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쓰는교회용어
어느 때고 어느 일이고 기도밖에 없습니다.
  • 강자는 거짓을 말해도 정당화 될 수 있고 약자는 참말을 하여도 거짓으로 몰릴 수도 있는 것이 인류 역사상에 나타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우리들은 여러 과정에서 배웠고 들었고 보고 온 사실입니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인 우리들은 진리의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만들고 공의롭게 행해야 할 절대 기본 밑에 있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며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세상은 위와 같은 일들로 시끌벅적하고 심지어 싸움까지 벌어지기도 하지만 우리들은 기도할 수 있는 자격과 여건 위에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강자와 약자가 공존하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세상에도 같이하고 있지만 결과는 말씀대로 진리대로 공의롭게 생각하고 기도하는 곳에 응답의 승리가 있을진대 높고 낮고 간에 우리들은 가장 많이 기도할 때입니다. 더욱 기도하십시다. 원로장로회 제공
  • 2009.02.2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지어다’라는 말
  • ‘지어다’라는 말은 “마땅히 그렇게 하여라”의 뜻을 나타내는 명령형 종결 어미로 장엄한 어감을 띤다. 예를 들면 “너는 군인이 되었으니 지금부터 국방의 의무를 다 할지어다” 명령형 반말임에 틀림없습니다. 예배가 끝날 때 축도 속에 ‘지어다’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는데 이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이나 성령님에게 반말을 하는 것으로 들려 은혜가 안 될 때도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성전을 떠나가는 성도들 위에 영원히 함께 있을지어다” 이것은 누구엔가 명령이요 반말로 하는 것임으로 듣기에 겸손치 않게 느껴지니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이렇게 하면 더욱 은혜스럽습니다. 쉽게 말하면 상대방에게 “복 받으십시오” 하는 것과 “복받을지어다” 하는 것과 어떤 것이 듣기에 좋고 예의적입니까? ‘지어다’는 불손하게 들리고 교만하게 들리므로 교회에서 특히 예배와 관계되는 데는 사용을 삼가는게 좋습니다. 공동체 안에서는 특히 대중성에서 반말로 들리는 말은 아무리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습관성이라 할지라도 반말을 듣고 좋아할 사람은 없으니까요. 원로장로회 제공
  • 2009.02.2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꼭 지켜야 할 교회주변의 교통질서
  • 주일예배가 끝나면 모두 집에 가는 발걸음이 바쁩니다. 그러나 은혜 받고 나온 몸이 바쁘다고 교통질서를 위반하고 봉사자의 안내는 아랑곳없이 차도에 뛰어들어 무단 횡단하거나, 차가 지나가고 있는 횡단보도에 뛰어드는 아슬아슬한 장면을 자주 보게 됩니다. 차를 빨리 타려고 서둘러 뛰겠지만 교통법규와 질서는 꼭 지켜야 합니다. 위험하고 모양새가 나쁘고 세상사람들의 규탄거리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행위이며 더하면 죽기도 합니다. 질서는 아름답고 질서는 안전하고 잘 지키는 질서는 은혜롭기도 합니다. 원로장로회 제공
  • 2009.02.1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호칭(呼稱)의 변경
  • 지금으로부터 약 30여 년 전에는 친구의 부인을 영부인(令夫人)이라 하고, 친구의 아들을 영식(令息)이라 하고, 친구의 딸을 영애(令愛)라고 칭하였습니다. 그래서 자녀의 혼인 청첩장에는 동영부인(同令夫人)귀하 라고 하여 친지의 내외분에게 알린다는 것이었는데 세월의 흐름에 따라 영식, 영애가 아들, 딸로 불리우고 영부인이 사모님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자고로 윗사람을 칭할 때에 반드시 ○○○님자를 붙이는데 그런즉 아버지 앞에서 형(兄)을 말할 때는 님자를 붙이지 않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목사, 장로, 집사, 권사들을 위한 기도할 때 님자를 붙이지 않아도 되는데 상대를 존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님자를 붙이게 되는 것입니다. 근래는 많은 지도자들이 자기의 부인을 칭하여 ‘우리 사모’ 심지어 ‘님’자를 붙여 ‘우리 사모님’이라고까지 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이런 것은 대단히 잘못된 호칭입니다. ‘나의 아내, 나의 처’라고 하는 것이 맞는 호칭입니다. 그 외에도 ‘우리 집사람’, ‘우리 애 엄마’ 등 수수한 말이 있습니다. 호칭을 잘못하여 조소꺼리가 되거나 망발이 되어 질서가 무너지고 예절이 뒤집히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원로장로회 제공
  • 2009.02.0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일구이언(一口二言)
  • 한 입으로 두 말을 한다는 뜻으로, 어떠한 일을 말할 때 이랬다 저랬다 중심 없이 환경과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어 변명하다 보면 일구이언(一口二言)인 것입니다. 자고로, 일구이언(一口二言)은 거짓말 하는 것으로 나쁘게 여겨 일구이언(一口二言)은 이부지자(二父之子)라고 하였습니다. 이부지자(二父之子)란, 두 아비의 자식이란 말로 대단한 욕설로써 일구이언(一口二言)의 나쁨을 지적한 말입니다. 진실이 결여된 허위의 일이나 임시변통하는 일이나 미봉책으로 그때그때를 넘기려는 수단에서 나오는 것이 일구이언(一口二言)이니 무리는 무리를 낳는다는 말과 같이 진실이 없는 일구이언을 정당화 하려고 하면 일구 삼언 사언(一口三言四言)이 되며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 속임꾼, 불신자로 전락하여 아무도 인정하지 않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어는 세상에서도 존재하지 못하고 매장되는 것입니다. 잠언에 기록된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고 네 입의 말로 인하여 네가 잡히게 되었느니라” 말씀대로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특히 지도층의 인사들의 말은 주위에 끼치는 영향이 크므로 일구이언으로 질서를 깨지 않는 세상을 위하여 노력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원로장로회 제공
  • 2009.01.3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부패(腐敗)는 부정(不正)이 쌓인 것
  • 본 뜻대로 되지 않고 잘못된 것을 하자(瑕疵)라고 하는데 물품의 하자는 교환(交換)하면 되는데 사람의 하자는 창조주 하나님께서도 지금까지 교환하지 않고 반면 고쳐서(수리) 사용하게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람을 고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들은 신앙적으로 회개하면 고쳐지는 것이고 회개하지 못하는 하자는 정해진 법과 규칙대로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잘못을 다스리거나 잘한 것을 상주는 것은 사람의 높고 낮음이 없고 귀하고 천한 것이 없고 늙고 젊음과 남녀가 없이 만인 앞에 평등하게 시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잘못을 바로잡는 다스림에 있어 위의 관계나 조건들이 가로막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결과로 희석화 된다면 이것을 부정부패라고 합니다. 이렇게 부정부패가 다스림 위에 존재하면 그 시대 그 사회의 그 사람들은 역사의 죄악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없게 하는 역할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몫입니다. 그리고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겠는데 썩어진 다음에는 소금이 있어도 소용없으니 썩기 전에 부지런히 소금을 치는 것이 애국이요, 애족이요, 교회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원로장로회 제공
  • 2009.01.2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일벌백계(一罰百戒)
  • 일벌백계는 크고 작고 간에 조직이나 공동체를 다스리는데 꼭 필요한 것으로써 그 뜻은 한사람의 잘못을 그에 해당한 벌을 줌으로 여러 사람에게 경계심을 주어 다시는 잘못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철저히 지키고 실시하는 공동체는 공의롭고 정정당당하게 발전하지만 이것이 지켜지지 않고 말로만 얼버무려 적당히 넘어가는 곳은 오히려 전철을 능가하는 악순환의 계속으로 무질서의 수라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잘못을 한 사람의 배경이나 지위 따위를 참작한다거나 여러 가지 정상 등을 고려하여 일벌백계(一罰百戒)가 미루어진다던가 또는 희석화 되면 또 그곳은 패배만 있을 뿐입니다. 질서 정연한 사회, 공의로운 사회,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위하여 법이 있고 규칙이 있고 더 크게 평가되는 도덕이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지도층에 있어 많은 사람들을 선도해야 할 사람들과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우리 크리스천들은 일벌백계를 당할 언행을 해서는 절대 안되지만 만일 믿음이 약하여 혹시 넘어지더라도 빨리 회개해야합니다. 자기의 잘못을 괴변으로 정당화시키려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겠습니까? 회개하고 고치지 않으면 일벌백계는 절대로 면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일벌백계와 관계 있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원로장로회 제공
  • 2009.01.1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일사불란(一絲不亂)
  • 일사불란이라 함은 한올의 실이 흐트러짐이 없이 곧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6·25전쟁 때 북진하였다가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인하여 전선이 무너져 후퇴를 시작하였는데 이 때 서울서 후퇴한 것이 1월 4일이기에 이름하여 1·4후퇴라고 하는데 이 일사후퇴 때 나는 중동부 전선 홍천까지 후퇴하여 병력을 정비 정돈하고 명령을 기다리는 동안에 적의 선발대가 퇴로를 차단하는 통에 우리부대는 독안의 쥐같이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었다. 이때 일사불란해야 할 지휘계통이 거듭 무너지고 이랬다 저랬다 하는 동안 일사불란해야 할 계통이 무너지고 나니 불과 1개 중대도 되지 않는 적군에게 퇴로(홍천에서 원주로 가는 고개)를 빼앗겨 1만여 명이 넘는 병력이 이틀씩이나 홍천강가 눈 속에서 굶어가며 추위에 떨었던 것은 지휘부가 이랬다 저랬다 하는 기본을 벗어난 임기응변식 작전 계획이었던 것을 지금도 뼈저리게 기억한다. 사회나 교회, 단체의 일도 부동적 치밀한 기획을 최선으로 하고 만일에 대비하여 차선책을 세워 대비하면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진행되는 것인데 전문진을 경유하지 않고 최고자의 단독 판단만으로는 시행착오도 있고 독선도 있어 퇴로마저 차단되면 원치 않는 끝을 보게 되는 것이다. 금년에는 부디 우리나라, 우리 사회, 우리교회가 일사불란(一絲不亂)한 대열이 흐트러지지 말고 전진하는 한해가 되기를 기도하며 실천합시다. 원로장로회 제공
  • 2009.01.0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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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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