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현성 목사의 순복음신학산책
22 - 순복음신학의 미래
  • 오순절적 무장만이 교회의 세속화 막을 수 있어 현대교회는 초대교회 오순절 사건의 의미 간과하지 말아야 인간 삶의 주체는 성령께 있음을 깊이 인식하는 성도 되길 순복음신학의 미래, 오순절 사건 속의 가치체계 발견에 있어 초대교회의 구성원들은 당시 정치, 종교, 사회적인 냉대와 위협이 남아 있는 가운데 마가 다락방에 모여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다. 교회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탄생했고 뿌리를 내리면서 성장해 갈 수 있었다. 오늘날 현대교회는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시작된 성령임재의 사건을 결코 역사의 한 장면으로 쉽게 잊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오순절 사건에 나타난 주권적인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간과하고 지나치는 순간 교회는 형식주의, 제도주의, 교권주의의 역기능적인 해악상 속에서 위기를 맞을 수 있다. 이 시대 교회는 다시금 새로워져야 한다. 오순절 성령임재의 사건은 오늘날 교회가 되찾아야 할 진정한 기독교적 유산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다. 이러한 관점에서 초대교회가 지녔던 신앙적 특성을 오늘날 계승하여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교회의 귀한 몫임이 틀림없다. 따라서 순복음신학의 산책을 마무리하면서 오순절 사건이 지닌 몇몇 가치적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다. 첫째로, 오순절 사건에는 경직되지 않은 유연성이 발견된다. 여기서 유연성이란 성령이 주체적으로 역사 하심을 따라 나타나는 특성이다. 유연성은 일체의 고정관념이나 굳어진 의식으로부터 회복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 쓰시고자 하는 대로 자신을 내맡기는 순종과 겸비의 자세이다. 인간의 경직된 관념이나 의식은 인간을 구속하고 억압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사역을 제한한다. 오순절 사건의 중요한 특성인 방언 말함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가능했다. 이러한 점에서 성령운동은 인간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만든 모순된 제도와 구조라는 경직성을 타파한다. 성령운동을 이끄시는 주체이신 성령은 인간의 사상과 주의에 묶여 계시지 않는다. 오히려 성령은 인간에게 참 자유를 허락하며, 그 자유를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가능성을 무한히 펼칠 수 있도록 한다. 둘째로, 오순절 사전에는 개방성의 요소가 내재하여 있다. 성령운동은 열려 계신 하나님께로 우리를 인도한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 성령임재의 사건은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로 묘사되고 있다. 바람이 열린 세계에서 감지될 수 있듯이 성령은 닫혀 있거나 밀폐된 의식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역사 하시지 않는다. 성령은 개방된 의식과 신앙생활 가운데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영이다. 오순절 사건으로 시작된 기독교 신앙은 유대교가 지닌 우월의식과 특권의식을 철폐하고 구원의 보편성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을 유대 민족 신의 개념에서 온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는 주권자 하나님으로 강조했다. 오순절 사건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당신을 열어 보이신 사건이며, 이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지평을 향하게 한 사건이다. 이처럼 성령의 개방성이 체험되지 않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사건이 이해될 수 없다. 개방성은 변화와 갱신의 첫 걸음이다. 셋째로, 오순절 사건은 공동체성을 발견하게 해준다. 기독교 신앙은 함께하는 삶을 강조한다. 오순절 사건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1백20문도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기에 가능했다. 즉, 마가 다락방 성령임재의 현장은 공동체적 신앙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이처럼 성령의 역사는 공동체적 정신을 지닌 곳에서 역사 한다. 사도들에게 성령의 강한 능력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성령을 체험한 자들이 공동체적 의식을 갖고 자신의 소유를 나누었다는 데 있다. 이 시대 올바른 교회 상과 인간상은 결국 개인주의적 의식에서 벗어나 한국교회와 함께 하며 이웃과 더불어 나누며 함께 하는 의식에서 시작한다. 넷째로, 오순절 사건에 나타나는 두드러진 점은 역동성에 있다. 성령의 능력은 사람들을 정적(static)이거나 비활동적인(inactive) 자세로부터 역동적이며 활동적으로 만든다. 오순절 사건을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행 2:3)으로 묘사한 것도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불은 더러운 것을 태우고 씻기며 소멸하는 역동성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불은 에너지로 상징되기도 한다. 성령이 임하시면 그 역동적인 힘 때문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 사도행전 1장 8절처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는 것이다. 이로써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은 더욱 적극적이며 모든 일에 능동적이 되는 것이다. 다섯째로, 오순절 사전에는 성령의 인격성을 강조하는 요소가 있다. 오순절 임하신 성령은 단순히 힘이나 능력처럼 비인격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빌립이 사마리아 지역에서 전도할 때 마술사 시몬은 성령의 역사 하심을 통해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이때 마술사 시몬은 성령의 능력을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사도들을 청해 자신도 성령의 권능을 달라고 했다. 베드로는 그의 사악한 마음을 읽고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행 8:20)라고 저주했다. 성령은 지, 정, 의를 지니신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순복음신학의 미래는 오순절 사건에 내재하여 있는 귀중한 가치체계를 오늘날 재발견하여 오늘의 한국 교회에 여하히 재현하는 가의 여부에 달렸다. 이러한 오순절적 가치체계야말로 교회가 오늘날 세속화의 흐름에 맞서 세상을 변혁하고 복음화할 수 있도록 이끄는 원동력이 됨을 부인할 수 없다.
  • 2002.12.22

    21 - 순복음신학과 통전적 조화신학
  • 사람들이 처한 ‘삶의 정황’을 잘 반영하는 신학 순복음신학의 주된 신학적 방법론은 이원론 배격에 있어 ‘삼중축복’ 신앙은 순복음의 통전적 조화신학의 모체 순복음신학은 초월의 세계와 실재의 세계를 통시적으로 해석하는 안목을 강조해 왔을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의 오순절적 정통성과 더불어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적 실천성을 중시하는 인식의 조화를 꾀하여 왔다. 이처럼 순복음신학은 초월의 세계와 실재의 세계, 정통성과 실천성을 조화 하려는 의지가 담긴 통전적 조화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신학적 특성이 있기에 순복음신학은 사람들이 처한 삶의 정황을 그만큼 신학에 잘 반영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세계는 영성과 지성의 조화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여정이다. 여기서 진정한 믿음은 결코 영성만을 내세우지도 않고 지성만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영성을 초월이성이라고 한다면 지성은 자연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인간이 자연이성의 범주 속에서 사물을 이해하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다시 말해 이 땅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은 자연법칙의 지배를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세계만이 전부가 아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라는 점에서 인간은 영적 초월의 세계에 관심을 둬야 한다. 이처럼 우리는 믿음의 세계에서 조화의 덕목이 요구됨을 알 수 있다. 순복음신학의 주된 신학적 방법론은 이원론을 배격하는 데 있다. 이원론적 신앙은 부분적이고 편협한 그리스도인을 낳는다. 이렇게 되면 신앙과 삶이 물과 기름처럼 겉돌게 되고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사회 안에서 무기력해진다. 결국 이원론적 의식은 건전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파괴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는 관건도 하나님 인식에서 이원론적 자세를 배격하는 데 있다. 지금까지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서양철학의 이원론적 구조 속에서 침묵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한쪽으로 치우치는 극단주의(extremism)나 사물을 양극화하여 이해하려는 이원론(dualism)이 순복음의 목회와 신학 현장에 발붙일 수 없도록 해야 한다. 한국교회 내에 만연하고 있는 신학과 신앙의 이원화 양상은 그 원인을 살펴보면 신학이 신학논쟁이나 교파의 이해관계를 꾀하는 수단으로 전용되거나, 학문의 자유와 창의성이라는 이름으로 교회와 사람들의 삶과 무관한 방향으로 나가는 양극화 현상과 관계한다. 여기에 바로 조화의 필요성이 대두하는 것이다. 조화는 단순히 두 가지 개념의 혼합(mixture)이나 융합(fusion)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의 개체성을 잃고 중성화(neutralization)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또 다른 개체성과 아름다운 화합을 이루는 개념이다. 그러기에 조화(調和)에는 통전적인 특성이 함축되어 있다. 순복음신학은 이처럼 ‘조화’가 지닌 특성을 신학함의 중요한 요소로 삼는다. 순복음신학은 오순절적 성령의 역동성을 신학화함으로써 그 차별성을 강조하는 신학이다. 단순히 교리적으로 갇혀 있는 신학이기보다 교회와 사회를 통시적으로 보며 문제를 진단하고 예방하고 처방하는 신학적 적합성을 추구하는 신학이다. 이러한 통전적 가치성에는 성령의 조화와 화해를 유도하는 능력이 중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통전적 가치성을 말하면서 ‘조화’의 개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순복음신학에서 강조하는 ‘삼중축복’의 전인구원의 신앙은 통전적 조화신학의 모체가 된다. 초대교회에 있었던 오순절 사건은 이러한 통전적 조화의 가치를 인식시켜 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즉, 오순절 사건을 통한 성령임재의 역사는 전인구원과 더불어 동시에 성령운동의 지평을 여는 통전적 조화의 가치를 보여주었다. 그러기에 성령임재의 현장은 새로운 존재적 변화가 일어나는 현장이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통전적’이란 표현은 ‘관계적’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전인구원은 독립적 관계 속에서 형성되기보다는 통전적 관계성 속에서 형성된다. 이러한 통전적 관계성은 우리가 접하고 살아가는 영적, 문화적, 사회적, 심리적, 종교적 측면 등 다양한 영역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주변 피조물과의 아름다운 조화의 관계 속에서 생각할 수 있는 개념이다. 현대는 더욱 다원적이며, 통전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시대로 이전되고 있다. 때문에 신학함에 있어 기존의 이원론적인 사고의 바탕 위에서 신학을 해온 정신 유산을 청산하고 신학이 더욱 신학다워질 수 있게 하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순복음신학은 조화라는 용어가 지닌 상징적이고도 함축적인 개념을 바탕으로 해서 한국교회가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점들을 치료하고, 나아가 한국적 신학의 지평을 열어 갈 잠재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 2002.11.17

    20 - 순복음신학과 성령의 인격성
  • “성령님을 인정합니다, 환영합니다, 모셔들입니다”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고백 되는 순복음의 핵심교리 성령은 인격을 지니신 예배의 대상임을 인식해야 순복음신앙에서 가장 인상적인 신앙고백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성령님을 인정합니다. 환영합니다. 모셔들입니다”이다. 이러한 고백은 순복음신앙이 ‘성령의 인격성’에 대해 얼마나 실천적 관점에서 삶에 적용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실례가 된다. 성령의 인격성은 우리로 하여금 성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제공하는 중요한 신학적 개념이다. 성령은 ‘인격적인 하나님’이다. 순복음신앙의 핵심은 성령이해에서 성령의 능력을 경험할 것과 더불어 성령의 인격성이 지닌 중요성을 동시에 강조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순복음신앙은 보다 통전적인 차원에서 성령을 이해할 것을 가르친다. 그렇다면 순복음신학이 이처럼 성령의 인격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관하여 몇 가지 측면에서 성령의 인격성이 지니는 신학적 의미들을 함께 살펴본다. 첫째로, 성령과 성도 간의 교제적 측면에서 발견된다. 성령은 우리의 진정한 교제의 대상자이다. 성령을 단순히 어떤 림이나 에너지, 능력 정도로 이해하게 된다면 성령은 문제해결의 수단과 방법은 될 수 있어도 삼위일체 하나님은 될 수 없다. 진정한 교제는 성령과의 단절된 관계를 청산하고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성경과의 교제는 성령의 체험적 사건이 있은 후 그러한 삶이 불연속적이지 않고 연속적으로 지속할 때 가능하다. 성령과의 교제는 과거 죄로 말미암은 인류 타락과 그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단절이라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을 극복하게 한다. 즉, 인격을 지니신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의 공간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며, 막힌 담을 제거하시며, 우리와 교제하신다. 둘째로, 성령의 인격성은 성육신적 측면에서 그 신학적 의미를 일깨운다. 인격은 ‘하나님 형상’의 성육신적 표현의 결과이다. 다시 말해 인격이란 ‘하나님 형상’이 보다 구체적으로 인간의 개념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인간과의 진정한 의사소통을 위하여 성령은 당신 스스로 인간과 동화되기를 원하신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사하시려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성육신의 원리와 같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신분을 멀리하고 친히 우리를 위해 인간이 되셨다. 유대교가 기독교가 될 수 없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하나님만으로” 이해하는 데 있다. 반면 기독교가 유대교와 구분될 수 있는 요인은 “하나님을 인간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파격적인 관심과 사랑에 연유하는 것이다. 성령이 인격을 지니고 계심은 ‘우리가 그에게로 접근할 수 있는 여지’를 갖게 하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참된 인격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의 실체를 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셋째로, 성령의 인격성은 하나님의 구속사적 측면에서 그 의미의 중요성을 인식게 한다. 성령께서 인격적이라는 사실은 인간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을 보증한다는 점이다. 성령께서는 인격을 지니고 계시기에 인간에게 가깝게 다가가실 수 있으며 결국 그리스도를 통해 마련된 구속사적 청사진이 성취될 수 있도록 활동하신다. 다시 말해 성령의 인격성은 곧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을 확증하신다. 성령이 우리를 위해 탄식하고 간구하신다는 바울의 표현은 곧 인격을 지니신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현재적 시점에서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인식시켜 준다. 넷째로, 성령의 인격성은 역설적 측면에서 그 의미를 더 깊게 조명해 준다. 성령께서 인격을 지니고 계시다는 것은 성령의 신성적인 권위와 사랑을 더한층 강화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 할 수 있다. 성령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에도 인격을 지니고 계시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신성과 권위 그리고 사랑을 약화시키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바로 하나님의 역설적인 진리가 기능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육신의 사건에서 깨달을 수 있듯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인류의 구원과 영생을 위해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셔야 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셔서 모든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의 소망이 됨은 죽음을 통한 부활이라는 역설적인 개념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다섯째로, 성령의 인격성은 잘못된 신앙을 바로잡는 측면에서 그 의미를 새롭게 한다. 성령께서 인격을 지니고 계시다는 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잘못되고 극단적인 신비주의에 접근하는 것을 막아 준다. 즉 성도로 하여금 성령에 대한 신비주의적 일변도의 자세를 자제케 한다. 성령의 인격성은 비인격적 예배 행위를 절제하게 한다. 성령의 인격성이 무시될 때 예배는 신비적이거나 광신적으로 흐를 수 있다. 성령께서 인격을 지니고 계심은 성도들의 예배와 경배의 대상이 됨을 말하는 것이다. 성령의 인격성이 신앙의 영역에서 구심점을 잃을 때 성도들의 성령을 삶 속에서 예배의 대상으로 섬길 수 없다. 우리는 인격을 소유하신 성령을 인정할 때 그를 예배하고 섬길 수 있다. 이처럼 성령의 인격성이 우리에게 주는 동기부여는 신학적으로 무궁무진하다. 성령의 인격성은 성도와 교회에서 더욱 포괄적으로 인식될 수 있어야 한다. 성령이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이해될 때 결국 우리는 성령 임재를 통한 전인적이고 성숙한 신앙생활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 2002.10.20

    19 - 순복음신학과 인간이해
  • 인간이해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 성경을 벗어난 인간이해는 한계점 극복할 수 없어 창조의 상황 볼 때 인간 위한 하나님 배려 알 수 있어 유사 이래로 인간은 자신의 기원과 존재의미 등에 관해 많은 질문을 해 왔다. 그러나 그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은 가변적이고, 모호하였으며, 대립적인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다. 어떠한 인간에 대한 정의도 단순히 ‘현상들에 대한 묘사’에 치우쳤고 ‘일방적’인 한계점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서는 창세기 1장에서 3장에 걸쳐 인류창조와 타락 사건을 다루면서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 인간 이해의 장을 제공하고 있다. 창조사건은 하나님의 역사 하심이 인류 삶의 터전 속에 구체화하고 가시화되어 나타난 사건으로서 인간 이해의 출발점이 된다. 하나님 창조의 특성은 바로 ‘무로부터의 창조’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히브리어로 ‘바라(bara)’라고 하는데 이는 ‘무의 상태에서 만들어진’이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이 고민하고 만들어내는 그 어떠한 것도 하나님의 창조와는 구분됨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사건은 또 다른 보완이나 수정과정이 요구되는 것이 아닌 그 피조물 각각의 개체가 완전성을 내포한다. 진화론이 성서와 정면으로 어긋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하나님의 창조사건에는 초월성과 역사성이 함께 공존한다. 여기서 초월성은 창조사건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지만, 역사성은 창조 이후 갖춰진 공간과 시간 안에서 인간이 살아온 현재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순복음신학은 인간을 이해함에서 하나님의 초월적인 차원과 더불어 인간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 속에서 벌어지는 실제적 차원을 중요하게 인식한다. 이러한 개념이 연결되어 있는 인류창조와 타락사건을 살펴보아 인간이해에 관한 중요한 개념들을 살펴본다. 먼저는 아담과 이브가 인류 최초의 조상이라는 점이다. 즉 아담과 이브는 인류의 대표성을 띠는 최초의 인간이다. 이는 인류가 본래 한 종족에서 기원 되었음을 암시함과 더불어 아담과 이브가 가진 인간의 특성이 모든 인류에게 유전되고 있음을 말한다. 아담이 생태계의 모든 이름을 명명할 정도의 지적 능력이 인간에게 전수되었으며, 만물의 영장으로서 피조물에 대한 책임과 권리 역시 인류에게 전수되었다. 무엇보다도 주목할 사항은 바로 아담과 이브가 지은 죄 또한 모든 인류에게 너 나 할 것 없이 원죄로서 전가된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 필요한 모든 환경을 예비하심으로 인간에게 깊은 배려와 관심을 보여주셨다는 점이다. 인류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세계를 통해 부족함 없이 살아가도록 창조함 받은 존재이다. 피조물 창조과정에서 인간이 가장 나중에 창조되었음은 바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최고의 배려 하심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 관한 한 예비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피조물들이 하나님 말씀으로 창조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인간만은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창조하셨다는 점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친히 흙으로 인간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주입하심으로 생령(living being)이 되게 하셨다(창 2:7). 인간 이해는 이처럼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배려하심이 고려되어야 한다. 셋째로, 인간의 권리와 의무란 방종이나 착취의 개념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즉,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신 창세기 1장 28절의 말씀은 피조물에 대한 ‘지배자’의 관점이 아닌 ‘관리자’ 또는 ‘청지기’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인류가 피조물을 마음대로 취급해도 좋다는 식의 방임적 권리가 아닌 피조물을 돌보고 가꾸어야 할 책임적 권리를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온 우주의 주인은 하나님 한 분이시며 인간은 청지기요 관리자임을 인식하는 자세가 요청된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살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이 이 땅에 거주하는 한 생태계를 떠나 살 수 없다. 이는 곧 생태계에 대한 인간의 올바른 관계 인식이 인간 이해에서 필수적 요소가 됨을 강조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 창조사건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 만물을 인간을 축으로 하여 창조하셨다. 그 실례가 바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바로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을 지닌 존재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고 하심은 바로 인간 창조에 대한 최고의 만족을 표하신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과 구별되는 존재임을 말한다. 다른 피조물들이 창조된 후 하나님께서는 단지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곧 인간이 본래적으로 갖춘 자화상이다.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상태는 바로 이본디본래적 자화상인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을 때이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은 인간 타락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게 했다. 따라서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야말로 인간 이해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과 십자가 대속의 사건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역이었다. 창조사건과 인간의 타락사건은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바른 시야를 제공한다. 결국 이 두 가지 사건에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이 내재하여 있는데 전자는 인간에게 복을 명하심을 통해 후자는 타락한 인간에게 구원이라는 은혜를 허락하심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인간 이해는 ‘하나님과 인간의 조화’에 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온전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 이해는 하나님의 ‘인간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순복음신학은 인간 이해에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관심 그리고 그에 대한 인간의 적극적인 응답을 신학에 반영하려는 입장을 중시한다. 이처럼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인식이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책임 있는 인간으로서 참된 인식이 가능한 것이다.
  • 2002.09.15

    18 - 순복음신학과 ‘삶의 자리’
  • ‘삶의 자리’는 하나님의 초월세계와 인간의 현실 세계가 만나는 곳 신학함의 본래 의의는 ‘삶의 자리’에서 발견 한국의 신학은 21세기 세계화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많은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한 변화의 움직임 가운데 우리의 것을 찾고자 하는 신학적 시도가 단연 중심이 되고 있다. 오늘날 신학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서구의 신학사상을 소개하고 이를 수정하거나 보완하는 차원을 넘어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반영하여 신학화하는 것을 포함한다. 여기서 ‘삶의 자리’는 한 개인이 성장하여 사회인이 되기까지 또한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까지 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제반 환경적 요소들을 총체적으로 칭한다. 신학이 ‘삶의 자리’를 중요시하는 이유는 신앙이 뜬구름 잡는 개념이 아니며, 구체적으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환경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학이 ‘삶의 자리’를 도외시하고 다만 메마른 신학논쟁이나 교리논쟁에 매달린다면 신학은 교회와 성도들에게서 멀어지고 만다. 이처럼 신학이 신학으로서의 사명을 상실할 때 신학은 이 시대 사람들에게 무관심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순복음신학은 현대인들을 영성과 지성이 겸비된 참된 신앙의 세계로 안내하는 데 그 신학적 의의를 둔다. 순복음신학의 교리적 핵심은 성도들 개개인이 매일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 속에서 발견된다. 그 가운데서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방황했다”는 고백은 순복음교회에 첫발을 딛은 자들이라면 누구나 설교자를 따라 하게 되는 영접기도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고백은 신앙의 세계가 그저 막연하거나 사변적이며, 형이상학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짧고 단순한 고백이지만 그 안에는 인간의 기원과 존재의 의미, 그리고 삶의 목적과 방향에 대한 신학적 개념들이 총망라된 것이다. 순복음신학 이해의 출발점은 바로 삶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며, 삶 속에서 제기되는 질문들을 성서에 기초해서 응답을 모색하는 데 있다. 하나님은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의 하나님이 아니다. 인간이 접한 삶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시고, 그들의 문제에 응답하시며, 삶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이다. ‘삶의 자리’는 바로 하나님의 초월 세계와 인간의 현실 세계가 만나는 곳이다. 따라서 신학함의 본래 의의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삶의 자리’인 것이다. 순복음신학을 가리켜 한국적 상황에서 토착화된 오순절 신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오순절 신앙이 한국교회의 ‘삶의 자리’ 속에 접맥되고, 발전하였다는 데 있다. 초대교회는 오순절 사건을 통해 받은 영적 영향력을 사회의 각 분야에 확산시켰다. 경제적 빈부의 차를 해소하고자 노력했으며, 진정한 기독교 문화 창달과 이의 보급에 관심을 표명했다. 단순히 종교라는 의미를 앞세우기보다는 당시 사람들이 접하는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며, 삶의 문제에 실질적으로 접근하는 자세를 보여 주었다. 다시 말해 삶의 필요를 채우는 ‘동시대적 가치성’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초대교회가 그러했듯이 순복음신학은 한국 사람들의 ‘삶의 자리’의 필요를 채우며,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는 일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를 위해 순복음신학은 한국적 사고와 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삶에 대한 신학적 질문을 제기하는 데 중점을 둔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회에 상처가 난 부분들을 치료하고 돌보아 주어야 할 책임을 강조한다. 결국, 순복음신학은 교회를 위한 신학이요, 내 이웃이 더불어 살아가면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삶의 신학’인 것이다. 신학과 삶, 교회와 사회는 분리될 수 없다. 한울타리 안에서 공존하며 역할 할 때 신학은 생명력을 얻고 사회는 풍요롭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짧은 역사 속에서 엄청난 성장을 이루어 냈고 세계 교회에 많은 도전을 주어왔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한국 성도들의 믿음의 근면성이 이루어 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한국교회는 21세기를 맞이하면서 많은 영역에서 갱신과 변화가 필요하고 있음이 또한 사실이다. 교회에 만연되고 있는 권위주의의 병폐와 물질 만능주의적 요소들 그리고 개 교회 분파주의 현상이 그것이다. 또한 우리가 함께 숨 쉬며 살아가는 조그마한 한반도는 지난 반세기가 넘도록 둘로 동강 난 채 있으며 아직도 이북의 동포들은 상상을 초월한 압박과 고난을 받는 것이다. 순복음신학은 이러한 교회와 사회 내에 문제들을 가슴 아파하며 치유책을 모색하는 ‘삶의 자리’의 신학을 지향한다. 이처럼 순복음신학이 ‘삶의 자리’를 강조한다는 것은 곧 동시대적(contemporary) 가치성을 무시하지 않고 이를 신학에 반영하려고 하는 의지를 지니고 있음을 말할 수 있다. 순복음신학의 궁극적 관심은 어떻게 하면 이 시대 사람들에게 복음을 효과 있게 전달하여 그들의 삶에 적용될 수 있도록 하는가에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순복음신학은 삶과 복음과의 단절이 아닌 연결이며 삶과 복음과의 관련성을 꾀하는 신학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인간의 삶의 현장에 나타나셔서 간섭하신다. 그 때문에 우리는 문하에 대해서 논할 때 역시 하나님께서 인간문화를 변혁시키는 주체이심을 고백하는 겸허한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
  • 2002.08.18

    17 - 순복음신학과 젓가락
  • 한국인의 ‘삶의 자리’ 속에서 이뤄가는 신학 ‘젓가락’의 유비를 통해 순복음신학의 잠재력 확인 가능 순복음신학은 21세기 한국의 신학 선도할 하나의 모형 순복음신학은 이미 만들어진 ‘완료형적 신학’이기보다는 아직도 만들어져 가는 ‘현재형 신학’이다. 따라서 순복음신학에 대해 섣부르게 정의 내리고 규정짓기보다는 그 함축적인 상(image)을 전달하여 그 신학적 잠재력을 신학화하는 연구가 요청된다. 순복음신학이 지닌 특성과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도구로서 ‘젓가락’이라는 유비(類比)를 제안한다. 그것은 한국사람들의 음식 문화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순복음신학이 지닌 특성들을 반영하고있기 때문이다. 첫째로, 젓가락은 한국인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를 반영한다는 점이다. 즉, 한국 사람에게 있어 젓가락은 음식문화를 접하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음식도구가 된다. 삶의 문화이기에 그것은 결코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닌 생존과 직결된 문화이다. 순복음신학은 삶의 문제를 다루는 신학이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면서 그들에게 꿈과 소망을 심어주는 실제적인 측면을 중시한다. 단순히 신학적 *유에 그치는 신학이 아니라 삶에 적용시켜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신학이다. 따라서 영혼구원은 물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영∙?혼∙?육의 균형잡힌 전인구원을 지향한다. 둘째로, 젓가락은 조화(harmony)를 지향하는 한국인의 지혜와 깊은 철학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조화란 모순 대립적인 각각의 개체가 하나로 화합하여 하모니를 이루는 통전적 가치 개념을 표현하는 용어이다. 젓가락의 한쪽이 지렛대 역할을 한다면 다른 한쪽은 움직이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젓가락의 두 기능의 조화를 중시하는 한국인의 통전적 의식이 내재하여 있다. 젓가락에 담긴 조화의 개념은 순복음신학이 강조하는 통전적 가치개념인 ‘전인구원’을 잘 설명한다. 전인구원은 영과 혼과 육의 전체적인 조화가 있을 때 실현되는 것으로서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로, 젓가락은 한국인의 공동체적인 관계성을 상징한다는 점이다. 한자로 인간을 사람 인(人)으로 표기한다. 상형문자인 한자를 통해 그 의미를 살펴본다면 사람 인(人)은 두 막대기로 되어 하나는 받쳐주고 하나는 걸쳐 있으므로 사람 인(人)을 형성한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고 돕고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적 존재이다. 순복음신학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공동체적 관계성을 중시한다. 함께 모여 공동체적 관계성을 형성할 때 순복음신학의 참모습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모여서 기도하고 함께 나누면서 서로 필요를 채우는 ‘더불어 함께하는 삶’을 강조하는 신학이 바로 순복음신학인 것이다. 넷째로, 젓가락은 이를 사용해 본 경험자에게 편리하다는 점이다. 역으로 말하면 젓가락을 사용해 본 경험이 전혀 없는 자에게는 젓가락은 불편할 뿐이다. 젓가락은 반복적 사용을 통해 몸에 익숙해져야 한다. 매일같이 사용하면서 훈련하지 않으면 젓가락을 적절하게 사용할 수 없다. 순복음신학은 많은 영적 훈련을 통해 하나님 임재하심을 경험하는 신학이다. 기도와 금식, 전도와 봉사, 예배와 찬양 그리고 각종 모임을 통한 영성훈련은 순복음신학의 핵심적인 내용이 된다.특별히 순복음신학은 성령의 은사를 개발하고 활용하여 복음증거 사역으로 연결하는 데 지대한 관심을 두고 있다. 젓가락을 사용해 본 자들이 젓가락의 필요성을 느끼듯이 성령의 은사를 경험한 자들이 그 은사를 귀하게 여기고 더 큰 은사를 사모하게 되는 것이다. 다섯째로, 젓가락은 우리의 문화라는 면에서 독특하다는 점이다. 오랜 역사 가운데 젓가락을 사용하면서 젓가락은 우리 문화로 토착화되고 적합성을 갖게 되었다. 순복음신학은 오순절 신학의 주류를 형성해 왔던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교리와 한국 교회의 정황이 반영되어 형성된 신학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순복음신학을 논할 때 오순절적 정통성은 물론 우리의 ‘삶의 자리’가 반영되고 투영된 우리의 신학적 정서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젓가락은 서로 교차할 때 원하는 음식을 선택하여 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젓가락이 교차한다는 사실은 갈등과 긴장이 상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순복음신학은 갈등과 긴장관계를 신앙성숙의 중요한 요인으로 본다. 이러한 긴장관계는 파괴적이기보다는 창조적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긴장을 가리켜 ‘창조적 긴장”(creative tension)이라고 말한다. 순복음신학은 이러한 긴장과 갈등을 창조적이고 발전적으로 승화시키는 요인을 오순절 ‘성령의 임재하심’에둔다. 따라서 순복음신학은 이러한 오순절 성령의 임재하심이 모순 대립적인 갈등구조를 창조적인 것으로 변혁시키는 주체가 됨을 신학적으로 천명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 21세기는 보다 통전적 사고를 요구하는 시대로 전개되고 있다. 이제 21세기를 맞이한 한국교회는 기존 서구의 이원론적인 사고의 바탕 위에서 신학을 해온 과거를 반성하면서 더욱 우리의 신학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거 20세기 짧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한국교회를 부흥과 성장 그리고 폭발적인 성령의 역사로 이끌어 낼 수 있었던 여러 요인 중에 순복음교회가 이바지한 부분은 참으로 지대하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순복음신학은 21세기를 위한 한국적 신학의 대안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 2002.07.21

    16 - 순복음신학과 교회 정치
  • 신정주의(神政主義) 우선할 때 참 민주화 이룩 순종의 신앙 선행되는 성도의 자세 필요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명심해야 오늘날 한국사회에는 다원화된 각 계층으로부터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가고 있다. 이제 ‘민주화’와 관련된 주제들은 사회는 물론 교회에서도 화두가 되고 있다. ‘민주화’란 시민이 주인이 되어 권리 행사의 주체가 되고 자유롭고 평등하게 의사를 결정하고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하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민주화의 사상적 기반이 되는 민주주의는 인류가 발전시켜 온 위대한 유산 가운데 하나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민주화’가 교회에서 논의되는 상황을 전제할 때 ‘민주화’가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인식은 교회의 정체성에 심각한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 이 시대 교회는 ‘민주화’에 대한 중요성은 인식하되 ‘민주화’가 누구를 위하고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에 대한 분명한 성서적, 교리적 견해를 밝히는 면에 한계점을 보여 왔다. 민주화는 사람(民)이 주인이라는 인식에 따라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지만 교회는 사람을 주인의 위치에 올려놓지 않는다. 교회는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주님이 주인 되심을 고백하는 곳이다. 순복음신학에서는 ‘민주화’를 교회 내에 기존 영적 권위와 가치체계를 초월하는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영적 질서체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세상의 정치조직이나 사회단체와 구분된다. 베드로와 요한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에게 공회에 붙잡혀 있을 때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고 말했다. 여기서 ‘인간의 말’이 다수 견해가 반영된 ‘민주주의’와 관계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통치 하심이 반영된 ‘신정주의’와 관계한다. 하나님 백성의 관심사는 오로지 하나님의 통치 하심에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세워진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예표이다. 따라서 교회는 그 구성원들이 교회의 영적 권위와 질서체계에 대해 ‘예’와 ‘아멘’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곳이다. 이러한 예와 아멘 신앙은 강요도 맹종도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순종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신정주의(theocracy)가 순종의 신앙을 견지한다면 민주주의(democracy)는 민의의 수렴 여하에 따라 하나님의 권위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약속이나 권위는 민주주의적 합의에 따라 수용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교회는 오랫동안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는 민주주의의 본산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진정한 민주화는 먼저 ‘하나님 앞에’라는 말이 명시하듯 하나님의 주권과 권위의 인정이 우선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교회가 문제가 있을 때 그 원인을 민주화의 부재로 이해하는 풍토는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교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나 위기는 종종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절대성을 상대화하고 약화시키며 민주화를 비판 없이 수용함으로써 발생한 것임을 직시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을 초월해 있는 권위, 즉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하여 절대적 존재인 하나님을 향할 때만이 진정 교회의 본질을 지켜갈 수 있다. 교회에 부여된 교회로서의 사명과 특수성을 무시한 채 교회가 ‘민주화’ 분위기 일색에 압도당할 때 민주주의는 이 시대 또 다른 우상이 될 소지가 있다. 민주주의는 과거 전제군주나 독재자의 권력에 투쟁하며 민중들이 쟁취한 인류 역사의 고귀한 업적이요, 제도요, 사회규범이다. 그러나 그 민주주의가 교회라는 영역에서조차 절대적인 것처럼 군림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 그 이유로써 교회 안에서 민주주의는 결코 영적 권위와 질서체계에 우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교회론적 본질이 머무는 현주소는 신정주의이다. 그럼에도 교회는 민주주의를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민주주의를 존중히 여기며 실천한다. 교회는 이 땅의 문화와 관습과 제다가 낳은 많은 산물 가운데 민주주의를 중요한 것으로 인식한다. 올바른 민주주의의 사상적 기반은 기독교 정신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올바른 민주주의는 기독교적 진리, 신적 권위와 질서체계 등과 대립하기보다는 그 안에서 조화를 꾀한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며 그분의 통치 하심을 이 땅에서 구현해야 할 사명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신다는 측면에서 교회는 본질적으로 신정주의에 있으며 그 통치하심이 이 땅에서 구현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교회는 민주주의를 존중한다. 따라서 교회의 올바른 민주화는 신정주의와 별개의 개념도 아니며 하나님의 신적 권위 그리고 질서체계와도 모순되지 않는다. 순복음신학은 이 시대 참된 민주화의 뿌리가 기독교의 진리와 가르침 속에 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선포함으로써 영혼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소금과 빛”의 삶을 실천하라고 요청한다. 순복음신학은 이 땅에서 참된 민주화는 결국 성령의 임재 안에서 신정주의적 측면과 더불어 민주주의적 측면이 잘 조화로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신학이다.
  • 2002.06.16

    15 - 순복음신학과 여의도순복음교회
  • 현대 성령운동의 기수로 우뚝 서 순복음의 저력, 절대절망을 절대희망으로 바꾸는 데 있어 한국교회의 경직된 예배 분위기 쇄신하는데 일조 담당해 오순절 성령운동의 소개와 환산의 견인차 역할을 하면서 한국은 물론 세계교회의 성장을 주도해 온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창립 44주년을 맞이했다. 순복음신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우리는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떼놓고 말할 수 없다. 순복음신학은 여의도순복음교회라는 목회현장과의 만남을 통해 그 신학적 잠재성과 기량을 선보일 수 있었으며,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순복음신학이 지닌 교리적 특성을 적용함으로써 단일 교회로는 세계 최대의 성도들을 모은 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다. 따라서 지금의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순복음신학’이 있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대한 미래를 조망해 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한국의 오순절 신앙의 전래는 1928년 봄, 럼시(Mary C, Rumsey) 선교사의 한국 방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녀가 한국에 오게 된 동기는 1906년부터 있었던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의 대부흥 집회와 관계한다. 럼시는 집회 중에 성령세례를 체험했고, “한국으로 가라”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내한한다. 교단선교본부에서 정식으로 파송 받은 선교사는 아니었지만 한국에 도착하여 허홍, 박성산, 배부근과 같은 인물들은 접하면서 한국 땅에 오순절 신앙의 씨를 뿌렸다. 이들은 당시 기성 교회들로부터 ‘오순절 교회는 이단이다’ 혹은 ‘방언 패거리’라는 외부의 비난을 감수하면서 성령세례를 통한 방언과 신유 그리고 권능체험을 강조하는 원색적인 오순절 신앙을 전했다. 럼시 선교사에 의해 오순절 신앙이 한국에 뿌리내릴 수 있었다면 오순절 신앙의 확산은 미국 하나님의 성회에서 공식적으로 파송된 채스넛(Arhber Cheesnut) 선교사가 내한하고 이듬해 1953년 4월 8일 ‘하나님의 성회’ 창립총회를 열게 되면서부터이다. 1958년 5월 18일 대조동의 천막교회가 오늘의 여의도순복음교회로 성장하기까지 그리고 오순절 신앙이 한국교회에 절정에 달하기까지 주도적 역할을 해온 조용기 목사의 사역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천막교회시절 조용기 목사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는 적극적인 신앙자세로 일관했다. 사도행전적인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해 기사와 이적이 끊이지 않자 교회는 인산인해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1961년 서대문으로 교회를 이전하면서부터 조용기 목사는 한국교회 차원에서 성령의 바람을 불러일으키며 2천 년 전 초대교회에서 불기 시작했던 ‘오순절 성령의 바람’이 당대에도 계속 재현되고 있음을 목회현장에서 검증했다. 이러한 오순절 성령운동은 당시 한국교회의 경직된 예배 분위기를 바꾸어 놓기 시작했다. 복음성가의 보급으로 보다 열린 예배를 지향하게 되었으며, 금식기도, 철야예배 등을 통해 성령의 임재하심을 체험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늘기 시작했다. 교회마다 구역조직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하면서 교회성장을 가속할 수 있었다. 1967년 월간 ‘신앙계’를 발간하면서 조용기 목사는 오순절 신앙의 보급과 한국적 정립에 관심을 두었다. 조용기 목사는 신앙계를 통해 한국교회 안에서 오순절 신앙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불식시켰으며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소개할 수 있었다. 1973년 교회가 여의도로 이전하면서 교회는 보다 변화되어 가는 시대 추이를 읽으며 세계화와 신학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순복음세계선교회와 국제교회성장연구원(C.G.I.) 등이 조직되어 선교에 박차를 기할 수 있었고, 현 국제신학연구원을 설립하여 순복음신학이 정립을 위해 정진할 수 있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조용기 목사의 목회철학, 신학사상, 지도력 등이 잘 발휘될 수 있도록 도왔으며 그 결과 순복음신학은 뚜렷한 오순절적 신학의 색깔을 지닌 토착화된 한국의 신학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지난 44년 동안 줄곧 가난에 찌들리고, 지치고 병든 절대 절망에 처한 사람들에게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선포함으로써 절대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러기에 순복음신학은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삶의 신학’이다.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바탕으로 한 ‘성경중심의 신학’이다. 성령의 임재와 사역을 강조하는 ‘성령 신학’이며 좋으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축복의 신학’이다. 초대교회의 신앙적 열정을 되찾으려는 ‘사도적 신학’이며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선교 신학’이다. 그리고 오순절 신학을 한국교회에 적용시켜 우리의 체질화된 신학으로 발전시킨 ‘토착화 신학’이다. 또한 이 땅에 교회 성장의 비전을 제시해 온 ‘교회성장 신학’이며 궁극적으로는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종말 신학’인 것이다. 이러한 특성이 있는 순복음 신학은 강력한 영적 침투력을 지닌 신학으로서 한국 교회와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이처럼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순복음신학과의 상호보완적 관계를 통해 세계 최대의 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순복음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한국의 기성교단들로부터 철저히 무시당해 왔을 뿐만 아니라 이단시되어 많은 핍박과 어려움을 겪어왔다. 이제 여의도순복음교회 산하 순복음교회들은 그와 같은 시련을 극복하고 당당히 세계 오순절 운동을 이끌어가는 주체적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이제 교회창립 44주년을 맞이하여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갱신과 변화를 이끄는 성숙한 교회의 위상을 마련하려고 분주하다. 교회의 미래는 건전한 신학 풍토의 분위기 속에서 가능하다. 이제 순복음신학도 개교회적이며 교단적 차원의 신학에 안주하지 말고 세계 신학계에 도움을 주며 보편적인 신학이 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신학화 작업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 2002.05.19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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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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