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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죄인이로소이다
2018.12.16

<말씀봉독>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9~14)


<등단 후 멘트>
귀한 은혜의 찬양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뒤돌아보고 주님 앞에서 내가 얼만큼 인정받고 있는 나 자신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때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다가오는 새해에는 정말 우리 주님 앞에 인정받고 칭찬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사 나누겠습니다. “오늘은 참으로 좋은 날입니다.” “사랑의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좋은 일이 있습니다.”
<찬송가 278장 : 여러 해 동안 주 떠나>

(1절)
여러 해 동안 주 떠나 세상 연락을 즐기고
저 흉악한 죄에 빠져서 주 은혜를 잊었네
오 사랑의 예수님 내 맘을 곧 엽니다
곧 들어와 나와 함께하며 내 생명이 되소서

(2절)
죄악에 죽을 인생을 심히 불쌍히 여기사
저 하늘의 영광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셨네
오 사랑의 예수님 내 맘을 곧 엽니다
곧 들어와 나와 함께하며 내 생명이 되소서

(3절)
홍포를 입은 구주는 가시 면류관 쓰시고
저 십자가 높이 달리사 그 아픔을 참았네
오 사랑의 예수님 내 맘을 곧 엽니다
곧 들어와 나와 함께하며 내 생명이 되소서

(4절)
미련한 우리 인생은 주의 공로를 모르고
그 쓸쓸한 사막 가운데 늘 헤매고 다녔네
오 사랑의 예수님 내 맘을 곧 엽니다
곧 들어와 나와 함께하며 내 생명이 되소서

 주님을 멀리 떠났던 것을 회개하고 주님 내 마음의 중심에 오셔서 나의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고 나를 회복시켜주시고 주님 은혜로 충만하게 하여주소서.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니다. 주여! 주여! 주여!

(통성기도)

오 사랑의 예수님 내 맘을 곧 엽니다
곧 들어와 나와 함께하며 내 생명이 되소서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주시고 희생하셨는데 우리는 그 한없는 사랑을 받고, 또 받고 오늘 여기까지 왔는데 그러나 우리 삶 가운데에는 진정한 감사가 사라졌습니다. 눈물이 사라졌습니다. 감격이 사라졌습니다. 주님 다시 회복하기 원합니다. 알게 모르게 주님과 멀어졌던 우리들의 모습이 이번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다시금 첫사랑을 회복하여 주님께로 가까이 더 가까이 나아가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함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설교말씀>
여러분 신앙은 늘 새로워지는데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늘 새로워져야 합니다. 문제는 새로워지지 않고 늘 뒷걸음질 치거나 제자리걸음을 하게 되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주님 앞에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저를 받아주옵소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와야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입합니다.

 할렐루야 오늘은 누가복음 18장 9절로 14절의 말씀을 가지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와 같은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말씀의 제목을 따라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신앙생활은 한평생 자기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고 내 삶의 주인이 나 자신이었기 때문에 내 뜻대로 살았지만, 예수 믿고 나서는 그날부터 마음에 심한 갈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데 내 안에 오신 성령님이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잘못된 길로 가는 나를 다시 바른길로 가도록 이끌고 계시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 삶에 끝없는 갈등과 충돌이 있습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도 로마서 7장을 보면 이 문제로 인해 권면하고 탄식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7장 21절로 24절에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 위대한 사도 바울이 죽은 사람을 살리고 가는 곳마다 병자를 고치고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고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신약 성경의 27권 중 13권이나 쓴 그가 순간순간 자기 옛사람, 육의 사람 죄의 법으로 끌고 가는 그 과거의 나의 모습 때문에 갈등하고 고민했던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을 넘어가면 그 답이 나옵니다. “내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해방되었다”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내 힘으로 죄의 문제를 이길 수 없고 옛사람인 나를 내가 어떻게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성령이 임해서 성령충만을 받으면 성령께서 나를 새 사람의 길을 가게 만들어주신다는 위대한 선언을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었어도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끝없이 죄성과 싸워야 합니다. 언제까지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호흡을 마치는 날까지, 육신을 벗어버리는 그날까지 우리는 싸우고 또 싸우다가 주님께서 오라고 부르시면 우리가 육신을 벗어버리고 우리 영이 하늘로 올라가는데 그로부터는 우리가 옛사람과 싸울일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당시 사람들이 볼 때 신앙적으로 본을 보이고 부족함이 없는 거 같은 바리새인과 또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세리의 비유를 들어서 이러한 신앙의 문제점을 지적하시고 권면하신 말씀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1. 의롭다 여기는 바리새인

첫째로 의롭다 여기는 바리새인에 대해서 함께 생각을 해봅니다. 9절과 10절에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말씀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이 옳고 바르고 틀림이 없기 때문에 내가 기준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다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멸시하고 비판하고 자기보다 한참 부족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바리새인이란 말의 원어의 뜻은 거룩한 자, 분리된 자, 구별된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잘 지키고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하나님 앞에 구별된 자들이다.” 하는 이러한 영적 우월감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이 그대로 말씀대로 살려고 애썼고 십계명을 지키려고 애썼고 선한 일을 하려고 애썼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와 같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알게 모르게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잘 섬기고 내가 이렇게 바르게 행하고 내가, 내가, 내가 하다가 영적인 우월감에 사로잡혀서 자기 기준에만 맞지 않으면 쉽게 그들을 비판하고 그들을 정죄하고 그들을 멸시하는데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 11절 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뭐라고 그랬습니까?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는데 자기들은 옆에 떨어져서 기도하면서 “저 사람들과 나는 차원이 다릅니다. 나는 저 사람들처럼 도둑질하지 아니하고 악한 일을 행하지 아니하고 간음하지도 않고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을 하고 십일조를 드립니다. 저 죄 덩어리 세리나 이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하며 이렇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뻣뻣이 들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렇게 사람들 보기에 흠이 없고 문제가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라고 의기양양하게 그것도 사람들이 들으라고 자기 자신을 이렇게 드러내놓고 자랑한 것입니다.
예수를 처음 믿었을 때는 그냥 다 좋아요. 찬송을 불러도 좋고 말씀 들어도 좋고 교회 오는 것이 너무나 좋고 그저 교회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너무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서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교회 직분을 받고 20년쯤 되고 나면 알게 모르게 다 바리새인이 되어버립니다.

바리새인이 되어가지고 자꾸 남을 판단합니다. “저 사람 저렇게 예수 믿으면 안 되지” “저 사람 예배 태도가 불성실하구만” 자꾸 남에 대해 얘기하게 돼요. ‘나는 주일날 빠진 적이 없어’ ‘열심히 교회 봉사하다 오고 십일조도 하고 뭐가 하나도 부족한 것이 없어’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이미 바리새인이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 아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여기 있는 누군가를 지칭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저를 포함해서 모든 우리 제직 및 성도들에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내가 늘 깨어지고 나서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주님의 은혜로 삽니다’하면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인데, 최소한도 예수 믿은 지 10년 정도 지나고 나면 이 모습이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늘 남을 내려다보는 자리에서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왜 저 사람은 예배 드리는데 핸드폰 보고 앉아있지? 저 사람 예배 드릴 때 불성실하구만.” 자기가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는 이러한 모습은 바리새인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 의인입니까? 자기가 의롭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죄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용서받고 의인이라고 부름받고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의로운 체하면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늘 재판장의 위치에서 남을 판단하고 남의 허물을 지적하고 심지어 자기 뜻과 맞지 않으면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바리새인 중에 왕 바리새인입니다. 예수님의 바리새인을 향한 꾸짖음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그들이 얼마나 철저히 십일조를 드렸냐 하면 자기 집에서 기르는 그 식물의 열매까지도 십 분의 일을 드렸어요. 여기 박하, 회향, 근채라는 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집에서 기를 수 있는 향내가 나는 그런 열매를 맺는 화초들이었는데 그 화초들의 열매까지도 십 분의 일을 거둬서 철저하게 우리 집의 밭에 나는 이 식물의 열매의 십일조까지 드립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파 열 단을 심었으면 한 단을 뽑아서 이 파 열 단 중에 한 단 이렇게 정확하게 십일조를 드립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모습과 비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말씀하십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겠지만 실제로 가장 주님 앞에 중요한 모습인 공의, 의로움이 사라졌고 긍휼, 주님 앞에 긍휼히 여김을 받은 사람들을 향한 긍휼함이 사라졌고 그 믿음의 모습이 사라졌다고 주님은 지적한 것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고 성수 주일 한다고 하면서 실제로 그 마음에 주님 보시기에 의로움이 없어요. 그 마음에 긍휼함이 없습니다. 남을 불쌍히 보는 마음이 없습니다. 믿음도 없습니다. 믿음 있는 척하지 실제로 믿음이 없는 그런 신앙생활하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주님이 지적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할지라도 직분자라 할지라도 함부로 남을 비판하거나 판단하거나 정죄하면 안 됩니다. 돌을 들어 던지면 안 됩니다. 왜? 우린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쏟아냈던 수많은 부정적인 말들 남을 상처 주는 말들, 악성 루머들을 이 성탄의 계절이 우리에게 와서 주님을 맞이하는 이 때에 다 내던져 버리고 변화된 모습으로 새로워진 모습으로 주님을 맞이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7장 1절 2절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기독교는 사랑과 용서의 종교입니다. 가장 사랑을 많이 이야기하면서 가장 용서하지 못하는 집단이 기독교 집단이라고 세상 사람들은 비판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그렇잖아요. 남이 잘못한 거 그냥 넘어가지 못하잖아요. 막 떼를 지어서 그 사람의 잘못을 욕하고 끌어내리지 않습니까? 한국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어느 교회든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를 막 벌떼처럼 들고일어나서 교회가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떠벌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고 교회가 분열되고 다투고 싸우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이처럼 가장 사랑을 많이 얘기하는 교회가 가장 사랑이 없고 용서가 없는 오늘 우리 교희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회개 해야 됩니다. 사람이 실수할 수 있어요. 잘못할 수 있어요. 근데 다 돌로 들어 치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누가 살아남을 것입니까?

매 예배 때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는 그렇게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로 고백하면서 실제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주지 않으면서 어떻게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감히 주님 앞에 죄를 고백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작은 상처를 준 사람을 마음에 품고 미움을 가지고 분노함을 가지고 원수처럼 지내면서 어떻게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서 내 죄를 용서해달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주님의 용서는 조건이 없는 용서입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몸 죽고 피 흘려 돌아가시면서 용서하신 그 용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상처받은 그 사람에 대해서 용서해야 되는 거예요. 왜? 그렇게 여러분들이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이걸 잘못하잖아요. 베드로가 용서에 대해서 주님께 물어봤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 22절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여러분 용서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용서가 빠진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용서는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사랑이 바로 용서고 용서가 바로 사랑입니다. 왜 “사랑한다” 말하면서 용서하지 못하고 늘 다투고 싸워야 합니까? 왜 가슴마다 복수의 칼을 품고 언제 내가 복수하나 미움과 분노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 복수의 칼을 다 빼 집어 던져야 됩니다.


2. 세리의 회개


세리의 회개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누가복음 18장 13절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바리새인들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조금 떨어져 나와 손을 들고 하늘에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기도했지만, 세리는 저쪽 뒤에서 고개를 푹 떨구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제가 죄인입니다”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세리는 당시 로마제국의 세금 걷는 일을 대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나라 사람들을 세워서 세금을 걷게 했는데 세금 걷어드릴 목표를 줬어요. 그러니까 그 목표를 걷어 들이면 그들은 세리들이 중간에서 더 많이 걷던, 안 걷던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하면 십만원만 걷으라고 했는데 십 오만원 걷어서 오만원을 따로 집어넣어도 로마제국에서 모른 척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세리들이 그 당시 그렇게 세금을 더 많이 징수해서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에게 상납도 하고 그 돈을 가지고 썼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배신자라고 하는 욕을 먹었습니다. 변절자라고 하는 욕을 먹었습니다. 다 뒤에서 침을 뱉고 욕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리들조차도 그런 일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늘 죄책감을 가졌던 것입니다. ‘내가 이러면 안되는데, 내가 이러면 안되는데, 내가 또 우리 동족의 그 고통을 더하여 줬구나. 내가 동족을 도와주지 못하고 그들의 물질을 착취해서 저들에게 고통을 주었구나’하는 그러한 죄책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나올 때에 “주님 제가 잘못한 것을 알면서도 또 죄를 짓는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렇게 외쳤던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청교도 설교자인 토마스 보스턴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회개는 민족과 교회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지 않도록 막아준다. 회개는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 회개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넓고 따뜻한 긍휼의 팔에 안길 수 있다. 하나님을 떠나 살아왔지만 다시 돌아오면 긍휼을 얻는다” 또한 이사야서 55장 7절은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야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철저히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용서의 십자가는 눈물의 회개 없이는 만날 수가 없는 십자가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죄 사함 받기 위해서 십자가 앞에 나와야 하는데, 눈물의 회개만이 십자가 앞에 나가는 길인 것입니다. 스스로 의로운 의인 인체 하지 말고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회개하고 첫사랑의 감격을 회복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천국 가신 뉴욕 퀸즈 한인교회 한진관 목사님께서 워싱턴에 오셔서 부흥회를 인도하시는데 부흥회 첫날 전하셨던 말씀을 제가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87~89년까지 3년 동안 계속 부흥회로 오셔서 말씀을 전하셨는데 첫날 말씀하시기를 “여러분 정말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면서 손을 가슴에 얹고 진정한 사랑의 고백을 가지고 “사랑의 예수님 제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열 번을 고백해서도 아무런 감동도 없고 눈물이 안 나면 그건 가짜 신자요, 이름만 크리스천이지 죽은 신앙입니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진정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는지 생각하며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강퍅한 마음을 깨뜨려주옵소서”라고 고백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 1서 9장 말씀을 기억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세리와 같이 깨어진 마음으로 회개하고 눈물의 기도를 흘릴 때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여주셔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쳐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 인정받았습니까.


3. 주님께 인정받는 신앙

세 번째 주님께 인정받는 신앙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눕니다. 누가복음 18장 14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의로움은 우리의 힘으로 절대 얻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의로워지려고 몸부림쳐도 우린 죄 덩어리이기 때문에 늘 죄에 갇혀 살게 되어있습니다. 죄의 용서는 우리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보시고 우리 죄를 용서해주실 때 우리는 죄에서 놓임받고 용서받은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종교적인 행위는 사람들에게는 참 그럴싸하고 사람들 앞에서 칭찬받을 수 있는 모습인지는 몰라도 주님이 그 심령을 보실 때 그들의 심령은 썩어 있었고 그들의 행위는 가식적인 행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비록 세리가 한 행위가 사람들 앞에 부끄러운 모습이었지만, 그 마음은 깨어져 있었고 주님 앞에 눈물의 기도를 드렸기 때문에 그 눈물의 기도를 주님 보시고 세리의 믿음을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주님의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은 잠깐입니다. 사람들이 잘한다 박수 치는 것은 잠깐이에요. 사람들의 마음은 늘 변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바뀝니다. 그러나 주님께 인정받는 여러분이 될 때 일생 다가도록 주님이 여러분을 꽉 붙들어 주시고 여러분 옮기는 발걸음 발걸음 주님 함께하여 주시며 주님의 은혜가 주님의 사랑이 주님의 축복이 주님의 평안함이 넘쳐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여러분 주님 앞에 깨어지고 낮아지고 회개해서 우리 주님 앞에 인정받는 주님의 일꾼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장차 먼 훗날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에 주님께로부터 다 칭찬받고 상급 받는 여러분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25장 21절입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이 땅에서의 우리의 업적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다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헌신은 주님을 향해서 우리가 드렸던 모든 그 귀한 우리의 노력과 정성은 하늘나라의 보석처럼 빛나고 큰 상급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한 번뿐인 인생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며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게 되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주여! 우리가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축복을 누리며 살게하 여 주시되, 받은 사랑을 우리 이웃에게 전하며 상처 입은 우리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주옵소서.

 지난 금요일에 독산동에 우리 교회 88세 된 강남수 집사님 댁에 심방을 갔는데요, 홀로 계신데 허리를 못 펴세요, 허리를 이렇게 구부려가지고 계신데, 제가 심방 갔다가 참 눈물이 핑 돌았는데 뭐라고 그러시냐면 “목사님, 제가 오늘밤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그러면서 군고구마를 구워 놓으셔가지고 제가 할 수 없이 다 먹고 왔어요. 너무나 감사해가지고. 제가 심방 갈 때마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마시라고 그렇게 말씀을 전하는데도, 이 할머님이 저를 위해서 군고구마 안 타게 하려고 냄비에다가 자갈까지 구해다 올려놓고 정성스레 구워가지고 주셨다고 하는 말입니다.
저는 그 정성과 그 사랑에 너무 감격했어요. 그래서 제가 “주님 앞에 가는 날까지 더 섬기며 살겠습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람들 찾아가고 그분들 섬기며 살겠습니다”하고 결심을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 주위에 고개만 돌려보면 얼마나 힘들고 어렵고 고통 가운데 살고있는 그리고 죽지 못해서 밤마다 고통 가운데 눈물 흘리며 살아가는 많은 고통에 처한 이웃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향해 주님의 사랑을 전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동안 나 중심으로 살았던 삶을 철저히 회개하고 주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까 우리가 함께 불렀던 찬송이 우리의 맘에 문을 열고 주님을 향한 헌신의 모습으로 드려지는 찬송이 되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278장 : 여러 해 동안 주 떠나>

(1절)
여러 해 동안 주 떠나 세상 연락을 즐기고
저 흉악한 죄에 빠져서 주 은혜를 잊었네
오 사랑의 예수님 내 맘을 곧 엽니다
곧 들어와 나와 함께하며 내 생명이 되소서

(2절)
죄악에 죽을 인생을 심히 불쌍히 여기사
저 하늘의 영광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셨네
오 사랑의 예수님 내 맘을 곧 엽니다
곧 들어와 나와 함께하며 내 생명이 되소서

(3절)
홍포를 입은 구주는 가시 면류관 쓰시고
저 십자가 높이 달리사 그 아픔을 참았네
오 사랑의 예수님 내 맘을 곧 엽니다
곧 들어와 나와 함께하며 내 생명이 되소서

(4절)
미련한 우리 인생은 주의 공로를 모르고
그 쓸쓸한 사막 가운데 늘 헤매고 다녔네
오 사랑의 예수님 내 맘을 곧 엽니다
곧 들어와 나와 함께하며 내 생명이 되소서

 여러분,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시는데 문을 활짝 열고 주님을 모셔드리고, 이제 남은 여생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이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불쌍히 보시옵소서. 늘 내 중심으로 내 뜻대로 교만하게 살았던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감사하고 날마다 겸손히 낮아져서 나보다 더 어렵고 힘들고 고통당하는 사람을 섬기며 주님 앞에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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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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