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환 교수의 알기쉬운 평신도조직신학
종말론 (8) - 새하늘과 새땅, 새예루살렘
  • 최후의 심판인 ‘백보좌심판’의 결과 창조 이후에 주 안에서 육이 죽은 자들, 특히 순교당한 모든 자들은 첫째부활에 참여하게 된다(계 20:5~6). 이들은 둘째 사망(불과 유황못에 들어감)이 없이 하나님이 계신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가 살게 된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모든 자들과 사탄과 그의 하수인격인 귀신들은 둘째 사망인 불과 유황못(지옥, 마 5:22)에서 세세토록 밤낮 고통을 받으며 거하게 될 것이다(계 20:10).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성은 최후의 왕국으로서 지금까지 언급되고 존재해 왔던 왕국과는 전혀 다른 왕국이다. 왜냐하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없어진 후에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 보내신 것이기 때문이다(계 21:1~2). 새 예루살렘성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난 후에 세워 지는 성인데 이 성의 성질과, 이 성에 거하는 사람들과, 이 성 안에 거하는 사람들의 특권을 설명하면서 종말론을 마친다. 첫째, 새 예루살렘성(城, city)의 성질은 영적인 의미 보다는 문자적 의미로 주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 성은 기초와 문과 성곽과 길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 모양은 정육면체(정입방체)이다.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12,000스타디온(약 1,500mile, 2,000km)으로서 열왕기상6:20에 나오는 지성소의 모양과 동일하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성은 그 자체가 지성소인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왕 같은 제사장(벧전2:9)으로서 그 안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복된 교제를 나눌 것이다. 이 성의 빛은 귀한 보석인 벽옥과 수정같이 맑게 보였다(계 21:11). 이 성의 성곽(城郭, 성벽 wall)의 한 면에 세 개씩 문이 있어서 동서남북 네 면의 문들을 모두 합하면 열두 문이다. 열두 문의 재질은 진주이고, 성 안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황금으로 되어 있다(계21:21). 각 문 위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들의 이름이 하나씩 써 있다(계 21:12~13). 그 성의 기초석은 열두 개의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계 21:19,20), 그 위에 주님의 열두 사도들의 이름이 써 있다(계 21:14, 참조 엡 2:20). 성곽의 기초석을 이루는 열두 보석은 구약시대 대제사장의 흉패에 붙였던 열두 보석과 일치한다(출 28:17~21, 39:10~14). 둘째, 이 성에 거하는 사람들은 만유에 주재(主宰)가 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이다(계 21:3).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것들을 책임져 주신다. 다른 말로는 이 사람들은 믿음으로 이기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께서 소유하고 계신 모든 것에 대하여 상속자가 되는 사람들이다(계 21:7). 또 다른 말로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아내, 곧 신부로 언급되는 사람들이다(계 21:9, 참조 요 14:2). 즉, 예수님으로 믿음으로 말마암아 구원을 받아 예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다(계 21:27). 그 성에 거하는 사람들의 자격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고 예수님의 신부로 비유하고 있다. 셋째, 이 성에 거하는 사람들의 특권은 어둠이 없는 빛의 삶이다. 왜냐하면,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계 21:23)이기 때문이다. 그 성에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다시는 저주가 없고(계22:3), “만국 백성들과 땅의 왕들이 자기의 영광”(계 21:24)을 가지고 사는 곳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세세토록 왕노릇 할 수 있게 특권을 주셨다(계 22:5). 그 성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다”(계 21:4)고 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곳의 생명나무를 통하여 치료하시기 때문이다(계 22:2). 주님께서는 이 계시의 말씀에 다른 말을 더하는 자는 기록된 재앙들 더할 것이고, 제하는 자는 거룩한 성에 참여함에서 제하신다(계 22:18~19)고 하신다. 그 주님이 속히 오신다(마라나 타:초대교회의 인사말, 고전 16:22)고 하신다(계 22:20). 아멘. ※ 이번호를 마지막으로 ‘평신도 조직신학’ 연재를 마칩니다. 이재환 목사(순복음영산신학원)
  • 2010.02.21

    종말론(7) - 천년왕국 이후 심판의 날
  • 이 지상의 마지막 왕국인 천년왕국을 마감하면서 주님은 이 기간 동안에 생육되고 번성된 이방나라들의 백성들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하여 천년 동안 무저갱에 가두었던 사탄을 잠시 풀어 놓는다. 그리고 사탄으로 하여금 이방나라들의 우두머리들을 충동시켜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에 참여하게 만든다. 이것을 ‘곡과 마곡의 전쟁’이라고 부른다(겔 38:2~6, 계 20:1~3). 이 전쟁은 천년왕국 동안에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는 계기가 된다(계 20:7~8). 주님께서는 이 전쟁을 끝내시면서 지상 삼차원의 세계의 사람들(천년왕국동안 살았던 신자들과 불신자)이나 영계 사차원의 세계의 모든 무리들(천사들, 마귀, 귀신들)이나 창조부터 지금까지 이 세상에 존재해왔던 모든 사람들(신자들, 불신자들)을 심판하신다. 이 심판은 이 세상 최후의 심판으로 ‘백보좌 심판’이라고 부른다(계 20:11). 이 심판대 앞에서 모든 무리는 두 종류, 즉 양과 염소의 무리로 나눈다(마 25:31~36). 천년왕국 동안 육신을 가지고 주님을 믿던 사람들은 양이고, 불신하던 사람들은 염소이다. 창조 이후 이미 구원을 받아 천국(아브라함의 품; 눅 16:19~26) 또는 낙원(눅 23:43)에 있는 무리는 양이요, 구원을 받지 못하고 음부(눅 16:23)에 있는 무리는 염소이다. 천사들은 양이요, 마귀와 그의 부하 귀신들은 염소이다. 나눈 무리들을 요약하면 크게 세 종류의 심판으로 나누어진다. 신자들의 심판과 불신자들의 심판과 사탄과 귀신들의 심판이다. 첫째로, 신자들에 대한 심판이다. 여기에 속한 무리는 예수님을 믿다가 죽은 후에 영이 부활하여 휴거한 사람들, 대환란 전에 몸이 변화하여 휴거한 사람들, 천년왕국동안 육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던 자들이다. 이들의 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하여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형벌의 심판은 없고(요 3:18, 5:24, 롬 8:1,33), 자신들이 봉사한 일에 대한 상급을 받을 것이다(고전 3:13~15). 상급의 결과 이들이 거할 곳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수도 새 예루살렘성이고, 이들이 받을 특별한 상급은 면류관으로 나타나는데 다섯 종류가 있다. ‘의의 면류관’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을 지키고, 달려갈 길을 다간 승리자에게 주어진다(딤후 4:7~8). ‘생명의 면류관’은 시험이 다가와도 죽도록 충성한 자들에게 주어진다. 순교자들이 받는 면류관이다(약1:12, 계2:10). ‘영광의 면류관’은 목사들과 장로들과 같이 양무리를 치는 목자들에게 수여되는 면류관이다(벧전 5:4). ‘썩지 않을 면류관’은 신앙생활에 절제를 통하여 믿음을 지킨 성도들이 받는 면류관이다(고전 9:25). ‘기쁨 또는 자랑의 면류관’은 잃은 영혼을 주님께 인도한 자들에게 주는 면류관이다(살전 2:19). 둘째로, 불신자들에 대한 심판이다. 여기에 속한 무리는 예수님을 불신하고 죽은 후에 음부에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눅 16:23), 천년왕국동안 육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지 않고 불신하던 자들이다(계 20:11~14). 이들에 대한 심판에 대하여 두 가지 양상이 있다. 이들은 ‘책들에 기록된 대로’ 받는 심판이다(계 20:12). 이 책들은 성경책들이고, 특별히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예수님도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요 12:48)고 하셨다. 다음으로 이들은 행위대로 받는 심판이다. 그 심판에는 등급에 대한 암시가 있다(눅 12:47-48). 이들은 육으로 한번 죽은 후에 영원한 불못에 들어가기 때문에 둘째 사망이라고 부른다(계 20:14). 셋째로, 사탄과 그의 부하들인 귀신들에 대한 심판이다. 먼저 사탄은 대환란 동안에 하늘에서 땅으로 내어 쫒기고(계 12:7~9), 예수님의 지상 재림 때에 결박을 당해 천년동안 무저갱에 갇힌다(계20:1~3). 무저갱에 있다가 천년왕국 끝에 곡과 마곡의 전쟁을 위하여 잠시 풀려난 사탄(마귀)은 심판을 받기 위하여 백보좌 심판대 앞에 설 것이고, 그들은 불신의 영혼과 마찬가지로 심판을 받아 불못에 던짐을 받고, 그의 하수인 적그리스도(짐승)와 그의 하수인 거짓선지자와 더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을 것이다(계 20:9~10). 이재환 목사(순복음영산신학원)
  • 2010.01.17

    종말론(6) - 대환란의 끝 아마겟돈 전쟁
  • 대(칠년)환란의 끝은 아마겟돈 전쟁이다. 지상에 임한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의 하수인 적그리스도(짐승)와 그 짐승이 불러 모은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을 입에서 나오는 검으로 죽이고 전쟁을 끝낸다(계 19:19∼21). 그리고 그것들의 괴수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계 20:2∼3)하시고, 이 지상 위에 “천년왕국(The Millennium)”을 세우신다. 이 왕국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지상을 다스릴 천년이란 기간으로 요한계시록 20장에 6번이나 언급되어 있다. 천년 왕국 동안에 다스릴 백성들은 마지막 대환란 동안 휴거하지 못하고 이 지상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육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계 13:7∼10)로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사탄이 무저갱에 결박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천년 동안 편안한 가운데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다(사 2:1∼5, 11:6∼9). 인간의 수명이 천년 내내 연장될 수도 있지만, 육적인 죽음이 있을 수 있다(사 65:20). 지상에 임한 예수님은 휴거된(부활한) 성도들과 함께 천년 동안 그 사람들을 다스리며 왕 노릇을 할 것이다(계 20:4,6). 천년왕국의 정체성을 알기 위해서 그리스도에 관하여, 교회에 관하여, 이스라엘에 관하여, 열방에 관하여, 사탄에 관하여, 자연에 관하여, 일반적 상태를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이 지상에 존재하시며 그의 조상 다윗의 위에 앉아 계실 것이다. 그는 천하를 통치하신다(렘 23:5∼6, 사 11:3∼5). 그는 두 가지 사실을 확정짓는데, 우주적인 평화(사 2:4)와 우주적인 공의(사 11:4∼5)다. 둘째로, 교회는 휴거된 상태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열방을 통치할 것이다(계 20:4,6).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여왕이다. 그런 만큼 교회는 그의 보좌에 앉아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이다(계 3:21). 셋째로, 이스라엘은 재집결한다(겔 37:1∼4, 사 11:10∼12). 모든 나라들 가운데 이스라엘이 중심이 되는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신 32:8∼10). 이스라엘이 이방에 거하는 사람들에게 야훼를 경외하며 예배하도록 지도하는 선교사와 사명자의 역할을 할 것 같이 보인다(사 61:4∼11). 넷째로, 이방나라와의 관계에서 천년왕국 동안에 이 지상에는 이방나라들이 있을 것이다(계 20:7∼8, 사 2:1∼5). 그리스도께서 모든 나라들이 포함된 왕국을 포함된 왕국을 통치하실 것이라는 사실이 다니엘의 환상가운데도 나타났다(단 7:13∼14). 다섯째로, 사탄은 결박당하여 천년동안 무저갱에 내어던진다(계 20:1∼3). 사탄의 하수인 귀신들도 함께 감금됨이 분명하다(계 19:19∼21). 이 동안에 사탄은 과거에 해오던 것처럼 열방을 미혹하지 못한다. 여섯째로, 자연은 예수님께서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마 19:28)가 바로 이 때이다. 피조물의 재생이다. 피조물의 세계는 대환란의 결과로 인하여 비통을 안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지상 재림하실 때, 큰 지형적인 변화가 생긴다(슥 14:4∼8, 사 35:1,6∼7). 잔인한 동물도 성질이 변한다(사 11:6∼9). 비가 풍부하고 땅이 기름지게 된다(욜 2:22∼27, 사 35:6∼7). 일곱째, 일반적인 상태는 큰 기쁨과 행복의 기간이다. 많은 사람이 치유를 받는다(사 35:5∼6). 환희와 즐거움을 얻을지언정 슬픔과 한숨은 사라진다(사 35:10). 물질적 번영과 안정의 시기다(미 4:2∼5). 사람들이 더 이상의 전쟁을 말하지 않는다(사 2:4).
  • 2009.12.20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 조직신학(XXXVI) - 교회론(6)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두드러지게 비유했다. 그 이유는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초대교회 당시에도 인간에게 있어서 머리가 몸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와 같은 적용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비유 외에도 성경 속에는 교회에 적용된 비유가 무수히 많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어떤 비유도 교회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관계, 신자와 신자와의 관계, 신자와 세상과의 관계를 완전히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에 나타나는 교회에 대한 25가지 비유들을 추가해서 설명함으로 교회의 전체 개념을 좀 더 잘 알아본다. 첫째, 주님의 가족으로서의 교회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 6:9)라고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면서 아바(Abba)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과 더불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우리의 맏형이 되신다(히 2:11, 12). 히브리서는 신자들을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라고 선언한다. 둘째, 신자들의 친교로서의 교회다. 친교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코이노니아인데, 이 말은 ‘공동으로 무엇을 갖고 있는 사람들’ 또는 ‘어떤 사회에 속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교회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공동의 믿음을 통해 공동의 구원을 갖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모임이다. 셋째, 운동선수의 팀(team)으로서의 교회다. 운동경기는 그리스(헬라)와 로마 세계에서도 오늘날 만큼 성행했다. 예리한 관찰자 바울은 운동경기의 비유를 자주 사용했다. 허공을 치는 자(고전 9:26), 달음질하는 자(고전 9:24, 갈 2:2, 빌 2:16), 경기자(딤후 2:5) 등이다. 교회를 운동 경기에 가장 잘 비유한 말씀인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빌 1:27)에서 협력이라는 단어는 ‘함께’와 ‘경쟁’의 합성어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팀으로 단합하여 일하기를 원했다. 넷째, 주님의 군대로서의 교회다. 교회가 군대라는 개념은 아마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에게 언짢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가 피할 수 없는 흑암의 세력과의 싸움(영적 전쟁)을 언급하고 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1, 12) 교회는 군대로서 실전에 참여하고 있다. 다섯째, 야훼의 양무리로서의 교회다. 목자의 비유는 아주 친밀하다. 지역 교회의 영적 지도자는 일반적으로 목사로 불리워지며, 회중은 양무리로 언급돼진다. 비록 영적인 지도자로서의 ‘목사’라는 단어가 신약 성경에 단 한 번밖에 나타나지 않지만, 바울과 베드로 모두는 목사에 대한 생생한 예를 든다(행 20:28). 베드로는 부활하신 이후 세 번이나 반복하여 부탁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잘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요 21:15∼17). 여섯째, 야훼의 학교로서의 교회다. 예수님은 주(master) 또는 선생(rabbi)으로 불리웠는데 그 말들은 ‘가르친다’는 말에서 유래 됐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을 설교자보다는 스승으로 훨씬 더 많이 언급하고 있다. 지역교회도 처음부터 가르치는 장소로 사용됐다는 사실은 지상명령을 통하여 아주 확실해 졌다(마 28:19, 20). 일곱째, 종 또는 청지기로서의 교회다. 교회 생활에서 중심이 되는 말은 섬기는 사람이란 단어이다. 이 말은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을 의미하는 헬라어에서 유래된 사자(minister), ‘집안일을 돌보는 하인’에서 유래된 청지기(steward), ‘노예’를 의미하는 종(servant)인데 하나님의 교회에서 보직을 가지고 일하는 자들, 사역자들, 일꾼들 및 지도자들이 모두 하인들이었다(마 2:27, 28, 벧전 5:3, 고전 4:1, 2, 롬 1:1).
  • 2009.04.19

    교회에서 행해지는 예식, 침례와 성찬
  • 교회 내에는 중요한 성사(聖事 sacrament), 예식(禮式 rite) 또는 의식(儀式 ordinance)이라는 말들이 있는데 교회사에서는 나타나지만 성경 상에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성사는 ‘새로 입대한 군인들의 충성 맹세’라는 뜻이 있고, 예식은 ‘정규성과 거룩한 의도를 가지고 행함’이라는 뜻이고, 의식은 ‘기독교의 핵심 진리를 제시’라는 뜻으로 보편적으로, 개인적인 의무성을 지닌다. 이런 의미들은 교회 안에서 거의 동일한 의미로서 사용하고 있다. 신교(protestant)에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분명하고 확실하게 명령하신 두 가지 침례와 성만찬을 의식으로 준수하고 있지만, 구교(roman catholic)에서는 일곱 가지를 의식으로 지키고, 교회사에서는 열두 가지를 의식으로 지키기도 한다. 여기서는 신교의 두 가지 의식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첫째, 침례(baptism)이다. 예수님께서 침례를 성례(성사)로 정했다는 것은 마태와 마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에 분명히 나타난다(마 28:19, 막 16:16). 예수님께서는 친히 그의 선구자인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심으로 교회에 모범을 보이셨다(마 3:13∼17).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를 주고 있다. 먼저 침례의 방법은 침수이다. 이 말은 헬라어의 밥티죠의 의미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침례 받으신 방법에 대한 성서적 기술을 살펴볼 때, 분명히 물에 완전히 잠기는 것이다. 다음으로 침례의 형식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라고 성경은 기술하고 있다.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 받는다는 말은 앞의 긴 형식을 간략하게 생략한 것이며, 침례 요한의 침례와 구별되는 기독교인의 침례를 강조한 것이다. 신약에서 침례는 다음과 같은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죄의 제거와 함께 사용되었다(행 22:16). 중생과 관련이 있다(요 3:5∼7).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 또는 죽음에 관련이 있다(갈 2:20, 3:27).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갈3:26,27). 성령을 받는다(고전 12:13). 교회에 소속이 된다(행 2:41). 그리고 구원의 은사와 관련이 있다(요 3:5). 둘째, 성찬(eucharist)이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마지막 유월절에 자신의 대속의 죽음에 대한 기념으로써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의식을 제정하셨다. “또 떡을 가져 감사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로 하셨다. 성찬의 의미는 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고(고전 11:24),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 피흘림에 대한 기념이고(고전 11:24), 그 대속의 효력에 대한 믿음의 선포이고(고전 11:24), 주님의 재림에 대한 성명(聲明)이고(고전 11:26), 믿음으로 주님과 사귀는 축복이고(고전 10:16), 주의 식탁에 모인 신자들의 친교(고전 10:17)이다. 성찬에 사용된 재료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가 있다. 로마 카톨릭은 ‘화체설’로 사제가 축사할 때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공재설’로 떡과 포도주와 함께 기도할 때, 예수님의 살과 피가 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쯔빙글리는 ‘기념설’로 성찬을 준수하는 것은 아무런 축복이 개입되지 않은 주님의 몸만을 기념하는 것으로 카톨릭과 루터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끝으로 칼빈과 대부분의 개혁자들이가 주장하는 ‘상징설’이다. 떡과 포도주를 받아들일 때,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영적인 축복의 전달해 준다는 의미고, 떡과 포도주 자체는 상징이라는 견해이다. 대부분의 개신교는 상징설을 따른다.
  • 2009.02.13

    교회가 이 땅에서 행해야할 일들
  • 주님의 몸으로서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은 신약 성경을 통하여 교회가 이 지상에서 행하여야 할 사명들을 주셨다. 초대 교회들은 이 사명들을 잘 수행하므로 날마다 수를 더해가는 교회가 되었다. 현대 교회도 이 사명들 중에 하나라도 놓친다면 초대 교회의 능력을 잃어 버릴 것이다. 따라서 초대 교회의 사명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본다. 첫째, 설교(preaching)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사도들에게 주신 지상명령 속에 선포되어 있다. 지상명령의 형태는 다섯 군데 나와 있다. 사복음서 끝(마 28:19∼20, 막 16:14∼18, 눅 24:47∼48, 요 20:21∼22)과 사도행전 처음(행 1:6∼8)에 선포되어 있다. 특히 마가와 누가는 복음을 전파는 교회의 사명으로서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과 함께 강조한다. 둘째, 가르침(teaching)은 마태와 누가의 진술에서 볼 수 있다(마 28:18∼20, 행 5:42). 말씀전파는 새 신자를 탄생시키며, 예수님을 믿게 한다, 그러나 가르침을 통하여 신자들이 젖 먹는 신도에서 고기 먹는 신도로, 어린 신앙에서 성숙한 신앙으로 성장할 수 있다. 셋째, 제자훈련(discipling) 또는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가르치는 것 보다 더욱 중요하다. 우리는 한 원리의 체계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 위하여 가르침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제자로 삼을 때에는 그 진리를 실제 행동을 통해 보여야만 가능하다. 승리한 인생을 실례를 들어 보여 주어야 한다. 단순히 가르치는 사람들에게는 학생들이 있으나, 제자화 시키는 사람들에게는 추종자들이 있다(살전 1:5∼7). 넷째, 친교(fellowship)는 교인 간의 친목을 도모해 주며, 유지시켜주는 일이다. 친교라는 말의 의미가 대개 운동경기, 식사, 및 사회활동과 관련되었다. 위의 언급된 활동들이 성경의 윤리와 조화를 이룰 때, 그것들은 교회에 전혀 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교회생활에 많은 유익을 가져온다. 즉, 친교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사랑의 띠, 좋은 목표, 일체감 가운데서 하나로 결합하는 것이다. 다섯째, 예배(worship)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것인데(요 4:23), 하나님께서는 이런 예배를 찾고 계시다. 따라서 교회의 예배는 신령과 진정의 분위기를 항상 유지시켜야 하고, 그러기 위하여서는 기도와 찬양의 분위기로 만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구약시대 성전에서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동물의 제사(번제: 오늘날의 기도)가 항상 수반 되었고, 신약시대 교회에서는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렸다(히 13:15). 여섯째, 선교와 전도(missions and evangelism)는 예수님께서 지상명령 중에 강조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서서 땅 끝까지 전파되기를 원하셨다(행 1:8). 교회는 이 사명을 강압적으로 밀고 나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모든 민족이 제자화된 것도 아니요, 땅 끝까지 복음이 미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일곱째, 가정 사역(home ministry)은 교회의 사명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사랑하셨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인의 가정에 있는 모든 가족들에게 특별한 것을 가르치고 있다(엡5:33∼6:4). 성령의 약속은 신자와 그들의 자녀들에게 한 것이다(행 2:39). 그리고 거의 모든 초대 교회들은 가정교회에서 시작했고, 그곳에서 복음은 전 가족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쳤다(골 4:15, 롬 16장). 여덟째, 물질 사역(ministry to material needs)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부터 비롯된다(마 25:34∼46). 예루살렘 교회는 과부들의 음식 공급해주는 일을 계속해 왔다(행 6:1). 베드로는 도르가를 죽음에서 살려 구제 사업을 계속하게 했다(행 9장). 유대 형제의 기근에 안디옥 교인은 경제적 원조를 했다(행 11장).
  • 2009.01.15

    초대교회의 직분은 어떤게 있었을까?
  • 초대 교회가 탄생했을 당시에 처음 신자들이나 지도자들은 회당의 구성원들과 동일한 유대인들이었으므로, 그들은 교회의 조직을 어느 정도 회당의 조직으로 모방했다. 실제로 신약성경의 한 구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의 모임 자체를 회당으로 언급하기도 했다(약 2:2). 그러나 초대 교회에는 회당 조직을 넘어선 더 많은 특별한 직책들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사도(apostles)가 있는데 그 뜻은 “사명을 가지고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새 교회를 세움에 있어서 특별한 명령을 받은 사람으로 사용되었으며, 사도와 선교사라는 용어는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다. 둘째, 선지자(예언자:prophets)가 있는데, 교회는 사도와 선지자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엡 2:20). 선지자는 사도들 다음의 서열로서, 그들은 사도들에게 종속된다(고전 14:37). 예언자는 “사람들에게...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고전 14:3)이다. 셋째, 복음 전하는 자(evangelists)인데 신약성경에서 찾기 쉽지 않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이가 복음전하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구원해 내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이다. 신약성경에 유일한 예는 사마리아에서 행한 빌립의 사역이다(행 8:5). 넷째, 목사(pastors)는 지역교회의 영적 지도자이다. 이 말은 신약성경에 한 번 사용했다(엡 4:11). 예수님은 자기와 백성과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하여 “양과 목자”를 즐겨 사용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양무리를 돌보기 위하여 위탁받은 사람들을 “목사”로 불리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섯째, 교사(teachers)인데 승천하신 주님께서 교회에 주신 은사이다(엡 4:11). 주님의 지상 대명령도 가르치는 것이라고 암시한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 바울은 자기 자신을 “이방인의 설교자요, 사도요, 교사로 임명”됨을 언급한다(딤후 1:1·1).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전적으로 부름 받은 “교사”이다. 여섯째, 장로(elders, presbyters)란 회당과 이스라엘의 회중에서 빌려온 명칭이다. 장로는 목사와 동등했으며, 지역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아주 흔한 명칭이었다(행 20:17, 딛 1:5, 벧전 5:1). 그들은 회중으로부터 물질적인 보조를 받아왔는데, 바울은 그들에게 배나 존경하라(사례금 드림)고 권면하고 있다. 일곱째, 감독(bishops, overseers)은 영국의 국교회(성공회)를 통하여 크게 영향을 주었다. 신약 시대에서 그들은 한 교회를 맡아 보고 있었다. 이 직책은 사도시대 후에 더 광범위한 조직이 되어야 하지만, 로마 카톨릭 교회 조직의 영향을 받아 의미가 변화되었다. 여덟째, 집사(deacons)의 자격은 감독 뒤를 따라 나온다(딤전 3:8). 집사라는 말은 종을 의미하는 헬라어에서 유래 되었는데, 그들은 장로들이 기도하고 말씀을 섬기는 일을 자유롭게 하도록 돕기 위하여 교회를 섬겼다. 최초로 나타남은 빈민구제나 재정출납을 감당할 목적으로 선출된 일곱 집사들이다(행 6:1∼6). 아홉째, 사역자(ministers)는 집사와 동일한 헬라어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집사의 직분으로만 언급할 수 없는 상당히 많은 내용의 성경구절이 있다. 사역자란 호칭은 어떤 경우에서든지, 영적 지도자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만 사용되었다(고전 3:5, 엡 3:7, 4:12). 열번째, 다스리는 사람(leaders, rulers)은 교회의 지도자를 가르치는 말이다. 교회에서 지도자들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정식으로 세움을 입고 인정받은 지도자가 존경을 받아야 하는 것은 성서적 가르침이다(살전 5:12,13).
  • 2008.12.18

    쉬운 평신도 조직신학(XXXI) - 교회론(I)
  • 교회는 주께 속해있는 사람들의 집합체 의미 교회의 모형은 구약의 성전과 회당에서 유래 우리가 이 땅에서 믿음생활을 하면서 하늘나라에 가기 전까지 계속해서 가야만 하는 곳이 있다. 그것이 교회이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따라서 교회의 의미와 더불어 그 유래를 알아본다. 교회의 의미는 그 말의 뜻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교회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처음 사용하신 단어이다(마 16:18). 원어 성경인 헬라어에서는 두 가지 말로 기록이 되어 있다. 첫째가 에클레시아이고, 둘째가 퀴리아콘이다. 첫째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사람들의 집합체’를 의미한다. 이 용어는 ‘…로부터’를 의미하는 εκ(에크)라는 말과 ‘부르다’를 의미하는 καλεω(칼레오)라는 말의 합성어에서 유래됐다. 원어적인 의미로는 ‘부름 받아 나온 사람’인데 국가에 봉사하도록 그 지역사회에서 부름을 받은 그리스 시민의 입법부(국회)를 가리켰다. 이 말은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의 회중’(70인역)으로, 신약성경에서는 ‘모인 무리’(행 19:22)로, 그리고 영어에서는 ‘assembly’로 번역됐다. 예수님께서 이 단어를 선택하신 이유는 당시 존재했던 회당(synagogue)과 구분을 지으시려는 의도가 있다고 본다. 둘째 퀴리아콘이라는 단어는 ‘주께 속해 있는’을 의미한다. 신약성경에서 ‘주의 만찬’과 ‘주의 날’에 사용되었지만, 그러나 이 단어는 교회라는 말을 번역할 때 사용하지는 않았다. 퀴리아콘이라는 헬라어는 한 때 ‘예배를 드리는 건물’의 명칭으로 사용되었고, 스코틀랜드에서는 ‘kirk’라는 말로 변형시켜 사용해 오다가 ‘church’라는 말로 진화되어 사용했다. 따라서 교회는 주께 속한 자들의 모임이나 또는 예배를 드리는 건물이라고 볼 수 있다. 교회의 유래를 보여주는 모형에는 구약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가 성전(temple)이고, 둘째 회당(synagogue)이 있다(행 5:42, 약 2:2). 이 두 기관의 유래에는 각각의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첫째, 성전은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기근으로 인하여 애굽(이집트)에 정착에서 시작된다. 처음 애굽의 바로(왕)는 요셉의 공적을 인정하여 그들에게 후한 대접을 해주었지만, 해가 거듭할수록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전락시켰고, 이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탈출하게 만드셨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광야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계속적인 만남의 장소를 위하여 모세에게 성막을 지을 것을 명하셨다. 이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온 후에는 다윗 왕 때에 성전으로 대치됐다. 여기서 행하여진 예배의 형태는 찬양과 번제가 있었는데, 제물을 태워드리는 번제는 오늘날 예배의 기도로 대치됐다. 둘째, 회당의 시작은 이스라엘 백성이 왕국을 이루어 나가다가 솔로몬 왕 때, 남왕국(유다)과 북왕국(이스라엘)으로 나뉘더니 마침내 남북왕국 모두 강대국의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이라는 예배의 터전을 잃게 되자, 하나님께 번제와 찬양이라는 예배는 드릴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다른 형태로 하나님을 예배드리는 방법을 모색하게 됐다. 그들은 낮에는 강제 노역을 하였고, 밤에 한 곳에 모여서 모세가 기록한 성경(모세오경)을 읽고, 그 내용을 풀이하는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이 회당의 시작이라고 보여 진다. 현재 예배의 성경봉독과 설교는 회당 예배에서 온 것이다. 따라서 현재 교회의 모형은 구약의 성전과 회당에 찾아 볼 수 있고, 현재 예배의 형식도 성전 예배와 회당예배의 형식에서 유래됨을 찾을 수 있다. 이재환 교수(순신원)
  • 2008.11.21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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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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