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마가복음 10장 13~16절)
어린아이들은 가정의 꽃이고 희망이고 행복입니다. 그리고 이 사회의 미래입니다. 장차 교회의 큰 일꾼들이 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이 어리고 힘이 없고 연약하다는 이유로 많이 무시당해왔습니다. 1923년 5월 1일, 어린이 날이 처음으로 제정되었습니다. 소파 방정환 선생님께서 어린이 운동가들과 함께 외친 구호는 우리 어린아이들을 ‘욕하지 말고, 때리지 말고, 부리지 말자’였습니다. 얼마나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쉽게 욕을 하고 잘 때리고 아이들을 막 함부로 다루고 부렸던지 그때 캠페인이 ‘욕하지 말고, 때리지 말고, 부리지 말자’였던 것입니다. 94년이 지난 오늘날 얼마큼 아이들에 대한 우리들의 모습이 달라졌습니까? 많이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요. 오늘날도 아이들이 부모에게 매 맞고, 심지어는 생명을 잃기까지 하고,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가 종종 뉴스를 통해 대하게 됩니다. 지금도 무시당하고 매 맞고 제대로 사랑받지 못한 채 자라는 아이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저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돌보고, 사랑으로 섬기는 그런 본을 보여야 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러한 모습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어린아이들이 기도받기 위해서 나올 때 제자들이 이를 막고 꾸짖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제자들의 태도
제자들의 태도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마가복음 10장 13절입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자녀들에 대한 부모사랑은 내리사랑입니다. 예수님 당시 부모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훌륭하신 선생님이나 또 존경하는 분들에게 기도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기도 받으러 나왔는데, 사람들이 많이 몰려오니까 제자들이 사람들이 오는 것을 막으면서 특별히 기도 받기 위해서 온 아이들을 막고 꾸짖었던 것입니다. 왜 선생님 피곤하게 이렇게 와서 괴롭히느냐고.
마태복음 19장 13절입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님 당시는 철저하게 남성 위주의 사회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수를 헤아릴 때에도 여자와 아이의 수는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 마태복음 14장 21절을 보니까,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대 시대에 어린아이들의 인권은 전혀 존중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이후 아이들을 존중하는 그러한 아름다운 관습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원하지 않는 아이들을 죽게 내버려두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집이 가난해서, 재산분할을 원치 않아서, 여자 아이라서, 사생아라서, 쓰레기 더미나 배설물 구덩이에 아이들을 던져버렸습니다. 거의 다 죽게 되는데 어쩌다 구조된 아이는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 덕분에 교회가 세워지고 난 이후, 아이를 버리는 악습은 폐지가 됩니다.
존 오트버그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시작한 운동이 퍼져 나가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초창기 교훈서에 보면, 당시 널리 성행하던 낙태와 유기와 영아 살해 같은 관습들이 금지되어 있다. 4세기 말에는 기독교로 개종한 황제가 전 제국에 걸쳐 유기라는 관습을 법으로 금지시켰다! 세월이 가면서 서서히 사람들은 원하지 않는 아기를 똥구덩이에 던지지 않고, 수도원이나 교회 앞에 데려다 두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고아원이다!”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서 고아원을 세우게 되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 곳곳에 고아원들이 세워져서 버려진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아이 사랑으로부터 출발된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들은 아이들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읽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데 아이들까지 데려와서 기도받는다고 그것을 꾸짖고 가로막은 것입니다. 예수님 곁에 있으면서 예수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스스로 사람을 판단하고 당시 관습에 따라 아이를 멸시한 그러한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 믿고 우리가 달라져야 되는데 예수님 믿고 난 후에도 세상 사람과 별 차이가 없이, 힘이 없고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그들을 사랑으로 존중하지 않는 데에 우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우리들이 우리 자신을 돌이켜보고 반성해야 될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힘없고 가난하고 병들고 문제 있고 버림당하고 소외된 자들을 사랑으로 섬기고 돌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으스대면서 오히려 자기들이 권세를 휘둘렀던 것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면 오래 다닐수록 우리가 더 온유와 겸손으로 섬김의 본을 보여야 될 것입니다. 처음 나와서 잘 뭘 모르는 성도들을 사랑으로 잘 돌봐야 됩니다. 무엇을 잘 모른다고 꾸짖고 야단치면 새로 나온 성도들이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처럼 섬김의 본을 보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주님의 일꾼들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빌립보서 2장 3절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예수님의 제자들 같은 그러한 태도로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좀 더 배웠다고 가진 것이 많다고 높은 자리에 있다고 없는 사람을 소홀히 대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태도
예수님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마가복음 10장 14절은 이와 같이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잘못된 모습을 보고 꾸짖으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들이다. 이런 모습으로 주님을 섬기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인데 왜 너희들이 내게 오는 것을 가로 막느냐?’ 제자들의 잘못된 태도를 지적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 5절 6절입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주님을 섬기는 자들의 모습은 온유와 겸손과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로 우월의식에 빠져있으면 안 됩니다. 특별히 어린아이들을 사랑으로 잘 돌보고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이 아이들이 우리의 미래인 것입니다. 교회의 미래인 것입니다.
아이들을 함부로 대하고 아이들에게 욕하고 아이들을 때리고 이렇게 상처를 주는 모습들이 우리 주변에 흔히 발견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부터 먼저 그 풍토를 바꿔야 합니다. 우리들이 아이들을 잘 사랑으로 돌볼 때 이 나라에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면 남자만 5천명이고 여자와 아이를 합해서 약 2만 명의 사람들이 다 먹게 되었는데 정작 이 일의 큰 기적을 행하도록 그 헌신의 모습을 보여준 것은 어린아이였습니다. 어린아이가 예수님께서 먹을 것을 찾는다고 하시니까 자기가 먹을 것을 주님께 내놓았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9절입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어린아이의 헌신이 굶주렸던 수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고 열두 바구니나 남는 큰 축복을 받아 누리게 한 것입니다. 절대로 우리가 아이들을 소홀히 여기면 안 됩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격을 가진 존중받아야 될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부모님이 화났을 때 아이들에게 막 함부로 말을 하고 욕을 하면 안 됩니다. 그 아이들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교육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이집에서나 유치원에서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돌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에 가면 행복하고 기쁘고 즐거운 그러한 교육을 해야 되는데 권위적이고 야단치고 꾸짖는 그러한 모습의 교육풍토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이 어린아이였을 때 그를 부르셨습니다. 다윗이 소년이었을 때 그를 불러 기름 부으셨던 것입니다. 엘리사에게 가서 나병을 고침 받은 나아만 장군도 작은 여종의 말을 듣고 엘리사를 찾아가 그 나병을 고침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아이들이 주 앞에, 주님께 오는 것을 막지 않으시고 아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그들에게 기도해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16절입니다.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몬테소리 교육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유명한 교육학자 마리아 몬테소리가 제창한 교육으로서 전 세계에 이 몬테소리 교육이 파급되어 있습니다. 마리아 몬테소리는 원래 의사입니다. 이탈리아 최초의 여성의사였는데 어느 날 지적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합숙하고 있는 사회복지시설을 우연히 방문을 하였다가 아이들이 마치 짐승처럼 대우를 받고 있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날 때 지적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저렇게 아이들이 소홀히 여김을 당하나!’ ‘짐승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우리에 가둬놓고 먹을 거만 세끼 주는 것이, 그것이 아이들을 돌보는 것인가!’
그래서 그가 그때부터 지적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최초로 공립재활학교를 만들고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서 특수 기구도 만들고 그래서 아이들이 거기서 행복을 느끼면서 지적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잘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의사 직을 포기하고 아이들을 교육하는 일에 전념했던 것입니다. 어느 날 공원에서 길거리의 거지로 살고 있는 엄마와 아이를 보았는데, 아이가 눈이 반짝반짝하면서 무엇을 만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 그렇구나. 아이들의 마음에 갖고 있는 저 내일을 향한 꿈을, 저 빛을 비취게 하자. 어린이의 영혼 속에 있는 저 빛을 비취게 하자.’
그래서 가난한 동네에 가서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어린이 집을 만들었습니다. 세계 최초의 어린이 집입니다. 지적장애 아이들에게 하던 모든 노력의 몇 배로 다시 또 어린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길거리에서 버려져서 자라는 아이들이 그것을 교육을 받으면서 아주 뛰어난 인재들로 성장했습니다.
아이들을 돌보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어느 날 나는 내 가슴에 손을 얹고 자문해보았다. 나는 그리스도가 어린아이를 팔에 안으시고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아이 중 한 사람을 영접하는 자는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 ‘너희가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한 그 어린아이를 만났는가? 나는 이렇게 그들을 만났다! 어린이집에 온 아이들은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한 채, 가난하고 방치된 어린이로 자란 아이들이었다. 말을 건네지 못할 만큼 위축되고 얼굴은 무표정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아이들이 변화해서 완전히 다른 아이가 되었다!”
그는 세 번이나 노벨 평화상 후보로 올랐지만 그때마다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린아이를 돌본 것 밖에 없습니다.” 상 받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녀의 묘비에 이와 같은 글이 적혀져있습니다.
“나는 나의 친애하는 모든 어린이가 인류와 세계의 평화를 건설하기 위하여 하나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한 의사의 헌신이 전 세계 어린아이의 교육의 풍토를 바꾸어놓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화되어서 주님께 쓰임받기만하면 이와 같은 위대한 일이, 놀라운 일이 지금도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 우리를 사용하여 주셔서 우리를 통하여 우리의 자녀들이 변화되게 하시고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아지게 하여주시옵소서.’
여러분, 우리 대한민국의 가장 큰 위기는 북한이 핵무기 가지고 위협하는 것도 아니요, 이 조그마한 땅덩어리에서 동서로 나뉘어서 지역 간에 다툼을 하는 것도 아니요, 진보와 보수가 다툼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출산입니다. 아이가 태어나지 않습니다. 결혼해서 두 사람이 둘을 낳아야 현상 유지인데 두 사람이 한 사람 밖에 낳지 않습니다. 1년에 40만 명이 태어납니다. 80만 명이 태어나야 되는데 40만 명이 태어납니다. 앞으로 2, 30년 후에는 우리 대한민국이 노동시장이 완전히 붕괴되고 큰 위기에 다다르게 될 것입니다. 중앙일보에서 1년 넘게 특집 기사로 내보내는데도, 102조를 쏟아 부었는데도 아직 저출산은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생명 존중 캠페인을 벌여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게 해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셋에서 다섯은 낳자. 다섯! 기본적으로 다섯씩만 낳으면 우리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아질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미래가 아이들에게 있습니다. 이 문제는 국가가 아무리 캠페인을 벌여도 안 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실천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아이 울음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지게 하기를 바랍니다.
3. 천국을 소유할 자
천국을 소유할 자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마가복음 10장 15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주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순수함입니다. 우리가 순수한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7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어린아이는 백지와 같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부모님이 그 마음에 심어준대로 그림을 그립니다. 사랑을 심어주면 사랑을 그리고 미움을 심어주면 미움을 그립니다. 기쁨을 심어주면 기쁨을 그리고 분노를 심어주면 분노를 그립니다. 그것이 어린아이입니다. 순수합니다. 어린아이에게 흰색이라고 하면 흰색이라고 믿어요. 어린아이에게 그것은 먹으면 몸에 안 좋다. 그러면 순수하기 때문에 안 좋은 건 먹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순수한 모습으로 주님을 섬길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른이 되면서 순수함이 다 사라져버렸어요. 앞에서 이렇게 말하고 뒤에 가서 다른 말하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거짓말도 하고 사기도 치고. 사업 파트너에게 피해도 주곤 합니다.
대한민국에 없어져야 될 것 중에 하나가 어음 제도입니다. 지금 공사를 했는데 공사가 끝나서 돈을 줘야하는데 3개월 후에 받으라는 3개월 후의 수표를 주는 거예요. 6개월 후, 1년 후. 현금으로 주고 계산을 해야 경제가 이렇게 돌아가는데 나중에 갖다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6개월 후에 돈을 못 갚게 되면 부도를 내요. 연쇄 부도가 일어나서 많은 사업이 문을 닫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순수하기 때문에 그렇게 남에게 사기를 칠 줄 모릅니다. 남에게 피해를 입힐 줄 모릅니다. 어린아이들은 어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런 일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앞에서 늘 순수한 믿음을 갖고 믿음을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 믿었을 때 그 모습으로 돌아가서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러한 모습으로 주님을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어린아이는 겸손합니다. 겸손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1절을 보면 이와 같은 제자들의 질문이 나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님, 천국 가면 누가 높은 자리에 앉아있습니까?” 항상 이 사람들은 높은 자리, 위로 올라가는 것만 관심을 갖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절과 3절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아이들은 늘 부모를 의지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압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은 꼭 부모에게 와서 “이것 좀 해줘.” “이것 좀 열어줘.” “나, 무엇 좀 사줘.” 늘 부모에게 부탁해요. 왜?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만이 나의 모든 것 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조금 더 배우면 교만해지고, 조금 더 가지면 교만해지고, 조금 더 높아지면 교만해지고. 교만이 독선이 되고 그래서 실수를 하게 되서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권력을 가지면 가질수록 겸손해야 되고 배우면 배울수록 겸손해야 되고 돈을 많이 벌면 벌수록 겸손해서 섬기는 자가 될 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35절에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마태복음 20장 26절, 27절입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섬김을 체질화해야 됩니다. 그래서 내가 섬길 것이 무엇인가 늘 살펴보아야 합니다. 같이 여러 사람이 차를 타고 내려가다가 휴게소에 들어가면 앉아서 음식을 시킵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섬김이 체질화 된 사람은 앉자마자 휴지를 가져다가 놓고 수저통을 열어서 수저를 차립니다. 물컵도 가져다가 물도 따릅니다. 거기에 비해 어떤 사람은 손도 까딱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가만히 앉아서 차려주는 밥만 먹곤 합니다.
식사가 끝난 다음에도 그냥 밥 먹고 일어나서 나가는 사람이 있고 다 정리해서 다시 식기 반납 통에 갖다 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체질화 되어있는 사람은 아예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체질화 되지 않은 사람은 어디 가서 먹고 놓고 그냥 나와요. 분명히 반납하라고 되어있는데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경의 본을 보이지 않으면 이 세상이 굉장히 불편한 세상이 되고 문제 많은 세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본을 보여야 되고 섬김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행복한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내 것, 네 것, 다투고 싸우지 말고 베풀고 양보하고 섬기며 살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히 임할 줄로 믿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빌립보서 2장 6절로 8절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주님 앞에 겸손히 자신을 낮추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이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아낌없이 베푸시기 바랍니다. 더 많이 주님께서 채워주실 것입니다. 움켜쥐고 사는 인생은 평생 불행한 인생입니다. 움켜쥐고 살다가 그렇게 쓰지도 못하고 쓸쓸히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풀고 또 베푸는 인생은 더 주시고 더 주셔서 풍성함을 누리고 살다가 장차 주님이 오라 부르실 때 영광 가운데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선택은 우리가 해야 됩니다. 우리가 과연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한평생 섬김의 삶을 살 것이냐, 아니면 마음이 굳어진 제자들처럼 늘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우월감에 사로잡혀서 교만의식에 살 것이냐. 그것이 본인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한평생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서 온유와 겸손을 옷 입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헐벗고 굶주리고 고통당하는 이웃을 섬기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겸손히 섬기며 살게 하여주시고 사랑을 베풀며 살게 하여주시고 무엇보다도 가난하고 소외되고 불쌍하고 병들고 문제 있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돌보며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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