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북한교회
(15)마지막회
  • 해방 전 북한에 세워진 교회 2000여 곳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며 복음화 앞장 서 통일 한국과 북한교회 재건 위한 준비 필요 지금까지 1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이 지면을 통해 ‘잊혀진 북한교회’에 대해 알아봤다.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리웠던 평양을 중심을 북한 곳곳에 세워졌던 교회는 민족 복음화는 물론 일제강점기에 한민족 정신 계승을 위해 앞장서 나갔다. 우리가 그동안 알아본 교회는 1907년 대부흥의 중심에 서 있던 장대현교회를 비롯해 10여 개에 불과하지만 북한에는 해방 전까지 대략 2000개가 넘는 교회가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 기관에서 1994년에 발간한 ‘북한지역 종교자료집’에 따르면 해방 이전 북한 지역에 설립된 교회는 중국대륙 동북지역을 포함해서 2193개 교회가 존재한 것으로 수록돼 있다. 또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1996년 발행한 ‘북한교회사’에는 모두 2978개의 교회가 존재했던 것으로 수록돼 있다. 이 가운데 500여 개는 중국 대륙 동북지역 등에 세워진 교회들로 이 교회들을 빼면 북한 지역에는 대략 2439개 교회가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교회 중 대다수를 차지한 것은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장로교와 감리교였다. 장로교는 대략 1370여 개 교회가, 감리교는 300여 개 교회가 있었다. 이 외에도 성결교회가 존재했으며 구세군, 성공회 교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 교회들은 일제강점기와 공산 치하, 한국전쟁 시기를 거치며 대부분 사라졌다. 따라서 남한 교회는 이들 북한교회에 대한 자료 수집에 나서 해방 전 어떤 교회들이 북한에 있었는지 다각적인 조사에 나섰다. 극동방송은 광복 50주년을 기념해 북한 교회를 알리는 기획을 진행했다. 한기총도 북한교회 자료 조사에 나서 통일 이후 교회 재건을 위한 기초 작업을 진행한 바 있다. 북한에 세워졌던 교회들은 각 지역의 구원의 등대였을 뿐 아니라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한 계몽의 선두에 서 있었다. 교육을 일으켰고, 의료 사업을 전개했으며, 민족애를 일깨웠다. 또한 민족적 인물을 키웠으며 한국 복음화를 위한 위대한 지도자를 양성했다. 지역 중심에 섰던 교회는 독립 운동 중심에 있었고, 기독교를 반대하는 공산주의와 맞서기도 했다. 무엇보다 남한 교회 부흥의 불씨가 됐다. 공산주의를 피해 남하한 북한 기독교인들이 남한에 모여 이룬 교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영락교회 대다수 교인들이 북한에 고향을 둔 이들이었고, 남산현교회는 월남한 성도들이 모여 교회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며 신앙의 유산을 이어나갔다. 이들은 남한 교회 부흥은 물론 통일 한국 시대를 기대하며 북한 교회 재건을 위한 기도를 이어가고 있다. 북한교회 재건을 위한 기도는 비록 교회는 사라졌지만 목숨 걸고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을 이어가는 북한 교인들을 위함이다. 또 통일 한국 후 북한 세습 체제에 묶여 있던 북한 주민들을 기독교의 신앙과 사랑으로 회복시켜, 다시 한국이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세계선교 사명을 완수하는데 크게 쓰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한국 교회는 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통일 한국을 위해, 북한 교회 재건을 위해 우리교회가 1% 통일 기금을 매월 꾸준히 적립하듯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나가야 할 것이다.
  • 2016.12.18 / 오정선 기자

    (14)회령교회
  • 항일 민족운동에 앞장섰던 교회 최경재 목사 회령서 독립 운동 주도 한국초기 영화인 나운규·윤봉춘도 가담 1945년 해방 이전 북한의 크리스천은 인구 940만명 중 370만명으로 40% 가까이 차지했다. 북한에 있던 기독교인들은 일제 강점기 시절 누구보다 항일운동에 열심이었다. 한국영화의 개척자로 영화 ‘아리랑’을 제작한 나운규는 함경북도 회령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참가한 인물이다. 15세 때인 1916년 중국 간도에 있는 미션스쿨 명동중학교 재학시절 독립 정신을 키운 나운규는 1919년 4월 초 회령교회 최경재 장로의 지도를 받으며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 때 독립운동에 함께 나섰다가 투옥된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나운규와 함께 한국 영화의 개척을 이룬 윤봉춘이다. 나운규와 함께 명동중학교를 다니며 민족 독립 정신을 배운 윤봉춘은 당시 명동중학교 안에서 발간하는 독립신문을 옷에 숨기고 가져와 회령교회 최경재 장로에게 전하면 최경재 장로는 신문을 주변에 뿌렸다. 독립운동을 주도한 최경재 장로가 시무했던 교회가 바로 회령교회이다. 장로교인 회령교회가 설립된 것은 1908년이다. 회령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마주보는 곳으로 당시 함경도는 캐나다 장로교의 선교구역이었다. 한국에 공식적으로 처음 들어온 캐나다 선교사 중 한 명이었던 로버트 그리어슨은 1901년 5월부터 회령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그리어슨 선교사는 원산, 성진, 함흥에서 선교 활동을 차례로 진행했는데 함경도 기독교 중심지였던 성진의 전도인 안순용을 회령에 보내 전도 활동을 전개하고 교회를 설립한 것이 바로 회령교회였다. 개인 집에서 시작된 회령교회는 1910년 성진 선교부에서 기와집 두 채를 구입해 한 채는 예배당으로, 다른 한 채는 목사관으로 사용하면서 선교사와 교역자, 전도인, 교사들이 부임했고 교회는 크게 부흥했다. 회령교회는 복음 전도 외에도 교육 분야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 그래서 교회를 중심으로 진명학교, 신흥학교, 보흥여학교를 설립했다. 보흥여학교의 경우는 그 일대의 유일한 여성고등교육기관이었다. 회령교회는 앞에서도 설명했듯 회령 일대 만세운동을 주도한 교회로 유명하다. 그 중심에는 최경재 장로가 있었다. 고향이 성진인 최경재는 회령으로 이사해서 회령교회를 크게 부흥시키기 위해 힘썼다.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최경재 장로는 만세 운동 주도자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회령은 국경 도시로 일본 군대가 주둔해 있었기에 만세 진압에서 많은 사람들을 거칠게 다뤘다. 최경재 장로는 형무소 출감 후 1924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뒤 회령교회 담임목사로 재직하게 된다. 민족 운동에 앞장섰던 회령교회는 회령 지역 뿐 아니라 중국대륙 동북지역, 당시 북간도 지역 선교의 발판으로 복음운동과 민족운동에 헌신했다. 회령교회는 최경재 목사 외에도 함경도 선교의 거목인 김영제 목사, 회령교회 초기 어학교사로 수고한 강두화 목사가 활동했다. 우리에게는 김일성의 부인이었던 김정숙의 고향으로 알려진 회령. 하지만 이제 회령은 복음화의 흔적이 사라지면서 마약이 불법으로 거래되는 마약 범죄도시로 전락하고 있다고 북한관련 한 소식통은 전하고 있다. 또 중국과의 접경지로 북한을 탈출하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다고 한다.
  • 2016.11.20 / 오정선 기자

    ⑬신의주동부성결교회
  • 이성봉 목사 부임 후 놀라운 부흥 일어나 일제와 공산정권에 맞선 담임 목사들 신앙정신 이어받은 인물이 정진경 목사 북한의 신의주는 압록강 하류의 평안북도에 위치하고 있다. 평야지대로 이뤄진 신의주는 중국 단둥시와 인접한 곳으로 구글 지도상 단둥과 신의주 평야 초입간의 다리가 완공돼 있다. 이들 간의 거리는 대략 20㎞, 도보로 25분 거리다. 중국 대륙과 가까운 잇점 탓에 북한이 한 때 중국과의 교류로 특별행정자치구를 만들려고 했던 신의주는 경의선 철도의 종점이자 우리나라 국도 제1호선의 종착점이기도 하다. 국도1호선의 출발점은 전라남도 목포이다. 신의주에는 해방 전 모두 8개의 교회가 세워졌다. 감리교, 장로교, 구세군, 성결교가 자리잡고 있었다. 신의주동부성결교회는 1934년 7월에 세워졌다. 성결교는 신의주동부성결교회가 세워지기 전 1927년 신의주성결교회를 먼저 설립했다. 이 교회가 부흥해 분립한 것이 바로 신의주동부성결교회이다. 신의주동부성결교회가 분립하면서 신의주성결교회는 신의주서부성결교회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신의주동부성결교회는 더 늦게 세워졌지만 서부교회보다 크게 성장했다. 그 이유가 1936년 4월에 담임으로 부임한 이성봉 목사 영향이다. 이성봉 목사는 우리나라 대부흥사로, 성결교회 재건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평안남도 출생인 이성봉 목사는 6세에 기독교에 입문해 모친에게서 신앙교육을 받았다. 21세 때 원인불명의 병으로 고통당하던 이성봉 목사는 이때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절대 믿음을 갖게 된다. 목회자가 되고 신의주동부성결교회에 부임한 이성봉 목사는 부임 즉시 한 주간 교회에서 부흥회를 개최했다. 이로 인해 130여 명의 교인이 생겨났고 성도들의 부흥으로 이듬해 교회는 벽돌 예배당을 신축해 화제가 됐다. 이성봉 목사는 신의주에서 목회할 때 태어난 딸의 이름을 신의주의 ‘의’자를 넣어 ‘의숙’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그의 딸 이의숙은 한국도자기 김동수 회장의 부인으로, 이의숙 여사는 수안보 파크호텔에 아버지의 신앙정신을 기억하기 위해 성봉메모리얼채플을 세우기도 했다. 이성봉 목사 후임으로 부임한 교역자는 김유연 목사이다. 황해도 출신인 김유연 목사는 일제 강점기 말 옥고를 치르는가 하면 동아일보 경서지국장,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 부총회장, 경성신학교(현 서울신학대) 교수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신의주동부성결교회를 비롯해 안성교회·무교정교회(현 중앙교회)·신공덕교회(현 신덕교회) 담임을 지내기도 했다. 성도들은 김유연 목사의 신앙 정신을 본받아 거룩한 삶을 이어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해방 후 서울에서 목회와 교수생활을 하던 김유연 목사는 북으로 피랍돼 이후 행방을 알 길이 없다. 이 외에도 초기 담임이었던 김성달 전도사, 신의주서부성결교회 2대 담임이었다가 신의주동부성결교회를 담임했던 한성과 목사, 박용현 목사도 공산 정권과 맞서 복음을 전한 믿음의 용사들로 알려져 있다. 성결교회는 한 때 일제의 미움으로 강제 해산된 적이 있다. 이때 신의주동부성결교회 역시 폐쇄됐지만 해방 후 재건돼 1947년에는 교인 수가 200명이었다. 신의주동부성결교회 담임은 아니었지만 이 교회 목회자들을 통해 한국교회 지도자가 된 인물도 있다. 신촌성결교회 담임이었던 정진경 목사(2009년 9월 3일 소천)다. 정진경 목사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과 한기총 대표회장,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장, 한국세계선교협의회 대표회장, 월드비전 이사장, 대한성서공회 이사장, 호서대 이사장 등을 지낸 개신교계 대표적인 인물이다. 양반 집안의 11대 종손이자 외아들이었던 정진경 목사는 아들이 ‘예수쟁이’가 되는 것을 싫어한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예수를 믿었다. 정 목사는 10대 때 신의주동부성결교회에서 성령을 체험했으며, 18세 때 은행에 취직했다가 폐결핵과 늑막염에 걸려 산속에서 요양하던 중 신유를 체험하기도 했다. 오늘날 신의주동부성결교회의 자취는 사라져 그 위치마저 확인할 길이 없지만 많은 이들에게 영적 가르침을 깨우쳐준 주님의 교회로 기억되고 있다.
  • 2016.10.16 / 오정선 기자

    ⑫ 중화읍교회
  • 1897년 주민 20여 명이 모여 세운 교회 대기암교회와 함께 지역 복음화 앞장 서 채정민 목사 등 일제 항거 신사참배 거부 평안남도 중화군에 세워진 중화읍교회는 1897년 5월 13일 세워졌다. 평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아침에 출발하면 점심 먹을 때 즈음 도착한다고 해서 ‘중화’라는 지명이 탄생됐다는 말이 있다. 중화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사무엘 마펫 선교사의 전도에 의해서다. 사무엘 마펫 선교사의 복음을 전해들은 김태로가 평양 장대현교회에 출석 후 지역주민을 전도하기 시작했다. 그의 헌신으로 주님을 믿는 사람이 스무 명이 넘자 이들은 평양까지 가서 예배를 드리기보다 자신의 마을인 중화에 교회를 세우자고 결의했다. 그들의 마음이 모여 초가로 교회가 세워졌고, 이듬해 열두 칸 초가 예배당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여덞 칸 기와집과 열 칸 초가로 교회는 부흥됐다. 중화는 중화읍교회보다 1년 먼저 세워진 대기암교회와 함께 지역 복음화에 헌신하게 된다. 1911년 장산동교회와 건산교리교회를 합병한 중화읍교회는 1911년 출석교인이 300명인 교회로 부흥한다. 교인 중에는 독립협회 회원인 이준배, 당시 중화군수였던 신대균도 있었다. 신대균 군수는 증화읍교회에서 학교를 세울 때 군청 소유 건물을 사용하게 하는 등 적지 않은 도움을 줬다. 초기 중화읍교회는 그래함 리(한국명 이길함) 선교사가 사역했으며 그 다음 홀드크로프트(한국명 허대전) 선교사와 채정민 목사가 함께 사역했다. 이 지역 출신인 채정민 목사는 어려서 한학을 수학했고, 1897년 이성하(우리나라 최초 개신교 침례교인)와 최일형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된 인물이다. 1898년 침례를 받은 그는 그래함 리 선교사의 조사로 평안도 중화를 비롯해 황해도 일대 교회들을 돌봤다. 1911년 평양장로회 신학교 졸업 후 그 해 목사 안수를 받고 중화읍교회로 부임해 1934년 은퇴할 때까지 목회활동에 전념했다. 은퇴 후 평양노회 공로목사로 추대된 채정민 목사는 1938년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에는 주기철·이기선 목사 등과 함께 강경파로 지목되어 예비검속을 당하기도 했다. 채정민 목사는 1948년 우리나라가 건국 될 때 주일인 5월 9일 예정이던 제헌국회의원 선출 선거를 월요일인 5월 10일에 실시될 수 있도록 강력히 주장하기도 했다. 중화읍교회 출신 인물로 눈 여겨 볼 인물로는 신사참배를 강력히 거부하다 순교한 권원호 전도사가 있다. 권원호는 1904년 8월 중화읍교회 장로였던 권오방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앙이 깊었던 권원호는 당시 중화읍교회에서 6년제로 운영하던 학교에 다니며 민족 교육을 받았다. 당시 왜정의 토지수탈로 고향을 떠나 주거지를 옮겨야 했지만 옮기는 지역마다 그 곳에 세워진 교회를 출석하며 신앙심과 애국심을 키워갔다. 이 때문에 그는 일본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결국 목회자의 길로 나서 일본 경찰의 박해가 심하다는 강원도 회양읍교회에 자원, 목회자로 부임하게 된다. 신사참배를 강요받던 권 전도사는 1940년 10월 자택에서 태극기가 발견된 혐의로 구속, 모진 고문 속에 1944년 옥중에서 순교를 당하고 만다. 중화읍교회에 부임했던 김선환 목사도 3·1만세운동과 관계되어 옥고를 겪기도 했다. 중화읍교회는 채정민 목사나 김선환 목사, 권원호 전도사, 독립협회 이준배 같은 민족주의자들을 배출하기도 했지만 친일 분자도 있었다. 이 교회에 부임한 박응률 목사는 평양노회장이던 1938년 열린 장로교 제27차 총회에서 평양·평서·안주 3개 노회 총대 35명을 대표해 신사참배에 찬성하는 ‘긴급 동의안’을 제출했다. 그래서 한국장로교회의 신사참배 가결은 이렇게 결정됐다. 박응률 목사는 해방 후 평양에서 목회하다가 1950년 북한정권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 2016.09.18 / 오정선 기자

    ⑪ 대기암교회
  • 1896년 중화군 신흥면 대기암리에 세워진 장로교회 채명신 장군 외조부 박진준 장로가 설립 민족정신, 금주·금연 등 절제 운동 적극 전개 대기암교회는 평안남도 중화군 신흥면 대기암리에 세워진 장로교회이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평양시 대동강 남쪽으로 위치했던 교회다. 대기암이라는 이름은 ‘마을에 물이 솟아나는 기이하게 생긴 바위가 있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기암교회는 1896년 세워졌다. 대기암리에 살던 박진준과 김영백 등 여섯 명의 주민이 예수를 영접하고 박진준 집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교회의 시작이다. 박진준은 1903년 대기암교회 장로가 됐다. 박진준 장로는 자신의 토지를 교회에 기부해 그 땅을 기반으로 300명이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가 건립됐다. 교회 부흥에 있어 헌신적으로 나선 박진준 장로는 바로 초대 파월군사령관을 지낸 고 채명신 장군(2013년 11월 소천)의 외조부이다. 독실한 신앙인(여의도순복음교회 장로)이었던 채명신 장군의 신앙은 바로 외가에서 비롯됐다. 구한말에 하나님을 영접한 외조부 박진준 장로는 복음전파는 물론 일대 주민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가 하면 미신을 타파하고 주민들 사이에서 금주·금연 등 절제 운동을 전개했던 인물이다. 외조부의 영향으로 채명신 장군은 목회자를 꿈꾸기도 했으나 공산주의 체제로 들어서면서 북한을 탈출, 군인이 됐다. 박진준 장로 등에 의해 세워진 교회는 초기 그래함 리 선교사(한국명 이길함)의 지도를 받았다. 이후부터는 조사(장로교에서 목사를 도와 전도하는 교직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를 이끌었다. 1904년에는 채정민 조사가 시무했는데 그는 이후 목사가 됐다. 채정민 목사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지도한 인물 중 하나로 한국 사회와 교회를 향해 끊임없이 경고해 ‘회개를 외치던 선지자’로 불리우기도 했다. 대기암교회는 1914년부터 오능조 조사가 시무했다. 중화군 출신인 그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다닐 당시 일어난 3·1운동 때 평안도에서 만세 운동을 이끌었다. 또 1919년 10월 31일 중국 상해에서 임시정부 성립 축하문을 발표할 때 30인의 대한민족대표의 명단이 적힌 ‘대한민국임시정부성립축하문’에도 그 이름이 올라있다. 대기암교회는 계속되는 부흥 속에 1913년에는 교인 수가 200명에 달했고, 1915년에는 지교회로 중화군 신흥면에 성천리교회를 설립해 박진준 장로가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다. 대기암교회는 지교회 설립 뿐 아니라 학교도 세워 교육에도 힘썼다. 하지만 교회가 침체기를 겪으면서 교인이 떠나고 학교마저 폐교되는 등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또 교회의 기둥으로 부흥에 힘쓴 박진준 장로가 병으로 고생하면서 교인이 한 때 30명으로 줄어드는 아픔도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꾼들로 인해 다시 부흥을 맞으면서 일대 복음화를 위해 힘썼다. 대기암리는 1952년 북한의 군면리 대폐합 정책에 따라 강남군이 구성되면서 신흥면 간산리, 상삼리, 대기암리가 병합해 상암리로 변경됐다. 강남군은 현재 강남읍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 2016.08.21 / 오정선 기자

    ⑩ 평양 대동군 하리칠동교회
  • 성도들의 헌신으로 부흥된 교회, 교육 사업 전념 미션 스쿨 창덕학교, 한때 김일성이 다니기도 해 하리칠동교회는 1899년 대동군 용산면 하리에 세워졌다. 대동군 용산면은 현재 평양 만경대 구역에 해당된다. 하리칠동교회는 이영언의 전도로 주님을 영접한 홍신길에 의해 설립됐다. 평양 판동교회(장대현교회는 1903년까지 판동교회라고 불리웠다)에 다니며 신앙을 키운 홍신길이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한 결과 서서히 사람들이 교인이 됐고, 이들을 중심으로 세 칸의 초가집 하리칠동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하리는 아랫마을을 의미하는 말로 평양에는 하리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가 몇 군데 있었다. 마포삼열(마펫) 선교사 등 외국 선교사들의 헌신으로 하리칠동교회는 침례자들이 늘면서 교회는 점점 커지며 부흥이 됐다. 성도들이 늘어난 하리칠동교회는 교육 사업에 눈을 떠 1909년 미션스쿨인 창덕학교를 설립한다. 설립자는 마포삼열 선교사이며, 교장은 배위량(베어드) 선교사였다. 교사로는 조병첨, 홍상용, 민정식이었다. 하리칠동교회는 김일성 외가 친척이 많이 다닌 교회로도 유명하다. 김일성의 외할아버지인 강돈욱은 1910년 이 교회 집사가 됐다. 1911년에는 강건욱, 1912년에는 강관욱이 집사로 임명됐다. 이때 침례받은 이가 120명이었다. 1914년 하리칠동교회는 성도들의 헌신으로 기와집 8칸으로 증축됐고, 평양 산정현교회 최살라 성도를 권사로 초빙해 최화순 권사와 함께 사역하게 함으로 점차 교회가 왕성하게 됐다. 같은 해 창덕학교 고등과정 설립을 위해 후원금을 모금하기도 했다. 하리칠동교회는 1915년 강돈욱과 선우정을 영수(장로교에서는 당회가 조직되지 않은 교회를 임시로 인도하는 이를 영수로 칭했다)로 택했다. 1917년 침례교인이 168명으로 늘어난 하리칠동교회는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들의 헌신이 대단했다. 교인 최화순이 토지를 교회에 기부하는가 하면 남형제산면(광복 전 대동군 14개면 중 하나) 당촌리 이교식이 교회내 창덕학교 후원금으로 1000원을 기부해 대지 1000여 평을 매입, 기와집 14칸을 건축하는데 사용됐다. 이로 인해 1920년에는 여학교가 설립됐다. 복음과 교육 사역을 전개한 하리칠동교회는 침례교인만 225명이었고, 창덕학교 후원회를 결성해 교육 사업에 매진한다. 미션 스쿨이었던 창덕학교는 김일성이 다닌 학교로도 알려져 있다. 김일성은 초등학생 시절 이 학교를 2년간 다녔다. 지금도 창덕학교는 현존해 있으며,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뽑아 공부시키는 학교로 알려져 있다. 북한은 김일성이 당시 공부했던 교실은 물론 책상까지 보존하고 있다. 강돈욱은 창덕학교 운영에도 참여했다. 강돈욱의 육촌인 강량욱(조선기독교연맹위원장)은 교사로 활동했으며 김일성을 가르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리칠동교회 장로였던 강돈욱은 이후 목사로 활동했고, 대동군 용악면에서 세워진 하리교회와 창덕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 2016.07.17 / 오정선 기자

    ⑨ 평양 조왕리교회
  • 1933년 ‘T자형’ 모형으로 교회당 신축 평양 과기대 토목 공사 과정 중 종탑 발견돼 평양 대동군에 세워진 조왕리교회는 1900년 3월 13일 평양 점동교회에서 분립된 장로교회다. 대동군 남곳면 조왕리에 설립된 이 교회는 한국 최초의 순교자로 알려진 영국 선교사 토마스를 기념하기 위해 1927년 5월 7일 토마스기념교회로 개명됐다. 토마스 선교사는 1840년 영국 회중교회 목사 아들로 태어났다. 1863년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중국 선교사로 파송됐지만 1866년 9월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대동강변에서 순교했다. 순교 직전 건네진 성경으로 인해 최치량, 박영식이 예수를 영접하고 박영식의 집이 ‘평양 널다리골 교회’ 예배 처소가 된다. 평안도 최초의 교회로 알려진 이 교회는 장대재 교회, 후에는 장대현교회가 돼 1907년 평양 대부흥의 시발점이 된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를 기억하자는 취지로 창립된 ‘토마스 목사 순교기념 전도회’라는 단체는 평양 대동강변의 ‘조왕리 교회’를 ‘토마스 기념교회’로 삼자고 제의했다. 1933년에는 토마스 선교사의 묘소 가까운 곳에 토마스의 이름 영문 첫 자를 따서 ‘T자형’ 모형으로 교회당을 신축해 조왕리교회는 ‘T자형 교회’라는 별칭이 생기기도 했다. 조왕리교회가 세워졌던 평양 대동군 남곳면 조왕리는 현재 평양시 낙랑구역에 해당된다. 남북간의 이념 대립과 연이은 전쟁으로 조왕리교회는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2002년 6월 남북교류협력 일환으로 추진된 평양과학기술대 캠퍼스 부지조성 공사 중 인부들에 의해 종탑을 비롯한 교회 유물들이 발견됐다. 역사 속에서 사라진 ‘토마스 기념교회’인 조왕리교회 관련 유물이었다. 애초 평양 과기대는 대동강 북쪽에 세워지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대동강 남쪽 낙랑지구 승리동에 세워지는 것으로 계획이 변경되면서 초기 토목공사 과정에서 종탑 하나가 발견된 것이다. 종탑에는 ‘토마스 선교사 기념교회’라는 글귀가 씌어 있어 공사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후 평양 과기대 캠퍼스가 완공돼 100만㎡의 대지 위에는 본부동, 학사동, 종합생활관, 기숙사, R&D센터 등 총 17개 동의 건물들이 세워졌다.
  • 2016.06.19 / 오정선 기자

    ⑧ 평양 서문밖교회
  • 큰 부흥 경험했으나 시대적 아픔 속에 사라진 교회 장대현교회서 분립, 수많은 교회와 학교 등 세워 신사참배 결의, 공산 세력 옹호 등 격랑의 세월 보내 평양에 위치한 서문밖교회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로부터 세워진 장대현교회에서 1909년 분립된 교회다. 처음 서문밖신학교를 임대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했던 이 교회는 당시 남녀 세례교인이 408명이었고, 어린이가 109명이다. 서문밖교회는 그해 6월 이미 장대현교회에서 장로였던 위창석 주공삼 김선두와 새로 장립된 박영일 등 장로 4명을 피선하고 교회부흥을 위해 힘써나갔다. 마포삼열 목사(미국명 : 새뮤얼 모펫·평양 장로회 신학교 설립자)는 장로에서 목사가 된 주공삼과 이후 김선두 목사와 함께 협동 사역을 진행하면서 무엇보다 교회학교 부흥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1914년 주일학교 학생 수는 1200명으로 늘었고, 교사 수 만도 고등부 교사 72명, 유년부 교사 42명이었다. 서문밖교회는 1915년 김선두 목사가 전임 목사로 되면서 부흥을 향한 행보를 이어갔다. 급기야 불어나는 성도들을 주체할 수 없어 1922년에는 150평 규모의 2층으로된 새성전을 건축했다. 그리고 2층은 예배당으로, 1층은 교회학교 교수실로 사용했다. 1922년 12월에는 장로 정일선이 목사안수를 받고 김선두 목사와 서문밖교회 사역을 시작했다. 그해 이영훈 목사의 조부인 이원근 장로도 장립을 받았다. 서문밖교회는 부흥을 거듭하면서 1929년 성도 수가 3000명 안팎으로 늘어났으며 평양에서 모범되는 교회가 됐다. 북봉수리교회, 현암교회, 주촌교회, 대타령교회 등을 분립시켰고 숭덕학교 숭현학교를 설립하고 유치원과 야학도 운영했다. 하지만 격랑의 역사 속에서 뼈아픈 시련을 겪는 일도 많았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1919년 3월 1일, 김선두 목사와 정일선 윤기화 장로 그리고 남녀교인 10여 명이 ‘조선독립만세사건’으로 인해 투옥당하며 나라를 되찾기 위한 몸부림에 나섰다. 이원근 장로도 그 당시 만세 사건에 연루돼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일본의 강력한 신사참배 강요에 못이겨 1938년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제27차 장로교 총회에서 장로교는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만다. 당시 사복경찰이 교회 안팎으로 포위하고 경찰간부 수십 명이 칼을 차고 교회당을 포진하고 있었다. 시대적 아픔이 배어나오는 순간이었다. 당시 서문밖교회는 중요한 교회 중 하나였기에 중요한 모임이 열리기도 했다. 예를 들면 복음을 받아들인 지 50년이 되는 해인 1934년 ‘희년 총회’로 불리우는 제23차 총회가 열리는가하면 해방직후인 1946년 평양노회 면려청년대회가 최초로 열렸다. 하지만 서문밖교회는 1950년 공산정권의 박해가 심해지면서 또 다시 아픔을 겪어야했다. 공산정권에 협력하는 장로교 교역자들이 서문밖교회에 모여 공산정권에 협력하는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할 것을 권한 것이다. 또 6.25전쟁 당시에는 북한의 교인들이 서문밖교회에 모여 북한이 전쟁에 이기게 해달라고 궐기대회를 열었다. 반면 국군과 UN군이 평양을 탈환했을 때는 한경직 목사가 평양에 들어가 서문밖교회 주일예배를 인도하기도 했다. 당시 평양 서문밖교회가 있던 곳은 평양 하수구리로, 지금의 행정구역은 평양시 중구역 서문동이다. 평양의 중심부인 이곳은 교회가 사라지면서 현재 평양만수대 예술극장이 들어 서 있다.
  • 2016.04.17 / 오정선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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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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