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미술관
석파정 - 문화공간 백년대계
  • 흥선대원군 별서…조선말기 대표적 건축물 모두가 공유하는 문화예술공간으로 탈바꿈 서울미술관과 붙어 있는 석파정은 서울시 유형문화제 제26호로 흥선대원군의 별서(別墅)였다. 600년 된 소나무와 사랑채, 안채, 별채와 함께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계류(산골짜기에서 흐르는 시냇물) 한가운데는 청나라풍의 정자(오른쪽 사진)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석파정은 6.25전쟁 이후 고아원과 병원 등으로 사용되었고 이후 개인 소유로 방치되어 있었다. 이것을 인수해 조선말기 흥선대원군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해 일반에게 공개한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석파정은 인왕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수려한 자연경관과 조선말기의 건축기술이 잘 조화를 이룬 대표적 건축물이다. 현재 석파정에 남아 있는 건물은 안채와 사랑채, 안채 뒤에 있는 별채와 청나라풍 정자로 총 네 동이다. ㅁ자형의 안채와 ㄱ자형의 사랑채가 동서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고 안채 뒤편 한 단 높은 곳에 一자형의 별채가 있다. 사랑채 앞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된 노송을 지나면 동선의 폭이 좁아지면서 연못과 정자가 있는 계류를 만나게 된다. 창건 당시에는 안태각, 낙안당, 유수성중관풍루 등 일곱 채의 건물로 구성되었다고 하나 각 당호에 따른 기록이 없어 오늘날엔 어떤 건물의 명칭인지를 확인하기 어렵다. 사랑채에서 인왕산 쪽으로 물길을 따라 난 오솔길을 올라가다보면 개울 한가운데 위치한 망원정을 만나게 된다. 다른 이름으로 ‘유수성중관풍루’이다. 몸채가 정사각형이고, 지붕은 기와 없이 동판으로 접어서 만들었다. 하단부는 석조 아치형이며 정자로 들어가는 입구가 세 번 꺾인 돌다리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세워진 위치며 모양새가 19세기 중엽 청나라 정자건축 양식을 닮았다. 석파정은 처음부터 흥선대원군의 소유는 아니었다. 조선 경종 때 조정만이 만든 소수운련암을 김흥근이 인수해 사용하고부터 그 기록이 전해진다. 김흥근이 언제 석파정을 조영했는지에 관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연대를 대략 1837∼1866년 사이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김흥근이 청나라 사신으로 다녀온 것이 1837년이며 소치 허련이 김흥근을 만나 석파정에 머물기 전까지의 시간이 1866년이다. ‘소치실록’ 기록에 나타난 공간의 묘사가 현재 석파정의 공간 구성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1866년 이전에 지어진 것이 틀림없다. 조선시대 선비들 사이에는 자연과 가까이 지내려는 풍조에 따라 별서 조영이 많이 이루어졌다. 조선후기에는 주로 세도가들이 도성 안에 살림집을 두고 도성 밖 경치 좋은 산자락에 별서를 조성해 사교모임이나 풍류를 즐겼다. 별서 정원의 건물은 주로 누와 정자로 주변의 경치를 조망할 수 있도록 개방된 형태이다. 담장이나 문은 없거나 부분적으로 있어서 자연과의 소통을 원활히 한다. 석파정은 입구와 건물 사이의 높은 고도차로 인해 생기는 시각적인 경계 때문인지 담에 의한 경계가 보이지 않는다. 경사를 오르면 평지가 나타나면서 정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석파정을 어떻게 흥선대원군이 소유하게 됐는지는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 기록돼 있다. 흥선대원군이 별서를 팔 것을 간청했는데 김흥근이 듣지 않자 하루만 빌려 놀게 해달라고 했다. 옛 풍습에 따라 김흥근이 억지 승낙을 하자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이곳에 행차하도록 권해 고종과 같이 석파정에 머물렀다. 그 후 ‘왕이 거처한 곳을 신하가 감히 거처할 수 없다’는 관례에 따라 김흥근이 다시는 오지 못했고, 결국 석파정은 흥선대원군의 소유물이 되고 말았다. 석파정은 흥선대원군 이전에는 사용되지 않던 이름이다. 흥선대원군은 석파정을 소유한 뒤 자신의 호를 석파(石坡)로 바꾸었다. 석파정에는 흥선대원군이 ‘강일독경 유일독사’(강한 날에는 경전을 읽고, 부드러운 날에는 역사책을 읽는다)라 쓴 편액이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편액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특권층의 사적 공간이던 이곳이 오늘날 대중의 문화예술 향유공간으로 개방되기까지는 힘든 여정이 있었다. 그러나 대중과 함께하고자 했던 열정과 믿음으로 새롭게 태어나면서 석파정은 오늘날 사람들의 이야기가 넘쳐흐르는 문화예술공간이 됐다. 문화애호가가 사랑하는 석파정과 서울미술관이 앞으로 500년 쯤 지속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과거 흥선대원군이 석파정을 50년간 소유하며 이곳에서 정치권력의 불로장생을 꿈꿨다면 나는 이곳이 모든 이가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문화공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석파정과 서울미술관의 백년대계를 꿈꿔본다.<끝> 안병광 장로(서울미술관 설립자)
  • 2018.10.21 / 오정선 기자

    서울미술관
  • 모든 이와 즐거움 나누는 ‘토비아스의 우물’처럼 문화는 사람과 사람 잇는 다리 같은 것 자연 역사 문화 어우러진 ‘너른 뜰’ 기대 ‘사람 인(人)’ 글자는 두 사람이 서로 기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사이 간(間)’ 자도 인간들 사이, 즉 관계를 의미한다. 이 세상이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 사람과 사람이 만나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 것을 글자가 몸소 보이고 있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일구며 살아갈 때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이 바로 ‘문화’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젊어서 미술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생애 커다란 행운이었다. 미술이 아니었다면 나는 문화와 예술이 인간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 모른 채 살았을 것이다. 물기 없이 바싹 마른 일상이 실은 얼마나 많은 아름다움을 감추고 있는지를, 내 주위 사람과 그들의 삶이 알고 보면 더없이 여리고 외롭고 사랑스럽다는 것을 비로소 미술을 통해 알게 됐다. 사회 초년 시절, 내가 한 달 치 월급과 맞바꾼 금추 이남호 선생의 작품은 나를 미술품 수집가의 길로 들어서게 해준 작품이었다. 그 뒤 화가 이중섭을 알게 되고,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접하면서 미술의 세계로 점점 빠져들었다. 그림을 보는 남다른 안목이나 특별한 수집체계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미술품을 수집한다는 것은 작품 속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길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미술이 나에게 사람에 대한 사랑, 생명과 자연에 대한 존경, 창조에 대한 이해를 교육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오늘날 나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수십 년 동안 그림에 품었던 연모의 감정이 어느덧 나로 하여금 미술관을 짓고 싶다는 꿈을 꾸게 했다. 2012년 8월 서울미술관이 탄생한 것은 이런 연유에서였다. 나는 서울미술관이 토비아스의 우물이었음 하는 바람이었다. ‘토비아스의 우물’은 목사이자 작가인 맥스 루케이도가 쓴 동화인데,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사막 한가운데 작은 마을이 있었습니다. 사막에 있는 대부분 마을은 물 한 방울이 금처럼 귀하지만 이 마을 사람들은 목마름에 물을 갈구하지 않습니다. 근처에 깨끗하고 시원한 물이 펑펑 솟아나는 우물이 있는 까닭입니다. 우물을 가진 토비아스가 보물처럼 소중한 이 물을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들 쥘리안에게도 우물물은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나누어 마시는 거라고 단단히 일러 주었어요. 어느 날, 토비아스와 아들 쥘리안이 먼 길을 떠나면서 우물 관리를 하인 엘제비르에게 맡겼습니다. 하인 엘제비르는 처음 얼마 동안은 주인의 뜻을 받들어 모든 사람에게 즐거운 마음으로 물을 퍼주었지요.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엘제비르는 마을 사람들이 물을 받아 가면서도 별로 고마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바꿔 자기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는 사람에게만 물을 주었습니다. 나중에는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물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물을 얻기 위해 우물 주인도 아닌 엘제비르를 기쁘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해야 했습니다. 엘제비르의 횡포가 점점 심해지던 어느 날, 머리에 수건을 쓴 남자가 우물가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우물 주인 토비아스의 아들 쥘리안이었지요. 쥘리안은 예전처럼 마을 사람 누구든지 마음껏 물을 가져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쥘리안에게 그동안 하인 엘제비르가 저지른 나쁜 짓을 고발하고 그에게 물을 주지 말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쥘리안은 마을 사람들의 뜻과는 반대로 ‘저 사람에게도 물을 나눠주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라며 하인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토비아스는 착한 사람에게만 물을 먹게 하지 않았다. 물이 어찌 착한 사람만 먹는 것이겠는가. 문화도 마찬가지라 여긴다. 문화는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문화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다리이지, 사람과 사람을 가르는 벽이나 가두는 철조망이 아닌 까닭이다. 경제의 산물은 쓰면 쓸수록 없어지지만, 문화의 산물은 토비아스의 우물처럼 아무리 퍼 올려도 마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서울미술관이라는 문화의 우물을 사람들과 나누고자 했다. 미술관이라는 우물가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반갑게 이야기를 나눴으면 했다. 우리가 함께 물을 주고 아끼며 격려할 때 묘목은 거목으로 자랄 수 있다. 그래서 서울미술관이 자연과 역사, 문화가 어우러진 너른 뜰이 되고 문화계에 큰 그늘이 되어 있길 희망한다. 안병광 장로(서울미술관 설립자)
  • 2018.09.16 / 오정선 기자

    오치균의 ‘ 감 ’
  • 순환의 시간을 보내고 살아남은 생명력 지두(指頭) 화법으로 표현한 개인의 추억과 감성의 상징물 끝내 살아남아 이룬 결실은 경건한 삶의 영예 나뭇가지 사이로 탐스러운 감이 보인다. 잎이 떨어진 뒤 앙상하게 남은 가지와 탐스럽게 익은 주홍빛 감이 풍경의 대조를 이룬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주홍빛 감이 해처럼 둥글게 떠 있으니 더욱 탐스럽게 보인다. 오치균의 ‘감’은 자연에서 살아남은 환희, 끝내 살아남아 이룬 결실의 얼굴을 가졌다. 오치균은 어떤 생각으로 몇 알의 감만 이토록 탐스럽게 표현했을까. 초여름, 감나무를 올려다보면 가지 사이로 가득 핀 감꽃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하얀 감꽃이 열린 자리마다 잘 여문 감이 열릴 테지. 날씨가 조금씩 더워지면 감꽃은 바닥에 떨어져 검게 말라 사라지겠지. 그리고 그 자리에 다시 푸른 감이 고개를 내밀고. 하지만 맺힌 감이 모두 탐스러운 감이 되지는 않는다. 바람에 흔들려, 비를 맞고, 벌레가 먹고. 지금처럼 뜨겁고 긴 여름을 보내는 동안 수많은 이유로 순서도 없이, 어린 감들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따가운 여름을 이긴 감들만이 나뭇잎이 다 떨어져 가지가 앙상해질 때쯤 주홍빛 둥근 얼굴을 세상에 내민다. 한 그루 감나무에 매달려 순환의 시간을 보낸 뒤, 둥근 해 같은 튼실한 감 한 알로 살아남으니 그 생명력이 새삼 경이롭다. 오치균에게 있어 감은 생활이었다. 작가는 말한다. “엄마는 감을 곱게 닦고 광주리에 담아 새벽 첫 차에 몸을 싣고 시장에 내다 팔았다. 엄마와 함께 시장에 가서 감을 팔 때면 엄마는 ‘감 사세요!’를 외쳤지만 이상하게도 내 목소리는 정작 밖으로 나오지 않아 거의 들리지 않았다.” 오치균에게는 감이 먹고살기 위한 생존의 수단이었다. 작가는 자신의 추억을 더듬듯 물감을 손가락으로 찍어 직접 발라 그 감을 표현했다. 작품을 완성한 작가는 설명을 제거하고 본질을 보여주고자 했다지만, 지두(指頭) 화법으로 그리는 순간 감은 개인의 추억, 개인의 감성을 의미하는 상징물이 됐다. 화폭은 현실에서 아득히 멀어져 옛 기억을 회상하는 파노라마 한 장면으로 정지한다. 작가 스스로 ‘지긋지긋했던 시골 생활’이라 표현한 유년의 기억은 그에게 감처럼 붉고 또렷한 위태로운 아름다움이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이름이 결국 마지막 가지에 매달린 한 알의 붉은 감처럼 소중하고 희소하게 빛나길 원한다. 요즘 같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사회에서는 누구나 부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 유일한 존재가 되기 위해 바삐 달린다. 그러한 존재가 되기 위해 나는 ‘몰입’을 경험하라고 말하고 싶다. 어떤 대상, 목표에 몰입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공부든, 일이든, 운동이든, 연주든, 그림그리기든 그 무엇을 위해 자신의 온 힘을 쏟아 부을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경험하는 세상은 크게 다르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몰입은 의식이 경험으로 꽉 차 있는 상태다. 이때 각각의 경험은 서로 조화를 이룬다. 느끼는 것, 바라는 것, 생각하는 것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이다. 명확한 목표가 주어져 있고, 효과를 곧바로 확인할 수 있으며, 과제의 난이도와 자신의 능력이 합치되는 활동을 할 때 우리는 몰입을 통해 삶의 질을 끌어올릴 수 있다.” 사업을 하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시련이란 없었다. 한고비 한고비를 넘어서면서 나는 때때로 승부사가 되어야 했다. 자신의 판단을 근거로 적당한 타이밍에 선택해야 했고, 그 선택에 집중과 몰입을 하여 일관되게 행동했으며, 모든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책임을 지고자 했다. 그러자 견제와 시기가 사라졌고, 고난의 시기에 쌓은 미운 정이 지금은 고운 정으로 바뀌어 함께 지난날을 떠올리며 웃을 수 있는 관계가 됐다. 오치균의 감은 늦가을 한참 물오른 감이다. 어려서 감을 팔아 생활해야 했던 오치균은 나무에 열린 감이 충분히 무르익었을 때 누릴 수 있는 풍요로움 따위는 생각할 수 없었다. 자연은 이 시기를 절정으로 다시 말라 추운 겨울로 이어진다. 겨울이 되도록 찾아오는 까치가 없어 까치밥으로 남겨 놓은 감이 매달린 채 새까맣게 말라가는 광경은 자못 쓸쓸하다. 사람의 이름이나 사업도 전성기가 있으며 쇠퇴기가 있게 마련이다. 다만 사람의 빛이 감의 빛과 다른 점은 그 시기에 무언가를 남긴다는 것에 있다. 사회사업가로 활동 중인 빌 게이츠는 전 세계 아이들의 유아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세상을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가를 보여준 사례다. 나누는 삶, 돈이라는 것을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지를 보여주는 모범처럼 느껴졌다. 내 주변에도 이러한 사람이 존재했다. 2013년 소천한 박영하 박사(을지재단 설립자)는 의학자라는 외길을 걸으며 생명·사랑 정신을 몸소 보여주셨다. 한평생을 의술발전·인재양성 등 국가사회에 헌신해 후대에 귀감이 되고 있다. 기업을 운영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회의 요구에 부흥해야 가능한 일이다. 나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부름의 목소리에 긍정적인 대답을 하는가를 목표로 지금까지 일해 왔다. 나를 위한 몰입의 순간마저도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내겐 실패한 과거는 있을지라도 수치스러운 과오는 없다. 자연에서 살아남은 환희, 끝내 살아남아 이룬 결실의 감 한 알은 승자에게 주어지는 영예일지 모른다. 손가락으로 물감을 묻혀 그린 오치균의 감처럼. 그 영롱한 빛처럼, 속이 꽉 찬 열망의 무게처럼. 안병광 장로(서울미술관 설립자)
  • 2018.08.19 / 오정선 기자

    임직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소녀>
  • 꿈꾸지 않으면 청춘도 멀어질 뿐 볕 좋은 오솔길에서 만나는 발랄하고 차분한 생명미 미래가 있다고 확신하는 것은 자신이 간직한 꿈을 믿는다는 의미이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그 꿈을 이루려는 의지가 지금의 나를 꿈틀거리게 한다. 꿈틀거리는 에너지는 상상이라는 그릇 안에 담긴다. 그 그릇은 모양도, 내용도 정해지지 않는다. 상상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변한다. 하지만 상상의 그릇은, 모양은 없지만 크기는 가늠할 수 있다. 상황에 따라 작아지기도 하고 사람에 따라 커지기도 한다. 우리의 꿈이 어디까지 가 닿았느냐가 상상의 그릇의 크기이며 그 가장자리가 청춘의 경계선이다. 그렇게 치자면 삶은 그 그릇의 크기를 계속해서 넓혀 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변주곡의 멜로디가 상상이라는 무형의 그릇에 담겨 있는 한 청춘으로 살아갈 수 있다. 청춘은 20대와 50대를 가리지 않는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인생이 길어 보일 때가 청춘이라고. 오히려 상상의 그릇이 어느 순간 커지지 않거나 심지어 줄어들면 그때부터 늙음은 시작된다. 다만 청춘은 더 이상 꿈꾸지 않는 자에게서 멀어질 뿐이다. 상상은 다른 말로 로망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로망의 시작은 중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절 나는 눈에 보이는, 귀에 들리는 모든 욕망에 나를 대입시켰다. ‘어른이 되면’이라는 가정 아래 복권 당첨, 돈을 많이 버는 부자, 판사나 검사 등 많은 상상을 하곤 했었다. 생각만으로도 흐뭇해지는, 고스란히 내면에서 피어나는 뭉게구름 같은 혼자만의 상상을 누가 뭐라 하겠는가.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 최종적으로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지상에는 아무도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을 알 수 있다.” 뒤러의 말이다. 임직순은 소녀에 대한 로망으로 가득한 화가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그가 세상에서 꿈꾸는 생명에 대한 간절한 기도가 느껴진다. 알록달록 꽃무늬 치마와 붉은색 티셔츠를 입은 소녀의 가슴에 화려한 장미가 피어난다. 소녀가 앉은 의자 뒤에도 형형색색의 꽃들이 밝기만 하다. 무뚝뚝한 사람이라도 금방 경계를 풀고 부드러운 눈빛을 갖게 하는, 한 순간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의 시간이 찾아온다. 임직순은 여인, 특히 소녀를 많이 그렸다. 앉아서 책을 보거나 사색에 잠긴 소녀의 그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볕 좋은 오솔길을 걷는 듯한 기분에 빠져들게 한다. 그만큼 안정되어 있다. 게다가 색채는 화려해서 기분을 달뜨게 한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발랄한 차분함이랄까. 햇살 좋은 날 소풍 가는 어린아이의 두근대는 심성을 자아낸다. 차분한 여인과 강렬한 빨강이 어우러진 임직순의 그림에는 미래에 대한 에너지가 있다. 붉은 색 자체가 나에게는 생명의 색으로 읽혀 유독 그리 여기는지도 모르겠다. 아담과 이브가 딴 붉은 사과로 표현되는 선악과가 담고 있는 유한한 인간의 삶, 생명이 있는 곳에 언제나 붉은색이 함께하고 있어 든 생각이리라. 임직순이 소녀와 붉은 색을 통해 생명의 힘을 표현하려는 것처럼 나는 석파정을 통해 문화의 정신을 표현하고자 했다. 석파정은 지리적으로 아름다운 위치다. 또 역사적으로 가장 격동기였던 구한말 이야기를 간직한 곳이다. 내가 10대 때 꾼 꿈이 30년을 바라보는 로망이었다면, 지금 나는 500년을 내다보며 석파정을 로망한다. 나는 이곳을 세계의 문화 애호가들이 아끼는 문화놀이동산으로 만들고 싶다. 내 경계 없는 상상의 그릇에 석파정을 고이고이 담는 중이다. 안병광 장로(서울미술관 설립자)
  • 2018.07.15 / 오정선 기자

    이중섭의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
  • 진짜와 가짜 가족이 함께 사는 것을 죽을 때까지 꿈꿨던 화가 위작 시비 휘말린 건 세상에 하나 뿐인 진품 매력 때문 빛엔 어둠이 따르기 마련, 어둠에 발목 잡히지 않게 조심해야 살아생전, 꿈에 그린 가족과의 재회. 과수원에서 가족과 함께 과일을 따며 평화롭게 살 수만 있다면…. 화가 이중섭은 전쟁의 소용돌이 안에서 빼앗긴 민족과 가족을 되찾고자 늘 소망했다. 굴곡의 역사 속, 세상이 아무리 험난해도 그는 가족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중섭의 작품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을 보면 과수원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넘친다. 파마머리를 한 아내 남덕과 콧수염을 단 화가 이중섭 주변에는 여섯 명의 아이들이 있다. 노란 나무에 올라 과일을 따는 아이, 그 밑에서 천을 펼치고 있는 아이, 사다리를 받치고 있는 아이, 엄마와 함께 과일을 따는 아이. 그림 속 아이들은 하나같이 즐겁고 행복한 표정이다. 이중섭이 살아생전 그토록 바라던 풍경이었다. 이중섭이 상상한 낙원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중섭이 아이를 여러 명 그리게 된 데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이중섭은 1945년 결혼하고 원산 광석동에 신혼집을 마련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6년 남덕과 사이에 첫 아들을 낳지만 태어나자마자 죽게 된 것이다. 아이가 죽은 날, 이중섭은 슬픔을 달래려고 선배 시인 구상과 밤늦도록 술을 마셨다. 죽은 자식을 되살릴 수만 있다면, 아이들을 더 많이 낳아 오순도순 정을 나누며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일찍이 이중섭처럼 가족에 대한 사랑을 이토록 절절하게 오랫동안 그린 화가는 없었다. 가족이 모여 사는 일이야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을, 중섭은 아내와 아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것에 대해 죽을 때까지 그 행복을 꿈꿨다. 그런 이중섭을 나의 아내는 연민하며 좋아했다. 이중섭에게는 죽은 아들 외에 평생을 그리워했던, 살아 있는 아들이 두 명 더 있었다. 2005년 이중섭 타계 50주년 행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둘째 아들이 평소 가지고 있던 아버지의 그림 몇 점을 경매에 내놓았는데, 경매에 나온 이중섭 그림이 가짜라는 뉴스가 보도됐다. 이중섭 그림 가운데 4점이 위작으로 판명 났다는 것이다. 당황스러웠다. 이중섭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나로서는 이 사건이 적잖은 충격이었다. 살아생전 이중섭은 자신이 그릴 수 있었던 최고의 작품을 그렸을 뿐이었는데, 후대 때문에 그의 예술 세계가 거짓으로 얼룩져 버렸다는 것에 마음이 몹시 아팠다. 미술계 지인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이중섭 같은 화가의 명성이 더는 추락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며 대책을 논의해왔다. 이중섭의 진작 가운데 으뜸을 골라 세상에 내놓아 이중섭의 진가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마땅한 작품을 물색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결국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만한 작품이 없다는 게 지인의 내심이었다. 가장 귀한 것을 내놔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펄쩍 뛰었다. 그 작품은 아내의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이중섭의 명성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했다. 아내가 아끼는 그림을 경매에 내놓았다. 아내의 원망이 눈앞에 선했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내는 뉴스를 통해 이중섭 그림이 경매에 넘어간 사실을 알았노라고 했지만 나는 잘못 안 거라며 시치미를 뗐다. 그리고 잔꾀를 내어 똑같은 판화작품을 머리맡에 걸어두기로 했다. 친한 지인이 진짜와 진배없는 판화작품 액자를 만들어왔다. 다시 집안은 이중섭의 아이들로 시끌벅적한 듯했다.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을 팔고 두 달 쯤 지난 어느 날, 나는 아내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지금 벽에 걸린 저 작품은 가짜다. 당신이 본 뉴스가 사실이다. 나는 내가 왜 작품을 팔 수 밖에 없었는지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그리고 아내에게 용서를 구했다. 다행히 아내는 이중섭에 대한 나의 애착을, 의무감을 이해해 주었다. 사실 미술품 위조 사건은 심심치 않게 언론에 발표된다. 해외 유명 작가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이중섭이나 박수근 같은 화가의 위작이 발표된 적이 여러 번 있다. 때때로 미술품을 수집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위작과 직접 만날 때가 있다. 그때는 누굴 믿고 미술품을 사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위작의 탄생에는 몇 가지 배경이 있다. 작가가 그린 사실이 기록에는 있는데 작품이 없는 경우, 누군가 위작을 그려 진품이 발견되었다고 대중을 속일 가능성이 크다. 또 고가의 작품일 경우 위작이 나돈다. 작품의 가격이 비싸다는 것은 그 작품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위작이라고 판단한 작품이 후에 진품일 경우도 있다. 위작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됐다. 고대 페니키아의 위조꾼들처럼 위작을 통해 한몫 잡으려는 속셈이 있거나 진품의 매력을 시기하는 무리가 늘 위작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늘 경각심이 필요하다. 미술품이 늘 위작이라는 시비에 휘말리는 것은 세상에 딱 하나 밖에 없는 진품이 가진 매력 때문이다. 세상 모든 빛에 어둠이 따라오는 것을 탓하기 보단 스스로 어둠에 발목이 잡히지 않게 조심하는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됐다. 안병광 장로(서울미술관 설립자)
  • 2018.06.17 / 오정선 기자

    박수근 <젖먹이는 여인>
  • 잠깐의 기척에도 쉬이 꺼져버릴 것 같은 어머니 어지러운 현실에서도 꿋꿋이 현실을 이겨낸 강인한 모성 아침 일찍 서울 아산병원에서 출발한 운구차가 점심 때가 지나서 용인 선영에 도착했다. 짙게 깔린 구름에 해가 가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스산한 바람이 어딘가에서 불어와 먹먹한 가슴에 도달했다. 휑한 가슴을 가른 그 바람이 어머니를 태운 차를 한 차례 휘감고 사라지는 것도 같았다. 미지근한 눈물이 목줄기를 타고 옷깃 안으로 파고들었다. 어머니가 내게 베푸신 사랑의 십분의 일도 되돌려 드리지 못했는데, 아들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어머니가 소천하시고 말았다. 눈물이 끝도 없이 흘렀다. 평생 일만 하셨던 어머니. 환갑이 지나면서 몸 여기저기에 병이 들기 시작했다. 결국 몸이 약해지시면서 심장병에 걸리셨다. 병원을 오래 다니셨지만 차도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협심증 같은 이런저런 합병증이 찾아왔다. 1년에 3개월은 입원해 계셨을 정도였으니 당신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곁에 있는 사람이라 해도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는 하루에 먹는 약이 20알이 넘을 정도로 약에 의존하여 하루하루를 지내셨다. 자식이 약을 파는 사람인데 병을 고쳐드리지 못하다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알약의 개수를 줄여드리는 정도였다. 자식으로서, 약 때문에 늘 몸이 부어오르고 정신이 몽롱한 상태의 어머니를 바라다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몸이 지칠 때도 있었고 그래서 마음을 지나칠 때도 많았다. 하지만 힘없이 떨궈진 어머니의 손을 끝내 놓는 일만은 없길 바랐었다. 이토록 무능하게 속수무책으로 죽음이라는 놈에게 어머니를 보내고 싶지는 않았었다. 다만 이대로도 좋으니, 조금만 더 이 못난 자식 곁에 머물다 가시기를, 어머니와 아들의 인연으로 살아온 생애를 하루씩 더 이어나갈 수 있다면, 그래서 같이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고 볕 좋은날 바람도 쐬러 갈 수 있다면. 하지만 간절한 바람은 바람으로 끝이 났고 2007년 11월 10일, 내 어머니는 세상을 뜨셨다. 내가 발을 디딘 온전한 세계 하나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 날이기도 했다. 박수근의 그림 속 인물은 평생을 일로 보내셨던 내 어머니와 많이 닮았다. 지아비의 다정한 보살핌 없이, 눈을 뜨면 밭에 나가고 점심이 되면 상을 차리고 저녁이 되면 아이들을 돌보며 하루를 마감하던 여인. 우는 새소리도 구슬펐던 어지러운 현실에서도 박수근의 그림속 인물들은 마치 내 어머니처럼 꿋꿋이 현실을 인내하고 있다. 지금 되돌아보면 내가 어렵고 힘들 때마다 숨을 제대로 살리고 새로이 희망의 불을 지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어머니와 함께 보냈던, 보잘것없던 나의 어릴 적 일상이 평생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내 안에 빛나는 별로 자리하고 있다. 진실로 내 마음속 별 가운데 가장 빛나는 별은 여전히 어머니별이다. 무심히 지나는 새의 날갯짓에도 어머니 생각이 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무릎에서는 응석받이, 무덤에서는 눈물받이라는 말이 있다. 아마도 이 세상 모든 자식을 두고 하는 말일 게다. 아니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어머니가 진정 그리워진 불효자가 되고 말았으니. 안병광 장로(서울미술관 설립자)
  • 2018.04.22 / 오정선 기자

    이대원 《사과나무》
  • “나무는 삶의 방향으로 가지를 뻗는다” 영원한 아름다움, 긍정적이고 관대한 마음 품을 때 조화 공간 나누는 벽은 작품 걸릴 때 서로를 잇는 소통의 문 돼 “인생에서 살아갈 만한 가치를 부여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일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말이다. 미술품을 수집하는 데에는 두 가지 즐거움이 따른다. 하나는 아름다움과 함께 생활한다는 것이다. 꼭 그림이 아니더라도 무엇인가를 수집해 본 사람은 자신이 아끼는 수집품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 지를 안다. 다른 하나는 아름다움을 나눈다는 것이다. 수집의 즐거움은 모아두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기호를 주변 사람들과 나누고 교류하는 과정을 통해 즐거움을 배가시킬 수 있다. 둘의 공통점은 더하거나 나누어도 그 향기나 품위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또한 ‘소유’와 ‘나눔’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도 예술만이 가진 특별하고 아름다운 가치가 아닐 수 없다. 미술품을 모은 시간이 30년이 넘으면서 어느 덧 작품 수가 제법 많아졌다.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는 물론 김창열, 오치균, 고영훈, 황재형까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을 가까이 두게 된 것은 말로 다 하지 못할 만큼 큰 행운이다. 그중에서도 나의 동심을 자극하는 작품은 단연 이대원이다. 자연에 자신만의 색채를 덧세우지만 한번도 부정적이거나 음울한 법이 없다. 이대원 작품 가운데 특히 나무가 들어간 작품은 그 안에서 생명력이 꿈틀거린다. 나무는 삶의 방향으로 가지를 뻗는다. 결코, 거꾸로 가지를 뻗는 법은 없다. 작가는 생명이 앞으로 나아가야 함을 자연의 이치를 빌려 말하고 있다. 미국의 소설가 하퍼 리가 쓴 <앵무새 죽이기>를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상대방의 관점에서 생각할 때 비로소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미술품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미술품을 감상할 때 미술가의 생각과 처지를 이해하면 그 그림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오독의 가능성이 많이 줄어드는 셈이다. 농원의 작가라 불리는 이대원은 ‘나무는 삶의 방향으로 가지를 뻗는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위로 향해 제멋대로 뻗어 가는 나뭇가지에서 생명력이 태동함을 보았다. 나무가 거꾸로 자라지 않고 태양을 향해 가지를 뻗고 있다. 우리 앞에도 태양과 같은 밝은 날이 존재하지 않는가. 작가 특유의 긍정이 그림으로 표현된다. 그리하여 내일이 아름다울 것이라는 확신은 어디에도 없으나 이대원은 확신에 찬 붓을 마음껏 놀린다.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아름답다’는 말의 사전적 의미를 보았다. 두 가지 뜻이 있었다. 하나는 ‘보이는 대상이나 음향, 목소리 따위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눈과 귀에 즐거움과 만족을 줄 만하다’였다. 또 하나는 ‘하는 일이나 마음씨 따위가 휼륭하고 갸륵하다’고 적혀 있었다. 하나는 외적인 정의이고 또 하나는 내적인 정의이다. 모든 유·무형의 물질이 서로에게 긍정적이고 관대한 마음을 품고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를 우리는 아름답다고 말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각박해지는 것은 우리가 아름다움과 눈높이를 맞추지 못한 탓이다. 안과 밖의 균형, 나와 너의 조화가 안과 밖, 나와 너 사이에 놓인 벽을 허물게 한다. 세계를, 너와 나를 통하게 하는 것이 아름다움이다. 미술은 언제나 그 사이에 있다. 작품을 벽에 걸어두거나 세워두는 것이 이런 이유에서 일까. 벽은 공간을 나누고 시간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벽에 걸린 미술품은 나를 다른 세계로 인도하고 때로는 나의 내면으로 통하는 문이 되어준다. 그림이 걸려 있을 때, 벽은 단절의 벽이 아닌 소통의 문이 된다. 미술품은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을 절대로 뿌리치거나 냉대하지 않는다. 그러니 누구든 언제든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보면 된다. 세상이 점점 복잡하다. 어제가 오늘을 담보하지 못하고 오늘이 내일과 같으리란 보장은 없다. 이럴 때 미술은 나의 의지에 힘을 실어준다. 내가 어디든 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아름다움에 대한 매혹, 소유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욕망,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것에서부터 훨씬 자유로운 지점이다. 안병광 장로(서울미술관 설립자)
  • 2018.03.1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신사임당《초충도》
  • 위대한 유산은 자기완성에서 시작 된다 진정한 성공은 부와 명성에 있지 않아 삶의 큰 부분 이루려면 작은 부분부터 실천 부와 명성을 쌓는 세속적인 성공은 진정한 성공이라 할 수 없다. 부와 명성이 인간의 마음 속 깊이 잠겨 있는 갈망이나 삶의 근본에 해답을 제시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진정한 성공은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그 안에서 보람과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오랜 지인 대륭그룹 이환근 회장을 좋아하는 것은 그가 늘 부지런하고 성실하다는데 그 이유가 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완벽하게 해내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닌다. 나 역시 이 회장처럼 평생을 가족과 직원을 부양하기 위해 지금껏 열심히 일했다. 내가 걸어왔던 과거를 되돌아보면 평생을 두 가지 목표를 이루고자 뛰었다. 두 가지를 시간으로 나눠 생각해보면 지금까지는 주로 가족과 직원을 부양하기 위해 열심히 일해 왔다. 그리고 이웃을 돌보고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서울미술관을 만들고 운영의 기초를 닦는 일은 후자에 해당된다. 나는 사명에 보다 집중하고 싶다. 나의 이런 생각에 힘을 실어준 분이 신사임당이다. 내가 처음 신사임당이 그린 《초충도》 10점을 구입했을 때 가졌던 생각은 그녀가 평생 나비, 맨드라미, 원추리, 잠자리, 사마귀, 메꽃, 도마뱀, 갑충, 개구리, 여뀌, 나방, 벌, 개미, 방아깨비, 오이, 가지, 수박, 들쥐, 패랭이꽃과 같은 자기 주변에 있는 소소한 사물에 관심을 가졌던 것처럼 나도 내 가족, 내 이웃에 조금 더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고 대화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눈에 보이는 일이라 여긴다. 이를테면 집을 짓고 휴대전화를 만들고 옷을 만들어 파는 경제적인 일들 말이다. 반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일 즉, 정신적인 활동을 하찮게 여기기도 한다. 사색하거나 식물을 키우거나 사랑을 나누는 감성적인 일을 우리는 여유를 부리거나 사치스러운 일로 여긴다. 그러나 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신사임당이 《초충도》를 통해 보여 준 탁월한 통찰은 노벨상을 받은 폴링의 말처럼 오랫동안 몰두한 뒤에야 나올 수 있는 경지이다. 우리가 어떤 일에 몰두한다고 해서 즉시 효과를 보지는 못한다. 보고 듣고 읽은 작은 알갱이들이 뭉치고 뭉쳐지는 과정을 겪어야 추운 날을 꼬박 버티는 눈사람이 되는 것이다. 신사임당이야말로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여성성이라 할 만하다. 스스로 증진하고 남편, 자녀, 가족을 위해 뒤에서 묵묵히 지원한 그녀의 삶은 오늘까지고 미덕으로 빛나고 있다. 그녀는 조선 600년을 대표하는 여류 문인답게 실력과 철학, 삶이 일체가 된 인생을 살았다.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현모양처이면서 그림, 자수, 문장에 뛰어났다. 그의 예술세계는 모두가 인정하듯 관찰력이 뛰어나고 그 기록도 세밀하다. 율곡 선생은 어려서부터 이런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신사임당을 현모양처의 대명사라 칭송하는 것은 정갈하고 고상한 그녀의 삶이 자녀와 남편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내가 《초충도》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작품에 그녀가 가진 삶의 철학이 고스란히 스민 까닭이다. 《초충도》를 곁에 두면서 나도 내 아이들에게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한 적이 있다. 큰아이가 음악가의 길을 선택했을 때 나는 음악에 관심을 가졌고, 둘째가 경영인의 길을 선택했을 때 나는 사회적으로 좀 더 본을 보일 수 있는 CEO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리고 셋째 아이가 의사의 길을 선택했을 때 나는 다시 한번 나의 본업에 충실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초충도》를 그린 화가들은 여럿 있으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모두 신사임당을 능가하지는 못한다. 신사임당은 조선 초기 《초충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희망하는 길로 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 희망하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를 반문할 때만 더 멀리 갈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그 길은 자연의 이치와 닮아서 삶의 큰 부분을 이루려면 작은 부분부터 바꾸고 실천할 때만이 다다를 수 있다. 신사임당이 걸었던 길처럼 말이다. 안병광 장로(서울미술관 설립자)
  • 2018.02.18 / 오정선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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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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