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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의 참 의미
2016.12.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립보서 2장 5~11절)

 

예수님 닮은 겸손과 온유로 이웃 섬기고
사랑으로 열매 맺는 신앙인의 삶 살아야

 성탄절은 예수님의 생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 가운데 눌려 고통당하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날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사람들은 성탄절의 주인공인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그저 자기들이 하루를 노는 축제와 같은 날로 생각해서 먹고, 마시고, 선물 주고받고, 파티를 하면서 이날을 그냥 보냅니다. 그러나 사실 이 성탄절은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우리 믿는 사람들이 소중히 보내야 하는 날입니다. 그저 들뜬 마음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삶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그와 같은 삶을 살기로 결심하는 그러한 복된 날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고통과 절망과 문제와 어려움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넘치는 평화가 임한 날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이렇게 찬양합니다. 누가복음 2장 14절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주여! 우리 마음 가운데 평화가 임하게 하여주옵시고, 우리 대한민국에 그 평화가 임하게 하여주옵시고, 온 세계에 평화가 임하게 주옵소서.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우리에게는 참 평화가 임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떠한 삶을 사셨습니까?


1. 낮아짐


 첫째로, 예수님은 낮아지셔서 우리를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모습은 낮아짐이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로 8절은 설명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자기를 낮추셔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설명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 이것이 바로 성탄의 신비입니다. 인간적으로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은 이처럼 자신을 비우시고 낮아지셔서 겸손의 모습으로 한평생 많은 소외되고 병들고 문제 있는 자들을 사랑으로 돌보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과 온유를 옷 입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시기 전,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앞으로 오실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이사야 9장 6절, 7절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야훼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장차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는 정의와 평화의 왕이시다. 불의를 멸하시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펼치시는 정의의 메시야이시고, 동시에 분쟁과 갈등과 대립 있는 곳에 평화를 전하신 평화의 메시야로 우리 주님이 오실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화려한 왕궁에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처럼 시설을 다 갖춘 큰 병원에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가장 낮은 곳에 임하신 예수님. 베들레헴에 있는 한 누추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사 말구유에 누이신 예수님. 누가복음 2장 7절입니다.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여관이 없어서 결국 누추한 마구간에 가서 주님이 태어나셨습니다. 아마, 손님들이 많으니까 만삭된 여인이 들어오면 뒤치다꺼리해야 되고 여러 가지 바쁜 일 생길 테니까 방이 없다고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 마음속에 너무나 담아두고 있는 것이 많아서 예수님 모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 마음속에 탐욕이 담겨있습니다. 그 마음속에 세상의 인기, 명예, 권력에 대한 욕심이 가득 담겨있습니다. 그 마음속에 깊은 상처가 담겨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마음속에 미움과 원망과 불평이 담긴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모실 자리가 없어요. 우리가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주님,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 나를 불쌍히 보시옵소서. 내 마음에 주님 임하여주시옵소서. 그때 사랑의 주님이 우리 마음 가운데 임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로 29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을 다 주님께로 초청하십니다. 그런데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주님의 멍에를 같이 지자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멍에는 어떤 멍에냐? 온유와 겸손의 멍에입니다. 우리가 온유와 겸손을 옷 입으면 우리 마음에 평안함이 임합니다. 우리 맘에 쉼을 주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미움이 있는 한, 평안함이 다가올 수 없습니다. 마음에 원망과 불평이 있는 한, 평안함이 다가올 수 없습니다. 마음에 상처가 있는 한, 평안함이 다가올 수 없습니다. 마음에 분노가 있는 한, 평안함이 다가올 수 없습니다. 주여, 내 마음에 주님 오셔서 주님의 평안으로 넘치게 채워주시옵소서.

 하나님 가장 미워하시는 죄가 교만입니다. 잠언서 16장 18절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올라갈수록 겸손해야 합니다. 올라갈수록 섬김의 본을 보여야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높아진 사람들이 군림하고, 짓밟고, 다스리려하기 때문에 이렇게 세상이 힘들고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권세를 부여받았을 때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소외되고 힘없는 사람을 섬겨야 되는 것입니다. 제대로 말도 못하고,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몸도 장애가 있고, 이런 사람들을 가진 사람들이 사랑으로 돌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겸손의 모습입니다.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성육신은 예수님이 자신을 완전히 비우시고 인간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은 언제나 온유하고 겸손한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겸손해지심으로써 기쁨을 느끼셨고, 이 땅에 오셨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예를 구하기 위해 인간의 모든 명예를 포기하는 겸손을 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도록, 우리의 자아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겸손을 구해야 한다. 그래서 오직 주님만이 높임을 받으시도록 해야 한다.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여! 예수님의 겸손을 배워라!”


 2. 섬김과 희생 


 예수님의 모습은 낮아짐, 겸손이었고, 둘째로는 섬김과 희생이었습니다. 2장 8절 보니까,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한평생 낮고 천한 자들과 함께 생활하시면서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셨습니다. 요즘 말로 말하면 사람 취급받지도 못하고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어디 갈 곳 없어 길에서 노숙하던 사람들, 거친 인생을 사는 사람들, 사람들이 사람 취급받지도 못하는 저 사람은 쓰레기 같은 사람이라고 그렇게 비웃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친구가 되시고 그들을 돌보셨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이와 같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비웃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절, 2절입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진정한 지도자는 섬김과 희생의 본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습니다. 예수님 마가복음 10장 45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할렐루야. 마음이 상한 자를 위로해주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예수님. 이 사랑에 감동되어 우리도 섬김과 희생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요한일서 4장 10절, 11절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할렐루야. 최근에 SNS로 소개되어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케냐 나이로비에서 존 쑤오라고 하는 한 소년과 글래디스 카만데라는 여성의 사연입니다. 존 쑤오는 매일매일 거리에서 구걸하며 먹고사는 집 없는 청소년입니다. 저도 케냐에 가봤는데 차가 서있으면 이 구걸하는 아이들이 막 일이십 명이 막 차로 몰려와요. 애들은 부모님도 없고 버림을 받았는지 돌아가신 건지 그걸 모르겠어요. 그냥 거리에서 집단으로 애들이 모여 사는데 완전히 다 낡아 떨어진 헌 옷을 입고 차만 서면 막 차에 달려들고 뛰어들어 와서 돈을 달라고 구걸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어느 날, 구걸하기 위해 주차된 차로 달려가서 좀 돈을 달라고 손을 내미니까 그 안에 휴대용 산소호흡기에 의지해서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한 여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열두 번 수술을 했는데 폐가 망가져가지고 시력도 손상돼서 잘 보이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사고가 나서 폐가 망가졌는데 산소호흡기가 없이는 숨을 쉴 수도가 없고 돈이 없어서 더 이상 수술도 못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아마 이 소년이 길거리에 살아도 예수님을 믿는 소년이었나 봐요. 자기보다 더 불쌍한 사람을 봤다고 손을 붙잡고 울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분이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리고 자기가 구걸하여 모은 꼬깃꼬깃한 돈을 내미니까 그분이 너무 놀래서 아니라고, 아니라고. 그런데 이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그 사진을 찍었어요. 사진을 찍어갖고 SNS에 올렸습니다. 그래서 많은 네티즌이 이 글래디스를 돕자 해서, 4일 동안 케냐의 모금 사이트에 300만 실링, 이억 원이 모여져 가지고 드디어 이 여인이 병원에 가서 완전히 치료함 받고 건강하게 되었고, 그리고 이 여인이 소년을 자기 아들로 입양해서 행복하게 살게 되었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사랑이 두 사람의 운명을 바꿔놨어요. 고아처럼 살던 아이에게 엄마가 생기고 병으로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그 아주머니가 건강한 몸이 생겼고 훌륭한 아들을 얻었으니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여러분, 사랑은 섬김입니다. 내가 먼저 다가가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내 것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절대 내게 누가 무엇을 해준다고 앉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사랑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고, 어려운 사람에게 다가가서 사랑을 나눠주는 것, 이것이 참사랑의 모습인 줄 믿습니다.


 우리 한국에 많은 선교사님들이 오셔서 헌신하셨지만 독일계 미국인 의료선교사인 쉐핑 선교사님. 혈혈단신으로 오셔서 평생 우리 한국 사람을 섬기다 돌아가신 귀한 선교사님. 얼마나 감동적인 삶을 사셨는지 영화로도 내년에 나온다고 하는데요, 한국에 1912년 서른두 살로 오셔서 도착하자마자 거리에 버림받은 사람들, 병든 사람들, 특별히 한센병 환자들, 당시 한센병 환자라 하면 다들 손사래 치고 다 피했는데 그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을 고쳐주신 귀한 선교사님, 돌봐주신 귀한 선교사님. 이일학교를 설립하고, 지금은 한일장신대가 됐죠. 조선간호협회를 창립하고, 여수 애양원을 건립하고, 공창제(매춘) 폐지운동을 위해 앞장섰던 선교사님. 1년 가운데 100일 이상을 나귀를 타고 전라남북도와 제주도 전도여행을 다니며 병자들을 돌보고 여성들을 교육하신 선교사님.

 일기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한 달간 500명의 여성을 만났는데, 하나도 성한 사람이 없이 굶주리고 있거나, 병이 들어 앓고 있거나, 소박을 맞아 쫓겨나거나, 다른 고통을 앓고 있었다!”

 이름 없는 사람 이름 지어주고, 버림받은 여인들을 돌봐주고, 그래서 저들을 사랑으로 품어주는데 특별히 한센병 환자들을 돌봐줬어요. 그리고 열네 명의 아이들을 자기에게 자녀로 입양했습니다. 열네 명의 양아들, 양딸을 키우고 오갈 데 없이 버림받은 여인들 서른여덟 명과 같이 살면서, 본인은 누렇게 바랜 저고리와 검은 통치마를 입고, 고무신을 신고,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으면서 54세로 그의 삶을 다할 때까지 그냥 온몸을 바쳐 헌신했습니다. 자기가 의료선교사로 왔으니까 내 시신을 의과대학에 해부용으로 써달라고 맡겼는데, 그 사인을 조사해보니까 영양실조입니다. 마지막으로 남긴 것이 반 장짜리 담요 하나, 동전 몇 닢, 강냉이 가루 두 홉, 한 주먹 밖에 안 되지요. 머리맡에 그리고 이와 같은 글귀를 남겨놨습니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그의 장례 행렬에는 수백 명의 한센병 환자들과 거지들이 “어머니!”, “어머니!” 통곡하면서 이 상여를 따라갔습니다. 당시 동아일보가 그녀의 죽음을 대서특필했습니다. “자선과 교육 사업에 일생을 바친 빈민의 어머니, 서서평 양 서거. 부제, 재생한 예수” 평소에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내일 나 먹기 위해 오늘 굶는 사람을 그대로 못 본 척 할 수 없으며, 옷장에 옷을 넣어놓고서 당장 추위에 오들오들 떠는 사람을 모른 척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선교사였습니다. 크리스마스가 우리만의 축제가 아니라 소외되고, 병들고, 고통당하는 이웃을 돌보는 크리스마스가 되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께 영광

 셋째로, 예수님의 삶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그 죽으심을 받으시고 그를 높여주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9절로 11절은 설명합니다.“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을 비우시고 섬김과 희생의 삶을 사시다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하나님이 높여주셔서 모든 만물이,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무릎 꿇게 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앞에 깨어지고, 낮아지고,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면 주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6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공부를 하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비즈니스해서 돈을 버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찬양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전문인들이 그 직업에서 일하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어디서 무엇을 하던지 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복에 복을 더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며 많은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8절입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마태복음 5장 16절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가 입으로는 “하나님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하면서 실제로 우리 삶에 사랑 실천이 결핍되어있으면 그것은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 이렇게 경고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 쌓아놓은 탑은 금방 무너지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가 헌신한 것은 하늘나라에 상급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천국가신 임연심 선교사님이 생각이 납니다. 아프리카 오지, 케냐 투루카나에서 처녀의 몸으로 28년 동안 섬기시다가 천국가신 선교사님. 투루카나는 독사, 전갈, 그리고 가시떨기가 뒤덮여있는, 굶주리고 헐벗고 돌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는 그곳. 물자도 부족하고 너무 덥고. 낮에 50도니까요, 50도. 너무 외롭고 위험한 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버림받은 아이를 돌봤어요. 그 노력이 열매를 맺어서 이들이 자라서 목사, 의사, 기자, NGO직원, 은행원, 회계사, 사무원, 교장, 교사, 경찰, 약사, 변리사들로 활동하고 있는데 문맹률이 95%인 이 투루카나에 이 고아원 출신 아이들이 기적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케냐 국립병원에 닥터가 된 존슨 에키로는 고백합니다. “제 인생 자체가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머니를 통해 제 삶을 공급해주셨죠. 글을 가르쳐주셨고, 학교를 다닐 수 있게 해주셨고, 어머니의 사랑을 알게 해주셨죠. 절망적인 환경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어머니를 만나 새 삶을 살게 됐죠. 저는 어머니처럼 사람들을 돕는 사람이 되겠다는 확실한 꿈이 있었어요. 그래서 의사가 되려고 한 거고요. 어머니가 나를 돌봐주신 것처럼, 내가 어떻게 하면 환자를 잘 돌볼 수 있을지 늘 생각하고 노력해요!”

 28년 동안 마흔여덟 개의 교회를 개척하고 아낌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나누고 2012년 고열과 박테리아 감염으로 세상을 떠날 때 61세였습니다. 마지막 썼던 아파트 셋방은 텅 비어있었고 선물로 받은 반 실링짜리 구슬 하나가 남긴 물품 전부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평생의 꿈이었던 임연심 굿피플 미션스쿨이 완공되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굶주림에 지쳐 눈에 눈물이 그렁한 그 아이가 바로 하나님 마음을 가진 이웃이었습니다. 저는 투루카나 사람들을 돌보며 그곳에서 진정 하나님을 만났고, 이제 그분의 심부름꾼에 불과합니다. 제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저의 사명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행복합니다!”

 선교사님은 천국에 가셨지만 그분이 남긴 이 아름다운 자취는, 업적은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어져서 제2, 제3, 제4의 임연심 선교사를 만들어 낼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그 성탄절의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주님의 삶을 우리 삶 가운데 실천하지 못하고 살았던 부끄러운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은 낮아지려 오셨는데 늘 높아지려고만 했고, 예수님은 섬기고 희생하셨는데 우리는 섬김을 받으려고만 하고 전혀 희생을 하지 않으려고만 했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늘 자신의 명예만 관심을 가졌던 주님 앞에 죄와 허물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 용서하여주옵소서. 성탄절에 우리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본받아서 이제 우리 모두가 낮아지고, 섬기고, 희생하며 하나님의 영광 위해 살게 하여주옵소서. 이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스스로 낮아지시고, 섬기시고, 희생하셨는데,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늘 높아지려고만 하고, 늘 칭찬받으려고만 하고, 늘 대접받으려고만 했던 저희들의 허물을 용서하여주옵소서. 이제 이후로 우리 남은 여생, 섬기고 희생하며 사랑으로 소외된 이웃을 돌보며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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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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