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야훼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야훼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야훼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야훼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 4장 3~10절)
일생동안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유대인 종교학자 마틴 부버는 그의 책 「나와 너」에서 ‘인간은 창조될 때부터 관계성을 갖고 살도록 만들어졌으며, 이러한 관계성을 맺기 위해서는 자기부인과 자기희생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참된 관계는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이웃과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이렇듯 깨어진 관계 속에서 인간은 불행과 절망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참된 관계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1. 가인과 아벨의 제사
아담과 하와 사이에 가인과 아벨이 태어났습니다. 가인은 농사짓는 자가 되었고, 아벨은 양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장성한 그들은 자신들이 거둔 첫 소산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셨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야훼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야훼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 4:3-5)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자 가인은 몹시 화를 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에 대해 성경은 가인이 악한 자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요일 3:12)
또 가인은 하나님 앞에 선을 행하며 살지 않고 죄에 매인 삶을 살았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가인의 내면에는 항상 죄의 욕망이 넘쳐났습니다. 그 욕망을 다스리지 못한 가인은 언제나 죄에 넘어지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린 제사조차 죄와 탐욕이 가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가인의 삶을 기뻐하지 않으셨고 결국 가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악인의 제물은 본래 가증하거든 하물며 악한 뜻으로 드리는 것이랴”(잠 21:27)
하나님께서는 제물을 드리는 자의 삶을 살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벨과 같이 선을 행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야훼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창 4:4)
아벨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을 담아 양의 첫 새끼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아벨의 태도는 평소에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삶을 살았음을 말해줍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아벨과 같은 의로운 삶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기에 앞서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또 하나의 이유는 믿음으로 제사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나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 11:4)
가인과 아벨은 똑같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린 반면에 가인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전통과 형식이 아닌 믿음으로 예배를 드릴 때 살아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예배하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마지막 이유로 성경은 가인이 행위의 제사를 드리고 피의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자신들의 벗은 것을 수치스러워 하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셨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짐승이 죽어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한 인간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는 한 생명이 죽어야함을 상징적으로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피흘림을 통해서만 정결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하나님께서는 양의 첫 새끼를 잡아 피의 제사를 드린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피흘림이 없는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에도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피가 있어야 합니다. 예배의 형식이나 인간의 공로가 아닌 오직 예수의 피 공로로 죄사함 얻고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고 보혈의 능력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아벨을 죽인 가인
가인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신 것에 분노하여 아벨을 쳐죽였습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창 4:8)
인류 가운데 죄가 들어오고, 죄의 결과 인간의 삶 속에 미움과 갈등, 살인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죄의 산물인 미움과 질투로 인해 살인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미움을 품는 것도 살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요일 3:15a)
미움은 곧 살인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형제를 미워하거나 시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미움과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와 화해를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의 수하였던 아이히만은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하는데 주동자 역할을 했던 사람입니다. 결국 1968년 아이히만은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고 그에게 사형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아이히만의 사형을 당연히 여기고 어느 누구도 그를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꼴란즈란 이름의 유대인이 다섯 가지의 이유를 들어 아이히만의 사형을 반대하며 석방을 요구했습니다.
“첫째, 아이히만을 죽인다고 죽은 유대인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둘째, 사형시키지 않고 내버려두어도 모든 사람이 죽듯이 그도 자연스레 죽을 것이다. 셋째, 하나님께서 이미 그의 영혼을 심판하셨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넷째, 동생을 죽인 가인도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는데 우리가 누구를 정죄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다섯째, 참사랑이 없는 이 세상에 이제부터라도 사랑을 심어가야 한다. 누군가는 먼저 용서를 해야 사랑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유대인의 원수요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용서를 통해 사랑이 시작될 수 있도록 꼴란즈는 요구했던 것입니다.
미움은 결국 파멸을 낳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미움이라는 적과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미움과 시기를 버리고 사랑과 용서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이같이 물으신 이유는 가인이 자신의 죄를 고백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반항적인 어조로 대답했습니다.
“야훼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
가인이 미움으로 인해 아벨을 살인한 것과 같이, 우리도 미움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그들을 절망으로 몰고 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들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고 지금 물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물으실 때 우리는 잘못을 고백하고 상처 입힌 사람에게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미국 이민 2세로 미국 추수반석교회의 담임목사이자 국제추수선교회 대표로 활동하고 있는 채안 목사님은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로 힘든 시절을 보냈습니다. 항상 모범생이었던 누나에 비해 학업에 대한 습득이 늦었던 목사님은 항상 아버지로부터 꾸중과 체벌을 받았습니다. 결국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고 술과 마약을 습관적으로 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연히 참석했던 청년부흥집회에서 그는 방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방탕한 삶을 살았던 것에 대해 하나님께 회개하고 아버지에게도 용서를 구했습니다. 변화된 후에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되었지만 그의 마음 가운데 아버지에 대한 쓴 뿌리가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용기를 내어 아버지에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자라면서 아버지가 저에게 육체적인 벌을 주셨을 때 느낀 거절감에 대해 지금까지 큰 아픔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으셨어요. 오늘날 목사로서 저는 아버지가 그때 저를 육체적인 학대를 가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제가 말씀드리는 것에 대해서 아무 대답도 안 하셔도 됩니다. 그저 제 속마음을 털어놓고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치유가 됩니다.”
아들의 고백에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울먹이는 목소리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네가 자라는 동안에 내가 너에게 한 일들은 나의 큰 잘못이었다. 날 용서해주겠니? 그리고 아들아, 나는 네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그리고 너를 무척 사랑한단다.”
그날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채안 목사님의 마음의 쓴 뿌리는 영원히 떨어져나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뜨겁게 사랑하고 화해와 용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갈등과 대립의 세상 속에 모든 것을 덮는 것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회복해주신 사랑의 관계를 통해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마음의 크고 작은 미움들이 사라지게 하여 주옵소서. 분노와 원망과 불평들이 사라지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용서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감정을 다스려 분노하지 말고 미워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며 사랑의 실천자로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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