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시편 22편 1∼2절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절대 주권자이심으로 무엇이든지 당신이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해서 누구도 왜 그렇게 행하시느냐고 질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온 우주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1. 인간이 하나님께 던지는 질문들
우리는 하나님께 많은 질문을 합니다. 왜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셨습니까? 왜 마귀가 시험하도록 하셨습니까? 유대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가나안 족속을 다 멸하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남녀, 노유까지 전부 멸절시킨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왜 그랬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지도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설명합니다. 선악과를 만드신 이유와 마귀의 시험은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이 자율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느냐를 시험해 보기 위함이요 우상을 섬기는 가나안 족속의 멸망은 전적인 타락과 부패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생존할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12장 2절로 3절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고 말씀하고 있고 신명기 7장 7절로 8절에 “야훼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야훼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유대민족을 사랑하시고 선민으로 삼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유대민족을 위하여 다른 민족을 해하는 일을 허락하시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시편 22편 1절에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도 이해할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쳤을 때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질문했지만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2차세계대전 때 히틀러가 600만 유대인들을 참혹하게 학살하도록 침묵하신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게슈타포에게 사형을 당한 괴들러(Goedler) 박사의 수기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잠을 이룰 수가 없다. 개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은 과연 계실까? 나는 그것을 믿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수십만의 사람들이 공포와 절망 속에서 미쳐가는 것을 그대로 놓아두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수백만의 사람들이 공포의 풀무불 속에 떨어져 허우적거릴 때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으시고 죽게 버려두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 절망하고 낙심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시원한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왜 이러한 고통과 슬픔이 내게 다가옵니까? 왜 나는 이렇게 괴로움을 당하고 살아야 됩니까? 왜 나는 병들었습니까? 왜 내가 망해야 되는 것입니까? 왜 내가 배신을 당해야 되는 것입니까? 왜 내가 낭패를 당해야 됩니까? 수많은 ‘왜’라는 질문을 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이러한 질문들에 명쾌하게 대답하지 않으시고 침묵으로 일관하실까요?
2.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과 섭리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계획과 섭리를 우리는 머리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유치원생이 선생님께 찾아가서 고등수학을 묻습니다. 겨우 1,2,3,4,5,6,7,8,910을 깨달은 어린 아이가 선생님에게 “고등수학에서 미분과 적분을 가리켜 주십시오”라고 물어본다면 어느 선생님이 가르쳐 주려고 하겠습니까? 미분과 적분이라는 고등수학은 어린아이가 도저히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 없으므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아인슈타인 박사에게 가서 “아인슈타인 박사님 상대성원리를 설명해 주십시오. ‘E=mc2’라는 것은 질량에다가 광속도를 배가한 것이 에너지라고 했는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라고 물어본다면 설령 아인슈타인 박사가 우리앞에 나타나 상대성원리를 설명하여도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것을 이해할 만한 지혜와 총명이 없으므로 설명할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유한한 인간의 지력으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룻배가 바다를 담을 수 없듯이 인간의 조그만 가슴에 하나님의 넓은 세계를 다 담을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룻배가 바닷물을 그속에 담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창조주의 섭리와 경륜을 피조물인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욥기 42장 2절로 3절에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이 우주를 다 이해하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깨달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유한한 시간과 공간의 산물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사야 55장 8절에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야훼의 말씀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무지한 사람들을 이해시킬 수 없을 때는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라고 성경에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은 그냥 웃으시고 침묵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감당할 수 없는 의문에 대한 우리의 태도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아들을 달라고 하나님께 25년 동안 기도를 해서 100세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독자 이삭이 10대 소년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사랑하는 외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 데리고 와서 각을 뜨고 장작불에 얹어 재물로 바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설득하거나 이해시키려 하지 않으시고 다만 명령하셨습니다.
창세기 22장 9절로 10절에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왜 이삭을 바쳐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순종과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요셉을 통해서도 우리는 순종의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요셉은 삶속에서 고난의 과정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요셉은 왜 형들이 자기를 잡아서 발가벗겨 우물물에 던져 넣을 때 하나님은 내버려 두셨는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미디안의 대상에게 팔려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10년이 넘도록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겨우 가정 총무가 되어 살만하니까 그 아내의 참소를 받아 억울하게 누명을 덮어쓰고 감옥에 들어가서 2년 동안 있게 된 것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왜 이렇습니까? 하나님 왜 침묵하십니까? 왜 저를 건져 주지 않으십니까?’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어도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나 그후에 애굽의 총리가 되어 돌아보니 걸음마다 자국마다 그 모든 것이 국무총리가 되는 발걸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깨달음은 후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믿고 순종하고 따라온 이후에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깨닫게 해주십니다.
신앙이란 깨닫고 난 다음 따르는 것이 아니라 믿고 순종하고 난 다음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거울을 보듯이 희미하게 그리고 부분적으로 알뿐 완전히는 알지 못합니다. 하늘나라에 올라가면 그때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펼쳐 보여 주시면서 “그때는 이해할 만한 지성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설명해 주마”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모든 의구심들에 대해서 설명하여 주실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내 앞길 칠흑같이 어두워도 믿고 순종해 나가면 결국에 가서는 선하게 될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중에 화니 크로스비 여사가 작곡한 찬송이 많습니다. 그녀는 출생 6개월 만에 의사의 실수로 소경이 되었으나 한 번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운명을 탓하지 않고 늘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렸습니다. 그녀는 간증 중에 “내 육신의 눈은 감겨졌으나 영의 눈을 뜨게 하셔서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셨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지은 찬송 중에 찬송가 434장 ‘나의 갈 길 다 가도록’은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애창하는 찬송곡 입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고난을 만날지라도 절대선이시고 사랑이신 예수님만 따라가면 되는 겁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납니까? 그런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은 일일이 대답하지 않습니다. 오직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바라보며 종국에는 좋아질 것을 믿고 감사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를 품에 품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요, 절대 선한 하나님이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고통과 역경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꿈을 버리지 말고 감사함으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지면보기
행복으로의 초대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