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태복음 11장 28∼29절)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누구도 인생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웬 은혜인지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우리에게 쉼을 주시기 위해 지극히 높은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일생을 섬김의 본을 보이시다가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에게 참된 평안과 안식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1.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하심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죄와 절망, 질병과 사망, 가난과 저주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인생의 이 무거운 짐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대신 져 줄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하시려고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으나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가난하고, 소외되고, 삶에 지치고, 외로운 사람, 죄인들을 부르셨습니다(눅 5:31∼32). 예수님은 세관에 앉았으나 양심의 짐이 무거운 마태를 부르셔서 제자를 삼으시고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빌립을 부르셨습니다(요 1:43). 그러므로 우리는 짐 진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염려의 짐, 의심의 짐, 탐욕의 짐, 야망의 짐, 성취욕의 짐, 경쟁의 짐, 열등의식의 짐, 외로운 짐, 죄의 짐 등 어떤 무거운 짐을 지고 있더라도 예수님의 초청에 응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무거운 짐을 다 맡아주십니다. “네 짐을 야훼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사람들이 어느 날 간음하다가 붙잡힌 한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당시의 관례로는 그러한 사람은 돌로 쳐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돌을 들고 여인을 치려는 무리들을 향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인을 향해 돌을 들고 던지려 하던 모든 사람들이 돌을 내려놓고 슬그머니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모두 떠나고 여인과 마주선 예수님께서 “너를 정죄 하는 자가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여인은 흐트러진 채로 숨죽여 대답했습니다. “없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하시므로 그 여인의 무거운 죄 짐을 벗겨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스스로 해결하지 못할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주님만이 모든 문제의 해결 자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염려를 맡겨야 합니다(벧전 5:7).
필 라이큰(Philip Ryken)은 두 자녀를 먼저 천국으로 떠나보내는 상실의 아픔과 질병의 고통에서 부르짖다가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이라는 찬송시를 썼습니다. 삶에 지쳐 쓰러졌을 때 그녀가 깨달은 것은 생명보다 귀한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훗날 그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 영혼은 언제나 주님을 더욱 사랑하기를 갈구합니다. 깊은 숲 속에서나 침대에서나 운전할 때나 행복할 때나 바쁠 때나 슬플 때나 게으를 때나 더욱 사랑, 더욱 사랑, 더욱 사랑하라는 속삭임이 끊이지 않습니다”
어떠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까? 우리의 짐을 맡아주시는 예수님께로 나오십시오. 예수님께로 나오면 ‘죄의 짐’을 주님께서 맡아주십니다. 이사야 1장 1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야훼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예수님께로 나오기만 하면 ‘질병의 짐’을 주님이 맡아주십니다. 이사야 53장 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께로 나오기만 하면 ‘가난과 저주의 짐’을 주님께서 맡아주십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로 나오기만 하면 ‘죽음의 짐’을 주님께서 맡아주십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초청에 응하여 예수님께로 나오기만 하면, 주님은 우리의 무거운 짐을 맡아 주십니다.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날마다 우리의 짐을 대신 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2. 참된 평안과 안식을 주심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참 평안과 안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세상은 염려와 근심과 걱정, 그리고 불안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참 평안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나아오면 참된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주시는 평안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구름과 폭풍우가 빼앗아 갈 수 없는 평안이요, 모든 환경을 초월한 평안입니다. 이 평안이 우리에게 임할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주님께서는 밤새도록 그물을 던지며 고기를 잡으려 애썼으나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하고 지쳐있는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리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주님은 실의에 빠졌던 베드로의 얼굴에 만족함의 웃음이 가득하게 하셨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과 만족을 주실 수 있습니다.
질병으로 인한 고통의 짐을 지고 괴로워하던 수많은 병자들이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 주님은 그들의 병을 고쳐주심으로 질고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안식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예수님 안에 있으면 평안 그 자체를 소유하게 됩니다.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그의 저서 『예수가 주는 평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지닌 평안은 세상의 왕들이나 용사들이 지닌 그 무엇과도 비할 수가 없다. 세상을 다 주어도 이 평안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자녀만이 왕의 자녀로서 복된 평안을 상속받을 수 있다. 이 평안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준비된 귀한 축복이다”
우리 마음 안에 평안이 없는 것은 인생의 주인이 예수님이 아니라 돈, 명예, 권력이 주인이 되어 예수님을 마음에 모실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은과 금을 제 아무리 많이 가졌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함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있으면 바울처럼 감옥 안에서도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격려의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톨스토이는 55세 되던 해 그의 저서 『신앙론』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55년을 살아오는 동안 15년의 소년기를 제외하고는 안식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안식을 알지 못하고 살아 왔습니다. 18세 되던 해에는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는 친구의 말에 설득되어 기독교를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종교를 포기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를 얻는 길이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내 나이 55세, 이제 나는 내가 버린 어머니의 품과 같은 신앙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종교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 왔습니다. 비로소 예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발견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이 평안이 우리에게 임할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진정한 평안과 안식을 원하십니까? 지금 예수님께로 나아오십시오.
3. 온유와 겸손을 가르치심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시는 이유는 온유와 겸손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지은 모습 그대로, 못난 모습 그대로 나아오면 어머니처럼 우리를 따뜻하고 부드럽게 맞아주시고 품어 주시는 온유한 분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유월절 마지막 만찬에서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오셔서 묵묵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의 모습은 겸손한 모습입니다(요 13:14∼15).
베드로는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모두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권면합니다(벧전 5:5). 어느 날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나아와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말할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예수님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셨지만 이 땅에서 지극히 낮아진 종의 형상을 입고 일생을 사시고,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사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까지 겸손으로 섬기시더니 마침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겸손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사닥다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낮추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겸손하게 낮은 곳을 찾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으며 하나님 은혜를 누릴 수 있고 예수님의 사랑이 강물처럼 넘쳐나게 됩니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님은 1968년 2월 4일 조지아주 애틀랜타 에벤에셀 침례교회에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으뜸이 되려면 예수님처럼 살면 됩니다. 그분은 힘으로 으뜸이 되지 않으셨습니다. 섬기는 종으로 오셨고, 섬기며 살았고, 죽으시면서 섬김을 완성하셨습니다. 섬기는 자가 으뜸이 됩니다. 종으로 살면 최고가 됩니다. 섬기는 데는 학위나 언변에 능함이 필요 없습니다. 종이 되는데 지위나 지식이 필요 없습니다. 섬기면 누구나 으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섬김의 자리로 나아갑시다”
우리가 하나님께 경배를 드릴지라도 겸손하지 않으면 그 예배는 무가치하고 아무리 많은 봉사를 하고, 종교적인 열심을 내어도 자기를 나타내고 자기가 높아지려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상처를 주면 모든 것이 무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걸어가신 길은 겸손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본받아 상처 입은 영혼들을 온유함으로 품어주고, 낮은 곳에 마음을 두며 겸손하게 섬기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 은혜 가운데 이렇게 택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되었는데 감사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한 것을 회개합니다. 우리의 남은 여생, 감사하고 사랑하며 섬김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지면보기
행복으로의 초대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