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오순절 운동이야기
(28)오순절 운동의 미래적 전망 - II
  • 세대가 변하고 시간이 지나도 성령의 역사와 사역은 멈추지 않는다. 교회를 향한 오순절 운동은 강하고 급한 바람과 같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어 질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기독교 국가였던 곳이 아닌 다른 대륙, 나라, 인종들 사이에서 오순절 운동이 일어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리고 오순절 교회 내에서도 새로운 영적 갱신 운동이 일어나 오순절 운동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3) 타 종교 권에서 일어날 오순절 운동 오순절 운동은 과거에 있었던 어떤 영적인 운동보다 폭발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세계 대륙은 인종과 언어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나뉘어 있다. 유럽, 북미, 남미 대륙이 전통적인 기독교 국가들도 이루어진 기독교권을 이루고 있다면 아시아 대륙은 불교, 이슬람, 힌두교로 나뉘어 있다. 인터넷과 국가 간의 교류가 활발해 지면서 인종과 언어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있다. 하지만 종교의 벽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철옹성과 같이 오랜 세월 동안 그 견고함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오순절 운동은 종교가 다른 지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지난달에 한국을 방문했던 사티쉬 쿠마르(45) 목사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교회인 갈보리템플을 이끌고 있다. 갈보리템플은 2005년에 25명의 성도로 시작해 11년 만에 15만 명의 성도를 가진 인도 최대의 교회가 됐다. 주목할 만한 것은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교회가 힌두교 국가인 인도에 세워져 있다는 것과 지금도 성장하고 있으며 과거의 그 어떤 교회들보다 교회의 성장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다. 기독교 국가인 영국이 오랜 세월동안 인도를 지배하면서 인도의 복음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정치와 경제적으로 인도를 지배했을 뿐 종교적으로는 힌두교라는 종교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오순절 운동은 종교의 벽을 허물고 기독교 역사에 있어 가장 빠른 교회 성장을 이루고 있는 교회를 기독교 국가가 아닌 힌두교 국가에서 탄생하게 했다. 이런 현상은 힌두교 국가들뿐만 아니라 아직은 먼 미래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이슬람권에서 일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나라와 백성, 방언과 족속이 복음 듣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4) 오순절 내에서의 영적 갱신 운동 16세기 종교개혁으로 개신교와 가톨릭이 분리 됐다. 종교개혁의 역사를 보며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회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교회 내에서 일어났던 종교개혁이다. 만약 가톨릭 내부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역사에서 사라졌을 것이고 지금의 가톨릭교회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교회는 항상 갱신되어야 한다. 20세기 초에 시작된 오순절 운동은 기독교 내에서 일어났던 그 어떤 영적인 운동보다 파급력이 컸었다. 그러나 오순절 운동은 110여 년의 시간을 넘기고 있다. 이 기간 동안 오순절 운동은 기존에 있었던 다른 교단들처럼 교단을 형성하고 교리와 신조를 완성하며 조직화되었고 정형화되기 시작했다. 초기 오순절 교회들은 이단 논쟁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교회의 성장을 바탕으로 기존 교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치에 와 있다. 그러나 오순절 운동은 오순절의 역동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정형화 되고 있는 예배, 기도, 말씀의 선포는 새로운 성령의 뜨거운 역사를 바라는 영적 갱신의 열망으로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오순절 신학자들의 주된 관심은 초대교회의 영성과 교회론을 기반으로 한 갱신 신학(Renewal Theology)으로 옮겨지고 있다. 고인 물은 생명력을 잃게 되듯이 신앙도 새롭게 갱신되지 않으면 뜨거움과 활력을 잃게 된다. 교회사를 통해서 보면 성령은 성도들의 신앙과 교회를 새롭게 갱신시켜 새로운 부흥의 역사를 이끌어 왔다. 오순절 운동을 새롭게 하기 위한 성령의 역사는 가까운 미래에 영적 갱신 운동으로 나타날 것이며, 이것을 통해 오순절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을 새롭게 할 것이다. 이상윤 목사(국제신학교육연구원)
  • 2016.09.1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27)오순절 운동의 미래적 전망 - I
  • 오순절 운동의 영향으로 20세기 이후 기독교는 많은 발전과 변화를 겪어 왔다. 성령론의 재발견이라는 신학적인 측면 외에도 오순절 운동이 없었다면 세계 선교와 교회의 부흥은 대단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에 모두가 공감하고 있다. 21세기의 교회와 기독교는 교회의 부흥과 기독교 전통을 바꾸어 놓았던 오순절 운동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진행 될 것인가 하는 관심과 의문을 가지고 있다. 1) 새로운 형태의 오순절 성령 운동이 일어날 것이다 교회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21세기 한국과 서구 기독교의 성장은 둔화 되고 있다. 교회의 수나 성도의 증가, 선교사 파송 등 여러 가지 지표들을 살펴보면 더 이상 20세기 중반에 나타났던 폭발적인 성장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오순절 운동은 위기감과 함께 낙관적인 견해를 갖게 된다. 왜냐하면 오순절 운동은 성령 운동이기 때문이다. 오순절 운동의 주체는 성령이며 성령에 의한 영적인 갱신 운동이다. 성령은 언제나 하나의 영적인 운동이 일어났다 사그라질 때 또 다른 형태의 성령 운동으로 교회와 기독교를 갱신해 왔다. 종교 개혁 또한, 종교개혁자들의 공헌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종교 개혁자들이 기독교를 갱신한 것이라기보다는 부패한 중세 교회와 기독교를 개혁하기 위한 성령의 영적인 갱신 운동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종교 개혁이후 교회가 또 다시 영적인 침체기로 접어들기 시작하자 성령은 웨슬리 운동과 무디의 영적 갱신 운동을 통해 새로운 부흥의 역사를 이루었다. 20세기 오순절 운동은 웨슬리 운동과 무디의 영적 갱신 운동이 시들어 갈 무렵에 강력히 일어났던 성령에 의한 부흥 운동이었으며 교회를 위한 갱신 운동이었다. 오순절 운동 안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순절 운동도 은사주의 운동이나 제3의 물결과 같은 다른 형태의 영적 갱신 운동으로 바뀌었다. 이와 같은 사례들은 어떤 형태로 일어날지 단정 지을 수 없으나 새로운 성령 운동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일어날 것임을 단적인 예로 보여 준다. 그럼으로 21세기의 교회와 성도들은 지금의 현재의 상태에 안주하지 말고 또 다른 성령의 은혜와 부흥을 사모해야 한다. 2) 아시아권에 일어날 오순절 운동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은 유럽을 거쳐 미국에 도착했다. 이후 세계 선교와 복음화는 미국에서 일어났던 아주사 부흥 운동(1906)을 통해 더욱 힘 있게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복음의 불모지로 남아 있는 대륙들이 남아 있다. 세계 기독교 지도를 보면 아시아에서는 한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들이 ‘미전도 국가’들이다. 아시아의 인구는 44억 3000만명으로 전 세계 인구의 반을 넘고 있다. 하지만 아시아의 약 3% 인구만이 기독교를 믿고 있다. 기독교의 불모지와 같은 아시아에서도 오순절 성령 운동은 서서히 힘을 발휘하고 있으며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나라들에서 선교의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다. 중국의 지하 교회와 독립 교회를 중심으로 한 오순절 운동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으며 인도에서도 오순절 교회는 두드러진 성장을 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중국과 인도뿐만 아니라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게도 나타나고 있다. 세계 인구의 반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아시아에서의 성령 운동이 일어난다면 이것은 과거의 어떤 부흥 운동보다 강력할 것이며 이전에 없었던 괄목할 만한 교회 성장을 이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세계 기독교의 지도를 더욱 넓고 광활하게 그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시아 기독교의 성장은 서구 중심으로 이끌려 왔던 기독교 문화에도 큰 변화를 가져 오게 될 것이다. 오순절 운동의 특징 중의 하나는 역동성이다. 과거의 영광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부흥을 이끌어 가실 성령님께 민감히 반응하며 부흥의 주역이 되고자 노력해야 한다. 이상윤 목사(국제신학교육연구원)
  • 2016.08.2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25)오순절 운동과 현대 기독교 - Ⅱ
  • 오순절 운동은 세계 기독교의 흐름과 개신교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았다. 그동안 개신교는 서양의 종교로서 유럽과 북미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오순절의 등장과 함께 개신교는 남미와 아프리카 지역에서 크게 성장을 했고, 한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권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오순절 교회들은 단순한 교회 성장에만 만족하지 않고 오랜 세월동안 기독교가 추구하지 않았던 새로운 시도와 사역들을 시작했다. 1) 다인종·다문화 교회의 성장, 글로벌 네트워크의 형성 냉전 시대의 종식 이후 국가 간의 장벽이 무너지고 교통의 발달과 함께 사람들의 자유로운 이동이 이루어졌다. 활발한 국제적인 교류는 서로 다른 문화와 인종에 대한 접촉점을 확대했고 다인종·다문화 사회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는 인터넷의 등장과 함께 급속도로 빨라졌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기독교인의 삶의 형태와 패턴을 바꾸어 놓았고 교회 내에서의 인종과 문화에 대한 구분을 더욱 흐리게 만들어 놓았다. 이런 변화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처했던 보수적인 교단들과 달리 오순절 교회는 첨단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복음과 선교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교회들은 적극적으로 인터넷을 통해 예배 실황을 전송하고 성도들은 여러 나라의 다양한 예배와 설교를 접하게 되었다. 오순절의 에큐메니컬한 성향은 오순절 계열의 교회들을 교단과 상관없이 하나의 네트워크로 구성할 수 있게 했고 선교와 전도 사역에 공조하며 성장할 수 있게 했다. 2) 전도와 선교를 위한 광고, 마케팅, 미디어의 도입 1970년대 후반부터 오순절주의자들은 전도와 선교를 위해 TV, 라디오, 신문 등과 같은 미디어를 도입하고 광고와 마케팅 전략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많은 크리스천 방송국들이 생겨났고, TV와 라디오 채널을 통해 복음을 증거 하기 시작했다. ‘The 700 Club’은 오순절주의자인 팻 로버트슨(Pat Robertson)이 설립한 것으로 전 세계에 TV 채널을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기독교 방송이다. 전도와 선교를 위한 미디어의 도입과 함께 마케팅 전략도 도입되었다. 기존의 전도와 선교는 믿지 않는 가정을 방문하거나 거리에서 노방 전도를 하는 것이었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연령과 직업군에 맞는 세부적인 전략을 세우고 전도의 효과를 분석하기에 이르렀다. 제리 파웰(Jerry Falwell)은 TV 전도 사역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했던 목회자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The Old Time Gospel Hour’를 통해 TV 방송에서 설교를 하는 것 이상의 일을 했다. 그는 자신의 설교를 듣는 TV 시청자들을 우편물과 이메일을 통해 조직화 했으며 기독교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훗날 이 프로그램은 ‘리버티 온라인 대학’(Liberty University Online)으로 확장 시켰으며 9만 명의 학생들이 인터넷을 통한 온라인으로 수강했다. 3) 기독교 교육의 비약적인 성장 20세기 이후 기독교의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는 평신도를 위한 기독교 교육의 비약적인 성장이다. 다양한 종류의 성경이 번역 되었고, 그 동안 평신도들에게는 생소했던 주석적인 해석이 담긴 성경이 출판되었다. 미국에서 스코필드(C. I. Scofield)가 주석 성경(the Scofield Reference Bible)을 출판했는데 이 성경은 30년간 무려 200만 부 이상 팔렸다. 복음주의와 오순절주의의 영향으로 교회 내에 평신도를 위한 성경 공부 프로그램이 많이 개발 되었고, 조직신학과 성서학적인 것까지 가미 된 평신도를 위한 성경 교육이 이루어졌다. ‘알파코스’는 캠브리지대학에서 법을 전공하고 변호사로 일을 했던 니키 검블(Nicky Gumble)에 의해 완성되고 전 세계로 확장되었던 프로그램이다. 변호사 였던 니키 검블은 소명을 받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을 한 후 영국 성공회 소속의 목회자로서 오순절 계열의 목회자가 되었다. 그는 평범한 성경 공부 교재였던 ‘알파코스’를 대부분 재집필해서 150여 개국에서 사용되는 새신자 교육과 전도를 위한 평신도 교육 교재로 만들었다. 이와 같이 오순절 운동은 교회의 부흥과 영적 갱신 운동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20세기와 21세기의 기독교의 사역과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았다. 성령께서는 항상 교회의 갱신과 신앙의 회복을 위해 새로운 부흥 운동을 일으키셨고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과 교회를 통해 새로운 성령의 바람을 일으켜 주셨다. 오순절 교회들은 이런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을 의지하며 계속해서 쓰임 받으며 한국과 세계 기독교를 이끌어 가야 할 것이다. 이상윤 목사(국제신학교육연구원)
  • 2016.07.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오순절 운동과 현대 기독교 - I
  • 20세기 기독교의 가장 큰 변화는 교회와 세계 선교의 폭발적인 성장이다. 이런 현상은 21세기에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데 교회의 성장과 갱신에는 항상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 성령의 역사가 한 지역 교회의 영역에서 벗어나 나라와 민족 전체로 확산되면 이것을 ‘영적인 운동’(spiritual movement)이라고 부르게 된다. 기독교의 영적인 운동은 여러 세대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18세기 이후 존 웨슬리를 중심으로 일어난 성결운동은 물론 16세기의 종교개혁도 영적 갱신 운동 중의 하나이다. 오순절 운동은 현대 기독교를 이끌고 있는 영적인 운동으로서 현대 기독교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1) 교회와 예배의 패러다임 전환 2차 세계 대전 이후 인류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패러다임이 전환되었다. 베이비 부머(the baby boomers) 세대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세대는 생활, 문화, 생각, 가치관 등 모든 것에 있어 부모의 세대와 확연하게 달라졌다.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에 대항하며 정형화된 사회의 틀을 깨고자 했으며 이런 현상은 기독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예배의 거룩성을 표방하며 파이프 오르간과 고딕 양식의 웅장한 교회들은 점점 현대화 되었다. 웅장한 소리를 내며 예배를 이끌던 파이프 오르간은 점점 빠르고 경쾌한 피아노로 대치되었고, 높은 강대상에서 성도들을 내려다 보며 교리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설교는 점점 대중화 되었다. 오순절 운동은 이런 교회와 예배의 변화를 가속시켰다. 오순절 예배는 정형화 된 예배를 역동적으로 바꾸어 갔다. 예배의 형식보다는 성령의 임재에 초점을 맞췄으며 시간적 제약과 공간적인 제약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성령의 임재에 따라 예배의 시간은 많이 길어지기도하고 예배의 순서도 유동적이었다. 예배와 경배는 거리, 공원, 대학의 캠퍼스, 쇼핑몰 등 교회를 벗어나 어느 곳이든 상관없이 이루어졌다. 교회는 고딕 양식과 모자이크 유리에 성화가 그려져 있는 건축 구조를 버리고 성도들의 편의성과 성경 공부와 여러 소그룹들이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의 활용성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그래서 오순절 교회들은 주차장이 완비된 예식장, 극장, 쇼핑몰 등 접근성과 활용성이 높은 건물들을 공격적으로 사들여 예배의 처소로 삼았다. 오순절 예배는 대중화된 예배라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척 스미스(Church Smith)의 갈보리 채플(Calvary Chapel)이 중심이 된 ‘예수의 사람들 운동(Jesus People Movement)’이 일어났다. 이들은 정장과 넥타이 대신 간편한 옷차림으로 설교와 예배를 인도했으며, 죄의 고백과 회개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동행과 성령의 임재를 중심으로 한 말씀을 선포했다. 예배에는 기타, 드럼, 키보드 등 현대적인 악기들이 동원 되었으며 찬양과 경배는 마치 콘서트 장을 연상하게 만들었다. CCM의 발달로 새로운 찬양 곡들이 쏟아져 나왔고, 많은 청년들과 젊은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다. 2) 세계화된 초대형 교회의 성장 오순절 운동의 영향으로 초대형 교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일반적으로 교회들이 어떤 한 지역을 기반으로 두고 있었다. 교회는 그 교회가 속한 지역을 기반으로 지역의 사람들과 소통하고 지역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이끄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대형 교회의 등장은 지역의 경계를 허물었다. 교통수단의 발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지역의 경계를 넘어 한 곳으로 모일 수 있게 되었다. 대형교회는 교회의 트렌드를 만들었고, 그 트렌드를 기반으로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 여러 지역에 제자 교회를 설립했다. 대형교회의 제자 교회들은 행정, 평신도 교육, 선교 등 모(母)교회의 트렌드를 그대로 사용했으며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을 손쉽게 하나로 연결할 수 있게 되었다. 대형 교회들은 거대 조직을 교단에 맞게 ‘구역’, ‘순’, ‘셀’, ‘교구’ 등과 같은 이름으로 세분화했으며 세분화한 조직을 위해 사역을 할 평신도를 양육하게 되었다. 이런 대형 교회의 성장은 교회가 인종 간의 벽을 허물고 다양한 문화를 기반으로 한 다인종 교회로 성장할 수 있는 모범을 제시하게 되었다. 오순절의 에큐메니컬한 성향은 이런 다인종, 다문화의 대형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충분한 자양분을 제공해 주었고, 오순절의 역동성은 급변하는 사회적 현상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교회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이 오순절 운동과 오순절 교회들은 성령의 강권하심에 따라 짧은 기간 안에 오래된 교회의 전통적인 관습을 바꾸었으며 새로운 기독교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이상윤 목사(국제신학교육연구원)
  • 2016.06.1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오순절신학과 하나님의 나라
  • 하나님의 나라는 오순절신학의 핵심적인 내용 가운데 하나이다.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해 왔으며,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신학적인 노선을 달리해 왔다.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을 가졌던 교단들을 적극적으로 현실참여에 나섰고,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최후의 심판 이후에 다가 올 미래적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을 가진 교단들은 개인의 영혼 구원에 사역의 무게를 두었다. 기독교 신학은 오랜 세월 동안 물질적인 번영과 건강하고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은 기복적인 신앙에 근거한 것이고, 기독교인이 추구해서 안 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오순절주의자들은 이 땅에서의 물질적인 풍요와 건강한 삶을 누리는 것은 기복신앙이나 물질주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며,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1)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b∼21) 기독교 신앙은 전통적으로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현재의 삶을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그러나 오순절은 미래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이 땅에서 경험하고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포기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기존의 기독교 신학은 이 땅에서 물질의 번영과 건강의 축복을 바라는 것을 기복신앙이라고 격하시켜왔지만, 오순절주의자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누리는 부귀영화와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경험되어야 한다. 로마서 14장 17절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수많은 재산이 있지만 그 재산 때문에 자녀들이 서로 다투고, 법적인 소송에 휘말려 있고, 얼굴도 대면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될 수 없다.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성령 안에서 체험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 담겨 있어야만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성숙에 따라 이루어 가는 것이다. 2) 미래적 하나님의 나라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하는 것은 오순절만이 아니다. 이 땅에서의 지상낙원을 꿈꾸는 이단들도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단들은 미래적 하나님의 나라를 무시하고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만 강조하기 때문에 신학적, 신앙적 오류에 빠지게 된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영원한 생명과 함께 주어질 미래적 하나님의 나라에 향해 있어야 한다. 이 세상의 축복과 안위에 빠져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에 집착하게 되면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리게 된다.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도래할 미래적 하나님의 나라를 대신할 수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과 함께 임한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완성될 것이다. 서로 영원히 분리되고 구별될 것만 같은 미래적 하나님의 나라와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임재와 하나님의 통치를 통해 하나로 연결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 확장되고 있으며, 성령의 능력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증거를 통해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적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게 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한다. 신앙의 무게 중심이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치우치면 신앙은 기복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치중하면,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통치와 축복은 값어치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오순절의 신앙은 성령 안에서 미래적 하나님의 나라와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의 균형을 이루어야만 한다. 이상윤 목사(국제신학교육연구원)
  • 2016.05.1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23) 오순절 신학의 핵심 교리
  • 모든 분야에 걸쳐 이론과 실제의 괴리는 존재한다. 신학교 강의실의 신학을 목회 현장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신학과 목회, 신학과 신앙 속에서 답을 제시하고자 하는 목회자와 신학자의 고민과 갈등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체험적이고 실천적인 신학’은 오순절신학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오순절신학의 특성 때문에 이론과 실제, 신학과 목회의 괴리감은 다른 기독교의 신학에 비해 적게 느껴지는 편이다. 오순절신학은 이론과 실제의 거리를 좁혀 가며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의 오중복음에서 사중복음으로 전환되었고, 다시 사중복음에서 현대 오순절주의자들의 오중복음로 발전해 왔다. 1)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의 오중복음(중생, 성화, 성령침례, 신유, 재림)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은 성결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 초기 오순절운동을 이끌었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감리교나 성결운동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었다. 이들은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의 성화의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의 신학적 공헌은 다른 교단의 신학과는 구별되는 오순절신학의 핵심 교리를 처음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 기독교 신학은 구원론에 집중되었다. 칼빈의 예정론과 이에 대한 반박으로 등장한 아르미니우스의 예지론의 신학적 대립과 논쟁은 구원론에 대한 관심을 더욱 가중시켰다. 기독교 신앙의 최고 목적은 구원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구원 그 이상의 어떠한 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성화론의 등장으로 기독교 신앙이 단순히 구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으로서 더욱 성숙된 삶을 살아가는 성화에 새로운 목표를 두게 되었다.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은 이런 성화의 교리를 오순절의 오중복음으로 그대로 받아들였고 성결주의자들의 사중복음(중생, 성화, 신유, 재림)에 성령침례를 넣어 오순절의 오중복음을 선포하게 되었다. 오순절신학의 첫 단추가 꿰어 진 것이다. 2) 오순절의 사중복음(중생, 성령침례, 신유, 재림)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의 오중복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중복음으로 바뀌었다. 오순절의 사중복음과 성결운동의 사중복음은 ‘성령침례’에 대한 교리적 차이이다. 오순절의 사중복음은 ‘중생, 성령침례, 신유, 재림’을 내용으로 하고 있지만 성결운동의 사중복음은 ‘중생, 성화, 신유, 재림’이다. 웨슬리의 제자였던 플레처 이후 성결주의자들도 인간의 힘으로는 성화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성화를 위해 성령침례가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을 교리적으로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성화를 성령침례 속으로 포함시켰으며, 성령침례를 오순절신학의 중요한 핵심 요소로 부각시켰다. 오순절의 사중복음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성령침례를 통해 성화와 신유를 신학적으로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성령침례가 빠진 성결교리의 사중복음은 어떻게 인간이 성화의 단계에 이르고 신유를 체험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을 하는데 있어 신학적인 제한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오순절의 사중복음은 성화를 성례침례에 포함시켜, 성화가 어떤 것이며 성화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설명하고 있고, 성령침례와 신유의 신학적인 연관성을 설명해 주고 있다. 3) 현대 오순절의 오중복음(중생, 성령침례, 신유, 축복, 재림) 현대 오순절을 대표하는 핵심적인 신학적 교리는 오중복음이다. 현대 오순절의 오중복음은 중생, 성령침례,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에 축복의 복음을 더한 것이다. 축복의 복음은 통전적(holistic) 인간 이해와 구원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영혼을 배제하고 인간의 육체로만 인간을 이해할 수 없고, 그 반대로 인간의 영혼만으로 인간을 이해 할 수 없듯이, 구원 또한 영혼과 육체를 포함한 전인적인 구원이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오순절의 축복은 단순히 물질적인 축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과 육의 조화로운 축복을 말하며 전인적인 구원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상윤 목사(국제신학교육연구원)
  • 2016.04.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22)오순절 운동의 신학화
  • 20세기 초 성령의 역사와 오순절 운동은 전 세계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폭발적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원산(1903)과 평양(1907) 대 부흥 운동은 회개 운동으로 나타났으며, 미국의 아주사 부흥 운동(1906)은 은사를 중심으로 한 은사 운동이었다. 1900년대 초에 일어났던 오순절 성령 운동은 영적인 부흥 운동(Movement)에서 신학(Theology)으로 발전하는 신학화(Theologization) 과정을 겪고 있다. 16세기의 종교개혁과 18세기의 웨슬레 부흥운동을 비롯한 기독교의 영적 갱신운동이 신학화의 과정을 거쳤던 것처럼 오순절 운동도 오순절 신학화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개혁주의신학이 탄생했고, 위대한 설교가였던 웨슬레의 신학은 웨슬레에 의해 완성됐다고 하기 보다는 후대에 발전되었다. 신학화의 과정은 영적 갱신 운동을 이끌던 당대의 사람들의 몫이라기보다는 후대 사람들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1) 오순절 학파의 등장 초기 오순절 신학은 성결 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성화와 성결’은 테일러(Nathaniel Taylor)를 중심으로 예일대학에서 ‘새로운 신학’이라는 신학적 견해를 가지고 접근하게 되었고, 보드만(W. E. Boardman)은 장로교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귀한 기독교인의 삶』(Higher Christian Life)라는 책을 통해 구원이후의 성화된 성도의 삶에 대해 강론을 폈다. 마크 피어스(Mark Guy Pearse)는 서평을 통해, “보드만의 저서로 인해 초기 경멸받던 성화의 교리가 모든 교파의 영광스러운 유산이 되었다”고 평했다. 기독교의 주류 교단들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는 고린도전서 12장 3절의 말씀을 근거로 구원을 받을 때 이미 성령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오순절 신학은 구원을 위한 성령의 사역과 성령 침례를 엄밀히 구분하고 있다. 오벌린대학의 교수였던 피니(Charles Finney)는 오벌린학파를 형성하며 ‘오벌린 완전주의’(Oberlin Perfectionism)를 출현시켰다. 오벌린 학파를 이끌었던 피니는 구원 이후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성결한 삶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침례를 통해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피니와 오벌린학파의 성화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관심은 점차 성령 침례와 성령의 능력으로 바꾸어 갔고, 이런 오벌린학파의 성령에 대한 이해는 초기 오순절신학의 바탕이 되었다. 2) 두 번째 축복(Second Blessing)에 관한 교리 오순절 운동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기독교 신앙의 최종 목적은 구원이었다. 그러나 오순절신학의 등장으로 기독교 신앙의 목표가 단지 구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은 이후의 성도들의 영적인 삶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은 중생을 ‘첫 번째 축복’으로 간주하고 성령침례를 ‘두 번째 축복’으로 이해했다. 토레이(R. A. Torrey)는 중생과 성령침례를 구별하면서 중생은 ‘생명과 구원’에 관련되어 있지만 성령침례는 복음 증거를 위한 ‘능력과 봉사’와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토레이는 “모든 성도들은 성령을 가지고 있지만 중생을 받은 모든 사람이 성령침례를 받은 것은 아니다”는 말로 고린도전서 12장 3절의 말씀을 해석했다. 피니는 성령침례는 초대 교회에만 한정 된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공통으로 누릴 수 있는 특권이며, 죄인을 회심시키는 성령의 역사와 혼돈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피니는 중생과 두 번째 축복인 성령침례를 구별하면서, 칼빈의 관점으로 보면 회심은 종교 체험의 마지막이지만 오순절의 입장에서 회심은 종교 체험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오순절 신학이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직도 신학화의 과정을 거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순절 신학은 그동안 기독교 신학이 간과하고 있었던 신학적인 문제들을 오순절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연구함으로써 교회의 부흥과 성장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학에도 큰 공헌을 하고 있다. 이상윤 목사(국제신학교육연구원)
  • 2016.03.20 / 복순희 기자

    (21)성령 침례와 성령의 은사에 대한 오순절 신학의 이해
  • 원어적인 의미의 침례는 헬라어 ‘밥티조’인데, ‘적시다’, ‘잠그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되고 주로 옷에 염색하는 것이나 물을 퍼낸다는 의미를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밥티조’는 ‘물에 완전히 잠기는 것’과 ‘죄의 씻음을 나타내는 것’ 두 가지 의미로 적용되고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옛 사람은 죽고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을 상징하는 의식으로 쓰여 지고 있다(롬 6:1∼4). ‘성령’에 대한 신학적 관심은 19세기 후반에 들어 활발해졌다. 19세기 초부터 성결운동의 영향으로 인해 성결(Holiness)과 성령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접근이 시작되었고, 1890년대부터 성령은 신학의 주된 관심사 중의 하나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성령’을 주제로 한 논문들이 점차 증가하게 되었고, ‘성령 침례’라는 제목의 설교들이 대규모 집회에서 종종 선포되었다. 이후 성령 침례에 대한 해석은 오순절 성령론의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성결 운동의 영향을 받았던 초기 오순절 신학자들은 성령 침례를 그리스도인의 성결한 삶과 연관시켰다. 이들은 성령 침례를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정결’에 필요한 요소로 생각했으며,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령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성령 침례는 ‘봉사와 헌신을 위한 능력의 부여’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런 오순절주의자들의 성령 침례에 관한 신학적 관심과 이해는 점차 ‘성령 침례와 중생의 관계’, ‘성령의 은사와 성령 침례의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1) 성령 침례와 중생 교부시대 이후 기독교 신학은 오랜 세월 동안 ‘은사중지설’에 휩싸여 있었다. ‘은사중지설’을 강조하는 교단들과 신학자들은 고린도전서 12장 3절을 근거로 중생한 사람들은 이미 성령 침례를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오순절주의자들은 중생과 성령 침례를 구분하기 시작했으며 중생 이후에 중생과는 다른 성령 침례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은 중생을 첫 번째 축복으로 규정하고 성령 침례를 중생 이후에 받는 두 번째 축복(Second Blessing)이라고 이해했다. 1950년대를 지나면서 성령 침례에 대한 신학적 관심은 ‘성령 충만’(filled with the Holy Spirit) 또는 ‘성령에 의한 능력의 덧입힘’(empowered by the Holy Spirit)으로 바뀌어 갔다. 오순절주의자들의 용어는 더 이상 성령 침례에 머물러 있지 않았으며 오순절주의자들은 계속적인 성령의 재충만을 신앙의 목표로 삼게 되었다. 이들은 일상적인 삶과 신앙생활 가운데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며 ‘능력 전도’(empowering evangelism)와 ‘능력 있는 삶과 사역’(empowered life and ministry)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2) 성령 침례와 성령의 은사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 침례를 받은 증거는 성령의 은사로 나타난다고 이해했고, 특별히 방언을 성령 침례에 대한 외적인 증거로 받아들였다. 찰스 팔함(Charles F. Parham)은 방언을 성령 침례를 받은 ‘단 하나의 증거’라고 강조했다. 찰스 팔함의 신학적 영향으로 인해 고전적 오순절주의자(Classical Pentecostals)는 방언을 성령 침례를 받은 외적 증거로 받아들이고 이것을 그들의 신앙적 교리로 삼게 되었다. 하지만 고전적 오순절주의자들을 제외한 다른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 이외의 성령의 은사들 또한 성령 침례를 받은 외적인 증거로 받아들이고 있다. 성령의 은사와 성령 침례를 직접적으로 연관시키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성령 침례의 명료성 때문이다. 구원은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의심이 들 때도 있고, 구원에 대한 확신이 흔들릴 수 있지만 성령 침례는 성령의 은사를 통해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확실하게 나타나고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상윤 목사(국제신학교육연구원)
  • 2016.02.2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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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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