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누가복음 4장 23∼30절
성경인물들은 살아있는 믿음의 표본
행동으로 옮길때 온전한 믿음
형식을 탈퇴해 기적을 바라봐야
박제된 독수리나 곰의 겉모습은 살아 있을 때와 꼭 같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죽었고 생명이 없기 때문에 움직이지 못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박제가 된 형식적인 믿음은 종교적인 의식은 잘 행하지만 생명력이 없습니다.
1. 엘리야와 시돈 땅 사르밧 과부의 기적
이스라엘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많은 사람이 굶주려 죽을 때 수많은 과부 중 오직 이방땅 시돈에 있는 사렙다 과부만이 살아있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이스라엘의 수많은 과부들 대신 시돈에 있는 사렙다 과부에게만 보냈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가 극심함으로 살아있는 신앙을 찾아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시돈땅 성문 곁에 가니까 한 과부가 나무를 줍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느냐?” “나무를 주어서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을 가지고 빵을 만들어 내 아들과 나누어 먹고 죽으려고 합니다” 엘리야가 가만히 보고 “그렇게 해도 좋겠지만 가서 물 한 사발을 내게 갖다 주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과부가 나무를 줍다말고 물을 길러 갔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물만 가져 오지 말고 빵을 만들어서 자신에게 먼저 가져 오라고 했습니다. 과부는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 보았습니다. 마지막 빵을 만들어 자기와 자식하고 나눠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을 엘리야에게 먼저 가져 오라니 당황스러웠습니다. 망연자실하여 엘리야를 쳐다보자 엘리야가 “만일 당신이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가뭄이 지날 때까지 밀가루통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기름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렙다 과부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엘리야를 만났는데 엘리야가 너무나 어려운 부탁을 한 것입니다. 과부는 당황했으나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이라 엘리야가 하나님의 종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렙다 과부는 하나님 말씀이 주어졌으므로 말씀을 선택하는 믿음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과부는 하나님의 종, 엘리야의 말을 듣고 그 말씀을 믿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물 한 사발과 빵을 만들어서 가져오는데 어린 아들이 따라오면서 떡을 달라고 몸부림치고 웁니다. 그러나 물 한 사발과 떡을 엘리야에게 주었습니다. 그 과부와 어린아이가 보는 앞에서 엘리야는 떡과 물 한 사발을 다 먹고 마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너무 야박하고 사랑이 없다고 생각되지만 하나님은 이를 통해서 과부의 신앙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정말 믿음으로 목숨을 내어 놓고 순종하느냐, 안하느냐를 시험해 보신 것입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과부가 밀가루 통을 보니 밀가루가 끊이지 않고 기름병에 기름이 계속 흘러 나와 그 가뭄이 다 지날 때까지 과부와 어린아이, 엘리야는 배고프지 않게 넉넉히 먹으며 가뭄을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실천하는 믿음에 대해서 하나님의 기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줄타기를 제일 잘하는 블론딘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미국과 캐나다에 걸쳐서 줄을 걸쳐 놓고 장대를 들고 지나갔었습니다. 그리고 올때는 조그마한 손수레를 허리에 걸고 다시 그 줄을 건너왔습니다. 밑에는 천길만길 폭포가 쏟아지고 아찔합니다. 캐나다 편에서나 미국 편에서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 박수를 쳤습니다. 그때 그가 미국 편에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여러분, 이 수레에 내가 사람을 태워 이 줄을 타고 캐나다 편으로 건너갈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그러자 모두 다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블론딘이 다시 말했습니다. “그러면 누구 자원하는 사람 여기 수레에 타십시오” 사람들은 블론딘이 손수레에 사람을 싣고 그 외줄을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너갈 것을 믿는다고 했지만 수레에 자원해서 올라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믿음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마음으로 믿는다고 하지만 행동을 옮긴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만약 이 사렙다 과부가 엘리야에게 “나는 이 떡을 만들어서 당신에게 줄 수 없어요. 아들과 나는 마지막으로 떡을 먹고 죽겠소”라고 말했다면 그대로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말을 듣고 이 사렙다 과부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했습니다. 사나 죽으나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실천한 결과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2. 엘리사와 수리아 대장군 나아만의 나병 치유
엘리사시대에 이스라엘의 적국인 수리아에 대장군 나아만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외적으로는 화려했지만 내적으로는 썩어져가는 문둥병 환자였습니다. 그런데 집에 일하던 이스라엘 소녀가 그 주인의 비참함을 보고 말합니다. “엘리사라면 그병을 고쳐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어린 소녀의 말에 나아만의 귀가 번쩍뜨였습니다. 그는 수리아의 왕이 ‘나아만 장군을 잘 고쳐달라’고 직접 쓴 편지까지 받아들고 수레를 타고 군인들을 거느리며 당당하게 이스라엘로 갔습니다. 대장군이 소녀의 말을 듣고 믿음으로 행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입니다. 또한 그는 엘리사가 문둥병을 고칠지 안고칠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소녀의 말을 듣고 믿고 실천한 것입니다. 믿음이란 이와 같이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이 없어도 모험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막에서 엘리사는 나오지도 않고 그 종 게하시가 나와 굽신거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주인이 말씀하기를 저 요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하라고 합니다” 나아만 장군은 굉장한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이렇게 모욕을 줄 수 있느냐? 목욕을 할 것 같으면 우리 수리아의 아바나 강과 바르발 강이 얼마나 맑고 좋으냐? 목욕해서 나을 바에야 그곳에 가서 내가 목욕하지!”라고 분을 내고 돌아서자 그 종자들이 말합니다. “대장군이여! 노하지 마소서. 선지자가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을 하라고 해도 했을 것 아닙니까? 요단강의 물로 목욕하라는데 못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보좌관들이 간청하는 바람에 나아만은 요단 강에 들어갔다 나옵니다.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여전히 문둥병이 낫지 않았습니다. “일곱 번!” 일곱 번째 물에 들어갔다 올라오니 문둥병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깨끗이 나았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어린 이스라엘 소녀의 복음을 듣고 이스라엘까지 와서 행동하는 믿음을 보였기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3. 살아 있는 믿음
믿음은 ‘박제된 믿음’과 ‘행동으로 옮기는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의 형식은 가지고 있어도 죽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오늘날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믿습니다’라고 말하지만 믿음이란 실제로 절망 상황에 처했을 때 자기의 몸을 온전히 주님께 믿고 맡기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살아있는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인간이 벼랑 끝에 설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우리들이 수단과 방법을 다해보고 노력을 다 해봐도 할 수 없습니다. “주여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고백하고 주님께 내어 맡기면 그때서야 주님께서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기다려서 내가 정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느냐, 의지하지 않느냐를 테스트해보십니다. 전적으로 주님을 믿을 때 주님의 능력과 권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내어 맡길 때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이 같은 확신과 경험이 생기면 그 다음부터는 점점 인간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사렙다 과부가 죽음이냐, 삶이냐의 기로에 섰을때 주님께 내어 맡긴 것처럼 수리아의 대장군 나아만이 자기의 인격이 달려있고 수리아의 명예가 달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종의 말을 듣고 엘리사를 믿고서 찾아온 것처럼 믿음의 결단을 보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벼랑에 처할 때 주님께서 찾아오신다는 것을 깨닫고 마지막까지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자를 책임져 주시지만 반신반의 하는 자는 돌봐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하는 것입니다. 사렙다 과부가 뭘 믿고 자기의 마지막 물 한그릇과 떡 한조각을 엘리야에게 내놓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말하기를 “야훼께서 말씀하기를 네가 그렇게 하면 이 가뭄이 지날 때까지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기름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있기 때문에 믿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장군 나아만도 자기 집에 있는 이스라엘 여종의 입을 통해 엘리사 앞에 서면 병이 낫는다는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없이 믿는다는 것은 감각이요, 감정이요, 인간의 지혜요, 지식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반드시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 없이 내 생각과 내 감각으로 믿는다는 것은 엉터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으려면 말씀을 찾아 가십시오. 하나님을 믿으려면 말씀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말씀을 떠나서 우리에게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고 말씀을 달라고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문제가 생기고 고통을 당할 때 아무리 믿으려고 발버둥쳐도 믿음이 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여, 말씀을 주시옵소서. 나에게 말씀으로 찾아와 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하면 성령께서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심어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말씀을 찾아서 나아가야 합니다.
미국을 뒤흔든 위대한 설교가 무디는 거듭난 이후에 깊은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산에 들어가 열심히 기도해서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무디는 ‘내가 성령의 은혜를 이렇게 체험했으니 이제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나와서 한달이 지나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세상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위대한 주의 종들의 부흥회 이곳 저곳을 찾아다니며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을 때마다 자신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부흥회에서 은혜받고 얼마 세월이 지나가면 또다시 마음이 흔들리고 믿음이 약해졌습니다. 그는 탄식했습니다. ‘나는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인가 보다. 나는 하나님이 버렸는가 보다. 믿기는 믿었는데 믿음을 계속 지속할 수 없으니 어떻게 되겠는가’탄식했습니다. 하루는 성경을 읽다가 로마서 10장 17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 순간 가슴을 탁쳤습니다. ‘아, 내가 은혜만 찾았지 말씀을 찾지 않았구나! 말씀을 매일같이 읽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가지고 있었으면 내 믿음이 굳건하게 설 수 있겠구나!’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무디 목사님은 말씀을 가슴에 품고 다녔습니다. 항상 말씀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과 더불어 사니까 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고 만세반석 위에 설 수 있었습니다. 말씀이 우리를 승리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얻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말씀을 찾아 가십시오. 성경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 7000가지의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해야될 것은 믿음의 결단을 내리고 행동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사로의 무덤가에 가셨을 때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났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고 무덤문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마르다가 “주여, 우리 오라버니가 무덤에 들어간지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납니다. 그런데 왜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십니까?”라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결단을 못 내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마르다여, 내가 네게 말하노니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란 생각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결단을 내리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마르다가 생각한 뒤 결단을 하고 행동을 하려니 그 주위에 있던 수많은 유대인들이 자신을 광신자라고 비웃을 것만 같았습니다. ‘어찌할 것이냐. 타협할 것이냐, 결단을 내릴 것이냐’ 그녀는 마리아와 함께 결단을 내렸습니다. “욕을 먹든, 미쳤다고 하든, 유대인의 회당에서 쫓겨나든 예수님 말씀대로 순종하자” 그래서 두 처녀는 돌문에 매달렸습니다. 큰 돌이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움직이려고 매달려도 아무도 도와주질 않습니다. 예수님도 도와주지 않았고 유대인들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가 행동하는 결단으로 보여줘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말 믿으면 끝까지 실천하는 것입니다. 행동하는 믿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명령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이 결단을 내려서 믿음을 실천할 때까지 도와주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눈에 보여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숨어있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주님은 믿음을 보시고 역사하십니다. 나사로를 살리기 전에 마르다와 마리아가 믿음을 보여 주기를 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갔을 때 수많은 사람이 인산인해로 진을 쳐서 예수님 앞에 더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중풍병 환자가 친구들에게 의해서 들것에 들려서 왔으나 예수님 앞에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친구들은 지붕에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그 침대를 내려 놓았던 것입니다. 남의 집 지붕을 뚫고 침대를 내려 놓았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행동있는 믿음입니까? 집을 통째로 헐었으니 집값을 지불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앉아 계셨습니다. 먼지가 나고 지붕에서 쿵쿵 소리가 나도 주님은 꾸짖지 않고 가만히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고함을 쳤습니다. “왜 남의 집을 허느냐? 왜 먼지를 날리느냐? 그만두라”고 고함을 쳐도 예수님은 가만히 계셨습니다. 그 침대가 줄에 달려서 예수님 앞에 내려왔을 때 예수님이 그 사람의 믿음을 보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끝까지 참아 보시고 난 다음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침상을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도 있는 힘을 다해서 초죽음이 될 때까지 돌을 흔들어서 옮겨 놓습니다. 썩은 냄새가 무덤에서 확 납니다. 그때 예수님이 무덤 앞에 서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시니 죽은 나사로가 수의를 동인채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실천하면 주님이 기적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기적이 일어날 것을 언제나 기대하고 감사드려야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기적이 없으면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기적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것이 기적이고, 요단 강에서 침례받고 성령 받은 것이 기적입니다. 주님의 일생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문둥이를 깨끗이 하고, 파도를 잠잠케 하고,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고도 열두 바구니를 남기고,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기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생애 속에서 기적을 빼놓으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성경에 기적을 빼놓으면 겉장과 끝장 밖에 없는 것처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은 모두 다 기적의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감사하지 아니하면 믿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거듭나서 새사람이 되는 것이 기적입니다. 성령받고 병 낫는 것도 저주에서 해방되는 것도 죽은 후 천당가는 것도 기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 사람은 모든 신앙생활에 적은 기적이든 큰 기적이든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살아야 합니다.
일본의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는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는 기적이다. 그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만일 기적을 제외한다면 성경은 표지 2장만 남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적은 언제 일어날까요?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들어가면 정면에 이런 구호가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위대한 일을 기대하는 것이 바로 기적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우리 집안에 가족들이 구원받을 것을 기대하는 것은 기적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가족이 병낫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기적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망한 사업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것은 기적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셔서 오늘도 우리 가운데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단히 종교적이라 신앙에 대한 지식과 의식은 잘 알지만 믿음 없는 죽은 신앙, 형식적인 신앙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믿지 않았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믿음을 가진 종교는 의식에 묶인 죽은 박제품에 불과합니다. 주님은 우리 속에 어떤 믿음이 있고 얼마나 오랫동안 교회를 왔다갔다 했는지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네 믿음을 보여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가족들을 교회에 데리고 나오라. 구원은 내가 하지만 데리고 나오는 것은 네가 해야 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여,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십일조와 헌물을 심어라. 그러면 축복은 내가 한다” “그러지 말고 복부터 먼저 주세요” “안 보여주는 믿음에 대해 내가 기적을 행할 수가 없느니라” 이처럼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여 달라고 지금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의심의 무덤 돌문을 옮겨 놓아라. 그러면 내가 기적을 행하리라” 우리는 사회적인 체면 때문에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해서 마음에 불안과 공포가 있어도 믿음을 실천하지 않고 머뭇거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주님도 머뭇거리십니다. 주님은 확실히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차면 차고, 더우면 더우라. 미지근하면 뱉어 버리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사렙다 과부처럼 받아들여야 합니다. 수리아의 대장 나아만처럼 명예와 권세를 다 잃어버릴지라도 이스라엘 적국의 나라에 가서 엘리사에게 몸을 맡기는 신앙을 본받아야 합니다. 실천하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 이것이 살아있는 믿음이요, 이런 믿음이 있을때 주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는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교회만 왔다 갔다하고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박제된 신앙을 가진채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주의 말씀을 듣고 믿고 실천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 믿음을 실천하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겠다”고 말씀하셨사오니, 이제 부터는 거짓되게 바라만보는 신자가 아니라 행동하는 신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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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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