자가를 스스로 지고 가야 한다(눅 23:26)는 점은 십자가형의 잔인성을 보여준다. 로마의 정치가요 철학자인 키케로(M. T. Cicero 주전 106~43년)가 “십자가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로마시민들의 생각이나 눈과 귀에서조차 완전히 제거돼야만 한다. 왜냐하면 단지 십자가형의 실제적 집행뿐만 아니라 그것의 언급마저도 로마시민과 자유인에게는 합당치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십자가형은 혐오의 대상이었다. 바로 이런 저주와 치욕의 십자가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온 인류를 대신해 달려 죽으신 것이다.<다음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4.07.26

    교회에서 행해지는 ‘침례’는 무엇인가요? ④
  •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교회에 허락하신 성례는 두 가지 ‘성찬’과 ‘침례’이다. 침례는 잠깐 동안 우리의 몸이 물에 잠겼다 나오는 의식을 통해 죄를 용서받고 이전의 삶과 다른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했음을 나타내는 의례이다. 침례의 형식으로는 침수례와 관수례가 있는데 본래는 물속에 완전히 잠기는 침수례를 행하다가 12세기 이후부터 머리에 물을 적시거나 뿌리는 관수례가 발전했다. 그 이유는 병자와 어린아이는 물속에 침수시키는 것이 어렵다는 점 그리고 물이 귀한 사막 지역 같은 곳에서의 편의성 때문이었다. 현재 우리 교회가 속한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기하성)와 침례교단은 침수례를 행하고 있으며 가톨릭과 장로교 감리교 등은 관수례를 행하고 있다. 따라서 침례(浸禮), 세례(洗禮), 영세(領洗)는 모두 ‘물세례’를 의미하는 같은 말이다. 다만 우리 기하성 교단과 침례교는 온전히 물에 잠긴다는 의미로 ‘침례’를 사용하며 가톨릭에서는 세례를 받는다는 의미로 ‘영세’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가톨릭에서는 새로 태어났다는 의미로 영세를 받은 사람에게 새로운 이름인 세례명을 부여해 주는 전통도 있다. 원칙적으로 침례는 일생에 한 번 받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침례도 하나요”라고 기록한다(엡 4:5). 따라서 같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 곧 삼위일체 하나님을 마음으로 믿어 받아들이고 입으로 시인해 똑같은 신앙을 고백하며 행해지는 침례는 세계 어디서나 유효하고 중요한 성례전이다. 김에녹 목사
  • 2024.06.21

    ‘성령강림절’이란 어떤 날인가요?
  •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켰던 3대 절기는 유월절(무교절) 맥추절(초실절) 초막절(수장절)이다(출 23:14~16, 신 16:1~17). 이 절기들은 모두 출애굽과 연관된다. 성령강림절은 유대교의 3대 절기인 맥추절 혹은 오순절(五旬節, Pentecost)과 같은 날이다(레 23:9~11). 이스라엘에서 맥추절은 초실절이라고도 하는데 한 해 추수의 처음 열매를 거두는 시기로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리는 날’(민 28:26)이며 보리와 밀을 추수하고 지키는 감사절이다. 오순절은 5를 뜻하는 헬라어(Pente)에서 파생된 말로 ‘50번째 날’(축제일)이란 뜻이며 칠칠절(출 23:14~17)에 대한 헬라식 표현이다.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을 먹는 무교절(유월절) 다음 날부터 계산해 50일째 되는 날에 행해지는 감사 절기를 의미한다. 정리하면 오순절, 맥추절, 초실절, 칠칠절, 성령강림절은 명칭의 의미는 다르지만 같은 날이다. 예수님은 승천하기 전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고 명령하셨다. 제자들은 이 명령에 순종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며 기다렸다. 제자들을 포함한 120명 성도는 예수님 부활로부터 50일째 되는 오순절 날에 임한 성령으로 충만케 돼 전도 활동을 시작했다. 이날을 ‘성령강림절’이라 부르게 됐으며 사실상 기독교의 성립일이다. 서방교회에서는 성령강림절 철야제를 성탄절과 부활절 같이 성대하게 지키고 침례를 행했으며 이는 성령 침례의 의미를 지닌다. 성령강림절은 교회의 확장과 성장을 도모하는 날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성령의 역사와 인도와 충만을 기도하게 된다. 교회력에서는 성령강림절 이후 강림절(성탄절 4주 전 주일, 대림절)까지의 주일들은 ‘오순절 후 주일들’로 불린다. 올해는 지난 5월 19일 주일이 ‘성령강림절’이었다. 김에녹 목사
  • 2024.05.24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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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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