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 130년
12-한국 기독교의 미래
  • 한국교회 ‘성령과 동행’ 할 때 희망 있다 지난 130년 부흥 원동력, 주가 보낸 ‘성령’ 주 위해 하나될 때 사회적 사명 다할 수 있어 130년 역사를 맞은 한국 기독교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참으로 많다. 5만 5000여 교회, 1200만 성도로 성장하기까지 양적부흥을 위해 정신없이 달려왔으니 이제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헌신토록 내적 부흥에 더욱 내실을 기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은혜를 받았으니 받은 은혜를 교회 안에만 담아두지 말고 세상과 나눠야 한다는 실천적 행동이 강조되기도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가 필요하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많은 일들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안에서 ‘분열과 다툼’의 이미지가 강해 거센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최근 한기총과 한교연 대표회장이 서로 손을 맞잡아 연합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했다. 이러한 연합은 곧 교회 협력과 일치를 가져온다. 국내외 교회가 초교파적으로 협력하게 되면 통일 문제와 사회적 약자들에 관한한 정치 참여, 사회 활동을 기대할 수 있다. 물론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실천해온 사회참여는 많았다. 하지만 기독교 문화운동, 기독교 윤리 실천, 사회봉사 운동, 환경 운동, 평화통일운동에 있어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성경에 기록되었듯 주의 가르침을 따라 한국교회가 하나 될 때, 정직 절제 사랑운동 순결서약 등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전개되고, 국내 구호사업 및 해외구제 사업 등 사회 봉사활동이 보다 확대될 수 있다. 또 통일과 북한 선교에 있어 한국교회가 이제껏 해온 노력에 하나님이 더 큰 열매를 맺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이같은 활동을 위해서는 하나 됨을 위한 한국교회의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교회가 새로운 부흥을 기대하며 하나 되기 원한다면 오직 성령의 역사를 간구해야 한다. 성령만이 교회를 변화시키고 성도를 일꾼으로 세울 수 있다. 지난 130년 동안 한국교회를 일으키고 부흥을 가져온 것은 바로 성령의 힘이었다. 주를 알지 못한 조선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외국인 선교사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도, 선교사들이 순교와 박해를 이겨내고 조선에 교회와 학교를 세우도록 역사하신 이도,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를 시작으로 대부흥운동을 일으킨 이도 바로 성령이었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됐듯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면서 비로소 교회가 탄생한 것처럼 한국교회는 성령의 힘으로 오늘날 5만5000여 교회가 탄생될 수 있었다. 또한 순복음을 이단으로 규정했던 많은 교회들이 성령을 인정하고 성령 운동에 동참할 때 폭발적 부흥을 경험하게 됐다. 성령을 인정할 때 교회가 부흥한 것은 세계교회도 마찬가지다. 전세계에서 가장 부흥한 교회들을 보면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고 성령 운동에 동참했을 때 놀라운 변화를 경험했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지난 130년의 역사를 기반으로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원한다면 성령을 인정해야 한다. 성령으로 하나 될 때만이 한국교회에 연합과 일치가 이뤄진다. 또한 다양한 사회적 활동에 나설 수 있다. 그리고 북한 복음화를 위해 한 마음으로 전진할 수 있다. 성령의 역사는 또 강력한 기도 운동을 불러일으킨다. 과거 우리나라는 민족과 국가를 위한 기도회가 많았다. 나라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한국교회는 손을 치켜올리기보다는 먼저 한자리에 모여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기도할 때 성도들의 신앙은 뜨거워졌고, ‘내’가 아닌 ‘주’를 위한 부르심 따라 헌신된 일꾼으로 일어섰다. 그들은 민족 지도자로 일어섰고, 사회 리더가 됐으며, 세계 각지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됐다. 주의 은혜를 자신들 안에 담아두기보다는 밖으로 흘려보낼 때 거룩한 생수의 강으로 모든 이들의 목마름을 해갈해줬다. 결론을 맺자. 이제 한국교회의 미래는 오직 ‘성령’에 달려 있다. 성경으로 돌아가 오로지 말씀에 충실하고 성령의 임재를 간구할 때 한국교회는 이전과 다른 변화와 각성 그리고 새로운 부흥을 기대할 수 있다. 자신을 겸허히 내려놓고, 오직 주 만을 높이며 성령과 동행한다면 우리의 이웃과 사회는 강요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주를 인정하고 더욱 주를 따르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앞으로 희망이 있다.<끝>
  • 2014.12.14 / 오정선 기자

    11-여의도순복음교회와 1200만 기독인
  •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며 복음 전파·사회 운동에 앞장 선 한국교회 폭발적 부흥의 선봉이었던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성령운동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서대문에 자리하고 있던 순복음중앙교회 시절 이미 성도수가 8000명이 이르렀다. 나날이 늘어나는 성도수로 인해 주일예배는 3부 예배로 드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가 부족해 많은 성도들이 성전에 못 들어 와 교회 마당에 앉아 스피커로 들려나오는 설교를 들으며 예배를 드렸다. 결국 조용기 목사는 성전 건축과 이전을 결심하고 성도들의 조언을 받아 여의도에 1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성전 건축의 비전을 품게 됐다. 1969년 4월 착공 예배 후 4년만인 1973년 8월 15일 여의도에 교회가 완공되면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만, 5만, 10만명 성도라는 폭발적 부흥을 거듭하기에 이른다. 이와 동시에 1973년 전세계를 돌며 열리는 세계오순절대회(Pentecostal World Conference) 제10차 대회의 준비위원장으로 조용기 목사가 임명돼 대회 일부 행사가 우리교회에서 진행되면서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미국 프랑스 등 세계 30여 개국 2000여 명이 참석한 서울대회에는 서울시장의 환영사가 있을 정도로 사회의 관심이 컸다. 조용기 목사는 이 대회에서 말씀을 전한 짐머만 목사의 통역을 맡았으며, 성회를 통해 말씀을 전하며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을 근거로 “성도들이 성령을 체험하고 병을 고침 받아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1975년 대전에서 열린 복음화전도대회, 연이어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서울전도대회, 9월에 열린 부산전도대회, 대구전도대회에 많게는 3만명까지 참석하면서 국내 복음화는 불이 붙기 시작했다. 1977년 8월 15일부터 18일까지 서울 여의도광장에서는 민족복음화대성회가 열렸는데, 이 대회는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성령운동을 70년이 지난 시점에서 재현하고자 한 운동의 일환이었다. 성회에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성도뿐 아니라 전국에서 몰려든 초교파 성도들의 참석으로 한국교회에 성령의 역사와 영적부흥을 일으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1980년대는 1970년대의 성장 추세를 그대로 이어받아 한국교회가 계속 성장하는 시기였다. 주도적인 역할은 여의도순복음교회였다. 많은 교회들이 이단으로 규정했던 순복음교회를 찾아와 부흥을 배워가기 시작했고, 함께 성령운동을 전개하기 이른다. 한국교회 부흥의 중심에는 이렇듯 언제나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조용기 목사가 선봉에 있었다. ‘성령의 횃불을 드높게’ 든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성령운동의 선구자로 한국교회에 성령 운동을 전개하는 일을 주도해나갔다. 그 결과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성도수가 세계 최대라는 80만명이 이르렀고, 한국교회는 1200만 성도와 5만 교회라는 놀라운 부흥을 맞이했다. 이는 한국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지 130여 년 만에 일어난 변화였고, 2천년 교회사에 유례없는 놀라운 부흥과 성장이었다. 한국의 5만 교회는 이후 범사회적 운동을 일으키며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사랑 실천 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나눔 운동은 교회별로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일어나거나 기독교 윤리 실천, 사회 봉사, 환경운동, 평화 통일 운동 등이 교회 연합으로 전개됐다. 이 뿐 아니라 국가적 재난 앞에 한국교회는 누구보다 먼저 나서 어려운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위로의 손길을 내밀었다. 복음 전파와 사랑나눔 실천은 국내에만 머물지 않고 제3세계에도 전해져 한국교회를 중심으로 한 NGO단체가 태동하기도 했다. 복음전도와 사회적 운동, 통일 및 북한 복음화를 위한 노력 앞에서도 언제나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아낌없는 지원에 나서는 등 하나님이 원하시는 시대적 부름에 순종하며 오늘날 여기까지 왔다.
  • 2014.11.09 / 오정선 기자

    10-폭발적인 부흥의 시작
  • 선교의 ‘땅 끝에서’ 선교의 ‘출발지로’ 엑스플로 74, 민족복음화 대성회 등을 통해 국내선교 넘어 세계선교 비전 품고 교회성장 방송선교, 군복음화가 부흥의 촉매제로 작용 세계교회에 있어 대한민국은 복음을 전해야 할 ‘땅 끝’의 일부였다. 그러나 70년대에 열린 대부흥성회들이 시발점이 되어 한국교회는 더 이상 선교지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선교의 사명을 갖고 복음을 가지고 선교지로 향하는 선교의 출발지가 됐다. 60년대에 심은 복음화운동이 70년대에는 대부흥운동으로, 80년대에는 선교운동으로 변화되면서 한국교회가 세계교회 가운데 변방이 아닌 세계교회를 리드하는 위치로 바뀌게 됐다. 1965년에 “3천만을 그리스도에게”라는 표어를 내걸고 전국을 복음화하는 열렬한 복음화운동을 전개됐다. 이 복음화 운동은 개신교 18개 교단과 로마 가톨릭과 정교회까지 포함하여 총 20개 교단이 함께 참여한 대규모 전도운동이었다. 이 복음화운동은 1년 동안 전국에서 계속되었고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이 복음화 운동은 위원장 홍현설 목사, 총무 김활란 박사를 중심으로 한 준비모임이 발족, 그해 11월에 서울운동장에서 전국복음화 대성회를 갖고 ‘교회는 일치를, 사회는 봉사를, 민족에게는 소망을’이란 선언문을 채택했다. 그 후 1973년, 1974년, 1977년 계속해서 여의도 광장에서 대성회 개최에 큰 역할을 해며 한국교회의 폭발적인 부흥의 단초를 마련했다. 1973년 서울 당시 여의도 5·16광장에서 모인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는 100만의 성도들이 한 자리에 집결한 민족 최초의 대집회였다. 미국의 세계적 부흥사 빌리 그레이엄 목사를 강사로 한 이 집회는 한국교회의 저력을 세계에 보인 초대형 집회로서 한국의 모든 교회들에게 큰 자극이 됐다. 당시 집회는 일반 매스컴에서도 중계하면서 대한민국 전역으로 복음이 전해졌다. 집회 중 여의도광장에 무지개가 드리워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증거라고 입을 모으기도 했다. 1974년 8월 13일에는 ‘EXPLO’74’대회가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개최됐다. 엑스플로는 원래 미국 CCC에 의해 주도된 대전도집회로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설립자 김준곤 목사가 72년에 열린 미국 텍사스 대회에 참석해 한국대회를 개최하겠다고 선포함에 따라 열렸다. ‘예수혁명-성령의 제3폭발’을 주제로,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소서’를 표어로 진행됐으며 한경직·김준곤 목사, 미국의 빌 브라이트, 일본의 하도리 아키라, 싱가포르의 찬 두레이, 홍콩의 필립 텡 등이 강사로 초청됐다. 연 655만 명이 참가한 대규모 집회로 하루에 20만 명이 길거리 전도에 참여하여 27만 2000여 명의 결신자를 얻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대회 후 지방별로 후속 전도대회가 여러 곳에서 열렸으며 기도회와 전도훈련이 지속됐다. 이때부터 사영리가 전도의 도구로 자리 잡았다. 대회를 기점으로 예수혁명, 성령충만,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자’는 구호가 교회마다 전해지며 교회부흥의 불꽃이 퍼져나갔다. ‘민족복음화 대성회’는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 70주년을 기념해 1977년 여의도광장에서 열렸다. 이 집회는 외국선교단체 등 외부의 도움이 아니라 부흥사로 이름을 알린 조용기 신현균 목사를 비롯한 국내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준비됐다. 주제는 ‘민족복음화를 위하여, 한국인에 의해서, 오직 성령으로’였다. 이 집회에서 처음으로 평양대부흥운동을 한국교회 부흥 및 성령 운동의 역사적 사건으로 기념했다. 1980년 ‘세계복음화대성회’, 1984년 ‘한국 기독교 100주년 선교대회’ 등 80년대에도 대규모 기독집회의 열기가 이어지며 한국교회의 부흥의 불씨가 이제는 한국을 넘어 선교지, 즉 세계를 바라보게 됐다. 한편 전도운동의 불씨에 바람이 되어 준 것이 바로 방송매체의 등장이었다. 현 CBS의 모체인 기독교 방송국(HLKY)이 1954년 감의도 목사(본명 오토 디캠프)에 의해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4교단의 연합 사업으로 창립 개국했다. 민간방송의 효시이기도 한 기독교 방송은 전국 방방곡곡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어 국제복음방송국(현 극동방송)이 1956년 시험방송을 시작으로 1957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기독교인의 교양, 문화, 전도에 주력하는 한편 한국어방송은 물론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로 방송해 공산국가를 향한 방송선교도 함께 진행했다. 또하나의 불씨는 의외로 군부대에서였다. 군목제도가 1950년 창설되어 각 군에서 군종병들과 군목들의 노력으로 많은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1970년의 전군신자화운동을 통해 본격적으로 전군으로 복음이 전해지게 됐다. 당시 1군사령관이었던 한 신 장군이 이스라엘군이 중동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로 유대교신앙을 꼽으며 모든 장병들에게 신앙을 가질 것을 당부했다. 이에 군종감실에는 모금운동을 통해 논산 훈련소에 1500명을 수용가능한 교회를 건립하고, 이어 500명이 동시에 침례를 받는 군부대만의 특수한 ‘합동침례식’이 생겨나게 됐다. 한 번에 몇 천명이 동시에 침례를 받는 진풍경으로 인해 군부대는 전도의 황금어장이라 불리기도 했다. 군복음화운동은 지금까지도 매우 중요한 전도사업이며 한국교회 성장의 촉매제역할을 했다.
  • 2014.10.12 / 정승환 기자

    ⑨정치변혁과 한국교회 그리고 순복음의 태동
  • 6·25한국전쟁 이후 폐허 속에서 교회재건 시작 한국교회가 국민들과 함께 호흡하며 희망전해 조용기 목사의 희망목회가 전 분야에 영향력 발휘 ▲ 1958년 조용기 전도사와 최자실 목사 그리고 그 가족이 예배드린 천막교회. 6·25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은 모든 기간 시설이 파괴되고 전쟁의 폐허와 잿더미만 남았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사람들을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 준 것이 바로 한국교회였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많은 교회들도 잿더미가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피난을 갔다 돌아온 사람들과 목회자들은 당장 교회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교회뿐만 아니라 교육기관 역시도 이 재건사업에 포함됐다. 기존의 연세대학교나 이화여자대학교는 물론 숭실대학을 재건하고 대전대, 계명대, 서울여대 등도 신설했다. 한국교회 재건 사업에는 선교사들의 지원이 큰 힘이 됐다. 재건사업은 한국사회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이 되어 주었다. 한편 북한의 기독교 박해를 피해 한국전쟁 당시는 물론 그 이전부터 많은 북한교회 교역자와 성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했다. 당시 남한의 대부분의 교회가 교역자가 부족하던 때라 이들은 각 교회에서 사역에 임했고 월남한 성도들 중 일부는 대도시에서 교회를 개척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한경직 목사가 설립한 서울 영락교회가 있다. 많은 월남인들이 영락교회로 몰려들었다. 전쟁 중 피난지였던 부산, 대구, 제주에도 영락교회가 설립됐다. 한국교회는 전쟁으로 지치고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선교사들의 구호사업과 더불어 세계적인 부흥사들이 우리나라를 찾으면서 새로운 소망을 심어주며 부흥의 불씨를 전국에 심기 시작했다. 한국 고아의 아버지라 불리는 밥 피어스 목사와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서울과 부산 등지에서 부흥회를 통해 희망의 복음을 전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결신시켰다. 이런 부흥회를 통해 교회마다 부흥운동이 전개됐고 이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후에 열리는 전국적인 대부흥집회의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한국교회가 한국전쟁 이후로 점점 제자리를 잡아가는 상황에서 반대로 한국의 정치상황은 전쟁 전후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미군정이 끝난 1948년 UN감시 하에 총선을 실시한 결과 1948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이해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다. 국회가 개헌될 때 국회의원인 이윤영 목사가 기도하므로 역사적인 제헌국회가 개헌되고 이승만 박사를 비롯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제헌국회 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정치상황은 혼란정국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6·25전쟁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전쟁 중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반대파를 용공으로 조작, 대통령제를 간접선거에서 직접선거로 바꾸면서 정치파동을 유발했다. 이승만 대통령 일인 독재체제의 영구집권을 꾀하면서 일으킨 자유당의 1960년 3·15부정선거로 인해 4·19혁명이 일어나게 됐다. 그리고 이어진 1961년 박정희 소장의 군사 쿠데타, 유신정권 등으로 대한민국의 정치 불안정이 계속되면서 한국교회는 국민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함께 울고 위로하며 한국사회의 동반자를 자처했다. 또한 유신정권에 맞서 공명선거 추진운동을 전개하며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에 동참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많은 목회자들이 ‘긴급조치 제9호’에 의해 구속되는 일이 발생하며 한국교회는 이들을 위한 구호운동과 함께 나라를 위한 기도운동을 펼쳤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탄에 사망하면서 유신정권의 막이 내리고 한국정치의 새바람이 이는 듯했으나 바로 이어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12·12사태로 민주화의 봄은 다시 멀어졌다. 그리고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진다. 일제에 대항한 항일운동 당시에도 그러했듯이 기독교는 민주화운동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광주민주화운동에는 광주기독청년연합회, 기독교농민회, YMCA, YWCA 등의 단체들이 참여해 시민운동을 조직화했으며 광주교계는 광주제일교회에 모여 기도회를 갖기도 했다. 특히 광주교계는 민주화운동 후 공수부대들이 휩쓸고 간 곳에 시체들을 옮겨 유족들에게 전달하고, 유족들을 위로하며 함께 울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계엄군에 쫓기는 학생이나 시민을 숨겨주었던 것도 바로 교회였다. 일련의 과정에서 많은 목회자들이 체포됐고 이 소식을 들은 전국 교회는 구명운동을 벌이는 한편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기도회를 갖고 위로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렇게 한국교회는 한국의 정치적 변혁 속에 민주화를 위해 함께 울고 외치는 가운데 한국사회에 뿌리 깊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대조동에서는 한국교회의 변화 아니 세계교회에 큰 영향을 끼칠 새로운 희망의 씨앗이 싹을 틔웠다. 그 새로운 희망이 바로 여의도순복음교회였다. 1958년 5월 18일 조용기 전도사, 최자실 목사 그리고 그 가족이 함께 첫 예배를 드렸다. 시장에서 사온 군용텐트를 세워 만든 이 천막교회에서 말씀을 증거한 조용기 전도사가 훗날 세계를 120여 바퀴를 돌며 선교에 앞장서는 한편 세계최대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설립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당시 조용기 전도사는 강한 성령운동과 함께 희망의 복음을 증거하면서 대조동 천막교회에서 1961년 서대문으로 이전, 순복음중앙교회로 명칭을 변경하는 가운데 폭발적으로 교회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조용기 전도사가 목사안수를 받은 후인 1964년 서대문교회는 3000명에 이르게 되었고 같은 해 조용기 목사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 본부초청으로 미국 하나님의 성회 교단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미국을 방문하면서 해외선교의 첫 문을 두드렸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조용기 목사의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으로 대변되는 희망목회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 메시지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꿈과 소망을 갖게 되었고 이는 정치, 사회, 경제 등 전 분야에서 전 세계 역사 가운데 유래 없는 발전을 일으켜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우는 단초가 됐다.
  • 2014.09.14 / 정승환 기자

    8 혼돈의 시대
  • 시대의 비극 속에 박해와 분쟁이어져 1930년대 말 일제의 폭압으로 교회는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인정하고 비참하게 굴복하고 말았다. 한편 이에 굴하지 않은 신사참배에 대한 강한 저항이 평양과 경남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평양의 주기철 주남선 이기선 목사와 경남의 손양원 한상동 이인제 목사 등은 생명을 걸고 항거했고 투옥되어 순교당하거나 극심한 옥고를 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독일의 패망소식을 듣고 일본의 패망과 한국의 해방을 확신하며 옥중에서 교회의 재건방안을 구상했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았다. 신사참배 항거로 투옥된 이들도 풀려났고 이들 중 50여 명은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주기철 목사가 시무한 평양 산정현교회에 모여 한국교회 재건 기본 원칙을 발표했다. 신사참배에 대한 통회와 권징의 방법으로 휴직과 정화, 자숙 등을 교회 재건을 위한 기본 원칙으로 정했다. 하지만 교회 재건 원칙을 발표할 때 신사참배를 결의했던 이들은 재건 원칙을 반대하고 나섰다.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 했던 사람의 고생은 마찬가지다’ ‘핍박을 피해 해외로 나가거나 낙향을 한 것보다는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의 강압 속에서도 교회를 지킨 일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공박했다. 이러한 공방 가운데 아무런 결론 없이 모임은 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로 촉발된 정통성 갈등, 이와 함께 일제의 강압 하에서 잠복하고 있던 신학적 입장 차이로 논쟁하고 갈등하다가 혼란이 폭발한 것이다. 이 때에 신사참배에 반대해 투옥됐다가 출옥한 일부 성도들은 기성교회에는 구원이 없다고 비판하며 따로 교회를 설립하고 재건파라고 불렀다. 이 일은 장로교 분열의 시초가 됐다. 또 출옥 성도 중 한상동 목사는 평양에서 목회 중 모친의 사망으로 부산에 갔다가 38선 통제로 월북하지 못하고 부산에 머물게 됐다. 그는 한국의 신학이 자유주의에 물들었다며 새 신학교를 설립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를 주축으로 1946년 9월 고려신학교가 개교했다. 고려신학교의 교장이었던 박형룡 박사는 후에 신학교 운영진과의 의견 충돌로 서울로 상경해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했다. 이후 보수 정통을 부르짖는 고려파도 고신파, 고려파, 반고소 등의 교파로 나뉘었다. 장로교단은 기독교장로회(기장)과 예수교장로회(예장)으로 분립되고 또 예장은 통합과 합동으로 분립됐다. 성결교회도 NCCK에 가입한 교단이었는데 WCC운동을 용공, 신신학이라고 문제 삼아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으로 분립되는 단초를 제공했다. 교단 분열로 각 지역과 교회마다 분쟁이 일어나는 비극이 일어났다. 광복과 함께 신탁통치로 38선이 그어지고소련군이 북한지역을 점령하며 북한 교회는 큰 핍박과 수난에 처하게 됐다. 남북의 왕래가 금지되고 북한 공산당의 김일성이 소련군의 힘을 얻어 기독교를 탄압하면서 자신의 권력기반을 견고히 만들어 나갔다. 신의주에서는 윤하영,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사회민주당을 결성했지만 역시 탄압을 받아 추진하지 못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독교인 및 학생 5000여 명이 공산당 본부와 인민위원회 본부 등으로 집결하고 퇴각을 요구하는 시위운동을 벌였다. 공산당원들과 소련군은 학생들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1946년 3월 1일 독립기념일을 맞이해 3·1절 기념예배가 장대현교회에서 드려졌다. 그때 공산당들이 들이닥쳐 교인을 구타했고 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부르짖으며 항의했다. 공산당은 기회가 되는 대로 기독교를 탄압하고 교회 지도자들을 영장없이 구속시켰다. 한편 공산당을 지지하는 어용 기독교 세력이 대두되며 북한교회 교역자와 교인들 사이에 싸움이 계속 일어났다. 기독교 어용단체인 조선기독교도연맹은 주일에 실시되는 선거에 대해 지지하는 등 김일성 정부를 절대적으로 지지할 것을 표명했다. 반면 신앙의 자유를 부르짖던 5도 연합회는 탄압과 숙청을 당했다. 이후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이 한국전쟁을 일으키며 교회와 신학교는 폐쇄됐고 우익 진영의 교역자는 구속 또는 숙청됐다. 사랑의 원자탄으로 불리는 손양원 목사는 애양원교회를 지원하여 시무하던 중 1948년 여수·순천사건으로 동인·동신 두 아들을 폭도들에 의해 잃었다. 그러나 손 목사는 사태 진압 후 가해자들의 구명을 탄원하고 가해자를 양자로 삼았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동료와 신도들의 피난 권유를 거절하고 행동이 부자유한 나환자들과 교회를 지키다가 공산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한국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인 동시에 한국 기독교에 수난과 암흑의 시기였다. 남한에 있던 교회들이 광복과 함께 신앙의 자유를 얻어 교회 재건에 박차를 가하는 것도 잠시 한국 전쟁의 발발로 공산당에 의해 많은 목회자들이 납북됐고 교회당은 파괴되고 교인들은 집단적으로 학살당했다. 한편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혼란 중에 한국교회는 ‘전시대책비상기구’를 만들고 민족을 위해 노력했다. 한국 정부는 미국에 유엔 안정보장이사회를 요청했고 유엔은 불법으로 남침한 인민군을 향해 전투에 임할 것을 결의했다. 한국교회도 미국교회와 국제기독교기구, 유엔 등에 한국 문제에 관심을 가져 줄 것과 구체적인 협력과 도움의 방도를 강구해 줄 것을 요구하는 외교적 노력을 했다. 또한 대내적으로는 기독청년들을 중심으로 십자군을 조직, 직접 전선에 투입되어 공산주의와 맞서 싸울 것을 준비했고 선무와 정훈활동 등을 통해 남한에 대한 전쟁지원을 전개했다. 무서운 한국전쟁이 끝났지만 수복된 서울은 만신창이 그 자체였다. 파괴된 터전, 혼돈과 가난, 수많은 이들이 생명을 잃고 무수한 이산가족이 생겼다. 이러한 사회의 불안을 틈타 이단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박태선의 전도관 운동, 문선명 집단의 활동 등 이 때부터 이단은 독버섯처럼 사회와 교회 곳곳을 파고 들어 기성교회를 위협하고 사회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민족의 수난과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교회 역시 수많은 위기와 아픔을 당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교회가 민족에 대한 역할을 새롭게 전개할 수 있는 긍정적 기회로도 작용하기도 했다. 혼란의 시기였지만 하나님이 하셨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교회사 이래 가장 큰 성장과 부흥이 이때부터 시작됐다. 혼란과 어려움이 닥칠 때 교회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가치와 믿음에 기초해 교회와 민족공동체를 살리고 일어설 수 있도록 힘쓸 기회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2014.08.17 / 복순희 기자

    7. 기독교의 수난
  •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 문제와 기독교의 수난 일본 아베 총리가 국제사회의 매서운 비난에도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강행하며 침략전쟁을 미화하다 급기야 최근 집단자위권 행사를 용인하는 헌법 해석변경을 마무리했다. 즉 일본을 전쟁이 가능한 국가로 만들어 버렸다. 아베 총리 때문에 신사참배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게 된 요즘 일본은 물론, 아니 우리부터 역사를 직시하고 새로운 역사를 세워야할 시기가 바로 이때다. 일제의 신사참배는 대한민국의 기독교 역사에도 형언할 수 없는 아픔과 상처를 준 사건이었다. 1930년대는 일본의 대륙 팽창 정책과 태평양 지역을 향한 침략 야욕이 노골화 되는 시기였다. 한국에 대한 수탈의 강도와 지배체제의 압력은 강화됐다. 민족의 문제에 가장 먼저 나서며 일본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던 한국 기독교에 대한 일본의 탄압도 강해졌다. 일본은 한국인의 황국 신민화를 감행하며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우선 신사라는 곳은 일본인의 조상신 곧 국조신과 전쟁신, 무사신, 영웅신 등을 모시는 다소 복잡한 사당이다. 이곳에는 온갖 영혼들 심지어 동물의 영을 위한 위패까지 있다. 지금 큰 문제가 되는 야스쿠니신사에는 A급 전범 14명을 비롯해 자칭 호국 무명용사라는 전쟁에서 죽은 무수한 이들의 위패가 있다. 황국신민화는 민족 말살 정책이었다. 일제는 순차적으로 일본어 상용(1937. 3), 신사참배(1937. 7), 황국신민 서사(1937. 10), 창씨개명(1939. 11) 등으로 우리말과 한글 사용과 한국사 교육을 금지하며 우리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민족정신과 혼을 말살시켰다. 일제는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을 세웠고 중요 도시 읍면 소재지 등에 빠짐없이 신사를 만들었다. 이는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볼 때 명백한 우상숭배였다. 신사참배는 이미 1920년대부터 조금씩 거론 됐고 1931년 만주사변 후 일본이 국가 의식을 강조하면서 본격적으로 문제시 됐다. 첫 충돌은 1935년 11월 평양의 숭실 전문학교장 조지 매큔과 숭의여학교장 스누크가 평남지사로부터 신사참배를 종용받는데서 시작된다. 매큔은 평양의 27개 교회 목사들과 협의 끝에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 일로 매큔과 스누크는 면직 돼 강제출국 당했다. 그후 교회 지도자들은 계속 신사참배를 강요받았고 교인들 가정에 일제가 보급한 우상의 감실을 설치하게 하고 예배 시작 전 동방요배라는 국가의식을 강요받게 됐다. 신사 참배 문제에 강경한 입장은 남장로교에서 먼저 표명됐다. 풀턴 목사가 이를 주도했는데 그는 부친과 일본에서 선교사로 있었던 적이 있어 누구보다 일본의 신사를 잘 알고 있었다. 1937년 전주에서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회의를 소집해 의논한 결과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다’라는 이른바 풀턴 성명을 발표한다. 하지만 일제는 교단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제로 가결시켰다. 장로교의 경우 1938년 9월 10일 개최된 총회에서 신사참배 찬성이 가결됐고 감리교는 1938년 9월 3일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당시 일제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신사참배 찬성을 강요하며 각종 수단을 동원했고 총회 총대들에게는 신사참배를 지지하도록 강요했다. 반대하는 총대들은 검거해 총회에 참석할 수 없게 했다. 신사참배에 대한 결의안이 표결되는 때에도 사회자는 찬성자만 묻고 반대자는 묻지 못하게 했으며 항의하려는 총대는 총대수만큼 잠입해 있던 일본 경찰들에 의해 제지 당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일제의 날선 핍박으로 교회와 미션스쿨들이 문을 닫았고 일부 교단은 해산됐다. 어떤 신사는 목사들이 동원돼 지어졌고 예배당에 들어가기 전에 신사참배를 해야했다. 성서 강독권도 박탈당했다. 묵시록들, 구약의 역사서, 예언서, 서신서들이 차례로 빼내지고 결국 사복음서만 남겼다. 찬송가 금지 목록도 나왔다. 또 예수와 일왕을 양자택일하게 하기도 했다. 일제는 가혹하게 탄압으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전개한 목사 및 교인들을 2000명이나 형무소에 수감했다. 이중 50여 명은 형무소에서 순교당했다. 한편 평양의 신사참배 반대자들은 일본인 오다 나라치 목사를 초청해 신사참배는 일본의 국가의식인가 기독교인에게 우상숭배인가에 대한 강연을 개최했는데 이때 오다 나리치 목사는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이므로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투옥된 교인과 목사들의 고초는 이루말 할 수 없었다. 고문과 폭력, 협박은 상상이상이었다. 민족대표 33인중 1인이었던 신석구 목사, 반복된 투옥에도 오히려 수감 중 70여명에게 전도한 이원영 목사, 일제가 널빤지에 못을 박아놓고 그 길을 걷게 한 주기철 목사, 사랑의 원자탄이라 불리는 손양원 목사, 여성 가운데에도 평북선천보성여학교 교사였던 안이숙 선생, 경남지방의 조수옥 권사, 네차례 구속당한 최덕지 선생, 마산의 잔다르크 김두석 선생 등 일일이 이름을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목회자와 교인이 인간적으로 극한의 고통을 감내했다. 단 하나뿐인 목숨을 부지할 수 없고 가족을 지킬 수도 없음에도 순교의 순간까지 신앙 양심을 지켜냈다. 일제의 만행에 신사참배를 거절하는 교인들은 해외로 망명하거나, 교회를 떠나야 했다. 많은 교회가 폐쇄돼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자 이때 시작된 것이 천막집회다. 그러나 이러한 집회도 일본 경찰의 제지와 감시로 인원수가 줄 수밖에 없었다. 외적인 압력으로 교회 출석은 어려워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례를 받는 교인의 수는 줄지 않았다. 새신자의 수도 줄지 않았다. 이때 교회에 모이는 성도들은 오히려 더욱 신앙적으로 확실한 고백을 했고 순교도 각오하는 충성된 자들이었다. <▲ 신사참배하는 모습>
  • 2014.07.13 / 복순희 기자

    6-일제강점기의 숨은 희망
  • 1920∼30년대 기독교의 역사적 특성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이후 1920년대가 도래하며 한국 기독교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3.1운동 후 국내 민족운동은 기독교계를 비롯한 종교계 인물들이 주도했다. 양반과 유생보다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계에서 평민 출신 지도자들이 배출됐다. 이상재, 조만식, 윤치호 등의 인물이 민족 운동가인 동시에 주요한 기독교 지도자들이었다. 1920∼30년대는 일제의 압제정치가 극에 달하는 시기였다. 3.1운동에 자극과 용기를 받은 약소국들에서도 독립운동이 연이어 일어났다. 일본은 단순 강압 통치의 한계를 인식하고 문화통치라는 이름 아래 교묘히 식민통치 방법을 써 억압 대신 회유 등 수탈의 방법을 바꾸고 조선을 병참기지화 했다. 또한 이들의 목표는 한국인의 민족정신과 문화를 말살해 우리 국민을 일왕의 충실한 백성으로 만드려는 정책을 펼치는데 있었다. 한국교회는 실력 배양을 통한 점진적이고 계몽적인 방법으로 민족운동을 추진했다. 대표적 사례가 농촌 계몽운동이다. 금주·금연운동, 아편 퇴치 운동, 공창 폐지 운동 등 절제·정화 운동이 펼쳐졌다. 이와 더불어 한국교회는 해외 선교에도 착수한다. 산동 지역의 경우 한국인이 중국인을 대상으로 선교를 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시대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1917년 소련 공산당의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고 이 영향은 한국에까지 미쳐 고려 공산당이 설립되고 사회주의 운동이 펼쳐진다. 기독교 급진자들은 사회주의의 매력에 빠지면서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사회주의 운동과 기독교 사이에는 유사성이 많아 보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신앙의 여부이다. 사회주의 세력은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보였다. 사회주의는 기독교를 미국 제국주의의 연결고리로 인식했다. 이들은 반기독교 운동의 사회적 분위기를 주도했다. 이들에게 기독교의 내세 지향적 신앙, 비현실성은 집중적 질타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 농촌운동, 계몽운동 등 사회참여 운동마저 비판했다. 1920∼30년대로 접어들면서 교회의 에너지는 여러 방향으로 분산됐다. 하나는 앞서 설명한 기독교인의 주도로 전개된 사회 운동적 성격의 민족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부흥회를 중심으로 한 타계주의적·내세지향적 경향이다. 1920∼30년대 한국교회는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등으로 대표되는 부흥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종말적, 개인적, 신비적 부흥운동에 몰입했다. 김익두 목사는 가난하고 멸시받던 소외 계층 사이에서 신유를 행하는 인물로 유명했다. 일제의 압박에 시달리던 많은 민중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또 이용도 목사 등은 신비주의적 부흥회를 전국 곳곳에서 열어 신비주의 운동의 시초를 열었다. 이러한 기독교계의 신비주의적 내세지향적 경향에 대해 1920년대 중반부터 교회 내에서는 물론 사회주의 계열에서 강렬한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사회운동과 함께 기독교 지식인들에게 추구된 또 하나의 활동이 있다. 바로 민족문화 수호를 위한 움직임이다. 이중 하나가 국학 연구활동이다. 20년대에 눈에 띄는 것은 남궁억, 함석헌 등 기독교인 역사가의 출현이다. 남궁억은 찬송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의 작자로 1922∼24년에 걸쳐 ‘동사략’ 5권, 1929년에는 아동용 한국사인 ‘죠션니약이’5권 등을 저술했다. 함석헌은 기독교 사관에 입각한 역사 서술을 시도해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 역사’ 등을 썼다. 이윤재, 김교신 등은 기독교계 사립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이윤재, 최현배, 김윤경, 장지영 등은 한글을 수호해 민족 문화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인물들이었다. 기독신보 주간을 역임한 이윤재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흥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남궁억은 일본의 국화인 벚꽃의 강제 보급에 대항해 전국적으로 무궁화 심기 운동을 전개했다. 1933년 일제는 무궁화 보급 운동이 불온사상을 고취하고 민족주의를 선전하는 것이라며 그와 모곡학교 직원과 그의 친척들을 구속하고 무궁화 묘목 8만주를 불살랐다. 교회에 대한 탄압은 1930년을 넘어서며 더욱 노골화됐다. 일제는 한국을 완전히 내지화 하기 위해 민족말살정책을 편다. 그동안 기독교의 항일 항쟁으로 일제에게는 한국 통치에 있어 기독교는 없애야 할 걸림돌이 되는 존재로 각인됐다. 일제는 교회를 와해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힘과 폭력으로 교회를 파괴하면서 합법적 어용화, 예속 단체화 시키는 방법도 동원했다. 1930년대를 지나면서 종교적으로 점차 강제하기 시작했다. 종전에는 일제와 기독교가 정치와 종교의 관계였다면 1930년대 후반부터 종교와 종교의 관계를 보이기 시작한다. 내세적 성향 말세 신앙을 갈등의 소지로 걸고 넘어졌다. 일제의 강력한 민족말살정책과 일본화 프로그램 아래에서 한국기독교의 주류는 서서히 민족교회로서의 최후 정체성마저 상실해 나갔다. 결정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일제와 한국교회는 정식으로 격전이 벌어진다. 일제의 탄압은 집요하고 무자비했고 무력을 앞세워 교회의 지도자들을 고문하고 핍박했다. 물리적인 힘에 밀려 많은 이들이 굴복하기에 이른다. 그 후 교회는 본격적인 핍박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한국교회의 부흥은 계속 됐다. 외부의 힘이 가해지면 수그러드는게 아니라 오히려 딛고 서는 양상을 보였다. 1920년에서 25년까지 자료를 보면 30%의 성장을 보였다. 침례교인 수도 6만 9000명에서 8만 9000명으로 증가됐다.
  • 2014.06.08 / 이미나 기자

    5 독립운동의 기폭제
  • 민족부활의 염원 ‘3.1운동과 기독교’ 1919년 3월 1일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민족의 저항으로 서울과 평양·의주·선천·안주·원산·진남포 등의 도시에서 동시에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됐다. 항일독립운동으로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자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의 식민지에서 최초로 일어난 대규모 독립운동이었다.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국제사회로부터 고립시켰다. 그리고 1910년 8월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해 대한제국을 완전히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시켰다. 일본은 무자비한 탄압과 억압, 수탈을 자행하는 무단통치를 실시했고, 우리나라 시민들의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지가 높아졌다. 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앞서 선교사를 통해 세워진 미션학교와 교회를 통해서 국민들의 마음에 국권회복과 독립운동의 의지가 생겨나고 있었다. 일본 동경 유학생들은 1919년 2월 8일 동경 조선 YMCA회관에서 약 400명이 모여 2.8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그 선언서를 각국 공사와 일본 각부 대신, 국회의원들에게 전달했다. 이들 중 주모자들은 동경 경시청에 연행되어 옥살이를 했다. 그런데 이소식이 곧 본국에 알려지자 천도교의 최린 손병희 등에게 전해졌으며 손병희는 이 민족적인 거사를 기독교와 함께 해야 한다는 뜻에서 평북 정주에 있는 이승훈 장로에게 먼저 연락하여 서울에서 만나 3.1 독립운동을 준비하게 됐다. 여기에 최남선에게 3.1 독립운동 선언서를 작성케하고 이를 인쇄하여 전국 각지에 배포했다. 33인의 민족대표들 중 기독교인이 16명(길선주 김병조 양전백 유여대 이승훈 이명룡 이갑성 이필주 김창준 박희도 박동완 신흥식 신석구 오화영 최성모 정춘수) 천도교 15명 불교 2명이었다. 민족대표 33인 중 29명이 3월1일 서울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자진해서 경찰서에 신고하여 일본 경찰에 의해 모두 체포됐다. 한편 이른 아침부터 학생들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가방 속 깊이 숨기고 등교를 했다. 그날은 토요일이어서 오전 수업만 받고 탑골공원으로 향했고 시간이 갈수록 학생과 시민들의 수는 많아졌다. 그러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 때 경신학당 출신으로 황해도 해주읍 남본정교회 정재용 전도사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독립선언서 한 장을 들고 나가 약 4000여 명이 모인 군중 앞에서 큰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그의 목소리는 탑골공원을 가득 채웠고 시민 학생들은 질서정연하게 시가행진에 돌입했다. 같은 시간 평양에서는 제7회 총회장 김선두 목사의 진두지휘 아래 독립선언서가 낭독됐다. 이 일로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민족운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됐다. 3.1운동은 수개월 동안 지속되었으며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됐다. 충남 천안 매봉교회의 신실한 크리스천이자 이화학당의 학생이던 18세 소녀 유관순은 3월 31일 대한독립만세운동의 소식을 안고 고향으로 내려와 다음날 아우내장터에서 벌어질 만세운동에 소명감을 갖고 매봉산에 올라가 만세운동을 알리는 횃불을 높이 들어올렸다. 아우내장터는 대한독립만세 소리로 가득 찼고 이날 만세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은 매봉교회 교인을 포함해 약 3000명이 됐는데 이 중 19명이 일본의 총칼에 맞아 희생됐다. 이때 유관순의 부모도 희생됐다. 유관순은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과 협박을 받았다. 유관순은 당당히 맞서며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조국의 독립을 위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3.1운동의 중심에는 기독교 사상을 가진 기독교 지도자들이 있었다. 이승만과 서재필을 중심으로 일본으로부터 정치, 경제적인 면에서 독립을 구하고자 독립협회를 조직해 독립정신을 고취시켰고 백성들의 정신을 깨우치고자 했다. 기독교는 전국에 효과적인 연락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3.1운동에서 주축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전국적 규모의 조직화가 가능한 단체는 종교단체 밖에 없었다. 기독교가 전국적인 교회의 조직을 통해 3.1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하며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해왔다. 1911년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을 비롯해 이런 일련의 법적 조치들을 볼 때 일제가 얼마나 종교계, 특히 기독교를 경계하고 감시했는지 알 수 있다. 한국기독교는 당시 독립운동의 통로가 되었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수난으로 이어졌다. 3.1 운동 이후에 여러 형태의 보복과 책임자 처벌이 진행됐고 일제에 의한 비인도적 만행과 보복학살이 기독교회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제암리교회 사건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다수의 기독교인들을 체포해 교회로 끌고가 십자가에 묶고 총검으로 찔러 죽인 서울의 기독교인 십자가 학살사건, 의주의 교회당 방화사건, 천안 병천의 학살 사건 등 많은 핍박이 있었다. 모진 핍박 속에서도 교회는 민중과 함께 했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했다. 약 3400명의 기독교인들이 체포되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교회는 비탄에 처한 민족에게 복음을 통해 희망과 소망, 살아갈 용기를 주었다. 길선주 목사, 김익두 목사는 기독교인과 교회와 민족에 신앙으로 소망을 주기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3.1운동 후 기독교 지도자들은 농촌사회운동에 참여해 그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농촌을 변화시키는 선각자가 됐다. 기독교 농촌운동과 YMCA, YWCA, 기독교 절제운동 등을 통해 한국교회가 민족교회임을 인식하게 됐다. 3.1운동이 일어나는 과정 속에서 교회와 기독교인의 기여는 대단히 크다. 3.1운동은 민족 전체가 하나가 되어 국권회복을 실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다. 또 3.1운동을 전후로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대한독립군, 광복군 등이 조직되어 항일무장독립투쟁이 가능하게 됐고,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사람들에게 심어줬다. 그리고 3.1운동을 계기로 한성, 블라디보스톡 등지에서와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4월 11일에 창건되어 민족독립을 추진할 수 있는 구심점이 형성됐다.
  • 2014.05.11 / 이미나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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