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야훼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야훼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야훼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이사야 11장 1∼5절)
예수님은 지혜와 총명의 성령과 동역하시고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뜻과 영광을 따르시며
공의로 심판하시고 평화 주시는 사랑의 메시야
예수님은 죄와 절망 가운데 살던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기적이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쁨의 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자로 오신다는 것은 구약 성경의 여러 곳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성령이 함께 하심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일생동안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무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침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그 위에 임하셨습니다. 또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고, 공생애 기간 동안 성령의 능력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시고 병든 자를 치유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 18∼19절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와 같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성령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일생동안 성령님과 동행하셨던 예수님은 제자들도 성령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약속을 주신 것은 제자들 역시 성령님과 함께 할 때에만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을 받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복음 증거가 급하다 할지라도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제자들이 감당할 수 없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존 스토드(John Stott)는 성령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세상에 보내시기 전에 먼저 성령을 교회에 보내셨다” 성령이 임하시면 예수님이 하신 일,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하던 일을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김은주 선교사님은 그의 책 『천국열쇠』를 통해 선교지에서 일어났던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간증합니다. 김 선교사님이 그곳에서 사역하는 동안 놀라운 성령의 역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성도가 이단 종교의 사람들을 불러 굿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선교사님은 급히 심방을 갔고, 이방종교를 섬기는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성경 말씀을 읽었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 결국 그들은 돌아갔지만 며칠 후 이상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들이 선교사님을 살해할 것이라는 소문이었습니다. 또 짚으로 인형을 만들어 칼로 찌르고 선교사님을 저주한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실제로 선교사님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선교사님은 금식기도를 한 후 순교의 각오로 그들의 접신장소로 가서 소리쳤습니다. “모두 나와라! 너희의 잡신이 강한가, 만군의 야훼 하나님께서 강하신가, 한번 붙어 보자고!” 그런데 그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후, 성도들이 “할렐루야”를 외치며 성전으로 몰려왔습니다. 그 이단 종교 사람들이 본부를 헐고 아예 이사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귀신이 떠나가고 병이 치유되며 하나님 나라가 전파됩니다. 우리 힘으로 되지 않는 일들이 성령의 능력으로는 됩니다. 스가랴 4장 6절은 “만군의 야훼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님은 지혜와 총명의 신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게 합니다. 모략과 재능의 신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게 합니다. 지식과 야훼를 경외하는 신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이 임하시면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언제나 성령님과 동행하십시오. 성령님과 함께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을 경외하심
성령으로 충만하셨던 예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으셨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을 경외케 하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이와 같이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 철저한 희생과 섬김의 삶,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순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한때 죄와 어둠의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이 임하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우리 안에 일어나는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자기중심의 삶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할 때 삶의 가장 큰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고,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 청년 바보의사』의 저자인 의사 안수현 선생님은 몸의 병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깊이 헤아릴 줄 아는 ‘참 의사’였습니다. 환자의 손을 붙잡고 울어주고, 돈이 없는 환자를 위해 병원비를 대신 지불하며, 일과가 끝난 후 일일이 찾아가 잠든 환자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는 불이익을 감수하며 파업이 아닌 환자를 선택하여 병원을 지켰습니다. 동료들의 비난 속에서도 그에게 의사란 환자 곁에서만 의미가 있다는 소신이 있었고, 또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으로 밤을 새우고 끼니를 걸러 가며 파업 병동을 지켰습니다. 33살의 나이에 일찍 삶을 마감한 그의 장례식장에는 4000명이 넘는 조문객으로 들어설 곳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그를 통해 주님의 사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우리 삶의 가장 큰 즐거움이요 가장 귀한 가치가 되어 있습니까? 잠언 1장 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야훼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십시오. 그것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을 본받는 삶입니다.
3.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공의로 심판하심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공의와 정직으로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계실 때 헌금함에 부자들이 많은 돈을 넣는 것과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가 부자들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부자들은 풍족한 중에서 그 일부를 넣었지만, 가난한 과부는 가난한 중에서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택하실 때에도 외모가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외모가 아니라 그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공의와 정직으로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당시 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이방의 압제로부터 구원할 군사적 영웅으로서의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군사적 영웅이 아닌 공의로운 재판장으로서의 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 이유는 유다 백성들이 앗수르나 바벨론 같은 이방 나라로부터 압제를 받았던 이유가 군사력이 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며 불의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유다 백성들에게서 공의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 백성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군사적 영웅이 아니라 그들의 의를 회복시킬 공의로운 재판장으로서의 메시야였던 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공의의 재판장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정직한 판단으로 가난한 자와 겸손한 자를 돌보시며, 공의로운 판단으로 악인을 멸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안에서 공의를 실천하며 언제나 정직하고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장차 완전한 공의로써 다스리는 재림의 메시야, 예수님을 소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4. 참 평화를 가져오심
성령으로 충만한 예수님께서 공의로 통치하실 때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한 마디로 평화입니다. 육식 동물인 사자가 하나님 나라에서는 초식 동물처럼 풀을 뜯습니다.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고 장난을 치고 놉니다. 그래도 아무런 해도 없고 상함도 없습니다. 온통 평화와 화목뿐입니다. 이 평화의 나라는 한 자리에 함께 할 수 없는 존재들까지도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도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호 2:18)
죄와 전쟁, 불의와 악독, 강포와 부르짖음, 미움과 분쟁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메시지는 사랑과 용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시면서도 자기를 못 박는 무리들을 용서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용서와 평화의 삶을 사셨듯이, 이제는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가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피에르 볼레(Pierre Boulle)가 지은 『콰이강의 다리』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계 2차 대전 때 일본군이 영국군 포로를 이용하여 콰이강에 다리를 놓는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중요한 장비가 없어졌습니다. 포로들의 소행이라 여긴 일본군은 셋을 셀 때까지 자수하지 않으면 모든 포로를 총살시키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한 병사가 “제가 범인입니다”라고 말했고 그 자리에서 총살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후 창고에서 그 장비가 발견되었습니다. 일본군의 실수였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모든 사람들이 목숨을 건진 것처럼,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 모두를 살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용서 받은 우리는 이제 미움과 다툼, 시기와 질투를 다 버리고 사랑과 용서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이 성탄의 계절에 서로 사랑하고 화해하고 용서함으로써 온전히 이루어질 메시야 왕국을 소망하며 지금 여기에도 평화의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남을 위해서 희생하지 않고 내가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더 빼앗고 가지려고 했던 우리의 이기주의와 교만과 탐욕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사랑의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 일생이 베풀고 나누고 섬기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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