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요한복음 5장 2~9절)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절대 희망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그 순간 모든 문제가 예수님 안에서 해결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죄에서 놓여남 받게 되고 가난과 저주와 질병에서 놓여남 받는 놀라운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세 가지 사역을 집중적으로 하셨습니다. 하나는 말씀을 가르치시는 일이요, 두 번째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는 일이요, 세 번째는 예수님께 나오는 모든 병자를 고치시는 일이었습니다. 특별히 병 고치시는 이 일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2/3이나 차지할 만큼 가는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시는 곳 마다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와서 병 고침 받지 못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믿음으로 나오는 자를 다 고쳐주셨습니다. 때로는 포기하고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에게도 찾아가셔서 병을 고쳐주시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셨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주님의 놀라운 은혜에 대한 것입니다.
1. 절망에 처한 인생
이 38년 된 병자는 절망에 찬 우리 인생을 의미합니다. 우리 인생은 절망 가운데 태어나서 절망 가운데 살다가 절망 가운데 죽어갑니다. 왜냐하면 죄 때문에 그렇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원튼 원치 않든 인간들은 이 세상에 죄성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언제 우리가 죄에서 놓여나 자유함을 받게 될까요? 그것은 우리가 육신의 몸을 벗고 천국 갈 때에만 완전히 자유함을 받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늘 성령 충만 받아서 죄와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절망과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지만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셔서 성령의 은혜로 충만하게 하시면 우리는 죄와 싸워 넉넉히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에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 못가로 가셨습니다. 거기에 수많은 병자들이 병이 낫기를 사모하며 그곳에서 머물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절과 3절은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라고 설명합니다.
양문은 예루살렘의 북쪽 성곽 근처에 있는 문으로 제사 드릴 때 쓰일 양들을 옮겨 들어가는 문이었기 때문에 양문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는데 이 베데스다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자비의 집’, ‘은혜의 집’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연못 옆에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던 이유는 가끔 천사가 와서 이 물을 끓어오르게 하는데 누구든지 못에 먼저 뛰어 들어가는 사람이 병을 고침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장 4절입니다.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그러니까 병원에서 치료 받지 못한 사람들이, 여러 약으로도 고침 받지 못한 사람들이 그곳에 와서 물이 끓어오르기만 기다렸다가 뛰어들어서 병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물이 끓어오를지 모르기 때문에 늘 주변에서 조바심을 가지고 끓어오르기만 기다렸다가 끓어오르면 물에 뛰어들었는데 그 순간 그 사람은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고침 받는 사람은 소수였고 고침 받지 못한 사람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아, 이 사람들이 좀 지혜롭지 못하다. 모두가 다 손에 손을 잡고 “하나, 둘, 셋!”하고 같이 뛰어들었다면 똑같이 고침을 받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해보았어요. 그러나 사람들을 자기 병 고치는 게 더 급하니까 그런 생각도 못하고 그냥 뛰어들었겠죠.
요한복음 5장 3절을 보니까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라고 되어 있는데 병자들에게 있어서 베데스다 연못은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이 베데스다 연못은 오늘날 교회를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가끔 이야기합니다.
“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그래?” “왜 교회 다니는 사람이 그렇게 문제가 있어?”
여러분, 교회는 완전한 사람이 오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사람들이 와서 주님의 은혜로 완전을 향해서 가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병원은 병자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이지 건강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영적인 병원입니다. 몸과 마음에 병이 든 사람들이 교회를 더 많이 찾아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심리학 교수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세상의 사람들 가운데 좀 적응하지 못한 비정상적인 사람이 2%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4%가 존재한데요. 그래서 교회 내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를 고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다 고침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가 병자입니다. 마음의 병, 육신의 병, 가족관계의 병,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깨어지고 있습니까? 부모 자식 간에, 부부간에 갈등이 심합니다. 형제간에도 그렇습니다. 여러 가지 병에 시달리며 살고 있습니다. 육신의 병은 그래도 병원에 가서 진단받고 고침을 받지만 마음의 병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두었다가 더 큰 문제와 어려움을 안게 되는 것입니다.
2015년도 사망원인 통계를 보면 1년 동안 13,513명이 자살로 죽었습니다. 하루 평균 37명이 자살로 죽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울증이라고 하는 병이 그 마음속에 들어와서 그를 사망으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병들이 우리를 죽음으로 이끌어가고 있는데, 특별히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질병은 해결할 방법이 없어요. 마음의 병에 걸린 사람들은 혼자만 괴롭고 아픈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아픈 사람은 쉽게 분노하고 쉽게 다른 사람과 다투고 비난하고 작은 일에도 상처받고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께 나와서 이 마음의 병을 고침 받아야 합니다. 우울증도 치료함 받고 마음의 상처도 치료함 받고 마음의 스트레스와 마음의 눌린 것 내 마음에 고통을 주는 것들을 치료함 받아야 될 것입니다.
이 연못가에 맹인도 있었습니다. 육신의 맹인은 앞을 보지 못해 불편하지만 진짜 맹인은 영적인 맹인입니다. 하나님의 계심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 교회 나와서 예배드리고 가는데도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는 영적인 맹인입니다.
또 연못가에 다리 저는 사람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마음이 삐뚤어져서 늘 무언가 불균형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편치가 않아요. 그러니까 남을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하고 본인은 문제를 만들어냈어도 문제가 자기로부터 일어났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또 혈기 마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는 몸의 일부가 마비된 사람들인데 생각이 마비가 되어서 과격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기가 과격하게 주장을 하고 막 들어 엎어야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가끔 보면 과격시위를 하다가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언가 생각이 마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과격하게 해야만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본인이 어딘가에 병이 들어있다고 하는 그런 것을 보여주는 모습일 뿐인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사람들을 위한 영적인 병원입니다. 예수님만이 모든 병을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고치지 못하는 병을 예수님만이 지금도 고치십니다. 중요한 것은 이 교회가 베데스다 연못인데,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베데스다 연못이 끓어오를 때 믿음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은 언제나 베데스다 연못이 끓어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구경꾼으로 와 있으면 절대로 그 물은 끓어오르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고 못 받는 것은 내 자신의 믿음의 문제입니다. 내가 구경꾼으로 와 있느냐, 아니면 예배자로 와 있느냐 이것에 따라서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주여! 내가 이 시간 내게 주시는 은혜를 받게 원합니다. 내가 끓어오르는 연못에 뛰어 들어가기 원합니다! 주님, 역사하여주옵소서!’
말씀을 들을 때, 찬양할 때, 기도할 때, 베데스다 연못이 끓어오를 때 뛰어 들어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마음의 병, 육신의 병, 환경의 병, 가족관계의 병, 모든 병에서 고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로 형식적으로 습관적으로 예배드리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여, 오늘 이 시간도 베데스다 못이 끓어오르는 그 은혜의 현장 속에 내가 뛰어 들어가게 하여주옵소서! 많은 예배 가운데 또 한 번의 예배가 아니라 나에게는 나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기적의 예배, 축복의 예배, 은혜의 예배, 신유의 예배되게 하여주시옵소서!’
그와 같은 은혜가 임해야 되는 것입니다.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입니다. 자비의 집입니다. 이 교회는 주님이 역사하시는 은혜의 집입니다. 자비의 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많은 병자들 가운데 아예 자포자기하고 그 옆에 누워있던 38년 된 병자입니다. 이 병자는 병이 낫기 위해서 그 연못가에 누워있었지만 해를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자기보다 형편이 나은 사람이 뛰어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절망이 쌓여갔습니다. 병 고침 받은 사람에게는 자비의 집이었지만 병 고침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고통의 집이 되었습니다. 물이 어쩌다 끓어오를 때 다른 사람이 뛰어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은 고침 받았구나. 나는 또 버림받았다.’라는 생각에 그는 한 해를 지내고, 두 해를 지내고, 10년을 지내고, 20년을 지내고, 38년이 된 것입니다.
이제는 몸을 잘 거동할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내 인생은 여기서 끝난다고 생각하면서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던 병자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세상에서 버림받고, 사업이 실패하고, 가정이 깨어져서, 상처 속에 고통 속에 ‘난 끝났어.’하고 누워있는 그 자리에 예수님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있는 곳에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사람들은 여러분을 버리고 떠났어도, 육신의 병이 깊어졌어도, 마음의 병이 깊어졌어도, 주님은 여러분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여러분에게 찾아오셔서 여러분의 눈에 눈물을 닦아주시고 여러분의 고통과 상처를 치료하여주시고 다시 새 힘을 허락해주시는 것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베데스다의 끓어오르는 물에 뛰어 들어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병자를 찾아오신 예수님
요한복음 5장 6절은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절망에 처한 38년 된 병자에게 놀라운 기적이 임했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분이 예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찾아갈 힘도 없고, 능력도 없어요.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우리 같으면, “네, 예수님! 당장 고쳐주세요.” 할 텐데, 이분은 38년 동안 하도 절망하고 또 절망하고 또 절망해서 완전히 다 포기했어요. “낫고자 하느냐?” 할 때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찾아오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그 누운 곳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아픔을 보십니다. 우리의 슬픔을 보십니다. 우리의 문제를 보십니다. 우리의 어려움을 보고 계신 것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일자리가 없어요. 1백만 명 넘는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고 있습니다. 어떤 청년은 원서를 서른 번, 마흔 번 냈는데도 자기가 일할 곳을 찾지 못해서 절망 속에 살아갑니다. ‘나는 끝났다’ 할 때 주님이 우리에게 고개를 돌리시고 우리에게 관심을 보여주십니다. 시편 31편 16절에 이와 같이 다윗이 기도합니다.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보실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시편 31편 7절, 8절입니다.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고난을 보시고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으며 나를 원수의 수중에 가두지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주님이 우리를 지금도 사랑의 눈으로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를 불쌍히 보고 계십니다. 주님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런데 이 병자의 대답을 보세요.
요한복음 5장 7절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내가 낫지 못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먼저 다 뛰어 들어가서, 내가 들어갈 자리에 먼저 들어가서 고침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절망에 깊어지면 남 탓을 하게 됩니다. “부모님을 잘못 만나서 내가 이 꼴이 되었어요.” “내가요, 친구 잘못 만나가지고 배신당해서 내 재산을 다 날렸습니다.” “제가요, 보증을 서주면 안 되는데 보증 한 번 서줬다가 이 꼴이 되었네요.” “제가요, 상처받아가지고 마음에 쌓이다보니까 스트레스 받아서 암이 되었어요.” 사람들에게 자기가 어려운 일 당한 것이 누구 탓이라고 이렇게 말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때 ‘누구 탓입니다. 누구 탓입니다.’라고 부정적으로 말할 것이 아니라 “주님, 내가 낫기 원합니다!”라고 담대히 말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어요.” 남 탓하지 말고, “내가 부모님을 잘못 만났어요.” “친구를 잘못 만났어요.” “내가 잘못된 사람을 만나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어요.” 이렇게 말하지 말고 “주님, 제가 낫기를 원합니다!”
맹인 바디메오 보세요. “네게 무엇 해주기를 원하느냐?” 하니까,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얼마나 분명하고 정확한 답입니까? “내가 앞을 못 보는데 보길 원합니다!” 믿음의 고백으로 주님 앞에 나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미국에서 레이크우드 교회 담임 조엘 오스틴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태도는 이러해야 한다. ‘진단서 따위에 흔들리지 않아! 하나님은 의학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실 수 있어! 하나님이 내 몸을 지으셨으니까 말이야. 의사들이 약을 짓고 수술할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치유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야!’ 이것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열쇠는 상황을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것이다. 부정적인 상황만 보면 낙심하고 의심이 싹틀 수밖에 없다. 상황이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면, 그분이 우리 삶 속에 나타나 놀라운 일을 행해주신다!”
특별히 몸이 자주 아프신 분들은 약속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서 치료자 예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53장 5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나음을 받았도다. 나음을 받았도다. 이미 과거완료형입니다. 2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다 사하셨고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병을 고치셨고, 고치시고, 고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문제의 해결자 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3. 문제의 해결자 예수님
문제의 해결자 예수님에 대해서 함께 생각합니다. 5장 8절에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에게 명령하십니다. 세 가지 명령입니다. ‘일어나라’, ‘네 자리를 들고’, ‘가라.’ 일어날 수가 없어요. 38년 동안 누워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주님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주님 명령은 불가능을 가능케 합니다.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38년 된 병자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예수 이름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고백하면 기적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3절, 14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주님 말씀하십니다.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질병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슬픔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가난과 저주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그 다음의 명령은 “자리를 들어라!”는 것입니다. 누워있던 자리는 자기의 절망의 자리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구원받은 다음 우리는 과거의 상처에 머물러있지 말고 상처를 들고 이제는 믿음으로 나아가야합니다. 예수님 만난 후에도 계속 뒤를 돌아보고 과거에 머물러 있는 한 우리는 절망의 자리에서 헤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누웠던 자리를 들고 일어나서 아무 곳에다 갖다 버렸겠죠. 여러분 38년 누워있던 때가 찌든 그 자리. 우리말로 하면 돗자리 같은 그 때 찌든 자리를 끼고 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이 “들고 일어나라!” 그리고 “걸어가라!” 주님 말씀은 이제 더 이상 과거에 머물러있지 말고 믿음으로 일어나서 과거의 상처를 잊어버리고 씻어버리고 믿음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명령을 듣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자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걸어갔습니다. 요한복음 5장 9절입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이제 “가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예비하신 축복의 내일을 향하여서 걸어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후에 우리의 과거의 모든 상처를 딛고 일어나서, 이제는 우리처럼 절망에 처했던 사람들, 상처와 고통과 괴로움에 지친 사람들에게 가야하는 것입니다. 울고 있는 저들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전해줘야 합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을 찾아서 예수님을 전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병상에 누워있는 사람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의 모든 부정적인 절망의 모습에서 이젠 일어나 절망의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최근에 책 한 권을 읽으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일곱 번째 봄』이라고 하는 책인데, 전 그 책을 읽으면서 그런 병이 있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스티븐 존슨 증후군이라는 병인데 희귀성 중증질환입니다.
서른한 살의 나이에 항생제를 먹고 부작용이 왔어요. 2009년 8월10일,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디자이너로 취직을 해서 열심히 하고 있던 그날, 열흘 전에 먹은 항생제 때문에 온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병에 걸릴 확률은 만 명 중에 한명이랍니다. 온몸이 수포와 발진으로 뒤덮이고 수포들이 터지면서 고름과 피로 온몸을 뒤덮게 되었습니다. 처음 간 병원에서 이 병명을 모르고 일주일 동안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큰 병원을 가고 나서 알고 보니까 스티븐 존슨 증후군인데, 온몸이 다 살갗이 부풀어 오르면서 이것이 터져서 피고름이 되는 겁니다. 이 병이 심해지면 머리털이 다 빠지고 손톱 발톱이 다 빠진데요. 그런데, 썩어 들어가는 피부를 다 뜯어내고 다시 약을 바르고 치료하기위해 하는 드레싱을 해야 되는데, 온몸의 살점을 부풀어 오르는 것을 다 뜯어내고 약을 바르니까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대량의 그 모르핀을 투여해도 통증이 너무 심해서 견디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회상합니다.
“첫날 드레싱은 지옥 같았습니다. 타들어 가는 목마름에도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었고, 뜨거운 용광로 속에서 살을 파먹는 구더기와 한 몸이 되어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습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고 후회해도 되돌아갈 수 없는 곳,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딱 지옥이었습니다!”
이렇게 온몸에 껍질을 그 부풀어 오르는 것을 다 뜯어내고 약을 바르는 그 드레싱을 하루에 두세 번씩 받으면서 주사 바늘 꽂을 자리를 찾지 못해서 며칠 동안 이 대동맥을 잡고 한 그 라인 잡기를 여러 번 하고. 그 고통의 순간을 이겨낼 수 있었던 그 유일한 힘은 예수님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마취제도 없이 모르핀도 없이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셨을까!’ 또 하나는 그의 신앙인데 오빠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오빠가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오빠의 기도가 시작되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이 상황에서도 주님을 먼저 찾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처럼 처참한 상황에서도 오빠의 기도는 감사로 시작되었다. 오빠, 언니, 나 우리 삼 남매는 큰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죽여 하염없이 울었다. 그날부터 나에게도 새로운 감사 찾기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몇 달 동안 온몸의 살이 부풀어 오르고 또 뜯어내고 약 바르고 손톱은 손톱 발톱은 다 빠지고 그 후유증으로 눈에 망막과 각막이 손상되어 19번 수술을 하고 거의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 마음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하필이면 저를 택했나요? 왜 저를 사랑하시나요?” 그때 주님 말씀하십니다. “보리야. 내가 너를 사랑함은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란다.”
지금 많이 회복이 되었습니다. 눈은 여전히 잘 보이지는 않지만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프기 전엔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아픈 뒤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이제는 나에게 새롭게 주어진 하루를 뜻깊고 사려 깊게 살고 싶습니다. 나의 저자이고 완성자이신 하나님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나는 두렵지만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분의 다음 페이지를 기대하고 소망합니다!”
예수님만이 모든 문제의 해결자가 되십니다. 이 자매님은 온몸을 벌거벗기고, 온몸에 살점이 다 부풀어 올라서 피고름이 되어서 그걸 다 뜯어내는 그러한 치료를 수십 번 이상 받으면서 그 절망의 가장 밑바닥 죽음의 문턱에서 베데스다 연못이 끓어오르는 기적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손톱 발톱이 다 빠지고 지금 손톱이 하나 정도 밖에 안 나있는데도 끓어오르는 베데스다 연못 속에 뛰어들어 주님을 만나고 이렇게 감사의 고백을 글로 써서 이번에 책을 내게 된 것입니다. 그 책을 읽어보면 ‘사람이 어떻게 이런 고통을 견딜 수가 있을까? 신앙의 힘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러한 고통을 이겨낼 수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온몸이 전체가 다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고 그것이 곪아 터져서 피고름이 되고, 살점이 달라붙으니까 환자복도 입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살점하고 피고름이 붙어서 옷을 벗으면 살점이 떨어져나가니까 온몸이 벌겨 벗겨져서 몇 달 동안 병원에 누워서 하루에 두 번씩 살점을 뜯어내고 약을 바르고 몸을 뒤집고 아무리 진통제를 써도 너무 통증이 심해서 진통제도 듣지 않고, 그 가장 힘들고 어려운 자리에서 예수님 만난 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이 끓어오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믿는 사람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절망은 새로운 희망의 시작일 뿐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떤 문제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어떤 질병이 여러분을 괴롭히고 있다고 할지라도, 어떠한 가족 관계의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생활이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이제는 ‘다 끝내야 되겠다!’ 하는 그러한 절망에 처했다 할지라도, 오늘 절대 희망되신 예수님 만나시기 바랍니다. 베데스다 연못가를 찾으신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끓어오르는 연못에 뛰어들어서 한 분도 빠짐없이 모두가 기적을 체험하고 돌아가는 은혜의 시간, 기적의 시간, 기쁨의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은혜에 사랑에 얼마나 감사한지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 자체가 기적이고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나 같은 사람도 주님 사랑해주셔서 찾아오셔서 구원해주시고 가장 깊은 절망의 자리에 처했던 저들을, 저희를 주님 찾아서 건져주시고 저희들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오늘 이 시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마음의 병이 다 치료받게 하시고 육신의 병도 치료함 받게 하여주시고 관계의 병도 치료함 받게 하여주시고 모든 어려움에서 놓여날 수 있도록 은혜 내려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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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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