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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III) - 충성, 온유, 절제
2017.08.27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라디아서 5장 22∼23절)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있는데 첫 번째 그룹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서 사랑과 희락, 기쁨, 화평, 평안이고, 두 번째 그룹은 나와 이웃 간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열매의 특징으로 오래 참음, 자비, 친절함을 베푸는 것, 양선, 착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그룹은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서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1. 충성(Faithfulness)

 일곱 번째 충성의 항목에 대해서 우리 함께 은혜 나누기 원합니다. 이 충성이란 말의 헬라어는 ‘피스티스’인데 이는 ‘믿음, 신실함’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충성이라는 것의 의미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믿음으로 최선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 하나님께 인정받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사람 앞에 잘 보이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진실하지 않게, 그저 그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그저 그 사람이 지금 높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잘하는 척하는 모습을 보일 때가 참 많습니다. 이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이것은 위선의 모습입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의 충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믿음의 자세로 최선을 다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자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2절은 설명합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맡기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 직분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직분을 주시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믿음의 자세로 충성하도록 사명을 부여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직분은 계급장이 아닙니다. 섬김의 직분이요, 영광스런 직분입니다. 평신도로 있을 때는 불평도 하고 부정적인 얘기도 때때로 할 수 있고, 또 감정을 다 표현해서 소리치고 다투고 싸울 수 있어도, 일단 제직이 되면 그때로부터는 그것을 하면 안 됩니다. 왜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세우신 직분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직분자의 첫 출발점, 첫 걸음이 집사 직분인데, 집사는 헬라어로 ‘디아코노스’라 해서 ‘섬기는 자, 하인’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집사님이 되면 교회의 머슴이 되고 하인이 되는 것입니다. 궂은 일은 다 앞장서서 하고,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예배가 은혜롭게 하는 데 충성을 다하는 직분이 바로 집사 직분입니다. 집사님 직분으로 섬기다가 “이제는 종신토록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는 일꾼이 되라”고 해서 세우는 직분자가 장입니다.

 장로 직분은 아주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이제는 교회 부흥을 위해서 일생을 바쳐 헌신하는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의 대표로 세운 직분입니다. 그래서 그 직분자들로 인해서 교회가 든든히 서고, 교회가 부흥하고, 하나님의 큰 영광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도 너무나 훌륭하신 장로님들을 많이 세워져 각 부서에서 충성, 헌신, 봉사하여 교회 모든 행정적인 것이 아름답게 잘되고 있고, 부서 부서에서 잘 섬겨주셔서 교회가 화목하고 부흥하고 성장하고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직분을 맡겨주신 이는 우리 주님이시고,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충성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는 교회의 직분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달란트 비유로 그 맡은 자에게 충성해야 될 것을 가르쳐주셨는데, 한 사람에게 한 주인이 먼 곳을 가면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열심히 나가서 일을 해서 다섯 달란트를 더 남기고, 또 한 사람도 나가서 열심히 일해서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두 달란트를 남겼는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나가서 일을 하지 아니하고 땅에 파묻어놓고 놀았습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이제 그 하인들이 일한 것의 보고를 받고 그들을 평가하는데,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다섯 달란트 남긴 사람이나,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두 달란트 남긴 사람이나 칭찬이 똑같습니다.

 마태복음 25장 21절을 보면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주님 앞에 설 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게을러서 이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그저 놀고먹었던 한 종은 주인으로부터 책망을 받고 심판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25장 26절입니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서의 의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약의 요셉은 야곱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말씀을 잘 순종하고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충성된 자녀였고, 그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노예로서 팔려갔지만 노예로서 그 자리에서 열심히 충성해서 주인에게 인정을 받았고, 또 모함을 받고 죄수로 그가 감옥에 들어가게 됐지만 그곳에서도 맡겨진 모든 것에 충성하여서 간수장이 그를 높여 감옥 전체를 돌보게 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때가 되매 높이셔서 불과 서른 살의 나이에 당시 최대 강대국인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는 총리가 되어서도 교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 헌신하여서 온 애굽 사람과 이방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충성하고 최선을 다하고 헌신함으로 말미암아 인정받고 칭찬받고 장차 주님 앞에서 설 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 받는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녀들은 자녀들로서 자녀의 자리에서 충성해야 되고, 부모는 부모의 자리에서, 주부는 주부의 자리에서, 직장인은 직장인의 자리에서, 경영인은 경영인의 자리에서, 전문인은 전문인의 자리에서, 예술인은 예술인의 자리에서 충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게으른 사람들에게 복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성공은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나이가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있는 곳에서 나에게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하고 충성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길이요, 복 받는 길인 것입니다. 모세는 120세까지 충성했습니다. 히브리서 3장 5절에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랬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1절, 2절에 우리에게 주님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우리에게 주님께서 맡기신 하나님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가 되신다고 하는 복음의 비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가는 그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이 복음의 비밀을 전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가 되시고, 당신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당신의 삶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로 축복받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 귀한 복음을 전해야 될 것입니다.

 지난 8월 17일 날 제5회 성천상, 아주 귀감이 되는 의료인들에게 주는 상을 받은 91세 국내 최고령 의사 한원주 권사님이 계십니다. 소망교회 권사님이신데요, 평생 2/3, 60년의 그 긴 시간을 의사로, 그 중에서도 40년이 넘는 세월을 소외된 이웃을 위해 인술을 베풀며 살아오신 귀한 권사님이십니다. 3대째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아버님은 독립운동가요, 의사였습니다. 경성여자의학전문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가서 인턴, 레지던트를 거쳐 미국 원호병원 등에서 10년간 근무하고 나서, 한국에 돌아와 1968년 병원을 열게 되었는데,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다고 한 사람이라고 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는지,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도 잠깐. 1979년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남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어요.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기도를 해도 ‘이게 아니잖아요. 하나님, 정말 이럴 수 있습니까’라는 하소연부터 터져 나왔어요. 하지만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왜 나를 의사의 길로 인도하셨을까’부터 되짚어보게 만드시더군요.”

 문득 아버님이 생각났습니다. 아버님은 독립운동가면서 의사였는데 일제 치하에서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에 앞장서서 결핵 퇴치 운동, 또 콜레라 예방 운동, 한센병 환자 돌보기,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환자들 돌보기, 또 두메산골에 의료시설 없는 곳에 무료 진료를 하는 일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셨던 것을 기억하고, ‘이것이 나의 사명이다. 나도 아버지처럼 내 주변에 돈이 없어 병원에 못 오는 사람, 여러 가지 형편이 힘들고 어려워서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사람들을 돌보는 삶을 살아야 되겠다.’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28년 동안 도시 영세민, 노숙자등 어려운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겐 생활비도 지원해주고 장학금까지 지원해주었습니다.

 82세가 되던 해 또 다른 사명을 맡습니다. 자신처럼 황혼 앞에 선 노인 환자들을 섬기는 일입니다. 재활 요양 병원과 종신 계약을 했습니다. ‘내가 병원을 여기 서서 일할 수 있을 때까지, 마지막까지 여기에서 일하다가 세상을 떠나겠다.’ 그의 그 귀한 삶이 알려져서 8월 17일 날 상을 받게 되었는데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제가 가진 것을 나누기 위해 의사로서 소임을 다 했을 뿐인데, 뜻하지 않게 영예로운 상을 받게 됐습니다. 제가 일할 수 있을 때까지 하되, 치매 등 질병, 사고 때문에 일할 수 없을 때가 오면, 이 병원에 입원하고 여기서 임종할 수 있도록 계약했어요. 아픈 사람 고치는 게 제가 할 일이거든요. 그걸 지금까지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기뻐요. 하나님이 건강을 허락하실 때까지 사명을 이어가고 싶어요.“

 얼마나 귀한 권사님인지 모릅니다. 나이가 91세가 되었는데도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셔서 지금 환자를 돌보고 있어요. 여러분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여러분에게 맡겨진 사명이 매우 중요한 것임을 깨닫고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온유

 그 다음 여덟 번째가 온유입니다. 온유는 부드러운 성품을 말합니다. 요즘 너무나 사람들이 사나워졌어요. 사람을 사귀는 것도 잘 사귀어야지 사귀다가 헤어지면 요즘 헤어졌다고 와서 칼로 찔러 죽이고, 가서 폭력을 행사하고, 차로 들이박고. 전 뉴스를 보면서 가슴이 섬뜩 섬뜩 합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이 사람을 잘 사귀어야겠구나, 이거. 이런 폭력성 있는 사람을 사귀었다가는 큰일 나겠구나.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먼저 달라져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성령충만 받고 난 후에는 온유해져야 됩니다. 온유해져야 됩니다. 온유해지지 않으면 아직 충만 받은 게 아닙니다. 그것은 부드러움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온유하신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게 핍박받고 욕을 먹고 고난을 당하셔도 늘 그것을 온유함으로 참고 견디고 이기셨습니다. 이사야 53장 7절은 설명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포용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까지 용서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사야 42장 1절로 3절은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고함치고 소리 지른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닌데, 사람들은 목소리가 크면 자기의 뜻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목소리를 높인다고 해서 그것이 통과된다고, 그 떼거지처럼 모여서 소리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 반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소리쳐야 될 때 소리치지 아니하고, 온유함으로 감정을 다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품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내게 배우라. 내게 배우라. 예수님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십니까?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여러분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정 다 표현하고 살지 말고, 소리를 지르고 싶다고 다 소리를 지르고 살지 말고, 그럴수록 감정을 잘 조절해서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사랑으로 권면하고, 품고, 대화 나누면서,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어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뉴욕 타임즈 최장기 베스트셀러로 130주 동안 베스트셀러였고 천만 권이 넘게 팔린 책이 최근에 나왔습니다. 49개국 언어로 번역되었는데요, 게리 채프먼의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라고 하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온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은 온유하다. 우리는 사랑의 감정을 말로 전달하고 싶으면 온유한 말을 써야 한다. 온유한 말투로 해야 한다. 우리의 배우자는 우리가 사용하는 말보다는 그 어투로 내용을 이해한다. 같은 말이라도 크고 거칠게 표현하면, 그것은 사랑의 표현이 아니라 비난하고 정죄하는 표현이 될 것이다. 솔로몬은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잠 15:1)라고 했다. 배우자가 몹시 화가 나서 말을 함부로 할 때라도 당신이 그를 계속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더 열을 내며 화를 부추길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말을 해야 할 것이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표현이 거친 말을 하고 목청을 높여 소리를 질러도 여러분은 목소리를 낮춰야 되요. 마음속으로 ‘할렐루야. 할렐루야.’ 하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얼굴에 미소를 띠고 웃으면서 “아, 그래요.” 소리가 크면 소리를 더 작게 해야 됩니다. 저 사람이 잘 안 들리게. “그러셨어요.” 그 사람이 갑자기 소리가 작아지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소리를 왜 같이 안 지르나.’ 여러분 그렇게 감정을 다 표현해갖고 싸워보고 난 후에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잖아요. 마음이 편치가 않아요. 밥 먹어도 제대로 소화도 안 되고 감정만 나빠지는 것입니다. 온유하시기 바랍니다. 온유하면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온유하면 여유가 생기고, 온유하면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잠언 15장 1절은 말씀합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그런데 이 온유한 자에게 이 땅의 복도 주신다고 시편 37편 11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누가 많은 땅을 차지하느냐? 온유한 사람이에요. 이삭은 참으로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농사를 지어서 100배를 얻으니까, 그 집을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고 질투해서 그를 공격해 왔습니다. 애써 땅을 파 우물을 만들었더니, 와서 우물을 뺏었습니다. 당시 물이 귀했습니다. 물을 얻기 위해서 땅을 많이 파야 하는데 한 번 파서 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곳을 파서 물이 어디서 한 곳 나오는 곳을 찾는 그런 시절인데 우물을 빼앗아 갑니다. 그런데요. 이삭이 다투지 않았어요. 다른 곳으로 옮겨서 또 우물을 팠습니다. 물이 또 나왔습니다. 그런데 또 달려와서 그 우물을 뺏었습니다. 싸우지 않고 그 우물을 양보해줬습니다. 하인들이 말합니다. “아이, 저 사람들 왜 저렇게 무례하게 구는데 주인님의 왜 그러십니까?” “아니야, 아니야. 원하면 주고 우리가 또 가서 파면되지.” 가서 또 땅을 팠더니 또 물이 나왔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아, 저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이구나. 저 사람은 가는 데마다 물줄기가 따라다니는구나. 이제 그만 괴롭히자.’ 할렐루야!

 여러분 이 같은 넉넉한 마음, 온유한 마음,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지 못했더라도 오늘 이 시간부터 결심해야 됩니다. 여유 있게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사랑을 베풀며 살면 인생이 행복해집니다. 아름다워집니다. 멋있는 인생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26장 22절에 설명합니다.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야훼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3. 절제(Self-control)

 마지막 아홉 번째가 절제입니다. 절제는 ‘셀프 콘트롤(Self-control)’ 즉 자신을 잘 조절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잠언 25장 28절은 설명합니다.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마음이 무너지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마음을 잘 절제해야 됩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스피드를 내고 싶다고 그래서 막 밟으면, 절제하지 못하면 속도위반으로 티켓도 띠고, 또 사고도 나고, 많은 어려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절제해야 됩니다.

 특별히 운동선수들은 얼마나 절제하는지 모릅니다. 먹고 싶은 것도 몸 관리를 위해서 먹지 않고, 쉬고 싶어도 몸을 위해서 체력을 위해서 계속 훈련을 하고, 잠자는 것 먹는 것 모든 것 다 절제합니다. 또 정신도 늘 건강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합니다. 골프하는 사람은 정신이 무너지면, 멘탈이 무너지면 다 무너진다고 그래서 늘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공을 친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운동선수보다 우리는 더 절제해야 됩니다. 왜?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 받은 자녀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감정 표현하고 싶다고 다 표현하고, 소리 지르고 싶다고 다 소리 지르고, 싸우고 싶다고 다 싸우면 안 됩니다. 그것은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제가 설교 준비하다가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돼지들이 모여서 하나님 앞에 인간을 고발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먹을 것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돼지처럼 먹는다’고 그러는데 절대로 돼지는 위의 7, 80퍼센트가 차면 아무리 좋은 것, 맛있는 것 갖다놔도 먹지를 않는대요. 과식하는 법이 없답니다. 여러분, 돼지가 많이 먹어서 배탈 났다는 얘기를 들어봤습니까? 그런데 인간들이 자기들은 절제하지 못하고서는 우리 보고 ‘돼지같이 먹는다’고 우리를 갖다가 오히려 모독했기 때문에 고발했다! 그 예화를 보면서 실제로 우리 인간들이 절제하지 못하면서 그렇게 절제하는 동물을 들어가지고 ‘돼지처럼 먹는다’ 표현을 한 것을 보면 참 부끄럽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 가운데 하나가 절제의 은혜입니다. 늘 우리는 모든 면에 절제해야 됩니다. 감정도 절제하고 삶의 모습도 절제해야 됩니다. 너무나 한국은 음식물 쓰레기가 많이 남아서 그 음식물을 처치하지 못합니다. 대천덕 신부님과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음식을 옆에 있는 분이 많이 남기니까, 다른 때는 그런 말씀 안 하시는데 음식 남기는 것 보고 한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음식물 남기지 마세요.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하신 말씀이 마음에 딱 걸립니다. “음식물 많이 남기는 것도 죄에요.” 여러분, 지금부터는 남기지 말고 싹싹 비워가지고 절대로 남기면 안 됩니다. 특별히 뷔페 음식점 가가지고 이만큼 쌓아다가 반 씩 남기면 절대 안 돼요. 먹을 만큼만 조금 가져다 먹고 파해서 딱 음식을 조절을 해야지, 절제하지 못하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범사에 절제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정말 인정받고 사람 앞에서 칭찬받는 주님의 귀한 일꾼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톨스토이의 글 가운데, ‘사람에게는 어느 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주인공은 바흠이라고 하는 사람인데 농부로서 늘 넓은 땅을 갖기를 소원했습니다. ‘내 원이 없이 큰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지어봤으면 좋겠다.’ 그런데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데 어느 고장에 가면 원하는 대로 땅을 준다고 그래서, 그곳에 가봤더니 그 성주가 말하기를 하루 동안에 다녀올 수 있는 만큼 다녀오면 그 온 땅을 천 루블에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신이 나서 다음날 아침 일찍 동이 트자마자 그곳에 가서 “제가 이제 원하는 땅을 갖기 위해서 다녀오겠습니다!”하고 출발점에서 달려 나갔습니다. 그 대신 조건은 해지기 전에 그 자리로 돌아와야 돼요. 그러니까 해지기 전에 한 걸음이라도 더 가서 반환점을 돌아오기 위해서 또 가고 또 가고 또 갑니다. 해를 바라보면서 해가 중천에서 넘어가면 다시 되돌아가야 되니까 달려가다가 더 이상 갈 수 없을 때까지 갔을 때, 다시 돌아와서 해지기 전에 열심히 열심히 다시 돌아와 가지고 출발점에 와서 탁 치고 쓰러졌는데, 가보니 피토하고 심장마비로 죽었어요. 그의 하인이 그곳에 땅을 파고 묻어주었는데 그가 얻은 땅은 여섯 자였습니다. 일 미터 팔십, 관 들어가는 그 땅밖에 못 얻었습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우리 인생의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 16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철저하게 자신을 절제하고 훈련해서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고 사람 앞에 존귀함을 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성령으로 충만하여 풍성한 열매 맺는 주님의 일꾼 되기 원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변화되어서 우리 가정이 변화되고, 이웃이 변화되고, 이 대한민국이 변화되고, 그리하여 하나님 영광이 온 천하에 나타날 수 있는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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