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3장 13∼14절)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우리들은 모두 복 받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복 받은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 때문이 아닙니다. 복의 근원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통해 우리를 친히 자녀 삼아 주셨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리가 어떠한 인생을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그 순간에 우리의 신분이 바뀌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베푸신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에 감사하여 받은 복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 저주받으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생긴 모든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은혜와 축복이 넘치는 에덴동산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그 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기며 만물을 다스리는 복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타락하기 이전의 인생들이 이러한 복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축복받은 인생들이 죄를 짓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인생의 목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온 인류에게 가난과 저주, 죄와 질병 그리고 사망이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죄’라는 단어의 헬라 원어 ‘하마르티아’는 ‘목표에서 벗어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류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 자신의 뜻대로 사는 것이 죄입니다. 죄를 지은 결과 인류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에서도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하자 삼중형벌이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죄에는 반드시 형벌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먼저 인간의 영이 죽어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습니다. 환경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고, 육신은 질병과 사망으로 고통 받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롬 5:12).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가난과 저주, 죄와 질병을 십자가에 짊어지고 대신 돌아가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속량’이라는 표현은 당시 노예시장에서 사용되었던 말로 ‘값을 지불하고 노예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죄의 노예가 된 우리들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값을 지불하고 구원하셨다’라는 뜻입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10장 12절부터 14절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가 단번에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종교도 이와 같은 구원의 진리를 알려주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만 이 놀라운 구원의 진리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인간적인 노력과 관계없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구주가 되시고 축복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운명이 바뀝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와 회개하기만 하면, 예수님께서는 보혈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축복받은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2. 아브라함의 복
갈라디아서 3장 14절은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이방인이었던 우리에게 미친 아브라함의 복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주신 바로 그 복입니다. 창세기 12장 2절부터 3절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고 말씀합니다.
언제 이와 같은 은혜가 임합니까?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이와 같은 아브라함의 복이 임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우리에게 동일하게 임하게 됩니다.
이 복은 죽었던 영이 살아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적인 축복뿐만 아니라 물질의 부요함과 건강의 축복을 포함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또 베드로전서 2장 24절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받는 아브라함의 복은 먼저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되는 삼중 축복입니다. 그래서 요한삼서 1장 2절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부요와 건강의 복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노력해야 하며, 주님께서 주신 몸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게으른 삶을 사는 사람에게 자동적으로 부요와 건강의 복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살며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의 예비하신 모든 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새로운 자화상을 가져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은 겉모습은 똑같아도 ‘속사람이 변화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실패와 가난, 저주와 상처로 얼룩진 옛 사람의 모습에서 희망과 행복,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새로운 자화상을 가지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더 이상 과거의 상처에 얽매여 살지 마십시오. 더 이상 과거의 절망을 끌어안고 살지 마십시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과거의 고통과 괴로움을 기억하고 살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 우리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이익밖에 모르던 옛 사람의 모습을 뒤로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전하는 새사람의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3. 성령의 약속
갈라디아서 3장 14절은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받은 복을 나누는 것은 결코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 복을 나누는 섬김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없이 자신의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면 힘듭니다. 자신의 힘으로 이웃을 도우려고 하면 부담이 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임하셔서 능력을 주시면 우리는 주님의 권능으로 귀한 사명을 잘 감당하게 됩니다.
초대 교회는 이러한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난 교회였습니다. 초대 교인들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했을 뿐만 아니라(행 1:8), 자신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받은 복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섬김과 나눔’의 삶을 살았습니다(행 2:44∼45). 그들이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아낌없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나누자, 온 백성에게 칭찬을 받았고 교회에는 부흥의 불길이 타올랐습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사도행전 2장 47절은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께 받은 복을 이웃과 아낌없이 나눌 때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지속적인 부흥을 주십니다.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John Wesley) 목사님은 성령 충만을 받기 전에는 선교 사역에 실패한 목회자에 불과했습니다. 미국에서 영국으로 돌아와 낙심 가운데 지내던 그는 런던 올더스케이트의 한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성령의 불을 받았습니다. 1738년 5월 24일 저녁 8시 45분, 말씀을 듣던 중 성령의 불이 그에게 임했고,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된 그가 말씀을 선포했을 때 수천, 수만 명이 모여들어서 회개하고 변화되었습니다. 술주정뱅이들이 술을 끊고 그 지역의 범죄율이 낮아지는 등 마을이 변화되는 역사도 일어났습니다. 어떤 판사는 죄짓고 잡혀오는 사람이 없어서 “나는 할 일이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한 때 실패한 목회자에 불과했던 사람이 성령 충만을 받고 나자,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고 외치며 88세까지, 52년 동안 4만 2000여 번의 설교를 한 위대한 목사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위한 학교, 병원, 고아원, 은행 등을 세우고, 노예해방운동, 금주운동과 같은 사회개혁운동도 벌였습니다. 신학자 러프스 존스(R. Jones)는 웨슬리의 부흥 운동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그의 부흥 운동은 ‘거룩한 변화의 기적’을 일으켰고, 특별히 사회를 변혁했다.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이 성결해지고, 감옥이 개혁되고, 노예무역이 중지되고, 노예해방이 이루어졌다. 사회 곳곳에서 삶이 개선되고, 무지가 극복되고, ‘생명의 샘’이 터져 나왔다!” 웨슬리는 자신이 이 모든 일을 이뤄낸 비결은 ‘마음속에 있는 성령의 불길’에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모든 업적은 성령 충만의 결과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고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여,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서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섬기는 귀한 일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새로운 자화상을 가져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가 이러한 복을 받아 누리며 새 역사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령으로 충만하여 복음의 증인이 되고, 받은 복을 이웃과 나누는 귀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아브라함의 복을 받아 가난과 저주, 질병과 죄, 그리고 사망의 문제가 해결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변화된 신분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이제는 베풀고 나누고 섬기며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일생 다가도록 우리를 통해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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