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재정관
“돈,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두 가지 정체성에 관해 상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돈과 관련하여 크리스천이 경험하는 문제는 돈의 유무(有無)나 다소(多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돈을 다스리는 사람에게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돈이 권력이 되고 우상 또는 물신(物神)이 되는 것은 그 돈을 바라보는 사람의 윤리관과 신앙관 등에 달린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과연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이 어떤 신앙적 의미를 가지며, 크리스천에게 있어 돈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적 관점과 명확히 구분되는 기독교적 재정관을 이해하기란 어려우며, 돈이 야기하는 문제들을 지혜롭게 극복해 갈 수 없다. 크리스천은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되어 부름 받은 존재라는 강력한 소명의식’(첫 번째 정체성)을 가진다. 그러면서 동시에 수평적인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사명을 실현하기 위해 ‘세상으로 보냄 받은 존재라는 분명한 사명의식’(두 번째 정체성)을 가진다. 이렇듯 수직(소명의식-첫 번째 자기 인식)과 수평(사명의식-두 번째 자기 인식)이 교차하는 십자가의 신앙을 균형 있게 가지지 못한 사람은 참된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은 세상을 초월하여 이상적인 하늘나라에 거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시고 세상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사명자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는 균형 잡힌 영성을 추구해야 하며, 동시에 하늘나라가 아닌 세상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성취해 가야 한다. 이러한 두 가지 정체성을 갖는 크리스천에게 있어 돈을 바라보는 관점은 세상의 관점과 같을 수 없다. 크리스천은 돈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관점으로서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기 때문이다. 즉 크리스천은 돈에 의해 지배당하는 자가 아니라 그 돈을 맡기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분명하게 인식하여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돈을 사용할 줄 아는 자인 것이다. 또한 크리스천은 돈을 벌고 씀에 있어 명확한 신앙적 원칙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과 방법대로 돈을 벌고 쓰는 것이다. 아무리 선하게 사용된 돈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벌어들인 돈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것이 되고 만다. 또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었다 해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돈 역시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크리스천은 상상하기 힘든 거금이 주어진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방법이 아니면 당당하게 ‘아니오’라고 거절할 수 있어야 하며, 쉽고 빠르게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길이 아니라면 단호하게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청지기이기 때문이다. 가장 훌륭한 청지기는 위탁받은 돈을 가장 짧은 시기에 가장 많이 증식시키는 자가 아니라, 주인의 뜻을 바르게 헤아려 그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인 것이다. 크리스천의 재정생활에 대해 배우면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재물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둘째 하나님은 우리가 풍요롭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을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 표현한다. 성경은 ‘물질의 부요’만을 복이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히 6:12), 자손의 번성(창 1:22), 승리(창 24:60), 지혜로운 인생(잠 3:18), 그리고 고난(벧전 3:14; 시 119:71)까지도 복으로 언급하고 있다. 물론 물질적인 복도 약속하셨다(마 6:33). 크리스천은 “많은 재산”보다 “영적인 복”을 더 사모해야 한다(고후 9:10). 기독교 신앙의 주된 관심은 소유 그 자체가 아니라 존재이며, 존재간의 인격적인 관계에 있다. 돈이 아니라 그 돈을 사용하여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성취해 가는 존재 그 자체가 더욱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크리스천은 바로 그러한 존재 양식을 자신의 삶에서 실천해 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영적인 복에 초점을 맞추고 돈에 관한 하나님의 사명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성취해 갈 수 있다. 돈에 인격을 부여하고 돈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돈에 자신은 물론 타인의 신앙과 삶과 인격까지 지배당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돈을 하나님이 주신 사명 완수를 위해 필요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존재형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크리스천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며,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성취해 가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장석 목사(교회성장연구소)
  • 2011.12.0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물질, 나누고 섬길 때 가장 귀합니다”
  • 크리스천에게 있어 재물이 갖는 의미는 세상 사람들과 같을 수 없다. 크리스천에게 있어 재물은 은사이기 때문이다. 재물을 은사로서 여긴다는 것은 자신을 재물의 주인이 아닌 그것의 관리를 위임받은 청지기로서 이해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청지기는 단순히 재물을 가치있게 쓰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는 자이다. 그는 자신의 소유에서 하나님의 몫(각종 헌금, 십일조 등)과 다른 사람의 몫(구제 등)을 구분할 줄 안다. 그리고 그 몫에 합당하게 사용하고자 애쓴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의 소유 중 하나님의 몫과 다른 사람의 몫을 분별하여 재물을 나눔과 섬김의 자산으로 삼을 수 있을까? 한 작은 마을에 착한 구두수선공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이 할아버지의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내일 그대를 방문하러 가겠노라” 잠에서 깬 할아버지는 구둣방을 깨끗이 청소해놓고 예수님을 기다렸다. 그런데 밖을 내다보니 추운 날씨에 청소부가 청소를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청소부에게 차 한 잔을 대접했다. 점심 때가 되어도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다. 대신 헌 누더기 옷을 입은 여인이 어린아이를 안고 걸어왔다. 그들을 측은하게 여긴 할아버지는 발이 파랗게 얼어 있는 어린아이에게 신발을 선물했다. 이제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했다.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한 떼의 거지들이 나타났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먹을 스프와 빵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밤이 되었는데도 예수님은 오시지 않아 할아버지는 실망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예수님의 음성이 들렸다. “오늘 나에게 베푼 사랑에 감사하노라. 오늘 그대 가게에 세 번 방문했었노라. 한번은 청소부로, 한번은 누추한 여인으로, 한번은 거지로 말이네” 여기에서 우리는 “심판의 비유”(마 25:31∼46)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비유에서 모든 천사를 거느리고 이 땅에 다시 오신 예수님은 영광의 보좌에 앉으셔서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셨다. 그리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두 무리로 나누어 한 무리는 오른편에, 다른 한 무리는 왼편에 두셨다. 그리고는 오른편에 서 있는 자들에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고 칭찬을 하셨다. 그러나 왼편에 있는 자들에겐 반대의 이유로 심한 꾸중을 하셨다. 그런데 참으로 의미심장한 것은 두 부류의 사람들이 칭찬이나 꾸중을 받는 이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두 부류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동일한 질문을 하게 된다. “우리가 어느 때에 그렇게 하였나이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40). 우리는 예수님이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 하나’와 동일시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동일시의 관점은 위의 예화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구두수선공 할아버지는 오른편에 선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은 우리의 삶에 주님이 제기하시는 질문이며, 그에 대한 우리의 책임 있는 대답은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신앙적 행위이다.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우리의 가난한 이웃에 대한 책임 있는 대답, 곧 우리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해 보라고, 우리가 가진 믿음을 다른 이에 대한 헌신과 나눔을 통해 증거해 보라고. 이러한 주님의 요구를 외면하는 것은 곧 주님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재물을 은사로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있어 재물은 가난한 자들을 통해 제기하시는 질문에 책임있게 대답하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인 것이다. 은사로서의 재물은 그것을 자산으로 삼아 더 많은 재물을 더 빨리, 더 쉽게 소유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눔과 섬김이라는 하나님의 방법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장석 목사(교회성장연구소)
  • 2011.11.0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돈, 미래를 위해 계획하십시오!
  • 1888년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다이너마이트를 만든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일약 당대 최고의 명사가 됐고, 수많은 돈을 벌어 사람들의 관심과 촉망을 받는 인물이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신문 기사를 읽던 중, 깜짝 놀랄 만한 기사를 발견했다. “세계 최초로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해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폭탄 제조업자 알프레드 노벨(Alfred Bernhard Nobel)이 드디어 죽다” 이는 사실 동생의 죽음을 노벨의 죽음으로 착각한 오보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망 기사 앞에서 말할 수 없는 큰 충격과 도전을 받았다. “내 인생의 마지막도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닐까?” 그는 그 신문을 찢으며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다. 이것이 바로 인류 발전을 위해 수고한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노벨상이 시작된 이유이다. 론 블루(Ron Blue)는 ‘크리스천의 돈관리’란 책에서 성공이란 개념을 설명하며 하나는 ‘하나님께 부여받은 목표에 대한 끊임없는 성취’이고, 또 다른 하나는 ‘언제든지 필요할 때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중 전자의 정의는 영원한(장기적인) 것이고, 후자의 정의는 매우 단기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후자의 정의를 지나치게 세속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경험하는 크리스천은 필요할 때 하나님께 구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럴 권리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떠한 의미의 것이든 성공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 성공은 항상 특정한 목표에 결부돼 있다. 이는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모두가 공통적이다. 다만 양자의 차이점이 있다면 관점과 행동의 차이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현재의 시각만을 중시하는 반면, 크리스천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도 함께 존중한다. 즉 크리스천은 미래를 앞당겨 현재를 사는 사람이며, 우리의 행동에 대한 미래의 하나님의 평가를 항상 고려하며 오늘을 사는 사람이다. 위의 예화에서 노벨의 사고와 행동의 전환은 미래의 사건, 곧 그의 사망기사를 미리 접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현재의 노벨에 대한 미래의 평가는 노벨이란 한 사람의 삶을 변화시켰던 것이다. 크리스천에게 있어 성공과 그것과 결부된 목표는 세상 사람들과 동일할 수 없다. 우리의 목표는 소금과 빛의 역할(마 5:13∼16)을 다하는 것이고, 청지기로서의 사명(마 25:14∼30)을 완수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크리스천의 성공 역시 하나님께 받은 물질을 하나님께서 주신 목표를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를 염두에 둔 재정계획이 바르게 세워져 있어야 한다. 미래 설계에 관한 성경적 원리는 다음의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지나치게 미래를 확신하지 말고 언제나 지나친 확신보다 가변적 상황이 있음을 기억하며 자만하지 않는 것이 바른 처사이다. 특히 재정 계획을 세움에 있어 상황의 변화에 따른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즉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지나친 확신을 버리고 가변적인 상황이 있을 수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목표를 지나치게 경직적으로 잡지 말고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역사하실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방식으로, 그의 때에, 그의 재원으로 일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계획을 유연하게 세워야 한다. 둘째, 정당하지 못한 부도덕한 방법을 거부해야 한다. 이익에 눈이 멀어 뇌물을 상납하거나 투기하는 일은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과 같다. 미래를 설계한다는 것은 신앙적인 의미로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진술하는 것과 다름없다. 따라서 성취할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그 과정 역시 하나님의 뜻과 방식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4)라고 말했다. 셋째, 가장 확실한 투자에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 하나님을 자신의 영원하신 기업으로 삼는 것이 가장 확실한 투자이다. 성경에 따르면 우리 삶의 최우선 순위는 ‘하나님’(God first)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처럼 삶의 첫 번째 우선순위를 하나님에게 두는 자는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않고 하늘에 쌓아두려 한다. 그에게 있어 보물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 부여받은 선물로서 소유의 대상이 아닌 나눔과 섬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장석 목사(교회성장연구소)
  • 2011.10.0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돈, 지배받지 말고 다스리라”
  • 한 농부가 존 웨슬리 목사의 설교를 들으러 갔다. 웨슬리 목사는 마침 돈에 대해 설교하고 있었다. 설교 메시지는 세 단계로 선포됐다. “첫째, 여러분은 할 수 있는 만큼 돈을 많이 버십시오” 농부는 옆 사람을 툭툭 치면서 말했다. “저 목사님은 속에 무엇이 있는 분이야, 아주 훌륭한 설교구만!” “둘째, 할 수 있는 만큼 저축하십시오” 농부가 다시 흥분해서 말했다. “그렇지, 암 그렇구말구. 저축해야 잘 사는 법이지. 역시 웨슬리 목사님은 달라!” “그리고 셋째,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남을 위해 쓰십시오” 남에게 주라는 말씀에 농부는 안색이 변하여 이렇게 말했다. “저런, 저런, 한심한 설교같으니라구! 잘 나가다 다 망쳤구먼” 마르틴 루터는 인간의 회심에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것은 가슴의 회심, 정신의 회심, 돈지갑의 회심이다. 여기서 돈지갑의 회심이란 교회 사역을 위해 많은 헌금과 기부를 하고 이웃을 위한 구제에 열심을 품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첫째, 재물을 공급해 주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헤아려 순종하는 청지기가 되라는 의미이다. 둘째, 신앙에 있어 가슴과 정신의 회심 못지않게 구체적인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의 회심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는 그 행동의 회심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용어로 ‘돈지갑의 회심’이란 말을 사용했다. 왜냐하면 돈만큼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신앙적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존 웨슬리는 “돈지갑이 회개하기까지 당신의 회개를 믿지 않겠다”고 강한 어조로 말하기도 했다. 단지 알고 이해해 입과 가슴으로만 회개하는 것은 참된 회개가 아니라 그것을 행함으로 옮길 수 있는 결단과 실천만이 참된 회개라는 의미이다. 이렇듯 물질적 소유에 대한 관점의 전환은 우리의 삶과 신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그 중요성에 못지않게 그것의 실천은 매우 어려운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위의 농부의 이야기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삶 속에서 돈지갑의 회심과 회개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돈을 쓰는 것을 값비싼 희생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용할 수 있는 재원(財源)은 한정되어 있는데, 이를 교회와 타인을 섬기는 데 사용하라니, 이것만큼 불합리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받은 자의 행복만큼 비례해서 주는 자의 희생이 증가하는 제로섬게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버려야 할 잘못된 생각이다. 그리스도인은 발상의 전환, 관점의 전환, 행동의 전환이라는 삼각형의 세 변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것은 재물의 공급자를 유한(有限)한 자신으로 상정하지 말고 무한(無限)한 하나님으로 상정하는 발상의 전환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재물에 대한 하나님의 영역(소유권)과 인간의 영역(관리권)을 구분하는 관점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즉 재물의 소유자는 하나님이며, 자신은 그 재물의 관리를 위임받은 청지기라는 자기 정체성이 분명히 확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돈을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위임받은 관리의 대상으로 볼 수 있게 되며, 자기안위나 자기만족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나눔과 섬김의 수단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발상의 전환, 관점의 전환을 통해 물질적 소유에 대한 분명한 행동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주는 자나 받는 자나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윈-윈 게임, 곧 포지티브섬 게임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무한한 은혜의 공급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우리가 기쁘게 나누고 섬긴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하나님은 축복의 축복을 더해 주실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발상의 전환, 관점의 전환, 행동의 전환이 상호 균형을 이룰 때에만이 우리는 돈으로부터 지배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0∼11). 이장석 목사(교회성장연구소)
  • 2011.09.0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돈을 바르게 쓰는 것도 중요하다!
  •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돈을 어떻게 버느냐 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돈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이다. 즉 돈을 버는 데에도 분명한 철학이 있어야 하지만, 돈을 쓰는 데에도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무한한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뜻과 방법대로 돈을 벌고 쓰는 자가 돼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부와 재물이 자신에게 공급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감격해 하지 않으며, 그보다는 하나님의 뜻과 방법대로 쓸 수 있다는 사실에 더욱 감사하고 기뻐한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돈을 받으나 움켜쥐지 않으며, 주님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돈을 보내야 할 때가 되면 자유롭게 흘러 보낸다. 이러한 인식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과 방법대로 번 돈을 그리스도인답게 쓰는 방법, 곧 그리스도인의 바람직한 재정지출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계획을 세우고 지출하라.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혜를 구하면서 수입과 지출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태도이다. 계획을 세울 때는 모든 지출 항목과 그 중요도를 적어보라. 지출계획의 근본원칙은 실제 수입에 근거하여 세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돈에 관한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매사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혜를 구하면서 수입과 지출에 대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따라서 지출 계획을 세우기에 앞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둘째, 필요(needs)와 욕심(desires)을 구분하라. 지금은 소비를 부추기는 시대이다. 돈이 없다면 빚을 내어서라도 사라고 유혹한다. 그러므로 물건을 구입할 때는 정말로 자기에게 꼭 필요한 것인지, 이 물건을 사는 대신 더 급하게 돈을 써야 할 곳은 없는지, 이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시험에 드는 것은 아닌지 고려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평안하게 살기를 원하시지만, 우리가 필요 이상의 사치를 누리는 것은 원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자원은 나의 필요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도 사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 빚지지 않도록 신중하라. 물건을 살 때나 투자할 때는 현재의 확실한 수입에 맞추어 결정하는 것이 원칙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투자할 능력이 안되면서 돈을 빌려서라도 주식이나 각종 금융 자산에 투자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미래의 성공여부에 따라 돈을 갚을 수 있을지가 결정되기 때문에 자칫 재정적인 재앙을 자초할 수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빚을 졌다면 그 빚을 갚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넷째, ‘나누는 복’을 누리라.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주는 것보다 받는 것에 익숙하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더욱 힘쓰라고 말한다. 손 마른 사람에게 손을 펴라고 말씀하신(눅 6:6∼10)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똑같은 말씀으로 명령하신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내 것으로 만들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움켜쥐려고만 한다. 손을 펴서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준 적은 많지 않다. 그러나 주님은 영적으로 메마른 우리에게 움켜쥔 손을 펴라고 명령하신다. 남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복이고, 남에게 베풀 수 있는 마음 자체가 은혜인 것이다. 다섯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투자하라.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 예를 들면 복음전도, 구제 및 지역사회봉사활동을 위해서는 많은 재물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은 정직한 수입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과 함께 하나님의 선한 사업을 위해서 넉넉하게 쓸 줄 알아야 한다. 고린도후서 9장 8절에 보면,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능히 모든 은혜를 우리 모두에게 넘치게 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맞추어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질을 활용하여 하나님의 일을 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풍성한 돈을 벌 기회를 소망할 뿐만 아니라 그 돈을 나누고자 하는 요구가 있어야 한다. 돈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버는 것 못지않게 하나님의 뜻과 방법대로 쓰는 것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사역을 위해 돈을 벌고 쓸 줄 아는 사람이 돼야 한다. 바로 그러한 자가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않고 하늘 창고에 쌓아두는 자인 것이다. 이장석 목사(교회성장연구소)
  • 2011.08.0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돈을 어떻게 벌어야 하나’
  •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하나님의 뜻과 방법대로 돈을 벌고 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아무리 선하게 사용된 돈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벌어들인 돈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것이 되고 만다. 또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었다 해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돈 역시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무한한 사랑의 공급자이신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며, 하나님의 뜻과 방법대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돈을 벌고 써야 할 것이다. 이 때 하나님은 그에 합당한 은혜의 보상을 부어 주실 것이다. 옛 속담에 ‘개처럼 벌어 정승같이 쓴다’라는 말이 있다. 물론 이 말이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성실하게 땀 흘리고 노력해 번 돈을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해 훌륭하게 쓴다는 의미라면 이것만큼 아름다운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돈을 버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이 속담을 전자의 의미보다는 후자의 의미로 받아들일 때가 많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조차 다른 사람들의 눈물어린 희생을 담보로 벌어들인 돈 앞에서 행복하게 미소 짓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돈을 선하게 사용하는 것 못지않게 돈을 어떻게 버는가 하는 문제도 매우 중요하다. 이에 성경적인 재정수입을 다음의 네 가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째,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하라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은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 때 주어지는 결과이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순종하면 주님께서 우리 일과 사업을 축복하신다.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하듯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의 주된 관심은 돈이나 재물이 아니라 그것들을 올바르게 다스리며 관리해야 할 인간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돈과 재물, 명예, 권력 등과 같은 소유가치를 위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망각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해 버리는 경우가 많으나 그리스도인들은 그와 정반대의 길을 따른다. 기독교 신앙의 주된 관심은 소유 그 자체가 아니라 존재이며, 존재간의 인격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질적인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그것의 조명 하에 타인과의 관계를 점검해야 한다. 둘째, 정당한 방법을 선택하라 정직하면 손해를 볼 수도 있지만 결국 정직한 삶에 대한 합당한 인정을 받기 마련이다. 돈을 버는 것과 정직한 것은 서로 어울릴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정직하게 살면 손해를 보고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 말은 사실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직하다고 반드시 손해를 보고 가난해 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자신의 뜻과 방법대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땀 흘리는 그리스도인에게 그에 합당한 은혜의 보상을 부어 주신다. 그리고 그렇게 정직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을 통해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과 방법이 통하는 세상으로 만들고자 하신다. 셋째, 성실하게 일하라 우리의 일터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역지이다. 하나님께서 늘 보고 계시며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을 섬긴다는 마음 자세를 갖는다면, 모든 일에 성실하게 임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일터를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역지라는 소명감을 가지고 성실하게 일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은 우리의 일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꿈을 성취시킬 수 있음을 믿는 것이고 우리의 꿈을 성취시켜 주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다. 넷째, 삶의 우선순위를 올바로 하라 인생에는 돈을 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다(신앙, 건강, 가정, 친구 등). 가장 큰 성공은 예수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이며, 가정을 아름답게 지키는 것이다. 스티븐 코비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과 ‘원칙 중심의 리더십’이란 책에서 “성공적인 리더는 긴급한 일이 아닌 중요한 일부터 먼저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일을 행할 때에 우선순위를 바로 정하고 가장 중요한 일부터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차선에 해당되는 일을 하기 위해 정작 가장 중요한 일들을 놓쳐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돈보다 더 중요한 가정, 건강, 신앙, 친구 등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 결과 돈은 많이 벌었을지 몰라도 행복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불행해지는 모습을 자주 본다. 따라서 우리는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돈을 무엇 때문에 버는지, 돈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잊어서는 안 된다. 가장 큰 성공은 영적 성장과 가정의 평안이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16:26)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돈 때문에 희생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장석 목사(교회성장연구소)
  • 2011.07.0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물질과 신앙생활
  • 오늘날 돈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갖지 않고는 우리의 삶과 신앙을 올바르게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다. 돈은 우리 생활의 여러 측면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단 한 순간도 돈 없이 살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통계 자료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이 느끼는 삶의 문제 중에서 물질로 인한 문제가 70%를 넘을 정도라고 한다. 이는 물질이 신앙생활과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다. 따라서 돈에 대한 분명한 관점 없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에 대해 마틴 루터는 “가슴의 회심과 정신의 회심 못지않게 돈지갑의 회심이 중요하다”고 했으며, 요한 웨슬레는 “돈지갑이 회개하기까지 당신의 회개를 믿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여기서 ‘돈지갑의 회심’과 ‘돈지갑의 회개’란 많은 헌금을 내고 구제에 열심을 품으라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는 먼저 재물을 공급해 주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헤아려 순종하는 청지기가 되라는 것이다. 영적인 사람일수록 물질의 노예가 되거나 물질로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단지 수입을 늘리는 것만으로는 물질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또한 크리스천 가운데 돈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나 염려로 인해 신앙생활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거나, 물질의 축복을 죄악시하거나, 무관심과 무지로 인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돈이 많으면 행복하다’,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 ‘가난해야 경건하다’, ‘돈은 악의 뿌리’라는 생각 등은 돈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이다. 그러므로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은 물질적 소유에 대한 기본적 자세를 정립해야 한다. 이를 위해 크리스천으로서 성공적인 재정 관리를 위한 몇 가지 지침을 소개하고자 한다. 1)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라 성경은 우리가 재물의 소유주가 아니라 청지기라고 가르치고 있다.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한 우리는 재물의 속박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계속해서 돈과 재물로부터 영향과 지배를 받게 된다. 비록 힘들게 느껴지더라도 소유권을 하나님께 돌려드린 후 청지기 자리로 물러서게 되면 재물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된다. 2)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소유했을 때 만족감을 갖게 되지만 그 만족감은 얼마 가지 않아 시들게 된다. 인간의 소유욕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는 나보다 많이 가졌거나 잘난 사람들이 항상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남들과 비교함으로부터 얻어지는 만족감 역시 변하기 쉽고 상대적이어서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근본적으로 자족이란 내가 얼마를 가졌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내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고 내가 주님께 소유된바 되었기 때문에 자족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선 부유해질 필요도, 가난해질 필요도 없다. 오히려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는 태도가 가장 바람직하다. 3) 돈을 우상화하지 마라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이요, 재물은 이용의 대상일 뿐인데, 사람들은 이와 정반대로 하나님을 이용하려 하고 재물을 사랑하며 살아간다”고 말했다. 하나님과 재물, 이 둘 중에서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는 사람만이 재물을 올바르게 다스리며 관리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얻게 된다. 4)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십일조) 하나님께서는 물질을 우리에게 모두 주셨다. 우리는 그분께 다시 돌려드려야 할 의무가 있다. 십일조와 헌금은 감사의 예표이며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기본자세이다. 그중에서도 십일조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소유권을 인정하고 ‘재물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는 적극적인 믿음의 표현이다. 5) 이웃에게 나누어주라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이 책임을 외면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차적인 관심을 저버리는 것이다. 재물은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으로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해야 할 도구이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물질의 양(量)이 축복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물질의 양이 아니라, 그 물질을 선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더 큰 축복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의 의를 위해 물질을 쓸 때, 그것이 축복이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늘에 쌓는 생활이란 양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얼마나 사용했는가의 문제이다. 물질과 신앙생활은 이 세상에서 가장 실제적인 삶의 문제이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살아갈 때, 이 모든 것을 더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장석 목사(교회성장연구소)
  • 2011.06.0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예수님의 물질관
  • 성경에 돈으로 상징되는 물질적 부에 대한 말씀이 약 3000군데나 기록돼 있다. 그만큼 돈과 신앙이 얼마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성경은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누가복음 16장 13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는 말씀은 이런 속성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재물이 우리의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서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 생활 속에서 돈의 힘과 영향력이 하나님의 위치를 대신할 수 있는 또 다른 신, 즉 맘몬으로 간주될 수 있을 만큼 위협적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돈을 사용하되 돈을 섬길 만큼 돈의 지배를 받으면 안 된다는 경고를 내린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결코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것을 성경은 역시 경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르게 돈을 사용하고 관리하기 위해서 예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재정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재물에 대해 매우 극단적인 이해를 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물질이면 모든 문제(심지어 신앙문제까지)를 해결할 수 있다는 물질 주의적 관점이나 그와는 반대로 물질을 악한 것으로 간주하는 금욕주의적 관점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돈과 재정을 운영하고 관리해야할까?’하는 질문의 답은 예수님이 돈과 재물을 어떻게 바라보셨는지를 살펴보면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의 재물관이 그리스도인의 재물관을 형성하는 기본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건강한 크리스천의 재정관을 위한 예수님의 물질관을 크게 4가지로 소개해 보고자 한다. 첫째는 부요의식이다. 예수님은 부유한 사람을 무조건 정죄하시거나 재물 자체를 죄악된 것으로 말씀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은 물질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리스도인은 물질적으로는 풍성하지만 영적으로는 빈곤하거나, 반대로 영적으로는 풍성하지만, 물질적으로는 빈곤한 자가 되는 것을 신앙의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물질적인 측면과 영적인 측면이 ‘풍성한 균형’을 이루는 부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는 축복의식이다. 예수님은 물질적 가난을 복된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오히려 풍성히 복을 주셨다. 넉넉하고 풍족한 것을 즐기시며 기뻐하셨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풍성히 복을 부어 주셨다. 셋째는 소유의식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음을 믿으셨다.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공급하심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6:26, 28).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들의 소유를 버리고 따르도록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지상의 모든 것들을 버리고 자신을 따라나선 제자들에게는 풍성한 보상을 약속하셨다(마 19:27∼30; 막 10:28∼31). 넷째는 목적의식이다. 예수님은 부자됨에 대해서 경계를 하신 것이 아니라 부자가 재물을 선하게 사용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경고를 하셨다(눅 16:19∼31).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모든 재물은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수단으로 사용돼야 한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부자는 목적의식이 분명한 부자이다. 즉 재물 그 자체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부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수단으로 인식하고 실천하는 부자인 것이다. 이처럼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는 부요함, 곧 사랑과 은혜의 자원으로 위임하신 부(富)가 예수님이 돈과 재물을 바라보는 관점인 것이다. 돈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삶의 현실이다. 이기적인 욕망을 따라 돈을 맘몬으로 섬길 것인지,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로서 재물을 지혜롭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이용하며 누릴 지는 우리의 선택 여하에 달려 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질을 사용하라(use)고 주신 것이지 섬기라(serve)고 주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사용하거나 섬기고 있지 않는가? 재물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는 법을 배우라. 두 가지 얼굴을 가진 야누스와 같은 속성을 가진 재물을 잘 사용하기 위해 예수님의 재물관을 가슴 속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이장석 목사(교회성장연구소)
  • 2011.04.2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PDF

    지면보기

  • 행복으로의 초대

    PDF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