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을 위한 성경동화
어른들을 위한 동화 12 - 사울의 실수(삼상 1:8~14)
  • “큰일났습니다. 지금 블레셋이 병거 3만과 마병 6000을 거느리고 우리와 싸우기 위해 몰려오고 있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된지 2년만의 일이다. 이 소식은 벌써 온 지역에 다 퍼져 백성들이 전쟁은 커녕 피난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쟁을 지휘해야 할 사울 입장에서는 사기가 가장 중요한데 벌써 겁먹고 두려워하는 자들을 보고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2년 전 만해도 사울의 한 마디에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는데 도대체 2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마땅히 의지해야 할 사울을 의지하지 못하고 피난 짐을 쌓고 있단 말인가. 사울은 흩어지는 백성들을 보면서 조급해졌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를 오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사무엘 선지자가 나이가 고령이라 오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일주일 동안을 기다려도 그는 오지 않았다. 오고 있는 중이라는 소식만 반복적으로 들린다. 기다리다 지친 백성들은 다시 흩어지기 시작한다. “모이라. 우리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가서 싸우자”하고 사울이 소리 질러 보았지만 오는 사람이 없다. 바로 이게 문제였다. 그래서 사울이 두려움에 떨게 된다. 사울이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린다. 상황적으로 보면 그리 사울만 탓할게 아닌 것 같은데 사울도 사무엘이 도착했을 때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왕위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줄을 사울은 전혀 몰랐다. 무엇이 그리 잘못되었단 말인가? 하나님이 보신 사울의 속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사울이 제사를 드린 것은 백성들이 흩어지는 것을 면하게 하려고, 흩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제사를 드린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응답을 듣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다. 사울에게는 2년 전 겸손하게 하나님을 구했던 그 마음이 없었다. 오직 백성만 눈에 보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제사가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의 뜻을 묻는 시간이 아니고 백성들을 자기에게로 오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즉 이 경건은 믿음이 아니라 수단이었기에 하나님이 진노하신 것이다. 또한 부득이하다는 사울의 말이 불신앙적 변명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부득이함은 통하지 않는다. 사실 사울의 마음속에는 고령이 된 사무엘에 대한 무시가 있었기에 이런 태도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사람을 볼 때 누구인지, 또 나이를 생각하지 말자. 중요한 것은 지금 하나님이 쓰시고 있는 이상 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항상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는 겸손을 놓치지 말라. 박재만 목사(남가주순복음교회)
  • 2009.12.27 / 오정선 기자

    어른들을 위한 동화-9
  • 세 번만 친 것이 그리 큰 죄입니까?(왕하 13:14∼25) 북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 엘리사가 80세가 넘어선 나이에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게 된다. 전 이스라엘이 우울해진다. 영적 거인을 잃는다는 슬픔때문일 것이다. 이스라엘 왕 요아스는 달려가 엘리사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린다. “이렇게 가시면 안됩니다. 이스라엘의 국부와 같은 존재로서 계신다는 자체가 얼마나 이스라엘에 힘이 되셨는데…” 말을 잇지 못한다. 엘리사는 자신의 가슴에 안겨 이스라엘의 앞날을 걱정하며 눈물흘리는 요아스 왕에게 감동했다. 또한 왕의 아버지 여호아하스의 죄로 인해 아람군대에 의해 초토화된 조국 이스라엘의 군대를 생각하니 하염없이 안타까움에 엘리사도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엘리사는 마지막으로 조국을 위해 할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왕이시여 활을 잡아보세요” 요아스가 활을 잡자 그 손등위에 자신의 능력을 전가한다. 그리고 다시 주문한다. “이제 동편 창문을 열고 화살을 힘껏 당겨 보세요” 요아스의 손을 떠난 화살은 동편 창문을 통과하여 힘껏 창공으로 날아 올랐다. “잘 하셨습니다. 동편은 아람군대가 있는 곳인데 왕께서 쏘신 화살은 아람군대에서 건져진다는 구원을 상징하는 살임으로 왕께서는 아람군대를 진멸하게 될 것입니다” 엘리사의 요아스와 이스라엘에 대한 마지막 축복의 예언은 계속된다. “왕이시여 이제는 화살의 살들을 잡고 땅을 치십시오” 이에 요아스는 “살을 잡은 손으로 바닥을 ‘땅땅땅’ 세번 힘차게 내려쳤다” 그 때였다. 병상에 누워있던 엘리사가 갑자기 소리를 친다. “아니 왜 세번만 치십니까? 기왕 치는것 다섯 여섯번을 치셨어야지요. 그러면 완전히 아람군대를 멸할수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갑작스럽게 화를 내는 엘리사를 요아스는 이해할수 없었고 두렵기까지 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세번 땅을 내리친 것이 뭐 그리 큰 죄라고 저렇게 노발대발하는 것일까? 치라고 해서 세번 땅을 쳤는데 이것이 그리도 욕을 먹을 일인었단 말인가? 세번 친것이 무슨 그리 큰 죄라고…”엘리사의 행동을 이상히 여기며 요아스는 조금 마음이 상한채 병문안을 마쳤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엘리사는 임종을 하게 된다. 엘리사의 죽음 이후 요아스는 아람과 전쟁하면서 비로소 엘리사가 왜 그토록 세번 자신이 땅을 친것에 대해 분노했는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요아스는 아람군대와의 전쟁에서 딱 세번 승리한다. 땅을 친 횟수는 축복을 담을 믿음의 그릇이었던 것이다. 세번만 쳤다는 것에 대한 책망은 결국 믿음의 작음에 노한 것이었다. 세 번 정도의 승리에 만족하지 말아야 했다는 것이다. “아하 ! 하나님은 필요한 것을 주시되 믿음의 그릇대로 채워주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명령한다. 믿음의 그릇을 넓히라고.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 박재만 목사(남가주순복음교회)
  • 2009.09.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어른들을 위한 동화 7- 생각과 기적의 상관관계
  • “얼마나 가나 봐라”(불신주의), “전에 안 해본 줄 아나?”(경험제일주의),“우리가 하는 일이 별 수 있겠어? 개척교회가 뭐 뻔하지”(부정적 사고), “먼저 된 자가 나중된다더라”(뒷다리잡기), “그냥 잠잠히 조용히 지내는게 가장 속 편해.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마라”(복지부동), “또 바뀔 텐데, 뭘”(비관주의), “그래, 너는 잘 될 것 같으냐? ”(물귀신 작전) “너나 잘해”(냉소주의). 이런 것이 사회에 만연되어 있으면 백날 각오하고 결단해도 절대 새로워지지 않다.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윌리엄 제임스는 “우리 세대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사람은 자기 마음가짐을 고치기만 하면 자신의 인생까지도 고칠 수 있다는 것이다”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오늘 내 삶의 기적의 방해요소는 외부에 있지 않고 내 안에 있는 생각임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베들레헴이었지만 어린시절 대부분은 나사렛에서 보냈기에 성경에서는 나사렛을 예수님의 고향이라 부르고 있다.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을 방문하는 것으로 오늘 본문은 시작한다. 오랫만에 나타난 나사렛 예수. 외형적으로도 그동안 키도 많이 크고 제법 의젓한 남성으로 변했지만 무엇보다 그가 회당에서 하는 말들이 고향사람들이 알고 있던 예수가 아닌 전혀 딴 사람이었다. 그 탁월한 지혜와 설교에 사람들이 다 감탄하게 이른다. “아니 지금 회당에서 가르치고 있는 저 청년은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래 맞아 마리아의 아들이잖아. 나도 잘 알지” “저는 예수와 함께 놀면서 자랐잖아요” “그런데 어쩜 사람이 저렇게 달라질수 있단 말이냐? 아니 저런 능력을 어디서 배운 것일까?” “잠시 고향에서 안 보이는가 했더니 어디가서 조금 귀동냥으로 율법을 배워왔나 보네요” “맞아,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데 요셉도 답답하겠구먼. 아버지따라 목수일이나 배워 살림이나 돕지, 자기가 언제부터 스승이었다고 회당에서 가르친단 말이냐? 쯧쯧, 정신 못차리는 녀석 같으니라구” 성경 마태복음 13장 57절은 “예수를 배척한지라”, 58절은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났고 은혜의 말씀, 생명과 구원의 가르침을 들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구원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는 그 자체가 오히려 장애물이 된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기적을 체험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고정관념에 갇혀 기적을 체험하지 못한 실패자의 모습을 담고 있지만 그 뒤에는 고정관념의 틀을 깨야 기적이 일어난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숨어져 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히13:8)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기적을 경험하지 못하는 삶은 예수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이다. 우리의 고장난 생각을 치유하자. 잠자는 기적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박재만 목사(남가주순복음교회)
  • 2009.07.2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어른들을 위한 성경동화⑥ -인기를 성공과 혼동하지 말자
  • 솔로몬 대왕 이후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나라가 나눠집니다. 북쪽은 이스라엘이라 칭하고 남쪽은 유다라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12개의 지파가운데 10개 지파가 북이스라엘에 속하였고, 2개 지파만 유다에 속하게 됩니다. 북이스라엘의 수도는 사마리아요 남유다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왕이, 남유다는 르호보암 왕이 다스리게 됩니다. 여로보암은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함께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설하려 합니다. 여로보암은 백성들의 자신을 향한 지지와 인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자신을 지지했던 백성들이 다 유다의 르호보암 왕에게 갈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에 여로보암은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는 길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사마리아 부근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 부르면 여기서 제사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고유의 일은 레위인들만 할수 있었는데 자격이 없는 레위인 아닌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웁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백성들은 좋아합니다. 예배드리러 멀리 예루살렘까지 갈 필요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악으로 보았습니다(왕상 12:25∼33).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고집을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악입니다. 북이스라엘에서는 겉으로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드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제사장도 있습니다. 예배에 대한 모든 구색은 다 갖춰져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마음대로’(왕상12:33) 고집했다는 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고집’이 충돌할때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인간적 ‘편리’를 추구하지 말고 말씀의 ‘원칙’을 고수해야 합니다. 자신의 고집이 앞서는 행위는 아무리 하나님을 위한다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악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가룟 유다는 ‘열심당원’ 출신입니다. 열심당원이란 유대인 과격단체로 로마를 무력으로 전복시키려는 집단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자신들의 열심당 총수가 되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뜻은 정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의 뜻과 자신의 뜻이 충돌하자 가룟 유다는 자신의 고집을 주장하면서 예수님을 팔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십시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옵소서’ 분명 자신의 뜻이 있었지만 그것을 고집하지 않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라며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자신의 의견을 내 놓을수 있지만 끝까지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앞에 겸손하게 순종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내 고집의 뿌리에는 세상적 인기에 대한 갈망이 있고 하나님의 뜻의 뿌리에는 진정한 성공이 숨어 있습니다. 인기가 아닌 성공을 추구하며 삽시다. 박재만 목사(미국 남가주순복음교회)
  • 2009.06.2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어른들을 위한 동화 ⑤ 길이 아닌 끝을 비교하는 사람
  • 바울이 하루는 소아시아 지방에 가서 전도를 하다가 소아시아 북쪽을 전도하기 위해서 돌아가려고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드로아에 이르러 밤을 지내는데 마게도냐 사람이 등장하더니 ‘빨리 와서 우리를 도와 달라’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행 16:6,7).바울은 특별한 체험앞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마게도냐로 보내시길 원한다고 믿고 바다를 건너 유럽대륙으로 진출합니다. 마게도냐의 첫 성이 바로 빌립보인데 이곳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많이 모여 있는 것이 아닙니까. 바울과 실라가 보았더니 젊은 여자가 점치는 귀신이 들어서 얼마나 점을 잘 치는지 사람들이 줄서서 점을 치고 돈을 내고 갑니다. 점괘는 귀신들린 여인이 하고 돈은 그 여인을 고용한 사람들의 몫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 여인이 불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나가라”며 귀신을 쫓아내 주었습니다. 그 여자에게서 귀신이 나가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거금을 들여 그 여자를 사왔던 동업자들의 입장에서는 사업에 초를 친 셈이 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불쌍한 여자가 사악한 귀신으로부터 벗어나 건강한 한 여인이 됐다는 사실에는 관심도 없고 오로지 자신들의 경제적인 손실밖에 생각나지 않았으니 바울과 실라가 죽도록 미웠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과 실라를 ‘수상한 자들로 이상한 풍속을 전하고 종교를 전함으로 성이 소란하게 되었다’는 죄목을 붙여 관원에게 고발하게 됩니다(행16:19). 관원들은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고 매로 강하게 여러차례 친 후 깊은 지하 감옥에 가두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기가막히고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실라는 그 깊은 감옥속에서 놀랍게도 불평하지 않고 감사하고 찬양했습니다. 그랬더니 굳게 닫힌 옥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발목을 묶어 놓은 사슬도 그냥 풀렸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문을 잠가도 하나님이 열어 주시면 문이란 문은 다 열리게 됩니다. 놀라운 일은 계속됩니다. 감옥을 지키는 간수가 깜빡 잠들었다 눈을 떴는데 옥문이 다 열려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간수는 죄수들이 탈옥했다 생각하고 그 책임을 자살로 마무리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가 “안됩니다, 우리는 탈옥하지 않았으니 그 칼을 거두세요”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이에 간수가 놀라 소리나는 곳으로 달려가보니 바울과 실라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닙니까? 간수는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예수 믿고 자신 뿐 아니라 자신의 가족 모두를 예수를 믿게 했습니다(행 16장). 바울과 실라에게 그 깊고 침침한 어두운 감옥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간수와 그 집을 구원할 장소가 될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이 사건은 그리스도인들은 ‘길’을 비교하는 자들이 아니라 ‘끝’을 비교하는 자들이 되어야 함을 깨닫게 해 줍니다. 박재만 목사(남가주순복음교회)
  • 2009.05.24 / 오정선 기자

    효자는 장수한다
  • 미국의 중·고등학교에서 부모공경을 가르칠 때 가장 많이 인용하는 인물이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다. 워싱턴은 바다를 벗삼아 세계를 항해하는 멋진 선장이 되고 싶었다. 그는 선원으로 취직해 먼 뱃길을 떠날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어머니를 찾아가 작별인사를 드렸다. 아들과의 이별이 아쉬워 슬피우는 어머니를 보고 워싱턴은 마음을 돌렸다. “어머니의 눈물과 내 꿈을 바꿀수는 없다” 워싱턴은 항해를 포기했다. 그때 어머니가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했다.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의 앞길은 평탄하리라.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실 것이다” 결국 효자 워싱턴은 ‘선장’ 대신 ‘대통령’이라는 복을 받았다.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에게 ‘장수’와 ‘명예’라는 복을 주신다.
  • 2006.07.2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저주받은 청년
  • 한 비극적인 청년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조셉 스크리븐. 그는 사람을 만나면 시비를 걸고 싸웠다. 난폭하고 흉악한 청년을 가까이 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늘 혼자였다. 그러나 스크리븐은 원래 문학을 사랑하는 유순한 사람이었다. 그가 난폭하게 변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가 매우 사랑했던 한 여인이 결혼식 전날, 수영을 하다가 익사한 것이다. 그는 그때부터 하늘을 원망했다. 결국 그는 조국 아일랜드를 떠나 캐나다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스크리븐은 신앙에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을 학대하며 살아온 것이 큰 죄악임을 깨닫고 찬송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 만든 노래가 바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찬송가 487장 ‘죄짐 맡은 우리 구주’다. 복음은 ‘저주의 사람’을 ‘찬양의 사람’으로 변화시킨다.
  • 2006.07.1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성공인의 눈
  • 어느 날 조각가 로댕이 청년들과 함께 산에 올랐다. 청년들은 길을 가로막고 있는 바위에 귀찮은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로댕에게는 이 화강암이 ‘인생을 고민하는 젊은이’로 보였다. 그는 이 화강암을 갈고 닦아 명품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이다. 보통 사람들은 물이 끓는 주전자를 무관심하게 바라본다. 그러나 와트는 거기에서 증기기관차를 보았다. 사람들은 번개를 보고 무서워 몸을 떤다. 그러나 프랭클린은 그곳에서 어둠을 밝힐 전기를 보았다. 사람들은 쥐를 징그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정리해고를 당한 월트 디즈니는 창고에서 잠을 자다 쥐들이 노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리고 평화와 자유의 상징인 미키 마우스를 만들었다.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인생이 완전히 달라진다.
  • 2006.07.0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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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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