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한복음 11장 25∼27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기적이요, 축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요, 생명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뒤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예수님께서 부활과 생명이 되심을 확증하는 이야기입니다.
1. 인생에게 다가오는 죽음
예루살렘 남동쪽에 위치한 베다니 마을에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 삼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종종 예루살렘에 오시게 될 때 이곳에 머무르시며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사로가 중병에 걸렸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예수님은 곧바로 오시지 않았고 결국 나사로는 주님이 오시기 전에 죽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예고 없이 다가옵니다. 죽음을 피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전도서 3장 1절에서 2절은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삶이 있으면 그곳에 죽음이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뒤에도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시다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되어 다시 살아날 가망이 전혀 없었습니다(요 11:17). 이처럼 죽음은 인간의 힘으로 넘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는 우리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그 사람을 무덤에 묻고 그 사람에 관한 모든 것을 정리할 뿐입니다. 이 절대 절망의 순간에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오셨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늦게 오신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치료하실 수 있다는 것은 믿었으나 죽은 자까지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라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마르다는 죽음의 문제는 예수님도 어떻게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죽음조차 생명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견디기 어려운 고난을 만날 때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히 9:27).
세계적인 뇌의학 권위자이자 신경외과 전문의인 이븐 알렉산더(Eben Alexander)는 희귀질환인 박테리아성 뇌막염에 걸려 ‘뇌사상태’에 있다가 7일 만에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삶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는 그의 책 「나는 천국을 보았다」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죽었지만, 영혼은 살아있었다. 삶은 육체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 사후세계가 있다. 천국을 보기 전에는 천국, 하나님, 영혼에 관한 그 어떤 이야기도 의학적인 지식과 양립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하나님과 영혼이 실재하며 죽음이란 다만 다른 상태로의 전이 과정에 불과하다고 믿게 되었다. 영성과 과학은 함께 갈 수밖에 없다”
그렇습니다. 죽음 이후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천국에 들어가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영원한 지옥 형벌의 길로 갑니다(마 25:46). 죽음은 육신의 장막이 무너진 것이요 육신의 고통이 끝난 것일 뿐, 믿는 자에게 죽음은 영원한 세계에서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육신의 장막을 벗고 영원한 천국으로 이동하는 하나의 관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과 같은 상황을 만날지라도 생명의 근원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2. 생명의 근원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절망하고 있는 마르다를 향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1:25∼26).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의 근원이 되십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사람에겐 죽음 후에도 천국이 예비되어 있으므로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게 됩니다(요 3:16).
스위스의 정신의학자요 의사인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 박사는 그의 책 「귀를 핥으시는 하나님」에서 아내의 임종의 순간을 기록했습니다. 죽기 직전에 아내는 남편에게 천국에 도착하면 먼저 가 계신 시부모님을 만나 정말 즐거울 것이라고 평온한 미소로 말했습니다. 그는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내의 말을 듣고서 저는 비로소 생명이신 예수님을 새롭게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아내를 먼저 천국으로 떠나보낸 후 저의 믿음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에 대한 믿음이 강해질수록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해방되는 놀라운 자유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생명의 창조주이십니다(고전 15:20∼21).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절에 생명의 근원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부활절은 그냥 형식적으로 지켜야만 하는 종교적 관습이 아닙니다. 부활절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살아 있는 관계를 맺어 우리의 삶이 새로워지고 우리의 삶이 능력과 희망으로 충만해지는 현재적인 사건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시간,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것을 믿으면 모든 죽은 것들과 죽어 가는 것들이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부활과 생명이 되신 주님을 만날 때 우리의 인생이 바뀌고 삶은 변화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뒤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깊은 불안과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혹시라도 예수님과 한 무리였다는 사실이 발각될까봐 겁을 냈고 고향으로 돌아가 생계를 유지할 대책을 세우기에 급급했습니다. 이때 실의와 불안과 공포에 빠진 제자들 앞에 홀연히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불안과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숨어 지내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담력이 생겼습니다. 주저앉고, 낙심했던 사람들이 일어나 희망을 얻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후퇴하던 제자들이 어떤 위기도 두려워하지 않고 전진해 나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담대히 외쳤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예전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우리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라버니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리는 마리아와 주위 사람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요 11:33),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 11:35).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보시고 절망에 처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동안 몸소 인간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체험하셨기에 그 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십니다(히 4:15).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을 아시고 우리가 눈물을 흘릴 때 같이 눈물을 흘려주시며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 앞에 가셔서 “돌을 옮겨 놓으라”(요 11:39)고 명령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굴을 무덤으로 사용했는데, 자연 동굴이거나 바위를 파낸 동굴이었습니다. 그리고 짐승이 시체를 손상시키지 못하게 굴 입구를 돌로 막았습니다. 무덤의 돌을 옮기라는 것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썩어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요 11:39). 나흘은 더 이상 시체가 살아날 소망이 없는 절망의 기간입니다. 마르다는 눈에 보이는 3차원의 현실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그녀는 썩어 냄새나는 시체만 바라보고 생명의 주인이시요 부활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신앙은 부활의 능력을 의심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영적인 눈이 감겨져 있어서 하나님의 기적을 바라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영의 눈을 뜨게 됩니다.
예수님은 “마르다를 향해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요 11:40)라고 말씀하시면서 마르다에게 나사로를 살리시겠다고 하신 자신의 약속을 상기시키셨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우리가 어떤 절망에 처했든지 모든 문제의 해결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3.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조건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와 순종입니다. 믿음은 신뢰와 순종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려면 끝까지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시간까지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바로 이 믿음을 가지고 나올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따라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므로 믿음이 없는 사람이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합니다.
데이브 브라우닝(Dave Browning) 목사님은 그의 책「두려움을 이기는 믿음」에서 “믿음이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보여 드리는 마음과 태도다. 하나님은 하나님 뜻에 따라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기를 기대한다”라고 말씀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무덤 입구를 막고 있는 돌을 옮겨 놓았습니다(요 11:41).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해 영적인 눈을 떠야하고 믿음과 순종으로 돌을 옮겨야 합니다. 불신앙의 돌, 의심의 돌, 부정적 사고의 돌, 고집과 교만의 돌, 분노의 돌을 옮겨야 합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불가능하고 상식에 맞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고 나아가면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아들인 이삭을 주실 때, 그가 자기의 인간적인 능력과 소망을 포기하는 시점에야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25년 만에 아들을 주셨으며, 그의 육체가 죽은 사람처럼 된 100살에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확실히 믿었습니다(롬 4:19∼21).
마르다와 마리아가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옮기자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요 11:43)고 큰 소리로 명령하셨습니다. 그 때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 무덤에서 살아 걸어 나왔습니다. 우리는 어떤 절망 가운데에 처하더라도 그 절망을 향해 담대하게 외쳐야 합니다. “절망아 물러가라”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의 그 이름의 권세와 능력을 사용하여 온갖 고통과 죽음과 같은 문제 앞에서 우리는 담대하게 믿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어 예수님은 걸어 나온 나사로를 향해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명령하셨습니다(요 11:44).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 영혼이 구원을 받았으나 자유를 얻지 못하고 나사로와 같이 수의에 묶여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질병과 저주와 가난을 향해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명령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과 육신과, 물질, 욕심과 헛된 영광의 묶임을 풀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참 자유를 얻고 오늘도 여전히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히 13:8).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이 부활의 날에 “나사로야 나오라.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를 묶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 마음을 닫고 있는 돌이 어떠한 돌인지, 이 시간 그 돌을 굴려내고 묶여있는 것을 풀어 주님 안에서 참된 자유를 얻는 우리 모두가 되도록 주님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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