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교수의 명화속 성경코드
렘브란트의 명화로 보는 성경 - 아브라함과 이삭의 희생(1636)
  • 아브라함이 믿음의 아버지인 만큼이나 그의 생애에는 일어난 일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100세의 아브라함과 99세의 사라가 아들 이삭을 낳는 사연은 웃음을 넘어 신의 은총의 힘을 다시 생각게 한다. 이는 즐겁고 신나는 일이지만 이어 일어나는 이삭의 희생을 요구 당하는 사정에 이르면 우선은 당혹스러워진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과단성 있게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기로 한다(창 22:1-8). 이 장면에서 나는 두 가지 상반되는 심리적 흐름이 마음에 지나가고 있음을 숨기기 어렵다. 첫째는 아브라함의 깊은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 깊은 경외감을 느끼는 부분이다. 두 번째 떠오르는 것은 정말 그 같은 요구를 받았을 때 그는 아무런 불평이나 주저함이 없었을까하는 인간적이며 좀 더 현실적인 생각을 갖게 된 점이다. 아브라함이 살아온 생애와 신앙경력을 보면 그가 하나님의 요청에 즉각 순종하는 경위를 어느 정도 이해할 것도 같다. 내가 읽기로는 깊은 신앙행적에도 불구하고 그가 믿음에서 왕왕 실패한 적이 있는 것도 감지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감히 그의 여러 번의 실패가 오히려 굳은 믿음을 만들어 냈다고 말하고 싶다. 아브라함이 아들의 희생 요구에 즉시 순종하는 믿음의 태도야 말로 놀랍고 감동적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큰 감화를 주는 것은 야훼의 준비 야훼 이레이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야훼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훼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창 22:12-14) 나는 신앙 체험에서 내 삶의 앞길을 여호와께서 늘 준비하여 주셨음을 근래에 더욱 절감한다. 우리는 늘 앞날을 걱정하고 염려한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하나님께서는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나의 삶을 인도하여 주셨음을 알게 된다. 그것도 내가 생각하고 기대한 것 이상으로 그보다 더 좋은 방향과 결실로 말이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므로 그 분은 우리를 최상의 길로 인도하심을 믿는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시키려고 하는 그 순간 정확하게 그것을 막았다. 한순간만 놓쳤어도 이삭의 생명을 건질 수 없지 않았던가. 그만큼 섬세하고 치밀하고 정확하다. 기실 아브라함이 그 산에 오르기도 전에 이미 그 곳에 수양 한 마리를 예비하셨을 터인데 다만 우리가 모르고 있었듯이 말이다. 렘브란트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희생’을 대작으로 두 점 그렸다. 하나는 1635년에 그린 것으로 뻬쩨르부르그에 있는 아르미타쥬 미술관에 있다. 다른 하나는 일 년 뒤 1636년의 작품인데 독일 뮌헨의 알테피나코텍 미술관에 볼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하늘의 천사가 앞의 것은 화면 좌측에서 날아오고 있는 반면 후자의 경우는 중앙에서 등장하고 있는 점이다. 전체 톤으로 보면 전자가 좀 더 회색조 어둠이 깔려 있다면 후자는 보다 밝다. 공통점은 아브라함이 왼손으로 이삭의 얼굴을 움켜쥐고 있어서 이삭의 그 순간의 얼굴 표정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아무리 렘브란트라 하더라도 그 순간의 얼굴 표정을 상상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었던 것 같다. 이석우 (겸재정선기념관 관장, 경희대 명예교수)
  • 2009.03.24 / 이미나 기자

    렘브란트의 명화 (1) - 아브라함과 세 천사들
  • 하나님의 약속은 실현된다는 성경의 가르침 표현 렘브란트의 상상력과 신앙적 영감 느껴지는 작품 렘브란트는 신구약 성경을 소재로 한 수많은 유화 ,동판화, 드로잉 작업을 했다. 이들 작품 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탁월해서 그들을 대면하노라면 풍성한 예술적 상상력과 깊은 신앙적 영감을 느끼게 한다. 렘브란트가 그린 <아브라함과 세 천사들>(1646)은 아브라함이 세 천사들을 맞이하는 장면을 다루고 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얼마나 반가운 마음으로 그리고 마음을 다하여 지극정성 손님을 대접하고 있는지를 눈으로 보듯 자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야훼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좋은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창 18:1-8) 이렇게 환대를 받고 떠나면서 이들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의 상황과 형편으로는 도저히 임신을 할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아내 사라 조차도 속으로 웃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약속 받은 대로 놀랍게도 이삭을 얻게 된다. 렘브란트는 우선 그림의 배경으로 그림 상단 중앙에 용트림하듯 우람하게 서 있는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를 세웠다. 우측에는 텐트 대신에 그가 살던 시기의 탄탄한 집 건물을 그려 넣었다. 이는 현실감을 살리기 위해 화가들이 가끔 도입하는 방법이다. 무엇보다 중앙에 날개 단 천사가 황금빛을 환하게 발하며 다리를 내밀고 편안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우리의 시선을 끈다. 그가 천사의 외양으로 나타났지만 그가 하나님 여호와이심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렘브란트는 물감을 붓에 듬뿍 묻혀 두껍게 바르는 세심함을 보인다. 다른 두 천사에 비해 여호와를 단연 크게 그렸는데 그는 스스로 빛을 발산하는 빛 자체로 어떤 빛보다 밝다. 다른 두 천사는 등을 돌리고 있거나 반쯤 옆으로 앉았다. 우측 한 계단 낮은 자리에 아브라함이 한손에 그릇을 들고 왼손에 뚜껑달린 물주전자를 땅위에 세우면서 공손히 섬길 자세로 앉아 있다. 아브라함의 이런 태도는 하나님을 절대 신앙하듯이 인간을 존중하는 그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의 뒤편 계단 위에는 나이든 사라가 살짝 문을 열고 아브라함과 세 천사를 섬기기 위해 무엇이나 하겠다는 자세로 서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사라의 태도는 기쁘면서도 이들의 정체를 아직 모르는 상황에서 조금은 머뭇거려 졌을 터이다. 그럼에도 그녀에게서 불신앙의 표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그가 하나님임을 안후에는 두려워하며 끝까지 인종하여 기다리는 착한 여인이었다. 야훼를 두려워하는 마음은 그에 대한 신뢰와 신앙이 없이는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극진한 이웃사랑과 하나님의 약속은 어김없이 실현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드러내고자하는 렘브란트의 작품제작 의도를 읽을 수 있어서 즐겁다. 이석우 (경희대 명예교수, 역사 문화 연구소장)
  • 2009.02.13 / 이미나 기자

    도메니코 베카푸미의 모세와 황금송아지
  • 십계명을 출현시킨 고독한 지도자, 모세 빛의 화가, 색의 화가라 불리는 베카푸미 자연과 상징적인 빛의 대비 탁월해 사람들과 모세의 모습 대칭시켜 분위기 고조 모세는 80세 되던 해 호렙산(山)에서 야훼에게서 민족을 해방시키라는 음성을 듣고 이집트로 돌아와 바로 왕과 싸워 이겨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켰다. 어려운 환난을 이겨내고 기적을 보이며 해방시켰지만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인들의 불평과 불만은 계속됐다. 물이 쓰다고 원망했고(출 15:23), 애굽 땅에 있을 때에 배불리 먹었던 고기 가마와 떡을 그리워했다. 또한 사막의 목마름을 참지 못하고 모세에게 물을 마시게 해달라고 불평하고 원망했다(출 17:1∼4). 그 뿐 아니라 이집트에서 탈출한 그 근본 행위 자체를 부정하고 다시 돌아가겠다고 까지 위협했다. 그때마다 야훼께서는 나무 조각을 물에 던지거나, 바위를 쳐서 물을 내고, 놋뱀으로 독사를 이겨내게 하며,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불리 채우게 하여 이 위기를 이겨내게 했다. 그러나 인간의 불평은 계속됐다. 그 불만과 항거의 절정이 바로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에게 십계명을 받고 돌아올 동안에 일어나고 말았다. 그가 더디 내려오는 것을 참지 못한 불평자들은 아론을 위협하여 다른 신(神)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것이다(출 32:1∼7). 모세는 이 모습을 보고 분노해 십계명이 적힌 돌판을 던져버렸다. ‘모세와 황금 송아지’를 제작한(1536∼1537) 도메니코 베카푸미(Domenico Beccafumi, c 1486∼1551)는 시에나 근처에서 태어났다. 이탈리아 시에나에 그림 공방을 열고 그 곳에서 전 생애를 보내며 시에나 화풍을 연 화가였다. 그는 반고전주의 양식, 즉 초기 국면의 매너리즘에 해당하는 화풍을 이끌어가는 대표주자가 됐다. 베카푸미 그림의 특징은 길게 늘어진 신체, 과장된 몸짓, 높게 드러내는 감정 그리고 무엇보다 뜨겁고 신랄한 색감과 이국적 분위기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빛의 화가이자 색의 화가라고 불려지는데, 이는 자연의 빛과 상징적인 빛의 대비를 표현주의적으로 드러내는 아주 탁월한 재능 때문이다. ‘모세와 황금 송아지’는 작지 않은 화폭(197×139㎝)이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이 많아 화면이 빽빽하게 채워진 느낌이다. 왼쪽 하단, 나신의 젊은이가 놀라 넘어지듯이 도망하려는 자세인데 정통의 단축법으로 그려져 있다. 이 젊은이는 첫번째 던진 돌판에 이어 두 번째의 돌판을 던지려는 모세의 몸짓에 경악하고 있다. 모세를 응시하고 있는 오른쪽의 여인의 내면은 매우 흔들리는 듯 보이지만 엷은 옷주름과 더불어 흘러내리는 몸매는 서정적으로 아름답다. 도망가는 듯한 어린아이는 절박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데 상승효과를 더한다. 왼쪽 상단의 모세는 모든 이들의 응시를 받으며 과장된 몸짓의 S자형으로 다른 사람들과 대칭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온 몸의 무게는 왼쪽 다리에 가 있으나 들려진 오른쪽 다리는 무릎을 구부린 채 골반을 뒤로 빼고 있다. 굳건히 붙든 돌판은 힘센 모세조차 들어올리기에 무거워 보인다. 모세를 향해 굴곡있게 내려 뻗은 산언덕은 환히 비추는 빛으로 인하여 모세의 몸짓을 닮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 사이에 놓여 있는 의외로 작은 황금 송아지조차 모세를 불안하게 쳐다보고 있다. 산언덕 뒤로 멀리 보이는 광야와 이를 가로지르며 트여 있는 가느다란 길이 여기까지 이른 저들의 고난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매우 절박한 순간인데도 전체 분위기는 여전히 온화하고 깊은 서정이 흐르고 있는 것은 베카푸미의 특유한 화법, 그의 따뜻한 마음을 반영하기 때문일 것이다.
  • 2009.01.15 / 이미나 기자

    아기 요한의 가정이 주는 교훈
  • 12월은 언제나 성탄절을 기뻐하는 캐럴과 구세군의 종소리로 즐겁기만 하다. 그러나 천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의 탄생은 12월 한겨울이 아니라 5월이나 6월쯤으로, 사막이 대부분인 이스라엘은 양치는 목자들이 양떼를 치다가 밤중에 잠이 들어도 될 정도의 날씨라고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탄생일이 언제면 어떠랴? 내 마음에 탄생한 아기 예수를 받아들이고 기뻐하면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성탄절이 아닐까? 이러한 기쁜 계절에 우리는 침례 요한의 탄생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의 부모인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늙도록 자식이 없었다. 그러나 몸은 비록 후패했을지라도 그들은 후처를 두지 않고 자식에 대해 갈망하며 계속 기도를 했다. 이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너의 기도가 응답되리라!”고 축복하지만, 이를 믿지 못해 사가랴는 벙어리가 되고만다. 그러나 나이 많은 엘리사벳은 요한을 잉태한 후 숨어서 6개월을 지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곧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도 찾아가 예수께서 잉태될 것을 예언하였고, 이 소식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마리아는 일어나 엘리사벳을 찾아왔다. 두 여인이 행복해 하는 동안 엄마의 몸 안에 있던 두 아기들도 기뻐 뛰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3개월을 함께 보내며 기쁨으로 하나님께 찬양드렸다. 이러한 아름다운 성시가 누가복음 1장에 나오는데, 두 여인은 서로를 축복하며 기쁘고 즐겁게 임신 기간을 지냈다. 그리고 해산달이 되어 천사의 예언대로 요한이 탄생하면서 부친 사가랴의 닫힌 말문이 열리자 그는 예언을 했다. 이 예언은 축복이자 기도였으며, 곧 자신의 아기인 요한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나의 아들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아버지 사가랴의 이러한 축복의 말씀을 들으며 자라난 요한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큰 선지자가 되었다. 어린 자녀들은 아기 요한처럼 아버지의 축복의 말씀 속에서 자라야만 그 마음과 육체가 건강하게 된다. 자녀를 축복하는 것이 어찌 그리 힘든 일이겠는가. 그러나 많은 아버지들이 벙어리가 아닌 벙어리로 지내며 자녀들에게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가정의 문제점이다. 아버지들이여, 벙어리 된 입을 열자! 그리고 내 아내와 자녀들을 축복하자! 그래서 새해에는 우리 가정이 사랑과 축복의 열기로 가득 넘치게 하자. 김영실 교수(총신대 사회교육원)
  • 2008.12.2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시모네 마르티니(Simone Martin)의 ‘임신사실 알리기’
  •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마리아의 몸짓, 표정으로 심리적 흐름 볼 수 있어 성스러운 경건과 예술적 감성 교차된 작품 고딕 후기에 완성, 마르티니의 천재성 돋보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어떻게 오셨는가에 대한 경위는 누가복음에 간명하고도 사실적으로 설명돼 있다. 수태고지(受胎告知:임신사실을 알림) 소재는 화가들의 뜨거운 관심 대상이 돼왔고 이와 관련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작품수만 해도 120여 개에 이른다. 그 중 내 마음을 사로잡은 시모네 마르티니와 리포 멤미의 합작인 ‘임신 사실 알리기’는 두 사람의 공동작업이지만 회화 쪽은 대부분 마르티니의 작업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그림에서 눈여겨 봐야할 점은 마리아의 놀라는 모습이다. 온몸을 S자형으로 젖히면서 그의 표정은 당혹스럽고, 입술은 뽀로통하게 튀어나올 정도이며, 얼굴은 긴장으로 상기되어 있다. 손은 어느 덧 보호본능으로 목에 가 있다. 이 같은 극적인 긴장에 못지 않게 온몸을 따라 볼륨감 있는 옷의 곡선과 신체 내면의 윤곽이 출렁이면서 극도의 우아함과 서정성을 발산하고 있다. 오똑하게 솟아오른 코와 갸름한 얼굴, 흐르는 듯한 목선과 곱고 섬세한 손목은 차라리 육감적이기 까지 하다. 중세동안 상징적 의미에 충실하느라 거의 메말라 버렸던 예술적 감흥이 르네상스기에 들어서면서 되살아나는 증거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몸짓과 표정을 통해 심리적 흐름까지 되살려 내고 있다. 거기에다 옷의 레이스 장식, 보드라운 질감의 암록의 옷색과 뒷배경 황금색이 대비되어 주인공답게 화면을 압도하며 긴장을 유발시킨다. 성스러운 경건과 예술적 감성이 교차되는 순간이다. 마티스의 ‘인물화야말로 종교적 감정을 가장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마리아 앞에 갓 내려앉은 천사 가브리엘은 그 크고 당당한 두 날개를 아직 접지도 않았으며, 체크무늬의 망토는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품격있는 몸매로 무릎 꿇은 천사의 손가락은 화면 중앙 상단의 성령의 상징인 비둘기를 가리키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마리아가 성령으로 곧 잉태하였음을 암시한다. 그의 입에서부터 마리아의 귀까지 마치 무지개다리처럼 문자가 연결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은총을 드높이 받은 이여”라고 새겨져 있다. 가브리엘의 손에는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 나뭇가지가 들려있고, 마리아와 그 사이의 중앙에는 처녀성의 상징인 백합화가 바닥에 확고히 서 있다. 화려하고 장식적이면서도 따스한 인간의 체온을 느끼게 하는 이 고딕 후기의 작품은 마르티니의 천재성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14세기 최전성기를 자랑하고 있던 시에나 출신답게 마리아에게 받쳐진 그 도시의 분위기와 르네상스로 들어가는 시대적 분위기를 잘 반영시키고 있다. 이 그림은 황금색의 장식성에서 뿐 아니라 마리아의 아몬드형 얼굴에서도 비잔틴 이콘화의 전통이 아직도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당시 피렌체가 비잔틴 전통과 단절한 반면, 시에나 미술에서는 아직도 관계를 단절치 않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비잔틴 이콘화에서는 가브리엘의 위치가 통상 오른쪽에 있는데, 왼쪽으로 옮겨진 것은 서방측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라 하겠다. 이 그림이 화려한 효과를 내는 것은 템페라 기법으로 그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르티니의 초기 30여 년의 생은 가려져 있지만 아마도 두쵸의 제자이고, 페트라르카와는 가까운 친구였을 것이다. 이석우(경희대 명예교수, 역사문화연구소장)
  • 2008.12.18 / 이미나 기자

    두쵸 디 부오닌세냐의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
  •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겠노라” 예수님을 세번 부인한 베드로의 사건 두 장면 배치로 극적 분위기 증폭시켜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혀가실 때 자기도 붙잡힐 것이 두려워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번이나 부인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 생애 기록자 네 명 모두가 이 사진의 진행을 마치 소설 쓰듯이 자세하고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마 26:31∼35, 69∼75, 막 14:29∼31, 53∼72). 두쵸의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은 한 화면에 두 장면을 배치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마치 연극무대 세트를 1층과 2층으로 설치하고 있는 형식인데 우선 관람자의 시선은 보다 넒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아랫부분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 거기에 여러 하속들과 모닥불을 둘러싸고 앉아 있는 베드로는 발까지 불에 쬐며 자못 여유롭다. 하지만 갑자기 등장한 하녀가 그를 손가락으로 지목하며 “네가 예수와 함께 있지 않았느냐?”는 질책하는 듯한 질문에 매우 당혹스러워하며 손을 들어 부인하고 있다. 바로 그 시간에 위층 상단에서는 안나스 앞에 끌려간 예수님이 억압적 분위기에서 대답을 강요당하고, 그릇된 증인들에 의해 죄인의 몸이 되어가고 있었다. 본질이 다른 두 장면의 대비는 사건의 극적인 분위기를 증폭시켜 준다. 두쵸의 천재성은 위층으로 가는 층계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세움으로써 사람들의 시선이 아래에서 위쪽으로 움직이게 하면서 두 사건을 자연스럽게 연계시키고 있는 데서 드러난다. 더구나 좌측에 있는 소녀의 오른쪽 어깨선을 위로 향한 계단의 난간과 동일선상에 일치시켜 그림의 중심을 분산시키지 않으려고 세심히 배려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이 홀로 독립된 것이 아니고, 그의 불후의 대작 <마에스타>(Maesta)의 뒷면에 그려진 여러 예수님의 생애 그림 중의 하나라는 것을 기억하면 작품 분위기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베드로는 왜 예수님을 부인했을까? 그의 부인은 사실 심각한 것이었다. 어쩌면 그가 맨 먼저 고백했던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무효화시킨 일일지도 모른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대변인격인 수제자이며 중요한 사건 때마다 항상 그의 옆에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예수님의 기적을 직접 보고 체험하며 가르침을 따르고 믿었던 그조차도 그 연약함에 있어서는 다른 이들과 결코 다르지 않았다. 그 뒤에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까마득히 잊은 채 그도 갈릴리로 돌아가 평범한 어부생활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베드로를 예수님은 어떻게 대하셨는가? “야훼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라는 말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디베랴 바다에 찾아가 제자들과 함께 아침을 나누었다. 이른 새벽 조용한 바닷가에서 싱싱한 생선을 구워 놓고 제자들과 아침을 드시는 장면을 생각하면 나는 왠지 가슴이 흔들린다. 그것은 정말 아름다운 장면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똑같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17)라고 세 번이나 물으셨다. 그 때마다 베드로는 똑같은 결의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후 가난했던 어부 베드로의 삶이 크게 바뀌었음을 우리는 안다. 베드로는 하루에 3000여 명의 회심자를 얻을 만큼 위력적인 전도를 하였다. 이방인에 대한 첫 선교자가 되었고 병을 고치는 기적들을 행하였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책임자가 되었으나 44년 무렵 로마에 가서 기독교를 전하고 로마교회를 조직하여 그가 순교할 때(64 또는 67년)까지 그곳에 있었다. 암브로시우스 주교에 따르면, 네로(AD 54∼68) 박해 동안에 베드로가 로마를 떠나고자 카타콤을 지나 아스피나아 길에 이르렀을 때, 그는 홀연히 예수님을 만났다고 한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Domine quo vadis?)라고 물었다.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박히러 가고 있다”고 대답했다. 베드로는 제2의 십자가는 자기가 져야 할 것을 직감하고 다시 발길을 돌려 로마로 향했다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베드로는 순교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처형된 똑같은 방법으로 죽기에는 너무 죄스럽다 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죽여 줄 것을 자청했다고 한다. 회개와 용서 그리고 사랑은 세계를 바꿀 만큼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베드로는 말해 주고 있다. 이것은 이 시대에 관용이 무엇보다 더 절실히 요구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이석우(경희대 명예교수, 역사문화연구소장)
  • 2008.11.2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피터 브뢰겔(Pieter Bruegel)의 ‘바벨탑’
  • 변혁의 역사 속 지조있는 화풍 보여준 브뢰겔 바벨탑으로 여러 작품 만들며 생각 화폭에 담아 구약시대 아닌 안트워프 배경으로 그려져 바벨탑의 작가 브뢰겔의 작품에는 현실과 대결하면서 긴장 속에 살았던 흔적이 작품 곳곳에 묻어있다. 브뢰겔의 출생 연대는 1525년으로 추정되며, 출생지는 네덜란드의 남부 부레다로 알려져 있다. 그가 작가로 정식 등록한 것은 성(聖) 누가 길드조합에 장인으로 가입(1551)하고부터였다. 브뢰겔이 살던 때는 위기와 변화가 급류처럼 소용돌이치던 때였다. 당시 진행되고 있던 종교개혁은 신구교의 대립만이 아니라 왕권까지 가세하여 ‘최초의 국민·국가적 대결’ 양상까지 띠고 있었다. 이러한 갈등이 가장 첨예했던 곳 중에 하나가 바로 브뢰겔이 살고 있었던 네덜란드였다. 치열한 의식의 소유자 브뢰겔이 탄압과 감시의 위험을 교묘히 피하면서 자기의 생각과 메시지를 그림에 담아냈다. 그가 기독교를 소재로 그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바벨탑’(1563) 외에도 ‘세례 요한의 설교’(1566), ‘사울의 회심’(1567), ‘무고한 양민들의 학살’(1566), ‘왕들의 경배’(1564) 그리고 ‘갈보리 언덕으로 끌려가는 행진’(1564) 등이 있다. 공통된 특징은 그림 속의 주인공과 같은 인물이라도 클로즈업시켜 작품의 중심인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수의 사람들 중에 한 부분으로 숨기듯 묻어 두고 있다. 등장인물들 또한 아주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며 때로 우둔해 보이기까지 한다. 브뢰겔의 ‘바벨탑’은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 니므롯(Nimrot, 창 10:8)이 주도하여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고자 하였으나, 야훼가 이들을 온 지면에 흩어지게 하므로 성 쌓기를 그치게 한 내용(창 11:1∼8)에 근거하고 있다. 브뢰겔은 ‘바벨탑’을 주제로 한 작품을 적어도 세 번 이상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두 작품만 남아 있는데,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빈 미술관에 있으며, ‘작은 바벨탑’(1563)은 노트르담에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들 바벨탑도 구약 시대의 현장을 배경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브뢰겔이 살고 있었던 당시의 도시 안트워프에 세워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 무렵 이 큰 도시는 유럽 최고의 번영을 자랑하고 있었으며 서방 세계의 경제 중심지로 다양한 언어를 쓰는 상인들이 세계 곳곳에서 모여들고 있었다. 그림 왼쪽에 들어찬 도시 풍경이 바로 안트워프로 이 숲처럼 빽빽한 집들이 이를 증언하는 듯하다. 그림에서 보여주는 바벨탑은 여러 층으로 쌓아 올라가서 이미 구름 높이에 이른 탑은 건물처럼 조직적으로 쌓여가고 있다. 바닷길을 통해 들어오는 건축자재, 힘찬 크레인을 이용하여 들어 올리는 무거운 돌들, 기중기 등이 정말 하늘까지라도 올라갈 것 같은 기세이다. 현대 장비를 총동원한 대역사를 방불하게 하는데, 그것도 그냥 건축물이 쌓아 가는 것이 아니라 언덕의 산을 이용해 바벨론의 지구라트(Ziggurat)을 연상하게 한다. 하지만 이 일을 독려하러 나온 니므롯 왕의 형색은 그 화려한 정장에도 불구하고 사뭇 외롭고 초조해 보인다. 그가 입은 옷매무새와 또 석공들이 양 무릎을 꿇고 고도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동방에서 온 사람들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경배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인가? 오히려 수행자들이나 그의 앞에 꿇어 엎드린 석공들조차도 왕을 방해꾼 정도로 보는 것 같다. 이석우 (경희대 명예교수, 역사문화연구소장)
  • 2008.10.16 / 이미나 기자

    조르쥬 라 뚜르(Georges La Tour)의 ‘욥과 그의 아내’
  • 고통, 피할 수 없는 섭리의 질서 촛불을 켠 종교화로 잘 알려진 라뚜르 욥과 아내의 극적인 순간 그림에 담아 욥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 사정은 여호와와 사단 사이의 대화 내용을 통하여 짐작된다. 욥의 시련은 처음에는 재산과 자녀들에게 삽시간에 닥쳤다. 약탈자들이 소 500마리,약대 3000마리를 빼앗아 갔을 뿐만 아니라 양 2000마리가 벼락에 맞아 죽었다.그리고 그 토록 사랑하는 자녀 열 명의 목숨을 폭풍우가 통째로 앗아 갔다(욥1:6∼19).그래도 욥은 믿음을 지키며 이 일에 범죄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이에 사단은 다시 2차 타격을 가했는데 그것은 욥 자신의 신체를 향한 것이었다. 라 뚜르가<욥과 그의 아내>에서 그린 소재가 바로 이 장면이다. “사탄이 이에 야훼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7∼9) 프랑스 태생 화가 라 뚜르(1593∼1652)는 욥과 그의 아내 사이의 극적이고 긴장된 순간을 한 폭의 그림에 담고 있다. 촛불을 켠 종교화로 잘 알려진 그는 그가 살았던 루네빌시의 전폭적인 지지와 루이13세의 사랑을 받으며 당대 화려한 명성을 누렸다. 하지만 그는 지난 200여 년 동안 거의 완벽하게 잊혀져 있었다. 그러다가 19세기에야 다시 발견되어 살아오른 것은 왠지 촛불의 펄럭임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는 망각되어 버린 작가가 어떻게 되살아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한 사례하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의 교육배경과 행적의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가 빛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보아 카라바죠(Caravaggio, 1573∼1610)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만은 확실하다. 라 뚜르는 이 그림에서도 촛불을 중앙에 두고 욥과 그의 아내를 화면 가득 채우게 하고 있는데, 그 차지하는 자리는 단연 욥의 아내가 압도적이다. 조용하나 강렬한 촛불 위로 화사하게 빛나는 붉은 오렌지색 비단옷을 눈을 시리게 할 정도이다. 그와 대비해서 아픔으로 위축된 듯이 초라하게 앉아 있는 욥의 체구는 왜소하다. 그의 눈은 허공을 향한 듯 초점이 빗나가 있고, 먼지에 찌든 수염은 불결하며, 몸은 가려움증으로 뒤틀려 있고, 입은 할 말을 잊은 듯 벌려져 있다. 그가 앉은 잿더미 옆 사금파리는 촛불 사이로 빛나는 욥 아내의 치맛자락의 화사한 투명성과 참담히 대비된다. 빛으로 밝은 부분은 섬세하고 우아하게 그렸지만 어두운 그늘 부분은 대담한 붓질로 단순하게 처리했다. 그는 등장인물을 화면 가득 채우고 두 사람만을 대면하도록 함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얻어내고 있다. 다시 그는 움직이는 듯한 촛불 빛으로 인하여 화면에 일렁이는 듯한 불안한 고요와 신비 그리고 냉정함까지 도입 시키고 있다. 어떻게 보면 가장 비극적인 장면이 색의 향연으로 가려진듯하다. 욥의 아픔이 얼마나 컸던지 그의 고통은 바빌로니아 유수 때의 유대인의 아픔에 비견 되기도 했다. 욥기가 그 무렵에 쓰였을 것이라는 추리도 이 같은 사연에서 생긴 것 같다. 또한 프랑스 사르트르 대성당의 조각에서는 욥의 고통을 교회의 고통이자 그리스도의 고통에 비유하고 있다. 그에 반해 욥의 부인은 세상적인 것, 육신의 삶을 상징하는 것으로 대비시킨 것도 재미있다. 한편 욥의 세 친구들은 왕왕 그리스도 교인이 아닌 이교도로 평가 절하되고 있다. 고통과 고난은 벌이라기보다는 연단이나 개선을 위한 매라는 기독교의 입장은 나를 매료케 하는 부분이다. 신앙 차원에서 이론적으로 이렇게 설명이 가능하지만 욥기의 경우는 이보다도 한 차원 높은 곳에 있다. 우리는 때로 고통받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선이라고 분명히 못 박았다. 욥은 고통을 통하여 정금같이 단련된 자신, 듣기만 하던 하나님을 이제 눈으로 볼 수 있음을 감사하고 있음에 주목해야겠다.그러나 크게 보면 고통은 설명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와 순종의 과제인 듯하다. 욥이 받은 가장 큰 복은 욥이 잃어버렸던 재산이나 건강, 가족, 친지들을 다시 얻은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되고 그분이 하시는 일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 것”(워렌 위어스비, ‘욥기강해’,p.195)이라는 말은 두고두고 되새겨 봄직하다.지금 내가 당하고 잇는 고통이 아무리 큰 것이라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한 고난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지 않을까? 이석우 (경희대 명예교수, 역사문화 연구소장)
  • 2008.09.19 / 이미나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PDF

    지면보기

  • 행복으로의 초대

    PDF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