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o, Israel
이스라엘의 외로운 투쟁 (2)- 반유대주의, 생존의 싸움
  • 이스라엘과 가자지구 전쟁이 발발한지 벌써 1년이 되어가고 있다. 지난해 10월 7일 가자지구를 점령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인 하마스가 이스라엘 남부 가자인근 네게브에 위치한 키부츠 마을을 침공하여 1500여 명을 강간, 살해하고 240여 명을 납치해서 가자로 끌고 갔다. 이후 이스라엘은 즉각적인 반격과 함께 하마스 척결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가자지구로 진격했다. 이스라엘 군대인 IDF는 인질의 구출과 하마스를 궤멸시키기 위해서 지금까지 가자 지구에서 전투와 함께 민간인 보호를 진행하고 있다. 여전히 돌아오지 못한 인질들이 130여 명이나 되며 그 중 몇명이 살아 있는지 아직까지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하마스의 공격을 받고 민간인들이 살해당했을 때, 전 세계는 깜짝 놀라며 이스라엘을 향해 위로의 메시지를 보내고 이와 관련된 보도를 시작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난 이후 전 세계 언론들은 이스라엘을 향해서 반대하는 메시지와 하마스가 다스리던 가자지구에 대한 피해에 대해 집중보도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의 시민들의 참혹한 죽음에 대한 언급은 어느새 인가 사라지고 팔레스타인들에 대한 옹호, 하마스에 대한 지지의 목소리가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심지어 미국 캠퍼스 내에서는 반이스라엘 운동과 함께 반유대주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났다. 미국 지성의 선두에 있다는 아이비리그 대학만이 아니라 수많은 미국의 대학 내에서 반이스라엘 운동과 하마스, 팔레스타인 지지 운동이 일어났다. 물론 전쟁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반전 운동을 한다던 지 이스라엘의 작전 수행 중 일어나는 민간인 피해를 줄이기 위한 시위는 얼마든지 이해되지만 학교 내 성조기를 태우고 팔레스타인 국기를 거는 일이나 유대인 학생들을 위협하는 폭력적인 행위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스라엘은 이 속에서 외로운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반유대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다시금 일어나고 있다. 비단 지금의 전쟁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도 모르게 반유대주의적 정서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유럽 사회에서 만이 아니라 지금 미국 사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반유대주의는 2차 세계대전 나치가 유대인 학살을 주도하기 이전과 비슷한 양상을 지니고 있다. 솔직히 지금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유대주의 반이스라엘 시위에서 “강에서 바다까지”라고 하는 시위대의 외침은 어떤 의미인지를 모른 채 왜곡된 역사와 잘못된 이해 가운데서 무조건적인 유대인을 향한 미움으로 외쳐지고 있다. 강은 요단강이며 바다는 지중해이다. 다시 말하면 요단강에서부터 지중해까지 팔레스타인들에게 돌려주라는 외침이다. 현재의 이스라엘 영토 지배를 부정하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존재를 무시하는 이야기이다. 한 리포터가 시위대의 대학생에게 질문했다. “이런 주장 속에서 유대인들은 어디로 가라는 말인가?” 학생의 대답은 나를 실소하게 했다. 그것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어디로 갈지 내가 알바인가”라는 대답을 들으면서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 사이프러스의 난민캠프에 모였던 수십만 명의 유대인들을 향하여 던져진 질문이 그것이었다. ‘우리는 어디로 가란 말인가?’ 반유대주의 흐름 속에서 유대인들은 어디로든 갈 수가 없는 신세가 되었다. 역사 속에서 유린하는 백성이라는 타이틀이 이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어렵게 UN을 통해서 얻어낸 땅에서 살고자 했던 이들이 마주한 것은 4차례의 큰 전쟁이었다. 그 전쟁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에게 또다시 학살과 죽음을 마주하게 한 사건이 작년 10월 7일의 사건이었고 이 세계 어디에도 그들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알게 한 것이 지금의 반유대주의 시위와 반이스라엘 시위이다. 그것도 자신들이 우방이라고 여겼던 미국과 서구 국가에서 말이다. 한 유대인 친구의 집에서 샤밧 금요일 저녁을 먹으면서 나누었던 대화가 문득 떠오른다. 그 친구는 내 종교가 무엇인지 물었다. 나는 기독교인이라고 말하고 개신교 복음주의자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함박 웃으며 말했다. “우리 이스라엘에는 더 많은 복음주의자 친구들이 필요해. 그들은 우리가 여기 살아도 된다고 믿고 지지하고 있으니까!” 함께 크게 웃었지만 씁쓸한 이야기였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이 땅에 살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이들에게 총칼을 들이밀며 나가라는 세력들은 진짜 이 땅을 사는 팔레스타인들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유대인들이 미워서이다. 그들에게 목표는 이스라엘의 전멸이니까. 정말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시기이다. 오늘도 난 광야로 나가 하나님께 이 땅의 평화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한다. 김요셉 목사
  • 2024.08.23

    이스라엘의 외로운 투쟁 … 하나님의 지혜로 세상을 바라봐야
  • 성경 여호수아서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의 족속들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진멸하는 이야기는 많은 이들이 전쟁의 이야기로만 오해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성경 신명기에서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한다.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야훼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신 7:1~2). 여기에 등장하는 진멸이라는 단어는 헤렘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심판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고 제명이라는 뜻도 담겨 있다. 민족의 진멸에는 그 민족에 대한 절대적 멸족이라는 의미보다는 심판과 하나님의 언약에서의 제외라는 커다란 의미가 담겨 있다. 여호수아는 이 말을 받아서 가나안 족속들을 복속시켰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과 어긋난 방식으로 되어진 점령과정에서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그 일을 이루질 못하고 옆구리에 가시가 되는 민족들과 화합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한 이스라엘의 타락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가나안 땅의 민족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은 심판에 대한 이야기였다. 누군가를 해치거나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함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임과 동시에 하나님을 떠나 사는 이들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이다. 과거 기독교는 이 단어를 이용하여 이교도들에 대한 심판으로 이용했다. 또한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심판과 탄압 그리고 폭력과 학살의 정당성으로 사용해 왔다. 지금도 우리의 생각 저변에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부분이 먼저이면서 그로 인해 타민족 특히나 이방종교 민족에 대해서 행해지는 전쟁과 폭력에 묵인해 오는 것이 많았다. 과거 이스라엘, 유대 민족이 당했던 학살과 박해는 이에 기인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지난 역사 속에서 유대인들은 이방민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민족, 구세주를 외면한 이들이라고 낙인 찍혀서 온갖 박해와 핍박 그리고 심지어 학살을 당했다. 현대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한 이후 유대인들은 또 다른 왜곡 프레임에 놓여 핍박과 미움을 당하게 된다. 이스라엘 국가의 탄생이 유대인들의 돈과 권력으로 탄생했다고 하거나 미국이 밀어줘서 팔레스타인들을 내쫓고 그 땅을 차지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런 오해들 속에서 이스라엘은 독립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계속 전쟁의 위협과 위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향한 거짓과 왜곡 속에서 유대인들과 이스라엘 국가를 바라보고 있다. 하마스와의 전쟁만 하더라도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잘못만을 뉴스 미디어와 매체들이 보도하고 있다. 2023년도 10월 7일 이후 전 세계의 여론은 반이스라엘로 돌아섰다고 본다. 세계 곳곳에서는 반이스라엘(Anti-Israel) 시위가 일어나고 있으며 지성의 최고봉이라는 미국의 아이비리그 대학가에서는 반이스라엘 시위와 함께 친하마스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하마스가 일으킨 전쟁이 언젠가부터 이스라엘이 일으킨 전쟁으로 바뀌었고 하마스가 일으킨 유대인 민간인 학살과 납치는 사라지고 이스라엘의 공격만 보도된다. 이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전쟁을 일으킨 국가가 되고 왜곡된 이야기들은 일파만파 세계에 퍼지게 되어서 유대인들과 이스라엘은 점점 고립되고 있다.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던 유대인들은 전쟁국가의 자손으로 치부되어 학교에서 고립되거나 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유엔은 이스라엘에게 부당한 책임을 부여하고 있고 누구도 진짜 사실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는다. 폭력적으로 쏟아지는 비난과 비판 그리고 왜곡된 사실들만이 이스라엘을 옥죄고 있다. 이스라엘의 적은 누구일까? 오히려 이스라엘의 적이 아닌 이들을 찾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다. 이미 이스라엘은 홀로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다. 이제는 남쪽의 하마스만이 아닌 북쪽의 헤즈볼라 그리고 시리아와 이란까지 싸워야 하는 어려움에 놓여 있다. 이럴 때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의 편을 들며 서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실들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지혜를 얻도록 기도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지혜로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도록 기도하자. 김요셉 목사
  • 2024.07.26

    이스라엘 건국 76주년을 맞이하면서-삶의 여유가 아닌 생존의 싸움
  • 1948년 5월 15일 이스라엘 국가의 설립이 선포되었다. 당시 뉴욕타임즈의 1면에는 “시오니스트들이 새로운 이스라엘 국가를 선포하다”라고 대서특필 됐다. 당시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하였다는 기사와 함께 텔아비브가 폭격을 당하고 이집트가 침공을 명했다고 쓰여있다. 이스라엘은 올해 2024년에 건국 76주년을 맞이했다.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이스라엘은 현재 너무나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난해 10월 7일 가자지구를 점령한 하마스의 무차별 공격과 침입으로 인해서 21개의 가자 인근 키부츠와 마을이 공격을 당했다. 7000명 이상이 죽었고 아직까지 인질 130명이 가자지구에 붙잡혀 있다. 뿐만 아니라 지난 하마스의 공격에 대응하여 보복공격을 감행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북부와 중부를 점령해 나갔고 200만명의 팔레스타인 피난민들은 전쟁을 피해서 가자 남쪽으로 피신했다. 이를 계기로 북쪽 레바논 접경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테러단체인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마스를 돕는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스라엘 북부는 헤즈볼라의 미사일 폭격으로 인해서 20만명의 피난민이 마을과 도시를 버리고 남으로 피난을 가야 했다. 이스라엘 국가가 전란에 휩싸이고 새로운 중동전쟁이 시작될 것만 같았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250여 일이 지나는 시점에서 위협은 여전히 남아있다. 이스라엘 국가는 현재 여러 측면에서 위협과 비난을 마주하고 있다. 작년 이스라엘의 보복공격이 감행된 이후부터 서서히 일어난 반유대주의와 반이스라엘 운동은 본격적으로 미국과 유럽 등지의 대학가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너무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세계에서 제일가는 학문을 자랑하는 미국의 대학가에서 역사적 근거가 없는 외침과 일방적인 비난이 이스라엘을 향해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번 사태의 원흉이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이라고 비난을 쏟아내면서 미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발언을 하기도 한다. 국가가 설립된 이후 지난 76년 동안 이스라엘은 한번도 평화롭게 지내온 적이 없었다. 잠시의 평안이 존재는 했지만 계속적으로 위협과 도발 속에서 살아온 것이 이 국가의 역사이다. 건국 이래 4번의 커다란 중동전쟁이 있었고, 2차례의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민중항쟁)가 있었다. 이스라엘 국가 설립 이후 유대인들은 안전하고 인정받는 삶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꿈꾸면서 이룩하고 살아왔다. 76년 동안의 노력으로 이스라엘은 전쟁의 여파 속에서도 다시금 일어나 지금의 놀라운 모습들을 만들어 왔다. 열심히 노력하고 이루어 낸 것들 속에는 자신들만의 삶이 아닌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노력들도 담겨 있었다. 누군가가 주장하는 것처럼 유대인들만의 국가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아랍인도, 베두인도, 소수민족들도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유대국가를 만들어 가는 것이 테오도르 헤르쩰과 다비드 벤구리온의 꿈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꿈이 위협을 받고 있다. 삶을 누리는 것보다 삶을 생존해 가는 것,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의 생존의 싸움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 대학가에서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부르짖는 그들의 외침 속에서는 유대인들의 홀로코스트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전을 외치고 전쟁을 그만두라는 외침 속에서는 이 전쟁의 시작인 하마스라는 테러단체에 대한 고발과 비판은 없다. 학살을 멈추라는 외침은 하마스 테러리스트들의 손에 무차별 학살을 당한 유대인 민간인들과 어린 아이들의 피는 무시하고 있다. 전쟁의 피해자는 팔레스타인만이 아니라 유대인들도 포함되어 있으나 엄격한 이들의 잣대에는 유대인들은 학살자이고 전쟁과 피를 좋아하는 사람들로 표현되고 있다. 생존의 싸움을 살아가는 유대인들은 이런 비난과 매도 속에서 꾸준히 삶을 이어가고 있다. 하루하루 잡혀간 이들이 돌아오기를 기도하면서 오늘의 삶에서 나의 가족들이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다. 휴전을 요구하면서 여전히 민간인 지역을 향해서 미사일을 쏘아 올리는 하마스에 대응하면서 이스라엘은 묵묵히 생존해 가고 있다. 누군가는 이 싸움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영토싸움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 싸움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생존의 싸움이다. 하마스와 이란은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의 존재를 말살하기를 원하고 있고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생존을 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가운데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이스라엘에게 있기를 기도해야 한다. 폭력으로 누군가를 해쳐서 얻으려는 자들을 잠재우고 자비와 긍휼로 이 땅을 돌볼 수 있는 지혜와 마음을 이스라엘이 가질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들이 중보해야 할 것이다. 김요셉 목사
  • 2024.05.24

    이스라엘의 유월절 풍경 … 자유와 구원을 선포하다!
  • 올해 유월절은 예년에 비해서 한 달이 늦은 4월에 찾아왔다. 올해 유월절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필자는 정규 신학교를 나와서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며 목사로 사역해 왔다. 이스라엘을 오기 전까지는 아무런 저항이 없이 기존의 신학과 교육 안에서 가르치는 것과 배워왔던 것들이 크게 부딪치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이스라엘에 오게 되면서 많은 생각들이 부딪히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절기에 관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성경적 절기들을 지켜온다. 우리가 추석을 지키고 교회에서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을 지키듯 이들은 유월절, 오순절, 나팔절, 대속죄일 그리고 초막절을 지켜오고 있다. 우리는 기독교 안에서 이런 절기들을 유대교의 절기라면서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쳐 왔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런 절기들은 유대교의 절기라기보다는 성경 안에서 하나님이 가르친 하나님의 절기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키라고 가르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에도 없는 부활절, 추수감사절 그리고 성탄절을 크게 의미를 두면서 꾸준히 열성적으로 지켜왔다. 이번 유월절을 준비하면서 더 많은 생각들이 교차해 갔다. 우리는 성경의 절기들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잣대를 대고 비판하고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유월절은 의미가 큰 절기이다. 성경적으로 그리고 신학적 관점에서도 유월절을 대하면서 하나님의 구속하심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연관 지어서 설명한다. 그런 이해 속에서 유월절은 그리스도의 속죄하심과 구원하심이 선명하게 나타나는 절기인 것이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하나님은 애굽을 아홉 가지 재앙으로 심판하신 이후 마지막 재앙인 장자의 죽음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시려고 하였다. 하나님은 명확하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을 해야 그 죽음의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설명해 주셨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문지방과 기둥에 바른 집들이 죽음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유월, 즉 지나갔다는 의미로서 영어로 패스오버(Passover) 히브리어로는 ‘페싸흐’라고 불리고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은 무조건 죽음이 넘어갔다는 대목이다.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누구든지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은 죽음이 넘어간 것이다. 이집트 백성들도 하나님의 명령대로 어린 양의 피를 바르거나 혹은 이집트인과 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친구들의 집에 어린 양의 피를 발라 주었다면 그 집들은 모두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은 특정한 이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니라 구원의 약속을 받은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임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풀려난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는 자유를 향한 하나님의 선포이며 구원의 선포이다. 또한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누구나 그 언약을 믿고 그 약속의 상징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구원이 임한다는 선포이다. 이 선포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히 충격적이며 강력한 것이다. 자칫 기독교 우월주의에 빠질 수 있는 우리의 구원이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것이며 믿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생명의 선포이자 자유의 선포라는 것이다. 유월절을 기억하고 지키는 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유익한 일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 유월절 어린 양과 같은 피 흘림을 통해 구원을 이루실 하나님의 계획임을 알게 하는 절기인 만큼 이를 지키면서 누리게 될 은혜는 더욱 풍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이 이 절기를 계속해서 지켜 나갈 수 있도록 이들을 인도하고 계신다. 우리는 이번 절기를 이 지역에 공부하러 온 유학생들과 함께 나누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었지만 이스라엘에 공부하러 왔기에 유대교식 절기를 지내보고자 모였다. 유월절 메시지를 듣게 되고 절기의 의미를 되새기고 나자 그들의 표정에는 더욱 커다란 은혜가 남아있었다. 하나님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과 속죄함으로 나타나기까지 하나님은 이 절기를 통해서 기억하게 하시며 가르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올해 유월절은 더욱 이런 메시지가 필요하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으로 인해서 아직까지 갇혀 있는 이들이 자유함을 얻고 죽어간 이들과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어린 양의 속죄함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 유월절 저녁을 보내면서 함께 기도해 본다. 김요셉 목사
  • 2024.04.26

    라마단을 대하는 태도: 이스라엘의 공존과 화합을 향한 노력
  • 이 시기가 되면 이스라엘은 무척이나 긴장하게 된다. 이 시기에 두 개의 절기가 서로 만나게 된다.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절기인 부림절(Purim)과 한 달 동안 금식이 계속되는 이슬람의 절기인 라마단이다. 라마단은 이슬람의 절기로서 30일간 해가 떠 있는 동안은 금식을 하고 해가 지고 나면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음식을 먹으면서 하루 동안 주어진 알라의 은혜와 기쁨을 나누는 시간이다. 그리고 30일이 지나면 한 달 동안의 금식의 고행을 지킨 것을 기념하면서 성대한 잔치를 벌이고 먹고 마시는 축제를 즐기게 된다. 모두가 알다시피 예루살렘에는 황금돔 사원(Dome of Rock)이라는 이슬람의 성지가 있다. 매년마다 라마단 기간동안 무슬림들은 이 사원이 있는 예루살렘 성전 산의 알아크사 사원과 그 앞 광장에 모여서 기도회를 하게 된다. 금식 기간동안 기도를 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서 팔레스타인 무슬림들과 인근 요르단에서도 수많은 무슬림들이 성지순례를 오게 된다. 가뜩이나 서로의 관계가 좋지 않고 현재 이스라엘과 가자지구와의 전쟁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예루살렘은 더욱 긴장감이 올라가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갈등은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왔다. 그러나 이 갈등 속에서도 이스라엘은 무슬림들을 존중하면서 라마단을 지키게 하는 데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수많은 무장한 경찰들과 병력들이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예루살렘 구 시가지를 철통같이 보안하고 테러에 대비하고 있다. 누군가를 억압하기 위함이 아니라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갈등보다는 화합과 공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이를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 이스라엘은 문화적인 다양성과 종교적 다양성을 존중하는데 노력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비롯한 다양한 종교적 그룹들이 공존하는 나라로서, 각 종교 그룹의 신념과 문화를 존중하고 지지한다. 이스라엘은 다양한 종교적 축제와 의식을 존중하고 지원함으로써 문화적 구분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라마단 기간, 이스라엘은 무슬림들의 신념과 전통을 존중하면서 라마단을 지키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도시들은 라마단을 축하하는 이벤트를 개최하고, 무슬림들이 금식을 지키고 기도를 드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또한, 이스라엘 정부는 라마단 기간 동안 무슬림들의 식사를 지원하고 그들의 종교적인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노력한다. 항간에 괴담처럼 떠도는 이스라엘이 무슬림들을 핍박하고 있으며 분리시켜 제한한다는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누구나 원하면 자신들의 종교를 섬길 수 있는 곳이 이스라엘이다. 하지만 라마단 기간만 되면 무슬림들과 유대인들 간의 갈등과 폭력은 여느 때보다 더 심하다. 구시가지의 다메섹문(다마스커스 게이트-아랍구역)에서는 팔레스타인 청년이 이스라엘 경찰을 향해서 칼을 휘둘러 죽이거나 다치게 하고 이스라엘 군인은 그런 테러범을 사살한 뉴스가 보도가 된다. 가장 거룩한 절기이며 금식의 절기에 누군가의 생명을 해치려 하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알라를 섬기는 이들에게 금식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오랜 시간 뒤틀린 시각과 정서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야 함에도 이 절기만 되면 다들 극도로 흥분하여 공격하려는 경향으로 나타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스라엘은 갈등과 대립보다는 화합과 공존을 위해 나아가려 하고 있다.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존중하며,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갈등을 해소하고 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증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슬람은 스스로를 평화의 종교라고 말한다. 그러나 라마단 기간 동안 이들이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을 향하여 쏟아내는 말과 행동은 결코 평화와는 멀기만 하다. 시편의 기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시120:67). 라마단 기간동안 하나님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주님이 직접 찾아와 주셔서 참 평안을 얻게 하고 화평을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에게 진정한 평화가 찾아오기를 간절히 기대해본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은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노력과 무슬림들을 포함한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존중하는 태도는 지역의 평화와 공존을 위한 중요한 발걸음임을 보여줍니다. 함께 노력하여 갈등을 극복하고, 모든 이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세상을 만들기를 희망합니다. 김요셉 목사
  • 2024.03.27

    이스라엘 독립의 아버지, 네게브에 소망을 가진 벤구리온
  • 전 세계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오는 비행기는 모두 텔아비브 국제 공항에 착륙한다. 수많은 순례객과 방문객이 들어오는 관문이 바로 텔아비브 인근에 위치한 벤구리온 국제공항이다. 공항을 나서는 문 앞에 장식된 벤구리온의 흉상이 모두를 반겨준다. 벤구리온을 지역 이름이나 공항의 이름으로 아는 이들이 많다. 혹은 벤구리온이 이스라엘의 초대 수상인 것을 아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정작 벤구리온이 누구인가를 물어보면 그 이상을 아는 이들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유명하지만 그리 유명하지 않은 인물 중 하나가 벤구리온인다. 이스라엘의 유명 인사들 중에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아는 인물이 별로 없다. 근대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하는 이들 중에서도 초대 수상이었던 벤구리온에 대한 이야기를 아는 이들이 많지는 않다. 하지만 근대 이스라엘 역사를 말함에 있어서 벤구리온은 너무나도 중요한 인물이다. 다비드 벤구리온은 이스라엘 초대 수상이자 ‘쥬이시 에이전시(Jewish Agency, 유대인들의 이민과 삶을 돕던 민간기관)’의 수장이었던 인물이다. 우리가 사진으로 보게 되는 벤구리온의 얼굴은 양쪽으로 머리가 삐죽 솟아있는 고집스런 얼굴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가 이스라엘에 대해서 예언자적인 비전과 열정을 가진 사람인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대부분이 아는 것이 그가 초대 수상이며 제1차 중동 전쟁, 이스라엘의 독립전쟁을 이끌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이 아마도 전부일 것이다. 벤구리온의 일생은 뜨거운 열정의 인생이었다. 1886년 10월 16일 폴란드에서 출생한 그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테오도르 헤르츨의 『유대국가론』을 읽고 그의 강연을 들으면서 시온주의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자랐다. 아직 오토만 제국 시절이었던 1906년 그의 나이 20살에 이스라엘로 넘어와 그곳에 시온주의 청년단을 결성하여 정착촌을 만들고 신문을 발행하면서 그의 젊음을 시온주의에 바치게 되었다. 그 후 영국령 팔레스타인으로 넘어오게 되면서 그의 본명인 벤 그룬을 히브리식 이름인 벤 구리온으로 개명하고 히브리어로된 신문과 글들을 발행하였다. 그 시절이 그의 제일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기였다. 하지만 유대인의 부흥과 발전을 위해서 온 몸을 다 바쳤다. 이후 1914년부터 1948년 독립 이전까지 그는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유대국가의 필요성을 알리면서 살게 된다. 그는 수많은 사건들과 유럽의 반유대주의를 목격하면서 유대인들에게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국가가 필요함을 깨닫게 되고 수많은 반대와 비난 속에서도 국가 설립을 위한 일들을 끊임없이 해왔다. 그에게 있어서 유대국가의 설립은 그의 스승과도 같은 테오도르 헤르츨의 유산이며 그의 삶의 목표였던 것이다. 그의 꿈은 팔레스타인이라고 불리는 그 땅에 유대인들의 국가를 세우는 것이며 그 국가는 모두가 안전하고 공평하고 평등하게 사는 것이었다. 그의 국가론에는 차별과 차등이 없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독립 선언서에는 유대인과 아랍인, 베두인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갈 것을 언급하고 유대교와 이슬람, 기독교 모두가 존중 받는 국가를 세우는 것이 목적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스라엘 독립의 아버지인 벤구리온은 특히나 네게브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말년의 3년 반을 살았던 네게브 스데보케르 키부츠에는 그의 생가가 박물관으로 남아있다. 작은 집을 개조하여 살았던 그의 집무실 책상과 책장에는 수많은 서적이 빼곡하게 남아있다. 그의 삶 속에서 네게브는 이스라엘의 소망이었고 미래였다. 어렵게 얻은 땅이었지만 그 절반이상이 경작할 수 없는 불모지였다. 하지만 벤구리온은 그런 네게브의 광야가 푸르러지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고 이곳이야 말로 이스라엘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이스라엘 남부 네게브에 대한 열망은 남달랐다. 그는 이스라엘의 미래를 위해서 네게브가 발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를 위해서 그는 이미 1950년도에 태양열발전과 농업진흥을 위한 기술개발 그리고 더 나아가 네게브에 수많은 도시를 세워야 하는 비전을 내보이기도 했다. 벤구리온은 가장 무신론적인 모습으로 살아갔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평생을 이끌어 갔던 것은 성경의 롤 모델인 모세였고 신명기의 말씀이었다. 그는 종교적 인물이 아니었지만 신의 모습을 갈망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평생을 유대인의 안전과 발전을 위해서 힘써온 인물이었다. 그의 수많은 말들 중에 하나만 인용하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용기는…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는 방법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에 대한 지식입니다.” “이스라엘에서 현실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적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도 벤구리온처럼 기적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용기를 가졌으면 한다. 김요셉 목사
  • 2024.02.23

    이스라엘의 중심, 텔아비브- 하나님을 떠난 탕자의 도시
  • 한국에서 성지순례를 떠난 비행기가 12시간 남짓의 시간을 날아서 이스라엘 영공으로 들어선다. 이스라엘을 향해서 날아오는 모든 국제선 항공편은 텔아비브 인근에 위치한 벤구리온 공항을 통해서 들어온다. 물론 일부 유럽에서 오는 노선 중에는 다른 작은 공항으로 향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항공편은 벤구리온 국제공항을 통해서 들어오게 된다. 그렇기에 텔아비브는 국제공항을 끼고 있는 이스라엘의 관문도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영화 중 ‘제로 모티베이션’이라는 영화가 있다. 군에 복무하고 있는 젊은 여성군인들의 갖가지 갈망과 갈등을 잘 그려낸 블랙 코미디 영화이다. 그 영화에 등장하는 한 여주인공이 바라는 것이 바로 텔아비브에서 군복무를 하는 것이다. 그녀는 텔아비브에 근무하면 자신이 무언가 도시여자가 된 것 같다는 표현을 한다. 그만큼 이 도시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선망을 주는 도시이다. 자유와 해방의 도시, 선진 문화와 경제적 중심의 도시 그것이 이스라엘의 텔아비브를 지칭하는 명칭들이다. 텔아비브는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선망의 도시이다. 가장 발달한 도시이며 가장 도시적인 곳이다. 뉴욕과 런던 그리고 다른 수많은 화려한 서구의 도시들과 비교하기는 그렇지만 높다란 마천루와 지중해를 끼고 있는 바닷가 그리고 이스라엘의 초기 시작과 함께 발달한 산업과 경제, 문화는 모두 텔아비브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7년 6일 전쟁을 통해서 예루살렘이 수복되기 전까지 이스라엘의 중심은 텔아비브이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할 때만 해도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차지하지 못했다. 이는 무려 20년이나 지나서야 얻게 된 것이다. 물론 그때도 이스라엘의 잠정적 수도는 예루살렘이라고 모두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텔아비브는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현대 이스라엘 국가의 수도로서 한동안 그 역할을 했다. 지금은 모든 정치적 사회적 중심이 예루살렘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여전히 텔아비브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도시로서 그 기능을 하고 있다. 학문의 중심인 텔아비브 대학과 바르-일란 대학이 위치하고 있고 이스라엘 국립 발레단과 오케스트라를 품고 있는 문화의 중심지이다. 이스라엘은 민주주의 국가로서 국교는 없지만 공식적으로는 유대교 중심의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 유대교의 율법이 사회규범으로 작용하면서 안식일에는 대중교통이 운행하지 않고 모든 상업 활동은 금요일 오후에 멈추고 안식일을 지키게 된다. 하지만 텔아비브는 오래전부터 이런 유대교적 사회 규범에서 벗어난 도시였다. 바닷가는 안식일이 되면 휴식을 하러 나오는 수많은 인파들로 붐벼 이곳에서는 수많은 카페와 음식점들이 영업을 하고 있다. 또한 수많은 클럽들과 술집들이 안식일에도 문을 열고 크고 작은 슈퍼마켓도 영업을 한다. 이스라엘의 다른 도시들과는 다른 삶을 보여주는 것이 텔아비브이다. 텔아비브는 발전된 문화와 사상 그리고 경제의 중심이 되기 이전에는 무척이나 가난한 어촌 마을이었다. 지금의 현대적인 텔아비브 도시에서 불과 10분 남쪽으로 내려오면 만나게 되는 작은 도시가 바로 우리가 성경에서 잘 알고 있는 욥바라는 도시이다. 욥바는 19세기 말까지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중심 해안 도시였다. 텔아비브는 유대인 정착인들과 가난한 어부들이 살던 촌이었다. 아랍인들은 욥바를 중심으로 상업을 이어가면서 부를 축적하고 있었으며 기반이 없던 유대인들은 북쪽으로 밀려 텔아비브라는 작은 마을을 만들어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 곳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유럽에서 이주해 오고 발전시키면서 점차 경제의 중심이 텔아비브로 오게끔 만들었다. 그 당시 몇 안 되는 지중해를 통하는 항구를 개척하여 하이파와 텔아비브 그리고 욥바를 중심으로 팔레스타인의 해상 무역이 활발하게 시작됐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독립할 당시 독립선언문을 외쳤던 곳이 바로 텔아비브이고 여전히 그곳에 독립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신앙적 본질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수도라면 텔아비브는 현대 이스라엘의 탄생과 경제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도시 중 가장 다양한 인구분포도를 가진 도시가 텔아비브이다. 유대인과 아랍인 그리고 이민자들이 뒤섞여 있다. 빈부격차와 사회적 갈등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만큼 테러의 목표가 되는 도시이다. 미움과 반목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그 영향력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곳이 텔아비브이다. 현재 텔아비브는 화려하게 가장한 도시이다. 화려함과 능숙한 몸짓으로 사람들에게 많은 선망의 대상이 되고 기대를 갖게 하지만 아프고 슬픔이 가득한 곳이다. 수많은 교회와 단체들이 도시의 이곳 저곳에서 소외된 자들과 노숙자들 그리고 마약과 술로 중독된 이들을 돌보고 있다. 이스라엘의 가장 화려한 도시, 하지만 가장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도시가 바로 텔아비브이다. 김요셉 목사
  • 2024.01.26

    하누카와 성탄절, 하나님의 메시지
  • 벌써 2023년도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분쟁과 자연재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2년이 넘게 지속되고 있으며 튀르키예와 아프가니스탄을 강타한 지진은 아직까지도 복구가 되지 못하고 있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지만 이스라엘처럼 한 해의 마지막이 이토록 비극적이고 애통할 수 있을까 싶다. 지난 10월 7일 가자지구를 통치하던 팔레스타인 무장테러 단체인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향해 선포한 전쟁은 학살과 만행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가자지구를 초토화시키고 있다. 하마스를 박멸하겠다는 외침과 함께 시작한 전쟁은 하마스만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가자 모두에게 커다란 상처와 아픔 그리고 피폐함을 주고 말았다. 아직까지도 계속되는 전쟁은 240명의 인질들이 모두 풀려날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이스라엘의 선포처럼 여전히 진행 중이다. 모두가 괴로움 속에서 살고 있다. 이 전쟁 중에 두 가지 명절이 찾아왔다. 하누카라는 유대인의 절기와 성탄절이다. 모두가 기쁘고 즐거워야 할 명절이지만 올해는 조용하다. 빛의 절기인 하누카는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함이 있었다. 과거 이스라엘이 헬라 제국의 속국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은 이방신의 제사로 더럽혀졌다. 이에 분연히 일어난 제사장 그룹들과 유대인들은 싸웠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하고 이를 축하하기 위해서 수전절(하누카)이 생겨났다. 이 절기는 빛의 절기이면서 성전을 수복하고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회복된 날이다. 그래서 이날은 헌신의 절기라고도 한다. 엄밀히 말하면 성탄절은 성경에 나오는 절기는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성탄절을 기리는 것은 그 절기가 가지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죄사함을 통해서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다시금 회복시킨 것이다. 소망 없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오셔서 자신을 드러내시고 죄로 인해 무너진 영혼들을 회복시킨 날이 성탄절이다. 성탄절과 하누카, 모두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성이 회복된 절기이다. 이스라엘에서 두 절기가 올해는 너무나 조용하게 지나가고 있다. 현재 이스라엘은 모두가 아파하고 있다. 하마스에게 납치된 가족들도 아파하고 전쟁 중에 전사한 군인들의 가족들도 아파한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주위의 친구와 친척들도 아파하고 괴로워 한다.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시민들도 힘들어 한다. 하마스가 모든 것을 붙들어 왔기에 그들이 의지할 곳이 아무데도 없다. 모두가 일상을 살아보려고 하지만 다들 어떻게 해야 할지 방황하고 있다. 그들의 삶이 예전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2000년 전 예수님이 태어났던 시대도 그랬다. 그리고 그 이전에도 그랬다. 언제나 아파하고 힘들어 하던 그 시기에 하나님은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하셨다. 제국을 물리치고 성전을 수복하게 하시고 하나님 그분이 직접 우리 가운데 임재하셨다. 빛으로 오셔서 세상을 밝히시고 어린 양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지금 이스라엘에는 소망이 필요하다. 가자에도 소망이 필요하다. 모두에게 소망이 필요하다. 이 어두운 상황 속에서 오직 하나님이 빛과 소망이 되신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속히 끝나길 기도한다. 전쟁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 하셔서 모두가 서로를 죽이기 위한 전쟁이 아닌 악을 도말하고 생명을 살리는 전투를 할 수 있도록 기도한다. 또한 수많은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악한 세력들로 인해 더 이상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기도한다. 이 땅에서 더 좋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길 기도해 본다. 올 한해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내년에는 반드시 더욱 아름답고 좋은 이스라엘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김요셉 목사
  • 2023.12.29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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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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