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행하시는 야훼,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야훼, 그의 이름을 야훼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예레미야 33장 2∼3절
죄가 들어온 후 인간 생활은 고난의 연속
행하시고 성취하시는 야훼 의지하고 기도해야
속수무책인 우리 인생 하나님만이 대책 되셔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말 중에 ‘사면초가’란 말이 있습니다. 사방이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별 수 없이 이제는 항복하거나 망하게 되었을 때 하는 말입니다. 또 ‘진퇴유곡’이란 말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깊은 골짜기에 빠진 것을 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많이 쓰는 말 중에 ‘속수무책’이란 말도 있습니다. 두 손이 묶인 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이와 같이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고난에 빠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1. 아담의 타락과 속수무책
성경에 보면 아담의 타락에서 속수무책의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으므로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죄는 오직 그 죽음만을 그 대가로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양과 도덕으로 죄를 청산할 수는 없습니다. 종교도 대가가 될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의 영원한 노예가 되어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마귀는 이런 인간을 영원히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이 속수무책일 때는 하나님밖에 대책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아담의 후예로서 죄 중에 태어나서 죽음의 값을 지불해야 되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죄 없이 태어났으므로 다른 사람의 죄를 청산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게 된 것입니다. 마귀는 이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속수무책 일때 그 아들이 십자가에 몸 찢기고 피 흘려서 인간의 죄책을 청산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죄없는 인간이 탄생했다는 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대책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의 희생제물로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것을 청산해 주었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를 믿으면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 들어와야 됩니다.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청산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 들어오면 우리가 죄악 가운데 버림 받아 마땅한 자라도 즉시로 죄에서 용서를 받고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고 해방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밖에 있으면 예수님이 아무리 십자가를 짊어지고 인류를 위해서 죄를 청산해 주어도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믿고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야 보혈이 효과를 발생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절로 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따라서 마귀가 아무리 속수무책으로 인간을 묶어 놓아도 하나님이 대책을 세우시면 마귀의 속수무책은 아무 의미가 없고 힘 없이 무너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2.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속수무책
다니엘 3장에 보면 유대민족들이 바벨로니아의 포로로 잡혀갈 때 왕족 중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있었는데 머리가 좋아서 특별히 느부갓네살 왕이 경영하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바벨론의 관리로 일하게 되는 큰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왕이 두라평지에 금신상을 세워 놓고 제막식날 문무백관을 다 불러서 음악을 연주할 때 엎드려 절하게 만든 것입니다.
모든 세상의 문무백관들은 느부갓네살 왕의 명령에 절대복종 했습니다. 그러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십계명에 순종하여 우상에 절하기를 거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포로로 잡혀온 것도 원통한데 이방 땅에 와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우상에 절할 수가 있겠는가. 죽더라도 우상에 절하지 않겠다’고 마음에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엎드려서 절을 할 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장대처럼 서서 절하지 않고 꿋꿋이 서 있었습니다. 다니엘 3장 12절에 보면 “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지방을 다스리게 하신 자이거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들은 신앙을 견지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이 말을 듣자 진노해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불러서 “우상에 절하지 아니하면 일곱배나 뜨겁게 한 풀무불에 던져 넣어서 태워 죽이겠다. 다시 한번 기회를 줄 것이니 우상에 절하라”고 말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속수무책입니다.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왕에게 굴복 할 것이냐, 일사각오하고 신앙을 지킬 것이냐, 참으로 어려운 결정인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이러한 선택의 기로에 설 때가 많습니다. 세상을 따라 갈 것이냐, 주님을 따라 갈 것이냐, 사람들은 쉽게 타협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도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바벨론에서 출세하고 포로생활을 하면서도 크게 호의호식하고 잘 살 수 있었습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우상에 절하지 아니하면 잡혀서 관직을 다 빼앗기고 풀무불에 던져 넣어서 불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죽으면 죽으리다”라는 각오로 단호하게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병사들에게 명하여 풀무불을 일곱배나 더 뜨겁게 하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불이 뜨거웠던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묶어서 들고 가던 병사들이 그 풀무불 가운데 던지려고 하다가 불에 타서 죽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묶어서 불에 던져 분명히 바싹 타야 되는데 순식간에 밧줄이 끊어지고 그 가운데 세 사람이 아니라 네 사람이 손을 잡고 춤을 추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불의 세력을 멸하신 것입니다. 왕이 너무나 놀라서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왕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하나님의 종아 불 가운데서 나오라”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주님께서 불의 세력으로부터 지키셨던지 몸은 상하지 않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않고 겉옷의 빛도 변하지 아니하고 불탄 냄새도 없었습니다. 완벽하게 하나님이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목숨을 바쳐서 단호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 중심으로 설 때 하나님이 돌보아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에게 도움을 베푸십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같이 인간의 속수무책이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이 대책을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신앙의 지조를 지켰기 때문에 왕조차 크게 감동하고 변화되어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으며 그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개인, 가정, 생활, 자녀, 사업의 어려운 문제가 부딪혀서 속수무책이 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면 이 모든 일에서 하나님은 대책을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먼저 섬기면 하나님도 우리를 먼저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뜻을 받들면 하나님이 화가 변하여 선이 되고 축복으로 유익이 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 법을 지키고 단호하게 결단을 내리면 하나님이 우리 편에 서 계시게 되는 것입니다. 속수무책이 될 때 하나님은 대책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수무책이라고 해서 세상을 따라서 타협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3. 풍랑 만난 제자들의 속수무책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누가복음 8장 22절로 23절에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다 어부로서 배를 잘 부릴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있는 힘을 다하고 수단과 방법을 다해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주무셨습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그런 풍랑 가운데서 잠을 잘 수 없습니다. 혼비백산 일어나서 안절부절 못할 것입니다. 아무리 수양과 도덕을 닦은 사람도 이런 큰 풍랑 가운데 안절부절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님께서 다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주님의 명령 없이는 파도도 예수님을 물에 빠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속수무책이 되어 이제는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때 예수님을 잠에서 깨웠습니다. 누가복음 8장 24절과 25절에 보면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속수무책의 난관에 처했을 때 그들은 뛰어 내려 헤엄치지 않았습니다. 죽는다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개인, 가정, 생활, 자녀 문제가 있어서 풍랑이 일어나서 침몰할 위기에 처했을지라도 우리는 찾아갈 곳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 가십시오. 우리가 기도를 게을리하고 성경을 읽지 아니하고 주님 중심으로 살지 않고 예수님을 등한시 하면 예수님이 잠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풍랑이 다가옵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잠들 때 우리에게 쳐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말씀 읽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헌신하여 충성해서 예수님을 잠에서 깨워 일으키면 주님께서 속수무책에서 해방의 대책을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라이놀드 G. 그린 목사는 “인생의 가장 좋은 일들은 슬픔이나 고난의 보자기에 싸여서 온다”고 말했습니다. 슬픔이나 고난이 다가올 때라도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면 슬픔과 고난의 보따리 속에 하나님은 좋은 것을 담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헨리 워드 비처는 “우리는 날마다 두개의 손잡이를 잡고 살아간다. 하나는 두려움의 손잡이며 다른 하나는 믿음의 손잡이다”고 말한 것입니다. 두려움의 손잡이를 잡고 우리가 떨면서 물러갈 것이냐 믿음의 손잡이를 잡고 끝까지 주님 중심으로 믿고 나갈 것이냐는 우리가 선택해야 될 것입니다.
4. 삶이 속수무책일 때
우리가 아무리 큰소리쳐도 우리의 삶이 속수무책일 때가 있습니다. 사업이 도산해서 갈 길이 막막할 때가 있는가 하면 가정이 파탄에 이르러 진퇴유곡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어려운 문제에 사면초가가 되어서 피할 곳이 없습니다. 도울 자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때 크고 비밀한 대책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기억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 2절로 3절에 “일을 행하시는 야훼,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야훼, 그의 이름을 야훼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 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속수무책의 상황에 닥쳤을 때 주님께 부르짖으면 주님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비밀을 보여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만세전에 이미 우리의 형편을 아시고 대책을 세워 놓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속수무책을 당했을 때도 하나님은 대책이 있다는 것을 알고 믿음으로 부르짖어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목숨을 내어 건 믿음의 결단으로 하나님께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도 의지하고 하나님도 의지하고 인간의 힘도 의지하면 안됩니다. 죽으면 죽으리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주님께 내어 던져 맡겨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살겠다고 발버둥칠 때는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습니다. 내가 죽음을 각오하고 주님께 맡기면 주님이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 인간의 힘으로 수단과 방법을 다하고 허우적 거릴 때는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모두 다 맡기고 주님께 의지하고 두 손 들고 나올 때 주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를 의지하며 철야하고 금식하며 주님께 부르짖어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나올 때 주님은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크신 비밀의 대책이 있다는 것을 기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눈에 갈 길이 안보이고 귀로 들어도 좋은 소리 없고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한 캄캄한 밤에 주님은 우리의 갈 길을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길을 만드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사방에 길이 막혀도 주님은 길이 되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답답한 일을 당해도 예수님을 붙잡으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죽을 곳이라도 예수님을 통하면 살길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무리 망할 때라도 예수님을 통하면 흥할 길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 되십니다.
9·11 테러로 미국 월드트레이드센터 빌딩이 무너졌을 때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는 100층에 있었는데, 폭격으로 엘리베이터는 쓸 수 없었고 계단으로 뛰어 내려오는데 마음속에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빌딩에 불이 활활 붙고 연기가 가득하고 언제 빌딩이 무너질지 모르는데 주님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급한 바람에 “Jesus! Jesus!”(예수님, 예수님!)이름을 부르고 뛰어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뒤에 많은 사람이 따라오자 “Call God! Call Jesus!”(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라)고 외치고는 뒤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 예수님”이라고 고함을 치면서 계단을 뛰어 내려왔습니다.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데 화염이 붙다가도 예수 이름을 부르면 불이 착 갈라졌고, 연기가 꽉 차였다가 예수 이름을 부르면 연기가 팍 흩어졌습니다. 50분간을 뛰어 내려오는데 계속해서 불길과 연기가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빌딩 밑에 나와서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빌딩이 우르르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 이름을 부른 자들은 모두 살아났습니다. 이 간증은 다음날 온 미국을 뒤덮는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고통에 우리가 속수무책일 때 바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님께 나오면 주님이 대책을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속수무책일 때도 하나님은 대책이 있으십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책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에게 속수무책은 하나님의 나타나실 기회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믿는다고 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모든 것을 다하여서 주님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주님만 따르고 의지해야 주님께서 역사하여 주십니다. 마귀는 우리를 항상 속수무책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은 우리에게 대책을 세워 주십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 외치면 하나님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구원하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풍랑 가운데서 건져 내듯이 오늘날도 주님은 손을 내밀어 대책을 세워 주십니다. 주님은 길을 만드시는 분인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사면초가를 당하거나 진퇴유곡의 어려움에 처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기를 원하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온전히 순복하고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하면 주님도 전적으로 우리를 위해서 일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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