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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
2006.04.0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린도전서 13장 1∼8절


인간이 추구하는 삶의 목적
좌절과 공허한 삶을 야기하지만 
하나님의 사랑만이 참 기쁨과 행복


 인간은 삶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추구하고 그 결과로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인생 목표를 달성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얻지 못하고 절망적인 삶을 살게 되는 이유는 삶의 기쁨과 행복의 핵심요소인 사랑이 결핍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외면적인 환경이 완벽하다 할지라도 내면적인 사랑의 부재가 존재한다면 결코 행복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1. 사랑이 없는 성취의 무의미

 

 사랑이 없는 성취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로 3절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성경에는 사람의 방언을 많이 말하는 것을 자랑할 만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사랑이 있어야 많은 나라 방언을 말하는 것도 자랑이 되고 천사처럼 말할 수 있는 것도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2절에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언하는 능력은 정치, 경제, 군사, 산업 모든 분야에서 미래에 일어날 것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산을 옮길 만한 믿음과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도 놀라운 능력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같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가치있게 보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랑이 없이 행하는 모든 것들은 전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3절에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구제하는 운동은 사랑이 없이도 많이 행하여지고 있지만 이는 사랑이 없이 자기를 번제물로 내어 줄지라도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사랑과 그리스도인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만이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분한다. 그들은 함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표를 몸에 지니고, 함께 노래하며, 세례를 받고, 함께 교회에 다니지만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분하는 것은 사랑밖에 없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랑이 핵심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사람의 방언을 하고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있는 것으로 다 구제하고 몸을 불사르는 곳에 내어 던질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크리스천적인 행동을 할 수 있어도 마귀의 자식과 하나님의 자녀의 구분은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사랑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없는 능력과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2. 내게 사랑이 있으면

 

 자신에게 사랑이 있다면 사랑하는 이 앞에서는 그 진실함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사랑의 리트머스지가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으로서 먼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부모는 자식에 대해서 오래 참습니다.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누이고 손발이 다 닳도록 돌보아 주고 철없는 행동에 대해 오래 참고 견디는 기다림을 통해서 우리는 부모의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사랑이 있기 때문인데 이 사랑과 인내는 언제나 함께 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3절에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죄인들의 거역함을 오래오래 참으신 것입니다.

 또한 사랑하면 온유하게 됩니다. 부모가 자식을 향한 마음과 남편과 아내가 서로 따뜻하고 부드럽게 대해 주는 것은 사랑함을 통해서 나타나는 온유함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장 2절에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은 항상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를 알려면 상대방을 향한 우리의 마음의 따뜻함과 부드러움을 통해서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은 투기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내 이웃이 잘되면 온갖 중상모략을 해서 끌어 내리려고 하는데 이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잠언 17장 9절에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것은 남에게 심한 열등의식과 좌절감을 일으키게 됩니다. 잠언 27장 1절에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야고보서 4장 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말씀했으며 야고보서 4장 16절에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생각 할 때 우리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오직 주안에서 자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를 낮추고 언제나 상대방을 세워줍니다. 빌립보서 2장 3절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음으로 교만하지만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항상 겸손함이 있는 것입니다.

 또 사랑이 있으면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언어, 심사, 행동을 예의 바르게 하는 것이 사랑이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잠언 14장 21절에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랑은 언제나 예의 바르게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희생하는 마음으로 남의 유익을 먼저 구하고 남을 먼저 돌봐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남을 잘되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이 잘되도록 섬기는 것은 먼 훗날 그것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6장 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말씀하셨듯이 내가 움켜쥐면 사라지고 말지만 주면 줄수록 내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3절에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는 말씀과 같이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고 모든 사람의 유익을 구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대학에 다니던 시절 캠퍼스에서 한 아름다운 유태인 여학생을 본 순간 학생에게 반해서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프러포즈를 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재로 알려졌던 그는 졸업 후에 대학의 철학과 교수가 되어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또한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독일에 히틀러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의 가정도 위기를 맞았습니다. 국가에서 “유태인 아내와 이혼을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대학을 떠나든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곤혹스러웠습니다. 대학교수가 된 것은 자신 뿐 아니라 가문의 영광이었고, 또한 아름다운 아내를 만난 것 또한 자기 인생에 행복이었기 때문입니다. 대학 당국에서는 대학교수로 남기 위해서는 유대인 아내와 결별을 하든지 유대인 아내와 살기를 원하면 대학 교수직을 사임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야스퍼스는 아내를 택하고 교수직을 포기했습니다. 그러자 국가에서는 유태인 아내를 두었다는 이유로 그의 저술 활동, 강연, 여행 모두를 금지했습니다. 야스퍼스는 이런 상황속에서 아내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아내를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그는 아내가 수용소로 끌려가서 죽임을 당하지 않을까 하루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바깥에 초인종 소리만 나도 진땀을 흘렸습니다. 8년 뒤에 마침내 독일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 부부는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습니다. 그 아내는 남편을 사랑했습니다. 왜냐하면 가문에 영광이요, 일신의 출세인 독일대학의 교수직도 아내와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헌신짝같이 내어 던지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아내의 안전을 위해서 자기 목숨도 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스퍼스가 교수직까지 포기하고 모든 불이익을 감수했던 이유는 바로 아내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사랑은 자기의 유익 보다는 상대방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성내는 것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힐 뿐만 아니라 자기의 자존심도 상하게 만듭니다. 잠언 16장 32절에는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였고 야고보서 1장 19절로 20절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내는 것은 사발에 담긴 물을 엎는 것과 같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분을 안낼수는 없지만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는 말씀을 되내이면서 절제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악이라는 것은 고통과 괴로움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이웃을 고통스럽게 하고 괴롭게 하는 마음이 생기면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미움에서 나온 것이요, 사탄에게서 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9절에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였고 야고보서 1장 21절에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이 있으면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불의란 바르지 않은 삶의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품고 있으면 바른 길을 가려고 하지 잘못된 길을 가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옳은 길을 가고자 하는 마음을 주고, 정직한 삶을 살기를 소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에베소서 5장 9절에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는 말씀처럼 빛 되신 예수님의 사랑안에 거할 때 진리를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진리를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마음속에 있으면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에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는 벌써 멸망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받을 행동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가 돌이킬 것을 바라고 오래 참으시고 또한 성령을 보내셔서 회개할 수 있게 하시므로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회개시키고 용서해 주어서 우리를 바로 세우는 것이 주님의 사랑이십니다.

 로마서 8장 35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고 말씀하였고 로마서 8장 37절에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의 삶 속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사랑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해 주신다는 지식과 확신이 없으므로 삶 가운데서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트리니티 신학교 교수인 존 우드 브릿지 목사는 16대에 걸쳐 목사를 배출한 집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아주 어릴 적부터 집 안에서 늘 경건의 시간과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늘 가정예배가 끝나기만 하면 도망쳐 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집안의 분위기 때문에 자신을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브릿지 목사가 대학에 들어간 후 비로소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아니요, 신앙도 전혀 없고 부모가 시키기 때문에 억지로 가정예배 드리고 교회에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부모님은 그가 대학을 졸업한 후 신학교에 가기를 원했지만 브릿지 목사는 거절했습니다. 아버지가 이유를 묻자 “저는 예수를 믿지 않아요. 그러므로 저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서 목사가 될 수 없습니다”라고 아주 솔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브릿지 목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대대로 목사를 배출했던 가문의 배경에도 불구하고 아들과의 관계를 끊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적대적인 태도도 보이지 않고 아들이 예수를 안믿고 목사가 되지 않겠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큰 이해와 동정과 인내와 사랑을 베풀고 기다렸습니다. 강요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아들을 위해서 주야로 기도했습니다. 훗날 브릿지 목사는 고백하기를 “내가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 때문이다. 당시 부모님은 나에게 실망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방황하는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나를 위해 더 많이 기도하고 격려와 사랑을 베풀어 주었기 때문에 부모의 그 인내와 사랑에 감동해서 나는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신학교에 가서 16대째 목사가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입니다.

 

 3. 사랑을 하기 위하여

 

 사랑하고 살기 위해서는 사랑의 원천이신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를 모셔들여야 합니다. 태양이 없이 빛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내 마음을 점령할 때 내 마음에 사랑의 샘이 솟아 오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7절로 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랑하면 하나님께로 나온 것이고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사랑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이끌기 위하여 33년 동안 연약한 육신을 입고 계셨고 결국에는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원수들이 그를 향하여 고개를 흔들고 모욕을 하고 침을 뱉으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믿겠노라.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도다”라고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군단이나 되는 천사를 명하여 내려오실 수도 있었으나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에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고 모욕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이 바로 사랑의 원천이요, 사랑의 태양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셔야 참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9절로 10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희생제물로 주셔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항상 구해야 될 것은 성령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부어지도록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5절에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사랑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한 사람은 성령을 통해서 사랑이 싹트고 성령 충만한 사람은 사랑의 강물이 흘러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하며 살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먼저 마음에 작정을 하고 사랑하며 살 것을 각오하며 나아가면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요단강이 갈라진 것은 법궤를 짊어진 자들이 물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이루어진 것처럼 믿음의 행보는 먼저 발을 내딛어야 다음 길을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며 살기로 결심하고 이제부터 자신의 가족과 이웃들을 사랑하기 시작하십시오. 요한복음 13장 34절로 35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사랑하면 예수님의 제자로서 사람들이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사랑하기 힘든 환경가운데 있다면 먼저 용서해야만 합니다. 용서하는 것이 사랑의 출발이 되므로 사랑할 수 없으면 용서부터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에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용서하고 나면 사랑이 다가오고 이 사랑이 우리의 삶 가운데 흘러 넘치게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또한 마음에 병도 고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주님이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도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준 다음에 하나님 앞에서 내 허물도 사하시고 내 죄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참 사랑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8절에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에는 예언도 지식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지만 사랑은 세세무궁토록 계속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것은 형식일 뿐 본질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이요, 영원하고 무한하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삶의 진실한 내용으로서 우리의 삶의 내용은 사랑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내게 아무 유익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부터 사랑의 근원이 되시는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을 모시고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하고 그 사랑이 성령으로 내 마음에 부어지기를 기도하고 또 사랑하며 살기로 결심하십시오. 사랑을 실천하면서 참으로 하나님께 영광되고 행복한 일생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오늘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사랑이 모든 것 중에 모든 것이요, 모든 형식 중에 내용이자 본질인 것을 우리가 알았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참으로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보고 사랑이 없는 것을 회개하고 다시금 사랑으로 실천하며 사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이것이 나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이웃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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