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딤돌
영화-<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
  • 성공이 아니야, 섬김이야 # 1 예전 광주광역시 양림동 선교사 묘역을 들렀을 때 묘역이 앞마당처럼 포근했다. 유진 벨, 윌슨, 오웬 등 호남을 중심으로 선교사역을 펼친 미국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의 이름을 담은 묘비들이 촘촘히 늘어서 있었고 그 묘비들을 돌다 그녀의 이름을 찾았다. ‘Elisabeth Johanna Shepping, 서서평.’ 그녀의 묘비 앞에는 이미 여러 개의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그 무렵 그녀의 이름을 건 영화 한 편이 극장에 걸려 있었다. 쉐핑은 서른 두 살이던 1912년 조선에 왔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슬픈 땅으로 온 그녀는 이 아픈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해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이 선교사가 된 유일한 이유였다. 간호사였던 그녀는 조선에서 간호사를 양성하는 기관을 만들었고 여성 지도자를 키우는 이일성경학교를 설립했다. 한센 병 환자들을 비롯한 행려병자들과 길거리에 넘쳐나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이웃으로 살았다. 풍토병을 앓으면서도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보살피고 거두느라 결국 54세에 영양실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마지막 남은 시신까지 기증하고 사람들에게 “천국에서 만납시다” 인사한 뒤 빈손으로 떠났다. 1934년이었다. 그녀의 장례는 광주지역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졌는데 누구보다 그녀의 죽음을 슬퍼한 사람들은 가난한 양림천의 거지들과 한센병 환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르침을 받아 조선의 첫 신여성이고자 했던 성경학교의 제자들이었다. 그녀와 만남으로써 비로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그리고 귀한 존재임을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을 하늘처럼 받듦으로써 스스로 하나님의 제자가 된 셈이었다. # 2 영화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는 다시 그녀의 시간에 마음을 둘 수 있어 좋았다.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는 “Not Success But Service(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그녀를 떠올리면 무엇보다 먼저 떠오를 만큼 유명한 구절인데도 우리는 서서평 선교사를 떠올리면 성공이 아닌 섬김에다 방점을 찍었고 ‘성공’이란 단어를 까맣게 망각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성공’이라는 달콤한 유혹이 가끔은 혼자 남은 그녀의 방을 찾아와 쿡쿡 충동질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여 자고 일어날 때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의 글귀를 읽으며 자신을 다독였을 것이다. 그러니 한센병 환우를 돌보고 가난하고 외로운 어린아이를 위해 자신의 것을 떼어 주고 슬프고 고달픈 세월을 살아가는 조선 여인네들의 편이 되어준 그녀의 위대한 ‘섬김’은 어쩌면 그런 수많은 유혹들과의 싸움을 통해 얻어낸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성녀’로 불린 그녀이지만 성공이라는 욕망을 가진 사람, 나와 다르지 않음에도 나와 다르게 살고자 한 사람, 그래서 처음부터 성녀로 태어나지 않았으나 ‘호남의 성녀’가 된 사람…. 영화는 미혼모의 가정에서 태어나 가족의 사랑을 누리지 못한 채 외롭게 자란 어린 쉐핑의 시간을 깊이 들여다본다. 아버지의 존재조차 알지 못한 채 가여운 아이로 태어나 모질고 가혹한 ‘나쁜 엄마’를 경험한 그녀였다. 어쩌면 슬픈 나라 조선의 백성들을 가난과 탄압으로 내몰던 사납고 암울한 기운이 그녀의 ‘나쁜 엄마’와도 닮았던 것일까? 유독 조선에서 그녀의 시간은 엄마처럼 세밀하고 따뜻했다. 그녀의 눈은 조선의 바람과 바다와 나무와 풀 한 포기까지 세밀하게 관찰하였고 조선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녀의 사랑은 거기서부터 싹이 텄다. 그녀의 모든 부정적인 환경은 긍정과 감사로 열매 맺었다. 서서평은 결국 사랑과 섬김으로써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감사한 셈이었다. # 3 사랑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긍정이라고 믿는다.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이 아들을 죽인 빨갱이를 용서함으로써 자신에게 닥친 부정적 상황을 극복했듯이 말이다. 실제로 모든 사랑의 공통점은 부정적 감정을 이겨낸 긍정의 힘에서 비롯되었다. 자신을 향해 침 뱉고 조롱하던 사람들을 바라보며 분노와 증오의 감정조차 사랑과 자비의 언어로 녹여낸 분이 예수님이었다. 우리는 가끔 착각한다. 예수님이었으니까, 손양원 목사님이었으니까, 그녀는 성녀였으니까…. 나는 사람이니까 분노하고 증오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스스로 변론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말해버리는 그 순간 우리는 예수님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선택이 무엇이었는가 묻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고자 스스로 쳐서 복종시키는 노력을 용기 있게 감행해야 한다. ‘쉐핑’을 내려놓고 ‘서서평’으로 살아간 그녀처럼 날마다 자신을 다독여야 한다. ‘성공이 아니야, 섬김이야’라고.
  • 2020.02.0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영화 ‘남한산성’(2017년) - ‘옳고 그름’보다 ‘사랑과 믿음’으로
  • # 척화(斥和) 또는 주화(主和) 임진년에 왜구의 침략을 받아 7년 전쟁을 치른 조선은 피폐할대로 피폐했다. 조정은 왜구를 무찌른 공을 대명(大明)의 은덕으로 돌리며 수군을 이끈 충무공의 공적과 각지에서 일어선 의병들의 희생에 대해서는 오히려 깎아내리고자 했다. 광해가 즉위하며 조정이 숨통을 트는 듯했으나 노론 기득권 세력은 다시 인조를 내세워 그들의 지배를 이어갔다. 노론에 빌붙어 왕위에 오른 인조는 명 황제의 신하로 처신하느라 새로이 동아시아의 강자로 부상한 여진족의 나라 청(淸)과 맞서 전쟁을 치러야 할 운명이었다. 이처럼 정묘년과 병자년에 있었던 호란(胡亂)은 조정이 자초한 참화였다. 당시 조정을 사로잡은 척화론, 곧 오랑캐인 여진족의 나라에 맞서 싸우다가 모두가 죽더라도 명 황제의 은덕만큼은 기려야 한다는 주장은 그 참화의 토대인 셈이었다. 군신의 관계를 요구하며 침략한 청의 군대에 쫓겨 궁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조정은 이제 두 가지 선택이 남아 있었다. 척화(斥和), 곧 청과 싸워야 한다는 주장과 주화(主和), 곧 오랑캐라 하더라도 화친하자는 주장이었다. 척화는 사대부로서 의로운 죽음을 선택하는 길이며 주화는 비루하더라도 목숨을 보전하는 길이었다. 의로운 죽음은 떳떳하되 미래를 기약할 수 없고 비루한 삶은 고통스럽더라도 앞이 열려 있었다. 그러니 어느 선택을 하든 절대 옳거나 절대 그르지 않았다. 누구에게는 옳은 길이 누구에게는 절대 가선 안 될 길이었다. # 명길과 상헌 김훈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남한산성』은 이 절박한 선택의 기로에 선 '남한산성 조정'의 47일을 그려낸다. 화친으로써 후일을 도모하자는 주화파 최명길과 오랑캐에 맞서 싸워 대의를 지키자는 척화파 김상헌의 가파른 논쟁이 팽팽한 긴장을 자아내고, 다른 한편에선 조정의 대립이 어떠하든 그저 얼음이 녹고 민들레가 피기만을 기다리는 민중들의 지난한 시간들이 흐르고 있다. 인조는 끝내 주화의 길을 선택하고 청 태종에게 보낼 항복문서 집필을 명길에게 맡긴다. 두고두고 후세에 손가락질당할 일인 줄 알면서 명길은 그 길을 왕에게 강요하고 앞장서서 제 목숨을 던질 각오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명길이 쓴 항복문서를 상헌이 찢어버리자 명길이 다시 찢긴 문서들을 주워 모으며 "조정에는 이 문서를 찢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나처럼 주워 모으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명길과 상헌은 서로 다른 길을 주장했으나 실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데는 같은 마음인 셈이었다. 하여 두 사람의 주장은 다르면서도 같았다. 둘은 서로 자신이 가고자 한 길을 갈 뿐이었고 그 길을 가면서 책임을 면하고자 하지 않았다. 상헌은 자결하고자 했고 명길은 후대의 비판을 각오하였다. # 선하거나 악하거나 그러니 척화는 선이고 주화는 악이라는 식으로 역사를 보아 왔다면 이 또한 틀렸다. 역사를 보는 잣대는 차라리 상식이거나 몰상식이어야 할지 모른다. 영화 『남한산성』은 어쩌면 역사를 이원론으로 보려는 우리의 손쉬운 시각을 꾸짖고 있다. 최명길의 주화론 또한 하나의 상식일 뿐이었다고 평가하는 게 옳지 싶다. 역사를 보는 잣대만 아니라 사람을 보는 잣대 또한 선하거나 악하거나 두 개의 기준에 얽매여 제거하거나 칭송하는 데 익숙한 우리들이다. 사람의 판단에 따라 옳고 그름이 과연 하나님의 판단과도 일치할까? 세월이 흐른 뒤에 그때 옳은 것이 도리어 그른 것으로 판별이 되거나 그때 그른 것이 후에 옳은 것으로 드러나는 일을 많이 보면서 나는 섣부른 판단에서 벗어나고자 애썼다. 심지어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 하고 단언한 일조차 뒤늦게 '천만의 말씀'으로 드러나는 일도 목격했으니 사람의 일이란 도무지 판단이 쉽지 않다. 그 섣부른 판단으로 히틀러는 600만 명의 유대인 을 학살하고 스탈린은 수천만의 목숨을 앗아갔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성으로 살아갈 뿐이다. 인생이 가야 할 길을 사람이 알지 못하기에 오히려 인생은 하나님의 뜻을 물어가며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뿐이다. 먼 인생을 돌아보며 도무지 사람이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즈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개입에 대해 소름 돋는 감사를 드리게 된다. 그러니 역사를 대하거나 사람을 대하거나 섣부르게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보다 그 길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자 정성을 다할 일이다. 이를 진정성이라 일컫는다면, 세월이 지나고 모든 것이 낡아 부서지더라도 끝내 남는 것은 그 마음뿐이지 않을까. 사랑만이 영원하다는 성경의 말씀이야말로 진리가 아닐까. 영화 『남한산성』이 내게 말하고자 한 바도 그것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명철 기자
  • 2019.11.03 / 박명철 기자

    영화 <채비> - 떠나야 할 사람들의 ‘채비’에 대하여
  • 영화 ‘채비’(2017년, 조영준 감독, 고두심 김성균 주연)는 발달장애를 가진 아들을 두고 먼저 떠나야 하는 어머니가 살아있는 동안 아들을 위해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것들, 그 소소한 이별의 방식을 다룬 작품이다. # 채비 1 세상에서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엄마뿐인 아들을 두고 먼저 떠나야 하는 어미의 심정이란 오직 홀로 남아 살아갈 자식에 대한 걱정뿐이다. 끼니도 해결해야 하고 빨래도 하고 돈벌이도 해야 할 텐데 아들은 그 무엇 하나 온전히 해낼 수조차 없는 발달장애인이다. 누나가 있지만 제 앞가림하기도 벅찬 형편이라 맡기지도 못한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속고만 살 것 같아 엄마는 아들에게 세상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한다. 그런데도 아들은 세상이 모두 자기편인 양 헤벌쭉 마냥 웃기만 한다. 병세가 더 악화되자 엄마는 우격다짐에 나선다. 아들이 언감생심 마음을 뺏긴 아가씨를 찾아가서 “제발 우리 아들에게 모질게 말해서 다시는 아가씨를 생각하지도 못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고, 목사님을 찾아가서 “하나님 같은 건 없으니 믿을 건 오로지 네 자신뿐이라고 말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엄마의 기대와 어긋났다. 아가씨는 모질지 않고 목사님은 아들 편이다. 구청 공무원들도 심지어 힘이 되어주지 않을 것 같은 누나조차 엄마와는 ‘다른’ 세상을 사는 듯하다. 하지만 엄마가 살아온 세상은 독하지 않으면 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없는 세상이었고, 엄마가 아들에게 물려줘야 할 세상 또한 그렇다고 믿었다. 어느새 엄마의 세상은 마치 지옥 같았다. ‘아들아, 짓밟히지 않으려면 짓밟아야 해. 그러니 일단은 가지고 보는 거야. 돈도 가지고 학벌도 가지고 힘도 가지게 되면 그때는 비로소 세상이 너를 함부로 깔보지 않을 거야. 그러니 정신 바짝 차리고 엄마 말을 들어. 영어는 필수야. 돈이 되는 직업을 찾아야 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돈을 모아야 해. 이기려고 사는 거야. 이기는 게 착한 것이니까. 내 말을 들으렴. 다른 이야기에 귀기울이면 안돼. 누구보다 강해야 돼, 아니 독해야 해.’ 어느새 영화 ‘채비’는 장애인 아들을 위한 채비에서, 아들을 남겨두고 떠나야 할 엄마의 채비로 그 무게중심이 옮아간다. 아들을 위해 분주하던 엄마는 오히려 험준한 세상을 살아오며 만난 모든 부정적이고 차가운 시선들을 거둬들인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이 살아갈 세상에 대한 긍정으로 이별을 맞기까지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채비의 시간을 산 셈이었다. # 채비 2 영화 ‘채비’의 엄마 마음을 가진 또 한 사람의 늙고 병든 아비를 우리는 알고 있다.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목자 없는 양처럼 남아서 믿음을 지켜가야 할 자식 같은 사람들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채비란 편지로써 마음을 전하는 길뿐이었다. 남은 이들은 그 편지를 읽고 용기를 내어 저 무지막지한 로마의 탄압을 견뎌야 했다. 그러니 편지는 절절하게 그 길을 열어주어야 하고 그들은 강해져야 하며 끝내 스스로를 지켜내야 했다. 하여 그가 해야 할 모든 채비란 자신이 살아온 세상의 민낯을 알려주는 일인 동시에 그 세상에 맞서는 길을 일러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물려주어야 할 세상과 그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터득해야 할 기술은 여느 아비들의 그것과 너무 달랐다. ‘정복’이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아무도 그런 기술로써 로마의 압제에 맞설 수 있으리라 예상하지 않았으므로 믿고 따르기도 쉽지 않을 것이었으나 그의 당부는 날 선 칼처럼 또렷했다. ‘사랑이다, 사랑으로써 맞서고 이겨야 한다. 아니 사랑만이 이긴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변화를 전제로 하지 않으므로 가장 안전한 전략이다. 네가 사랑하면 된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세상은 네가 할 수 있는 그 사랑의 힘으로써 맞설 때 너는 비로소 강해진다. 놀랍게도 사랑만이 영원히 남아서 승리한다.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것, 네가 지금까지 보아 온 모든 잘나고 힘센 것들조차 남김없이 사라진다. 그러나 사랑만은 끝내 이기고 남는다. 그러니 사랑이다, 오직 사랑이다.’ 회자정리(會者定離). 인생은 만나면 헤어지기 마련이어서 누구나 자신이 살아온 세상과 물건과 꿈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을 준비하며 살아간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숨 쉬고 살아가는 모든 시간은 어쩌면 이별을 위한 채비의 시간인지 모른다. 단지 저마다 그 채비의 내용이나 빛깔은 달라서 그것으로써 한 인생이 그려낸 삶의 무늬를 짐작할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자신에게 질문할 차례다. 나는 어떤 채비를 하며 살아가느냐고.
  • 2019.10.0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똑똑똑 천국의 문을 두드려요
  • ▶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 On Heaven’s Door, 1997년 작품, 토마스 얀 감독/ 얀 요제프 리퍼스, 틸 슈바이거 주연) #1 “천국은 없어. 산타클로스가 없는 것처럼 천국도 없어. 천국이 없으면 우리 아빠는 어디에 있는 거야….” 예쁜 꼬마 환자 예은이가 엉엉 운다. 아빠는 천국에 갔다고 했는데 짓궂은 어떤 오빠가 예은이에게 천국은 어디에도 없다고 했다. 그러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아빠는 어디에 계시는 걸까? 예은은 아빠를 다시 볼 수 없을까 두려운 게다. 그때 예은에게 친구 같은 소아과 레지던트 박 선생님이 다가온다. “예은아, 아빠 얼굴 기억나니?” “예.” “아빠하고 놀던 것, 선물 사준 것도?” “예.” “그럼 됐어. 너한테는 아빠가 하늘나라로 가는 문이 있으니까.” “문요?” “응.” 박 선생님은 자신의 가슴을 가리킨다. 거기 문이 있다는 듯이. “그런데 맨날 울고 슬퍼하고 천국이 없다고 믿으면 이 문은 사라져버려. 하지만 아빠랑 즐거웠던 때를 생각하고 항상 웃으면 큰 문이 생겨. 아빠는 이 문으로 천국에 갔다가 예은이에게 놀러 오시기도 해. 천국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문이 없어서 그런 거야.” 그제야 예은의 얼굴에 두려움이 사라진다. “그 말 들으니까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 하며 마치 아빠가 곁에 있는 양 “아빠 맨날맨날 놀러 와야 해” 하고 말한다. 예은이도 작은 손으로 가슴을 ‘콩콩’ 두드린다. 그 모습이 마치 천국 문을 노크하는 듯하다. #2 소아외과 병원을 무대로 한 드라마 ‘굿닥터’(KBS2 월화드라마, 2013년)에 나오는 이 장면은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를 떠올리게 한다. 밥 딜런의 명곡 ‘노킹 온 헤븐스 도어’가 그대로 타이틀이 된 영화. 영화에서 천국이 있다는 걸 믿는 사람들만이 가진 그 문을 ‘노크’ 하던 두 남자를 기억한다. 두 남자는 같은 병실에서 만났다. 죽음을 코앞에 둔 그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이 전혀 달라서 한 번도 같은 자리에서 만나지 않았을 것 같은데, ‘죽음’이란 같은 종착지로 향해 가는 지금, 같은 병실에서 만났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모든 다름을 뒤로한 채 동반자가 되어 마지막 시간을 함께한다. 두 남자가 가야 할 길은 알 듯 모를 듯한 대사 한 마디에서 결정된다. “하늘나라에 대해 들어봤나? 그곳에선 바다의 아름다움과 바다에서 바라본 석양에 대해 얘기할 뿐이야. 물속으로 빠져들기 전에 핏빛으로 변하는 커다란 공, 사람들은 자신이 느낀 그 강렬함과 세상을 뒤덮는 바다의 냉기에 대해 논하지. 그러니까 영혼 속의 불길만이 영원한 거야. 노을이 질 때 불덩어리가 바다로 녹아드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불은 촛불 같은 마음속의 불꽃뿐이야.” 그리고 둘은 병실을 떠나 바다에 가기로 한다. 바다에 가서 석양을 바라보자고 결심한다.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미션이 되어버렸다. 천국에서 이야기할 그 주제를 찾아 나선 두 사람. 죽음 앞에 서지 않고선 발견할 수도 없고, 발견했다 하더라도 거기 인생을 던질 까닭도 없었을 텐데 둘은 지금 그 미션을 찾고 또 그 미션을 수행하기에 딱 좋은 조건을 가진 셈이었다. 영화는 시종 흐린 하늘처럼 차분하면서도 빠른 속도감이 느껴진다. 튀지도 가라앉지도 않는 두 사람의 마지막 여행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다다른 그들의 바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그 땅끝에서 두 사람은 이글거리는 바다의 태양을 만난다. 땅과 바다의 경계에 천국으로 향하는 문이 있는 것일까. 노래가 흐른다. 천국의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다. ‘똑똑똑 천국의 문을 두드려요∼. 똑똑똑 천국의 문을 두드려요’. 밥 딜런의 그 노래와 함께 다시 예은이가 자신의 가슴을 콩콩 치며 하던 말이 떠오른다. “아빠 맨날맨날 놀러와야 해.” #3 태양이 가장 뜨거운 계절, 다시 바다에 서면 파도처럼 두려움이 밀려온다. 방학숙제를 마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문득 시무룩해진다. 그리고 이글거리는 저 붉은 태양의 뜨거움이 녹아드는 바다를 바라보면 내 안에서도 ‘콩콩 똑똑똑’ 그 노크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 안의 두려움을 거두어들인다. ‘똑똑똑’ 천국의 문을 두드린다.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며 용기 있게 순종하리라 결심한다. 그 길 끝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열릴 것이다. 다시 이글거리며 타올라야 하리라, 우리의 자리에서. 박명철 기자
  • 2019.08.04 / 박명철 기자

    애니메이션 ‘천로역정’에서 우리 교회의 마음을 읽다
  • # 이야기 하나. "이걸 한번 읽어보세요. 우리 교회를 더 잘 알 수 있을 거예요." 얼마 전 기독교계의 어느 신문기자에게 '순복음가족신문' 5월 12일자의 한 지면을 건넸다. 제24회 영산효행상 수상자 열한 분의 이야기가 실린 지면이었다. 오랫동안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취재하면서 기사를 쓴 그 기자에게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 "이영훈 목사님은 설교 때마다 절대긍정 절대감사를 강조하십니다. 여기 올해 영산효행상을 받은 분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목사님의 그런 가르침이 우리 교회 성도들의 삶 속에서 꽃처럼 활짝 피어난 풍경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실제로 수상자들 한 분 한 분의 이야기 속에는 인생의 절박한 사연들이 어두운 밤처럼 내려와 있다. 절박한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간절해지는 법이다. 그들은 밤을 새워 기도하고 곡기를 끊고 매달린다. 이처럼 간절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절대긍정과 절대감사의 메시지는 목숨 같은 것이다. 끝내 희망을 내려놓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어두운 터널 저편에서 빛나는 햇살 한가득 품고 서 계신 하나님의 기적이 기다리고 있다. 열한 분 수상자들의 구구절절한 '오늘'을 읽으며 절대긍정과 절대감사,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기적을 생각했다. 그리고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오랫동안 드나든 그 교계 신문 기자도 내가 읽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신앙을 읽어주기를 기대했다. 우리 교회는 단 하루도 철야예배가 끊이지 않는다. 밤새워 기도한 분들의 얼굴을 보면 '대체 얼마나 간절하면 저리 기도할까' 싶은 생각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들의 풍경이야말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속살이라고 믿는다. 인생을 살며 가장 처절한 시간에 찾아올 수 있는 교회가 우리 교회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 교회의 자랑이라 확신한다. # 이야기 둘.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은 설교가 스펄전이 "성경 다음으로 소중한 책"이라고 극찬할 만큼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 된 책이다. 이 책은 존 버니언이 종교 탄압을 받아 12년 동안 옥에 갇혔을 때 썼다. 복음에 대한 견딜 수 없는 열정이 낳은 작품이다. 주인공 크리스천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고향 곧 '멸망의 도시'를 떠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크리스천의 손엔 한 권의 책이 있다. '멸망의 도시'를 떠나 '하늘나라'로 향하는 이 머나먼 여정을 시작하게 만든 것도 그 책 때문이었다. 크리스천은 이 여정에서 전도자 신실 소망 등의 동역자를 만나 힘을 얻고 세속현자 절망거인 두마음 등을 만나 위험도 당하며 절망의 늪과 죽음의 계곡, 허망시장을 지나 천신만고 끝에 '하늘나라'에 당도한다. 우리는 금세 이 우화의 의미를 꿰뚫는다. 말씀에 의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좁은 문을 통과해 마침내 하늘 영광에 이른다는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를 그려낸 영적 지침서인 셈이다. 너무 단순하다고 여겨서일까 우리는 존 버니언의 고전 '천로역정'을 책장에 꽂아두기만 하거나 "아! 그 책" 정도로 다 아는 양 정작 깊이 읽는 이들이 많지 않다.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오는 13일에 개봉하는 애니메이션 '천로역정:천국을 찾아서'(The Pilgrim's Progress, 2019년 제작 로버트 페르난데스 감독) 시사회에서 나는 그 단순한 메시지를 통해 우리 교회 성도들, 아니 나의 인생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좁고 험한 길을 오르는 순례자 크리스천의 뒷모습에선 기어이 표현할 수 없는 감사와 용기의 눈물이 어른거렸다. 그리고 하늘로 향하는 이 순례의 길 곧 '천로역정'을 마친 후 천국의 백성들이 마중을 나오고 순례자들과 동행한 빛나는 옷을 입은 천사들이 무리를 향해 했던 그 마지막 구절이 떠올랐다. "세상을 사랑했으며 그 거룩한 이름을 위해 모든 걸 버린 이들입니다." 가슴 벅찼다. # 이야기 셋. 얼마 전 미국의 대학수학능력시험(SAT)을 주관하는 기관에서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에 대한 심사과정에 인생의 역경을 산 경험을 반영하도록 할 것이라고 발표해 화제가 되었다. 실제로 미국인들 58%가 사회경제적인 역경이나 건강상의 역경을 견뎌낸 이력을 대학 입학생 심사에 반영해야 한다고 응답했다는 것이다. 천로역정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그것이 제도 속에 반영된다니 꽤 매력적인 뉴스가 아닐 수 없다. 좁은 길을 걸어 본 사람들, 용기를 내어 말씀에 순종한 사람들, 간절하게 부르짖어 응답의 기적을 누린 사람들은 안다. 믿음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임을. 그래서 '천로역정'의 다음 구절을 함께 읽고 싶었다. "항상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십시오.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들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굳게 믿으십시오…얼굴을 부싯돌처럼 굳게 하십시오. 하늘과 땅의 권세가 모두 여러분들 쪽에 있습니다"(포이에마가 펴낸 '천로역정' 175쪽).
  • 2019.06.02 / 박명철 기자

    영화 <에델과 어니스트>
  • 평범하지만 빛나는 부모님의 아름다운 인생 1928년 런던. 성실한 우유 배달부 어니스트는 날마다 가정부 에델과 마주쳤다. 매일의 인사가 두 청춘 남녀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고 사랑에 빠지게 했으며 둘은 마침내 결혼에 이르렀다. 가난하지만 성실했던 두 사람은 집 한 칸을 렌트하여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침대 하나 덩그러니 놓인 공간에서 둘은 ‘작고 확실한 행복’을 가꾸어가기 시작했다. 안과 밖의 풍경을 나누기 위해 커튼을 드리웠고 작은 옷장 하나를 들여놓았으며 중고 소파를 얻어 커버를 씌웠다. 두 사람의 공간은 두 사람의 향기와 색깔을 입으며 따뜻하고 아늑한 ‘홈’으로 바뀌어갔다. 에델은 집 안팎을 쓸고 닦고 꽃을 심었으며 어니스트는 날마다 우유를 배달하며 돈을 벌었다. 두 사람이 성실하게 살아가는 동안 문명은 더욱 발전하고 어느새 그들의 공간에도 전화와 텔레비전과 자동차가 생겼다. 그렇게도 기다리던 아이가 태어났고 뜻하지 않은 전쟁이 일어났으며 전쟁 속에서 아이를 지키기 위해 생이별을 견디기도 했다. 아이는 자라서 학교에 가고 엄마가 바라지 않았으나 화가가 되었고 참한 여인을 만나 결혼하였다. 그 사이 두 사람은 늙어가고 급기야 에델은 치매로 어니스트의 존재조차 까맣게 망각한 채 가족들을 떠나갔다. 홀로 남은 아버지도 엄마 곁으로 급히 떠나갔다. 화가인 아들은 성실한 큰 나무처럼 튼튼하게 살다 가신 부모님을 기억하였고 그림으로 그려 한편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아들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평범하여 더 아름다운 사람들이었음을, 그래서 두 사람이 살았던 시간을 기억함으로써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무럭무럭 살아내었음을 고백했다. 아들이 추억한 부모님의 이야기, 바로 영화 <에델과 어니스트>(로저 메인우드 감독, 짐 브로드벤트, 브렌다 블레신 주연)이다. 칠순에 이른 어느 장로님이 들려준 이야기를 기억한다. 장로님의 어머니는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한두 권으로도 모자랄 거다”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장로님은 어머니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듣고 넘겼다. 그러다가 퇴직한 뒤 여유를 가지면서 문득 어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어느 날 대학노트 몇 권을 사서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어머니, 이 노트에 어머니께서 살아오신 이야기를 한번 적어보셔요.” 그때 어머니 연세는 아흔이 넘어 무엇을 기록할 기력조차 없어 보였으나 어머니는 의외로 반색하셨다. “왜 이런 걸 이제 말하누. 그동안 써 온 걸 버린 게 얼마나 많은데…. 진작 말했으면 그런 걸 잘 모아두었을 거 아니냐.” 그날 후로 어머니는 집필에 몰두하셨다. 쓰다가 기운이 떨어지면 몸져눕기도 했으나 어머니의 집필의지는 날이 갈수록 굳세어졌다. 저토록 많은 이야기를 쌓아두고 어떻게 참고 계셨을까 의아했다. 장로님은 어머니가 쓴 글을 타이핑하고 수정하여 컴퓨터에 저장했다. 글을 옮기다 이해가 어려운 부분은 다시 질문하고 보충했다. 때로는 어머니의 삶을 나름 해석도 했다. 그러는 동안 예전에 알지 못한 어머니의 삶에 관심이 깊어졌다. 누구보다 자식들에게 떳떳하게 살아온 어머니의 삶이 얼마나 빛나던지 당신의 열정과 인내 없이 오늘의 나는 없었으리라는 확신이 생겼고 아들의 삶을 응원해온 어머니의 은혜가 새록새록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나누는 이야기들이 깊어졌고 예전처럼 겉돌지 않았다. 그런 변화가 그로서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신비했다. 어머니의 글쓰기는 2년을 넘겨 완성되었고 A4용지 150매나 되는 분량을 가지고 그는 직접 편집을 하여 그리 화려하지 않은 책 몇 권을 제본했다. 그 책을 어머니께 드리던 날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을 받는 표정으로 기뻐했다. 장로님은 “세상에서 내가 어머니께 한 일 가운데 가장 잘한 일 하나를 꼽으라면 어머니가 자서전을 쓸 수 있도록 권유하고 응원한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다. “한 생애를 성실하게 살아오신 어머니의 세월과 어머니의 눈물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어른이 되어 간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우리는 부모님의 삶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때로는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그분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알았을 때 가져다줄 신비한 경험마저 함께 포기하고 사는건 아닐까.
  • 2019.05.05 / 박명철 기자

    [디딤돌] 마틴 루터 킹의 ‘꿈’
  • 1955년 12월 1일, 미국 남부 앨라배마 주에 있는 몽고메리 시에서 작은 사건 하나가 일어났다. 로사 파크스라는 흑인 여성이 관련된 사건이었다. 파크스 부인은 그날 버스에 타고 있었다. 백인전용 좌석 바로 뒤에 앉았는데 한 백인 남성이 버스에 올라타자 운전기사는 파크스 부인에게 큰 소리로 명령했다. “일어나 뒤로 가!” 부인은 뒤를 보았으나 빈 좌석이 없었다. 운전기사의 명령을 따라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면 어쩔 수 없이 일어서서 가야 할 상황이었다. 부인은 오랫동안 참고 견뎌온 울분 섞인 한 마디를 내 뱉었다.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어!” 몽고메리 시의 버스에선 흑백차별이 심했다. 운전기사들은 흑인들을 향해 ‘검둥이’ ‘검은 원숭이’ ‘검은 젖소’라고 부르기 일쑤였으며, 흑인 승객들의 경우 버스를 탈 때 앞문으로 타서 차비를 낸 뒤 다시 내려 뒷문으로 가서 버스에 올라야 했다. 그러다 보니 차비를 내고 뒷문으로 가는 동안 버스가 출발 해버리는 일도 있었다. 게다가 빈 좌석이 있어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서서 가야 했다. 백인이 한 명도 타지 않은 경우에도 ‘백인전용’으로 지정된 앞줄 네 좌석엔 절대 앉을 수 없었다. 또 파크스 부인의 경우처럼 백인전용 좌석이 가득 찰 경우 버스기사는 흑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도록 명령했으며 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경찰에 연행됐다. 평소 조용하고 침착하며 상냥하면서도 위엄 있는 태도로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사랑을 받아온 파크스 부인은 이날 버스에서 체포돼 며칠 뒤 공판을 받아야 했다. 이 사실이 몽고메리 시의 흑인 사회를 분노하게 했고 참아 온 흑인들의 울분은 마침내 ‘버스 보이콧 운동’으로 이어졌다. ‘버스 보이콧 운동’은 미국 흑인 민권운동에 불을 지폈다. 이 운동의 중심에 선 사람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마틴 루터 킹 목사였다. 루터 킹 목사는 이듬해 이 일을 기억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운동은 국제사회에 영향을 미쳐서 모든 나라 국민들의 귀를 울리는 심오한 메아리가 되었으며… 주님은 미국 내에서 자유와 정의를 위한 투쟁이 가능한지 그리고 승리가 가능한지를 실험하는 대상으로 몽고메리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루터 킹 목사는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기점으로 흑인들의 권리를 찾는 일에 헌신했고, 1968년 4월 4일 한 백인우월주의자가 쏜 총에 맞아 39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킹 목사의 장례예배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엄마의 무릎에서 슬픈 눈망울로 세상을 바라보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다섯 살 딸 버니스 킹의 모습이 언론들을 통해 전 세계에 보도됐다. 그로부터 51년이 흐른 지금 버니스 킹은 ‘마틴 루터 킹 비폭력사회변화센터’의 대표로, 변호사이자 목사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평등사상과 비폭력의 철학을 알리는 일에 헌신하고 있다. 바로 그 버니스 킹 목사가 세계사에 또 하나의 위대한 비폭력 민권운동사건으로 기록된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은 우리나라를 찾았다. 우리 교회의 초청으로 2월 27일 방한한 버니스 킹은 정부가 주관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고 3일 주일 3부 예배에서 설교하며 우리 교회의 청년들과 만나 희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등 다양한 일정들을 소화한 뒤 6일 돌아갈 예정이다. 3.1운동 100주년과 버니스 킹 목사의 때맞춘 방한이 우리 사회에 다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꿈’을 소환하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그는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절정이자 최대 규모의 집회로 기록된 1963년 8월 28일의 ‘워싱턴 대행진’에서 그 유명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을 남겼다. ‘백인전용’이라는 표지판에 의해 흑인 아이들의 존엄성이 짓밟히고 자존심이 발가벗겨지는 세상을 더 이상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고 호소하며 미국 국민들과 나눈 꿈이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어린 네 아이들이 언젠가는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 흑인 어린이들이 백인 어린이들과 형제자매처럼 손을 마주잡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그 꿈을 설파하기 몇 달 전 버밍햄의 한 교회에선 폭탄이 터져 주일학교에 온 흑인 어린이 네 명이 죽었고, 또 그 꿈을 설파하고 몇 달이 안 되어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었고, 또 많은 흑인들이 희생되었으며, 루터 킹 목사도 쓰러졌다. 그 시대 미국 사회를 뒤덮은 그 ‘증오의 바이러스’는 유령처럼 온 세계를 배회하며 루터 킹 목사의 꿈을 옥죄어 왔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문해야 한다. 마틴 루터 킹의 꿈은 성취되었는가? 미국 아닌 대한민국의 2019년 오늘, 그의 꿈은 얼마나 이루어졌을까? 우리는 과연 그의 꿈을 공유하고 있을까? 버니스 킹 목사의 첫 방한을 맞으며 우리가 진지하게 묻고 대답해야 할 질문인 셈이다.
  • 2019.03.03 / 박명철 기자

    ‘스카이캐슬’의 난맥을 푸는 열쇠
  • 아시안컵 축구 8강전에서 한국이 카타르에 패했다는 기사 밑으로 비난성 댓글들이 줄을 이었다. 그 많은 비난 댓글들 사이로 얼굴을 펴주는 한 줄이 있었는데 “스카이캐슬 볼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는 멘트였다. 국가대표팀이 4강과 결승에 진출하면 경기중계로 스카이캐슬을 볼 수 없게 되는데 그나마 져서 드라마를 볼 수 있어 다행이라는 자조 섞인 위로의 말이었다. 한국 팀의 결승 진출만큼이나 누구에게는 간절히 보고 싶은 인기 드라마가 있었던 셈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를 들썩이게 만든 드라마 ‘스카이캐슬’이 종방을 맞으며 대한민국은 비로소 주말 밤의 마법에서 풀려난 느낌이다. #엄마 1 어느 기자는 ‘스카이캐슬’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강준상(정준호)의 엄마 윤 여사(정애리)라고 말했다. 병원장을 눈앞에 둔 아들이 제정신을 차리고 나서 악행을 반성하며 사표를 내겠다고 했을 때 윤 여사는 “너 병원에 사표 낼 거면 날 죽이고 내” 하며 악다구니를 썼다. 오십 평생 엄마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고자 고군분투한 강준상의 삶도 안쓰럽기는 마찬가지지만 아들의 출세만을 목표로 거기에 존재의 이유를 얹어 살아온 엄마의 삶이 연민을 넘어 충격 그 자체라고 기자는 말했다. 맞다. 엄마의 인생이 다르고 자식의 인생이 다르니 아무리 엄마라도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다. 헌데 ‘스카이캐슬’에 사는 엄마들은 이 경계를 편의적으로 넘나들었다. 그리고는 윤 여사처럼 아들에게 협박하듯 윽박질렀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자식을 통해 대리만족하려는 엄마의 심리와 오직 자식의 출세에만 인생을 거는 가진 자들의 무한질주가 드러나 아프기도 했다. #엄마 2 프랑스 소설가 로맹 가리의 소설 ‘새벽의 약속’에는 윤 여사 못지않은 특별한 엄마가 등장한다. 자전적 소설이니 아마도 작가의 엄마를 그린 셈이다. 과부로서 아들의 성공을 위해 가난의 고통과 온갖 모멸을 감수하고 평생을 살았던 엄마와 그 희생과 헌신을 딛고 마침내 엄마의 소원이던 위대한 소설가가 되어 프랑스가 내린 훈장을 주렁주렁 달게 된 아들의 이야기이다. 아들은 훗날 엄마를 추억하며 말한다. “나는 어머니의 부서진 얼굴을 볼 때마다 내 운명에 대한 놀라운 신뢰가 내 가슴속에 자라남을 느꼈다. 전쟁 중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나는 항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느낌을 가지고 위험과 대면하였다. 어떤 일도 내게 일어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어머니의 해피엔드이므로.” 자신의 오늘을 ‘어머니의 해피엔드’로 연결 짓는 주인공의 고백은 엄마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찬사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나의 성공은 엄마의 희생으로 말미암았고 엄마의 삶은 나의 성공에 이르러 비로소 엔딩을 짓는 셈이니 나의 삶과 엄마의 삶을 구분 짓지 말라는 의미로도 들린다. #두 엄마의 사이에서 얼핏 보면 로맹 가리의 소설에 나오는 엄마와 강준상의 엄마 윤 여사는 닮았다. 아마 ‘스카이캐슬’의 엄마들은 그래서 “자녀의 성공을 위해 엄마가 물불 가리지 않는 건 당연하잖아. 그렇지 않은 엄마가 비정상 아냐?” 하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자녀의 성공’이든, ‘물불 가리지 않는’ 열심이든 거기 ‘너무 많은’ 엄마의 욕망을 덧칠하는 순간 그들만의 ‘스카이캐슬’ 쌓기 놀이에 빠지고 만다. 아이들의 행복과도 동떨어져 있고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에 대한 고민도 비어 있다. 그리고 끝내 부모자식 간의 관계를 헝클어버리기도 하고 범죄의 영역을 넘나들기도 한다.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하다. “엄마 나는 불행했어요. 내 인생엔 내가 없었다고요.” 그렇게 절규하던 강준상이 떠오른다. 하지만 로맹 가리의 ‘나는 당신의 해피엔드입니다’라는 문장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주고자 십자가의 희생을 마다 않고 걸어가신 예수님의 사랑이 떠오른다. 그 사랑에 힘입어 우리는 비로소 “나는 당신의 해피엔드입니다”라고 고백하지 않는가. 자식을 위한 부모의 희생은 고귀하다. 다만 사랑이 아닌 욕망으로 자녀의 인생을 컨트롤하려고 할 때 부모와 자녀의 인생은 ‘욕망의 캐슬’에 갖혀 희생의 고귀함과 결과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만다. 주님이 주신 인생은 그 자체로 고귀하다.
  • 2019.02.03 / 박명철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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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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