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문 목사의 성경에 나타난 인간상
[성경에 나타난 인간상 63-바울②] 예수 그리스도의 최대 해석자
  • 어느날 사울이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협박과 살기를 띠고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환히 비추었다. 그가 땅에 엎드리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당신은 누구십니까?”하고 물었다. 그 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하는 음성이 들렸다. 그는 눈을 보지 못하게 되고 주님의 지시를 받은 제자 아나니아의 치유로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세례를 받은 것이다(행 9:1∼19). 바울은 이 체험 뒤에 “나는 주 예수를 보았다”(고전 9:1)고 말하였는데, 이 ‘본다’는 그리스말 “호라오는 수동태이며, 그리스도가 네게도 나타나셨다”는 뜻이다. 이것은 ‘계시’라고 해도 좋으며,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영적인 체험을 말하는 것이다. 사울의 동행자도 그 음성을 들었으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행 9:7). 사울은 생전에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다. 만일 만난 일이 있었다면 바울은 이것을 역설했을 것이나, 그런 기사가 없다. 설사 예수를 알고 있었다고 해도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전에는 우리가 세속적인 표준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였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고후 5:16)라고 그는 말한다. 그에게 있어서 ‘역사적 예수를 아는 것’보다 ‘부활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중요하였다. 그리고 그의 회심의 체험을 통해서 기독교도를 박해하는 것이 주 예수를 박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 바울의 이같은 회심은 바울 한 개인뿐만 아니라, 기독교 사상 가장 중대한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다. 그는 자기 내면생활에 일어나는 변화와 그 의미에 대해, 또 앞으로 취할 방침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조용히 기도할 필요를 통감했다. 그래서 그는 “아라비아로 갔고”(갈 1:17), 잠시 조용히 때를 보냈다. 바울의 회심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그의 생활태도를 일백팔십도로 바꾸어 놓았다. 가치관과 인생관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동시에 사도로서의 부르심이었다. 이제 일상이 곧 전도생활이 되었다. “나에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장해물로 여겼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장해물로 생각됩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빌 3:7∼8)라고 전했다. 바울이 그동안 귀중히 여겼던 것은 자기의 출신,신분,혈통이었으며 율법에 의한 흠없는 교양과 열심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았기’ 때문에, 그러한 모든 것을 장애물로 여기고, 그것들을 쓰레기와 같이 버린 것이다. 그 대신 그가 얻은 것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난과 박해와 모욕이었지만,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고후12:10)라고 고백하는 사도로 변화된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을 비롯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밤빌리아의 버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에베소 등을 돌아다니면서 전도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로마까지 3차의 전도여행을 통해 기독교의 구원 교리의 근본을 가르치고, 전파하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최대 해석자이며, 신학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또 윤리나 교회의 실제적 문제 등에 대해서 큰 가르침을 주었다. 사도 바울 그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도요, 그 누구보다 확실한 예수의 흔적을 가진 신앙의 용장이었다. 김경문 목사(순복음영성훈련원장) 그동안 연재물 ‘성경에 나타난 인간상’을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7월 3일자 신문부터는 김유민 목사의 <순복음 치유신학>이 연재됩니다.
  • 2005.06.25

    [성경에 나타난 인간상 62-바울①]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앙의 용장
  • 바울(작은 자)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적 진리를 기록한 분이다. 신약성경 27권 중 ‘로마서’를 비롯해 ‘빌레몬서’까지 13권을 쓴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가 초기에 그저 예루살렘 중심으로 팔레스틴 지방에서만 전해지면서 ‘유대교의 나사렛파’에 불과한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그것이 로마로 전파되어 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명실공히 세계의 교회가 되었는데 그것은 사도 바울의 활동과 지도가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기독교 역사에 큰 획을 그은 바울은 본래 유대교인이었으며 기독교에 대해 격렬하게 박해를 한 사람이었다.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 돌로 쳐 죽임을 당할 때 “사울은 스데반을 죽이는데 찬성하였다”(행 8:1). 이 사울이란 바울의 히브리 이름이며, 바울은 로마식 이름이다. 성경에 바울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이때였다. 사울은 소아시아, 길리기아 지방의 수도 다소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디아스포라의 유대인이다. 그는 유대인이면서 나면서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가문이 로마 정부에 대하여 상당한 공훈을 세웠든가 아니면 돈을 많이 들여 샀을 가능성이 있다. 이같은 점들을 종합해 보면 바울의 가정은 지위나 재산이 있는 상류의 가문에 속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바울에 대해 ‘귀족적인 느낌’을 받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어떠한 난국에 처했을지라도 그는 “나는 로마인이다”라는 긍지와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사실 그는 그 시민권 때문에 몇 번이나 로마 정부의 보호를 받아 박해로부터 벗어나 바라던 대로 로마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그가 질서를 중시하고 권세를 잡은 자에게 복종할 것을 역설한 것도 그의 시민적 의식에 기초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자기에 대하여 “나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났으며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히브리 사람 중의 히브리 사람입니다. 나는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새파 사람이며,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면 나는 조금도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빌 3:5,6)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의 삶과 사상에는 유대 민족의 피와 전통 그리고 신앙이 뿌리깊게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다소는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헬레니즘 문화(기원 전 4세기로부터 기원전 1세기경까지의 약 300년간의 그리스 로마 문화)의 한 중심지였다. 거기에는 대학도 있었고, 동서 문화가 모인 문화적 도시였다. 거기서 자란 사울이 그리스어를 말하며, 헬레니즘 문화를 흡수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의 교양 중심은 아무래도 유대교였다. 그는 엄격한 유대교 가정에서 성장하여 젊은 시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당시 유명한 가말리엘 아래서 율법을 배웠다(행 22:3). 예루살렘의 교육은 그를 열렬한 바리새파 유대교도로 만들었다. 아울러 절대적인 유일신의 신앙, 엄숙한 윤리, 뜨거운 애국심 그리고 율법에 대한 충성이었다. 따라서 사울은 가문, 교육, 학식, 열심 때문에 유대인으로서 최고의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가 가말리엘 문하생으로서 몇 년을 예루살렘에서 지냈는지, 또 수학을 끝마치고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모두 분명치 않다. 아마도 예루살렘에서의 수학 후 고향 다소에 돌아가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사울은 기독교가 “성소와 율법을 거스려 말하는”(행 6:13) 언동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며 무엇보다도 십자가의 사형수를 메시아로 믿는다는 것은 율법에 비추어서 용인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를 박해하는 일에 젊은 열정을 쏟았던 것이다. 그런 사울이 나중에 사도 바울이 되어 온갖 고난과 박해를 견디며 복음선교에 생애를 바치게 되었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김경문 목사(순복음영성훈련원장
  • 2005.06.14

    [성경에 나타난 인간상 61-구레네 시몬] 평생 ‘증인의 삶’ 살다
  • 우연히 진 십자가 계기로 평생 ‘증인의 삶’ 살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을 향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로마 병사들에 의해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인물이다(마 27:32). 구레네라는 곳은 북아프리카의 옛 그리스 식민지였으며, 많은 유대인이 사는 곳이었다. 그들은 이른바 ‘디아스포라’라고 불리는 유대인들이다. 그곳에는 유대인의 회당(시나고그)도 있고, 유대인의 축제일에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도 많았다(행 6:9). 시몬은 이 식민지 태생의 유대인으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순례단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 16:24)고 가르쳤다. 구레네 시몬은 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른 첫번째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결단하고 진 것은 아니었다. 시몬은 예수님에 관해서 얼마간에 알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갈릴리에서 권위있는 가르침과 병자를 고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메시아라고 추앙받은 예수, 그들 중심으로 집단이 형성되고 군중이 운집한 예수의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정치적 종교적 지배자들에게 위험한 인물로서 체포되어 로마 총독에 의하여 십자가를 지게 된 얘기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시몬이 본 예수는 힘겹게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채찍으로 맞으며, 로마 군대에게 재촉을 받으며 골고다 언덕으로 험한 길을 기듯이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시몬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다른 구경꾼과 마찬가지로 가련한 사형수를 보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가 서 있는 앞에서 예수는 지쳐 쓰러진 것이다. 로마 병사는 하는 수 없이 그 옆에 서 있는 건장해 보이는 청년 시몬을 가리키며, “너, 이리와서 이 십자가를 지고 가라”하고 어깨를 잡아 끌었다. 군중 가운데는 재수없게 걸려든 청년의 신세를 재미있다는 듯이 조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당황과 수치를 느끼며 마지못해 십자가를 졌을 것이다. 십자가 밑에 기진맥진하여 쓰러져 있던 예수님의 눈길이 이 청년의 눈길과 마주쳤다. 한쪽은 감사의 눈길이고 한쪽은 연민의 눈길이었을 것이다. 어느 신학자는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골고다로 운반한 것은 사실 예수님의 수고를 덜어 드린 일이라고 해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이 사람에게 도움을 받으시는 일은 없으며, 예수님의 속죄 성업의 수고는 오직 그가 홀로 하실 수 있는 것이고, 다른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므로 이 일에 동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공감은 가나 한편으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나,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갈 때도 오직 신성이 아닌 인성으로 감당하셨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고통이 아프고, 또 인류의 죄를 감당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처절한가를 몸소 감당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전설에 의하면 시몬은 70인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뒤에 그는 자진해서 순교했다고 전한다. 그후 그의 출신지 구레네의 많은 유대인들이 기독교도가 되었다고 하며, 그것은 이 시몬의 영향이었다고 한다. 마가복음은 시몬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막 15:21)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은 로마에서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시몬의 자녀들 이름이 마가복음에 기록된 것은 그들이 이미 로마에서 유력한 기독교인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그 이름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루포와 그의 어머니’ (즉 시몬의 아내)에 안부를 전하며, “그의 어머니가 나의 어머니이기도 하다”(롬 16:13)고 쓰고 있다. 이 편지가 기록된 것은 시몬이 이미 세상을 떠난 뒤인 것 같다. 그 가족은 신앙의 집안으로서 바울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었다. 시몬, 그는 골고다언덕에서 인류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목도하고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남은 생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일관된 삶을 살면서 신앙을 전수시킨 것이다. 김경문 목사(순복음영성훈련원장)
  • 2005.06.08

    [성경에 나타난 인간상 60-헤롯가(家) 사람들] 하나님을 떠난 슬픈 인간 군상(群像)들
  • ‘헤롯’이란 ‘영웅의 아들’이라는 의미이다. 성경에 보면 ‘헤롯’이란 이름을 가진 인물이 여럿 나온다. 우선 첫번째 인물은 ‘헤롯 대왕’이다. 그는 에돔인으로서 유대 왕이 된 자이다. 그의 아버지 안티파텔이 로마 황제에 의해 유대 감사가 된 후부터 유대에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그는 정치인으로는 유능했으나 못된 성품 중의 하나인 ‘의심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일단 누구를 반역자로 의심하면 즉각 제거되었다. 그의 처와 장모, 자기의 장남과 두 손자을 의심하여 죽였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헤롯의 아들이 되기보다는 헤롯의 돼지가 되는 것이 더 안전하리라”고 말할 정도로, 왕권이 위협받는다고 생각되면 혈육이라도 여지없이 제거한 잔혹한 왕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태어나실 당시 ‘유대인의 왕이 탄생했다’는 소문을 듣고, 아기 예수를 죽이려 했던 인물이다. 두번째 인물은 ‘헤롯 안디바’이다. 헤롯 대왕의 아들로서 분봉왕으로 불렸다. 갈릴리와 베뢰아의 왕이었다. 그는 세례 요한을 투옥하고, 처형시켰다. 그것은 세례 요한이 이복 형제인 헤롯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 본처와 이혼한 사실로 인해 안디바를 책망했기 때문이다(막 6:17∼18). 그는 예수님께서 많은 이적을 베풀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막 6:16)고 말하기도 했다. 안디바는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했으나 예수님은 안디바의 영토에서 물러나 다른 곳으로 가셨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할 때였다. 안디바의 영토에 머물러 있는 동안 바리새인들이 찾아와 안디바가 죽이려 하니 떠나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이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 여우에게 가서 말하라”고 하며, 귀신을 쫓아내고 치유하는 사역이 잠시동안 더 계속될 것이며, 그 사역을 마친 후에는 대속의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것을 알려주었다(눅 13:31∼33). A.D. 33년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체포당하셨다. 이때 잠시 헤롯 안디바는 예수님을 만났다. 그는 매우 기뻐했다. 오래 전부터 예수를 보고자 하였고, 또 예수가 일으키는 일에서 어떤 표적을 보고 싶어하였다. 안디바는 예수님께 여러 가지를 물어 보았으나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눅 23:6∼12). 원래 예수님에 대한 재판권은 총독 빌라도에게 있었다. 그러나 빌라도는 자신이 보기에 예수는 무죄였으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그 골치아픈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 빌라도와 헤롯 안디바와는 관계가 좋지 못했었다. 그 이유는 빌라도가 안디바 백성 일부를 살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빌라도는 안디바와 화친을 맺고 싶었고, 반대로 안디바는 빌라도가 자신에 대해 황제에게 나쁘게 보고할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를 조롱한 후에 아무 말없이 빌라도에게 다시 보냈다. 이 일로 인해 두 사람은 화해의 길을 열기 시작했다(눅 23:12). 세번째 인물은 ‘헤롯 아그립바 1세’이다. 그는 초대교회를 핍박한 자로서 사도 야고보를 참살한 자이다. 베드로도 잡아죽이려고 했으나, 성령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풀려났다(행 12:1∼33). 네번째 인물은 ‘헤롯 아그립바 2세’이다. 아그립바 1세의 아들로서 로마의 4대 황제 글라우디오로부터 왕의 직함을 받은 자이다. 그는 유대 대제사장의 임명권한을 행사했으며, 사도 바울과 대면한 적이 있다(행 25:13∼26:32). 그는 A.D.100년경에 자식없이 죽었다. 헤롯 왕가 사람들은 야망과 욕심을 채우기 위해 온갖 범죄를 저질렀다. 그들의 영욕에 넘친 삶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슬픈 종말을 웅변적으로 증거한다. 그리고 진정한 왕은 예수 그리스도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김경문 목사(순복음영성훈련원장)
  • 2005.05.31

    [성경에 나타난 인간상 59-가룟 유다] ‘배신자’의 대명사
  • ‘가룟 유다’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배신자’다.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유다’하면 ‘배신자의 대명사’로 인식한다. 그는 스승인 예수님을 은전 30량에 팔아넘긴 파렴치한이다. 유다가 어떻게 예수의 제자가 되었는지에 관해서 복음서에는 설명이 없다. 아마 그는 스스로 찾아와서 예수님을 따르고 그 유능함과 전문성 때문에 여러 제자들 가운데 점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됐을 것이다. ‘가룟’이라는 히브리말은 ‘게리옷 사람’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을 판 유다를 가룟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성경에 나오는 다른 유다 이름과 구별하기 위함이다. 예수의 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말고, 또다른 유다(눅 6:16)가 있고 신약에는 ‘유다의 서신’도 있다. 야곱의 아들 ‘유다’를 비롯해 신구약을 합해서 16명이나 있다. 가룟 유다의 아버지도 ‘가룟의 시몬’이라고 불리었다(요 6:71). 가룟, 즉 게리옷이 어느 곳 지명인지 분명치는 않으나 이 사실로 그는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갈릴리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머지 11제자는 모두 갈릴리 사람이다. 갈릴리 사람들은 독특한 풍토정신를 가지고 있으며, 바닷가에서 살아 격정적인 사람이 많았다. 갈릴리는 반로마 운동이 격렬한 곳이며, 유다도 그런 점 때문에 제자가 됐을 것이다. 반면 그곳 사람들은 향토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유다는 고립감을 느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한편 유다는 아버지와 함께 피혁 상인이었다고 구전에 내려온다. 그래서 그의 가죽 저고리는 돈주머니 역할을 했다. “유다가 돈 자루를 맡아 보고 있었으므로”(요 13:29)라는 기사와 일치하며, 그가 예수 공동체의 회계를 보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회계 일을 보려면 머리도 좋고, 재간도 있어야 하는데 유다는 그러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을 때, 그는 “왜 그 향유를 300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느냐”(요 12:5)고 비난한 것도 그의 성격과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유다는 민족주의자이며, 혁명당원의 일원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고(막 14:45) 따른 것은 예수야말로 로마제국의 정치적 지배를 추방하고 이스라엘에 영광을 가져올 왕이 될 인물이라고 기대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기대는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들 사이에 누가 가장 높은가”(눅 22:24)하고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막 10:43∼45)라고 하셨다. 그리고 최후 만찬자리에서 예수님은 빵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눠주고, 이 빵이 찢기고, 포도주가 부어지는 것처럼 자신의 몸이 십자가에서 찢기고, 피흘릴 것을 암시하였다(눅 22:14∼23). 이러한 예수님의 언행을 보고, 유다는 다른 제자들보다 먼저 ‘자기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알아차린 것 같다. 그만큼 유다의 머리는 빨랐다. 그때까지 예수님을 아끼고 일해온 유다의 마음은 미움과 실망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유다는 예수에게 절망을 느꼈다. 그런 예수를 따라다닌 자기자신의 허망함을 느꼈다. 실망과 잘못된 생각이 광기로 돌변한 것이다. 결국 그는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나중에는 괴로워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유다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자살한 것이다. 거기에 그의 비극이 있다. 십자가의 구원은 죄를 안 지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와 같은 죄인을 구원키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김경문 목사(순복음영성훈련원장)
  • 2005.05.17

    [성경에 나타난 인간상 58-베드로] 실패를 극복하고 위대한 ‘진리의 깃발’ 되다
  • 본명은 ‘시몬’이고, 갈릴리 호숫가 베다니 사람이다. 그는 동생 안드레와 함께 고기잡는데 상당한 경력이 있는 어부였다. 어느날 그가 밤을 새면서까지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못했다. 그 다음날 허탕을 친 마음을 달래며 그물을 씻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예수님이 다가오셨다. 많은 군중이 말씀을 듣기 위해 호숫가로 몰려들었는데 차분히 앉아 말씀을 가르칠 만한 공간을 확보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이때 예수께서 베드로의 배를 빌려달라고 하신 것이다. 그는 기꺼이 자기 배를 내어드렸고, 배에 앉으신 예수님은 심오한 말씀을 군중들에게 전해주셨다. 말씀을 마친 후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보상하기 위해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도록 하셨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물에 고기가 가득 잡혔고 베드로는 친구의 배에까지 가득 채울 수 있었다. 베드로는 너무 놀라 “저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말했다. 이때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다. 이 부름에 그는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그는 당시 이미 결혼한 몸이었기 때문에 가버나움에 있는 그의 집을 선교활동 기점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여진다(막 1:29∼34). 예수님께서 12제자를 선택하실 때 그는 으뜸이 되어 활약했다(막 3:16).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붙인 것은 예수님이셨고(마 16:17∼18), ‘베드로’란 그리스어로 ‘반석’이라는 뜻이고, 아랍어로는 ‘게바’이다(요 1:42). 베드로는 언제나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제자들 가운데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그에게 결정적 실수가 있었다. 예수께서 대제사장에게 끌려 갔을 때 두려움에 떨어 예수님을 면전에 두고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것이다. 사실 그는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가도 좋고 죽어도 좋습니다”(눅 22:33)라고 장담한 사람이었다. 그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한 것이다. 그는 인간의 약점을 가지고 있었고, 예수님을 ‘세상 임금’이 되실 분으로 오해했으며 잘못을 저질렀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후 약속대로 오순절날 성령을 보내주셨을 때 베드로는 제자들과 함께 성령충만하게 되었다. 그후 그는 초대교회의 중심적 지도자로서 복음전파의 소명을 받고 나선다(행1:15, 2:14). 이 성령운동은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사마리아를 비롯해서 이방에까지 전해졌다(행 8∼9장). 마지막에는 로마 네로의 박해 때에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순교한다. 폴란드 작가 셰케비치의 저명한 작품 ‘쿠오 바디스’의 마지막 장면은 박해를 피하여 백발의 베드로가 한 어린 소년과 새벽에 아피아 가도를 남쪽으로 빠져 나가는 장면이다. 아침 안개 속에 신비스러운 빛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 노구의 베드로는 무릎을 꿇고 흐느껴 울며 “쿠오 바디스, 도미노”(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말한다. 그러자 슬프고 쓸쓸한 음성이 들려온다. “네가 내 백성을 버리니, 내가 로마로 가서 다시 십자가에 달려야겠다” 늙은 베드로는 그 말씀을 듣고 일어나 일곱언덕의 도시 로마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순교한다. 이 이야기는 2세기말의 전설을 기초해서 쓴 것이다. 베드로는 갈릴리의 어부로서 ‘배운 것이 없는 천한 사람’(행 4:13)이었다. 바울과 같이 그리스 철학에 정통한 문필가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삶 전체를 내어놓고 예수의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예수를 따르며 몇번이나 넘어지고, 실패한다. 그러나 그는 그때마다 주저앉지 않고, 다시 일어나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그것은 예수의 용서를 확실히 믿고, 그 분의 크신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약한 자를 들고 강하게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되며, 베드로는 스승의 기대에 부응하여 ‘복음의 나팔’로서, ‘사랑의 전령사’로서, ‘진리의 깃발’로서 사명을 다한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 김경문 목사(순복음영성훈련원장)
  • 2005.05.10

    [성경에 나타난 인간상 57- 막달라 마리아] 일곱 귀신 벗어나 예수부활 목격한 여인
  • 예수님의 열 두 제자는 모두 남성이고, 여성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교활동에는 제자들과 함께 여성들도 많이 참여하였다. 특히 악령이나 질병으로 시달리다가 나은 여자들도 따라 다녔는데, 그들 중에는 일곱 귀신이 들어있다가 나간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다(눅 8:2).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 가운데 언제나 먼저 기록된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다. 그리고 예수님이 계신 곳에 대체로 그녀가 있었다. ‘막달라’라는 것은 마을 이름이며, 갈릴리 호수 서안에 있었다. 나사렛에서 다메섹으로 가는 상인들의 통로였다. 그리고 그 마을은 부도덕한 환락의 도시로 유명했기 때문에 ‘막달라’라는 말 속에는 그런 좋지않은 어감이 내포되어 있었다. 당시 귀신들리는 것이 병의 일반적 원인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큰 병에 걸려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일곱 귀신이 붙어 있었다면 그녀의 병은 도덕적, 육체적, 심리적 질병이 복합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미 생활 자체가 완전히 무너져버린 상태이며, 사람들에게 버린 바 되어 재생의 길을 걸을 수 없는 육신의 정욕에 빠져 미친 듯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마리아가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요 8:11)는 죄를 사하는 말씀을 예수님에게서 듣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모습’을 되찾게된 것이다. 어느날 예수님께서 동석한 식사 자리에서 행실이 나빴던 한 여자가 향유를 든 옥합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예수 뒤로 와서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었다. 그리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발에 입맞추며 향유를 부어 드렸다(눅 7:37∼38). 예수님은 그것을 받아들였을 뿐아니라 그것을 나무라는 사람을 말리고, “나는 분명히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막14:9)하고 최고의 칭찬을 하셨다. 이 여성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라고 생각되어진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였다. 그것은 많은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가 얼마나 죄많은 여자였는가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 많은 죄가 용서된 기쁨 때문에 깊고 큰 사랑으로 힘차게 주님의 일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의 ‘소유’로 예수님 일행을 섬겼다(마 27:56, 눅 8:1∼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지 3일째 되는 날, 즉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의 일이었다.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시체에 바를 향유를 가지고 무덤에 가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이미 옮겨져 있음을 보고 놀랐다. 그녀는 즉시로 제자들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다. 다시 제자들과 함께 돌아와 보니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확인하였다. 제자들이 돌아간 뒤에도 그녀는 혼자 계속 웅크리고 앉아 무덤에서 울고 있었다. 그 순간 거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 실로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첫 번째 사람이었다(막 16:9). 예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예수께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랍오니”하고 불렀다(요 20:16). ‘랍오니’는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또다시 만나는 감격을 맛본다. 일곱 귀신에 사로잡힌 채 결코 평범하지 않은 고통의 나날을 보냈던 경험이 있는 그녀와 예수님과의 만남은 언제나 남다르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존재 자체, 삶의 자체가 방향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리아는 곧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막달라 마리아가 그의 변화된 삶을 통해 보여주듯이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변화된 우리들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여야 할 것이다. 김경문 목사 (순복음영성훈련원장)
  • 2005.05.04

    [성경에 나타난 인간상 56-나사로] ‘산다는 것의 가치’ 보여준 부활의 사나이
  • 예루살렘의 동쪽 약 2.7㎞ 떨어진 감람산 동남기슭에 작은 마을 베다니가 있었다. 여기서 나사로가 살았다. 그에겐 마리아와 마르다 두 여동생이 있었다(요 11:1). 예수께서는 그를 ‘우리 친구’라고 불렀을 정도로 끔찍히 사랑하셨다. 예수님은 이 세 남매를 사랑하여 종종 그들의 가정을 방문하고, 머물기도 하셨다. 예수를 대접하리만큼 그들 가정이 풍족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마리아가 예수에게 향유를 부어드린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데 나사로는 어떤 병을 앓고 있었다. 어느날 그 병이 악화되어 두 여동생이 걱정하여 예수님께 연락하였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죽은 다음에야 뒤늦게 도착하셨다. 나사로는 이미 나흘간이나 무덤에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야 나오라”하고 큰 소리로 부르시니 그는 손발이 베로 묶여 있었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겨 있는 그대로 무덤에서 걸어나왔다(요 11:43∼44). 그의 부활은 많은 유대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 하나는 많은 백성이 예수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요 11:45). 이것은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의 미움을 사서 그들은 예수뿐만 아니라 나사로까지도 죽이려고 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한다’ 또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인간이 ‘산다는 것’,‘존재한다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리아의 경우는 예수의 말씀을 듣는 것,‘참 좋은 몫, 빼앗아서는 안되는 것’을 택하였다(눅 10:42). 그리고 예수를 영접하는 만찬회에서는 ‘값진 순 나르드 향유 한 근’을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 그녀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것을 바친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그녀의 정성어린 보답이며, 아름다운 헌신의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나사로는 그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을 뿐이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롬 13:8)는 말씀과 같이 사랑만은 누구로부터 아무리 받아도 좋은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이나 ‘인간의 참된 사랑’은 기쁨으로 받아야 할 줄 알아야 한다. 어느 병원 중환자실에서 6살된 아이가 죽었다. 아이의 엄마는 울면서 “우리 아이가 6살밖에 못살고 고통 가운데 죽었는데,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때 어린 시체를 중심으로 둘러 서있던 몇사람의 의사와 간호사, 가족 가운데 한 의사가 말했다. “비록 6년이라는 짧은 기간을 살다가 갔지만 결코 무의미한 인생은 아니었습니다. 이 아이가 2년간 입원해 있는 동안 우리 모두는 사랑의 마음, 사랑의 행동으로 숨쉬었습니다. 다시말해 이 아이는 많은 사람들 마음 속에 사랑을 일깨웠고, 사랑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인간이 하는 일이 많지만 이보다 귀중한 일이 더 있을까요?” 우리가 얼마를 살던지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고 사는 밝은 인생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나사로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환자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완전하게 신뢰하여 살았음을 가리킨다. 나사로는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할 때, 이 세계와 역사에 창조적으로 동참할 수 있는 것이다. 부활을 체험한 사나이, 나사로는 유월절 엿새 전 베다니 문둥이 시몬이 베푼 식사에 동석했는데(요 12:1∼2), 이것이 그에 관한 성경의 마지막 기사이다. 김경문 목사(순복음영성훈련원장)
  • 2005.04.27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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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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