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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아들의 불신앙
2024.10.20 / 누가복음 15장 25~30절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누가복음 15장 25~30절)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 모습이 존재합니다. 바로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을 드러내고 높이고 나를 알리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그러한 모습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불쌍한 이웃을 돕고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고자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소설가 A. J. 크로닌이 1941년에 ‘천국의 열쇠’라고 하는 책을 썼습니다. 참 잘 쓴 소설인데 여기에 두 사람이 나옵니다. 거기에 주인공 치셤과 안셀모 두 신부가 나오는데 같은 동네에서 같이 자랐습니다. 친구입니다. 신학교도 같이 갔습니다. 

그런데 성격은 전혀 달랐습니다. 치셤은 겸손하고 소박하며 열린 마음을 갖고 있었고, 거짓과 타협을 모르고 정이 많은 진실한 종으로서 중국의 한 시골에 가서 40년 동안 선교사로 헌신하다가 외롭고 쓸쓸하게 은퇴했고, 안셀모는 그와 정반대로 굉장히 똑똑하고 사교적이고 정치적이고 출세 지향적으로 돼서 사람들 앞에 위엄과 품위를 갖추고 그가 인정받는 모습으로 승승장구해서 높은 위치에 올라가게 됩니다. 

 그는 치셤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습니다. 출세 가도를 달렸고, 치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중국 농촌에서 40년 동안 큰 업적을 이루고 그의 사역을 많은 사람에게 알린 그러한 선교사라기보다는 동네 사람들의 마음속에 늘 기억되는 그러한 진실한 선교사로서 그 사역을 마쳤습니다.
 
이 책에서 던지는 질문은 그것입니다. ‘누가 천국의 열쇠를 갖고 있느냐?’ 우리 모습 속에 이 두 가지 모습이 다 들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세상적인 방법으로라도 출세해서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소박하게 진실하게 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근데 문제는 많은 사람이 성공 지향적으로 사는 바람에 세상과 타협을 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잘 되기만을 위해 애쓰고 힘쓰는 삶을 살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람들을 이용하기도 하고 남에게 피해를 입히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모든 사람이 잘 아는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집 나간 탕자의 비유. 근데 성경 말씀을 자세히 보면 그 집에 또 하나의 탕자가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그 집의 맏아들입니다. 
 

1. 남을 판단하는 인생


먼저 남을 판단하는 인생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맏아들은 동생처럼 아버지의 재산을 갖고 나가서 허랑방탕하게 그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망나니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늘 집을 지키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항상 만족함이 없었습니다.

 집 나간 동생만을 탓하면서 자기만이 아버지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참 아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모든 일에 가장 옳고 모범적이라고 하는 자부심을 갖고 살았습니다. 자기중심적으로 나만이 옳고 나만이 모든 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있어 인정받는다는 그러한 모습은 자기 고집과 교만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 고집과 교만이라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저 사람은 이게 문제야, 이 사람은 이게 문제야라며 늘 남의 문제점만 지적하고 남을 탓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맏아들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큰아들과 똑같은 또 다른 탕자입니다. 우리가 항상 맏아들처럼 나는 옳고 저 사람은 틀리다 이런 생각을 갖고 남을 판단하고 살고 있지 않은지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나의 마음과 내 뜻대로 모든 것이 되기를 원하고, 그것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내가 좋아하지만, 나의 뜻과 맞지 않은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쉽게 화를 내고 있다면 문제의 원인이 나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아가 강할수록 자꾸 이웃과 부딪히고 많은 문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성경에서 금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1절, 2절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죄 많고 허물 많은 문제의 인생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의롭다 여기며 손에 비난의 돌을 들고 남에게 던지고 있다면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늘 주님 앞에 난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용서를 늘 체험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일꾼들이 되어야 합니다. 
 

2. 분노하는 인생


둘째로 분노하는 인생에 대해서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맏아들이 밖에서 돌아오는데 집 안에서 음악 소리가 나고 소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25절로 27절입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동생이 돌아왔다는 얘기와 그를 위해서 잔치를 베푼다는 말을 듣고 그는 분노했습니다. 집 나갔던 동생이 돌아왔는데 참 잘됐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28절 말씀합니다.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형은 인정이라고는 없고 일과 자신밖에 모르던 이기주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강력하게 항의합니다. 

누가복음 15장 30절입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돌아온 아들을 사랑으로 품어서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에 대해서 대든 것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갖고 나가 탕진하고 돌아온 불효자식에 대해 어떻게 아버지가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할 수 있습니까? 아버지의 처사에 심히 못마땅해서 그는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맏아들 같은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내 기준에 맞지 않으면 못마땅하게 여기고 분노합니다. 쉽게 화를 냅니다. 그래서 집에서 부모님과 갈등을 빚고 자아가 강한 사람끼리 결혼하면 부부가 밤낮 싸웁니다. 아침에도 싸우고 저녁에도 싸우고 늘 싸웁니다.

 또 회의하다 보면 늘 자기주장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주장을 안 받아들이면 화를 내고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회의할 때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데 혼자 얘기하는 분이 있어요. 그분만 없으면 회의가 곧 끝날 텐데 그분이 회의 시간을 다 잡아먹고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큰아들 같은 사람입니다. 저거 내 얘기구나 하는 분들은 오늘부터 회의 때 입을 다물기 바랍니다. 

제가 결혼 주례하다 보면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는데 잊히지 않는 결혼 주례가 있습니다. 오래전인데 결혼식이 끝나고 이제 퇴장을 하게 되는데 사회 보는 젊은 목사님이 좀 재밌게 하려고 “자, 신랑은 이렇게 훌륭한 신부를 얻었으니 만세 삼창하시오!” 그럼 보통 그냥 “만세! 만세! 만세!”하고 나가는데 그 신랑이 탁 째려보더라고요. “만세삼창 안 하면 못 나갑니다!”라고 말하자 그 신랑이 성질을 버럭 내더니 “나 이 결혼 안 해!” 소리를 꽥 지르더라고요.

 그러니까 사회자가 놀라서 그냥 나가라고. 저는 뒤에서 지켜보면서 ‘야, 저 신부 고생문이 훤히 열렸구나.’ 오늘 만약 이 설교를 그분이 듣고 있으면 지금이라도 부인한테 가서 사과하시길 바랍니다. 전 놀랐어요. 코르사주를 뽑아서 그 좋은 날에 바닥에다 탁 내팽개치면서 “나 이 결혼 안 해.” 만세 삼창하는 게 뭐 그렇게 어렵다고. 그러나 어쨌든 그분은 싫은 거죠. 

부부가 되어서 갈등하는 이유는 상대편의 입장을 이해하지 아니하고 늘 내 입장을 생각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제가 책방에 가서 제목에 반해 구매한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제목이 뭐냐 하면 ‘당신이 옳다’입니다. 책 제목이 참 마음에 들었어요. 우리가 모든 갈등의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내가 옳고 당신이 틀리기 때문에 갈등하지 않습니까? 그 책 제목처럼 말하고 살면 부부 싸움할 일이 없어요. 사람들과 다툴 일이 없습니다. 내가 옳고 네가 틀렸다고 하니까 늘 싸우는 것입니다. 

‘동정’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함께 느낀다는 말입니다. 상대편의 입장이 되어준다고 하는 말입니다. 배려하는 것입니다. 늘 상대편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아버지의 사랑에 도전한 아들


여기서 아버지의 사랑에 도전한 맏아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큰아들이 밖에서 화를 내고 안 들어온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놀라서 달려 나왔습니다. ‘야, 동생이 왔는데 집에 들어가야지.’라고 설득하자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복음 15장 29절입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내가 화내는 것은 아버지가 잘못했기 때문입니다.’라며 자기를 정당화합니다. 많은 사람이 문제를 일으키면서 스스로 정당화합니다. 이러니까 내가 이렇게 소리를 지른 것이고, 저렇게 됐기에 내가 화를 낸 것이고, 이래서 내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자기를 정당화합니다.

 이 큰아들도 자기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잘못했기 때문에 내가 화를 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맏아들은 지금까지 그 집안에서 누리고 있는 그 모든 축복과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서 조금도 감사하지 아니하고 원망과 불평만 쏟아놓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에 대해서 부정적인 상을 갖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부자입니다. 모든 걸 다 주기를 원하는 아버지를 아주 인색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사랑이 많은 부자 아버지를 염소 새끼 하나 안 주는 인색한 분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같이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갖고 살면서 남을 판단하고 비판합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다가 은혜가 떨어진 사람들이 그런 모습이 나타납니다. 남들은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데 자기는 기도하지 않으면서 눈 감고 옆 사람 기도를 듣습니다.

 ‘이 사람 문제가 많구먼. 그렇게 신앙생활 해도 되겠나.’ 자기 기도도 잘하지 않으면서 옆에 사람 기도를 듣고 판단하고 있어요. 누가 오늘 교회 빠졌다고 그러면 ‘아이고, 그래서 구원받겠나?’ 자기도 가끔 교회 빠지면서 이렇게 남을 비판하고 판단한다면 그는 맏아들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속한 것인데, 내가 저 사람 구원받을 수 있다 없다 판단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고, 이렇게 나 중심적인 교만의 모습이 늘 문제인 것입니다. 이건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그러한 모습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저를 포함해서 우리는 오늘 철저히 반성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같은 나 중심의 고집과 교만을 회개하고 내려놓고 반성하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그러한 주님의 일꾼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판단하고 욕할 것이 아니라 내 문제가 무엇인가를 나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 맏아들은 자기가 집에서 효자인 척했지만, 형식적으로는 아버지를 섬기기만 했을 뿐 사랑에 메말라 있는 그런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30절에,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그는 말했습니다. 여기서 자기 동생을 ‘이 아들’이라고 하는 표현을 썼는데, 영어 성경을 보니까 ‘당신의 아들’(this son of yours) “당신의 아들이 이렇게 사고를 치고 돌아왔는데 그 당신의 아들을 받아주고 있습니까?” 

자기 동생인데 제삼자 취급을 한 거예요. 돌아온 동생을 기뻐하기는커녕 그 나쁜 놈이 돌아왔다고 당신의 아들이, 사고 친 아들이 왔다고 아버지에게 대들고 불만을 쏟아놓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맏아들의 가장 큰 문제는 뭐냐 하면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맏아들 편에서 보면 옳다고 할 수 있어요. 그가 열심히 일했죠, 사고 친 적도 없죠, 뭐 모든 면에 모범을 보였죠. 그러니까 맏아들 편에서 볼 때는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문제가 뭡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살면 문제가 없는데, 내 마음, 내 중심을 갖고 살기 때문에 늘 갈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 번 더 생각해야 됩니다. ‘주님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부부간의 부모, 자식 간의 모든 문제가 거기 있습니다. 상대편의 입장이 한 번만 되어보면 모든 문제가 그냥 눈 녹듯이 사라질 텐데 늘 내 편에서만 생각합니다. 내 편에서만….

여러분, 우리가 일상 살아가는 동안에 늘 상대편의 입장을 생각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우리 아버지의 마음, ‘우리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 예수님의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 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내의 모든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내 마음에 맞는 교회를 만들려고 하니까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그룹을 만들어 교회 내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치고 소란하지 않은 교회가 없고, 문제가 생겨나지 않은 교회가 없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러한 인간적인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맞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중심이 되셔서 예수님이 홀로 높임을 받으시고 존경받는 교회가 바로 참된 교회입니다.

여러분에게 교회를 맞추려고 하면 우리는 잘못된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가 그래서 분열이 일어나고 깨어지고 하는데, 왜? 자기들에게 교회를 맞추려고 하는 그러한 인간의 집단을 만들어 놔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는 죄인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은혜의 자리이기 때문에 은혜의 집단이고 은혜의 교회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 사랑으로, 용서로 하나가 돼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부흥의 비결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용서인 것입니다. 비판의 돌을 들어 던지는 한 우린 참된 교회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신 명령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십자가에서 몸 찢기고 피 흘려 생명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했는데, 우리가 그러한 사랑을 갖고 이웃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그 사랑과 용서를 우리가 만분의 1이라도 배웠습니까?

우리는 용서하지 못합니다. 나에게 해를 입힌 사람 절대 용서 못 해요. 자다가도 벌떡벌떡 깨서, 내가 가만 안 두겠다고 이를 바득바득 가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저도 옛날에 속상했을 때 잠 못 잔 적이 있어요. 근데 목사니까 아무 말도 못 한 게 더 속상했어요. 예수님 믿지 않는 사람은 같이 멱살 잡고 싸울 텐데 싸우지도 못하고 당하는 입장이기만 하니까 더 속이 상하더라고요. 내가 소리 지르고 할텐데 내가 목사가 돼서 소리도 못 질러보고. 

지나고 나서 보니까 내가 다 철이 없어 그랬어요. 철이 없었어요. 우리 주님을 바라보면 주님이 다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희생하시고 다 주셨는데 내가 뭐라고. 나한테 뭐라고 하는 사람한테 분노하고 상처받을 그런 자격도 없어요. 나 같은 죄인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됐는데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라이언 와이트라고 하는 한 소년이 있는데요. 이 소년은 1971년에 미국 인디애나주의 코코모라고 하는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근데 집에 혈우병이 유전돼서 그 어릴 때 병원에 갔었는데 상처 난 곳에 피가 멈추질 않아요.

 그래서 이 혈우병을 앓고 있던 그가 중학교 갔을 때 폐에 이상이 생겨서 수술받다가 피를 수혈받았는데 그 피에 에이즈 균이 있어 에이즈에 감염됐습니다.

온몸에 통증이 오면서 의사들이 에이즈에 감염된 것을 알게 돼서 6개월 내로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다고 사형 선고를 내렸습니다. 그 당시 에이즈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연구가 되지 않았고, 에이즈는 그냥 동성끼리 성적 접촉을 통해서 옮겨진다고 생각되었는데 수혈을 통해서 감염된다는 것이 이 아이 때문에 발견됐습니다.

그 당시 많은 혈우병 환자들이 수혈받다가 에이즈에 감염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의료진에서 피의 성분을 제대로 검사하지 않고 아이에게 수혈해서 에이즈에 감염돼 6개월밖에 못 산다고 하는 시한부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니까 의사가 이 에이즈가 사람들끼리 악수하고 그래서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얘기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얘를 거부하고 퇴학시켰습니다. 학부모들이 데모하고 선생님들이 학교에 오는 걸 반대하면서 이 예쁘고 착한 아이를 쫓아낸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큰 이슈가 됐습니다. 아이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쫓겨나고 외롭게 된 그런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 레이건 대통령이 이 소식을 듣고 비서진을 보내서 그를 위로하고 트럼프 전 대통령과 마이클 잭슨도 찾아가서 선물을 주면서 그를 위로했습니다. 

그는 억울한 희생자였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숙연한 시간이 다가왔을 때 소년의 아버지가 아들 손을 꼭 붙잡고 울면서 얘기합니다. “사랑하는 라이언, 내가 너를 위해서 더 잘해주지 못한 것을 용서해라.”라고 얘기했을 때 라이언이 죽기 전에 이와 같은 감동적인 고백을 남겼습니다. 자기 아빠를 바라보면서 얘기합니다. 

“아빠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사랑을 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정말 많은 선물을 주었어요. 이 방에도 많은 선물이 가득하잖아요. 그러나 아빠 저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준 사람은 아빠밖에 없어요. 아빠는 나에게 예수님을 소개해 주었고,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주었으니까요. 아빠 누구나 다 죽는다고 아빠도 말했잖아요. 그러나, 나는 이제 천국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알게 됐어요. 이 선물은 아빠가 주신 거예요.”

그는 의료진의 실수로 에이즈에 감염돼서 5년 동안 병을 앓으며 고통 가운데 살다가 죽었지만 남을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죽음 앞에서 구원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미움과 원망과 분노 속에 살아가야 할 소년이 이렇게 예수님의 사랑을 마음에 품고 사랑과 용서의 삶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 앞에 갈 때까지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미움과 분노를 다 내려놓고 진정한 사랑과 용서의 사람이 되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맏아들 같은 죄인입니다. 이 소년보다도 못한 것 같아요. 이 시간 우리가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님, 내가 맏아들입니다. 저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찬송가 279장을 함께 하겠습니다.

<찬송가 279장(통 337) : 인애하신 구세주여> 

1절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가 비오니
     죄인 오라 하실때에 날 부르소서

후렴 주여 주여 내가 비오니
     죄인 오라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2절  자비하신 보좌 앞에 꿇어 엎드려
     자복하고 회개하니 믿음 주소서

맏아들과 같은 우리의 모습을 회개하고, 이 소년처럼 사랑하고 용서하며 마음에 미움과 분노를 내려놓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마음속에 미움과 분노를 품고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주님 용서하여 주시고 이 시간 손의 손에 들었던 미움과 분노, 비판의 돌을 내려놓고 진정한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를 마음에 품고 그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일꾼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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