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사도행전 9장 3∼9절>
우리가 일생을 사는 동안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적과 축복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죄와 절망 가운데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은혜와 축복 가운데 살다가 영생 천국에 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기적과 축복을 경험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주님의 영광을 가리고, 때로는 주님을 박해하는 것과 같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주님을 박해하였던 사도 바울의 회심 이야기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세 가지 영적 교훈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예수님을 박해한 우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우리의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부하던 사울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감옥에 넣고,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행 9:1∼2).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부하던 사울이 하나님의 뜻에 정반대되는 일을 행한 것입니다. 사울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 신앙의 자세를 가졌던 것입니다. 본인의 신앙관, 생각과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이단을 따르는 사람들이라 판단하여 그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을 섰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의 죽음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행 8:1).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도 사울과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한다고 하면서 나의 뜻, 나의 생각, 나의 주장을 내세움으로써 알게 모르게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주고 상처를 주고 분열과 다툼을 일으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자신의 뜻이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착각해서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앞장섰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 합니다. 나의 모습이 나타나면 안 됩니다. 나의 생각과 주장을 앞세우면 결국 자기 의에 빠져서 믿음의 형제자매를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지어 교회를 비판하게 됩니다.
한 신문사 사장님이 어떤 교회의 담임목사님에 대한 비난을 담은 현수막이 교회 앞 대로변에 걸려있는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마음이 아프고 부끄러웠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왕래하는 길에 목회자에 대한 비난의 글을 써 붙여놓음으로써 결국 교회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갖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문제는 교회 내에서 함께 기도하며 해결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는 문제가 생겼을 때 기도하기 시작했고, 기도하는 가운데 제직들을 세워서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아가 폭발적인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로마서 2장 1절부터 2절은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의롭다는 생각에 빠져 남을 판단하고 정죄한 일이 없는지, 혹은 주님께서 보시기에 남들보다 얼마나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특히, 자기 의에 빠져 교회를 비판하고, 교회에 상처를 입히는 일을 한 적은 없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붙잡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단 한 번 만난 적도, 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이단의 괴수로 전해 듣고 교회를 박해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 붙잡아 감옥에 넣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울에게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에베소서 1장 22절부터 23절은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을 괴롭히고 교회를 소란하게 하고 상처를 입히는 것은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Oswald Chambers, 1874∼1917)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내 고집을 주장하지는 않습니까? 내 고집과 자기주장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밀쳐냅니다. 우리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자기 뜻을 고집할 때마다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박해하는 사람은, 사울처럼 종교의 지식만 있고 자기 뜻과 마음을 주께 항복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 거룩해지려는 자세를 버리십시오. 이는 당신 때문에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짓밟히고, 우습게 여김 받고, 무시를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든지 오직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순종한다면, 예수님의 영광이 당신으로 말미암아 땅바닥에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박해받으시는 것을 당신이 막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8장 20절에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세 사람이 함께 있는 곳은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는 교회입니다. 따라서 두세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그곳에는 다툼이 있으면 안 됩니다. 갈등이 일어나면 결국은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제대로 잘 모르고 이 같은 행동을 한 것이 있으면 철저히 회개하고, 사랑과 용서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2.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
사울이 자기 의에 빠져 앞장서서 교회를 핍박하고 성도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둠으로 예수님을 박해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사도행전 9장 3절부터 5절은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를 박해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향하던 사울에게 예수님께서는 강한 빛과 함께 나타나셨고 사울은 그 자리에 엎드려졌습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은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빛이 비추어지면 모든 어둠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또한 모든 인간에게 생명의 빛, 구원의 빛, 치유의 빛, 용서의 빛이 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다른 길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죄악 가운데 빠진 사람들과 영의 눈이 먼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생명의 빛, 구원의 빛, 치유의 빛, 용서의 빛으로 오신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1장 5절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1892) 목사님은 영국에서 큰 부흥을 일으켰던 분입니다. 그는 목회자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교회를 다니면서도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해서 그저 예배를 구경하던 구경꾼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회를 가다가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할 수 없이 근처 교회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열 명 남짓의 사람들이 모여서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그 교회의 담임목사님이 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그들 가운데 대표되는 한 집사님이 대신 설교를 했습니다. 그 집사님은 이사야 45장 22절 말씀을 읽었습니다. “땅 끝의 모든 백성들아, 나를 바라보라 그리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킹제임스역) 그 집사님은 이 말씀을 가지고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것은 정말 아주 간단한 본문입니다. 본문은 ‘바라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만 소용없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은 결코 자신 안에 편안함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예수를 바라보세요.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지금 보는 것은 그리 많은 고통을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을 일으키거나 손을 들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보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보는 것을 배우기 위해 대학에 갈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가장 무식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볼 수는 있습니다. 누구든지 바라볼 능력을 위해 연간 수입이 많아야 될 필요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바라볼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조차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집사님은 이렇게 선포하고 설교를 마쳤습니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많은 핏방울을 흘리고 있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십자가에 걸려있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죽었고 장사되었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다시 살았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하늘로 승천했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있다. 오 가난한 죄인들이여, 나를 바라보라! 나를 바라보라!”
설교를 마친 그 집사님은 강단 아래에 있던 청년 스펄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 친구여,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바라보라! 바라보라! 자네는 바라보고 사는 것 외는 아무것도 할일이 없네” 그 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청년 스펄전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엉터리 신앙생활을 했던 모습에서 거듭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이후 스펄전 목사님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교를 통하여 은혜를 나눴고 목회지에서 큰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처럼 우리도 철저하게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회개할 때 죄의 지배로부터 자유함을 받을 수 있고, 영혼이 정결케 됩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 19절은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복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의 유혹에 넘어가 때로 믿음의 형제자매를 정죄하고 교회를 비판했던 모습을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알게 모르게 예수님을 박해한 것을 회개하고, 날마다 주님 앞에 바로 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을 결단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되었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날마다 회개함으로 마음 가운데 예수님의 빛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이제는 빛의 자녀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8절부터 9절은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세상에서 방황하며 예수님을 박해하는 자와 같았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와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받은 우리는 날마다 회개로 주님 앞에 바로 서고, 착하고 의롭고 진실한 모습으로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3.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
눈이 볼 수 없게 되어 다른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간 사울은 회개하며 사흘간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행 9:8∼9). 이때 예수님께서는 다메섹의 아나니아라는 제자에게 사울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환상 가운데 말씀하셨고, 이를 전하게 하셨습니다(행 9:10∼12). 사도행전 9장 15절은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합니다. 사울은 이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길을 멈추고 복음을 전하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섬기는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의 삶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울은 기도에 대한 응답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사울은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헌신하였습니다. 사울은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사울이 복음을 전하는 동안 받았던 환난과 핍박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4절부터 27절은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인의 혈통으로서 전혀 흠이 없었고, 당대 최고의 유대교 학자인 가말리엘의 제자였으며, 로마 시민권자였지만 사울은 그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고 복음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난도 마다하지 않는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교회를 앞장서서 박해했던 사울이 극심한 고난을 받으면서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주님의 일꾼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가 사울처럼 복음의 일꾼으로, 교회를 그 무엇보다 아끼고 사랑하는 주님의 일꾼으로 살아가려면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9장 17절부터 19절은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침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라고 말씀합니다.
사울은 성령충만을 받고 육신의 눈과 함께 영의 눈도 떴습니다. 이제 사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박해해야 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아니라 동역해야 할 형제자매들과 목숨 바쳐 세워야할 교회들이었습니다. 전혀 다른 세상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도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충만을 받으면 전혀 다른 세상이 보입니다. 함께 동역해야 할 형제자매들, 헌신하고 사랑해야 할 교회가 보입니다. 성령충만을 받으면 세상 얘기, 원망과 불평, 비판과 정죄를 일삼는 말쟁이가 아니라 능력 있는 복음의 증인으로 변화됩니다.
지난 7월 11일에 물에 빠진 아프리카 소녀 두 명을 구하다 숨진 김수석(1993∼2015, 대전신대) 형제가 있습니다. 올해 23살이었던 그는 5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줄곧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가 되기 위하여 2011년에 대전신학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2012년에 선교한국대회에 참석해 선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선교단체(한국 컴미션)에서 훈련받았습니다. 그리고 군종병으로 군에서 받았던 돈과 수개월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모아 올해 5월에 서아프리카 감비아로 단기선교를 떠났습니다.
올해 12월까지 감비아의 NGO WAM(West Africa Mission)에서 교회, 유치원, 학교 사역을 도울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7월 11일에 대서양 해변에서 파도에 휩쓸린 현지인 소녀 2명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는 1명의 소녀는 구했지만 다른 소녀와 함께 결국 바다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는 올해 5월 4일에 감비아로 떠나기 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유서를 썼습니다. 김수석 형제의 부모님은 “자식을 잃었으나,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쓰임 받다가 죽었으니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과 의미가 됐으면 좋겠다”라며 다음과 같은 유서를 공개했습니다.
“제가 만약 선교지에서 순교한다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순교자의 삶을 가게 하신 것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부모님을 비롯하여 저를 아껴주신 분들께 감사하고, 슬프지만 훗날 천국에서 마주할 것을 기대하며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이 말씀처럼 나의 순교로 인해 복음 전하는 일의 중요성과, 선교의 중요성이 다시 한 번 자각되어지고, 그러한 삶을 사는 자들이 넘쳐나길 소망합니다”
이 고백처럼 우리는 성령충만을 받아 사명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복음과 교회를 위해 여생을 바치는 헌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충만을 받아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언제나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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