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훈 교수의 창조와 과학
배아 줄기세포 연구, 어떻게 보아야 할까?
  • 환자 위해 ‘또다른 생명’ 죽일 수 없다 유럽 미국 배아이용 연구 허용 안돼 국가경쟁력 위해 윤리 버릴 수 없어 지난주 우리사회 쟁점현안을 꼽으라면 단연 MBC PD수첩의 부적절한 취재로 피해를 입은 황우석 교수팀의 일일 듯 싶다.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며 여론과 언론은 앞다퉈 황우석 교수의 연구복귀를 촉구하고 있다. 심지어 한 신문은 난치환자 가족의 말을 빌어 1면에 “힘을 내세요, 당신이 희망입니다”라는 제목을 뽑기도 했다. 언론의 잘못으로부터 피해자를 구출해낸 것은 다행스러운 일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이 시점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연구의 적절성이다. 황 교수의 연구에 사용될 난자가 어떻게 공급되는가로 촉발된 윤리문제에 앞서 우리는, 적어도 크리스천이라면 보다 근본적인 윤리문제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편집자주 이은일 교수(고려대학교 의과대학, 한국창조과학회) 인간복제, 배아 복제실험, 줄기세포 등 어려운 말들이 일반사람들도 많이 사용할 정도로 유명해졌다. 가장 중요한 말이 줄기세포라는 말인데 ‘줄기세포’에는 ‘배아 줄기세포’와 ‘성체 줄기세포’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줄기세포라는 것은 다른 세포들을 계속 만들어 낼 수 있는 ‘세포 공장’같은 세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포가 많이 손상된 환자들에게 줄기세포를 주어서 새로운 세포들이 생기게 하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성체 줄기세포’라는 것은 우리 몸의 골수를 비롯하여 피부 등 각 조직에 있는데, 골수에 있는 줄기세포가 주사기로 뽑아내기 쉽기 때문에 많이 사용되고 있다. ‘성체 줄기세포’를 이용하여 심장세포, 뼈 등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는 연구가 많이 진행되었다. 동물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 마쳐지고 사람을 대상으로 한 연구도 많이 하고 있다. ‘성체 줄기세포’를 이용한 연구는 자기 몸에 있는 줄기세포를 추출하여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윤리적인 문제가 없고, 거부반응도 일어나지 않아 세계적으로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우리 과학자들도 세계 과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열심히 연구 성과를 내고 있는 중이다. ‘성체 줄기세포’를 이용하여 환자를 치료하는 연구와 달리 ‘배아 줄기세포’를 이용한 연구는 윤리적인 문제가 있다고 비난받고 있다. ‘배아’라는 것은 인간의 모습을 갖추기 전 단계의 인간 생명의 진행과정에서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나 수정란이 분열하여 배아가 되고, 계속 성장하여 태아가 되고, 아기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배아 줄기세포’ 실험을 위해서는 배아에 있는 줄기세포를 꺼내야하기 때문에 배아는 죽고 만다. 사람이 될 수 있는 배아를 죽이는 것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인간 역사상 인간 배아를 죽이면서 연구를 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인간이 될 수 있는 배아를 연구목적으로 죽이는 것을 허용한 것도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기독교인으로서 더 마음 아픈 것은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환자들을 위해서, 국가 경쟁력 향상을 위해서 배아를 죽이고 줄기세포를 추출하는 것을 적극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많은 유럽국가들과 미국 등이 이런 윤리적인 문제 때문에 배아 줄기세포 연구를 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만이 이런 연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선진 외국에서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떨어뜨릴 수 있는 ‘배아 줄기세포’와 윤리적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 ‘성체 줄기세포’는 어떤 것이 더 좋을까? 여러 면에서 성체 줄기세포가 좋다. 우선 성체 줄기세포는 사람 몸에서 주사기로 바로 뽑으면 되는데, 배아 줄기세포는 여성의 난자를 제공받아야 하거나 사람의 수정란을 이용해야하고, 또한 수정란이 발생과정에 들어가도록 해야 하고, 이중에서 일부만이 줄기세포를 추출할 수 있기 때문에 복잡하고 돈이 많이 드는 과정을 거쳐야한다. 둘째로 성체 줄기세포 연구는 이미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실험에 들어간 단계이어서 실용화가 빨리 될 가능성이 높고, 배아 줄기세포는 아직도 동물실험 단계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적용하여 실용화되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배아 줄기세포 연구를 계속 하는 것일까? 그것은 성체 줄기세포에 비해 배아 줄기세포는 다른 세포로 될 수 있는 능력이 훨씬 좋기 때문이다. 성체 줄기세포는 원래 자신이 갈 길이 정해져 있는 세포들이기 때문에 적용할 수 있는 분야가 제한되어 있지만, 배아 줄기세포는 모든 세포로 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적용할 수 있는 분야가 제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런 장점은 동시에 단점이기도 하다. 성체 줄기세포의 경우는 자신이 갈 길로 가기 때문에 암세포로 되는 경우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지만, 배아 줄기세포의 경우는 억지로 어떤 세포가 되도록 하다 보면, 암세포가 만들어지는 것이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배아 줄기세포 연구보다 성체 줄기세포 연구를 발전시키는 것이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없고, 값싸게 적용할 수 있고, 과학적으로도 빠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은 과학기술의 발전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생명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며, 특히 인간 생명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가 한 명 한 명의 인간이 너무나 귀하기 때문인데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배아 줄기세포 연구를 정당화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존엄성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 존엄성을 지키면서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좁은 문’을 우리가 선택하는 까닭이다.
  • 2005.12.08

    <김정훈교수의 창조와과학>창조주 하나님
  • 핑계치 못 할지니라! 과학에 의해 드러나는 창조주의 존재 오늘날 눈부신 과학의 발전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들먹이는 것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어딘지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비이성적인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다. 과연 과학의 눈으로 보았을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존재하시는 것일까? 사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물질의 세계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과학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그 존재 자체가 부정 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과학을 전혀 무시할 수도 없을 만큼 우리는 과학의 ‘권위’에 상당 부분 영향을 받으며 살고 있다. 따라서 비록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지라도 뭔가 마음속에 좀 더 구체적이고 소위 과학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증거 할 수는 없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아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사실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그래서 그 분이 우주를 지으신 것이 사실이라면, 과연 그분은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의 하나인 인간이 발명해낸 소위 ‘과학’이라는 도구에 의하여 자신의 존재가 부정되어지는 현실을 그저 침묵으로 보고만 계실까? 그 분의 존재는 과연 과학적 방법에 의하여 철저히 부정만 되고 마는 것일까? 현대인의 이런 고민을 미리 아셨는지는 몰라도 성경은 로마서 1장 20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이 말씀은 인간이 자연을 연구해 보면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없이는 도저히 이 우주가 존재할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므로 결국은 그 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게 될 것이란 뜻이 아닌가?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과연 로마서의 말씀대로 이제 많은 과학자들이 그 새로운 지식이 더해 감에 따라 점점 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우주가 지적으로 설계되었다는 결론을 뒷받침하는 다양하고 놀라운 연구결과들이 점점 더 많이 나오고 있다. 천문학자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그저 우주의 수많은 평범한 행성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어쩌면 이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일 수 있음을 점차 인식해가고 있다. 생물학자들은 세포에 대한 지식이 쌓여 갈수록 마치 기계처럼 움직이는 그 구성물질들의 정교함과 복잡함에 더욱 경탄하며 그것들이 그저 무작위한 우연 발생적으로 생겨났다는 진화론적 설명 방식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많은 물리화학자들에게는 마치 발견되어지길 기다리고 있는 듯 숨어 있는 여러 가지 자연의 법칙들과 수학적 상수들에 대하여 예사롭지 않은 경이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 때는 과학을 통해 마치 하나님의 존재가 부정되는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 이제는 오히려 그 동일한 과학에 의하여 하나님의 존재가 들어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과학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 함을 증거 할 뿐만 아니라, 마치 미세 조정된 다이얼이 가득 찬 것과 같은 모습의 이 우주를 움직이는 뛰어난 지성의 존재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상황은 역전 되었다. 과학을 깊이 다룰수록 오히려 과학은 신앙에 커다란 추진력을 제공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직접 과학의 연구 대상이 될 수는 없다 할지라도 그 분이 만드신 자연을 통해 우리는 그 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계 14:7)” **저자 약력: 연세대 의대 생리학교실, 한국창조과학회 이사
  • 2005.05.03

    <김정훈교수의 창조와과학>무너지는 진화의 증거들(3)
  • 생명의 기원을 논하는데 있어서 피해갈 수 없는 질문 한 가지는, “그러면 과연 최초의 생명체는 어떻게 탄생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일단 최초의 생명체가 출현해야 그 뒤로 다양한 생물의 진화가 가능할 터이니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생명 기원에 대하여 온전한 자연주의적 설명은 불가능하게 된다. 유물론적 진화론에 따르면 과거에 지구가 원시 상태일 때 우연히 생명구성물질이 만들어졌고 이것들이 교묘하게도 한자리에 모여 하나의 세포를 이루게 되면서 이것이 바로 생명체의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과학적 증거로서 1953년 미국의 밀러가 행한 실험을 예로 든다. 밀러는 실험실 내에서 메탄, 암모니아, 수증기, 그리고 수소를 첨가한 혼합물을 만들고 여기에 적절한 방법으로 전기방전을 통해 아미노산을 합성해내었다. 아미노산은 생명체에게 꼭 필요한 중요 물질인 단백질의 구성 성분이므로, 그의 실험은 마치 생명체가 적절한 조건만 갖추면 저절로도 생겨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세상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만 않아서, 밀러의 실험은 오히려 최초의 생명체 출현에 더 많은 질문을 던지게끔 한 결과를 낳게 되었다. 우선 그가 가정한 원시지구대기의 조성은 그 뒤 더 많은 증거들에 의해서 매우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는데, 무엇보다도 원시 대기에는 수소가 거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산소가 처음부터 풍부히 존재하였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이 같은 조건하에서는 아미노산들이 저절로 생겨나거나 또 이것들이 스스로 결합하여 단백질 같은 고분자 물질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하기란 매우 어렵게 된다. 더 나아가 밀러의 가정이 맞는다고 하더라도 그의 실험의 결과 얻게된 아미노산은 L과 D의 두 가지 형태인데 반하여 실제 세포 내에 존재하는 아미노산은 단지 L 형태뿐이어서 어떻게 세포가 선택적으로 L 형태의 아미노산을 취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하기 어렵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문제는 밀러가 무엇을 인공적으로 합성해 내었든 그것은 그가 고안한 실험장치 안에서 계획적으로 얻어진 것이므로 그것이 반드시 자연 상태에서도 똑같이 아무런 설계자의 도움 없이 나타나리란 보장은 없는 것이다. 세포는 과연 무생물로부터 저절로 생겨날 수 있을까? 세포를 구성하는 물질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다. 그 각각의 물질 하나 하나를 보더라도 이것들이 우연히 만들어질 확률은 지극히 낮다. 그러면 여기서 그 구성물질들을 누군가가 다 공짜로 제공한다고 가정하면 그러면 그 물질들로부터는 과연 세포를 하나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박테리아 하나를 시험관에 넣어놓고 세포막을 용해시키면 그 세포 내 내용물들이 모두 시험관 안에 쏟아져 나오게 될 것이고 이를 가지고 어떤 식으로든지 조건을 가해 다시 살아 있는 세포를 인공적 혹은 자연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과학자가 과연 있는가 하는 것이다. 결론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도저히 불가능한 그 많은 조건을 한 자리에 모아줘도 그것을 결합시켜 다시 살아 있는 세포를 만드는 것조차 불가능한 것이다. 아미노산을 포함한 생명 구성 물질에서부터 실제 살아 있는 세포까지는 또 다시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의 너무나도 멀고 먼 길이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인간의 지식이 늘어나면서 이제 세포 즉 생명의 기원은 바로 “기적”이란 단어를 들먹이지 않고는 설명을 할 수 없는 막다른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사 40:26)” 연세대 의대 생리학교실, 한국창조과학회 이사
  • 2005.04.05

    <김정훈교수의 창조와 과학>무너지는 진화의 증거들(2)
  • 헤켈의 배아발생도 문제있다 지난 호에 얘기한 계통수에 이어, 진화론의 증거로 많이 인용되는 또 하나의 유명한 그림은 헤켈의 배아발생도이다. 19세기 독일의 생물학자였던 헤켈은 물고기, 도롱뇽, 거북이, 병아리, 돼지, 송아지, 토끼와 사람의 배아들을 한 그림에 나란히 보여 주면서, 초기 배아들 사이의 놀라운 유사성은 모든 생물이 하나의 공통조상에서 나왔다는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그림을 얼핏 들여다보면 그것들은 정말로 닮아 보여 과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마치 공통조상으로부터 출발한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헤켈의 그림이 실제 배아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아는가? 이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들여다보기로 하자. 헤켈 그림의 첫 번째 문제는 그것이 사실과 달리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론을 너무나 확신한 나머지 헤켈은 각 동물의 배아를 따로 그릴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하고는 하나의 목판으로 다른 동물의 배아를 그냥 똑같이 찍어내기까지 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이미 오래전인 1860년대 후반에 그의 동료들에 의해 처음 폭로되었었고, 유명한 진화론자인 굴드조차도 헤켈의 배 발생도가 100년이 넘도록 아직도 교과서에 계속 실려 있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고 말하였다. 두 번째로 헤켈은 전체 척추동물 가운데 일부만을 선별하여 보여주는데 다른 동물의 배아 발생 모습은 판이하게 다르다. 뿐만 아니라 그가 선택한 양서류의 대표는 도롱뇽인데, 같은 양서류라도 개구리는 배아의 발생 모습이 전혀 다르다. 세 번째로 헤켈의 그림은 생물 발생의 초기 단계가 아니라 실제로는 발생의 중간단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좀 더 초기 단계로 거슬러 가보면 배아들은 서로 훨씬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데, 헤켈은 의도적으로 그 전 단계를 몽땅 생략해버렸다. 발생 초기 단계에서 생물들의 모습이 비슷한 것은 바로 생명체가 공통조상에서 나왔다는 증거라고 진화론이 주장했던 것을 기억한다면, 초기 단계가 매우 다른 실제 배아 발생의 모습은 이러한 진화론적 주장을 전혀 뒷받침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내친김에 배아 발생과 관련지어 우리가 흔히 들어온 아가미에 관한 진실을 알아보기로 하자. 백과사전에도 설명이 나와 있듯이, 포유류의 태아에는 물고기와 비슷한 아가미구멍이 생기는 단계가 있는데 그것은 과연 인류의 조상이 어류라는 확증이라도 되는 것일까? 그러나 흥미롭게도 물고기 자신도 이 시기의 배아 단계에서는 아직 아가미가 없다. 배아를 보면 몸을 구부리고 있고 그 결과 목 아래 부분에 피부가 접혀 이랑이 생기게 된다. 물고기의 경우는 그 이랑들이 나중에 아가미로 바뀌지만 사람의 경우는 이것들이 아가미완 전혀 상관없는 귀와 턱 부분으로 된다. 발생단계에서 나타나는 해부학적 특성상 목 부위에 주름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을 외견상 나타난 모습만 보고 아가미 비슷한 구조라고 부르는 것은 진화론적 시각에서 만들어낸 단순한 억지일 뿐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속아왔다. 각 생물의 발생 모습은 초기로 갈수록 차이가 많이 나다가 중간 쯤 진행되면 일부 생물들 간에 유사성을 보이는 것들이 더러 나타나고 결국 성체에 이르면 또 다시 전혀 다른 모습의 생물들로 자란다. 모든 생물이 공통 조상에서 왔다는 진화론이 맞다면 초기로 갈수록 생물은 닮아야 하지만 사실은 그와 반대다. 헤켈의 유명한 명제를 실제 관찰되는 사실에 맞춰 다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이 되지 않을까?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생물의 근원이 각기 다름을 보여 준다.” **김 정훈 교수 (연세대 의대 생리학교실, 한국창조과학회 이사)
  • 2005.03.09

    <김정훈교수의 창조와 과학>무너지는 진화의 증거들(1)
  • 그동안 우리는 학교 교육을 통하여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물이 단순한 아메바 같은 생물로부터 점차 오늘날의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발달해 왔다고 아무런 의심 없이 배워 왔다. 우리가 잘 아는 소위 진화론적 주장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소개하는 교과서에는 진화론의 증거로서 그럴싸한 그림과 설명들이 으레 실려 있게 마련이었다. 이를테면 생물진화의 족보와도 같은 나무 모양을 한 계통수라든지 여러 동물의 배아 발생의 그림이라든지 혹은 원시대기의 조성으로부터 생명체 구성물질의 하나인 아미노산을 실험실에서 만들었다는 내용의 설명이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그런데 이들 '증거'들이 과연 말 그대로 ‘진화론의 증거’가 되는 것일까?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몇 가지 대표적인 진화의 증거들에 대해서 무엇이 실제로 드러난 사실이며 그 의미는 무엇인지를 같이 살펴보기로 하자. 진화론을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그림은 아마도 다윈의 「종의 기원」에도 실려 있는 진화계통수(進化系統樹)일 것이다. 이 그림을 보면 생물은 모두 한 뿌리를 가지고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점점 나무가 가지를 뻗어 가듯 갈라져 나온 것으로 보인다. 다윈은 이 그림을 통해 모든 생물은 '사소하고, 연속적이고, 유리한 변이의 축적에 의하여 서서히' 자연선택이 일어나 오늘날 우리가 보는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설명 하였다. 그런데 과거 이 땅에 살았던 생물의 모습을 보여 주는 화석의 기록은 오히려 다윈의 진화 계통수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 준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소위 '캄브리아기 폭발'이라고 불리는 화석 기록이다. 약 5억 4천만 년 전쯤으로 추정되는 고생대 캄브리아기 지층에서 발견된 화석의 기록은 오늘날 살아있는 대부분의 주요 동물의 기본 몸의 형태를 모두 보여 주고 있다. 즉 그 이전에는 일부 해파리, 해면, 벌레들의 화석이 보여 지다가 갑자기 캄브리아기로 들어서자 절지동물(곤충, 게 등), 극피동물(불가사리와 성게 등), 척색동물(현대의 척추동물) 등이 나타났다. 이를 축구 경기장에 비유하면 마치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이쪽 편 골대 선을 미생물 화석이 발견된 가장 오래된 시점이라고 하고 반대편 골대를 현재의 시점으로 잡으면, 이쪽 편 골대에서 반대쪽을 향하여 점점 걸어가는 도중 동물의 화석은 전혀 나타나지 않다가 중앙선을 넘어 상대방 골문 근처에 다다를 때쯤 우리가 오늘날 보는 동물의 기본적인 몸의 형태가 갑자기 펑하고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근본적으로 체제가 전혀 다른 이런 동물들이 완전히 발달한 형태로 갑자기 나타났으니 이것은 생물이 지구상에 처음부터 그런 모습으로 존재했다는 의미이고, 따라서 모든 생물이 단순한 생물로부터 오랜 세월동안 점진적으로 발달해 왔다는 다윈의 생물계통수와는 정반대의 모습인 것이다. 결국 오늘날에도 그럴싸하게 교과서에 실려 있는 다윈의 계통수는 실제 드러난 화석기록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어떤 학자는 캄브리아기 이전의 생물들은 몸이 연해서 화석의 흔적을 남길 수 없었을 거라고 주장하지만 박테리아도 화석을 남길 뿐만 아니라 몸이 연한 생물의 화석도 이미 같이 나오고 있어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어떤 이는 생물체의 어떤 분자 배열을 비교하여 계통수를 그리려고 시도도 하지만 해부학적 정보와 불일치하거나 다른 종류의 분자를 비교하면 결과가 다르게 나오는 등 일관성을 찾기가 어렵다. 결론적으로 다윈의 진화계통수는 과학적 증거가 결여된 채로 아직까지도 상상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김정훈 교수(연세대 의대 생리학교실, 한국창조과학회 이사)
  • 2005.02.10

    토대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 < a> 토대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일부 학자 유신론적 진화론 등 주장 펴기도 창세기는 성경 전체의 토대 이룩하고 있어 우리 신앙의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고르라면 그것은 단연코 성경일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것을 근거로 교리도, 교회도, 신앙체험도 가능하다. 그런데 성경의 많은 책 중에 가장 기초가 되는 책을 고르라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창세기이다. 기독교의 핵심을 이루는 중요한 교리는 모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창세기에 그 이론의 기초를 두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 자체가 창세기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는 말인데, 그 기초가 약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불을 보듯 훤한 일이다. 예를 들어 보자.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인류의 구원이란 예수님의 부활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즉, 예수님의 부활은 죄 없으신 그 분이 죽음을 이기신 사건을 말하고, 우리 인간은 모두 죄인으로서 죽음 아래 갇혀 있어 오직 그 분을 믿음으로 영접 해야만 죽음에서 해방되어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만일 창세기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면, 거기에 기록된 인간의 죄의 기원 또한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것이 되고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더 이상 인류의 죄를 구원할 아무런 이유도 없게 되고 만다. 창세기에는 사람이 죄를 범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완전한 자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오늘날 일부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진화론과는 전혀 거리가 먼 내용이다. 그런데 이러한 진화론적 사고에 영향을 받은 일부 학자들이 창세기 앞부분을 성경에 기록된 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임의로 재해석하여 하나님이 진화론적인 방법으로 수 억년에 걸쳐 조금씩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물을 만드셨다는 이론을 주장하는바 소위 유신론적 진화론 내지는 점진적 창조론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이러한 주장의 과학적 설득력은 논외로 하더라도,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당장 창세기 기록(특히 1∼11장)의 역사성을 무너뜨려 더 이상 기독교 교리의 기초를 제공하기 어렵게 한다. 이는 결국 기독교 자체를 위협하게 하는 자살 행위와도 다를 바가 없다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실 성경은 이를 구성하는 모든 책들이 상호 유기성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제로 하여 서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성경의 가장 첫 머리인 창세기 1장 1절을 사실로 믿지 않고 그 나머지 성경의 66권을 믿기가 어렵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으면서, 또 그의 부활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6일 창조는 믿기 어렵다는 것은 확실히 성경적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결혼의 제도를 말씀하시면서 에덴동산에서의 사건을 구체적으로 인용하셨고(마 19:4∼6), 사도 바울은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오고 그 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이르렀다고 선언하고 있다(롬 5:12). 그런가 하면 예수님께서는 말세의 시기를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인자의 때가 노아의 때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창세기 노아의 홍수를 역사적 사실로써 인용하셨다(눅 17:20∼30). 이 같은 사실들로 볼 때 창세기, 특히 창세기 1장에서 11장은 성경 전체의 토대를 이루는 역사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기록임을 알 수 있다. 시편 기자는 일찍이,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 수 있겠냐고 한탄했다(시 11:3). 창세기는 전체 성경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토대의 역할을 한다. 토대가 무너지지 않도록 기초 공사를 잘 해야겠다. 말씀의 벽돌을 창세기 1장 1절부터 믿음으로 굳건히 쌓아야 하겠다.
  • 2005.01.08

    노아의 방주에 대한 진실
  • < a> 방주 크기 철도 화물차량 522칸 추정 땅에 사는 생물 3만여 두 수용 과학적 정보 토대로 계산가능 성경… 상식 넘어 ‘진실’ 증거 회의론자들이 조롱하기 즐겨하는 성경의 기록 중 하나는 아마도 창세기에 나와 있는 노아의 방주일 것이다. 성경 기록대로라면, 오늘날 우리가 보는 모든 지상의 동물들은 과거 노아의 홍수 때, 방주 안에서 생명을 보전하였던 동물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말이 되는데, 과연 노아의 방주 속에는 그 많은 동물들을 한 쌍씩 실을만한 충분한 공간이 있었을까? 성경은 방주의 제도를, 길이가 300, 폭이 50, 그리고 높이가 30 규빗이었다고 기록(창 6:15)하고 있는데, 한 규빗을 대략 45cm으로 보면, 길이가 약 140m, 폭이 23m, 그리고 높이가 14m가 되어, 방주의 크기는 대략 철도 화물차량 522칸에 해당하는 부피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화물차량 한 칸에는 약 240마리의 양을 실을 수 있다고 하니, 전체 방주 안에는 자그마치 12만5280마리의 양이 들어갈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이제 실제로 방주에 들어갈 동물의 수를 헤아려 보기로 하자.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홍수로 인하여 땅에서 생명의 기식이 있는 육체가 다 멸절할 것이다(창 6:17) 하셨으므로, 수중 생물을 제외하고 땅에 사는 생물만 헤아리면 될 것이다. 이들은 주로 오늘날 우리가 소위 포유류, 조류, 그리고 파충류와 양서류라고 부르는 것들로서, 이들 모두를 합한 종의 수는 대략 1만7600종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이들을 한 쌍씩 실으려면 3만5200마리의 동물이 필요하게 되는데, 이들의 몸의 크기는 각기 다르지만, 한 계산에 의하면 이들을 크기순으로 배열하였을 때 중간에 위치하는 동물은 대략 조그마한 쥐의 크기에 해당되며, 양보다 더 큰 동물은 대략 11%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여유 있게 잡아 이들의 평균 크기를 양으로 생각한다면, 방주에 실어야할 동물의 수는 결국 양 3만5200마리에 해당하게 되고, 앞서 말한 바대로 방주에는 12만5280마리의 양을 실을 수 있으므로 이들 동물을 각종의 수대로 한 쌍씩 싣고도 그 두 배 이상의 공간이 방주에는 남게 된다는 계산이다. 아마도 방주의 남는 공간에는 노아의 식구와 동물들이 먹을 식량과 그들의 배설물, 그리고 통풍을 위한 여유 공간으로 쓰였을 것이다. 생각하는 자는 믿을 수밖에 없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막연한 추측을 떠나 실제로 계산을 해봄으로서 우리는 성경의 정확함을 발견하게 된다. 위에서 양보다 큰 지상의 동물은 전체의 11%정도라고 했는데, 그러면 그 중에서도 공룡과 같이 몸집이 큰 동물은 과연 어떻게 방주에 실었을까? 동물을 방주에 싣는 목적은 그 종류를 보전하기 위함이므로, 방주에 실리는 동물은 사람으로 치면 아마도 청소년기에 해당하는 나이(young adult)이어야 가장 생식적으로도 적합하지 않았을까? 공룡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몸집도 비례하여 커감으로, 이 나이의 공룡은 방주에 못 들어갈 만큼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편,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홍수는 자그마치 1년여 나 지속되었다고 하는데(창 7:11, 8:13), 방주 안에서 이들 동물들과 함께 타고 있던 노아의 가족 8명이 그 많은 동물들을 1년 동안이나 돌보는데 이들 8명의 사람만으로 과연 이 일이 가능하였을까? 연구된 바에 의하면, 오늘날 기계화된 최신 설비를 갖춘 공장식의 가축 사육장은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혀 기계화되지 않은 시골에서의 가축 사육의 경우에도 단지 한사람만의 힘으로 수백 마리의 토끼, 돼지와 송아지 등을, 혹은 수천 마리의 비둘기나 암탉 등을 돌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경우는 비교적 자유스러운 시골 환경에서 동물의 교배 등을 통해 보내는 시간을 포함하여 나온 계산이지만, 제한된 공간을 갖는 방주 안에서는 이 같은 일로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어 한 사람당 더 많은 동물을 돌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다가 만약에 각 동물들이 필요로 하는 식량을 각기 그들의 우리 곁에다가 비치하는 방법으로 동물들을 방주에 배치하였다면, 동물들에게 식량을 운반하느라 보내는 시간과 노동을 충분히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었을 것인데, 방주의 제도를 알려 주셨던 하나님께서 이와 비슷한 방식의 가장 효율적인 동물 관리 방법을 또한 노아에게 알려 주시지 않았겠는가? 뿐만 아니라,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대부분의 동물은 온도나 계절과 같은 주위 환경의 변화에 따라 혹은 제한된 공간에 처하게 되었을 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동면이나 또는 이와 비슷한 수준의 활동 둔화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방주의 동물들이 평균 이틀에 한번 정도 이 같은 활동 둔화기를 가졌다면, 노아의 8식구가 돌봐야 될 동물의 수는 절반으로 줄어들게 될 것이며, 그에 따른 식량의 소비도 반으로 줄어들게 될 것이다. 만약에 동물들이 4일 중의 3일을 활동 둔화기로 보낸다면, 그 수는 더욱 줄어 한 사람당 약 1100 마리 정도의 동물만 돌보면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창 8:1)”라는 말이 나오는데, 우리는 그것이 동면과 비슷한 동물의 활동 둔화 상태이었는지 혹은 어떤 다른 초자연적 돌보심이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형태로든 이들을 잊지 않고 특별히 돌보셨다는 사실이다. 결국 성경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 넘어 진실을 증거 한다. 노아방주의 크기와 그 안에 탔을 동물의 수도 언뜻 보기에는 믿겨지지 않아도, 알려진 과학적 정보를 토대로 철저한 계산을 하여보면 오히려 그 역사적 사실성을 더욱 뒷받침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물어 보신다. 너희 가슴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며, 너희 마음속의 총명은 또 누가 준 것이냐?(욥 38:36) 오직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시나니(잠 2:6), 그 이름을 높이 찬양 할지어다!
  • 2004.12.11

    노아의 홍수와 교회, 그리고 이 세대
  • < a> “노아의 홍수, 신화나 전설 아니다” 염호, 퇴적암, 화석무덤, 석탄층서 증거 성경의 기술 내용 과학적 뒷받침 가능해 구약 창세기에 나타난 노아의 홍수 기록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이 땅에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신화나 전설로 취급 받아 왔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이 말하는 것과 같은 규모의 전 세계를 덮은 노아의 홍수 사건을 실제 역사적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장 큰 두 가지 이유는 첫째, 어떻게 그렇게 전 지구를 덮을 만큼 많은 비가 올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심과 둘째, 그 물들이 지금은 다 어디로 가고 없는가 하는 질문 때문인 것 같다. 그럼 홍수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기 위해서, 먼저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하자. 창세기 1장에 보면 흥미롭게도 하나님께서 둘째 날에 하늘을 지으실 때,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어 놓으신 것을 발견 할 수 있다(창 1:6∼7). 이 말은 우리가 오늘 날 보는 하늘과는 달리, 창조 당시에는 하늘에 전 지구를 덮는 물 층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 물 층으로 인하여 지구의 기후는 전 지역에 걸쳐 따뜻한 아열대성 기후를 갖게 되었을 것이고, 동시에 우주에서 떨어지는 해로운 고주파선으로부터 지구의 생명을 보호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그야말로 지상의 생물에게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지금은 얼음으로 덮여 있는 시베리아나 극지방에서 아열대 기후에서 자라는 활엽수 숲의 화석이 발견되는 것과, 공룡과 같이 거대한 몸집을 한 파충류가 과거 이 땅에 번성하였던 사실, 그리고 창세기에 기록된 홍수 이전 족장들의 수명이 900세 이상 장수하였던 사실들은 모두 지구를 둘러싼 물 층의 존재 하에서 과학적인 설명이 가능한 내용들이다. 이어서 창세기 7장 11절은 그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하늘의 창들이 열렸다는 말은 바로 지구를 둘러싸고 있던 물이 땅으로 쏟아졌다는 이야기로 해석되어지며, 동시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졌다는 말은 전 지구적으로 펼쳐져 있는 해저 화산이 폭발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 같은 폭발은 거대한 해일을 일으켜 바닷물이 육지를 침범할 수 있도록 하여, 위에서 내리는 비와 함께 전 지구를 물에 잠기게 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라고 창조과학자들은 믿고 있다. 오늘날 호수이면서도 바닷물과 같은 염분을 함유한 소위 염호가 지구 곳곳에서 발견되는 것이나, 전 지구를 덮고 있는 거대한 퇴적암 층의 존재,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되는 대규모 화석무덤과 석탄층의 존재 등은 과거 이 지구가 한 때 물속에 잠겼었다는 과학적 증거들이다. 뿐만 아니라, 그랜드캐년의 장엄한 협곡 같은 지층의 구조도 과거에는 그것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조금씩 깎이어 형성되었다고 진화론자들은 생각하였지만, 최근에는 새로운 과학적 증거들에 의하여, 오히려 홍수와 같은 격변에 의해서 단시일 내에 형성되었다고 믿는 지질학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노아의 홍수 때 이 지구를 가득 채웠던 그 많던 물은 지금 어디로 가고 없는 것일까? 창세기 8장 1절에 보면, 홍수 후에 하나님께서 바람을 불게 하시어 물을 감하였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물의 증발을 의미한다. 오늘날 극지방에 존재하는 빙하가 다 녹으면, 해수면의 상승을 가져와 일부 도시는 물에 잠기게 될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염려하고 있는데 이는 홍수 때 물의 상당 부분이 오늘날 빙하로 갇히게 되었음을 말해 준다. 한편, 시편(104:6∼9)에는 온 땅을 덮었던 바닷물이 주의 정하신 처소로 빠져 나갈 때에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가는 대규모 조산 운동이 일어났음을 암시하는 구절이 나오고 있어, 홍수 후 해수면이 낮아짐으로 물들이 땅에서 물러갔음을 또한 보여주고 있다. 과거 대규모의 조산운동에 의하여 형성된 것으로 믿어지는 히말라야 산맥과 같은 장소에서 오늘날 바다 속에 존재하는 조개나 물고기의 화석이 발견되는 것을 통해 그 같은 사실을 잘 뒷받침 해주고 있다. 결국, 과학적 자료는 과거에 전 지구를 덮은 대규모의 홍수가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과학을 떠나 성경에서는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 성경은 단호하게 노아의 홍수는 전 지구를 덮은 홍수임을 여러 곳에서 밝히고 있다. 만일 노아의 홍수 사건이 단지 그 지역에만 국한되어 나타난 지역 홍수였다면, 사람들은 얼마든지 옆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함으로써 심판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므로, 성경이 알리고자 하는 당시 사람들의 타락한 모습과 이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사실 우스꽝스러워 지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해야 하는 오늘날의 교회가 만약 이 부분에서 분명한 성경적 입장에 서서 바른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자유주의 신학적 해석으로 노아의 홍수 사건을 가르친다면, 이는 스스로 성경을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압도하는 과학적 증거와도 모순을 갖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잘못된 진화론적 과학에 발맞추려다 오히려 올바른 과학적 자료에 창피를 당하는 우스꽝스러운 꼴을 당하게 될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인자의 때가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마 24:37∼39; 눅 17:26∼27) 노아의 홍수 사건이 갖는 예언적 중요성에 대하여 강조하셨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세대는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주의 재림의 약속을 기롱하며, 노아의 홍수 또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벧후 3:3∼7). 이럴 때 교회는 이 세대를 향하여 분명한 메시지를 선포해야 할 책임이 있다. 노아의 홍수에 대한 올바른 메시지는 바로 이 세대에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우리로 하여금 다시 오실 인자의 때를 기다리게 하는 것이다(롬 12:2). 우리 모두 깨어 기도해야 할 때이다.
  • 2004.11.13

  • 순복음가족신문

    PDF

    지면보기

  • 행복으로의 초대

    PDF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