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요한복음 21장 15~17절>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누구나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며 삽니다. 단 한 번도 실패해본 일이 없고, 단 한 번도 좌절하고 절망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자랄 때만 하더라도 중학교 시험 있었죠, 고등학교 시험 있었죠, 대학교 1차 시험 있었죠, 2차 시험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 시험에 떨어진 실패의 경험을 한 친구들이 참 많았습니다. 더욱이 대학 1차, 2차에 떨어지고 나면 재수를 합니다. 재수해서 떨어지면 또 삼수를 합니다. 그러니 다른 학생들은 다 대학을 다니는데 본인은 학원에 다녀야 하는 그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사법시험은 더합니다. 1차를 패스하고 나서 2차 패스하려고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어떤 분은 아홉 번을 봤는데도 못 된 분을 봤어요. 그만큼 시험이 우리를 절망하게 합니다. 좌절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음에 상처를 남깁니다. 패배의식을 가져다줍니다. 열등감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내가 약해지면 내 마음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너는 패배자야, 너는 뭘 해도 되는 일이 없어, 너는 그렇게 살다갈 거야.’
이 같은 실패와 좌절감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과연 어디서부터 올 수 있습니까? 인간의 힘으로 이 마음의 좌절과 절망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만이 우리를 절망에서 건져주고 실패의 자리에서 우리를 일으켜주고 우리를 새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주여! 그 사랑을 우리가 오늘 체험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 가운데 강물처럼 넘쳐나서 모든 실패와 상처의 과거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주님의 사랑에 힘입어서 믿음으로 일어나게 하여주옵소서.’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나니까 마음에 절망감, 좌절감, 배신자라고 하는 그 마음의 낙인이 찍혀서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고기 잡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예수님의 위대한 사랑으로 그를 다 용서해주시고 치료해주시니까, 너무나 베드로는 기쁘고 감사해서 성령 충만 받고 나아가 주의 복음을 전하다가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달려 순교하는 그러한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순교할 때에도 ‘내가 어떻게 예수님과 똑같이 십자가에 달릴 수가 있느냐. 십자가를 거꾸로 돌려 세워서 내가 거기서 죽겠다’며 거꾸로 매달려서 세상을 떠난 그러한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1. 배반자 베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실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큰소리쳤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3절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님은 ‘내가 고난당할 때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리고 흩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니까, ‘아닙니다, 예수님!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가도 저는 절대 주님을 버리지 않고 주님 곁을 지키겠습니다.’ ‘
아니, 아니, 아니야. 새벽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할거야.’
그때 베드로가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라고 말합니다.
항상 말이 앞서다보면 실수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절대로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다른 제자들도 ‘네, 우리가 절대로 주님을 버리고 도망하기 않겠습니다.’라고 했는데, 그날 밤이 지나기도 전에 예수님이 붙잡히시자 다 도망쳐버리고 베드로도 도망갔다가 예수님 붙잡혀 가신 것을 보고 멀찍이 뒤에서 조심스럽게 따라갔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22장 54절에 성경은 설명합니다.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단 한 번도 베드로는 지금까지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간 적이 없습니다. 늘 가장 가까운 곳에, 곁에 있어서 예수님을 섬기고 주님의 일에 동참했던 수제자입니다. 사랑받는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자기 목숨이 위태해지니까 멀찍이 주님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면 모든 문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배가 멀어지고, 감사가 멀어지고, 찬양이 멀어지면 그때로부터 내게 문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로 멀어지면 안 됩니다. 바짝 주님 곁을 따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멀어지면 그 때로부터 문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한 번도 주님을 멀리 떠난 적이 없던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갔다가 가야바의 뜰에서, 모닥불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이스라엘은 사막성기후라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몹시 춥습니다. 그래서 모닥불을 펴놓고 사람들이 둘러서서 불을 쬐고 있는데 한 여종이 지나가다가 말합니다.
‘당신, 예수님과 함께 있던 것을 내가 봤어요.’
‘아닙니다. 나는 모르는 사람입니다’
또 그 사람이 말합니다. ‘분명히 봤는데요.’
베드로는 또 ‘모른다’고 말합니다.
세 번째 옆에 있는 사람이 또 말합니다. ‘당신, 그 말투가 갈릴리 사투리인데 예수님 따라다니던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인데 당신 분명히 그 사람 제자야.’
그러니까 마태복음 26절 74절에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75절에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이 항상 앞섭니다. 그런데 실제로 문제를 당하면, 어려움 당하면 말을 바꾸고 그리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거짓말 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렇게 배신을 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수제자 베드로가 저주하고 맹세하며 모른다고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과 멀어져서 이러한 일이 생겨난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예수님과 멀어지지 않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늘 열심히 예배드리고, 열심히 구역예배 참석하고, 기도원에도 열심히 가고, 찬양도 열심히 부르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말씀도 열심히 묵상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면 늘 주님과 동행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가 멀어지고, 찬양이 멀어지고, 감사가 멀어지고 그러면 마음에 기쁨이 사라지고, 원망과 불평이 쌓이기 시작하고, 섭섭함이 쌓이기 시작하고, 미움이 쌓이기 시작하고, 분노가 쌓이기 시작하고 그래서 주님을 배반하게 되는 그러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예수님 제일주의 신앙으로 주님께 바짝 붙어서 주님 옷자락 붙잡고 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용서하시는 예수님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을 따르는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려 갈릴리 바다에 가서 그물을 던질 때 밤새 그물을 던지고 몇 마리를 잡았습니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인생은 빈 배 인생이요, 빈 그물만 올리는 인생이요, 빈 손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노력하고 수고해도 얻는 것이 없어요. 열심히 일을 했는데 나중에 계산해보면 남는 것이 없어요. 땀을 뻘뻘 흘리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을 했는데 주님 없이 내가 혼자 일하니까 얻어지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도와주시면 주님이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면 주님께서 넘치는 복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못하지만 주님은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고 나아가면 예수 믿고 난 다음 우리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넘쳐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권력자, 돈이 많은 사람, 세상에서 인기와 명예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특별히 찾아갑니다. 그러나 열흘 붉은 꽃이 없고(화무십일호), 십년 가는 권세가 없다(권불십년)고 했습니다. 예수님 곁에 있으면 절대로 우리가 실패하지 않지만 세상 권력 주변에서 예수님 모르고 권력만 따라가다가는 실패하고,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삶을 살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을 따라가지 말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예수님을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따라다니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아니하셨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고, 버림받고, 심지어는 예수님을 배반한 베드로를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언제나 그런 절망에 처한 자들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새 힘과 능력을 허락해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그를 꾸짖지 아니하시고는 밤새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해 피곤했던 그에게 아침식사를 준비해서 아침을 함께 드시고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그에게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용서를 받는 것과 그리스도처럼 그 용서를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주는 것, 이 두 가지는 하나이다. 주님께서는 용서하시는 사랑으로 악을 정복하고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의견의 차이, 하찮은 오해나 시비, 혹은 불친절하고 사려 깊지 못한 말, 분함과 경멸 혹은 소외의 감정 때문에 용서하는 것을 잊어버린다. 여러분은 세상에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신 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첫 번째로 행하신 일이며, 따라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여러분이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첫 번째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용서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주의 일을 맡기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주님의 일을 맡기십니다. 베드로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베드로에게 사명을 맡기신 예수님. 연약하고 불의하고 추하고 못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주님의 일을 맡기시는 예수님. 그 은혜에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세 번이나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그에게 사명을 전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5절입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은 오늘날도 우리에게 “네가 네 주변의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 때 우리들은 쉽게 “아멘!” 할 수 있지만 살다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너무 많아요. 자식을 너무 사랑해가지고 예수님은 두 번째이고, 자식이 첫 번째인 분들이 있어요. 그래서 고3이 되었는데 “야, 너 1년만 교회를 쉬어라. 내가 기도 대신해줄게. 대학이나 붙어야지.” 그런데 대학을 붙은 것까지 좋았는데 주님을 멀리 떠나버렸어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 것입니다. 예수 잘 믿게 해야 그것이 자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잘못했다고 야단을 칠 줄 알아야 자녀를 사랑하는 것인데 잘못해도 오냐오냐, 그냥 사고치고 다녀도 씩씩하게만 자라다오. 오냐오냐 이러니까 문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가진 그 모든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어떤 사람은 사업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합니다. 그래서 주일날 자꾸 빠져요. 사업이 첫 번째이고 예수님은 두 번째인 것입니다. 순서가 바뀌면 예수님도 잘 믿고 사업도 잘될 텐데, 그것이 바뀌어버리니까 사업도 안 되고 예수님도 잘 못 믿는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 삶의 첫 번째가 예수님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사업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가진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네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많은 경우에 자신을 더 사랑해요. 내가 첫 번째, 예수님이 두 번째.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예수님이 첫 번째입니다. 그래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그랬어요.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다 희생하며 헌신하며 주님을 섬겼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누가 월급을 준다고 주일날 새벽부터 밤늦게 나와서 이렇게 봉사를 합니까? 주님 사랑하기 때문에 기뻐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찬양대원도 마찬가지고, 오케스트라 대원도 마찬가지고, 교회학교 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학교 교사들은 아침 일찍부터 나와서 아이들을 돌보고 밤늦게까지 교회에 남아있습니다. 왜?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할렐루야! 이와 같은 사랑이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또 물으십니다.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요한복음 21장 16절)
주님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 제가 주님 사랑합니다.” 다윗처럼 고백해야합니다. “나의 힘이신 야훼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편 18편 1절)
나의 모든 것이 되시는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네 마음과 뜻과 정성, 내 삶 전체를 바쳐 주님을 사랑하기 원합니다. 이 같은 사랑이 넘쳐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이 여러분의 일생을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으신 예수님. 모닥불 앞에서 예수님을 몇 번 모른다고 부인했죠? 세 번 모른다고 부인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세 번 용서하심으로, “네가 사랑하느냐?”고 물으심으로 상처를 다 치료해주셨어요. 예수님의 치료방법은 야단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야단치고 소리 지르고 심지어는 주먹을 휘두르고 하는데 그게 예수님 방법이 아니에요. 그저 용서하는 거예요. 그냥 품고 용서하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가 완전히 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사명을 맡기십니다. 그 사명이 무엇입니까? “내 어린양을 먹이라!”
요한복음 21장 15절입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어린양은 교회 처음 나온 초신자들, 교회를 좀 다녔지만 믿음이 자라지 못한 사람들, 또 돌봐야 될 사람,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어린양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천국 보내드리고 외롭게 홀로 있는 사람들, 믿음이 자라지 못해서 자꾸 시험에 들고 넘어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그들을 말씀으로 양육해서 스스로 설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요, 부모님이 관심을 갖고 잘 먹을 걸 줘서 잘 먹여야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자라지 못하는 애들의 특징은 잘 안 먹는 것입니다. 뭘 줘도 잘 안 먹어요. 애를 키워본 어머님들은 알 것입니다. 잘 먹어야 되는데 애들이 입이 짧아갖고 안 먹는 애들이 있어요. 그래서 오죽하면 ‘애먹이다’는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애먹인다. 애가 하도 안 먹으니까 ‘애 먹인다’는 것 같아요. 우리 교회에서 믿음이 약한 자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말씀으로 먹여서 잘 자라가게 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주님이 주신 사명은 “내 양을 치라!” 16절입니다.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내 양을 치라는 것은 나의 양들을 보호하라. 보살피라. 이단들이 들어와서 양들을 도둑질해가지 않도록 잘 지켜라. 요즘 신천지라는 이단이 막 들어와 가지고 난리입니다. 교회 내에 문제가 된 교회는 다 들어와서 막 소동을 일으키고 싸움을 붙입니다. 저쪽 강북에 있는 큰 교회는 칠천 명이 모이는 교회인데 이 세 사람 이단들이 들어와서 그 교회 싸움을 선동해가지고 몇 년 동안 싸우는 동안에 교인이 오천 명이 나갔어요. 지금은 정리가 되어서 다시 부흥하고 있지마는 큰 상처를 입히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주변을 잘 살펴야 합니다. 갑자기 교회에 새로 와가지고 막 열심을 내고 또 이 사람 저 사람 데리고 들어와서 이 그룹을 만들어갖고 교회 내에 여기저기 흔드는 사람을 지켜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기도하라고 모인 곳, 기도하러 나오고 예배드리러 모이는 곳입니다. 선동하고 이간질하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주여,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여주옵소서! 이단 사상에 빠지지 않도록 교회를 지키게 하여주옵소서! 그래서 우리가 양 무리들을 잘 돌보아야 되는 책임이 있습니다.
셋째로,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합니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한복음 21장 17절)
세 번째 양, 이 양 큰 양 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들을 말합니다. 예수 믿고 나서 일 년 지난 분, 우리들은 다 큰 양들이 되었습니다. 믿음이 계속 성장할 수 있도록 말씀으로 양육하라. 잘 먹이라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예배만 빠지지 않고 잘 나와도 믿음이 자랍니다. 그다음에는 체계적인 성경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리고 구역예배 참석해서 말씀을 나누며 같이 기도해야 됩니다. 그때 믿음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라나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자라지 않으면 얼마나 집안의 근심거리가 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날마다 믿음이 성장하여 예수의 사랑을 온 천하에 전하는 주님의 귀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의 헬렌켈러로 불리우는 구경선 캐릭터 작가님. 요즘 젊은 사람에게 인기 있는 카카오톡 이모티콘 베니, 귀가 큰 토끼 캐릭터를 그린 자매입니다. 두 살 때 열병을 앓으면서 청력을 잃었습니다. 듣지 못하니까 말하는 것을 제대로 할 수 없었어요. 말이라는 것은 듣고 따라하는 것이 말인데 듣지 못하니까 어릴 때부터 말이 어눌했습니다. 어릴 때 그림 그리는 것이 너무 좋아서 애니메이션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듣지 못하니까 수업 진도를 따르지 못하고. 그래서 고등학교를 중퇴합니다. 늘 외톨이였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전도해서 교회 수련회 갔다가 은혜를 체험했어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내가 어떡하면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런데 자기 동료들을 보니까 회사에 취직해서 십일조를 내더라구요.
“나는 십일조를 낼 수 있는 능력이 안 돼. 십일조를 내고 싶은데.”
기도하는 가운데 ‘내 재능으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돈 말고 나만의 십일조가 뭐가 있을까? ‘아! 그림으로 십일조를 하자!’
일 년 내내 교회의 주보를 직접 그리고 만들었습니다. 열심히 그려서 섬겼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인터넷에서 유행하던 미니홈피 싸이월드에 일러스트작가가 되었습니다. 자기처럼 듣지 못하는 자가 더 많은 것을 들으라고, 큰 귀가 있는 그런 토끼를 그려놓은 것입니다. 자기가 듣지 못하니까 귀를 크게 해놔서 많이 들을 수 있는 그러한 자기의 모습을 대신 듣고자하는 자기의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어느 날 갑자기 시력을 잃기 시작해서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의사가 “이건 희귀병인데 앞으로 눈이 멀게 됩니다.” 듣지도 못하고 이제 보지도 못하게 되어서 찬송가 자막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나 절망해서, “주님,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납니까?” 하는데 주님이 음성을 주셨습니다.
“나만 불행하게 느껴서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아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하나님, 찬양이 너무 어려워요. 못하겠어요.’ 그런데 차가웠던 몸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면서 분명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다 안다. 너의 고통과 슬픔을 다 안다.’”
주님이 사명을 주셨어요. 이제는 자기보다 더 불행한 아이들, 버림받은 아이들, 고통 중에 문제 가운데 어려움 가운데 있는 아이들을 주의 사랑으로 돌보자. 사명감을 가지고 단기 선교에, 필리핀에 갔다가 오갈 데 없이 길에서 떠도는 불쌍한 아이를 만났는데 그 아이가 말합니다. “언니 난 꿈이 있어요. 앞으로 커서 전 세계를 다니며 사진을 찍는 사진작가가 될 거예요.” 그래서 그 아이의 말을 듣고 그림을 그려줬습니다. 사진작가가 되어서 사진을 토끼가, 사진작가가 된 토끼 그림을 그려주니까 너무나 이 아이가 좋아해서 그 그림을 껴안고 기뻐 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렇지 내가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것이 주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야.”
그래서 자기는 비록, 듣지 못하고 앞을 거의 못 보게 되었지마는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버림받은 애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있는 하나님의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는 볼 수 있는 날도 얼마가 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금 아직 볼 수 있을 때 아이들을 위해 계속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저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졌어요. 사람들이 보기에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일 수 있어요. 하지만 나의 신체적 약함과 관계없이 나를 사용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고 믿어요. 저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본인의 꿈은 어려운 나라를 순회하면서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그림을 그려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듣지 못하고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어도 이렇게 사명감을 가지고 예수 사랑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건강한 모습으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그저 나만을 위해서 나! 나! 나! 하면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주님, 저희들을 용서하여주시옵소서. 베드로를 용서하신 것처럼 저희들을 용서하여주시고 이제 우리 모두가 사명을 가지고 일어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 갈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주님이여! 우리의 일생을 인도하여주셔서 하나님의 가장 기뻐하시는 주님의 일꾼들 다 되게 하여주옵소서. 주님 앞에 귀하게, 크게 쓰임 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지금까지는 나를 위해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나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우리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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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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