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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의 축복
2006.06.0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사도행전 2장 1∼4절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임하신 성령
환영하고 인정하고 모셔들일 때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 나타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지 3일후에 부활하시고 40일만에 승천하신 이후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요한의 다락방에 모여 뜨겁게 기도하였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모든 사람 머리 위에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있은 이후로 모든 제자들이 성령이 충만해지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성령으로 이땅에 다시 강림하셔야만 하셨을까요?

 

 1. 하나님의 생기로 생령이 된 아담

 하나님은 모든 생명체를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창세기 2장 19절에 “야훼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생기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야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생기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숨바람입니다. 하나님이 숨바람을 흙 속에 불어 넣으니 아담이 생령이 되어서 사람으로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아담의 삶은 이중적인 삶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물과 같이 흙으로 지음받은 육체를 가지고 있으므로 육체의 모든 욕구를 가진 동물적인 삶을 사는 동시에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받은 영이 존재하므로 신령한 존재로서의 삶인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육체를 가지고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전부 다스렸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은 영이 속에 있어서 영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고 교통하며 함께 지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하므로 말미암아 아담 안에 있던 영은 생명력을 잃게 되었고 이로인해 영이신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 버리고 말았습니다. 도랑물은 샘물에서 나온 물줄기에서 끊어지면 썩어져 버리는 것처럼 사람의 영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게 되면 썩게 되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이사야 59장 2절에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허물과 죄로 인간은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다시 영적인 소생이 있기 위해서는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생기인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몸 찢고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악을 청산하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을 모두 헐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기인 성령이 우리속에 들어와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듭나는 삶을 살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통해서만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의 수양과 도덕과 노력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바람인 하나님의 생기가 다시 우리속에 들어와야만 되는 것입니다.

 

 2. 오순절 날의 기적

 오순절 날의 기적은 죽은 인생들 위에 불어온 하나님의 생기의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에스겔 37장 1절로 10절에 “야훼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야훼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야훼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야훼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야훼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야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른 뼈에 생기가 들어옴으로 다시 살아나서 큰 군대가 되었다고 하는 말씀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죄로 말미암아 영이 죽고 법적으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마른 뼈같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볼 때 영이 죽은 마른 뼈로 된 골짜기인 것입니다.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마른 뼈와 같은 인생들이 살아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보혈로 헐어 버리시고 성령을 통하여 마른 뼈들이 살아서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날에 성령의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는 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생기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과 같이 성령의 바람은 죽은 마른 뼈와 같은 죄인들을 일깨우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적인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선교사였던 리빙스턴은 의사라는 직업을 통해 원주민들의 병을 고쳐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의 사역에는 성령의 강한 역사가 나타났는데, 친구였던 베네트 목사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이런 상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는 이곳에 와서 많은 일을 겪었네. 지금은 20킬로미터나 떨어진 먼 곳에서 온 병자까지 치료하고 있지. 여기 사람들은 수술할 때 아주 잘 참네. 부인들도 직경 1센티미터나 되는 상처를 칼로 째도 전혀 울지 않지. 하지만 이들도 성령의 역사 앞에서 만큼은 견디지 못하네. 어떤 사람은 아이처럼 소리쳐 울기도 하고,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하면 교회 밖으로 뛰쳐나가 도망가듯 울면서 질주하기도 하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다시 안 올 것처럼 도망간 사람들이 다음 집회에 또 출석한다는 사실일세. 그리고 이런 과정을 몇번 거친 사람들은 순순히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라는 편지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성령의 강한 바람은 양심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가 죄의 문제를 건드리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책을 받아 괴로워 견디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면 마음속에 죄를 깨닫게 하므로 죄를 고백하게 하고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적 생명이 소생하므로 하나님과의 교통이 다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바람은 이 땅에서 역사하는 귀신의 세력을 몰아내고 천국이 임하게 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완전히 죽어 있는 세상은 귀신의 세력 안에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산업의 모든 부분들을 망라하여 역사하는 귀신의 세력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함과 동시에 사람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 자랑의 포로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이 오시면 이 귀신의 세력을 쫓아내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 28절에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은 바람 같이 나타날 뿐 아니라 불의 혀같이 사람들 위에 임재합니다. 아무리 어두워도 불을 켜면 환하게 밝아지는 것처럼 불은 죄악의 어두움을 밝혀 암흑에서 광명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삶이 캄캄한 밤중에 방황하는 삶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고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의 마음에 어두움은 사라지고 천국을 향한 밝은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많은 교육을 받아도 천국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의 영원한 지혜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우리 마음속에 천국에 속한 비밀한 지혜를 깨닫게 하심으로 우리는 영원한 미래를 밝히 바라보고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성령의 불을 통하여 얼음같은 세상의 냉기 속에 따뜻한 사랑을 가져오게 합니다. 오늘날처럼 극단적으로 개인주의를 추구하는 세대에 사람들은 냉냉한 무관심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게 이익이 되면 받아 들이고 내게 이익이 안되면 분토와 같이 버리는 이러한 세대 속에 살고 있지만 성령이 오시면 따뜻한 사랑을 마음속에 부어 주시므로 사랑 안에서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또한 교회 공동체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5절에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불은 더러움을 태우는 소독작용을 합니다. 이 세상에 가장 좋은 소독 방법은 불로써 태우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죄악의 병균으로 가득찬 우리의 영과 마음과 몸 가운데 성령께서 임하셔서 소독하시므로 정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1907년 대 부흥운동은 1903년 원산에서 선교사들이 모여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며 기도하다가 성령의 불을 받은 데서 출발했습니다. 이 불이 서울의 정동감리교회와 승동교회로, 평양의 남산현교회와 장대현교회, 남문교회로 옮겨 붙었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평양 장대현교회의 부흥은 놀라웠습니다. 2000명이 넘는 신자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통회 자복하는 바람에 그들의 기도소리가 교회당 지붕을 날려 버릴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자 어떤 어머니는 피난을 가다가 자기 아이를 강에 빠뜨리고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 온 죄를 고백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간통한 죄를 자백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둑질, 간음, 미움, 질투 등 온갖 더러운 죄를 한꺼번에 토해 놓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습을 두려워서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서 뛰쳐나가 도망을 치다가 무슨 강력한 힘에 이끌려 도로 교회로 돌아와서 뒹굴며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죄를 토해 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거꾸러져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춥기로 유명한 평양의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저녁 7시에 시작된 부흥회는 새벽 2시가 되어도 끝날 줄을 모르고 사람들은 모두 성령의 은혜에 취해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의 일로서 당시에는 유교와 불교가 나라에 널리 장려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저녁 7시부터 새벽 2시까지 성도들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통회하고 자복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이 불길이 한국에 넘쳐나 오늘날 한국교회에 부흥을 일으키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이 임하면 우리 안에 온갖 더럽고 흉악한 죄들이 드러나고 모든 육체적 소욕이 한꺼번에 태워지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이 임할 때 다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방언이라는 것은 우리말이 아닌 다른 나라의 말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말이 아닌 천사의 말을 하는 것을 방언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이 임할 때 체험하게 되는 방언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갖도록 하는 중요한 수단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 말로다 할 수 없는 심정이 되면 정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게 됩니다. 구약의 엘리 제사장 때에 한나는 마음이 괴로와서 야훼께 기도하고 통곡할 때에 말을 못하고 입술만 덜썩 거렸습니다. 이에 엘리 제사장이 “한나여 언제까지 술이 취해 있겠느냐?” 라고 묻자 한나가 대답하기를 “여종은 술이 취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마음이 답답하고 또 이 원통함을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그렇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1장 15절에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야훼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에 너무 간절하고 한이 서리면 사람의 말로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럴 때 방언으로 말하면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 속을 시원하게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드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방언을 통해서 하는 기도는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과의 비밀을 말하는 것입니다. 비밀을 말하는 정도의 친밀한 관계는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실 때 주시는 방언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영으로 하나님과 비밀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더 깊은 교통을 가능케 하므로 바울 선생은 그 때문에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많이 말하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방언은 또한 마음을 청소하는 빗자루가 됩니다. 현재 우리의 의식,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말하고 느끼는 의식 밑에는 잠재의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잠재 의식 속에 우리가 세상에서 체험한 모든 고통과 괴로움, 슬픔, 좌절, 절망 등이 쌓여 있고 이것이 우리 생애 속에 악취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이 잠재 의식 속에 들어와서 악취를 내는 모든 원인들을 전부 청소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 28장 11절로 12절에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삶에 곤비하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은 성령을 통해서 방언을 말할 때 마음속에 모든 더러움을 청소하고 씻어내어 버리기 때문에 심신이 깨끗하게 치료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마음의 상쾌함과 안식이므로 성령받고 방언 말하기를 허락하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9절에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순절 마가다락방에 임하신 성령님은 오늘날의 마가다락방인 교회에도 임하셔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 강한 바람 같은 성령은 하나님의 생기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난 다음 제자들이 모인 곳에 오셔서 생기를 불어 넣으시고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2절에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순절 다락방에 임한 하나님의 입바람인 성령의 생기는 오늘날도 교회 가운데 불어오고 있습니다. 강한 바람 같은 하나님의 생기로 불의 혀같이 어두움을 물리치고 또한 방언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우리 마음에 받아들이면 새롭게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기독교는 성령의 역사

 이사야 11장 2절에 “그의 위에 야훼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야훼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처럼 성령이 강림해서 역사하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세상 지식과 학문으로 이루어진 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성령이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고 할 수 없다고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교회에서 아무리 이론적으로 학문적으로 예수를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성령이 역사하지 아니하면 예수님을 주로 시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의식이나 형식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장엄한 교회당, 내부장식, 엄숙한 의식 등을 갖추어 놓는다고 해서 그곳 속에 하나님이 계신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영이신 하나님이 계신 곳이 성령이 거하시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곳이 마굿간이라도 성령이 계시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곳이라도 성령이 임재하신 장소가 하나님의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장엄한 교회, 아름다운 내부장식과 엄숙한 의식이 있더라도 성령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형식화되고 의식화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하신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근원적인 목적이 아닌 것처럼 교회는 인간적인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인위적인 조직을 통해서 사회개혁이나 구제와 같은 시민운동을 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물론 교회는 사회의 안녕과 복지를 위한 구제활동을 해야 하겠지만 그것이 교회의 중심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목적이 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입니다. 에베소서 1장 22절로 23절에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처소이지 인간적인 조직이나 단체가 모여서 활동하는 곳이 아니므로 교회에 당을 짓고 파벌을 형성하는 것은 하나님을 근심시키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조직을 통해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수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을 중심으로 해서 성령을 모시고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섬기고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거룩한 처소로 이것이 교회가 이땅에 있는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흑인이 백인들만 모이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려고 했는데 못 들어오게 해서 문 밖 계단에 앉아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잠깐 잠이 들었는데 비몽사몽 간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너는 왜 거기서 울고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제가 흑인이라고 이 교회에 못 들어가게 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너만 그 교회에 못 들어갔다고 슬퍼하지 말아라. 실은 나도 아직 이 교회에 못 들어가봤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가 성령님을 문 밖으로 내어 쫓고 인본주의적인 토대 위에 종교의식과 조직화된 프로그램을 추구하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러한 인간적인 활동과 조직이 아닌 성령님이 오셔서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는 거룩한 처소로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가지고 성령운동을 하는 것이 진정한 교회입니다. 성령운동을 하는 교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려서 죄를 용서하시고 마귀의 속박과 저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므로 모든 질병에서 치료받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을 통해서 거룩하게 하심으로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것과 같이 성령의 은혜가 부어지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성령 없는 교회를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성령 없는 교회는 비 없는 구름이요, 물 없는 우물이요, 불 없는 화로와 같습니다. 형식과 의식은 있으나 내용은 없는 죽은 교회인 것입니다.

 오순절 날 마가요한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님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 임하시고 또한 방언을 통하여 역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다가 33년만에 천국으로 돌아가셨지만 성령님은 오순절 날에 임하신 이후로 오늘날까지 우리 안에 거하시고 역사하시는 영으로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의지할 때에 성령님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 강한 바람같이 불같이 생수같이 역사하시고 또한 방언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을 우리에게 성취하시기 위해서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우리와 같이 계심을 감사합니다. 2천 년 전 오순절 날에 강림하사 교회를 중심으로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님, 우리 가운데 강한 바람같이 불같이 생수같이 역사하여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 영광과 대속의 은총이 우리의 삶 가운데 체험되는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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