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중략)…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누가복음 15장 11∼21절)
‘탕자의 비유’는 아버지를 떠난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 죄악에서 돌이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죄짓고 불의하고 방탕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탕자와 같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과 은혜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되었고 영원한 천국을 상속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 거하기 위해 우리는 늘 자신의 허물을 깨닫고 스스로 돌이켜 회개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1. 방황하는 사람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돌아올 몫의 재산을 요구했습니다. 유대 전통에 의하면 아버지의 죽음을 전후하여 큰 아들에게는 재산의 3분의 2를 둘째 아들에게는 3분의 1을 상속했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가 아직도 정정하신데 유산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크나큰 불효요,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며, 아버지의 다스림을 거부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자유와 독립을 얻고자 하는 일종의 방종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간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재산을 나누어 주자 얼마 지나지 않아 둘째 아들은 받은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허랑방탕하게 생활하며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말았습니다(눅 15:11∼14). 그는 아버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신의 힘과 뜻대로 아버지를 떠나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 생각했지만 그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죄와 궁핍과 허무함이 가득한 삶이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비극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자기의 뜻대로 자신의 만족을 따라가는 삶을 사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사는 것이 곧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착각하지만 결국 하나님이 없는 자유는 불행으로 가는 지름길에 불과합니다.
1960년대 미국의 LA와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청년층을 중심으로 히피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기성세대의 사회적 통념, 제도, 가치관을 부정하고 자유와 사랑을 추구하며 새로운 문화, 새로운 가치질서를 만들기 원했습니다. 평화와 자연으로의 회귀를 외치고 윤리나 도덕보다는 자연스러운 감정과 즐거움을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집을 떠나 마약과 자유로운 성생활을 하며 모든 기존 질서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다가온 건 참된 자유와 사랑이 아니라 허무와 절망 그리고 파멸과 방종뿐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 타국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며 방탕한 삶을 살던 둘째 아들은 곧 돈을 모두 탕진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큰 흉년이 찾아왔습니다(눅 15:14). 돈으로 사귄 많은 친구들은 그가 가난하게 되고 삶이 어려워지자 모두 그를 떠나갔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은 흉년을 만나 돼지 치는 일을 하며 돼지의 먹이인 쥐엄 열매로 허기진 배를 채우는 뼈저린 배고픔을 체험했습니다(눅 15:15∼16).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신의 힘과 뜻대로 살아보고 싶어 아버지 집을 떠났지만 아버지를 떠난 그에게 찾아온 것은 고통과 절망뿐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의 고난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하나님을 떠난 인생에겐 어떤 꿈도, 희망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에덴동산의 풍요와 축복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떠나자 인간은 에덴동산의 풍요를 잃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뒤덮인 저주 받은 땅에서 땀을 흘리고 일해야 먹고 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죄는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 자기 뜻대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떠날 때 모든 인간은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롬 5:12).
2. 삶의 전환점
아버지의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은 모든 것을 잃고 처절한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눅 15:17). ‘스스로 돌이켜’의 원어적 의미는 ‘자신에게로 돌아오다’입니다. 그는 궁핍해지고 비참해진 이후에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참 모습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으며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거친 풍랑, 세찬 비바람의 환난을 통해서 탕자와 같은 삶을 사는 우리들을 깨우치십니다. 회개는 모든 고통의 원인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임을 깨닫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또한 회개는 악인이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서 떠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입니다(겔 18:21∼22).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잘못했음을 발견할 때 속히 회개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이사야 1장 18절은 “야훼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집을 나와 자유를 찾는다고 방탕하게 살던 젊은 히피 청년들 가운데 현재의 삶에 진정한 자유가 없음을 깨닫고 진정한 자유를 찾아서 예수운동, ‘지저스 무브먼트’(Jesus Movement)가 일어났습니다. 이 지저스 무브먼트를 통해서 술, 마약, 섹스에 찌들어 있던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절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을 것 같던 미국의 유대인들이 수천 명씩 회개하고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을 ‘메시아닉 유대인’(Messianic Jew)이라고 하는데, 그들의 핵심 멤버 대부분이 ‘예수운동’ 때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현재 이스라엘에 사는 메시아닉 유대인만 2만 명, 미국에도 수십만 명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지저스 무브먼트를 통해 회개하고 돌아온 청년들을 기성교회에서 수용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때 갈보리채플, 윌로우크릭 교회, 새들백 교회 등이 이들에 맞는 목회를 통하여 성장하여 대형교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후회와 회개는 다릅니다. 회개는 잘못된 것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은 30냥에 예수님을 팔고 후회하고 자책하면서 죄를 고백했으나 그는 돌이켜 예수께로 향하지 않았기에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죄를 범했지만 돌이켜 예수님께로 향했기에 예수님의 수제자로, 복음전파의 아름다운 통로로 사용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후회나 뉘우침이 아니라 자아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돌이키는 근본적인 삶의 방향전환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는 길만이 살 길임을 촉구했습니다. 에스겔 18장 30절에서 32절은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주 야훼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고 말씀합니다. 회개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슥 1:3).
「탕자의 선물」은 허랑방탕한 삶을 살다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온 김치진 교도관의 간증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고 결혼과 함께 교도관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미신과 우상을 숭배하던 집안에서 자란 그는 아내를 따라 처음으로 교회에 갔습니다. 형식적인 크리스천이었던 그는 7급 공채시험에 합격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은 그를 합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시험에 합격한 이후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아내가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지도 모르고 술과 주식에 손을 대면서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하며 빚더미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는 궁리 끝에 세 번의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착하기만 하던 아들이 문제를 일으켰고, 그런 아들을 보며, 그는 자신을 향해 한없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삶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그에게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공황 장애를 앓고 있던 아내의 병이 치유되었고 빚도 청산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전도, 방송 출연, 간증 집회 등을 통해 교도관으로서의 하나님의 소명을 깨달아 지금은 구치소, 교도소에서 자신과 같이 방탕한 삶을 살았던 수용자들에게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3. 변함없는 아버지의 사랑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그 순간부터 문도 잠그지 않고 잠을 자며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아들이 돌아오던 그날에도 아버지는 멀리 동구 밖을 내다보며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직 거리가 먼데도 단번에 아들을 알아보고 맨발로 뛰어 나가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습니다(눅 15:20).
그리고 아버지는 재산을 다 탕진하고 온 아들을 위해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며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눅 15:22∼23). 제일 좋은 옷을 입혔다는 것은 마음을 열어 크게 환영하는 것을 의미하고, 가락지를 끼우는 것은 아들에게 상속권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신발을 신기는 것은 신분의 변화, 즉 노예나 종이 아닌 아들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꾸짖거나 분노하지 않고, 조건 없이 용서하고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올 때에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무조건으로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관계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 자녀의 영광의 옷을 입혀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권위의 가락지를 끼워주시며, 자유의 권리를 회복시켜주시는 신을 신겨주십니다.
심리학교수이자 영성작가인 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은 1983년 프랑스의 트로슬리 마을의 라르쉐 공동체에서 우연히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이라는 그림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림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따뜻한 포옹 장면을 통해 오랜 여행으로 탈진해 돌아온 아들이 바로 자신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2년 후 하버드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캐나다에 있는 또 다른 라르쉐 공동체에 들어가 정신적 결함을 가진 발달 장애인들과 더불어 생활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장애인들과의 공동체 생활을 통해 탕자가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 품에 안긴 것 같은 편안함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후 소천하기까지 10년 동안 장애인들과 함께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실천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늘도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더 이상 지난 허물을 기억하지 아니하시고 무조건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사 55:7).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택하고 부르셔서 자녀삼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지난 날 탕자처럼 감사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 원망 불평하며 내 뜻대로 살았던 우리의 모습을 회개합니다. 이 시간 돌이켜 주님께 나왔사오니 은혜를 내려 주시고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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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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